가락-요한복음14장16절(보혜사)170606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치명적인 잘못을 했습니다. 통밥이 아니고 대통밥. 대통밥인데.....,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가 또 보혜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고 앞에 또 뭐가 붙어요. 무슨 보혜사입니까? 다른 보혜사죠. 다른 보혜사.
그럼 그 다른 보혜사라는 것은 앞에 보혜사가 또 있고, 그 보혜사의 기능에 종속돼요. 앞에 있는 보혜사의 기능을 더 추가하거나 빼지도 않고 그대로 인수인계해서, 계속해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거예요. 그대로 활동하는 거예요. 그래야 보혜사라는 기능이 유지가 되니까.
다른 보혜사, 그 분은 아닌데, 그 기능은 동일한 기능으로써, 반복해서 예수님의 기능을 하실 분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보혜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보혜사라는 말은 우리말로 편하게 하면 간호사에요. 그럼 간호사 옆에 보통 누가 있습니까? 환자가 있죠. 환자의 특징은 뭡니까? 본인 앞가림을 본인이 하지를 않아요. 자기가 다 할 수 있으면 집에 가서 하지, 왜 침대에 환자로 누워있겠습니까? 무능자에요. 무능자.
근데 그 무능한 것이 숟가락으로 밥을 못 떠먹어서 무능한 것이 아니고, 길을 못 걸어서 무능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어서 무능한 거예요. 인간들이 말하는 무능이라고 하는 것은 내 생존에 불리할 때만 무능이라고 해요. “나는 죽어야 돼. 나는 이래가지고는 인생 못살아. 뭘 해도 사업이 안 되는데 나는 죽어야 돼.” 항상 자기 생존에 불리할 때는 무능을 이야기하고 유리할 때는 유능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어내신 그 목적,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형상, 그것과 관계있어요, 없어요? 관계없어요. 관계가 없을뿐더러 훼방을 놓죠. 그래서 문제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뭐로 바꾸느냐 하면 육으로 바꿔야 돼요. 육.
육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요새 말로 신체, 신체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신체성. 내가 있으니까, 내 신체가 있어요. 여러분이 있으니까 여러분의 신체가 있어요. 자, 내가 있다고 치면, 만약에 내가 누구한테 얻어맞았다. 졸도 했다. 깨보니까 내가 다시 살아났어요.
그러면 졸도한 순간 나는 어디에 가있습니까? 졸도 한 순간에? 졸도했으니까. 뭔가 끊어졌죠. 내가 끊어졌죠. 하지만 다른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해요? 니가 니를 생각 못하고 실신해있다고 할지라도 니 신체는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럼 신체가 우선이에요? 자아가 우선이에요? 신체가 우선입니다. 메를로퐁티, 라는 사람이 이걸 가지고 철학을 정립한 거예요.
젓가락을 가지고 물이 있는 유리관속에 넣어 보면, 누가 봐도 젓가락은 굽어져있어요. 누가 봐도. 시력 1.0이 봐도 굽어져있고, 1.1이 봐도 굽어져있고, 안경 쓰고 봐도, 뭘 해서 봐도 굽어져있어요. 그러면 아주 순진한 애들은 어떻게 보겠습니까?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가거든요.
어린애가 뭐라고 합니까? “엄마, 젓가락이 굽어졌어.” 이렇게 하죠. 그러면 “아니야. 봐봐! 펴 있잖아.” 이렇게만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다음에 애는 뭘 묻습니까? “근데 엄마, 왜 물속에만 들어가면 젓가락이 굽어져 보이는데?”라고 한다면 “엄마가 참고서 사줬잖아. 자연 참고서 사줬잖아. 좀 알아봐.” 이렇게 하거든요.
물리학에서 설명은 이렇게 합니다. 왜 이게 굽어보이느냐 하면, 빛이 똑바로 가고자 하는 성질 때문에 굽어보이는 거예요. 굽어보여야 빛의 직진이 증명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너무 자세한 것은 이 귀한 시간에 다 할 수가 없고, 물리학시간이 아니니까. 빛이 직진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빛이 직진하는데 물이 뭐가 되느냐 하면, 그 물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매질이라고 합니다. 중매가 되는 물체죠.
이걸 인간에게 하면 인간은 하나의 뭐가 되느냐, 인간의 신체는 매체가 돼요. 매체,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매개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목적이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 되심이 되기 위한 매개체로써 인간을 만든 겁니다. 인간이 매개체가 되게 되면 영이 되신 분이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예수님이 영이에요.
영이 주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매개체가 필요한데, 매개체가 인간이 아니고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육이 되어야 해요. 육이 필요한 거예요. 육이. 따라서 육은 뭐냐 하면 언젠가는 죽을 자죠. 언젠가는 죽을 자가 된다는 말은 살아있어도 임시적으로 살아있는 것이잖아요.
임시적으로 살아있다는 말은 그 본성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그 사람의 본성이 된다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점점 늙어갑니다. 늙어간다는 말은 그 골인지점이 있을 거고, 그 골인지점은 뭡니까? 죽음이죠. 그래서 다시 하게 되면 이 땅에 그 죽음이라는 결과물을 낳게하기 위한 매개체로써 인간의 육이 동원되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무슨 나무가 있죠? 죽음과 관련된 나무가 있죠. 쇼핑센터 같은데 애들 노는 놀이방이 있어요. 그 어린이들이 노는 놀이마당에, 진짜 어린이 놀이터라면 거기에 어린애들에게 해가 될 요소가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되죠. 그럴 때 그 놀이마당은 애들한테 낙원이 되는 겁니다.
근데 그 놀이터에 뱀 한 열 댓 마리 집어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마 부모가 기겁을 하겠죠. 뱀 넣으면 왜 안 됩니까? 물리면 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물리면 애가 죽죠. 죽음이 있는데 그게 무슨 동산이다? 이게 에덴동산이 되는 겁니다. 죽음이 있는데 그게 낙원이 되는 거예요. 죽음이 조건이 있는데. 뱀이 들어왔는데 그게 낙원이 돼요. 악마가 인간을 유혹해도 그게 낙원이 된다고요.
이 말은 뭐냐, 우리가 생각하는 낙원과 원래 에덴동산을 만든 그 취지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죠. 누구 쪽이 잘못되었어요? 하나님 쪽이 잘못입니까? 우리 쪽에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 쪽에 문제가 있고 우리 쪽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그 오해가 어디서 나왔는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매개체가 되어야 할 건데, 매개체가 되어야 할 이걸 악마가 나서서 매개체가 아니고 우리 자신을 중심에 놔버린 거예요. 우리 자신을.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시작부터 끝까지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할 때만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다? 사랑의 하나님이고 좋은 하나님이다.
십계명 제 1계명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해서, 이미 인간들이 만들어서 퍼트린 신이 따로 있어요. 그 신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신의 특징은 바로 우리 존재를 계속 무한대로, 끝까지 긍정과 긍정으로 이끄는 신이에요. 그 신이 내 취향에 맞잖아요. 내 취향에. 그럼 나는 어떤 취향인데? 나는 나만 챙기고 나만 절대자가 되는 취향을 갖고 있어요.
그러면 내 취향에 부응해주고, 내 취향을 박수쳐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줄 때,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뭐라고 합니까?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위로의 하나님. 성경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이게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몰라요. 내가 누구냐, 내가 얼마나 엉터리냐를 감안하지 않고 그냥 성경을 보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성경 백독을 봤다, 요한계시록을 다 외운다, 라고 하는데 관심사가 엉터리 같으면 나오는 것도 엉터리라고요.
그 사람에게서 어떤, 어떤 게 나오는가 한 번 봐라 이 말이죠. 어떤 게 나오는지. 이러니까 나는 잘났잖아, 라고 나오면 그 사람은 이미 엉터리에요. “여러분, 위로받아야 마땅합니다.”라는 이런 소리가 나오면 안 돼요. 교회는 위로를 해주는 곳이 아니고 진리를 외치는 곳이에요. 진리.
에덴동산에다가 뱀 집어넣고, 에덴동산에다가 죽음의 요소를 집어넣는 것이 진리에요. 물려죽으라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대들으라고. 그게 너의 타락한 본성에 합당한 거라는 겁니다. 제가 누누이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죄 짓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왜 죄 지으라고 해도 안 짓습니까? 아니, 참 짓고 있구나. 인간은 죄 짓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죄 짓기 위해서.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거든요. 알아도 너무 잘 알아요. 주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알아요. 어제 독일에서 공휴일이라고 놀았습니다. 왜 노냐고 물어보니까 성령강림절이라고 노는 거예요. 제가 참 기가차서. 독일가운데서 성령 믿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성령 믿는 신자가 거의 없어요. 근데 놀기는 잘 놀아요. 이 핑계 저 핑계대고. 예수님 스케줄에 맞춰서 다 놀아버려요. 교회가 아니고 친목단체가 된 겁니다. 자기들끼리 노는 겁니다. 왜 노느냐 하면 서로서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성령은 보혜사기 때문에, 보혜사를 아까 성령을 간호사라고 했죠. 간호사도 해도 되고, 바꿔서 의사라고 합시다. 환자가 있어요. 환자가 있다는 말은 환자 자체도 문제가 있다는 거죠. 문제가 있으니까 보혜사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죄인이니까 주님이 오신 거예요. 그건 어린애도 아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한테 문제가 있으니까 건져내시려고 오셨잖아요.
그럼 이 말은 뭡니까? 우리가 절대로 우리 자신을 건져내면 된다, 안 된다? 건져내면 안 되죠. 예수님을 모독해도 그렇게 모독해요. 우리 자신을 절대로 건져내면 안 돼요. 근데 우리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고 난 뒤에 극락가기 위해서, 천국가기 위해서 어떻게 건져내겠습니까? 뭘 동원하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치면, 죽을 때 다 되었다, 이제 천당 가야 되는데 어떻게 천당 가겠어요? 착함과 의로움, 남 사랑하는 것, 이런 것 다 끌어 모으겠죠. 이런 것. 그런데 이 버릇이 누굴 모독한다고요? 예수님을 모독하는 거예요. 착함, 의로움,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하고 나하고 거래할 내용이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성경을 보고 해도 계약 내용은 딱 한 글자에요. 계약 내용은 한글로 딱 한 자. 뭡니까? 피.
“내 피는 너희를 위하여 세운 언약이니라.” 그 계약의 조건에 제자들이 안 들어갑니다. 안 들어가고 누구만 들어가요? 예수님 본인의 피만 들어가요. 제자들 RH, RH- 피 다 모아가지고 야쿠자처럼 마시자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만 들어가요. 다른 피는 안 돼요.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언약이 돼요.
그 피만 들어간다는 뜻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피를 낼 때 주님께서 알아서 면도칼로 자기 살을 쨌습니까? 그렇게 해서 피를 내었습니까? 아니면 이 피를 내는데 누가 관여했습니까? 인간의 대표자들이 거기에 관여했잖아요. 혼자서 칼 쥐고 목 안 잘랐잖아요. 그냥 못으로 박았잖아요. 피를 흘리게 했잖아요.
그걸 예수님께서 의도했죠. 성전에서 횡포함으로써 그들이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했고, 뻔히 가룟 유다가 자기 자신을 배신할 줄 알면서도, 니는 니 할 일을 해야 된다고 해가지고 그 계략에, 그 작전에 스스럼없이 자진해서 말려들어줬잖아요. 그 목적이 뭡니까?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의 의로운 계약을 맺을 수 없음을 천명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자,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인간은 환자다. 환자 스스로 일어설 것 같으면 의사가 필요 없죠. 보혜사가 필요 없죠. 보혜사가 필요 없는 신앙생활. 이게 신앙일까요? 보혜사가 필요 없으면 누굴 믿겠어요? 본인이 본인을 믿겠죠. 보혜사가 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본인이 본인을 믿는다, 안 믿는다? 안 믿죠. 그럼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본인이 믿어야 된다, 안 믿어야 된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본인이 믿으면 안 되죠.
지금 유대인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본인이 말씀 지킨 것을 본인이 믿은 거예요. 이케요? 저케요? 하면서 자꾸 숙제한다고 숙제를 하는 거예요. 환자는 스스로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옆에 간호사가 있어야 돼요. 자, 그 다음의 문제, 그럼 간호사가 본인이 결정해서 환자를 고칩니까? 아니면 그 간호사, 보혜사를 보내 준 다른 분의 지시에 따르겠습니까? 어느 쪽이에요? 그 다른 분의 지시에 따라서 보혜사가 우리한테 온 거예요. 간호사는 전담 의사의 말을 들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성령은 무능하죠. 왜? 본인의 의사가 전혀 가미加味가 안 되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6장 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여기서 자의로 말하지 않죠. 자신의 의사대로 하지 않죠. 성령이 본인의 의사대로 하지 않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잖아요. 그럼 담당 의사가 진리 같으면 간호사는 뭐가 되겠어요? 그 진리를 그대로 인수받은 진리의 영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죠. 14장 17절, “저는 진리의 영이라” 근데 14장 6절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보조역할 하러 오시는 겁니다. 그럼 성령이 보조역할 하러 오신다는 말은 성령을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누구 믿으라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가 엉터리인 거예요. 삼위일체는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지 삼위일체가 복음이 아니에요. 그런데 십자가 복음이 염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를 거론한다는 말은, 삼위일체를 가지고 뭘 가리겠다? 십자가를 가리겠다.
삼위일체는 뭐냐 하면 하나의 소유용이에요. 하나의 정보. “내가 이걸 알면 구원받습니까?” “그래, 그게 진리의 전부니까, 그게 진리의 총화니까 니가 구원받는다.” 진리의 총화, 모든 진리를 총체로 정리한 거니까 구원받는다. 그렇게 돼버리면 내가 이 지식, 정보를 소유해서 내가 알아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돼요.
근데 그 지식이 나중에 치매 걸려서 놓쳐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헛방이죠. 평소 버릇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가 구원돼버리면 성령, 보혜사 필요 없고, 주님도 필요 없고, 그냥 주님은 저 먼데서 응원만 하는 거예요. “힘내라! 힘! 일어나야지! 일곱 번 넘어졌어도 여덟 번 일어나야지.” “주여, 일어나겠습니다.” 자꾸 이렇게 돼버리면 그 이야기가, 그 스토리가 자기가 주인공이 돼버려요.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만약 여러분들이 여러분들 자신의 소설을 쓰게 되면 십자가를 어디에다 집어넣겠습니까? 라고 질문했죠. 십자가가 들어가 버리면 졸지에 소설 쓰는 이것도 죄가 돼요. 그렇잖아요. 왜? 십자가 피니까. 십자가 피 왜 흘렸어요? 죄인을 위해서 흘렸죠. 그럼 그 피 값을 하고 피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졸지에 우리는 그 십자가 피 앞에서 뭘 해도 죄가 되잖아요.
그러면 일기장을 쓴다고 할 때, “오늘은 맑음. 이제 죄 이야기 해보자.”라고 이렇게 써야 되는데, 그런 일기장을 누가 쓰겠습니까? 지 잘난 것, 지 애쓴 것, 지 자랑하는 것,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 것, 그런 것 쓸 거 아니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쓸 수 있는 성경은 없어요. 왜? 그 구석구석 단어, 단어마다 십자가를 집어넣어서 그 이야기를 이어갈 인간이 없거든요.
그러면 그 성경 누가 씁니까? 성경은 누구의 감동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이 간호사라면 그 담당의사가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십자가죠. 십자가로써 성경을 쓴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결국 뭐가 나와야 합니까? 오직 십자가만, 복음만 나와야 돼요. 복음만. 복음 나오는 교회 나오면 안 되고, 복음만 나와야 돼요.
왜? 복음 나오는 교회가 되게 돼버리면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존재, 이게 존재가 되거든요. 존재. 존재가 돼버리면 그 존재 안에 내가 주인공이 된다고요. 존재는 이미 예수님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기능인이 되어야 해요. 기능인. 내가 존재의 자격이 없기 때문에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잖아요.
내 존재의 자격은 박탈되었기 때문에 어느 시, 어느 때를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오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천국의 문은 우리가 들어갔던 문이 아니고 주님이 나왔던 문이라고 했죠. 주님이 나올 때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에요. 이미 율법을 완성해서 나온 거예요. 율법의 완성을 뭐라고 합니까?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쏟아지게 되면 마치 화산에서 마그마가 폭발하는 것처럼. 그럼 산 밑에 있는 마을은 마그마의 범벅이가 되겠죠. 마그마로 뒤집어쓴다고요. 사랑으로 뒤집어쓴다고요.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질문으로 되돌아가잖아요. 어떤 사람이 성령 받았다, 성령이 받았으니까 뭘 해도 죄 없다. 이거하고 같은 논리가 아닙니까? 이런 생각이 들겠죠.
근데 덮쳤으니까, 시멘트가 확 덮쳐서 얼어버리면 시멘트맨이 되잖아요. 꼼짝도 못하고. 그러면 그게 왜 존재가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 자체가 새로운 존재가 아니고 왜 기능인으로 자꾸 설명합니까? 라고 물으면 이렇게 예를 들 수가 있어요. 오늘 비 왔잖아요. 비가 왔다가 말다가 했는데, 비 왔단 말이죠. 자, 비가 다발로 옵니까? 한 줄기씩 옵니까? 한 줄기씩 오죠. 그냥 굵은 줄기라도 이쪽 줄기하고 저쪽 줄기하고 따로따로 구분되어서 오죠.
그러면 인간이 이 빗줄기 사이를 피해서 비 안 맞고 집에 갈 수 있습니까? 못 피하죠. 주께서는 시도 때도 없이 사건을 일으켜요. 사건을 내가 존재가 되어 가지고 “이 사건은 주님 사건, 이 사건은 마귀 사건.” 이렇게 구분할 수가 없어요. 왜? 그 틈 사이를 비 안 맞고 갈 수가 없다 이 말이죠. 아무리 비 사이사이의 거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비가 오게 되면 주룩주룩 그 사건 안에서 다 맞기는 맞되, 한꺼번에 오지는 않고, 사건 따라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렇게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은 오후 다섯 시에 은혜를 받았다. 그러면 오후 다섯 시에 은혜를 받았으면 오후 다섯 시 오 분에 은혜를 받습니까? 그걸 내가 다섯 시에 은혜 받았으니까 오 분쯤 돼서 은혜를 받아야지, 라고 요구하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누가 누구한테 지시를 내리는 셈이 되느냐 하면 내가 주님한테 지시를 내리는 바가 되어버려요. 왜 은혜가 찔끔찔끔 내리지, 라는 식으로.
은혜가 찔끔찔끔 오던 많이 오던 그건 내가 요구할 존재가 못돼요. 그러면 오후 다섯 시에 은혜 왔다. 그 다음 일곱 시에 왔다. 그럼 두 시간 동안은 무슨 순간입니까? 그 두 시간 동안은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은혜가 안 온 순간이죠. 그렇다면 두 시간 동안 은혜가 안 왔다면 주님 보시기에 다 헛수고입니까? 아니면 다 의미가 있는 거예요? 다 의미가 있어요.
두 시간만 아니라 그게 육 개월이 되어도 의미가 있고, 1년이 되도 의미가 있고 15년이 되어도 의미가 있어요. 그게. 그래서 그게 어떤 의미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것 때문에 사도바울의 권면과 성경책, 갈라디아서, 로마서가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 될 거예요. 뭐냐 하면 사람이 무슨 은혜를 받게 되면 인간의 과거라는 것은 기억이미지에요. 과거뿐만 아니고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현재라는 것은, 사실은 현재라는 것이 없어요. 현재를 딱 뜯어보면 과거의 어떤 일들을 기억을 하는데, 어떻게 기억을 하느냐 하면 이미지로 기억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현재입니다. 현재 내가 거울을 보면서 지금의 내 모습이 저 모습이다, 라고 하는 것은 뭔가 기억을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만약에 뭔가 충격을 받아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한다면 거울 보면서 “저 넥타이는 낯선 건데? 저 셔츠는 못 보던 건데?” 갑자기 자기의 자아의 연속성이 끊어져버려요. 사람이 자살하고 싶을 때가 언제냐 하면 자기가 생각한 자기가 아닐 때. 자기 기억 이미지에 있는 내가 아닐 때. 그럼 내가 없잖아요. 내가 없으면 여기에 있는 게 내가 아니고 남이 돼버려요.
남이 돼버리면, 내가 원래 있는 이 신체가 남이라고 느껴져 버리면, 이게 나한테 굉장히 짐이 되고 불편해요. 불편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본능적으로 없애버려야죠. 없애버려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력서를 백 군데를 냈는데, 면접오라고 하는 데가 한 군데도 없다. 그러면 백 군데를 낼 때, 뭘 기대했겠어요? 어떤 자아상을 했겠습니까?
백 군데를 냈는데, 열 군데에서 면접오라고 하는 소식을 듣고, 그 다음에 열군데 중에서 세 군데에서 서로 스카우트를 해가겠다고, 더 줄 테니까 오라고 하는 것을 미리 상상을 한다고요. 이런 상상을 안 하면 이력서를 낼 이유도 없어요. 이력서를 낸다는 것은 이력서를 낼 때부터 이미 거기에 같이 상상이 담겨있었어요. 합류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분명히 지금 합격했다고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백군데 가운데서 아홉 군데는 탈락했다고 오고, 그것보다 더 서러운 것은 아무소리도 없는 것. 이거는 개 무시도 이런 개 무시가 없어요. 전화해보면 “바빠서 연락 못 했습니다.”라고 해요. 근데 사실은 수험생들이 전화해서 알아보라는 식으로 전화를 딱 끊어버린다고요.
그럴 때는 뭐냐 하면 적당한 옥탑 방에 가 보면 빨래 줄이 있어요. 빨래 줄을 꼰다고요. 꼬아가지고, 내가 이럴 것 같으면 죽는 것이 낫다고 해서, 의자에 올라갔는데 의자가 흔들흔들, 미리 연습해보고. 죽으면 무슨 이익이냐 하면 내가 죽는 순간 과거의 이미지가 점멸, 단절, 끊어져버려요. 끊어져버리면 나는 과거를 잊어버리니까 행복해요. 과거를 잊어버리니까 행복하잖아요.
막 죽으려고 하는 순간, “어이, 옥탑방 총각 빨리 월세 안 낼래?”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 소리 듣고 자살하는 사람이 없어요. 꼭 한 소리해야 돼요. “내일 준다고 했잖아요!”라고 하는 순간 에이, 죽는 마음이 없어져요. 분명히 내일 준다고 했잖아요, 라고 따지다보면 또 몇 시간 지나가버려서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려요. 그래서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누가 협조를 해줘야 해요.
누가 협조를 해줘야 하느냐 하면 빗줄기가 협조를 해줘야 해요. 성령이. 사건이. 죽는 것도 내 맘대로 못 죽어요. 죽을 때가 돼야 죽는 거예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으면 좋을 뻔 했어요. 가룟 유다는.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도 우리 마음대로 자라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쌍꺼풀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상에서 딴 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성령은 뭘 하느냐 하면, 늘 주님의 이벤트, 우리가 주님의 이벤트에 배역을 맡아가지고 거기서 같이 가무, 춤을 추고 있는 거예요. 빗줄기 속에서. 미친놈 같죠. 성령의 비는 오는데 거기서 춤을 추고 있는 거예요. 오늘도 무슨 손길을 주시고, 무슨 사건을 주셨습니까? 라고.
그 사건의 틈 사이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내려온 비기 때문에, 그 은혜 받고 은혜 받는 그 사이에서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뭔가 앞일이 지금보다 잘 되기를 기대하는 것. 잘 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녹음기를 올려놔야 하는데 안 올려놔서 눌러서 꺼졌는데, 화내는 것 보세요. 이게 죄인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거 잘 된다고 해서 누구하나 구원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구원은 주님의 소관이지 내 소관이 아닌데,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내 뜻은 뭐냐 하면 계속해서 잘 돼야 된다는 과거의 이미지가 있는 거예요. 이게 막힌 겁니다.
순간적으로 뭐가 나죠? 화가 나죠. 갑자기 화가 나는 순간 나는 평소에 육인 줄 알았는데 육이 아니고 인간이었던 거예요. 인간으로 인간행세 한 거예요. 인간행세 했다가 내 뜻대로 안 될 때는 졸지에 인간에서 뭐로 바뀝니까? 신처럼 바뀌면서 나는 누구의 매개체? 주님의 매개체인 것을 확인하고 증거 하는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주의 증인이 되는 것이 쉬워요.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라고 고함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그냥 사시는 대로 사시면, 떠밀려가듯이, 바람 부는 대로 사시면, 그렇다고 삿갓 쓰고 방랑하지 말고, 그냥 구름 따라 길 따라 그냥 사시는 되, 그게 죄인으로 느껴지게 되면 주와 동행한 거고, 죄인으로 안 느껴지면 지금 지옥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게 바로 광야에요. 구약의 광야. 구약의 광야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통째로 뭐로 만들어요? 죄인 만드는 거예요. 그들은 뭐로 자처를 했습니까? 구원받은 자로 자처했죠. 구원받은 자로 자처했으면 죄인이라는 것은 당연한데, 그 사람들은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죄인의 시절은 이제는 끝난 줄 알았습니다. 이게 뭐냐 자기가 존재거든요. 존재는 매개체가 아니에요.
매개체라고 하는 것은 존재는 따로 있고 그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매개체로써, 임시 땜빵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옛날 광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환자가 누워서 아픈 것을 이야기하면 되는데, 환자가 누워서 자기 건강한 것을 자랑하게 되면 지금 자기의 상황판단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어디 체육관에 왔습니까?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그렇잖아요.
항상 환자라면 누구를 자랑해야 돼요? “아이고, 간호사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아이고, 의사선생님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뭐가 필요 없고?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죠. 이게 마태복음 9장에 나오거든요. 마태복음 9장 초반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중풍병자가 나와요.
중풍병자가 중풍병만 걸린 자가 아니에요. 병 낫겠다고 오는 것도 병든 거예요. 그게. 주님께서 어떻게 낫게 했습니까? 중풍병 낫겠다고 한 사람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죄를 용서했다니까요. 죄를. “너는 건강한 자의 매개체가 아니야. 너는 주님이 의인되고 , 주님이 죄를 용서하신 분의 그 매개체이기 때문에 너는 죄인으로 온 거야.” 병이 나은 정도가 아니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 사람은 평생 주님을 잊지 못하는 겁니다. 평생.
똑같은 상황이 있어요. 문둥병자 열 명이 있습니다. 열 명 다, 자기들이 문둥병이 낫게 된다면 고맙겠습니다. 자기들의 과거의 이미지에서 미래를 생각한 겁니다. 과거가 뭡니까? 문둥병이죠. 그럼 현재도 뭡니까? 문둥병이죠. 그럼 미래의 이미지는 뭡니까? 이 병에 걸렸는데 멀쩡한 사람들처럼 되는 줄 아는 거죠.
근데 문둥병을 낫게 해줬죠. 아홉 명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이고, 고맙습니다.”하고 제각기 자기 갈 길로 갔죠. 근데 한 사람은? 볼 일 다 봤잖아요. 지금 원하는 것 얻었잖아요. 근데 주님한테 또 뭘 얻겠다고 왔습니까? 내가 바로 죄인인 것을, 병 낫게 해달라고 하는 그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죄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매개체인 것을 모르고 자꾸 어떤 결정적으로 완성된 존재를 내다보는 거예요. 내 스스로. 독자적으로 완성된 존재로 행세하고 싶은 것은, 악마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 때문에 그래요. 그게 악마의 최종 노림수입니다. 무소의 뿔로 혼자 가라 이 말입니다. 혼자 살아라.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니 자신이야.
흔히 학교에서 애들 상담할 때 하잖아요. “너는 너를 왜 사랑하지 않느냐? 너는 너부터 사랑해야 돼. 너는 너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돼. 너는 너부터 아껴야 돼.” 이게 상담이에요. 상담 잘하고 있어요. 너는 너부터 사랑한다면 매개체라고 하는 것이 사라져버려요.
근데 놀라운 사실은 성령은 하나님이거든요.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마지막에 나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라고 나오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뭐가 됐어요? 주님이 뭐가 돼요? 매개체가 된 거예요.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 자체가 매개체이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도, 성령이 주님 안에서 종속되고 지시를 따른 것처럼, 성령 받은 사람도 주님의 지시를 따르는데, 이것이 어떻게 해서 따르느냐, 바로 죄인 되게 해서 따르게 하는데, 바로 빗줄기처럼 사건, 사건의 연발 속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 되게 해서, 때가 되매 주님만 드러내는 그런 용도로 쓰시는 겁니다.
그럼 제자들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 제자들이 이해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오늘 본문 14장을? 이해 하나도 못합니다. 이해 전혀 못해요. 근데 이해 못해야 돼요. 왜? 그래야 십자가 지는데 홀로 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성도의 할 일은 굉장히 쉽고 간편해요. 그리고 간단해요.
뭐냐 하면 주님 홀로 하심만 드러내고, 나는 죄인이라서 내가 뭘 해도 이거는 전혀 주님께 보탬이 안 된다는 그런 마음으로 사시면 완벽해요. 성도의 삶으로써는 더할 나위가 없이 최고입니다. 이게 최고에요. 그래야 은혜가 성립이 돼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성립돼요.
지난 낮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사도바울이 예수님 오라고 초청했습니까? 나도 한 번 예수 믿어봐야지, 라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안 했죠. 그냥 쳐들어오니까 믿게 됐잖아요. 그냥 주님이 오시니까. 그래서 이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가 왜 중요하느냐 하면 사도바울과 동일한 고백, 동일한 느낌이 있을 경우에만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사도바울처럼 눈 봉사되고 하는 그건 아니에요. 그건 하나의 빗줄기고. 그건 그에게 주어진 빗줄기이기 때문에 그런 특이한 현상이 있고.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것도 그건 하나의 빗줄기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남의 것을 모방하거나 흉내 낼 필요가 없어요. 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은 우리 나름대로의 매개체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만든 거예요. 정 아쉽다면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다 죽이는데 찾아올 수도 있죠.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도바울처럼 동일한 인물이 되기 때문에 다양성이 떨어져서 안 돼요. 각각 개성이 다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적합한 성도들을 만들기 위해서 사건들이 다 따로 주어져요. 따로 주어지지만 공통성은 있어요. 그 공통성이 뭐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꾸 십자가로 데려간다는 공통성이 있어요. 십자가로.
예수님 잊어버리고 성령하고, “저는 성령 때문에 살았습니다. 성령으로 하겠습니다.”라고 우리는 자꾸 거기서 멈추는 경향이 있는데, 성령은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환자를 낫게 하는 것은 의사지 간호사가 아니잖아요. 간호사하고 쑥덕쑥덕 거리고 간호사하고 결혼할 일이 있습니까? 의사의 공로로까지 가야 되잖아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16장 8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럼 제자들은 어디에 속합니까? 세상에 속했으니까 같이 책망을 받는 거예요. 매개체니까. 흙이니까. 또 한 군데를 찾아보면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럼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죽었어요, 살았어요? 분명히 죽었죠. 죽었는데, 주께서 죽은데서 살아 나오게 할 때는, 죽은 그 인간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게 하신 주님의 실존이 성도를 통해서 기능으로 나타나요. 기능으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니까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성깔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 거죠. 성령의 열매,
성령의 의한 열매인데, 근데 사실은 누구의 열매입니까?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사시면서 이룩한 그 열매들이죠.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이런 것이다 이 말이죠. 이게 뭐냐고 할 때 이런 것들을 단독적으로 이야기하면 다 엉터리에요. 무엇과 대배해야 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5장 18절과 대비해야 됩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여기 육체의 일이 나오죠. 육체의 일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뭡니까? 성령의 열매고, 성령의 열매 반대편에 있는 것이 뭡니까? 육체죠. 그럼 주님은 육체를 죽여서 뭐가 나온다? 육체를 죽여서 성령의 열매가 나오잖아요. 그럼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가 뭘 죽여야 되죠? 육체의 일을 죽여야 되죠. 육체를 죽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육체의 일을 드러나게 해요, 안 드러나게 해요? 드러나게 해야 죽일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냄과 시기와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으로, 우리가 평생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예요. 논리가 이상하게 되어 버렸죠. 목사들이 설교하면서 이 본문 나오면 어떻게 해요? “여러분, 보셨잖아요. 이제 우리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렇게 삽시다.”라고 나오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게 되면 뭐가 빠져버립니까? 다시 존재에서 존재로 가버리고, 내가 주님을, 성령을 이용한 것 밖에 더 돼요.
지금 누가 누구를 다루는지를 분간을 못해요. 우리가 주님을 다루고 성령을 다루면 안 됩니다. 나를 근사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을 가지고 심부름을 막 시키면 안 돼요. “주님이여, 은혜 좀 주셔가지고 나로 하여금 온유한 사람 만들어주세요.”라고 이렇게 요구하면 안 된다니까요. 이미 우리는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으려면 죽음 자체를 뺑뺑이 돌려야 되는 겁니다. 죽음 자체를.
그러면 우리가 육체의 일을 행하면 여기 성령에 의해서 뭘 가져옵니까? 십자가를 가져오죠. 십자가를 가져오게 되면 십자가 능력이 임하겠죠. 십자가 능력이 무슨 능력입니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거죠. 그 못 박는 기능, 그 못 박는 기능이 바로 온유에요.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만 저지르고 있어요.” 이것보다 더 온유한 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따님하고 이야기할 때, “엄마는 뭐 성경도 잘 모르면서?” “그래, 나는 모른다. 정말 모른다. 옛날에는 내가 뭐 좀 아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몰라. 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모른다고 했는데 결국은 예수님 십자가 복음 전해버렸네요. 아는 지식, 하나님의 형상 끄집어내가지고, 누가 이기나 말싸움 해가지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 당 짓는 것이고 원수 맺는 거예요. 그게. 전도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지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는 겁니다.
근데 이게 하나의 빗줄기고 이 빗줄기 그치면 도로 마찬가지에요. 빗줄기와 빗줄기가 사그라들면, ‘나, 이제 제대로 해야지!’하고 새로운 죄인으로 등장해요. 하나의 매개체라고 하는 것은, 이게 매질처럼 우리를 쓰시는 분이 따로 있어요. 쓰시는 분은 주님이 쓰시고, 우리는 반항하지 마세요. 내 인생 어디 가서 어떻게 산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 육체적인 이미지고.
자, 그럼 그 다음 이야기가 뭐냐 하면 진리의 영이 오시죠. 진리의 영이 왔을 때에 우리를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습니다. 육으로 대우해요. 육의 반대말은 영이죠. 그럼 성령, 진리의 영이 오게 되면, 주도권이 다 누구한테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까? 성령에게 주도권을 다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육이고.
여기서 여러분들이 주의할 게 있어요. 육은 고집이 세고 힘이 세요. 근데 영은 되게 약해요. 꼭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같아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뭐 어떻게 양쪽에 쌍칼 들고 권총 들고 죽인다고 이래 왔습니까?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았죠. 그렇잖아요. 이 땅에 와서 소돔과 불바다 이야기는, 그거는 나중에 주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주가 되시고 난 뒤에 주께서 심판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있을 때에 불바다 된 적이 있습니까? 없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하늘이 깜깜해졌잖아요. 그때뿐이었어요. 왜? 빗줄기가 그때 잠깐 왔기 때문에. 그 뒤에 아무 소식이 없어요. 그러니까 두 제자가 실망해가지고 엠마오로 가버린 거예요. “에이, 인생 3년 헛것으로 보냈다.” 둘이 가는데 누가 동행했습니까? 주님이 동행했잖아요.
우리보고 소설을 쓰라고 한다면,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보통 어벤져스가 아니죠. 보통 영웅이 아니잖아요. 그럼 제자들을 모아가지고 의적을 만든다든지, 지하 레지스탕스를 만든다든지, 대립군을 만든다든지 해가지고 정권교체를 한다든지 해서 뭐가 있어야 하는데, 잠시 이야기하고 식사하시고 주님 나타나시고, 주님하고 함께 있었다고 했는데 주님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아까 이야기한 우발성이에요. 우발성. 내가 주님을 주도할 수 없어요.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붙들어야 해요. 우리 같으면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서커스단에서 재주피우듯이 “곰아 한 번 나와 봐라!” “주님, 여기 계십니다. 그럼 죽었다가 부활해보세요! 봤지요? 여러분! 믿으세요.” 이렇게 하고 싶어요. 서커스 왕서방이 맨날 곰하고 원숭이한테 바나나 줘가지고 재주시키듯이. 요즘 교회가 그러잖아요. 예수님 팔아서 재주시키잖아요.
이렇게 하고 싶은데, 그게 아니고 재주를 누가 부려요? 반대가 돼버려요. 반대가. 우리는 주님이 나타나셔가지고 코를 좀 꺾어줬으면 좋겠는데, 잠잠하게. 근데 이게 뭐냐 하면 성령은 예수님하고 똑같아요. 탄식하시는 거예요. 꼭 연약한 예수님을 그대로 본받았어요. 우리가 힘을 원하면 힘을 주지 않고, 힘을 원하지 않을 때는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고. ‘옳다구나. 이런 일이 또 생기겠구나.’라고 하면 벌써 그 현장에는 안 계시고.
그래서 제가 수련회 할 때마다 노래 가사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백지영이 불렀던 그 여자죠. 한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물러서면 다가오고 다가오면 물러서고, 무슨 밀당이 이런 밀당이 있어요. 도와달라고 했는데 안 도와주고, 흥! 하고 삐져가지고, 삐지면 예상 못한 것을 준비해놓고. 이거였군요! 하고 쥐면 싹 가져가버리고. 계속 주도권 싸움이에요. 내 인생에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그리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밥이나 먹고 사십니까? 그럼 족하겠네요.
참, 이게 인간으로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매개체에요. 우리 존재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아요. 알지만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상 한 대로 절대로 되게 안 해요. 만약에 예상한 대로 돼버리면 내가 독자적인 존재자가 돼버려요. 주객이 바뀐다고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아는 것은 도저히 예상도 못했는데, 어떤 순간에, 예를 들면 집에 돈은 많은데 입맛이 확 떨어져서 입원했을 때, 도저히 밥이 내키지 않았는데, 병원에서 누가 붕어빵을 물고 가는 것을 보고 사먹었던 붕어빵 두 개가 그렇게 맛이 있는 순간, 붕어빵을 먹는 순간 갑자기 잃어버린 미각이 다 회복이 될 때, 이거는 그 길을 가도록 그렇게 배역을 맡게 하신 거예요.
“큐! 붕어빵 물고 간다!” 붕어빵 물고 가게 하신 것을 보게 하시고, 그걸 나중에 뒤돌아보니까 모든 것이 예상 못했는데 주실 때만 감사가 나와요. 미리 예상하면 감사가 안 나와요. 그래서 여러분, 감사하지마세요. 감사 안 하다가 뭔가 얻어터지거든 그때 감사하세요. 얻어터지거든. 미리 범사에 감사하면 그건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자, 다시 본문 돌아와 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4장 18절 보세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오리라”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걸 제자들이 믿었을까요, 안 믿었을까요?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 안 믿죠. 안 오면 어떡해요?
지지리도 가난한 집 엄마가 애 놓고 난 뒤에 꼭 하는 말이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꼬까옷 사가지고 돌아올게.”라고 하잖아요. 안 돌아와요. 그리고 남자가 여자하고 헤어질 때, “내가 조금만 돈 벌면 돌아올게.”라고 하잖아요. 안 돌아와요. 나중에 보면 다른 여자하고 놀고 있어요.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이라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의 말을 못 믿느냐 하면, 평소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나로부터 나온 믿음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못 믿는데, 내가 나를 못 믿는 입장에서 내가 예수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죠. 인간은 자기 내부의 마음에서 떠나지를 못해요. 백날 떠나봤자 도로 나한테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내가 나를 못 믿거든요. 그래서 이 말을 못 믿어요.
그래서 주님의 찾아오심은 항상 제자들에게 예상 밖입니다.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우발성이라고 했죠. 우발성. 문 닫고 이쯤해서 주님이 오실 건데? 라고 했는데, 깜놀! 깜짝 놀랐어요. 놀랬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한다고 그렇게 신신당부했지만, 막상 마리아나 거기 제자들도 무서워했습니다. 놀랐습니다. 인간의 과거 이미지는 관습이기 때문에 굳어져서 계속 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에게 예상 못할 일이 온다면 아무리 그게 축복이고 은혜라고 할지라도 자기는 쇼크 먹어요. 충격먹습니다. 깜짝 놀라버립니다. 아까 mp3가 꺼졌을 때 놀랐듯이. 그냥 깜짝 놀라기만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는 것이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얼마나 자기 말씀을 사랑해서 건지시는 건지를 아는 겁니다.
다시 오겠다고 했거든요. 그럼 여기서 문제가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다시 오겠다고 하는데 제자들에게 다시 오겠다고 하는 겁니까? 제자들 말고 다른 사람에게 오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라는 질문이 성립이 돼요. 다시 질문할게요.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제자들에게 오겠다고 하는 겁니까? 제자 아닌 사람에게 오겠다고 하는 겁니까?
정답은 오심으로써 제자임을 사후적으로 정립하는 겁니다. 나는 제자다. 이거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한테 찾아갈 때, 그 전에 너하고 있었던 그 제자라고 하는 그 규정이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써 그게 전부 다 진리가 되는 거예요. 왜? 진리의 영이니까. 따라서 구약에서, 구약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십자가 지신 주님이 그들을 찾아감으로써 비로소 그들은 구원받은 자로 확정이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진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군에서 제대할 때 날짜 계산을 다 해보니까 이번 토요일에 드디어 제대를 하는 날짜에요. 그래서 고참들이 떠벌린다고요. “까불지 마라. 나는 중대장도 겁 안나. 사흘 뒤면 제대하는데 뭐.” 자기 계산은 분명히 제대하는 걸로 되어 있어요. 자기는 분명히 구원받은 걸로 되어 있다는 말이죠.
근데 언제 확정이 됩니까? 지가 제대한다고 고함치면 제대합니까? 군에 인사계가 있어요. 인사관리 하는 사람들. 인사계에서 와서 “어이, 김병장 전역장 받고 이건 개구리복이고.” 그때는 예비군복이 나왔어요.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럼 누구에 의해서 확정된 거예요? 그 인사계라는 상사에 의해서 확정이 되었죠. 고참들 중에서 토요일에 나간다고 해놓고 안 나간 사람들이 많았어요.
날짜 계산을 잘못 한 거예요. 인간은 날짜 계산하면 꼭 땡겨서 하기 마련이에요. 미리 나가고 싶어서. 옛날에는 삼년동안 했으니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요새는 군대생활도 아니에요. 저는 34개월이었는데 2개월 줄여서 32개월 동안 했어요. 늙어죽는 줄 알았어요. 제대날짜 저는 포기했었어요. 왜? 도대체 너무 오래하니까 언제 나가는지를 모르겠어요. 통보해주니까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통보자가 누구에요? 십자가를 보고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믿는다고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보니까, 십자가로 니가 의인되었다는 통보가 미리 왔으니까. 그게 성령으로 왔으니까. 무슨 짓을 해도 내가 구원받은 것이 확정이 된 겁니다. 그러면 뭐만 증거 하겠습니까? 뭐만 자랑하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 했다는 이걸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이게 사도바울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성령을 통해서 전달 받을 때, 비로소 처음부터 주께서 자기를 택했다는 사실을 안 것처럼, 늘 십자가를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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