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자
2017년 5월 7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6:14-18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6: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누가 누구에게 지적할 때, 상대방은 무척 기분 나빠합니다. 인간 모독. 인격 무시처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줄곧 성인들은 그동안 인생에서 본인의 결정과 결심으로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말고 외부인들은 자기에게 좋은 정보나 희망이나 격려나 사랑이나 퍼부을 것이지, 결코 자신의 인생에 시비 걸지 말라는 투로 나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과감하게 모든 산 사람을 타켓으로 삼아 공격합니다. 즉 “너희들이 어떻게 불신자와 사귀느냐”는 겁니다. 이러한 지적은 인간 내부에 불신자를 선호하고 가까이하고 그들과 사귀고 싶어 하는, 반(反)-복음적인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전파하는 내용이란 다름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질(質)의 정체를 밝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성경을 들여다보며 그 내용을 믿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 ‘믿음’이 지적당할 믿음이다 는 겁니다. 이미 인간을 장악한 사단에 의해서 조성된 믿음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쪽에서 다가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인간에게 주십니다. 인간들은 여기에 대해서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므로서 자신을 구원의 반열에 넣겠다는 겁니다. 천국에 자신을 도달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기 있거라. 내가 너희에게 들어간다”는 겁니다. 여기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평소에 인간들의 행세는,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알아서 성실하게, 차근차근하게, 성의와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식입니다.
남들의 호응을 곁들어 유도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이 직접 우리 안에 들어와서 성전과 성도됨과 교회와 거룩을 직접 생산하시겠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내부가 참으로 수상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세상 사람들과, 불신자와 사단과 사귀는 그 마음가짐으로 하나님마저 사귀어보겠다고 나대는 겁니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과 왜 그리 죽이 잘 맞습니까? 그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 구원을 위한 전쟁과 노력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도가 바로 진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고 인간으로 하여금 왜곡된 구원관에 몰입하게 만드는 사단의 시도가 있었던 겁니다.
마치 불교에서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그런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며”입니다. 마치 에어리언 영화에 보면, 여자 주인공이 우주선 안에서 외계생물체를 만나 외계인을 자기 뱃속에 임신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외계물의 생산 매개체로 동원되는 겁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인간들의 스스로 힘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직접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육신’의 지닌 본질은 십자가 죽음에서 다 드러났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을 자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자가 스스로 노력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와 거룩과 성전됨을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생산’하는 경우를 쉽게 표현하면 이러합니다.
5월 달에 온 사방에 아카시아 향내가 만발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인간들 입장에서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지혜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아카시아향내를 자기 소유화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발명한 것이 바로 ‘아카시아 껌’입니다. 이게 과학 정신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마치 인간들이 전기 만들어서 풍요로운 문명세계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 과학 정신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의 세계말고, 우리 인간들의 판단과 지혜와 결단에 의해서 스스로 조성해나가는 현실만을 유일하게 목표로 삼겠다는 것이 인간 내부를 지배하는 악마의 정신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악마가 원수가 아니지만 하나님에게는 원수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와 거룩과 성전과 교회와 성도가 생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 중간에 서 있는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보다는 악마의 뜻에 순응합니다. 왜냐하면 이 ‘흔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줄곧 분투 노력한 것이 몸에 배겨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 힘으로 이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가지고 우리 안에 임하는 것이 복이 되는 겁니다. 옛날 구약 때 복은 인간들이 가만히 있어도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셨습니다. 홍해 바다 갈라짐이나 여리고성 무너짐이 다 그런 겁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 복이란 낯설고 인간들이 기대하고 있는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의 복과 의를 위하여 핍박받고 고난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즉 구약에서는 여리고성 무너지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복이었지만, 신약에서는 성도 자신들이 여리고성이되어 무너지는 그것이 바로 복이 되는 겁니다.
그 중간에 오면서 하박국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주님의 원수와 싸우는 싸움터로 삼으시고, 그 전쟁터에서 예수님의 부활로 승리하셔서 그 승리의 전리품으로 새롭게 생산해낸 대상이 바로 성도요 교회요 성전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온전히 그리스도 의로 뒤집어 쓰고 사는 형국입니다. 자기 철저함이나 자기 경건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날마다 새롭게 죽어야 될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사는 분이 따로 있음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34강-고후 6장 14-18절(불신자)1705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6장 14-18절입니다. 신약성경 291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성경에서 성도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천국에 골인한다는 겁니다. 천국에 실제로 살게 된다는 거예요. 천국에 실제로 살게 되니 이 땅에 사는 것에 대해서 너무 연연해 하거나, 미련을 갖거나, 이 땅에서 성공과 실패로 모든 것이 마감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땅은 하나의 연습장에 불과하고 연습기간이지요.본 게임은 남아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그냥 연습하고, 실수하고 또 실수하고 실수해도 그것은 본게임을 위해 필요한 코스에 불과한 겁니다. 뭐가 잘못되었는가, 내가 왜 천국에 못가고 지옥 갈 수밖에 없는가를 실컷 이 땅에서, 맘껏 실패하시고 실수하면서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어디에 실패해야 되느냐 하면, 믿음에 실패해야 돼요. 주님께서 말씀을 주면서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인간들이 그 말씀 듣는 순간에 자기가 갖고 있는 믿음을 총동원해서 끄집어냅니다.
그 끄집어낸 것 다 엉터리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 말 듣고 있는 믿음 다 끄집어냈는데 끄집어낸 족족 가짜믿음이라는 사실, 주님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이 없었으면 몰랐을 뻔 했어요. 이 믿음이요, 저 믿음이요, 다 끄집어냈는데 ‘아ㅡ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행함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결국 남은 것은 과연 내가 구원받을 자격은 되는가를 자기에게 되물을 수 있는 기회들을 가지면서 이 땅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게 만들어요.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너희가 성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너희가 성전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요.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려면 여러시간 걸려도 모자라요. 그럴 때는 결론만 이야기하면 되는 겁니다. 결론이 뭐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성전을 생산하는 겁니다. 생산이라는 말을 여러분이 놓치면 안돼요. 생산하는 거예요. 어떻게 생산하느냐 하면, 16절 중간에 나옵니다.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가 갈께.” 그래서 우리를 뭐로 만드는가 하면, 우리를 공장으로 삼았어요. 공장으로 삼으시고 그 공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모든 것들을 다 생산해내십니다. 성전도 생산해 내고, 거룩도 생산해 내고, 성도들도 생산해내고, 믿음 소망 사랑도 다 생산해 내는 거예요.
이러한 생산에 방해물이 있었으니 그것이 나의 소망과 나의 믿음과 나의 사랑입니다. 그것들이 장애가 되고 방해요소가 되는 겁니다. “주님 기다리세요. 제가 믿음 소망과 사랑을 얼추 정리해서 이 땅에서 교회 다니면서 봉사 충성한 것 긁어모으면 대충은 믿음이 되고 봉사와 헌신이 안 되겠습니까? 그것 들고 주님 앞에 나가겠습니다.”이렇게 뇌물, 선물조로 들고 나가는데 주님께서는 반대로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갈께.”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지요. 수련회 끝에 늘 나오는 말입니다. “나대지 마라. 제발 좀 나대지 마라.” “충성 봉사, 쉐마, 쉐마, 그 말씀에 순종하겠나이다.”이렇게 나오면 “제발 좀 나대지 마라. 내가 노는 분이 아니다. 네가 설치는 이상으로 내가 더 설친다. 네가 하는 작품과 내가 하는 작품을 비교해볼까? 누가 합당한지, 누가 거룩인지. 네가 만든 솜씨 그것이 의인지 내가 직접 네 속에 들어가서 만든 그것이 의인지. 어느 의가 참된 의인지 한번 해 볼까?” 이렇게 나오세요.
올해 우리교회 목표가 없습니다만 정한다면 나대지 말라는 거예요. 왜 그렇게 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느냐 하면요, 우리교인들이 그거 하나는 잘하시거든요. 안나대는 것은 너무 잘하셔요.
생산이라는 말에 적합한 예는 다음 달인가에 개봉되는 영화에 있어요. <에이리언>이라는 영화입니다. <에이리언ⅳ>에 보면 여승무원들이 우주선 타고 우주로 나갑니다. 우주에서 외계생명체의 침공을 받았는데 외계생명체가 우주선내부에 침투해서는 여승무원 몸에 임신을 시켜서 배를 째고 괴물이 나오는 거예요.아침부터 흉측한 예를 드는데 그게 바로 생산입니다. 에일리언 자체가 번역하면 외계인이라는 뜻인데요. 전혀 생각도 못한 이물질이 내 몸에서 만들어지는 공장 같은 역할로서 우리를 사용하는 거예요. 화들짝 놀래지요. “뭐 이런 게 다 나오는 거야?”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우리가 상상하는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거룩이란 경건의 극치니까 내가 악한 것은 버리고 선한 것은 다 주워 모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그것으로 성전에 거할만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거겠지, 그게 거룩이겠지, 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 배 째져야 됩니다.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장애요소입니다. 이것은 열두 제자가 다 경험했던 거예요. 성령이 임해서, 외계인의 영이지요, 성령이 임해서 열 두 제자 본인들이 꿈꾸던 소망, 미래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다 거부하시고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일을 당한 사도바울은 고백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스스로 내뱉게 되고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내가 사도된 이것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포행자요, 주님을 핍박하던 자인데 사도가 되었다는 것, 성령을 받았다는 것,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내가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해요.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함으로써 다른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사도바울 당신은 구원받았노라고 자랑질을 하고 있느냐?” 이렇게 오해하겠지만 지금 사도바울은 나 구원받았다, 이것을 자랑질 하는 것이 아니고 “네 눈에 나만 보이느냐? 그러면 너는 잘못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내가 지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너희는 너희 의지와 감정이상으로 네 인생을 개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도 한 때 그랬었던 사람이라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기대하는 대로 내 인생 끌어보려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려고 나름 계획이 있었는데 주님이 찾아와서 “이게 어디서 훼방질이야.” 하고 다 찢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이미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 어떤 의미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오늘날 용어로 한다면 생산 공장의 의미로 바꾸어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겁니다.생산 공장의 의미, 다시 말해서 “너는 나대지 마라. 주께서는 너를 통해서 만들어낼 것을 다 만들어내고 네 구원이 필요한 것을 네 안에서 현지생산체제를 갖춰서 다 뽑아낼 거야.”라고 이야기하면서 한 사람을 타겟으로 삼아서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이 방식은 예수님의 그 당시 방식과 똑같은 방식이에요.
구원하려는 사람을 구슬리는 방식이 아닙니다.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방식이 아니에요. 공격하는 방식이에요. 타겟으로 삼아서. 산 사람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런 경험을 제가 여러 번 유발했지요.개 데리고 수변공원 잔디밭에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눈에 띄잖아요. “잔디밭에서 나오세요. 개 목줄도 하시고.” 또 “자전거 길 따로 있는데 왜 보행자 길로 가십니까?” 하지요. 그 사람은 옳고 그름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가 무슨 주제로 나서? 네가 경찰관이야?” 내가 한 두 번들은 소리가 아닙니다. 네가 경찰도 아니면서 왜 남의 일에 간섭하느냐는 겁니다. 잘잘못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줄곧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아왔는데 제 3자 네가 뭔데, 나도 나에게 간섭을 안 하는 나이인데 네가 왜, 우리 아버지도 나에게 명령을 안 하는데 네가 뭔데 나에게 간섭하느냐는 그 말이지요. 내가 뭘 하든 간에 왜 간섭하느냐는 말이에요.
기분 나쁘지요. 기분이 나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쫙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뭐가 생산되는가? 사도바울은 알고 있어요. 본문 15절 봅시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4절에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라고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한다는 자체가 살아 있는 인간을 타겟으로 삼아서 공격하는 겁니다. 네 옆에 안 믿는 자가 왜 그리 들끓느냐 그 말입니다. 네가 안 믿는 사람과 잘 사귀고 그런 사람들이 네 옆에 들끓는 이유는 평소에 “하나님,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는 것, 자기 속에 욕구와 욕망의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에 딱 맞춤 생산이 있어요.
그 생산의 방향이 안 믿는 사람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불법적인 사람들, 벨리알이라는 것은 사탄이거든요, 악마의 이름이에요, 악마와 한통속이 된 사람들과 왜 그렇게 친밀하고 친근성을 느끼는지. 안 믿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은 “사도바울, 간섭하지 마. 내 마음이야.” 이거거든요.그 말은 뭐냐? 그걸 사도바울이 유도한 거예요. 현재 여러분의 마음은 믿든 안 믿든 간에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은 내가 알아서 사귀고 그들과 함께 한다는 욕구가 우리 속에 들끓고 있다는 거예요.
이런 욕구, 마귀하고 좋다고 사귀면서도 어딜 간다고요? 천국을 가요? 누가 넣어주는데요? 자기혼자 갑니까? 넣어줘야 가지요. 이미 내 안에 뭐가 있는지 그 작업이 이뤄져야 돼요. 뭐가 자리 잡고 있는지 이걸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이거 아는 방법은 공격해야 돼요. 사람을 타겟으로 공격해줘야 됩니다.“너는 왜 그 사람과 사귀나?”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지.” 지금 사도바울이 그걸 유도합니다. 유도함으로서 내 마음은 성경과는 너무나 대립되어 있는 채로 가동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노출시키는 거예요. 얼마 전에 부처님오신 날, 오신 날은 있는데 가신 날은 없는 그 부처님오신 날 특집방송을 봤어요.
보게 되면 불교하고 기독교하고 어찌 그리 똑같은지. 법당과 예배당이 똑같아요. 불교 사람들이 뭘 추구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무엇을 원하고 그들이 불교교리를 이론이 아닌 실천에 옮길 때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지식이 아닌 실제로, 그냥 아니라 행함으로 보여주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기는 것을 한 번 보라는 거예요.그 대자대비 한 것을 한 번 보세요.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마음을 낮추는 것을 한 번 보라고요. 이게 불교인지 기독교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불교 제일 우두머리가 부처님오신 날 교시를 말하는 것이 있었어요.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 중생은 어리석다는 거예요. 깨달아야 되는데 깨닫지를 못해서 부처님 보시기에 어리석게 보인다는 거예요.
뭐가 어리석은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라.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서 사세요, 라고 교시를 했어요. 그거 하고 오늘 16절 중간에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하나는 혼자 사는 버릇대로 혼자 사는 것이 불교고 이쪽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한다. 너 주도권 빼앗겼어. 네가 생각도 못한 외계인이 네 주인이야.”라는 뜻이거든요.
이게 같이 있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구약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도와줍니다. 홍해 앞에 도착했는데 바다에 가로막혀서 못 건너갑니다. 모세가 지팡이 가지고 물을 쫙 갈랐습니다. 무능력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길을 터줘서 약속의 땅에 가게 한 겁니다.구약 초반기 기적들은 원하지도 않고 기도 안 해도 착착 도와주는 식으로 갔어요. 떡이 없다. 떡 줬습니다. 고기 먹고 싶다. 메추라기를 떼로 모아서 줬습니다. 물이 없다. 반석을 쳐서 물을 줬습니다. 이게 구약에서 도와주는 방식입니다. 전쟁하는데 해 스톱, 해를 멈춰서까지 승리케 했습니다.여리고성 그냥 뺑뺑이 열 세 바퀴 돌았는데 그들이 어지러워서 패배했습니까? 그냥 도니 성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어요.
그런데 신약에 들어오면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에요. 신약에서는 기도해도 안 도와줘요. 구약에서 무너져야 될 여리고성이 신약에서는 구원받는 성도가 여리고성이 되어서 무너져야 돼요. 만약 어떤 예배당을 크게 건축했는데 좌석이 많이 남아돕니다. 좌석을 채워야 되는데 근처에 아파트가 있어요. 구약 같으면 여리고성 돌듯이 아파트를 뺑뺑이 돌아서 아파트 주민들을 신축한 예배당에 채워달라고 기도를 하겠지요. 이것은 구약식입니다. 신약은 뭐냐? 그 교회가 불타야 되고 그 교회가 무너져야 돼요.
예배드리는데 갑자기 부실공사 한 예배당 지붕이 다 무너져서 교인들 한 20명이 죽든지 해야 돼요. 그게 바로 기적입니다. 뭐 한다고 아직 살아 있나, 그 말이에요. 진즉에 갔어야지 이 땅이 어느 동네인데 아직도 살 생각을 하고 있느냐, 이게 복이에요. 이게 축복이라는 말이지요.
그 중간에 하박국이 있어요. 초창기의 복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열리고 포도나무에 과실이 많고 소 키우는데 병치레 안하고 잘 자라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축복은 뭐냐? 소떼를 감당 못하게 많고, 양 떼가 많고, 염소 떼가 많고, 그게 축복이에요.그런데 하박국에 와서는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과실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할지라도 나는 장래에 오는 구원자로 인하여,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국을 몰고 천국을 생산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 천하고 죄 많은 우리에게 찾아오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기뻐합니다.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가 약속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그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벨리알을 원하고 믿든 안 믿든 나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고, 축복이 된다면 뭐든지 내가 내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이게 바뀌어야 되는데 안 바뀐 채로 버티고 있으면서 이런 축복을 구하다 보니 이게 절인데 교회당인지, 기독교인지 불교인지 차이가 없이 똑같아요. 동영상이 꺼져버렸다니까 이상하게 이 대목을 다시 하고픈 맘이 듭니다. 온갖 신경이 다 쓰입니다.
생산이라는 말의 적절한 다른 예를 또 든다면, 지금 5월이잖아요. 이 동네에 이사 오신 분 잘 오셨습니다. 4월이면 라일락 향기가 아주 진동하지요. 얼마나 좋습니다. 아주 자극적이지요. 5월이 되면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합니다.아카시아 향기가 날 때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생산합니다. 그러면 이 향기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는 예가 어떤 예가 있느냐? 아카시아 껌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카시아 꽃을 만발케 했을 때 사람들은 무슨 착각을 하느냐 하면, 나를 위해서 아카시아 나무가 있다고 착각을 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분명히 아카시아 꽃이 피는 이 세상을 준비단계로 봐서 결국 이 세상은 불로서 멸망당합니다. 아카시아가 있든 라일락이 있든 불로서 멸망당합니다. 옛날에는 물로서 다 멸망했고요. 그러니 연습기간인거예요. 연습기간에 인간이 해야 될 것은 뭐냐? 이 아카시아 향기가 만발한 것은 결코 인간이 잘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오히려 인간을 지적질하기 위함입니다. 아카시아 향기를 피움으로서 저 아카시아 향기를 계속 내 입에 머물게 하려면 아카시아 향으로 껌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한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물이 떨어진다. 그냥 물이 떨어지면 돼요. 19세기 중반에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어서 그 다음부터는 전기를 만들기 위해서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고 그렇게 과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철저하게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의 거룩과 성전이 생산되는 것을 내 안에 있는 악마가 저항하고 방해하는 증거물이 오늘날 과학이라는 것이고 종교라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조용하게. 해와 달을 찬미하면서. 시편에 나오잖아요. 해를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를 보고 그 인자하심을 발견하라는 거예요. 어디를 봐야 인자가 나옵니까? 달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달 줬고 해 줬고 별 줬다는 겁니다. 그래도 신앙생활 못한다 하면 너에게 문제 있다는 거예요. 해 줬고 달 줬고 별 줬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요. 우리 자체를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믿으면 안 됩니까? 인생이 어떻게 꼬이든 간에, 자식이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간에. 동영상에 빠진 부분이 있어요. 빠진 부분 다시 해도 좋아요. 구약 때는 인간 쪽에서 가만있어도 도와줬어요. 홍해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졌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신약의 열 두 제자의 특징은 뭐냐? 산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된 거예요. 복의 개념이 마음이 가난한 것인데 그 내용이 뭐냐? 예수님이, “나와 더불어서 나의 의와 나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을 때는 오히려 네가 감사해라.”
복의 개념이 처음에 구약 때 시작했던 복의 개념은 양떼와 소떼가 많아지는 것이지만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죄인의 몸이지만 내놓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마구 자신의 의, 성전을 만드는 관계와 엮인 것 자체로 너는 복이 있다는 겁니다.
그 중간과정에서 하박국이 나왔고 하박국에서는 뭐냐? 아브라함에서는 소떼와 양떼가 많은 것이 축복이었고 그 축복 자체가 충만이고 번창이에요. 하지만 하박국에 와서는 무화과나무의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장차 오실 예수님,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된 거예요.
방금 짧게 요약한 이 대목이 동영상 끊어졌을 때 빠진 대목입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 본문에 다시 들어가면, 말씀이 네 안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요. 말씀이 들어와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이 싸우고자 하는 그 싸움 그 전쟁터가 이제는 네 주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약처럼 이스라엘 빼놓고 외부가 아니라 이제는 직접 우리 안이 하나님의 전쟁터가 되고 그 전쟁터에서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모든 군대의 사령관으로서의 하나님이 직접 우리가 승리하지 못하는 그 적을 대적해서 싸우고 싸우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싸우게 되면 거기에 전리품이 있게 돼요. 그 전리품이 성도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싸울 때 누구하고 싸우느냐? 그것은 말씀에 위배되는 것과 싸우는 거예요. 말씀에 위배되는 것과 싸울 때 물론 그 배후에는 악마가 있고요.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을 때 마귀가 제일먼저 시험한 것이 뭐냐?
사람이 떡으로 산다고 하잖아요. 떡이나 먹으라고 한 것은 예수님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마귀가 줄곧 그렇게 유혹을 해 왔었어요. 벨리알이 유혹을 해 왔는데 거기에 동의 안한 사람이 없이 다 동의를 했다는 말입니다. 밥 먹고 합시다. 전부 다 동의 한 거예요.사람이 왜 삽니까? 먹고 살려고 다 하는 짓 아닙니까? 다 동의를 한 거예요. 여기에서 아니오, 라는 사람이 예수님 빼놓고 한 명도 없었던 겁니다. 따라서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말씀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불교신자인 것이 들통이 나요.
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표현이 ‘사랑의 하나님’ 아닙니까? 누굴 사랑하는데요? 나를 사랑해야 된다는 거예요. 네가 뭔데? 그래야 하나님답다는 거예요. 무슨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것은 불교에요, 불교. 사랑의 하나님일 경우에만 내가 믿을만한 조건이 되어서 믿을 용의가 있다는 그 말이거든요.그 사랑의 하나님이 죽었어요. 누구 때문에 죽었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을 찾는 우리들 때문에 죽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괴물 들었고 우리 안에 마귀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안에 벨리알이 들어 있어요. 우리가 오늘 본문을 안 읽었으면 아무 일도 없어요. 이걸 읽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에게 우리는 심하게 지적질 당하고 있습니다. 공격당하고 있어요.
네가 자연스럽게 사는 것은 왜인가? 흔한 현실, 흔히 말하는 현실에 습성화 되었어요. 습관화 되었다고요. 자연스럽게. 대표적인 것이 뭐냐? 대통령선거입니다. 제가 정치에 대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을 했습니다만 아직도 눈치를 못 채고 있는데. 정치, 민주주의라는 것은 내 목숨과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한 외부적제도입니다.뭘 지킨다고요? 내 목숨과 내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함이에요. 제대로 된 대통령을 뽑았어. 그 다음에? 내 목숨, 북한에게 당하지 말고 내 목숨 지키고, 내 사유재산, 내가 공들이고 고생고생해서 모은 이 재산을 지키고 더 많이 불려서 경제적으로 나아지게 하는 괜찮은 대통령을 뽑고 싶다는 그것이 대통령 선거라는 겁니다.
열다섯 명 나왔다가 대부분 사퇴했지만. 나 뽑으면 여러분 부자 되게 해주겠다는 그 내용이에요. 그런데 뭘 지키겠다는 겁니까? 내 목숨과 내 사유재산이거든요. 그런 마음이 그게 벨리알이거든요. 그게 마귀다 이 말이지요. 마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대통령선거가 있는 거예요.“목사님 누구 찍으렵니까?” 이 말은 “목사님, 더 살고 싶지요.” 그 말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이사야 25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장차 하나님께서 오시게 되면 모든 인간이 수치스럽게 살았다는 것을 내가 폭로하고 성도에게서만 그 수치를 면제해주겠다는 것인데 그 수치가 뭐냐?
이사야 26장 18절,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잉태하고 고통하였을찌라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님께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재산과 우리의 목숨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잉태해서 애를 낳았다고 해도 그것은 바람만 임신해서 해산했다는 그 말입니다. 너희가 태어난 자체가 바람, 바람, 바람이라는 거예요. 헛것, 헛것, 헛것이라는 거예요.벨리알이라는 그 뜻이 헛것이라는 거예요. 헛것이 헛바람 채우기 위해서 교회 나온 거예요. 헛바람 채우기 위해서 대통령선거 한 겁니다. 혹시 내 목숨과 내 가정과 내 자식들과 내 재산 지켜줄까 싶어서. 박근혜보다는 안 낫겠나, 그런 식으로. 취직도 시켜 줄 거고.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네가 이미 죽어 있는 인간이다. 왜냐? 벨리알을 추구하니까.” 마음가짐이 못돼 처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헛것을 추구하는 욕구와 욕망을 가득 담은 채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났어요. 그걸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하지요.
그렇게 태어나서 그저 나 좋아해주면 이게 예수든 부처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간에 껌벅 엎어져서 순종 하겠나이다, 그렇게 나온 거예요. 말씀만 하옵소서, 순종하겠나이다. 교회 있으면 봉사 하겠나이다, 충성하겠나이다. 십일조 드리고 주일성수 하겠나이다. 이 헛된 짓을 해온 거예요.그걸 믿음이라고 한 거예요. 믿음으로 구원 못 받아요. 믿음을 유도했지요. 얼마나 헛된 믿음인지. 다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믿음이에요. 천국 가는 것도 나 좋으라고 믿음이에요.
천국은 이 땅에서 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오는 거예요. 주님 오실 때 천국 둘둘 말고 오신 거예요.천국을 생산하는 거예요. 우리의 죄를 의로 바꾸면서, 예수님의 피로 바꾸면서. 이사야 26장 17절, 18절 말씀처럼 이미 모든 사람은 주 앞에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데 수치를 없앤다는 거예요. 그러면 수치가 어디서 생겼느냐? 네가 하는 그것이 저주받을 짓이라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 행동을 한 겁니다.내가 원하는 하나님, 내가 원하는 메시아, 다 유대인들이 했던 짓이거든요. 내가 원하는 성령, 이것이 사실은 진짜 하나님이 오신 것이 아니고 그걸 계기로 해서 실제로 내가 이런 것, 이런 것, 이런 것을 원한다는 그것을 완전히 폭로당하는 입장이 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과 불로 다 심판하는데 요한계시록 6장 끝에 12절부터 보면,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그게 오늘 본문에서는 14절 끝에 나와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어두움이라는 용어가 나오거든요. 사도바울이 얼마나 함축해서 이야기를 하는지.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귀는가? 너는 빛이냐 어둠이냐를 확실히 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느냐?
이 말 들어도 우리는 빛보다는 어두움이 더 사귀고 싶은 거예요. 왜? 그게 습성화 되었으니까. 이 흔한 현실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태어나면서 우리는 이 세상 말고 이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을 생각지도 못했고, 이 현실에 잘 적응이 되는, 어떻게 하면 이 현실에서 살아남는 사람으로 자신을 숙달시켰고 자신을 단련시킨 거예요.
지금에 와서 우리보고 이 세상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는 말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 다녀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 것만 챙기는 이 본성이 누가 와서 잔소리 한다고 고쳐지는 문제가 아니에요. 설교를 이것으로 끝낼까요? 사도바울이 실컷 이야기를 했는데 들어보니 우리가 해내지 못할 소리만 해놓았어요.
어쩌라고? 못한다. 그런데 16절에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리라. 어떻게? 우리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면서. 주님께서 이런 작업을 계속 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파괴시키는 거예요.
오늘 제목이 불신자인데요. 불신자가 이 땅에 태어나는 이유는 철저하게 완전히 파괴를 해야 될 자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철저한 파괴. 주님 앞에서 완전하게 파괴되어서 지옥가야 될 그 사람.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작업을 위해서 우리 속에 이 말씀이 오기 전에 먼저 무슨 작업을 하느냐? 말씀이 육신이 되신 거예요.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말씀이 잔소리를 한다는 말이 아니고 아예 말씀 자체가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는 육신이 되신 거예요.
말씀이 대표적 죄인이 되신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버리면 그 육신을 짜버리면 피가 나와 버려요. 그 피안의 내용물을 분석해 보면 나는 너희들 죄 때문에 아버지한테 저주받았다, 가 되는 겁니다.저주를 받게 되면 말씀의 심판이 완료가 된 겁니다. 그 저주 안에서. 마땅히 받아야 될 저주는 예수님의 피와 함께 있음으로서 우리의 저주가 이동돼요. 그러면 우리는 이미 저주받은 자가 돼요. 저주받은 자, 죽은 자가 되기에 죽었다가 부활되는 그 과정이 이미 죽기 전에 우리 안에서 부활의 영이 오셔서 실시가 되는 겁니다.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려내는 작업을 하는데 그 살려내는 작업을 하면서 쏙쏙 들어오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 읽었던 이 말씀이 들어와요. 아하,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구나. 혼자 산다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어야 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있어야 되고, 외양간에 소가 있어야 우리가 삽니다.그런데 주님이 함께 있다면 무화가 나무에 열매가 없다 할지라도, 외양간에 소가 없다 할지라도, 그것은 소가 없어야 마땅함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께서 오셔서 주님의 영광스러움을 우리에게 다 제공해주는 거예요. 왜? 주와 함께 죽은 자는 주와 함께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와 함께 죽지 아니하면 주와 함께 사는 것도 없습니다. 어제 결혼식이 있었거든요. 오늘 참석 안할 줄 알았는데 참석했어요. 신혼여행도 안가는 모양이라. 주례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신랑이 현재 우리를 신부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변화를 일으키는데 그 변화의 과정은 우리에게는 낯설고 이상한 것이다.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고 그 이상한 것은 결혼하면서 더욱더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의 말씀이 이 가정에 덮치게 되면 말씀대로 우리가 조종당하고 개조 당한다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요.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대통령 선거에 누가 이기는가 하는 그 게임이 그렇게도 궁금했는데 이제는 이 말씀이 나에게 작용해서 나로 하여금 세상 좋아하는 내가 세상이 시답지 않게 느껴지는 변화가 일어나는 이 사실이 정말 신기한 겁니다. 이 신기한 것을 극대화 하려면 아예 배를 째세요. 배를 째서 안에 있는 외계인이 튀어나오게 해야 됩니다.그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지퍼 죽 내려 보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괴물이 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운반하는 운반체가 되어버려요. 나는 죽고 날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배불러서 임신이 되어가지고 “밥 좀 작작 먹지.” “아니야. 주님이야.” 주님을 가마 태우듯이 모시고 다니는 이런 변화의 조짐, 남편을 보면 주님처럼 보이고……,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말씀대로 하는 거예요.
아내를 보기를 내 목숨 바칠 교회로 보이는 것, 에베소서 5장의 말씀. ‘내가 미쳤지. 왜 내게 헛것이 보이나? 왜 저게 교회로 보이지? 왜 내 목숨 바칠 대상으로 보이나?’ 이러한 변화는 주님이 여러분 속에 함께 있음으로서 그런 변화가 일어날 때 그것이 이미 죽으나 사나 상관없이 구원받은 사람인 거예요.따라서 구원받을 일이 없어요. 이미 구원받아버렸으니까.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자기구원에 대해서 안정화를 시도하지 않아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철저하게 살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인생을 어설프게 살아갑니다. 대충 살아가는데 나중에 그게 도가 심하면 막 살게 돼요. 왜? 어차피 내 인생 사라졌으니까. 주께서 생산하는 공장이니까.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삼성반도체 내부를 비디오로 본 적이 있어요. 그 안에 들어갈 때 방진복을 다 입어요. 반도체가 공정이 세밀해서 먼지가 조금도 들어가면 안돼요. 그래서 몸 전체를 방진복으로 감싸고 신발까지 꽁꽁 묶어서 견학하는 코스가 있어요.그걸 보고 느꼈습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성도가 무엇이냐? 교회도 생산되는 거예요. 있는 교회 계속 교회 아닙니다. 날마다 새롭게 생산되어야 돼요. 가정도 생산되고, 성도도 생산되고 다 생산되는데 생산될 때 어떻게 되느냐? 방진복을 다 입혀버리면 그 사람이 대통령이든 목사든 집사든 장로든 전혀 방진복 안에서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나이가 얼마냐, 교회 나온 지 몇 주 되었느냐, 몇 년 되었느냐, 그것은 다 방진복 안에 감춰져야 되고 이것은 의미 없는 것이 돼요. 왜? 날마다 새롭게 방진복을 주께서 입힙니다. 그 방진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로 봅시다. 주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거룩을 얻었노라,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되었어요.얻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 말씀이 어떻게 우리 속에 이런 놀라운 공장을 실제로 가동시켜 생산하느냐, 내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말씀을 성령께서 와서 이 말씀에 합치되도록 작동을 하는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증거 하는 그 무리를 두고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전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위주로 살면서도 천국에는 간다는 말도 안되는 헛꿈을 꾸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천국으로 이동할 수 없었는데 고마우신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보는 현실이 다 개꿈인 것을 깨닫게 해주니 너무 감사합니다. 거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쓰지 말고 거주해야 될 그 동네 그 천국을 위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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