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3장21절(무능)170321a-이 근호 목사
자, 요한복음 13장 21절 봅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 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하시고 그 다음 26절에 보세요. 21절 읽으시고 붕 띄어서 2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방금 읽었던 요한복음 13장 21절과 26절, 27절을 보게 되면, 이것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전부 다 예수님께서 의도해서 스스로 꾸며낸 일이죠. 그걸 자작극이라고 하죠. 자작극. 사탄이라든지, 가룟 유다,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가룟 유다나 사탄이나 전혀 자율권이 없어요. 독자적인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무능해요. 사탄은 굉장히 무능합니다. 사탄은 천사거든요. 천사의 특징은 시키는 대로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사탄이나 천사보고 무능하다고 하면 굉장히 화 낼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무능하다고 하는 말은 자율성이 없을 때 무능하다고 하거든요. 자율성이. 누가 이렇게 시켜야 하는 것.
그러면 인간들이 “저 무능한 것!” 이렇게 핀잔을 준다면, 그럼 본인은? 본인은 무능한 것이 아니고 유능하겠죠. 그럼 유능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내 행동에 대해서 행위의 주도권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거는 어디에만 써먹을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지게 하시는데 까지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십자가 믿고 안 믿고는, 그때는 나의 자율권이 가동된다는 겁니다.
특히 종교계 재세례파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왜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거든요. 그러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면, 만약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그러면 모든 인간이 지옥이라는 데를 갈 수가 없어요. 지옥을 가고 싶어도 못 가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본인을 인식하든 안 하든 사전에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씻어줬기 때문에 지옥가고 싶어도 죄가 있어야 지옥 가죠. 못 가는데. 주님이 알아서 죄를 다 씻어 줬기 때문에. 그래서 불리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 여기까지는 하시고 그 다음에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게 하자는 겁니다.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게 되면 교리상, 논리상 어떤 점이 유리해지느냐 하면 지옥에 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잘못해서 가잖아요. 죄 지어서 가잖아요. 그럼 죄 짓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위반했을 때 죄가 되겠죠. 하말티아(ἁμαρτία)라고 신학교 좀 나온 사람은 다 이야기하잖아요. ‘죄(하말티아)’는 ‘과녁을 맞추지 못함’이라고. 샤샤샤~♬ 화살을 쏘았는데, 그 목표가 어긋났다는 거예요. 노래 있잖아요. 화살을 쏘는 듯이 춤을 추면서 슈슈슈~♬하는 소녀시대 노래 있잖아요. 그 노래들을 때 하말티아가 생각이 나는데.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이 있는데 율법을 제대로 못 맞혀서 죄가 되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인간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는 거예요. 니가 잘못한 것은 누가 책임져라? 남 쳐다보지 말고 니가 책임져야지! 그럼 니가 책임지려면 인간에게 필히 조건이 있는데,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돼요. 자유. 자유가 있는데, 그 자유를 자유의지라고 이야기하고, 의지가 있는 자유를 함축해서 자율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율성. 반대말은 뭐가 되겠어요? 타율성이 되겠죠. 자유의지가 있다는 겁니다. 자유의지가.
그러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이유는,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자유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내장되어 있는 자유라는 그 정보가, 인간을 창조하면서 그 정보가 그대로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것을 신학교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건 하나님하고 인간하고 공유, 도깨비 주인공이라고 하면 알아듣죠. 그걸 가지고 공유적 속성이라고 이야기해요.
공유적 속성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자유, 감정, 이성뿐만 아니고, 경건함, 양심이라는 것, 거룩, 이런 것들을 가지고, 특히 거룩에 대한 시도가 있으니까 거룩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이것은 바로 창조주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 거룩이공유적 속성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거죠.
방금 제가 이렇게 쭉 나열한 논리를 보게 되면, 이런 논리를 펼치는 가장 핵심이 되는 이슈가 결국 뭡니까? 뭘 다 살리려고 하느냐 하면 지옥 가는 사람은 이거는 본인이 잘못해서 지옥 간다는 이것도 살리고, 그리고 또 뭘 하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는 할 도리는 다 했다. 하나님도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최선의 노력은 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 가는 것은, 그건 본인이 잘못해서 지옥 가는 것이지, 지옥 가는 그것을 남 탓으로 돌리면 안 되지. 지금 이 두 가지의 논리를 다 살리기 위해서 그들은 바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병행해서 꼭 살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게 되면, 그런 쪽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은 어떤 인간입니까? 타율적 인간이에요? 자율적 인간이에요? 자율적 인간이죠. 그럼 자기한테 선택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한테 선택권이 있는 겁니다. 근데 제가 요한복음 13장 21절을 하고 있습니다. 21절과 26절을 봤잖아요. 거기에 보니까 가룟 유다나 사탄에게 자율권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걸 세자로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자작극이다. 예수님의 자작극이에요. 이걸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왕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왕국이라는 그 뉘앙스가 뭐냐 하면 어떤 개인의 독자적인 가치를 내가 허락한 적이 없다. 전체가 예수님의 왕국이에요. 그게 진짜 천국이죠.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의 왕국에서 어떤 개인적인 의미나 가치를 허락한 적이 없어요.
이 왕국에서, 에베소서 같으면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의 통일이라고 하죠. 이 왕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어디를 경유해야 의미가 확장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경유를 해줘야 해요. 경유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단독적인 아이디어나 발상에서 일 할 수 있는 피조물은 그 어디에도 이 세상에서는 없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탄되든 가룟 유다가 되던, “나는 이렇게 해야지.”라고 해서 일어나는 일은 일체 없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누구냐, 애굽의 왕이었던 바로입니다. 출애굽 할 때, 열 가지 재앙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어요. “강퍅케 하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 왕에게 강퍅케 하시는 거예요. 강퍅케 하시는 것. 그것을 로마서 9장에서 그대로 가져와요. 로마서 9장 17절에 보면 “성령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절에,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그러니까 강퍅케 하시는 겁니다. 성질나게 만들어요. 성질나게. 이것을 철학적 용어를 통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로고스Logos적이 아니고 미토스Mythos적이다.”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인 것을 로고스라고 해요. 그리고 미토스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감성적이라는 뜻이에요. 그럼 감성적인 것은 뭐가 아니다? 따지고 자시고 할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 두 가지를 내세웁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는 사랑하고 하나는 미워하는 것.
여러분, 사랑하고 미워하는데 있어서는 이성적인 것이 거기에 끼어들면 안 돼요. 저 사람은 왜 미운데? 그거는 이유를 대면 안 돼요. 딱 보면 미운 걸. 이거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죠. 저 사람이 왜 좋은데? 좋은 걸 어떡해~ 그대가 좋은 걸~ 누가 뭐라고 하던 그대가 좋은 걸~ 말로는 곤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이게 쎄시봉에 나오는 김세환의 노래 <좋은 걸 어떡해> 아닙니까? 좋은 걸 어떡해요? 어떻게 말로 해요? 이게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미토스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이에요. 일시적입니다.
열 가지 재앙에서, 열 가지 재앙을 보게 되면 바로 왕이라는 사람의 인품이 있어요. 점잖고, 왕다워요. 이성적으로 해야 될 일과 안 해야 될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세하고 말할 때도 딱딱 논리적으로 합당한 말을 해요. 그러나 주께서 마음을 확 건드려버렸는데 이성이고 뭐고 성질나는 것은 성질나는데요. “약속했잖아요? 내 백성 보낸다고?” “근데 나도 약속한 것을 알아.” 그걸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의 줄임말로 양해각서)라고 하죠. 장차 그렇게 하도록 미리 허락한 것. “했다는 것을 나도 알거든. 나도 기억하고 있거든. 근데 성질나는데?”이상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요. 이게 바로 미토스적이다. 감성적이에요. 논리적이 아니라 감성적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 해석을 이성적으로 해석을 해야 돼요? 감성적으로 해석해야 돼요? 감성적으로 해야 되죠. 왜 야곱은 사랑받고 왜 에서는 미움을 받습니까? 그걸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을 해요. 하나님께서 하나는 사랑받기로 작정하고 하나는 미움 받기로 작정했다.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심지어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태어나서 인상보고 밉다고 한 것이 아니고. 태어나기도 전에.
그럼 태어나기 전에 뭐가 있습니까? 사랑과 미움이 먼저 있었고, 야곱은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사랑의 실체를 말하기 위해서 야곱이 태어났는데, 야곱은 사기꾼. 에서는 지난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지만, 에서는 사람이 착해. 착하면 뭐 합니까? 지옥 가는데. 그리고 에서가 지옥 간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야곱에게 양보하기 위해서. 야곱을 천국에 보내는 그 바탕을 형성해주기 위해서 지옥에 가줘야 하는 거예요. 이게 누구 마음대로냐 하면 화투에서 오야마음대로에요. 주도권문제에요. 주도권.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문제에요.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은 성경이야기고요. 그럼 아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는 우리가 알아서 선택해서 믿는다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성경이 이래 있고, 자 죽으면 어떻게 되지? 궁금한데, 어? 성경이 있네! 그럼 내가 성경을 한 번 다가가 봐. 거북이처럼 슬그머니 다가가는 거예요.
성경은 유한한 인간들이 모르는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책이다. 그러면 내가 궁금한 것은 이 책 안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죽어서 천국 갈지, 지옥 갈지 그 내용은 아마 성경에 나왔을 걸. 그럼 다가가서 뭘 하느냐,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지? 어떻게 하면 구원받지? 성경의 어떤 내용을 붙잡아야 구원받지? 라는 생각을 슬금슬금 하게 되겠죠.
그런데 백날 해봤자, 이 거리를 좁히고 좁혀봤자, 아예 머리를 성경에다 들이대 봤자, 나는 여전히 나고 성경은 여전히 성경이에요. 심지어 유대인은 성경에 머리를 들이대는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히 삶아먹을 정도에요. 옛날에는 문자가 발달되기 전에 기억력이 발달되어서 기억으로 성경계시를 전달했거든요. 애들 같으면 시편을 다 외우게 만들었어요. 그거는 성경에 나와 있어요. 이미 선지자들이 그렇게 지시를 해서 그 지시 따라서 그렇게 한 거예요.
성경을 볼 때 이 시선,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 이 시선이 살아있어요. 어디에 살아 있느냐 하면, 살아있는 나에게서 발사가 되는, 투사가 되는 그 시선이 여전히 살아있는 거예요. 그 살아있는 것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그런데 신약에 와서 성경은 가만히 있는 성경이 아니고 성경이 저절로 움직이는 거예요. 성경이 움직여서, 나는 가만히 있는데 성경이 와서 덮친다면,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이냐 하면 성경을 가지고 있는 주님의 시선이 나를 쏘아대는 거예요. 투시를 해버리는 겁니다.
그럼 뭐가 우선권이 뭐냐 하면, “내가 죽으면 천국 가야 되지. 지옥 가지 말고 천국 가야 되겠지. 우리 아버지도 천국 간다고 하니까, 내 아내가 먼저 천국 갔으니까 나도 아내 만나려면 천국 가서 만나야겠지. 지옥 가면 못 만나니까. 기어코 천국가야지.”라고 다가서는, 다가서는데 그냥 다가서는 것이 아니고 헤드라이트처럼 비추는 이 시선이 뭐와 마주치겠습니까? 성경에서 자체적으로 인간을 향해서 쏟아지는 시선과 어떻게 되겠습니까? 충돌을 일으키죠.
그 충돌이 뭐냐 하면 고린도전서에서 나오는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결과를 낳는 겁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 그걸 세자로 역주행이라고 합니다. 역주행. 인간은 차가 이리로 간다고 우기고, 주님 쪽에서는 마중 나와야 구원받는다고 우기고. 그러니까 차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리다가 정면충돌하는 거예요. 정면충돌하는 이유가 뭐냐, 성경 쪽에서 출발하는 모든 견해가 인간의 이성에 의하면 어리석고 미련한 곰탱이, 미련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인간의 다가서는 것을 가지고 행함이라고 해요. 행함. 그 행함은 그냥 행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행함의 주체가 있기 마련이죠. 그러면 인간의 모든 행함에는 무엇이 섞여 들어가겠습니까? 행함을 분석해보면 이 세 가지가 들어있어요. 주체의 의지와 주체의 감정과 주체의 지식이 이 행함을 낳겠죠. 이걸 합쳐서 보면 인간의 선택, 선택했다는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선택, 자유의지를 통해서 이 행함 속에 감정이니 뭐니 하는 이런 것들이 실리는 거예요. 실리기 때문에 누가 이 행함을 개무시 하면 누가 화내요? 주체가 화를 내죠.
교회 와서 꽃꽂이 잘 해놨는데 어떤 철없는 세 살 먹은 애가 와서 꽃 예쁘다고 꺾어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요. 근데 꽃꽂이 한 사람만 제일로 화가 나는 거예요. 왜? 누가 했기 때문에? 제2의 나의 분신이에요. 분신.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기증을 했는데, 다른 사람은 피아노에 관심이 없어요. 피아노 소리만 나면 그만인데, 그 기증한 사람은 “저걸 조율을 해야 하는데..조율 안 한지 1년이 넘었는데..”이러고 있다고요. 왜? 본인이 기증을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거는 본인이 누구한테 투자를 한 거예요? 본인이 본인의 명예에다가 본인이 투자한 겁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에요.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버리고 남아있는 백성들이 여호와하면서 금가락지 패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죠. 모세가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그 금송아지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서 누구한테 되돌려 줍니까? “에라 마셔라!” 해가지고 금가루를 물에 타서 백성들한테 되돌려 주죠. 백성들이 건강해졌습니다. 금을 마셨는데 안 건강해질 수가 있습니까? 되돌려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행함은 어디로 향한다? 인간의 행함에는 고무줄이 있어가지고 백날 해봐도 뭔가 일만 있으면 탱하고, 탱! 오늘 강의제목을 탱! 이라고 하자. 탱하고 벌벌 떨면서 자기한테 쫙 오는 거예요. “내가 이 교회에 목사로 온 것은 주의 일을 하러 왔습니다.”라고 백날 이야기해놓고 나중에 교회 그만두라고 하면 퇴직금 내놓으라고 하는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이런 멘트, 이런 발언, 이런 설교 하나 하나가 바로 결국에는 나에 대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만한 노동의 대가는 줘야 되지 않겠느냐? 이 염치없는 인간들아! 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행함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주체가 생생하게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를 누가 믿어요? 내가 믿는 거예요. 내가 믿는 믿음으로,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믿는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이게 바로 행함 종교의 특기에요. 내가 기도했는데 복은 기도도 하지 않은 저 농땡이가 복 받는다는 것은 용납이 안 돼요. 그럴 것 같으면 금요일에 커피 석 잔 먹고 기도회에 참석할 이유가 없잖아요. 기도한 당사자가 기도한 효과를 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보상을 받든, 뭘 받든, 이게 내 것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그 희망 때문에 우리는 악착같이 기도하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기도했는데 복이 나한테 오지 않고, 미토스적으로, 감정적으로 내가 보기만 하면 미운 자가 만약에 사업이 잘 되고 자녀가 잘 된다면 주님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따지게 되겠죠. 보통 기도할 때, 뭐 성프란시스의 기도, 맥아더의 기도, 록펠러의 기도, 기도의 매뉴얼 같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좋은 기도. 그 좋은 기도 문장 따라 한 번 해본다고요.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해주시고,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기도해서 남이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그런 내용이잖아요.
근데 실제로 지가 기도했는데 남이 잘 되어 보세요. 그 다음부터 기도할 마음이 나겠습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해달라는 좋은 멘트를 날렸으면 주님께서 눈치껏 알아서 그렇게 기도한 나에게, 내가 생각하지 못한 30배, 60배, 100배를 돌려주어야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계속 기도할 수 있는 어떤 보람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것이 없이 무슨 기도를 합니까?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 쪽에서 모든 것을 출발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도 내가 믿어서 예수 믿고, 행함도 내가 하고, 로마서에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래 내가 믿는다니까 내가. 내가 예수 믿는다니까!” 이래 돼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니까, “그래 내가 알아서 나를 부인한다니까!” 이래 나오는 거예요. 모든 산상설교 내용을 자기가 다 쓰는 거예요.
노림수가 뭡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기어이 내가 뭘 따내고 말겠다? 영생과 천국을 따내겠다. 먹고 말거야 치토스~!라는 광고 있잖아요. 기어이 그걸 먹고 말겠다는 거예요. 그런 오기와 집념덩어리. 그게 바로 이미 인간 속에 피조물이면서도 아닌 척 하는 악마가 인간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다 바꿔놨어요. 인간의 마음을. 그래서 요한복음은 뭐냐 하면 “오지마라. 내가 갈게.” 그럼 인간은 뭐라고 합니까? “기다리다가 안 오면?” 이러거든요.
10년 기다리고 20년 기다려도 안 오면 어떻게 되는가?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누구의 왕국이다? 그리스도의왕국이죠. 그 그리스도의 왕국에 사람들이 있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나라라고 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 하면 상상을 해요. 상상을 하는데, 사실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인간의 상상 속 밑바닥에 전부 다 아스팔트처럼 깔려있습니다. 깔려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친히 너희들을 키워왔다는 거예요. 내가.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그리고 니 심장이 뛰게 하고, 공기주시고, 마태복음 5장 45절에 보면 나오죠.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은혜를 주셨어요? 안 주셨어요? 이걸 노아언약이라고 하는데, 악인이나 선인이나 은혜를 주셨잖아요. 무지개 피게 해서 주셨잖아요. 그렇게 주셔서 누가 키웠습니까? 지금 주님이 키웠죠. 주님이 키워놨는데, 키워놓은 인간이 자기 밑바닥을 볼 생각을 안 하고 뭘 봅니까? 자기에게 있는, 왜 나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지금 누구한테 행패를 부리는 겁니까? 지금 하나님을 향하여 행패를 부리는 거예요.
근본적인 것, 지금 심장이 뛰는 것,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 파마된 것, 이게 전부 다 누구의 은혜에요? 전부 다 주님께서 괜찮은 미장원 소개해 줘가지고 된 거 아닙니까? 보세요. 사람의 시각으로 선택을 한다고 해도 주께서 눈에 띄도록 만든 그 바구니에서의 선택이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선택할 항목조차에도 끼지 않는데 어떻게 선택이 되겠어요? 어느 정도 주섬주섬 모아 놓아야, 어느 것 할래?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내를 선택해도 반경 40킬로미터 내에서 선택한다는 그런 말이 있잖아요. 배우자 선택 반경 40킬로미터 내. 직장가면 직장동료. 교회가면 교회 교인들. 반경 40킬로미터 내에서 대충 만난다는 겁니다. 요새는 인터넷이 되어서 그 공간개념이 떠났지만.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모든 사고는 항상 하나님이 조절해요. 하나님이 조절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생각나기 때문에. 근데 우리는 이렇게 뒤늦은 비겁한 변명을 해요. “아, 마침 내가 그 생각이 나네.” 나를 집어넣는다고요. 나를. 주님이 떠오르게 했는데 꼭 그걸 자기를 집어넣어요. 이걸 저는 문법적인 습관이라고 합니다.
문법적인 습관이 뭐냐 하면 비가 오는데, 비가 오는 것을 영어로 뭐라고 해요? It's a raining(잇츠 어 레이닝). 비가 오는데 갑자기 It이라는 3인칭을 내놓는다고요. 그냥raining인데, It(잇)이게 있어야 문장이 된다는 겁니다. 문장이. 따져보세요. 이 몸이 그냥, 내가 만약에 밥을 먹는데, 왜 밥을 먹느냐, 근데 내가 먹고 싶어서 밥을 먹는 거예요. 먹고 싶어서 밥을 먹는데 누가 갑자기 들어왔어요. “누구야? 이 시간에 밥 먹는 사람이?” “내가 먹어. 내가!” 갑자기 자기가 먹는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밥을 먹는 것이 아니에요. 밥을 먹게끔 한 감정이 나로 하여금 숟가락 들게 만들었지, 내 신체가 우선이고 자아주체성은 없어요. 자아주체성은 그때그때 신체가 그림자처럼, 꼬리처럼 뒤늦게 생성되는 것이 자아라는 이미지지, 자아라는 것은 없어요. 자아라는 실체가 없어요. 근데 신체가 했는데 우리는 그걸 꼭 뒤에 내가 했다고 하는 것이 버릇처럼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머리카락을 자라게 했는데, 이게 내 머리카락이라는 말을 꼭 집어넣어야 되겠어요? 왜냐하면 우리 신체는 누구 겁니까? 그리스도 왕국에 내 것이라는 것이 있어요? 없어요? 주님 건데, 꼭 우리는 내 것이라는 것을 집어넣어요. 이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세계에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는 겁니다. 나와바리라고 하죠.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서, 거기서 새롭게 현실을 구성을 해버려요. 이것을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네 자로 이야기했죠. 뭐라고 했던가요? 대안현실이라고 했죠. 현실을 내 편리위주로, 내가 납득되는 위주로, 일방적으로 현실을 생각해버립니다. 일방적으로. 좋은 예가 우리교회나 십자가마을에 올렸던 수습선교사라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존에 수습선교사로 가가지고 돌아와서 소감을 적어놓은 것이 있어요.
아마존에 죽기 살기로 주께 충성하는 것을 측정하기 위해서 갔는데, 한 얼마쯤 있다가 와가지고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믿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내가 이성적으로 하는 이것이 얼마나 헛방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아마존에 갔을 때 얼마나 집에 오고 싶었겠어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후딱 왔을 것이 아닙니까? 참, 얼마나 본인이 비겁하다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비겁하다는 것을.
자, 감정 다시 해봅시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사랑과 미움이죠. 사랑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무조건, 무조건이야.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사랑이에요.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것. 그냥 있음에, 불속으로 나방이 뛰어 들어가는 것이 사랑이에요. 스톱을 할 수 있는 자아가 없어요. “이쯤해서 멈춰야지.”라는 자아가 없어요. 절제 이런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사랑은 그냥 빠져 들어가는 거예요. 빠져 들어감으로써 사랑이 되는 거예요. 빠져 들어가면서 멈칫거리면 그건 진짜 사랑을 변경시킨 겁니다. 나를 위한 이익위주로 현실을 또 바꾸는 거예요. 대안현실로. 대체현실로 자꾸 바꾸는 거예요.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구, 저 셋째 아들 진짜 밉다. 저걸 내가 왜 태어나게 만들었는지? 밉다.” 이래서는 부모가 되어서 안 되는 줄 아는데, 미운 걸 어떡해~ 보기만 해도 미운 것을. 만약에 어떤 미운 사람이 있는데 그 미운 사람이 “목사님. 저도 천국 갑니다.”라고 한다면 그 소리 듣는 순간, ‘니가 천국 간다면 나는 지옥 가련다. 아이고, 영원토록 니하고 같이 살아? 미쳤나! 그게 지옥이야 그게. 니가 없는 곳에 가고 싶어. 정말 니 좀 안 봤으면 좋겠다.’ 거기에 대한 영화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밀양이라는 영화잖아요. 밀양.
자기 아들 죽여 놓고 전도연이 전도하려고 교도소에 갔는데, 전도도 하기 전에 지가 먼저 이야기해요. “자매님. 죄송합니다. 제가 예수 믿고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는 사람한테는 전도가 행함이잖아요?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내가 전도해서, 내 말이 먹혀들어 꼬셔야 내가 신자라는 것이 테스트 검증이 되는데, 내가 하기 전에 먼저 믿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자기의 모든 계획이 다 수포로 끝났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거짓이에요? 전도연 본인이 거짓인데, 인간이 근원적인 자율권이 뭐냐 하면 어떤 경우도 자기는 선악과 따먹은 신이기 때문에, 신은 비판받거나 평가대상이 안 돼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정당해요. 정당하기 때문에 김추자 노래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는 노래를 트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반대로 누가 정당하기 때문에? 내가 정당하기 때문에.
악마가 니가 따먹는 날에는 뭐처럼 된다? 하나님처럼 된다. 하나님처럼 어떤 평가나 심판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나는 예수님이 좋아요. 나는 예수님을 믿고 싶어요.”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본래 갖고 있던 악마적인 본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내가 평소에 나를 신으로 여겼던 그것을 예수님까지 거기서 인정을 해줄 때, 그런 예수를 싫어할 이유가 없죠. 평소에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잘한다! 잘한다! 하고 한껏 긍정적인 멘트를 막 날려주니까. 성경이. 성경에서 행함에 대해서 멘트를 날려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떻게 행동을 했는데, “주님이여, 저는 이런 행동을 했습니다.” 이래 하니까 지금 예수님이 하는 말이 사실은 마귀죠. 마귀가 하는 말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어보았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너에 대한 사랑이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행위에 대해서 갑자기, 내 행위에 대해서 정당화하고 싶었는데, 내가 나를 사랑해주고 싶은 그 이상으로, 그러한 사랑으로 또 어떤 분이 내 사랑에 대해서 박수를 쳐주고 동조를 해주니 이런 원군이 어디에 있어요? 더할 나위 없는 후원자를 얻었으니 그 예수를 어찌 사랑하지 않으리요?
그래서 교회에서 긍정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기반으로 해서 시작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기반으로 해서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복음은 어디서부터 합니까? 어리석다는 그런 인간의 시선으로 보기에, 안목에서 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하고 당최 누가 저따위 소리를 믿을 수 있으리요? 어느 누구도 안 믿을 거야? 라는 내용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믿게 된 것은 내 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함으로써 믿는 것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아, 나는 제정신가지고는 저런 복음을 못 믿어!”라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나는 평소에 내가 신이 되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사랑해서 니는 신의 아들이라고 해버리면 여기에 무슨, 이건 로마서 9장 33절에 나오는데요, 여기에 무슨 걸림돌이 있겠습니까? 걸림돌을 확 빼버렸는데요. 걸림돌을 확 빼버린 거예요.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걸림돌이 안 되는 십자가를 집어넣어버린 겁니다.
“십자가 믿나? 죄 많은 당신을 위해서 누가 희생했으면, 희생했다는 감정이입을 해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생각됩니까? 생각돼요?” “예. 생각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엄마라고 생각해보세요. 엄마가 지금 당신을 위해서 피 흘리고 죽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 그 사랑이 어때요?” “아! 너무 좋아요!” “좋아요? 좋습니까? 좀 더, 좀 더, 더더더더...당신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손들고 나오세요. 드디어 십자가 피를 믿었군요. 이제는 보답할 일만 남았습니다.” 결국은 돈 내라는 이야기죠.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 돈 내라는 이야기에요. 어차피 교회는 돈 없으면 유지가 안 되니까.
이 긴긴 이야기의 결국 시발점은 뭐였습니까? 자율권. 그 자율권이 나타난 이유가 어디서 나왔다? 지옥은 반드시 죄진 사람만 간다는 것. 왜? 자기 죄에 대해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면 안 되니까. 죄지은 당사자가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지옥가야 된다고, 이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그게 바로 니들이 아는 전부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죄의 수족관이에요. 수족관. 고기가 어디에서 삽니까? 수족관에 살죠. 고기는 수족관에서 마음껏 자기 수영솜씨를 뽐냅니다. 고기에게 수영이라는 것은 뭘 의미합니까? 행함이죠. 여기 행함에 뭐가 포함됩니까?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이게 포함되겠죠. 신뢰합니다. 의지합니다. 나는 주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내려놓고 또 내려놨습니다. 몽골선교사처럼.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나는 나를 부인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합니다. 전부 다 “나”가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 나왔다? 죄라는 수족관에서 마음껏 수영솜씨를 발휘하는 거예요. 종교적인 수영솜씨를.
다윗이 안 것은 뭐냐 하면 무슨 짓을 해도, 무슨 멘트를 날려도, 수족관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원천적으로 알았어요. 원천적으로. 그러니까 “하나님. 지금 제가 이런 괜찮은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스톱! 스톱! 했는데, 다윗은 성신을 받아가지고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겁니다. 죄 중이라는 것은 뭐냐 하나의 수족관이죠.
그러니까 야곱의 원천은 뭡니까? 야곱의 원천은 사랑이고, 에서의 원천은 미움이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미움이 먼저 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야곱이 나중에 태어나고 에서가 나중에 태어난다는 이 말이죠. 그러면 미움과 사랑이 있고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다면,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미움과 사랑은 하나 될 수 없고 둘이 분리되어 있죠. 분리된 그것을 그대로 반증하듯이 땅에서도 어떻습니까? 분리되는 거예요.
분리됐는데, “처음부터 나는 어느 쪽에 설래.”라는 그런 선택권이 있어요? 없어요? 원천이 주님의 사랑과 미움에 있기 때문에 우리 자체 내에 원천은 없어요. 원천이 없다는 말은 결과물에 불과한 겁니다. 그럼 결과물이, 결과물 자체가 원천을 더듬으면서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없다? 없죠. 왜냐하면 인간이 노는 곳이 이 수족관에서 노니까. 죄 속에서 노니까. 인간이 어떤 것을 하더라도 이 안에, 인간이 수영하면서 팔랑거리며 생기는 물방울 그 모두가 죄의 물방울이에요. 전도, 성경, 예배참석, 기도, 성경공부, 찬양, 강의, 설교, 전부 다 죄라니까요.
분명히 성경에는 번제 드리라고 했고, 소제 드리라고 했고, 화목제 드리라고 했고, 속건제 드리라고 했고, 속죄제 드리라고 했고, 제사 드리라고 했잖아요. 근데 시편 51편에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번제도 아니고 제사도 아니죠. 그럼 번제도 아니고 제사도 아니면 왜 제사 드리라는 명령을 왜 했어요? 이거는 유도한 거예요. 전략이에요. 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니 나름대로 한 번 팔랑거려봐라. 촐랑대보라는 이 말이죠. 시키는 대로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 따라 한 번 해보라 이 말이죠. 한 번 팔랑거리며 뛰어보라 이 말이죠.
그럴 때, 하나님의 택한 백성한테는 그것들이 나로 하여금, 지금 내가 얼마나 죄 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하나의 환경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수족관의 죄를 다 비우고 거기다가 뭐를 채워 넣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채워 넣습니다. 이건 이번 주 우리교회 낮 설교 내용이에요. 예수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사 성도로 하여금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는 겁니다.
의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의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루터가 이것을 몰라가지고 자꾸 소유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묻는 거예요. “루터야! 성도가 의인이야? 죄인이야?” 루터가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죄인이면서 의인이다.”이렇게 책을 읽어대는 거예요. 벌써 질문하는 사람도 잘못됐고 질문 받는 사람도 잘못알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의를 소유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의가 된 채 천국 가는 거예요. 의가 나를 소유하지 내가 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 의를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관계성이라고 하고, 나는 주의 수족관 안에 있는 성도라. 그래서 이걸 가지고 의의 종이라고 해서, 로마서 6장 18절에 보면 성도는 의의 종이 되었느니라. 아까 의의 원천이라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죠. 사랑에는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랑에는 이유가 없어요. 사랑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어떻게? 니가 이렇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는 너를 이유 없이 사랑했느니라. 그걸 자꾸 성립시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약의 아가 아닙니까? 아가. 여자가 싫다는데, 세상에! 초창기 스토커에요. 계속 따라와요. 계속 따라와. 여자가 싫다는데. 이 시커먼 여자야!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나는 시커먼 게 좋아. 하면서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포도원에서 일한다고 햇볕에 탔구나. 그런데 와 나는 그게 땡기지? 매력적이지? 하면서. 얼굴 시커멓게 탄 것 가지고? 어디 귀농했는가? 계속 집착을 하는 거예요. 여자 쪽에서 “이럴 것 같으면 헤어져!”라고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계속 헤어지자, 헤어지자고 했는데도 계속 따라와요.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결혼도 안 했는데 “나의 누이여”라고 해요. 나의 누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가 같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헤어질 관계다? 아니다? 헤어질 관계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의 원천은 우리 쪽에서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 말입니다. 이 사랑 자체에, 아무 이유도 없이 나는 너를 사랑했어야 한다. 사랑에는 뭐가 없다? 이유가 없어요. 사랑에는 이유가 없는 겁니다. 아까 로고스적인, 이성적인 그것이 있다고 했어요? 없다고 했어요? 그게 없어요. 없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런 교리가 나왔느냐? 더 원천적으로 들어가 봐야 해요. 뭐냐 하면 납득을 시킬 때 회원 하나 모집하는 것이 더 가능하기 때문에. 납득을 시킬 때. 고객이 왕이잖아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생산자가 채워줄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뭘 원합니까? 원하는 대로 알려드리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하고 다르죠.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해요.
그런데 교회가 장사를 하려면 뭘 해야 돼요? “내가 당신에게 뭘 해주면 됩니까?”에요. 훈련이 그거잖아요. “잘 돌아보시고 필요한 것 저한테 알려주시면 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 보세요. 처음에 미국이나 독일에 가면 “뭘 도와드릴까요?” “서류가 안 되는데요?” “예. 서류 떼어드릴게요.” “김밥 돼요?” “예. 이번 주 김밥 만듭니다.” “비빔밥은요?” “예. 이번에 비빔밥 합니다.” “외로우시죠? 도와드리겠습니다.” “방 구할 데 있습니까?” “좋은 방 있습니다. 옛날 방이지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들이 고객을 만족시킬 때, 그 사람과 그 사람 사이에는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걸 사자성어로 초코파이라고 합니다. 뭐죠? 정情이죠. 인간은 정으로 살아요. 초코파이 하나 주듯이 정으로 사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 한민족입니다. 교회 크게 부흥됐어요. 그 교회 가면 뭡니까? 전부 다 정이에요. 권사 투표하면 정이고 장로 투표하면 정이고, 정주고 정 받고 사는. 이 외롭고 돈만 있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위로해주죠? 여러분? 교회입니다. 교회가 정을 못 주면 교회는 문 닫아야 돼요.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