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가락강의-무능 17032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10. 18:05
2017-03-22 00:26:59조회 : 302         
무능 170321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이미아 (IP:122.♡.188.127)17-03-23 23:01 
가락-요한복음13장21절(무능)170321a-이 근호 목사 

  

자, 요한복음 13장 21절 봅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 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하시고 그 다음 26절에 보세요. 21절 읽으시고 붕 띄어서 2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방금 읽었던 요한복음 13장 21절과 26절, 27절을 보게 되면, 이것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전부 다 예수님께서 의도해서 스스로 꾸며낸 일이죠. 그걸 자작극이라고 하죠. 자작극. 사탄이라든지, 가룟 유다,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가룟 유다나 사탄이나 전혀 자율권이 없어요. 독자적인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무능해요. 사탄은 굉장히 무능합니다. 사탄은 천사거든요. 천사의 특징은 시키는 대로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사탄이나 천사보고 무능하다고 하면 굉장히 화 낼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무능하다고 하는 말은 자율성이 없을 때 무능하다고 하거든요. 자율성이. 누가 이렇게 시켜야 하는 것. 

  

그러면 인간들이 “저 무능한 것!” 이렇게 핀잔을 준다면, 그럼 본인은? 본인은 무능한 것이 아니고 유능하겠죠. 그럼 유능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내 행동에 대해서 행위의 주도권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거는 어디에만 써먹을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지게 하시는데 까지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십자가 믿고 안 믿고는, 그때는 나의 자율권이 가동된다는 겁니다. 

  

특히 종교계 재세례파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왜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거든요. 그러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면, 만약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그러면 모든 인간이 지옥이라는 데를 갈 수가 없어요. 지옥을 가고 싶어도 못 가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본인을 인식하든 안 하든 사전에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씻어줬기 때문에 지옥가고 싶어도 죄가 있어야 지옥 가죠. 못 가는데. 주님이 알아서 죄를 다 씻어 줬기 때문에. 그래서 불리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 여기까지는 하시고 그 다음에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게 하자는 겁니다.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게 되면 교리상, 논리상 어떤 점이 유리해지느냐 하면 지옥에 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잘못해서 가잖아요. 죄 지어서 가잖아요. 그럼 죄 짓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위반했을 때 죄가 되겠죠. 하말티아(ἁμαρτία)라고 신학교 좀 나온 사람은 다 이야기하잖아요. ‘죄(하말티아)’는 ‘과녁을 맞추지 못함’이라고. 샤샤샤~♬ 화살을 쏘았는데, 그 목표가 어긋났다는 거예요. 노래 있잖아요. 화살을 쏘는 듯이 춤을 추면서 슈슈슈~♬하는 소녀시대 노래 있잖아요. 그 노래들을 때 하말티아가 생각이 나는데.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이 있는데 율법을 제대로 못 맞혀서 죄가 되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인간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는 거예요. 니가 잘못한 것은 누가 책임져라? 남 쳐다보지 말고 니가 책임져야지! 그럼 니가 책임지려면 인간에게 필히 조건이 있는데,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돼요. 자유. 자유가 있는데, 그 자유를 자유의지라고 이야기하고, 의지가 있는 자유를 함축해서 자율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율성. 반대말은 뭐가 되겠어요? 타율성이 되겠죠. 자유의지가 있다는 겁니다. 자유의지가. 

  

그러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이유는,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자유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내장되어 있는 자유라는 그 정보가, 인간을 창조하면서 그 정보가 그대로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것을 신학교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건 하나님하고 인간하고 공유, 도깨비 주인공이라고 하면 알아듣죠. 그걸 가지고 공유적 속성이라고 이야기해요. 

  

공유적 속성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자유, 감정, 이성뿐만 아니고, 경건함, 양심이라는 것, 거룩, 이런 것들을 가지고, 특히 거룩에 대한 시도가 있으니까 거룩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이것은 바로 창조주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 거룩이공유적 속성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거죠. 

  

방금 제가 이렇게 쭉 나열한 논리를 보게 되면, 이런 논리를 펼치는 가장 핵심이 되는 이슈가 결국 뭡니까? 뭘 다 살리려고 하느냐 하면 지옥 가는 사람은 이거는 본인이 잘못해서 지옥 간다는 이것도 살리고, 그리고 또 뭘 하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는 할 도리는 다 했다. 하나님도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최선의 노력은 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 가는 것은, 그건 본인이 잘못해서 지옥 가는 것이지, 지옥 가는 그것을 남 탓으로 돌리면 안 되지. 지금 이 두 가지의 논리를 다 살리기 위해서 그들은 바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병행해서 꼭 살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게 되면, 그런 쪽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은 어떤 인간입니까? 타율적 인간이에요? 자율적 인간이에요? 자율적 인간이죠. 그럼 자기한테 선택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한테 선택권이 있는 겁니다. 근데 제가 요한복음 13장 21절을 하고 있습니다. 21절과 26절을 봤잖아요. 거기에 보니까 가룟 유다나 사탄에게 자율권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걸 세자로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자작극이다. 예수님의 자작극이에요. 이걸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왕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왕국이라는 그 뉘앙스가 뭐냐 하면 어떤 개인의 독자적인 가치를 내가 허락한 적이 없다. 전체가 예수님의 왕국이에요. 그게 진짜 천국이죠.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의 왕국에서 어떤 개인적인 의미나 가치를 허락한 적이 없어요. 

  

이 왕국에서, 에베소서 같으면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의 통일이라고 하죠. 이 왕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어디를 경유해야 의미가 확장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경유를 해줘야 해요. 경유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단독적인 아이디어나 발상에서 일 할 수 있는 피조물은 그 어디에도 이 세상에서는 없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탄되든 가룟 유다가 되던, “나는 이렇게 해야지.”라고 해서 일어나는 일은 일체 없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누구냐, 애굽의 왕이었던 바로입니다. 출애굽 할 때, 열 가지 재앙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어요. “강퍅케 하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 왕에게 강퍅케 하시는 거예요. 강퍅케 하시는 것. 그것을 로마서 9장에서 그대로 가져와요. 로마서 9장 17절에 보면 “성령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절에,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그러니까 강퍅케 하시는 겁니다. 성질나게 만들어요. 성질나게. 이것을 철학적 용어를 통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로고스Logos적이 아니고 미토스Mythos적이다.”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인 것을 로고스라고 해요. 그리고 미토스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감성적이라는 뜻이에요. 그럼 감성적인 것은 뭐가 아니다? 따지고 자시고 할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 두 가지를 내세웁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는 사랑하고 하나는 미워하는 것. 

  

여러분, 사랑하고 미워하는데 있어서는 이성적인 것이 거기에 끼어들면 안 돼요. 저 사람은 왜 미운데? 그거는 이유를 대면 안 돼요. 딱 보면 미운 걸. 이거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죠. 저 사람이 왜 좋은데? 좋은 걸 어떡해~ 그대가 좋은 걸~ 누가 뭐라고 하던 그대가 좋은 걸~ 말로는 곤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이게 쎄시봉에 나오는 김세환의 노래 <좋은 걸 어떡해> 아닙니까? 좋은 걸 어떡해요? 어떻게 말로 해요? 이게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미토스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이에요. 일시적입니다. 

  

열 가지 재앙에서, 열 가지 재앙을 보게 되면 바로 왕이라는 사람의 인품이 있어요. 점잖고, 왕다워요. 이성적으로 해야 될 일과 안 해야 될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세하고 말할 때도 딱딱 논리적으로 합당한 말을 해요. 그러나 주께서 마음을 확 건드려버렸는데 이성이고 뭐고 성질나는 것은 성질나는데요. “약속했잖아요? 내 백성 보낸다고?” “근데 나도 약속한 것을 알아.” 그걸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의 줄임말로 양해각서)라고 하죠. 장차 그렇게 하도록 미리 허락한 것. “했다는 것을 나도 알거든. 나도 기억하고 있거든. 근데 성질나는데?”이상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요. 이게 바로 미토스적이다. 감성적이에요. 논리적이 아니라 감성적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 해석을 이성적으로 해석을 해야 돼요? 감성적으로 해석해야 돼요? 감성적으로 해야 되죠. 왜 야곱은 사랑받고 왜 에서는 미움을 받습니까? 그걸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을 해요. 하나님께서 하나는 사랑받기로 작정하고 하나는 미움 받기로 작정했다.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심지어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태어나서 인상보고 밉다고 한 것이 아니고. 태어나기도 전에. 

  

그럼 태어나기 전에 뭐가 있습니까? 사랑과 미움이 먼저 있었고, 야곱은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사랑의 실체를 말하기 위해서 야곱이 태어났는데, 야곱은 사기꾼. 에서는 지난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지만, 에서는 사람이 착해. 착하면 뭐 합니까? 지옥 가는데. 그리고 에서가 지옥 간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야곱에게 양보하기 위해서. 야곱을 천국에 보내는 그 바탕을 형성해주기 위해서 지옥에 가줘야 하는 거예요. 이게 누구 마음대로냐 하면 화투에서 오야마음대로에요. 주도권문제에요. 주도권.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문제에요.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은 성경이야기고요. 그럼 아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는 우리가 알아서 선택해서 믿는다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성경이 이래 있고, 자 죽으면 어떻게 되지? 궁금한데, 어? 성경이 있네! 그럼 내가 성경을 한 번 다가가 봐. 거북이처럼 슬그머니 다가가는 거예요. 

  

성경은 유한한 인간들이 모르는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책이다. 그러면 내가 궁금한 것은 이 책 안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죽어서 천국 갈지, 지옥 갈지 그 내용은 아마 성경에 나왔을 걸. 그럼 다가가서 뭘 하느냐,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지? 어떻게 하면 구원받지? 성경의 어떤 내용을 붙잡아야 구원받지? 라는 생각을 슬금슬금 하게 되겠죠. 

  

그런데 백날 해봤자, 이 거리를 좁히고 좁혀봤자, 아예 머리를 성경에다 들이대 봤자, 나는 여전히 나고 성경은 여전히 성경이에요. 심지어 유대인은 성경에 머리를 들이대는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히 삶아먹을 정도에요. 옛날에는 문자가 발달되기 전에 기억력이 발달되어서 기억으로 성경계시를 전달했거든요. 애들 같으면 시편을 다 외우게 만들었어요. 그거는 성경에 나와 있어요. 이미 선지자들이 그렇게 지시를 해서 그 지시 따라서 그렇게 한 거예요. 

  

성경을 볼 때 이 시선,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 이 시선이 살아있어요. 어디에 살아 있느냐 하면, 살아있는 나에게서 발사가 되는, 투사가 되는 그 시선이 여전히 살아있는 거예요. 그 살아있는 것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그런데 신약에 와서 성경은 가만히 있는 성경이 아니고 성경이 저절로 움직이는 거예요. 성경이 움직여서, 나는 가만히 있는데 성경이 와서 덮친다면,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이냐 하면 성경을 가지고 있는 주님의 시선이 나를 쏘아대는 거예요. 투시를 해버리는 겁니다. 

  

그럼 뭐가 우선권이 뭐냐 하면, “내가 죽으면 천국 가야 되지. 지옥 가지 말고 천국 가야 되겠지. 우리 아버지도 천국 간다고 하니까, 내 아내가 먼저 천국 갔으니까 나도 아내 만나려면 천국 가서 만나야겠지. 지옥 가면 못 만나니까. 기어코 천국가야지.”라고 다가서는, 다가서는데 그냥 다가서는 것이 아니고 헤드라이트처럼 비추는 이 시선이 뭐와 마주치겠습니까? 성경에서 자체적으로 인간을 향해서 쏟아지는 시선과 어떻게 되겠습니까? 충돌을 일으키죠. 

  

그 충돌이 뭐냐 하면 고린도전서에서 나오는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결과를 낳는 겁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 그걸 세자로 역주행이라고 합니다. 역주행. 인간은 차가 이리로 간다고 우기고, 주님 쪽에서는 마중 나와야 구원받는다고 우기고. 그러니까 차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리다가 정면충돌하는 거예요. 정면충돌하는 이유가 뭐냐, 성경 쪽에서 출발하는 모든 견해가 인간의 이성에 의하면 어리석고 미련한 곰탱이, 미련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인간의 다가서는 것을 가지고 행함이라고 해요. 행함. 그 행함은 그냥 행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행함의 주체가 있기 마련이죠. 그러면 인간의 모든 행함에는 무엇이 섞여 들어가겠습니까? 행함을 분석해보면 이 세 가지가 들어있어요. 주체의 의지와 주체의 감정과 주체의 지식이 이 행함을 낳겠죠. 이걸 합쳐서 보면 인간의 선택, 선택했다는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선택, 자유의지를 통해서 이 행함 속에 감정이니 뭐니 하는 이런 것들이 실리는 거예요. 실리기 때문에 누가 이 행함을 개무시 하면 누가 화내요? 주체가 화를 내죠. 

  

교회 와서 꽃꽂이 잘 해놨는데 어떤 철없는 세 살 먹은 애가 와서 꽃 예쁘다고 꺾어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요. 근데 꽃꽂이 한 사람만 제일로 화가 나는 거예요. 왜? 누가 했기 때문에? 제2의 나의 분신이에요. 분신.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기증을 했는데, 다른 사람은 피아노에 관심이 없어요. 피아노 소리만 나면 그만인데, 그 기증한 사람은 “저걸 조율을 해야 하는데..조율 안 한지 1년이 넘었는데..”이러고 있다고요. 왜? 본인이 기증을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거는 본인이 누구한테 투자를 한 거예요? 본인이 본인의 명예에다가 본인이 투자한 겁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에요.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버리고 남아있는 백성들이 여호와하면서 금가락지 패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죠. 모세가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그 금송아지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서 누구한테 되돌려 줍니까? “에라 마셔라!” 해가지고 금가루를 물에 타서 백성들한테 되돌려 주죠. 백성들이 건강해졌습니다. 금을 마셨는데 안 건강해질 수가 있습니까? 되돌려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행함은 어디로 향한다? 인간의 행함에는 고무줄이 있어가지고 백날 해봐도 뭔가 일만 있으면 탱하고, 탱! 오늘 강의제목을 탱! 이라고 하자. 탱하고 벌벌 떨면서 자기한테 쫙 오는 거예요. “내가 이 교회에 목사로 온 것은 주의 일을 하러 왔습니다.”라고 백날 이야기해놓고 나중에 교회 그만두라고 하면 퇴직금 내놓으라고 하는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이런 멘트, 이런 발언, 이런 설교 하나 하나가 바로 결국에는 나에 대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만한 노동의 대가는 줘야 되지 않겠느냐? 이 염치없는 인간들아! 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행함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주체가 생생하게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를 누가 믿어요? 내가 믿는 거예요. 내가 믿는 믿음으로,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믿는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이게 바로 행함 종교의 특기에요. 내가 기도했는데 복은 기도도 하지 않은 저 농땡이가 복 받는다는 것은 용납이 안 돼요. 그럴 것 같으면 금요일에 커피 석 잔 먹고 기도회에 참석할 이유가 없잖아요. 기도한 당사자가 기도한 효과를 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보상을 받든, 뭘 받든, 이게 내 것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그 희망 때문에 우리는 악착같이 기도하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기도했는데 복이 나한테 오지 않고, 미토스적으로, 감정적으로 내가 보기만 하면 미운 자가 만약에 사업이 잘 되고 자녀가 잘 된다면 주님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따지게 되겠죠. 보통 기도할 때, 뭐 성프란시스의 기도, 맥아더의 기도, 록펠러의 기도, 기도의 매뉴얼 같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좋은 기도. 그 좋은 기도 문장 따라 한 번 해본다고요.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해주시고,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기도해서 남이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그런 내용이잖아요. 

  

근데 실제로 지가 기도했는데 남이 잘 되어 보세요. 그 다음부터 기도할 마음이 나겠습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해달라는 좋은 멘트를 날렸으면 주님께서 눈치껏 알아서 그렇게 기도한 나에게, 내가 생각하지 못한 30배, 60배, 100배를 돌려주어야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계속 기도할 수 있는 어떤 보람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것이 없이 무슨 기도를 합니까?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 쪽에서 모든 것을 출발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도 내가 믿어서 예수 믿고, 행함도 내가 하고, 로마서에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래 내가 믿는다니까 내가. 내가 예수 믿는다니까!” 이래 돼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니까, “그래 내가 알아서 나를 부인한다니까!” 이래 나오는 거예요. 모든 산상설교 내용을 자기가 다 쓰는 거예요. 

  

노림수가 뭡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기어이 내가 뭘 따내고 말겠다? 영생과 천국을 따내겠다. 먹고 말거야 치토스~!라는 광고 있잖아요. 기어이 그걸 먹고 말겠다는 거예요. 그런 오기와 집념덩어리. 그게 바로 이미 인간 속에 피조물이면서도 아닌 척 하는 악마가 인간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다 바꿔놨어요. 인간의 마음을. 그래서 요한복음은 뭐냐 하면 “오지마라. 내가 갈게.” 그럼 인간은 뭐라고 합니까? “기다리다가 안 오면?” 이러거든요. 

  

10년 기다리고 20년 기다려도 안 오면 어떻게 되는가?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누구의 왕국이다? 그리스도의왕국이죠. 그 그리스도의 왕국에 사람들이 있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나라라고 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 하면 상상을 해요. 상상을 하는데, 사실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인간의 상상 속 밑바닥에 전부 다 아스팔트처럼 깔려있습니다. 깔려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친히 너희들을 키워왔다는 거예요. 내가.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그리고 니 심장이 뛰게 하고, 공기주시고, 마태복음 5장 45절에 보면 나오죠.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은혜를 주셨어요? 안 주셨어요? 이걸 노아언약이라고 하는데, 악인이나 선인이나 은혜를 주셨잖아요. 무지개 피게 해서 주셨잖아요. 그렇게 주셔서 누가 키웠습니까? 지금 주님이 키웠죠. 주님이 키워놨는데, 키워놓은 인간이 자기 밑바닥을 볼 생각을 안 하고 뭘 봅니까? 자기에게 있는, 왜 나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지금 누구한테 행패를 부리는 겁니까? 지금 하나님을 향하여 행패를 부리는 거예요. 

  

근본적인 것, 지금 심장이 뛰는 것,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 파마된 것, 이게 전부 다 누구의 은혜에요? 전부 다 주님께서 괜찮은 미장원 소개해 줘가지고 된 거 아닙니까? 보세요. 사람의 시각으로 선택을 한다고 해도 주께서 눈에 띄도록 만든 그 바구니에서의 선택이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선택할 항목조차에도 끼지 않는데 어떻게 선택이 되겠어요? 어느 정도 주섬주섬 모아 놓아야, 어느 것 할래?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내를 선택해도 반경 40킬로미터 내에서 선택한다는 그런 말이 있잖아요. 배우자 선택 반경 40킬로미터 내. 직장가면 직장동료. 교회가면 교회 교인들. 반경 40킬로미터 내에서 대충 만난다는 겁니다. 요새는 인터넷이 되어서 그 공간개념이 떠났지만.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모든 사고는 항상 하나님이 조절해요. 하나님이 조절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생각나기 때문에. 근데 우리는 이렇게 뒤늦은 비겁한 변명을 해요. “아, 마침 내가 그 생각이 나네.” 나를 집어넣는다고요. 나를. 주님이 떠오르게 했는데 꼭 그걸 자기를 집어넣어요. 이걸 저는 문법적인 습관이라고 합니다. 

  

문법적인 습관이 뭐냐 하면 비가 오는데, 비가 오는 것을 영어로 뭐라고 해요? It's a raining(잇츠 어 레이닝). 비가 오는데 갑자기 It이라는 3인칭을 내놓는다고요. 그냥raining인데, It(잇)이게 있어야 문장이 된다는 겁니다. 문장이. 따져보세요. 이 몸이 그냥, 내가 만약에 밥을 먹는데, 왜 밥을 먹느냐, 근데 내가 먹고 싶어서 밥을 먹는 거예요. 먹고 싶어서 밥을 먹는데 누가 갑자기 들어왔어요. “누구야? 이 시간에 밥 먹는 사람이?” “내가 먹어. 내가!” 갑자기 자기가 먹는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밥을 먹는 것이 아니에요. 밥을 먹게끔 한 감정이 나로 하여금 숟가락 들게 만들었지, 내 신체가 우선이고 자아주체성은 없어요. 자아주체성은 그때그때 신체가 그림자처럼, 꼬리처럼 뒤늦게 생성되는 것이 자아라는 이미지지, 자아라는 것은 없어요. 자아라는 실체가 없어요. 근데 신체가 했는데 우리는 그걸 꼭 뒤에 내가 했다고 하는 것이 버릇처럼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머리카락을 자라게 했는데, 이게 내 머리카락이라는 말을 꼭 집어넣어야 되겠어요? 왜냐하면 우리 신체는 누구 겁니까? 그리스도 왕국에 내 것이라는 것이 있어요? 없어요? 주님 건데, 꼭 우리는 내 것이라는 것을 집어넣어요. 이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세계에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는 겁니다. 나와바리라고 하죠.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서, 거기서 새롭게 현실을 구성을 해버려요. 이것을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네 자로 이야기했죠. 뭐라고 했던가요? 대안현실이라고 했죠. 현실을 내 편리위주로, 내가 납득되는 위주로, 일방적으로 현실을 생각해버립니다. 일방적으로. 좋은 예가 우리교회나 십자가마을에 올렸던 수습선교사라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존에 수습선교사로 가가지고 돌아와서 소감을 적어놓은 것이 있어요. 

  

아마존에 죽기 살기로 주께 충성하는 것을 측정하기 위해서 갔는데, 한 얼마쯤 있다가 와가지고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믿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내가 이성적으로 하는 이것이 얼마나 헛방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아마존에 갔을 때 얼마나 집에 오고 싶었겠어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후딱 왔을 것이 아닙니까? 참, 얼마나 본인이 비겁하다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비겁하다는 것을. 

  

자, 감정 다시 해봅시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사랑과 미움이죠. 사랑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무조건, 무조건이야.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사랑이에요.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것. 그냥 있음에, 불속으로 나방이 뛰어 들어가는 것이 사랑이에요. 스톱을 할 수 있는 자아가 없어요. “이쯤해서 멈춰야지.”라는 자아가 없어요. 절제 이런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사랑은 그냥 빠져 들어가는 거예요. 빠져 들어감으로써 사랑이 되는 거예요. 빠져 들어가면서 멈칫거리면 그건 진짜 사랑을 변경시킨 겁니다. 나를 위한 이익위주로 현실을 또 바꾸는 거예요. 대안현실로. 대체현실로 자꾸 바꾸는 거예요.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구, 저 셋째 아들 진짜 밉다. 저걸 내가 왜 태어나게 만들었는지? 밉다.” 이래서는 부모가 되어서 안 되는 줄 아는데, 미운 걸 어떡해~ 보기만 해도 미운 것을. 만약에 어떤 미운 사람이 있는데 그 미운 사람이 “목사님. 저도 천국 갑니다.”라고 한다면 그 소리 듣는 순간, ‘니가 천국 간다면 나는 지옥 가련다. 아이고, 영원토록 니하고 같이 살아? 미쳤나! 그게 지옥이야 그게. 니가 없는 곳에 가고 싶어. 정말 니 좀 안 봤으면 좋겠다.’ 거기에 대한 영화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밀양이라는 영화잖아요. 밀양. 

  

자기 아들 죽여 놓고 전도연이 전도하려고 교도소에 갔는데, 전도도 하기 전에 지가 먼저 이야기해요. “자매님. 죄송합니다. 제가 예수 믿고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는 사람한테는 전도가 행함이잖아요?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내가 전도해서, 내 말이 먹혀들어 꼬셔야 내가 신자라는 것이 테스트 검증이 되는데, 내가 하기 전에 먼저 믿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자기의 모든 계획이 다 수포로 끝났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거짓이에요? 전도연 본인이 거짓인데, 인간이 근원적인 자율권이 뭐냐 하면 어떤 경우도 자기는 선악과 따먹은 신이기 때문에, 신은 비판받거나 평가대상이 안 돼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정당해요. 정당하기 때문에 김추자 노래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는 노래를 트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반대로 누가 정당하기 때문에? 내가 정당하기 때문에. 

  

악마가 니가 따먹는 날에는 뭐처럼 된다? 하나님처럼 된다. 하나님처럼 어떤 평가나 심판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나는 예수님이 좋아요. 나는 예수님을 믿고 싶어요.”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본래 갖고 있던 악마적인 본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내가 평소에 나를 신으로 여겼던 그것을 예수님까지 거기서 인정을 해줄 때, 그런 예수를 싫어할 이유가 없죠. 평소에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잘한다! 잘한다! 하고 한껏 긍정적인 멘트를 막 날려주니까. 성경이. 성경에서 행함에 대해서 멘트를 날려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떻게 행동을 했는데, “주님이여, 저는 이런 행동을 했습니다.” 이래 하니까 지금 예수님이 하는 말이 사실은 마귀죠. 마귀가 하는 말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어보았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너에 대한 사랑이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행위에 대해서 갑자기, 내 행위에 대해서 정당화하고 싶었는데, 내가 나를 사랑해주고 싶은 그 이상으로, 그러한 사랑으로 또 어떤 분이 내 사랑에 대해서 박수를 쳐주고 동조를 해주니 이런 원군이 어디에 있어요? 더할 나위 없는 후원자를 얻었으니 그 예수를 어찌 사랑하지 않으리요? 

  

그래서 교회에서 긍정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기반으로 해서 시작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기반으로 해서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복음은 어디서부터 합니까? 어리석다는 그런 인간의 시선으로 보기에, 안목에서 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하고 당최 누가 저따위 소리를 믿을 수 있으리요? 어느 누구도 안 믿을 거야? 라는 내용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믿게 된 것은 내 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함으로써 믿는 것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아, 나는 제정신가지고는 저런 복음을 못 믿어!”라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나는 평소에 내가 신이 되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사랑해서 니는 신의 아들이라고 해버리면 여기에 무슨, 이건 로마서 9장 33절에 나오는데요, 여기에 무슨 걸림돌이 있겠습니까? 걸림돌을 확 빼버렸는데요. 걸림돌을 확 빼버린 거예요.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걸림돌이 안 되는 십자가를 집어넣어버린 겁니다. 

  

“십자가 믿나? 죄 많은 당신을 위해서 누가 희생했으면, 희생했다는 감정이입을 해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생각됩니까? 생각돼요?” “예. 생각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엄마라고 생각해보세요. 엄마가 지금 당신을 위해서 피 흘리고 죽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 그 사랑이 어때요?” “아! 너무 좋아요!” “좋아요? 좋습니까? 좀 더, 좀 더, 더더더더...당신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손들고 나오세요. 드디어 십자가 피를 믿었군요. 이제는 보답할 일만 남았습니다.” 결국은 돈 내라는 이야기죠.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 돈 내라는 이야기에요. 어차피 교회는 돈 없으면 유지가 안 되니까. 

  

이 긴긴 이야기의 결국 시발점은 뭐였습니까? 자율권. 그 자율권이 나타난 이유가 어디서 나왔다? 지옥은 반드시 죄진 사람만 간다는 것. 왜? 자기 죄에 대해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면 안 되니까. 죄지은 당사자가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지옥가야 된다고, 이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그게 바로 니들이 아는 전부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죄의 수족관이에요. 수족관. 고기가 어디에서 삽니까? 수족관에 살죠. 고기는 수족관에서 마음껏 자기 수영솜씨를 뽐냅니다. 고기에게 수영이라는 것은 뭘 의미합니까? 행함이죠. 여기 행함에 뭐가 포함됩니까?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이게 포함되겠죠. 신뢰합니다. 의지합니다. 나는 주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내려놓고 또 내려놨습니다. 몽골선교사처럼.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나는 나를 부인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합니다. 전부 다 “나”가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 나왔다? 죄라는 수족관에서 마음껏 수영솜씨를 발휘하는 거예요. 종교적인 수영솜씨를. 

  

다윗이 안 것은 뭐냐 하면 무슨 짓을 해도, 무슨 멘트를 날려도, 수족관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원천적으로 알았어요. 원천적으로. 그러니까 “하나님. 지금 제가 이런 괜찮은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스톱! 스톱! 했는데, 다윗은 성신을 받아가지고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겁니다. 죄 중이라는 것은 뭐냐 하나의 수족관이죠. 

  

그러니까 야곱의 원천은 뭡니까? 야곱의 원천은 사랑이고, 에서의 원천은 미움이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미움이 먼저 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야곱이 나중에 태어나고 에서가 나중에 태어난다는 이 말이죠. 그러면 미움과 사랑이 있고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다면,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미움과 사랑은 하나 될 수 없고 둘이 분리되어 있죠. 분리된 그것을 그대로 반증하듯이 땅에서도 어떻습니까? 분리되는 거예요. 

  

분리됐는데, “처음부터 나는 어느 쪽에 설래.”라는 그런 선택권이 있어요? 없어요? 원천이 주님의 사랑과 미움에 있기 때문에 우리 자체 내에 원천은 없어요. 원천이 없다는 말은 결과물에 불과한 겁니다. 그럼 결과물이, 결과물 자체가 원천을 더듬으면서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없다? 없죠. 왜냐하면 인간이 노는 곳이 이 수족관에서 노니까. 죄 속에서 노니까. 인간이 어떤 것을 하더라도 이 안에, 인간이 수영하면서 팔랑거리며 생기는 물방울 그 모두가 죄의 물방울이에요. 전도, 성경, 예배참석, 기도, 성경공부, 찬양, 강의, 설교, 전부 다 죄라니까요. 

  

분명히 성경에는 번제 드리라고 했고, 소제 드리라고 했고, 화목제 드리라고 했고, 속건제 드리라고 했고, 속죄제 드리라고 했고, 제사 드리라고 했잖아요. 근데 시편 51편에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번제도 아니고 제사도 아니죠. 그럼 번제도 아니고 제사도 아니면 왜 제사 드리라는 명령을 왜 했어요? 이거는 유도한 거예요. 전략이에요. 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니 나름대로 한 번 팔랑거려봐라. 촐랑대보라는 이 말이죠. 시키는 대로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 따라 한 번 해보라 이 말이죠. 한 번 팔랑거리며 뛰어보라 이 말이죠. 

  

그럴 때, 하나님의 택한 백성한테는 그것들이 나로 하여금, 지금 내가 얼마나 죄 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하나의 환경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수족관의 죄를 다 비우고 거기다가 뭐를 채워 넣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채워 넣습니다. 이건 이번 주 우리교회 낮 설교 내용이에요. 예수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사 성도로 하여금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는 겁니다. 

  

의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의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루터가 이것을 몰라가지고 자꾸 소유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묻는 거예요. “루터야! 성도가 의인이야? 죄인이야?” 루터가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죄인이면서 의인이다.”이렇게 책을 읽어대는 거예요. 벌써 질문하는 사람도 잘못됐고 질문 받는 사람도 잘못알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의를 소유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의가 된 채 천국 가는 거예요. 의가 나를 소유하지 내가 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 의를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관계성이라고 하고, 나는 주의 수족관 안에 있는 성도라. 그래서 이걸 가지고 의의 종이라고 해서, 로마서 6장 18절에 보면 성도는 의의 종이 되었느니라. 아까 의의 원천이라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죠. 사랑에는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랑에는 이유가 없어요. 사랑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어떻게? 니가 이렇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는 너를 이유 없이 사랑했느니라. 그걸 자꾸 성립시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약의 아가 아닙니까? 아가. 여자가 싫다는데, 세상에! 초창기 스토커에요. 계속 따라와요. 계속 따라와. 여자가 싫다는데. 이 시커먼 여자야!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나는 시커먼 게 좋아. 하면서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포도원에서 일한다고 햇볕에 탔구나. 그런데 와 나는 그게 땡기지? 매력적이지? 하면서. 얼굴 시커멓게 탄 것 가지고? 어디 귀농했는가? 계속 집착을 하는 거예요. 여자 쪽에서 “이럴 것 같으면 헤어져!”라고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계속 헤어지자, 헤어지자고 했는데도 계속 따라와요.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결혼도 안 했는데 “나의 누이여”라고 해요. 나의 누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가 같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헤어질 관계다? 아니다? 헤어질 관계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의 원천은 우리 쪽에서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 말입니다. 이 사랑 자체에, 아무 이유도 없이 나는 너를 사랑했어야 한다. 사랑에는 뭐가 없다? 이유가 없어요. 사랑에는 이유가 없는 겁니다. 아까 로고스적인, 이성적인 그것이 있다고 했어요? 없다고 했어요? 그게 없어요. 없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런 교리가 나왔느냐? 더 원천적으로 들어가 봐야 해요. 뭐냐 하면 납득을 시킬 때 회원 하나 모집하는 것이 더 가능하기 때문에. 납득을 시킬 때. 고객이 왕이잖아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생산자가 채워줄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뭘 원합니까? 원하는 대로 알려드리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하고 다르죠.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해요. 

  

그런데 교회가 장사를 하려면 뭘 해야 돼요? “내가 당신에게 뭘 해주면 됩니까?”에요. 훈련이 그거잖아요. “잘 돌아보시고 필요한 것 저한테 알려주시면 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 보세요. 처음에 미국이나 독일에 가면 “뭘 도와드릴까요?” “서류가 안 되는데요?” “예. 서류 떼어드릴게요.” “김밥 돼요?” “예. 이번 주 김밥 만듭니다.” “비빔밥은요?” “예. 이번에 비빔밥 합니다.” “외로우시죠? 도와드리겠습니다.” “방 구할 데 있습니까?” “좋은 방 있습니다. 옛날 방이지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들이 고객을 만족시킬 때, 그 사람과 그 사람 사이에는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걸 사자성어로 초코파이라고 합니다. 뭐죠? 정情이죠. 인간은 정으로 살아요. 초코파이 하나 주듯이 정으로 사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 한민족입니다. 교회 크게 부흥됐어요. 그 교회 가면 뭡니까? 전부 다 정이에요. 권사 투표하면 정이고 장로 투표하면 정이고, 정주고 정 받고 사는. 이 외롭고 돈만 있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위로해주죠? 여러분? 교회입니다. 교회가 정을 못 주면 교회는 문 닫아야 돼요.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88.127)17-03-23 23:06 
가락-요한복음13장21절(무능)170321b-이 근호 목사 

  

자, 이번시간에는 26절, 2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한 쪽을 찍어 준 자가 그니라 하시고” 그러니까 이미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팔리는 것이죠. 팔려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주체가 되셔요. 예수님께서 나와서 하시는 말과 행위가, 행위로 인하여 어떤 행위가 나타나요. 예수님께서 주체가 된 행위입니다. 

  

반드시 사탄의 일을 해석하려면 누구를 경유해야 된다? 예수님을 경유해서 사탄의 일을 해석해야 돼요. 그렇게 되면 사탄이 악하다고 하는 것은, 악마는 악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에게만 악한 거죠. 무슨 말이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의 악한 쪽에는 악마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악한 쪽에 있어요. 이게 요한복음 7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2장 24절에 예수님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야붕이라고 해요. 누구 오야붕? 귀신들의 오야붕, 바알세불, 오야붕이죠. 제가 이렇게 하면 “아이구, 목사님. 너무 오버하지마세요.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이 아닙니까?”라고 하는데, 바리새인의 사고방식과 우리 사고방식과 다른 것이 없어요.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먼저 던질게요. 사탄이든 가룟 유다와 바리새인의 차이점은?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죠. 같은 점은 뭐냐 하면 둘 다 예수님을 파는 것에 동조했다는 것이 같은 점인데, 제가 질문을 같은 점을 말한 것이 아니고 차이점을 물어본 거예요. 왜냐하면 바리새인보고 “바리새인아 나를 잡아라.”라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왜 가룟 유다를 보고 했는가? 처음, 하나의 발화점이에요. 발화점. 

  

왜 발화점 역할을, 왜 열 두 제자 속에서 한 제자가 그 발화점 역할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그것은 열 두 제자를 누가 뽑았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았죠. 그러면 예수님이 선택하지 않으면 열 두 제자라는 그러한 실체가 등장하지 않아요.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든, 베드로든, 본인이 알아서 제자 시켜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택하여서, 선택해서 열 두 제자를 만들어놓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그들이 있는 그 존재와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이거는 그 원인은 어디까지 소급되어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까지 소급되어야 해요. 그러면 바리새인과 가룟 유다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바리새인 집단 안에다가 이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원질, 또는 원형을 가룟 유다로 집어넣어서 이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확정 시켜버립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한테 뭐가 들어갔습니까? “가룟 유다야 니가 팔아라.”라고 하면 가룟 유다는 절대로 예수님을 팔자가 아니에요. 누가 들어와야 돼요. 누가 들어옵니까? 사탄이 가룟 유다에게로 가서 들어가 버리면, 바리새인 너희 애비는 뭐다? 악마다, 라는 말이 드디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그러면 마귀의 정의를 우리가 만약에 “지금 사탄이 존재한다. 사탄이 있다. 저건 사탄이야.”한다면 이게 성립이 될까요? 안 될까요? 이건 성립이 안 돼요. 이건 완전히 오해입니다. 이런 오해가 만화책에서 사탄의 얼굴을 어떻게 만들었어요? 초록색이잖아요. 귀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당나귀고. 그리고 등짝에 있는 날개는 무슨 날개입니까? 박쥐죠. 그걸 하이브리드라고 합니다. 하이브리드. 온갖 잡동사니 피조물들은 다 끌어 모아서 끄집어냈으니까. 

  

그러면 결국 그것을 마귀하고 할 수 있습니까? 눈이 째지기는 얼마나 째졌는데요. 꼭 악동뮤지션 같아요. 갑자기 악동뮤지션을 왜 이야기했느냐 하면, 어제 엔진오일을 넣으려고 갔는데, 기다리면서 TV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 악동뮤지션이 나와 가지고, 옆에 어떤 부부가 왔는데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 남자를 보고. 세상에 그렇게 못 생긴 사람 처음 봤다고. 저게 어떻게 TV에 나왔느냐고. 그러니까 아내라는 분이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해요. 

  

방향이 이상한 방향으로 갔는데, 악마를 가지고 박쥐에다가 얼굴은 녹색으로 하고 귀는 삐죽하게 하고 눈은 째져가지고, 완전히 찢어져가지고, 이렇게 해놓고 이것이 악마라는 그 발상, 원래 그런 발상을 해서 그런 것이 악마일까? 하는 그 잠재성이 누구 안에 들어있습니까? 이미 인간한테 들어있죠. 그러니까 인간은 눈 째진 것 싫어하고 박쥐 싫어하고 뱀 싫어하고...싫어하죠. 그 싫어한다는 말은 뭡니까? 그런 것이 들어오면 나는 배격하고 내쫓고 싶다는 그 말 아닙니까? 

  

결국 예수님이 누구에 의해서 쫓겨났어요? 바리새인에 의해서 쫓겨났잖아요. 그러면 이사야 53장의 말씀 그대로에요.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그는 흠모할 어떤 면도 보이지 않는 분으로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모습을 보낼 때 인간들 안에 내장되어 있는, 장착되어 있는 악마의 이미지를 견주어서, 거기에 딱 맞춰서 예수님을 보내버린 거예요. 못 믿도록. 못 알아보도록. 

  

그럼 예수님의 왕국은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왕국의 씨앗과 그 출발은 어디에서 됩니까? 바로 마귀 속에서 시작돼요. 천국은 마귀 속에서. 선악과 따먹어야 될 이유를 알겠죠.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한 이유를 알겠죠. 추방된 저주의 땅에서 축복이 나오는 겁니다. 그냥 따로 축복이라는 것이 없어요. 저주의 땅에서 축복이 나오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주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언약은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은 어떠한 성공의 건더기가 일체 없는 거예요. 철저하게 실패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가능성과 가망성은 전부 다 완전 없애야 돼요. 모든 가능성과 가망성을. 

  

어떤 사람이 금요철야를 했다. 기도를 한다. 그 기도내용을 커닝하듯이 한 번 잘 들어보세요. “철저하게 망가지게 해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한 것 봤습니까?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그렇게 기도하던가요? “순복음 교회 이거 불타게 해주시옵소서. 누전되어 홀라당 다 타게 해주시옵시고, 교인 한 명도 없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그렇게 기도합니까? 그렇게 기도 안 하죠. 뭐라고 기도합니까? 하늘나라가 확장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죠. 그런데 누구 중심으로? 순복음 중심으로. 독일에도 주님이 있게 해주시고, 일본에도 있게 해주시고, 계속 번져나가는 거예요. 

  

근데 그것이 뭡니까? 그게 바로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너희들은 너희 제자삼기 위해서 땅 끝까지 뭐 했다? 전도한 거예요. 그 전도할 때, 말이 전도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그런데 그 고생이 심하면 심할수록 어떻습니까?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고난 받는 것을 즐기겠죠. 그게 더 쾌락으로 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라캉은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해요. 이게 희열입니다. 희열. 매조키즘Masochism적인 얻어맞는데서 오는 쾌감. 이걸 에리히 프롬도 이야기했고요. 그 반대로 때림으로써 쾌락을 느끼는 것, 새디즘Sadism이죠. 전두환 전 대통령 같은, 그리고 가부장적인 남편들. 여자하고 명태는 사흘마다 줘 패야 가정이 된다는 거예요.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거예요. 여자의 임무는 남자를 기 세워주는 거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하면 그 교회 장로들이 아멘하지 않아요. 권사들이 아멘 합니다. 왜 아멘 하는 줄 알아요? 저 못난 남자들을 내가 얼마나 하나님처럼 받들어서 장로까지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자긍심, 자존감이 대단하죠. 알아서 기어줄 테니까 니는 내 여망에 부흥해라. 이 말입니다. 자꾸 왜 딴 데로 새는지 모르겠네요. 

  

바리새인이 뭐하고 가장 가까이 접촉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살해와 십자가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 중간에 사두개인 서기관들 외에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왜냐? 가장 가까이서 봤기 때문에. 요새 같으면 돋보기 들고 예수님을 봤을 걸요. 또 보는 사람이 있다면 곁가지로서 로마군인들, 경호원, 로마병사들이죠. 이 사람들은 두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어떻게 봤습니까? 자세히도 봤어요. 가위 바위 보, 묵찌빠해가지고 이긴 사람이 뭘 갖는다? 옷을 갖는 거예요. 그리고 딱 쳐다보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진짜 선지자 같으면 니 뺨을 누가 때리는지 알아맞혀보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 정도로 인간은 뭡니까? 봄으로써 지식이 생기죠. 그리고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없는 것은 지식이 안 돼요. 지식이 있다는 것은 이 지구상 어디에 있어야 돼요. 

  

그래서 현대철학에서는 귀신이라든지 삼위일체라든지를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과학시대에서는 직접 뭘 봐야 돼요. 원자, 분자, 그런 것들은 안 보이지만, 지금 원자 사진까지 찍어놨어요. 원자 사진까지. 안 보이지만 그게 딱 증명이 된다 이 말이죠. 탄소화학물의 분자구조가 안보이지만 분석하기 위해서 정확하게 끄집어내줘야 이걸 잘라서 각종 플라스틱이라든지 화학제품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게 과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인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관찰이라고 해요. 관찰. 이게 관찰이거든요. 

  

예수님에 대해서 누가 정확하게 관찰했습니까? 누가 “~카더라”는 말을 듣지 마세요. 그것은 거짓뉴스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거짓뉴스가 아닙니다. 직접 만났어요. 직접 만났는데 믿을만하다? 믿을만하지 않다? 답변해보세요. 직접 눈으로 봤는데, 믿을만하다? 믿을만하지 않다? 쓸데없는 거였어요. 예수는 쓸데없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안 보니까 자꾸 상상하는 거예요. 믿을만하다고. 자꾸 상상하는데, 상상하지 말고 직접 예수를 만나보세요. 믿을만한지? 봄으로써 믿지 못하는 거예요. 안 보니까 지 마음대로 상상해가지고 “믿습니다.”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성에 안차서 꿈에 또 봤대. 꿈에 봤는데 인상이 어떻게 생겼는가 보니까 미술관에 예수님 그린 것처럼 백인처럼 생겼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초상화는 시대에 따라서, 화가에 따라서 전부 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모델이 다르기 때문에 다 달라요. 모델이 다르기 때문에. 

  

제가 옛날에 신학교총신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예수님을 비디오로 찍어도 그거는 성경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니까 화를 막 내는 거예요. 직접 봤는데 왜 못 믿느냐는 거예요. 예수님을 직접 봤으면 그걸 믿지, 왜 못 믿느냐는 거예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봤죠? 믿었습니까? 안 믿었죠. 안 믿었습니다. 못 믿어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인간의 주체적인 어떤 행위도 거부합니다. 하늘나라는 요만큼도 인간의 협조나 도움이나 행함이 거기에 섞이면 안 돼요. 섞이면 큰일 납니다. 쪼끔이라도 일체 용납이 안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니 생각으로는 예수님편이지만 사실은 예수님편이 아니고,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 쪽에 속했다는 것을 계속해서 성경을 통해서 언급해주시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지. 이게 참 고마운 쪽이에요. 결국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이 잡힐 때에 전부 다 배반했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다던 세 명의 마리아. 그 마리아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따라간 것이 아니에요. 정 때문이에요. 정 때문에. 불쌍해서. 시신이라도 거두어줘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불쌍해서 한 거예요.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말을 원천적으로 믿을 수가 없어요. 왜? 그 원천이 열 두 지파고, 열 두 제자의 대표자가 가룟 유다가 대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가 열 두 제자를 대표합니다. 가룟 유다가. 어느 누구도 가룟 유다를 욕할 사람이 없어요. “이 배신자여!”라고 이렇게 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베드로가 나서가지고 자기 딴에 자기 할 일을 한다고 하면서 했지만, 주님께서는 “니도 마찬가지야. 칼을 거두어라. 칼을 쓴 자는 칼로 망한다.” 예수님 죽이겠다고 칼을 빼든 인간이나 예수님한테 백날 있어봐야 예수님 안 믿겠다고 팔아먹은 사탄이 들어간 가룟 유다나. 차이점이 있다면 이게 사탄이 주모자고 그 다음에는 다 졸개죠. 그게 차이점이에요. 

  

바리새인과 가룟 유다의 차이점은, 가룟 유다는 사탄을 짊어지고 현장에 나타났고 바리새인은 가룟 유다의 말이 시발점이 되어가지고 그걸 동조했고. 결국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정해보겠습니다. 수상한 동질감. 바리새인과 가룟 유다가 뭔가 수상한 동질의식을 갖고 있어요. 납득이 되는 거예요. 납득이.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납득이 돼요. 예수 믿었으면 이제는 예수 믿는 티를 내라는 것이 납득이 돼요. 납득이 되면서 진짜 좀 아는 사람 같으면 예수 믿고 난 뒤에 구원은 받았는데, 행해라고 했는데....., 

  

그리 이야기하잖아요. 로이드 존스 강해에 보면 에베소서 1장, 2장은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서 믿으라고 준 것이고, 에베소서 3장, 4장부터는 “그러므로”가 왜 나왔느냐, “그러므로”부터는 이렇게 믿었으니까 이제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일을 하도록 성령께서 너희를 도와줄 테니까 성령 안에서 너희들은 이 말씀들을 행할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해서 주신 것이다. 이게 바로 로이드 존스의 신학입니다. 유명한 마틴 로이드 존스. 거기에 매료되어서 최초로 강해설교한 사람이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고요. 강해설교가 대히트를 쳤죠. 한국적 강해설교. 영국식은 로이드 존스. 한국식 강해설교는 박영선 목사고. 

  

그러한 사고방식에 대해서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언급을 했습니다. 그걸 무슨 철학이라고 했습니까? 스토아철학. 그 스토아철학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사도행전 17장에서 나오죠. 사도바울이 아덴(아테네)에서 논쟁하면서 했잖아요. 논쟁할 때, 사도바울은 복음을 이야기하고 저쪽에서는 스토아, 에피쿠로스를 했잖아요.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뭐냐 하면 신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한테 맡기기 때문에 우리가 하기 나름대로 신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게 스토아철학이에요.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고 신의 백성이라는 티를 내는 그것. 그게 신의 형상이다. 이게 플라톤 철학 아닙니까? 

  

플라톤 철학이 뭐냐 하면 원형은 따로 있고 그 형상이 우리한테 있는 거예요. 그걸 그대로 받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고, 그것을 성경의 내용과 접목시킨, 접목도 안 되는데 접목시킨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에요. 그 중간에 접목시킨 사람이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입니다. <신국>을 쓴 사람. 그러니까 교회사나 모든 신학자들이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아니고 유실론적 철학을 전한 사람이에요. 철학을. 

  

왜 철학을 전했는가? 철학을 전해야 교인들이 납득이 돼요. 납득이 되면 전 국민의 신자화를 조기에 달성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수용하고 납득이 되면 신자가 되기 때문에.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 아니에요. 주님하고 우리 사이는 동질감이 있으면 안 되고 뭐다? 반대로 이질감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수상한 동질감, 제목이 너무 기네요. 수상한은 지우고 동질감으로 하든지, 안 그러면 이질감으로 하든지, 이건 후보감이고 집에 가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음으로 말미암아 나머지기 열 한 제자는 아무런 힘도 못써요. 왜냐하면 중심이 저쪽으로 쏠렸기 때문에, 저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내빼기 마련입니다. 열 두 제자의 구심점이 베드로가 아니고 실제로는 사탄이 열 두 제자의 구심점으로 이끌어 온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사탄은 인간의 적수, 적이 아닙니다. 악마는 인간의 적이 아니에요. 진짜 적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적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악마만이 예수님이 누군 줄 아는 유일한 존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목사님 성도가 악마를 악마로 아는 것은 우리의 어떤 자질이나 신앙생활 하는 능력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면, 악마를 알 수가 있어요. 악마의 특징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귀 올라가고 눈 쭉 째지고 얼굴색이 녹색이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이 악마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그걸 극구 반대하는 것이 악마입니다. 그래서 악마를 알려면 뭐만 증거 하면 돼요?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 돼요. 십자가 복음만. 

  

그러면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 악마로 드러나는데, 왜 그토록 악마는 십자가 복음을 싫어하는 걸까요? 십자가 복음을 싫어하는 이유가 뭘 분명히 하냐면 단절입니다. 단절, 끊어짐입니다. 오늘 강의 제목은 끊어짐입니다. 지금 온갖 것 신경을 다 써요. 끊어졌다는 말은 그냥 창세기 3장을 되풀이하는 것뿐이에요. 생명나무에서 나가라! 생명나무에서 끊어지고. 나가라는 것이 얼마나 확고하고 적극적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화염검을 든 불천사가 수시로 두루 도는 거예요. 얼마나 완벽하게 차단시키는 겁니까? 검찰청 12층을 완전히 블라인드로 쳐서 기자들이 먼데서 망원경으로 못 찍도록. 우병우 찍듯이 못 찍도록 블라인드로 다 하고 밑에는 경호원들이 다 하고 한 층을 통째로 다 비워가지고 일체 누가 해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뭘 보호합니까? 생명나무를 보호하죠.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인간이 중요합니까? 생명나무가 중요합니까? 생명나무가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데 생명나무 지키기 위해서 사랑하는 거예요. 그 생명나무가 누구라 했습니까? 요한복음 16장 4절에서 “내가 곧 생명이라” 예수님이 생명나무에요. 창세전부터 아버지는 누구만 생각합니까? 아들이신 예수님 생각만 하는 거예요. 예수님 생각만. 

  

제가 주일날 했잖아요. 아들은 두 명이 될 수가 없다고. 가인과 아벨 중에서 단 한 명이라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장 10절에. 모든 것은 그리스도 중심이에요. 절대로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은 인간이 상상한 거예요. 바리새인이 상상하듯이. 절대로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에요. 신학교 교수 가운데 이걸 아는 교수를 제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총신 나오고 난 뒤에 권성수 교수라는 자가 신학교 교수했거든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 보면 아들이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 라고 했으니까 역시 삼위일체 서열이 맞다는 거예요. 성부가 제일 크고, 그 다음에 성자가 중간에 있고, 그 다음에 성령이 제일 바닥에 있고. 이렇게 서열이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반대한 사람이 차인배 교수에요. 차인배 교수가 삼위일체는 절대로 서열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 같이 동등하게 영광 받아야 되고 어떤 서열이 없다. 시어머니는 세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총신에서 이단이라고 나가라고 해서 쫓겨났습니다. 

  

이렇게 서열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부한테 제일 우선권을 주는 것은, 사실은 이단에 속한 거예요. 나라를 바친다고 해서 높다는 생각은 우리 인간들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 어느 쪽이 영광 되느냐가 중요하지, 누가 높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의 영광은 오직 아들의 이름을 높임으로써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서열이라고 하는 것, 삼위일체 자체가 인간들이 온 국민을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이성적으로 만들어낸 거예요. “이 문장 이해합니까?” “이해합니다.” “아이고, 세례 받으세요.” 얼마나 간편하지 몰라요. “3=1, 이걸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왜, 3=1이에요? 왜, 1하고 3하고 이꼬르(=)가 됩니까?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이거는. 이거 믿으면 천국 갑니까? 복음이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인다고 해서 막 이렇게 어리석은 것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이게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에요? 아니죠. 이거는 숫자로 장난치는 거죠. 

  

마귀가 십자가를 싫어하는 이유가 단절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십자가 단절, 끊어짐을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서 뭘 집어넣느냐 하면 십자가 플러스(+) 부활을 집어넣고는 십자가 지나고 난 뒤에 부활이라는 거예요. 부활. 종각 다음에 시청, 시청 다음에 서울역이죠. 그러니까 서울역이 부활이라면 시청은 십자가고, 종각은 크리스마스 주님의 출생이고. 지나온 것을 왜 믿느냐는 겁니다. 완료된 것, 부활을 믿어야지. 부활의 새 생명 운동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이제는 부활의 새 생명 운동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 성령이 역사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는, 이제는 율법을 지켜서 주께 영광 돌릴 일만 남아있다는 거예요. 이게 영광이 아니고, 이게 복음이 아니에요. 부활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가 퍼진 것이 부활이에요. 십자가가 퍼진 게. 부활이라는 따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부활의 실체는 못 박음의 반복이에요. 못 박힌 당사자의 반복이라니까요. 

  

오늘 참 어렵죠? 제가 오후예배 때 했던 질문을 여러분에게 해보겠습니다. 질문 그대로 해볼게요. 혹시 삼촌 있습니까? 삼촌? “예.” 삼촌이 부흥됩니까? 삼촌이 부흥돼요? “아니요.” 안 되죠. 삼촌이면 그냥 삼촌이지, 뭐 삼촌이 부흥이 됩니까? 삼촌하고 이게 안 맞죠. 교회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거예요. 삼촌은 삼촌 몸이죠. 삼촌 몸이 부흥됩니까? 안 되잖아요. 그리스도 몸이 부흥됩니까? 안 되죠. 삼촌이 어려우면 그럼 이모라고 할까요? 

  

무슨 교회에 부흥이 있어요? 그런 개념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어요. 두 세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그게 교회고, 그게 교회입니다. 어디 가게업소들입니까? 왜 그래요? 무슨 부흥이라는 것이 있어요? 교회 부흥이라는 것은 없어요. 하박국에 나오는 그 부흥이라는 말은 3년 뒤에 심판하겠다는 거예요. 3년 만에 약속대로 심판이 온다는 거예요. 심판.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홍두깨 알아요? 홍두깨? 홍준표 말고 홍두깨. 밀가루 미는 방망이. 홍두깨 아시죠? 쫙 밀면 동그란 것이 어떻게 돼요? 쫙 퍼지죠. 그게 부활이에요. 부활. 단절의 유비쿼터스. 단절의 우발적인 사건화.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요구한다고 보여주지 않고, 제자들이 예상 못할 때 언뜻언뜻 나타나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났죠. 문을 닫고 무섭게 벌벌 떨고 있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갑자기 문 열고 들어왔습니까? 띠디디딕띠디딕~♬ 비번 누르고 문 열고 들어왔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갑자기 문 안으로 들어왔죠. 예수님이 들어와 가지고 “평안하냐?”라고 이야기하시고. “우리는 봤다.”고 하니까 도마가 하는 말이 똑똑하죠. “나는 보고 믿겠다.”라고 하죠. 주님이 도마에게 보여줬죠. 얼굴보고 믿었어요? 뭘 보고 믿었어요? 단절의 증거. 우리가 죽였다는 증거. 바로 우리가 죽인 분이 살아났다는 그 증거. 그리고 내가 미워서 죽인 것이 아니고 태생이, 예수님을 못 믿는 그 태생이 죽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뭡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일방적인 예수님의 자비로움이고, 자기 선택이고, 자기 결정입니다. 구원이라는 게. 그게 긍휼이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을 강퍅케 하심에 가두어 두심은 오직 뭐로만 구원받는다? 긍휼로만 구원받는다. 이게 아까 로마서 9장에서 본 바로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을 강퍅케 하심에 갇히게 한 것은 오직 긍휼을 나타내심이라는 거예요. 

  

엘리야가 착각해가지고 “나만 남았습니다.” 나만 남았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니만 남은 것이 아니고 칠천 명이 남아있다고 한 거예요. 그리고 그 남은 자가 뭐냐 하면 자기 행함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라고 했어요. 은혜로 남은 자.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 이야기가 9장에서 11장까지 연속으로 나오는 건데요. 

  

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럼 은혜로 남은 것을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이래 나온다면 그건 애초부터 믿는 자가 아니죠. 자기 쪽에서 구원받고 싶어서 계속 성경으로 다가서니까, 다가선다는 말은 뭐가 없다? 다가옴이 없으니까 나라도 답답해서 성경을 파고 믿어야하는 거예요. 

  

그래서 답답해서 이 성경 파고 외국 갔다 온 사람들을 신학교 교수, 박사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박사들이 믿음이 하나도 없어요. 그 사람들 학위 따고 취직하러 온 사람들이에요. 진짜 믿는 사람들 같으면요, 신학교에서 쫓겨나죠. 신학교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신학교는 신학교라는 자본금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에요. 신학교 면허증 팔아먹고 자기는 부동산 세운 것하고 똑같아요. 사리 채우는 것하고 똑같아요. 

  

그러면 거기에 취직한 교수들은 뭐해야 합니까? 학교를 다른 신학교보다 더 키워서 자금을 많이, 돈을 많이 벌게 해야 됩니다. 그거하고 천국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신학교 교수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아마추어들이에요. 아마추어들. 제가 이 이야기를 그때, 개혁주의 발표 할 때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아마추어들이라고. 지들은 프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 사탄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사탄이 분명히 예수님을 경유하면 사탄이 무능해져요? 유능해져요? 사탄은 무능해집니다. 그런데 사탄은 주님과의 관계를 감추잖아요. 왜? 어차피 아담이 자기에게 속해 있으면 아담의 자식들도 자기한테 포함되어 있으니까. 무능을 감추면 뭐가 되죠? 뭐만 있어요? 유능만 있죠. 유능은 진화를 기대할 수 있어요. 진화를. 

  

진화라는 말은 다른 말로 발전입니다. 원래 진화라는 뜻이 우리가 아는 그러한 상식적인 진화가 아니고, 이거는 변화에요. 변화라는 뜻이에요. 유능하다, 라는 뜻은 어디까지 유능하냐? 계속해서 유능한 거예요. 발전가능성이에요. 발전가능성. 유능한 것은 발전가능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발전가능성이 오늘날 합리적인 세계 아닙니까? 이 인간세계 아닙니까? 우리가 잠시 성경공부 하는 시간 말고, 그 외에 모든 시간이 뭐냐, 유능한 나는 발전가능성을 내다보면서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낸다. 이거잖아요. 하면 된다. 지금하면 미래에 뭐가 된다는 거예요. 시간의식을 갖고 있잖아요. 묵시적이 아니고 시간 안에 갇혀있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하게 되면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속여 온 거예요. 사탄은 거짓말쟁이니까. 사탄이 거짓말 한다고 3곱하기 5는 14다.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3곱하기 5는 15다. 그게 진실이라는 거예요. 진실. ‘실’자가 들어가니까 좀 그런데 순실이 아니고 진실. 그게 진리라는 거예요. 3곱하기 5가 15라는 거예요. 14도 아니고 16도 아니고 15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합니까? “3곱하기 5가 15라는 것을 알면 천국 가나?” 이렇게 물어야 해요. 그게 천국 갑니까? 영생 줍니까? 하늘나라 영생을 시험 칠 때, 시험문제는 3☓5=☐ 이런 문제 주고 맞추면 천국 갑니까? 천국의 시험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단절을 인정하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단절. 아무리 애를 쓰고 천국을 기대해도 주께서는 그것으로 천국 넣어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와야 되는데, 그 단절을 가지고 오는 거예요. 왜? 단절을 가지고 와야 하느냐? 단절을 가지고 와야 우리가 단절을 싫어하는 사탄의 본모습이 십자가 앞에서 확연하게 다 노출되고 폭로당하기 때문에. 상한 심령이 되는 거예요. “내가 천국가려고 이런 짓까지 해봤습니다.”라는 그 죄를 드러내려고 하는 거예요. 

  

천국가려고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하고, 멀리까지 못 가서 강의 동영상 남기고, 헌금도 하고,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도 하고, 이런 악마 짓을 했다는 것을 폭로시키는 겁니다. 그럼 당신이 그게 악마 짓이라는 것을 알면 될 게 아니냐? 하는데, 이게 바로 로고스와 미토스의 차이점이에요. 안다고 안 하게 되면 자기 욕망을 억누르죠. 욕망을 억누르게 되면 이게 물침대가 돼요. 

  

우리 집에는 물침대가 없는데, 제가 예상을 해봤어요. 물침대 한쪽을 누르면 그 누른 쪽 물이 그냥 눌려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샙니까? 반대쪽으로 새겠죠. 인간의 욕망은 반드시 울렁거리게 되어 있어요. 참으면 참을수록, 이게 한 번 터지면 진짜 매트리스 다 찢어집니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지. 온유하고 화평해야 돼. 온유하고 화평해야 돼...에라! 더는 못 참겠다. 갑자기 저 인간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나오죠. 

  

10년 동안 쌓아놓은 마일리지가 한방으로 다 복福이 새겨진 보자기가 찢어져가지고 육의 열매로 다 전환되어 쏟아져 나옵니다. 참으라고 했으니까 참아야 되고, 절제를 하라고 했으니까 절제를 해야 되고, 마지막 때일수록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했으니까 선한 열매를 맺어야 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까 원수를 사랑해야 되고, 남편 사랑하기를 주님한테 하듯 받들어야 되고, 아내 사랑하기를 목숨을 바쳐서 하라고 했으니까 해야 되고, 계속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참아야 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고 하니까 실질적으로 경건해야 된다는 것까지 나오고, 온갖 수족관속에서 물방울을 다 튀게 하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누가 잘 하는 줄 알아요? 말씀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바리새인들이죠.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고 했으니까, 바리새인들이 거기에 대해 완전히 노하우를 갖고 있어요. 세칙에다 부칙까지 만들어서 철저에 철저를 기하는 겁니다. 그 바리새인들의 후예들이 누구냐 하면 개혁주의신학자들입니다. 

  

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신학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꼭 마술사가 타이거마스크 쓰고 마술비밀이야기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개혁주의 이론은 이겁니다. 개혁자들, 사실은 투톱인데, 루터와 칼빈을 투톱으로 세워놓고, 또 유식한 사람은 칼뱅이라고 하는데, 루터와 칼빈에 의해 나온 것에서 진리를 끄집어낸다고요. 끄집어내는데, 루터는 십자가복음을 이야기했고, 칼빈은 이상적인 교회조직을 만드는 거예요. 업소를 만드는 거예요. 밤업소, 조직을 만든 거예요. 

  

내용은 루터의 복음으로 채우고, 그 역사적 실체성, 구체화는 칼빈의 교회조직을 따라서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시대가 또 바뀝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시대가 계속 바뀌니까. 상황이 바뀌니까 상황 따라서 진리도 바뀌겠죠. 그러면 루터이야기 한 것 중에서, 또는 칼빈이야기 한 것 중에서, 그 시대에 안 맞는 것은 여기서 추려내요. 추려내면 뭐만 남겠습니까?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남아있어야 될 엑기스는 남겠죠. 그 엑기스를 그 다음부터는 17세기 이후에 더 건집니다. 

  

그러니까 루터, 칼빈이 생각했던, 그 시대에 합당했던 엑기스가 시대가 바뀌면 구닥다리 같은 것, 아직까지 더 시대를 안 살아봐서 칼빈, 루터가 몰랐던 그것, 그런 것들은 빼내고. 이거는 누가 봐도 루터나 칼빈이라고 하는 진짜인 것들만 골라 골라서 따로 모아서 만듭니다. 그래서 독일에 경건주의라는 것이 발생돼요. 해놓고, 근데 그게 17세기니까 18세기에 들어가면 또 그 시대에 주변 철학적인 상황이나 정치적 상황이 바뀌겠죠. 그러면 17세기에는 맞는데 18세기에는 안 맞는 것이 있잖아요. 

  

그럼 18세기에 맞도록 엑기스는 그대로 살리고 나머지기는 그 시대에 적합하게 새롭게 만드는 것. 이 신학이 수레바퀴처럼 흘러가는 이것이 전통을 존중하는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을 이렇게 봤으면 개혁주의 신학의 끝은 있어요? 없어요? 없죠. 22세기 사람들은 “무식한 21세기 사람들아! 이것도 모르고 말이야!” 이렇게 나올 수가 있죠. 그럼 어떻게 됩니까? 점점 더...점점이 되죠. 

  

그럼 너는 배우고 확실한 것을 가르치라고 했는데, 이게 문이 다 열려버렸는데, 이게 미완성인데 구원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죠. “루터, 칼빈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수업 끝.” 이래되는 거죠. 목사가 설교할 때, “목사님 그거 맞습니까?” 우리 정통적인, 정통이라는 말은 이단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정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어느 교회에 가도 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어느 교회에 가도 다 가르치는 것이 그게 진리입니까? 

  

진짜 진리라면 성령께서 지금도 우발적으로 사건으로 주시는 단절이에요. 단절. 어떤 행함도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는 것.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고 했죠. 단절성이에요. 단절성.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그럼 깨닫지 못하는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왜 설교했습니까? 지 마음대로 설교했습니까? 거기에 보니까 성령이 임해서. 그러니까 성령이 임해서 전하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죠. 그때 십자가 사건은 이미 지나갔어요. 그때는 15년이 넘었어요. 근데 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을까요? 우리 같으면 부활이 보이다고 할 텐데. 부활이. 근데 부활의 실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어찌하든지 십자가에 참여하므로, 그 다음에 부활에 이른다는 거예요. 지금 부활을 믿는 것이 부활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가야 해요? 지금 주어진 단절이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 단절이해는 성령세례가 아니면 이해가 안 돼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된다고요. 

  

“어떻게 아무것도 안 했는데 구원받아요?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그게 그 일이에요. 그 일. 인간은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뭐든지 성경 보면 지가 착실한 것을 티내려고 뭔가 해요. 이왕이면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마태복음 5장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니가 선한 행실을 해서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라. 등불을 덮어두는 것이 아니고 높이 두는 것처럼 너희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되어 있잖아요. 있죠? 기억나십니까? 

  

그걸 볼 때,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해요? 제가 강의 끝내면서 다시 복습하는 식으로 하는데, 두 가지가 있죠. 한쪽은 그 말씀을 듣고 내 쪽에서 다가가는 것이고, 한쪽은 그것이 우리한테 다가오게 되면, 그 착한행실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주님이 주체가 된 행실이에요. 주님 때문에 내가 뭘 해도 이거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이런 사태, 이런 일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겁니다. 

  

자, 끝으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소경이 눈 떴잖아요? 그렇죠? 근데 소경이 아예 처음부터 소경이 아니었으면 더 좋은 것이 아니겠어요? 어떻습니까? 병 주고 약주는 것이 좋아요? 아니면 아예 병이 안 나는 것이 좋아요? 병이 안 나는 것이 좋죠. 그럼 주님께서 가룟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이라는 것을 아시는 분이,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고 불쌍하다면 처음부터 소경이 되게 하지 말아야죠. 

  

근데 소경은 자기 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왕국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그리스도의 것이 돼요. 다만 그걸 자기는 몰랐죠. 내 몸이 내 몸인 줄 알았죠. 그런 경우가 성경에 굉장히 많습니다. 모든 병 고침이 다 그런 거잖아요. 열 명의 문둥병자가 왔는데 주께서 불쌍해서 다 고쳐줬습니다. 열 명이 있는데 고침 받았잖아요. 고침 받았으니까 자기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잖아요. 그래서 더 이상 예수님을 볼 일이 없죠. 다 가야잖아요. 다 가는 것이 정상이에요. 가는 것이. 가는 것이 우리라니까요. 

  

얻을 것 얻었으니까 가는 것이 정상인데, 가다가 한 사람이 주님한테 백back해서 왜 돌아옵니까? 주께서는 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문둥병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에요. “나는 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러 왔다.” 죄를 사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한 명이 돌아왔다는 말은, “바로 제가 죄인 맞습니다.” 하는 것. 그러니까 이거는 예수님이 불러주셔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활용한 거죠. 

  

문둥병 걸리도록 활용해서, 주님의 뜻에 의해서 죄인 되게 했고, 주님의 뜻에 의해서 그 죄와 긍휼을 결합시킨 거예요. 십자가 피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 죄인으로 만들었고, 그 십자가로 죄를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잘났다가 아니라 십자가만 더 높일 수 있는 활용도가 생기는 겁니다. 

  

이 계획이 바로 사랑이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 원초적인 사랑이, 그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사랑으로써 이 땅에 죄 속에 같이 뛰어들어서 그 죄에 대해서 죽으신 거예요. 게임오버에요. 끝난 거예요. 근데 아버지가 거기서 살려낼 줄이야! 그래서 마귀는 그 십자가를 우회하거나 삭제하거나 타넘거나 덮어쓰기 하거나 해서 지나간 일은 두 번 다시 생각하지 마시고 앞을 내다봐야지, 라고 합니다. 

  

이게 앞을 내다보는 거잖아요. 자기의 진화, 발전. 그리고 천국에 접근한다. 앞을 내다보면 이게 긍정적 사고방식, 마인드 아닙니까? “언제까지 십자가 할래?”라는 그런 핀잔을 많이 듣잖아요. 그런 핀잔을. “십자가는 루터신학이고 칼빈도 있는데 우리는 왜 칼빈을 놓치고 있느냐?” 이러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구체화시켜서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하늘나라를 확장시켜야지. 그걸 왜 안 해?” 이렇게 하거든요. 

  

지금 전도의 주체가 누굽니까? 인간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서 전도하고 있잖아요. 누가 방해해요? 업소(교회)가 방해해요. 업소가. 자기노후대책 생각하는 그 업소가. 바로 그런 암담한 현실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주님께서 만들었습니다. 누굴 보내서? 사탄을 보내서. 그래서 사탄은 참, 착실하게 주의 일을 하는 무능한 자입니다. 무능한 자. 

  

그래서 무능한 자니까 우리가 무서워하자? 무서워하지 말자? 허수아비를 왜 무서워합니까? 김정일 사진보고 절해서는 안 되듯이, 사진 그거는 무능하잖아요. 그처럼 사탄은 주님이 시키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탄을 예수님이라고 착각하고, 예수님을 사탄이라고 착각했지만 어차피 이것이 우리의 본질인 것을 고백합니다. 그냥 놔두면 사탄의 종인데, 성령이 찾아오셔서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주시니, 우리는 이 바뀐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