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강-YouTube강의(관찰의 자리)170404-이 근호 목사
제184강, 제목은 ‘관찰의 자리’입니다. 관찰하면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과학입니다. 과학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옛날에 중세 때 그 위 지도자나 영적 무당이나 샤머니즘이나 또는 그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집단적으로 훈계하고 양육하고 가르치는 대로 그냥 따라가게 되면 그 사회가 안정된다. 그 정도 그들 시대에서 과학이라는 것이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미 진리라는 체제가 확고하게 돼있기 때문에 가정이 잘되고 나라가 잘되고 사회가 잘되기 위해서는 따지지 말고 요모조모 의심하지 말고 평화로운 이 질서체제를 수용하면서 그냥 평온하게 평화롭게 한 평생 살다 가면 된다. 그런 시대가 과학 이전의 시대였습니다.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는 것은 이미 문자를 해독하고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사상체계가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육은 흙에 묻히지만, 영혼은 하늘로 간다는 것이 다 있기 때문에 이미 미래까지 확고하게 지식으로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새삼스럽게 별나게 따지면서 그렇게 골치 아프게 살 필요는 없는 겁니다. 편하게 사는 거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도 바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때 과학이라는 게 별로 없었잖아요. 신라시대 첨성대 있고, 세종대왕이 해시계 만들고 했지만, 제가 말하는 여기 관찰의 자리라는 것은 뭐 하나 발명품을 만드는 게 아니고 인간의 사상체계가 현 세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의심하고 이게 진리로서는 확정되지 않는다는 의식, 그게 과학적인 의식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새로운 진리를 이미 가지고 있는,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새로운 진리를 발굴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 애를 쓴다는 그런 마음을 가졌을 때에 그 진리에 대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애를 쓰는 그렇게 판단하는 본래의 자기의 자리는 이 자연과 더불어서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자리에서 바깥을 관찰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관찰을 하게 되면, 관찰하는 도구가 있어야 되고 그 도구를 이용해서 망원경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점점 더 세상에 대해서 과연 그런지 따지면서 묻게 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묻는다는 것은 기존의 이 체제에 대해서 믿을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관찰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이목 가운데서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 눈에 중점이 있겠지요. 사실은 딴 것도 포함되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지고, 그렇게 눈에 확실하게 될 때만 그걸 믿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은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그것은 믿을 수가 없지요. 관찰의 대상이 안 되니까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보겠다? 내가 보겠다. 나의 무엇으로? 눈으로. 그냥 맨 눈으로? 아니요. 기구를 통해서. 우주를 쳐다보고 자연을 관찰하고 인간의 몸을 해부하고.
이러한 이야기가 상당히 과학의 입장에서는 오늘날 일반적 생각이지요. 과학 하는 그것이 일반적 생각이라는 말은 아주 빠른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느끼고 보는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믿는다. 이걸 간추려 보면, 인간은 자기만 믿는다.
인간은 자기만 믿는다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 이미 과학시대에 접어 들었습니다. 오직 자기만 믿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성경을 봅니다. 성경을 볼 때, 그냥 쑥 쑥 받아들이겠습니까? 의심하겠습니까? 의심하겠지요. 창세기 1장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인데 그 하루가 여섯 번 지나서 천지창조가 만들어졌다.
옛날 중세 같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리 나올 텐데 과학시대에는 어떻게 합니까? “구라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성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 성경이 분명히 거짓말을 했지만, 뭔가 교훈은 있을 거다. 따라서 성경은 거짓말이라서 내칠 게 아니고 우리는 과학적으로 안 맞으니까 그것은 재껴 놓고 어떤 교훈만 챙기면 성경도 우리한테 어떤 유익을 줄 것이다.” 라고 성경과 어떤 협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홍해가 갈라졌다. 바다가 갈라질 이유가 있겠어요? ‘그런데 갈라졌다 하니까 이것은 실제로 그런 일이 없는데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쳐서라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애를 쓰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특히 여호수아에 보면 전쟁할 때 갑자기 지던 해가 잘 져야 되는데 안지고 스톱이 됐지요. 해가 멈췄다. 현대 천문학에서는 해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다 같이 운동하고 있는데요. 뉴턴의 만유인력에서 서로 견제하면서 운동하고 있는데 멈출 리가 있겠어요? 멈출 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성경을 봐도 성경은 틀렸다. 를 기본 전제로 하고, 성경은 틀렸다고 판단을 내리는 본인은 안 틀린 거예요. 과학이 진리니까. 안 틀린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성경을 보다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성경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해버린다던지 그것은 안 들은 것으로 쳐버리는 거예요. 성경 자체가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대표적인 것이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지옥 간다. 믿지 않는 자가 지옥 간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에요.
구원이란 말은 뭐냐 하면, 뭔가 질곡에 갇혀있는 것을 외부에서 강압적으로 끄집어내지 아니하면 망하는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뜻이거든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구출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니가 현재 있는 자리가 위험한 자리이고, 이건 망하는 자리이고, 저주받을 자이고, 지옥이다. 라고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는 지금 내가 성경을 보고,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이 모든 행위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지옥 가는 나를 더욱 더 지옥 가게 만드는 작업을 누가 한다? 하나님이 벌리고 있는 겁니다. 라고 그걸 수용을 해줘야 돼요.
잠언서16장4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이 어떠니 저떠니 세상이 어떠니 관찰 백날해도 인간 쪽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관찰하겠다는 그 의도 자체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분석하고 따지겠다는 그것은 본인이 결심한 게 아니고 그러한 결심이 나오도록 주께서는 적당하게 지옥 갈 사람들을 지옥 가도록 그렇게 아주 맞춤. 맞춤 존재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잠언서16장 4절에서 5절에서.
5절에 보면,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분석을 하고, 탐구를 하고, 연구하고, 이전부터 악한 인간들은 신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하도록 그렇게 적당하게 내가 고런 인간들을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관찰할 그 관찰의 자리 자체가 망하기 때문에 그렇게 관찰하는 거예요. 과학을 왜 하느냐, 그 과학하면서 망하도록 관찰하는 과학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겁니다. 철학도 마찬가지고. 일반 현재 교육도 마찬가지고. 교육을 하면 할수록 본인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지옥 가는 인간의 맞춤, 합당한 존재로서 점점 더 그 본색을 드러내는데 이 작업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흐뭇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는 옳다고 하고 하나님마저 관찰의 대상으로 본다는 이 자리마저 이미 사전에 적절하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찰의 자리 곧 이것이 저주의 자리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