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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인간개조 1704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21. 18:30
2017-04-19 00:27:42조회 : 176         
인간 개조 170418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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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직 (IP:110.♡.86.59)17-04-20 10:02 
가락-요한복음14장1절(인간 개조)170418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4장입니다. 14장. 참 어려운 대목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4:1-2)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예비합니까? 처소를 예비해요. 거처, 처소를 예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안가면 뭐가 없다? 처소가 없다는 뜻이에요. 처소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꼭 가야 있다는 처소는, 우리의 이 세상의 공간개념을 가지고는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내가 가서 자리 잡아올게.” 그러면 자리 잡기 전에도 맨날 그 자리는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처소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나 안가나 늘 마련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갔다 온다고 해서 없는 처소가 생기는 게 아니고, 원래 하늘나라는 넓기 때문에 정원도, 정원 몇 명 들어가도, 천만 명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을 갖잖아요. 적어도 하늘나라답다면. 지구는 제한되어 있지만 하늘나라답다면, 지구보다 크다면, 까짓것 몇 명 들어가도 다 들어갈 수 있는데 무엇이, 우리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냐 이 말이죠. 


지금 예수님 가기 전에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네가 있을 곳이 못돼!” 라고 막는 그 요소가 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아니하면 천국에서 살수 없는 거예요. 그게 핵심요소입니다. 예수님의 안내로 “여기, 니 자리” 이렇게 들어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해야 돼요,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아니하면, 그 처소는, 아무리 천국이 넓다 할지라도 성도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구약에 <제사장 제도>입니다. 제사장제도. 제사할 때 제사 드리는 사람을 제사장이라 하지요. 제사장, 우리가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사장 없이 내가 집에서 제사 드리면 어떠냐? 내가 집에서. 집에서 내가 양 잡고, 하나님께서 그거 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그거 안 받지요. 집에서 혼자 제사 드리면 안 받습니다. 뭐 정갈하게 드리면 안 되겠어요? 정성으로 깨끗하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요건이 안 맞아서, 무슨 요건이 안 맞아서 집에서 제사 드리는 것은 왜 안 받습니까? 집에서. 


그것은 무슨 요건이 안 맞습니까?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대신 제사 드려야 돼요. 일괄 제사를 드려야 돼요. 제사장이. 그러면 이 소리를 들으면 다른 사람들 “집에서 제사 드리면 되죠. 하나님 알고 나 아니까, 드리면 되지!” 하는 여기에서 기분이 싹 나쁘겠지요? 뭐냐 하면 “제사장, 니가, 니가 뭔데? 


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왜 니가 드린 제사는 주께서 받으시고, 나도 니 못지않게 믿음 좋아! 그럼 믿음 좋은 내가 드린 제사는 안 받고, 니가 뭐 그 별난 이유가 뭐냐?” 이게 궁금하겠지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은, 제사장은 하나님의 율법의 인격체입니다. 인격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사람이죠. 사람 모습, 사람. 


율법은 이게 문자거든요. 언어가 사람으로 변해요. 언어가 사람으로 변합니다. 예, 그럴 수가 있어요. 이 말은 요새말로 하면 “언어 믿을래? 사람 믿을래?” 이거와 똑같은 겁니다. “네가 문자를 실천에 옮길래? 아니면 이 문자가 그대로 인격화된 어떤 분의 행함을 믿을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쉽죠? 


신약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지요? 그 이름이 주의 이름이고, 주님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성경을 몽땅 누구한테, 누구 이야기라고 다 자기에게 당겼습니까? “모든 성경은 너희가 아니고 나! 예수님에 의해서 다 있다.” 했지요? 이미 다 가져 가버렸지요? “손 떼라! 다 떼! 다 떼! 다 떼! 다 떼! 내가 지켜!” 잡아 당겨 온 겁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성경말씀 지킨 거,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사울 때, 자기가 말씀 지킨 게 있잖아요. 율법 지킬 때 율법에 흠이 없다했으니까, 지킨 것은 뭐가 돼요? 이거는 무용지물이 돼버리는 거예요. 무용지물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몽땅 누가 가지고 간다? 예수님이 가져가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가져가면 우리는 소외당하는, 우리는 소외당하는 거예요. “너는 저리 나가있어!”가 되는 거예요. “너는 나가있어” 그러면 제사장 제도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때 모세 언약을 줬기 때문에, 이런 게 약간 어려워요. 모세 언약을 줬기 때문에 여호와는 누구만 상대하느냐 하면은 제사장만 상대해요. 


그때는 예수님이 새 언약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당시에 모세언약 시절에는 여호와께서 제사장만 상대한다고요. 그러면 여기(여호와께서 제사장)를 상대했다는 말은, 여기에서 모세 언약을 제사장이 성취를 해버리면, 여기에 “나가있어!” 라고 소외된 이들에게, 이 제사장 언약의 성취여부에 대해서 뭘 받느냐 하면은 ‘효과’를 보는 겁니다. 효과를. 


효과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은, 이익을 얻은 내가 그 결과의 원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이익은 얻어 챙겼는데, 거기에 대해서 내 쪽에서 뭔가 공작을 하거나 내 쪽에서 수완과 수완을 부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결과를 얻을 때 효과라고 합니다. 효과. 이것을 신약에서 뭐라고 하면은 그냥 대신하셨다. 내 대신하셨다. 이렇게 합니다. 


대신 하셨다. 대속. 전에 대리를 설명할 때 여러분, 대체하고 대리하고 구분했죠? 대신이란 두 가지가 있다 했지요? 뭐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니까. 제사장 제도에서의, 여호와께서 제사장만 대표로 상대 해버리면, 나머지는 효과를 보죠. 그러면 효과를 보려면, 이 효과 보는 사람이 뭐를 인정해줘야 하면은, 내가 뭔가 한 것에 대해서는 그거는 의미를 두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한테 한 것은 의미를 두지 말아야 돼요. 이것을 가지고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를 부인을 했다는 것은, 자기 부인을 해서 어떤, 자기 부인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이거는 자기 부인 자체가 원인으로 끼어들어요, 그러면 효과가 아니고 “역시 나는 나를 부인하기 참 잘했어.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어!”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이거는 장난질 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을 몽땅 가지고 간 것을 모독하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율법의 행함으로서 의롭게 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 이렇게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지만, 그렇게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 했고, 


1장에 보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을 지어다” 하는 그 이야기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미 모든 인간은 저주 받기 합당한 채로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하는 그 전제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효과 이야기가 되게 되면, 이게 점점 더 어려워져요. 


효과 이야기가 되게 되면, 구원해 달라는 그 요청마저 주께서는 거부합니다. 아이 참, 이런 이 
야기는 참, 한국교회에 이야기하면 교인들 진짜 화 많이 날거에요. “구원해주세요!” 라고 했을 때 “구원해줄게”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세요!” 할 때 “그래, 걱정 마! 구원해줄게!” 이렇게 주고, 받고, 주고, 받아서 구원이 되든지 교제를 하든지,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인데, 그죠? 사람들은 그러하잖아요.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줄게.” 이렇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하는 것 전부다 이렇게 마지막에 딱 와보면 그게 아니고, 구원해달라고 해서 구원해주는 게 아니고 또 “나는 구원 같은 거 필요 없어요.” 한다고 해서 구원 안 해주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누구 권한으로 넘어가느냐 하면은 예수님 권한으로 넘어 가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구원 받고 안 받고는 베드로의 개인적인 요구하고는 전혀 무관합니다. 이것을 과감하게 한국에서 외쳐야 돼요. “여러분들이 교회 나와도 소용없습니다!” 이걸 외쳐야 된다고. 여러분들이 구원해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맨날 문둥병자가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래, 불쌍히 여겨줄게!” 하는 것처럼 그걸 자꾸 염두에 두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한다고 주께서 “내가 꼭 너한테 가마!” 라고 주께서는 그런 사적인 약속을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걸 누가 이야기 하냐면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걸 이야기한다고요. 모든 사람은 구원해 달라는 것도, 그게 죄가 된다는 겁니다. 구원해 달라는 것도 죄가 된다는 거예요. “구원해 주세요!”도 죄가 된다는 거니까 “그 입 다물라! 그 입 다물라!” 하는 그런 충고밖에 들을 수밖에 없어요. 


구원해달라는 것도 죄가 된다면, 그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면, 죄니까 구원의 근거를 댈 수 없지요. 그렇다면, 그럼 누가 구원 합니까? 누가 구원 하겠습니까?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마태복음에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19:26)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 제자들이 다 떠났을 때 예수님이 하시는 의미 있는 말씀을 줬습니다. “너희는 왜 안가지?” 라고 물었지요. “너희는 왜 안가지?”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매 뉘게로 가오리이까?” 마치 베드로가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서 안 가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해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갈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게 내가 듣고자 한 정답이 아니고, 뭐냐 하면은 내가 너희를 택했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면 절대로 나에게로 올 수가 없느니라.”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면 나한테 올 수 없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간단하게 그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습니다. 누가 구원 될지, 안 될지, 누가 참된 양이냐 하는 것은, 너희들의 의견을 개진, 물어보는 게 아니고 그 누구와 누구 사이에서 이미 끝난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겁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거예요. 심지어 어느 정도냐 하면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심판권을 위임했어요. 심판권을 다 위임했기 때문에 이제 심판 하고 안하고는 누가 정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정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정하는데 어떻게 정하느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이 지상에 하신 일을 가지고 정해요. 


구원 근거는 예수님이 지상에서 자기가 했던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근거입니다. 근거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야기 했을 때 열두 제자들 중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 다음에, 자기가 일을 다 마무리 했고, 아버지한테,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 본인이 원하는 자를 본인이 임의로 구원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 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이거, 저 구원 받은 거, 주님 뜻이죠? 그죠? 내 그럴 줄 알았다. 나는 구원 받을 생각 없는데 주의 뜻 때문에 제가 구원 받아야 하는 거 맞지요?”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제 구약의 <아가>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쓴 게 아니고 이거는 반대에요. 


여자는 내빼고 남자는 스토커고요. 아주 지독한 스토커에요. 신고감이에요 완전히. 아가에 보면 완전히 신고감이라니까요. 여자가 하는 말이 “나는 오빠가 나한테 포도원에서 일 시켜서 얼굴이 새까맣습니다.”라고 하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아, 그 새까만 게 그 얼마나 이쁜건데? 난 네 얼굴 새까만 거, 햇빛에 탄 거, 새까만 거 나 거기에 뿅 갔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 도대체 어떤 빌미를 대고 좀 “그 남자에게 떨어질꼬.” 라고 아무리 연구해도 그 빌미 자체가 매력이에요. 그 남자한테는. 아가에 보면 그래요. 언제 아가를 한번 하고 싶어요. 그러니 그 아가의 주제가 뭐냐 하면은, 여자 쪽에서 남자를 떼 낼 어떤 빌미나, 구실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남자가 이야기해요. “네가 죽는다고 해서 내 품에서 떠날 줄 아느냐?” 


세상에 이런 스토커가, 이거 신고감이라니까요! “네가 죽어도 나는 널 따라갈 거야!” 이렇게 되니까, 연예인에 미친 사람들이 연예인 따라 붙잖아요. 그것보다 도가 더 심해요. “네가 죽는다 할지라도 내가 널 놓을 줄 아느냐?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렬하다! 죽은 자를 끄집어내는 그 사랑을 지금 너한테 지금 퍼붓고 있다.” 


그리고 여자 같으면 술람미 여인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자 이름을 이렇게 좀 불러주면 좋은데 나중에 아가서 끝부분에 가면 여자 이름을 안 불러요. 뭐라고 하냐 하면은, 이미 자기 가족이에요 집안입니다. “나의 누이여!” 나의 누이, 마치 자기 남편보고 오빠라 부르는 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오빠!” 한번 부르는 것처럼 “사랑하는 나의 누이여!” 결혼도 안했는데 이미 “나의 누이여!” 결혼도 안했는데 호칭부터 먼저 일방적으로 정해버렸어요. “너는 내 사람 되는데 빼도 박도 못해!” 하고 끈질기게 따라 붙는 게 아가입니다. 솔로몬이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영을 받고 쓴 책이 아가에요. 


지독하지요? 이걸 요한복음에 와서,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주님께서 “너는 내 사람이야! 너는 천국 가야 돼!” 라는 그 결정을, 그런 결정은 이미 하나님 아버지한테 위임받은 결정이기 때문에, 세상에 어떤 권세도 그 결정을 취소하거나 변경 시킬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가 로마서 8장에 나오지요? 


어떤 권세자나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위협 그 어떤 것이라도 주님이라는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면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딱 한개만 보여 주는 거예요. 이 끈이 얼마나 질긴가? 그거 보여주는 게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가 일부러 나쁜 짓 하면, 이케요? 저렇게요? 그걸 이제 경상도 버전으로 이야기하면, 


해운대 앞바다에 가면서 “나 잡아봐라~” 이렇게 하는 “나 잡아봐라~” 이렇게 하면 그 남자가 하는 말이 “니 잡히면 쥑이뿐다!” 따라오는 거 있잖아요. 그 대목 있잖아요. 슬로우 비디오로 해야 좋아요. 일부러 또 천천히 간다고요. 네? “나 잡아봐라~” 얼마 전 해운대 갔다 왔어요. “나 잡아봐라~” “니 잡히면 쥑인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항상 세속에 물들었기 때문에 도망치면서, 


“나 잡아봐라~ 내가 교회 안 나갈 거야~ 나 잡아봐라~” 이렇게 하고 “니가 교회 다니든 안가든 성경 지키든 지키지 않든 니는 내 손으로 쥑인다.” 이렇게 된 거에요. 그것이 바로 사랑놀이에요. 또는 사랑싸움.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춘향이, 춘향가에 한마디 나오잖아요. “저리 보아도 내 사랑, 어허둥둥 업어보자!” 업어 보든지 뭘 보든지 간에 그 나온 것처럼, 


이 사랑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의지와 자신의 감성과 감정, 감성과 감정은 좀 다르긴 다른데, 감성과 감정.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주께서는 개무시 해버립니다. 그런데 인간은 보통 성경을 지킬 때 뭐로 지킵니까? 의지와 이성과 감정으로 지키잖아요. 부흥사들 화요일쯤 되가지고 뭐 강의한다고, 화요 부흥회하면 또 아침 10시부터 하는 세미나 있잖아요. 


그거 할 때는 주로 어떤 멘트 하면은, 성막 멘트 하는 사람도 있고 어차피 목요일 날 저녁에 헌금 뽑아내야 되니까, 중간에 뭘 집어넣어서 시간 때워야 되잖아요. 어떤 사람은 뭘 집어넣느냐 하면은 이걸 집어넣어요. 이걸 해야 시간 오래 가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집어넣어요. 삼위일체 아니면 이단이라 하니 집어넣는데, 삼위일체를 왜 집어넣느냐 하면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았기 때문에, 삼위일체 형상이 인간에게는 바로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됩니다. 이 세 개를 구비해야 이게 참된 믿음입니다.” 


라고 이천년 동안 내려왔던 이 구닥다리 이론을 펼치는 게, 그래야 시간이 빨리 가니까, 가만히 있는 거 보니까 다 써먹는 거 아닌가 여러분? 삼위일체니까. 그래서 인간의 의지와 이성과 감정, 이거 얼마나 강조하는지 몰라요. 왜냐하면 균형 잡힌 신앙인이 돼야 된다고 선교단체에서 굉장히 강조하거든요. 


너무 이성적으로, 지적으로 성경 보면 안 되고, 그래도 감성적으로 봐야 된다. 감성이 뭐냐 하면은 감성, 감정 같이 봅시다. 구분하면 더 복잡하니까 뭐냐 하면은 사람이 정열적으로, 이모션emotion이라 하지요? 이모션, 이모션(감정)적으로 주님을 강렬하게 신앙해야 된다. 그 이모션, 감정적으로 정열적으로 했던 그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책이 많이 나왔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여자인데 중세 때 핍박받아 가지고, ‘잔느 귀용’ 그 책이 저한테 한 일곱 권 가까이 있거든요. 읽어보면 전부다 감성적이에요 욥기도 나오고, 그러니까 여성들한테는 훨씬 다가오지요? 이성적으로 따질 인간, 자기가 목사나 신학교 안 나왔으니까, 이 아마추어 티낼까 싶어서 겁나고, 또 의지로 하려고, 의지는 뭐냐 하면은 기도하고 전도 하는 거예요. 


전도는 바로 실적이 있어야 되니까, 전도했다는 소리 하기 때문에, 이거 사람 꼬시는 게 그리 쉽습니까? 어렵잖아요. 그래서 일단 빼는 거예요. 그러면 전도 많이 안하고, 공부 많이 안 해도 믿음 있는 티를 내는 방법은 그 셋 중에 뭐가, 셋 중에 뭘까요? 뭘까요? 감정. 눈물, 눈물 흘리면 되니까 “주여~” 울기만 하면 되니까 여자로서는 얼마나 좋아요? 


찔찔 울고,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이렇게 해서, 또 한나의 기도 보세요. “네가 술 취했구나!”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하는 중입니다!” 그 대목 막 생각해서, 얼마나 그거 하기 쉬어요? 그걸 또 보고 목사들은 너무 그렇게 감성적으로 해서 한다고 하는 것은, 나이 많은 권사들 기죽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적어도 나는 프로니까 나한테 성경 공부 좀 배워가지고, 원래 배운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에게, 이게 예속되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예속이 돼야, 지 마음대로 자기 팬클럽이 돼서 부릴 수가 있어요. 수완이. 많이 당해봤지요? 이렇게 배울 때, 자기에게 배운다는 말은 자기 부하로 꼭두각시놀이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적으로 알아줘야 “아, 목사님이 평소에 이렇게 공부 많이 하는지 몰랐다!” 감동 먹어가지고 팬 돼서 엎어질 수가 있는 기회를 준단 말이에요 


또 의지가 돼야 전도가 또 되거든요. “여러분은 맨날 니만 구원 받으면 되나? 중보기도 해서 가족들까지 건져야지.” 그 다음부터 기도 막 한다고 “우리 남편 구원해주시옵소서! 우리 자식도 구원해주시옵소서!” 또 난리잖아요. 이 세 가지를 모아야 균형 잡힌다고 하는데, 이 말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균형이라는 자체가 성사가 안 됩니다. 


반드시 카레이스 경주처럼 여러분들이 카레이스 할 때 나란히 가는 거 봤습니까? 카레이서는 나란히 가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앞에 꼭대기라도 뭔가 하나, 앞에 더 내밀어야 돼요. 분노의 질주를 안 봤구나. 반드시 이걸 하나 내밀어야 돼! 인간은 반드시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감정 좋아하는 사람은, 의지 이거는 뒤차로 돌리고 자기는 앞서 가게 되어있고, 평소에 고구마 전도하는 사람은 감정 이거는 우습게 봐요. “에이! 전도도 하나 못하는 게 무슨 신앙이야! 나처럼 전도해야지!” 반드시 궁극적인 그 하나를 내밀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공부 좀, 성경 공부 좀 한 사람은 “무식한 것이 이것도 모르나, 저것도 모르나, 헬라어 원어도 모르면서 무슨 설교를 하나?” 이렇게 또 내밀게 되어 있다고요 


균형 잡힌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목사 자기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시키는 거예요. 자,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의지, 감정, 지성을 어떻게 합니까?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죠. 왜? 그런 것들은 내 믿음, 내 의지, 내 감정, 내 이성이기 때문에 대상을 부른다고요. 


나 이정도 갖추어졌으니까 “주님, 한바탕 우리 한번, 한번 만나서 좋은 관계 한번 맺어 봅시다.” 대상을 요청하게 됐다고요. 요청한다는 자체가 오늘 본문과 달라요. 갈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임의로 구원하는데 “나같이 괜찮은 사람을 놓친다면 주님, 지금 일 잘못 하시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갖추어졌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조금만 도와주시면 우리, 주님하고 사이좋은 관계가 되서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아마 괜찮은 동업자가 될 겁니다.” 


이렇게 지금 자신만만한 거예요. 누가? 베드로가. 그래서 마지막에 뭐라 합니까? 13장 끝에 뭐라 합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쿠오바디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의 답변은 “네가 갈 수 없는데 간다.” 그러니까 “제가 왜 못갑니까? 으아~ 그렇다면 제 의지를 발휘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내 놓겠습니다!” 그 더러워서 뭐 받겠어요? 


“네 목숨 내놔도 못 간다.” 그 말은 결국 뭡니까? 못 간다. 더 나아가서 “너는 내가 어디 가는지를 너는 애초부터 몰라야 된다.”에요. 이 알 수 없는 나라. 이번에 여름 수련회 제목을 정했습니다. 이번 수련회 열왕기상 하는데, 제목을 미리 여기서 처음으로 공개를 합니다. 이게 제목입니다. ‘은밀한 나라’ 이스라엘 나라, 그 공개된 나라죠. 


그 공개된 나라가 무너지면서 은밀한 나라가 내부적으로 올라오는 거예요.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에. 기존의 해석들은 어떤 왕이, 어떤 왕이 있었는데 선지자가 있었다. 이렇게 되잖아요.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선지자, 선지자가 있고 선지자의 선지적인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왕들이 거기에 정립이 되고, 꽂히게 되어 있다. 이렇게 반대로 봐야 되죠. 그렇게 봐야 돼요. 


왕이 있는데 선지자 있다 하지 말고, 선지자의 선지자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핍박을 할 만한 왕들을 선지자 옆에 포진시켜 주는 겁니다. 핍박 없는 선지자는 선지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세상이 악하다 함을 증거 하려면, 세상에 집착하는 왕들을 적재적소에 필요한 왕들을 세워줘야 되죠. 그런데 막상 왕들은 그 사실을 알아요? 몰라요? 다 지 잘났다 하지요. 


그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의 교회 같은 거니까, 이 교회를 대대로 우리가 지켜내야 된다. 이 생각이 있었지, 그 생각 자체가 선지자를, 은밀한 나라를 공격한다는 거. 그것을 그들은 모르지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베드로가. “어디를 가십니까?” 오늘 본격적으로 시작하는데, 오늘 강의를 지금부터 시작하는데요. 이거부터 먼저 아시면 돼요. 


‘질문이 틀리니 해답을 모른다.’ 질문이 틀리니까 해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베드로는 그 질문을 하면서 이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한 겁니다. 베드로는 지금 그 질문을 왜 했느냐 하면은요. “저 구원 받고 싶어요!”라는 그 마음을 그렇게 표현 한 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으면 저 구원 받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주님하고 떨어지기 싫어요. 주님과 함께 있어야 구원 받습니다. 이게 제 생각입니다.”는 그 질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 질문 자체가. 이 질문 자체가, 질문이 틀리니까 답이 안 나오지요?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질문이 틀렸으니까 답이 안 나왔으면, 그럼 답을 얻으려 하면 뭐하면 됩니까? 


질문을 제대로 해야 되겠지요? 그 제대로 하는 질문은, 베드로가 이렇게 했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제대로 하는 질문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제대로 하는 질문을 그럼 누가 하느냐? 주님께서 가셔서 다시 성령을 통해서 오면서 그때부터 인간들이 예상 못할 질문들이 이제 나오지요. 


그 예상 못할 질문이 나오는데, 그 질문이 어떤 질문이냐 하면은 성경을 대할 때 성경을 누가 주셨습니까? 모세한테 누가 말씀, 율법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잖아요, 율법을 줬으니 여기에 나중에 뭐가 붙어야 되는가 하면, 율법에 대한 해석이 붙어야 되겠지요?(율법+...해석)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율법은 하나님이 줬고 해석은 누가한다? 


우리 인간이 한다 하잖아요. 이게 벌써 질문이 잘못 된 거예요. 하나님은 이 율법에 대한 해석을 하면서 못난 인간을 통해서, 이 율법이란 해석을 하나님 본인이 율법주고 하나님 본인이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전체가 누구 책이 돼요? 하나님 본인을 위한 책이에요. 본인을 위한 책을 본인이 던져주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 의해서 이해하면 인간은 어디서 나오나? 여기서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이게 맞나, 저게 맞나 하면서 항상 인간의 해석은 부정당하고 거부당하는 겁니다. 인간의 어떤 해석도 주님의 해석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왜? 범죄 했기 때문에, 아담이 범죄 했기 때문에. 그 공사장에서 그걸 뭐라 합니까? 


안에 물을 넣어놓고 수평 잡는 걸 뭐라고 합니까? ‘수평대’라 하지요? 수평대를 보면 그 안에 물이 이렇게 기울고 하면, 왔다 갔다 하지요? 그게 우리 인간이에요. 그 안에 인간은 백날 해도 그 자리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우왕좌왕하면서 무엇이 진리며 무엇이 옳은 것이며, 모르면서 나름대로의 자기가 어떤 답답함과 이 세상 괴로움 때문에 계속 질문들을 해대는 겁니다. 


그 질문을 두 자로 기도라 하는데, 계속 기도하면서 “답답합니다. 해결책 주시옵소서! 주님 전능하시잖아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할 줄 믿습니다!” 뒤에 예수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주문하고 붙였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거 하면서 성경이 자기를 위한 해석이라고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기도하는 당사자가 나이기 때문에 내가 기도했는데, 응답이 남한테 가면 그거는 환장하지요? 왜? 나한테 와야지 쟤한테 가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기도라 하는 것은 얼마나 이기주의의 표상이에요? 내가 기도해서 남 좋아하는, 이제 그거 벗어나고자 중보기도 했지만, 중보기도가 됐는지 안됐는지 또 자기가 살핀다는 의미에서 또 역시 자기 효과를 노리는 것도 똑같은 거거든요 그게. 


이 성경 자체가 수평대처럼 거기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런 물방울, 철없는 물방울이 있어줘야 성경이 돼요. 왜냐하면 주님은 고난 없는 주님은, 주님이 아니기 때문에. 고난의 가해자가 누굽니까? 그것은 마귀의 똘마니들, 마귀의 똘마니들, 마귀의 사람 누굽니까? 인간이죠. 


아담의 자손들이, 마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요. 주님의 주되심에. 이단 없이는 일이 안됩니다. 반드시 이단들이 있어줘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로 있기 때문에 집 나간 이단들이 주변에 다 모여드는 거예요. 사도가 사도 노릇을 안 하면 이단이 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때문에 숨어있던 이단들이 사도 바울 주변에 들끓기 시작하는 겁니다. 


일종의 집어등. 오징어 잡을 때 불 켜놓으면 오징어 다 기어 나오지요? 복음의 빛을 비춰야 비로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본래의 정체가 다 나옵니다. 그래서 추석이나 설에 집안끼리 모였을 때, 뭐 정종이라든지 술 먹고, 이렇게 고스톱치고 이럴 때는 아주 평화로워요. 그런데 말조심해야 돼! 


평화롭다가, 교회 이야기 나오면 이게 집어등이거든요. 교회 이야기 나오면 이제부터 이단들이 자기 본색 다 드러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부터 해서 야고보서 2장부터 시작해서 자기 아는 거 있잖아요. 들은 거 다 튀어나와요. 그럴 때 그 당하는 당사자는 주님의 해석을 위해서 그 순간 쓰여 지고 있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고난당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나라는 이 자체가 주님의 말씀이 살아있음의 증거물로서 활용당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활용 당하는지 몰랐는데 추석 때가 오니까 활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거기서 밝혀지지요. 속으로 감사해야 돼요.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을 때는, 어떻게 하면은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게 바로 선지자류 라고요. 선지자류. 같은 부류란 말이에요. 선지자하고 같은 노선이다. 라는 말이죠. “선지자들도 그와 같이 해서 다 하늘의 상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팔복에 처음 시작하는 심령이 가난한 거예요, 그게. 


심령이 가난한 거 따로 있고,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심령이 가난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면은 예수님과 관련 되어서만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거지. 예수님 빼놓고 지 마음 착하다고 해서 지 마음, “내 마음은 호수요.” 내 마음이 호수 된다고 그게 깨끗한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그런 상황 속에서 비로소 심령이 가난해지는 겁니다. 그게. 


온유하고, 화평케 하는 자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고. 딱 한가지에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때 그게 복이 있다는 겁니다. 복이라는 것은 주님과 함께 동행함을 느끼는 게 복입니다. 그것을 뭐라 하면 양적인 복이 아니고 그것을 가지고 질적인 복이라 하는 겁니다. 질적인 거예요. 질적으로. 아직 지금 문제를, 진도를 나가야 돼요. 


문제 여기서 끝나면 안 되는데, 질문을 새롭게 정립시키지 않으면 해답이 안나온다했지요. 그런데 그 질문을 아시는 분은 아버지와 아들밖에 몰라요. 그리고 제자들은 여기서 잠시 격리해야 됩니다. “우리 여기서 잠시 헤어지자.” 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자기를 끊어버립니다. 이게 바로 단절입니다. 


닭 쫓던 개지요 뭐, 예수님 승천하고 난 뒤에 위에 쳐다보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제자들이 열심히 기도하면 뭐합니까? 저기 쳐다보고 있는데, 천사들한테 지적 받습니다. “당신들이 왜 주님을 쳐다보느냐?” 성령이 오게 되면 구태여 쳐다볼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은 쳐다본다는 것은 나는 여기 있고 주님은 저기 있다가 되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온다는 말은, 주님이 나 있는 곳에 합류를 하기 때문에 내가 어디를 가도, 미국 가나 어디를 가도 성령 안에서 함께 있으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요. 그게 하늘나라라고요. 그러면 거기서 질문은 누가 합니까?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질문은 주님이 던지고 답변은 누가 합니까?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하는 일이 곧 주님이 던진 질문에 답변이 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우리를 인도해 주시죠.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이 “당신 사는 게 왜 그래?”하면 “이렇게 사는 게, 이게 해답이야! 이렇게 사는 게!” 그러면 “당신은 그런 소리 하는데 그럼 당신 같으면 내가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느냐?” 


“그래도 뭐, 아침에 이렇게 큐티 하고 이렇게 해야지. 큐티 하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해야지.” “그것을 하라고 그 질문을 한 자가 누구지?” 물으면 주님은 아니에요. 그거는 뭐냐 하면은 베드로에요. 지금 예수님과 갈라선 베드로라니까요. 자, 베드로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베드로는 뭘 책망한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내 목숨 바치겠습니다.” 나왔지요? 


그 질문에 합당한, 그 질문에 부합되려고 인간들이 생각한 그 해답은 뭐냐 하면은 뭔가 구시렁구시렁 뭘 안하면 뭔가 허전하고, 안하면 구원에 탈락될 것 같은 느낌 들고 하는 거예요. 그런 느낌이 들면 뭐 하세요. 이거 안하고, 기도도 안하고 뭐 안하면 내가 이게 탈락 될 거야. 분명해.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뭐 말릴 수가 없고,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할 문제도 아니거든요. 그러나 그거는 알아야 돼요. 이게 바로 탈락의 이유가 되는 짓을 내가 하고 있다는 그것만 내가 알아야 돼요. 말이 지금 안 되는 것 같지만 말이 되는 이야기거든요. 탈락이 되는 짓을, 탈락이 되는 짓을 우리 같으면 안해야 되는데, 우리의 옛 본성이 있어가지고 뭘 해야 돼요. 


아침에 일어나면 눈뜨고 뭘 해야 되고, 저녁에 또 감사기도 뭐 해야 되고, 옥색 원피스 입고 오늘도 무사히, 뭐 해야 돼요, 이렇게. 무릎 살짝 내놓고 이렇게, 하여간 뭐 해야 된다고요. 오늘도 무사히. 옛날 버스의 그림처럼. 운전사 옆에 붙인 거 안 봤어요? 젊은 분들은 못 봤구나. 나이가 60정도 넘어줘야 본다고. 오늘도 무사히 해놨어요. 


그처럼 뭔가 아주 경건해 보이는 그림들로 아예 방을 치장을 하고, 마리아상이나 마리아상 아니면 예수 상이라도 뭔가 이렇게 책상에 있고, 그리고 차 앞 백미러에서는 차 다닐 때마다, 급정거 할 때마다 십자가 덜렁덜렁 거리게 해야 되고,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 해서 금으로 하든지 또 소박하게 하든지 또 있어야 되고, 이걸 해야 돼요. 


왜? 그게 해답이니까 니는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짓을 해야지요. 아, 그걸 꾹 참고 안한다고 해서 살림살이 나아집니까? 그거 안한다고 마음 편해집니까? 그냥 마음 편한 대로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하고 “나 성경 하루에 석 장, 주일날 성경 다섯 장 읽어야지.” 읽으세요. 읽으라니까요! 어차피 하나 안하나 그게 죄인데 뭐? “나는 십일조 할 거예요.” 아. 하세요! 


십일조 하고 싶으면 해요. 실컷 채우란 말이죠. “십일조 있어서 하는 게 아니고, 나 하고 싶어서.” 아,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게 해요? 하되, 뭐는 알아라! 이것은 바로 베드로가, 내가, 내가 궁금해서 자기가 해답 던져놓고 이 정도라도 하니까 그 해답에 궁색 하나, 약간 시원한 느낌? 네? 이번 주는 벌 안 받을 것 같은 느낌. 


기도를 어제 길 나갈 때, 기도 안하고 가니까 경찰한테 걸릴 거 같고, 기도하니까 경찰에 걸려도 봐줄 것 같은 느낌. 그것도 체험을 해보니까 아홉 개 했는데 열 개 맞으면 “아, 이거 진짜 효과 있구나.”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집안에 어른 모셔 보세요. 어른 모시면 효도되죠? 효도되면 무슨 느낌이 듭니까? 


에베소서 6장에 뭐 나와요? “주안에서 부모를 섬기면 너 오래 산다.” 나오지요? 이상하게 오래 살 거 같아. 그리고 구약에 보세요. 부모를 사랑하게 되면 잠언서에 보면 뭐든지 잘된다 하지요? 네? 오른손에는 장수고 왼손에는 부귀라 양손을 다 쥘 수 있는 느낌 든다니까요. 그 느낌 드는 걸 왜 그렇게 억지로 안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하라 이 말이죠. 하되, 성령이 오게 되면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오게 되면 “아! 이런 내가 하고 싶은, 그래서 내가 뭔가 속이 편하고 싶은 이 죄 때문에 주께서 돌아 가셨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걸 안다고 해서 돌아서 또 안하는 게 아니에요. 안 해보세요. 얼마나 찝찝한지, 차라리 하는 게 시원해. 차라리 해버리는 게 시원해. 이게 편해요. 


그래서 제 말은 뭐냐 하면은 성경에 모든 들어있는 것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수평대처럼, 물방울처럼 항상 돌아다녀야 돼요, 이 안에서. 늘 돌아다녀야 돼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렇게 해야 돼요. “주 안에 편안하게, 하나님이 이렇게 믿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 기도하기도 전에, 아멘하기도 전에 전화 와서 남편 아프다는 소리를 들을 때 도대체 그럼 하루에 기도를, 하루에 30분했는데 아팠으니까 내일은 몇 분 됩니까? 


날로, 날로 한 몇 분해요? 한 시간까지 가는 거예요. 그것도 안 나면 한 시간 반까지 “이케요?” 더 할 거예요. 그때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은 말씀이 생각나지요. “누구든지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주님이 주신 그 말씀이 느껴집니다. 느껴지고, 또 사랑하는 뭐 이렇게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할 때 하나님께 갑자기 “하필이면 제게 그런 재난을 주십니까?” 막 원망하고 하지요. 


그럴 때 마태복음 9장이 또 생각나는 거예요.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라.” 아, 그런 이야기를 진짜 목사가 심방 가서 해줘야 되는데, 이건 뭐 교인 하나 떨어졌다 각오하고 해야 돼요. “이제 두 번 다시 나 안 볼 거야!” 라는 각오하고 그런 이야기해야 돼요. 


이때라~ 이때라♬ 바로 말씀이 적용되는 이때를 주시는 이유가 우리가 말씀을 증거 하는 결과물로 이미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리 몰고 저리 몰고 다니면서 “그러니까 이 말씀이 이런 뜻이야, 이 바보야! 그러니까 이 말씀이 이런 뜻이잖아!”가 되는 거예요. 회사하다가 부도 날 때는, “부도내게 하시는 이런 것도 뜻입니까?”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 말이 그런 뜻이야!” 


그리고 뭐, 너무 자기에 대한 애착이 있을 때는 또 디모데후서에 “마지막 때에 너만 사랑하고” 또 나오잖아요. 어느 성경이든 간에 우리가 성경이라는 거미, 이 촘촘한 거미줄에서 벗어 날수가 없어요. 성경 안에서 벗어 날수가 없습니다. 어제 대구 강의 한 거 잠시 해 볼게요. 마태복음 13장. 제가 이거 하면서 제 마음에 굉장히 은혜를 받은 대목이라서 제가 참을 수가 없네요. 


그게 뭐냐 하면은 마태복음 13장 4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이 대목에서요. 제가 은혜 받은 게 이 그물입니다. 그물. 천국은 모든 고기를 다 그물에 모았다.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탁, 감동이 된 것은 뭐냐? 어떤 인간도 주님의 그물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은 없는 거예요. 


김정은도 마찬가지고, 저 불교신자도 마찬가지고, 달라이 라마도 마찬가지고. 지금 누구 그물에 있다? 주님이 쳐놓은 그물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 모든 인간이 그물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요. 이미 주님께서 모든 인간에 대해서 전도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가두어 놓고 전도 하는 거예요. 가두어놓고. 


그러니 새삼스럽게 교회 키우려고 전도할 필요가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그물을 우리가 던지는 게 아니에요. 그물은 누가 던집니까? 주님이 던지는 거예요. 주님이 이미 던져줬어요. 산자나 죽은 자나, 나이 많은 자나 직업에 관계없이, 직장과 관계없이, 병들고 아프고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주님의 그물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어떤 기능을 하느냐? 천국 기능을 하는데, 천국이라 하는 우리의 예상은 뭐냐 하면은, 이미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천국을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은 그게 아니고, 천국은 뭐냐? 분류하는 기능 자체가 천국의 효과고 능력인거에요. “너는 좋은 고기, 너는 나쁜 고기.” 이렇게 분류를 한다는 거예요. 분류.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만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분류 기준을 알아요. 구원 받은 사람만. 그럼 나쁜 고기는 뭐냐? 그물에 갇힌 것도 모르고 하나님이 인간을 분류할 때 어떻게 분류하는지도 몰라요. 그러면 좋은 고기, 다시 말해서 이미 구원 받은 사람에게 알고 있는 기준은 뭐냐? 요한복음 오늘 14장 봅시다. 뭐냐 하면은 14장 나오지요? 


인간 떼놓고, 인간 제껴놓고 “내가, 예수님 내가 내 마음대로 결정했음.” 이게 기준이에요. “내 마음대로 결정했어.” 그러면 여러분한테 이 어려운 질문을 해보겠어요. 그러면 구원의 기준이 십자가 피 입니까? 예수님이 “내 마음대로 결정 했어.” 예수님의 선택입니까? 이게 제 질문이에요. 


와, 어렵다. 학문은 객관성이 두 개밖에, 이게 두 개밖에 없는데. 에베소서에 보면 순서가 뭐냐 하면은 “창세 전에 택하사”가 되어 있고 뒤에 보면 “피로 한다.”고 되어 있지요. 피로 이렇게, 예수 안에서. 더 쉽게 말해서 모든 권한을 예수님한테 일임했다는 말이죠. 아버지가 “너한테 다 맡길게. 나 다 맡길게.”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하는 일을 하다보면 뭐가 등장하냐면 비로소 지옥 갈 사람이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지옥 갈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누구 원수냐 하면 주의 원수에요. 왜? 사탄은 하나님이 부리는 종이니까, 심부름꾼이니까. 주님께서는 지옥 갈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서, 만들어내기 위해서 주님을, 아들을 ‘주’되게 만들어버렸어요. ‘주’되는 과정 속에서 얼마나 주님께 핍박을 가하고 욕을 많이 했습니까? 


특히 마귀가, 마귀가 이걸 알아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벌써 왔습니까? 우리를 멸하려고 왔습니까?” 이미 이야기 했잖아요. 그 이야기를 인간들은 무슨 말인지 “저 무슨,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악마와 예수님 이야기는, 이미 악마는 멸하기로 작정되어 있고, 지옥가기로 작정되어 있고, 유황불에 가기로 되어 있고. 원래 유황불이, 지옥이 마귀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그 추종자들이 다 같이 거기에 합세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천국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무슨 나라냐 하면 이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 네? 아들의 나라라고요. 지옥은 아들께서 선택, 사랑하기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 미워하기로 작정한 사람이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니깐요. 이거는 인간은 빠지고 하나님 자기끼리 다 해요. 


왜냐하면 우리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형상에 주도권이 있지, 만들어진 우리한테 주도권이 없어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선택이 구원의 근거가 돼야 된다고 하는데, 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되느냐? 이 말은 예수님의 그 구원하는 취지는 선택이지만 그 근거는 예수님의 피에요. 예수님의 피. 왜? 피가 뭐냐 하면은 살해당했잖아요. 


그럼 살해당했으면 누가 있어야 돼요? 살해한 쪽이 있어야 되겠지요? 살해한 쪽. 그러니까 그게 뱀의 후손이단 말이죠. 약속대로 주님은 살해당할 뻔해도 안돼요. 완전히 살해당해야 돼요. 살해당해야 될 이유가, 그래야 이게 베드로 이야기 했잖아요. 이 말이 뭐냐 하면은 단절이 성립돼요. 단절이 성립 안 되면 자꾸 구원해달라고 요청을 해요. 


“제발! 플리즈~” 아, 미안합니다. 침 튀겨가지고. “플리즈~ 플리즈~” 이러고 있단 말이에요. “베드로야! 니는 없어! 니는 없어! 니 자리는 없어!”라고 완전히 내쳐버려야 돼요, 내쳐야 돼요. 전도하는 요령은 “예수 믿지 마세요.” 하는 방법이 최고 좋은 방법이에요. “교회 오지 마시고, 예수 믿지 마세요. 교회 다니지 마시고, 잘 하던 거 있잖아요. 네? 절에 가는 거, 그 절에 가서 기도하면 복 받고, 그거 하세요. 


주께서는 간절히 빈다고 구원하지 않습니다. 두드려봐야, 당신 두드려봐야 발만 아프고 시간만, 그냥 하지 마세요. 주님께서는 자기 원하는 자를 임의로 창세전에 원하는 자를 인도합니다.” 그게 전도입니다. 전도 내용이 그게 되어야 돼요 


예, 10분 쉽시다.

 이명직 (IP:110.♡.86.59)17-04-21 10:27 
가락-요한복음14장1절(인간 개조)170418b-이 근호 목사 


제가 아까 첫 번째 강의 마지막 부분에 답변을 안했답니다. 답변을 안했는데 답변해 드릴게요. 선택은 배후에 은밀히 숨어 있는 거고요. 역사 속에 나타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근거로서. 그러니까 두개를 합치면 되는 거지요. 두개를 합치면 되는 거예요. 


나타나는 것은 십자가고, 그 배후에는 주께서 선택하신 거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선택한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이전에, 그러면 십자가만 십자가냐? 안 그러면 예수님이 태어나서 살아온 모든 것이 십자가와 연계되어 있는가? 이거는 여러분들 아시죠? 다 연계되어 있죠. 


어릴 때부터 나타났을 때에 헤롯왕이 달려들어서 오폭이다. 오폭. 폭탄을 잘못 투하해서 이미 빠졌는데 거기에다가 베들레헴 두 살 밑에 애들, 화학 약품 폭격 했는지, 해서 다 죽여 버리고 거기에 있는 엄마들이 막 울었잖아요. 근데 엄마들이 울었을 때에 헤롯 원망 하겠어요? 예수님을 원망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하지요. 


“왜 괜히 나타나서 애매한 우리 애가 죽었다고!” 그만큼 인간은 권력에 대한, 헤롯에게 반기 들었다는 게 증거가 없어요. 그리고 시위 했다는 거 없어요, 그 권력에 철저하게 물들어져 있고 그렇게 양육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딱 짜여져 있는 권력체를 힘들게 했다면, 우리 최고 권력자를 힘들게 한 그쪽이 나쁜 거예요. 그게 예수님이 나쁜 거예요. 예수님이. 


그 동방 박사도 나쁘고, 동방박사 또 쏘려고 미사일 쐈는데 그것도 또 실패 해버리고, 주께서 천사를 통해서 다 빼돌려 버린 거예요. 빼돌린 거예요. 빼돌림으로써 그때부터 헤롯은 무슨 역할을 했느냐 하면 “애굽에서 내 아들 불러냈다” 하잖아요. 헤롯은 바로, 바로의 역할을 해야 되는 겁니다. 


바로의 역할을 해서 나중에 본디오 빌라도까지 연결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동적으로 살해, 본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민중들이, 백성들이 의견을 총괄하고 합쳐서 대신 행사 해주는 인물로서 본디오 빌라도가, 헤롯이 이제 가는 길을 가야 돼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패가 저쪽으로 한패가 이렇게 뭉쳐져요.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이거는 아주 평화로운 세계 입니다. 그 복음 이야기 안하면 명절날 아주 평화로워요. 교회 이야기 하지 마세요. 평화로워요. 좋게 지냅니다. 막 떡하고 송편 다 싸주고 오는데 괜히 교회 이야기해서 욕만 얻어먹고 “오지마라!” 그래서 항상 주님께서는 일을 만들어요. 


가만히 있어도 일을 만들어서 복음을 전하지 않기 위해서 입을 아무리 다물어도 사태를 일으켜 버려요. 사태를 일으켜 버리면 무심코 복음이 나와서 완전히 그 복음이 나온 주고, 받는 한 가운데서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층에 속한다는 것을 티내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작업을. 


그래서 이제 아까 이야기 하면, 어릴 때부터 쭉 나오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떼놓고 가는 것도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자가를 아십니까? 누구의 책 제목 같다 만은. 십자가를 아십니까? 할 때 십자가 아십니까? 보통 이야기 하게 되면 선교단체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할 때 일곱 번의 문장을 해놓고, 일곱 번 문자 분석 하고 난리예요. 


십자가만 딱 끊어서 십자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했고, 마지막 때는 내 영혼을 받아주고, 이 이야기 했다는 거예요. 그것을 십자가상에 칠언, 일곱 가지의 언어. 이렇게 하지요. 십자가는요? 예수님 출생부터 다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더 나아가서는 구약부터, 창세기부터 다 관련 되어 있지만, 그래서 이 마태복음 14장도 십자가 내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크게 한번 그려보죠. 이 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느냐? “베드로 나가!” 베드로 떼놓기, 베드로 떼놓기가 있어요. 그러면 베드로는 누가 선택 했습니까? 예수님이 선택 했죠? 선택 해놓고 떼놓아 버려요. 선택을 해놓고. 예수님이 선택 해놓고 제자, 그것도 수제자로 만들어 놓고 떼놓아 버려요. 


“네 위에, 반석위에 교회를 세운다.” 해놓고는 주께서는 떼놓아 버립니다. 그러면 떼놓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제자로 삼지 말지 지금 와서 왜 “너 안 데리고 간다.” 이러면, 그러면 열두 제자를 그동안 함께 삼년동안 같이 붙어 다닌 이유가 뭐예요? 실컷 와서 마지막 고지가 저긴데, 이제 다 왔는데 “가거라!” 이 베드로가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오죽 했으면 “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하겠어요. 이제 베드로는 섭섭함을 좀 자제하고 “어디로 가느냐?”를 묻죠. 어디로? 참 어려운 질문을 했어요. “어디로 가느냐?” 근데 그 질문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대구 공부를 마치고 우리교회 권사님이 저한테 한 질문이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에요. 


뭐냐 하면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하는 질문이에요. 난 그 권사님은 진짜 머리가 천재 같아. 참 진짜 머리 똑똑해.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분이 질문했기 때문에, 다른 분이 거기에 같이 관심을 가져줘야 공부가 되기 때문에, 그 질문을 다른 분에게 했어요.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어떻게 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분이 “천국에 죄가 있습니다.” 라고 했어요. 제가 정답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권사님이 꽤 당황스러워서 그 다음부터는 강의가 안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 권사님 오늘 아침에 전화 했어요. “다시 강의 들어보니까 자기가 잘못 알고 있었다.” 해서 나도 아이고, 다행이다 생각 하는데. 


사실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라는 강의를 내가 그런 방식으로 강의를 안했던 것 같아요. 대구 강의를 들어보면. 그런데 질문은 그렇게 했거든요. 답변 받아가지고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 질문을 내가 던졌고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죄가 있습니다,” 라고 할 때 내가 “옳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아는 상식은 천국은 뭡니까? 이미 죄가 처리된, 처리된 상태를 천국이라 하잖아요. 천국에는 아픈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고 죄가 없는 곳이 천국이잖아요. 요한계시록 21장에. 그러면 천국에 죄가 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바로 개념을 질문자가 그 죄라는 개념을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죄의 개념을 가지고 그대로 사용 한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죄의 개념을. 베드로를 떼놓았다. 라는 말은 앞으로 베드로를 구원할 수 있는 모든 준비 작업 속에는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가 지금껏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나름, 나름 예수님에 대해서 정리, 들었던 것, 노트 정리한 그 개념을 전부 다, 다 수정해야 돼요. ‘인간 개조’ 오늘 제목이 이거 같아. 완전히 인간이 개조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갑니다. 인간 개조 돼야 돼요. 


어느 한 부분, 어느 한 부분만 개조 될 수 없어요. 전부 다. 인간 개조 되는데, 인간이 개조 된다는 말은 다른 말로 인간의 마음이 바뀐다는 거지요. 인간의 마음이 바뀐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 언어로 되어 있어요. 마음을 표현 할 때는 언어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껏 상상했던 그 천국, 그 예수의 나라, 하고 전혀 거기에, 거기에 말리지 않는, 거기에 포함 되지 않는 세계에 가는 거예요. 왜? 그래야 개조가 되거든요. 약간 엮여져, 약간 이렇게 이어져 있으면 “아, 그 부분은 놔두고 나머지는 고치면 되겠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전부 다 “바꿔, 바꿔, 다 바꿔" 전부 다 바꾸는 거예요. 전부다, 전부 다 바꿔요. 


전부 다 바꾸는데 그 바꾸는 근거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서 예수님과 아버지만이 아는 언약적인 내용을, 개념을, 기존의 개념에 실어서 다시 제자들에게 택했으니까, 제자들에게 사도로서 만들기 위해서, 개조하기 위해서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다 보내줍니다. 


그러니 이 작업이, 이 작업을 우리가 설명을 하려고 하면 굉장히 오래 걸리겠죠. 오래 걸리지만 오늘 다 하는 건 아니니까, 차츰 하면 되니까 진도가 14장, 15장 나가면서 진도 나가면 되니까 그것은 우리 할일이 아니고, 14장부터 지금 하는 처음 시작부터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은 그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내가 있다고 이야기 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죄 없는 천국을 상상한 사람한테는 반발이 나오지요. 성질이 나오지요. 이단 아니야? 그렇게 되죠. 그게 뭐냐 하면은 뭘 모르냐 하면, 죄에 대해서 예수님이 죄라고 할 때만 죄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나름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아무리 내가 죄인이고 나빠도 선과 악도 제대로 분간 못할까? 


선과 악도 제대로 분간 못할 리가 있겠어?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고, 선과 악이 딱 대비되면 아, 이건 선이고 악이고 대번에 알지. 자꾸 나름대로 자신만만해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신만만함의 한계가 종교 개혁 때 칼빈이라는 기독교 강요에 보면 그 한계가 드러나요. 칼빈이 뭐라고 하냐 하면은 “이거는 나쁜 거고 이거는 좋은 거다.” 


딱 구분 하려고 하니까 아~ 애매한 게 또 있는 거예요, 애매한 게. 그것을 중립적인 것을 또 하나 설치해 놓았어요. 아주 악도 아니고 아주 선도 아니고, 중간 쯤 되는 거. 어떤 거? 내가 물 마시는 거. (물 한 모금 마시고) 내가 방금 나쁜 짓 했습니까? 착한 짓 했습니까? 성립 안 되지요. 바람 부는 거, 겨울에 눈 오는 거 나빠요? 안 나빠요? 


이게 칼빈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왜? 칼빈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기존의 철학이 들어가 있으니까, 법과 철학을 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이것을 설명해서 교인들을, 천주교에서 내려오는, 던져 나온 교인들을 개신교, 개혁주의로 여기에, 교회에 모아야 하거든요. 


스위스의 베른에서. 모아야하기 때문에 그들이 납득 하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괜찮은 교회 만드는데 지금 급급하다 보니까 기독교 강요를 만든 겁니다. 그게 오늘날 합동측, 통합측 전부 다 장로교회의 기본 매뉴얼이 되었어요. 매뉴얼. 그게 개혁주의 전통 신학이라는 겁니다. 칼빈 자체가 문제예요. 칼빈 자체가. 시간이 가더라도 그것을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선하다, 악하다, 중간이다. 이렇게 판정을 내리는 것이 왜 잘못이냐 하면은 선과 악일 때에는 반드시 철학적인 개념에 의하면 자율권이 보장 되어야 돼요. 자율권. 판사하고 검사하고 싸우는 게 뭐냐 하면은 “그 범인이 어쩔 수 없이 했다.” 하는 게 변호사가 하는 일이고요. “본인이 의지를 발동해서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했다.” 하는 것이 검사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판사는 그것을 감안해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과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부분을 감안해서 형량을 때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선과 악이 나눠지는 게 아니고 이게 흥정이 돼요. 선과 악이, 흥정이 되었다고. 그 흥정이 되는 이유가 뭐냐면 인간에게는 뭐가 있다고 봅니까? 


인간은 자유의지, 또는 자율의지, 또는 자율성이 있다고 본겁니다. 인간에게 자율성이 있다는 거 누가 이야기 했던가요?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없지요? 성경에 없어요. 이천 년 신학자들이 뭐라 하냐면 이렇게 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율권이 있는 것처럼 그 자율권을 인간에게 줬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 자율권, 자유의지, 흔히 자율권이라 하는 것은 철학적 용어고, 보통 신학에서는 자유 의지라 하는데 자유 의지를 해줘버리면 어떤 결과가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새 언약을, 새 언약의 성취가 안돼요. 


예수님의 새 언약은 뭐냐 하면은, 우리의 마음속까지 우리의 허락 없이 그냥 강제로 딱 장착을 해줘야, 그 마무리 되는 게 그게 새 언약이에요, 택배가, 택배 회사에서 택배 물건을 문 앞에 놔두면 이거는 택배가 아닙니다. 택배 회사 입장에서는 문 열고 싸인 받고 가게 되면 자기의 물건을 인수 하면 그것이 마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는 복음의 택배는 그 정도가 아니에요. 아예 밤에 자고 있든지, 나쁜 짓만 하고 있든지 해야 돼요. 자고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이미 구원 받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구원 받은 그것을 결과적으로 느끼는 것은 인정 되는데, 그 들어오는 시점을 본인이 예상하면 안돼요. 


그러면 그거는 주님의 새 언약, 성령이 온 게 아니고, 새 언약은 성령이니까, 성령이 오신 게 아니고 지가 소설을 쓴 거예요. 소설을. 그것은 성령을 안 받은 티를 감추기 위해서 받은 티를 내는 겁니다. 위장하는 거예요. 성령이 올 때 이렇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올 때는 이렇다가 아니라 성령 받고 난 뒤에 이렇다가 돼요.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바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누구 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성령 받고 난 뒤에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다.” 라는 것을 본인이 감수하고 인정하는 겁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조건적인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선과 악을 동원시키기 이전에 이미 어디에 속했다? 이미 악이고, 죄고, 저주 받아도 할 말이 없고,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지옥 보낸다 할지라도 주님의 결정에 하등 하자가 없음을 내가 찬양해야 돼요. “참 잘하셨습니다! 죄 짓는 인간 벌 때리는 거, 그것은 주께서 당연히 하실 일입니다. 정말 잘 하셨습니다!” 


성령 안 받으면 도저히 그렇게 안돼요. 왜냐하면 성령 안 받게 되면 내 중심이에요. 자기 구원 중심인데, 내 중심이니까 내 구원 중심이에요. 성령을 받으면 내 중심에서 벗어나서 누구 중심이냐 하면 예수님 중심이 돼요. 이미 예수와 함께 있기에 마음껏 예수님의 중심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껏 박수를 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결정이, 내가 구원되기 때문에 박수 치는 게 아니고 주님이시라는 그 이유만으로 박수치기 위해서 뽑힌 거예요. 주님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그 구약적 예가 뭐냐 하면은 욥입니다. 욥이 고난 받을 때, 심지어 이 세상에 어떤 인류 가운데 욥만큼 고난 받은 사람은 없어요. 


성경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아무리 복을 받아도 솔로몬만큼 복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요강도, 숟가락, 젓가락도 전부 다 금덩어리에요. 요강도 그게 금이에요. 완전히, 진짜. 그리고 제일 밑바닥 내려간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질문을 누가 했는가? 본인이 시작했어요. 아까 했죠? 틀린 질문에는 해답이 없다는 거예요. 질문을 계속 해야 되는 거예요. 


질문은 자기 체험에서 나오는 거죠. “아픕니다. 너무 아픕니다. 이럴 것 같으면 저를 죽여주옵소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그러면 아예 죽이면 죽이든지, 죽이지도 않고 아프기만 한 이유가 뭡니까? 제가 잘못 했으면 잘못 했다고 이야기를 해주시고.” 계속 이야기해요. 아무 소리 안 해요. 떠들기는 친구만 대따 떠들지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기껏 주께서,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거였습니다.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네가 파도치는 이유를 아느냐? 하늘에 별 뜬 이유를 아느냐? 너는 바로 네 중심이다 말이야.” 그러니까 욥이 그날 아파서 “아야~” 했는데 그 “아야~”를 주께서는 결과물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아프기에, 자기 밖에 모르기에 자기 이야기만 나오는 그런 식으로 지금 살고 있다는 겁니다. 아까 전에 우리 제목이 뭐라 했습니까? 인간 개조죠.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개조가 됩니까?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졸지에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라고 주님만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다 풀리지요,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모든 생명은 주님만 있으면 그 주님 말씀에 의해서 생명이 나오면 되니까. 지금 우선순위가 나부터 출발 하는 게 문제가 돼요. 나부터. 나 있고, 날 어떻게 데려가실 겁니까? 지금 문제가 그거잖아요. 베드로가 아까 그 문제였잖아요. “저 어떻게 할 겁니까? 날 왜 내칩니까?” 이 말 아닙니까? 


이것을 바꾸는 거예요. 베드로가 주님과 같이 하지만 내치는 이것도 주님의 주되심에 꼭 필요한 과정이고 경과에요. 있어야 될 사건이에요. 예수님은 혼자서 아버지의 일을 다 이루어야지, 베드로가 거기 끼어들면 안 됩니다. “나도 눈치 좀 챘거든?” 이러면 절대로 안 돼. 눈치를 절대 못 채야 돼요. 


눈치 못 채기 위해서는 베드로 나름대로의 계획, 생각했던, 주님께 들었던 정리되고, 일기장 쓰고, 노트 정리 해놓은 모든 그 개념 자체는, 인간에게서만 통하는 그런 인간의 언어의 개념적인, 개념들이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할 때는 뭐냐 하면은 이미 우리는 죄를 알고, 선이 뭔지 아는데 “그 죄가 천국에 있습니까?” 물은 거예요. 


그 물었던 권사님은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죄는 없다고 여기는 거예요. 저는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죄의 개념 말고 다른 개념의 죄는 주님의 개념 됨에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한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천국이 어떤 곳이냐? 부터 이미 그게 새롭게 정리 되어야 될 필요가 생긴 거예요. 


천국에 죄가 있는 천국 같으면 그 천국은 내가 아는 천국과 다르잖아요. 그러면 그 천국은 어떤 천국이냐? 죄라는 것은 예수님이 죄라고 규정 할 때만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누가 계시냐? 규정한 자가, 예수님이 계시지요? 그러면 그것이 뭐냐? 그게 천국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천국이 성령을 통해서 미리 와버리면 지금껏 성령 받기 전에는 내가 알던 죄의 개념과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주와 함께 있으면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함께 있으면서 죄의 개념이 같을까요? 다르지요? 다르지요? 그 다르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존재적인 문제가 아니고 다르다는 게 문제예요. 다르게 한 것은 그것은 누구 덕이다? 예수님의 의의 덕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안에서 우리가 의인 되는 겁니다. 천국에서. 예수님이 천국 사람이면서도 죄에 대해서 언급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죄가 있는 거예요. “죄 없어!” 이게 아니고 “저게 죄야! 이게 죄야! 너희가 죄 없다 하니까 죄야!”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그 대상의 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있듯이, 그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대로 복제가 되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와 버립니다. 들어와 버리면 우리의 바깥에 뭐가 나가냐 하면은 기존의 인간들이 상투적으로,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선악 체제에 의해서 알고 있던 모든 개념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 나올 때 죄라는, 주님 보시기에 죄라는 레터르letter 그 딱지를 붙여서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기도해도 죄고, 십일조 해도 죄고, 교회 참석해도 죄고, 이 성경공부 해도 죄고, 강의해도 죄고, 설교해도 죄고, 예배 드려도 죄고, 다 죄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오죽 많이 들었겠습니까? 아~주 노트필기는 이렇게 해가지고, 그런데 막상 노트 이만큼 갖고 이제 “가자!” 이렇게 하니까 “오지마!” 이렇게 되었으니까 “why? 왜 저를 이렇게 합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간다는 말도 그것도 잘못된 말이에요. 


예수님 사이에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어요. 왜냐하면 주께서 오시기 때문에. 어디로 가는 것을 만약에 안다면 뭐합니까? 지하철 탈거에요? 버스 탈겁니까? 예? 어디로 갈건 데?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유대인 사상에서는 삼층천 이거든요. 지상과 음부와 그 하늘이 있습니다. 


하늘이 어디 있느냐? 그 질문만 할 게 아니고, 음부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부터 해야 돼요, 사실은!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쳐다볼게 아니라, 사실은 자신이 죽으면 음부에 간다는데, 그 무덤에 간다는데, 음부가 어디에 있는지 거길 가야돼요. 땅 밑에 있다고 본거에요, 땅 밑에. 하나님은 땅 밑에 있다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한계성을 충분히 이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인간이 쓰는 똑같은 언어를 사용해요. 아람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못 알아들어요. 원어 백날 파도 소용없어요. 어떤 사람이 저한테, 십자가 마을에 와서 실컷 시비 걸고, 뭐 나한테 하고, 뭐 이렇게 하는데, 자기는 원어, 원어로 하겠다. 원어. 원어라는 게 없어요. 


전에 이야기 했지만 원어가 없어요. 언어에요, 언어(원어-언어) 왜냐하면 히브리어라 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쓰는 언어라니까, 언어. 왜 자꾸 원어라 해서 다른 것과 특별화 시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히브리인들이다. 그 백성이 쓰는 언어가 히브리어에요. 네? 


한국은, 백성이 한국 사람들 같으면 한국말이 그 사람의 언어잖아요. 왜 원어라고 따로 고집을 하냐 이 말이죠. 그러면 언어를 봅시다. 그들의 언어, 히브리 언어. 한번 물어봅시다. 히브리어에 대해서 히브리인들이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저, 이 목사님, 한국말 압니까? 잘 압니까? 우리말 겨루기 한번 해볼까요? KBS에. 8시에 하는 거. 


모르지요? 산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필요한 것만 뽑았어요. 도서관 관장이 책 다 읽었습니까? 도서관 책. “어느 책, 어디 있습니까?” “네, 뽑아드리겠습니다.” 이건 되는데 그 책 다 읽었어요? 그 책 다 외우고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언어라 하는 것은 필요 시 적시에 필요한 것 뽑았는데, 뽑을 때 어떻게 뽑느냐 하면은 비슷한 것을 뽑아요. 


정확한 의미를 담을 언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요. 정확한 의미를 담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고 “아, 이런 마음을 뭐로 표현하지?” 비스무리한걸 후보감을 서너 개 이야기해요.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 여성주의자는 이렇게 합니다. 여자들이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말을 많이 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왜냐 하면은 여자하고 남자하고 근본차이가, 여자는 임신을 하기 때문에 평소에 타인에 대한 자기 말, 자기 안에 자기 외부적인 물질이, 물체가 들어온 것에 대해서 그걸 여성은 기본적으로 아기를 낳으면서 늘 주고, 받고 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언어를 퍼 담아서 저쪽에 넘겨주면서 적당한 언어를 좀 더 정확하게 구사하는 그러한 성깔이 있어서 그렇게 말이 많다는 거예요.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네, 그런데 애를 안 낳은 여자는 어떻게 되는지 그건 내가 모르겠는데, 애 안 낳은 여자 같으면 어릴 때부터 여자로 태어날 때 그렇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해요. 특히 그 임신했다는 그 점에서. 왜, 남자들은 임신을 모르니까,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가설로 일단 합시다. 정답으로 지금 내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래서 남자들이 여자 말 들으면요. 


한마디 하면 될 문제를 같은 문장을 또 반복하고 있어요. 전화 딱 오게 되면 벌써 오늘은 두 시간짜리, 한 시간짜리 다 마음잡고 있어요. ‘오늘 잘됐다. 오늘 이걸로 하루 종일 뛰자!’ 하는 식으로 이렇게 하고 남자는, 남자가 전화 딱 오게 되면 ‘쓸데없이 전화는 하긴 왜 하고, 빨리 끊자!’하는, 벌써 마음 준비부터 빨리 끊자 나오고 여자는 한번 놀아볼까 하고. 


마음이 정말 많이 다르거든요. 일리가 있는 거 같아. 어쨌든 간에 언어라 하는 것은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계속해서 개발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문화가 발달되게 되면 언어가 세분화 됩니다. 지금은 세분화 되어서 세분화된 그 의미가 옛날 같으면, 예로 천 개라면 천 개가 살고 있는 이 단어를 가지고 천 개 있는 의미를 가지고 오백 개 밖에 안 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가지고 이것을 설명을 하려고 하니까, 


이 원어라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입니까?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푸느냐? 성경은, 성경이 확증되고 난 뒤에는 성경 보는 자기의 삶이 있잖아요. 그 삶이 이 성경의 저자가 누구죠? 성령이죠? 성령이 우리의 삶을 지적하지요? 지적질 하잖아요. “네가 어디서 죄인이고, 네가 왜 저주 받을 수 받게 없는지.” 그 지적질을 하면서 나오는, 지적질을 경유하면서, 그래, 탕자가 밖에 가출해야 아버지를 알아요. 


가출 안하면 그냥 집에 있던 아버지하고 달라요. 가출하고 나오니까 “아버지 아니라도 괜찮아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버지 아니라도 괜찮은데, 아버지라고 해주니까 얼마나 그게 고맙습니까? 제일 맛있는 밥은 굶고 먹는 밥이 제일 맛있어요. 굶을 때. 그처럼 자기 자신을 알아요, 탕자는.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가 시켰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좋아서 나왔습니까? 자기가 가출하고 싶다는 말 자체가 이게 뭐냐? 내가 아니고 곧 탕자 사실 나쁜, 나쁨이 나를 만든 거예요. 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자기가 태어난 거예요. 그런데 맏이는 “내가 뭐 잘못됐습니까?” 자기가 우선이고, 자기는 죄 안 짓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나한테 소도 안 잡아주고 가락지도 안줍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가락지 하니까 누구 생각난다. “왜? 나에게 이걸 안 줍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뭐로 만듭니까? “나는 죄인이다.”에서 뭡니까? “죄가 너를 만들었다.”로 인간 개조를 시키는 겁니다. 이게 성령께서 오셔서 하는 거예요. 미리 한번 보겠습니다. 16장 봅시다. 16장 8절에, 16장 8절을 누가 좀 읽어보세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보세요. 그가 와서 죄, 의, 심판 이 세 가지가 같은 단어입니다. 같은 의미에요. 체포하려면 죄 나오고 의 나오잖아요. 죄 알면 의 나오고 심판 받아야 되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은 뭐냐 하면은 이미 죄가 뭔지 확정 됐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내가 나쁜 짓을 할 때는 죄고, 착한일 하면 의고, 나쁜 짓도 아니고 착한 짓도 아니면 칼빈대로 뭡니까? 중성, 중립이고 이런데, 주님은 뭐냐? “너희들이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 그러면 그게 유일한 죄가 되는 기준이 되는 거예요.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가지고 그대로 들고 오는 겁니다. 그대로 들고 오게 되면 우리는 뭐냐? 


주님과 함께 동행 하지 못하는 베드로 꼴이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만약에 말씀 운동한다. 그러면 신약에서 뭐가 됩니까? “내가 말씀 운동하니까 잘했지요?” 하면 성령이 뭐라고 합니까? 그게 바로 뭐다? 죄가 되는 거지요. “내가 구속사 합니다.” 이게 뭐가 돼요?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나는 십자가 앞에 죄인입니다.” 


그게 바로 성령께서 고백케 하는 겁니다. 그러니 뭐, 피를 모른다고요? 말라비틀어진 피를 모른다? 피가 뭐, 말라비틀어진 피가 왜 피냐? 이렇게 나와. 성령을 안받아보니까 그런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구속사 가지고 오는 게 아니고, 조직신학 가지고 오는 게 아니에요. 성경 신학의 체재를 가지고 오는 게 아닙니다. 뭐 가지고 옵니까?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다 죄로 규정할 수 있는 그것 가지고 와요. 그게 뭡니까? 십자가지요.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어리석다 하니까, 부끄러워하니까. 너희들은, 자기들은 지혜롭다 하고, 어리석은 그 십자가를 내세우죠. 이게 성령께서 하시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은 성령이거든요. 


그렇다면 “어디로 가십니까?” 할 때 ‘어디로’라 하는 것. 장소, 시공간 개념에서의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로 가는 것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동네에서는 어디로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 여기서, 그 권사님한테 제가 답변을 하면서 또 한 가지 제가 언급한 게 있어요. 


권사님한테는 이제 다 풀렸어요. 오늘 아침에 전화하고 풀렸는데, “어디입니까?” 이것은 오늘 아침에 뉴질랜드에서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저한테 카톡으로, ‘카톡, 카톡’ 해가지고 질문을 해요. 질문을 하는데 그분의, 그 목사님의 질문이 뭐냐 하면은 강도가, 예수님이 강도 보고 “네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어요. 낙원에. 


그럼 오늘 밤에 낙원에 있지요? 그게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에 십자가가 세 군데 있었잖아요. “오늘밤에 낙원에 있다.” 오늘밤에 어디? 낙원. 다시 말해 이건 천국입니다. 오늘밤에 예수님과 함께, 나와 함께이니까. 뭐 낙원 해도 되고, 천국가고 있다 이 말이에요. 물론 뭐 학자들에선 낙원이라 하는 것이 천국 이전에 뭐 어떤 이야기 하는데, 아브라함이 어떻고 이야기 하는데, 하여튼 천국이라 보고. 그럼 이미 함께 있잖아요. 


그러면 그 목사님의 질문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잖아요. 죽었을 때 그곳이 어디냐 이 말이에요. 이게 질문이에요. 천국에 가 있어야 되는데, 오늘밤에 갔으면 오늘밤에 천국가야 되는데, 사도신경에 보면 뭐라 되어 있습니까? 사흘 동안 어디가 있어요? 음부에 가있죠? 그럼 음부에 가 있는 게 맞습니까? 천국에 가 있는 게 맞습니까? 


그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게 질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지요. 예수님과 관련된 시공간은 묵시적 공간이에요. 묵시적 공간. 이 묵시적 공간이 역사 속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젓가락을, 반듯한 젓가락을 물속에 집어넣으면 그 물밑에 한번 보세요. 젓가락이 휘어졌습니까? 어떻게? 휘어져 보여요? 안 그러면 똑바로 보입니까? 


구부러져 보이죠? 그게 물리학에서는 빛의 직진성 때문에 그래요. 빛의 구부려지는 선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빛은 직진을 하기 위해서는 구부러진 모습을 보여야, 그게 가장 빛이 가까이 가는 경로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쨌든 간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구부러져 보이지요? 우리는 저것은 구부러졌다고 하는데 빼보면 어떻습니까? 


똑바로 펴지요? 묵시적 개념이 인간의 죄악 된 시공간에 들어오게 되면 이게 구부러져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다중 현실이라 했잖아요. 지난 수련회 할 때 다중 현실. 이 세상 바깥에 주님의 세계가 있는 게 아니고, 이게 같이 있는 거예요. 같이 있으면서 사람들은, 같이 있으면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같이 있으면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다락방에 있나? 지하방에 있나?” 그래서 표현 할 때는 뭐냐 하면은 음부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마치 땅 밑에 라고 표현한 거예요. 그게 이제 전도서에 나오니까. 왜냐? 인간이 어떤 쓰는 단어에, 인간이 쓰는 단어 자체가 인간들이 이해하는 시공간으로 뭉쳐져 있는 단어들이거든요. 


그걸로 묵시를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표현 하는 거예요. 주와 함께, 그 강도와 함께 음부에 가 있는 겁니다. 음부에 가 있는데 그게 낙원에 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니, 낙원에 갔어요? 둘 중에 한 개만 하고, 둘 다 하지 말고!” 이렇게 고집을 부릴 수가 없는 겁니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오늘 본문에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할 때에 예수님 답변은 아버지께로 간다는 거예요. 사실 이게 더 정답이죠. “아버지께로 간다.” “어디로 가십니까?” 시공간을 묻는 거예요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이 말은 “너는 아버지께로 가지 못할 그런 입장에 있다.”는 거예요. 


“너는 아버지하고 끊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언약적 대상자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언약적 대상자가 아니다.” 전에 제가 강의할 때 했지요? 언약을 주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약을 주시고 그것을 성취하면서 여호와의, 여호와의 됨을 나타내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한테는 언약을 주셨고, 전능하심 주셨고, 그걸, 언약을 누가 이룬다? 모세가 이루는 게 아니에요. 언약을 주신분이 말씀을 주신분이 말씀을 해석하듯이, 언약을 주신분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이 인간세계에 뛰어드신 분이 여호와 또는 여호와 이름 또는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름이니까, 이름은 반드시 실체를 전제로 할 때 이름이 있어요. 개가 있을 때 개 이름을 부르지, 개가 없는데 이름을 붙이면 이상하잖아요. 그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에 합치되는 개가 실체로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이름을 부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면 하늘에 계시잖아요. 


하늘에 계신 것은 숨어계신 분이고 인간과 함께 동거동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계시는 거예요.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주님을 부르는 게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는, 이름이니까 함께 계시는 우리가 이름을 부르는, 자기 이름을 부르고 누가 불러 주듯이 함께 계신 분과, 주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우리는 이끌림 받고 가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하늘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인간이 사는 이 동네에서 만들어진 주가, 주의 이름이에요. 사도가 말하지요. “당신 누구십니까?” 할 때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하십니다. 그래 핍박이 없으면 뭐가 안 된다? 주가 없어요. 사람에게 핍박을 받아야 주님이십니다. 


그냥 하늘에서 나풀나풀 내려오는 천사는 주가 아니에요. 핍박을 받아야 돼요. 구체적인 접촉, 구체적인 충돌이 실제 일어나야 돼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 말은 내가 지금 헛말 하고 있는 게 아니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두고 지금 구원을 이야기 한다는 겁니다. 


뭐냐? “그 십자가의 피가 우리 죄를 대신한 피다!”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거예요. 따라서 그 구체성 앞에서는 뭐가 없다? 필요 없다? 종교라는 게. 우리의 모든 종교 행각은 다 쓸데없는 거다. 다 필요 없는 거예요. 남은 것은 십자가가 지금 나의 십자가로서 성령께서 그 안에 집어넣어줬느냐가 문제입니다. 


과거의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과거의 1592년 임진왜란에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죽었으면 지금 살아 있다 하는 것은 무당들한테만 살아 있지, 다른 사람한테는 살아 있지 않다 이 말이죠. 그죠? 무당이 이순신 장군 이렇게 비는 것. 그런데 이순신 장군처럼 과거로 끝난 게 아니고, 십자가는 성령 안에서 이게 반복이 됩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는 이미 지나간 사건인데, 지금 사도바울은 우리 성도는 십자가를 알고 있다는 거예요. 오히려 사도바울이 반문 합니다. “몰라? 아니, 모른단 말인가? 그러면 성령 안 받았네? 


그러면 성령 안 받았으니까 네가 하나님 법 지키듯이 법 지켜서 구원 받으려고 지금 그런 시도 하는 거야? 그렇다면 너는 헛빵이야!” 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지금 사람 꼬시려는 의도가 그냥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을, 아버지가, 아들이 성령을 줬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들이 자기 티를 내면 그게 교회되는 것이지, 


성령을 줄 권한도 없는 내가 “아나 먹어라~” 해서 성령 나눠줘서 그래서 “우리 교회 만들자!” 대한 예수교 장로회 간판 들고 이럴 입장이 아니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은 자기 사람이 있다? 없다? 자기 사람이 없다 했지요. 자기 패를 생각하지 않아요. 완전 천상회의에 참석한 선지자처럼. 그냥 외치는 것을 외칠 뿐이에요. 


이 세상은 어둠에 있어야 되니까. 그 답변하기를 예수님이 같이 함께, 여기 섞여 있어 버린 겁니다. 섞여 있다면 어디로 간다는 게 성립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잖아요. “세상 끝 날까지 보라” 마태복음 여러분 그냥 볼 필요도 없어요. 다 외워요. 마태복음 28장 20절 마지막에 뭡니까?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뭐라고 되어 있어요? 


“너와 함께 있다.”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올라가니까 제자들이 뭘 쳐다봅니까? 쳐다보니까 누가 나무래요? 천사한테 까여야 돼! “보기는 지금 뭘 보고 있느냐 지금! 아직도 시공간이냐? 너 아직도 시공간이냐? 함께 있는데!” 성령이 너희에게 약속대로 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뭐냐 하면은 주와 함께 있는 겁니다. 


주와 함께 있어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방식을, 그러면 그 방식의 모델이 뭐냐? 모델이 바로 요단강 입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았잖아요. 물속에 들어갔지요? 그때 하늘이 열렸지요. 그래서 뭐가 내려옵니까? 비둘기가, 성령이 비둘기 같이 왔잖아요, 오고 난 뒤에 그 이후에 예수님의 행적을 보세요. 


예수님은 자기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인도 합니까? 성령이 인도하는 거예요. 자, 아버지가 있고 아들은 물에 있습니다. 아들은 물에 있는데, 여기 누가 왔습니까? 성령이 왔지요?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보냈지요? 그 다음부터는 아들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할 때 까지는 누구 주도 행위다? 성령이 아들을 주도합니다. 성령이 아들을 주도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주도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뭘 이룹니까? 모든 율법을 다 이루게 됩니다. 그 율법 이룬 게 뭐냐 하면은 바로 죄를 긁어모으는 거예요. 죄를. 뭐 되기 위해서? 죄가 성립 되어야 핍박이 성립되고, 핍박이 성립 되어야 예수님 의가, 주님의 의가 성립돼요. 죄를 위해서 대신 죽어야 되기 때문에. 


세상은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까. 전부 다 아버지와 아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요. 모든 놓여 져 있는 모든 사례들이, 사례들이 통합이 되면서 주가 나온다 이 말이죠. 통합, 주가 나오는데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함께 함으로써 성령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이런 사례들, 이런 사건들을 유발시키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여기에 뭐가 되냐? 죄인이 되는 거예요, 죄인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죄도 안 지으면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물론 자기 죄가 아니고 대신 짊어지는 죄들이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하면 그냥 죄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을 품어, 품게 되면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낸 것처럼 이제는 아버지, 성령 보낸 아버지 자리에 누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 하나님 오른편에서 성령을 보내어 버립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언하기를 “저분은, 성령 받은 저분이 장차 자기 백성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자”라고 이야기 하죠, 주실 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 역할을 하되, 이제는 성령을 누가 주느냐? 자기와 함께 있는, 언약적으로 아버지가 아들과 언약적으로 함께 있기에 성령을 준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이 자기 언약과 함께 있는 아들에게 성령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언약이 완성 되었으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이 뭐냐 하면은 내 백성 살리는 언약이잖아요. 이게 완성이 되면 이, 완성을 예수님이 가지고 아버지 역할을 그대로 우리에게 하게 되면 이, 아들 될 사람, 하나님의 양자지요, 아들은 없고 양자지요, 양자를 아끼는 성령이 와버린다 말이에요. 


성령이 와버리면 여기에 적용되는 오시는 모든 성령의 효과는 이 사람들이, 이 죄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그것을 그 공로를 근거로 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아나 먹어라~!” 이 말이죠. “아나 먹어라~!” 이것은 네가 한 것 없이 내가 혼자 다 한 것을 네가 그냥 공짜로 이걸 얻어 챙기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이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프로젝트에요. 예수님 혼자 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가 되죠.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아~ 주님은 혼자 다 했구나!” 다시 말해서 “주님은 ‘주’시구나!” 또는 “주님은 왕이시다!” 이것을 몇 초지만, 몇 초 짧은 기한이지만 늘 느끼는 겁니다. 


내가 왜 자꾸, 내가 왜 내 인생을 내가 챙기려고 하고 내가 책임지려고 하느냐. 아까 선과 악 할 때 인간의, 그 이야기를 빠뜨린 것 같은데, 인간의 선악의 문제가 뭐냐 하면은 사물한테는요. 칸트는 이야기 했어요, 임마누엘 칸트는 말하기를 이런 책상이나 이런 데는 죄악을 물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유가 없어요. 자유가. 


의자를 걷어차면 돼요? 안돼요? 의자 걷어차도 괜찮지요? 의자 걷어차는 게 죄입니까? 의자가 막 마술을 부리면서 “왜 저를 찹니까?”이럽니까? 사물은 의지가, 자유가 없기 때문에 요구 하거나 책임을 묻거나 할 권한이 없어요. 인간에게만 자유가 있는 자율권이 있는 자에게만 책임을 물어서 죄를, 벌을 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칸트 이론에 의하면, 지옥 가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해서 지옥가고, 그 말은 맞죠? 문제는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잘해서 천국 가는 거예요. 그런 신학을 신칸트주의라 합니다. 이 땅에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기 위해서 산상 설교대로 하자는 겁니다. 칸트는 어떻게 했냐? 예수 믿고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가 책임지고 이제는 바르게 살아서 이 지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거예요. 


전도하고 선교하고 헌금해가지고. 하도 유럽의 기독교가 하도 개판되니까, 영국에서는 현재 2014년도에 교회 출석률이 7.2%, 기독교 7.2% 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교회 출석률이. 영국 국민 중에서. 뭐 총리도 이슬람교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미국도 마찬가지고, 뚝 떨어지고. 그러니까 목사, 교회 입장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어쨌든 꼬셔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살면 당신 어릴 때 세례 받은 거 무효 되고, 다 지옥 갈라고 합니까?” 이렇게 협박, 공갈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뭐냐? 천국은, 교회 나오면 착한 일 해야 되고, 십일조 하는 착한 일 해야 되고, 자꾸 그 사람에게 자유를 발휘케 하고 행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물어서 지옥 가는 것은 말해도 말을 안 들어 쳐 먹어서 지옥 간다는 거예요. 


참, 오늘 올 사람이 안보이네.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어떤 사람은 뭡니까? 자기가 행하여 왔던 사람들은 “오늘 은혜 받았다!” 이렇게 하지요? 진짜 은혜 받으면 어떻게 돼요? “이야~ 이제는 바르게 살겠다.” 희망을 품는 게 은혜 받는 게 아니고 “아이고 뭐, 해도 안 해도 종쳤네. 종결 되었네. 끝났네!” 이런 자유함. 성령이 주는 자유함. 그게 바로 겁 대가리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자기 인생의 미래에 대해서 미리 초조하지 않는 사람 아닙니까? 어차피 주님께서 다룰 건데. 아까 뭐야 성령께서는 어떻게 한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모든 사례를 통합시킨다 하지요? 그러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에게 일어난 어느 학교 나오고, 어느 고등학교에 나왔는지, 


이 모든 일들이 어느 것 하나, 내가 걸음걸이 걷는 거, 머리카락 자르는 거, 어느 것 하나 성령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에요. 주어진 팔자, 이 더러운 팔자. 어떤 팔자인지 모르지만. 이런 모든 팔자, 이혼 세 번하고 다시 네 번째 결혼하고 이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주님의 허락 없이는, 주님의 합력하여 선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다 이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베드로는 사도 안합니다. 삐져서 안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베드로가 사도되고 난 뒤에 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띠 띠고 원치 않는 길, 주께서는 이 식대로, “마치 아버지가 성령을 보내서 나를 다루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너를 나를 증거 하기, 증인되게 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다룰 것이다.” 누구에게? “성령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을 다룰 것이다. 내가 이겼으니 너희는 이미 세상을 이겼노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를 배제한 이유에 대해서 저희들은 이제 알았습니다. 언약을 완성할 분이 예수님뿐인 것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하나님하고 우리하고 막 거래 하려고 했고, 흥정 하려는 심보. 이것이 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