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4장1절(인간 개조)170418b-이 근호 목사
제가 아까 첫 번째 강의 마지막 부분에 답변을 안했답니다. 답변을 안했는데 답변해 드릴게요. 선택은 배후에 은밀히 숨어 있는 거고요. 역사 속에 나타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근거로서. 그러니까 두개를 합치면 되는 거지요. 두개를 합치면 되는 거예요.
나타나는 것은 십자가고, 그 배후에는 주께서 선택하신 거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선택한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이전에, 그러면 십자가만 십자가냐? 안 그러면 예수님이 태어나서 살아온 모든 것이 십자가와 연계되어 있는가? 이거는 여러분들 아시죠? 다 연계되어 있죠.
어릴 때부터 나타났을 때에 헤롯왕이 달려들어서 오폭이다. 오폭. 폭탄을 잘못 투하해서 이미 빠졌는데 거기에다가 베들레헴 두 살 밑에 애들, 화학 약품 폭격 했는지, 해서 다 죽여 버리고 거기에 있는 엄마들이 막 울었잖아요. 근데 엄마들이 울었을 때에 헤롯 원망 하겠어요? 예수님을 원망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하지요.
“왜 괜히 나타나서 애매한 우리 애가 죽었다고!” 그만큼 인간은 권력에 대한, 헤롯에게 반기 들었다는 게 증거가 없어요. 그리고 시위 했다는 거 없어요, 그 권력에 철저하게 물들어져 있고 그렇게 양육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딱 짜여져 있는 권력체를 힘들게 했다면, 우리 최고 권력자를 힘들게 한 그쪽이 나쁜 거예요. 그게 예수님이 나쁜 거예요. 예수님이.
그 동방 박사도 나쁘고, 동방박사 또 쏘려고 미사일 쐈는데 그것도 또 실패 해버리고, 주께서 천사를 통해서 다 빼돌려 버린 거예요. 빼돌린 거예요. 빼돌림으로써 그때부터 헤롯은 무슨 역할을 했느냐 하면 “애굽에서 내 아들 불러냈다” 하잖아요. 헤롯은 바로, 바로의 역할을 해야 되는 겁니다.
바로의 역할을 해서 나중에 본디오 빌라도까지 연결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동적으로 살해, 본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민중들이, 백성들이 의견을 총괄하고 합쳐서 대신 행사 해주는 인물로서 본디오 빌라도가, 헤롯이 이제 가는 길을 가야 돼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패가 저쪽으로 한패가 이렇게 뭉쳐져요.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이거는 아주 평화로운 세계 입니다. 그 복음 이야기 안하면 명절날 아주 평화로워요. 교회 이야기 하지 마세요. 평화로워요. 좋게 지냅니다. 막 떡하고 송편 다 싸주고 오는데 괜히 교회 이야기해서 욕만 얻어먹고 “오지마라!” 그래서 항상 주님께서는 일을 만들어요.
가만히 있어도 일을 만들어서 복음을 전하지 않기 위해서 입을 아무리 다물어도 사태를 일으켜 버려요. 사태를 일으켜 버리면 무심코 복음이 나와서 완전히 그 복음이 나온 주고, 받는 한 가운데서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층에 속한다는 것을 티내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작업을.
그래서 이제 아까 이야기 하면, 어릴 때부터 쭉 나오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떼놓고 가는 것도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자가를 아십니까? 누구의 책 제목 같다 만은. 십자가를 아십니까? 할 때 십자가 아십니까? 보통 이야기 하게 되면 선교단체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할 때 일곱 번의 문장을 해놓고, 일곱 번 문자 분석 하고 난리예요.
십자가만 딱 끊어서 십자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했고, 마지막 때는 내 영혼을 받아주고, 이 이야기 했다는 거예요. 그것을 십자가상에 칠언, 일곱 가지의 언어. 이렇게 하지요. 십자가는요? 예수님 출생부터 다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더 나아가서는 구약부터, 창세기부터 다 관련 되어 있지만, 그래서 이 마태복음 14장도 십자가 내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크게 한번 그려보죠. 이 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느냐? “베드로 나가!” 베드로 떼놓기, 베드로 떼놓기가 있어요. 그러면 베드로는 누가 선택 했습니까? 예수님이 선택 했죠? 선택 해놓고 떼놓아 버려요. 선택을 해놓고. 예수님이 선택 해놓고 제자, 그것도 수제자로 만들어 놓고 떼놓아 버려요.
“네 위에, 반석위에 교회를 세운다.” 해놓고는 주께서는 떼놓아 버립니다. 그러면 떼놓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제자로 삼지 말지 지금 와서 왜 “너 안 데리고 간다.” 이러면, 그러면 열두 제자를 그동안 함께 삼년동안 같이 붙어 다닌 이유가 뭐예요? 실컷 와서 마지막 고지가 저긴데, 이제 다 왔는데 “가거라!” 이 베드로가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오죽 했으면 “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하겠어요. 이제 베드로는 섭섭함을 좀 자제하고 “어디로 가느냐?”를 묻죠. 어디로? 참 어려운 질문을 했어요. “어디로 가느냐?” 근데 그 질문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대구 공부를 마치고 우리교회 권사님이 저한테 한 질문이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에요.
뭐냐 하면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하는 질문이에요. 난 그 권사님은 진짜 머리가 천재 같아. 참 진짜 머리 똑똑해.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분이 질문했기 때문에, 다른 분이 거기에 같이 관심을 가져줘야 공부가 되기 때문에, 그 질문을 다른 분에게 했어요.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어떻게 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분이 “천국에 죄가 있습니다.” 라고 했어요. 제가 정답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권사님이 꽤 당황스러워서 그 다음부터는 강의가 안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 권사님 오늘 아침에 전화 했어요. “다시 강의 들어보니까 자기가 잘못 알고 있었다.” 해서 나도 아이고, 다행이다 생각 하는데.
사실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라는 강의를 내가 그런 방식으로 강의를 안했던 것 같아요. 대구 강의를 들어보면. 그런데 질문은 그렇게 했거든요. 답변 받아가지고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 질문을 내가 던졌고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죄가 있습니다,” 라고 할 때 내가 “옳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아는 상식은 천국은 뭡니까? 이미 죄가 처리된, 처리된 상태를 천국이라 하잖아요. 천국에는 아픈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고 죄가 없는 곳이 천국이잖아요. 요한계시록 21장에. 그러면 천국에 죄가 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바로 개념을 질문자가 그 죄라는 개념을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죄의 개념을 가지고 그대로 사용 한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죄의 개념을. 베드로를 떼놓았다. 라는 말은 앞으로 베드로를 구원할 수 있는 모든 준비 작업 속에는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가 지금껏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나름, 나름 예수님에 대해서 정리, 들었던 것, 노트 정리한 그 개념을 전부 다, 다 수정해야 돼요. ‘인간 개조’ 오늘 제목이 이거 같아. 완전히 인간이 개조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갑니다. 인간 개조 돼야 돼요.
어느 한 부분, 어느 한 부분만 개조 될 수 없어요. 전부 다. 인간 개조 되는데, 인간이 개조 된다는 말은 다른 말로 인간의 마음이 바뀐다는 거지요. 인간의 마음이 바뀐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 언어로 되어 있어요. 마음을 표현 할 때는 언어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껏 상상했던 그 천국, 그 예수의 나라, 하고 전혀 거기에, 거기에 말리지 않는, 거기에 포함 되지 않는 세계에 가는 거예요. 왜? 그래야 개조가 되거든요. 약간 엮여져, 약간 이렇게 이어져 있으면 “아, 그 부분은 놔두고 나머지는 고치면 되겠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전부 다 “바꿔, 바꿔, 다 바꿔" 전부 다 바꾸는 거예요. 전부다, 전부 다 바꿔요.
전부 다 바꾸는데 그 바꾸는 근거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서 예수님과 아버지만이 아는 언약적인 내용을, 개념을, 기존의 개념에 실어서 다시 제자들에게 택했으니까, 제자들에게 사도로서 만들기 위해서, 개조하기 위해서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다 보내줍니다.
그러니 이 작업이, 이 작업을 우리가 설명을 하려고 하면 굉장히 오래 걸리겠죠. 오래 걸리지만 오늘 다 하는 건 아니니까, 차츰 하면 되니까 진도가 14장, 15장 나가면서 진도 나가면 되니까 그것은 우리 할일이 아니고, 14장부터 지금 하는 처음 시작부터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은 그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내가 있다고 이야기 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죄 없는 천국을 상상한 사람한테는 반발이 나오지요. 성질이 나오지요. 이단 아니야? 그렇게 되죠. 그게 뭐냐 하면은 뭘 모르냐 하면, 죄에 대해서 예수님이 죄라고 할 때만 죄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나름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아무리 내가 죄인이고 나빠도 선과 악도 제대로 분간 못할까?
선과 악도 제대로 분간 못할 리가 있겠어?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고, 선과 악이 딱 대비되면 아, 이건 선이고 악이고 대번에 알지. 자꾸 나름대로 자신만만해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신만만함의 한계가 종교 개혁 때 칼빈이라는 기독교 강요에 보면 그 한계가 드러나요. 칼빈이 뭐라고 하냐 하면은 “이거는 나쁜 거고 이거는 좋은 거다.”
딱 구분 하려고 하니까 아~ 애매한 게 또 있는 거예요, 애매한 게. 그것을 중립적인 것을 또 하나 설치해 놓았어요. 아주 악도 아니고 아주 선도 아니고, 중간 쯤 되는 거. 어떤 거? 내가 물 마시는 거. (물 한 모금 마시고) 내가 방금 나쁜 짓 했습니까? 착한 짓 했습니까? 성립 안 되지요. 바람 부는 거, 겨울에 눈 오는 거 나빠요? 안 나빠요?
이게 칼빈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왜? 칼빈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기존의 철학이 들어가 있으니까, 법과 철학을 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이것을 설명해서 교인들을, 천주교에서 내려오는, 던져 나온 교인들을 개신교, 개혁주의로 여기에, 교회에 모아야 하거든요.
스위스의 베른에서. 모아야하기 때문에 그들이 납득 하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괜찮은 교회 만드는데 지금 급급하다 보니까 기독교 강요를 만든 겁니다. 그게 오늘날 합동측, 통합측 전부 다 장로교회의 기본 매뉴얼이 되었어요. 매뉴얼. 그게 개혁주의 전통 신학이라는 겁니다. 칼빈 자체가 문제예요. 칼빈 자체가. 시간이 가더라도 그것을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선하다, 악하다, 중간이다. 이렇게 판정을 내리는 것이 왜 잘못이냐 하면은 선과 악일 때에는 반드시 철학적인 개념에 의하면 자율권이 보장 되어야 돼요. 자율권. 판사하고 검사하고 싸우는 게 뭐냐 하면은 “그 범인이 어쩔 수 없이 했다.” 하는 게 변호사가 하는 일이고요. “본인이 의지를 발동해서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했다.” 하는 것이 검사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판사는 그것을 감안해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과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부분을 감안해서 형량을 때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선과 악이 나눠지는 게 아니고 이게 흥정이 돼요. 선과 악이, 흥정이 되었다고. 그 흥정이 되는 이유가 뭐냐면 인간에게는 뭐가 있다고 봅니까?
인간은 자유의지, 또는 자율의지, 또는 자율성이 있다고 본겁니다. 인간에게 자율성이 있다는 거 누가 이야기 했던가요?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없지요? 성경에 없어요. 이천 년 신학자들이 뭐라 하냐면 이렇게 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율권이 있는 것처럼 그 자율권을 인간에게 줬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 자율권, 자유의지, 흔히 자율권이라 하는 것은 철학적 용어고, 보통 신학에서는 자유 의지라 하는데 자유 의지를 해줘버리면 어떤 결과가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새 언약을, 새 언약의 성취가 안돼요.
예수님의 새 언약은 뭐냐 하면은, 우리의 마음속까지 우리의 허락 없이 그냥 강제로 딱 장착을 해줘야, 그 마무리 되는 게 그게 새 언약이에요, 택배가, 택배 회사에서 택배 물건을 문 앞에 놔두면 이거는 택배가 아닙니다. 택배 회사 입장에서는 문 열고 싸인 받고 가게 되면 자기의 물건을 인수 하면 그것이 마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는 복음의 택배는 그 정도가 아니에요. 아예 밤에 자고 있든지, 나쁜 짓만 하고 있든지 해야 돼요. 자고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이미 구원 받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구원 받은 그것을 결과적으로 느끼는 것은 인정 되는데, 그 들어오는 시점을 본인이 예상하면 안돼요.
그러면 그거는 주님의 새 언약, 성령이 온 게 아니고, 새 언약은 성령이니까, 성령이 오신 게 아니고 지가 소설을 쓴 거예요. 소설을. 그것은 성령을 안 받은 티를 감추기 위해서 받은 티를 내는 겁니다. 위장하는 거예요. 성령이 올 때 이렇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올 때는 이렇다가 아니라 성령 받고 난 뒤에 이렇다가 돼요.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바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누구 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성령 받고 난 뒤에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다.” 라는 것을 본인이 감수하고 인정하는 겁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조건적인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선과 악을 동원시키기 이전에 이미 어디에 속했다? 이미 악이고, 죄고, 저주 받아도 할 말이 없고,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지옥 보낸다 할지라도 주님의 결정에 하등 하자가 없음을 내가 찬양해야 돼요. “참 잘하셨습니다! 죄 짓는 인간 벌 때리는 거, 그것은 주께서 당연히 하실 일입니다. 정말 잘 하셨습니다!”
성령 안 받으면 도저히 그렇게 안돼요. 왜냐하면 성령 안 받게 되면 내 중심이에요. 자기 구원 중심인데, 내 중심이니까 내 구원 중심이에요. 성령을 받으면 내 중심에서 벗어나서 누구 중심이냐 하면 예수님 중심이 돼요. 이미 예수와 함께 있기에 마음껏 예수님의 중심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껏 박수를 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결정이, 내가 구원되기 때문에 박수 치는 게 아니고 주님이시라는 그 이유만으로 박수치기 위해서 뽑힌 거예요. 주님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그 구약적 예가 뭐냐 하면은 욥입니다. 욥이 고난 받을 때, 심지어 이 세상에 어떤 인류 가운데 욥만큼 고난 받은 사람은 없어요.
성경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아무리 복을 받아도 솔로몬만큼 복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요강도, 숟가락, 젓가락도 전부 다 금덩어리에요. 요강도 그게 금이에요. 완전히, 진짜. 그리고 제일 밑바닥 내려간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질문을 누가 했는가? 본인이 시작했어요. 아까 했죠? 틀린 질문에는 해답이 없다는 거예요. 질문을 계속 해야 되는 거예요.
질문은 자기 체험에서 나오는 거죠. “아픕니다. 너무 아픕니다. 이럴 것 같으면 저를 죽여주옵소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그러면 아예 죽이면 죽이든지, 죽이지도 않고 아프기만 한 이유가 뭡니까? 제가 잘못 했으면 잘못 했다고 이야기를 해주시고.” 계속 이야기해요. 아무 소리 안 해요. 떠들기는 친구만 대따 떠들지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기껏 주께서,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거였습니다.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네가 파도치는 이유를 아느냐? 하늘에 별 뜬 이유를 아느냐? 너는 바로 네 중심이다 말이야.” 그러니까 욥이 그날 아파서 “아야~” 했는데 그 “아야~”를 주께서는 결과물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아프기에, 자기 밖에 모르기에 자기 이야기만 나오는 그런 식으로 지금 살고 있다는 겁니다. 아까 전에 우리 제목이 뭐라 했습니까? 인간 개조죠.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개조가 됩니까?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졸지에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라고 주님만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다 풀리지요,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모든 생명은 주님만 있으면 그 주님 말씀에 의해서 생명이 나오면 되니까. 지금 우선순위가 나부터 출발 하는 게 문제가 돼요. 나부터. 나 있고, 날 어떻게 데려가실 겁니까? 지금 문제가 그거잖아요. 베드로가 아까 그 문제였잖아요. “저 어떻게 할 겁니까? 날 왜 내칩니까?” 이 말 아닙니까?
이것을 바꾸는 거예요. 베드로가 주님과 같이 하지만 내치는 이것도 주님의 주되심에 꼭 필요한 과정이고 경과에요. 있어야 될 사건이에요. 예수님은 혼자서 아버지의 일을 다 이루어야지, 베드로가 거기 끼어들면 안 됩니다. “나도 눈치 좀 챘거든?” 이러면 절대로 안 돼. 눈치를 절대 못 채야 돼요.
눈치 못 채기 위해서는 베드로 나름대로의 계획, 생각했던, 주님께 들었던 정리되고, 일기장 쓰고, 노트 정리 해놓은 모든 그 개념 자체는, 인간에게서만 통하는 그런 인간의 언어의 개념적인, 개념들이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천국에 죄가 있습니까?” 할 때는 뭐냐 하면은 이미 우리는 죄를 알고, 선이 뭔지 아는데 “그 죄가 천국에 있습니까?” 물은 거예요.
그 물었던 권사님은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죄는 없다고 여기는 거예요. 저는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죄의 개념 말고 다른 개념의 죄는 주님의 개념 됨에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한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천국이 어떤 곳이냐? 부터 이미 그게 새롭게 정리 되어야 될 필요가 생긴 거예요.
천국에 죄가 있는 천국 같으면 그 천국은 내가 아는 천국과 다르잖아요. 그러면 그 천국은 어떤 천국이냐? 죄라는 것은 예수님이 죄라고 규정 할 때만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누가 계시냐? 규정한 자가, 예수님이 계시지요? 그러면 그것이 뭐냐? 그게 천국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천국이 성령을 통해서 미리 와버리면 지금껏 성령 받기 전에는 내가 알던 죄의 개념과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주와 함께 있으면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함께 있으면서 죄의 개념이 같을까요? 다르지요? 다르지요? 그 다르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존재적인 문제가 아니고 다르다는 게 문제예요. 다르게 한 것은 그것은 누구 덕이다? 예수님의 의의 덕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안에서 우리가 의인 되는 겁니다. 천국에서. 예수님이 천국 사람이면서도 죄에 대해서 언급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죄가 있는 거예요. “죄 없어!” 이게 아니고 “저게 죄야! 이게 죄야! 너희가 죄 없다 하니까 죄야!”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그 대상의 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있듯이, 그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대로 복제가 되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와 버립니다. 들어와 버리면 우리의 바깥에 뭐가 나가냐 하면은 기존의 인간들이 상투적으로,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선악 체제에 의해서 알고 있던 모든 개념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 나올 때 죄라는, 주님 보시기에 죄라는 레터르letter 그 딱지를 붙여서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기도해도 죄고, 십일조 해도 죄고, 교회 참석해도 죄고, 이 성경공부 해도 죄고, 강의해도 죄고, 설교해도 죄고, 예배 드려도 죄고, 다 죄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오죽 많이 들었겠습니까? 아~주 노트필기는 이렇게 해가지고, 그런데 막상 노트 이만큼 갖고 이제 “가자!” 이렇게 하니까 “오지마!” 이렇게 되었으니까 “why? 왜 저를 이렇게 합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간다는 말도 그것도 잘못된 말이에요.
예수님 사이에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어요. 왜냐하면 주께서 오시기 때문에. 어디로 가는 것을 만약에 안다면 뭐합니까? 지하철 탈거에요? 버스 탈겁니까? 예? 어디로 갈건 데?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유대인 사상에서는 삼층천 이거든요. 지상과 음부와 그 하늘이 있습니다.
하늘이 어디 있느냐? 그 질문만 할 게 아니고, 음부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부터 해야 돼요, 사실은!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쳐다볼게 아니라, 사실은 자신이 죽으면 음부에 간다는데, 그 무덤에 간다는데, 음부가 어디에 있는지 거길 가야돼요. 땅 밑에 있다고 본거에요, 땅 밑에. 하나님은 땅 밑에 있다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한계성을 충분히 이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인간이 쓰는 똑같은 언어를 사용해요. 아람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못 알아들어요. 원어 백날 파도 소용없어요. 어떤 사람이 저한테, 십자가 마을에 와서 실컷 시비 걸고, 뭐 나한테 하고, 뭐 이렇게 하는데, 자기는 원어, 원어로 하겠다. 원어. 원어라는 게 없어요.
전에 이야기 했지만 원어가 없어요. 언어에요, 언어(원어-언어) 왜냐하면 히브리어라 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쓰는 언어라니까, 언어. 왜 자꾸 원어라 해서 다른 것과 특별화 시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히브리인들이다. 그 백성이 쓰는 언어가 히브리어에요. 네?
한국은, 백성이 한국 사람들 같으면 한국말이 그 사람의 언어잖아요. 왜 원어라고 따로 고집을 하냐 이 말이죠. 그러면 언어를 봅시다. 그들의 언어, 히브리 언어. 한번 물어봅시다. 히브리어에 대해서 히브리인들이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저, 이 목사님, 한국말 압니까? 잘 압니까? 우리말 겨루기 한번 해볼까요? KBS에. 8시에 하는 거.
모르지요? 산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필요한 것만 뽑았어요. 도서관 관장이 책 다 읽었습니까? 도서관 책. “어느 책, 어디 있습니까?” “네, 뽑아드리겠습니다.” 이건 되는데 그 책 다 읽었어요? 그 책 다 외우고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언어라 하는 것은 필요 시 적시에 필요한 것 뽑았는데, 뽑을 때 어떻게 뽑느냐 하면은 비슷한 것을 뽑아요.
정확한 의미를 담을 언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요. 정확한 의미를 담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고 “아, 이런 마음을 뭐로 표현하지?” 비스무리한걸 후보감을 서너 개 이야기해요.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 여성주의자는 이렇게 합니다. 여자들이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말을 많이 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왜냐 하면은 여자하고 남자하고 근본차이가, 여자는 임신을 하기 때문에 평소에 타인에 대한 자기 말, 자기 안에 자기 외부적인 물질이, 물체가 들어온 것에 대해서 그걸 여성은 기본적으로 아기를 낳으면서 늘 주고, 받고 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언어를 퍼 담아서 저쪽에 넘겨주면서 적당한 언어를 좀 더 정확하게 구사하는 그러한 성깔이 있어서 그렇게 말이 많다는 거예요.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네, 그런데 애를 안 낳은 여자는 어떻게 되는지 그건 내가 모르겠는데, 애 안 낳은 여자 같으면 어릴 때부터 여자로 태어날 때 그렇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해요. 특히 그 임신했다는 그 점에서. 왜, 남자들은 임신을 모르니까,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가설로 일단 합시다. 정답으로 지금 내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래서 남자들이 여자 말 들으면요.
한마디 하면 될 문제를 같은 문장을 또 반복하고 있어요. 전화 딱 오게 되면 벌써 오늘은 두 시간짜리, 한 시간짜리 다 마음잡고 있어요. ‘오늘 잘됐다. 오늘 이걸로 하루 종일 뛰자!’ 하는 식으로 이렇게 하고 남자는, 남자가 전화 딱 오게 되면 ‘쓸데없이 전화는 하긴 왜 하고, 빨리 끊자!’하는, 벌써 마음 준비부터 빨리 끊자 나오고 여자는 한번 놀아볼까 하고.
마음이 정말 많이 다르거든요. 일리가 있는 거 같아. 어쨌든 간에 언어라 하는 것은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계속해서 개발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문화가 발달되게 되면 언어가 세분화 됩니다. 지금은 세분화 되어서 세분화된 그 의미가 옛날 같으면, 예로 천 개라면 천 개가 살고 있는 이 단어를 가지고 천 개 있는 의미를 가지고 오백 개 밖에 안 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가지고 이것을 설명을 하려고 하니까,
이 원어라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입니까?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푸느냐? 성경은, 성경이 확증되고 난 뒤에는 성경 보는 자기의 삶이 있잖아요. 그 삶이 이 성경의 저자가 누구죠? 성령이죠? 성령이 우리의 삶을 지적하지요? 지적질 하잖아요. “네가 어디서 죄인이고, 네가 왜 저주 받을 수 받게 없는지.” 그 지적질을 하면서 나오는, 지적질을 경유하면서, 그래, 탕자가 밖에 가출해야 아버지를 알아요.
가출 안하면 그냥 집에 있던 아버지하고 달라요. 가출하고 나오니까 “아버지 아니라도 괜찮아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버지 아니라도 괜찮은데, 아버지라고 해주니까 얼마나 그게 고맙습니까? 제일 맛있는 밥은 굶고 먹는 밥이 제일 맛있어요. 굶을 때. 그처럼 자기 자신을 알아요, 탕자는.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가 시켰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좋아서 나왔습니까? 자기가 가출하고 싶다는 말 자체가 이게 뭐냐? 내가 아니고 곧 탕자 사실 나쁜, 나쁨이 나를 만든 거예요. 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자기가 태어난 거예요. 그런데 맏이는 “내가 뭐 잘못됐습니까?” 자기가 우선이고, 자기는 죄 안 짓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나한테 소도 안 잡아주고 가락지도 안줍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가락지 하니까 누구 생각난다. “왜? 나에게 이걸 안 줍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뭐로 만듭니까? “나는 죄인이다.”에서 뭡니까? “죄가 너를 만들었다.”로 인간 개조를 시키는 겁니다. 이게 성령께서 오셔서 하는 거예요. 미리 한번 보겠습니다. 16장 봅시다. 16장 8절에, 16장 8절을 누가 좀 읽어보세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보세요. 그가 와서 죄, 의, 심판 이 세 가지가 같은 단어입니다. 같은 의미에요. 체포하려면 죄 나오고 의 나오잖아요. 죄 알면 의 나오고 심판 받아야 되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은 뭐냐 하면은 이미 죄가 뭔지 확정 됐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내가 나쁜 짓을 할 때는 죄고, 착한일 하면 의고, 나쁜 짓도 아니고 착한 짓도 아니면 칼빈대로 뭡니까? 중성, 중립이고 이런데, 주님은 뭐냐? “너희들이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 그러면 그게 유일한 죄가 되는 기준이 되는 거예요.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가지고 그대로 들고 오는 겁니다. 그대로 들고 오게 되면 우리는 뭐냐?
주님과 함께 동행 하지 못하는 베드로 꼴이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만약에 말씀 운동한다. 그러면 신약에서 뭐가 됩니까? “내가 말씀 운동하니까 잘했지요?” 하면 성령이 뭐라고 합니까? 그게 바로 뭐다? 죄가 되는 거지요. “내가 구속사 합니다.” 이게 뭐가 돼요?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나는 십자가 앞에 죄인입니다.”
그게 바로 성령께서 고백케 하는 겁니다. 그러니 뭐, 피를 모른다고요? 말라비틀어진 피를 모른다? 피가 뭐, 말라비틀어진 피가 왜 피냐? 이렇게 나와. 성령을 안받아보니까 그런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구속사 가지고 오는 게 아니고, 조직신학 가지고 오는 게 아니에요. 성경 신학의 체재를 가지고 오는 게 아닙니다. 뭐 가지고 옵니까?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다 죄로 규정할 수 있는 그것 가지고 와요. 그게 뭡니까? 십자가지요.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어리석다 하니까, 부끄러워하니까. 너희들은, 자기들은 지혜롭다 하고, 어리석은 그 십자가를 내세우죠. 이게 성령께서 하시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은 성령이거든요.
그렇다면 “어디로 가십니까?” 할 때 ‘어디로’라 하는 것. 장소, 시공간 개념에서의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로 가는 것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동네에서는 어디로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 여기서, 그 권사님한테 제가 답변을 하면서 또 한 가지 제가 언급한 게 있어요.
권사님한테는 이제 다 풀렸어요. 오늘 아침에 전화하고 풀렸는데, “어디입니까?” 이것은 오늘 아침에 뉴질랜드에서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저한테 카톡으로, ‘카톡, 카톡’ 해가지고 질문을 해요. 질문을 하는데 그분의, 그 목사님의 질문이 뭐냐 하면은 강도가, 예수님이 강도 보고 “네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어요. 낙원에.
그럼 오늘 밤에 낙원에 있지요? 그게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에 십자가가 세 군데 있었잖아요. “오늘밤에 낙원에 있다.” 오늘밤에 어디? 낙원. 다시 말해 이건 천국입니다. 오늘밤에 예수님과 함께, 나와 함께이니까. 뭐 낙원 해도 되고, 천국가고 있다 이 말이에요. 물론 뭐 학자들에선 낙원이라 하는 것이 천국 이전에 뭐 어떤 이야기 하는데, 아브라함이 어떻고 이야기 하는데, 하여튼 천국이라 보고. 그럼 이미 함께 있잖아요.
그러면 그 목사님의 질문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잖아요. 죽었을 때 그곳이 어디냐 이 말이에요. 이게 질문이에요. 천국에 가 있어야 되는데, 오늘밤에 갔으면 오늘밤에 천국가야 되는데, 사도신경에 보면 뭐라 되어 있습니까? 사흘 동안 어디가 있어요? 음부에 가있죠? 그럼 음부에 가 있는 게 맞습니까? 천국에 가 있는 게 맞습니까?
그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게 질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지요. 예수님과 관련된 시공간은 묵시적 공간이에요. 묵시적 공간. 이 묵시적 공간이 역사 속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젓가락을, 반듯한 젓가락을 물속에 집어넣으면 그 물밑에 한번 보세요. 젓가락이 휘어졌습니까? 어떻게? 휘어져 보여요? 안 그러면 똑바로 보입니까?
구부러져 보이죠? 그게 물리학에서는 빛의 직진성 때문에 그래요. 빛의 구부려지는 선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빛은 직진을 하기 위해서는 구부러진 모습을 보여야, 그게 가장 빛이 가까이 가는 경로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쨌든 간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구부러져 보이지요? 우리는 저것은 구부러졌다고 하는데 빼보면 어떻습니까?
똑바로 펴지요? 묵시적 개념이 인간의 죄악 된 시공간에 들어오게 되면 이게 구부러져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다중 현실이라 했잖아요. 지난 수련회 할 때 다중 현실. 이 세상 바깥에 주님의 세계가 있는 게 아니고, 이게 같이 있는 거예요. 같이 있으면서 사람들은, 같이 있으면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같이 있으면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다락방에 있나? 지하방에 있나?” 그래서 표현 할 때는 뭐냐 하면은 음부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마치 땅 밑에 라고 표현한 거예요. 그게 이제 전도서에 나오니까. 왜냐? 인간이 어떤 쓰는 단어에, 인간이 쓰는 단어 자체가 인간들이 이해하는 시공간으로 뭉쳐져 있는 단어들이거든요.
그걸로 묵시를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표현 하는 거예요. 주와 함께, 그 강도와 함께 음부에 가 있는 겁니다. 음부에 가 있는데 그게 낙원에 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니, 낙원에 갔어요? 둘 중에 한 개만 하고, 둘 다 하지 말고!” 이렇게 고집을 부릴 수가 없는 겁니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오늘 본문에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할 때에 예수님 답변은 아버지께로 간다는 거예요. 사실 이게 더 정답이죠. “아버지께로 간다.” “어디로 가십니까?” 시공간을 묻는 거예요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이 말은 “너는 아버지께로 가지 못할 그런 입장에 있다.”는 거예요.
“너는 아버지하고 끊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언약적 대상자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언약적 대상자가 아니다.” 전에 제가 강의할 때 했지요? 언약을 주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약을 주시고 그것을 성취하면서 여호와의, 여호와의 됨을 나타내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한테는 언약을 주셨고, 전능하심 주셨고, 그걸, 언약을 누가 이룬다? 모세가 이루는 게 아니에요. 언약을 주신분이 말씀을 주신분이 말씀을 해석하듯이, 언약을 주신분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이 인간세계에 뛰어드신 분이 여호와 또는 여호와 이름 또는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름이니까, 이름은 반드시 실체를 전제로 할 때 이름이 있어요. 개가 있을 때 개 이름을 부르지, 개가 없는데 이름을 붙이면 이상하잖아요. 그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에 합치되는 개가 실체로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이름을 부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면 하늘에 계시잖아요.
하늘에 계신 것은 숨어계신 분이고 인간과 함께 동거동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계시는 거예요.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주님을 부르는 게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는, 이름이니까 함께 계시는 우리가 이름을 부르는, 자기 이름을 부르고 누가 불러 주듯이 함께 계신 분과, 주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우리는 이끌림 받고 가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하늘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인간이 사는 이 동네에서 만들어진 주가, 주의 이름이에요. 사도가 말하지요. “당신 누구십니까?” 할 때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하십니다. 그래 핍박이 없으면 뭐가 안 된다? 주가 없어요. 사람에게 핍박을 받아야 주님이십니다.
그냥 하늘에서 나풀나풀 내려오는 천사는 주가 아니에요. 핍박을 받아야 돼요. 구체적인 접촉, 구체적인 충돌이 실제 일어나야 돼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 말은 내가 지금 헛말 하고 있는 게 아니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두고 지금 구원을 이야기 한다는 겁니다.
뭐냐? “그 십자가의 피가 우리 죄를 대신한 피다!”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거예요. 따라서 그 구체성 앞에서는 뭐가 없다? 필요 없다? 종교라는 게. 우리의 모든 종교 행각은 다 쓸데없는 거다. 다 필요 없는 거예요. 남은 것은 십자가가 지금 나의 십자가로서 성령께서 그 안에 집어넣어줬느냐가 문제입니다.
과거의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과거의 1592년 임진왜란에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죽었으면 지금 살아 있다 하는 것은 무당들한테만 살아 있지, 다른 사람한테는 살아 있지 않다 이 말이죠. 그죠? 무당이 이순신 장군 이렇게 비는 것. 그런데 이순신 장군처럼 과거로 끝난 게 아니고, 십자가는 성령 안에서 이게 반복이 됩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는 이미 지나간 사건인데, 지금 사도바울은 우리 성도는 십자가를 알고 있다는 거예요. 오히려 사도바울이 반문 합니다. “몰라? 아니, 모른단 말인가? 그러면 성령 안 받았네?
그러면 성령 안 받았으니까 네가 하나님 법 지키듯이 법 지켜서 구원 받으려고 지금 그런 시도 하는 거야? 그렇다면 너는 헛빵이야!” 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지금 사람 꼬시려는 의도가 그냥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을, 아버지가, 아들이 성령을 줬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들이 자기 티를 내면 그게 교회되는 것이지,
성령을 줄 권한도 없는 내가 “아나 먹어라~” 해서 성령 나눠줘서 그래서 “우리 교회 만들자!” 대한 예수교 장로회 간판 들고 이럴 입장이 아니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은 자기 사람이 있다? 없다? 자기 사람이 없다 했지요. 자기 패를 생각하지 않아요. 완전 천상회의에 참석한 선지자처럼. 그냥 외치는 것을 외칠 뿐이에요.
이 세상은 어둠에 있어야 되니까. 그 답변하기를 예수님이 같이 함께, 여기 섞여 있어 버린 겁니다. 섞여 있다면 어디로 간다는 게 성립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잖아요. “세상 끝 날까지 보라” 마태복음 여러분 그냥 볼 필요도 없어요. 다 외워요. 마태복음 28장 20절 마지막에 뭡니까?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뭐라고 되어 있어요?
“너와 함께 있다.”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올라가니까 제자들이 뭘 쳐다봅니까? 쳐다보니까 누가 나무래요? 천사한테 까여야 돼! “보기는 지금 뭘 보고 있느냐 지금! 아직도 시공간이냐? 너 아직도 시공간이냐? 함께 있는데!” 성령이 너희에게 약속대로 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뭐냐 하면은 주와 함께 있는 겁니다.
주와 함께 있어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방식을, 그러면 그 방식의 모델이 뭐냐? 모델이 바로 요단강 입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았잖아요. 물속에 들어갔지요? 그때 하늘이 열렸지요. 그래서 뭐가 내려옵니까? 비둘기가, 성령이 비둘기 같이 왔잖아요, 오고 난 뒤에 그 이후에 예수님의 행적을 보세요.
예수님은 자기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인도 합니까? 성령이 인도하는 거예요. 자, 아버지가 있고 아들은 물에 있습니다. 아들은 물에 있는데, 여기 누가 왔습니까? 성령이 왔지요?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보냈지요? 그 다음부터는 아들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할 때 까지는 누구 주도 행위다? 성령이 아들을 주도합니다. 성령이 아들을 주도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주도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뭘 이룹니까? 모든 율법을 다 이루게 됩니다. 그 율법 이룬 게 뭐냐 하면은 바로 죄를 긁어모으는 거예요. 죄를. 뭐 되기 위해서? 죄가 성립 되어야 핍박이 성립되고, 핍박이 성립 되어야 예수님 의가, 주님의 의가 성립돼요. 죄를 위해서 대신 죽어야 되기 때문에.
세상은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까. 전부 다 아버지와 아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요. 모든 놓여 져 있는 모든 사례들이, 사례들이 통합이 되면서 주가 나온다 이 말이죠. 통합, 주가 나오는데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함께 함으로써 성령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이런 사례들, 이런 사건들을 유발시키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여기에 뭐가 되냐? 죄인이 되는 거예요, 죄인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죄도 안 지으면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물론 자기 죄가 아니고 대신 짊어지는 죄들이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하면 그냥 죄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을 품어, 품게 되면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낸 것처럼 이제는 아버지, 성령 보낸 아버지 자리에 누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 하나님 오른편에서 성령을 보내어 버립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언하기를 “저분은, 성령 받은 저분이 장차 자기 백성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자”라고 이야기 하죠, 주실 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 역할을 하되, 이제는 성령을 누가 주느냐? 자기와 함께 있는, 언약적으로 아버지가 아들과 언약적으로 함께 있기에 성령을 준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이 자기 언약과 함께 있는 아들에게 성령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언약이 완성 되었으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이 뭐냐 하면은 내 백성 살리는 언약이잖아요. 이게 완성이 되면 이, 완성을 예수님이 가지고 아버지 역할을 그대로 우리에게 하게 되면 이, 아들 될 사람, 하나님의 양자지요, 아들은 없고 양자지요, 양자를 아끼는 성령이 와버린다 말이에요.
성령이 와버리면 여기에 적용되는 오시는 모든 성령의 효과는 이 사람들이, 이 죄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그것을 그 공로를 근거로 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아나 먹어라~!” 이 말이죠. “아나 먹어라~!” 이것은 네가 한 것 없이 내가 혼자 다 한 것을 네가 그냥 공짜로 이걸 얻어 챙기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이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프로젝트에요. 예수님 혼자 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가 되죠.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아~ 주님은 혼자 다 했구나!” 다시 말해서 “주님은 ‘주’시구나!” 또는 “주님은 왕이시다!” 이것을 몇 초지만, 몇 초 짧은 기한이지만 늘 느끼는 겁니다.
내가 왜 자꾸, 내가 왜 내 인생을 내가 챙기려고 하고 내가 책임지려고 하느냐. 아까 선과 악 할 때 인간의, 그 이야기를 빠뜨린 것 같은데, 인간의 선악의 문제가 뭐냐 하면은 사물한테는요. 칸트는 이야기 했어요, 임마누엘 칸트는 말하기를 이런 책상이나 이런 데는 죄악을 물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유가 없어요. 자유가.
의자를 걷어차면 돼요? 안돼요? 의자 걷어차도 괜찮지요? 의자 걷어차는 게 죄입니까? 의자가 막 마술을 부리면서 “왜 저를 찹니까?”이럽니까? 사물은 의지가, 자유가 없기 때문에 요구 하거나 책임을 묻거나 할 권한이 없어요. 인간에게만 자유가 있는 자율권이 있는 자에게만 책임을 물어서 죄를, 벌을 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칸트 이론에 의하면, 지옥 가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해서 지옥가고, 그 말은 맞죠? 문제는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잘해서 천국 가는 거예요. 그런 신학을 신칸트주의라 합니다. 이 땅에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기 위해서 산상 설교대로 하자는 겁니다. 칸트는 어떻게 했냐? 예수 믿고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가 책임지고 이제는 바르게 살아서 이 지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거예요.
전도하고 선교하고 헌금해가지고. 하도 유럽의 기독교가 하도 개판되니까, 영국에서는 현재 2014년도에 교회 출석률이 7.2%, 기독교 7.2% 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교회 출석률이. 영국 국민 중에서. 뭐 총리도 이슬람교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미국도 마찬가지고, 뚝 떨어지고. 그러니까 목사, 교회 입장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어쨌든 꼬셔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살면 당신 어릴 때 세례 받은 거 무효 되고, 다 지옥 갈라고 합니까?” 이렇게 협박, 공갈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뭐냐? 천국은, 교회 나오면 착한 일 해야 되고, 십일조 하는 착한 일 해야 되고, 자꾸 그 사람에게 자유를 발휘케 하고 행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물어서 지옥 가는 것은 말해도 말을 안 들어 쳐 먹어서 지옥 간다는 거예요.
참, 오늘 올 사람이 안보이네.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어떤 사람은 뭡니까? 자기가 행하여 왔던 사람들은 “오늘 은혜 받았다!” 이렇게 하지요? 진짜 은혜 받으면 어떻게 돼요? “이야~ 이제는 바르게 살겠다.” 희망을 품는 게 은혜 받는 게 아니고 “아이고 뭐, 해도 안 해도 종쳤네. 종결 되었네. 끝났네!” 이런 자유함. 성령이 주는 자유함. 그게 바로 겁 대가리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자기 인생의 미래에 대해서 미리 초조하지 않는 사람 아닙니까? 어차피 주님께서 다룰 건데. 아까 뭐야 성령께서는 어떻게 한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모든 사례를 통합시킨다 하지요? 그러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에게 일어난 어느 학교 나오고, 어느 고등학교에 나왔는지,
이 모든 일들이 어느 것 하나, 내가 걸음걸이 걷는 거, 머리카락 자르는 거, 어느 것 하나 성령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에요. 주어진 팔자, 이 더러운 팔자. 어떤 팔자인지 모르지만. 이런 모든 팔자, 이혼 세 번하고 다시 네 번째 결혼하고 이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주님의 허락 없이는, 주님의 합력하여 선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다 이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베드로는 사도 안합니다. 삐져서 안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베드로가 사도되고 난 뒤에 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띠 띠고 원치 않는 길, 주께서는 이 식대로, “마치 아버지가 성령을 보내서 나를 다루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너를 나를 증거 하기, 증인되게 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다룰 것이다.” 누구에게? “성령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을 다룰 것이다. 내가 이겼으니 너희는 이미 세상을 이겼노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를 배제한 이유에 대해서 저희들은 이제 알았습니다. 언약을 완성할 분이 예수님뿐인 것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하나님하고 우리하고 막 거래 하려고 했고, 흥정 하려는 심보. 이것이 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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