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갇힌 혈육 (마 22:41-46) 대전-85강
이근호
2017년 2월 28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2:41-46
(마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마태복음 22장 41절부터 보겠습니다. 41절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질문하시는 거에요. 지금까진 바리새인 쪽에서 먼저 질문을 했어요. 질문을 한다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우리가 사람 대 사람을 만나잖아요. 보통 거리에서 만나면 “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안부를 묻잖아요. 사람들이 만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사람 대 사람이 만나는 것으로 보지만 사실은 만나는 사람들의 주변에 뭐가 있나 하면 그 사람마다 살아온 역사가 있습니다.
자기의 인생이 있어요.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를 보면 단어 하나를 끄집어 낼 때 단어 씀씀이가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이나 살아온 환경, 촌사람인지 도시 사람인지 다 나와요.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단어 선정에서 들통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 이야기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이기 전에 네가 내 사람으로 포섭 될것인지 말 것인지 계속 견주는 거에요.
내 밑에 오게 되면 당신이 우리 일에 협조 할 용의가 되어 있다고 생각 하겠지만 우리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우리가 세운 유대인들의 정치적 질서를 위해 당신을 제거 할 수밖에 없다. 이미 대세는 촛불 집회로 기울었기 때문에 당신 편은 없다는 거에요. 실제로도 예수님 편은 단 한명도 없었어요. “목사님! 12제자들 있잖아요?” 그들도 다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지느니라” 그렇게 해 놓고 말씀에 응하게 하였다고 했어요.
이 상황도 예언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던 겁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예언을 믿는 거에요. 말씀을 믿는 거에요. 주님이 알아서 하실거에요. 걱정 안해도 되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자기들의 세력권 속에 들어오느냐 마느냐 였는데 마태복음 22장 4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을 던진다는 말은 예수님의 세계가 먼저 바리새인을 공격한 게 되지요.
여기에서 마주침이 형성되요. 충돌, 부딪힘이지요. 부딪힘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서로가 도저히 공통성이 제로라는 것, 전혀 공통성이 없다는 거에요. 공통성이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단절’이에요. 연결 다리가 끊어진 거에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 올 수 없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어갈 수 없는 거에요. 부딪힘이에요. 부딪힘을 분명히 하면서 드디어 서서히 십자가로 다이렉트로, 지름길로 가시는 겁니다.
마태복음을 이야기 하는데 처음엔 예수님이 평탄히 가시다가 골고다 언덕으로 급속히 가시는 겁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어요. 오병이어 때도 그렇고,그런데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십자가에 가까이 가니까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이) 예수님은 훌륭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 다 떨어져 버려요.
교회에서도 전도 할 때 십자가이야기 안 하지요. 복 받은 이야기를 간증 집회로 했다가 나중에 조심스럽게 십자가를 끄집어내기가 참 난감해요. 심지어 복 준다고 해서 1~2년 다니는데 거기다가 십자가가 실은 고난이야기하면 “진작 이야기하지!” 도로 다 집으로 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교회운영비는 어디서 나옵니까?
어떤 당회에서 오죽했으면 십자가 컨퍼런스를 열겠느냐고요. 얼마나 설교 시간에 십자가를 이야기 안 했으면 따로 십자가를 이야기 하겠느냐고요. “뭐 관심 있으면 오시던지, 시간 있으면” 이런 식으로 소극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참 비겁하지요. 돈은 돈대로 챙기고 복음은 복음대로 전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잘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가짜들이 그런 짓들을 하지요.
그렇게 공격을 하면 부딪히게 되지요. 예수님이 말씀으로 공격을 하게 되면 그들 안에 감추어진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이성적으로 포장된 안쪽에 있는 것들이 파괴되겠지요. 들통 나겠지요. 이것이 함축된 주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바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찾아와서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해요. 그 구약의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자식 10명 하루아침에 다 죽어버리지요. 재산도 다 날아가 버립니다. 속에서 불이 나지요. 왜 쟤들은 가만두고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무슨 억한심정으로 그러십니까? 하다가 나중에는 입을 다물었지요. “고난을 주던 뭐를 주던 참 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 마음대로 하실 자유가 있는데 저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실은 저만 생각했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이어져요. 욥에게 찾아온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실 때는 우리도 모르는 가장 원초적인 것을 건드리게 되어 있어요. 주님 말씀의 창끝이, 그러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느냐? 이 문제거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릅니다. 우리 자신을 아는 것에 자신이 없어요. 왜? 무슨 일을 할 때 무슨 마귀 짓이 나올지 장담을 못합니다. 좋을 때나 좋지 자존심과 마지막 남은 명예와 체면에 대해 시비 걸고 나오면 자식이고 가족이고 소용없어요. 무슨 욕설이 나올지 상상도 안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우울증에 걸이고 스트레스 받고 힘들게 사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터트릴 자리가 없어서에요. 교회에 가서 욕을 하겠습니까? 옆에 사람이 듣는데, 교회에 가서 내 남편 XX 이다라고 해봐야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냐 하면 그 집사가 지금 남편에게 욕을 하는 것 같지만 우회해서 누굴 욕하는 거에요? 하나님 자신에게 욕한다는 것을 뻔히 다 아십니다. 저도 알겠는데 주님이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십일조 하면서 “자! 먹고 꺼져라!” 그렇게 하고 내는데 모를 리가 있습니까?
“돈 밝히기는 아이고! 자~ 1/10, 이렇게 해놓고 벌주기만 해봐라! 그렇게 돈을 좋아하다니”
(본인이) 이상한 교회에 가 놓고 자기가 30배, 60배. 100배 노리면서 줘놓고
성경에 십일조 내라는 그런 것 없다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예수님의 공격인 창끝을 한번 보라고요.
그것은 내가 모르는 나를 내 속까지 친히 가이드로 인도해줘요.
“ 네 속에 이런 것 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의 속에는 육이 있었던 겁니다.
육을 번역하면 나는 ○○의 자식이다. 육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혈육이에요. 인간은 혈육에서 못 벗어납니다. 아무리 부모가 나빠도 누가 내 부모의 욕을 하며 그 인간은 용서가 안되고 내 자식이 아무리 욕을 먹여도 누가 내 자식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손 지검을 하고 대신 나무라면 그 인간의 멱살을 쥐고 흔들 겁니다. “네가 뭔데? 내 자식을?”
심지어 남편이라 할지라도 내 자식을 건드리면 용서가 안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남편 입장에선 황당한 거에요. 자식을 하나 나았는데 DNA 50% 주었다고 내 자식이라고 하면 안되지요. 가위, 바위, 보를 하던지 몰아주기를 하던지 이렇게 해야지요. 그래서 4주 조정기간 이후에 법원에 가잖아요. 자식은 누가 키울 것인지, 냉각기간 거쳐서, 자식은 누구 것이냐 말이에요. 이런 문제에서 자식은 누구 것이냐? 이러면 나중에는 그 부모 문제만 아니에요.
자식을 밀어주는 친정 쪽과 시댁 쪽, 집안끼리의 싸움이 된다고요. 혈육을 다른 말로 하면 뭐가 되겠어요? ‘집안’이에요. 인간은 그 집안이라는 범위를 못 벗어나는 거에요. 자기 선택 자기자유, 마음대로 했지만 사실은 혈육 안에서의 찻잔 속의 풍랑이에요. 커피 잔 속의 풍랑이에요. 잔물결, 뛰어봤자 우물 안 의 개구리에요.
“너 같은 자식을 둔적 없다, 나가라!” 해놓고 그 자식이 감옥에 가면 보석금은 누가 냅니까? 부모가 사채라도 빌려서 내고 데리고 나올 때 등짝 한번 때려 주지요. “너는 부모 아니면 벌써 죽었어! 부모의 중요함을 이제 알았지?” 등짝 맞고 애는 또 그러고 (웃음) 혈육입니다. 혈육에서 어떤 인간도 못 벗어납니다. 벗어나려고 하지 마세요.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혈육에서는 못 벗어나는데 만약에 벗어났다고 칩시다. 혈육에서 벗어 난 것을 보고 뭐라고 하냐하면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오늘 두 번째 강의 제목입니다. ‘죽음’입니다. 혈육에서 벗어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해요. 내가 죽는 게 아니고 혈육에서 벗어나는 거에요. 그러면 내가 죽는 게 왜 죽음이 아닙니까? 자식이 제사를 드려주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그래서 옛날 선조들이 딸을 그렇게 싫어 한 거에요. 기어이 씨받이를 부르던지 해서 아들을 낳아야 되요. 왜? 아들을 낳아야 제사를 지내지요. 부모가 재산이 좀 있고, 재산이 있다는 말은 부동산 좀 갖고 있고 4층 정도의 건물이 있고 본인은 치매 직전에 있을 때 자식들을 호출합니다. 자식 서너 명이 마음 단단히 먹고 부인들을 데려 오지요. “마지막 유언이다.” 전신 있을 때, 정신이 있다는 말은 자기 힘으로 주소를 적을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주소를 안 적으면 유언장이 안 되거든요. 주민등록 번호하고 쓸 여력이 있을 때 합니다. 그럴 때 "제사 누가 가져갈래? 제사 네가 가져갈래? 그럼 4층짜리는 네 것이다.“ 이렇게 되거든요. 유언장이 제일 효력이 있어요. 1/n 이 안되요. 주민등록 번호 적고 주소 적힌 게 최고지요. 치매 걸리기 직전에 해야 되요. 병원 의사까지 동원해서 지금은 치매 안 걸렸습니다라는 보증서까지 해서 도장 찍고 해야 되요.
그래서 죽더라도 안 죽는 거에요. 영원히, 자식이 있으면 영원한 겁니다. 그런데 둘째가 와서 “제가 제사 드리겠습니다.” 해서 둘째가 제사를 가져갔습니다. (막상)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 두 달도 안되서 “도로 형님이 (제사)가져 가세요.” 제사 탁구 대회가 벌어집니다. 강 스파이크로, 제사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가 툭탁툭탁, 제사를 가져간다고 재산을 다 받아놓고도 입 싹 닦고 “형님이 가져 가이소” 이렇게 되는 것.
이게 뭐냐하면 모든 사람의 내부에 있는 악마적 요소에요. 이런 제사를 교회에서는 뭐로 바꿨나하면 추도 예배로 바꿨어요. 계속 살고 싶어서 목사 불러 놓고 구천에 떠도는 영혼 천당에 보내 달라고 그렇게 하는 거에요. 추도 예배보다 더 노골적인 것이 있어요. 천주교에서 하는 것인데 뭐냐하면 미사가 있어요. 이것은 추도 예배 정도가 아닙니다. 안 믿고 죽은 부모라도 미사(면죄부) 드리면 연옥에서 빼줄 수가 있어요.
성당에서 누가 빼내주나 하면 천국의 천사가 아닙니다. 천국의 예수님 옆에 누가 있나 하면 마리아가 있고요 마리아는 예수님 엄마니까 대선 실세거든요. 최순실처럼 (웃음) 실세니까 빼내 주듯이 마리아 옆에는 12제자도 있어요. 12제자가 성자가 돼서 밑에서 올라오게 되면 마리아에게 압력을 가해서 지옥에 간 사람들을 빼줄 수 있습니다. 돈은 성당에서 챙기고, 이런 것을 (교회의) 중보기도라고 볼 수 있어요.
(질문) 목사님! 어떤 사람은 제사를 지내도 된데요. 우리가 갖고 있는 의미만 틀리면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술도 먹어도 된다는데요?
제가 방금 이여기 한 것은 하라! 하지 마라! 의 이야기가 아니고 추도 예배를 안 드리고 미사를 안 드려도 우리는 늘 그렇게 하고 싶어 해요.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는 우리의 육을 이길 수가 없다고 “나는 교회에 다니면서 추도 예배는 금했습니다.”라고 해도 우리 마음은 예수님보다 나의 미래가 사랑스럽고 걱정되고 소중한 거에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아까 언약을 이야기 했지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죄 되게 하시는 겁니다. 창끝이, 예수님이 말씀 하실 때 말씀이 창이라면 한번 보라는 이야기이지요. 창끝을 보게 되면 내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고 이미 저질러 진 일에 우리가 그 늪에서 빠져 아무리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뭘 해도 늪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어요. 남 욕 할거 없어요. 추도 예배는 안 드린다고 하지만 우린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자식들이 나를 좀 기념해 주고 나를 위해 모임도 하고 은근히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타인이 나를 대신해 주는 겁니다.
광주 강의에서 한 예를 다시 들어야겠네요. 귤을 여러 개 놓고 그 중에서 샘플을 하나 뽑는다고 합시다. 샘플이란 말은 그 나머지와 동급이라는 뜻이에요. (샘플이)유별난 게 아니에요. 그 중 샘플 뽑아서 천국에 보내면 결국 간 사람이나 남아 있는 사람이나 다 똑같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겁니다. 행함이 아니고.
구원을 받는데 그냥 받는 것이 아니고 육 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그러면 육이 뭐냐? 죄인 됨이에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닙니다. 여는 부흥회에서는 자꾸 회개하라고 하는 데 그건 우리가 기억나는 것만 하지 평소에 우리가 지었던 모든 죄는 아무리 끄집어내려 해도 다 끄집어 낼 수가 없어요. 주님은 기억 난 죄만 용서해 주시는 게 아니고 우리의 육 자체에 대해서 이미 용서해 주신 거에요.
이건 뭐냐 하면 갇혀있다.
죄에 갇혀 있는 거에요.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는 것, 뭐 하는 것,
전부다 우리가 갖고 있는 육의 죄성을 폭로해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내 이름으로 구원 받지 않습니다.
이근호 “내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내 이름은 죽은 이름이에요. “네가 믿음도 모르면서 믿는다 했구나!: 그러니 내 이름으로 구원해 줄게 ”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쳤지요? 그들이 올 때도 알아서 주님을 찾아왔습니까? 하나 둘 씩? “선생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죽은 거 보니까 후회스럽습니다.
드라마, 요새 하는 역적이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아무개가 노비인데 얻어맞아서 형편없을 때 아들이 홍길동인데 그제서야 깡패들을 다 불러 모으지요. “선생님! 이제야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드라마 보셨지요? 이처럼 우리가 알아서 나온 게 아니라 주께서 알아서 찾아오시는데 찾아오셨을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도권을 예수님께 넘깁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잖아요.”
사랑은 급습이지요. 사랑이라는 것은 그냥 내 속에 뛰어 들어오는 거에요. 팍 찌르면서 오는 거에요. 예상했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했다는 말을 못하게 만드시는 식으로 우리를 사랑해줘요. 우리는 세상으로 향해있는데 사랑해줘 버리면 완전히 목덜미를 잡고 어딜가? 당겨 버리지요.
제가 주일 학교 설교를 하는데 (자료) 그림에 양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이 아주 잘 그려져 있어요. 예수님은 어디에 있나하면 그 뒤에 있어요.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간다 하거든요. 주님께서는 그 쪽으로 가면 안돼! 그 쪽으로 가면 이리가 있어!라고 뒤에서 조정을, 운전을 해 주시는 겁니다. 어디로 가도록? 채찍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너 때문에 내가 채찍에 맞았다는 것이 들리는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제 갈 길로 늘 가는 것을 알아야 돼요.
살면 살수록 점점 우리가 짐승이고 동물에 불가하다는 거에요.
정신이 있을 때 인간이지 정신 줄 놓으면 개 보다 더 못해요. 우리들이,
개는요 상황 판단이나 되지요.
주제도 파악 못하면서 까불기는 혼자 까불고 그래요.
여러분 사람이 죄 짓고 싶어서 죄 짓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죄 안 지은 것은 죄를 안 짓도록 상황이 그렇게 유도됐기 때문에 죄를 안 지었을 뿐이지
우리가 그러한 상황이 되면 온갖 나쁜 짓을 다 할 거에요.
자기가 답답한데 술 맛보고 마십니까? 술 아니면 도저히 못 견디니까 마시지요. 10년 째 술 끊어 놓고 속상하면 술 먹고 시집 간 딸이 이혼하고 오면 아이고! 괜찮다 해놓고 돌아서서 담배피고 담배 끊은 지 20년도 넘었는데, 엄마는 새벽 기도하고 그 어떤 정당성이란 없습니다. 그동안 딸이 참 잘살았던 거에요. 말씀에 때가 되매 이혼한 거에요.
범사에 뭐하라고 했습니까?
감사하라! 참 말은 쉽다만
감사하고 안 하고를 네가 선별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잖아요.
로마서 8장에.
주께서 뭐라고 하시냐 하면 육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이렇게 질문하지요. 바리새인들아! 육이라는 게 과거에서 현재로의 육이 되느냐 아니면 미래에서 현재로의 육이 되도록 했느냐 그 질문을 하신 겁니다. 어려운 질문이지요. 여기 46절을 읽어 보세요. 이게 뭐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것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완벽한 진리 체제를 갖추었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리였기 때문에 너도 진리일 것이다. 라고 대드는 겁니다.
(마 22: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그 중 하나의 예가 뭐냐? 현장에서 간음하다 걸린 여자를 데려와서 이 여자를 돌로 치라 했는데 돌로 칠까요? 한 거에요. 유대인들은 신명기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는 대목을 보면서 ‘돌로 치라’고 만 봤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칠 수 있다는 그 앞에 붙어 있는 그 본래의 의미를 빼먹은 거에요. 알 수가 없었던 겁니다. 심판은 율법을 주신 분이 심판하게 되어 있지 율법을 받은 자가 심판을 하면 안돼요.
시험 문제를 출제한 사람이 해답을 갖고 있지 머리 똑똑해서 100점 맞았다고 까불면 안돼요. 예를 들어서 주관식으로 임진왜란 때 했던 전쟁 중 마지막으로 승리케 한 사람은 누굽니까? 라고 선생님이 내면 얘들이 말하기를 이순신 장군이요. 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얘들 50명이 다 백점 맞은 거에요. 선생님이 약이 올라서 전부 빵점을 만든 거에요. “이순신 장군 맞잖아요?” 아니 이~순신 장군 요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런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하면“내가 수업 시간에 분명히 말했는데”
이게 바로 플라톤의 삼각형이에요. 변이 세 개다. 그런데 삼각형을 10명에게 그리게 해보세요. 다 다르지요. 그 원형은 하늘나라에 있다. 이게 플라톤이 말한 겁니다. 그것들은 다 복사본이고 다 가짜이고 진짜 원형은 이데아 세계에 있다. 천국 세계에 있다고 본 겁니다.
주님이 율법을 주신 분이 해답을 갖고 있어요.
그 해답이 뭐냐하면 죄 없는 자만이 칠 수 있다는 거에요.
그 여자가 죄 없다가 아니지요. 죄가 있는 건 맞는데
죄라고 규정 할 수 있는 건 누구 밖에 없다?
예수님 본인 밖에 없는 거에요.
그 여인을 잘 데리고 온 거에요. 사실은 질질 끌고 잘 온 거에요.
이 여자가 (간음)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 어떻게 처분 할까요? 하니
“처분은 내 마음대로 한다. 여자여! 내가 용서 할 께!”
이건 주님 마음대로에요.
우리가 그런 용서를 십자가를 통해 받은 거에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피 흘리신 거잖아요. 피를 흘렸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기를 내 죄는 내가 회개하면 된다는 그런 범위 안에 갇혀 있는데 주님께서는 오바 하듯 내가 죽지 아니하면 용서가 없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남은 할 일은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내가 죽는다고 용서가 안되고 꼭 주님이 죽어야 용서가 됩니까를 알아 가는데 우리를 평생을 보내게 하십니다. 이게 성도의 삶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누가 죽인다하면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생명을 두려워해야 되요.
생명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생명을 대해야 됩니다. 그동안처럼 죽는 것에 너무 떨게 되면 돈 앞에 떠는 셈이 되요. 우리는 생명에 대해 두렵고 떨어야 되요. 이 말은 요새는 대통령 앞에서도 안 떨지만
높은 사람 앞에서 떨지 말고
갑질 하는 것에 떨지 말고
예수님 앞에서 떨어야 되요.
갑중에 갑은 예수님입니다.
최고의 갑질은 예수님이 하시는 거에요.
살리고 죽이고는 주님 마음대로에요.
우리는 그런 주님을 믿습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지요. 그 점을 설명하면
인간은 육이다. 육에 속해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는 것도 과거를 알아요.
과거에 우리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가 있어서 나를 낳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서로 서로 묻습니다. “이 말이 맞지? 맞지?” 하는 거에요.
이렇게 인간들은 갇혀 있지요. 자기가 아는 것에 갇혀 있습니다.
맞다! 맞다! 맞다! 자! 맞다고 했으니까
제대로 갖추려면 미래의 천국에 들어 갈 합격을 높이는데 치중하게 될 겁니다. 확률이지요. 그것을 자기 의라고 하는데 반듯하게 살고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순종 안하는 사람들 보다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확률을 높이려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과거를 자꾸 되돌아 봐야 되요. 과거에 잘못 한 것은 두 번 다시 안하면 되고 술 끊고 담배도 끊고 나쁜 짓도 안 하면 되고 과거를 돌이켜 볼 때 내가 착한 일을 못했던 것은 이젠 용기내서 과감하게 해 보는 거에요.
고아원에 쌀을 갖다 준다던지 전에는 기도를 30분하고 끝냈었는데 이제는 5분을 더 늘여 본다던지 전에는 성경을 두 장 정도 읽었는데 이제는 다섯 장을 읽는다던지 그렇게 해놓고 자기가 놀래요. 이렇게 장~한 신앙이? 이렇게 멋~찐 신앙이? 자기가 자기에게 놀래요. 내가 이렇게 성령에 의해 달라졌나? 막 신자가 다 된 것 같아요.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해왔던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들이 했던 것이 뭐냐? 점점 더 어려운 과제를 자기에게 내고 다른 사람에게 퍼트리는 겁니다. 이왕 기도하는 것을 고통이 가미 되게 기도해 봤냐?를 묻는 거에요. 그냥 기도 하지 말고 5일 동안 굶고 기도해 봤냐?를 묻는 겁니다. 편하게 아침 11시에 기도하지 말고 새벽 4시에 와서 기도 해봤냐?를 묻는 거에요. 헌금도 천원 내지 말고 천만 원 내는 아픔을 경험해 봤냐?를 묻는 겁니다.
이런 것은 전부 어디에 속합니까? 과거에 속하지요? 과거보다 조금이라도 발전이 있으면 신앙이 나아졌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을 세 자로 성화론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 성화론, 장로교에서 칼빈을 언급하면서 교회에 충성하도록 매진하게 만드는 필살의 무기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해놓고 성화되지 않으면 어디에 합격하지 못한다? 믿어도 성화의 코스를 안 밟으면 천국에 탈락하거나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
상급이 전혀 없는, 보너스가 전혀 없는, 부끄러워서 천국에 가도 주님 근처도 못가고 저 구석에 앉아서 흑흑흑 울고 있는 “진작에 착실히 할껄! 십자가 안 믿어서~” 팬티 바람으로 구원 받는다고 상급 없이 고린도 전서 3장을 거론 하면서, 사기입니다. 이것만 사기가 아니고 다 사기이지만 대표적 사기입니다. 상급에는 차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면류관은 의로운 사람에겐 다 줘요. 의로운데 상 안 주지 않아요.
의로우면 다 상을 주고 죄인에겐 상이 없어요. 의인이냐 죄인이냐는 상이 있고 없고로 판단하거든요. 의인이면 다 상을 주는 데 여기서 의가 뭐냐? 율법을 지켜서가 주는 게 아니고 율법 외에 주시는 상이기 때문에 상을 받아요. 그러면 율법 외란 뭐냐? 바로 믿음으로 받는 의가 율법 외입니다. 그러면 뭘 믿느냐? 화목 제물인 것을 이미 내 죄는 처리되었음을 믿을 때 그것에 대한 상이 ‘의’의 면류관이에요.
면류관 앞에 ‘의’라는 거에요. 사도 바울이 받았던 면류관이 이것이에요. 사도를 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의’의 면류관을 받은 거에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의의 면류관 받았으니까 이젠 사도 안하면 되겠네라고 하는데 사도는 본인이 하고 싶어서 손들고 한 게 아니고 의의 면류관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사도라는 직책을 받은 것이고 우리는 그 직책을 받지 못한 것이에요.
우리는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는데 장사나 농사를 해도 괜찮아요. 그 쪽은 그 쪽 업을 해도 괜찮아요. 그 쪽은 그 쪽 일을 해서 의의 면류관을 부각시키고 사도는 사도 일로 드러내는 거에요. 물주는 자 있고 자라게 하시는 것은 누가 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뭘 보시냐 하면 먼지 털 듯 털어 버리십니다. 인생 중 네가 한 것을 다 털어 버리시고 그 바닥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있는 지 그것만 살펴요.
이것이 고린도 전서 3장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면 의가 되는 거에요. 의인 되는 겁니다.
(고전 3: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이것이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아무리 사람이 집을 지어도 만약에 바람이 불어 버리면 모래위에 지은 집인지 돌 위에 지은 집인지가 들통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반석이니까. 베드로를 반석이라 하지만 반석이 될 때 까지, 반석이라는 의미를 알 때까지 주님을 배신한다는 코스를 필히 밟았어야 됩니다.
그러면 베드로만 배신했습니까? 우리는 매밀 같이 평생 동안 계속해서 배신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 자기 죄에 대해서 제발! 자기가 책임지지 마세요. 책임지라는 것은 악마의 소리입니다. “당신이 예배 시간 11시인데 11시 반에 왔으니 헌금 천원 더 내야지! 저번엔 교회 출석도 안했잖아! 그러니 일찍 성가대 봉사로 때워야지!”
과거 어려서 크리스마스에 교회 가서 빵 얻어먹고 20대까지 안 나가다 30대부터 이제 교회 나와서 못 다한 것 채우기 위해 집사부터 시작해서 남들보다 맹렬하게 따라 잡아야지!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과거에 기억된 자기의 인생에다 미래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과거의 구닥다리 신앙의 철로에 새 철로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놓아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구닥다리 모든 철로가 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연결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철로를 예수님께선 이용하시지요. “너의 죄 된 성질이 어디 가겠느냐!” 톡톡히 주께선 그렇게 활용하십니다. 십자가를 증거 하도록, 그래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지요. 또 내가 율법에는 흠이 없지만 전혀 자랑거리가 아니다. 율법에 흠없이 했던 모든 것들을 뭐로 여겼다? 배설물로 여긴다. 똥, 오줌이죠.
집에 똥, 오줌 사진 찍어 걸어 놓고 하는 건 치매 걸린 노인이나 하는 것이지 더럽게, 상상도 하기 싫어요. 그런 것을 도배 해 놓는 게 어디 있어요! 없잖아요. 없는데 교회에선 그렇게 하고 장로나 집사들은 그렇게 한다니까요. 전도 상 받은 것, 똥, 오줌 딱 걸어 놓고 선교 회비 냈다고 감사장 해 놓은 것, 걸어 놓고 또 교회가면 역대 당회장 사진들 쭈~욱 걸어 놓고, 실제로 그걸 제가 봤어요. 안 본걸 제가 예기 안합니다.
그 목사님에게 제가 그랬어요. 검찰청도 아니고 왜 저런 걸 걸어 놓으냐고 (웃음). 이게 뭐냐 4대째 신앙생활, 모태 신앙, 아버지 장로에 어머니 권사, 이건 마치 상장같이 세례장 걸어 놓고 이것이 똥, 오줌을 걸어 놓은 것 하고 똑같습니다. 자기가 나쁜 짓 한 것 셀카 찍어서 걸어 놓은 거 하고 똑같은 거에요.
미래가 우리를 지금 결정해 놓은 겁니다. 제가 지난 설교 시간에 이야기 했지요. 현재는 미래의 조건이다. (어려운 것은 적어놓으셔도 좋아요.) 미래를 위해 지금 이렇게 돼야 마땅하다는 거에요. 예수님은 다윗에 대해 질문합니다. 다윗의 자손이 어떻게 선조가 되는 가를 답변해 봐라! 이 말입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을 중간에 놓고 다윗의 육적인 자손이 어떻게 다윗의 선조가 되는 설명해 봐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왜 조상이 다윗의 후손으로 나와야 되는 이유를 설명을 해봐라! 그러니까 46절에 뭐라 되어 있어요? 한 마디도 답변 못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이 공중에 질문을 겨냥하는 게 아니고 그 인간을 겨냥하는 거에요. 인간이 진리를 가로막는 마귀 짓 하고 있음을 아울러 내용을 품어 질문하시는 거에요.
주께서 질문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 쪽에 문제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성경에서 보면 먼저 질문한 대표적인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아담이에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러신 거죠. 왜 숨어 있느냐를 기정사실화 하시는 거에요. 숨어 있는 아담은 내가 창조한 게 아니라는 거에요. 뭔가 탈이 났어요. 탈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어요. 개를 밖에 데리고 나왔는데 이상해! 이건 내가 키우던 그 개가 아니에요. 갖다 버리던지 안락사 시키던지 해야되요.
이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일이 뭐냐하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산 형태를 갖는 거에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이 이런거에요.
관계가 끊어지면 죽은 거에요. 다른 말로 하면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다는 건 죽은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거울을 보면서 폼 잡고 있는 거에요.
“거울아! 거울아!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시체가 시체와 견주는 꼴이에요. 다른 시체와 자기하고 누가 더 때깔 좋은 시체인지,
서서히 망가진다는 거지요. 우리 몸의 수분이 빠져 나갑니다. 온갖 것 맞지요이영애가 부러운 거에요. 나이가 50이 다 되어가도, 그런데 배추 농사짓는 아줌마하고 비교해 보세요. 수분이 다 날라가고 없어요. 한 쪽은 70대에요. 6시 내 고향 보세요. 촌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나이 소개하면 다 놀라요. 50대인데 60-70내로 보이는 사람이 많잖아요. 빠져 나갑니다. 말릴 수가 없어요
가슴을 치며 청춘을 돌려 달라 해도 어떻게 누가 돌려 줘요? 어떤 탈랜트가 고백을 하는데 미스 코리아 출신인데 그 딸이 이런 말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 엄마가 이쁘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땐 수분이 빠졌구먼 뭐가 이뻐요? 정말 솔직하지요? 얘들 피부의 탱탱함과 엄마하고 비교해 보세요. 엄마가 이쁜 구석이 없지요.
그리고 지금 기억하기로 제가 십대엔 40대 아줌마 중에 이쁜 사람이 없어요. 엄마나 40대 이모가 밖에 외출한다고 화장한 것을 보면 가관이 아니에요. 급조해서 칠한다고 나중엔 가 씻어 버릴 것을 30분에서 1시간씩 붙들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이모가 하는 짓을 모를꺼야!” 얘들은 못 속이잖아요. 아빠들처럼 화장 안하고 그냥 나가면 되는데 꼭 이모나 엄마들은 꾸민다고 애를 쓰고 꾸미고 나서는 꼭 물어봐요. “얼굴 괜찮지?”라고 해도 죽은 시체에요.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표현은 잘못된 겁니다. 마귀가 그렇게 우리에게 교육하고 세뇌시킨 거에요.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음에 갇혀 있어요. 죽음에 갇혀 있는 이유도 모르지요. 그래서 율법을 줘서 율법에 갇혀 있다고 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래서 죄에 갇혀 있다. 율법이 주어지므로 우리는 더욱 더 죄 되게 하고 주님 앞에 갇혀 있다는 말이에요. 갇혀 있다는 말은 시간 요소가 빠져 나갔다는 거에요.
미래를 기대하지 마세요. 이미 체육관 안에 갇혀 있다면 100년을 살던 1000년을 살아도 갇혀 있는 겁니다. 100년 살면 살수록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뿐이에요. 가요에 60대는 아직 젊다고 오지 말라고 했지요? 70대는 보세요. 90세는 알아서 가겠다고요? 와도 안 받아 줄거에요. 점점 더 자기 본색이 드러납니다. 문제는 이유를 모른다는 거에요. 교회에 가도 이유를 몰라요.
복음을 알아도 성경을 봐야 되는데, 교회에 가도 칭찬하고 격려만 받을 뿐이지 죄 때문에 죽는 겁니다라는 말을 들을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교회에서 말하는 죄란 회개하면 다시 착해질 수 있습니다를 내다보고 죄라고 하니까 죄를 지어도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면 주께서 복 주셔서 죄 용서해 줍니다라는 식으로 하니까 천주교나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백 날 기도하고 백 날 헌금 목돈으로 내도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교회 보셨습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은 뭐냐하면 자기 도취하는 것이거든요. 일종의 마약이다라는 말이죠. 거울보고 도취되듯,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러 온 사람에게 거울을 깨어버리지요. 거울의 자리에 주님의 일그러진 피 흘린 모습을 내미는 것이 진정한 복음적 설교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착해서 살려주신 게 아니고 그 죄를 활용하게 되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꾸역꾸역 살려 준 거에요. 어떤 짓을 도 십일조 떼 는 건 기본이고 주일 성소 안하는 것도 기본이고 남편하고 주일 날 등산가도, 등산가나 교회에 가나 늙어 죽는 속도는 같은 거에요. 등산가고 교회가서 젊음이 유지되는 그런 건 없습니다. 보습 효과 없어요. 교회가 무슨 화장품 회사입니까?
다만 교회에 오므로 뭘 아느냐 하면 죽는 것이 지당하고 마땅하다는 것. 내가 더 이상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것, 죽음에, 내 죄에 대해 책임 질 이유가 없다는 거에요. 그 동안 너무 놀아나서 마귀에게 교회 목사, 사기꾼 에게, 너무 놀아난 거에요.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을 자꾸 책임지라고 하니까 헌금은 헌금대로 내고, 돈은 돈대로 바치고 나아질 것도 없고 선교 헌금 다하고 봉사하고 알뜰살뜰 교회 청소하고 할 건 다했지요.
무슨 비젼 센터, 교회 교육관 짓는다고 옆에 있는 목사도 불러서, 사기꾼 불러서 교육관 짓는다 해서 주식 투자 했는데 30배, 60배, 100배로 대박나서 하나님이 약속 지키실 줄 몰랐는데 헌금하고 나서야 알았다니 어떻다니, 이런 식으로 여러분이 이렇게 안되는 것은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 없어서라고 이런 식으로 응답을 알아서 확인하세요. 이런 식으로 사기를 치는 이건 서로 단짝이 돼서 패키지 쇼처럼 하는 거에요.
드럼치고 선교단 아이들 불러서 바람잡이하고 2부 순서로 간증집회 해서 “나도 예전엔 돈 아껴썼는 데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니까 땅에서 복 받았습니다. 대대손손, 4대 손까지,이런 식으로 하니까 ”나도 그런 거 안 믿지만 찝찝하니까 한번 해보자!“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들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고 주의 것이기 때문에 이 복음이 들리고 믿어지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 누가 되겠나?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다윗의 자손이라 하는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게 다윗의 자손 역할이에요.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다윗 보고 네가 죄인 되고 밧세바하고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은 미필적 고의로 살인하고 하는 일을 하는 것이 구원 받은 자의 왕이 되는 거에요.
왜? 이스라엘의 왕이니까, 왕이란 작자가 간통 죄 짓고 했다면 그 죄인 됨을 동감하는 사람이 새롭게 구원되는 새 이스라엘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느냐? 십자가 피로 다 알게 된다는 거에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주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렸느냐? 이건 샘플이거든요. 우리는 간음을 안 했지만 내 옆 사람이 간음을 했다면 나도 상황이 되면 간음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아직까지 이쁜 여자가 안 나타나서 그래요. 묻지도 따지지 않고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주는 사람이 아직 안 나타나서 그런 거에요. 아직까지 이성적으로 버틸 만 해서 버티는데 나중에 나타나면 다 주고 싶어요. 공유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거에요. 아직까지 안 나타나서 그렇지, 나타나나 안 나타나나 관계없이 이미 우리는 죽은 시체라니까요. “아직까지 죄 안 지었습니다.” 무슨 죄를 안 지어요?
이게 간음죄든 살인죄를 졌다면 우리는 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내가 간음하고 살인 안 했더라도 이미 같이 지옥 가는 겁니다. 같이 지옥 가는 전세 버스에 옆 자리에 있는 거에요. 저는 35번이고 나는 36번이고 같이 탄 거에요. 마지막 심판은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되요. 십자가의 의미는 누가 주느냐? 다윗의 자손이 줍니다. 줄 때는 그냥 주지 않고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주는 거에요.
이미 용서 되었어. 언제? 창세 전 부터 용서되었어. 창세 전 이라는 미래가 현재 속에 삽입됩니다. 칩처럼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는 누구와 싸우냐 하면 내 인생 내가 책임지려는 나의 육적인 것과 안 그래도 되는데 “너 그러면 마귀에게 또 놀아나는데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당할래?” 하는 소리와 우리 안에서 싸우데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순환된다고 지난 낮 설교에서 했지요. 순환 펌프라는 말을 했지요?
액체는 고체보다 강하지요. 앞에 있는 단단한 콘크리트 같은 나의 잘난 성화가 있다면 십자가의 피가 그것을 다시 덮어 줄 때 “주여! 제가 또 나를 위장했습니다. 잘난 나 뒤로 제가 몰래 숨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 살아서 지금 부활 했거든요. 지금 뭐 하시겠어요? 부활해서 놀겠습니까?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죽을 때까지 십자가의 홍보용으로 사용하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나를 꾀더냐고 사도 바울이 지적 한 것처럼 십자가 사건의 계속 반복해서 십자가 사건을 언급한 이유를 이제는 우리가 알게 하고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