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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증인 생산 1703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14. 17:47
2017-03-25 01:45:34조회 : 360         
증인 생산 17032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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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175.♡.233.149)17-04-04 09:31 
광주 강의(2017. 3. 24) 37-1 

마가복음 10장 13-14절에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의 의식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 12제자를 예수님이 뽑았어요. 12제자를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정신구조가 예수님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심으로 경계선을 만듭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 역시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계시면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발언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활동하실 때 경계선이 확연하게 생깁니다. 예를 들면, 가나의 혼인잔치가 있습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동이 났어요. 그 사실을 마리아가 예수님께 알리면서 은근히 문제를 해결하라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의도에 말려들 생각이 전혀 없음을 알립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했지요. 

그런데 결국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제공하도록 했지요. 이 때 손님들이 한 이야기가 있어요. ‘좋은 포도주를 잘 간직해 놓았군요.’라고 합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취한 후에는 질 낮은 포도주를 내놓는데, 이 가정은 반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손님들이 생각하기에는 먼저 마신 포도주나 나중에 맛본 포도주나 같은 포도주입니다. 나중에 마신 포도주가 더 질 좋은 것은 사실이나 결국은 다 포도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경계선은 없어요. 그런데 누가 여기에서 놀라는가 하면, 하인들이 놀라요. 이들은 포도주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고 물을 퍼다 주었어요. 

물을 퍼다 주었는데 손님들이 하는 말은 ‘야, 이 집은 좋은 포도주를 나중에 주네.’ 하면서 즐거워해요. 하인들은 분명히 알아요. 자신들이 가져다 준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도 알지요. 그런데 어떻게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어요.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첫 번째 표적입니다. 표적은 증인을 낳아요. 증인은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자신이 본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위세나 강압에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생산된 것입니다. 

표적은 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증인을 생산합니다. 증인(하인)들은 포도주를 가져 간 것이 아니고 물을 가져갔어요. 그런데 손님들은 포도주가 맛있다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 증인들에게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가?’ 물으면 설명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증인은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증거만 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이 질문에 성도는 대답할 말이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에. 가나 혼인잔치의 표적에서 하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난처하게 되었어요. 사도 바울, 스데반도 난처한 증인이 되었어요. 성령을 받으면 그 사람은 졸지에 바보가 됩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아는 것이 많았는데 성령 받은 후에는 할 말이 없어요. 그동안 자신이 알았던 모든 것은 배설물이에요. 아무 쓸데없는 거예요. “당신은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에 “글쎄요?”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어제까지는 안 믿었는데 오늘은 믿고 있잖아요.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변화가 생겼습니까?” “글쎄요?” 

왜 이런 대답밖에 못하지요? 예수 믿기 위해 자신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요. 하인들은 평소처럼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하인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이 물이 포도주로 변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아니죠. 하인은 그냥 물을 채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퍼서 사람들이게 주라고 해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하인이 뭔가를 노린 것이 없어요. 그냥 주님의 뜻이 자신에게 덮쳤습니다. 이것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니 하인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사건의 증인이 되고 말았어요. 이처럼 주님이 하신 일을 내가 무슨 수로 설명을 합니까? 내가 계획하고 내가 한 일이라면 설명을 할 수 있는데 주님이 와서 덮쳐서 된 일을 내가 설명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왜 예수 믿습니까?” “글쎄요?” “우리 집안은 불교를 믿는데 너는 왜 예수를 믿어?” “그러게요. 내가 미친 모양입니다.” “이제 정신 차리고 돌아와야지.” “내가 예수를 믿으려고 했으면 알아서 철회를 하겠는데 내가 믿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냥 믿어졌어요.” 자신은 예수를 믿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한 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이 믿어짐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증인이 되는데, 이 증인은 예수님과 동일하게 이 땅에서 경계선에 속한 사람입니다. 경계선이 뭔가 하면, 양쪽을 다 아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다고 말하는 바울은 지금 어디에 속한 것입니까? 이 말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예전에는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는데 이제는 육체로 아는 것이 아니다(고후5:16).’고 말한 거예요. 

성령을 안 받았으면 육과 영의 차이를 몰라요. 다만 성령을 안 받아도 육과 혼과 영을 자기 나름대로 구분합니다. 이게 헬라철학입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삼분설’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워치만 리의 지방교회에서 이것을 주장합니다. 지방교회는 이것이 무기입니다. ‘세상교회는 육과 혼만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육과 혼, 그리고 영까지 다 안다.’  

이렇게 주장하면 경계선이 없어요. 왜냐? 이런 주장을 하려면 자신이 혼의 상태에 있는지 영의 상태에 있는지 본인이 감시를 해야 돼요. ‘혼에서 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혹시 혼에서 육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또 영에 왔다면 더 깊은 영으로 가려면 어떻게 할까?’ 늘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인이 본인의 유혹자가 됩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헐떡이면서 달려가는 거예요. 그러면 결과적으로 자신은 누구의 증인이 됩니까? 본인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워치만 리는 기존 교회의 극단입니다. 기존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워치만 리를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왜냐? 모든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자아가 되기 위해서 교회에서 훈련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해요. “복음 전하는 목사의 오류가 뭡니까?” 제 답변은 “복음전해서 교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냥 복음으로 살면 되는데, 복음으로 복음적인 교회를 만들려고 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고 본인의 증인이 돼요. 워치만 리의 지방교회를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모든 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이들이 선점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면 왜 다른 교회는 지방교회처럼 못하는가? 다른 교회는 따라가다가 돈으로 흘러요. 그런데 워치만 리는 돈이 아닌 말씀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거론합니다. 이들의 목표는 이상적인 교회 만들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온 그대로의 교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니 돈은 부정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기존교회에서 실망한 사람들이 한 단계 더 올라가고 싶어 설치다가 지방교회로 갑니다. 

그럼 워치만 리의 지방교회와 김홍전 계열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김홍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상적인 교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해요. 그런데 워치만 리의 지방교회와는 달라요. 지방교회는 교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따라 살면 결과적으로 성경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존교회는 워치만 리를 비판할 수가 없어요. 교회를 만들려고 돈을 요구한다면 비판을 하겠는데, 그들은 오직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비판을 합니까? 이런 워치만 리의 사상으로 장사를 해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제자 위트니스 리입니다. 이게 오늘날 지방교회입니다. 

그러니 지방교회는 워치만 리의 이론으로 장사를 하겠다고 나오는 것이 나쁘지만 워치만 리의 교리 자체를 나쁘다고 지적할 사람이 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기존교회가 워치만 리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과 혼과 영을 거론하면서 인간의 구원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이 있다고 하는 것은 기존교회와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러나 표적은 예수님의 증인을 생산합니다. 이 증인은 자기 구원에 대해 할 말이 없고 ‘저분이 물을 갖다 주라고 해서 갖다 주었을 뿐입니다.’라고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게 되지요. 증인은 예수님을 설명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 일하게 계심을 증거할 뿐입니다.  

12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다닌 사람들입니다.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15절에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어요. 

이 대목을 보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어린 어아처럼 될까를 궁리하겠지요. 제가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몇 살부터 기억이 납니까? ‘나는 이런 아이야.’ 라고 처음 생각할 때가 언제였습니까? 제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만약 여러분이 5세 때의 마음을 아신다면 그 때 ‘나는 이런 아이야.’라는 것을 규정했고, 그것이 부합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처음 확정한 때가 언제지요? 이런 회상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5세, 6세 끊어진 것이 아니고 연결되고 19세쯤 되면 자아가 형성됩니다. 자아의 특징은 과거를 돌아볼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자아는 과거의 자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19세 때 자아가 형상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내가 8세 때는 이런 일을 했고, 10세 때는 이런 일이 있었고 이렇게 기억이 되는 그 시점이 자아입니다. 그러면 내가 8세 때 눈 가리고 소꿉놀이를 했는데 실제로 해 보세요. 그러면 5세라 생각하는 그 주체가 이미 19세입니다. 

19세를 떼고 5세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미 무르익은 주체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빵이 있는데, 밀가루를 반죽하고 첨가물을 넣어 오븐에 구워서 빵이 되잖아요. 빵이 만들어지기 전에 밀가루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미 빵이 된 이상은, 내가 밀가루 반죽의 시절이 그립다고 해서 빵이 밀가루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신 말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시 어린 아이가 될 수 없잖아요. 어떤 사람은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자.’고 하는데, 겸손해도 어른으로써의 겸손이에요. 

만약 어른인 내가 5세 때의 나로 돌아가 어린 아이의 심정이 된다. 반드시 이 자아는 대가를 바래요. ‘나는 어린 아이의 심정이 되었으니까 천국에 넣어줄 거지요?’라고 하는데, 이 질문이 절대 어린 아이의 질문이 아니에요. 어른은 자기 행동에 대해서 기대와 목적을 갖고 있어요.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기 행동에 대해 어떤 기대나 목적이나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다는 말은 그냥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본문에서는 ‘받든다’(막10:15)고 했어요. 그런데 어린 아이가 ‘내가 부모를 잘 받들어야 살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린 아이는 없어요. 

겨우 돌 지난 내 외손녀가 혼자 장난을 치고 까불고 하는데, 하루는 화장대 의자의 뚜껑을 열다가 무거워서 내려놓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서 또 열다가 무거워서 내려놓고, 그러다가 손을 미처 못 뺀 상태에서 의자 뚜껑을 내려놓았어요. 심하게 아픈 정도는 아니었는지, 3초 정도 가만히 있다가 엄마한테 달려가는 거예요.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면서 제가 생각했어요. 아이들은 문제만 생기면 엄마에게 달려가요. 가서 기대고 의지하고 자기를 맡겨요. 이건 깊이 생각해서 된 행동이 아니고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아서 그래요. 자아가 형성되지 않으면 자율성이 없어요.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파도, 잠이 와도, 심심해도, 무슨 일이 생겨도 무조건 엄마에게 달려가는 거예요. 이건 본능적 행동입니다. 이 상황이 ‘아이는 엄마를 받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받든다는 것은 이미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에요. 아이의 정체성은 1년 6개월 정도가 되면 생긴다고 해요. 제 외손녀는 아직 그 때가 되지 않아서 자신과 엄마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향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는 말은, 하늘나라가 만든 성도는 다 어린 아이가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나이가 70이든 80이든 관계없이 그는 주 안에서 어린 아이가 됩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는 것은 워치만 리가 하는 짓이에요. 한국 교회가 다 이런 상황입니다. ‘예수님 말씀 듣고 순종해서 천국 가는 자가 되세요.’ 교회에서 이런 소리를 합니다. 천국은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기위해 노력한다면 이것은 자기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가나 혼인잔치 이야기했지요. 포도주 생산하는 일에 하인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물을 항아리에 부으라고 해서 부었고, 그 물을 갖다 주라고 해서 갖다 주었는데,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시면서 맛있는 포도주라고 합니다. 그 본문은 보면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요2:9).”고 되어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하인들은 압니다. 그런데 하인들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만약 손님들에게 “여러분, 제가 갖다드린 것은 물인데 포도주로 바뀌었어요.”라고 한다면 욕만 얻어먹어요. 만약 우리가 남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면, 내가 증거를 잘 했을까, 못했을까를 두고 염두에 두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어린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스스로 책임지는 어른이 됩니다. 이건 누구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받들어 모시는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린 아이를 생산합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만들어져요. 즉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신 후에는 예수님 나라로 괄호 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예수님이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이란 인물이 어떻게 하늘나라라는 영토와 일치되는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요. 

하늘나라는 언약개념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조성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때에 언약은 누가 독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독점해요. 그 근거가 뭔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이 말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바로 ‘다윗 언약’ 관계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아들을 만들 것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을 자기 아들로 만들겠다는데, 그 아들은 혈육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생길 아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게 다윗 언약이에요. 

그러니까 다윗 언약이 오게 되면 아들이 일을 마무리 지으면 하나님도 손 틀어요. 그러면 그 나라는 아들의 나라가 되고 모든 것은 끝이 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왕국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언약적 나라인데, 일반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 나라를 하나님 나라로 봐요. 일반인들의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자체가 우상이란 것을 알지 못하면 언약을 이해 못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상입니까? 우리는 오류가 있기 때문에 오류 있는 존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오류 있는 하나님이고, 그게 우상입니다. 우리는 오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일하지 않고 자기 아들과 일을 하십니다. 

아들 외에 다른 사람과 일하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12제자도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뽑은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 증인 되라고? 아닙니다. 예수님 증인이지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언약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증인은 아버지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 증인이 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지 하나님의 증인 되는 것이 아니지요. 왜냐?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은 다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부터 먼저 챙기고 예수님은 일종의 옵션입니다.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분의 아들도 있다고 하니까 그분도 믿어야 할 것 같아서 믿기로 하고, 또 성령도 있다고 하니까 성령까지 믿어서 완벽한 믿음을 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질문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는 뭡니까? 참 신입니까, 우상입니까? 우상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거예요.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몰라요. 하나님을 몰라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다가 우상인 것이 들통 났고,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하나님이고.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가면 거기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도 없어요. 자기 혼자 있어요.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눈 오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못 오는 것인지, 안 오는 것인지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요. 안 오는 겁니까, 못 오는 겁니까? 안 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으니 안 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인데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 우상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사야 53장 1절에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고 해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어린 아이는 누가 만들지요? 예수님이 만들어요. 만들 때 어떻게 만드는가 하면, 예수님이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면서 만듭니다. ‘누구든지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고 했지요. 이 말은 아무도 알고 천국에 들어갈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갈 수 있습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왜냐? 하나님의 모든 일을 위임 받았기 때문이죠. 많은 주석과 책들에서 이 말씀을 놓고 사람들을 닦달해요. 교회 왔으면 제발 어린아이같이 되라고. 그런데 목사 자신도 안 되는 걸.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람들이 행할 수 없습니다. 십계명만 못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처벌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법을 못 지킬 경우에만 처벌 받는 것이 아니고, 처벌 대상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법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처벌을 모면하기 위해서 법을 지키려고 해요. 이렇게 되면 법을 지킨 자를 죽이면 됩니까? 수학능력 시험을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다섯 과목 정도 시험을 치는데 점수를 매기는 것은 시험이 끝난 후에 하는 일이지요. 만약 첫째 시간 후에 “너는 이번 시험에서 탈락이야!” 이렇게 나오면 안 되잖아요. 

왜냐? 기회를 주고 난 후에 최종 판단을 해야 하는데 기회를 주기 전에 결정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시험 친 사람은 마지막 시간까지 시험을 친 후에 판단해 달라고 항변을 할 거예요. 그러나 판정관이 ‘탈락’이라고 말한 것은, 그 사람의 점수를 보고 판정한 것이 아니고 ‘시험을 쳤다는 자체가 불합격자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네가 왜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려주시려고 성경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을 왜 모르느냐?’ 그럼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지옥 갈 자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성경 읽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은 죄는 있고, 천국은 가고 싶고. 그래서 천국 가기 위한 방법을 알기 위해서 성경 읽잖아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감춰진 완악함, 즉 마귀의 본성입니다. 

내가 구원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추호도 못하는 거예요. 내가 잘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죄악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실까요? 예수님이 대신 죽지요. 예수님은 말씀을 못 지켜서 죽었습니까, 말씀을 지켜서 죽었습니까? 지켰기 때문에 죽었어요. 이걸 인간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왜냐? 신명기 28장에 보면,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에 순종해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어요.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저주 받는다는 그 공식,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 이런 이론이 있습니까? 아무 곳에도 없어요.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아무도 납득 못합니다. 

2,000년 기독교의 역사가 참으로 희한합니다. 열심히 하면 천당 간다는 것을 교회가 상품으로 팔았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라는 말은 하는데, ‘우리는 구원 얻을 자격이 안 됩니다.’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끌어 모아야 돈이 나오는데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미국의 어떤 영화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시고 숙모가 자신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성장한 후에 숙모의 귀한 목걸이를 훔쳐서 집을 떠났어요.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배은망덕한 조카를 욕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조카가 숙모를 사랑하고 도와주기 위해 그런 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숙모가 가난해서 진짜 목걸이는 팔고 그 대신 가짜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조카만 알고 있었어요. 

그 진짜 목걸이가 너무 비싼 것이기에 숙모와 동업하는 오빠가 사업이 어려우니까 목걸이를 팔아서 빚을 청산하고 사업을 새롭게 일으키자고 압박을 했어요. 숙모는 죽을 지경입니다. 자신이 가진 목걸이가 가짜인 것을 오빠는 모르는 거예요. 이 모든 상황을 조카가 알고 있었기에 그 목걸이를 훔쳐 도망침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숙모의 난처함을 해결해 주었어요. 

모든 죄를 조카가 짊어지고 지금 수배당하고 있고, 숙모는 살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희생을 당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가짜인 것 때문에.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이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은 없어요. 그래서 이 가짜 세상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이 가짜인 것을 알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죄도 없는 분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어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모릅니다. 이 세상이 가짜인 줄을.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생산하기 위해 택한 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으니까 ‘우리가 가짜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아시는 분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왜 갑니까? 현실을 포기하기 위해 갑니까, 현실에서 대우받고 잘 살기 위해 갑니까? 복 받아서 잘 살려고 교회 가지요. 그러니 그들은 십자가를 모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믿어 천국 갈 생각만 했지,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가짜인 것을 모르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7. 4. 4. 08:26 녹취 마침)

 서경수 (IP:14.♡.78.67)17-04-14 17:30 
광주 강의(2017. 3. 24) 37-2 

지난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미 어른이 된 입장에서는 다시 어린 아이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른들에 의해서 어린 아이가 무시당하는 것을 분히 여기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처음 것이 낫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이 제일 낫고 좋은 거예요. 그러나 갈수록 질적으로 떨어지겠지요. 어린 아이처럼 받들라고 했는데, 5세와 2세 중 누가 어린 아이입니까? 2세가 어린 아이죠. 2세와 1세 중 누가 어린 아이입니까? 1세가 어린 아이죠. 이 말은, 역순할수록 하나님의 창조성이 더 많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역순으로 갈수록 더 낫다고 하면 결국 없음이 가장 좋은 거예요. 어떤 있음보다 없음이 더 나은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없음은 비교 대상이 안 된다고 봅니다. 귤 1개와 귤 없는 것 중 어느 것이 좋은가?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뭔가 있어야 비교가 되는데 없으면 비교할 수 없지요. 

있음에서는 없음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있음이 점차 질이 떨어져 결국 없음으로 떨어진다면 인간은 자신이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입장에서는 있음도 모르는 것이 됩니다. 내 인생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면 현재 살아가는 이것도 뭔지 모르는 거예요. 

내가 지금은 있어도 결국은 죽어서 없어질 것이 뻔한데, 이 없음과 관련짓지 않고 하루하루를 산다면 그 삶은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주님은 인간이 죽어서 없어지는 그 세계를 처음 있게 된 것과 일치시켜 버립니다. 고무줄놀이를 할 때 양쪽에서 잡아 당겨야 됩니다. 없음과 없음이 잡아주지 않으면 있음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있음과 없음에서 있음을 인간으로 보고, 없음을 예수님 자신으로 봐요. 죽고 심판하는 것을 예수님이 하고, 태어나게 하는 것도 예수님이 하고. 그런데 없음이 있음의 세계에 들어와 버리죠. 그러면 있음으로 유지되는 대화의 차원과 예수님의 차원이 같을 수가 없어요. 

어린 아이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어린 아이는 없다고 본 거예요. 그렇게 보지 말고 없음의 자리를 성경에 비춰봅시다. 그러면 최초에 부부가 나와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죠. 아담이 누구와 결혼했지요? 자신과 결혼했어요. 자기 몸에서 나온 갈비뼈와 결혼했잖아요. 자기가 자기 몸과 결혼했기에 두 몸이 아니고 한 몸입니다. 

아담이 범죄하든 안 하든 아담은 자기와 결혼했고, 그래서 자식을 낳게 된다면 그 자식은 아담과 다른 몸이 아닌 한 몸이죠. 그래서 아무리 대를 잇고 인구가 많아져도 전부 아담 안에 있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 안에 있으면  엄청나게 많은 수가 있더라도 1로 응집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 1을 있게 한 것은 없음에서 오죠. 없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결국 있음도 1에서 나온 1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있고 세상에 만물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확장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18절에 의하면,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설명을 하는가 하면, 마가복음 10장 15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을 이렇게 설명하게 되면, ‘예수님 받들어 천국 가자.’고 하면 안 돼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확인해야 돼요.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는다는 말은, 내가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예수님의 권력 안에 놓여 있음을 확인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주신 재산을 가지고 가출했지요. 가출했으면 아들입니까, 아들 아닙니까?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집을 나가든 안 나가든 관계없어요. 여전히 아들이에요. 

그러면 탕자는 아들이 아닌데 아들 된 것이 아니고, 탕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여전히 아들인 것을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사는 맏이는 무엇을 확인하지 못했는가 하면, 나도 아들인데 왜 나를 위해서는 소를 안 잡고, 가락지를 안 끼워주고, 잔치를 왜 안 베푸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소를 잡고, 가락지 끼워주고, 잔치를 벌여야 아들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들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맏이 생각이 아들 아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무엇을 할까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는 질문을 계속하니까 성경을 이해 못한 거예요. 할 것이 없어요. 

한 가족인데 뭘 해요? 한 집안에서 살면 아들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면 아들이 됩니까?’ 이런 질문은 말이 안 됩니다. ‘무엇을 하면 구원 받습니까?’ 역시 말이 안 되는 질문이지요. 구원 자체가 우리에게는 없는 이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님만 생각해야 되지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생각하는 것은 사단에게 장악되었기에 나오는 생각입니다. 

‘구원해 줄 테니까 교회 충성하세요.’ 이것은 사단의 소리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건 거래고 흥정입니다. 구원이 없는데 무슨 구원을 받아요? 시편 71편 2절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 말은, 하나님의 의의 관계가 성립되는 언약의 완성상태 안에서만 구원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왜냐? 구원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내가 4개 동이 있는 빌라에 사는데, 만약 우리 곁에 1,500가구 대단지 아파트 건축공사를 하면서 우리 빌라는 그 아프트의 경로당을 짓기로 되어 있고 설계도면에 이미 그렇게 나와 있어서, 우리들에게 빌라를 팔 것을 요구합니다. 

내 입장에서는 그동안 빌라에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집이 있고, 우리 집 옆에 따로 아파트를 짓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파트를 지으면 우리는 보상금 많이 받고 빌라를 팔아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파트 짓는 사람의 생각은, 보상금은 나중 문제고 도면상 빌라 지역 땅은 자기들 아프트 단지에 이미 포함된 거예요.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창세전의 계획은 모르고 내 생각만 하고 있어요. 그래서 “보상금 얼마나 줍니까?”라는 식으로 ‘내가 무엇을 하면 구원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네 몸은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라는 질문이 주님 보시기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마귀한테 단단히 붙잡혀 있기에, ‘주님, 제가 무엇을 하면 구원해 주실 겁니까?’ 라는 거래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와 거래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설계도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원 얻을 백성이 제 멋대로 살아도 하나님의 구원 작업에는 전혀 차질이 없어요. 그러면 창세전에 구원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막 사세요.”라고 하면 됩니다. 이 소리 듣고 “어? 막 살면 구원 받는구나.”하고 나오면 이 사람은 신자 아닙니다. 

내가 이 빌라에서 무슨 짓을 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이 빌라는 내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온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막 산 것이 됩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한 고백입니다. ‘창세전부터 나를 포행자요, 살인자로 살다가 긍휼을 입게 하신 것’(딤전1:13)입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는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어떻게 살면 됩니까?” 정말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 번 답변도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살면서 대속의 은혜만 찾으면 됩니다.”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는가를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적으로 맞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 또 물어요. “어떻게 살면 됩니까?” 왜 이런 질문을 반복해서 하는가 하면, 자기의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이 고3인데 의대를 보내고 싶은데 실력이 조금 모자라요.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해 봐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혹시 기도하면 하나님이 좋은 방법을 알려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목사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그럼 이 사람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의과대학에 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는 것은, 아들을 의대 보내려는 것도 막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막 사는 인간이 자기 백성이기에 십자가 피로 대속하는 겁니다. 밤에는 모든 소가 검은 소입니다. 낮에는 황소도 있고, 흰 소도 있고, 검은 소도 있지만 밤에는 검은 소뿐입니다. 십자가 피 안에서 모든 인간은 다 죽었고, 죄인입니다. 

의대를 가나 재수를 하나 다 죄인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설계도면으로 세상을 봐야 하는데, 우리는 내 몸은 내 것, 우리 가족은 내 것으로 생각하고 주님과 흥정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하는 종교생활입니다. ‘얼마 헌금하면 내 소원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흥정을 해요. 

이런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하면 안 되고, ‘막 사세요.’라는 말 외에는 할 것이 없어요. 어떤 분이 굉장히 불만스런 투로 제게 이야기해요. “목사님은 질문을 하면 그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고 왜 엉뚱한 답을 합니까?”라고 하는데, 질문에 답하는 것이 제 사명이 아니라 복음 전하는 것이 제 사명이기 때문에 어떤 질문을 했던 복음만 나오면 되는 거예요. 

질문을 하고, 어떤 답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그 사람은 자기 목적을 갖고 있는 거예요. 목적을 갖는다는 자체가 제가 보기에는 막 사는 거예요. 막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그냥 편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 말을 곡해해서 ‘막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어요. 

‘막 살지 않는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막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시비를 걸고 나옵니다. “목사님이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는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와 다르네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제가 사용하는 용어를 저와 다르게 이해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건 자신이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엉터리로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 믿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라고 ‘바른’이란 단어를 섰어요. 제가 볼 때 그 사람이 ‘바르게 산다.’는 그것이 바로 이제 들통 난 막 사는 거란 말이죠. 

16절을 보겠습니다. “그 어린아이를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안수하고 축복했다고 했는데, 제자들과 다른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어린아이로 되돌아갈 수 없으니까,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죠. 

그리고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안았는데, 그 아이들이 예수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주님이 아이를 안을 때는 아이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의사를 묻지 않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조치입니다. 아가에 보세요. 스토커도 그런 스토커가 없어요. 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끝까지 달려들어요. 

사랑이 뭡니까? 눈 감아도 보이고, 꿈에서도 떠오르고, 못 보면 보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면(주님이 먼저 사랑하면) 그 사랑이 그냥 밀고 들어와요. 그러면 나의 사랑은 배설물로 빠져나갑니다. 그 때 그 빠져나가는 것이 아까워 죽을 지경입니다. 그동안 내가 공들여 가진 것이기에. 

주님이 들어오시면 내가 평생토록 일군 것이 빠져나갑니다. 최근에 제 컴퓨터에 악성코드가 침투해서 제가 30여년 모아놓은 자료들이 다 사라졌어요. 그 때 제가 뭘 느꼈는가 하면, 낯선 새로움. 사람이 새로운 것이 안 들어오면 기존의 것을 가지고 새로운 척을 해야 돼요.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척을 해도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우리의 것은 날마다 소멸되어야 합니다. 제 컴퓨터에 악성코드가 들어온 이유가 뭔가 하면, 유튜브에서 공짜로 음성만 따로 뽑아내는 것이 있어 다운을 받았는데 그런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제가 또 그 파일을 다운 받으려고 재시도했습니다. 왜냐? 한 번 빠져나갈 때는 가슴이 아팠지만 그 이후에는 실패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내가 이 일에 성공한다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도 아닌데. 주의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어떤 식으로 훼방하는가 하는 점을 찾으면 돼요. 주님의 일과 관계도 없는데 무슨 일인들 못해요. 결국은 다운 받는데 성공했습니다. 악성코드가 들어오면 포맷하고, 또 다운 받고, 그러다 다시 악성코드가 들어오면 또 포맷하고. 

물론 첫 번째 모든 자료를 날린 이후에는 USB에 자료를 보관해 놓고 작업을 했으니까 큰 염려 없이 용감하게 다운을 받았지요. 그 이후에는 악성코드가 두렵지 않았어요. 나쁜 짓도 처음 할 때는 벌벌 떨면서 하는데, 이 일이 반복되면 나쁜 짓이 아니라 재주가 되어 노하우가 쌓입니다. 그러면 편하게 그 일을 할 수 있어요.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질이 더러워져요. 그래서 주님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갈 수 없다.’고 하시지요. 어린아이가 지혜롭고 똑똑해서가 아니고 자신에게 주도권이 없고 부모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어린아이는 본성 자체가 부모와 연결되어 있어요. 예수님과 연결되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천국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른은 어떻게 천국 가는가? 사람은 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과정 속에 토지가 압류당한 거예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니고 하늘나라의 일이 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 분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께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면 됩니다. 지금 일 잘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목회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자기중심입니다. 그냥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주님의 목회입니다. 그냥 살면 그것이 교회고, 그 교회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17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성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무엇을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하면, 인간 세상은 가짜 현실로 똘똘 뭉쳐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외부에서 온 사람이죠. 그러니 예수님은 이 세상 질서에 포함된 사람이 아닙니다. 질서란, 법을 말합니다. 인간이 법으로 조직을 유지할 때는 반드시 처벌 기준이 있어요. 그래야 사람들이 추상적인 국가에 권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실재로 국가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법적 질서가 바깥으로 추장적인 권위로 요구하게 돼요.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섬기지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여호와 상을 물체로 만들어 구체화 시킨 것입니다. 거기서 법이 뭔가 하면,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섬기자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동의했어요. 

희한하지요. 그 사람들이 다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여호와가 금송아지는 아니지요. 그걸 알고 금송아지를 만든 거예요. 이건 각자의 마음에서 나온 거예요. 각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여호와에 대한 인상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이미지를 따라 금송아지를 만든 거예요. 

각 사람이 금을 내놓았는데, 금은 돈과 같은 것인데, 돈을 낼 때 그 돈이 소멸되면 안 내요. 내 속에 있는 것이 돈이란 매개를 통해서 바깥으로 형상화 될 때 돈을 내도 아깝지 않아요. 교인들이 교회 돈을 왜 냅니까? 건축 헌금을 왜 냅니까? 하나님께 바친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상상하는 예배당을 구체화 시키는 것에 흡족해 하면서 돈을 낸 겁니다. 

자기가 낸 돈이 절대 헛된 곳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예배당이 완공되면 눈물 흘리잖아요. 이게 바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마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가 정과 충성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이 주어집니다. 만약 십계명 돌판이 깨어지지 않고 모세가 그냥 주었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자신이 여호와를 섬기는 그 마음으로 십계명을 지키겠지요.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돼요. 십계명은 죄를 들춰내는 것인데 그들은 이미 여호와와 한 편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신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어요. ‘시켜만 주시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왔지요. ‘내 속에 있는 신이 실재로 어떤 결과물을 남긴다면(제가 헌금해서 세운 교회가 교인이 늘어나고 부흥하면) 제 한 몸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왜냐? 처음부터 그것을 기대했으니까. 

건축헌금을 하면서 이런 것을 기대했어요.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목사가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욥8:7).”는 생각을 안 하는 목사가 없어요. 심지어 다단계 회사도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은 마귀의 말이었습니다. 인용을 할 때는 누구의 말인지 알고 인용해야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좋은 말이라고 마구 인용합니다. 

이 구절을 기록해서 액자에 넣어 집에 걸어 놓은 가정이 많아요. 돈푼 바쳐도 나중에는 목돈 되어 돌아온다는 거예요. 왜 개인적으로 창대함이 있어야 합니까? 주님은 개인의 창대함을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왜 나는 잘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없고 ‘우리’만 있어요. 알레스카에도 우리 형제가 있을 수 있어요. 

숨어 있는 형제가 나타날 수는 있지만 다 나타나야할 이유는 없어요. 왜냐? 우리가 형제를 다 알 필요는 없어요. 주님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주께서 주신 복음은 이것입니다.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는 구원에 대해서 신경 끊어라.’는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못 믿으니까 성령이 오셔야지요. 성령을 받으면 일이 다 끝난 것을 압니다. 그러니 내가 걱정한 문제가 없어요. 그러니 편안하게 막 살게 됩니다. 

‘행함’이 왜 나쁜가? 행함에는 반드시 주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핫도그를 다 먹고 나면 막대기가 남지요. 한평생 나는 사람들에게 칭찬듣기 위해서 이만큼 노력하고 애썼다는 것이 핫도그입니다. 죽도록 고생하며 자식 잘 키운 것도 핫도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했어요. 

주님은 “내가 흘린 피를 네가 아느냐?”라고 묻는데, 우리는 “나는 주님을 위해 전도하고 충성했습니다.”라고 해요. 기가 찬 일이지요. 

전도는 주님이 붙여주는 사람이 있어요. 고넬료와 베드로가 전도의 원형입니다. 이 둘의 만남은 천사가 중재했습니다.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 담당자가 따로 있어요. 천사가 있고 성령이 활동하십니다. 전도는 주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사도행전 끝부분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행28:26).” 

사람이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전도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그들을 찾아갔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갔어요. 이런 믿음이 없으니까 총동원 전도주일을 만들고 사람을 불러 모아요. 예배당을 크게 지어놓았는데 빈 의자가 많이 있으니까 부끄럽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을 데려와서 예배당을 채우려 합니다. 

전도는 주체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할 때 전도하는 증인들은 반드시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해요. 이것이 바로 증인입니다. 환란, 핍박, 위험, 적신, 기근을 주신 이유가 뭡니까? 그동안 네가 얼마나 막대기(핫도그의 막대기)를 무시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나도 멋있는 사업채 하나 운영하고 싶다고 하잖아요. 큰 교회 목회하고 싶고. 그런데 그것이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전도할 수는 없고, 주께서 만나게 해주셔서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나는 아닙니다.’라고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지요. “목사님이 부임하신 후에 우리교회가 부흥했습니다.”라고 하면, 진짜 복음을 아는 목사라면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소리를 설교 시간에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열심히 충성하면 교회가 부흥된다고 생각하는데 교회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에 의해 움직일 뿐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성도는 “아멘!” 하겠지요. “역시 복음대로 했더니만 주님이 교회를 부흥시켜주셨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왜 복음 전하는 목사에게 반발을 하는가?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의 취지는 좋은데, 그렇게 하다가 교회에 사람이 안 모이고 결국 교회 문을 닫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나와요. 정신병자 이야기 중 이런 것이 있어요. 자신을 모이(닭 먹이)로 생각하는 사람이 닭을 보면 두려워서 도망을 가요. 그래서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거울을 보여주면서 “당신은 사람입니다. 절대 닭 모이가 아닙니다.”라고 일러주었어요. 환자도 인정했어요. ‘아, 나는 사람이구나. 이제 나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병원에서 퇴원을 했어요. 그런데 병원 밖에 닭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내가 사람인줄 아는데, 닭이 나를 모이로 보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했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목사님은 옳은 말씀을 하셨지만 그렇게 하다가 교회가 문을 닫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게 정신병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교회에서 이런 정신병자가 대세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복음을 알아듣지 못해요. 말씀을 생각해야 하는데, 교회를 생각해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겨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아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붙여 놓으니까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어요. 인간들이 믿는 하나님이 가짜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서 죽임 당하셨어요. 그리고 죽음 후에 부활하셔서 당신의 영을 자기 백성에게 주시니, 그 영(성령)을 받은 자만이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예수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생명이 없어요. 그런데 부자 청년을 자기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방법을 찾았어요. 처음부터 이 사람은 상종할 자가 못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도무지 행하지 못할 법을 제시하셨지요. 율법을 주신 이유는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처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거예요.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막10:21).”고 하셨지요. 만약 이 부자가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를 것 같으면 주님은 다른 법을 주셨을 거예요. 기어이 인간의 행함으로는 천국에 못 간다는 점, 그리고 너희는 가짜 신앙인이란 점을 폭로하십니다. 

천국 갈 어린아이는 예수님이 생산해 내십니다. 어른인 내가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육이 영이 되는 방법은 없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줌으로 구원 받고, 증인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 욕할 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 성의를 다해 충성하면 내가 기대하는 바를 주님이 채워주실 줄 알고 주님과 거래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우리들인데, 이것마저 주님의 도면 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고, 이런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린 주님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