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3. 24) 37-2
지난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미 어른이 된 입장에서는 다시 어린 아이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른들에 의해서 어린 아이가 무시당하는 것을 분히 여기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처음 것이 낫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이 제일 낫고 좋은 거예요. 그러나 갈수록 질적으로 떨어지겠지요. 어린 아이처럼 받들라고 했는데, 5세와 2세 중 누가 어린 아이입니까? 2세가 어린 아이죠. 2세와 1세 중 누가 어린 아이입니까? 1세가 어린 아이죠. 이 말은, 역순할수록 하나님의 창조성이 더 많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역순으로 갈수록 더 낫다고 하면 결국 없음이 가장 좋은 거예요. 어떤 있음보다 없음이 더 나은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없음은 비교 대상이 안 된다고 봅니다. 귤 1개와 귤 없는 것 중 어느 것이 좋은가?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뭔가 있어야 비교가 되는데 없으면 비교할 수 없지요.
있음에서는 없음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있음이 점차 질이 떨어져 결국 없음으로 떨어진다면 인간은 자신이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입장에서는 있음도 모르는 것이 됩니다. 내 인생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면 현재 살아가는 이것도 뭔지 모르는 거예요.
내가 지금은 있어도 결국은 죽어서 없어질 것이 뻔한데, 이 없음과 관련짓지 않고 하루하루를 산다면 그 삶은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주님은 인간이 죽어서 없어지는 그 세계를 처음 있게 된 것과 일치시켜 버립니다. 고무줄놀이를 할 때 양쪽에서 잡아 당겨야 됩니다. 없음과 없음이 잡아주지 않으면 있음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있음과 없음에서 있음을 인간으로 보고, 없음을 예수님 자신으로 봐요. 죽고 심판하는 것을 예수님이 하고, 태어나게 하는 것도 예수님이 하고. 그런데 없음이 있음의 세계에 들어와 버리죠. 그러면 있음으로 유지되는 대화의 차원과 예수님의 차원이 같을 수가 없어요.
어린 아이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어린 아이는 없다고 본 거예요. 그렇게 보지 말고 없음의 자리를 성경에 비춰봅시다. 그러면 최초에 부부가 나와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죠. 아담이 누구와 결혼했지요? 자신과 결혼했어요. 자기 몸에서 나온 갈비뼈와 결혼했잖아요. 자기가 자기 몸과 결혼했기에 두 몸이 아니고 한 몸입니다.
아담이 범죄하든 안 하든 아담은 자기와 결혼했고, 그래서 자식을 낳게 된다면 그 자식은 아담과 다른 몸이 아닌 한 몸이죠. 그래서 아무리 대를 잇고 인구가 많아져도 전부 아담 안에 있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 안에 있으면 엄청나게 많은 수가 있더라도 1로 응집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 1을 있게 한 것은 없음에서 오죠. 없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결국 있음도 1에서 나온 1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있고 세상에 만물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확장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18절에 의하면,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설명을 하는가 하면, 마가복음 10장 15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을 이렇게 설명하게 되면, ‘예수님 받들어 천국 가자.’고 하면 안 돼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확인해야 돼요.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는다는 말은, 내가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예수님의 권력 안에 놓여 있음을 확인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주신 재산을 가지고 가출했지요. 가출했으면 아들입니까, 아들 아닙니까?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집을 나가든 안 나가든 관계없어요. 여전히 아들이에요.
그러면 탕자는 아들이 아닌데 아들 된 것이 아니고, 탕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여전히 아들인 것을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사는 맏이는 무엇을 확인하지 못했는가 하면, 나도 아들인데 왜 나를 위해서는 소를 안 잡고, 가락지를 안 끼워주고, 잔치를 왜 안 베푸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소를 잡고, 가락지 끼워주고, 잔치를 벌여야 아들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들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맏이 생각이 아들 아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무엇을 할까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는 질문을 계속하니까 성경을 이해 못한 거예요. 할 것이 없어요.
한 가족인데 뭘 해요? 한 집안에서 살면 아들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면 아들이 됩니까?’ 이런 질문은 말이 안 됩니다. ‘무엇을 하면 구원 받습니까?’ 역시 말이 안 되는 질문이지요. 구원 자체가 우리에게는 없는 이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님만 생각해야 되지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생각하는 것은 사단에게 장악되었기에 나오는 생각입니다.
‘구원해 줄 테니까 교회 충성하세요.’ 이것은 사단의 소리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건 거래고 흥정입니다. 구원이 없는데 무슨 구원을 받아요? 시편 71편 2절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 말은, 하나님의 의의 관계가 성립되는 언약의 완성상태 안에서만 구원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왜냐? 구원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내가 4개 동이 있는 빌라에 사는데, 만약 우리 곁에 1,500가구 대단지 아파트 건축공사를 하면서 우리 빌라는 그 아프트의 경로당을 짓기로 되어 있고 설계도면에 이미 그렇게 나와 있어서, 우리들에게 빌라를 팔 것을 요구합니다.
내 입장에서는 그동안 빌라에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집이 있고, 우리 집 옆에 따로 아파트를 짓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파트를 지으면 우리는 보상금 많이 받고 빌라를 팔아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파트 짓는 사람의 생각은, 보상금은 나중 문제고 도면상 빌라 지역 땅은 자기들 아프트 단지에 이미 포함된 거예요.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창세전의 계획은 모르고 내 생각만 하고 있어요. 그래서 “보상금 얼마나 줍니까?”라는 식으로 ‘내가 무엇을 하면 구원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네 몸은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라는 질문이 주님 보시기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마귀한테 단단히 붙잡혀 있기에, ‘주님, 제가 무엇을 하면 구원해 주실 겁니까?’ 라는 거래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와 거래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설계도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원 얻을 백성이 제 멋대로 살아도 하나님의 구원 작업에는 전혀 차질이 없어요. 그러면 창세전에 구원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막 사세요.”라고 하면 됩니다. 이 소리 듣고 “어? 막 살면 구원 받는구나.”하고 나오면 이 사람은 신자 아닙니다.
내가 이 빌라에서 무슨 짓을 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이 빌라는 내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온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막 산 것이 됩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한 고백입니다. ‘창세전부터 나를 포행자요, 살인자로 살다가 긍휼을 입게 하신 것’(딤전1:13)입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는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어떻게 살면 됩니까?” 정말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 번 답변도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살면서 대속의 은혜만 찾으면 됩니다.”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는가를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적으로 맞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 또 물어요. “어떻게 살면 됩니까?” 왜 이런 질문을 반복해서 하는가 하면, 자기의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이 고3인데 의대를 보내고 싶은데 실력이 조금 모자라요.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해 봐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혹시 기도하면 하나님이 좋은 방법을 알려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목사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그럼 이 사람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의과대학에 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는 것은, 아들을 의대 보내려는 것도 막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막 사는 인간이 자기 백성이기에 십자가 피로 대속하는 겁니다. 밤에는 모든 소가 검은 소입니다. 낮에는 황소도 있고, 흰 소도 있고, 검은 소도 있지만 밤에는 검은 소뿐입니다. 십자가 피 안에서 모든 인간은 다 죽었고, 죄인입니다.
의대를 가나 재수를 하나 다 죄인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설계도면으로 세상을 봐야 하는데, 우리는 내 몸은 내 것, 우리 가족은 내 것으로 생각하고 주님과 흥정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하는 종교생활입니다. ‘얼마 헌금하면 내 소원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흥정을 해요.
이런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하면 안 되고, ‘막 사세요.’라는 말 외에는 할 것이 없어요. 어떤 분이 굉장히 불만스런 투로 제게 이야기해요. “목사님은 질문을 하면 그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고 왜 엉뚱한 답을 합니까?”라고 하는데, 질문에 답하는 것이 제 사명이 아니라 복음 전하는 것이 제 사명이기 때문에 어떤 질문을 했던 복음만 나오면 되는 거예요.
질문을 하고, 어떤 답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그 사람은 자기 목적을 갖고 있는 거예요. 목적을 갖는다는 자체가 제가 보기에는 막 사는 거예요. 막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그냥 편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 말을 곡해해서 ‘막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어요.
‘막 살지 않는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막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시비를 걸고 나옵니다. “목사님이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는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와 다르네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제가 사용하는 용어를 저와 다르게 이해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건 자신이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엉터리로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 믿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라고 ‘바른’이란 단어를 섰어요. 제가 볼 때 그 사람이 ‘바르게 산다.’는 그것이 바로 이제 들통 난 막 사는 거란 말이죠.
16절을 보겠습니다. “그 어린아이를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안수하고 축복했다고 했는데, 제자들과 다른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어린아이로 되돌아갈 수 없으니까,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죠.
그리고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안았는데, 그 아이들이 예수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주님이 아이를 안을 때는 아이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의사를 묻지 않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조치입니다. 아가에 보세요. 스토커도 그런 스토커가 없어요. 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끝까지 달려들어요.
사랑이 뭡니까? 눈 감아도 보이고, 꿈에서도 떠오르고, 못 보면 보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면(주님이 먼저 사랑하면) 그 사랑이 그냥 밀고 들어와요. 그러면 나의 사랑은 배설물로 빠져나갑니다. 그 때 그 빠져나가는 것이 아까워 죽을 지경입니다. 그동안 내가 공들여 가진 것이기에.
주님이 들어오시면 내가 평생토록 일군 것이 빠져나갑니다. 최근에 제 컴퓨터에 악성코드가 침투해서 제가 30여년 모아놓은 자료들이 다 사라졌어요. 그 때 제가 뭘 느꼈는가 하면, 낯선 새로움. 사람이 새로운 것이 안 들어오면 기존의 것을 가지고 새로운 척을 해야 돼요.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척을 해도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우리의 것은 날마다 소멸되어야 합니다. 제 컴퓨터에 악성코드가 들어온 이유가 뭔가 하면, 유튜브에서 공짜로 음성만 따로 뽑아내는 것이 있어 다운을 받았는데 그런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제가 또 그 파일을 다운 받으려고 재시도했습니다. 왜냐? 한 번 빠져나갈 때는 가슴이 아팠지만 그 이후에는 실패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내가 이 일에 성공한다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도 아닌데. 주의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어떤 식으로 훼방하는가 하는 점을 찾으면 돼요. 주님의 일과 관계도 없는데 무슨 일인들 못해요. 결국은 다운 받는데 성공했습니다. 악성코드가 들어오면 포맷하고, 또 다운 받고, 그러다 다시 악성코드가 들어오면 또 포맷하고.
물론 첫 번째 모든 자료를 날린 이후에는 USB에 자료를 보관해 놓고 작업을 했으니까 큰 염려 없이 용감하게 다운을 받았지요. 그 이후에는 악성코드가 두렵지 않았어요. 나쁜 짓도 처음 할 때는 벌벌 떨면서 하는데, 이 일이 반복되면 나쁜 짓이 아니라 재주가 되어 노하우가 쌓입니다. 그러면 편하게 그 일을 할 수 있어요.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질이 더러워져요. 그래서 주님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갈 수 없다.’고 하시지요. 어린아이가 지혜롭고 똑똑해서가 아니고 자신에게 주도권이 없고 부모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어린아이는 본성 자체가 부모와 연결되어 있어요. 예수님과 연결되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천국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른은 어떻게 천국 가는가? 사람은 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과정 속에 토지가 압류당한 거예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니고 하늘나라의 일이 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 분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께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면 됩니다. 지금 일 잘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목회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자기중심입니다. 그냥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주님의 목회입니다. 그냥 살면 그것이 교회고, 그 교회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17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성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무엇을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하면, 인간 세상은 가짜 현실로 똘똘 뭉쳐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외부에서 온 사람이죠. 그러니 예수님은 이 세상 질서에 포함된 사람이 아닙니다. 질서란, 법을 말합니다. 인간이 법으로 조직을 유지할 때는 반드시 처벌 기준이 있어요. 그래야 사람들이 추상적인 국가에 권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실재로 국가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법적 질서가 바깥으로 추장적인 권위로 요구하게 돼요.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섬기지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여호와 상을 물체로 만들어 구체화 시킨 것입니다. 거기서 법이 뭔가 하면,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섬기자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동의했어요.
희한하지요. 그 사람들이 다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여호와가 금송아지는 아니지요. 그걸 알고 금송아지를 만든 거예요. 이건 각자의 마음에서 나온 거예요. 각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여호와에 대한 인상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이미지를 따라 금송아지를 만든 거예요.
각 사람이 금을 내놓았는데, 금은 돈과 같은 것인데, 돈을 낼 때 그 돈이 소멸되면 안 내요. 내 속에 있는 것이 돈이란 매개를 통해서 바깥으로 형상화 될 때 돈을 내도 아깝지 않아요. 교인들이 교회 돈을 왜 냅니까? 건축 헌금을 왜 냅니까? 하나님께 바친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상상하는 예배당을 구체화 시키는 것에 흡족해 하면서 돈을 낸 겁니다.
자기가 낸 돈이 절대 헛된 곳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예배당이 완공되면 눈물 흘리잖아요. 이게 바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마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가 정과 충성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이 주어집니다. 만약 십계명 돌판이 깨어지지 않고 모세가 그냥 주었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자신이 여호와를 섬기는 그 마음으로 십계명을 지키겠지요.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돼요. 십계명은 죄를 들춰내는 것인데 그들은 이미 여호와와 한 편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신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어요. ‘시켜만 주시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왔지요. ‘내 속에 있는 신이 실재로 어떤 결과물을 남긴다면(제가 헌금해서 세운 교회가 교인이 늘어나고 부흥하면) 제 한 몸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왜냐? 처음부터 그것을 기대했으니까.
건축헌금을 하면서 이런 것을 기대했어요.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목사가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욥8:7).”는 생각을 안 하는 목사가 없어요. 심지어 다단계 회사도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은 마귀의 말이었습니다. 인용을 할 때는 누구의 말인지 알고 인용해야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좋은 말이라고 마구 인용합니다.
이 구절을 기록해서 액자에 넣어 집에 걸어 놓은 가정이 많아요. 돈푼 바쳐도 나중에는 목돈 되어 돌아온다는 거예요. 왜 개인적으로 창대함이 있어야 합니까? 주님은 개인의 창대함을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왜 나는 잘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없고 ‘우리’만 있어요. 알레스카에도 우리 형제가 있을 수 있어요.
숨어 있는 형제가 나타날 수는 있지만 다 나타나야할 이유는 없어요. 왜냐? 우리가 형제를 다 알 필요는 없어요. 주님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주께서 주신 복음은 이것입니다.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는 구원에 대해서 신경 끊어라.’는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못 믿으니까 성령이 오셔야지요. 성령을 받으면 일이 다 끝난 것을 압니다. 그러니 내가 걱정한 문제가 없어요. 그러니 편안하게 막 살게 됩니다.
‘행함’이 왜 나쁜가? 행함에는 반드시 주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핫도그를 다 먹고 나면 막대기가 남지요. 한평생 나는 사람들에게 칭찬듣기 위해서 이만큼 노력하고 애썼다는 것이 핫도그입니다. 죽도록 고생하며 자식 잘 키운 것도 핫도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했어요.
주님은 “내가 흘린 피를 네가 아느냐?”라고 묻는데, 우리는 “나는 주님을 위해 전도하고 충성했습니다.”라고 해요. 기가 찬 일이지요.
전도는 주님이 붙여주는 사람이 있어요. 고넬료와 베드로가 전도의 원형입니다. 이 둘의 만남은 천사가 중재했습니다.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 담당자가 따로 있어요. 천사가 있고 성령이 활동하십니다. 전도는 주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사도행전 끝부분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행28:26).”
사람이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전도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그들을 찾아갔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갔어요. 이런 믿음이 없으니까 총동원 전도주일을 만들고 사람을 불러 모아요. 예배당을 크게 지어놓았는데 빈 의자가 많이 있으니까 부끄럽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을 데려와서 예배당을 채우려 합니다.
전도는 주체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할 때 전도하는 증인들은 반드시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해요. 이것이 바로 증인입니다. 환란, 핍박, 위험, 적신, 기근을 주신 이유가 뭡니까? 그동안 네가 얼마나 막대기(핫도그의 막대기)를 무시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나도 멋있는 사업채 하나 운영하고 싶다고 하잖아요. 큰 교회 목회하고 싶고. 그런데 그것이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전도할 수는 없고, 주께서 만나게 해주셔서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나는 아닙니다.’라고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지요. “목사님이 부임하신 후에 우리교회가 부흥했습니다.”라고 하면, 진짜 복음을 아는 목사라면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소리를 설교 시간에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열심히 충성하면 교회가 부흥된다고 생각하는데 교회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에 의해 움직일 뿐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성도는 “아멘!” 하겠지요. “역시 복음대로 했더니만 주님이 교회를 부흥시켜주셨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왜 복음 전하는 목사에게 반발을 하는가?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의 취지는 좋은데, 그렇게 하다가 교회에 사람이 안 모이고 결국 교회 문을 닫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나와요. 정신병자 이야기 중 이런 것이 있어요. 자신을 모이(닭 먹이)로 생각하는 사람이 닭을 보면 두려워서 도망을 가요. 그래서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거울을 보여주면서 “당신은 사람입니다. 절대 닭 모이가 아닙니다.”라고 일러주었어요. 환자도 인정했어요. ‘아, 나는 사람이구나. 이제 나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병원에서 퇴원을 했어요. 그런데 병원 밖에 닭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내가 사람인줄 아는데, 닭이 나를 모이로 보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했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목사님은 옳은 말씀을 하셨지만 그렇게 하다가 교회가 문을 닫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게 정신병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교회에서 이런 정신병자가 대세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복음을 알아듣지 못해요. 말씀을 생각해야 하는데, 교회를 생각해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겨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아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붙여 놓으니까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어요. 인간들이 믿는 하나님이 가짜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서 죽임 당하셨어요. 그리고 죽음 후에 부활하셔서 당신의 영을 자기 백성에게 주시니, 그 영(성령)을 받은 자만이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예수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생명이 없어요. 그런데 부자 청년을 자기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방법을 찾았어요. 처음부터 이 사람은 상종할 자가 못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도무지 행하지 못할 법을 제시하셨지요. 율법을 주신 이유는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처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거예요.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막10:21).”고 하셨지요. 만약 이 부자가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를 것 같으면 주님은 다른 법을 주셨을 거예요. 기어이 인간의 행함으로는 천국에 못 간다는 점, 그리고 너희는 가짜 신앙인이란 점을 폭로하십니다.
천국 갈 어린아이는 예수님이 생산해 내십니다. 어른인 내가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육이 영이 되는 방법은 없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줌으로 구원 받고, 증인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 욕할 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 성의를 다해 충성하면 내가 기대하는 바를 주님이 채워주실 줄 알고 주님과 거래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우리들인데, 이것마저 주님의 도면 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고, 이런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린 주님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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