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3장31절(누명)170404b-이 근호 목사
예, 지난 시간에 사랑의 말이 어렵다는 게, 뭐가 어렵다는 거냐 하면은, 사랑이 먼저고 사랑을 위해서 죄라는 것이 만들어져야 된다. 이 관계가 어려워요. 죄가 없는 곳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서 필히 이 땅에서 마귀가 죄를 저질러야 되고, 인간은 그 마귀가 시키는 대로 따 먹어야 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끝까지 사람의 나라로 주께서는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예수의 나라에요. 끝까지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예수의 나라에요.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예수의 나라에요. 하나님은 그냥 창조하면 되지만, 예수의 나라가 올 때는 거기에 언약 관계가 성립되게 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언약으로 다 이루었다가 돼야 돼요. 하나님의 새 언약이. 새 언약은 뭡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뭐가 없다? 영생이 없다. “자, 받아먹어라! 이 떡을. 받아먹어라! 이 잔을.” 이것은 그 떡과 잔을 줄때는 각각 떡과 잔을 나눠두고 먹으라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떡을 가지고 떼어 주는 거예요. 없는데, 없는 것을 주는 거예요.
이게 새 계명 사랑의 제공 방법입니다. 주님의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의 종교라 하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것부터 출발해서 점차 저 높은 곳 천로역정이죠? 저 높은 곳, 신의 나라에 자력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졌으니까, 계명이 주어졌으니까, 계명 지키면 지킨 만큼 점점 더 천국은, 조금씩 더 보일 것이라고 생각 하는 거예요.
마치 등산하듯이, 이러한 사고방식은 기독교에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종교에 다 있어요. 그래서 모든 종교가 말하기를 진리는, 진리가 여기 있으면 진리는 뭐냐? 사랑인데, 그 사랑의 방법은, 정상은 모든 사랑으로 모이지만, 가는 길은 원불교식으로 있고, 이슬람식으로도 있고, 불교식으로도 있고, 천주교, 어떤 토속종교라 할지라도 결국은 배화교 뭐, 그 배화교라 하는 이란 종교가 있어요. 배화교. 사실 불을 숭배하는 건 아닙니다.
숭배하는 건 아닌데, 놀린다고 불 숭배. 배화교. 또 마니교 이런 거, 힌두교. 그들의 원리를 따져보면 전부다 뭐냐 하면은, 바로 ‘인류애’ 인류 사랑입니다. 종교가. 인류 사랑인데, 이것을 네 자로 우리한테 익숙한 네 자로 이야기하면 이게 뭐냐 하면은 ‘홍익사상’이에요. 홍대. 홍익사상. 만인을 평등하게 하는 것. 민주주의죠?
이게 결국은 솟구쳐(종교를 그린 산) 올라오는 이 전체를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이것은 무슨 사랑입니까? 인간사랑. 너희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모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다 알아요. 인간들은 이렇게 자기로부터 출발한다는 거. 그러면 예수님은 여기에 일부러 들어왔어요.
일부러 들어오고 추방당했잖아요. 일부러 들어와서 까이지요? 까여서 튀어나와버렸어요. 만약에 하나가 된다면 이거는 인자의 영광은 없습니다. 그런데 튕겨 나옴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뭐가 발생 되냐면 살과 피가 발생돼요. 살과 피가 뭐냐 하면은, 이게 새 언약의 요건입니다. 새 언약의, 하나님의 약속의 요건이에요. 요건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안 죽고 언약 맺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돼요. 그런데 여기(종교) 인간들은 살아있는 내가 구원 받아야 되기 때문에, 자기가 죽으면 안돼요. 내가 죽어버리면 구원 당사자가 사라져서 안돼요. 내가 죽을 만큼 고생을 해도, 죽을 만큼 고생해도 죽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진짜, 내가 실패 할 만큼 하지만 실패해서는 안돼요.
완전히 끝까지, 고난에다가, 마음 낮추기, 온갖 수단을 다 해서라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돼요. 살아남아야, “수고했다. 훈련 잘했다. 내가 너 믿음 있는지 시험해봤잖아. 시험 이겼으니까 합격이야!” 끝까지 나라는 인간이 죽을 뻔 했지만 절대로 죽어서는 안 돼! 다시 말합니다. 대체는 안돼요. 인간들은.
인간에게는 대체는 안 되고, 그냥 대리 정도로 해줬으면 합니다. 과장, 대리. 그 대리 아닙니다. 그 대린가? 대리 정도는 해도 대체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당사자가 역시 구원 받을 당사자는 ‘나’이여야 한다는 그 원칙은 고수해 달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전부 다 대리 이것을 없애버리죠. 모든 인간을 하나로, 전부 다 하나의 죽, 스프 속에 다 넣어버립니다.
어디 있냐 하면, 하나님이 죄 안에 가두어 두어서, 죄 안에 가두어 두게 되면 계승이 날라 가 버려요 계승이. 니 잘났다 나 잘났다 하는 계승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죽’이니까, 팥죽이니까. 다 같이 용암 속에, 화산 속에, 다 하나의 액체, 물질이 돼서 녹아버렸으니까. 그 다음에 그것을 모든 사람의 순종치 아니하심에 가두어 두심은, 그 다음에 골라내는 문제는, 죽은 자가 손든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그냥 아무나 필요한 사람을 건지는 겁니다.
건질 때에, 그 건지는 그 방식이, 예수님이 이 땅에 다녀갔던 그 방식을 그대로 반복을 해버려요. 버림받았는데 아버지의 언약 때문에 사흘 만에 부활 한 것처럼, 십자가로 가게 해서, 아버지한테 버림받게 해서, 그 버림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 모든 위임은 누구한테 위임을 합니까?
아버지한테 맡겨서 끄집어내는 방식을, 예수님뿐만 아니고 예수님 이후에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그 원칙을 적용시킵니다. 그 원칙을 가지고 뭐라고 하면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 옛 언약의 특징은, 말씀으로 마음 앞까지 스톱이 돼요. “지켜라, 십계명 지켜라, 이거 지켜라, 안식일 지켜라.” 딱 스톱이 돼요. 그 다음부터는 스톱이 되니까, 단절된 상태입니다.
지키고 안 지키고는 내 쪽에서 내 역량껏 뭘 해야 돼요. 그런데 새 언약은 어떻게 오냐 하면은, 에스겔에 예언된 것처럼 “지켜라”가 아니라, 아까 여자는 어디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어요? 남자 안에 들어오지요. 허락도 없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여기에다가 새겨 버립니다. 마치 돌판 에다가 십계명을 일방적으로 새기듯이, 우리 안에 새겨버려요.
‘카프카의’의 법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오지요? 피고인데, 피고가 받을 형량이 뭐냐 하면은, 감옥소 가서 고생하는 게 아니고, 유치장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피고의 신체에다가 지은 죄를 문자로 재봉틀 박듯이, 아예 문자로 그 죄목을 피부에다가 박는 것 자체가 벌이 돼요. 박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프겠어요?
아픔을 유발시킨 그 모든 상황이 네 몸에 박혀 있던 그 법에 의해서, 네가 벌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카프카의’의 소설에 나와요. 이건 소설이고, 하나님의 방법은 그것보다 더 심하지요? 아버지께 저주받은 모든 말씀을 새 언약 속에다가, 우리 안에다가 집어넣어 버리면, 우리는 뭘 해도 죄가 돼버립니다. 뭘 해도 죄가 돼버려요. 말씀과 더불어서.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말이, 오호라 나는 어떤 사람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간과 일반적인 과학이나 사회에서 인간은 뭐냐 하면은, 사회에서 인간은 “내가 이걸 할 줄 압니다. 저걸 할 줄 압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성경에서는 “이거 하느냐? 저거 하느냐? 재주가 뭐냐?
탁구를 얼마나 잘 쳤느냐? 마라톤 몇 시간 뛰느냐?” 그것을 묻는 게 아니고, 죄와 관련해서 물어요. 네 죄에 대해서 어떤 입장에 있느냐를 묻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 나에게 주어진 죄는 걷어 낼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안 받게 되게 되면, 자기 기억 속에 죄라고 느낀 점만 죄라고 하고, 그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아마 죄 아니거나 안 그러면 중립의, 중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거나, 죄도 아니고 뭐 그럴 거라 생각했죠. 그러나 성령 받은 사도는, 아예 죄 속에 자기가 있기 때문에, 밥을 먹든 뭘 하든 간에, 헤엄쳐서 죄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그대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다녀갔던 이 속에, 새 언약 속에 이미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새 언약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자기가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나를 이 죄에서 건져내랴.” 건져낸다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천당 가는 게 아니고 죄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이 죄의 압박에서, 죄의 심해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해놓고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께 감사’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 대목 설명하는데 상당히 거기 좀 난해해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오후 7시42분에 했다 칩시다. 42분에. 그리고 7시43분에 “기뻐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러면 7시44분에 어떤 고백이 나올까요? 어떤 고백? “기뻐하리로다!” 해놓고 7시44분, 1분 지나서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또 이렇게 해야 돼요? 그리고 45분에는 “기뻐하리로다!” 이런 미친 인간이. 그걸 조울증이라고 하지요. 슬펐다가, 기뻐했다가. 새벽기도 하고 나오는 것 보면 그 조울증 같은 현상들 있어요.
들어갈 때는 짜증나고, 나올 때는 찬송하고 나오면서, 막 새벽에 나와서 갑자기 “예수 믿으세요!” 하다가 두 시간도 안 지나서 차 운전하면서 막 욕하고, 또 화내고. 그런 설명이 어려운 겁니다. 왜 인간 세상에서는 선형적이라, 선형이라는 것은 단선적, 순서로 되어 있어요. 시간이 순서로 되어 있다고요. 7시42분, 43분, 44분 이렇게 되는 겁니다. 44분되기 이전에 43분이 있어야 돼야 돼요.
그러나 묵시 세계에서는, 이게 동그라미입니다. 선이 아니라 동그라미이기 때문에, 거기는 뭐냐 하면은, 녹아져 있는, 녹아져 있는 사건의 다발. 녹아져 있는 사건의 단편들의 다발, 집합.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이 동그라미 안에서 무수한 사건이 대기 되어 있습니다.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말씀 사건이에요.
말씀 사건이 대기되어 있으면 오늘은 이쪽 구석에서 말씀이 나에게 사건을 유발하고, 그 다음에는 어디서 나오는지 이쪽 사건이 유발하고, 이쪽 사건이 유발해요. 어쨌든 간에 이 모든 것은 무슨 사건이다? 말씀들이 일으키는 사건인 겁니다. 아까 여자, 남자이야기 다시 할게요. 남편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러면 여자는 남편 안에 들어있지요? 우리 남편이 어떨 때는 술 먹고 들어와서 주사, 주사 놓은 거 말하는 게 아니죠. 개차반 같은 그런 짓을 할 경우도 있고, 어떨 때는 승진했다고 좋다고 자기가 전화해서 원피스 하나 백화점 옷, 시장 옷 말고, 백화점. 그것도 세일 기간 골라서 말고 정품 파는데 가서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래, 이 말은 뭔데, 7월15일 날 술 먹고 들어왔다. 7월 25일 날 원피스 사 입었다. 그러면 이렇게 돼버리면 뭐가 끊어지냐면 동질성이 깨져버려요. 어느 남편이 진짜 내 남편인지 헷갈리게 되어 있다고요. 어느 남편이. 술 먹고 깡패 짓 하다가 갑자기 임금 노릇하다가, 갑자기 또 술 먹고 와서 또 깡패 짓 하는 게 아니고, 또 엉엉 울면서 “너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 많지?
나 네가 보기 부끄럽다.” 해서 어느 게 진심인지 알 수가 없어요. 저게 또 몇 시간 갈지, 해놓고 그 다음날 와서 또 “너 나한테 어제 회개했다고 너 날 얕잡아 보지?” 뭐 이렇게 하면 정신병자 수준이지만, 도대체 회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행패를 자기 아내한테 행패를 하고 이런 게 있죠. 인간은 기분으로 사니까. 동질성이 깨지잖아요.
그런데 이게 사건이 있으면, 똑같은 분이 일으킨 사건이 되는 겁니다. 똑같은 분이 일으킨 사건. 그러니 이 사건은 뭐냐?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로 더욱 더 죄인을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같은 말씀으로 우리로 하여금 성도인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주의 백성인 것을!” 그러면 그것을 같이 보자 이 말이죠.
같이 보게 되면, 곰발바닥 그다음에 소발바닥, 곰발바닥, 소발바닥 이렇게 들어 갈 때는 “곤고한” 뒤집어서 나올 때는 뭡니까? 소발바닥 “찬송하리로다!” 뭔가 사람이 가만히 있다고 죄가 느껴지는 게 아니에요.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때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나는 인간도 아니야, 나는 신자도 아니야.” 라고 하는 그 계기를 통해서 “이야~ 내가 잘나서 신자라는 생각을 또다시 그런 잘못된 생각을 했구나.
내가 어떤 실수, 어떤 죄를 지었는가와 상관없이, 구원은 나하고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대신 처리하신 분과 구원이 관련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내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는 느낌을 내가 또다시 받는 그런 오류를 범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죄를 지었다 그래서 취소되는 게 아닌데,
뭐 구원 최소까지는 아니지만, 이번 주 계약 건이 있는데 일이 잘 안될 것 같은, 저주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징계 받을 것 같은 느낌. 그런 것도 우리의 착각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서 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함이지, 우리를 갈구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를 갈군 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옛 본성이 남아서 그래요.
“부모한테 효도 하고 있으니까, 뭐, 이번 일 년은, 내 아들 고3인데, 좋은 점수, 좋은 점수” 왜? 내가 부모 효도하니까! “효도하면 복을 받으리라” 잠언서에 나오잖아요. “복 주시겠지? 아들, 내 아들 좋은 대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거는 니 생각이고, 그거는 니 생각이에요. 잠언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들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적당하게 했다는 겁니다. 적절하게. 그 일이 적절하게 일어난다. 참, 이거는 믿어야 될 문제에요. 이거는 뭐 따질 문제가 아니고, 합력하여 로마서 8장에 합력하여 뭘 이룬다? 선한 일 이룬다 했어요. 주님이 좋으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은 거예요.
엎어져서 안경 깨도, 주께서 선하게 깨주신 거예요. 좀 이해가 안 되겠지만. 자, 이해 안 되는걸 오늘 본문 더 진도 나가봅시다. 여기에 35절 봅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되어 있지요. 자, 너희가, 너희의 동질성이 깨집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너희 할 때는 누구를 이야기 하느냐?
지금 한 제자가 떠났으니까 열한 제자로 봅시다. 자, 열한 제자를 뭐라고 합니까? ‘너희’라고 했지요? 너희라고 한 거지요? 그런데 이 너희가, 너희는 예수님이 성령을 줄 때 너희가 돼버리면, 성령은 십자가를 지고 난 뒤에 오기 때문에, 십자가 자체가 인간과 주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동질성의 단절을 성령이 와서 이걸 뛰어 넘었다 이 말입니다. 성령이 와서, 십자가의 영이니까. 옛사람은 십자가에 죽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만 나오는 현상이 뭐냐? 성령의 열매잖아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갈라디아서 5장입니까? 5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성령의 열매, 육의 열매.
성령의 열매 할 때 반드시 십자가가, 새 언약이, 십자가라는 새 언약이, 새 언약은 살과 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누명쓰고 죽었다는 그 사건. 그 사건이 생각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속에서 온유와 화평의 열매가 확 이렇게 분출되는 겁니다. 예수 믿고 언제 기쁘던가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뭐될 때?
죄인인 것을 알 때, 이 행복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에요. 사랑은 결과고 원인은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그런데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딱히 근거가 없어요. 왜냐하면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죄인이기 때문에. 무조건, 무조건 죄인이기 때문에 북한이 핵을 준비하든 핵실험을 하든, 세월호 배가 무거워서 도로 깔아 앉든, 이게 내가 죄인인 것과 무슨 관계있어요?
대선을 언제 치룹니까? 뭐 5월 달입니까? 대선을 하든 말든, 누가 되든, 안철수가 되든, 문재인이 되든, 누가 되든, 누가 되든 나는 뭐다? 죄인이잖아요. 만약에 내가 죄인 안 되면, 내가 표 찍은 사람이 꼭 돼야 된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만의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불만의 가능성.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적을 갖지 마세요.” 라는 말을 한 거예요. 죄인 주제에 목적이라는 게 필요가 없어요. 목적 없으면 중보기도 안할 거 아닙니까? 목적을 갖지 마세요. 목적을 갖지 마시란 말은 오늘 본문대로 한다면 “당신은 필히 목적을 가지고 살 겁니다.” 라는 뜻이에요.
내가 예언한다. “목적을 갖지 마세요.” 라고 하면 반드시 목적을 갖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이게 자기 목적이 뜻대로 안될 때 오는, 그 불만과 원망이 터져 나오면서 “내가 이미, 목적이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구나.” 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하나님의 새 계명, 사랑이 우리 몸을 통해서 마구 분출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열두 제자의 대표자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36절에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이렇게 했지요.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나라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 단절이 아니고 연결되어 있다고 본거에요. 연결되어 있다고 봤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합니까?
떠밀어 버리죠? “이게 어디를 들어가?” “방금 어디 들어간다고 했어요?” “네가 지금 어디를 들어가? 어디를 넘보냐?” 이 말이죠.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제가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렇게 나오죠. “목숨을 버리고 따라가겠나이다.” 이 주제 파악을 못해가지고, 이거는 베드로가 따라갈 정도가 아니고요. 베드로는 배신합니다.
지금 이 이야기 할 때 자기가 배신 할 줄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어요.) 진짜 오랜만이 아니지만, 정답을 말씀하셨네요. 오랜만은 빼고. 진짜! 진짜! 몰랐어요! 지금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진짜 오늘 제목을 ‘몰랐어요.’라고 하고 싶은데, 자, 인생이 있습니다. 인생을 둥글다 보고, 어떤 사람이 45세까지 살았어요. 죄 압니까? 모릅니까? 죄?
지금, 자기가 아는 것은 아까 이야기 했지만, 자기, 인간이 안다는 것은 자기가 기억 되는 것 안에서만 돼요. 기억. 기억은 뭐냐? 자기가 기억된 사건의 다발이고, 사건의 집합이에요. 내가 기억하고 싶은 거, 기억 되는 것 안에서만 뭐냐 하면은, 선과 악을 논하게 됩니다. “나는 얼추, 별로 나쁘게 산 기억이 없어.”
기억이 없다는 거예요. 나쁘게 산 기억이 없고 “그다지 나쁘게 산적은 없고 그다음 그다지 착한일도 없다.” 그럼 그것은 뭘 놓친 거예요? 자기가 기억난 것은, 이게 사실 10%도, 10%도 안 되죠? 0.1%된다고 칩시다. 안되지만 1%된다면 99%는 자기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지요. 여기에 대해서 자기가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까? 못 내리죠?
베드로가 지금 이런 입장이에요. 자기는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 하는 거예요. 그것도 어떤 걸 기억하고 싶어요? 좋은 ,거 좋은 거. 이게 경제학에서 뭐냐? ‘단골의 심정’ ‘단골의 법칙’이에요. 그 가게가 어지간히 나쁘지 않는 한, 한번 간 가게에 갑니다. 인간은. 진짜, 우산 가지고 패지 않는 한, 그리고 막 갔는데 5년 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가 있다. 그런 일이 없는 한 어지간하면 갑니다.
그러니깐 왔을 때 잡아야 돼요. 왔을 때 잡아야 되지 “니 아니면 손님 없는 줄 아냐?” 이래 가지고는 장사 안 됩니다. 교회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만. 사람은 어지간히 하면 이미 기억에 딱 박히기 때문에, 그게 제2의 자아가 돼요. 자기 인생에서 내가 어디를 다녀갔다. 어느 것을 했다. 그것을 해서 “그게 나일거야”라고 여기거든요.
그러면 어떤 미장원을 갔는데, 미장원에 열 번을 갔는데, 아홉 번 마음에 안 드는데 한번 마음에 들게 했다. 그러면 그 미장원에 갑니다. 한번을 기억해서. 사람 바꾼다는 것은 좀 귀찮거든요. 물론, 또 성격상 돌아보는 성격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드물고, 이것을 이렇게 문장으로 고치면 쉽습니다.
뭡니까? ‘늘 하던 대로 쭉- 늘 살던 대로 쭉-’ 왜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고, 교회를 안 나가는 줄 알아요? 몇 번 나와 봤어요. 그런데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있거든요, 뉴턴의. “아이고, 그냥 살던 대로 살지 뭐” 이겁니다. 우리 사장님도 여기 직원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도 했을 거예요. 직원들 꿈적도 안합니다.
왠지 알아요? 관성이 더 세요. 늘 살던 대로, 하던 대로 하는 거, 하던 대로. 그래서 선지자나 사도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은, 노이즈noise 노이즈는 우리말로 잡음이죠? 잡음을 걸러내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 믿잖아요. 그러면 예수 믿고 난 순간부터 갑자기 뭐 “새사람 되었다!” 뭐 이렇게 유난떨어도, 또 이렇게 거의 일요일에 유난떨어도 월요일에 다 잊어버립니다.
늘 하던 대로 가요. 늘 하던 대로, 그 다음에 뭐? 늘 살던 대로 가요. 그러면 거기에 뭐가 끼겠습니까? 잡음이 낀다니까요. 그 잡음을 뜯어내는 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네가 뭘 보려고 광야에 나왔더냐?” 했잖아요. 그때 예수님이 마태복음11장에서 “네가 뭘 보려고 광야에 나왔더냐?” 할 적에, 광야는 뜻이 뭐냐 하면 ‘없음’이에요.
왜? 선지자가 광야에 왜 나갑니까? 현재 있는 말은, 늘 하던 대로 쭉, 늘 살던 대로 쭉 이에요. 윤리학자들은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것을 ‘관행’이라고 하고, 법학자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관습’이라고 하고, 영국에서는 뒤에다 뭘 붙여요. ‘관습법’ 이게 문자로 책에 있는 법이 되었어요. 옛날에는 영국은 관습법밖에 없었어요. 관습법.
“이런 형태는 형이 얼마 나와?” “가만있어보자, 판례 보자 판례. 그때 3년 때렸네. 아, 3년.” 딱 3년. 왜? 늘 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이게 예수님 때, 유대인 때 뭐라 했나? 전통이라, 전통. 디모데전서에도 사도바울이 이걸 전통이라 했어요. 전통과 관습에 의해서 한 거예요. 전통과 관습은 뭐가 우대되느냐 하면은 역사가 우대 돼요.
그러면 법을, 정의라는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왔나? 정의라 하는 것은 역사에서 나온 거예요. 역사에서.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모른다는 거. 설민석이라는 역사 강사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사람이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는 거. 했던 것을 반복 하지 말고, 잘한 것은 장려해야 되고, 못한 것은 주의하면서, 보다 더, 더 진리에 가까운 그러한 원칙을 쥐고 민족의 국가 역사로 일어나자!
이게 역사학자들의 모토입니다. 역사학자들이 그것 때문에 역사를 자기가 하면서 정당성을 가져요. 그런데 역사학자만 그런 게 아니에요. 어디서 하냐? 신학에서 하죠. 신학에서. 신학에서 뭐냐? 그것을 가지고 무슨 신학이라 하면,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그 핵심을 뭐냐 하면은 청교도에요. 청교도.
청교도 하면 대학교 서클, 기독교 서클의 핵심이 전부 청교도들입니다. 청교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자기 학대에요. 자기 학대. 자기 학대를 하는 이유는, 욕심을 이기지 못하면 주께서 나를 들어 사용을 안 한다는 겁니다. “주께서 들어 쓰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니도 양심이 있지, 니가, 그래 술 담배 하면서 들어 쓰기는 뭐 바짝 들어가지고 엎어지고 그래 쓸까?
니 꼬라지 니가 알잖아. 니라면 니 쓰겠냐?” “미안합니다!” “그렇다면 정신 차려야 될 거 아니냐?” “네! 알겠습니다!” 술 끊고, 담배 끊고 “들어 쓰시옵소서!” “니 하루에 기도 얼마나 하는데? 성경은 몇 장 보는데?” “죄송합니다!” “제대로 하고 와! 제대로!” “예!!” 자기가 자기에게 훈계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훈계해서 다듬어요. 이렇게.
“내가, 이만하면 내가 봐도 흠잡을 데 없이 다듬었습니다.” 이것을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걸 두 자로 뭐라고 했어요? 기억이지요? 어떤 기억? 나쁜 기억 말고, 좋은 기억. 좋은 기억을 붙들기 위해, 붙들다 보니까 뭐가 안 되느냐 하면은, 죄라는 것이, 점점 더 죄의 폭이, 죄의 영역이 얼마 남지를 않았어요.
왜? 죄 지은 기억은, 죄다 그때그때마다 전부다 회개를 해가지고 처리를 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점점 더 뭐의 양은 줄어가고? 죄 짓는 기억은 자꾸 줄어들고, 회개는 늘어나고, 그 다음에 또 회개하려고 하니까, 이거는 그 찾아내는데 힘들어. 죄 지은 거 찾아내려니까 힘들어 미치겠어. 죄지은 게 있어야 회개하죠?
그런데 또 선교단체에서는 성경 들이대면서 니가 이런 응답받지 못한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니가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가 뭐라고 했어요? 시편에 보면, 죄를 안고 기도하니까 응답이 없다는 거예요. 시편에 보면. 그러면 응답받으려면 뭐 하면 됩니까? 죄를 안 짓든지, 지은 죄는 제 때에 회개해서 다시 십자가 피 묻혀가지고 처리하든지, 그러면 십자가 피 묻어 처리 하겠다. 회개하겠다는 그게 목적이 있지요?
그 목적이 뭡니까? 내가 요구한대로 족족 응답받는 그런 기도의 그 순간을 고대하면서 사전 정지 작업을 나서게 된다는 이 말이죠. 평소에 늘 하던 이야기 하니까 뭐 고개를 끄떡이지도 않지요 이젠. 주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너는 지금 너의 동질성을 그대로 유지 하고 있으니까” 주께서는 밀쳐버립니다.
“베드로야 너는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네 기억 속에는 내가 줄 나라는 있다? 없다? 없다. “너는 천국을 몰라. 너는 나의 세계를 몰라. 너는 상상하는 천국 외에는 몰라. 네가 상상하는 세계는 너의 있음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부터 그것을 안고 “나는 천국 사람 맞고”를 안고 키워왔던 상상의 천국은 그것은 베드로 나라이지, 예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는 어떤 경험을 해야 됩니까? 못 들어간다는 경험을 해야 돼요. 나라는 인간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데, 고맙게도 주께서는 상황을, 베드로로 하여금 소극적으로 도망친 게 아니고 적극적으로 배신을 하게 하는 사건을 주십니다. 그래야 누명씀이 되니까.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완전히 느끼게 만들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주님이 아니면 누가 나를 알겠습니까? 우리는 나를 항상 미화하고, 꾸미고, 괜찮은 존재로, 이렇게 남한테 내세울 때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내세우고 다듬는 일을 해요. 그것이 아까 무슨 교라고 했습니까? 청교도. 청교도 뜻은 파랗다는 뜻이 아니고, 순수하다는 퓨리탄puritan이에요. 순수. 순수하다에요.
참, 순수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 사람들은 순수 몰라요. 그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순수한 인간 되는 게 아니고, 순수하게 자기의 비전이 달성되는 자동 기계화 되는 걸 선호합니다. 기도만 했다하면 응답. 했다하면 응답. 그런 순수함만 요구하고 있어요.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다 이루어지는 그러한 응답받는 기계? 기도 기계. 그걸 그들은 자기들의 순수라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까 시편 이야기는, 너희들이 응답 못 받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다? 죄 지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응답 못 받았다에 정답은 뭐겠어요? 이 세상에 모든 기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 뜻이에요. 시편에 ‘너’라는 것은 누굽니까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다윗은 그냥 마이크에 불과합니다. 마이크, 핀 마이크, 여기 핀 마이크가 다윗이에요. 이름 쓸까? 다윗. 마이크에 불과하고 끈은 뒤에 끈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한테 탯줄로 연결되어 있어요.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했잖아요. 뭔가 과일을 따먹는다는 말은 딱, 똑딱 하고 따먹을 때, 과일만 따먹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에 연결되어 있습니까?
그 가지에 연결 되어 있지요. 가지에. 그래서 사람은 누구를 대할 때, 그 사람 뒤를 안보고 그 사람만 따먹으면 된다 하지만, 그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이 뭐냐 하면은, 과부나 고아나 약한 자를 함부로 할 때, 사람들은 “아휴, 저거 한방에!” 하지만 그 뒤에 누가 있습니까? 주께서 유발해서 가난하게 되었고, 주께서 유발해서 고아와 과부되게 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긴 자는 누구한테 불쌍히 여김 받는다? 여호와께 불쌍히 여김 받는다. 그것을 가지고 출애굽기에서는 뭐냐? “나한테 돈을 꾸이는 것이다. 나한테 돈을 빌려 주는 것이다. 내가 돈 갚아줄게. 그들에게 해준 것은 나한테 돈을 빌려주는 거니까 내가 필히 갚아 주리라 줄 것이다.” 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출애굽을 유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주변에 고와와 과부들이 생기도록 조치를 합니다. 전쟁을 통해서.
우리 같으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복 받은 나라니까, 모든 나라가 한 결 같이 다 부자 되기를 원하겠죠? 실상 그게 아니고 고와와 과부와 나그네가 많이 생겨나게 한 이유는 출애굽 당시에 네가 하나님 보시기에 고아였고, 과부였고, 나그네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고와와 과부가 누구냐? 그때는 고와와 과부가 소용이 없어요. 누가 되느냐?
하늘나라의 표상을 쥐고 있는 사람이 등장해야 돼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선지자의 특징은 이게 계층화 되어 있어요. 입체적으로 현실을 보는 겁니다. 너희들은 땅에 속하고, 나는 천상회의를 보고 왔고, 따라서 선지자의 특징은 예수님 같아요. 주님을 아시는 분이 섞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안에 깊숙이 들어와 버려요.
들어와 버리면, 이 사람은 계층이기 때문에, 선지자의 말을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들어요.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예요. 일부러. 네?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예요. 누굽니까? 스데반이 성령 충만 받고 난 뒤에 죽었잖아요. 성령 충만이라 하는 것은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나오지요? 성령으로 충만 받는 게 어떤 것이냐?
고난의 영이 함께 있으면 성령 충만 받는 거예요. 고난의 영이. 뜨겁다는 것은, 그건 난로 옆에 있어서 뜨거워요. 뜨거운 응답받으려고 하면, 난로를 동서남북으로 펴놓으면, 응답이 진짜, 해보세요. 난로 옆에서 기도해 보세요. 갑자기 기도한지 5분 안 되서 뜨겁지요. 진짜입니다.
여기 베드로전서 4장 13절에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4:13-14)
네가 착하다는 말이 아니고, 너는 누구 안에 있다? 고난 받는 예수님 안에 신부로서 들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고 욕할 때, 너보고 미워하고 욕한다 하지 말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미워서 거기에 속해 있는 신부, 너희보고 미워지도록 세상을 나는 그런 식으로 편승을 해놓겠다는 거예요. 편승을.
그래서 일부러도 고난 받는다고 또 뭐 남한테 “예수 믿으세요!” 새벽에, 새벽 4시에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일부로 욕 얻어먹지 마시고요. 원래 열심 있는 목사님들은 아침에 내복, 속옷 바람으로 가서 “예수 믿으세요!” 고함지르는 사람 있어요. 있다니까. 있어요. 네, 전에 목사 할 때 그랬어요. 하도 영혼들이 불쌍해서, 집에 있을 시간에, 새벽에 들어갔다고요. 그래도 저는 양심의 가책을 못 느꼈어요. 왜?
그 사람의 영혼이 불쌍해서였지 뭐,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게 영혼이 불쌍한 게 아니고, 그래 가지고 주께서 도와주시면 교인 수 늘어나겠네. 그런 것이 사실은, 나중에 슬그머니 배경으로 올라오더라 이 말이죠. 진짜 그때는 몰랐어요. 순수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함이 지나고 보니까 노림수가 있었어요. 아니 내가 나를 몰랐던 거예요.
어느 정도의 탐욕인지를, 그러니까 나는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내가 구원을 못 받아야 인자의 영광이 유지가 돼요. 내가 만약에 동업자가 되고 협조자가 돼버리면, 주님의 영광에 인간의 영광이 섞이게 되면, 이거는 순수하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 보고 “저리가라. 저리가!” 서로 사랑하라가 되려면, 그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서로 사랑하면 일이 되는 게 아니고 빠져 있어야 돼요.
우리는 사랑에서 완전히, 사랑 근처도 안가야 돼요. 주님 혼자 다 사랑을 이루어서 우리한테 그냥 택배로, 그냥 아무것도 없이 그냥 줘야 돼요. 받는 입장에서는 구원의, 구원에는 이유가 없어요. 이번에 책이 나올 겁니다. ‘복음의 생산’이라는 책이 나오는데, 그 머리말에, 머리말 뭐 시 비슷한 걸 제가 쓰거든요.
그 마지막 대목이 뭐냐 하면은, ‘구원에는 이유가 없다.’ 이게 글 마지막 대목이에요. 악마는 인간의 자궁이다. 부터 해서 거기서 혓바닥이 나온다. 이런 무서운 게 나와요. 마지막에 보면 구원은 이유가 없어요. 중간에 보면 뭐냐 하면은, 우리는 재수 없는 곳을 찾아가야 된다.
지금 모든 교회가, 왜 교회 가느냐? 재수 좋기 위해서 가잖아요. 우리는 반대로 가야 돼요. 재수 없는 곳에 가야 돼요. 왜? 그 입을 열지 아니한, 채찍 소리가 유일하게 거기에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재수 좋게 하기 위해서 교회 나가는데, 성도는 재수 없는 곳을 찾아가야 돼요. 재수 없는 곳을. 그러면 기도의 응답은 뭡니까? 결국은 뭘 응답받아야 돼요?
재수 없는 것을 응답받아야 돼요. 재수 없는 걸. 이걸 쉽게 말해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네.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왜? 그래야 우리는 응답 받을 자격이 안 된다는 죄인인 것을 또다시 아는 거예요. 그러면 재수 없는데 이정도로 산다. 이것은 은혜에요. 하늘의 선물이단 말이에요. 선물. 내가 생각지도 않은 것을 덤으로 주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다가 내 기도의 의미를 딱 박아 넣어버려. “내가 기도했기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했기 때문에 이정도 건졌다.” 이렇게 돼버리면 주께서는 삐져가지고, “나, 나, 그 방식 안하고 딴 방식” 또 다른 사건이, 말씀 사건이 또 터져 버립니다. 하여튼 잡았다! 싶으면 뿌리치고, 삐지면 찾아오고. 이건 뭐 술래잡기도 아니고요.
“내 사랑 어딨나?” 하면 “여기 있습니다.” 하면 삐지고 가버리고 “내 사랑 어딨나?” “안 놀아!” 하면 “에이고! 삐지기는!” 또 찾아오고.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긍휼로 줘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협조하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협조하는 주의 일은 없어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36절 봅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쿠오바디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6-37)
이 베드로의 고백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게 왜 감사한지 압니까? 베드로는 노리는 게 있어요. 목적이 있어요. 베드로는 쉽게 말해서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었습니다. 노리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예수 덕분에 예수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목적. 그 목적이 자기는 죄라는 생각을 조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님은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말씀을 퍼부었는데, 베드로는 오해하기를 살아있는 나에게 약속으로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기가 주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지, 주님과 헤어질 몸체를 가지고 지금 주와 대화 하고 있다는 생각을 베드로는 조금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런 착각이, 오늘날 우리가 매일같이 하고 있는 착각을 베드로가 대신해주니 얼마나 감사해요. 오늘 제목 정했습니다. ‘누명’ 네, 누명 쓴 거예요. 누명입니다. 예수님이 누명 쓴 거예요. 죄도 모르면서 죄 아닌 척 의 라고 착각하는 그 죄를 주께서는 죄다 십자가에 누명을 쓴 겁니다.
주님은 아버지하고 이야기하는데, 자꾸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목을 잡고 그 드레스를 잡아당기면서 자기하고 놀자는 거예요. “주님, 나하고 놀아 줘잉~ 나 얼마나 착한지 주께서 아시죠? 제 목숨 바치겠습니다.” 이게 논다는 거예요. “놔라 이거” “주님 같이 가요~” “놔! 니는, 니가 상종할 나라가 아니야!”
요즘 젊은 사람들이, 선교단체 애들이 참 이런 걸 들어야 돼요. 들어야 돼요. 그래야 선교단체 앵벌이 안하고, 앵벌이 안하고 있지. 기도 앵벌이, 헌금 앵벌이, 헌신 앵벌이. 이제 38절 봅시다.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방금 버리겠다고 했잖아요.
안 믿습니다.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런데 이 말은 사실 뒤에 뭔가 들어가야 돼요. “네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느냐?” 라고 할 때 “반드시 너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게 돼있다.” 그런데 그 전에 단절이 있어요. 단절. 그전에 단절이 있어야 돼요. 베드로는 “네가 생각한 너의 주체로 인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나는 안 받는다.”
하지만 나의 주체가, 새 언약의 주체가 나한테 삽입이 돼버리면, 또는 성령에 의해서 베드로가 예수 안에 들어와 버리면 “네가 싫더라도, 좋든 싫든 상관없이, 필히 너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게 돼있다. 네가 한 말이지만 일단 내가 거두어 가버리면” 네가 한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린 역할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실없이 하는 모든 기도가 하나같이 응답이 돼요. 목사님 왜 딴소리 합니까? 딴소리 하는 게 아니고, 맞아요. 우리가 실없이 하는, 실없이 하니까 갑자기 또 실없이 하는 농담이 생각나는데, 실없이 하는 모든 것이, 이게 주체가 주님으로 바뀌어 버리면 그게 응답이 돼버립니다.
그때, 내가 내뱉은 말이 아니고, 주님께서 무심코 내뱉도록 조종을 해놓고, 응답은 나한테 맡긴 게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응답을 함으로 말미암아, 협조하는 차원이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께서 알아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작업에 차질이 없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오늘 강의가 끝나고 난 뒤에, 그러면 결론이 뭡니까?
막 사세요예요. 막 사세요! 결국은 이거 하나뿐이에요. 어떤 행동, 발걸음도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난 일이 없잖아요. 다 주님께서 다 허락하셨단 말이에요. 허락하셨어. 마귀에 들려 한 짓인지, 뭘 하든지 간에, 허락하신 그것을 누가 이루신다? 주께서 다, 결국은 다 이루어 내십니다. 그러니까 잘했다는 말입니까? 못했다는 말입니까? 못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는 죽어 마땅한 게 되지요.
죽어 마땅한 게. 주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부터, 우리한테, 우리의 몫으로 남겨 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께서 알아서 다 처리했습니다. 이제 끝으로, 마지막에 닭 울기 전에,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게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닭 운다는 대목이, 공관복음에 나오잖아요. 요한복음은 좀 달라요.
닭 울기 전에. 닭 울기 전에 라고 할 때, 다른데에서는 베드로하고 누구하고 비교 하냐면, 그 베드로를 부끄럽게 말하기 위해서 눈치코치 없는 소녀가 등장하지요? 화롯불 앞에 있는 애. 싸가지 없는 아가씨. “아저씨 내가 봤는데? 쟤하고 한편이지요?”
여기서도, 요한복음에도, 요한복음 18장 17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마태, 마가 이런 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썼어요. 예수님의 고난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제자들을 봐라! 싹, 입 닦고 배신하잖아. 제자들은 하여튼 이런 인간이야.” 이렇게 강조하지만 요한복음에선 그게 “닭 울기 전에” 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배신하더라도 걱정 하지 마!” 라는 뜻이에요. 그게 마태, 마가, 누가 지나고 난 뒤에 요한복음이 쓰여 졌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다 알아요. 하지만 베드로가 그때 했던 것을, 자기가 크게 실수 한 걸로 보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가 있어요. 뭐냐 하면은, 마지막에 보면 “베드로야, 너는 다시 실수 하면 안 돼. 이렇게 묻는 게 아니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누가 더 세냐 말이에요. “니 배신이 더 세냐? 아니면 너에 대한 사랑이 더 세냐?” 이 말이죠.
그게 요한복음, 우리가 했지요? 13장에 했잖아요. 끝까지 사랑한다고요. 이게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지나고 난 뒤에 했기 때문에 이미 알아요. “아무리 니가 배신 때리고, 아무리 나를, 무슨 욕을 하더라도 그거, 그거 신경 쓰지 마라. 이미 내가 너한테 그렇게 허락 한 거다.” 말이죠. “아니, 그래야만 돼. 그래야만 돼. 니가 그걸 보고 후회 하지 마!” 그래서 베드로가 그걸 알아요.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미쳤어, 미쳤어, 내 잘못이야!” 여러분! “우리 잘못이야” 라는 말이 성립이 안돼요. 우리는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우린 잘못이에요. 새삼스럽게 잘못이라고 할 게 없어요. 우리 요한복음 식으로 삽시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것도 주께서 계획 잡힌 대로, 적당하게, 적절하게 한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는 그걸 몰랐을 뿐인데, 그것도 왜 몰랐느냐고 닦달내시는 분도 아니고, 끝까지 사랑한다는 거. 다시 말해서 “너는 네 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식으로 구원할 날이 올 것이다.”는 그 사실을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주님 잘 믿어 보려고 애쓰는 것이, 이게 타고난 죄라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얼마나 철이 없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잘잘못만 따졌습니다. 상관없는데, 구원과 전혀 무관한데, 마귀에 속해서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제는 주님 앞에서 그것마저 주 앞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