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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누명 1704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9. 14:17
2017-04-05 00:32:32조회 : 229         
누명 17040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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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직 (IP:110.♡.86.59)17-04-07 13:17 
가락-요한복음13장31절(누명)170404a-이 근호 목사 


뉴턴이 말하기를 ‘원격작용’으로 ‘만유인력’이 된다는 거예요. 난리 났지요? “어떻게 접촉이 안 되는 물건끼리 서로 잡아당기는 것을 네가 한번 증명해봐라!” 뉴턴은 증명을 못했어요. “그렇게 되는 걸 어떻게..”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러면 뉴턴이 그렇게 “하나님이 도와준다.” 또는 “접촉해야 움직인다.” 해서 멀리서도 이렇게 달과 지구가 서로 움직인다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한쪽을 양보 한 겁니다. 뭘 양보했느냐 하면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질점, 그것을 물질, 물체, 물건으로 본거에요. 그러니까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 돼버린 거예요. 


인간을 생각하니까 신을 자꾸 당기는데, 인간을 하나의 물질 덩어리로 봐버리니까 그동안 몰랐던 것이 다 해결이 되는 겁니다.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 “하나님이 떨어지게 하는데~” 이런 식으로 옛날에, “그런 게 아니고 물질, 질점이다. 물체와 물체 사이에 서로 당기는 게 있다. 해봐라 직접, 그렇게 돼지.”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운동은 이제 해결됐잖아요? 


해결됐는데 뭘 드러냈어요? 인간은, 인간이라 하지 말고 뭘 보자? “그냥 운동이 작용하는 하나의 물체로 보자.” 이렇게 된 겁니다. “운동이 작용하는 물체로 보자.” 그러면 뭐가 날라 가느냐? 인간의 자존심이라든지, 명예, 그것은 이 세상에서 그런 것은 찾지 말자는 겁니다. “그런 것은 찾지 말자.” 그래서 그게 이제 ‘유물주의’가 시작 되는 거예요. 


힘을 가진 쪽이 그게 성공한 사람이고, 그게 새로운 기적이고, 그 힘은 돈에서 나오고,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 21세기까지 왔잖아요. 왔으니까, 21세기 인간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에요. 얼마나 힘으로 둘둘 감았느냐가 괜찮은 인간이고, 힘 빠진 인간, 돈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닌 거예요. 거기에다가 뭐냐? 


이미 자기가 하나의 물질인 것을 인정하고, 힘으로 산다는 것을 뻔히 알고, 아는데 거기에다가 억지로 집나간 하나님을 여기에다 억지로 이렇게 붙이니까, 자기는 안 다치고 하나님만 고스란히 둘둘 감기를 바라면서 교회 나가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뭐하는 거냐면, 이용하는 거예요. 과학적으로 인간이 이렇게 될 때에 뭔가 의료보험이 돼야 더 건강해진다. 


이게 진리처럼 간주되는 세상에서, 의료보험에 돈이 들어가고, 어떻게 수술하는데 돈이 필요하니까 “돈 주세요, 하나님!” 하고 이렇게 자기가 물체인 것을 인정하고, 그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 안하고, 하나님이 거기에다가 도움을 요청하니까 성경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옛날에 그 무당 신앙하고 똑같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되나? 성경은 그 인간을 원초적으로 지적을 하거든요. 원초적으로 지적을 하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부터 쭉 이야기 나오면 뭐부터 시작 하느냐?

인간은 바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죄에 가두어져 있다고 성경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죄에 가두어져 있으니까, 죄가 가둔 입장에서 성경을 본다는 이 모든 안목 자체가,
어떤 해석을 하던 그것은 뭐가 되냐 하면은 그것은 죄가 되는 겁니다. 어떤 해석을 하든.
 


자, 그렇게 해놓고, 오늘 본문 13장 31절 들어가기 전에 먼저 12장 43절부터 먼저 보고 13장 31절 진도 나가봅시다. 


요한복음 12장 43절에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눈에 보이는 것부터 출발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는 방향성을 그렇게 깔아 놓은 겁니다. 


보이는 것부터 따져 놓고, “봤지?” “네가 기도해서 응답됐지? 됐어! 제대로 된 거야~” 차근차근 이렇게 밟아나가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터치하는, 접촉을 하는 겁니다. 마치 산을 등산하듯이 조금씩 기도와 그리고 말씀으로, 약을 그냥 항시 복용 하는 거, 일상의 약을 먹듯이 매일같이 큐티 하면서 말씀으로 채우고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는 흔적들을 주변에서 이제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찾아서 그것을 가지고 계속 누적을 시켜버리면, 최정상에 올라가게 되면, 비로소 전에는 안보이던 천국이 일출이 보이는 겁니다. 아름다운 천국이 이제 보일 때, “아, 이제는 내가 이 정도까지 올라왔구나!” 하는 그러한 포만감을 제공하는 그것이, 유대인들이 했던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했던 방식입니다. 


자, 이 방식에 대해서 요한복음 12장 43절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뭐라고 합니까? 더 사랑했다 했지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은 현재 유대인에게 있는 체제, 법 제도에 대해서 사람들이 출회 당할까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아니라고 쫓아낼까봐 그들이 겁을 낸 겁니다. 


그럼 쫓아낼 때 두 가지를 시비 걸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할례’ 여부 또 하나는 ‘안식일 준수’ 여부. 이것을 지키면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이것을 지킬 수 있는 그 권리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허락하지 않겠다. 이것의 차이를 잘 아셔야 돼요. 


“여러분들이여, 할례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면 택한 백성이 됩니다.”가 아니라 “우리가 할례가 어떤 것이며 안식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한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독점을 줬으니까” 독점. “하나님은 우리한테 이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에, 우리 말 안 들으면 할례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고” 할례 할 때 그냥 자기 혼자 하면 안 되거든요. 이 의식 허락 맡고 해야 돼요. 


그리고 “안식일을 참여하는 것을 우리 쪽에서 거부하겠다.” 그러면 이 사람은 뭐냐? 이게 바로 출회가 돼요, 출회. 이미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단체, 유대교라는 이 하나님의 이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의 살아있음의 그 공동체에 대해서 쫓겨나는 거예요. 그런데 들어오라고 전도하는 것도 이 유대 공동체 중심이고, 추방시키는 것도 이 유대 공동체 중심입니다. 


지금 이 역할을 지금 누가 충실하게 잘하고 있습니까? 이거 어디서 잘하고 있지요? ‘성당’에서 하고 있지요. 성당에서. 성당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고해성사 오라고 하는데, 농땡이 부리고 안 오게 되면, “이번 성만찬에서 빠지시고, 한 석 달 굶으시고 그 다음에 오세요.” 라든지 그렇게 징벌적 차원의 미사를 참석 못하게 만들죠. 


성당에서 이렇게 하고 있어요. 성당에서 하고 있는데, 칼빈이 여기서 괜찮은 것만 뽑아가지고 했어요. 뭐냐 하면은, 죄를 지은 자는 성만찬에 참여 못하게 만들었어요. 칼빈이. 어디 근거해서? 고린도전서 11장에 근거해가지고 자기의 죄를 살피고, 죄 없다 싶은 사람만 이 예수님의 살과 떡을 먹어라 이렇게 된 거에요. 


그러면 그것을 듣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당화를 늘 생각하던 사람에게는, 성만찬 날을 미리 고시가 되어 있으면, 그 날이 가까이 왔다 싶으면 행동이 상당히 조신하게 행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만약에 죄를 살피지 않고 성만찬에 참석을 했을 경우에는, 어떤 사람은 아픈 사람이 있는데, 좀 심한 사람은 그 길로 황천 가는 수가 있다. 죽는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안 아프고 안 죽으려면 그 고시된 날짜를 중심해서 자기가 알아서 행동에 좀 조심을 하게 돼요. 지을 죄가 있으면 미리 다 당겨서 지으세요. 짓고 그날이 오게 되면, 그날이 올 때는 조심하게 되면 그날만 무사히 넘어가고, 넘어가는 순간 그 다음부터 또 일 년에 두 번하기 때문에, 또 실컷 짓고 싶으면 짓고, 그때는 놀러가고 싶으면 다 놀러 가야돼요. 


또 가을철에 올 때는 또 조심하면 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게 되면, 칼빈이 이것을 이야기  함으로써 무슨 권위를 강화시켰냐 하면은, 성찬식의 참여 여부를 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 그게 교회 당회장이죠. 교회 당회장. 그 당회장 권위가 옛날 종교개혁 이전에 신부 못지않게 된 겁니다. 그 종교 개혁 하나 마나예요. 


그 선배들은, 몇 년 선배들은 루터는 말하기를 ‘만인제사장’이라 했잖아요. 만인제사장이 잠시 만인제사장 좋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다시 칼빈이 되게 되면 만인제사장이 아닙니다. 누구만 제사장이에요? 목사가 실질적인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일을 독점하는 셈이 돼요. 독점. 


성당하고 교회하고 차이점이 있어요. 아까 그런 점에서 성만찬, 그 점은 동일합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사실 이 차이점도 사라졌지만, 진짜 노골적으로 처음에 나왔던 차이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신부가 죄 용서, 죄 사함권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신부가 죄 사함권이 있다는 말은 평신도에게 신부가 죄 사함권이 있다는 말은, 신부라고 해서 다 같은 신부일까요? 


신부보다 조금 더 높은 계급이, 높은 단계가 뭐냐 하면은 ‘주교’가 있겠지요? 그럼 주교라고 다 주교가 정권을 갖고 있습니까? 주교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지요? ‘추기경’이지요? 그럼 추기경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높은 사람이 있죠? 그럼 뭡니까? ‘교황’이지요? 그래서 교황은 무엇을? 교황은 그게 없어요, 오류가 없어요. 


사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상징적으로 오류가 없다 이거에요. 상징적으로. 이 교황이 개인적으로 나쁜 짓을 절대로 안했다가 아니라, 교황 자리 자체가 전혀 나쁜 짓을 안 하는 자리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확정 지었다는 거예요. 


그럼 이런 이야기가 일반적인 평신도한테는 이런 이야기가 무지무지하게 구원 받는데 간편해요. 왜냐하면 성당 등록만 하면 되니까.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누구에게 죄과만 대면 구원은 된 겁니다. 죄 용서를 누가 한다고요? 교황부터 해서 쭉 신부까지 내려오면 누가 용서합니까? 


요한복음에 의해서,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나오지요? “누구든지 뉘 죄를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그냥 있으면 그냥 있다”는 대목이 나와요. 20장 23절 누가 읽어보세요. 요한복음 20장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0:23) 예,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뉘 죄를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여기에서 너희가, 너희가 누굽니까?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너희가 누구를 이야기 하는 겁니까? 일단 열두제자 말하는 거죠. 가룟 유다 빼놓고 열한 제자이지요? 그런데 이 열한 제자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성령을 받은 열한 제자에요. 성령 받은 제자.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가 뉘 죄를 용서하게 되면 그 사람의 죄는 용서가 되고, 그 다음은 뭡니까?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된다? 죄가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 그런데 성당에서는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수장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로마 교황의 계보로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누구지요? 그대로 이야기 하면 교황이지요? 


첫 번째 교황이 베드로니까. 그 교황한테 제도적으로 신부로서 인정받은 사람은 그 신부가 교인들의 죄를 용서하게 되면 용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해성사가 생기는 겁니다. 고해성사. 일반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제도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몰라요. 왜냐하면 아까 과학이야기 했잖아요. 


과학은 뭐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 되니까,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자기가 상상력이 동원 돼서 이게 환상을 꿔놓고, 자기가 믿는다고 우길 수 있기 때문에 이게 증거가 없어요. 증거가. 그런데 성당가면 신부가 말로서 용서했으니까, 뭐, 이거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마음이 편안~하지요. 편안하지요. 편안하고, 성당에 등록하면 되니까. 


그래서 전 세계의 현재의 종교 가운데 지금 천주교가, 기독교가 숫자가 제일 많거든요. 이슬람보다 더 많습니다. 그 많은 숫자가 주로 어디서 그렇게 많은가 하면은, 멕시코부터 해서 중남미, 남미 이 사람들을 원주민들과 거기에 있는 국민들의 그 교육 수준을 보세요. 이거는 무지 무지하게 떨어져요. 떨어지는데 그 나라가 거의 90% 이상이 무슨 신자입니까? 


천주교 신자에요. 천주교 신자한테, 이 머리가 안 되는 사람한테는 말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제도나 법 만들어서 거기에다 의미를 심어줘서 그냥 제공만 하면 그 다음은 정서적으로 그들은 행복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행복하면 됐지, 딴 거 뭐 있습니까? 뭐 나중에 천국, 지옥은 가봐야 아는 이런 입장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에는 개신교가 먹히지를 않습니다. 


딱 먹히는 개신교가 뭐냐 하면은, 자기가 스스로 자기 열광을 내는 거. 열광을 내는 것을 허용하는 단체. ‘순복음’이죠. 그래서 미국이나 미국의 침례교, 흑인 침례교 가운입고, 그 유명한 영화 있잖아요? ‘오 해피데이~’ 하는 거 있잖아요. <시스터 액트>에서 나오는 그런 쪽으로, 그 영화 보면 나오잖아요. 


가스펠이라 하는 하나의 장르로서, 완전히 예배 장소를 그렇게 해버립니다. 흑인들 막 신나요. 억눌린 한 다 풀고, 거기에 심지어 남미도 먹혀들어가요. 심지어 독일에도 먹혀들고, 순복음이라 하는 게 바로 그런 쪽에 성령운동, 오순절 성령운동 그쪽에서 먹히고 다른 것은 먹히지를 않습니다. 공부하는 것 자체가 짜증나요. 머리에 안 들어간다니까요. 


이걸(성경책) 왜 봐요? 그냥 미사 참석하면 될 걸 가지고 이거 봐가지고 할 게 뭐 있어요? 이미 예배당에 딱 손에 벽돌 만져지는데, 여기에 등록했으니까 구원 받은 거 잖아요. 참 간편하지요. 좀 문제가 있는 게 있습니다. 여기서. 뭐가 문제냐 하면은, 성당은 차이점은 뭐냐 하면은 교회는 죄 용서를 누가 한다 했습니까? 예수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런데 여기는(교회) 예수님이 하고, 예수님은 안보이잖아요? 하여튼 안 보이는 것은 무조건 다 성당에서 전부 다 교체, 보이는 것으로 교체를 다 해버리는 겁니다. 신부가, 신부의 임무가 Father 아버지, 신부라는 영적 아버지가 죄 용서를 삐딱하게 앉아서 죄 용서, 고해성사로 용서 해주는 이게 편한지? 


아니면, 안 보이는 예수를 억지로 상상해서 억지로 하다가, 나중에 또 잠도 오고 이러면 또 잊혀지고, 어제 보았던 예수님 상상하고 오늘 봤던 예수님을 상상하면, 어느 쪽이 맞는지 헷갈리고, 이러면 더 골치 아프단 말이죠. 그래서 교회도 역사가 오래 되면서 무엇으로 바뀌느냐 하면은 성당으로 바뀌는 겁니다. 성당으로 바뀌는 거예요. 


예수님이 주실 때 뭘 하냐? ‘살과 피’ 그리고 ‘세례’ 여기 두 개의 성찬을, 두 개의 의식을, 여긴(성당) 일곱 개인데, 여기는(교회) 두 개만 딱, 그 의식을 인정해요. 의식을 인정하면서 여기(성례) 누가 계시냐 하면 예수님이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일반 교인들이 살과 피, 성만찬하면서 예수님을 봅니까? 아니면 비스킷과 포도주스를 봅니까? 


비스킷 포도주스를 본다고요. 백날 예수님을 상상하면서, 상상은, 이거 먹으면서 집에 가스 불 꺼졌는지 그거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가만있어봐라, 우산 안 가져왔는데 비오면 어떻게 하지?’ 이거 하면서 비스킷 먹는다니까요. 어쨌든 간에 이게, “이것은 내 살이요” 할 때 거기에 내 살이다. 


이 떡은 이퀄(=) 내 살이다 할 때, 이퀄, 이(떡=살) 같다는 게 무슨 의미냐 놓고, 이게 쯔빙글리하고, 루터하고, 칼빈하고 개신교에서 이게 또 파가 많은 거예요. 이런 거, 저런 거 다 엉터리 같은 소리다! 하고 한 게 뭐냐 하면은 제세례파고, 제세례파. 아직도 있습니다. 대전에 가면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되니까 교회입장에서는, 어느 곳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느냐가 그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은(떡=살) 중요하지 않아요. 세례 받고 그저 성당은 맨날 이것, 저것 떡 맨날 미사 할 때마다 이거 주니까 어떻습니까? 미사 시간이 길어지잖아요. 그럼 12시에 지금 예식장에 가야 되거든. 


그러니까 차라리 이 성당보다는 이 개신교가, 일 년에 딱 두 번밖에 안하니까, 주님이 두 번 하라고 했습니까? 고린도전서에서 두 번하라고 했습니까? 모일 때마다 하라고 했지요? 어느 게 맞아요? 이게 성당이 맞잖아요? 그래 여자들은 예배 참석할 때 뭐를 쓰라고 했습니까? 모자 쓰고 오라고 했잖아요. 요새 아가씨들 교회 갈 때 모자 쓰고 오는데, 상당히 복음적이에요? 안 그러면 싸가지 없는 거, 어느 쪽이에요? 싸가지 없는 쪽이라고요. 


세례 할 때는 물 뿌리는, 이게 세례도 문제에요. 세례를 뭐라고 하나? 이것은 세례를 옳다. 아니다 침례가 옳다 해서, 여기에 또 욕조하나 만들어서 빠뜨려서 코 해가지고 또 타올로 닦는다고 바쁘고 첨벙 해서, 물론 첨벙하니까 어느 일시적 느낌이 이쪽에 침례가 좋긴 좋은데, 이건 또 물 잘못 뿌려서, 초짜 목사가 뿌려서 미장원에 갔다 온 머리 다 날리고, 좀 노련한 것 같으면 탁탁 뿌리고 표 안 나게 하면 되는데, 손가락에 물 조절 안 해봐서 뿌리다 보니까 너무 많이 뿌려서 축축하게 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 둘 다(성당과 교회) 뭐 지금 뭐냐 하면은, 루터가 이야기 한 게 있어요.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죠? 자, 이 말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로 한번 들어가 보겠어요. 만인제사장, 만인제사장인데 루터가 만인제사장 할 때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모든 성도가 전부다 뭘 받아요? 성령. 성령을 받아야, 성령을 받을 경우에 이 사람은 만인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루터가 이런 이야기 할 때 천주교에서는 제사장이 따로 있지요? 신부가 제사장이잖아요. 그 천주교에서 제사장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남을 가르치고 남을 교인 만드는 중간 매체로서의 자격을 염두에 두고 제사장이라 했다 이 말이죠. 네? 


“나 제사장이야!” 신부가 “나 제사장이야! 내 말 안 들으면 너 죄 그대로 있고, 내 말 듣고 죄 용서 받으면 너는 죄 없는 순간으로 지금 죽어도 천국 가!” 이게 타인을 의식하잖아요. 그런데 루터가 만인제사장 하는 것은 타인을 의식합니까? 의식하지 않습니까? 이게 없어요. 여러분 자체가 이미 제사장입니다. 


이거는 베드로전서 2장에 나오잖아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듣는 교인들은 기분 좋은데, 그러면 차이가 없으니까 목사도 전부다 성령 받은 차이가 없으니까 좋은데, 내가 안 믿는 사람에게는 나는 어떤 존재냐 이렇게 나올 때, 갑자기 본인이 대상 없는 제사장이 됐다가 남한테 이야기 할 때는 뭐가 돼 버려요? 


옛날 신부 했던 게 폼 나거든요? 자기가 안 믿는 식구들이나 안 믿는 친구에게는 무슨 역할을 해버려요? 제사장 역할을 하고 싶어서, 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는 신학교 안 나와도 루터 말 대로면, 성령 받았으면 제사장이 되니까, 그러면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그대로 나와요. 이것이 무슨 기도냐 하면, 이게 바로 ‘중보기도’ 중보기도라는 제도가 등장해버립니다. 중보기도. 


“달랑 너만 구원 받을래? 아니, 네 식구, 네 친구들 불쌍하지 않냐?” “그럼 목사님, 어떡해요?” “네가 바로 중보기도만 하면 되잖아? 하나님께서는 너를 통해서 저쪽이 기도하지 않더라도, 네 기도를 들어줘서 저쪽이 구원 받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성령을 줬다. 그러면 그 능력 그냥 썩힐래? 써먹을래?”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썩히는 것은 뭐고 써먹는 것은 뭡니까? 이것을 생각하니까 또 개콘에 이런 거 생각난다. 개콘에 그런 게 있어요. “네가 그걸 썩힐래? 써먹을래?” 하거든요. 썩히는 것은 뭐냐? 나만 구원 받는 게 썩히는 거고 써먹겠다는 것은 뭐냐? 


이게 무서워요. 써먹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과연 성령을 받았는지, 믿음이 있는지는 내 중보기도의 효과가 나면 저쪽이 문제가 있고, 내가 구원 받는 사람 맞고, 만약에 중보기도 빡세게 했는데, 한 2년 했는데 아무 효과 없으면, “내가 성령 안 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안 받을 수 있다면, 사람이 안 받으면 “안줬으니까 안 받지” 이럴 인간이 아니거든요. 


어떻게 합니까? 악바리 같이 생길 때까지 계속해서 증거를 찾는 작업에 나서겠지요? 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10년 전에 중보기도를 했는데 세상에! 그달에 다섯 명이 나한테 전도 받아서 교회 나왔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다섯 명도 중요하지만 “아, 역시 나는 주의 종 맞구나!” 확인됐지요? 


그 다음에 한 5년 전에, 3년 전에 합니까? 또 빡세게 중보기도 하니까, 딱 목표 잡고 중보기도 하니까, 한 세 명이 아! 기도하고 끝나고 난 뒤에 전도하니까 세 명 됐어요. 3년 전에. 드디어 2017년도에 마음먹고 빡세게 기도했는데, 한명도 안 되는 정도가 아니고, 왔던 여덟 명이 도로 나갔을 때, 여덟 명은 너무 했다. 네 명, 반 쪼갭시다. 


네 명 나갔을 때,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뭐 이렇게, 아직도 나는 신자라는 생각이 들겠어요? 아니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신자 아닐 수도 있다는 거, 왜? 중보기도는, 성령 받은 중보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된다는 그 방정식이 생각나서, 효과가 있을 경우에만 나는 신자가 되고, 어떤 실적이 없으면 신자가 안 되는 그 방정식에 자기가 놀아난 겁니다. 


이것 지금 누가 지어낸 거예요? 이게 지금 성경하고 아무 상관없이, 개신교는 천주교를 닮아가고 왜? 장사가 잘되니까, 천주교는 유식이고 무식이고 할 것 없이 성당만 있으면 다 신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심지어 천주교인은 지금 신자 아니라도 죽고 난 뒤에도 미사를 열어 버리면 성자들이, 예수님의 엄마 옆에 있는 성자들이 빽 써가지고, 미사 연다는 것은 돈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돈을 드려서 미사를 열게 되면 패자 부활전 해서 연옥에서 빼줄 수가 있어요. 


이 정도 하면 정말 하나님이 사랑이 넘치고 넘치는 게 아니겠어요? 적어도 이 정도 돼야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믿음 없으면 지옥가라. 믿음 있으면 천국 오너라.” 너무 쌀쌀맞다 생각 안 듭니까? 점차 이 개신교가 천주교를 거의 다 따라 잡았어요. 제도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통합 측에서는 옛날에 천주교가 했던 거 그대로 합니다. 


통합 측에서는 목사가 됐으면 월 150 보장됩니다. 맞지요? 더 돼요? 교회 없어도 150 보장 해주십니다. (누가 줍니까?) 교단에서, 다 줍니다. 이게 원래 감리교에서 했던 건데 이제 통합 측에서, 괄호열고 통합 괄호 닫고 장로교. 거기서 이미 다 했어요. 그만큼 큰 교회의 상납비가 그만큼 부담이 많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큰 교회에서는 대당, 대당하면 안 되죠? 인원수당, 한 사람당 그게 분담금이 주어져서, 그래서 큰 교회에서는 남의 교회, 노는 목사 돌보기 짜증나서, 우리 독립해버린다 해서 같이 독립교단 만들어서 돈 한 푼도 안주려고 하는, 그런데 이미 천주교에서는 이미 다 하고 있는 겁니다. 감리교에서도 다 했고, 다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최저 생계비 정도가 아니지요? 그러면 장신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애쓰고 재수하고, 삼수하고, 사수하고 노력하겠어요? 


자, 이 방법이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이, 이게 결국 뭐라고 했습니까? 요한복음 12장에서 이게 뭐다? ‘출회’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님으로부터 독점적으로 받았다가 성립이 될 경우에는 이게 가능하지요? 그런데 그 출회가 있어 버리면 예수님한테 뭐가 문제라 했습니까? 출회가 있어버리면, 출회. 


이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너는 우리 사람 아니야. 구원 못 받아!” 하고 ‘딱, 딱, 딱’ 이것을 판결할 수 있는 특정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 단체가 있다. 라는 말은 뭐가 성립된다? 출회가 성립되죠? 출회가. 그런데 이 전체를 예수님은 뭐라고 합니까? 이게 무슨 영광이다? 이게 사람의 영광이라는 거예요. 이게.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이것을 만들 때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었어요? 아니면 여호와의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든 거예요. 이렇게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아요. 이렇게 만드는 이 전체가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사람의 권세를 보고 겁이 나서 벌벌 떨면서 안 쫓겨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게 사람의 영광이라고 단정 짓는 근거가 뭐냐 이 말이에요. 근거가. 주님과 그 일행이, 주님이 여기에서 출회 당하기 때문에 그래요. 배척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배척받았기 때문에. 쉽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서 버림 받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있는 자다. 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종교 단체, 권한을 왜 이렇게 허락했습니까? 그들은 사람의 영광이라는 것을,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벽돌 건물 있잖아요. 저 뒤에도 성당 있잖아요. 이렇게 눈에 보이고, 보고, 들리고, 찬양 들리고, 기도 하는 거 다 기억나고 이런 것들의 집대성, 


이런 것들의 규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 거기 안에다가 차곡차곡 쌓아두는 이게, 타고난 인간들의 종교성을 허락하는 이유는, “필히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위인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이 말입니다. 그런 것을.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딱 사로잡아 놨는데, “이건 아니야!” 라고 나올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사람이다 이 말이에요. 


거기서 나온 게 바로 ‘사랑’이란 게 나오는 거예요. 사랑. 자, 요한복음 13장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13장 31절에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버지의 영광을 누가 독점했습니까? 인자가 독점 한 거예요.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는 영광과 예수님을 쫓아냈던 그 인간들로 구성된 정치적인 단체. 


영광 단체 중에 어느 쪽이냐를 묻는 겁니다. 쫓겨난 자들 쪽에 속하느냐? 아니면 인간들의 종교적인 아이디어와 욕구로서 규정한 그 단체가 하나님을 찾는 그 단체가 진짜 하나님의 영광이냐를 여기서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쪽에서는 우리보고 선택하라면 우리는 누구를 선택합니까? 


안 그래도 교회 다니기 짜증나고, 돈 내라는 것에 돈이 아깝고, 성당 신부들 하는 그 꼴을 보기 싫을 때는, 교회 안다니고 성당 안가면서 천국 가는 방식을 우리가 살짝 또 고려를 하겠지요? 세상에 그거 같이 편한 게 어디 있습니까? 교회 봉사 안하고, 헌금도 안하고, 참석도 안 해도 구원 받을 길이 있으면, 문제는 돈 문제거든요. 


왜냐하면 교회까지 가려면 차 기름도 없어. 차 기름 값. 그것도 요새 기름 값이 왜 이리 비쌉니까? 그것도 아까워 미치네. 일체 안하고 그 돈 모아놓아서 애들 피아노 레슨 시키는 것이 낫지요? 그거 안하고 구원 받는 길이 있다면 우리는 거침없이 어느 쪽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영광 쪽을 우리는 거기에다가 표를 던지는 거예요. 


자기가 다니기 싫어놓고 마치 저쪽에서 쫓아낸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쫓아 나가라 하는 소리도 안했는데, 아니 누가? 누구 나가라는 소리 안했는데? 본인이 나가놓고 “역시, 나는 세상 단체에서 속하지 않는 진짜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이다.” 이렇게 우길 수가 있지요? 


자, 그것에 새로운 계명이 주어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은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로운 계명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이 독점했는데, 그 영광에서 나오는 새로운 계명이 나와요. 그게 뭐냐? 사랑. 


서로 사랑하라는 겁니다. 자, 그러면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바로, 제일 어려운 개념이 바로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이 왜 어려우냐 하면은 ‘사랑’ 때문에 ‘죄’가 나타나고 생겼습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이 없으면 죄가 나타나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 죄를 왜 나타나게 했는가?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은, 하나의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쉬운데 어떤 사람이 어떤 여자를 너무 사랑했어요. 여자가 미인이기도 하고 너무 예뻐서 너무 사랑하고 있는데, 같은 아파트 바로 옆에 붙어 있는데 말은 안하고 속은 쓰리죠. 좋아한다는 말은 못하고 그냥 쳐다보기만 하고 짝사랑만 하고 있는데, 


그 자기가 좋아하는 그 여인의 전남편이, 이혼한 전 남편이 와서 술을 먹고 와서 행패를 부리면서 돈 내놓으라고, 그 남편은 놀음을 하고, 인간쓰레기인데 막 때리고 이렇게 하니까 때리려 하다가 그 여자가 딸하고 같이 어떻게 몸싸움을 하다가 죽여 버렸어요. 이렇게 우연히 죽여 버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여인을 사랑하는 그 남자가 그때 나섭니다. 


나서가지고 그 여자의, 그 죄를 자기가 뒤집어써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누명을 쓴 거예요. 왜 누명을 썼을까요? 뭐 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누명을 쓴 거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은 사랑이 사랑으로, 이게 현실에 드러날 때는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되느냐? 누명씀이 있어야 돼요. 누명씀. 


누명을 이렇게 예수님이 누명썼다는 사실이 있어야 돼요. 누명 썼다는 사실이 있으려면 우리는 뭐만 해야 돼요? 죄만 지어야 되는 거예요. 죄만. 죄만 지어야 되는 겁니다. 좀 더 실감나게 이야기 한다면, 그 전 남편이 행패 부리면서 놀음 꾼이 행패 부리면서 “돈 내놔~” 술 먹고 들어와 행패 부릴 때, 그 여자가 싸우다가 어쩌다보니 담요를 손으로 해서 목 졸라 죽였어요. 


죽고 난 뒤에, 경찰에서는 유일한 용의자, 그건 뭐 볼 것도 없이 전 부인이, 부인과 그 딸이 죽였다. 라고 할까봐 이 천재적인 짝사랑하는 남자가 와서 그 여자하고 소곤소곤 해가면서 다 이야기 합니다. 경찰이 와서 이렇게 할 때는 이렇게 해야 되고, 이렇게 할 때는 이렇게 해서 다 나한테 미루고, 자기는 여관에 갔다고 하고 전부 다 조치 해놓고, 자기는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누구만 믿어라? 


누구만 믿어라? “나만 믿어라!”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여자가 옆에 있는, 알기는 알지만 옆에 있는 남자가 왜 나한테 이러한 친절을 베푸는지를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왜?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여자는 이 남자를 사랑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습니다. 전혀 사랑할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남자는 왜 그래야 되느냐? 이게 나중에 이야기해줘요. 


또 영화 이야기 비슷한데, 나중에 이야기 한 게 뭐냐 하면은 당신이, “당신이 날 사랑하지도 않고 이렇게 죄를 지어줘야 내가 나답다.”는 거예요. 내가 나답다는 겁니다. 내가 나 되려면 당신은 날 사랑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일서 4장에 나오지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이것이 반드시 들어가야 돼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에요. 왜? 우리는 뭘 사랑한다? 인간의 영광을 사랑해요. 왜? 인간은 다 한 통속이고 하나이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지고, 눈으로 본 것하고, 중보기도해서 어떤 응답이 나올 때, 그때 우리는 그걸 보면서 나름 내 기도 응답되었으니까 “나는 신자 맞다.” 기껏 우리는 이 범위 안에 그냥 갇혀있어요. 


내가 기도해서 누가 전도 되고 이럴 경우에는 신자답고, 어떤 목사가 목회하는데 처음에 한 30명 왔다. 뭐 다 나가고 한 5명 남았나? 남았다. 이럴 때 어느 목사가 “아! 정말 저는 주의 종 맞군요!” 이렇게 생각할 사람 누가 있어요? 실제로 그렇게 안 되어봤는데, 만약에 30명 왔는데 복음 전했더니 한 40명. 그래서 이상하다 해서 다음에 또 복음 전했는데 50명. 차고 넘쳐. 


그러다가 또 한달 되니까, 어떤 부자가 와서 “이번에 주식을 해서 한 20억 남았는데, 한 10억은 하나님께 서약을 해서” 10억을 그냥 교회에다 툭 던지니까 안 그래도 타이밍이 멋져요. 교회는 비좁고 10억이 그냥 다가왔으니까, 타이밍이 이사 갈 타이밍, 교회 옮길 타이밍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예배당 지었다. 


그럴 때 그 목사가 “난 주의 종도 아니야. 난 주의 종도 아니야. 정말 나 신자 아니야~” 이렇게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이 말이죠. 실적이 있거든요. 실적이 있잖아요. 실적이. 실적이 말하잖아요. 실적이. 꿩 잡는 게 뭐라고요? “매다!” 하잖아요, 조용기 목사가. 실적이 있잖아요. 실적이. 백날 정통 장로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쪽에 신자가 10만 명이 넘는데? 꼬라지, 장로교 꼬라지 해서 세 명, 네 명 남고 그거보다는 이쪽이 하나님이 보내줬다는 기적의 증거를 보고도, 이게 진짜 복음의 순복음 아니냐 이 말이죠. 이만큼 왔는데 이게 사람 불러 모아서 오겠어요? 주께서 보내줘서 왔지. 하나님 쪽은 누구의 손을 들었습니까? ‘승! 5회 TKO승!’ 이미 손을 들어줬잖아요. 숫자 보세요. 숫자가 많잖아요.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무슨 증거가. 어떤 선교단체에서 <리투아니아>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지도 펴놓고 리투아니아 딱 펴놓고 기도합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돌아가면서 하는데 중보기도 하는 거죠. 리투아니아 팀이 있고, 이쪽은 뭐냐 하면은 <우크라이나> 팀이 있고, 이쪽은 <이슬람> 제일 빡센 데는 이슬람이 있고, 더 기도 잘하는 데는 이건 뭐, 짐승 같아서.. 


의인은 간구하는 능력이 많거든, 거기는 좀 믿음이 좋은데 가야 돼. 기도 했다. 그러면 그 기도하는 당사자가 한 달이나 두 달 지나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네? 통신원의 소식을 듣겠지요? 나는 여기서 수천 킬로 떨어진 곳에서 기도했는데, 거기에 파견된 통신원들이 어떤 소식을 전해줄까 말이죠. “리투아니아 나오시오, 오바!” 


“우즈베키스탄 나오시오!” 할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세 명이 전도되었습니다!” 이러면 무엇과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겠어요? 내 중보기도가 효과 본 것을 봤잖아요. 그럼 그 다음부터 중보기도를 끊겠습니까? 더 열심히 하겠습니까? 세 명으로 멈출 위인들이 아니잖아요. 세 명이 양이 안차잖아요. 


이제는 30명, 40명 되면 될수록 뭐가 확정 되냐 하면 “역시! 나는 성령 받은 주의 종 맞다!”가 확정이 된다. 이 말이죠. 이게 바로 천주교잖아요. 이게 천주교, 성당이란 말이에요. 이게 개신교 교회다 이 말이죠. 이게 사람의 영광이에요. 그러면 실컷 여러분 강의 들어놓고 “목사님, 그 말 맞잖아요. 다들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 맞잖아요. 


그렇게 하늘나라가 확장 되고, 그게 하늘나라 확장되는 방법 아닙니까? 그게 전부잖아요!” 할 때, 제가 성경을 가지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뭐라고요? 또 다 잊어버렸지요? 이야기 듣고 난 뒤에, 하나님의 영광은 뭐냐? 기존의 이것을 허락하면서, 이게 아니고 출교 당했지요? 당하는 것으로 끝났습니까? 뭐라 했습니까? 제일 어려운거. 새 계명이 뭐죠? 사랑이죠. 


사랑의 내용을 뜯어봤습니다. 뭐가 들어있습니까? 바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 주님은 누명 쓴 거예요. 이것을 대속이라고도 하지요. 지난 낮 설교 할 때 대속이라 하는 말을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설교하면서도 교인들이 무슨 말인지를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서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하는 말을 두 가지 개념으로 제가 나누었지요. 하나는 ‘대리’고 한쪽은 ‘대체’로 나누었습니다. 대체. ‘대리’라 하는 것은 대신하는 그 상대가 아직 살아있어요. 살아있다 이 말이죠. 살아있고, 대리하는 역할은 한시적이고 임시적이에요. 그런데 ‘대체’라는 말은 이 대리해야 될, 대신해야 될 상대자가 이미 죽었어요. 


죽었기 때문에 의논 상대자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대체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하고 더 감사한 것은 이게 영구적이에요. 왜? 의논 안했으니까. 만약에 의논하게 되면 “이번에 아프가니스탄 위해 열심히 중보기도 하는데, 이번 달에는 한 세 명 정도 전도하게 해주세요.” “세 명 정도? 알았어. 세 명 정도. 세 명은 좀 심하다. 오늘 두 명하고, 다음 달에 한 명 더 할게.” “예, 됐습니다.” 


뭔가 기도하면 의인이 되는데 일방적으로 이렇게 죽어버리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구원이 되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의논 한 적이 없다 이 말이잖아요. 그러면 대신 하심이 성경에서 대리에요? 대체에요? 이게 대체가 되는 거예요. 대체. 대체가 되고 이 사람을 성령으로 새롭게, 새로운 피조물로 살렸잖아요. 


눈 뜨고 살아보니까 이게 대리가 아니고 대체다 이 말이죠. 그러면 평생 이 사람은 자기 잘남을 하겠어요? 아니면 대신 죽었다 살아나신 예수님만 증거 하겠습니까? 대리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대체를 증거 하는 거예요. 만약에 자기가 살아 있으면서 이렇고, 저렇고 주님께 기도 가운데 의논했다면, 살아났다고 치고, 살아나지도 않았지만, 살아났다고 치고 그 다음부터 간섭이 많아요. 


전에는 한 세 명 정도는 전도 시켜 줬잖아요? 요즘 들어서 전도가 안 되면 뭐 어떻게 됩니까? 뭐 더하라는 말입니까? 돈 더 달라는 말입니까 뭔 뜻입니까? 이렇게 불만 가운데서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대체가 돼버리면 “분명히 나는 바짝 마른 뼈였는데, 어? 성도가 됐네? 어? 구원은 다 끝나버렸네?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그럼 나는 죽어 있는데, 거기에 나는 죽어 있다는 말은 주님을 사랑했습니까? 사랑 안했습니까? 주님을 사랑 안했지요? 주님을 사랑 안 한 거예요. 주님도 사랑 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한 거기에다가 주님께서는 무슨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줘버렸습니다. 그러면 이 계명 속에 사람의 영광이 끼어들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미 죽은 자한테는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끼어들 수 없는데 명령은 주어졌지요? 명령은. 그러면 그 사랑하라는 명령은 죽은 자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100% 전적으로 누가, 누구만 할 수 있는 업무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자기 업무가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누명, 누명을 자기한테 씌우는 거예요. 


아버지로부터 저주 받아야 될 그 죄인의, 그 죄를 예수님께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 죄를 전부다, 죄다 자기한테 다 뒤집어 씌어서 자기가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아요. 버림 받으면 예수님 역할은 끝났습니다. 예수님 저주 받으면 끝났어요. 그 다음에 살려내고 안 살려내고는 누구 소관입니까? 아버지 소관이지요? 아버지가 누구를 사랑해요? 예수님을 사랑하지요? 


그러면 아버지와 예수님이 사랑할 때, 거기에 아무도 모르는 채 오직 아버지만 알고 예수님만 아는 그 둘 사이에, 그 관계가 사랑 관계에요. 그게 유일한 계명인데, 그 계명에는 이미 죽은 자가 그 계명에 끼어들 수 있다 없다? 전에도 못 끼어들고 구원 받고 난 뒤에도 거기에 끼어들 수 없어요. 


그 끼워 놓은 그 계명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줘 버리면 그거는 새 계명 안에 우리들이 거기로 들어가서 사랑으로 구원 받는 게 되는 겁니다. 사랑으로. 제가 대구 강의할 때 그리스도 안에 라는 것을 설명을 했어요. 그리스도 안을 설명하면서 신랑 신부의 예를 들었던 것이 제가 기억이 납니다. 기억나는 것은 어제 했는데 기억이 안 날수가 없지요. 다 기억나지요? 


뭐냐 하면은 결혼할 때 남자가 여자를, 자기 새색시를 생각하는 그것과 여자가 남자를 생각하는 것이 확연히 다르다고 이야기 했어요.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게 됩니다. 남자는 여자를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소유했다고. 나 혼자 살았는데 여자 하나가, 여자라는 존재 하나 추가해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여자는 남자 곁에 오는 게 아니고 남자 속으로 들어가요. 남자 속으로. 그게 그리스도 안이라는 겁니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마음이 납득이 안돼요. 같이 산다고 생각하지. 내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 못하는 겁니다.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옆에 붙은 거 하고 이 사람이 이 안에 들어오는 거 하고 이거는 천지 차이입니다. 


만약에 어떤 여자가, 만약이 아니죠. 어떤 남자와 결혼해서 안에 들어와 버리면, 이 여자는 평생 할 게 없어요. 왜? 남자 안에 있기 때문에. 수입 버는 것도 남자가 다 해주고, 특히 여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결혼해서 제일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보호입니다. 보호. 여자들이 원하는 것은 이거 하나 밖에 없어요. 남자한테. “끝까지 나를 보호 해 달라!”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왠 다이아’ 이 노래 알아요? 다이아 어디서 샀느냐 그 말이 아닙니다. ‘휘트니 휴스턴’ 부른 노래 있잖아요. 왠 다이아And I 보디가드라 하는. 여자는요.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사랑해요. 그거 모르고 결혼 하셨어요? 남자들. 기생충입니다. 그것도 안에 들어와 버려요. 이제 책임지라는 거예요. 


남자는 같이 사는 것으로 해서 헤어질 때도 같이 헤어지면 그만일 거라 생각 한 거예요. 왜?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이잖아요. 옆에 붙어 있으면 같이 있으면 옆에 보이잖아요. 하나, 둘 식구가 한명이었다가 두 명이잖아요. 여자는 두 명이 아니에요.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갑니다. 두 사람이 뭐 돼요? 한 몸이 돼요. 그런데 남자가 출장 가잖아요? 


남자는 생각에 자기 혼자 출장 갔다고 생각 하거든요. 여자는 그렇지 않아요. 출장 간 현장 안에 누가 들어있다? 아내가 들어 있는 거예요. 또 다른 여자 관심 가질까 싶어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 하는 거예요. “지금 누구와 함께 있어?” 남자는 귀찮아 죽겠어. “전화를 왜 하는데 좀 믿어라!” 이건 믿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고, 당신이 어디를 가더라도 당신 속에 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느냐로 닦달 내는, 그냥 묻는 겁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요. 집에 오면 같이 있고, 나가면 해방이고 그런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14년 만에 아내가 친정에 간다고 해서 해방을 불렀는데 누군지 모르겠어요. 혹시 이 안에 계신 분 아닙니까? 


어떤 분이 14년 만에, 세상에 그 여자도 참, 14년 만에 친정 처음 가는 겁니다. 남자가 좋아 가지고. 우리 교회에 어떤 분은 아내가 유럽으로 2주 여행 간다고 합니다. 좋아가지고, 세상에 이런 보너스. 그러나 여자는 유럽을 가더라도 화상 통화를 해서 “비춰봐라. 너 지금 어디야? 비춰봐!” 예수 그리스도 안이 이런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가 되는 겁니다. 이런 관계입니다. 


남남으로서 사랑을 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사랑 안에 들어와 버린 겁니다. 들어왔다는 말은 이 사랑을 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우리가 할 게 있다? 없다? 없습니다. 뭐만 하면 돼요? 주님이 나 대신 누명을 다 뒤집어 쓰셨다. 요한일서 4장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고, 스토커는 누가 스토커다? 주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우리를 덮쳐서 자기 신부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그럴 경우에만 이게 뭐냐 하면, 인자의 영광이 돼요. 섞이지 않으니까. 인간의 모든 행함이 섞이지 않고 100% 몽땅 다 예수님 혼자 다 했으니까, 이게 인자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을 했나 안했나를 뭐로 증명 할까요? 뭐 기도하고, 중보기도 해서 교인 수 더 늘어나는 그것을 증명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 생각 할 때마다 “주님, 저는 한 게 없습니다.”가 그 순간순간이 예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얼마나 감사한지. 다 이루었다 거든. 결혼식을 했었거든요. 결혼식이 끝났어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되는 겁니다. 


주일날 설교에 <하나님의 의>를 설교하고 나왔더니만 끝나고 난 뒤에, 우리 교회에 그때 처음 오신 분이 있었어요. 그것도 그냥 오는 게 아니고, 그냥 누구 만나러 왔다가 참석을 했어요. 아, 벌써 어제 설교 듣는 태도 딱 보면 알잖아요. 그러면 저는 또 밉다고, 좀 순하게 하면 될 걸, ‘이래도 안 나갈래?’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그분이 하는 말이, 어떤 분이 먼저 물었어요. 


“목사님 설교 어떻습니까?” “십자가는 이야기 하는데 왜 부활은 이야기 안하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어휴~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를 고르고, 부활을 고를 수 있는 우리의 제3의 지역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어요! 왜? 우리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주면 주는 대로 받으면 되지! 


“나는 십자가는 챙겼고 이제 나머지는 부활 챙기면 되지~” 이렇게 지가 안 죽었어. 자기가 안 죽고 골라잡는 거, 어느 게 자기한테 유리한지, 어느 게 이익이 되는지, 어느 것을 챙겨야 내가 구원 받는지. 그렇게 돼버리면 계속, 그럴 줄 알고 설교 시간에 그때 그런 거 나올 줄 알고 계속 이야기 했는데, 했거든요. 치매 걸리면 믿음이고 다 없다고. 분명히 했거든요. 


그러면 그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은 정신 바짝 차리고, 자기에게 유리한 거, 성경 말씀 구절 갖고 바구니에 담아야 돼요. 그런데 만일에 치매 걸리면 뭘 담을 건데? 치매 걸리면? 남진, 나훈아 담을 거예요? 치매 걸려 보세요. 유행가 밖에 안 나와요. 찬송가도 안 나옵니다. 


본성으로 돌아가요. 본성으로. 권사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똑같이 돼요.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설교 시간에. 교회 나오나 안 나오나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 인간의 영광, 눈에 보이는 인간의 영광을 인간은 선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는 뭐냐? 계속 누명 쓰시는 거예요. 옆집 아저씨. 


이 영화의 제목은 일본 영화입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그 영화가 기독교 냄새를 굉장히 많이 피고, 찬송가도 나와요. 크리스마스 때 일어난 일. 


10분 쉽시다.

 이명직 (IP:110.♡.86.59)17-04-08 17:08 
가락-요한복음13장31절(누명)170404b-이 근호 목사 


예, 지난 시간에 사랑의 말이 어렵다는 게, 뭐가 어렵다는 거냐 하면은, 사랑이 먼저고 사랑을 위해서 죄라는 것이 만들어져야 된다. 이 관계가 어려워요. 죄가 없는 곳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서 필히 이 땅에서 마귀가 죄를 저질러야 되고, 인간은 그 마귀가 시키는 대로 따 먹어야 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끝까지 사람의 나라로 주께서는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예수의 나라에요. 끝까지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예수의 나라에요.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예수의 나라에요. 하나님은 그냥 창조하면 되지만, 예수의 나라가 올 때는 거기에 언약 관계가 성립되게 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언약으로 다 이루었다가 돼야 돼요. 하나님의 새 언약이. 새 언약은 뭡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뭐가 없다? 영생이 없다. “자, 받아먹어라! 이 떡을. 받아먹어라! 이 잔을.” 이것은 그 떡과 잔을 줄때는 각각 떡과 잔을 나눠두고 먹으라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떡을 가지고 떼어 주는 거예요. 없는데, 없는 것을 주는 거예요. 


이게 새 계명 사랑의 제공 방법입니다. 주님의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의 종교라 하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것부터 출발해서 점차 저 높은 곳 천로역정이죠? 저 높은 곳, 신의 나라에 자력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졌으니까, 계명이 주어졌으니까, 계명 지키면 지킨 만큼 점점 더 천국은, 조금씩 더 보일 것이라고 생각 하는 거예요. 


마치 등산하듯이, 이러한 사고방식은 기독교에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종교에 다 있어요. 그래서 모든 종교가 말하기를 진리는, 진리가 여기 있으면 진리는 뭐냐? 사랑인데, 그 사랑의 방법은, 정상은 모든 사랑으로 모이지만, 가는 길은 원불교식으로 있고, 이슬람식으로도 있고, 불교식으로도 있고, 천주교, 어떤 토속종교라 할지라도 결국은 배화교 뭐, 그 배화교라 하는 이란 종교가 있어요. 배화교. 사실 불을 숭배하는 건 아닙니다. 


숭배하는 건 아닌데, 놀린다고 불 숭배. 배화교. 또 마니교 이런 거, 힌두교. 그들의 원리를 따져보면 전부다 뭐냐 하면은, 바로 ‘인류애’ 인류 사랑입니다. 종교가. 인류 사랑인데, 이것을 네 자로 우리한테 익숙한 네 자로 이야기하면 이게 뭐냐 하면은 ‘홍익사상’이에요. 홍대. 홍익사상. 만인을 평등하게 하는 것. 민주주의죠? 


이게 결국은 솟구쳐(종교를 그린 산) 올라오는 이 전체를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이것은 무슨 사랑입니까? 인간사랑. 너희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모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다 알아요. 인간들은 이렇게 자기로부터 출발한다는 거. 그러면 예수님은 여기에 일부러 들어왔어요. 


일부러 들어오고 추방당했잖아요. 일부러 들어와서 까이지요? 까여서 튀어나와버렸어요. 만약에 하나가 된다면 이거는 인자의 영광은 없습니다. 그런데 튕겨 나옴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뭐가 발생 되냐면 살과 피가 발생돼요. 살과 피가 뭐냐 하면은, 이게 새 언약의 요건입니다. 새 언약의, 하나님의 약속의 요건이에요. 요건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안 죽고 언약 맺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돼요. 그런데 여기(종교) 인간들은 살아있는 내가 구원 받아야 되기 때문에, 자기가 죽으면 안돼요. 내가 죽어버리면 구원 당사자가 사라져서 안돼요. 내가 죽을 만큼 고생을 해도, 죽을 만큼 고생해도 죽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진짜, 내가 실패 할 만큼 하지만 실패해서는 안돼요. 


완전히 끝까지, 고난에다가, 마음 낮추기, 온갖 수단을 다 해서라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돼요. 살아남아야, “수고했다. 훈련 잘했다. 내가 너 믿음 있는지 시험해봤잖아. 시험 이겼으니까 합격이야!” 끝까지 나라는 인간이 죽을 뻔 했지만 절대로 죽어서는 안 돼! 다시 말합니다. 대체는 안돼요. 인간들은. 


인간에게는 대체는 안 되고, 그냥 대리 정도로 해줬으면 합니다. 과장, 대리. 그 대리 아닙니다. 그 대린가? 대리 정도는 해도 대체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당사자가 역시 구원 받을 당사자는 ‘나’이여야 한다는 그 원칙은 고수해 달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전부 다 대리 이것을 없애버리죠. 모든 인간을 하나로, 전부 다 하나의 죽, 스프 속에 다 넣어버립니다. 


어디 있냐 하면, 하나님이 죄 안에 가두어 두어서, 죄 안에 가두어 두게 되면 계승이 날라 가 버려요 계승이. 니 잘났다 나 잘났다 하는 계승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죽’이니까, 팥죽이니까. 다 같이 용암 속에, 화산 속에, 다 하나의 액체, 물질이 돼서 녹아버렸으니까. 그 다음에 그것을 모든 사람의 순종치 아니하심에 가두어 두심은, 그 다음에 골라내는 문제는, 죽은 자가 손든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그냥 아무나 필요한 사람을 건지는 겁니다. 


건질 때에, 그 건지는 그 방식이, 예수님이 이 땅에 다녀갔던 그 방식을 그대로 반복을 해버려요. 버림받았는데 아버지의 언약 때문에 사흘 만에 부활 한 것처럼, 십자가로 가게 해서, 아버지한테 버림받게 해서, 그 버림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 모든 위임은 누구한테 위임을 합니까? 


아버지한테 맡겨서 끄집어내는 방식을, 예수님뿐만 아니고 예수님 이후에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그 원칙을 적용시킵니다. 그 원칙을 가지고 뭐라고 하면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 옛 언약의 특징은, 말씀으로 마음 앞까지 스톱이 돼요. “지켜라, 십계명 지켜라, 이거 지켜라, 안식일 지켜라.” 딱 스톱이 돼요. 그 다음부터는 스톱이 되니까, 단절된 상태입니다. 


지키고 안 지키고는 내 쪽에서 내 역량껏 뭘 해야 돼요. 그런데 새 언약은 어떻게 오냐 하면은, 에스겔에 예언된 것처럼 “지켜라”가 아니라, 아까 여자는 어디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어요? 남자 안에 들어오지요. 허락도 없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여기에다가 새겨 버립니다. 마치 돌판 에다가 십계명을 일방적으로 새기듯이, 우리 안에 새겨버려요. 


‘카프카의’의 법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오지요? 피고인데, 피고가 받을 형량이 뭐냐 하면은, 감옥소 가서 고생하는 게 아니고, 유치장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피고의 신체에다가 지은 죄를 문자로 재봉틀 박듯이, 아예 문자로 그 죄목을 피부에다가 박는 것 자체가 벌이 돼요. 박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프겠어요? 


아픔을 유발시킨 그 모든 상황이 네 몸에 박혀 있던 그 법에 의해서, 네가 벌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카프카의’의 소설에 나와요. 이건 소설이고, 하나님의 방법은 그것보다 더 심하지요? 아버지께 저주받은 모든 말씀을 새 언약 속에다가, 우리 안에다가 집어넣어 버리면, 우리는 뭘 해도 죄가 돼버립니다. 뭘 해도 죄가 돼버려요. 말씀과 더불어서.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말이, 오호라 나는 어떤 사람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간과 일반적인 과학이나 사회에서 인간은 뭐냐 하면은, 사회에서 인간은 “내가 이걸 할 줄 압니다. 저걸 할 줄 압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성경에서는 “이거 하느냐? 저거 하느냐? 재주가 뭐냐? 


탁구를 얼마나 잘 쳤느냐? 마라톤 몇 시간 뛰느냐?” 그것을 묻는 게 아니고, 죄와 관련해서 물어요. 네 죄에 대해서 어떤 입장에 있느냐를 묻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 나에게 주어진 죄는 걷어 낼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안 받게 되게 되면, 자기 기억 속에 죄라고 느낀 점만 죄라고 하고, 그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아마 죄 아니거나 안 그러면 중립의, 중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거나, 죄도 아니고 뭐 그럴 거라 생각했죠. 그러나 성령 받은 사도는, 아예 죄 속에 자기가 있기 때문에, 밥을 먹든 뭘 하든 간에, 헤엄쳐서 죄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그대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다녀갔던 이 속에, 새 언약 속에 이미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새 언약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자기가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나를 이 죄에서 건져내랴.” 건져낸다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천당 가는 게 아니고 죄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이 죄의 압박에서, 죄의 심해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해놓고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께 감사’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 대목 설명하는데 상당히 거기 좀 난해해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오후 7시42분에 했다 칩시다. 42분에. 그리고 7시43분에 “기뻐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러면 7시44분에 어떤 고백이 나올까요? 어떤 고백? “기뻐하리로다!” 해놓고 7시44분, 1분 지나서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또 이렇게 해야 돼요? 그리고 45분에는 “기뻐하리로다!” 이런 미친 인간이. 그걸 조울증이라고 하지요. 슬펐다가, 기뻐했다가. 새벽기도 하고 나오는 것 보면 그 조울증 같은 현상들 있어요. 


들어갈 때는 짜증나고, 나올 때는 찬송하고 나오면서, 막 새벽에 나와서 갑자기 “예수 믿으세요!” 하다가 두 시간도 안 지나서 차 운전하면서 막 욕하고, 또 화내고. 그런 설명이 어려운 겁니다. 왜 인간 세상에서는 선형적이라, 선형이라는 것은 단선적, 순서로 되어 있어요. 시간이 순서로 되어 있다고요. 7시42분, 43분, 44분 이렇게 되는 겁니다. 44분되기 이전에 43분이 있어야 돼야 돼요. 


그러나 묵시 세계에서는, 이게 동그라미입니다. 선이 아니라 동그라미이기 때문에, 거기는 뭐냐 하면은, 녹아져 있는, 녹아져 있는 사건의 다발. 녹아져 있는 사건의 단편들의 다발, 집합.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이 동그라미 안에서 무수한 사건이 대기 되어 있습니다.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말씀 사건이에요. 


말씀 사건이 대기되어 있으면 오늘은 이쪽 구석에서 말씀이 나에게 사건을 유발하고, 그 다음에는 어디서 나오는지 이쪽 사건이 유발하고, 이쪽 사건이 유발해요. 어쨌든 간에 이 모든 것은 무슨 사건이다? 말씀들이 일으키는 사건인 겁니다. 아까 여자, 남자이야기 다시 할게요. 남편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러면 여자는 남편 안에 들어있지요? 우리 남편이 어떨 때는 술 먹고 들어와서 주사, 주사 놓은 거 말하는 게 아니죠. 개차반 같은 그런 짓을 할 경우도 있고, 어떨 때는 승진했다고 좋다고 자기가 전화해서 원피스 하나 백화점 옷, 시장 옷 말고, 백화점. 그것도 세일 기간 골라서 말고 정품 파는데 가서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래, 이 말은 뭔데, 7월15일 날 술 먹고 들어왔다. 7월 25일 날 원피스 사 입었다. 그러면 이렇게 돼버리면 뭐가 끊어지냐면 동질성이 깨져버려요. 어느 남편이 진짜 내 남편인지 헷갈리게 되어 있다고요. 어느 남편이. 술 먹고 깡패 짓 하다가 갑자기 임금 노릇하다가, 갑자기 또 술 먹고 와서 또 깡패 짓 하는 게 아니고, 또 엉엉 울면서 “너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 많지? 


나 네가 보기 부끄럽다.” 해서 어느 게 진심인지 알 수가 없어요. 저게 또 몇 시간 갈지, 해놓고 그 다음날 와서 또 “너 나한테 어제 회개했다고 너 날 얕잡아 보지?” 뭐 이렇게 하면 정신병자 수준이지만, 도대체 회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행패를 자기 아내한테 행패를 하고 이런 게 있죠. 인간은 기분으로 사니까. 동질성이 깨지잖아요. 


그런데 이게 사건이 있으면, 똑같은 분이 일으킨 사건이 되는 겁니다. 똑같은 분이 일으킨 사건. 그러니 이 사건은 뭐냐?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로 더욱 더 죄인을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같은 말씀으로 우리로 하여금 성도인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주의 백성인 것을!” 그러면 그것을 같이 보자 이 말이죠. 


같이 보게 되면, 곰발바닥 그다음에 소발바닥, 곰발바닥, 소발바닥 이렇게 들어 갈 때는 “곤고한” 뒤집어서 나올 때는 뭡니까? 소발바닥 “찬송하리로다!” 뭔가 사람이 가만히 있다고 죄가 느껴지는 게 아니에요.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때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나는 인간도 아니야, 나는 신자도 아니야.” 라고 하는 그 계기를 통해서 “이야~ 내가 잘나서 신자라는 생각을 또다시 그런 잘못된 생각을 했구나. 


내가 어떤 실수, 어떤 죄를 지었는가와 상관없이, 구원은 나하고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대신 처리하신 분과 구원이 관련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내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는 느낌을 내가 또다시 받는 그런 오류를 범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죄를 지었다 그래서 취소되는 게 아닌데, 


뭐 구원 최소까지는 아니지만, 이번 주 계약 건이 있는데 일이 잘 안될 것 같은, 저주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징계 받을 것 같은 느낌. 그런 것도 우리의 착각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서 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함이지, 우리를 갈구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를 갈군 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옛 본성이 남아서 그래요. 


“부모한테 효도 하고 있으니까, 뭐, 이번 일 년은, 내 아들 고3인데, 좋은 점수, 좋은 점수” 왜? 내가 부모 효도하니까! “효도하면 복을 받으리라” 잠언서에 나오잖아요. “복 주시겠지? 아들, 내 아들 좋은 대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거는 니 생각이고, 그거는 니 생각이에요. 잠언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들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적당하게 했다는 겁니다. 적절하게. 그 일이 적절하게 일어난다. 참, 이거는 믿어야 될 문제에요. 이거는 뭐 따질 문제가 아니고, 합력하여 로마서 8장에 합력하여 뭘 이룬다? 선한 일 이룬다 했어요. 주님이 좋으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은 거예요. 


엎어져서 안경 깨도, 주께서 선하게 깨주신 거예요. 좀 이해가 안 되겠지만. 자, 이해 안 되는걸 오늘 본문 더 진도 나가봅시다. 여기에 35절 봅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되어 있지요. 자, 너희가, 너희의 동질성이 깨집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너희 할 때는 누구를 이야기 하느냐? 


지금 한 제자가 떠났으니까 열한 제자로 봅시다. 자, 열한 제자를 뭐라고 합니까? ‘너희’라고 했지요? 너희라고 한 거지요? 그런데 이 너희가, 너희는 예수님이 성령을 줄 때 너희가 돼버리면, 성령은 십자가를 지고 난 뒤에 오기 때문에, 십자가 자체가 인간과 주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동질성의 단절을 성령이 와서 이걸 뛰어 넘었다 이 말입니다. 성령이 와서, 십자가의 영이니까. 옛사람은 십자가에 죽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만 나오는 현상이 뭐냐? 성령의 열매잖아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갈라디아서 5장입니까? 5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성령의 열매, 육의 열매. 


성령의 열매 할 때 반드시 십자가가, 새 언약이, 십자가라는 새 언약이, 새 언약은 살과 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누명쓰고 죽었다는 그 사건. 그 사건이 생각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속에서 온유와 화평의 열매가 확 이렇게 분출되는 겁니다. 예수 믿고 언제 기쁘던가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뭐될 때? 


죄인인 것을 알 때, 이 행복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에요. 사랑은 결과고 원인은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그런데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딱히 근거가 없어요. 왜냐하면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죄인이기 때문에. 무조건, 무조건 죄인이기 때문에 북한이 핵을 준비하든 핵실험을 하든, 세월호 배가 무거워서 도로 깔아 앉든, 이게 내가 죄인인 것과 무슨 관계있어요? 


대선을 언제 치룹니까? 뭐 5월 달입니까? 대선을 하든 말든, 누가 되든, 안철수가 되든, 문재인이 되든, 누가 되든, 누가 되든 나는 뭐다? 죄인이잖아요. 만약에 내가 죄인 안 되면, 내가 표 찍은 사람이 꼭 돼야 된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만의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불만의 가능성.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적을 갖지 마세요.” 라는 말을 한 거예요. 죄인 주제에 목적이라는 게 필요가 없어요. 목적 없으면 중보기도 안할 거 아닙니까? 목적을 갖지 마세요. 목적을 갖지 마시란 말은 오늘 본문대로 한다면 “당신은 필히 목적을 가지고 살 겁니다.” 라는 뜻이에요. 


내가 예언한다. “목적을 갖지 마세요.” 라고 하면 반드시 목적을 갖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이게 자기 목적이 뜻대로 안될 때 오는, 그 불만과 원망이 터져 나오면서 “내가 이미, 목적이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구나.” 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하나님의 새 계명, 사랑이 우리 몸을 통해서 마구 분출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열두 제자의 대표자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36절에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이렇게 했지요.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나라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 단절이 아니고 연결되어 있다고 본거에요. 연결되어 있다고 봤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합니까? 


떠밀어 버리죠? “이게 어디를 들어가?” “방금 어디 들어간다고 했어요?” “네가 지금 어디를 들어가? 어디를 넘보냐?” 이 말이죠.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제가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렇게 나오죠. “목숨을 버리고 따라가겠나이다.” 이 주제 파악을 못해가지고, 이거는 베드로가 따라갈 정도가 아니고요. 베드로는 배신합니다. 


지금 이 이야기 할 때 자기가 배신 할 줄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어요.) 진짜 오랜만이 아니지만, 정답을 말씀하셨네요. 오랜만은 빼고. 진짜! 진짜! 몰랐어요! 지금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진짜 오늘 제목을 ‘몰랐어요.’라고 하고 싶은데, 자, 인생이 있습니다. 인생을 둥글다 보고, 어떤 사람이 45세까지 살았어요. 죄 압니까? 모릅니까? 죄? 


지금, 자기가 아는 것은 아까 이야기 했지만, 자기, 인간이 안다는 것은 자기가 기억 되는 것 안에서만 돼요. 기억. 기억은 뭐냐? 자기가 기억된 사건의 다발이고, 사건의 집합이에요. 내가 기억하고 싶은 거, 기억 되는 것 안에서만 뭐냐 하면은, 선과 악을 논하게 됩니다. “나는 얼추, 별로 나쁘게 산 기억이 없어.” 


기억이 없다는 거예요. 나쁘게 산 기억이 없고 “그다지 나쁘게 산적은 없고 그다음 그다지 착한일도 없다.” 그럼 그것은 뭘 놓친 거예요? 자기가 기억난 것은, 이게 사실 10%도, 10%도 안 되죠? 0.1%된다고 칩시다. 안되지만 1%된다면 99%는 자기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지요. 여기에 대해서 자기가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까? 못 내리죠? 


베드로가 지금 이런 입장이에요. 자기는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 하는 거예요. 그것도 어떤 걸 기억하고 싶어요? 좋은 ,거 좋은 거. 이게 경제학에서 뭐냐? ‘단골의 심정’ ‘단골의 법칙’이에요. 그 가게가 어지간히 나쁘지 않는 한, 한번 간 가게에 갑니다. 인간은. 진짜, 우산 가지고 패지 않는 한, 그리고 막 갔는데 5년 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가 있다. 그런 일이 없는 한 어지간하면 갑니다. 


그러니깐 왔을 때 잡아야 돼요. 왔을 때 잡아야 되지 “니 아니면 손님 없는 줄 아냐?” 이래 가지고는 장사 안 됩니다. 교회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만. 사람은 어지간히 하면 이미 기억에 딱 박히기 때문에, 그게 제2의 자아가 돼요. 자기 인생에서 내가 어디를 다녀갔다. 어느 것을 했다. 그것을 해서 “그게 나일거야”라고 여기거든요. 


그러면 어떤 미장원을 갔는데, 미장원에 열 번을 갔는데, 아홉 번 마음에 안 드는데 한번 마음에 들게 했다. 그러면 그 미장원에 갑니다. 한번을 기억해서. 사람 바꾼다는 것은 좀 귀찮거든요. 물론, 또 성격상 돌아보는 성격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드물고, 이것을 이렇게 문장으로 고치면 쉽습니다. 


뭡니까? ‘늘 하던 대로 쭉- 늘 살던 대로 쭉-’ 왜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고, 교회를 안 나가는 줄 알아요? 몇 번 나와 봤어요. 그런데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있거든요, 뉴턴의. “아이고, 그냥 살던 대로 살지 뭐” 이겁니다. 우리 사장님도 여기 직원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도 했을 거예요. 직원들 꿈적도 안합니다. 


왠지 알아요? 관성이 더 세요. 늘 살던 대로, 하던 대로 하는 거, 하던 대로. 그래서 선지자나 사도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은, 노이즈noise 노이즈는 우리말로 잡음이죠? 잡음을 걸러내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 믿잖아요. 그러면 예수 믿고 난 순간부터 갑자기 뭐 “새사람 되었다!” 뭐 이렇게 유난떨어도, 또 이렇게 거의 일요일에 유난떨어도 월요일에 다 잊어버립니다. 


늘 하던 대로 가요. 늘 하던 대로, 그 다음에 뭐? 늘 살던 대로 가요. 그러면 거기에 뭐가 끼겠습니까? 잡음이 낀다니까요. 그 잡음을 뜯어내는 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네가 뭘 보려고 광야에 나왔더냐?” 했잖아요. 그때 예수님이 마태복음11장에서 “네가 뭘 보려고 광야에 나왔더냐?” 할 적에, 광야는 뜻이 뭐냐 하면 ‘없음’이에요. 


왜? 선지자가 광야에 왜 나갑니까? 현재 있는 말은, 늘 하던 대로 쭉, 늘 살던 대로 쭉 이에요. 윤리학자들은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것을 ‘관행’이라고 하고, 법학자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관습’이라고 하고, 영국에서는 뒤에다 뭘 붙여요. ‘관습법’ 이게 문자로 책에 있는 법이 되었어요. 옛날에는 영국은 관습법밖에 없었어요. 관습법. 


“이런 형태는 형이 얼마 나와?” “가만있어보자, 판례 보자 판례. 그때 3년 때렸네. 아, 3년.” 딱 3년. 왜? 늘 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이게 예수님 때, 유대인 때 뭐라 했나? 전통이라, 전통. 디모데전서에도 사도바울이 이걸 전통이라 했어요. 전통과 관습에 의해서 한 거예요. 전통과 관습은 뭐가 우대되느냐 하면은 역사가 우대 돼요. 


그러면 법을, 정의라는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왔나? 정의라 하는 것은 역사에서 나온 거예요. 역사에서.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모른다는 거. 설민석이라는 역사 강사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사람이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는 거. 했던 것을 반복 하지 말고, 잘한 것은 장려해야 되고, 못한 것은 주의하면서, 보다 더, 더 진리에 가까운 그러한 원칙을 쥐고 민족의 국가 역사로 일어나자! 


이게 역사학자들의 모토입니다. 역사학자들이 그것 때문에 역사를 자기가 하면서 정당성을 가져요. 그런데 역사학자만 그런 게 아니에요. 어디서 하냐? 신학에서 하죠. 신학에서. 신학에서 뭐냐? 그것을 가지고 무슨 신학이라 하면,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그 핵심을 뭐냐 하면은 청교도에요. 청교도. 


청교도 하면 대학교 서클, 기독교 서클의 핵심이 전부 청교도들입니다. 청교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자기 학대에요. 자기 학대. 자기 학대를 하는 이유는, 욕심을 이기지 못하면 주께서 나를 들어 사용을 안 한다는 겁니다. “주께서 들어 쓰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니도 양심이 있지, 니가, 그래 술 담배 하면서 들어 쓰기는 뭐 바짝 들어가지고 엎어지고 그래 쓸까? 


니 꼬라지 니가 알잖아. 니라면 니 쓰겠냐?” “미안합니다!” “그렇다면 정신 차려야 될 거 아니냐?” “네! 알겠습니다!” 술 끊고, 담배 끊고 “들어 쓰시옵소서!” “니 하루에 기도 얼마나 하는데? 성경은 몇 장 보는데?” “죄송합니다!” “제대로 하고 와! 제대로!” “예!!” 자기가 자기에게 훈계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훈계해서 다듬어요. 이렇게. 


“내가, 이만하면 내가 봐도 흠잡을 데 없이 다듬었습니다.” 이것을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걸 두 자로 뭐라고 했어요? 기억이지요? 어떤 기억? 나쁜 기억 말고, 좋은 기억. 좋은 기억을 붙들기 위해, 붙들다 보니까 뭐가 안 되느냐 하면은, 죄라는 것이, 점점 더 죄의 폭이, 죄의 영역이 얼마 남지를 않았어요. 


왜? 죄 지은 기억은, 죄다 그때그때마다 전부다 회개를 해가지고 처리를 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점점 더 뭐의 양은 줄어가고? 죄 짓는 기억은 자꾸 줄어들고, 회개는 늘어나고, 그 다음에 또 회개하려고 하니까, 이거는 그 찾아내는데 힘들어. 죄 지은 거 찾아내려니까 힘들어 미치겠어. 죄지은 게 있어야 회개하죠? 


그런데 또 선교단체에서는 성경 들이대면서 니가 이런 응답받지 못한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니가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가 뭐라고 했어요? 시편에 보면, 죄를 안고 기도하니까 응답이 없다는 거예요. 시편에 보면. 그러면 응답받으려면 뭐 하면 됩니까? 죄를 안 짓든지, 지은 죄는 제 때에 회개해서 다시 십자가 피 묻혀가지고 처리하든지, 그러면 십자가 피 묻어 처리 하겠다. 회개하겠다는 그게 목적이 있지요? 


그 목적이 뭡니까? 내가 요구한대로 족족 응답받는 그런 기도의 그 순간을 고대하면서 사전 정지 작업을 나서게 된다는 이 말이죠. 평소에 늘 하던 이야기 하니까 뭐 고개를 끄떡이지도 않지요 이젠. 주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너는 지금 너의 동질성을 그대로 유지 하고 있으니까” 주께서는 밀쳐버립니다. 


“베드로야 너는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네 기억 속에는 내가 줄 나라는 있다? 없다? 없다. “너는 천국을 몰라. 너는 나의 세계를 몰라. 너는 상상하는 천국 외에는 몰라. 네가 상상하는 세계는 너의 있음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부터 그것을 안고 “나는 천국 사람 맞고”를 안고 키워왔던 상상의 천국은 그것은 베드로 나라이지, 예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는 어떤 경험을 해야 됩니까? 못 들어간다는 경험을 해야 돼요. 나라는 인간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데, 고맙게도 주께서는 상황을, 베드로로 하여금 소극적으로 도망친 게 아니고 적극적으로 배신을 하게 하는 사건을 주십니다. 그래야 누명씀이 되니까.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완전히 느끼게 만들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주님이 아니면 누가 나를 알겠습니까? 우리는 나를 항상 미화하고, 꾸미고, 괜찮은 존재로, 이렇게 남한테 내세울 때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내세우고 다듬는 일을 해요. 그것이 아까 무슨 교라고 했습니까? 청교도. 청교도 뜻은 파랗다는 뜻이 아니고, 순수하다는 퓨리탄puritan이에요. 순수. 순수하다에요.  


참, 순수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 사람들은 순수 몰라요. 그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순수한 인간 되는 게 아니고, 순수하게 자기의 비전이 달성되는 자동 기계화 되는 걸 선호합니다. 기도만 했다하면 응답. 했다하면 응답. 그런 순수함만 요구하고 있어요.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다 이루어지는 그러한 응답받는 기계? 기도 기계. 그걸 그들은 자기들의 순수라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까 시편 이야기는, 너희들이 응답 못 받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다? 죄 지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응답 못 받았다에 정답은 뭐겠어요? 이 세상에 모든 기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 뜻이에요. 시편에 ‘너’라는 것은 누굽니까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다윗은 그냥 마이크에 불과합니다. 마이크, 핀 마이크, 여기 핀 마이크가 다윗이에요. 이름 쓸까? 다윗. 마이크에 불과하고 끈은 뒤에 끈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한테 탯줄로 연결되어 있어요.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했잖아요. 뭔가 과일을 따먹는다는 말은 딱, 똑딱 하고 따먹을 때, 과일만 따먹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에 연결되어 있습니까? 


그 가지에 연결 되어 있지요. 가지에. 그래서 사람은 누구를 대할 때, 그 사람 뒤를 안보고 그 사람만 따먹으면 된다 하지만, 그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이 뭐냐 하면은, 과부나 고아나 약한 자를 함부로 할 때, 사람들은 “아휴, 저거 한방에!” 하지만 그 뒤에 누가 있습니까? 주께서 유발해서 가난하게 되었고, 주께서 유발해서 고아와 과부되게 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긴 자는 누구한테 불쌍히 여김 받는다? 여호와께 불쌍히 여김 받는다. 그것을 가지고 출애굽기에서는 뭐냐? “나한테 돈을 꾸이는 것이다. 나한테 돈을 빌려 주는 것이다. 내가 돈 갚아줄게. 그들에게 해준 것은 나한테 돈을 빌려주는 거니까 내가 필히 갚아 주리라 줄 것이다.” 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출애굽을 유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주변에 고와와 과부들이 생기도록 조치를 합니다. 전쟁을 통해서. 


우리 같으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복 받은 나라니까, 모든 나라가 한 결 같이 다 부자 되기를 원하겠죠? 실상 그게 아니고 고와와 과부와 나그네가 많이 생겨나게 한 이유는 출애굽 당시에 네가 하나님 보시기에 고아였고, 과부였고, 나그네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고와와 과부가 누구냐? 그때는 고와와 과부가 소용이 없어요. 누가 되느냐? 


하늘나라의 표상을 쥐고 있는 사람이 등장해야 돼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선지자의 특징은 이게 계층화 되어 있어요. 입체적으로 현실을 보는 겁니다. 너희들은 땅에 속하고, 나는 천상회의를 보고 왔고, 따라서 선지자의 특징은 예수님 같아요. 주님을 아시는 분이 섞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안에 깊숙이 들어와 버려요. 


들어와 버리면, 이 사람은 계층이기 때문에, 선지자의 말을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들어요.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예요. 일부러. 네?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예요. 누굽니까? 스데반이 성령 충만 받고 난 뒤에 죽었잖아요. 성령 충만이라 하는 것은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나오지요? 성령으로 충만 받는 게 어떤 것이냐? 


고난의 영이 함께 있으면 성령 충만 받는 거예요. 고난의 영이. 뜨겁다는 것은, 그건 난로 옆에 있어서 뜨거워요. 뜨거운 응답받으려고 하면, 난로를 동서남북으로 펴놓으면, 응답이 진짜, 해보세요. 난로 옆에서 기도해 보세요. 갑자기 기도한지 5분 안 되서 뜨겁지요. 진짜입니다. 


여기 베드로전서 4장 13절에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4:13-14) 


네가 착하다는 말이 아니고, 너는 누구 안에 있다? 고난 받는 예수님 안에 신부로서 들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고 욕할 때, 너보고 미워하고 욕한다 하지 말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미워서 거기에 속해 있는 신부, 너희보고 미워지도록 세상을 나는 그런 식으로 편승을 해놓겠다는 거예요. 편승을. 


그래서 일부러도 고난 받는다고 또 뭐 남한테 “예수 믿으세요!” 새벽에, 새벽 4시에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일부로 욕 얻어먹지 마시고요. 원래 열심 있는 목사님들은 아침에 내복, 속옷 바람으로 가서 “예수 믿으세요!” 고함지르는 사람 있어요. 있다니까. 있어요. 네, 전에 목사 할 때 그랬어요. 하도 영혼들이 불쌍해서, 집에 있을 시간에, 새벽에 들어갔다고요. 그래도 저는 양심의 가책을 못 느꼈어요. 왜? 


그 사람의 영혼이 불쌍해서였지 뭐,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게 영혼이 불쌍한 게 아니고, 그래 가지고 주께서 도와주시면 교인 수 늘어나겠네. 그런 것이 사실은, 나중에 슬그머니 배경으로 올라오더라 이 말이죠. 진짜 그때는 몰랐어요. 순수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함이 지나고 보니까 노림수가 있었어요. 아니 내가 나를 몰랐던 거예요. 


어느 정도의 탐욕인지를, 그러니까 나는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내가 구원을 못 받아야 인자의 영광이 유지가 돼요. 내가 만약에 동업자가 되고 협조자가 돼버리면, 주님의 영광에 인간의 영광이 섞이게 되면, 이거는 순수하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 보고 “저리가라. 저리가!” 서로 사랑하라가 되려면, 그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서로 사랑하면 일이 되는 게 아니고 빠져 있어야 돼요. 


우리는 사랑에서 완전히, 사랑 근처도 안가야 돼요. 주님 혼자 다 사랑을 이루어서 우리한테 그냥 택배로, 그냥 아무것도 없이 그냥 줘야 돼요. 받는 입장에서는 구원의, 구원에는 이유가 없어요. 이번에 책이 나올 겁니다. ‘복음의 생산’이라는 책이 나오는데, 그 머리말에, 머리말 뭐 시 비슷한 걸 제가 쓰거든요. 


그 마지막 대목이 뭐냐 하면은, ‘구원에는 이유가 없다.’ 이게 글 마지막 대목이에요. 악마는 인간의 자궁이다. 부터 해서 거기서 혓바닥이 나온다. 이런 무서운 게 나와요. 마지막에 보면 구원은 이유가 없어요. 중간에 보면 뭐냐 하면은, 우리는 재수 없는 곳을 찾아가야 된다. 


지금 모든 교회가, 왜 교회 가느냐? 재수 좋기 위해서 가잖아요. 우리는 반대로 가야 돼요. 재수 없는 곳에 가야 돼요. 왜? 그 입을 열지 아니한, 채찍 소리가 유일하게 거기에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재수 좋게 하기 위해서 교회 나가는데, 성도는 재수 없는 곳을 찾아가야 돼요. 재수 없는 곳을. 그러면 기도의 응답은 뭡니까? 결국은 뭘 응답받아야 돼요? 


재수 없는 것을 응답받아야 돼요. 재수 없는 걸. 이걸 쉽게 말해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네.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왜? 그래야 우리는 응답 받을 자격이 안 된다는 죄인인 것을 또다시 아는 거예요. 그러면 재수 없는데 이정도로 산다. 이것은 은혜에요. 하늘의 선물이단 말이에요. 선물. 내가 생각지도 않은 것을 덤으로 주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다가 내 기도의 의미를 딱 박아 넣어버려. “내가 기도했기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했기 때문에 이정도 건졌다.” 이렇게 돼버리면 주께서는 삐져가지고, “나, 나, 그 방식 안하고 딴 방식” 또 다른 사건이, 말씀 사건이 또 터져 버립니다. 하여튼 잡았다! 싶으면 뿌리치고, 삐지면 찾아오고. 이건 뭐 술래잡기도 아니고요. 


“내 사랑 어딨나?” 하면 “여기 있습니다.” 하면 삐지고 가버리고 “내 사랑 어딨나?” “안 놀아!” 하면 “에이고! 삐지기는!” 또 찾아오고.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긍휼로 줘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협조하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협조하는 주의 일은 없어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36절 봅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쿠오바디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6-37) 


이 베드로의 고백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게 왜 감사한지 압니까? 베드로는 노리는 게 있어요. 목적이 있어요. 베드로는 쉽게 말해서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었습니다. 노리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예수 덕분에 예수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목적. 그 목적이 자기는 죄라는 생각을 조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님은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말씀을 퍼부었는데, 베드로는 오해하기를 살아있는 나에게 약속으로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기가 주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지, 주님과 헤어질 몸체를 가지고 지금 주와 대화 하고 있다는 생각을 베드로는 조금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런 착각이, 오늘날 우리가 매일같이 하고 있는 착각을 베드로가 대신해주니 얼마나 감사해요. 오늘 제목 정했습니다. ‘누명’ 네, 누명 쓴 거예요. 누명입니다. 예수님이 누명 쓴 거예요. 죄도 모르면서 죄 아닌 척 의 라고 착각하는 그 죄를 주께서는 죄다 십자가에 누명을 쓴 겁니다. 


주님은 아버지하고 이야기하는데, 자꾸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목을 잡고 그 드레스를 잡아당기면서 자기하고 놀자는 거예요. “주님, 나하고 놀아 줘잉~ 나 얼마나 착한지 주께서 아시죠? 제 목숨 바치겠습니다.” 이게 논다는 거예요. “놔라 이거” “주님 같이 가요~” “놔! 니는, 니가 상종할 나라가 아니야!” 


요즘 젊은 사람들이, 선교단체 애들이 참 이런 걸 들어야 돼요. 들어야 돼요. 그래야 선교단체 앵벌이 안하고, 앵벌이 안하고 있지. 기도 앵벌이, 헌금 앵벌이, 헌신 앵벌이. 이제 38절 봅시다.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방금 버리겠다고 했잖아요. 


안 믿습니다.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런데 이 말은 사실 뒤에 뭔가 들어가야 돼요. “네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느냐?” 라고 할 때 “반드시 너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게 돼있다.” 그런데 그 전에 단절이 있어요. 단절. 그전에 단절이 있어야 돼요. 베드로는 “네가 생각한 너의 주체로 인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나는 안 받는다.” 


하지만 나의 주체가, 새 언약의 주체가 나한테 삽입이 돼버리면, 또는 성령에 의해서 베드로가 예수 안에 들어와 버리면 “네가 싫더라도, 좋든 싫든 상관없이, 필히 너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게 돼있다. 네가 한 말이지만 일단 내가 거두어 가버리면” 네가 한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린 역할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실없이 하는 모든 기도가 하나같이 응답이 돼요. 목사님 왜 딴소리 합니까? 딴소리 하는 게 아니고, 맞아요. 우리가 실없이 하는, 실없이 하니까 갑자기 또 실없이 하는 농담이 생각나는데, 실없이 하는 모든 것이, 이게 주체가 주님으로 바뀌어 버리면 그게 응답이 돼버립니다. 


그때, 내가 내뱉은 말이 아니고, 주님께서 무심코 내뱉도록 조종을 해놓고, 응답은 나한테 맡긴 게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응답을 함으로 말미암아, 협조하는 차원이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께서 알아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작업에 차질이 없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오늘 강의가 끝나고 난 뒤에, 그러면 결론이 뭡니까? 


막 사세요예요. 막 사세요! 결국은 이거 하나뿐이에요. 어떤 행동, 발걸음도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난 일이 없잖아요. 다 주님께서 다 허락하셨단 말이에요. 허락하셨어. 마귀에 들려 한 짓인지, 뭘 하든지 간에, 허락하신 그것을 누가 이루신다? 주께서 다, 결국은 다 이루어 내십니다. 그러니까 잘했다는 말입니까? 못했다는 말입니까? 못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는 죽어 마땅한 게 되지요. 


죽어 마땅한 게. 주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부터, 우리한테, 우리의 몫으로 남겨 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께서 알아서 다 처리했습니다. 이제 끝으로, 마지막에 닭 울기 전에,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게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닭 운다는 대목이, 공관복음에 나오잖아요. 요한복음은 좀 달라요. 


닭 울기 전에. 닭 울기 전에 라고 할 때, 다른데에서는 베드로하고 누구하고 비교 하냐면, 그 베드로를 부끄럽게 말하기 위해서 눈치코치 없는 소녀가 등장하지요? 화롯불 앞에 있는 애. 싸가지 없는 아가씨. “아저씨 내가 봤는데? 쟤하고 한편이지요?” 


여기서도, 요한복음에도, 요한복음 18장 17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마태, 마가 이런 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썼어요. 예수님의 고난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제자들을 봐라! 싹, 입 닦고 배신하잖아. 제자들은 하여튼 이런 인간이야.” 이렇게 강조하지만 요한복음에선 그게 “닭 울기 전에” 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배신하더라도 걱정 하지 마!” 라는 뜻이에요. 그게 마태, 마가, 누가 지나고 난 뒤에 요한복음이 쓰여 졌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다 알아요. 하지만 베드로가 그때 했던 것을, 자기가 크게 실수 한 걸로 보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가 있어요. 뭐냐 하면은, 마지막에 보면 “베드로야, 너는 다시 실수 하면 안 돼. 이렇게 묻는 게 아니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누가 더 세냐 말이에요. “니 배신이 더 세냐? 아니면 너에 대한 사랑이 더 세냐?” 이 말이죠. 


그게 요한복음, 우리가 했지요? 13장에 했잖아요. 끝까지 사랑한다고요. 이게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지나고 난 뒤에 했기 때문에 이미 알아요. “아무리 니가 배신 때리고, 아무리 나를, 무슨 욕을 하더라도 그거, 그거 신경 쓰지 마라. 이미 내가 너한테 그렇게 허락 한 거다.” 말이죠. “아니, 그래야만 돼. 그래야만 돼. 니가 그걸 보고 후회 하지 마!” 그래서 베드로가 그걸 알아요.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미쳤어, 미쳤어, 내 잘못이야!” 여러분! “우리 잘못이야” 라는 말이 성립이 안돼요. 우리는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우린 잘못이에요. 새삼스럽게 잘못이라고 할 게 없어요. 우리 요한복음 식으로 삽시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것도 주께서 계획 잡힌 대로, 적당하게, 적절하게 한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는 그걸 몰랐을 뿐인데, 그것도 왜 몰랐느냐고 닦달내시는 분도 아니고, 끝까지 사랑한다는 거. 다시 말해서 “너는 네 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식으로 구원할 날이 올 것이다.”는 그 사실을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주님 잘 믿어 보려고 애쓰는 것이, 이게 타고난 죄라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얼마나 철이 없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잘잘못만 따졌습니다. 상관없는데, 구원과 전혀 무관한데, 마귀에 속해서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제는 주님 앞에서 그것마저 주 앞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