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2. 24) 36-1
마가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 2절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묻는 질문은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항상 예수님에 먼저 질문합니다. 유대의 모든 사상체계를 자신들이 평정했고, 그 사상체계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질서가 잡혔습니다. 국가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사고방식이 일치될 때 나라가 안정을 취하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생각을 하나로 만들어 통합시켜야 각자가 1로 포섭이 됩니다. 이것이 질서입니다. 기계의 질서는 자동화시키면 되는데, 인간은 사고방식이 하나가 될 수는 없지만 하나를 바라보면 됩니다. 질서가 하나를 추구할 때에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에 하나가 되면 그 공동체는 질서를 잡을 수가 있습니다.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을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출애굽 당시에 애굽은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였습니다. 큰 나라라는 말은 숫자가 많다는 뜻이고, 이 나라가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요. 질서가 있는 이유는 왕이 말하는 선과 악에 온 국민이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선과 악은 무엇일까요? 성경에 보면 바로 왕의 존재입니다.
모든 질서는 왕의 입에서 나옵니다. 왕의 말이 법이 되고, 그 법을 위반하면 악, 법을 지키면 선이 됩니다. 애굽 나라는 바로 왕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나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애굽의 선과 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애굽 나라에 많은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히브리인들은 빠져나왔는데 다른 민족은 왜 못 빠져나왔지요? 빠져나오려고 하면 바로 왕이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바로 왕의 말을 듣지 않고 탈출하는 민족이 있다면 바로 왕이 질서 유지를 위해서 군대를 보내서 처단하겠지요? 애굽에서는 이것을 ‘정의’라고 합니다.
애굽 나라에서 탈출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 나라의 정의를 위해서 군대가 와서 처단합니다. 그동안 그 사람들이 아무소리 못하고 그 질서에 종속된 이유가 뭡니까? 바로 왕에게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 힘이 무서워서 따른 것입니다. 히브리인들도 힘이 무서워서 빠져나올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출애굽을 누가 제안했습니까? 이것은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이 아니고 바깥에서 투입된 모세입니다. 그러면 출애굽이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뭡니까? ‘네 힘으로 네가 사는 세상에서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이란 없는 것이고,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구원이 아닌 행복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할 때, 구원에 대해 설교하는 것과 행복에 대해 설교하는 것 중 어느 때가 잠이 덜 올까요? 구원을 설교하는 목사는, ‘아내나 자식이나 소유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할 것이고, 행복을 설교하는 목사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봉사하면 자자손손이 복을 받습니다.’라고 하겠지요? 어느 목사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겠느냐는 말입니다. 당연히 행복 쪽이겠지요.
이런 교회는 결국 구원되는 단체가 아니지요. 이 세상과 결탁해서 사는 곳이지 주님 가신 길을 가고자 하는 단체가 아니겠지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1)입니다. 이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겠지요. 왜냐? 모든 공동체가 하나를 추구하니까 질서가 잡힌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 어떤 사람이 복음을 외치면 그들 입장에서는 복음이 악이 되는 겁니다. 비록 그곳이 교회라 할지라도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노라!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이렇게 나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찾아와서 이야기할 때, 하나(1)가 뭡니까? 유대 나라에는 왕이 없어요. 그 왕의 자리에 법이 있어요. 그 법이 뭐냐 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이 왕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율법을 세 부류의 전문가들이 담당했는데,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입니다. 이 세 분류가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선과 악을 규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에 대해서 유대 공동체가 지금 동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당신은 우리 편이야, 우리 편 아니야?’라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하나(1)의 가치관, 율법을 지키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다. 여기에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를 묻는 겁니다.
그리고 10절 이하에서 묻는 질문은, 예수님 당신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 점검 차원에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점검 차원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경우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한국 사회는 동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의 동질성은 율법이죠. 애굽 사회는 왕이 있지만 유대 사회는 왕이 없고 율법이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의 해석입니다. 율법의 해석이 유대 사회를 동질화 한 거예요. 사회의 해석과 다른 사람은 악인이 되고, 같은 해석을 하는 사람은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건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언급했어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은 서기관, 바리새인을 통해서 유대 사회가 규정한 거예요. 율법으로 동일화, 동질화가 되어 정신적으로 하나가 된 사회라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가 만나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적용을 시키려면 유대 사회의 동일성과 오늘날 한국 사회의 동일성을 연결시켜줘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민주사회이기에 각자의 개성이 있습니다.’ 라고 하지 마세요. 하나로 일치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돈입니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금 우리는 마가복음 10장과 연결을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저쪽은 율법의 동질사회에요. 우리는 돈의 동질사회입니다.
돈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없어요. 교회, 직장, 가정, 학교 그 어느 곳도 전부 돈의 동질화로 되어 있습니다. 돈을 매개로 하면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합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그 바탕에 돈이 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돈을 바라면서 믿어요.
돈의 동질성과 율법의 동질성이 안 맞으니까 이걸 이해하려면 중간에 무엇을 삽입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마가복음 10장은 의미가 없어요. 10장 초반 내용이 뭔가 하면, 아내와 헤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아내와 헤어지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는 여유 자금을 주시겠습니까?’ 이것이 반드시 따라붙게 되어 있어요.
말씀에 순종했는데 사업이 망했다면 순종할 마음이 안 생깁니다. 아내와 헤어지지 말라고 해서 안 헤어졌는데 ‘아내가 계속 사치하고, 바람피울 때 그래도 헤어지지 말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전혀 순종할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 말씀은, 배우자의 어떤 조건도 보지 말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아내가 바람피우고, 사치하고, 자식을 학대해도 헤어지지 말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끄집어낸 자체가 조건부로 순종하지 무조건 순종할 의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남편에게 “네가 더 나쁜 놈이다.”라고 하십니다. “순종할 마음도 없으면서 조건을 내걸고 순종하려 했지?” 라고 묻으면 그 남편은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중간에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제자들이죠.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지요? 유대 사회는 율법을 지켜야 돼요. 그러나 현대 사회는 돈이 최고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동행이 없어요. 왜냐? 율법을 내가 지키니까.
팀웍(teamwork)을 이뤄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잖아요. 율법을 내가 지킬 때 지킨 만큼 나의 의로 돌아오는 거예요. 즉 나의 모든 행동은 결국 나에게로 환원된다는 것입니다. 다 나 좋으라고 하는 행동입니다. 이웃을 사랑해도 결국 나를 위해서 한 일입니다. 현대인들도 교회도 가고 성당도 가요. 무엇을 위해? 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나 홀로 행복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율법에 대해서 질문하니까 예수님 답변은 ‘혼자서는 행복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같이 삽니다. 왜 하나님이 성(性)을 하나로 만들지 않고 남,녀로 만들었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남자 신도 있고, 여자 신도 있어야 해요. 형상은 유사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원판이고 인간이 복사판이라면, 복사판에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기에 원판에도 남자 신이 있고 여자 신도 있어야 하잖아요. 안산홍 집단은 이런 논리로 어머니 하나님을 주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면 지킨 만큼 의가 마일리지처럼 쌓인다는 사고방식으로 나올 때 예수님은 1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2를 이야기하죠. 남자와 여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부부에 관해서만 2를 말씀한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율법에도 전부 2가 있는 것입니까?
모든 율법에 대한 예수님 해석은 단독으로 자기 의가 될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율법은 예수님 단독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만약 인간이 율법의 내막을 알고 율법을 지킨다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성을 믿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입니다. 로마서 1장 2절에서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약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법을 아들이 다 지킬 때 생긴 효과가 복음이에요. 그래서 이 복음이 성령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 관계성이 성령에 의해 확장되면 우리는 율법을 전혀 못 지켜도 이미 율법을 다 지킨 것으로 간주됩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의인이 되지요. 그런데 율법이 100개라면 그 중 99개를 지켰는데 1개를 못 지켰으면 저주를 받아요. 왜냐? 율법은 양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탈 없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귤이 완전한 원형이 아닌데도 둥글다고 말합니다. 귤이 시들어도 귤이고, 못생겨도 귤입니다. 그런데 만약 귤에 사과의 요소가 있다면 이것을 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귤이 아니죠. 복음은 일점일획이라고 복음 외에 다른 요소가 섞이면 안 됩니다. 복음은 아들이 혼자 다 이루었어요.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 수 없어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한 분을 예비하시고, 그 예비하신 분이 오셔서 약속을 다 지킴으로 율법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면 복음은 자동적으로 무엇을 배격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 외에는 전부 부정하는 성질을 갖고 있어요. 그리스도가 하신 일만 복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자기 구원 용도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유대인들 가운데 12명을 제자로 뽑았어요. 그럼 제자들이 알고 있는 율법은 어떤 것일까요? 그 당시 유대인이 율법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했어요.
귤이 많이 담겨있는 바구니에서 무작위로 하나를 뽑으면 귤이 잡힐 뿐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입니다. ‘네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택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앞으로 잘났다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뽑았기 때문에 뽑힌 너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말라는 겁니다.
단독으로 비교하면 안 돼요. 나는 구원 받을만해서 구원 받았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 받을만한 사람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말씀에 순종하고 신앙에 매진하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샘플이 뭡니까? 표본입니다. 샘플이란 말은 다른 사람과 같다는 뜻인가요, 다르다는 뜻인가요?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옥 가는 사람과 같아야 합니다. 이 논리에 문제 있습니까? 그래야 택함의 샘플이지요. 선택받은 샘플이잖아요. 잘나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선택되었다면 우리의 모델은 불신자여야 하지요. 왜 자꾸 믿는 사람 티를 내려고 합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스승이어야지요.
‘예수를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 이게 복음을 알게 된 자의 심정입니다. 제자들은 샘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누가 공격합니까? 바리새인, 사두개인, 유대인들 다 공격했지요. 그런데 이들이 공격할 때 어떻게 공격했습니까? 예수님을 저주했지요.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외면하고 저주했어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지요.
‘연애인 지망생 베트남 아가씨가 공항에서 뚱뚱한 남자(김철)에게 장난삼아 얼굴을 문질렀는데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라고 북한에서 주장할 때, 우리가 죽인 것이 아니고 외국 아가씨가 장난쳐서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었으니까 우리에게 책망을 묻지 말라고 하지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적인 부담이 적은 거예요. 거기에 제자들도 동조를 한 겁니다. 그것이 제자다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돈이라는 동일성을 갖고 있다고 했지요. 교회 충성하고, 선교회비 내고, 철야기도하고 이렇게 25년을 했는데, 의대 본과 4학년에 다니는 외동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하겠어요? 절대 아닙니다. “왜 돈의 동질성을 공격합니까?” 이렇게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원망할 때 그것이 바로 잠복되어 있던 자신의 본 모습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선택 받았다고 설교를 하니까 자신은 딴 사람으로 변한 줄 알았지요. 그런데 주님이 내 아들 죽이니까 옛 모습이 그대로 나오는 거예요. 자신의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 복음을 알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알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옛 모습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복음을 멋대로 해석해서 그래요. 실재로는 나온 적이 없어요. 처음 복음을 알 때고 언제고 자신에게서 나온 적이 없어요. 아들 죽었다고 하나님께 원망할 때,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제 원망 다했나?” 이것이 바로 구약 욥기의 내용입니다.
“다 했어? 원망할 것 더 끄집어내 봐.” 욥은 실컷 원망한 뒤에 “할 말 없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한 것은 뭡니까? 욥의 믿음은 욥이 소유할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믿음은 욥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데려가기 위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오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믿음 주신 분 안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요. 그것을 ‘예수 안, 그리스도 안, 십자가 안’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강의 한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기에 결국은 돈입니다. 나는 죽더라도 자녀에게 유산을 남겨주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부모의 도리를 다했다고 흐뭇해하지요. 유대사회는 율법입니다. 내가 구원 받을 만한 의를 확보하면 그것이 목적이고 행복이에요. 현대 사회는 돈이 최고고.
이 둘이 사실은 동일해요. 동행이 없지요. 결국은 혼자예요. 가까운 친구도 돈 떨어지면 다 떠납니다. 친구들이 찾아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돈 보고 오는 거예요. 동행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고 4층 건물을 지어 1층은 부모가 살고, 2층은 장남 가족이 살고, 3층은 차남 가족이, 4층은 딸 가족이 살았습니다. 과연 행복할까요? 1개월이 지나지 않아 다툼이 일어납니다. 6개월 지나면 떠나기 시작합니다. 같이 못 살아요.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이런 인간 세상에서 예수님은 12명(제자들)을 샘플로 부릅니다. 12제자의 특징은 뭔가? 다른 사람들은 홀로 살지만 12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했지요. 이 말씀의 뜻은, ‘너희가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어떤 짓을 해도 안 버려요. 저주를 하고 떠나도 안 버립니다. 왜 12제자를 이렇게 대우하는가 하면, 12제자는 이스라엘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가 예뻐서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 보면 자기 택한 백성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이 있어요.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12명을 택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축한 겁니다. 이 모두는 예수님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살펴봐야 할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동행하실 때의 율법 해석과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 해석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자기 의를 위한 율법 해석과 오늘날 돈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율법 해석은 다를까요, 같을까요? 같지요.
따라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려면 이쪽 해석, 저쪽 해석 둘 다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 해석이 돼요. 즉 예수님의 공생애를 따라서 해석해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경 해석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환경을 받았습니까, 핍박 받았습니까? 핍박 받았지요. 심지어는 제자들에게도 버림 받았어요.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들의 율법 해석은 결국 해석을 배척하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해석이 2절에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할 때, 왜 내어버리는 것부터 질문을 하지요? 결혼식에서 주례하는 사람이 신랑에게 질문합니다. “옆에 있는 신부를 내버릴 때 문서 써주고 버리겠습니까?” 이런 질문과 같아요. 왜 결혼식에서 헤어질 이야기부터 거론하느냔 말이지요.
유대인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먼저 했을까요? 이혼을 하더라도 율법은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부부가 마음이 맞지 않을 때는 힘들어서 갈라설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길 수는 없거든요. 즉 이혼은 했지만 천국은 가겠다는 심보지요. 왜냐? 자기를 위한 천국이니까요. 끝까지 자기는 손해 안 보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 이혼은 했지만 천국은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지만, 사실은 틈만 나면 이혼하고 새장가 가려고 궁리를 하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율법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율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 율법을 해석하는 한계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인간들의 율법 해석에 의해서 예수님 해석은 외면을 당하게 되는데, 이런 해석이 예수님 해석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은 아직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이유와 목적과 동기에 방해되는 해석이 예수님의 해석이 됩니다. 이 해석은 반드시 십자가를 바탕으로 합니다.
십자가 빠진 성경 해석은 엉터리가 됩니다. 예수님 본인의 해석은 없어요. 예수님 본인의 해석을 내놓으면 인간은 그 해석을 자신을 위해 지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기에 갈라설 수 없다는 해석을 예수님이 했다면, 사람들은 그 해석대로 어떤 경우가 와도 이혼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구원 받기 위해서.
이런 인간들의 해석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포기할래, 종교를 불교로 바꿀래?”라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교회 다니는 아가씨가 시집을 갔는데 “우리 집안은 불교 신자이기에 교회는 못 간다. 이제 교회는 가지 말고 절에 가자.”고 할 때, “어머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교회 가야 됩니다.”라고 자기 나름대로 복음에 대해 해석하겠지요.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가 뭡니까? 1) 주님을 위해서. 2) 자기 구원을 위해서. 어느 것입니까? 자기 구원을 위함이지요.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교회 간다고 괴롭히는 시어머니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그 시어머니를 누가 보냈습니까? 주님이 보냈습니다. 우리는 죄인의 샘플일 뿐입니다. 이 손이 주님의 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이 손이 다른 곳에 가면 안 되고 나에게 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바로 개인적 구원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을 배격할 수밖에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남은 지옥에 가도 나만 구원 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주여, 저는 주님 영광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라고 자랑을 해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말하신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어떤 남편도 아내를 이해할 수 없고, 어떤 아내도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주님의 사랑은 상대방 속에 새로운 둥지를 마련하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신만 살아있다면 내가 따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이란 그 사람 속에 내가 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풍선이라면 내 바람을 집어넣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풍선 속에 집어넣으면 나는 껍데기만 남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내 안에 다른 것으로 가득 찬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이런 사람이 없습니다. ‘내 가슴이 아파도 나는 행복합니다.’ 이런 노래가사가 있어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나는 슬퍼도 행복하다는 거예요. [그런 사랑 없습니다] 이승철이 노래했지요. 하나님이 짝지어 줬다는 말은, 짝지어 준 것을 지킬 위인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헤어지지 않고 같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라고 하는데, 그게 안 헤어진 것입니까? 서로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건 결혼이 아니고 동거입니다. 이들은 틈만 나면 헤어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헤어질 꼬투리가 없어서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거예요. 아내는 밥을 잘 한다. 나는 밥을 못한다. 밥 해주는 것이 편리해서 같이 사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부부라는 것이 성사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부부는 돈과 관련해서 편리를 위해서 같이 살 뿐입니다. 따로 사는 것보다 같이 살면 월세를 아낄 수 있고, 분업화하면 일의 효율도 생깁니다. 아내는 밥하고 빨래하고, 남편은 일해서 돈 벌고.
레비나스는 말하기를 ‘애무란 미래의 사랑으로 이끈다.’고 했어요. 여자를 만짐으로 자기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아니고 미진한 것을 새롭게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계속 지연되는 거지요. 그 지연된 결과가 ‘자식’이라는 겁니다. 이게 성경적으로 의미가 있는데, 10분 쉬고 계속 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