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안양강의-자기고유화a 1703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3. 20. 18:13
2017-03-20 15:10:38조회 : 7         
안양20170310a히13장10절(자기 고유화)-이 근호 목사이름 : 공은주 (IP:119.207.152.148)

안양20170310a히13장10절(자기 고유화)-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13장10절,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그냥 하나님 존재를 인정하면 될 텐데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것들이 뭐냐 하면, 제단, 제물, 장막, 대제사장, 짐승의 피, 성소 이런 게 있다 말이지요.

 

그러면 요걸 그림으로 그리면 우리의 생각은 뭐냐 하면, ‘오! 신이시여.’ 그걸로 끝난 거죠. 그냥. ‘오! 우리를 창조하신 신이시여. 제가 신을 인정하겠나이다.’ 우리는 너무나 간단해요. 우리가 평소에 어떤 어른을 모시듯이 임금님 섬기듯이 신은 위대하니까 위대한 신을 섬기는 거죠. 신 앞에 위대한 말을 누가 잘 붙이지요? 이슬람 또는 IC 테러집단들이 잘 섬기지요. 그래서 우리도 위대하다고 붙여주면 하나님이 기분 좋을 것 같은데 막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할 때는 성경대로 해요.

 

성경에 뭐가 있는가 하면, 방금 읽었던 용어들이 나와요. 성소, 제물, 제단, 대제사장, 짐승의 피, 그게 무슨 의미냐 이 말입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우리 쪽에서 신에게 나아가는 길을 만든다고 봅시다. 우리는 길을 만듭니다. 만드는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시도하는 길 말고 다른 길로 와요. 다른 길로.

 

그러면 우리가 시도하는 길로 신에게 가면 신에게 도달되겠습니까? 도달되지 않겠습니까? 도달 안 되지요. 안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방법대로 가야 되겠지요. 그 제시한 방법이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땅 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물, 짐승의 피, 제사, 성소, 장막, 땅의 일인데 그러면 우리는 하늘을 쳐다볼 게 아니고 인간이 뭘 쳐다보느냐 하면 땅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이 제시한 것을 쳐다보면 되는데 문제는 봐도 모른다는 겁니다. 봐도 몰라요. 요렇게 하나님께서 내려온 화살표로 탁 건너뛰면 되는데 건너뛸 수 있는 마음이나 능력이 없어요.

 

차라리 우리는 이렇게 해서 신에게 가고 싶은 것이 편합니다. 그 말은 뭐냐, 우리 속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고 괴물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속에 선악과를 따먹고 나도 신이다! 하고 우기는 그 괴물적인 심성, 악마적인 본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식대로 신을 믿고 싶지 하나님 식대로 신을 믿고 싶지가 않은 겁니다. 그러면 어떤 누구도 방금 제가 이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을 점프해서 갈 수 없다고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 같이 우리 인간으로 오신 분이 이걸 점프해서 올라간 게 있어요.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다 말씀을 다 이루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의 완성이 뭐냐 라고 한다면,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알게 되면 바로 요 하나님께서 제시한 진짜 나는 길이요, 진리요, 하는 그 길에 해당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거 굉장히 싶지요?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굉장히 싶지요. 인간 쪽에서 신에게 가는 이쪽은 이다? 아니다? 이건 아닌 거예요. 아니고 히브리서 13장10절, 11절 말씀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이 남겨준 방식대로 가야 되는데, 우리 인간 쪽에서 이 하나님이 주신 방식의 의미를 모른다고 이야기했지요. 모르는 이유를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우리가 우리 홀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심성에 이 방식에 대해서 거부하고 이 방식에 대해서 저항하는 어떤 괴물이 있는 거예요. 속성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못하고 누가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방식대로 이루어서 아버지께로 가신 겁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이 말이죠.

 

자, 그럼 오늘 강의가 요게 굉장히 쉽게 납득이 되신다면 오늘 강의 할 것은 두 가지를 해야 돼요.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 쪽에서 신에게 나아가는 그 방식이 뭐냐를 먼저 알아야 돼요. 제가 우리 인간 쪽에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아니라고 말을 해서 그렇다고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인간 쪽에서 가는 방식을 충분히 알아야 돼요. 충분히 알아야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가는 방식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는 방식이 왜 서로 상반되고 섞일 수 없는가를 분명히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신에게 가는 방식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할 테니까 이야기해보면 평소에 우리가 익숙한 거예요. 우리가 신에게 가는 방식을 복음 알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 속에는 그게 차분하게 남아있어요. 요거 ①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는 방식은 ②번해서 다 해드리겠습니다.

 

우선 ①번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 쪽에서 신에게 나아가는 방법은 육에서 혼과 영으로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육과 혼과 영.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교리 아닙니까? 지방교회. 워치 만리 방식이에요. 그런데 그 원치 만리 방식이 오늘날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2000년 교회에서 하는 것을 그걸 집약한 거예요. 모아온 거예요. 워치만리를 사람들은 욕하지만, 욕하는 그들의 방식을 좀 너무 철저하게 했다는 것에 욕 얻어먹지 사실은 워치만리가 기존의 교회하는 방식을 더 철저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다른 교회들은 어설프게 했어요. 어설프게.

 

워치만리와 다른 교회와의 차이점은 다른 교회는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하는 무속신앙, 불교적인 요소, 무속신이나 정성들이면 복 받는다. 그런 요소도 같이 집어넣어요. 사람들은 성경에 관심 없어요. 그냥 하나님도 관심 없어요. 하나님도 관심 없고, 성경도 관심 없고, 내가 복 받는 거, 내가 행복해지는 것, 내가 가장 편한, 여기에 관심 있어서 옛날에는 산속의 절에 갔는데 이제는 가까운 2층 상가에 올라가는 거예요. 교회라는 곳에 올라가기 때문에 그들의 목적은 성경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이 갖고 있는 그 초월적인 능력을 빼먹어보느냐, 내가 행복 하는데 잘 이용해 먹을 거냐, 그런 마음으로 오는 겁니다.

 

그런데 워치만리는 그걸 안하기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그걸 섞지 않고 순수하게 성경을 통해서 인간 쪽에서 신에게 가는 그 방법만 고수하기 때문에 다른 교회한테 욕 얻어먹는 겁니다. 그야말로 기복신앙을 거부하기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교회는 기복신앙을 거절한다고 하면서도 뭘 인정하느냐 하면, 기초반, 교회 처음 오는 초 신자한테는 마음껏 허용을 해주는 겁니다.

 

일단 고기를 던질 때, 일단 그물에 걸려야 1차 공작, 2차 공작, 3차 공작에 들어가잖아요. 처음부터 우리는 기복신앙 안 합니다. 이래버리면 처음부터 안하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지방교회 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기존교회 다녔다가 계속 기존 교회에서 육에 머물지요. 육에.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교회에 충성하면 천당 갑니다. 상급 받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들은 이제 성경에 좀 관심을 갖다보니까 성경에 그 내용이 없고 성경은 더 깊은 내용이 있는데 기존교회는 그 깊은 내용에 진도를 나가지를 못해요.

 

진도 나간다 하면 그 처음 모아놨던 사람이 “처음이야기하고 왜 다녔다고 다른 이야기하십니까? 아이고~ 나 안 갈란다. 절에 갈란다.” 이렇게 빠질 가능성이 있으면 돈도 같이 빠지니까 교회 운영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부흥시키고, 전도해서 하기 위해서는 계속 모으기 위해서는 성경적으로 안 가야 되는 거예요. 성경에 못가는 것도 있지만, 안 가는 거예요.

 

철딱서니 없는 부목사가 와가지고 자기가 성경 강의하고 그러면요, 대번 소비자 고발 들어옵니다. “이러려고 교회 왔습니까?” 하는 것처럼. 소비자 고발 들어와요. 그 부목사 쫓아내세요. 기도해서 이렇게 복 받았으면 여러분 기도 훌륭합니다. 이런 쪽으로 설교를 해주고 격려를 해줘야지, 헌금한 행위를 격려를 해야 할 건데 어디에 우리 관심도 없는 성경 이야기를 왜 합니까? 당회장한테 압력 넣어서 교회 부흥에 저해되니까 나가세요.

 

그러면 당회장이 부목사 불러가지고 “니가 이 바닥을 모르는 모양인데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더라도 여기서는 그리 하는 게 아니다. 니가 신학 하는 게 아니고 목회를 해야 돼!” 라는 식으로 구슬려가지고 바꾸도록 하지요. 안 바꾸면 재계약이 안 됩니다. 12월 달에 재계약이 안돼요. 4대 보험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좀 이제 지루하다 할까? 깊이 알고 싶은데 안 알려줄 때에 이제 지방교회에서 나오면서 하는 소리가 있어요. “기존 교회는 썩었다. 이렇게 성경 말씀에 관심이 깊이 있는 것 보니까 우리는 거듭났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끼리 모였으니까 누가 뭐래도 완벽한 100%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그 자체다.” 그게 바로 지방교회라는 겁니다.

 

이름도 지방교회라고 해서 교회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 지방에 있는 어디에 있는 교회라야 성경대로 한다. 항상 성경이 기준이고 사람들을 어떻게 끌어 모으는 것보다 성경이 기준이 되어가지고 그 안에 들어가면 누가, 누가 성경 깊이 들어가나, 내기하고 시합하는 그런 재미로 다니는 거예요. 지방교회가.

 

지방교회에 기존교회에서 비판할 때는 딱 한 가지밖에 비판 안 해요. 뭐냐 하면 “너만 교회냐?” 요것 가지고 비판해요. 너만 교회냐? 왜냐 하면 그중에서 우리만 교회라고 했으니까. 너만 교회 아니다. 그래서 기존 교회에서 지방교회 공격할 때, “고린도 교회 봐라. 그 어설프고 간음자도 많고 죄인도 많았잖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워서 그걸 교회라고 했잖아. 그런데 너희들은 교회 중에 교회라 해서 따로 핵심, 엑기스만 끌어 모아서 교회라고 하니까 그것은 성경하고 다르잖아.” 라는 교회 쪽으로만 이야기를 해요.

 

왜 교회 그 이야기만 하느냐 하면, 가는 방향이 인간에서 신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방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워치만리가 기존교회보다 자칭 더 뛰어나고 완벽한 거듭난 교회라고 하니까 원치만리 이론을 해보겠습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육에서 일단 육으로 왔으면 기존 교회 말입니다. 신에게 착하게 살면 나중에 천당 가고, 착하게 못 살면 나중에 지옥 간다. 그런 육을 혼으로 진급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혼으로.

 

혼으로 진급시켜야 되고 혼에서 더 영으로 진급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육에서 혼으로 진급시킬 때, 여기에 뭐로 되는가 하면 바로, 윤리와 도덕이 여기에 동원되는 겁니다. 윤리와 도덕. 그림을 수평으로 했지만, 사실은 수직으로 육에서 혼 단계로 넘어서야 돼요. 혼 단계 넘어 설 때 이미 여기에 뭐가 작용되느냐 거듭남이 작용합니다. 성령의 거듭남이 작용해요. 그래서 워치만리는 두 가지의 거듭남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육에서 혼으로 거듭나야 되고, 혼에서 영으로 거듭나야 되고. 이중 중생설이라고 합니다. 점프를 두 번 해야 돼요.

 

그럼 윤리, 도덕에서 영으로 가야 되는데 윤리, 도덕에서 영으로 왜 가야 되느냐 하면,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나온 것은 영이기 때문에 육에서 영으로 한 번 더 점프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워치만리에서 언급을 안 한 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누가? 육에서 혼에서 영으로 누가 그렇게 되는데? 누가에요. 누가? 그건 본인들이에요. 내가에요. 그러니 끝까지 누구를 안 놓치는가 하면, 본인의 구원 욕구를 절대로 놓치지를 않습니다. 내가 나를 붙들고 내가 나를 관리해서 기어이 신의 나라, 천국까지 집어넣겠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그러면 여기서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오실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냥 구경하러 오신 게 아니고 무슨 일을 하시러 오셨지요. 그 일은 제가 아까 언급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지키는 분이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 본인 밖에 없지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고유성이라고 합니다. 고유성. 고유성은 오직 나만이.

 

성경 말씀을 다 지킨 증거가 뭐냐, 십자가에서 말하기를 “다 이루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할 때에 옆에 다 이룬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게 새 언약이라 하는 것은 히브리서10장에서 했지만, 어느 누구도 성경을 이룰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준비하신 분을 보내서, 하나님이 보내신 준비하신 그 분만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홀로 다 이루어서 그 분의 새 언약을 이루었다. 그게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 했어요? ‘고유성’ 예수님만이 갖고 있는 것. 예수님만이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고유성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반대발이 ‘대체성’입니다. 대체성이라 하는 것은 바꿀 수 있는 거예요. 그 자리에 다른 게 끼어들어도 아무 진리에 변동이 없는 걸 대체성이라 해요.

 

자, 신은 대체성일까요? 고유성일까요? 이게 인간에게 신은 대체성입니다. 신이라 하는 것은 두리뭉실해서 위대한 전능자에다가 어떤 이름을 집어넣어도 괜찮아요. 알라를 집어넣고 여호와를 집어넣었다 할지라도 고 내용은 위대한 전능자, 위대한 신, 그 의미만 담으면 이게 어떤 이름을 불러도 부처라도 괜찮고 브라만도 괜찮고 신은 같은 신이라고 대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왜? 인간보다 위대하니까.

 

신한테 뭐가 붙는다고요? 위대한. 알라는 뭐하다? 위대하다 하잖아요. 유대교는 여호와도 위대해요. 위대하다는 것은 누구와 견줄 때 위대하다는 거예요? 인간보다 견주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만 위대한 거죠. 그러니까 인간이 신을 안다는 것은 이것은 그 신에게 어떤 이름이 주어지더라도 이건 대체가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그 다른 이름이 하나님 이름이 아니에요. 신의 이름이 아니에요. 그 다른 이름이 놀랍게도 여호와 이름이 아닙니다. 여호와, 알라하고 같은 계열이 아니에요. 그 다른 이름이 무슨 이름입니까? 주 예수 이름이에요.

 

그러면 고유성은 신에게 주어지지 않고 어디 주어져요? 예수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뭐가 주어지는가 하면, 주 예수가 주어지는 겁니다. 다른 어떤 자라도 주의 자리에는 예수님이 주의 자리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마저 아들 예수님을 주의 자리에다가 집어넣으신 거예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의 자리에다가 고유성을 집어넣겠습니다. 자,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지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으로 전능하신 위대한 분은 계셔요. 그것 말고 예수님이 주의 자리에 앉아있고 하늘나라는 무슨 나라인가 하면, 예수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에요. 주 예수의 나라에 올 때에, 그러면 주 예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주 예수님이 육과 혼과 영을 이런 식으로 주 예수님이 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게 왜 없느냐 하면, 여기 지금 인간이 육, 혼 할 때 자기 고유성부터 출발한 거예요. 자기 고유성. “누가 구원받아?” “내가 구원 받아.” 를 꽉 쥐고 있는 겁니다. 내가 구원 받아. 내가. 그러니까 이런 사람에게 질문을 해야 돼요. “당신은 왜 꼭 천국 가야 합니까? 당신은 지옥가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보세요.” 라고 한다면 지방교회에서는 할 말이 없어버려요. 지방교회 뿐만 아니고 모든 교회가 할 말이 없어버려요.

 

“왜 하필이면 당신이어야 됩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되었다 했는데 내려오라 해서 내려오게 되면 그러면 대통령 자리는 자기 고유성이에요? 대체성이에요? 대체성이지요. 이제 대체성 알겠지요? 자리는 있지만, 그것은 들어가더라도 빠지고 또 빠지고.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고. 그래야 될 입장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인정하는 고유성은 이미 확정되었어요. 주님의 자리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주님의 자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심판 주를 말합니다. 심판 주. “니 지옥 가!” “니 천국 가!” 그러니까 이것은 천국, 지옥을 할당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에요. 주 예수가. 그러면 예수님의 고유성을 인정한다면, 나의 고유성은 주님의 권위성 앞에서 이게 방해가 돼요. 주님께서 너, 너, 너, 천국 가! 지옥 가! 라고 했을 때에 천국 갈 자기 이름에 호명을 안 하게 되면 우리는 무슨 저항이 나오느냐 하면, “왜 저는 이름을 안 불러줍니까?” 이렇게 저항을 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로마서9장에 나오는 것처럼 토기장이 이야기가 나와요. 토기장이가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하나는 귀히 쓸 것을, 내가 만드는데 “그게 싫은가?” 그렇게 나오겠지요. 그럼 우리는 “싫소이다! 나는 천국 가야겠습니다.” 그럼 주님이 뭐라 하느냐 하면, “왜 그래야 되는데 니가 설명해봐라.” 설명할 길이 없네요. 천지가 변해도 나는 꼭 천국가야 돼! 라는 정당성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나니까. 나는 나니까.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지방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이 고유성을 감추고 교묘히 감추고 자기는 성경대로 퍼 붓는데, 어디다 퍼 붓냐 하면 자기 고유성에다가 전부 다 이 성경을 퍼붓는 거예요. 마치 튀김 닭 하게 되면 생닭은 그대로 있는데 조금 시간 지나면 노래져서 온갖 튀김옷을 입잖아요. 지방교회는 전부 다 지가 다 성경을 뒤집어썼어요. 성경구절을 보면서 온갖 것 뒤집어씌우면서 완전히 튀김 닭을 만들었어요. 성경 닭을 만들어서 들어가겠다는데 이건 자기 고유성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 했다 말이죠. 그럼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한 이유가 있어요. 마태복음16장23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탄아 니가 물러가라.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탄의 일을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있지 않고 뭐로 되어있습니까?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누구의 일? 사람의 일이죠. 사람의 일=무슨 일입니까? 사단의 일인 거예요.

 

그래서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보고 자기를 뭐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다시 말해서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고 사탄에게 매이든지 아니면 주님에게 매이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악령에 매이든지 아니면 성령에 매이든지 둘 중에 하나지. 독자적으로 나는 나라고 버틸 수 있는 입장이 안 됩니다. 이걸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했어요? 베드로보고 이야기했어요. 수제자인 베드로보고 이야기했다고요.

 

그러면 성도가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우리가 몸에서 내 뿜을 수 있는 건 뭐냐 하면, 바로 아까 읽었던 마태복음 16장 23절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걸 배설물로 그냥 내놓으면 되는 겁니다. 김장할 때 배추에다가 소금 치면 물기 나오지요. 소금이 들어가니까 물기가 나온다 말이지요. 삼투압작용에 의해서.

 

말씀이 성령이 들어가니까 마태복음16장23절,24절을 우리가 매일같이 내 뿜으면 되잖아요. 배설물로. 우리 안에 들었던 것을 바깥으로 쏟아내면 되는 겁니다. 사장하고 싸운다든지 이런 거. 내놓으면 되는 거예요. “사장하고 싸웠습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니는 왜 안 싸워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왜 점잖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니는 지금 하나님 일을 생각지 않고 지금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들어있는 것을 바깥으로 노출시키는 일을 하는 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좀 이렇게 정신 이상한 80넘은 할머니하고 이야기할 때, 결국 그 할머니 입에서 자기가 부족하다. 그게 나온다면, 그런 기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마는, 나온다면 그게 바로 성령의 일이에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게 성령의 일이에요.

 

그런데 지방교회 보세요. 악착같아요. 악착같아. 완전히 말씀으로 자기 게 삐져나올까 싶어서 철통같은 보안에다가 이렇게 나는 육적인 인간을 내가 관리 잘해가지고 혼의 인간으로 드디어 접근해 갑니다. 점점 더 영의 세계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 또 전진. 이게 바로 기존 교회에서 원하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론하는 겁니다. 성화론. 얼마나 악마적이고 마귀적이고 이단입니다. 모든 기존교회 다 그렇게 해요. 성화론이에요.

 

계속 자기의 고유성. 관심사가 주 예수가 아니에요. 결국은 나의 고유성을 위해서 예수 당신도 협조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천국가려고 성의를 보인다면 당신이 나를 내칠 이유 없다는 겁니다. 내치고 싶어도 못 내치도록 철저함을 기하는 겁니다. 마치 중들이 생명을 죽일까 싶어서 빗자루 들고 곤충 같은 거 쓸어서 생명 안 죽인다고 하는 것처럼. 그럼 바이러스는 안 죽입니까? 바이러스는 생명 아니에요? 철저에 철저를 기하는 겁니다.

 

온갖 악한 마음을 일체 품지 않고 정갈하다 하지요. 신사임당처럼. 이영애처럼. 생각하는 것도 깨끗하고 정갈하고. 누가 내 앞 차 가로막았다고 욕설하지 아니하고. 하여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렇게 해서 육의 인간, 이 더러운 짐승 같은 그 마음씨가 혼에 담겨서는 윤리 도덕적 단계가 되는 거예요. 여기까지. 그런데 기존교회는 육에서 혼까지 오는 것밖에 못하고, 자기들은 혼에서 영으로까지 더 나아갈 수 있는 그 준비단계에 있다는 겁니다. 혼에서 영으로.

 

그러면 그 지방교회에서 말하는 혼에서 영의 문제는 뭐냐 하면, 여기는 아주 기괴한 해석이 들어갑니다. 성경 말씀을 해석하면서 요 해석이 어떤 해석이 되느냐 하면 이런 해석으로 들어가요. 우리 지방교회만이 교회다. 를 증명해주는 해석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동원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뭐와 닮았느냐 하면 여호와 증인하고 똑같아요. 여호와 증인이 세상 적으로 그냥 기독교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여호와도 몰랐던 그들이 노량진시장의 고기만 팔고 회만 치던 사람이 드디어 여호와 증인 들어가게 되면 갑자기 남자는 넥타이 메고 여자는 긴 치마입고 교회 오지요. 그 여호와 증인 모습 보세요. 신사도 그런 신사 없어요. 신사도 19세기 신사. 많이 봐줘서 1950년도에 시골 아낙네들이 꾸미는 그 숙녀 스타일. 정갈해요.

 

그들도 똑같아요. 모든 게 똑같아요. 인간은 신에게 가는 방법이 육에서 혼으로. 이것뿐이에요. 윤리인데. 그들이 혼에서 영으로 가는데 그들은 144,000을 굉장히 강조해요. 여호와 증인들이. 이 해석으로 할 때 기괴한 해석으로 들어갑니다. 여호와 증인만이 참된 구원받은 자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해석이 들어갑니다.

 

기존교회는 육에서 혼 될 때 돈 내지만, 여호와 증인이나 신천지나 지방교회는 혼에서 영올 때 이건 푼돈이 아니고 아주 전 재산을 바쳐버려요. 전 재산을. 가만히 보면 후반전이 전반전보다 돈이 돼요. 그래서 여호와 증인이나 신천지나 못 빠져나와요. 왜 못 빠져나오느냐, 단계가 육에서 혼의 단계로 끝나는 게 아니고 혼에서 영의 단계에 가려면 신천지에 목숨을 걸어야 돼요. 그런데 만약에 잘못 됐나 돌아서게 되면 이건 혼에서 머물기 때문에 영의 세계에 못가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 이리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되지요. 그 동네에 가면 생전 이런 이야기 듣지도 못해요. 그냥 이게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들에게는 그렇게 납득이 되고 그 꼼수에 완전히 매어드는 이유가 그것은 그들이 잘 가르쳐서가 아니라 본인의 고유성을 본인이 성령을 안 받아서 포기를 못해서 그래요.

 

모든지 내 잘되기 위해서 내 집안 잘되기 위해서 한다는 내 자식 잘되고 내 가정 잘되고 나만 잘되면 돼! 라는 것이 이렇게 확보된 이상은 이걸 위해서 계속해서 악마가 공작을 해놓으니까 내가 그걸 뿌리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건덕지가 없는 거예요. 아, 교회가고 헌금하는 게 나 잘되라고 하는 것이지, 남들 눈치 볼 필요가 뭐가 있느냐, 육에서 혼까지 오는데 얼마나 애썼는데 이제 조금만 가면 되는데, 조금만 가면 승리하는데, 마지막 촛불 집회해야지 조금만 하면 승리하는데. 여기서 멈추면 안 되잖아요.

 

그동안 갖다 부은 돈도 아깝고 내 정성도 아까워서 다시 빠꾸를 못 하는 거예요. 육으로 다시 빠꾸하는 것은 주의 성령이외에는 안됩니다. 모든 사도들은 항상 육에서 못 벗어나게 만들어버려요. “니가 육이냐?” “육입니다.” “아니야 더 가야 돼! 니가 사탄의 앞잡이야.” 사탄 쪽으로 가야 돼요. 이제 성령이 성도한테 임하면 우리 쪽에서 뭐가 나타나느냐 하면, 성전에서 예수님을 힘들 게 했던 그런 요소들이 이제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주 예수의 이 자리가, 아까 신의 자리가 아니라 했지요. 주 예수의 자리라 했지요. 그럼 주 예수의 자리이니까 요걸 예수의 자리를 말로 이렇게 바꾸어보겠습니다. 요걸 새 언약, 또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성소, 또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짐승의 피 자리, 또 다른 말로 하면 대제사장자리, 요걸로 제가 바꾸겠습니다. 이 자리는 뭐냐, 예수님께서 이미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갔다가 성공하시고 자기 구원에 성공하시고 보여주신 자리가 이 자리입니다. 새 언약 자리입니다.

 

이런 성소의 짐승의 피가 새 언약에서 누구의 피 입니까? 예수님의 피가 됩니다. 예수의 피 흘림에 담긴 의미를 아는 것이 바로, 의미를 알게 되면 바로 우리 속에서 혼과 영으로 가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런 암 덩어리가 고름덩어리가 이 안에서 계속해서 들어있던 정도가 아닙니다. 생산되고 있습니다. 들어있는 거 하고 달라요. 들어있으면 빼내면 양이 줄어들지만, 생산된다는 것은 70이고, 80이고 70까지 사셔야 돼요. 계속 고름이 나와야 되니까.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70아니고 90까지 살아야 돼요.

 

살아서 계속해서 세상 악마의 일, 인간 위주의 자기 위주의 일들이 삐져나와야 돼요. 삐져나옵니다. 주께서는 소금을 계속 치고. 우리는 악마의 성질이 계속 나오고. 자기의 고유성, 자기밖에 모르는 성질이 계속 나옵니다. 이게 바로 히브리서13장에서 복음이에요. 이게 바로 주 예수의 복음입니다.

 

히브리서13장 6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으면 기존의 사람들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수요일에 언급했잖아요. 롯이 천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어디까지 양보했습니까?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곧 시집갈 두 딸을 마음대로 유린해라. 이 깡패들아. 하지만, 내 진짜 귀한 가족보다도 이 분들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말을 오늘 강의에 적용시켜 보면, “아이고, 내 두 딸 요렇게 이쁜 걸.” 라는 것도 이게 너무나 당연한 걸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것도 어떤 내 고유성, 나밖에 모르는 내 자식이니까 이쁜. 내 죄의 일부로서의 내 안에 이미 자리 잡은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마태복음10장과 관련성이 있지요. 누구든지 내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집어넣은 그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 상황이 됩니다.

 

어느 강의에서 해삼이야기를 했는데, 겨울철에 해삼을 사면 다 썰어줘요. 초장 찍어 먹잖아요. 우리라는 이 인생에다가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삽입해버립니다. 아까 마태복음10장 말씀이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할 때, 해삼을 자를 때 우리의 단면, 해삼의 잘라진 단면이 나오지요. 우리는 단면보다도 치킨 튀김하기에 급급해요. 헌금했잖아요. 죄 지은 거 봐주세요. 자꾸 헌금, 기도, 전도 이런 걸 가지고 옷을 덧입기를 원하지만 주께서는 히브리서4장처럼 완전히 발가벗기지요. 관절과 골수를 쪼개거든요. 쪼개버린다고요. 쪼개면 단면이 나와요. 단면은 속일수가 없습니다.

 

육에서 혼에서 영으로 가게 되면 여기에 무슨 요소가 개입되느냐 하면, 시간 요소가 개입돼요. 시간이 흐릅니다. 시간이 흐르니까 인간들은 자꾸 시간을 지연시켜요. “다음에 잘할게요.” 지연시키는데 육에서 사탄의 일을 끄집어내는 것은 육에서 더 갈 데가 없어요. 그러니까 육에서는 무시간이에요. 시간이 없어요. 나이 50이 됐던, 60이 됐던, 70이 됐던 80이 돼도 여전히 주께서 말씀으로 다루는데 서는 지장이 없습니다. “나이 80인데 봐주세요.” 이런 거 없어요. 40 되면 40대에 알만큼의 죄를 끄집어내고 80되면 80돼야 아는 죄를 또 끄집어내고. 90되면 90까지 안 살았으면 모를 뻔한 죄가 또 끄집어내면서.

 

이렇게 끄집어낸다는 말은 이미 이 사람은 뭐와 같이 겹치고 있습니까? 이미 영속에 하나님의 성령 안에 속한 사람이에요. 육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갈 필요가 없지요. 왜냐 하면, 이미 영이 우리를 덮쳤으니까. 그걸 침범이라 해요. 주님의 침범. 하늘나라 자체가 이 땅을 향하여 침노한 거예요. 우리는 하늘나라에 정복당한 겁니다. 마태복음12장에 보면, 도둑이 와서 주인을 꽁꽁 묶어 놓고 세간에 불과한 우리에게 보쌈해가지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주머니 달고 우리를 거기다가 집어넣어 놓고 이 땅에서 빼내어 가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은 누구 소관입니까? 구원은 나의 소관이 아니고 구원은 누구 소관이에요? 구원은 주 예수님의 소관이에요. 헌금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주셨습니다.” 라고 내어놓는 것이기 때문에 헌금은 누구 소관입니까? 주 예수님의 소관입니다. 전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육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나아가겠다는 사고방식 때문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잖아요.

 

유대인들도 이런 식이니까. 유대인들도 자기 구원하고자 하는 것 때문에 피 흘림이기 때문에 전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이라고 육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가겠다는 구원 받겠다고 하는 이것을 악마의 일이라고 지적당하는 그것이 누가 벌인 전도인가,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벌이신 전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라는 것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니까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뭐냐 하면, 주님의 기도가 나의 기도를 이긴다는 것을 기도하는 가운데 그걸 수용하도록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기도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니까 기도도 누가 해요? 주님이 하지요.

 

기도도 주님이 하고, 헌금도 주님이 하고, 전도도 주님이 하고, 그리고 예배도 진리와 성령 안에서 예배하니까 주님이 하시고, 그리고 교회라는 것도 그리스도 몸이 교회니까 교회도 주님의 것이고. 교회, 예배, 전도, 선교, 찬양, 기도, 헌금, 다 누가 하십니까? 다 주님이 하시지요.

 

(질문) 워치만리에서 말하는 혼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답) 혼이라 하는 것은 짐승과 차이나는 점.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과 깨달음과 지. 정. 의, 지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과 의제를 줬기 때문에 이것을 충분히 활용해서 나아가고자 함.

 

(질문) 원래 도 닦으면 갈 수 있잖아요? 

(답) 이것은 모든 인간이 이렇게 가고 있어요. 지금. 어린 애들은 철이 없고, 어른들은 철났다는 말은 이만큼 이미 시간상 나름대로 높아진 거예요. 아무 큰 종교도 없는 몽골족에 가도(무당을 섬기지만), 어디에 가도 그 부족의 윤리가 있어요. 윤리, 도덕은 다 있습니다. 애들을 하여금 성인식을 해서 나무 위에서 던져서 이제는 하나의 성인으로서 사냥하는데 주체 자가 되고 하는 그런 부족들이 있습니다. 어디에 가도 어린애와 어른과의 차별은 다 둡니다.

 

(질문) 그러니까 혼의 구원을 받으려는 생각이 틀렸다는 말씀이시지요? 

(답) 혼의 구원으로 다 가고 있는데, 방향 자체가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마의 일이라는 말이지요. 사탄의 일인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뭐했습니까? 이리 한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 몰랐다. 이제는 예수님 알았다. 이제 천당 가면 된다. 이게 바로 사탄의 일이고, 인간의 일이에요. 방향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러니 이 방향이 어디서 나오는가, 육속에 악마랑 괴물이 들어있으니까 이런 방향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인 이상은. 좀 더 인간다운, 좀 더 성스러운 내일, 내년에는 더 착하게, 더 바르게살기.

 

(질문) 그러면 기존교회에서는 혼을 자극하는 거예요? 영을 자극하는 거예요? 

(답) 영은 그 다음 단계고. 기존교회에서는 육으로 하여금 신사답게 살아서 거기서만 머물면 안 되고, 성령을 받아서 영으로 가야 된다는 거예요. 혼에서 영으로 가야된다는 거예요. 혼은 윤리, 도덕이라니까요. 짐승으로 차이나는 거예요. 짐승은 먹고 사는 것밖에는 모르지만, 인간은 인간답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기존 교회에서 하는 혼이 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라, 하는 것 때문에 여기에 들어간다. 아까 했잖아요. 모든 성경 말씀을 자기 닭튀김 하듯이 다 집어넣는 거예요. 이런 과정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한다는 것은 뭐냐, 에베소서에 보니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고,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혼과 영의 생활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지방교회는 이미 그런 생활을 하고 있고. 기존 교회는 혼에 머물고 있고.

 

(질문) 예수님이 그걸 허용하신 거죠? 

(답) 당연히 허용해야지요. 그래야 예수님께서 다녀온 이유가 나오지요.

 

(질문) 허용한다면, 비판할 건 없다는 것이지요? 

(답) 비판을 하는 게 아니고 증거를 한다니까요. 증거. 증거를 하게 되면 비판이 안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증거 게 되면 악마가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악마는 악마 나름대로 활동을 해야 돼요. 뭘 활동하느냐, 복음에 대해서 공격을 해야 돼요. 베드로처럼.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공격을 해야 돼요. 공격을.

 

(질문) 목사님이 비판을 많이 하시는데, 비판을 하면 할수록 계속 비판이 나와요. 다 끌어 들여 다 비판하면 결국에는 누가 남는 건지 모르겠어요. ⇒ 

(답) 예수님 자신의 모든 말속에는 뭐냐 하면, 기존에 대한 부정이 들어있어요. 이 세상에 대한 모든 부정. 마귀의 세계 부정이 들어있다고요. 부정이 되는 것을, 성경 말씀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지요.

 

예를 들어서 만약에 부정을 안 들이고, 지금 설명해 볼게요. “짐승의 피로 제사장이 가지고 갔습니다. 우리는 짐승의 피를 믿읍시다.” 이러면 부정이 아니에요. 그러나 제가 설명한다고요. “짐승의 피가 왜 피를 흘려야 됩니까?” “왜 피를 흘려야 되지요?” 세상이 하나님이 제시하는 방식에 대해서 반발하고 저항하기 때문에 피를 흘리잖아요. 피를 믿으면 구원받아요? 안 받아요? 구원 못 받지요. 왜?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거기다가 피라는 닭튀김을 또 거기에 덮치게 되니까. 아직 속은 달라진 게 없어요.

 

“주님이여, 어떤 정보를 더 확보하면 구원받습니까?” 자기의 고유성을 주장하고 있고, “요번에는 피를 해볼까? 뭘 해볼까?” 여기에는 아무 비판이 필요 없어요. 끌어 모으면 되는데, 무슨 비판이 됩니까? 끌어 모으면 되는데. 정보를 끌어 모으면 되지, 비판이 왜 필요해요?

 

주님의 말씀에서 누가 비판하느냐 하면, 남이 비판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비판해요. 내가. 그게 70, 80 살 때까지 계속 비판한다고요. 우리가. 천사가 롯 집에 오긴 왜 와요? 안 왔으면 딸한테 좋게 지내지. 천사가 괜히 와가지고 그 소리를 딸이 들었으면 얼마나 섭섭해 하겠어요. 천사가 왔을 때는 모든 게 부정적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짐승에서 탈피하고 싶어요. 인간답게 살고 싶어요. 인간답게 살고 싶은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나는 남을 비판하지 않는 점잖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마귀의 생각이라니까요. 안 다치고, 좋은 게 좋다고. 그런데 그런 마음 자체가 주께서 피 흘리게 만든 요인이 된다니까요. 그런 마음 자체도.

 

(질문)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한 비판은 좋은데,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 

(답) 주님을 증거 하는 비판도 죄고, 바른 비판이란 비판도 죄에요. 우리에게 나올 때는 죄 아닌 게 없음을 아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자꾸 예수 믿고 이제부터는 죄를 적게 짓겠다는 그 사고방식이 계속 작동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작동하는 걸 나는 오히려 박수치고 싶은데. 작동하는 그것도 사실은 제가 이런 강의를 하니까 삐져나온 거죠. 가만히 참지 못하고 막 튀어나온 거예요. 녹음되는데 막 튀어나온 거예요.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에요. 입 다물고 있으면 울화병이 날 건데, 지금 슬슬 나오잖아요. 그러나 이것이 주께서 우리한테 그렇게 하신 겁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고요함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천국가게 됐는데 우리는 나한테 괜찮은 것을 가지고 자꾸 거기다가 들어붙으려고 하는 거예요. 보답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에 대한 공로에 보답을 하려고 해요. 왜 보답을 해야 되는데? 그것은 평소에 내가 나로 인하여 흐뭇해하는 게 습관이 되어가지고 나로 인하여 내가 내 잘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 보람을 느끼는 악마적인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어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하고 안 믿는 사람하고, 어떤 차이를 자꾸 두려고 합니다. 우리의 차이는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이 고백이외에는 다른 차이 없어요.

 

(질문) 목사님이 비판하면 사람들은 싫어하잖아요. 그 이유를 알겠다니까요. 자꾸 예수님을 증거 하려 비판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비판하지 말라. 너 하고 싶은 말만 하라. ⇒ 

(답) 남들이 싫어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히브리서13장6절 나오잖아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남들이 비판하는 게 아니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비판한다니까요.

 

내가 여기서 100명한테 설교하는데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100명이 몽땅 나에게 욕을 하더라 말이죠. 

그럴 때 갑자기 내가 보람을 못 느끼고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수가 있을 때,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자리에 세워주신 주님에 대한 내가 지금 도전, 반발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지정한 자리에서 그 결과가 뭐냐, 감사로 이어질 게 감사로 이어지는 게 아니고, 

은혜 받은 사람 한 명도 없고, 이런 식으로 짜증이 나온다는 것은 이건 남 욕할 거 없어요. 

바로 내 자신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 악마적인 모습을 삐져내는 이 관계가 성령 받은 성도된 모습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