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강-YouTube강의(등장과 사라짐)170307-이 근호 목사
제181강, 제목이 ‘등장과 사라짐’입니다. 등장과 사라짐이라 하는 것은 왜 이 제목을 걸었느냐 하면, 세상은 한 번 태어나게 되면 죽을 때까지 그대로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그 말에 누가 이의를 달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부모가 오늘 키워줬다. 나는 여기서 계속 등장한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가 여기 있다고 해도 들어줄 사람 없으면 이 사회에서 그건 없는 존재입니다.
저 산속에 무인도에 혼자 앉아가지고 나는 태어났다. 나는 이만큼 나이 들었다. 백날 해봐야 그것은 이 세상에 없는 존재에요. 무인도에 태어나가지고 폭풍에 휩쓸려 죽었다 해도 그건 누가 태어났는지, 누가 죽었는지 아무 관심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몸은 분명히 있더라도 나의 나됨을 알리기 위해서는 내가 여기 있다. 를 알아줄 다른 사람들과 섞여야 되는 겁니다. 그것을 사회라고 이야기하지요. 사회.
사회에서 유명하지 않고 유명까지 할 것 없지요. 사회에서 내가 여기 있음을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 속에 있더라도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남이 안 알아주더라도 나 혼자 살면 되지. 라고 나는 행복하면 되지. 라고 할 만한데 이상스럽게 사람들은 혼자 있는 그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남이 알아줄 때 사는 의욕이 그 때 생겨요. 남이 알아 줄 때.
그것에 대해서 왜 그런 지를 여러 가지 학자들이 연구해 보니까 대충 납득이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애가 태어날 때, 부모가 곁에 있기 때문에 부모가 자꾸 뭔가 시켰어요. 부모가 시키고 잘하면 사탕주고 못하면 매매하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가지고 우리의 제2의 자아, 제2의 주체가 된 겁니다.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등장과 사라짐이란 이건 뭐냐 하면 니가 이 사회의 법에 준수하게 되면 이 서울바닥이나 어떤 마을에 살도록 용납해줄 것이고 만약에 자꾸 법을 위반하게 되면 너는 이 사회에서 격리조치 해가지고 교도소에 집어넣어서 이 사회에 없는 사람 만들 거야. 라는 그 원리에 점점 크면서 우리는 그것에 숙달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아주 간단한 예로 북한 보세요. 북한에서 김정은이 좋아하지 않으면 없는 존재가 됩니다. 정치적 수용소에 집어넣어버려요. 그쪽 법은 뭐냐 하면 김정은을 무조건 숭배해야 돼요. 신으로 숭배해야 돼요. 김정은 말은 무조건 숭상해야 되고 만약에 비판이나 싫은 소리했다가는 싫은 소리가 아니고 김정은 연설하는데 박수도 안치고 가만히 있다가는 100% 사살당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남쪽에 있는 사람한테 북쪽에 있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지요. 그래서 자기가 소속된 사회를 통해서 사람은 살아가는 겁니다. 그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해줘야 살 수가 있어요. 만약 어떤 사람이 큐빅 맞추는 천재다. 그런데 그 큐빅해서 나이 40, 50 백날 해봐야 누가 월급 안 갔다 줘요. 왜, 사회는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잘하는 건 인정하겠는데 이거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말이죠.
어떤 사람이 기타를 잘 친다. 기타를 잘 치는 건 인정하겠지만, 기타 잘 치는 그 직업자리가 제한되어 있어요. 기타 잘 치는 건 인정하겠는데 자리 없으면 기타 치지 말고 양계장 하던지 다른 것 해야 돼요.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변형을 해줘야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내 자신이 남들이 원하는 대로 등장했다가 남이 이제는 우리 회사가 당신의 제조는 시효가 끝났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자동기계 들어갔으니까 이제는 단순노무는 오늘부로 퇴직해주세요. 이러면 사라져야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세상도 그런데 하나님 나라도 그러하겠는가?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도. 원칙이 있고 원리가 있어요. 그 하늘나라 원리가 골로새서2장18절부터 19절까지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여기에 보면, 이 땅에서 사람들이 천국가려고 평소에 뭘 하느냐 하면 겸손하고 일부러 자기를 낮추는 거예요. 겸손하고 천사를 숭배하고 그리고 뭔가 신비로운 것을 추구하고 자기가 꿈에 봤다든지 기도하면서 본 것을 그것을 붙들고 이게 신의 계시라고 여기고 그리고 그 다음에 읽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안식일과 절기와 월삭과 교회에서 제작한 것. 그런 것도 지키고 이렇게 하게 되면 교회라는 곳에서 또는 남들 앞에서 굉장히 대단한 사람으로 알아주지요.
그러면 오늘 제목에 의하면 그건 등장이 되는 겁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면 주위에서 “야, 신앙 좋다. 당신은 오늘 죽어도 천국 가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남을 굉장히 부러워하고 거기에 또 호응해서 이래야 옳은 줄 알지요.
그건 성경을 안 봐서 그래요. 고린도전서 2장16, 17, 18절, 19절 안 봐서 그래요. 복음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칭찬하는 대로 간다고 하나님도 같이 천국 넣어주는 게 아니에요. 보통 문제 아니지요? 큰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에서 성경은 안 보고 교회에서 하는 걸 왜 따라하느냐, 평소에 어릴 때부터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이게 습관화됐거든요.
그러면 교회에 가게 되면 교회 선배들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이 평소에 뭘 했는가를 보고 흉내 내기를 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그냥 이것대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대로 하니까 돈 버는 기적을 받았다.” “이것대로 하니까 응답을 받았다.” “금식 하니까 자식이 좋은 대학 갔다.”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교회가 부흥되더라. 이런 식으로 이미 수차례 중첩되듯이 계속 누적되듯이 계속해서 왔고 그건 우리 마음에 저장이 된 겁니다.
그 저장된 것에 맞추려고 하다보니까 우리의 자아와 마음도 변형을 시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왜 교회에서 그런 소리 하는가 하면 주의 뜻이 그런 게 아니고 교회를 키우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왜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하느냐, 교회를 부흥시켜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그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라고 그렇게 규정한 겁니다. 성경에 보면 하늘나라 확장이라는 게 없어요. 하늘나라 크게 만들라는 대목이 없어요. 그것은 정복력입니다. 지리적인 정복력.
내가 소속된 이 단체가 커질 때, 어떤 보람이라든지 존재하는 이유를 찾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아니라면 성경에서는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진작에 물어야 돼요. 그걸 묻지를 않는다니까요. 왜, 정답을 이야기해봐야 이미 인간 마음 자체가 그들에 꽉 세뇌 당했어요. 마치 아까 이야기한 북한하고 똑같아요.
그들은 하나님이 안보이니까 교회가 커지면 하나님이 도와주는 교회고 교회가 작아지면 하나님이 예수님이 떠난 교회라고 그렇게 교육받은 거예요. 성경에서 두 세 사람도 나와 함께 있으면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그런 구절은 안 들리는 거예요.
자기가 돈을 투자한 교회가 커질 때, 돈 투자한 보람을 느끼고 자존심을 챙기고 그런 식으로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거예요. 자존감을 느끼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온 유대 나라가 가짜였습니다. 예수님 혼자 진짜였습니다. 심지어 12제자도 그 가짜의 힘의 위세에 겁이 나가지고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배신했어요. 똑 같습니다. 왜, 똑같은 세상에 살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18,19절에 보니까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했느냐 하면 머리를 붙들지 않았다. 머리를 붙들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예수님 앞에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자기 행함을 주님의 행함과 견주어서 주님의 행함 앞에 자기 행함을 포기를 해야 될 텐데 의미 없는 고로.
독단적으로 자기 행함에다가 의미를 주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러니까 자기 행함이 누구 행함을 가려버려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를 가려버리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그냥 복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천국가려고 설쳤느냐를 먼저 딱 제시를 해요. 왜냐 하면 제시한 이유가 다들 거기에 빠지니까. “바쳐야 복을 받지.” 전부다 거기에 다 빠지는 거예요. 열심히 하고 기도하면 응답된다. 진정으로 하면 응답된다. 다 그런데 빠지고 그런 것들을 붙잡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붙잡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복음은 인간의 행함 속에서 찢어진 몸으로 찢어진 피로서 등장한 게 복음이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그냥 죽였습니까? 자살했습니까? 약 먹고. 달려들어서 산산조각 냈잖아요. 찢었잖아요. 십자가에서.
똑같은 우리의 찢김이 있어야 돼요. 내가 남들 보기에 믿음 좋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했던 그 몸을 이걸 찢어져야 돼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는데 주께서 십자가의 영역으로 그것을 전부 다 찢어버리고, 찢어진 그 쓰레기를 주께서 머리로 통합해서 연합할 때 연합된 우리의 몸은 두 번 다시 우리의 행함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중에 되면 우리만 천국에 등장하고 그런 자만 있고 나중에 잘난 사람들은 천국에 다 사라집니다. 이게 등장과 사라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