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자유 (삼상 6:10-16) 대전-22강
이근호
2017년 1월 24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6장 10-16
(삼상 6: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삼상 6: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삼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삼상 6: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삼상 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삼상 6: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삼상 6: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사무엘 상 6장 10절부터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암소 두 마리에 실려서 자율 주행이라고 하지요. 운전사가 없는데 알아서 다시 이스라엘 지역으로 오는 그 대목입니다. 언약궤는 상자거든요. 아카시아 상자에요. 궤라는 말이 상자이지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냐하면 언약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 판이 들어 있어요. 언약 판이 원래 어디에 있던 거냐하면 시내산 위에 있어요.
높이가 2,200m정도 되는데 시내산 꼭대기에 하나님이 계셨고 산 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치고 있었고 모세와 여호수아가 올라오다가 중턱에서 여호수아는 남겨두고 모세 혼자 끝까지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언약궤는 원래 하나님이 준비한 게 아니고 없던 거에요. 없고 모세가 하나님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바위에 써서 모세에게 인계했고 모세는 내려오다가, 몇일 만에 내려오냐 하면 40일 만에 내려와요.
40일이라는 것은 하나님 이쪽 세계에선 시간이 흐르지 안으니까 40일이라는 것은 없고 밑에서 사람들이 계산해 보니까 40일이 흐른 겁니다. 방금 제 말이 맞다면 언약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을 때 이것이 순수성이 유지 되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순수성이 유지 되겠지요. 그런데 이 언약이 어디서 수모를 당하느냐?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모세가 들고 산을 내려오다가 밑에서 파탄나는 겁니다.
돌판이 깨지는데 이것을 언약이 깨어짐,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거든요. 이것을 네 자로 하면 ‘계약 파기’가 되는 겁니다. 부동산 중계소에서 계약했다가 계약 파기, 또는 약혼 해놓고 결혼식 날짜 잡아 놓고 안해 버리는 것. 결혼식에서 주례자가 묻습니다. 혹시 이 결혼에 반대하는 분 있습니까? 묻는데 “예! 반대합니다.” 하고 아줌마가 얘 하나 안고 들어오면 완전 파기 되지요.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구원에 대한 열의와 욕망으로 인간들이 혼자 착각한 거에요. 인간들에게 구원이라는 것의 아이디어나 끄집어 낼 수 있는 권리나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흔히 구원받았을 때, 복음 알았을 때 하는 멘트가 있어요. ‘죽어 마땅함’ 죽어 마땅한 죄인을 살려 줬다. 그런데 그 말도 너무 퍼지고 상투적으로 되다 보니까 그것도 시들어져요. 그냥 기계적으로 들 붙이는데,
죽어 마땅함을 진정성 있게 하려면 앞에 뭘 붙여야 되요. 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이런 각오를 하는 것은 이 정도로 나오는데 이제는 알아서 죽이지 마세요라는 그런 뉘앙스가 강렬해요. 내가 (스스로) 죽어 마땅하다고 이야기 했으니까 죽음이 슬쩍 봐줘서 피해가 주세요라는 꼼수를 쓴 느낌이 들거든요.
조용하게 이야기하기를 죽어도 아쉬운 게 없습니다. 이게 사실 죽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마땅함, 죽어도 별로 아쉽지 않습니다. 살려고 수술 하려는데 수술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이런 것. 이 말은 뭐냐하면 내가 구원 받으려고 길길이 뛰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이에요. 내가 천국 가려고 일부러 교회 찾아 나오지 않겠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교회가 뭔가 이득이 있다는 노림수를 가지고 종교 생활을 하는 짓거리는 저한테 합당치 않습니다.
저는 그러한 이익을 위해서 교회를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런 짓을 제가 할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럴 자격이 안 됩니다. 이게 바로 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왜 당신은 교회에 나오냐? 주께서 이끄시니까 나왔습니다. 주께서 새벽 4시 55분에 아무개야~~교회 나오너라~ 오늘 주일니다~하고 음성으로 알려 주셨던가요? 사무엘아~사무엘아! 세 번 부른 것처럼 그렇게 부르던 가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부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를 구획이라고 하는데 구획이라는 말을 아시죠. 이렇게 영역을 정해주는 것. 반드시 뭐가 있냐 하면 경계선이 있어요. 경계선의 특징이 뭐냐하면 ‘오지 마라!’에요. 올라오지 마라! 네가 관여 할 영역이 아니다. 오지 마라는 말은 “제가 요렇게 착하면 구원시켜 주겠습니까? 제가 순종하면 구원시켜 주겠습니까? 헌금을 목돈으로 내면 구원시켜 주겠습니까?
이 한 몸 오지로 가서 선교사로 목숨 바치겠습니다. 이러면 저를 구원시켜 주시겠습니까? 이런 모든 짓이 헛짓이라는 거에요. 이것을 소위 말해서 나대지 마라! 에요. 올라 오지마라!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이 오늘 하는 첫 번째 공식입니다. 구원=성부와 성자의 계약으로 구원이 되요. 여기에 인간이 끼어듭니까? 안 끼어듭니까? 끼어 들 수가 없어요.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돌아가는 거에요. 인간은 끼어 들 수 없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분을 뭐라고 하냐 하면 언약의 하나님이라 해요. 약속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란 뜻이 뭐냐 하면 언약적인 요소를 내가 제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한다. 그런 뜻이 함유되어 있어요. 옛날 고대 신화에 보면 전부 신과 연관되어 있어요. 이것을 우상이라고 하지요. 성경에서 우상이라 하든 말든 자기 민족을 통합시킬 수 있는 신이지요.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데 그 방법은 뭐냐하면 중재 할 수 있는 짐승이 필요 한 겁니다.
그 우상이 바로 사무엘 상 6장에 보면 블레셋이 아주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문제가 생기고 재앙이 생기니까 재앙을 달래기 위해서 계속 그들은 재물을 바치고 있어요. 그런데 효과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죽 읽어 보면 효과 없어요. 6장 4절에도
(삼상6:4)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이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냐? 그들이 다곤 신을 섬길 때 여기서 다곤 신은 인어 공주 모습이에요.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물고기 모습인데 그건 블레셋이 원래 해양 민족이에요. 해양 민족이었는데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한 것이 블레셋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양 민족은 어떻습니까? 파도가 잔잔해야 수입이 되요. 그런데 바다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인간은 이방인이거든요.
인간은 바다에선 못 살고 육지에서 살잖아요. 그래서 남의 영역에 갈 때는 좀 아부를 해야 되요. “바다에 있는 신이시여! 당신의 고기를 잠시 잡는 것을 용납해 주세요. 우리가 먼저 당신에게 필요한 양식을 우리 쪽에서 제시해 드릴 테니까, 우리가 필요한 바다 양식을 제공해 주시기 바랍니다.”이게 뭐냐 하면 계약이에요. 주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는 겁니다. 받아 드셨으면 내놓으시기도 해야지! 십일조 처먹었으면 30배, 60배, 100배 내놓으라는 거하고 똑같은 거에요.
이것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계약 사상이에요.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라는 말 있잖아요. 천국가게 하고 복을 주고 십자가로 구원을 했으면 입을 싹 닦고 그냥 있으면 안 되잖아요. 천국을 줬는데 십분의 일 정도는 내놔야 되지 않느냐 하고 이걸 목사들이 가르쳐요. 그러면 교인들이 순순히 순종하지 않아요. 계산기 들고 계산하는 거에요. 십분의 일이 커트라인이니까 십분의 일을 맞춰야 되는데 어떻게 맞추느냐?
집에서 교회까지의 기름 값을 계산해요. 두바이의 원유가 오를 때는 1,600원 가까이 되거든요. 그거까지 계산하고 다 합해서, 그리고 구세군 자선 남비에 얼마를 또 냈잖아요. 그거 낸 것까지 계산해서 십분의 일을 채우면 되니까 전부 계산기 들고 설치는 거에요. 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계약은 그런 계약 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하지 마라!“라는 계약을 인간은 상상도 못 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해도 소용없다!”는 계약.
네가 집을 갖다 바쳐도 이건 계약 성사가 되지 않는다. 끼어들 것을 끼어들어야지 이건 끼어 들 수가 없는 거에요. 여기서 오지 마라는 경계선이 뭡니까? 이미 추방된 입장에서는 주님의 원에 대해서 끼어들 수 없는 이유가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들을 아버지에게 바쳐서 언약이 성사되거든요. 제물로 바쳐지는 당사자가 인간이 아니무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그것이 어디에 나오냐? 히브리서 7장, 8장, 9장, 10장에 계속 나오는 거에요.
제사장이 제물을 바쳤다 그래도 소용없어요. 양을 바쳐도 소용없고 소를 바쳐도 소용없고 시편 50편인가에 보면 오죽 답답하면 그렇게 이야기했겠어요? 산에 있던 짐승을 바쳤다고 내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지마라! 산에 있는 짐승을 내가 거기 갖다 놨다는 말이죠. 내 것 가지고 이동시켜 놓고 제 것처럼 드린다는 수작을 부리냐 말이죠. 주님이 주신 것을 받았으면 내꺼는 게 일체 없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마치 기마에 쓰는 거처럼
설날에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새뱃돈을 주는 데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돈이 없지요. 없는데 빳빳한 돈을 받았다? 손자는 돈의 흐름을 생각하지요. 나에게 준 돈은 어디서 났나? 가만히 보니 자기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준 돈을 빼서 내게 준 거였어요.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돈을 드리지 않았다면 새뱃돈도 없어요. 얘들에겐 새배도 일종의 노동이니까.
이 세상의 종교라는 것은 자기의 것을 줍니다. 이것을 두자로 증여라고 합니다. 현대에는 별로 없지만 조선 시대에나 고려시대 때 옛날 농경 시대에는 농사를 짓기 위해 두레라는 것, 모든 것이 무상 제공해서 단합이 되어 있어야 해요. 정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서로 그렇게 돼야 되요. 수건돌리기를 할 때보면 반드시 자리 하나가 비게 되지요. 자리가 비지만 돌아가는 이유가 계속해서 이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사를 하면 알리면서 떡을 주고 하지 않습니까? 성질 이상한 사람은 받은 떡 음식 쓰레기로 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떡을 준다는 것은 뭐냐하면 이방인이 오더라도 텃새부리지 마세요라는 뜻이에요. 나는 당신의 구축된 것에 대해서 순응 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처음 왔으니까 잘 가르쳐 주세요라는 뜻이죠. 이게 증여라는 거에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고 받으면 아낌없이 높은 사람에게 댓가 없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증여의 특징은 댓가가 없습니다. 대가가 없으니까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에요. 뭐가 왔다 갔다 하냐? 인간의 정과 사랑이 왔다갔다하는 겁니다. 서울로 시집 간 딸을 위해서 엄마가 바리바리 싸서 김장때는 김치 담근 것 가지고 외국 이름으로 된 아파트 찾아서 막상 그 앞에 가서는 벨도 못 누르고 들어가지 못하잖아요.
참, 친정 엄마 말고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 입장에서는 갖다 버릴 수도 없고 난처해요. 입장이, 이걸 계속 먹으려 하니 남편이 화 낼 것 같고 두려하니까 평소 입맛하고 안 맞으니까! 옛날 촌 사람들은 증여라는 게 있어요. 댓가 없이, 지금은 그런 것이 왜 안 통하냐 하면 지금은 증여의 시대가 아니고 교환의 시대에요. 교환의 시대에는 물건 사고 나서 돈을 던져 줘도 괜찮아요. 예의 없이 던져도 사람들은 돈만 쳐다보기 때문에 그 사람의 태도를 보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젊은이들은 정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과 돈의 흐름만 교환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버르장머리나 사고방식이 뭡니까? 정을 내놓을 줄을 몰라요. 젊은 사람들은.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이러고 있다 말이죠. 사랑도 돈 주고 살꺼야! 돈으로 해결하는 거에요. 결혼도 전부 돈으로 계산하잖아요. 정으로 하는 게 아니고.
그러면 인간들의 자체적인 계약, 약속 체제는 하나님이나 다곤 신을 섬길 때 어떻습니까? 수건돌리기 하듯 하나님을 그 이웃한 옆에 비켜라! 비켜라! 해서 다곤 신 옆에 하나님을 빈자리 하나 마련해 주게 되면 평소에 인간들 끼리 하던 그 행세를 신(하나님)에게 그대로 하게 되면 자기가 구축한 사회 영역 체제에 신을 하나 더 모신 게 되요. 그렇게 되면 굉장히 수월하지요.
신이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제 때 비 내려 주고 농사 잘되게 해 주고 고기 잘 잡히게 해주고, 또 신에게는 구성원들이 달마다 제사를 드리고 “이 만큼 베풀어 주셨으니 우리가 가만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하고 성의를 표해요. 그것이 뭐냐하면 달의 초 그것을 월 삵이라고 합니다. 첫 달에 항상 뇌물을 바쳐요. 그렇게 해서 농경 사회가 돌아가는 겁니다. 그것을 제천의식이라고 합니다.
고조선 시대 이후에 주몽이 나타나서 부여, 옥저, 동예 있고 졸본 성에 고구려를 세우거든요. 국립 박물관에 가면 제천 의식하는 것을 해놨어요. 거기에 제사장이 누구냐 하면 왕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건 옛날이야기잖아요. 요즘은 왕도 없고 대통령도 촛불 시위하면 내려가야 되고 요즘은 자본주의 시대이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인구가 많고 국가라는 냉혹한 체제가 그렇지요.
촌이라서 가족끼리 집안끼리 한번 묶어 보세요. 마찬가지로 명절날 제사가 없으면 설날 아닌 거 같아요. 제사 지낼 때는 막나니 같은 가장이라도 그때만큼은 두루마기 다려 입고 전 날은 목욕탕가서 목욕하고 제사장 노릇을 합니다. 에헴! 하면서 향도 피워 두 번 씩 돌리고 홍동백서하고 영발, 영적 카리스마로 집안을 책임진다. 그래서 장남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재산을 전부 장남에게 물려주잖아요. 제사 잘 지내 달라고. 둘 째, 셋 째, 딸들이 가만있지 않겠지만,
어쨌든 옛날엔 그것이 전제가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의미 있는 달이나 해가 뜰 때는 자동적으로 비는 것, 그리고 제사드릴 때는 아무리 싸웠어도 잠시 휴전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용납이 되요. 이 말은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종교와 신앙은 살아 있다라는 겁니다. 살아있는 이 마음 가지고 교회에 갔다? 똑 같아요. 교회에서 하는 행세가 똑 같습니다. 이것을 이런 문장으로 대변해 줍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늘도 감동한다. 이것이 오늘 날 목회의 기술, 방법이에요. 딱! 이거 하나이고 나머지는 구색 맞추기에요. 가장 근원적인 것을 보면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을 다했으면 그 다음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정성을 다해, 돈 다려서 빳빳하게 헌금하면 그 다음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방 종교의 신을 통해서,
오늘 본문에 이방 종교에 신속에 언약궤가 들어오므로 말미암아 언약궤를 모셔 놓고도 의미도 모르고 취지를 모르는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해서 홀홀 단신 혼자서 언약궤가 일부러 포로로 잡히지요. 포로로 잡혀서 이방 민족을 한 바퀴 도는 겁니다. 블레셋의 언약궤에 대한 태도와 하나님이 백성이라고 우기는 이스라엘의 언약궤에 개한 태도가 다를 바가 있느냐? 없어요. 똑같아요. 똑같습니다. 가는 곳마다 재수가 없어요.
블레셋으로서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들은 정성이나 지성을 다했지만 망했다는 말이죠. 정성을 다했는데 망했다면 인간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어요. 그래서 비록 언약궤가 산 위에 있다가 산 밑으로 내려오지만 물론 언약이 내려와서 산 밑에서 상자는 만들고 내용물은 위에서 내려왔으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산 밑으로 내려왔지만 내려오더라도 기존의 인간 사회 영역에서 언약궤는 함부로 손 댈 수 없는 겁니다. 6장 19절을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삼상6: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 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자! 산위에는 모세와 하나님이 있습니다. 산 밑에서는 우상을 섬겼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것은 뭐냐 하면 ‘죽어 마땅함’ 이지요. 그런데 죽어 마땅하다고 회개해도 이 원리가 취소되는 게 아니에요. jd만 회개했다면 죽어 마땅합니다를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시켜 줘야 되요. 왜냐하면 나는 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를 계속 유지해 줘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요청으로 실시되는 것이 아님을 계속 살아있게 되요.
구원은 주님의 위쪽의 계획이지 내가 개입되고 내가 은근히 노리는 욕망의 산물이 아니라는 거에요. 십자가(사건)이 매일같이 반복 돼야 되는 이유가 매일같이 죽어 마땅함이 유지돼야 되는 이유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자로서 우리가 휘말려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원하는 구원을 주께서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구원은 주께선 아예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드러내는데 필요한 재료가 되어 버렸어요.
“이것 봐라! 이것 봐라! 자기 주제 파악도 안 되는 것이 뭘 원해? 구원을 원해? 너 한번 죽어봐라!” 구원을 해 주세요라는 그 자체가 “아하! 이 정도로 우리는 내 이익만 챙기는 인간이구나!” 의 온갖 티를 내는 거에요. 여러분! 금요 철야에서 기도하는 내용들을 한번 녹음해 보세요. 주~여! 하고 기도하는 것을 녹음기 대놓고 한번 들어봐요. 죽여주옵소서!라고 기도 하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살려 달라고 기도 하지요? 왜 살아야 되는데요? 관심사사 아예 저쪽엔 없어요. 그런데 가정에 문제 있다? 교회로 쫓아옵니다. “주여! 이러다가 우리 이혼하겠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현장에 계셨으면 이렇게 이야기 했을 거에요. “네가 이혼 안해야 되는 이유를 한번 대봐라!” 왜 이혼 안해야 되는데요? 실컷 죽어 마땅합니다~ 이래놓고 주께서 묻습니다. “너 이혼 안할래? 내 손에 죽을래?”
정말 네 말이 솔직하고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한다면 이혼을 당하던 애가 다치고 개가 죽던 상관없어요. 관심사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내 이익을 위해 산다는 자체가 죄라는 것을 늘 주께서 뽑아내기 위해서 내가 죄를 슬슬 뽑아내는, 마치 실을 뽑아내는 누에처럼 매일같이 이런 죄로 똘똘 말려있었구나라는 것을 뽑혀 나오는 기능을 하라고 주께서 우리를 구원에 합류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소한 일에도 감사 밖에 나올 게 없지요. 나중에 남편들이 퇴근해서 집에 오거든 감사하세요. 여보! 감사해요. 그만 이혼하고 안 살아도 되는데 감사해요. 나중에 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감사하세요. 어제까지 살다가 아침에 교통사고 당해서 안 죽고 멀쩡하게 들어오니까 감사하고 심지어 강아지한테까지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했으니.
지금 블레셋이 감당 못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도 감당 못해요. 결국은 하나님의 폭력인데, 하나님의 횡포 또는 하나님의 폭력입니다. 폭력을 계속 행사 하시면서 위에 있었던 언약궤가 아래 인간 세계에 합류되었으니 위기도 보통이 아닌 이런 위기가 없어요. 그러면 그런 하나님을 모시려면 정성을 드려선 안 되겠지요? 정성을 드리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뭐냐하면 정성을 드려야 할 당사자는 죽어야 되요? 살아야 되요? 계속 살아있어야 되잖아요? 살아 있어야 정성을 드리지 않습니까? TV화면에 나오려면 계속 TV가 제대로 가동이 돼야 되잖아요. 주께서 나의 정성을 원하신다면 주님이 생각이 있다면 정성을 뽑아내는 나를 죽이면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선교사들이 오지에 가서 선교 할 때 늘 주님을 이렇게 협박합니다. “주님이여! 지금이 위기입니다. 내가 죽으면 복음 못 전하잖아요. 주여! 살려 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을 해대는데 이건 살겠다는 것인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인지 본인이 살겠다는 것인지 구분이 안되요. 그리고 죽는데 자기 고향에서 죽어도 되잖아요. 왜 더운데 가서 죽습니까? 필리핀에 가서 왜 죽어요.
선교사들에게 묻고 싶어요. 본인이 있는 현장에서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구태여 멀리 나갈 이유가 뭐가 있느냐 말이죠. 고향을 떠나, 그 쪽에는 그 쪽에 있는 사람에게 맡겨 두고 이쪽은 이쪽에서 하지 왜 가느냐 말이죠. 취직하러 가는 겁니다.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 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거에요. 지금 한국 교회에선 오라하는 곳이 없거든요. 오라는 교회가 없으면 목회를 안 하면 되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게 교인이 없으면 안하면 되잖아요.
만약에 지난 수요 예배같이 교인이 한 명도 안 온다면, 제 아내도 없었거든요. 만약에 생중계가 안 된다면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인터넷)카메라로 접속하는 분이 한 두 분이 아니거든요. 카메라 보고 했어요. 오래 된 분들은 어색함을 못 느꼈을 것이고 저는 하면서도 아무도 없으니까 속으로 “정신 바짝 차리자!”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출 수 있거든요.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했었는데 다음엔 또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젠 아무도 없어도, 무슨 스튜디오도 아니고 말이죠, (웃음).
언약궤와 언약궤 주변에 아무도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언약궤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언약 백성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다운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블레셋이던 이스라엘이던,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언약궤에서 새로 생산하면 되요. 있는 그 자리에서. 그래서 선교사가 “내가 이 대전 바닥에 왜 있지? 여기서 복음 전하라고 하시는구나!” 선교사라는 말하지 말고.
지금 목사로 밥 먹고 살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제가. 복음을 전하는데 이 몸뚱이는 주의 것이고 이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전한다. 이게 자연스럽다는 말이죠. 난 어디에 가서 적성에 맞는 영업소를 찾나?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어디 가서 내 가족을 위해 밥벌이 하느냐 그 문제가 아니고
내가 신경 써야 될 하나! 내가 관심 둬야 될 유일한 하나! 그것은 자기가 사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지금 복음으로, 십자가로 살게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에요. 내가 살고 죽는 문제는 그것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에요. 아무런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요.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먼 곳까지, 오지까지 왜 갑니까? 오지 말라고 하는 곳에 그렇게 가서 잡혀서 몸값으로 25만불 지불하는 그 짓을 하고요.
아무리 주의 이름을 거론해도 그 배후엔 뭐가 있냐하면 나는 무조건 살아겠다는 강한 집념이고 집착이며 살겠다는 방법은 뭐냐? 정성을 다 하면 안되요. 정성을 다하면 산다는 거에요. 그걸 어서 배웠어요? 이방민족에게서 나온 거에요. 순수하면 되고 순진하면 된다는 겁니다. 순박하면 되고, 교인들이나 심지어 목회자들도 내놓는 것이 믿음을 내놓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순수합니다. 순진합니다. 순박합니다를 내놓으며 목사 안수 주세요! 나 권사 되게 해 주시고 장로 되게 해달고 이거 주장하고 있어요.
순수, 순진, 순박 이것도 돈 앞에서 다 깨어집니다. 돈 앞에서 다 들통 납니다. 복음을 위해서만 살겠습니다. 돈 안되니까 취직하는 거 보세요. 돈이 얼마나 소중한지, 제발 순수, 순진, 순박을 이 시간부로 개한테 줘버리세요! 이게 바로 배설물입니다. 더러운 우리에게서 매일 뽑아내는 죄에요. 이런 것을 장착해서 복 따내려 하는 겁니다. 얍삽한 짓을 한 거에요.
구원은, 천국은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고 언약에서 자동적으로 생산되는 겁니다. 생산 될 때 그 생산품 즉, 새로운 피조물과 언약 사이에는 뭐가 있나 하면 바로 하나님의 희생이 있습니다. 그 희생은 인간의 손이 타지 않은 희생이어야 되요. 그것이 어디에 나오냐 하면 6장14절에 있습니다. 한번 읽어 봅시다.
(삼상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자! 그 번제 드린 소를 사람들이 이랴! 이랴!하고 몰았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아까 자율 주행차라고 했지요. 소가 알아서 법궤를 몰은 거에요. 이 말은 법궤가 소를 이용한거에요. 소가 무슨 생갓이 있어서 법궤를 잘 몰아야지 하겠습니까? 법궤가 소를 인도 한거에요. 그 다음 벧세메스 사람들이 소를 잡을 때 본인들이 제공한 소입니까? 아니지요. 인간의 한계를 느꼈던 블레셋 사람들이 드린 제물 아닙니까?
“제발! 우리와 함께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데이트라고 하지요. 너무 심하게 당하고 딘 거에요.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횡포를 부리는 신과 함께 하는 상자를 건사한다는 것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 한 거지요. 식겁한 거지요. 그래서 소에 싣고 가도록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남은 것은 이스라엘 사람도 언약궤와 함께 있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도 나 몰라라 하고 내 놓고 남은 것은 언약궤만 단독으로 남지요.
그게 바로 언약궤가 보여줘야 될 본래의 취지이고 본 모습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돕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예수님을 왜 도와요? 우리가? 베드로가 건방지게 예수님을 도우려 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욕 얻어먹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베들의 목숨도 필요치 않아요. 예수님 제가 주를 따를 때 제 목숨까지 바치겠습니다. 아서라! 그 목숨 더러워서 안 받는다. 우리의 목숨도 안 받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안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헌금도 안 받고 우리의 기도도 안 받고 우리의 순박, 순종, 순진 다 안 받습니다. 우리의 열성 안 받고 우리의 성의도 안 받습니다. 그냥 주님께서 우리를 키우는 거에요. 집사님이 개를 키우면서 받은 게 뭐에요? 나중에 개 고기 먹고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개 키운데 있어서 개가 기여 한 바가 없어요.
이게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사야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소도 제 주인을 알건마는 이스라엘을 누가 키우냐 이 말이에요. 소도 제 주인을 안다 이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자들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인간을 대표에요. 택함 받았으니까, 인간을 대표한 그들을 통해서 얼마나 인간 속에 괴물이 들었는가를 낱낱이 들추어내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언약궤를 누가 만들었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거든요. 사람이 뭔가 자기가 만들게 되면 주도권을 가지려해요. 내가 뚝딱! 뚝딱! 만들었다는 거에요. 브살렐인가 만들었지요. 만들었으니까 다 압니까? 만들었으니까 안다고 생각해요. 기묘한 주의 능력이 임하니까 언약궤가 작용하고 기능하는데 있어서 내가 만들었다는 말을 끼어 넣을 수가 없는 거에요.
이건 언약궤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자식은 내가 엄마니까 내가 만들었지! 자식 생각엔 안 그럴 것 같아요. 그다지..제가 요번 수련회에서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가 자식에 대해서 뭘 알아요? 몰라요. 아니 몰라야 되요. 그래야 자식 키우는데 수월합니다. 그냥 낯선 젊은 아이가 우리 가정에서 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낯선 딸내미가 같이 사는 거에요.
그렇게 가리킨 시집도 안 간 딸내미가 사는 거에요. 말을 죽어라고 안 들어요. 시집가라 하면 삐져 가지고 짜증내고 또 취직 안하고 있으면 취직 언제 할래? 이놈의 자슥아! 공부 시킬 때 얼마나 애를 썼는데 취직을 안해! “엄마는 나에 대해서 알아?” 이렇게 하거든요. “엄마한테 말하는 거 봐라! 키워준 보람도 없이” 이러거든요. “엄마는 그 소리 언제까지 우려먹을래?” 그냥 출몰한거에요.
자식은 그냥 동거인으로 출몰한 겁니다. 가면 갈수록 아하! 이건 다른 존재이구나!를 점점 더 실감나게 느낄 거에요. 그렇게 느껴줘야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뭡니까?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그래서 자식에게 올인한다는 것은 관심사가 사소한데 관심을 두는 거에요. 정말 죽어 마땅하다고 한다면 그런 자식 문제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대범하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되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은 내가 원래 순박하고 착해서가 아니라 주의 생산물이 내 속에 장착되어 버린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에 대한 결과물로 인해 기존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주고 받는 그런 존재가 아니고 내가 봐도 낯선 현상들이 일어나는 내가 봐도 신기한 그런 마음가짐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 ‘극한자유’이지요.
극한 자유스러운 마음이 들 때.
왜냐하면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느 시점부터 어렴풋이 감 잡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필요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고 얼마나 주변애서 주눅 들었습니까? 주눅 들어서 온 몸이 다 아파요. 이것 네 자로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그 주눅 때문에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그렇게 잔소리 하던 사람도 나이 들어 늙으니 엄살 부리는 거에요. 그렇게 어른스럽고 의젓하고 대범해 보이던 그런 분들도 자기 몸이 아프니까 어리광을 부르는 겁니다. 아휴! 내가 저런 분에게 기죽어 살았나 싶을 정도로, 또 아무리 의젓했어도 돈 떨어지니까 비굴해져요. 인간은 돈이 없으면 비굴해 지는 거에요. 제가 지금 진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처럼 정리해 보면 아까 무슨 사회? 지금은 교환의 사회, 교환의 사회에선 뭐가 필요하다? 돈. 예전엔 정, 농경 시대이기 때문에 인구가 희박하기 때문에, 지금은 산업 사회이기 때문에 농사지으면 안돼요. 요새는 농사도 사업이에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쌀의 양이 일인당 170g도 안되요. 밥 두 공기도 안 먹어요. 지금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기업이거든요. 돈이, 이 세상은 정으로 살다가 돈으로 사는 것뿐이에요.
돈이 더럽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을 알아서가 아니라 제잘 정 주고 받고 살자! 옛날 이 그리워서 돈을 욕하는 겁니다. 돈 밖에 모르는 지옥같은 이 세상, 이 말은 뭐냐하면 복음을 알아서가 아니라 정이 그리워서 그런 거에요. 그럼 교회는 뭡니까? 교회는 개척교회 같이 작을 때는 정으로 유지하다가 커지면 돈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천국 안 가기는 마찬가지라니까요. 진짜 교회가 뭐냐 하면 교회 자체가 나를 살리는 게 아니고
이미 주께서 나를 새롭게 생산했다는 사실이 낯설게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극한 자유’ 이상하게 내 인생이 가벼워진다는 것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