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대전강의-극한자유 1701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3. 1. 18:02
2017-01-24 21:45:15조회 : 352         
사무엘상 22강(극한 자유), 마태복음 84강(자아 살해) 17012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주향 (IP:211.♡.24.139)17-02-15 18:36 

극한 자유 (삼상 6:10-16)                                                                                           대전-22강 

  

이근호   


2017년 1월 24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6장 10-16 

  


(삼상 6: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삼상 6: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삼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삼상 6: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삼상 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삼상 6: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삼상 6: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사무엘 상 6장 10절부터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암소 두 마리에 실려서 자율 주행이라고 하지요. 운전사가 없는데 알아서 다시 이스라엘 지역으로 오는 그 대목입니다. 언약궤는 상자거든요. 아카시아 상자에요. 궤라는 말이 상자이지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냐하면 언약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 판이 들어 있어요. 언약 판이 원래 어디에 있던 거냐하면 시내산 위에 있어요. 

  

높이가 2,200m정도 되는데 시내산 꼭대기에 하나님이 계셨고 산 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치고 있었고 모세와 여호수아가 올라오다가 중턱에서 여호수아는 남겨두고 모세 혼자 끝까지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언약궤는 원래 하나님이 준비한 게 아니고 없던 거에요. 없고 모세가 하나님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바위에 써서 모세에게 인계했고 모세는 내려오다가, 몇일 만에 내려오냐 하면 40일 만에 내려와요. 

  

40일이라는 것은 하나님 이쪽 세계에선 시간이 흐르지 안으니까 40일이라는 것은 없고 밑에서 사람들이 계산해 보니까 40일이 흐른 겁니다.
방금 제 말이 맞다면 언약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을 때 이것이 순수성이 유지 되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순수성이 유지 되겠지요. 그런데 이 언약이 어디서 수모를 당하느냐?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모세가 들고 산을 내려오다가 밑에서 파탄나는 겁니다. 

  

돌판이 깨지는데 이것을 언약이 깨어짐,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거든요. 이것을 네 자로 하면 ‘계약 파기’가 되는 겁니다. 부동산 중계소에서 계약했다가 계약 파기, 또는 약혼 해놓고 결혼식 날짜 잡아 놓고 안해 버리는 것. 결혼식에서 주례자가 묻습니다. 혹시 이 결혼에 반대하는 분 있습니까? 묻는데 “예! 반대합니다.” 하고 아줌마가 얘 하나 안고 들어오면 완전 파기 되지요.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구원에 대한 열의와 욕망으로 인간들이 혼자 착각한 거에요. 인간들에게 구원이라는 것의 아이디어나 끄집어 낼 수 있는 권리나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흔히 구원받았을 때, 복음 알았을 때 하는 멘트가 있어요. ‘죽어 마땅함’ 죽어 마땅한 죄인을 살려 줬다. 그런데 그 말도 너무 퍼지고 상투적으로 되다 보니까 그것도 시들어져요. 그냥 기계적으로 들 붙이는데, 

  


죽어 마땅함을 진정성 있게 하려면 앞에 뭘 붙여야 되요. 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이런 각오를 하는 것은 이 정도로 나오는데 이제는 알아서 죽이지 마세요라는 그런 뉘앙스가 강렬해요. 내가 (스스로) 죽어 마땅하다고 이야기 했으니까 죽음이 슬쩍 봐줘서 피해가 주세요라는 꼼수를 쓴 느낌이 들거든요. 

  


조용하게 이야기하기를 죽어도 아쉬운 게 없습니다. 이게 사실 죽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마땅함, 죽어도 별로 아쉽지 않습니다. 살려고 수술 하려는데 수술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이런 것. 이 말은 뭐냐하면 내가 구원 받으려고 길길이 뛰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이에요. 내가 천국 가려고 일부러 교회 찾아 나오지 않겠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교회가 뭔가 이득이 있다는 노림수를 가지고 종교 생활을 하는 짓거리는 저한테 합당치 않습니다. 

  


저는 그러한 이익을 위해서 교회를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런 짓을 제가 할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럴 자격이 안 됩니다. 이게 바로 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왜 당신은 교회에 나오냐? 주께서 이끄시니까 나왔습니다. 주께서 새벽 4시 55분에 아무개야~~교회 나오너라~ 오늘 주일니다~하고 음성으로 알려 주셨던가요? 사무엘아~사무엘아! 세 번 부른 것처럼 그렇게 부르던 가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부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를 구획이라고 하는데 구획이라는 말을 아시죠. 이렇게 영역을 정해주는 것. 반드시 뭐가 있냐 하면 경계선이 있어요. 경계선의 특징이 뭐냐하면 ‘오지 마라!’에요. 올라오지 마라! 네가 관여 할 영역이 아니다. 오지 마라는 말은 “제가 요렇게 착하면 구원시켜 주겠습니까? 제가 순종하면 구원시켜 주겠습니까? 헌금을 목돈으로 내면 구원시켜 주겠습니까? 

  


이 한 몸 오지로 가서 선교사로 목숨 바치겠습니다. 이러면 저를 구원시켜 주시겠습니까? 이런 모든 짓이 헛짓이라는 거에요. 이것을 소위 말해서 나대지 마라! 에요. 올라 오지마라!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이 오늘 하는 첫 번째 공식입니다. 구원=성부와 성자의 계약으로 구원이 되요. 여기에 인간이 끼어듭니까? 안 끼어듭니까? 끼어 들 수가 없어요.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돌아가는 거에요. 인간은 끼어 들 수 없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분을 뭐라고 하냐 하면 언약의 하나님이라 해요. 약속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란 뜻이 뭐냐 하면 언약적인 요소를 내가 제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한다. 그런 뜻이 함유되어 있어요. 옛날 고대 신화에 보면 전부 신과 연관되어 있어요. 이것을 우상이라고 하지요. 성경에서 우상이라 하든 말든 자기 민족을 통합시킬 수 있는 신이지요.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데 그 방법은 뭐냐하면 중재 할 수 있는 짐승이 필요 한 겁니다. 

  


그 우상이 바로 사무엘 상 6장에 보면 블레셋이 아주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문제가 생기고 재앙이 생기니까 재앙을 달래기 위해서 계속 그들은 재물을 바치고 있어요. 그런데 효과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죽 읽어 보면 효과 없어요. 6장 4절에도 

(삼상6:4)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이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냐? 그들이 다곤 신을 섬길 때 여기서 다곤 신은 인어 공주 모습이에요.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물고기 모습인데 그건 블레셋이 원래 해양 민족이에요. 해양 민족이었는데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한 것이 블레셋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양 민족은 어떻습니까? 파도가 잔잔해야 수입이 되요. 그런데 바다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인간은 이방인이거든요. 

  


인간은 바다에선 못 살고 육지에서 살잖아요. 그래서 남의 영역에 갈 때는 좀 아부를 해야 되요. “바다에 있는 신이시여! 당신의 고기를 잠시 잡는 것을 용납해 주세요. 우리가 먼저 당신에게 필요한 양식을 우리 쪽에서 제시해 드릴 테니까, 우리가 필요한 바다 양식을 제공해 주시기 바랍니다.”이게 뭐냐 하면 계약이에요. 주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는 겁니다. 받아 드셨으면 내놓으시기도 해야지! 십일조 처먹었으면 30배, 60배, 100배 내놓으라는 거하고 똑같은 거에요. 

  


이것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계약 사상이에요.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라는 말 있잖아요. 천국가게 하고 복을 주고 십자가로 구원을 했으면 입을 싹 닦고 그냥 있으면 안 되잖아요. 천국을 줬는데 십분의 일 정도는 내놔야 되지 않느냐 하고 이걸 목사들이 가르쳐요. 그러면 교인들이 순순히 순종하지 않아요. 계산기 들고 계산하는 거에요. 십분의 일이 커트라인이니까 십분의 일을 맞춰야 되는데 어떻게 맞추느냐? 

  


집에서 교회까지의 기름 값을 계산해요. 두바이의 원유가 오를 때는 1,600원 가까이 되거든요. 그거까지 계산하고 다 합해서, 그리고 구세군 자선 남비에 얼마를 또 냈잖아요. 그거 낸 것까지 계산해서 십분의 일을 채우면 되니까 전부 계산기 들고 설치는 거에요. 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계약은 그런 계약 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하지 마라!“라는 계약을 인간은 상상도 못 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해도 소용없다!”는 계약. 

  


네가 집을 갖다 바쳐도 이건 계약 성사가 되지 않는다. 끼어들 것을 끼어들어야지 이건 끼어 들 수가 없는 거에요. 여기서 오지 마라는 경계선이 뭡니까? 이미 추방된 입장에서는 주님의 원에 대해서 끼어들 수 없는 이유가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들을 아버지에게 바쳐서 언약이 성사되거든요. 제물로 바쳐지는 당사자가 인간이 아니무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그것이 어디에 나오냐? 히브리서 7장, 8장, 9장, 10장에 계속 나오는 거에요. 

  


제사장이 제물을 바쳤다 그래도 소용없어요. 양을 바쳐도 소용없고 소를 바쳐도 소용없고 시편 50편인가에 보면 오죽 답답하면 그렇게 이야기했겠어요? 산에 있던 짐승을 바쳤다고 내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지마라! 산에 있는 짐승을 내가 거기 갖다 놨다는 말이죠. 내 것 가지고 이동시켜 놓고 제 것처럼 드린다는 수작을 부리냐 말이죠. 주님이 주신 것을 받았으면 내꺼는 게 일체 없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마치 기마에 쓰는 거처럼 

  


설날에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새뱃돈을 주는 데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돈이 없지요. 없는데 빳빳한 돈을 받았다? 손자는 돈의 흐름을 생각하지요. 나에게 준 돈은 어디서 났나? 가만히 보니 자기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준 돈을 빼서 내게 준 거였어요.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돈을 드리지 않았다면 새뱃돈도 없어요. 얘들에겐 새배도 일종의 노동이니까. 


이 세상의 종교라는 것은 자기의 것을 줍니다. 이것을 두자로 증여라고 합니다. 현대에는 별로 없지만 조선 시대에나 고려시대 때 옛날 농경 시대에는 농사를 짓기 위해 두레라는 것, 모든 것이 무상 제공해서 단합이 되어 있어야 해요. 정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서로 그렇게 돼야 되요. 수건돌리기를 할 때보면 반드시 자리 하나가 비게 되지요. 자리가 비지만 돌아가는 이유가 계속해서 이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사를 하면 알리면서 떡을 주고 하지 않습니까? 성질 이상한 사람은 받은 떡 음식 쓰레기로 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떡을 준다는 것은 뭐냐하면 이방인이 오더라도 텃새부리지 마세요라는 뜻이에요. 나는 당신의 구축된 것에 대해서 순응 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처음 왔으니까 잘 가르쳐 주세요라는 뜻이죠. 이게 증여라는 거에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고 받으면 아낌없이 높은 사람에게 댓가 없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증여의 특징은 댓가가 없습니다. 대가가 없으니까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에요. 뭐가 왔다 갔다 하냐? 인간의 정과 사랑이 왔다갔다하는 겁니다. 서울로 시집 간 딸을 위해서 엄마가 바리바리 싸서 김장때는 김치 담근 것 가지고 외국 이름으로 된 아파트 찾아서 막상 그 앞에 가서는 벨도 못 누르고 들어가지 못하잖아요. 

  


참, 친정 엄마 말고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 입장에서는 갖다 버릴 수도 없고 난처해요. 입장이, 이걸 계속 먹으려 하니 남편이 화 낼 것 같고 두려하니까 평소 입맛하고 안 맞으니까! 옛날 촌 사람들은 증여라는 게 있어요. 댓가 없이, 지금은 그런 것이 왜 안 통하냐 하면 지금은 증여의 시대가 아니고 교환의 시대에요. 교환의 시대에는 물건 사고 나서 돈을 던져 줘도 괜찮아요. 예의 없이 던져도 사람들은 돈만 쳐다보기 때문에 그 사람의 태도를 보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젊은이들은 정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과 돈의 흐름만 교환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버르장머리나 사고방식이 뭡니까? 정을 내놓을 줄을 몰라요. 젊은 사람들은.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이러고 있다 말이죠. 사랑도 돈 주고 살꺼야! 돈으로 해결하는 거에요. 결혼도 전부 돈으로 계산하잖아요. 정으로 하는 게 아니고. 

  


그러면 인간들의 자체적인 계약, 약속 체제는 하나님이나 다곤 신을 섬길 때 어떻습니까? 수건돌리기 하듯 하나님을 그 이웃한 옆에 비켜라! 비켜라! 해서 다곤 신 옆에 하나님을 빈자리 하나 마련해 주게 되면 평소에 인간들 끼리 하던 그 행세를 신(하나님)에게 그대로 하게 되면 자기가 구축한 사회 영역 체제에 신을 하나 더 모신 게 되요. 그렇게 되면 굉장히 수월하지요. 

  


신이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제 때 비 내려 주고 농사 잘되게 해 주고 고기 잘 잡히게 해주고, 또 신에게는 구성원들이 달마다 제사를 드리고 “이 만큼 베풀어 주셨으니 우리가 가만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하고 성의를 표해요. 그것이 뭐냐하면 달의 초 그것을 월 삵이라고 합니다. 첫 달에 항상 뇌물을 바쳐요. 그렇게 해서 농경 사회가 돌아가는 겁니다. 그것을 제천의식이라고 합니다. 

  


고조선 시대 이후에 주몽이 나타나서 부여, 옥저, 동예 있고 졸본 성에 고구려를 세우거든요. 국립 박물관에 가면 제천 의식하는 것을 해놨어요. 거기에 제사장이 누구냐 하면 왕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건 옛날이야기잖아요. 요즘은 왕도 없고 대통령도 촛불 시위하면 내려가야 되고 요즘은 자본주의 시대이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인구가 많고 국가라는 냉혹한 체제가 그렇지요. 

  


촌이라서 가족끼리 집안끼리 한번 묶어 보세요. 마찬가지로 명절날 제사가 없으면 설날 아닌 거 같아요. 제사 지낼 때는 막나니 같은 가장이라도 그때만큼은 두루마기 다려 입고 전 날은 목욕탕가서 목욕하고 제사장 노릇을 합니다. 에헴! 하면서 향도 피워 두 번 씩 돌리고 홍동백서하고 영발, 영적 카리스마로 집안을 책임진다. 그래서 장남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재산을 전부 장남에게 물려주잖아요. 제사 잘 지내 달라고. 둘 째, 셋 째, 딸들이 가만있지 않겠지만, 

  


어쨌든 옛날엔 그것이 전제가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의미 있는 달이나 해가 뜰 때는 자동적으로 비는 것, 그리고 제사드릴 때는 아무리 싸웠어도 잠시 휴전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용납이 되요. 이 말은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종교와 신앙은 살아 있다라는 겁니다. 살아있는 이 마음 가지고 교회에 갔다? 똑 같아요. 교회에서 하는 행세가 똑 같습니다. 이것을 이런 문장으로 대변해 줍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늘도 감동한다. 이것이 오늘 날 목회의 기술, 방법이에요. 딱! 이거 하나이고 나머지는 구색 맞추기에요. 가장 근원적인 것을 보면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을 다했으면 그 다음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정성을 다해, 돈 다려서 빳빳하게 헌금하면 그 다음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방 종교의 신을 통해서, 

  


오늘 본문에 이방 종교에 신속에 언약궤가 들어오므로 말미암아 언약궤를 모셔 놓고도 의미도 모르고 취지를 모르는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해홀홀 단신 혼자서 언약궤가 일부러 포로로 잡히지요. 포로로 잡혀서 이방 민족을 한 바퀴 도는 겁니다. 블레셋의 언약궤에 대한 태도와 하나님이 백성이라고 우기는 이스라엘의 언약궤에 개한 태도가 다를 바가 있느냐? 없어요. 똑같아요. 똑같습니다. 가는 곳마다 재수가 없어요. 

  


블레셋으로서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들은 정성이나 지성을 다했지만 망했다는 말이죠. 정성을 다했는데 망했다면 인간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어요. 그래서 비록 언약궤가 산 위에 있다가 산 밑으로 내려오지만 물론 언약이 내려와서 산 밑에서 상자는 만들고 내용물은 위에서 내려왔으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산 밑으로 내려왔지만 내려오더라도 기존의 인간 사회 영역에서 언약궤는 함부로 손 댈 수 없는 겁니다. 6장 19절을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삼상6: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 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자! 산위에는 모세와 하나님이 있습니다. 산 밑에서는 우상을 섬겼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것은 뭐냐 하면 ‘죽어 마땅함’ 이지요. 그런데 죽어 마땅하다고 회개해도 이 원리가 취소되는 게 아니에요. jd만 회개했다면 죽어 마땅합니다를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시켜 줘야 되요. 왜냐하면 나는 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를 계속 유지해 줘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요청으로 실시되는 것이 아님을 계속 살아있게 되요. 

  


구원은 주님의 위쪽의 계획이지 내가 개입되고 내가 은근히 노리는 욕망의 산물이 아니라는 거에요. 십자가(사건)이 매일같이 반복 돼야 되는 이유가 매일같이 죽어 마땅함이 유지돼야 되는 이유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자로서 우리가 휘말려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원하는 구원을 주께서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구원은 주께선 아예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드러내는데 필요한 재료가 되어 버렸어요. 


“이것 봐라! 이것 봐라! 자기 주제 파악도 안 되는 것이 뭘 원해? 구원을 원해? 너 한번 죽어봐라!” 구원을 해 주세요라는 그 자체가 “아하! 이 정도로 우리는 내 이익만 챙기는 인간이구나!” 의 온갖 티를 내는 거에요. 여러분! 금요 철야에서 기도하는 내용들을 한번 녹음해 보세요. 주~여! 하고 기도하는 것을 녹음기 대놓고 한번 들어봐요. 죽여주옵소서!라고 기도 하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살려 달라고 기도 하지요? 왜 살아야 되는데요? 관심사사 아예 저쪽엔 없어요. 그런데 가정에 문제 있다? 교회로 쫓아옵니다. “주여! 이러다가 우리 이혼하겠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현장에 계셨으면 이렇게 이야기 했을 거에요. “네가 이혼 안해야 되는 이유를 한번 대봐라!” 왜 이혼 안해야 되는데요? 실컷 죽어 마땅합니다~ 이래놓고 주께서 묻습니다. “너 이혼 안할래? 내 손에 죽을래?” 

  


정말 네 말이 솔직하고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한다면 이혼을 당하던 애가 다치고 개가 죽던 상관없어요. 관심사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내 이익을 위해 산다는 자체가 죄라는 것을 늘 주께서 뽑아내기 위해서 내가 죄를 슬슬 뽑아내는, 마치 실을 뽑아내는 누에처럼 매일같이 이런 죄로 똘똘 말려있었구나라는 것을 뽑혀 나오는 기능을 하라고 주께서 우리를 구원에 합류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소한 일에도 감사 밖에 나올 게 없지요. 나중에 남편들이 퇴근해서 집에 오거든 감사하세요. 여보! 감사해요. 그만 이혼하고 안 살아도 되는데 감사해요. 나중에 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감사하세요. 어제까지 살다가 아침에 교통사고 당해서 안 죽고 멀쩡하게 들어오니까 감사하고 심지어 강아지한테까지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했으니. 


지금 블레셋이 감당 못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도 감당 못해요. 결국은 하나님의 폭력인데, 하나님의 횡포 또는 하나님의 폭력입니다. 폭력을 계속 행사 하시면서 위에 있었던 언약궤가 아래 인간 세계에 합류되었으니 위기도 보통이 아닌 이런 위기가 없어요. 그러면 그런 하나님을 모시려면 정성을 드려선 안 되겠지요? 정성을 드리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뭐냐하면 정성을 드려야 할 당사자는 죽어야 되요? 살아야 되요? 계속 살아있어야 되잖아요? 살아 있어야 정성을 드리지 않습니까? TV화면에 나오려면 계속 TV가 제대로 가동이 돼야 되잖아요. 주께서 나의 정성을 원하신다면 주님이 생각이 있다면 정성을 뽑아내는 나를 죽이면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선교사들이 오지에 가서 선교 할 때 늘 주님을 이렇게 협박합니다. “주님이여! 지금이 위기입니다. 내가 죽으면 복음 못 전하잖아요. 주여! 살려 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을 해대는데 이건 살겠다는 것인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인지 본인이 살겠다는 것인지 구분이 안되요. 그리고 죽는데 자기 고향에서 죽어도 되잖아요. 왜 더운데 가서 죽습니까? 필리핀에 가서 왜 죽어요. 

  


선교사들에게 묻고 싶어요. 본인이 있는 현장에서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구태여 멀리 나갈 이유가 뭐가 있느냐 말이죠. 고향을 떠나, 그 쪽에는 그 쪽에 있는 사람에게 맡겨 두고 이쪽은 이쪽에서 하지 왜 가느냐 말이죠. 취직하러 가는 겁니다.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 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거에요. 지금 한국 교회에선 오라하는 곳이 없거든요. 오라는 교회가 없으면 목회를 안 하면 되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게 교인이 없으면 안하면 되잖아요. 


만약에 지난 수요 예배같이 교인이 한 명도 안 온다면, 제 아내도 없었거든요. 만약에 생중계가 안 된다면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인터넷)카메라로 접속하는 분이 한 두 분이 아니거든요. 카메라 보고 했어요. 오래 된 분들은 어색함을 못 느꼈을 것이고 저는 하면서도 아무도 없으니까 속으로 “정신 바짝 차리자!”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출 수 있거든요.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했었는데 다음엔 또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젠 아무도 없어도, 무슨 스튜디오도 아니고 말이죠, (웃음). 

  


언약궤와 언약궤 주변에 아무도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언약궤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언약 백성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다운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블레셋이던 이스라엘이던,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언약궤에서 새로 생산하면 되요. 있는 그 자리에서. 그래서 선교사가 “내가 이 대전 바닥에 왜 있지? 여기서 복음 전하라고 하시는구나!” 선교사라는 말하지 말고. 

  


지금 목사로 밥 먹고 살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제가. 복음을 전하는데 이 몸뚱이는 주의 것이고 이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전한다. 이게 자연스럽다는 말이죠. 난 어디에 가서 적성에 맞는 영업소를 찾나?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어디 가서 내 가족을 위해 밥벌이 하느냐 그 문제가 아니고 

  


내가 신경 써야 될 하나! 내가 관심 둬야 될 유일한 하나! 그것은 자기가 사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지금 복음으로, 십자가로 살게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에요. 내가 살고 죽는 문제는 그것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에요. 아무런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요.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먼 곳까지, 오지까지 왜 갑니까? 오지 말라고 하는 곳에 그렇게 가서 잡혀서 몸값으로 25만불 지불하는 그 짓을 하고요. 

  


아무리 주의 이름을 거론해도 그 배후엔 뭐가 있냐하면 나는 무조건 살아겠다는 강한 집념이고 집착이며 살겠다는 방법은 뭐냐? 정성을 다 하면 안되요. 정성을 다하면 산다는 거에요. 그걸 어서 배웠어요? 이방민족에게서 나온 거에요. 순수하면 되고 순진하면 된다는 겁니다. 순박하면 되고, 교인들이나 심지어 목회자들도 내놓는 것이 믿음을 내놓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순수합니다. 순진합니다. 순박합니다를 내놓으며 목사 안수 주세요! 나 권사 되게 해 주시고 장로 되게 해달고 이거 주장하고 있어요. 

  


순수, 순진, 순박 이것도 돈 앞에서 다 깨어집니다. 돈 앞에서 다 들통 납니다. 복음을 위해서만 살겠습니다. 돈 안되니까 취직하는 거 보세요. 돈이 얼마나 소중한지, 제발 순수, 순진, 순박을 이 시간부로 개한테 줘버리세요! 이게 바로 배설물입니다. 더러운 우리에게서 매일 뽑아내는 죄에요. 이런 것을 장착해서 복 따내려 하는 겁니다. 얍삽한 짓을 한 거에요. 

  


구원은, 천국은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고 언약에서 자동적으로 생산되는 겁니다. 생산 될 때 그 생산품 즉, 새로운 피조물과 언약 사이에는 뭐가 있나 하면 바로 하나님의 희생이 있습니다. 그 희생은 인간의 손이 타지 않은 희생이어야 되요. 그것이 어디에 나오냐 하면 6장14절에 있습니다. 한번 읽어 봅시다. 


(삼상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자! 그 번제 드린 소를 사람들이 이랴! 이랴!하고 몰았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아까 자율 주행차라고 했지요. 소가 알아서 법궤를 몰은 거에요. 이 말은 법궤가 소를 이용한거에요. 소가 무슨 생갓이 있어서 법궤를 잘 몰아야지 하겠습니까? 법궤가 소를 인도 한거에요. 그 다음 벧세메스 사람들이 소를 잡을 때 본인들이 제공한 소입니까? 아니지요. 인간의 한계를 느꼈던 블레셋 사람들이 드린 제물 아닙니까? 

  


“제발! 우리와 함께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데이트라고 하지요. 너무 심하게 당하고 딘 거에요.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횡포를 부리는 신과 함께 하는 상자를 건사한다는 것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 한 거지요. 식겁한 거지요. 그래서 소에 싣고 가도록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남은 것은 이스라엘 사람도 언약궤와 함께 있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도 나 몰라라 하고 내 놓고 남은 것은 언약궤만 단독으로 남지요. 

  


그게 바로 언약궤가 보여줘야 될 본래의 취지이고 본 모습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돕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예수님을 왜 도와요? 우리가? 베드로가 건방지게 예수님을 도우려 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욕 얻어먹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베들의 목숨도 필요치 않아요. 예수님 제가 주를 따를 때 제 목숨까지 바치겠습니다. 아서라! 그 목숨 더러워서 안 받는다. 우리의 목숨도 안 받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안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헌금도 안 받고 우리의 기도도 안 받고 우리의 순박, 순종, 순진 다 안 받습니다. 우리의 열성 안 받고 우리의 성의도 안 받습니다. 그냥 주님께서 우리를 키우는 거에요. 집사님이 개를 키우면서 받은 게 뭐에요? 나중에 개 고기 먹고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개 키운데 있어서 개가 기여 한 바가 없어요. 


이게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사야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소도 제 주인을 알건마는 이스라엘을 누가 키우냐 이 말이에요. 소도 제 주인을 안다 이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자들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인간을 대표에요. 택함 받았으니까, 인간을 대표한 그들을 통해서 얼마나 인간 속에 괴물이 들었는가를 낱낱이 들추어내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언약궤를 누가 만들었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거든요. 사람이 뭔가 자기가 만들게 되면 주도권을 가지려해요. 내가 뚝딱! 뚝딱! 만들었다는 거에요. 브살렐인가 만들었지요. 만들었으니까 다 압니까? 만들었으니까 안다고 생각해요. 기묘한 주의 능력이 임하니까 언약궤가 작용하고 기능하는데 있어서 내가 만들었다는 말을 끼어 넣을 수가 없는 거에요. 

  


이건 언약궤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자식은 내가 엄마니까 내가 만들었지! 자식 생각엔 안 그럴 것 같아요. 그다지..제가 요번 수련회에서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가 자식에 대해서 뭘 알아요? 몰라요. 아니 몰라야 되요. 그래야 자식 키우는데 수월합니다. 그냥 낯선 젊은 아이가 우리 가정에서 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낯선 딸내미가 같이 사는 거에요. 

  


그렇게 가리킨 시집도 안 간 딸내미가 사는 거에요. 말을 죽어라고 안 들어요. 시집가라 하면 삐져 가지고 짜증내고 또 취직 안하고 있으면 취직 언제 할래? 이놈의 자슥아! 공부 시킬 때 얼마나 애를 썼는데 취직을 안해! “엄마는 나에 대해서 알아?” 이렇게 하거든요. “엄마한테 말하는 거 봐라! 키워준 보람도 없이” 이러거든요. “엄마는 그 소리 언제까지 우려먹을래?” 그냥 출몰한거에요. 

  


자식은 그냥 동거인으로 출몰한 겁니다. 가면 갈수록 아하! 이건 다른 존재이구나!를 점점 더 실감나게 느낄 거에요. 그렇게 느껴줘야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뭡니까?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그래서 자식에게 올인한다는 것은 관심사가 사소한데 관심을 두는 거에요. 정말 죽어 마땅하다고 한다면 그런 자식 문제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대범하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되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은 내가 원래 순박하고 착해서가 아니라 주의 생산물이 내 속에 장착되어 버린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에 대한 결과물로 인해 기존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주고 받는 그런 존재가 아니고 

내가 봐도 낯선 현상들이 일어나는 내가 봐도 신기한 그런 마음가짐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 

‘극한자유’이지요. 


극한 자유스러운 마음이 들 때. 

 왜냐하면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느 시점부터 어렴풋이 감 잡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필요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고 얼마나 주변애서 주눅 들었습니까? 주눅 들어서 온 몸이 다 아파요. 이것 네 자로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그 주눅 때문에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그렇게 잔소리 하던 사람도 나이 들어 늙으니 엄살 부리는 거에요. 그렇게 어른스럽고 의젓하고 대범해 보이던 그런 분들도 자기 몸이 아프니까 어리광을 부르는 겁니다. 아휴! 내가 저런 분에게 기죽어 살았나 싶을 정도로, 또 아무리 의젓했어도 돈 떨어지니까 비굴해져요. 인간은 돈이 없으면 비굴해 지는 거에요. 제가 지금 진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처럼 정리해 보면 아까 무슨 사회? 지금은 교환의 사회, 교환의 사회에선 뭐가 필요하다? 돈. 예전엔 정, 농경 시대이기 때문에 인구가 희박하기 때문에, 지금은 산업 사회이기 때문에 농사지으면 안돼요. 요새는 농사도 사업이에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쌀의 양이 일인당 170g도 안되요. 밥 두 공기도 안 먹어요. 지금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기업이거든요. 돈이, 이 세상은 정으로 살다가 돈으로 사는 것뿐이에요. 

  


돈이 더럽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을 알아서가 아니라 제잘 정 주고 받고 살자! 옛날 이 그리워서 돈을 욕하는 겁니다. 돈 밖에 모르는 지옥같은 이 세상, 이 말은 뭐냐하면 복음을 알아서가 아니라 정이 그리워서 그런 거에요. 그럼 교회는 뭡니까? 교회는 개척교회 같이 작을 때는 정으로 유지하다가 커지면 돈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천국 안 가기는 마찬가지라니까요. 진짜 교회가 뭐냐 하면 교회 자체가 나를 살리는 게 아니고 


이미 주께서 나를 새롭게 생산했다는 사실이 낯설게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극한 자유’ 이상하게 내 인생이 가벼워진다는 것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주향 (IP:211.♡.24.139)17-02-15 18:39 
자아 살해 (마 22:34-46)                                                                                            대전-84강 

이근호 

  

2017년 1월 24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2:34-46 

  

  

(마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마 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마태복음22장 34절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여기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하면 바로 하나님 주변에 인간들이 포진해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땅에 안 오면 인간은 자기의 본색을 모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땅에 오니까 예수님하고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서 숨겨놓은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어두움 이라고 해요. 

  

빛이 오매 어둠이 깨닫지 못 하더라 그러면 노출된 들켜버린 인간의 마음은 어떤 식으로 신을 섬기고자 했던가?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것은 이방민족에 관해 이야기 했지요. 블레셋, 그리고 그 당시 이스라엘도 이방 민족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이방 민족인 블레셋에게 졌잖아요. 그런데 율법이 주어지고 난 뒤에 신을 섬기는 방식은 새로운 노선이 마련됩니다. 

  

수서라는 곳에서 대전을 거쳐가는 새로운 SRT(Super RapId Train) 인가 하는 고속열차 노선이 새로 생겼어요. 전에는 서울역에서 대전을 거쳐서 갔는데 수서에서 가는 새로운 노선을 새로 까는 거에요. 그러면 전에 노선은 뭐냐하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획기적인 기적, 또는 성신에 취했다. 성신에 취하면 정신이탈, 정신이 혼란되는 것, 몽롱한 상태에 빠지는 거죠. 

  

인간은 이성적으로 따지는데 따지다가 신의 능력이 임하면 황홀한 상태로 빠져버립니다. 황홀한 상태(ecstasy) 그 사람을 선지자로 쳐져요. 선지자는 마치 술 취한 것처럼 성신에 취했다고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소문이 도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에도 공통적으로 있는 겁니다. 이런 것을 샤먼이라고 해요. 무당이라고 하지요. 샤먼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가만있다가도 신의 계시가 오면 벌벌벌 떨며 어떤 징후가 보여요. 

  

그러면서 뭔가 내뱉는 겁니다. 옛날 로마 그리스 시대에는 이 샤먼(Saman)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그랬어요. 심지어 이스라엘도 주변 이방 민족들의 영향을 받아서 남창이 있고 여창이 있었다 하잖아요. 원래 간음이라는 것고 이때부터 나온 것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이 믿는 신에게 합류하므로 남편으로 오시는 여호와에 대한 배신으로 봐서 간음이라 합니다. 신랑이 원래 한 명이면 신부도 하나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개인 구원은 없어요. 단일체로 보려면 이스라엘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동일한 원리가 있어야 되겠지요.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어떤 단일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단체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단체라는 토대 자체는 개인의 역량을 묻지 않아야 되지요. 그러면 그 토대 자체는 대표자가 있어야 되는데 그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왕이에요. 

  

대표자인 왕하고 맺은 것이 다윗언약이라는 것이고 이스라엘이나 유대는 왕만 잘되면 백성도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반면에 왕이 시원치 않으면 백성들이 고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계약 관계에 있어요.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되냐하면 우리의 왕이 누굽니까? 그리스도라 하는데 그리스도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왕이 백성이라고 인정해주면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고 잡아 죽이던 사울이라는 작자도 얼마든지 사도가 될 수 있어요. 사도 바울이 되거든요. 이런 관계입니다. 예수를 믿을게 아니고 그 앞에 뭐가 붙어야 되요. 주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주 예수를 믿어라를 풀이하게 되면 무슨 뜻이야 하면 ‘나의 왕이시여!’가 되요. 

  

왕이라는 말은 내가 있고 왕이 있는 게 아니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상의 소소한 모든 일들은 왕이 은혜로 베풀어 준겁니다. “오늘 왜이리 어깨가 아프나?” 왕이 아프게 하신 거에요. “오늘 왜 이렇게 날씨가 맑아?“ 왕이 날씨를 맑게 하신 거에요. 만유의 주가 되는 겁니다. 아까 어떤 목사님이 질문을 하셨어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왜 문제입니까? 뉴질랜드에서 라인으로 질문해서 답변해주었어요. 

  

성경은 예수님의 주권이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을 써도 괜찮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맞아 죽었습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어떤 표현을 할 때 성경엔 하나님의 주권도 나오고 예수님의 주권도 나와요. 

  

하지만 전하는 입장에서는 복음을 전해야 되거든요.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계획과 원칙은 하늘에서 정했어요. 어떻게 정했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하므로써 아버지까지 영광을 받게 짜여져 있어요. 그러면 성경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더라도 우리가 들을 때는 뭐냐하면 예수님의 주권을 앞장세운 것이 아버지의 주권에도 부합된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복음을 모르고 삼위일체라는 논리나 전해버리니까 성부 주권 따로 있고 성자 주권 따로 있어 버리면 누가 섭섭해 하냐하면 성령 주권 섭섭해 해요. 시아버지에 시어머니를 세분 모시려 하니까 이게 엉망진창이에요. 결국 위선자만 될 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게 뭐냐 주 예수를 증거하라는 그거 하나만 알면 되요. 

  

삼위일체 이런 거 말고 예수님이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본 것이고 나를 믿는 자가 아버지를 믿는 거에요. 왜 세분을 다 이렇게 못난이 삼형제 인형처럼 침대 맡에 올려놓고 세분 다 우는 이런 것을 왜 보고 있어요. 다윗 언약은 왕이 모든 것을 책임 져 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것이 뭐가 되겠습니까? 나의 미래와 나의 운명은 주께서 다 가져 가신 것 맞지요? 더는 제 미래에 대해서 걱정 안 해도 되지요? 이겁니다. 

  

그런데 철야 기도를 보면 온갖 걱정을 다가져 오는 지? 어디서 쓰레기는 다 들고 와요. 왜 답답하고 컬컬한 건 다 가져 오는지? 컬컬하면 막걸리나 마시든지 온갖 것 다 가져 와요. 그러면 목사들은 둘러보고 오늘도 장사 잘되겠네! 저희 집 옆에 절이 있어요. 그 절을 보면 수시로 그 짓 하고 있어요. 비는 것, 중도 없어요. 중은 녹음기 틀어놓고 가버리고 회색 보살 몸빼 알지요? 추울 때는 누비로 되어 있는 것. 

  


차암! 세상에 사기꾼도 이런 사기꾼이 없어요. 중 볼 때마다 다 사기꾼으로 보여요. 인간의 나약한 한 맺힘을 이용해서 돈 빼먹는 겁니다. 중이나 목사나 다를 바가 뭐 있어요? 똑같지요. 왕이 이미 결정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남은 것은 뭐냐? 예수님이 내려 주신 사다리가 어떤 종류이나 그것만 보면 되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인정 안 한거에요. 

  

인정을 안하니까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상황에서 노선이 두 개가 된 겁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하나는 기적, 기적을 베푸는 것, 병을 고치는 것. 가락 강의에서도 이야기 했지요 중풍병자가 왔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네 병이 나았다가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병 낫고자 지붕 뚫은 것도 죄다. 너는 병이 문제이지 내가 보기엔 죄가 문제이다. 너는 올 때 죄를 그대로 가져 왔다는 거에요. 

  

아픕니다! 이 아픈 것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그게 비로 죄야!”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사다리,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나는 너를 위해 죽었는데 너는 왜 살고자 하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사는데 힘들어 못 살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에요. 그러면 주니께선 “내가 힘들게 했어? 이 인간아! 네가 행실을 잘못하고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고 내가 일부러 힘들게 했어! 그런데 너는 마귀에게 속아서 착하면 덜 힘들거야! 착하면 이 저주가 풀릴거야!” 

  

자꾸 마귀의 꾀임에 빠지는 거에요. 그 마귀 역할을 누가 해주는가!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해 주는 거에요.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은 율법을 무시하기 때문에 기적과 정성의 노선이 있다면 바리개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노선을 까는 거에요. 위로 올라가려고 사다리를 놓는 거에요. 율법으로. 그러면 그들에게 율법은 그들에게 주어졌잖아요. 율법 책이, 경전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구약을 가지고 사다리를 놓겠지요? 밑에서부터 점점 올라가겠지요. 그 정점에 누가 있다고 보는 겁니까? 바리새인 자신들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자부하고 장담하며 큰 소리 치는 이유가 뭡니까? 그들의 눈에는 늘 못난 사람과 비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소위 장로들이나 간부급들이 목사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에 함부로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하면 교회 법 지키고 성경 지키는 데 있어서 자기들이 시간이 남아돌잖아요. 새벽 기도를 나오세요라고 목사가 명령을 했다, 고난주일을 앞두고 새벽 기도를 나오라고 했다 이걸 한번 적어 볼께요. 새벽 기도를 나오라고 했다 밑에 뭐가 깔려 있습니까? “헤!헤! 나는 갈 수 있는데” 이게 깔려 있지요. 

  

그런데 편의점 아르바이트 한다고 새벽 3시에 일하는 아줌마가 새벽 기도에 나올 수가 있습니까? 못 나오잖아요. 못 나온다는 말은 이미 목사가 제시한 새벽기도 나오세요에 미흡하니까 일단 교회 안에서 갑 질하는 것을 용납하라! 이러한 질서가 잡히는 거에요. 이게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에요. 

  

어떤 교회에 공학 박사가 왔다. 돈 잘 벌지요. 똑똑하지요. 이런 분들이 살면서 어디에 몰두 하겠어요? 자기 일에 몰두하겠지요. 몰두하게 되면 성경에 대해 아마추어가 되잖아요. 아무리 박사가 되고 뭐가 되도 기껏 집사 밖에 안되고 집사는 누구에게 진다? 목사한테 꿀릴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그런데 집사가 목사에게 대드는 사건이 있었어요. 뭐냐하면 새누리당 집사는 서창원이 집사이고 임명진은 목사이고 한쪽은 거짓 목사님이라고 욕하고 다른 쪽에선 집사는 가만있어라 하는 거에요. 그리고 어떤 여자 집사인데 얘 키우고 살림살이하고 돈 번다고 바쁘다. 이런 집사는 교회가면 목사에게 꿀릴 수밖에 없지요. 성경도 잘 못 보니까 

  

그런데 이런 권사들이 있어요. 자식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나이는 60넘어서 할 일이 없어, 할 일이 없어 CBS 방송 듣는다. 방송으로 설교 듣기 시작하는 거에요. 성경 보고, 그럴 때 어떤 신참 목사가 와가지고 “권사님! 이래도 됩니까? 당회장이 영발 세운다고 했더니만 권사가 ”목사님 지난 설교를 보니 틀렸는데요! 이렇게 나오면 다른 데선 다 큰 소리쳐도 그 권사에게는 약간 갑 질을 보류해야 되요. 

  

또 그 권사가 집에 있어야 되는데 새벽기도 나오라 하니까 나오네! 이게 문제가 되요. 안 나와야 되는데, 갑 질 좀 하게, 안 나오게 되면 “권사님 뭐하십니까? 이제 연세도 그렇고 자식들 위해 신앙을 위해서 중보기도 해 주셔야지요!” 이어고 싶은데 계속 나오네! 나오는거 보다 더 미운 것은 목사보다 더 오래 기도하는 것. 눈치도 없고 이건 코치도 없고 뭐에요. 교회 질서에 문제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러면 목사가 참다 참다 이런 말 합니다. 꼭! 교회 문제 있는 것들이 봉사한다고 한 마디 하고 지나가면서 툭 던지죠. 그러면 권사가 “목사님! 저보고 이야기 했습니까?” 아이고! 권사님에게 이야기 할 일 있습니까?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거에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지금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 왜 내 죄가 실타래처럼 계속 나오니까. 

  

이게 주께서 내어준 사다리인데 바리새인들은 뭐니까? “어디 천박하게 기적을 해!” 기적이라는 것은 딱딱 끊어져요. 한본 써먹었던 기적이 그 다음엔 먹히질 않아요. 이건 소 뒷발 치다가 쥐 잡는 꼴이에요. 한 번 한 것을 수십 년 우려먹을 수가 있어요. 처음에는 한 두 번은 속아요. 사람들이 야! 영발 있다. 그런데 같은 멘트 계속 날리면 영발 다 떨어졌나보다 해서 이제는 그 권위에 복종 안 해요. 

  

그래서 기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천박한 인간들이 하는 짓이라고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해요. 이건 딱딱 끊어지니까! 단절되어 있으니까, 그러면 계속 이어질 것은 뭐만 있습니까? 역시 율법으로 천국 가는 길, 그것이 최고지요. 성경책은 늘 있으니까, 염불같이 외우고 실천에 옮기면 되니까! 그래서 유일한 노끈이 뭐냐? 동아줄이라고 합니다. 붙드는 유일한 동아줄이 뭐냐? 그게 바로 율법이라는 거에요. 

  

자! 여기서 질문 하나 할께요. 십자가를 붙들면 구원 됩니까? 안 됩니까? 구원이 안 됩니다. 동아줄 같은 거에요. 십자가를 붙들면 왜 구원이 안 되냐 하면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자가 입으로 십자가가 뭐꼬? 이렇게 나옵니다. 십자가가 뭔데? 십자가를 우리가 붙들면 사적인, 개인적 십자가가 되요. 

  

그런데 다윗 언약에 의하면 개인 용도로 십자가를 준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살리는 십자가라면 이것 가지고 소유해서 살면 되는데 우리를 죽이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를 참신하게 바꿉시다. 오직 내 안에 내가 아니라로 내가 아닙니다. 여기서 내가는 죽었고가 합당하고 연결돼야 하고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살아있다고 할 때는 숨 쉰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 주셔서 말씀으로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 증거하라고 살아 있습니다. 살아있는 체로 예수님 증거하라고 제가 지체로써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붙드는 것은, 붙들지 마세요. 십자가를 붙든다는 게 말이 안돼요. 어떤 엄마가 한 살 먹은 애의 손을 잡고 갈 때에 “ 너 엄마 손 꼭 잡아라!” 이렇게 하지요. 그러면 그 말 듣고 꼭 잡지요. 

  

애가 꼬옥 안 잡으면 애 버릴 거에요? 왕인데 백성을 버리겠습니까? 안 버리지요. 부모가 자식을 안 버리지요. 소 주인이 소를 안 버리듯이 안 버립니다. 안 버린다는 것을 언제 아느냐? 자기가 주님을 생각 못하고 엉뚱한데 관심두고 얼굴 돌리면서 신경 썼을 때, 중요하지 않는데 본인에게 당장 일이 터지니까, 당장에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생각하다 보니까 뭐를 잊어버리는 가? 

  

내 인생은 내가 책임 진다로 돌아서 버린 거에요. 늘 주님 생각하다가 그 때 그만 주님 생각 안 한 거에요. 주님 생각을 하는 것이 하루 중에 5초이고 생각 안 할 때가 23시간 59분 55초가 되는 거에요. 그냥 남들처럼 살 때가 인간답다로 쭈욱 매여 살다가 갑자기 “내가 죽었지!”하며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자각할 때는 성령이 침을 줘야 되요. “어잇! 정신차렷!”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실 사람이 다급하다는 것은 예상 못한 일을 당할 때 사람은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 다급해요. 뭐만 생각하면 되요? 왜 내가 예상 못한 일이 닥치는가? 누가 그렇게 합니까? 왕 되시고 주되시는 예수님께서 정신 차렷! 하고 나한테 주사 놓으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연쇠 됩니까? 아닙니까? 연속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연속이냐 아니냐는 이건 좀 어렵습니다. 

  

인생을 하나의 선으로 보게 되면 연결되어 있는 연속 이것을 율법이라 했지요. 딱딱 끊어지는 것을 기적이라고 했지요. 제가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인간 쪽에서 신에게 다가갈 때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다가 갈 때 이 두 가지 경우가 나타났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다가갈 때는 율법적일까요? 기적적일까요? 둘 다 아니에요. 동그라미에요. 이것을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정지가 되요. 시간이 정지되면 선이라는 것도 무의미해지는 겁니다. 강아지가 이 집에 사는데 강아지가 혼자서 TV보다가 고독에 잠긴다 합시다. “나는 오늘 하루는 아침에 사료 먹고 하루를 보람되게 살았을까? 이렇게 하면 주인이 와서 ”이 강아지가 놀고 있네! 너는 우리 집 안에 들어 있어!“ 

  

그런 사적인 히스토리, 사적인 역사와 인생 추억이니 안에서는 무의미 한거에요.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이에요. 캡슐 안, 그리스도와 함께, 그 안에서는 시간이라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백년을 살아도 안개 같은 순간이라는 거에요. 손바닥 만 한데 이것을 오므려 버리면 날아가고 없어요. 

  

자기가 살 동안에는 산다는 것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실감나게 아프지만 마음이 쓰리고 아프지만 내가 죽고 난 뒤에 6개월 내지 일 년 어떤 사람은 6개월만 지나도 잊혀진 존재입니다. 지금 요양원에 모셔나도 잊혀진 존재인데요. 눈에 띄는 곳에 없으니까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안에 들어 있다는 말은 늘 돌아온다는 말이 아니에요. 돌아오면 선이 되어 버려요. 돌아오면 10월의 마지막 밤이 되어 버려요. 

  

해마다 10월 31일만 되면 10월의 마지막 밤인 노래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노인들이 옛날 추억 생각하면서 화장 짙게 한 아줌마 찾아서 촌에 다방을 찾듯이 우리는 그냥 예수 안에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선교라는 것도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 안에 내가 사는 이지점에서 주께서 하시는 것이 선교이지 정신 차려서 아프가니스탄 가고 이게 선교가 아니에요. 매일 주어지는 날이 선교 날이고 선교지고 그런 거에요. 

  

하늘에서 별 딸 생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별 따서 뭐 하려고요? 하늘의 별은 철광석으로 되어 있어요. 그냥 암석으로, 하늘의 별 보고 싶거든 광산에 있는 아무 돌이나 줏으면 그게 별이 타다 남은 운석들이라니까요. 왜냐하면 시간이 오래되면 원자가 제일 무거운 원자로 변하거든요. 철이 제일 안정된 것이기 때문에 철로 변한 겁니다. 가끔 다이아몬드도 나오기도 하지만.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주신 게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율법 전체를 두 개로 축소시킨 겁니다. 이것을 요번 수련회에선 뭐라고 했습니까? 응축이라고 했지요. 두 개로 축소했다가 나중에 뭐로 바뀌게 되요? 하나로 되지요. 하나를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사랑이라고 했지요. 사랑이 두 개로 축소 된 것을 보면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고, 

  

그래서 이 두 사랑의 공통점을 뽑아내 보니까 마지막 하나가 사랑이 되는 거에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그렇다면 율법에서 사랑으로 끄집어내면 되는데 끄집어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을 끄집어내려면 율법에 대해서 율법 준수의 주체자가 둘이 되는 겁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하나는 바리새인 및 인간, 모든 인간, 모든 인간이 법을 지키고 이방인들은 양심이 율법으로 되어 있어요. 

  

또 한 분 누가 있어요? 예수님이 지키는 법이 있어요. 예수님이 지키면 뭐가 나오겠습니까? 율법의 완성이 되겠지요? 그게 뭐냐하면 이웃 사랑과 하나님을 예수님이 사랑이라는 형식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인간이 지켜버리면 계속 누구의 사랑으로 되돌아가 버립니까? 이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율법을 지켰다는 자기 자신을 부정 할 수가 없어요. 논리 상. 지키는 당사자를 없애버리면 율법은 누가 지키는 데요? 누가 지킬 거에요? 

  

그럼 예수님만 사랑할 수 있고 율법을 완성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못할 이유가 뭐냐? 그것은 예수님에게 물어봐야 되요. 예수님은 내가 사랑이다라고 말로 했습니까? 아니면 실천으로 옮겼습니까? 그 실천이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에요. 그런데 십자가를 지신 분이 예수님 한 분 뿐이냐 아니면 또 있냐를 보란 말이에요. 보니까 예수님 한 분 뿐이죠. 

  

그렇다면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율법을 지켜도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이 나온다? 안 나온다?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믿는 거에요 우리가. 내가 아무리 법을 지켜봐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가 제공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거에요. 죄인 중에 괴수라하며, 성도라는 사람이 그것을 이야기하고, 그럼 그것을 이야기 할 때 뭐가 되냐하면 주님의 사랑이 현실화 된 거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깨닫게 하시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겁니다. 그게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막달라 마리아지요. 울면서 향수를 뿌리지요. 평소에 그 여자가 향수를 모은다고 얼마나 신경 많이 썼겠습니까? 그런데 한 쪽에 향수 들고 한 쪽에 주님을 보고, 한 번 견주어 보세요. 두 개 다 가지지. 본인이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에요. 두 개 다가 용납이 안 되는 거에요. 

  

이 향수가 있다는 것은 주님의 존재가 본인 입장에서는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향수를 깨어 버렸다는 것은 뭐를 의미하는 거냐하면 ‘자아 살해’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거에요. 이것을 예수님이 뭐라고 하냐 하면 나의 장례식을 위해서 네가 향수를 뿌렸다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장례에 누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죽어 마땅합니다. 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 그런 자와 합류된 장례를 주께선 준비하신 거에요. 십자가에서. 

  

그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앞당겨 보는 거에요. 요한복음 11-12장에 나온 말씀일거에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에요. 향수를 뿌려서 나의 장례를 예비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자들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자기 살해하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카메라고 뭐고 다 부술까요? 이 강아지도 마지막 날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데(방해 되서), 

  

부셔서 십자가를 예비하는 것은 십자가 이전까지이고 십자가 후에는 주시거든 챙기세요. 다 어디서 온 겁니까? 다 십자가 희생에서 주신 거니까! 하늘에서 비 내리거든 감사하고 눈 오거든 또 감사하고 서리 내리거든 감사하고 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거에요. 모든 게 주께서 다 주신 겁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거에요. 뭐를 드리고 할 것도 없이 안 바쳐도 줴서 다 세뱃돈 주신 거에요. 

  

세뱃돈 주듯이 주께서 무한 증여 하신 겁니다. 우리에게 주신 거에요. 성도는 그 증거로 사는 겁니다. 그 사랑으로 사는 거에요. 그런데 새삼스럽게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관심사가 예수께 없다는 뜻이에요. 없으니까 요만큼 한 것을 가지고 30배, 60배, 100배 달라고 내밉니다. 도둑놈도 이런 도둑놈이 없어요. 

  

목사들도 사기를 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만 있다면 30배, 60배, 100배로 얻어 낼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인생이 괴롭고 저주받고 힘들고 매 맞는 것은 믿는다고 우기지만 따지는 믿음이라 그런 것인데 어린 아이 같은 믿음, 다시 말해서 목사가 때리면 그냥 맞고 돈 내라 하면 내고 교회에서 하라하면 하고 전도 집회하면 하고 제발 좀 어린 아이 같은 믿음만 가지면 복이 오지 말라고 해도 복이 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이죠. “이래도 아멘 안 하지?” 반말 조로 나가지요. 그러면 “아~멘!” 하면 “목소리 봐라!” 하고 “아~멘!” 하면 “할렐루야 붙이고!” 하고 “할렐루야!” 평소에 이런 식으로 사육 받던 사람이 가끔은 저한테 목사님! 할렐루야~이렇게 나온다고요. 버릇이 얼마나 들었으면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복이 온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있는 저주가 해결 되고 붙어 있는 더러운 저주가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건 남묘호렌게쿄도 아니고. 

  

제가 진짜 목회자에게 말하고 싶은 게 그거에요. 목회 성공 할 생각 하지 말아야 되요. 세상 자체가 어두운데 무슨 신자가 있겠어요? 신자가 없는 거에요. 혹시 있거든 기적인 줄 알게 되지 요렇게 설교하고 요렇게 쉽게 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런 헛된 망상은 본인부터 지옥가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이왕 신학교가게 하셔서 말씀 보게 했거든 세상이 왜 지옥이고 왜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이 왜 구태여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를 실감하면 실감 할수록 죄 용서 해준 고마움이 점점 커집니다. 본인이라도 늘 감사하며 살면 되요. 그게 전도이고 그게 선교에요. 그게 바로 목회에요. 

  

목사의 목회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것 밖에는 없어요. 그래서 성도간의 만남도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 밖에는 없어요. 교회가 조금 크면 다단계가 뛰어 들어요. 돈 불려 줄게요. 이자 꼬박꼬박 드립니다. 교회가 조금 크면 그런 게 있어요. (교회) 앞에다 약국 차렸는데 소망 약국이라고 써서 감사 헌금하면, 그러면 또 목사는 눈치체고 “이번에 소망 약국 개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건 간접 광고에요. 헌금 한 게 아니고 광고비 드린 거에요. 

  

율법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건너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에요. 거기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동의했겠습니까? 미워했겠습니까? 미워했겠지요. 그 미움이 사랑을 낳게 하는 동기로서 필히 발생 돼야 될 일입니다. 발생 돼야 될 현상이에요. 미워하는 자가 있어야 주님이 죽게 되거든요. 그러면 오늘날 이 미움의 역할을 누가 해야 됩니까? 바로 우리가 해야 되는 거에요. 이미 구원은 챙겨 놓고, 

  

“주님 미워!” 그 쉬운 일을 마다 할 일이 있습니까? “기도 했는데 왜 응답 안 해줘잉~미워!” 우리는 눈만 뜨면 미움 밖에 나오지 안는데 그 역할을 원 없이 신나게 평생 동안 이거만하면 되요. 헌금 하려고 가져 왔는데 갑자기 길이 눈이 와서 미끄러워 넘어져서 뼈가 부러졌다. 가만히 계산해 보니까 뼈 부러진 거 치료비하고 헌금 하려 했던 것을 비교해보니 헌금이 더 적은 것 같애! 삐졌다. 

  

헌금하려고 했는데 주님이 밀어서 넘어져서 다쳤으니 헌금은 그냥 없던 걸로 퉁 칩시다. 원망은 안 할 테니 퉁 칩시다. 이런 사고방식이 매일 일상 속에 피어나옵니다. 늘 피어나옵니다. 고3이니까 눈 감아 주세요. 다음에 헌금 만원 더 올려 드릴테니, 이런 것. 우리 아들 지금 고 3인데 공부해야 되니까 주일에 교회 안 보내겠습니다. 그 대신 헌금 만원 더 얹어 드릴께요. 이러한 계산이 우린 수시로 나와요. 

  

그 다음 봅시다. 사실은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계명이 누가 복음 10장에 보면 늘어났어요. 누가 복음10장 36절에 보면 뭐가 첨가 되냐 하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굽니까? 이렇게 나왔어요. 그래서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이 뒷부분에 나오는 거에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선한 사마리아인임을 알려 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마태복음 22장 계속 봅시다. 41절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앞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는데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예수님 쪽에서 바리새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던진다는 말은 그 만큼 예수님 자신이 죽어가는 길을 재촉한다고 보시면 되요. 격차를 점점 더 벌여 놓는 거에요.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지도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장악을 해줘야 되지요. 안 그러면 나라에 혼란이 일어나니까 그러면 혼란이 유발되게 되면 방법은 이런 겁니다. 공동체에서 헌란을 유발하는 자를 뭐라고 하냐하면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면 신에게 혼란의 요소를 전처럼 자기들의 질서를 바꾸려면 이 죄인을 희생물로 바쳐야 되요. 

  

바칠 때 희생물이 더러우면 안 받기 때문에 대신 누가 깨끗한 것을 희생해서 추방되는데 추방되는 자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유발하게 만들어 버려요. 이게 모든 고대 민족들의 제사법입니다. 시집도 안 간 처녀를 잡아서 아직 뭔가 밝혀 지지 않은 자기들 공동체에서 아직 꼼지락 거리며 남아 있는 질서를 어지럽히고 남에게 해코지한 범죄인으로 하여금 시집 안 간 생 처녀가 심장 도려내 죽는 것. 아즈텍 문화 멕시코의, 

  

그 제사에 참여 할 때 뭘 느끼겠습니까? “아! 나 때문에 저 아가씨가 죽는구나! 다시는 이런 죄 안 져야지!”라고 양신에 가책이 되면 오는 해에는 나쁜 짓을 줄였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축복이 그 만큼 더 많아지겠지요. 이것이 일반 제사입니다. 조산 제사도 마찬가지이고, 이게 어디에 나오냐 하면 사사기에 나옵니다. 사사기에서 입다가 아람나라와 전쟁 하면서 입다 이 사람이 길르앗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그 쪽 동네 제사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치는 제물로 뭘 내놓으냐 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을 바치겠습니다. 딸이 나온다면 그런 소릴 안 하겠지요. 딸이 있어야 자랑 질 할 수 있잖아요. 평소라면 염소 새끼나 닭 새끼가 나왔겠지요. 심지어 종이라도 괜찮아요. 종은 죽여도 괜찮거든요.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십니까? 

  

분명히 입다는 하나님의 실무자로 일을 했음에도 북구하도 하나님은 그 실무자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모든 승리를 소급해서 하나자신의 공로로 돌리기 위해서 실무자가 내가 했다는 요소를 주께서는 부끄럽게 만들어 버려요. 아주 비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뭐냐하면 여러분! 죽은 자가 비참하겠어요? 살아서 죽은 자를 보는 게 비참하겠어요? 산자가 비참해요. 심지어 죽은 자가 누굽니까? 외동 딸. 

  

천하에 순실이도 정유라 이야기하면 눈물 난다 안 합니까? 그렇게 입다를 최순실로 보고 딸을 정유라로 본다면 감옥살이 안해도 그 자체가 감옥살이 일것다 말이죠. 손들고 차라리 누가 죽는다? 죽이려면 나를 죽여야지 왜 아무 죄 없는 딸을 죽이냐는 말이죠. “네가 큰 소리 쳤잖아!” 그러면 입다가 뭐라 합니까? “아니 농담도 못합니까? 다른 사람도 농담 다 했는데 왜 갈궈도 나만 갈굽니까?” 왜 하필 저에게? 

  

이게 구약에 있는 십자가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난체 하는 인간을 실패로 만들어 버려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니가 성공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확인시켜 주는 거에요. 실패 없이는 우리가 성도로 티가 안나게 되어 있어요. 내 뜻이라는 것은 무조건 무산시킵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의 관심사가 주님의 십자가를 훼방하고 가리지 않게 만듦으로 십자가만 더욱 또렷하게 보이는 관련성을 주의 은혜로 유지하게 만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거에요. 특징은 배설물이 계속 나온다는 거에요. 일 년치 오줌 한 번에 누는 게 아니라 계속 나온다는 거에요. 살다보면~ 죽을 때까지 까지 계속 나와요. 행진~행진~ 행진 하는 거야! 어찌 합니까 하면서 계속 나와요. 세상의 모든 드라마나 유행가가 전부 뭡니까? 배설물이에요. 이거 아니고 찬송가 부른다면 찬송가는 배설물이 아닌 줄 압니까? 

  

이 몸 자체가 배설물을 생산하는 아지트인데 찬송가와 대중가요가 차이 나는 줄 알아요? 찬송가만 24시간 부를 수 있습니까? 목 아픈데 띄엄띄엄 하지요. 띄엄띄엄 하면 선이 되요. 둥그런 안이 아니고 주께서는 묻습니다. 네가 다윗의 자손에 대해서 아느냐? 왜 묻느냐? 너희는 다윗의 자손을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평가한 것, 그래서 내가(예수님) 다윗의 자손인 것을 못 알아 본 거에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것을. 

  

예수님이 묻는 이유는 다윗의 자손이 왔는데 다윗의 자손을 메시야라고 하는 거에요. 메시야가 왔는데 못 알아보는 거에요. 그 이유를 찾아 주시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구원을 계산하다 보니까 과거가 먼저 있고 지금이 현재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안았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이미 와버렸어요. 와버리면 이건 선이 아니고 동그라미가 되어 버려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이다? 

  

처음이자 나중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시간이 무의미 한 겁니다. 오늘 하루만 살아도 괜찮아요. 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어요. 그러나 나사로는 그것을 알아요.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나잖아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죽어도 상관없어! 죽어도 괜찮아! 그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왜 삽니까? 너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려 줬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 때문에 실패 하도록, 실패하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기도 하시고 어떻게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을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산다고 했는데 바로 그것이 기준이 되고 모델이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는 짧은 순간이지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