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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25강-외모(고후5;11-12) 1702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2. 26. 17:59
2017-02-26 12:29:14조회 : 26         
   외모 170226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외모(고린도후서 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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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2-26 13:26 

외모 

2017년 2월 26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5:11-12 

(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불신자들의 객관적 안목에서 보면 참 건방진 사람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독점적으로 비밀스러운 진실을 알려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건방짐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소위 스스로 신자라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대할 수가 있습니다. 즉 “당신이 독점적으로 받았다는 그 진실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하기 어서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세요. 자진해서 기꺼이 신자될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나올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의 집단이 ‘고린도교회’입니다. 

형식적으로나마 사도 바울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지 않겠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받은 그 복음은 이런 인간들의 호의의 그 배후와 내막까지 그냥 두지 않고 파고들어 갑니다. 신적이고 신비적인 것에 대해서 호의적인 호기심을 내비친다고 해서 ‘성도’라고 지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호의가 ‘외모’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내면의 속사정이 바깥으로 표현화되게 되면 그 외모를 통해서 내면의 실체를 복음으로 파악이 가능합니다. 복음에 대한 호의에 의해서 사람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호의의 바탕을 복음에 의해서 검증되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후서 2:14-16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이 전파하게 되면, 필히 망해야하는 자들은 반드시 망해야 될 자로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복음에 호의적이고 싶지만 제대로 복음을 알게 되면 결국에는 “나에게 악취 풍기지 말라”고 배척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복음이란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의해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복음은, 인간들의 의사결정 그 배후의 실정을 폭로하는 기능으로 스며들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외모’라는 말을 쓴 것은 ‘고린도교회’ 외부인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말씀하는 겁니다. 복음은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인간 구원에 있어 인간 도움이 필요없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3:36에 그 내막이 나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즉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각자 주어진 저주란 그들의 행동을 보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덮쳐져 있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권한이나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형편은 복음에 실려서 사도 바울에게 전달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형편임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복음이 전달되는 그 현장에서만 알려집니다. 망해야 될 자들은 이런 복음에 대해서 믿음이 없기에 억지로 믿는 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믿으려고 애쓰는 자’들은 결국에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망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미 ‘구원된 자’들에게 있어 ‘외모’란 인간에게 있어 필연적이다 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고마워합니다. 자신의 형편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저주는 어떻게 풀릴 수 있는 겁니까? 아가 7:6에 보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랑이 언약에 실려 인간에게 전달되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 시내산 밑까지 오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 위로 올리십니다. 

산 밑에 남은 자들은 ‘모세 없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이 질서잡기 위해 모세의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들 각자 자기네들 마음 속에 자리잡은 속마음이 구체화되는 경우 뿐입니다. 그래야 말썽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일반화된 여호와 하나님의 이미지는 곧 금송아리로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매개물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시각적 교재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징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극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오직 언약 뿐입니다. 언약이 장착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살 자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내면에서 결코 만들어질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언약을 개입시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의 모든 요소들은 외모로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외모는 근원적으로 균열되지 않고 퇴적물처럼 갈수록 강력한 지층을 이루게 됩니다. 

자신의 의가 갈수록 쌓이고 쌓이게 됩니다. 이는 육의 존재성이 외부로 발산되는 현상입니다. 육은 스스로 포기를 모릅니다. ‘나’라는 존재를 기어이 영원까지 끌고 가려고 합니다. 이런 육의 본성은 구약 사사기에서 잘 나타나있습니다. 사사기 2:17-19에 보면,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옷니엘-에훗-삼갈-드보라-기브온-돌라-야일-입다-입산-엘론-압돈-삼손-엘리-사무엘로 이어지는 사사의 고리는 그 중간 중간에 이런 이스라엘의 배신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살만하면 ‘구원의 사건’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자기 존재’를 붙들게 됩니다. 사사기는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 25) 그렇다면 그들을 구원할 왕은 어디 있습니까? 룻기에 보면, 이미 사사 시대에 잠복되어 진행되었습니다. 바로 모압 여인 룻이 외부에서 언약의 주체로 개입하여 ‘다윗’이라는 왕을 낳게 합니다.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입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육의 죽음에서도 벗어날 분의 고유 권한입니다. 이 분의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면 성도는 날마다 존재성에서 차고 올라오는 죄가 외모를 이루고 그 외모를 이룬 고체는 액체같은 언약적 사건에 의해서 삭제되어 죄가 의로 전환되는 순환펌프가 작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라고 오직 십자가 피 뿐입니다. 즉 날마다 죽이시고 날마다 살려내시는 그 사건만을 자랑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타고난 죄가 종교적 외모로 등장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5강-고후 5장 11-12절(외모)1702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11-12절입니다. 신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5:11-12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방금 읽은 사도바울의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건방진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유명하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 말고 달리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자신이 사도니까. 얼마나 건방진 이야기입니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인간세계와 대자연까지 운영하고 계신 그 하나님께서 특정사람에게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시고 비밀을 알려줬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들으면 보통 삐질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치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안 받을 때 가인의 심정을 우리가 이제는 이해할 때가 되었어요. 

  

죽이고 싶을 거예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무효라는 겁니다. 헛방이라는 거예요. 왜 내 제사, 예배가 헛방인가? 이유를 몰랐지요. 보니까 옆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만 받는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자기의 소망에 불과하지 전혀 하나님 앞에 먹히지도 않는 짓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중보자개념이에요. 하나님은 중보자 없이는 안 받는데 우리는 그동안 중보자 없는 하나님을 사귀기를 그동안 원했던 겁니다. 자신의 정성과 선행, 이런 것들을 주워 모아서 이정도 정성과 성의와 착함을 가져다 바치면 하나님도 감동해서 껌벅 넘어가실 것이라고 우리 쪽에서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걸 가지고 외모라고 하는 겁니다. 외모라는 말이 굉장히 간단한 말이고 그 반대말로 하면 내면이에요. 내면과 외모가 서로 반대말인데 복음을 아는 사람이 ‘외모’라는 말을 왜 구태여 거론해야 되느냐 하면, 복음이라는 것이 외모와 짝을 이루지 아니하면 복음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인간은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고 외모를 통해서 남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자신인척 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미 설교 했습니다만 고린도후서 2장 14절과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이야기를 남들이 들었다면, 무슬림이나 불교, 혹은 오늘날 교회까지 얼마나 건방진 이야기겠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겁니다. 16절에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여기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망하는 자가 발생된다는 겁니다. 

  

누가 망하는지는 모르는데 네가 망할까, 내가 망할까, 유보된 상태인데 사도바울이 복음을 던지니까 복음을 던지는 현장에서 비로소 망하는 자가 거기서 확인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에 십자가 복음 탁 던져버리면 대부분이 망하기 위해서 교회 온 사람들이에요. 망함을 더욱 더 가속화시키기 위해서. 

  

‘아하, 망할 때 이렇게 망하는구나.’ 그 근거를 고린도후서 2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5장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그 근거가 뭐냐?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왜? 외모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고자 하고 그리스도 앞에 신자라는 티를 내고자 하기 때문에 또다시 나는 복음 앞장세워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가 나를 요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를 앞장세워서 고린도교회에 보냈는데 그 이유가 뭐냐? 외모가지고 구원받고자, 천국 가고자 티를 다 내는 그 작업을 이제 시작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또 꾸준히 해왔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사도바울에 대해서 좋게 생각해왔던 사람들조차 불만을 품게 되는 겁니다. 

  

“너도 인간, 나도 인간, 좋은 게 좋다고 당신 아는 것을 우리에게 넘겨주면 우리가 믿어줄게. 당신이 복음을 이야기하면 복음 믿어주고, 당신이 십자가 이야기하면 십자가 믿어주고, 하여튼 당신 이야기는 믿어줄 용의가 있다.”라고 이야기할 때 이 말은 뭐냐? “당신은 당신 할 일 하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외모를 취하든 내면을 취하든 그것은 당신이 간섭할 바 아니요.”라는 식으로 지금 고린도교회가 구축이 되고 형성이 된 거예요. 

  

얼추 교회 와서 사람과 좋은 관계 이루고 후딱 자기 집구석으로 내빼서 ‘내 인생은 내가 산다.’ 이것은 복음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끝까지 따라가요. 집구석까지 따라갑니다. 교회 와서 얼마나 겸손한 티를 내느냐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너의 집, 너의 가정, 직장에서 외모에 신경 쓰면서 살아가느냐를 내가 한 번 볼 거라는 이야기에요. 교회 나올 때만, 부족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외모이야기를 두고 사도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는 다른 이야기로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외모를 형성하고 외모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가리기 때문이고, 복음을 가릴 뿐만 아니라 이 외모가 옆으로 전염을 시켜요. 

  

조류독감 유행시키는 것 같아요. 집단최면이라는 것이 있지요. 자꾸 전염시키고 오염을 시킵니다. 저렇게 하면 신앙인 것처럼 모방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외모 만들기에 대해서 집요하게 복음이 파헤칠 수밖에 없어요. 오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파헤칠 때까지 파헤쳐야 됩니다. 

  

본문에 외모이야기가 나오지만 구약부터 전부 다 외모에 관한 하나님의 저주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와서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여호와 없이는 못산다. 그런데 자기 내면 속에 알고 있는 여호와를 솔직하게 바깥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계기가 왔었어요. 

  

인도자 모세가 산에 오르고 나서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길을 잃었는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인도자가 없으니까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자만 40만이 되는 그 집단을 하나로 체제화 시켜야 돼요. 안 그러면 무질서해서 안 되니까 체제화 시킬 때 제일 좋은 방법은 뭐냐 하면, 각자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정신세계를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각자 본인들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생각하는 그 하나님을 다 끄집어내세요. 끄집어낸 그것을 바구니 하나에 담아봅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금송아지였습니다. 이것은 이의가 없습니다. “가하시면 ‘예’ 하시오.” “예”였습니다. 민주주의에요. 다수결원칙입니다.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기 참 잘했어요. 

  

모세가 산 위에 안 갔으면 모세가 알고 있는 여호와하고 모세 말고 다른 사람의 여호와하고 같은 것으로 착각들 하면서 계속 왔었을 겁니다. 모세가 오늘 사도바울 같은 입장이지요. 모세가 친히 여호와를 먼저 만났습니다. 여호와를 제대로 아는 모세가 독대하면서 산위에 올라가고 난 뒤에 나머지 사람들은 껍데기였고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 속에는 각자의 금송아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당사자에게 우리가 질문을 던져 봅시다. “왜 만들었습니까?”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그게 뭐가 어째서? 그게 뭐가 나빠서? 우리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섬깁니다. 

  

다만 금송아지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중개로 해서 금송아지처럼 자비롭고, 복스럽고, 어질고, 점잖고, 우리가 알고 있는 괜찮은 이미지는 다 금송아지에 담아서 여호와를 대표하는 속성이라고, 우리를 고생하는 애굽에서 끄집어냈다고 하는 것인데 이게 뭐가 나쁜가?” 하는 겁니다. 

  

서기 900년경, 중세에 벌어진 우상숭배논쟁하고 똑같은 겁니다. 우상숭배를 할 것이냐, 이것은 우상이 아니고 상징이다, 그 논쟁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알지만 그들 전부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십계명이라는 것이 따로 주어져야 될 이유를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로서, 하나님의 자비심, 하나님의 사랑을 집대성한 금송아지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충분하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정갈한 마음으로 정화수 떠놓고 신에게 비는 이 마음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통할 줄 알았지요. 그것으로 충분할 줄 알았습니다. 

  

때마다 기도하고, 금요철야하고, 주일에 기도하고, 새벽마다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이것만 해도 자기도 구원받고, 가족도 구원받고 복 받을 줄 알았지요. 그게 오늘날 한국교회 아닙니까? 교회가 뭡니까? 기도처 제공하고 커미션 챙겨먹는 곳 아닙니까? 그들이 무슨 말씀을 그리워해요? 

  

말씀 이야기하면 교인들 안옵니다. 말씀 듣겠다고 온 사람들이 아니고 정성 내놓고 반대급부로 복 받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에요. 학교 때도 공부 안했는데 새삼스럽게 교회 와서 이 두꺼운 책을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정성 다 하면 복 받게 되어 있는데. 조상 때부터 타고난 것인데. 그것이 공통적인 인간의 정신구조인데요. 그게 마귀생각인지도 모르고. 

  

언약이라는 것, 십계명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언약 뒤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요. 아가서 8장 6절에 보면,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왜 아가서에서 그런 말씀을 했어요. 요한복음 3장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본격적인 설교는 지금부터, 요한복음 3장부터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예수를 몰랐을 때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나중문제로 여겼던 거예요. 선악과를 이미 따먹었으니까, 죽고 난 뒤에 심판받을 때 착하게 살면, 가인처럼 정성드려 예배하고 제사하면 천국가는줄 알았어요.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왔다는 사실, 우리가 제사하나 예배하나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그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야 알아요. 차라리 예수를 몰랐더라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자라는 그것도 더불어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가 뭐냐?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라는 문제를 내서는 안 되지요. 

  

어떻게 내 행함과 상관없이, 내정성과 상관없이 왜 진노는 내 허락도 없이 모든 인류의 머리에 먹구름처럼 덮여 있습니까, 그 질문을 해야 돼요. 교회 와서 그 질문을 해야 되고 교회는 그 질문에 해답을 줘야 그것이 교회입니다. 헌금 바치고 예배 참석한다고 해서 진노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정성의 일종입니다. 기도의 일종이에요. 우리는 중립인데 중립에서 하나님께 뭘 해드리면 복 받고, 중립인데 안하게 되면 못된 인간, 그렇게 해서 지옥가는 것이 아니에요. 중립은 없어요. 중립의 자리는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예수의 존재가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십자가는 뭐냐? 왜 낯선 남자가 십자가에서 저주받아요. 그게 복음입니다. “뭐지? 저 남자 뭐야? 저 남자가 왜 십자가에서 저주받았어?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다.’ 뭐라는 거야? 왜 저래?” 부처는 보리수 아래서 혼자서 도 닦고 있어요. 주님은 아버지하고 대화하고 있습니다. 

  

외모라 하는 것은 주님과 대화가 되지 않는 그 표면을 외모라 합니다. 주님과의 대화가 종결되었어요. 혼자 똑똑하다고, 혼자 거룩하다고, 혼자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그것 가지고 완전히 시멘트를 발라놓은 것이 외모입니다. 이정도 성당 다니고, 이 정도 교회 다니면 외모가 두껍게 장착되지요. 

  

교회에서 장로권사 투표하면 가관입니다. 벌써 목사가 교회 실세부터 다 불러요. 다 불러서 “이번에 승진대상인데 한 천이나 이천 내렵니까? 주차장도 좁은데 좀 내야지요.” 사전에 정치공작 다 들어갑니다. 집사에서 장립집사 정치공작 들어가고 장립집사에서 장로 될 때도 다 들어갑니다. 권사 되는 것도 다 공작 들어가요. 

  

그 참에 교회의 기본자산을 늘여야지요. 자본금을 늘려야 되는 겁니다. 자본금이 있어야 은행대출이라도 받을 것이 아닙니까? 이자도 낮은데. 문제는 그런 짓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이길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의 헌금과 정성과 예배참석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길 수가 없어요. 진노를 이기는 것은 언약입니다. 투입된 언약이 이깁니다. 

  

왜 교회에서 언약 이야기를 안 하는지 이제 이유를 아시겠지요? 가만히 있어도 기도하고 기도했다고 고맙다고 헌금으로 커미션 내지요. 거기다가 목사가 응답받아야 된다고 하니까……, 본래 점쟁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점쟁이의 경우에 찾아온 고객이 알아서 “잘 맞습니다.” 해요. 점쟁이가 하지 않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도를 하고 응답에 대해서 목사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기도한 본인이 기도한 체면 때문에 “목사님, 응답받았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알아서 발설을 하는데, 가만있어도 은혜 받았다고 나대는데 할 게 뭐가 있어요? 응답 받았으면 하나님하고 갈라먹기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응답 받았으면 가만있으면 안되지요. 

  

다음에 또 응답받아야 될 일이 있기 때문에 미리 돈 좀 내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진노를 이깁니까? 왜 교회에서 십자가 이야기를 안 하느냐 하면, 자기가 하는 그 모든 짓거리가 외모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방식에 대해서 십자가가 전혀 보탬이 안돼요. 왜냐하면, 그 다음 구절이 나옵니다. 죽어야 되니까. 

  

살려고 교회 나온 사람보고 죽으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사랑은 뭐냐 하면, 죽음보다 더 센 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은 얄밉고 무서워요. “죽어라. 내가 살려줄게.” 그거잖아요. “나중에 봅시다. 믿음이나 좀 생기거든.” 꽁무니를 실실 빼기 시작하는 겁니다. 

  

외모로 성당과 교회는 2천년동안 장사를 해 왔습니다. 사도바울과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건만 복음을 뭘 로 바꿨는가 하면, 권력으로 다 바꿨어요. 성수 뿌리기, 묵주 돌리기, 교회에서 모자 벗기, 무릎 꿇기. 이 모든 것은 교회에서 외모로서, 권력을 형성하는 인간들의 정신적인 공통점을 끄집어내는데 종교단체에서, 권력체에서 이것을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속에 있는 금송아지를 바깥으로 끄집어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절에 가면 마찬가지에요. 부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내면의 자비심을 상징하는 것뿐이래요. 이슬람교에서는 성전에서 아예 모든 형상을 다 없애버리고 글자로 다 만들었습니다. 모자이크의 글자로 다 해놓았어요. 형상이 없다는 것을 행함으로 구원받기 위해서. 

  

복음의 이단들을 한꺼번에 묶어버리면 행함의 종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든 신천지든 구천지든 간에 안상홍이든 여호와의 증인이든 전부 다 공통점이 있어요. 전부 다 행함입니다. 그런데 그 행함, 이슬람하고 붙어보세요. 누가 행함이 더 센지. 날도 더운데 머리에 시커멓게 쓰고 다니는 것 봤지요? 확 벗겨버렸으면 좋겠어요. 보는 사람도 더워. 

  

금요일만 되면 동쪽 찾아서 메카 쪽으로 절한다고 하고. 이 행함이나 교회라는 이단들의 행함이나 거기서 거기에요. 똑같은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죽는지 알고 있어요. 이것을 가지고 제 2의 천성, 또는 제 2의 자아라고 합니다. 행함으로 습관화시켜서 제 2의 자아, 구원받는 자아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걸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은 자신의 행함을 끄집어내 보세요. 끄집어내서 행함 없이 만들어보라고요. 불가능합니다. 제가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저주는 예수님의 피 외에는 해결이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유일한 사랑은 유일한 예수님의 그 피의 사랑만이 죽음보다 강해요. 

  

죽음보다 강한 것은 그 십자가의 피 외에는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그 외에는 없어요. 문제는 인간이 제가 방금 이야기한 그 사실을 내가 받아들이는 순간, 받아들이고 내 놓으면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저주받을 외모가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의 몸이 문제가 있어요. 

  

마귀가 장착되어 있는 것 같아요. 문제가 커요. “믿습니다.”가 결국 따져보니까 하루만 지나도 외모화 되어서 콘크리트 타설된 것이 이미 굳어져 버렸어요. “어제 믿었다.” 그렇게 돼버려요. “누가? 내가 믿었다.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는다.” 내가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날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은 내가, 예수 믿었다는 그 행함이 그 믿는 주체가 된 나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할래? 그렇게 잘 믿는 네가 치매 걸려서 죽으면 어떻게 할래? 죽기 전에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교통사고 나서, 서울 남영역에서 지하철에서 사고 나서 기억을 잃으면 어떻게 할래요? 그대와 나중에 살래? 

  

기억을 잃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예수 믿는 그 기억을 잃으면 새로 시작할거예요?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룻밤만 지나도 우리의 기억은 다른 것으로 이미 내용이 바뀌어 있어요. 아주 간사하게 바뀌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간사한지 어제 믿었던 그것을 오늘 각색을 해서 다른 소설을 갖고 있어요. 

  

날마다 업그레이드 하고 있습니다. 그 방향이 뭐냐? 나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 달 전에 예수 믿었던 것을 가지고 아주 찬란하게 화려하게 포장을 해놓습니다. 외모입니다. 신앙마저 외모가 되어버렸어요. 오늘 본문보고 “사도바울님, 나한테는 해당 안 됩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말씀은 영원토록 우리에게 되풀이하게 만들어요. 

  

오늘 설교의 해답을 말씀드립니다. 순환펌프가 해답입니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고 바꾼 그것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저주가 되고 저주가 되면 다시 축복으로 바꾸고, 순환펌프를 만드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게 대화입니다. 성령과의 대화, 주님의 말씀과의 대화가 되는 것, 이것만이 성도고 외모를 지향하는 사람은 대화가 안돼요. 딱딱하게 굳어져서 스톱이 되었어요. 

  

성당 가는 사람들, 근처 지묘동에도 수십억 들여서 성당 지어놨어요. 돈 없다고 애를 먹더니만 대출을 받았는지 어쩐지 성당을 지어놓았어요. 산책길에 보면 새벽미사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마리아상을 보고 성호 긋는다고 막 꽂아버려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수녀가 유니폼을 입지요. 신부도 신부의 유니폼 입는다고요. 그게 외모에요. 인간이 죽어가는 몸을 영생 얻는 몸으로 바꾸기 위해서, 제 2의 천성으로 바꾸기 위해서 시각적 시스템으로 작동시켜 버립니다. 성당은 시각적인 시스템뿐만 아니라 오감을 다 만족시켜요. 시각뿐만 아니고 청각, 후각까지 동원합니다. 미각도 동원해요. 

  

“hoc est corpus meum(이것이 내 몸이니라).” 갑자기 제가 라틴 방언을 하는 이유가 뭐냐? 이렇게 감각을 동원해요. 촉각적인 것은 물 뿌려주는 것, 세례줄 때고 영성체라고 해서 맛보는 것, 향을 피워서 냄새 맡게 하고 보이게 하는 것, 시각적으로 유니폼을 입고 계급장을 달고 모자 쓰는 이것들은 다 이미 유럽에 있었던 이방신화에서 나온 거예요. 

  

집단화하기 위해서, 금송아지로 변종시켜서 전인민의 신자화, 전 국민의 신자화를 꾀하는 겁니다. 그래야 나라 질서가 안정이 되니까. 외모의 방법이 아니면 다른 수가 없어요. 나라를 안정시키는 방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스러운, 이미 인간에게 탑재된 악마의 본성을 거룩한 것으로 정당화해주지 아니하면 종교적인 질서, 종교적인 질서가 정신적인 질서 중에서 최고거든요, 그 정신적인 질서를 하나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종교가 시들한 오늘날 21세기에서는 정치가 경제와 과학, 특히 자본주의가 종교를 대신합니다. 그 자본주의는 과학이 그 밑바탕이 되어주고 있어요. 과학은 무지스럽다는 마음을 감추고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가려는 정신적 동력을 가동시키게 되면 나중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이 돼요. 

  

자본하고 돈하고 다릅니다. 돈은 그냥 사치 떠는데 필요한 것이 돈이지만 자본은 굴려서 계속 재투자가 될 때 자본인 거예요. 18세기에 아담스미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자 되고자 하는 탐욕이 모든 인간을 부자 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혼자 구두쇠처럼 갖고 있으면 혼자 부자지 남도 부자 되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부자가 신용대출, 금융기관을 통해서 자본을 굴려버리면 자기만 부자되는 것이 아니에요. 남들도 “다 부자 되세요.” 해서 다 부자를 만들어요. 누구 하나 부자 되겠다는 탐욕이 없으면 다른 사람 다 같이 가난한 나라가 되는 겁니다. 계속해서 나라가 부자 되고자 하는 사람을 전방위(아방가르드)로 내세워서 자본주의화 시키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은 부자 될 수가 없어요. 

  

중국 보세요. 그렇게 못살던 사람들이 다 부자 되어서 한국에 놀러오잖아요. 면세점에서 물건 사고. 이게 경제라는 이름의 종교고 과학이라는 이름의 종교에요. 행복은 그 종교에서 나와요. 기독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본을 굴리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폭로했어요. 한국의 큰 교회들이 왜 그렇게 자본이 많고 부동산을 사고 건물을 짓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은행의 수표나 어음 등의 수상한 돈을 현금이 모이는 교회에서 바꿔주면서 커미션을 챙기니까 공짜돈이 쌓이고 또 쌓여서 교회는 점점 잘된다는 겁니다. 성당은 왜 그렇게 잘되는가? 성당은 옛날부터 정신이 일치감치 깨어서 부동산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속 부동산, 부동산, 부동산……. 

  

개신교의 십일조는 비교도 안돼요. 십일조 몇 푼 된다고요. 성당 교인들은 죽어서 부동산을 바치게 되면 돈이 몇 배가 더 커지잖아요. 땅을 왜 바치는가? 땅을 바쳐야 안 믿는 아들이나 딸이 패자부활전을 해서 연옥으로 갔다가 천당으로 갈 수가 있거든요. 이 외모의 흔적은 지금까지 예를 든 것처럼 바깥에서도 예를 들 수가 있어요. 

  

그러나 구약에서 그리고 신약의 결말에서 보게 되면 어떻게 해서 외모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지를 더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사사기 2장 17절과 19절을 보겠습니다. 17절에 보면,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것은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사건을 잡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건을 잡게 되면 그 잡은 것이 존재기 때문에. 외모는 존재고 그 존재를 순환구조로 돌려버리는 것은 주님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언약사건이라는 말이지요. 인간은 계속해서 사건에 의해서 저주스러운 외모가 다시 용서를 받고 축복으로 달라지고, 축복으로 달라지면 “나 축복받았다.” 까불다가 다시 저주받을 꺼리가 되어서 외모로 밀려올라옵니다. 

  

고체보다 액체가 더 강하거든요. 내면은 액체고 표면은 고체라는 말이지요. 고체가 언약의 작용에 의해서 파열이 되면서 스며있는 내면의 액체가 표면을 장식하게 되면 오늘 일단의 새로운 축복으로, 하나님의 용서로서 표면을 장식합니다. 물론 이것은 언약을 받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이게 순환펌프라 했잖아요. 순환이 되잖아요. 성도라 할지라도 구원받았다고 해봐도 우리는 나를 존재로 여긴다는 말이지요.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존재가 되느냐, 존재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건은 바람 같아서 붙잡을 수가 없으니까. 존재가 날아가는 사건을 붙잡기 보다도 사건이 존재에 스며든다는 말이지요. 

  

사랑이라는 것은 밑도 끝도 없이 급습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기대한 사랑은 사건화된 사랑이 아니고 내 존재를 위한 사랑이 되어버립니다. 남녀 간에 그리되면 곤란해지지요. 내가 너한테 이렇게 해줬는데 너는 나에게 뭘 해줬나, 그렇게 되어버려요. “지루하다 헤어지자, 힘들다 헤어지자.”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내 존재를 포기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내 존재가 우선이기 때문에 복음이나 종교보다도 자본이라는 돈, 돈이라는 종교를 먼저 신봉하고 여유가 생겨서 살포시 웃음이 나니까 그 때는 보험 들 듯이 천당가볼까, 해서 교회에 찾아오고, 그러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후다닥 (휴대폰 꺼내들고) “예, 예. 곧 갑니다. 한 시간 안에 문 엽니다.” 이러고 달려가고. 

  

사는 게 뭡니까? 그저 살아남는 것이 최고 아닙니까? 참 오랜만에 사이다 같은 이야기한다. 인간이 살아남는 것이 장땡이 아니에요? 그것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하늘이 부를 때까지. 인생 뭐 있어요? 인생이라는 것이 그거잖아요. 구색 맞추는 성경이고 복음이고 그것은 나중문제 아닙니까? 

  

애들 교육 왜 시킵니까? ‘너라도 잘 살아야지. 이 부모 닮지 말고 너라도 떵떵거리면서 살아야지. 네 덕분에 나도 좀 살자.’ 그게 사사기에 나와 있어요. 내가 못한 것을 위해서 새끼를 계속 까는 거예요. 자식에게 희망을 거는 겁니다. 이게 시간을 지연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그렇게 지연시키면서 놓치는 것이 있어요. 언약과 점점 멀어졌다는 겁니다. 지금 한국의 노인네들 옛날에 교회 다 다녔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 총동원령 내려서 지난 토요일에 모였고 이번 3월 1일에 한번 보자는 식으로 모인다는 겁니다. 

  

태극기집회. 십자가 나오지요? 미국 성조기 나옵니다. 다 교회 장로니 집사니 권사니 그런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자녀들은 저녁에 광화문에 모입니다. 교회는 안다닙니다. 언약과 멀어져요. 진노, 심판, 그것은 나중문제에요. 우선 취직해서 밥이나 먹고 살자는 거예요. 취직을 해서 밥이나 먹을 수 있어야 결혼도 하지요. 

  

취직해서 사랑하는 애인과 결혼해서 사는 이것이 급선무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 언약은 나중문제라는 말이지요. 한국교회가 얼마나 전혀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없는 저주 집단이라는 것은 태극기를 보면 알아요. 무슨 뜻인가? 왜 데모를 하느냐하면, 저녁에 광화문집회 저렇게 하다가 미국이 정말 떠나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는 겁니다. 

  

“나라를 누가 지켜주나? 미국 아니면, 트럼프 아니면 누가 지켜주나?” 결국 마지막에는 살고보자는 거예요. 이건 뭐냐? 사건이 아니고 존재에요. 급습한 사랑이 아니에요.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의 급습이 없습니다. 교회 다녀서 그 덕으로 밥먹고 사는 줄 알고 있어요. 존재가 깨져야 되는데 붙잡고 있다고요. 

  

그 붙잡고 있는 것을 누가 깹니까? 다시 성령께서 말씀으로 또 깨야 되지요. 사사기는 그 반복입니다.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사무엘, 전부 사사들입니다. 사사와 사사 중간에 뭐가 있겠습니까? 

  

사사기 2장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구약 사사기에 이게 왜 있느냐 하면, 육은 육이라는 말이지요. 육은 절대로 지속할 수가 없어요. 육은 외모로서 굳어질 뿐이지 순환펌프를 작동할 수 있는 능력은 육속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육속에 주님의 순환펌프가 장착되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구원될 수가 없어요. 

  

매일같이 우리는 죄인인 것을 폭로당해야 돼요. 죄를 의로 바꾸는 순환펌프,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십자가 피로 올라오는 죄를 용서해주시고, 또 올라오면 또 용서해주시고.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속에서 순환펌프를 돌려줄게. 

  

순환펌프를 돌려줘요. 교회 나올 때는 복음 생각하지만 뉴스시간에는 ‘나라가 안정되어야 될 텐데. 그래야 밥 먹고 살 텐데. 내 재산 보호하고 자식이 잘되고. 나는 늙어서 죽으면 그만인데 내 자식들은?’ 자식에게 또 지연시킵니다. 자식은 지금 교회 나올 생각도 없는데. 아마 분명할 거예요. 

  

낮에 나오는 태극기집단과 밤에 나오는 촛불집단, 온가족이 모여서 기념촬영해도 괜찮아요. 사사의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으로 끝납니다. 아무도 이것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거기서 무엇이 생기는가? 갈라디아서 4장 10절 같은 그것을 사도바울이 우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0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독일이라는 나라는 맨날 놀아요. 노는 이유가 뭐냐? 성자의 순교일이에요. 중세 때는 순교자의 무덤에서 병 고침을 받고 성자가 죽은 그 날이 그 나라의 국경일이 되는 겁니다. 

  

스페인은 성자가 죽은 그 코스를 잡아서 게스트 하우스를 군데군데 만들어놓았어요. 한국의 30대 아가씨들이 배낭여행을 가는데 현지인이 이야기를 한답니다. 한국이 가톨릭 국가냐고. 천주교 신자도 아닌 것이 그 코스를 왜 밟아요? 왜 하는가? 다이어트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외모를 전부 다 마모시킵니다. 계속 올라오는 외모를 깎고 또 깎고 계속 깎아버려요. 우리 집 근처 전봇대에 광고가 붙었어요. “뼈 빼놓고 다 빼줍니다.” 봉무동의 다이어트카페. 주님께서는 뼈까지 다 발라줍니다. 그 육이라는 것, 우리가 죽을 때까지 육이라는 것이 존재함으로서 십자가와 떨어질 수 없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 십자가와 주고받고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라는 것이 사도바울이 주는 복음입니다. 

  

사사기 끝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그러면 이스라엘 왕은 어디 있는가? 사사기 밑에 잠복되어 있었습니다. 룻이라는 여인을 통해서 없는 왕이 생겨요. 룻이 보아스와 결혼을 했는데 그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겁니다. 왕가가 형성이 돼요. 

  

룻은 이스라엘사람이 아니에요. 모압 여인이에요. 성경에서 이스라엘 내부의 정성이 아니고, 율법지킴이 아니라, 외부의 침입인데 그 외부의 침입을 사랑의 급습이라고 표현했고 그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무덤을 깨고 빈무덤을 만들어서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이게 바로 사랑이야.” 사랑으로서 우리에게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지금 어디서 뭐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우리를 성전으로 삼아서 자기작업장이 되었어요. 성전으로 삼아서 늘 소제하고 청소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올라오는 이 존재에서 나오는 죄를 육으로 바꾸는 순환펌프를 가동시키면서 결국은 주 앞에 감사하게 하는 겁니다. 

  

구원받고자 노력하면 무조건 외모에요. 하나님께서는 구원받고자 하는 자와 이미 구원된 자를 오직 복음으로서만 구분합니다. 그래서 구원되고자 하는 것은 백날 해도 그것은 망하는 자고 구원된 자는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을 내세우면서, 뿜어내면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주께서 만드시는 주의 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독점적으로 복음을 알게 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린도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내가 복음 전하면 교회 되게 할게.”라고 쳐들어오는 겁니다. 그 쳐들어오는 방식은 그 뒤의 본문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 알아봤자 돌아서면 존재기에 콘크리트 같은 외모로 타설을 하고 그것을 가지고 외부를 향하여 자랑질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마귀적인 본성을 다시 고백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새언약, 다 이루었다는 그 피언약만이 저희를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 위한 그 자체에 대해서 오늘도 쉬지 않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