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23강-언약으로 본 죽음(고후5;4-7) 1702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2. 12. 21:21
2017-02-12 12:42:08조회 : 32         
   언약으로 본 죽음 170212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언약으로 본 죽음(고린도후서 5:4-7)

음성               동영상

 이근호17-02-12 13:39 
언약으로 본 죽음 

2017년 2월 12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5:4-7 

(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5: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세상이 무너진다는 소식에 대해서 누구나 ‘나만은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4절을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습니다. 다 무너진다는 겁니다. ‘탄식’, 혹은 ‘죽을 것’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구원에 적절한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빼놓고 무너진다’는 말이 아니라 ‘다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기에 대해서 이의 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이나 하나님의 일이 결코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세우기 위해’ 일하십니다. 이점은 5절에 나와 있는대로 성령이 오시지 아니하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사는 딴 데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본인의 모든 행동과 생각의 출발점이 과연 옳은가를 생각 못합니다. 자신의 행복과 번영과 발전과 구원과 영원함을 위해서 움직이면서도 이러한 자신들의 태도에 대해 당연히 하나님이 동의할 줄로 여깁니다. ‘자비하심’라는 단어를 하나님 호칭 앞에서 붙이는 아부를 곁들이면서 말입니다. 

이미 이러한 오류를 범한 단체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입니다. 신약에서는 유대인들이 여전히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등장해도, 왜 등장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사람 숫자 하나 더 채우는 식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언약의 내용을 아시고 성취능력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출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언약의 출제자들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 지혜를 모아 만든 게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로 나타났기에 그 성취성에 있어서도 인간은 배제됩니다. 문제는 이런 소식에 대해서 인간들은 절망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의 최종 관심사가 결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원한 행복보장과 구원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도닦는 경쟁자로 여깁니다. 이는 언약의 상대자가 오직 예수님뿐임을 인정치 않고 자신의 이름도 그 곁에 두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악마가 인간을 사주하면서 마음 속에 부축하는 방식은, 이러한 예수님만이 하나님과의 계약자라는 확정된 사실에 시비를 걸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 덕분에 자신들도 같이 가치를 확보하겠다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이는 마치 구약 때, 이스라엘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고 외쳐대는 군중들의 집단심리를 반영해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진 것은 ‘모든 인간들의 무차별성’입니다. 한결 같이 ‘죽은 자’라는 사실에 예외는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 그 ‘죽음의 죽탕’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배후에는, 아담 이후 줄곧 ‘죽음을 가지고’ 인간을 사주한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이 악마입니다. 

악마는 자꾸만 인간의 고유 가치를 키워주려고 합니다. 그래야 늘 벌벌 떨며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쫓기게 만들어서 ‘죽음의 승리성’을 확고히 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절벽에서 넘어져 절벽 끝에 간신히 손을 집고 있을 때의 두려움 같은 겁니다. 절벽에서 손 놓기를 겁이 나는 겁니다.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의지하고 온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그러하고, 부모가 그러하고, 직장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26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즉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결코 생명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약적으로 죽어 있음을 더욱 죽도록 몰아세우는 기구들이라는 겁니다. 그 끝은 영원한 죽음이요 심판입니다. 바로 이런 세계 안에서 인간들은 줄곧 악마에게 속아온 겁니다. 

즉 “〜하면 살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모방으로 시작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삶을 모방합니다. 흉내 내면서 자신의 인생관을 장착합니다. 이는 곧 부모가 어디로 가는지 못하고 무작정 따라 가기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그 전의 부모에 대해서 그런 관계성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노선으로부터 이탈을 추진하십니다. 마태복음 10:37에 보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맺어지는 그 어떤 관계도 사람을 살리는 관계가 아닙니다. 

도리어 새롭게 덮쳐 오는 것에 의해서 함몰되어야 마땅합니다. 새롭게 덮쳐지는 것이 바로 ‘언약의 완전성’입니다. 이 완전성 중심에는 ‘예수님 홀로’라는 원리가 작용하게 됩니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이름으로, 다른 존재로 구원될 여지는 없습니다. 이 원리는 필히 인간들의 모방성에 의해서 갖추어진 모든 것에 대한 부정과 거부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에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모든 것이 차이남이 없는 ‘무차별적 존재’에 불과함을 드러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창조 전으로 환원시키십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이 저주 안에서 악마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악마는 영원한 죽음의 당사자입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반발하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이런 악마의 대변자 노릇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무차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차별성 있는 사회로 전환시켰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에게 정면으로 욕먹은 자들이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왔던 그들도 이런 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율법 앞에서 그 어느 인간도 잘났다 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모두다 율법의 저주 아래에 놓여져 있는 실정입니다. 

생명이란 성령세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 가를 평생 확인하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일한 언약 상대자로 지정받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을 가르치기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같이 죄인되신 분입니다. 자진해서 ‘무차별성’ 속에 뛰어드신 분이십니다. 

이런 방식은 이미 구약 때부터 선지자에게 나타난 현상입니다. 다니엘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뜨겁게 가열된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곧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죽음 속’입니다. 하지만 다니엘 세 친구는 비로소 그 죽음 속에서 생명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살린다고 믿는 그 절벽에서, 철봉에서 손을 놓은 것입니다. 이로서 다니엘 세 친구는 예수님 빼놓고 모든 것들이 실은 이미 죽은 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진정 생명을 얻을 자는 어떤 식으로 죽음의 노선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까? 에스겔 37장 초반에 나오는 경우를 통해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을 데리고 바짝 마른 뼈들만 가득 찬 골짜기로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대화하는 분은 하나님과 에스겔뿐입니다. 바짝 마른 뼈들은 자신의 회생이나 미래의 운명에 대해서 전혀 끼어들지를 못하는 처지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인자야!”라고 호칭하십니다.  

즉 뼈들의 소생은 뼈들이 은근히 노렸던 바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자, 곧 예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신약 때 이방인들에게 찾아드시는 성령님은 바로 이 점을 앞장 세워서 찾아오십니다. 죽음의 바다 같은 이 세상조차도 모두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유일한 언약 달성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겁니다. 

즉 구원될 자들은 구원의 여망이나 희망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러한 취지가 근거가 된 복제판들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생산이 부모의 DNA의 복제물로서 등장하듯이 성도들은 예수님의 작품으로 출현됩니다. 그리고 이들만 ‘아들이 나라’라는 천국에 들어갑니다.(골 1:14) 

따라서 이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의 덮쳐짐을 경험하는 성도들은 죽음의 상황을 이미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들이 나름대로 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조차도 죽음의 힘의 발산인 것을 압니다. 죽음이, 죽음답게 몸짓을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는 차라리 세상을 일찍 떠나고 싶다는 속마음을 드러냅니다. 

살려고 꽉 잡은 철봉을 놓으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늘 죽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주님에게 이미 붙잡힌 바 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가짜라서 의지할 거리가 되지 않음을 항상 기억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223강-고후 5장 4-7절(언약으로 본 죽음)1702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4-7절입니다. 신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5:4-7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성경에 나오는 내용은 인간들의 협의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출처가 따로 있습니다. 그 출처는 구약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온 겁니다. 그 약속을 두 자로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언약의 만남에서 이스라엘이 구원에 성공을 했더라면 이방인에게까지 구원이 올 리가 없습니다. 

  

진짜 감람나무가 되었더라면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것으로 모든 구원은 종결되는 겁니다. 그런데 전혀 하나님의 예언이나 약속이나 언약 근처도 가지 않는, 그냥 단군이나 믿고 각자의 민족 신이나 믿는 우리에게 복음이 전달되었다는 것은 그 이스라엘에서 실패한 요소를 발견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뭔가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보자는 그 말이지요. 그들이 실패한 내력을 보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했어요. 언약을 지키려고 했다는 말이지요. 언약이 인간에게서 나왔으면 지킬 만해요. 자기들이 만들었으니까 지킬 요량으로, 지킬 것을 예상하면서 성공할 수 있는 것만 추려서 법으로 정해놓으면 지킬 수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과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들이민 거예요. 그냥 제시된 거예요.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준 겁니다. 일방적으로 줬다는 말은 언약의 제작자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 쪽입니다. 그러면 언약을 누가 준수하고, 누가 성취하고 달성하느냐 하면, 언약을 제작한 당사자 외에는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이거든요. 인간이 십계명 제작자도 아니고 십계명 창안자도 아닌 게 건방지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들이 실패로 끝났다면 이방인 우리도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왜 이방인이 구원받을 수 있느냐? 이것은 이미 실패한 것을 아시고 기정사실화시켜서 실패한 것을 안다는 그 전제하에 구원이 되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서 그러한 조건을 구비하고 확보시키는 겁니다. 

  

그냥 확보하는데 거쳐서는 안 되고 친절한 택배처럼 우리 마음속까지 집어넣는 작업을 하는데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율법도 모르는 채 먼저 구원부터 받아 챙겼습니다. 시험 친 적도 없는데, 이름 쓴 적도 없는데 하늘나라에 합격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거든요. 

  

어째 이런 일이! 이렇게 해서 구약 신약이 우리 이방인에게도 다 필요한 겁니다. 우리는 구원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을 타고났는데, 실패가 지당한데 성공이 되었으니까 그 중간과정에 분명히 하나님이 이런 저런 식으로 개입했다는 것, 그것을 구원받은 상태에서 확인해가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영광이 된답니다. 하나님이 그걸 그렇게도 기뻐하신대요. 이것을 간추려 보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본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관계에 돌입되는 겁니다. 

  

그 관계의 내용이 오늘날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이 되었는데 3절과 4절에,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 탄식한다는 내용이 나오고, 죽을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탄식해야만 하고 죽어야만 한다는 이 지칭은 바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거지요. 우리는 결국 뭐냐? 부적절하다는 겁니다. 어디에? 구원에 부적절하다는 거예요. 부적절하다는 이야기가 아주 기분 좋게, 신나게 다가온다는 것은 이미 성령 받아서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이 돼요. 

  

“너는 구원에 부적절해.”라는 말을 마음껏 퍼부어줘도 그것이 기분이 좋다는 겁니다. “너는 구원에 실패한 자라.”라는 말을 할 때 “더 때려주세요.” 하는 기쁨이 솟아나야 돼요. 그렇지 않고 초조해 하고 불안해한다면, 성경을 자기 구원용으로 착각하는 사람, 마치 실패한 옛날 이스라엘처럼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사람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요. 실패한 것은 당연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라고 이미 언약적 관계에 놓인 사람한테는 이렇게 해서 성공하라는 말보다도 “그래서 너는 실패자고 죄인 중에 괴수야.”라는 말이 더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지요. 자기 쪽에서는 안 해도 되니까.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이 대목을 가지고 자기 노력할 것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의 모든 예언과 언약은 인간이 먼저 요청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가 창안한 것도 아니고 지키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지 않아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관심사가 이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하면 나는 천당 갈 수 있습니까?” 그게 관심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하는 방법은 뭐냐? 옛날 이스라엘이 하던 방식을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노력해야 돼. 예수의 경지에 이르러야 돼. 도를 닦아야 돼. 사도의 권면을 다 지켜야 돼.” 그렇게 나오겠지요. 그렇게 나오면 예수는 하나의 라이벌이 되어 버려요. 토끼와 거북이 경주하는 것처럼 따라 붙이려고 하는 겁니다. 

  

따라 붙이게 되면 점점 더 따라 붙었다는 도의 경지가 자기 유일한 기쁨이 되고 보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난관에 부딪혀서 실패로 끝나게 되면 자살하거나 좌절해버립니다. “난 안 돼, 안 돼!” 하면서 좌절해 버려요. 자기한테 웃고 자기한테 우는 것, 그것은 결국 뭐냐 하면, 자기 이름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이름 옆에 자기 이름을 계속 얼추 비슷하게 갖다 붙여놓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언약상대자가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말고 또 다른 언약상대자가 등장하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왜 마귀가 예수님 십자가복음을 그렇게 싫어했던가요?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 내에 이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오직 내 이름으로, 다시 말해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갈 수 없다는 이것 때문에 그 당시 악마의 대변인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공모해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자신의 고유한 그 가치를 묵사발 만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세상 모든 인간들이 설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생명이라고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오직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 빼놓고는 전부 다 죽은 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지구의 모든 것을 다 갖다 바쳐도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좀더 깊이 있게 가 봅시다. 

  

세상과 관련된 모든 일은 죽음과 관련된 일이다. 이렇게까지 나아가야 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일, 우리가 정 붙이고, 애지중지하고, 안타까워하는 그 모든 것은 죽음으로 이끌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일이 돼요. 많은 분들이 결혼이나 가정에 대해서 관심사가 많아요. 왜 관심사가 많으냐 하면, 행복의 원천이 가정에 있기 때문에 가정이 편해야 자기가 행복하다고 해서 “어떻게 하면 가정이 행복하고 부부사이가 좋아지고 자식교육 잘하겠습니까?” 하는데 그렇게 묻는 사람은 먼저 마태복음 10장부터 알고 있어야 돼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우리부부가 어떻게 가깝게 지낼 수 있는가를 생각지 말고 떨어져도 괜찮아야 된다는 겁니다. 별거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지금 제가 잘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별거해도 상관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왜? 세상에서 우리가 관심 두는 모든 것들은 죽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아무리 가정이 행복하고 부자가 된다 할지라도 어떤 것을 주고 생명을 얻겠는가, 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성경을 알고 성경을 읽었다 치지만 평소에 세상에 돌입해버리면 이런 말씀들은 어디로 갔는지, 에프킬라 뿌릴 때는 다 도망간 것 같지만 금새 모기가 달려드는 것처럼 도로 세상 것이 웽, 하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라 하는 것은 죽음의 가마솥이라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죽음의 가마솥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 질문을 해야 돼요. 대체 어떤 것들이 죽음에서 면제될 수가 있는가? 다시 말해서 어떤 것들이 “날 죽음에 끼워넣지 말라. 날 죽음과 엮지 말라.”라고 발악하는 것들이 뭐냐를 봐야 돼요. 

  

죽어가면서도 기어이 발악하는 것이 있어요. 특히 장례식에서 고인이 죽고 나면 울잖아요. 우는 의미가 뭐냐 하면, “엄마! 나는 좀 더 살다 갈래.” 그거잖아요. 다시 말해서 일찍 죽어서 애석하다는 말입니다. 애석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휴, 다행이다. (가슴 쓸어내리면서) 나는 아직 안 죽어서 다행이다.’ 하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다행일까요? 이 땅의 가마솥에서, 죽음이 들끓는데서, 그 지옥 불에서 펄펄 끓는 그것이 다행일까요? 우리 사고방식을 장례식 앞에서 다시 점검해야 돼요. 전도서 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결혼식에 가지 말고 장례식에 가라. 네 모습이 그 모습이다.” 그런 구절이 전도서 7장 1절입니다. 

  

“이 세상은 죽음이야.”라고 해놓고는 왜 그렇게 살고 싶으냐는 말입니다. 무슨 낙을 보겠다고? 무슨 호강을 누리겠다고? 그 이유를 생각해 봤어요. 그 이유는 사망인데 사망의 특징이 뭐냐? 모방이에요. 애가 크면 누구를 모방하느냐? 아버지를 모방합니다. 부모를 모방하지요.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국 어느 쪽으로 가느냐 하면, 죽음 쪽으로 가요. 

  

그러나 자식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음 쪽으로 가는 것과 관계없이 기껏 양육 받고 교육받은 것이 모방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 부모가 가르치는 내용이 뭐냐 하면, “혼자 살아라. 혼자서 살만한 독자적인 힘을 길러라.” 그걸 가르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생명은 혼자서 살면 그 자체가 바로 죽음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4 절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이 말은, 나 말고 어떤 분이 계셔서 이 벌거벗고, 탄식하고, 죽어가는 것을 함몰하듯이 덮쳐오는 그 관계가 생명이에요. 다시 말해서 나는 혼자 살면 그것이 죽음이고 누구와 더불어 함께 있을 때만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사는 사람한테는 늘 공포스러운 세상이에요. 성공해도 늘 경쟁자가 있고 모함자가 있고 헐뜯는 사람이 있잖아요. 얼추 뭐가 되었다 싶으면 또 달려드는 사람이 있다고요. 문재인 29퍼센트, 하면 와, 하고 다 달려들어요. 누구 하나, 반기문 떴다 하면 와, 하고 달려들어요. 

  

혼자 잘 되는 것은 보지를 못하는 세상이에요. 성경에서는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겁니다. 사탄이 죽기를 무서워하게 만들어서 성공을 하든 뭘 하든, 성공한 지점에서도 벌벌 떨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어디서 나왔는가?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그런 것 외에는 다른 것을 배운 적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누구의 어른이 될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 누구도 그 누구의 어른이 되면 안돼요. 똑같이 돼야 돼요. 십자가는 모든 것을 무차별하게 만들어요. 죽탕이라고 하는데 뭣도 들어가면 다 녹아서 똑같이 돼요. 똑같은 형태가 되는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 더 낫고 덜한 것도 없어요. 그런데 바리새인은 더 의롭고 창기와 세리는 지옥 간다고 들쑥날쑥 하고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무차별하고 똑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순서를 바꿔버리지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간다고 하지요. 그 말은 먼저 천국간다는 말이 아니고 똑같음을 너희가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것이 똑같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애들 유치원 운동회를 하더라도 1등을 해야 되지 2등하면 안돼요. 엎어지면 엄마가 달려가서 일으켜 세웁니다. 그 무차별을 견디지를 못해요. 그걸 두고 보지를 못합니다. 서울의 강남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촌에서 허름한 몸빼 입고 돌아다니던 아줌마도 어느 날 갑자기 강남에서 살게 되면 그 다음부터 옷에 신경을 써요. 그쪽에 맞추기 위해서. 그게 모방이에요. 흉내내기입니다. 그래도 무서워요. 또 어떤 트랜드가 유행할까 또 겁이나요. 그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 절벽에서 손을 놔야 됩니다. 

  

손을 떼야 됩니다. 아등바등 살려고 애를 쓰면 그 공포심이 더욱더 심화됩니다. 절벽에서 손을 놓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오게 되는가? 절벽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 내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언약이 진리지 내가 죽는다는 것은 언약에 낄 가치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나는 뭘 보고 살았어요? 무엇에 시달리면서 살았습니까? 무엇에 쫒기면서 살았어요? 무엇에 심한 정신적 고문을 당하면서 살았습니까? 스트레스는 우리가 왜 받는 거예요? 무서워서 받잖아요. 그런데 무서운 것이 뭐냐? 물리적으로 무서운 것이 중력입니다. 정신적으로는 자기 의로움이에요. 쌓아놓은 자기 잘남, 자기 정의로움, 자기 거룩이에요. 

  

자기 의로움에서 손을 놓으세요. 절벽에서 손을 놓고 중력에 맡기세요. 중력이 있다는 것, 자기 의로움이 있다는 것, 그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고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자기 의와 물리적인 그 중력 같은 것들이 죽음의 일부입니다. 삶이라는 것이 죽음의 일부에요. 4절에 하나님께서 뭔가로 덮치는데 우리 자신이 부적절하다고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죽을 몸이라는 말이지요. 

  

죽을 몸이어야 하는데 그동안 마귀한테 속아서 살려고 교회 나온 거예요. 살려고 종교생활하고, 살려고 기도하고, 살려고 헌금하고, 살려고 개척교회하고, 살려고 선교사가고, 그렇게 한 거예요. 핑계대지 마세요. 딱 보면 딱, 입니다. 죽어야 할 것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죽는다는 그 본질을 애써 거부하고 그래도 한 번 살아보자는 식이에요. 

  

먼저 돌아가시면 “아이고 좋겠다!”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인데 “아이고, 아이고!” 하는 이것은 뭐냐? ‘더 살아야 할 것인데 이게 꿈인가? 아, 아직 살아 있구나. 다행이다.’ 이 모방이 남긴 것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살고자 해서 남긴 그 모방의 내용은, 네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된다는 거지요. 

  

교회 다니고 믿는다는 가정 같으면, 네가 말씀대로 순종해야 네가 산다는 거예요. 얼마나 악마적으로 가르쳐왔습니까? “말씀대로 살면 조기 퇴학한다. 말씀대로 죽는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말씀대로 순종해야 이 땅에서 복을 받고 교회와 나라와 국제사회에서 큰 일군이 된다.” 큰 일군이라는 반총장은 반밖에 안 되는 거 같아요. 큰 일군 되는 그것이 다에요? 

  

그게 뭐예요? 유엔사무총장 해본들? 무차별이라니까요, 무차별. 죽음의 가마솥에 불 때면 똑같아요. 멀건 죽이 돼요. 어디서부터 너인지도 나인지도 몰라요. 나도 너도 없고 무차별적이라니까요. 주님은 세상을 그렇게 보고 있어요. 독자적으로 살려고 하니까 이미 하나님언약관계에서 끊어진 것이고 이게 아담이잖아요. 

  

자식이 부모를 모방했다는 것은 결국 아담의 사고방식을 답습하고 교육을 받은 것인데 아담자체가, 아담과 여자와 뱀은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저주의 굴레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으로 못가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것이 제 말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입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환원된다는 거예요. 창조 전으로 환원된다는 겁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숨 쉰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대로 새로운 피조물 될 때 그것이 살아 있는 겁니다. 인간의 dna에서 아기가 나올 때 그 과정이 어떤 과정이냐 하면, 복제를 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도 언약을 복제를 해요. 방식이 같아요. 복제를 하는 겁니다. 복제를 한다는 말은 우리는 원판이 아니고 복제판, 복사판이라는 겁니다. 누구의 복사판? 예수 그리스도의 복사판이라는 거예요. 그걸 누가 하는가? 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령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사본이 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낳아진 자,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만이 모여서 무슨 나라, 아들의 나라를 이루어요. 흔히 아는 천국이 아니고 아들의 나라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아들의 나라’가 나오지요. 

  

에일리언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아주 무서운 영화인데 우주에서 외계인과 싸우는 내용이고 이 영화가 1, 2, 3, 4까지 나왔거든요. 1편, 2편 나올 때는 “용감한 의지의 지구인이 못된 외계인과 싸워서 이긴다.” 이런 내용이었는데 소재가 떨어지니까 3편, 4편에서는 지구의 여자가 에일리언을 임신해서 출산시킵니다. 

  

에일리언4가 주목받은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은 인간은 껍질에 불구하고 사실은 인간 속에 괴물이 들어 있다는 현대인의 괴물성을 이야기했습니다. 돈에 미쳐 돌아가는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조절이 안 되고, 그 돈 좋아하는 욕망을 저지할 수 없으니 이것은 괴물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현대인의 삭막한 물질주의를 영화가 반영한 거예요. 

  

돈 앞에서는 명상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김과장>이 그렇게 했던가, 그래요. 돈 앞에서는 명상하는 것이 아니라고. 볼 것 뭐 있어요? 뭘 인내합니까? 웬 떡이냐 하고 받지요. 드링크박스에 담은 억대의 돈 냉큼 받으면 될 것 아닙니까? 뭘 명상을 해요. 우리가 괴물입니다.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의 라이벌이에요. 

  

얼마나 악마적이에요. 악마는 예수 그리스도가 라이벌로 삼았습니다. 그 성질, 그 에일리언 성질을 똑같이 닮아서 악마가 우리를 그냥 잉태한 거예요. 혼자 살겠다는 겁니다. 자기 이름을 끝까지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왜 내 이름을 내가 스스로 포기해요. 안되지요. 내 행복의 원천인 가정과 내 행복의 원천인 직장을 못 놓겠다는 겁니다. 

  

이것가지고 죽음과 싸워서 이기겠다는 거예요. 취직하고 그리고 결혼 잘해서. 하지만 마태복음 10장의 그 말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다는 그런 말씀은 왜 있는 거예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어도 무슨 수로 생명을 얻겠느냐 하는 그 말씀을 왜 주신 겁니까? 

  

그런 말씀을 주신 예수님의 무차별성을 우리는 견디다 견디다 참지를 못합니다. 에라 죽어라, 하고 죽였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고 성령은 그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옛날 유대인들도 실패했다. 너희는 이미 실패했지?” 하지만 성령을 가지고 그 실패한 무차별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가 왜 흙으로 환원되는지 그 이유를 알아요. 그것도 그 운명을 아주 신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 죽은 시체가 되어간다는 이 사실이 소풍가듯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이 땅을 잠시 다녀간다는 느낌으로, 낙으로, 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죽음이 와서 약을 올리다가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부럽다 죽음아, 이렇게 나오니까 죽음이 겁나는 거예요. 

  

그러면 남은 중요한 것이 뭐냐? 평소에 혼자 사는 것이 악마적 괴물버릇이고 그게 보람인데 어떻게 해서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하나님 쪽으로 붙을 수가 있느냐는 그 문제가 남아 있는 거예요. 구약에 보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 이스라엘이 망하도록 합니다. 망하도록 해놓고 이스라엘의 요청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요새 말로는 성령이지요, 신이 임한 사람이 선지자라는 이름으로 불쑥불쑥 돌출합니다. 

  

무작위적으로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현 듯 등장해요. 다니엘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친구가 나오거든요.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만만하게 본 거예요. 나는 왕이고 너희는 그냥 내 부하고. 그러니까 십자가 앞에서, 죽음 앞에서 무차별성이 아니고 나는 차이 나게 왕이고 너는 차이 나게 부하고 내 명령에 따라야 되는 하찮은 존재라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뭐냐 하면, 법을 세운 거예요. 이제부터 금신상에게 정한 때에 절을 해야 한다는 법을 세운 겁니다. 그런데 다니엘 세 친구는 왕의 부하인데도 불구하고 절을 안했어요. 그러니까 막 고자질을 한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경쟁한다고요. “저 사람은 법을 어겼습니다. 처벌해야 됩니다.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용서하면 안 됩니다.” 이래서 세 명이 잡혔습니다. 

  

잡혔을 때 왕이 다니엘 세 친구에게 하는 말을 보면 아주 걸작이에요. 왜 걸작이냐 하면, 자기입장을 생각해서 상대방에게 말을 던집니다. “내가 만약 너 같은 지경이 된다면 까짓거 한번 절하고 목숨 건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거든?” 그러니 나나 너나 똑같은 인간이니까 너희들도 마찬가지일게 아니냐는 거지요. “여호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쯤해서 양보하고 그냥 절해라. 다시 한 번 내가 너희에게 특별히 기회를 줄게. 잘못했다 하고 절 한번 꾸벅 하면 살 것이 아니냐?” 

  

그런데 다니엘 세친구가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왕은 자기가 세운 법을 자기가 유도리를 할 수가 없어요. 어떤 여유를 줄 수가 없어요. 법은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어요. 어쨌든 간에 왕이 약이 많이 올랐어요. 사랑에 대한 배신으로 느껴서 평소보다 7배가 온도를 올려서 저 포항제철의 용광로같이 했던 모양이에요. 

  

얼마나 뜨거운지, 이게 얼마나 실제적으로 물리적으로 온도가 높은지, 세 친구를 불속에 집어넣는 간수가 타죽을 정도였으니까요. 나름대로 불에 안타죽을 수 있는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죽었어요. 세 명은 불에 들어갔습니다. 다니엘 세친구도 자기가 죽는지만 알았지요. 

  

그러나 그들은 비로소 그동안 못 봤던 것을 봤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믿던 생명을 죽음 속에서 봤어요. 생명을 죽음 속에서 보고 난 뒤에 자기를 죽음 속에 집어넣는 그 인간들이 하나의 허수아비라는 사실, 그들이 명령한 것이 아니고 그들 배후의 죽음이라는 것이 그들을 명령해서 우리로 하여금 네가 죽을 자인지 살 자인지 측정하는 용도로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주님의 계시 만들기 일환으로서 자기가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에요. 붙잡힌 바 된 것을 확인할 뿐입니다. 우리 하루하루 삶이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를 찾지 마시고 “오늘도 이렇게 붙잡아주시네요.”를 확인해야 돼요. 제가 지난 금요일에 서울의존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취지로 이야기했습니다.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뭐냐? 불신자는 자꾸 근사한 일을 만들어서 “주님, 저는 이런 착한 일을 했습니다.” 뒤에는 말을 안 해도 알지요. “복 주시옵소서.” 이런 것이 붙지요. “오늘도 이런 착한 일을 했으니까 죄를 짓더라도 벌을 경하게 해주세요.” 상쇄해달라는 조로 나가지요. 그러나 성도는 뭐냐 하면, 자기를 세워놓고 막대기를 가지고 브리핑을 하는 거예요. 

  

“주께서는 오늘도 머리를 이렇게 염색하게 해주시고, 옷도 이 옷을 입게 해주셨습니다. 여기 주목! 이런 바지를 입게 해주시고, 아침에는 운동도 하게 해주시고……” 이렇게 마치 자기가 자기작품이 아닌 것처럼, ‘아닌 것처럼’이 아니고 아니지요. 아니고 자신은 그냥 주님이 만든 작품으로 예수의 증인노릇 할 뿐이에요. 

  

“주님이 만든 작품이 이 정도입니다. 오늘도 수성로를 달렸습니다.” 이렇게 브리핑을 하는 거예요. 자랑할 것이 없어요. 자랑할 내 이름이 없다니까요. 왜? 주의 이름의 작품이니까. 그러면 주위에서 보는 사람이 “그러면 네가 성공했냐?” 이렇게 나올 것이 아닙니까? 아니야, 이 작품이 있다는 말은 이미 절벽에서 손을 뗐다는 것이고 철봉에서 손을 뗀 거예요. 

  

내 꿈, 내 희망, 내 소망, 자기 행복의 목적, 이런 철봉에 매달려서 우리는 얼마나 힘을 줬던지 힘줄이 생기고 스트레스가 된 거예요. 안 놓으려고, 꽉 쥐려고. 그게 실제로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죽음의 일부인데, 그 외에는 사는 길이 없다고 부모로부터 그렇게 양육을 받았고, 교육을 받았고, 모방을 했어요. 

  

그러면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모든 세계가 죽음의 세계라서 어떤 철학과 어떤 교육과 어떤 윤리도덕도 죽음으로 이끌게 만듭니다. 그러면 성령을 줬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잉여, 여분의 것, 또는 간격을 보는 거예요.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던 예수님과 그리고 그 외 모든 사람의 차이, 그 간격을 살피는 겁니다. 

  

그걸 살핀다는 말은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신약시대에 오기 전에 이미 구약에서도 그러한 조짐이 이미 있었습니다. 에스겔 37장은 여러분이 다 아실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낸다고 했지요. 에스겔 선지자를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면, 뼈들만 있는 곳, 그것도 바짝 마른 뼈들만 있는 골짜기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자 외에 다른 사람은 그 대화에 낄 수가 없어요. 왜? 전부 다 뼈다귀니까. 뼈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바짝 마른 뼈는 그냥 수동적 입장에 있어요. “우리 두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나 보자.” 이런 것이 없어요. 죽어도 완전히 바짝 말라 죽었어요. 

  

이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잘못 해석할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 덕분에 이들이 회상했다. 부활했다. 살아났다. 신난다.” 이렇게 해석할 공산이 큽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바짝 마른 뼈들만 있는 골짜기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고 갔다는 이 의미는 뭐냐? 

  

에스겔을 하나님이 부른 호칭이 있어요. 인자입니다. 그 말은 인자를 토대로 하지 않는 한, 인자를 창조의 근원으로 하지 않는 한 새로운 피조물은 없다는 이야기에요. 인자의, 예수님이라는 dna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이라는 dna를 토대로 할 때에만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만 있는 곳에 오신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는 뼈다귀인데 그들은 살아 있다고 길길이 뜁니다. 자기 본색도 모르고. 진짜 살아 있는 것은 그들이 아니고 그들 배후의 악마가 살아있지요. 그들 아비인 악마가 살아 있습니다. “너희 아비는 악마다.”라고 해도 그들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자기가 살아 있다고 보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잘 되었다 싶어서 예수님을 고소할 용도로 질질 끌어다 예수님 앞에 세우고 양 손에는 짱돌을 들고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이게 법이라는 거예요. 법이 있으면 무차별이 되지 못해요. 법 지킨자와 못 지킨자, 돌로 칠 수 있는 자와 돌로 침을 받을 자의 구분이 생겨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제정자의 뜻이 아니고 인간들의 뜻이에요. 언약의 제정자는 주님이고 지금 언약의 제정자가 주님 앞에 서 있잖아요. 그런데 시험문제 출제자도 아닌 것이 지금 시험문제 출제자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마치 정답을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어른이지요. 가르치겠다는 겁니다. 교회 누구도 가르칠 사람 필요 없어요. 누가 누구를 가르쳐요. 아무도 필요 없어요. 예수님은 가르치는 분이 아니고 아예 가르침을 받는 죄인과 하나가 된 분이에요. 그 하나됨이 중요해요. 세례요한이 세례줄 때 주님은 “물 그렇게 뿌리면 안 되고 이렇게 뿌려야지.” 이런 식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례요한한테 물세례를 받아버려요. 

  

세례요한이 놀라서 “죄인들만 받는 세례에 의인이 낄 자리가 아닌데 왜 끼십니까?” 이렇께 끼어드는 그것이 의라는 거예요. 죄인들과 하나 되는 것이. 스승 되어서 가르치는 것이 의가 아니라, 말 빨로 천당 보내는 것이 아니고 끼어들어서 천국 보내시는 거예요. 그 죽음에 끼어들어서. 멀건 죽에 뛰어들어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옛날 교회도 안다니던 젊은 시절에 본 영화가 있는데 좀 야했던 것 같아요. 머리가 긴 아가씨가 그냥 물속에서 나오면 되잖아요. 물속에서 나오면서 그 긴머리를 탁 튀기면서 물이 튀면서 그 장면을 또 정지해서 클로즈업하고……, 갑자기 설교하다가 이상한 장면이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서는 물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물속에 입수하신 거예요. 죄 속에 들어오신 겁니다. 나는 높고 너희는 낮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앞에서 같은 죄수가 된 거예요. 그게 죄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간음한 여인, 그것도 끝나고 나서 들킨 것이 아니고 현장에서 들킨 이유가 그 여인은 인자됨을 위해서 간음해야 될 여인으로 자기와 일치시켜 버린 겁니다. 

  

쉽게 말해서 윤리와 도덕으로서는 사망을 이길 수가 없고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윤리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잖아요.” 그게 윤리도덕이에요. 사도바울의 윤리와 권면을 지키는 그것이 윤리도덕이에요. 그것 지켜서 남과 차이나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중국입니까? 차이나, 게? 

  

어떤 차이도 십자가 앞에서는 무차별이에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교회 다니면서 스트레스 받는 이유가 뭡니까? 차이 나려고, 복 더 받으려고 해서 그렇잖아요. 그냥 죽은 자에요. 죽음의 심화. 나한테 기대되는 모든 철봉에서 손을 놓으세요. 그리고 갈수록 그러하세요. 

  

다음 시간에 볼 5장을 미리 보게 되면,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나 죽으련다.” “대통령 바뀐다는데 대선이나 지나고…….” “아니, 나 그냥 죽을래.” “태극기가 이기는가, 촛불이 이기는가 보고서…….” “아니, 난 그냥 죽을래. 태극기고 촛불이고 간에 난 그냥 죽을래.” 

  

왜? 사람이 살아 있다고 우기면 남 가르치려고 덤벼들기 때문에. 가르친다는 말은 내가 너보다 낫다는 거예요.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한 번 가르쳐 보세요. 좀 더 가르치고, 좀 더 잘 가르치고, 이렇게 되어서 자기가 자기 덫에 빠져요. 나중에 내놓을 것이 없으면 설교 부담되어서 자살합니다. 누구처럼 부담되어서. 

  

보는 눈은 많지요. 내놓을 것은 없지요. 자기가 생각해도 설교는 엉망진창이지요. 우세스럽다. 우세스러울 것이 뭐가 있어요? 이미 죽은 자인데 뭐가 우세스러워요? 이미 그렇고 그런 자인데. 우리의 철봉과 절벽을 전부 다 철회시키세요. 그 철봉과 절벽은 사실은 가짜입니다. 

  

우리는 가짜에 목매였습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것에 전부를 걸었던 거잖아요. 주님의 십자가 생명 앞에서는 사소한 것인데. 가정 행복에 목숨 걸었고, 애 교육에 목숨 걸었고, 수요일에는 영재들 나오는 프로그램 있잖아요. 골치 아픕니다. 그런 거 내보내서 바보들 다 기죽게 만들고요. 연예이들 애 키우는 거 보여주는 프로그램 보면, 그렇게 키우면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것이 아닐 건데 다른 사람은 거지같은 느낌이 들어요. 

  

똑 먹는 것 보여주는 방송 보면, 나는 언제 저거 먹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가고. 먹어봐도 별 맛도 없는데 땀 흘려 가면서 맛있게 먹는 것처럼 하고. 그런 것들로 뭔가 우리가 철봉을 자진해서 만들어요. 왜? 교육을 우리가 그렇게 받아왔고 아버지 어머니 뒤따라서 그렇게 모방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르고.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비나 어미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은 거예요. 본받을 일 있거든 복음이 삼종세트, 그냥 실패하고 망하고 아프세요. 실패하고 아프고 망할 때 비로소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생명이 보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구원받는 것은 나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이군요. 주께서 언약을 세우려고 오셨지 나를 천당 보내려고 온 것이 아니군요. 내 행복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군요.” 

  

언약 세우는 일에 우리를 넣어주기만 해도 왠 신분인지 그것은 천사도 부러워할 자리입니다. 천사가 사도요한한테 절해야지 사도요한이 천사에게 절하면 안돼요. 주님의 복제물이고 주님의 작품입니다. 자부심 가져도 좋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는 목표들이 부유물처럼 우리 눈앞에서 유혹합니다. 저거 가지면 더 오래살 수 있고, 저거 가지면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위대한 스승 같은 느낌, 그것이 우리의 덫이고 사망이고 독자적인 마귀의 정신인 것을 이제는 정리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