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24강-구원과 죽음(고후5;8-10) 1702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2. 20. 21:10
2017-02-19 12:39:47조회 : 102         
   구원과 죽음 170219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구원과 죽음(고린도후서 5:8-1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YuXWIG_0PTU, Hit:7
 이근호17-02-19 13:23 
구원과 죽음 

2017년 2월 19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5:8-10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차라리 죽고 싶다’라는 식으로 이 취지에 같이 할 자를 모집하는 투로 사도는 발언하고 있습니다. 즉 “나는 일찍 죽은데 같이 저와 뜻을 같이할 분이 혹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는게 지거워서 비겁하게 도피하는 식으로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짜와 가짜를 이런 식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는 사도의 자신감을 말합니다. 

그 이유가 그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어차피 가짜와 진짜는 가려질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에 해당되는 그 ‘우리’라는 집단에서 한결 같이 고백하는 바는 바로 ‘차라리 죽고 싶다’입니다. 바로 이 고백은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가짜로 드러날 자를 겨냥해서 하는 고백하는 겁니다. 

즉 가짜들은 그 어떤 근사한 고백을 쏟아내어도 그 배후에는 필히 “그러니까 나는 살고 싶단 말이야”라는 성향을 감출 길이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대단하고 으리으리하게 사느냐가 진짜를 증명하는 증거가 아니라 훌쩍 미련없이 세상을 늘 떠날 마음으로 사는 것이 간접 증명이 된다는 겁니다. 

세상이 더러워서 세상을 떠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더럽고 재수 없어 떠나고 싶은 겁니다. 사도 바울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의해 현재가 조건 지어 진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신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그 근거가 됩니다. 즉 현재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살다보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심판성이 현재에 작렬하는 자들이 바로 진짜 성도들이라는 겁니다. 그 심판성이 작렬하게 되면 성도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미움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본심은, 자신의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여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이 좋든 싫든 자기에게 충성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귀한 것들이 있다할지라도 자기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다 자기를 미워해도 자신은 자기를 끝까지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런 자기 중심적인 사도 방식으로 인해 인간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항해서 기어이 살데까지 살아보자는 오기로 대처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오해가 있습니다. 지나온 과거는 모든 간단히 사라집니다. 아무리 감동 있게 보낸 시간도 뒤돌아보면 벌써 없어졌습니다. 지나온 철로길에는 잡초만 무성합니다. 먼저 먹었던 식당의 그 자리도 30분 후에 가보면 벌써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꼬리는 짧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과거를 자꾸만 주워모습니다. 이는 그것은 자신이 이만큼 살게 된 것도 다 본인이 애쓴 덕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배신’입니다. 전혀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일방적입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지금 살아있는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기억을 조립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는 일방적으로 자신이 자기를 심판하는 바가 됩니다. 흔히 교회 나와서 복음을 알았다고 자부하고서는 미리 죽음의 상황을 연상해보고서는, 현재 자신에게 장착된 방식대로 그 죽음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다짐을 해봅니다. 이처럼 이론상 죽음의 순간에도 믿는 자임을 과시하기 위한 방안은 마련할 수 있지만 실제로 죽음이 찾아올 때는 그딴 것, 아무 것도 소용없습니다. 

참된 죽음의 순간이 찾아들면, 인간은 자신이 전에 느껴보지 못한 소유에 대한 집착성이 발휘가 됩니다. “이것만큼은 안 빼앗길거야. 이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하면서 말입니다. 결코 사도 바울처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소리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다양하게 펼쳐져도 ‘죽음의 힘’ 앞에서 똑같은 반응을 나타냅니다. 

살아가면서 항상 잠재되어 있는 두려움과 공포심이 그것을 반영해줍니다. 구체적인 독재자가 굴복을 요청할 때만 죽음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아침에 직장에서 해고통보 받는 순간만 죽음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자기가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자 애를 쓰기 위해 지속적으로 신에게 기도하고 기도한다는 그 자체가 그만큼 내재적으로 죽음의 종이 되어 있다는 반증입니다. 

악마는 자신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동일하다고 말입니다. 예를 들면, 초록색 모래 더미가 있고, 빨간색 모래 더미가 있다고 칩시다. 초록색 모래 더미가 빨간색 모래 더미가 싫어서 뭉텅이로 없애버린다고 해봅시다. 그런다고 해서 마지막 남은 빨간색 모래 한 알이 두려움에 얼굴이 창백해져 초록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인류의 긴긴 역사 가운데 악마가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또 실험하는 바는, 그 어떤 특별한 인간도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간이 제 딴에 죽음에 겁을 내든 겁을 내지 않든지 상관없이 죽음은 모든 인간을 이기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단 한 알의 빨간색 모래는 죽음에 묻혔다가 사흘만에 다시 초록색 권세, 곧 악마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했습니다. 

이게 바로 말씀 완성의 위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5:54-56에 보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인간이 악마를 이긴다는 말이 아니라 진짜 성도는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조립된 채, 부활의 능력으로 사망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진주 목걸이는 진주만으로 둘러싸인 것이 아닙니다. 그 진주를 잇는 끈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그 끈은 평소에는 진주에 가리워져서 잘 보이지 않지만 진주와 진주 사이가 단락지어질 때는 목줄이 보입니다. 

이처럼 기존의 악마에 속한 육신을 말씀으로 해체하고, 그 해체된 것들을 재료로 해서 십자가 능력으로 다시 조립해놓게 되면 그것이 바로 진짜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심판을 이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노릇을 하게 됩니다. 말씀은 이처럼 지켜서 구원되는 용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쪼개는 식으로 그 안에 담겨 있는 십자가의 승리를 드러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게 하옵소서.(요 12:25).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2-20 19:39 
224강-고후 5장 8-10절(구원과 죽음)1702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8-10절입니다. 신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5:8-10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교회 나와서 주님 말씀 순종해서 주님 계시는 천국까지 따라가 보려고 수많은 사람이 애쓰지만 오늘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10절의 본문으로 말미암아 다 떨어집니다. 예수님을 신앙의 라이벌로 여기고 그렇게 따라잡으려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 와서 다 떨어져요. 사도바울이 하는 이 고백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겁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이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가짜는 이 쯤해서 좀 빠져줘, 라는 그런 이야기에요. 전에 이야기했지요. 복음 가르친다고 해서 성도 아니라고요. 복음 설교 한다고 해서 성도 아니에요. 그것은 일종의 기능인일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이 고백에 진정성, 진심이 같이 우러나와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이야기했는가? ‘차라리’ 이 한마디로 끝내버려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차라리 그만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았을 때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고백은 딱 이거 하나지요. 

  

“세상은 이렇습니다. 우주는 이렇고 인간은 이렇습니다. 인생은 이런 겁니다.” 죽 나열하다가 “따라서 그러므로 차라리 일찍 떠나는 것이 낫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모아집니다. 세상에 대해서 모르고, 아는 것이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다 아는 사람에게서 비로소 나올 수 있는 발언입니다. 

  

세상을 열심히 살지 않고. 세상을 도피하는 것처럼 비겁하게 자기 역할이 힘들다고 도중에 내팽개치고 자살하듯이 피하면 되겠느냐, 라고 우리는 사도바울보고 비아냥 거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 10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것은 뭐냐 하면, 빨리 죽고 싶은데 그 죽는 이유가 뭐냐?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지금껏 살아온 것이 주님의 의에 의해서 살아온 것인지, 내가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기에 그나마도 이만큼 살았는지를 마지막 때 끝에 가서 실제로 담겨 있는 내용에 대해서, 순수한 본질에 대해서 티를 내보자는 거예요. 

  

가짜가 진짜 흉내 내 왔는지, 진짜가 따로 있었는지를 주의 심판대 앞에서 확연하게 패 까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생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주님에 대해서 무슨 일을 하셨느냐, 를 아는 쪽과 평생 기억나는 것은, 내가 인생 이만큼 올 때까지 나는 이런 식으로 했다는 그 기억, 그것만 남는 것이냐, 네가 어느 쪽이냐는 겁니다. 

  

사람이 기억을 한다고 그것이 실제가 아니에요. 그것을 가지고 기억의 배신이라고 합니다. 내가 기억한 그것이 진실로 그러한 줄 알았는데 막상 내가 그 기억한 것과 그 당시 있었던 친구와 이야기를 해보니까 내가 줄곧 뭔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광주사태 때 당시에 있었던 사람들도 있는데 그 광주사태에 대해서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던 사람들끼리 모여서 한 40년 후에 이야기를 해보니까 똑같이 광주사태에 관여되었어도 나는 이렇게 보고 저 사람은 저렇고 보고, 다 달라요. 

  

그게 기억의 배신이라는 겁니다. “아, 사람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없구나. 뭔가 내 속에 욕구가 있어서 동물적인 충동이 있어서 그 충동에 의해서 실제로 일어난 것도 변경될 수 있겠구나.”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을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 변경하고 싶은 그 충동 그 성깔이 뭐냐? 

  

그것은 살고 싶다는 거예요. 나는 이런 경험 하니까 더 살고 싶다. 저런 경험을 했으니까 더 살고 싶다. 더 살고 싶다는 것이 밑에 쫙 깔려 있는 거예요. 너는 무엇을 원해? 나는 이것을 원해. 남 보기에는 순수한 화투장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밑장이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것으로 인하여 나는 살고 싶다, 가 뒤에 붙어요. 살아 있는 것이 남는 것이다, 이것이 딱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사도바울은 밑장이 깔린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나는 죽고 싶은 거야.” 이게 밑장으로 딱 깔려 있는 거예요. 같은 성경을 보고 같이 고백을 해도 성경해석을 할 때 ‘살고 싶다.’가 깔린 사람의 성경해석과 ‘속히 죽고 싶다.’가 깔린 해석이 서로 반대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한쪽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본 사람이고 한쪽은 자기를 없애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성경을 본 사람이고. 자기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성경을 본 사람에게 있어서 지금 같은 십자가 이야기하고, 같은 언약 이야기하고, 같은 천국 이야기해도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내가 같은 예수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패 까자.” 하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네가 진짜로 보이지? 아니야, 가짜야.” 사도바울은, 나처럼 고백을 안 하면 가짜라는 거예요. 죽음을 사도바울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어요. 세상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이 진실로 드러나는 심판이 있다는 것이 자기에는 유일한 소망이라는 말이지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더 이상 군말 못할 테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의 입장이 이렇습니다. 미래가 현재를 이루는 조건이 된다는 겁니다. 지금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는가? 지금 왜 나는 이런 일을 했는가? 왜 내 앞에 토끼가 나타나고 왜 없던 도로가 뚫리고, 바나나는 왜 이렇게 노랗고, 봄이 되니까 꽃이 왜 피고……. 

  

꽃이 피는 이유를 압니까? 그냥 피니 피는 거지요. 그 이유에 대해서 모르잖아요. 그 모든 이유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다 알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게 봄이 되면 꽃이 핀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봄에 꽃이 피기를 원하지요. 

  

꽃이 피기를 원하는 그 목적이 뭐냐? 그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을 내가 목격하고 싶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목격하려면 나는 봄까지 계속 안 죽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나는 살아야 되겠다.’가 항상 뒤에 남아 있는 겁니다. “꽃이 아름답네.” 성도가 꽃이 아름답다고 하니까 옆에 있던 불신자도 “꽃이 아름답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단어를 적어보면 똑같은 단어를 가지고 문장을 만들었어요. 아주 톤도 같은 톤으로 했습니다. 분간이 안 됩니다. 마지막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납니다. 같은 멘트를 날려도 ‘그러니까 나는 죽어야 해.’와 ‘그러니까 이 꽃을 보기 위해서 나는 더 살아야 해.’라는 식으로 서로 다른 밑장이, 숨겨진 밑장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리스도의 선악이야기가 10절의 이야기라면 빨리 죽고 싶다는 것은 8절의 이야기입니다. 이 10절과 8절이 연결이 안 되는데 연결이 되는 순간은 한 순간밖에 없습니다. 9절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주를 기쁘시게 한다는 말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서 거부한다는 것을 아주 기쁘게 여기는 거예요. 내가 소망하고 내가 기도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배격한다는 그 사실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거 미친 사람 아니에요? 그럴 것 같으면 교회 왜 나옵니까? 자기 원하는 것을 챙기기 위해서 교회나아고, 주 앞에 악바리로 기도해서 원하는 것을 얻고자 교회 나오는데. 

  

쉽게 말해서 지금 나는 주님의 취향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분과 전화를 하다 그런 단어를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몰라요. 주님이 나보고 하는 말이 “너 재수 없다.” 한다는 거예요. 재수 없다, 너는 내 취향이 아니다, 너는 나하고 상종할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은 주님의 그 견해를 기쁘게 수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여 기쁘게 나를 살리지 마시고 살든지 죽든지 나를 주님 기쁘시기 인도해오셨잖아요.”라고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9절이에요. 9절이 들어가지 않으면 8절에서 10절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이어지지가 않습니다. 

  

성도라면 매일의 우리의 삶에 대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내가 봐도 나 자신이 재수 없어야 돼요. 너 같은 인간이 아직도 사냐, 이런 견해로 자기 자신의 거울을 봐야 돼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재수 없느냐?” 그야 말로 백설 공주가 백발공주가 되어야 돼요. 

  

물론 그럴 때가 있어요. 70대가 넘으면 그렇게 돼요. 거울을 아예 보지도 않지요. “꼬라지하고는! 왜 그래 늟었노!” 청춘을 돌려달라며. 따라서 오늘 본문을 처음부터 다시 설교한다면, 이 내용은, 가짜는 결국은 다 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천당 가려고 교회 온 사람들이 설치는 것에 너무 마음아파 하지 마세요. 결국 가짜는 다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고맙게도 마지막 심판대가 있으니 우리가 안 걸러내도 주께서 다 걸러내요.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만 쓴 것이 아니고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로마서, 죽 썼습니다. 사도바울의 그 모든 편지를 종합해보면 이겁니다. 스마트폰 앱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폰을 최적화시키는 앱이 있는데 클린 마스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앱의 그림이 빗자루에요. 그거 볼 때마다 은혜를 받아요. 안 되는 것은 다 빗자루로 쓸어버리는 거예요. 주께서 매일같이 클린 마스터를 가동시킵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가동시켜요. 빨간 모래 한 더미가 있고 초록모래더미가 하나 있다 합시다. 빨간 모래가 꼴 보기 싫다면서 초록색 모래를 없애버립니다. 

  

그래도 초록 모래는 또 남아 있어요. 또 꼴 보기 싫어서 또 없애버리고 또 꼴 보기 싫어서 또 없애버립니다. 초록색 모래와 빨간 모래, 두 종류의 모래가 있다면 한쪽이 나머지 한쪽이 꼴 보기 싫다고 추려낸다면 마지막 남은 알갱이가 있을 거예요. 

  

마지막 남은 알갱이가 자기 친구들 추려나가면 자기가 겁을 내서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해야 되는데 “잘못했어요. 초록색 보기 싫어요? 그러면 이제부터 빨간색으로 바꿀게요.” 이렇게 살살 빌고 빨간색으로 바뀌어야 되는데 이 초록색이 얼마나 성질이 대단한지 끝까지 초록색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걸 왜 제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전부 다 결국은 한통속이에요. 종교라는 것도 그렇고, 예술, 과학, 이렇게 하지만 마지막에 어떤 폭력적인 정치가가 나타나서 “나에게 절하지 않으면 다 죽인다.”고 한다면 예술이고 과학이고 종교고 필요 없이 “잘못했습니다. 당신에게 절하겠습니다.”하고 절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실제로 하고 있잖아요. 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 최고 존엄성을 거부하면 다 죽여 버린다는 말이지요. 까불면 스프레이 뿌려서 죽이잖아요. 이 세상 모든 지혜는 인류 역사상 시험을 해본 거예요. 별난 인간이 있는가를 시험해봤습니다. 역사를 6천년 잡고 6천년 더하기 2천년, 약 8천 년간 시험을 해봤는데 인간이 별나 봤자에요. 

  

전부 다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그 똑같은 인간들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들,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 똑같아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대비해서 뭘 열심히 해보지만 죽음을 미리 대비하는 것과 실제로 죽음이 찾아오는 것하고 행동이 달라져요. 

  

죽음을 대비할 때는 마음 단단히 먹고 예수만, 십자가만, 죽으면 죽으리라,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이론이고 자기가 죽음을 미리 상상해서 혹시 죽음이 왔을 때 이런 마음가짐으로 죽음마저 이기리라, 하는 일종의 상상이고 막상 죽음이 오게 되면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자기 소유입니다. 

  

내 재산, 내 자식, 내 부동산, 아까워라 내 부동산. 내가 상상한 죽음이 왔을 때는 아낌없이 버리리라, 가 되는데 진짜 죽음이 스멀스멀 기어 나올 때는 제일 먼저 살 궁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촛불집회 했던 사람들 정말 나라 어려우면 캐나다 이민할 곳 알아봅니다. 뉴질랜드 이민갈 곳 없는가, 내빼기 바쁘지요. 

  

그것도 가진 사람이나 이민이라도 가지 못 가진 사람은 오도 가도 못해요. 그동안 자기가 죽음을 이긴다고 여기면서 생각했던 모든 종교적인 방어책, 복음적인 방어책, 그딴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기는 구원받은 빨간 모래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래?” 하고 마귀가 일을 벌이니까 자기는 빨간 모래인척 하는 초록색 모래에 불과한 거예요. 

  

그렇게 불교를 욕하고 그렇게도 불신자를 욕했건만 막상 죽음이 왔을 때는 불신자가 따로 없네. 내가 바로 불신자에요. 그 때 우리에서 나올 수 있는 고백은 하나밖에 없어요. “너 재수없다. 나 너에게 실망했다. 내가 생각해도 너는 상종할 인물이 못돼. 너같이 예수 믿으면 그것은 예수 믿는 것 아니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지적하고 미워할 수 있어야 됩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한 톨의 모래도 예외없이 전부 다 마귀가 작동을 하니까, 실제로는 종교인이고 과학이고 예술을 한다고 지리산에 기어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잘못했다고 빌고, 그거 필요없어요. 

  

정치적인 힘, 총살당하는 그 힘 앞에 누구도 큰 소리 못쳐요. 북한에 있다가 탈북 했으니까 큰소리치지 그 안에서는 큰소리 못 칩니다. 있을 때 큰 소리를 왜 못 쳤는가? 죽음이 무섭기 때문에. 김정은이가 무서운 것이 아니고 죽음이 무서워요. 김정은이가 나타났을 때 그것이 실효성 있게 약간 나타났을 뿐이지 김정은이 말고 다른 사람이 와도, 만약 어진 사람이 예를 들어 반총장이 북한의 대통령이 되어도 여전히 우리 속에 작동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죽으면 안 돼’가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김정은이가 통치하고 난 뒤에 그것이 노골화된 것뿐이지 어떤 인간도 예외 없이, 목사가 되었든, 장로가 되었든, 집사가 되었든, 신앙생활 5년을 했든, 6개월을 했든, 하루를 했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똑같이 모든 인간은 죽음한테 맥을 못추는 겁니다. 죽음을 이길 수가 없어요. 왜 걱정하고 왜 두려워하는데요? 

  

그 심리를 따져보세요. 죽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예요. 죽는 것이 무서운 사람 앞에서 사도바울이 약을 올리는 겁니다.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 되나 안 되나, 안되지 봐라. 어디서 가짜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 너는 뭘 믿고 그렇게 큰 소리 치느냐?” 모든 모래는 전부 다 초록색 모래밖에 없었습니다. 그 속에서 딱 한 알, 딱 한 알, 예수님은 죽고 나서 유대인들은 게임오버라고 한 겁니다. 

  

유대인의 아비는 마귀니까 마귀를 유대인이 대변해주고 있는 거예요. “게임 끝났다. 어딜 정치적 힘을 공격해? 세상권력이 누구 건데?”라고 했던 그 권세를 이겼어요. 찬송가에도 나와요. 권세를 이겼다고 해요. 그 권세가 뭐냐 하면, 그냥 권세, 대통령, 행정수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무정부주의라 할지라도 내 몸을 항상 억누르고 있던 그 권세, 없는 듯이 있으면서 나를 궁극적으로 군홧발로 밟는 그 권세, 그 죽음의 권세를 주께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예수님을 밟았고 모든 인류를 초록색 모래, 마귀모래로 바꾸었던 그 권세를 평생토록 체험해야 될 임무가 있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 힘, 죽음의 힘이 얼마나 센지를 죽을 때까지 두고두고 반복적으로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에요. 

  

그래서 성도가 죽는다는 말은 곧 자기 역할을 다하고 군에서 제대하는 날입니다. 그동안 이 세상이 주님 보시기에 이미 죽음의 세상인 것을 혹독하게 온 몸으로 경험하는 거지요. 그래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주님 앞에 그대로 일러주는 거예요. 고자질하는 거지요. 

  

“주님도 아시겠지만 인간이 사는 이세상이 악마의 세계입니다.” 어서 그 고자질이 유효하게 되는 그 날을 사도바울은 고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내가 다 일러 줄거야.”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사는 것과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우리 사이에서 9절이 있지요. 

  

9절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진짜가 아니라면, 가짜이면서도 성도라고 흉내 내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심판대 앞에 지옥가야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진짜인데 그 진짜의 값어치를 무시한다면, 제대로 파악을 못한다면 주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작용해서 “너 진짜야!”라고 일러줄 수 있는, 주님 쪽에서 벌이는 작업이 있을 거예요. 

  

그 작업을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 미래의 형태가 현재의 조건이라는 이야기를 했지요. 미래의 형태가 현재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심판대도 미래고 사도바울이 빨리 죽겠다는 그것도 사도바울 개인의 입장에서는 미래가 된다면 그 미래를 위한 조건이 현재 마련되었을 때 그 조건은 어떤 식으로 미래와 연결되어 있는가? 

  

모든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언약이나 말씀이나 같은 뜻입니다, 언약에 의해서 조립되어 있는 거예요. 조립되어 있는 것을 아는 방법이 뭐냐? 조립되면 진짜인데 조립되었느냐 아니냐를 어떻게 아는가? 말씀으로 매일같이 해체를 당하는 경우를 당하면 이게 진짜에요. 말씀으로 해체당하는 거예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말은, 말씀으로 매일같이 해체되는 겁니다. 왜냐? 우리가 이미 악마에 속한 아담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악마의 마음은 항상 선악을 아는 자가 매일같이 새롭게 형성이 되거든요. 선악을 아는 자는 어느 과실을 따먹을 수가 없느냐 하면, 생명나무과실을 따먹을 수가 없어요. 창세기 3장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진짜 천국 백성이라면 선악과(선악체제)를 따먹은 이것을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존재로 달라지게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 달라지는 작업에 말씀이 개입하는 겁니다. 말씀이 개입하게 되면 우리의 추억은 전부 다 산산 조각나서 해체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서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 다정한 이야기가 오고가지요. 그것이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습니다마는 식당에서 계산하고 밖에 나옵니다. 30분 후에 아까 아름다운 추억이 피어났던 그 자리에 다시 들어가 보지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제가 별로 어려운 말 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추억이라는 것은 이미 없어진 거예요. 다른 사람이 앉아 있을 때 성질 급한 사람은 “내 아름다운 추억의 자리에 네가 뭔데 앉아 있느냐?” 하고 시비를 걸 건데 그럴 수가 없지요. 기차가 철로를 지나가면서 추억을 만든다 하지만 1년 후에 그 자리에 가보면 잡초가 나 있어요. 

  

쉽게 말해서 우리의 인생은 잡초더미입니다. 지나가면 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없는 거예요. 들의 풀같이 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의 꼬리는 짧아요. 긴 꼬리 자꾸 걸치지 마세요. 나의 역사 만들지 마시고 꼬리는 없다 치세요. 그래서 인간이 꼬리가 없는가? 방금 뭐 했는데 돌아보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인간은 이미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인간이 죽도록 정해졌다면 도대체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의미 없는 거예요. 빼빼로 같아요. 남녀 간에 빼빼로 갉아먹기 하듯이 나중에 보면 다 갉아먹고 없어요. 인생은 이미 죽도록 되어 있는 걸, 죽는 것 자체가 목적인데 다른 목적을 설정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살아요? 이미 죽게 되어 있는데. 쿠알라룸푸르공항에 가봐야 독극물스프레이만 받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 공항에 왜 갑니까? 마카오로 가려고? 그 스프레이 받겠다고 일부러 말레이시아까지 간 겁니까? 김정남이라는 사람은 자기 인생이 아주 우아하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자식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그런데 웬 아가씨 둘이 독극물 뿌려서 그거 맞고 죽을지는 상상도 못했잖아요. 김정남 그 사람은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았어요. 자기 원하는 대로 세상을 살았고 그게 자기 취향에 맞았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래서 되겠느냐 그 말입니다. 성도라면 죽는 것이 내 취향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면, 그 말은 지금 내가 사는 것도 절대로 내가 원하는 바도 아니고 내 취향도 아니라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어야 돼요. 

  

이 사실을 알았던 사람이 욥과 다윗이었습니다. 구약의 욥과 다윗, 그리고 에스더까지 첨가시켜 보지요. 미인대회에서 1등해서 아하수에로왕의 새 왕비가 되어서 그 위세가 대단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원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권력 앞에서는 왕비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너도 유대인이니 너도 죽는다.” 그렇게 되었어요. 

  

모르드개 사촌이 하는 말이 “나도 같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너도 왕비라는 이유로도 이 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너도 언약에 속한 존재, 말씀을 위한 존재,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를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빨간 모래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너는 이 땅에 태어났기에, 따라서 네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은 그리스도가 통과했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해.”라는 말을 앞당겨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일러주는 거예요. 

  

그럴 때 에스더가 하는 말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잖아요. 임금님의 본처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요. 그렇게 뭔가 잘된다고 하는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미운 존재고 망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시그널이었어요. 이게 신호가 되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서 악착같이 자식 키우고 살아 보련다, 라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러니까 너는 죽어 마땅해. 그러니까 너는 지옥가야 해.” 언약, 그 말씀의 본질에 비춰볼 때 너는 죄인이라고 알려주는 하나의 신호가 되는 거예요. 이게 9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젊은 사람이 삼성전자에 입사원서를 냈는데 1차 되고 2차 되고 3차에서 떨어져 버렸어요. “불합격입니다. 다음에 다시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소리 듣고 나왔을 때 그 청년이 성도라면 뭐라고 고백해야 됩니까? 9절로 고백해야 되지요. “그런즉 우리는 삼성에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런 경우가 있을 수가 있지요. 혼담이 거의 성사되었는데, 그야말로 날짜까지 잡았는데 갑자기 남자 쪽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됩니다.” 하고 예식장에 안 나타났다. 그럴 때 신부가 부케 들고 울고 짤 것이 아니고 9절을 이야기해야 돼요. “그런즉 예식장을 떠나든지 머물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다.” 

  

진짜라면 죽기 전에 진짜로 티가 나게 되어 있는데 그 진짜의 티가 뭐냐? 내가 원했던 성공, 내가 원했던 출세와 모든 것이 내가 나를 망하게 하는 요인으로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대조하면서 파악하는 기회가 된다는 겁니다. 욥과 다윗과 에스더의 특징이 있어요. 특히 다윗의 특징은 오늘날 우리를 굉장히 기쁘게 합니다. 

  

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으니까. 욥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원하는 것을 다 누렸으니까. 부자 되었지요. 자식 열 명 낳았지요. 자식들이 다 훌륭하고 신앙생활도 잘하지요. 원하는 것을 다 준 거예요. 에스더도 마찬가지에요. 왕비까지 올랐으면 여자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지요. 

  

그런데 그들의 특징은 난입이에요. 말씀의 난입, 십자가의 난입. 난입이라는 것은 허락 없이 그냥 뛰어드는 것. 십자가의 개입이 되어버린 겁니다. 십자가를 꽂아버린 거예요. 도깨비의 가슴에 칼을 꽂아버린 것 같이 십자가를 꽂았어요. 꽂아버린 순간 미래가 아니고 지나온 과거를 다시 생각하게 된 거예요. 

  

오늘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과거라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공부했고, 사회에서 경쟁에서 안 지려고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의 기쁨을 짓밟아온 과거에요. 그런데 그것이 무계획적이 아니라 계획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말씀대로 된 거예요. 

  

시편 61편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여기에 피한다는 말이 있어요. 피한다는 말은, 갑자기 극복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서 피하다 피하다 보니 결국 주의 날개 밑에 피했다는 고백으로 시편 61편이 쓰였거든요. 

  

그럴 때 사방에서 다윗을 못 죽여서 안달하는 상황이거든요. 다윗은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디서 미워서 이렇게 하는가?’ 할 때 하나님은, 네가 미워서가 아니라 네가 운반하고 있는 그것이 미운 거예요. 오리가 뭐가 그렇게 밉고 닭이 뭐가 그렇게 미워서 살처분을 하겠어요? 소나 돼지가 뭐가 그렇게 미워서 살처분을 하겠습니까? 

  

그 안에 AI바이러스가 있어서 그렇잖아요. 그 바이러스는 우리 인간이 싫어하듯이 지금 성도 안에는 바이러스처럼 주님이 들어 있어요. 그게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이 그토록 싫어하는 거예요. 다윗은 다윗언약을 운반하는 운반책입니다. 모세는 모세언약을 운반하는 운반책이고 오늘날 성도는 십자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수모를 당하는 운반책이에요. 

  

남들이 나를 꼴 보기 싫다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그 십자가가 내 안에서 반복해서 작용해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내가, 이런 내가 정말 싫어. 내가 나에게 재수 없어요. 이런 취향인 내가 싫어. “주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사탄은 오라!” 이렇게 큰 소리 쳐놓고는 사탄은커녕 차바퀴 펑크만 나도 “주여, 왜 저에게 이런 재앙을 주십니까?” 

  

차바퀴가 내 것이라는 소유성이 갑자기 차바퀴가 펑크 났을 때 새롭게 현실화 되는 거예요. “지금 공산당은 오라. 공산당이 오더라도 나는 예수를 외치겠다.” 이렇게 해놓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가 잘 안 나오니까 자기 머리카락은 또 자기가 쥐고 있으려고 하네요. 모든 것이 나의 소유성. 결국 나는 이 소유성을 놓치기 싫다는 거예요. 

  

이 소유성 가지고 계속 살고 싶다는 겁니다. 시편 61편 4절의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었지만, 우리는 이론상, 지식상 이것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것이 실제로 올 때는 죽음으로 와요. 밑장이 뭐냐?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밑에 깔고 시편 61편 4절이 오게 되면, 우리 인생에 주님의 십자가가 난입한 것이 됩니다. 

  

뛰어들어서 개입한 것이 됩니다. 개입하는 순간 그동안의 우리 인생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인생이 아니었고, 그것은 나의 기억의 배신이었고 실제로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것이 그 순간만큼은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을 인생으로 이어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의 진주목걸이가 되어버려요. 

  

진주목걸이는 구슬과 구슬로 이어졌지요. 구슬과 구슬 사이에 언뜻 언뜻 뭐가 보이는가 하면, 끈이 보여요. 만약 금줄에 진주구슬을 달았다면 얼른 보면 잘 안보이지만 늘어나면 금줄이 보이듯이 그 금줄이 뭐냐? 주님의 심판대, 또는 주님의 죽으심, 십자가가 보이고 그 구슬이란, 잘나 보이고 남에게 기죽지 않는 훌륭한 인생 살아보려는 나의 잘남이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 우리는 자기 잘남의 목걸이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다 토막토막 다 끊어진 거예요. 십자가에 의해서. 말씀의 완성이 십자가니까 말씀에 의해서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가 보이도록 구슬과 구슬을 자꾸 벌여놓는 일을 합니다. 잘난 내가 오늘도 잘났는데 내일까지 잘나야지, 했는데 내일에 실패로 끝나요. 

  

실패로 끝날 때는 그 순간에 뭐가 있느냐? 십자가가 딱 보이는 겁니다. “너 내일에 왜 잘하려고 하는데? 내일까지 살고 싶지?” ‘살고 싶지’라는 그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지요. ‘오늘까지는 그저 감사하고 내일은 또 주께서 사나 죽으나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이것이 아니고 ‘내일까지 이 잘남을 유지시켜야지. 내일까지 계속 지속시켜야지.’ 이런 욕구가 오늘의 나에게 미리 있는 거예요. 

  

그러나 미래를 위해서, 마지막 심판을 위해서 현재가 조건 지워졌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미래라는 것은 예수님의 심판대니까. 심판을 위해서 우리가 오늘날 앞서서 던져진 동전처럼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사나죽으나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이론 들어보니까 별로 어렵지 않지요. 이론은 굉장히 쉬운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보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설교 이쯤 들었으면 여러분이 ‘아하, 그런 뜻이구나.’ 다시 말해서 ‘우리가 움직이는 말씀이구나.’ 내가 살아야지, 가 아니라 내가 심판을 면해야지, 가 아니라 내 자신을 주님의 심판대로 조립해서 이미 제작해 놓은 거예요. 

  

고무줄 동력으로 만든 비행기, 여러분이 어릴 때 날려 봤습니까? 고무줄 동력으로 만든 비행기가 날아가니까 꼭 생명체 같지요.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내가 만들었거든요. 내가 만들기 전에는 전부 다 하나의 부품들이었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뭘로 해체하느냐 하면, 말씀의 부품들로 해체해서 아까 그 목걸이처럼 십자가로 연결시켜 버리면 우리는 기록된 말씀의 구현체, 또는 구체화가 되는 거예요. 

  

한꺼번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주의 심판대에 살아남아서 천당 가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이미 나를 그리스도의 말씀이 실제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고무줄 동력으로 만든 하나의 모형체와 같이 조립을 한 거예요. 조립을 하면서 나라고 하는 것은 삭제가 되고 사라지는 겁니다. 

  

팔다리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말씀 덩어리로서 복합체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말씀을 지키고 자시고 할 그것도 없어요. 주께서 제작하겠다는데 내가 왜 말씀을 지켜야 됩니까? 복음 설교는 항상 기쁨으로 끝나요. 지킬 것이 없다니까요. 주께서 상어를 토막 내듯이 날마다 말씀으로 난도질을 하는데 뭘 지켜요? 난도질당한 자체가 말씀의 제작품, 주님의 제작품인데 뭘 지켜요? 

  

그래서 사망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만든 말씀의 형상물로 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책임 하에 사망을 이기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작용하기 때문에 내가 볼 때 내가 재수 없는 인간이 되는 거예요. “사는 꼬라지하고는!!” 

  

그게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나와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 생명을 좀 미워하라는 말이지요. 이 가짜를 가짜로 미워하라는 말이지요. 방법은 뭐냐? 말씀에 입각해서 보면 우리가 어딜 봐서 말씀 지킵니까? 못 지키거든요. 못 지키니까 가짜지요. 가짜니까 없애주는 것은 말씀 쪽에서 친절하게 우리를 없애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고맙다는 그 표시가 뭐냐? 나는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왜?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이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자기백성을 말씀으로 제작했다고 보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 보면,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에게 율법이라는 말씀을 준 것은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그것은 사실은 너를 지옥으로 몰아넣기 위한 악마의 제작물이었느니라, 라는 그것을 스톱, “내가 이 인간을 해체하고 새로 조립할거야.” 해서 십자가가 와서 날마다 해체하고 조립할 때 그 해체된 덩어리 하나하나는 전부 다 악마가 원했던 겁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다. 밥을 먹어야 산다. 사람이 인기 있어야 산다. 사람이 사는 보람이 뭐냐? 출세하는 보람으로 산다.” 이게 말씀에 입각해서 보니까 마귀가 만든 제작물이었어요. 우리는 거기에 말려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고자, 혹은 지옥 간다 하는 그것도 내 소관 밖의 문제입니다.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문제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에요. 나라는 것은 없어요. 그러면 이런 현상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라고 묻는다면 에베소서 5장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 말씀을 제식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술 작작 먹어라 인간아.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그 말이에요. 술 취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살아보려고 했는데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것을 잊기 위해서 술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처먹지요. 술 처먹는 사람, 술 먹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을 짐승으로 보지 사람으로 못 보겠어요. 무슨 대화가 돼야지요. 

  

제정신이 아닌데요. 술 정신이지 제정신이 아니에요. 악마정신인데 무슨 대화가 됩니까? 성령에 취해버려라. 성령에 취하는 것이 뭔지 알려면 술 취하는 것이 뭔지 먼저 알아야 돼요. 술 취해서 헤롱헤롱 하잖아요. 성령에 취하면 헤롱헤롱합니다. “아, 죽고 싶어라.” “무슨 이런 소리가 다 있지? 어떻게 자식이 부모 앞에서 그런 소리를 다 하느냐?” 막 나무람을 당하지요. 

  

“엄마 아빠, 못난 딸 용서하세요. 저 죽고 싶어요.” “그런 소리 하는게 아니다. 자식의 도리가 아니야.” 여러분,

윤리와 도덕이라 하는 것은 아직도 마귀 종이라는 뜻입니다.
아직도 지킬만한 것은 지키겠다는 것은 마귀가 하는 거예요.
아직도 괜찮은 존재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는 겁니다. 


성경말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은 쪼개기 용이지 지키는 용이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차피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바 지금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 무의미 속에서 허무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니 이제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너무 기뻐서 이제는 주님 얼굴 뵈올날만 기다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