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질 집
2017년 2월 5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5:1-3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5: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사람들의 모든 걱정은 ‘자기 걱정’의 확장입니다. 자기를 돌보는 것이 자신의 궁극적인 임무라고 본성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본성에 대해서 사람들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장막집 무너지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집을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일을 번거롭게 하시는 걸까요? 애초부터 안 무너질 집으로 인간으로 살게 하시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세상만사가 인간 좋아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에게 좋은 것이 나에게도 좋다”고 신앙티를 냅니다. 그러나 이것은 솔직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좋은 그것을 하나님께서도 같이 좋아하실거지요?”라고 요구하는 바를 은근히 감추는 고백일 뿐입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때,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자신의 행동을 강제하고 조절을 하듯이, 그 버릇으로 하나님에게도 적용하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도 동조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합니다. 이런 엉터리 하나님관을 가지고 사람들은 성경을 훑습니다. 거기에 온갖 좋은 것들을 제공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초월의 세계’에 도전합니다. 즉 지금껏 성공하듯이 구원에도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처사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완전하게 창조하시지 않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세상을 준비하고 왜 거기에 인간을 두셨는가요? 그것은 세상일이 인간을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생긴 세상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심지어 악마에 의해서 인간이 유혹받아야 하는 일마저도 예수님을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나 현 인간의 마음상태에서는 이런 소리가 좋은 소식으로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자아를 위한 존재’로 탈바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익 없는 짓은 나서지 않으려고 하고 그것을 ‘성공’이라고 긍정적으로 보지 않으려 합니다.
즉 인간은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성공이 자기다움에 부합되는 상황이라고 간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5:17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인간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벌어진 그 일의 의미를 위하여 보조적 입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들의 본성에 의해 야기된 비극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부활은 없다’고 외치는 것은 곧 이 세상이 얼마나 헛된 것들의 통치를 받고 있느냐를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후속 조치인 부활을 증거하므로서, “너희들 보기에 참된 하나님은 이처럼 ‘거짓’을 말하시는 분으로 취급당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통보해줍니다. 즉 인간들은 주장합니다. 자신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인간 세계에서 거짓말이 됩니다. 왜 인간들이 성경에 나오는 그 초월적 세계의 진입을 노리면서 몸부림쳐도 다 실패하는 지 그 이유가 정립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인간들 자기 자신이 거짓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거짓된 것들만 ‘옳다’고 곡해해서 끌어모아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채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세계를 무너지게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등장을 ‘심판주’로 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메시야에게 인간들이 달려가서 안길 수 있는 안목은 인간에게 전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메시야를 알아볼 능력이 없으니 마땅히 대자연과 더불어 인간은 무너져야 합당합니다.
인생이란 본인이 만들어 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사는 게 우리의 원함이 아닙니다. 따라서 살기 싫어도 하나님은 계속 살려내십니다. 그리고 죽일 때는 군말없이 죽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제시한 관계성입니다. 인간이 악마의 편에 붙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끊어진 관계’를 가지고 ‘단절된 관계로 구성되는 관계성’을 성취시키십니다. 예수님의 몸에 그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오해와 곡해와 무시를 예수님께서는 ‘주되심의 요소’로서 자기 안에 끌어당기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9:34에 보면,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 몸에 생긴 기 창자국과 못자국은 성도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요한복음 20:27에 보면, “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마라는 의심 많은 제자와 예수님과의 연결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얼굴이 아닙니다. 인간의 눈과 귀와 코가 아닙니다.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전부 예수님의 몸에 삼켰다는 증거는 바로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입니다. 즉 도마는 이미 예수님 몸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단절로 구성된 관계성’을 자기 몸으로 구원하십니다.
인간이 무너지면서 그냥 세월 따라 무너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아닙니다. 죄인으로서 참여됩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에게 상처가 나게 하시는 방식으로 자기 사람을 덮치게 됩니다. 이제 성도는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롬 14:8) 십자가 상처를 매개로 결합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성도는 자신의 무너짐에 대해서 감사하고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자신에게 의미 있다고 여긴 인생의 성과들은 모두 쓰레기며 하나님의 작업을 훼방해온 방해물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처럼 무너짐은 새로운 것의 덮쳐짐과 동반된 작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 출현하지 않는 전체 앞에서 우리의 생은 아예 없는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2강-고후 5장 1-3절(무너진 집)1702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1-3절입니다. 신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5:1-3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세상이 무너지는 이것은 기정사실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하늘과 땅은 이제 마지막이라, 이렇게 생각하세요. 실컷 보세요. 이 세상의 하늘과 땅을. 실컷 후회없이 보시되 그냥 보시면 안 됩니다. 왜 무너져야 되는가? 이 멀쩡한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대자연,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우리의 신체, 몸, 머리카락, 이 모든 것들, 태어날 때 탱글탱글 태어난 우리의 피부가 점점 무너지는 것이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분명히 공통적인 현상을 부여받고 있으면서도 이 공통적인 현상을 해명해줄 사람이 없어요. 전부 다 쉬쉬하고 있는지. 과학은 발달해봐야, 과학이 발달한다고 하면서 좋다고, 2020년도에 어떻게 되고, 2040년도에 어떻게 되느냐, 상품으로 내놓고 희망을 제공하지만 2040년도가 되어 보세요. 그 때 내 나이 몇 살인지. 구경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지금 태어난 애들이 2040년도에 화려하게 느껴져도 그들이 그 때에는 “2100년도에는?” 이렇게 또 나올 거예요. 세상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모르고 그냥 어지러울 정도로 속도감을 가지고 어디론가 빠지고 있습니다. 무너지고 있어요. 그 이유, 원인에 대해서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처음부터 인간자체가 너희들 보기에 실패작이라는 겁니다. 실패한 인간 몸 가지고 꾸역꾸역 인생을 살아보면 그 인생 자체가 실패작이지요. 다 소용없는 겁니다. 어제 토요일에 친척 칠순잔치가 있어서 갔어요. 저보고 뭘 시키지 말아야 되는데 뭘 또 시켰습니다. 식사기도를 시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 사람만큼은 초조해 하면서 ‘또 저 입에서 무슨 폭탄선언이 나올지……?’ 인생 돌아보면 다 쓸데없고 부질없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인생이란 자체가 다 쓸데없고 부질없는 거예요. 그게 노래가사에도 나와 있습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방실, 방실, 방실이가 부른 노래에요. 살아오면서 지금 밑에 있는 기반이 무너지는데 기반 자체가, 토대자체가 실패거든요. 그 위에서 아무리 점핑, 점핑, 점프를 해봐야 초월에 도달하지를 못합니다. 성경이 우리를 성공자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자체의 내용을 우리에게 주면서 “네가 이 성경대로 해볼 능력이 있거든 한 번 해 봐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가는 사람들이 성경보고 이걸 지켜서 천국에 도달하려고 온 몸부림을 다 쳐요. 믿으라고 하는 것은 몽땅 다 믿고, 행하라고 하는 것은 몽땅 다 행하고. 시키는 것 다 하고, 비전센타 짓는다고 돈 내라고 하면 다 내고, 온갖 것 다 해보는데 이게 항상 실패로 끝납니다. 젊을 때, 집사, 장로 되어서 설칠 때는 진짜 하늘나라 상급의 마일리지가 막 쌓이는 것처럼, 천국에 가도 A급 대우받아서 갈 것처럼 하는데 그런 것은 햇권사가 그런 거지요. 막 집사가 되고 막 권사가 된 햇집사, 햇권사는 이 교회 본인 아니면 안돌아간다는 식으로 설쳐대는데 나중에 집사를 2년이나 3년하고, 장로도 그렇게 하게 되면 슬슬 자신만 이용당하는 느낌이 듭니다.
‘뭐야 이거?’ 하지요. 붕 띄워놓고 밑에서 흔드는 느낌이 들고 자기가 쪼다된 느낌도 들면서 ‘나 안하련다. 장로 네가 맡아라.’ 슬슬 발 뺍니다. 괜히 상처받을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슬슬 발을 빼게 되면 결국 그동안 교회에서 미친 듯이 주를 위해서 설쳤다는 그것이 뭡니까? 그걸 다섯자로 ‘부질없는 짓’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방실이가 노래 참 잘 불렀어요. 이 세상에 하는 일이 나이 들고 몸 약해져서 돌아보니 다 한 때 ‘날 좀 알아줘.’ 하고 자랑질을 한 거예요. 그래서 식사기도 할 때, 제발 자랑질 좀 그만하라는 식으로 해서 밥맛이 제대로 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자랑질 하고, 뽐내는 짓 하고, 자기 몸 약하고 이제 자랑질 할 것이 없으니까 옛날에 했던 자랑질을 끄집어내서 소도 아닌 것이 또 되새김을 해요. 방실이 노래 보면 이런 은혜로운 가사가 나오지요. “내 나이 묻지 마세요. 이름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이 이렇다는 거예요. 서로 안 묻기. 서로 사적인 것 안 들춰내기. 아파트 옆집에 살아도 뭐하며 사는지 모르기. 이게 20년 전에 불렀던 노래의 가사인데 요새는 촌도 그렇게 살아요. 서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서로 간섭 안하고 관여 안하기. 촌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서울에 가 봐야 서울 사는 며느리는 이미 서울이라는 곳에 적응되어 있어요. “너희 집에 김치 있나?” 그거 안 묻기. “요새 애들 공부 잘하나?” 그런 것 안 묻기요. 신세대인 며느리 머리 속에는 일체 사적인 것은 시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안 물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게 “서울이란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 왜 묻지 않는가? 현대인들은 너무 공부를 많이 했어요. 공부를 많이 하다 보니 각자 하나 깨달은 것이 있어요. 해답은 없다는 거예요.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 그게 해답이고 그게 진리이니 이유를 묻지 말고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승리고 이게 인생이고 그 외 나 사는 일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것이 해답이고 그 외에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 천국이 있다는 말이지요. 천국이 있으니까 갑자기 목표가 생겼어요. ‘이런 좋은데 한 번 가볼까?’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한번 해 봐라.” 폴짝폴짝 뛰지요. 뛰기는 하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폴짝폴짝 뛰니까 교회 목사들이 사기를 치는 겁니다. “당신이 뛰어서 소유하고 쟁취할 만한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하시면, 조금만 헌금 더 하시고 봉사 더 하시면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격려를 해주니까 진짜 그런 줄 알고 뛰어보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모를 때 목사가 집어주는 성경구절 가지고 그렇게 하니까 거기에 희망을 걸었지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다고 하니 까짓 거 기도하고 금식하지요. 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쟁취하는데 며칠 굶는 것 못할 것 뭐 있어요? 다이어트도 되는데 다 하지요. 일주일 가지고 안 되면 열흘로 늘여보고 그것도 안 되면 40일로 늘이니까 ‘아, 초월이라는 것이 인간이 달성할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 안 되는것만 안 되는 것이 아니고 된다고 여긴 그것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 이것도 안돼요. 사랑도 물론 안 되고. 젊을 때는 교회에서 천국 내일이라도 곧 갈 것처럼 그렇게 설치다가, 그래서 온갖 직위를 다 걸치고 집사에서 장로, 다 해보다가 나중에 보니까 “묻지를 마세요, 덧없이 간 인생” 교회 왜 가는가? “그냥 쉬었다 가지요.” 커피나 한 잔 하면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결국 교회란 친목단체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노는 장소로, 시간 때우는 장소로. 그러니까 이 성경은 우리보고 약을 올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울산강의에서 이렇게 했지요. “하나님은 함정수사를 했다.” 함정수사. 사람이 자기가 어느 정도로 실패했는지를 몰라요. 자기가 실패의 정도를 알았다면 구원에 대해서 기대조차 안했을 거예요. 구원의 기대를 한다는 것은 자기 주제파악이 안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야기해주는 것인데 성경에서 교회가 그 이야기를 안 하고 “당신은 당신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가사와 “세상 사 인간 사 다 부질없는 것.” 어느 가사가 복음적입니까? 어느 가사가 희망적이고 긍정적이에요? 어느 가사가 진실입니까? 하나님 믿으면 구원해준다고요? 성경은 함정수사에요. 네 속의 괴물이 그걸 원하고 있어요. 마귀가 그걸 원하고 있는 거예요. 마귀주제에 천당 가려고. 마귀주제에 천당 가는 그 심성이나 우리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천당 가려는 우리 심성이나, 아담 후손이기 때문에, 마귀의 심성이 들어왔기 때문에 꼭 같은 심성으로 반복되고 있는 중이에요. 주님께서는 이 성경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원없이 실패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정도 실패해야 되느냐 하면, 이제는 자기가 자기에게 힘주는 그 모든 힘을 다 놓아버리는 것, 힘을 쫙 빼는 겁니다. “나 원래 안 돼. 난 원래 안 되게 되어 있어. 나보고 구원이야기하지 마. 나는 원래 안 돼.” 이 정도까지 내려가야 돼요. 5장 1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무너지면’ 원래부터 같이 무너졌는데 너는 이 성경을 안보고 모를 때는, 그래도 나만은 안무너질거야, 라는 반칙성 있는 소망을 누구나 송곳처럼 뽑아낸 거예요. 이것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가시 같은 겁니다. 자기의 희망이 자기에게 가시가 된다는 것, 그것이 암의 원인,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아시겠어요? 자기가 희망을 가지면 가질수록 여러분 속에 있는 병은, 암세포는 더욱더 확장됩니다. 제가 내과 전문가는 아니지만. 사서 암 걸려요. 사서 당뇨걸리고. 성경의 치료법은 간단해요. 무너지거든 같이 무너져라, 그 말입니다. 왜? 무너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네 뜻이 뭔데, 네가 뭔데 그 뜻을 변경시키려고 합니까? 제가 시간 아직 얼마 안 되었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설마? 하나님은 거짓이 없는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했고 악마가 거짓말한다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왜 그렇게 바꾸어서 이야기합니까?”라고 이야기한다면 제가 조건을 달았어요. 나에게, 하나님은 나에게 거짓말 하는 분이에요. 이 말은 뭐냐? 나는 거짓인지 참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자라고 아는 이상은 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나에게 희망을 이야기해보라는 그런 이야기도 있잖아요. 그 정도로 우리는 거짓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나 자신은 참되다고 되지도 않는, 말도 안 되는 우김이 있어요. 그건 마귀가 집어넣은 거예요.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니까. 우리는 거짓말을 하면 밀어내고 진짜라고 하면 다 받아들이는데 그 받아들이는 진짜가 뭐냐 하면, 나를 독려하고, 현재 나에 대해서 부정적인 언사를 보이지 않는 것만 무조건 다 끌어모아요. 그게 바리새인입니다. 그게 사두개인들이었고. 줄곧 인간사는 그렇게 살아왔어요. 살다가 안 되니까 인간사 다 부질없다고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는다고 해서 어떤 해결점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 보면 방금 제가 말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그 이야기를 가지고 사도바울이 언급을 하고 있어요. 사도바울의 편지가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편지일 거예요. 이것보다 더 어려운 철학은 없어요. 정말 어려워요. 사람을 개무시하고 이야기하는 편지거든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여기서 헛되다는 말을 해요. 그리스도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지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절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는 법도 없었고 십자가에 죽는 일이 없었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머리 좋은 여러분이 잘 들으세요. 지금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오자마자 “메시아네요.” 하고 반기고 알아들었으면, 하나님 아버지의 취지에 맞는 메시아인상을 가지고 믿었다면 죽을 필요도 없고, 그리고 죽을 필요도 없기에 부활할 이유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밉상 받고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예수님도 못 알아보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자기의 초월적 능력으로 믿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는 겁니다. 없다는 말은 뭐냐? 예수님 오셨던 그 때의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나 똑같은 성질이 그냥 유지되고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던지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하는 행세를 나에게 또 해 봐, 또 해봐!” 이 말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을 보고 “사탄에 속한 자, 사탄의 대장(바알세불)이다. 저것은 이단이다. 율법을 어긴 자다.” 자기들이 아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러니까 가짜다. 저것은 엉터리 메시아다.”라고 결론내린 그 결과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죽음과 부활이었다는 말이지요. 그 결과를 도로 아나, 하고 우리에게 던지는 거예요. 믿으려면 믿어봐라, 네가 실력있거든 한 번 믿어봐라, 이 말입니다. 실력이 없다면 너희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함께 무너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함정수사에요. 분노하라는 그 말입니다. 이 복음에 대해서 제발 믿는 척 하지 말고 분노하라는 그 말입니다. “차라리 화를 내라. 솔직하게. 아는 척 하지 말고 믿는 척 하지 말고. 내가 너희를 보고 욕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싱글싱글 웃는다는 것은 등신 아냐?” 이런 뜻이에요. 욕하고 있는 거예요. 가정이 어렵고, 허리가 아프고, 종기가 나고……, 그게 망해야 된다는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원해서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걸 몰랐어요? 지금껏 교회 다니면서 그것을 몰랐어요? 내가 태어난 것이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르트르가 던져진 존재라고 했잖아요. 그냥 툭 던져진 존재에요. 내가 언제 남자 되고 싶었습니까? 샤워기 하나도 제대로 못 바꾸는데 내가 언제 남자 되고 싶었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어요. 내가 개로 태어나도 괜찮습니다, 한 것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개나 사람이나 다 주께서 원한 바가 맞잖아요.” 그런 고백을 할 때 주님께서 “세상에, 이런 믿음이 나 있느냐!” 믿음이 있다는 말은 시작점이 결코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에서 어떤 시작점이 없다는 겁니다. 모든 시작점은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뜻을 위해서 시작하다 보니까 그 중에 천 구백 몇 년도, 주민등록에 나와 있는 숫자, 그렇게 태어난 거예요. 남자는 1로 시작하고 여자는 2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가 있잖아요. 그게 이미 주님의 일로 개시한 거예요. 내가 관리할 내 것이 내 인생에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귀가 슬쩍 끼어든 거예요. “저거 괴롭혀 볼까? 저거 가지고 놀아봐?” 주체의식을 개입시켰습니다. “따먹어라. 따먹으면 너, 네가 잘될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나’라는 독자적인 자의식이 발생된 겁니다. “네가 잘 될 거야.”라고 하는 ‘나’라는 경계선, 철조망을 통해서 나 밖은 네가 되고 나의 나와바리와 저쪽의 나와바리, 영역이 갈라져요. 나의 안은 전부다 내 것이 되는, 내 것으로 소유의식이 모아져서 나의 존재감을 밀도 있게 채우는 거예요. ‘나’라는 것을 쪼개보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의 집합체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을 때는 나도 조용히 자살해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뭐도 없고, 뭐도 없고, ‘에라, 사니 뭐하나? 죽자.’ 나라는 것은 빈 윤곽에 불과하고요 그 안에는 그동안 내가 평생 동안 긁어모아놓은 것이 담긴 바구니, 그게 나에요. 대구의 어느 학교 욕하면 “왜 그 학교 욕하는데?” “당신이 왜 그렇게 그 학교 이야기에 화를 내는데?” “내가 그 학교 출신이거든.” 자기가 과거에 그 학교 출신인 것이 바구니에 담겨 있어요. 그 학교 출신이라는 자신의 과거가 계속 누적된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오늘 본문에 의하면 무너질 꺼리들, 무너질 재료라고 하면서 그것을 그렇게 만든 것인데 우리는 무너질 것이라도 내 것이라는 것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되는 겁니다. 마귀가 다 장난질을 쳐 놓았어요. 그렇다면 해결책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 대목을 만약에 장례식장에서 발인예배 때 한다고 칩시다. 상주들과 조문객들은 은혜 받을 준비를 합니다. 본문 딱 들어보니 목사님이 설교할 필요도 없어요. 다 아는 이야기에요. 우리의 몸이 죽게 되면 새로운 몸을 덧입을 것이라고 생각들 하잖아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단순히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땅에 있는 우리 육신부터 해서 모든 것들이 흙으로 만든 그 자리 그대로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게 아니고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여기서 세계관이 나오고, 여기서 고집이 나오고, 여기서 탐욕이 나오고, 욕구가 나오고, 욕망이 나오고, 시기와 질투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깥에서 뭐가 들어가도 일단 내 것이 되어서 나오면 전부 다 더러워요. 돈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닌데 내가 그 돈을 헌금을 하게 되면 더러워서 하나님이 받지를 않습니다. 왜? 내가 냈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가만있으면 문제없는데 나의 오른손이 뭔가 하게 되면 왼손이 눈치 채 버려요. 갑자기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추잡한 짓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내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무너진다는 하나님의 이 말 자체가, 지구도 무너지고, 나도 무너지고 이 세상이 다 불바다 된다는 자체를 “그건 거짓말이야.”라고 외치는 강력한, 우리를 붙들고 있는 세력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은 참고로 듣지 진정성 있게 들으면 너만 손해야.”라는 외침이 우리 안에 있다고요.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게 되면, 우리교회는 그런 것이 없지만, 설교하게 되면 ‘시간 빨리 안가나? 광고나 빨리 하지. 오늘 점심 뭐 나오나? 그거나 먹자.’ 이렇게 된다니까요? 관심사가 참고로 들을 테니까 나를 지적질 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겁니다. 땅에 있는 것이 무너진다고 하니까 ‘좋으신 하나님이니까 무슨 대책이 있겠지. 대책 있을 줄 알았어. 하늘에 있는 것을 덧입는다 하잖아.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평소 우리 일상생활은 안 무너지려고 애를 쓰거든요. 그 예가 욥기 10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수련회 첫 시간에 언급을 했고 사실은 이 내용이 정말 어려운 내용인데 시간관계상 이걸 오래 설명할 수 없었어요. 골로새서 강의라서 욥기를 길게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욥기 10장 5절에 보면,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하시나이까.”라고 언급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쉽게 말씀드리면 “내 인생 내가 참하게 관리하는데 주님이 뭔데 함정수사 합니까?”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이 땅에 살면 살림 따로 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면 그렇게 열심히 살라고 좋은 말로 하면 되는데 “왜 하나님이 하나님 사는 그 방식 그대로 보잘 것 없는 나를 완벽을 요구하는 쪽으로 시달리게 하고 잔소리를 해대시고 ‘너는 왜 그렇게 살아?’ 하고 모질게 몰아넣으시면 저는 어찌하라는 말입니까?” 그런 뜻이에요. 너무 거룩한 사람한테는 가까이 안하는 것이 부담이 덜 돼요. 너무 완벽하고, 너무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한 사람한테는 거리를 띄우고 싶어요. 비교가 되니까. 그래서 인간이 이 땅에 살다보니까 이 땅이 좋아요. 이 땅이 또 좋은 점이 뭐냐? 나름 자기 것이 생겨요. 자기 인생이라는 것을 소박하게 만들어낼 수가 있어요. 그 만들어진 자기 인생의 모든 경우가 전부 다 자기의 애씀과 자기의 참신함과 명민함과 충실함과 성실함이 잔뜩 들어 있는 겁니다. 그걸 소꿉놀이라고 이야기해요. 또는 애들이 하는 인형놀이. 남들에게는 별것으로 안 보이지만 손때 묻은 그것은 자기가 하나하나 가꾸어놓은 거지요. 초등학교때의 공작시간이 생각납니다. 보통 그림은 2차원이거든요. 그런데 때로는 신기할 때가 있었어요. “여러분이 사람과 나무와 집을 그리고 색을 칠하세요.” 그래서 평소에 하던대로 도화지에 나무 그리고, 집 그리고, 사람 그렸어요. 그 다음에 선생님이 “칼을 가지고 사람이면 사람, 나무면 나무, 경계선을 따라서 오려서 똑바로 세워 보세요.” 이렇게 하니까 2차원의 그림이 설계사무소의 모형처럼 3차원으로 변모되었어요. 그게 그렇게 신기했어요. 갑자기 2차원이 입체가 되었으니까. 지금도 그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그린 그림이 수직으로 서 있더라는 말이지요. 우리 인생이 뭐냐 하면, 내가 꽂아놓은 장기판처럼 하나하나 내가 다 옮겨놓은 것이고 내가 세운 거예요. 정원에 있는 나무 한그루, 집안에 있는 가구 한 점,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 가지고 샀던 놋그릇 하나, 살림 모으는 재미, 저의 경우는 제가 손때가 묻고 저의 과거의 기억이 있는 책들, 이런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평범한데 그걸 이제는 하나하나 다 쓰레기통에 버리라는 겁니다. 인생은 버리는 것이지 싸 모으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버려보자는 거예요. 그걸 버려보면 거기에 빈터가 남아요. 어떤 가구를 내가 샀는데 그 가구가 있던 자리다. 가구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것 때문에 뭘 잊었느냐 하면, 아예 가구조차 없었던 그 빈공간, 먼지 스민 그 빈공간을 깜박 잊어버린 거예요. 내가 가구를 들어서 갔다 버린 것처럼 주께서 나의 머리를 쥐고 너도 이 세상에서 뽑아서 사라지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처음부터 내가 없었던 자리, 그게 남아요. 원래 나는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없는 사람을 왜 만들어 놓았느냐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장막집 해놓고 무너지게 하고 또 새로운 장막집을 주시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번거롭게 왜 일을 이중으로 하느냐는 그 말입니다. 이게 어려운 거예요. 처음 준 장막집을 가지고 영원히 범죄 안하고 살게 하지 뭐 때문에 장막집 해놓고 “그거 아니거든요.” 하면서 또 주고, 그런 복잡한 이중 일을 왜 하는가 말입니다. 처음부터 에덴동산에 선악과도 없게 하고 마귀도 못 들어오게 하면 되지요. 왜 그렇게 못합니까? 여러분은 교회 다니면서 그런 질문 안 해봤어요? 하나님은 그만한 능력이 있으면서도 왜 처음부터 깔끔하게 일처리를 안 하고 실패라는 것을 경유하게 만드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지요.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빈자리가 그냥 빈자리가 아니고 더러운 죄라는 오물이 거기 들어 있어요. 그 죄가 뭘 낳는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죽음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게 함으로서 예수님의 주되심이 성사된 거예요. 그냥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을 경유를 해야 됩니다. 뭘 경유하느냐? 죽음을 경유해야 되는데 그 죽음은 아주 특수한 죽음이에요. 보통 죽음은 혼자 죄진 값 한다고 그냥 죽지만 예수님은 보편적인 죄를 한 몸에 다 수축시키고 응축시키는 특수한 죽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 특수한 죽음 앞에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애쓰는 모든 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주님, 저 살아 있어요.” “거짓말 하지 마. 내 앞에 너는 죽어 있어. 네가 지금 나의 특수한 죽음의 자리에서 안 보니까 네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이거 내일 확 뽑아버릴까? 잡초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로 들어가는 잡초도 키우시고, 하늘 나는 참새도 주께서 없애시는 것처럼,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우리 인생입니다. 시편 39편에서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는데 그 지혜가 뭐냐 하면, “내 인생이 주 앞에서 없는 것 같이 되었다는 그 사실을 제발 제 평생 잊지 말게 하옵소서.” 나의 인생이 있어도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내가 진즉에 아는 사람이 이미 천국에 합격한 사람이에요. 합격통지서 받은 사람입니다. “없는데 왜 살아야 됩니까?” “네가 사는 것이 아니고 제발 인간아, 살아라. 그리고 그냥 곱게 죽어라.” 그 말입니다. “사는 것도 주님이 소원 때문에 사는 것이고 죽을 때는 아무소리 하지 말고 그냥 죽어.” “실컷 살게 해놓고 왜 죽이십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너 좋으라고 살게 한 것이 아니야. 착각하지 마.” 주께서 이 땅에 부모로부터 태어나게 한 것도, 자식이 태어난 것도 다 주께서 주님의 주되심, 보편적 죽음을 진리로 소개하기 위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담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중요한 것이 남았어요. “목사님, 그렇게 안다고 할지라도 처음에 말씀했다시피 인간은 초월이 안 된다면서요?” 점핑, 점핑, 백날 뛰어봐야 이게 초월이 안돼요. 주님의 세계에 우리가 노력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목사 된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 많이 한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점핑하는 통로를 도마를 통해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어요. 도마가 얼마나 감사한지. 요한복음 19장 3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군병이 창으로 찔렀어요.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아주 중요한 과정에 접어들었습니다.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정말 특수한 죽음이고 이것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도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사실은 모든 인간들이 이러한 저주를 받아 마땅함을 알려주는 죽음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강력하게 반발하는 괴물이 우리 안에서 반대를 할 거예요. 복음은 너무 부정적인 내용을 닮고 있기에 싫다는 식일 거예요. 도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 한 장을 넘겨서 그 뒤에 보면 요한복음 20장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게 되면, 도마가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했을 때 그 당시 제자들이나 우리도 상식적으로 생각하기를 “그러면 예수님 얼굴 보여주면 믿을래?”라고 했는데 정작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준 것은 얼굴이 아니라 손가락을 잡아당깁니다.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이게 뭘 의미하느냐? 네 손가락을 넣어보라는 말은, 도마야, 너는 내 안에 이미 장착되어 있다는 거예요. 네가 평생에 지은 죄가 나의 상처라는 이름으로 내 몸의 하나의 구성요소로서 이미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존재와 존재의 만남으로 주님을 사귀려고 해요. 내가 여기 존재하고 하나님이 존재하니까 “날 존재하게 하신 분을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데 그런 방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기능인으로 전환시켜요. “너는 십자가와 어떤 관계로 맺어졌느냐? 너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 그런 기능을 평생 해왔다. 믿어도 믿는 것이 아니었고 믿는 척을 한 것을 너도 알잖아. 혹시 나에게 이익이라도 돌아올까, 그 생각 하면서 혹시 저 사람으로 인해서 횡재하지 않는가, 그것 때문에 교회 다닌다는 것을 뻔히 아니까 너는 그 짓을 평생토록 해라. 하지만 이제는 넣어보아라, 그 손가락을. 너의 나와바리, 너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네 소유된 것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했던 그 모든 짓거리를 가지고 네 손가락을 옆구리에 한번 넣어보라. 그 너의 모든 짓이 나로 하여금 창자국을 유발하게 했고 못자국을 만들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미 내 안에 장착이 되어 있으니 봐라. 너는 내 편이야. 너는 나와 한 몸이야.” 도마가 이야기합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냥 멀뚱하게 하늘에 서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초월할 수 없고 우리 힘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반대로 점핑이 아니고 다운되는 거예요. 주께서 우리 죄안으로 덮치는 겁니다. 마치 장차 올 새로운 하늘이 우리를 덮치는 것처럼. 우리 장막집이 무너지는 그 기능이 덮치는 기능과 동반하고 있는 거예요.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 덮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욥기 10장 5절을 봅시다. 욥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곱게 계십시오. 우리는 그저 인간이잖아요. 어떻게 인간을 하나님 수준으로 갈구십니까? 우리는 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끼리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우리는 곤란하지요.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겠습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기도 오래하고, 나는 저 사람보다 헌금 많이 하고, 나는 저 사람보다 신앙생활 잘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인간끼리 경쟁하고 비교하기를 원합니다. 애들 노는데 어른이 끼면 게임이 안 되잖아요.” 욥이 이런 식으로 반발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욥조차도 뭔가 단절을 원했던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끼리 노시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고, 어떤 단절된 관계성을 유지하고자 했는데 주님께서는 그 단절을 자기 몸 안에 집어넣은 거예요. 내 몸안에서 단절은 사실은 단절이 아니라 그 단절조차 내 몸의 융합이었고 연합이었다는 겁니다. 내가 시켜서 만든 단절이었다는 것을 도마는 차후에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믿음 없다는 것을 까발릴 대로 다 까발려놓고, 죄는 죄대로 다 토해놓고, 그래서 고체가 된 자기가 액체로 변한 거예요. 물컹한 액체. 12월 동짓날에 경상도에서 팥죽을 먹는데 거기에 찹쌀로 만든 동글동글한 것을 넣어요. 새알이라고 해요. 팥죽이 아직 출현하지 않은 전체라면 우리는 그 액체 안에 들어 있는 새알 같은 겁니다. 그런데 그 팥죽 전체는 누가 먹는가? 우리 하나님이, 주님이 맛있게 먹는 자기 음식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호 안에 있어요. 주님의 사랑의 철조망 안에 있는 겁니다. 이렇게 뛰나 저렇게 뛰나 우리는 주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을 유발할 요인밖에 할 것이 없어요. 우리도 한 고집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께 한다고 열심을 다 했는데 주님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30배, 60배, 100백라고 했는데, 그래도 나는 양보해서 100배까지는 요구 안하고 30배 요구했는데 30배도 안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이 거짓말 했지요?” 우리가 노골적으로 말은 안하지만, 자칫하면 번개불 맞을까 겁이 나서 안하는데, 속으로는 ‘거짓말 한 것 맞지요? 나는 그거 참고로 듣지 진심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이런 식이 우리의 일상이 되고 말았어요.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방실방실, 방실이의 노랫말이 맞아요.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뒤에 술이나 한잔 하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술까지는 할 것 없고요. 구름 같은 것, 그런데 이유는 몰라요. 구름 같은 것까지는 알았어요. 초월세계에 점핑하려고 하다가 도로 떨어져요. “에라, 더러운 세상. 모르겠다. 그냥 술이나 한 잔 먹지.” 다시 원상태로 땅으로 떨어졌어요. 그 땅이 지금 무너지고 있는데. 부활의 영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이 부활해야 우리 자신의 진상이 나온다는 것, 진짜 나를 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마귀가 우리를 꾀어서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것도 정말 주께서 잘한 짓이 되게 한다는 것, “정말 주께서 참 잘 하셨습니다.”라고 감사가 나오는 고백이 나와요. 감사 안 할 것이 없어요. 팥죽 안에 작은 파동인데 감사 안할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있다가도 없는 그런 모습,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더 이상 내 인생의 길이 내 길이 아니고 이게 곧 주의 길이라는 것. 욥이 그렇게 화를 냈는데 욥은 몰라서 그랬어요. 이제는 신약에 오니까 욥한테는 주의 길을 냈듯이 지금 우리한테는 “사나 죽으나 너는 내 것이라.”는 주의 인생으로서 이미 우리를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없어져도 기쁘고, 또 다가올 새로운 장막집의 주님의 소망에 이미 참여한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태껏 살면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감추고 또 감추고 감추기에 급급했습니다. 이제는 차라리 드러내서 스트레스 받지 않는 인생 살게 해주시고 힘들지 않는 인생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