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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2장-광주강의 0804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22. 07:29
2008-04-26 12:09:31조회 : 4074         
광주 4월 25일 강의 디모데전서 2장 1절, 4절이름 : 우리교회 (IP:124.59.85.92)
080425 디모데전서 2장 1절, 4절
 우리교회 (IP:124.♡.85.92)08-04-26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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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교회 (IP:220.♡.176.141)08-05-01 04:43 
광주080425a디모데전서2장1절 

광주 강의(08. 4. 25) 36-1 

지난 서울 강의 두 번째 시간에 녹음이 안 됐어요. 오늘은 정신 바짝 차리고 녹음이 되도록 해야 되는데 --- 

디모데전서 2장에서 이슈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4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고 했을 때, 여기서 ‘모든’이라는 범위가 한 사람도 누룩이 없는 ‘모든’이냐, 아니면 사람들이 차별하는 것처럼 차별을 안 둔다는 뜻에서 ‘모든’이냐 하는 그런 논쟁들이 여기에서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점에 대해서 이해를 하려면 1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여기서도 ‘모든’이 나오지요? 그리고 2절에 보면 ‘모든’의 목록이 나와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는 이런 식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지으신 것 전부는  어떤 경로를 밟아서라도 다 구원 된다.’ 이런 식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후서3장2절에 보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한 사람도 누락 없이 인간이라고 생겨먹었으면 반드시 다 구원 받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어요. 첫째는 2장 1절에 있는 것처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묻지 않고, 그것의 차별을 두지 않고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된다.’ 이런 해석이 하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이 복음은 그 사람이 천당 가는지 지옥 가는지 우리는 알 바 아니고 일단 복음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이런 뜻으로 이해될 수 있어요. ‘너는 공무원이니까 바쁘지? 그러면 교회 나오지 마!’ 이러지 말란 말이지요. ‘너처럼 바쁜데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구원 받겠느냐? 아예 나오지 마!’ 이러지 말고, 그 사람이 고위 공무원이든 뭐든 복음만큼은, 구원 못 받고 지옥 가는 한이 있더라도 복음만큼은 들을 수 있는 권리는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아직은 살아 있으니까. 죽은 사람 같으면 어쩔 수 없지만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분명히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복음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줘야 한다. 이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시켜 주신다.’ 이쪽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구원문제가 아니고 복음을 들을 기회는 모두에게 주어야 한다.’ 이것이 맞는지? 

사실을 둘 다 같은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로마서 1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이것이 상당히 쉬운 말씀인데도 굉장히 어려운 말씀이에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니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안 들으면 믿음이 안 생긴다. 그러면 강원도 산골에서 한 번도 복음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로마서 10장 말씀에 어긋나지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건질 때는 그냥 아무것도 맹탕 없었는데 죽어보니까 천국이더라. 이런 경우는 없단 말이지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이 천국에 가려면 믿음이란 것이 발생되어야 되고,
믿음은 말씀(복음)을 듣는데서 발생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은 안 믿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믿을 수 있고, 어찌했든 간에 믿음은 말씀을 듣는데서 생긴다고 로마서 10장에 되어 있어요. 

로마서 10장의 내용을 좀 더 이야기해 보면, 믿음은 (복음을)들음에서 난다고 했고, 복음의 진수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뭐가 복음에서 빠집니까? ‘하나님이 존재한다.’ 철학자들도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복음입니까, 복음 아닙니까? 이것은 복음 아니죠. 이것은 조선시대 할머니들도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조물주가 있다고. 

그러나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신이 계신다.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소리 들어서 믿음이 생겼다고 하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믿음의 내용은 ‘복음의 말씀을 들어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울의 이론에 의하면 믿음이 없어도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하나님을 안다고 했지요. 로마서 1장에 나오지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안다 이 말입니다.
이들도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대상에게 기도를 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믿음이라고 할 때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믿음은 반드시
구체적인 어떤 사나이? 죽었는데
이상스럽게 사흘 만에 되살아난
그 사나이의 모든 것을 수용할 때

그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모든’이란 말을 설명하기 전에, 진짜 사도가 진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면, 그 구원은 복음을 믿어야 된다는 그 앞의 전제가 있다면, 여기에서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따져봐서 사도바울의 이런 이야기를 하는 취지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 어떻게 구원 받는데? 신이 존재하면 되지. 이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사람이 양심적으로 내부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아쉬울 때면 신에게 빈다. 다 이렇게 하잖아요. 

창세기 4장에 보면 누가 나오지요? 가인. 가인이 믿음 있습니까? 없지요. 믿음도 없는데 가인은 제사를 드렸어요. 요새 말로하면 교회 와서 예배를 드렸단 말이지요. 그러면 예배 참석하면 믿음이 있습니까? 아니죠. 그런데 아벨은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아벨이 믿음이 있다는 것은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나와요. 

그러면 우리는 가인과 아벨이 서로 대조되는 인물을 통해서 뭘 규정할 수 있습니까? 진짜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믿음이 확실하게 여기서 구분 되지요. 그러니까 이런 소리는 하지 말란 말이지요. ‘제사 드리면 믿음 있다.’ 라는 소리는 창세기 4장에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 가인도 제사를 드렸으니까. ‘여러분, 예배드리세요. 그러면 믿음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어떤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쳤는데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라는 문제가 나왔어요. 그 정답은 ‘뉴턴’입니다. 그런데 어떤 초등학생의 답은 ‘그 사람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뉴턴이 죽었다는 말은 맞잖아요. 뉴턴이든 이순신이든 늙으면 다 죽잖아요.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사람인가? 그건 아니죠. 그러니까 정답은 앞뒤가 맞아야 됩니다. 

‘제사 드리면 믿음 있다.’는 말은 성립이 안 돼요. 앞뒤가 안 맞아요. ‘믿는 자들은 예배드린다.’는 말은 맞는데, ‘예배드리면 믿는 자다.’ 이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논리학에서 필요조건, 충분조건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제사 드린 것과 아벨이 제사 드린 것의 차이를 두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아벨이 제사를 드릴 때 무엇과 연관이 되느냐가 나와요. 장차 오실 예수님과 연관해서 제사를 드린 아벨은 믿음이 있는 거고, 가인은 예수님과 연관 없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가인은 누구와 연관해서 제사를 드렸습니까? 가인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제사 드린 거예요. 이 세상 인간들은 엄마에게서 탯줄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모든 행동과 생각이 누구 위주로 됩니까? 전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행동이 가인과 같다고 어떻게 장담하느냐? 가인이 아담의 자식 아닙니까. 그 아비의 그 자식이거든요.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 모두는 아담의 자식이고, 하나님은 아담을 다루는 방식으로 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을 다루십니다. 아담은 이름대로 흙이 되어 죽지요. 그러면 그 뒤의 모든 인간도 흙이 되어 죽는 겁니다. 여자로 태어난 사람은 해산의 고통을 갖지요. 그 뒤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도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룰 때는 아담 한 사람으로 몰아넣는 방식으로 다루십니다. 상당히 문장이 어렵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실 때는 그 사람의 독자적인 개성을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한 인물 안에, 한 인물이 누구죠? 아담. 아담에게 몰아넣는 식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동일한 아담으로 살지요. 그렇게 집어넣으시는 분이 누구냐? 마지막 아담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담이라는 테두리에 집어넣고 비로소 우리는 맞은편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깨닫고 나로 인하여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감히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벨이 장차 오실 예수님과 연관을 지어서 제사를 드렸더니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연관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제사를 받은 거예요. 그럴 때 아벨의 행위를 받는 것이 아니고 아벨의 제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담겨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아벨의 제사를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제사를 안 받아요. 대신 자기 아들의 제사만 받습니다. 히브리서 10장 5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라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제사를 다 거부하고 예수님만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연관 지을 때 예수님 덕분으로, 주의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어떤 분이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나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거창하게 오셔서 모두가 신적인 존재인 것을 알면 그분을 믿겠는데, 예수님에 대해서 이슬람교나 불교나 불신자나 그쪽 시선으로 보게 되면 예수는 과대망상증 환자이고 미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엘리트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네가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예수를 안 믿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요. 예수를 믿게 되면 기존의 뭘 포기해야 됩니까?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뭐로 바꿔 놓아야 돼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죄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뭘 믿은 사람입니까?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와를 믿은 사람이 누구를 죽였다? 예수님을 죽이는 이 과정이 있어야 우리가 제대로 예수를 알지요. 

바리새인, 서기관들 욕하지 마세요. 이들이나 우리나 다 같이 아담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똑똑한 바리새인들, 경건한 바리새인들. 얼마나 훌륭했으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못 간다.” 

사도바울이 사울일 때의 생활이 어떠했습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면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내린 결론은 ‘이 인간은 나와 상종할 인간이 아니다.’ 예수님과 작별을 고하지요. 

바리새인과 같은 본성을 갖고 있는 우리 인간이 아직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백발백중 거짓말입니다. 그 똑똑하고 여호와를 잘 섬겼고 정기적으로 예배드리고 십일조하고 -- 
어떤 바리새인과 죄 많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했잖아요. 바리새인이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남이 하기 힘든 구제를 하고, 하루에 세 번 기도하고, 저 세리와 같은 인생은 안 살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그런데 그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예수님이 내리지요. “저 세리가 의인이고,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바리새인은 저주받을 자다.” 세리는 뭐라고 합니까? 감히 얼굴도 못 들고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했지요. 

멀쩡한 사람이 스스로 죄인이 된다는 게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잘난 자 되기를 힘쓰지요. 훌륭하게 되려고 반성은 해도, 내가 전적으로 죄인이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은 진짜 누구를 만나야 가능합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내 속에 죄가 있어서 죄가 매일같이 날 이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매일같이 죄한테 지고 있다. 내 힘으로 죄를 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내가 믿을 구석은 주 예수님 밖에 없다. 절대로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 사도바울이 외쳤던 고백이잖아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자신에 대해 기대를 건다거나 소망을 갖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요. 바울 되기 전의 사울은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사람은 “목사님이 좀 오버하신다. 사울이란 사람이 스데반 죽이는데 동의는 했지만 스데반에게 돌을 직접 던지지는 않았고, 체포 명령은 내렸지만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 맞습니까? 

사도행전 22장 4절을 보세요.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라고 했습니다. 사울 본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였다고 하잖아요. 오버한 게 아니지요. 바울은 자신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 죽인 것을 마치 자랑스러운 것처럼 이야기하잖아요. 이것은 사람 죽인 것을 자랑하는 말이 아니고 -- 

보통 점잖은 양반 같으면 사람 죽였다는 소리를 안 합니다. 그런 이야기하면 자신의 추한 과거가 노출되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런 완악한 나도 구원 받았는데 당신들도 예수 믿으면 됩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신은 존재한다. 신은 살아 움직이고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보면 모든 종교가 다 수용하고 이미 모든 자들이 다 인정하는 거예요. 종교가 뭡니까? 인간 힘으로 안 될 때는 전능하신 신에게 기도하는 것. 이것이 종교입니다. 이런 종교심은 타고난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니까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아니었고 아벨의 제사가 믿음의 제사였는데, 그 제사에는 구체적인 사나이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었어요.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다는 말은 오늘날 목회자로 하여금 목회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왜 포기냐? 생각해 보세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밖에 몰라요. 무엇을 해도 자기 유익을 위해 하는데, 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예수라는 분, 얼굴도 본 적 없고, 실제 있는지 없는지도 불분명한 자에게 자기 인생을 전부 그분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십자가 복음을 듣는 것도 누구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잖아요. 자기를 위한 복음이죠. 이것이 인간의 본성 아닙니까. 그런데 ‘복음을 위한 자기’ 이런 인간 있습니까? “십자가 복음 믿으면 용서 받고 천국 갑니다.” “야, 나 십자가 복음 믿어서 천국 갈래.”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것이 믿음이라면 목회는 쉽습니다. 

성경 끼고 교회 오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국가와 민족이 잘 되면 그 이익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기에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을 위해서 죽을 사람 누굽니까? 손들어 보세요.’ 이것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피 흘렸습니까? 하나님은 피 흘린 적 없지요. 그런데 피로 샀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로 만든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교회 간판 걸고 어느 측이냐(합동, 통합 등) 따져서 찾아와서 예배드리는 그런 교회가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 피로, 우리 속에 우리 허락도 없이 피를 심어서 ‘너는 내 것이야.’ 라고 심어놓은 사람 그 사람만이 교회란 말입니다. 그 외에는 아닙니다. 

목회는 안 되는 겁니다. 사람을 꼬셔서? 꼬셔도 안 돼요. 목회 불가입니다. 목회가 될 수가 없어요. 목회가 될 수 없는 자를 가지고 이것을 ‘주의 종’이라고 합니다. 왜? 누구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종이 아니다. 나의 자존심, 위신, 품위 이런 것은 거기에 가담 못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에 보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이런 말씀이 ‘귀하다.’ 정도가 아니고 얼마나 불가능한지. 그 대목 한 번 봅시다. 어떤 사람은 없다고 우기는데, 사람들은 제가 이야기하면 없는 이야기 한데요. “있으면 왜 내가 못 들었나?” 이렇게 나와요. 이건 실제이야기입니다. 제가 “독사의 새끼들아!” 하니까, 어떤 사람이 반박하기를, 예수님은 그런 욕을 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했지, “독사의 새끼들아!”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답니다. 

로마서 14장 7절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교회 목사가 이렇게 목회하면 교인 한 명도 안 남습니다. 교회 올 때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자기 복 받기 위해서, 남편 사업 잘 되기 위해서, 자식 잘 되기 위해서, 내가 교회 오고 헌금을 하고 힘든 희생을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을 해 달라는 것이지요. 다 자기 잘 되려고 하지 남 잘 되기 위해서 철야하고 기도하는 사람 없어요.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인간의 힘으로 이런 사람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어야 정상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진짜로 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거니까. 로마서 14장 8절은 절대로 사람 힘으로 안 돼요. 될 수가 없어요.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데 그런 사람이 등장했다는 말은, 그 사람은 주님이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 분명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지 자기가 열심히 큐티하고 기도하고 영성훈련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기도해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뽑아낸 사람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선택’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이 도시에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가 많도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정말 신기한 것이 참 많아요. 밤중에 주께서 나타나셔서 고린도,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이 엄청 많이 맞습니다. 그 시대의 법은 일단 사람을 때려놓고 봐요. 옛날 60년대 경찰 같아. 일단 잡아다가 때려놓고, 그 다음에 죄 없으면 그만이고. 

사도행전에 보면 일단 잡아놓고 때립니다. 바울은 많이 맞았어요. 때려고 난 후에 ‘아니네.’하고 보내니까 ‘로마 시민인데 무작정 때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럴 때 더 약이 오른 것은, 얻어맞고 나오니까 주님께서 밤중에 계시하시기를 “네가 에베소에서 전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전해야 하리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뭘 알았다는 말입니까? 지금 주께서 그 전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못 전하게 하고 고린도, 에베소에 전하게 하신 것은 이미 뭘 내다봤어요? 네가 복음 전하다가 실컷 얻어맞아야 한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주께서 아시고 바울을 얻어터지게 합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어디를 보내느냐 하면 예루살렘으로 보내요. 예루살렘에 보낼 때  성령 받은 한 선지자가 있었지요. 그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하는 말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행21:11)고 하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갑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고 하면서. 가서 엄청 얻어터집니다. 

아까 봤던 그 대목이 예루살렘에서 했던 설교에요. 그 때 주께서 또 나타납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증거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거하리라(행23:11).” 그러니 바울의 입장에서는 뭔가를 전하면 호응이 있다든지 인기를 얻는다든지 이런 좋은 것을 기대하고 갔는데 전하면 욕 얻어먹고 전하면 전할수록 더욱 더 매를 맞는 경우까지 누가 아신다? 주께서 아시고 일부러 그곳에 보냅니다. 

보내면서 뭐 하나 남기느냐? 뭐 하나 건지느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 이것 하나 배워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구원의 코스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축약해서 말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이고, 이것을 약간 풀이해서 말하면, 로마서 8장 18절에 나오는 것처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롬5:3-4).” 그러니까 이것을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짜인간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우리는 어디에 집어넣었다? 아담 안에 집어넣었지요. 아담 중에서 예수님과 연관된 사람이 있다고 했죠. 창세기 4장에 누굽니까? 아벨. 아벨 같은 경우는 제사 한 번 잘 드리고 형에게 맞아 죽고. 

그러니까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티 내려고 구원 받은 거예요. 주님에 대한 모자이크의 일부죠.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 다루듯이 우리를 다뤄요.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따로 오는데, 어떻게 한다? 자기 부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말씀대로 순종해야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성경의 어느 말씀이든 예수 믿었다고 그냥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뭘 거치게 되어 있습니까? 반드시 성령 안에서 이것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뭘 하는가 하면, 반드시 자기 부인이라는 것을 거치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나오지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자기 부인하는 이것이 그 사람 아담의 개성은 아닙니다. 아담의 개성은 아닌데, 예수님과 연관되기 때문에 여기서 성령이 오니까 본인의 개성은 죽이고 예수님의 개성, 십자가 개성이 덮치니까 이렇게 자기 부인이라는 것이 일어나면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받는 면류관도 반납을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쓰셔야지 제가 쓸 게 아닙니다.” 하고 계시록 4장에 보면 반납합니다. 

이 원칙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이 틀에서 못 벗어납니다. 이 틀을 벗어나서 구원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최민수가 최민수 됨은 노인 때릴 때 표가 나는 거예요. 달리 최민수겠습니까? 그것이 최민수의 개성 아닙니까.

성도의 개성은 뭐냐?
뭘 해도 나는 죄인이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될 인간이고,
이런 나를 용납하시고 구원하신 것은
주님의 십자가 능력이 날 그렇게 하셨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하는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진짜로 (베드로)내가 한 것이 아니란 것이지요. 

이제 정리가 되지요.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 존재한다. 하나님 살아 계시다.’ 그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누구의 인생이 들어와야 돼요? 예수님의 인생이 허락도 없이 박혀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박힐 때 어떻게 들어온다고 했습니까? 말씀을 들음으로. 그러니까 이 말씀이라는 게 그냥 성경 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역사한 말씀을 듣게 되면 여기에서 믿음이 생겨서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인이 되고 예수님의 소유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롬14:7-8).”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런 말씀이 있을 때 ‘예, 동의합니다. 납득됩니다.’ 하면 그 사람은 말씀에 의해서 믿는 자로 표가 나고, ‘딴 말씀은 몰라도 그 말씀은 너무 심하다. 그 말씀을 나는 거부합니다.’ 이러면 그 사람은 결국 열심은 내지만 뭐가 없다? ‘나는 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내가 예수님의 똘마니, 예수님의 것으로 내 인생을 산다는 것은 도저히 못 참겠다.’ 이렇게 되고 이것은 신자가 아니지요.  

지난 수요일 설교 들어보셨어요? 김을수 집사님은 들어보셨다고 하는데 다른 분들은 못 들으셨지요? 제가 문장을 하나 썼어요. 여러분 집에 돌아가서 숙제로 생각하고 풀어보세요. “옛날, 옛날 한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부도를 만났어요. 그러나 여전히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이 문장을 키로 삼고, 뒤의 문맥을 스스로 만들어보라고 제가 숙제를 냈어요. 

또 예를 들면,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내가 가출하고 자식은 사고 쳐서 교도소에 수감되고 자기는 사고를 당해서 반신불수가 되었는데 그러나 그는 여전히 복음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개척교회 목사 같으면, 복음을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모든 재산, 처가의 재산까지 다 동원해서 개척교회를 했는데 교인 10명 있었는데 1년 후에는 자기 식구밖에 안 남고 나중에는 전세금도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더라. 

앞의 키 문장을 빼놓고 뒤 문장은 여러분이 각자 만들어보세요. ‘아이가 셋인데 하나는 병들고 하나는 사고 나서 다치고 하나는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도 복음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라는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욥’ 아닙니까. 이게 바로 스데반이고.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이 설교 듣고 “불가능합니다.”라고 메일을 보낸 사람이 있어요. 이름은 안 밝히겠습니다. “저는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제 설교에 이미 답변이 나와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규정하지 마세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란 내가 누구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은 안개와 같기 때문에

주님이 만들어 주신 자로 살 뿐이지 내가 이렇게 되고자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꼭 이렇게 되어야지’ 하는 것은 아담의 죄악 된 본성에서 나온 거예요. 생긴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안 믿으면 안 믿는 대로 믿으면 믿는 대로. 그런 점에서 주님은 개인적인 ‘믿겠다.’하는 것을 철폐하는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모든’이라는 말을 일방적으로 주님 쪽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런 인간은 복음 듣지 말아야 돼.’ 라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바쁘니까 복음 들을 시간이 없다.’ 라고 하지 말란 말이지요. 비록 복음을 모르지만 그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이에요. ‘모든’이라는 말은 아까 1번, 2번 다 포함 되지요. 지옥 갈지 천당 갈지 누가 장담합니까? 장담 못하니까 아직 우리는 주의 것으로 살아 있고, 저 사람은 주의 것인지 아닌지 우리가 모르니까,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가 뭡니까? 어떤 대상이든 우리는 마음껏 복음을 가리지 말고 전해야 된다는 의미에서 ‘모든’이고, 그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란 말이지요. ‘주여 복음 전하게 하옵소서. 복음의 문이 열리게 하옵소서.’ 

기도라는 것은 기존의 주님의 기도에 쓰임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 이미 주님의 기도 내용이 있잖아요. 문제는 주님의 기도 내용은 누구 일방적이에요? 주님 일방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속성이니까 내 위주 아닙니까. 내 위주가 기도 가운데서 누구로 바뀌어야 돼요? ‘주님 원하는 대로 쓰이게 하옵소서.’ 라고 바뀌어야죠. 그 과정에서 자기 부인이 되어야 하고. 나를 죽여도 좋으니까 주님의 것으로 사용되게 해 달라고. 

이런 것이 싫어서 기도 안 합니다. 행여나 진짜 주의 종 될까 겁이 나서 기도 안 해요. ‘지금 아무 탈 없이 잘 사는데 내가 미쳤다고 주의 종 되나. 이대로가 좋은데.’ 

성령이 개인에게 온다고 하잖아요. 거짓말입니다. 성령이 개인에게 안 와요.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성령이 개인에게 오지를 않아요.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 “성령 받기 위해 기도하라.” 이런 말씀이 한 두 구절이 아닌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 

성령은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창세전에 예정된 것을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1900몇 년에 태어나서 2000몇 년에 죽기 때문에 창세전은 모르지요. 1800년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성령님은 창세전의 것을 알지요.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니까 성령께서 기도를 하는데 우리 개인적으로 깨달으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에서 신입사원이 있는데 자동차 바퀴를 잘 못 끼워요. 그 때 고참 직원이 와서 방법을 가르쳐 주고 끼웠어요. 개인적으로 그 사람이 바퀴를 끼운 것으로 보이지요. 보일 때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서 성령 충만 받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라고 나와요. 그런데 그 사람이 현대자동차 그만두고 집에서 프랜차이즈 치킨 집하고 있는데 거기 가서 타이어 어떻게 끼웁니까? 물으면 가르쳐 주겠습니까? 안 가르쳐 주지요. 바쁜데 언제 공장에 가서 그런 것 가르쳐 주겠습니까. 치킨 배달하기 바쁜데. 

결국은 현장에서 고참이 타이어를 끼우는 것을 가르친 것은 그 사람을 위함이 아니고 결국은 전체 공정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뭘 부순다? 자아를 부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갖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계획을 하고 배치를 해요. 사건과 경험들을. 내가 우연히 길을 걷는데 광주 비엔날레 광고하는 그림을 봤다. 나는 이제 농사 짖지 말고 그림 그릴까? 내가 우연히 광주 비엔날레 그림을 봤다는 것은 나의 인생에서 배치가 농부에서 화가로 바뀌는 계기로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자기 나름대로의 비전이 있고 소망이 있잖아요. 자아 나름대로의 세계관이 있지요. 그 세계관이 있는데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성령이여 도와주소서. 몽골에 선교사로 가게 하옵소서.’ 이렇게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이것은 자기 세계관에 성령이 도와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런 분이 아니고 창세전의 뜻을 성령께서 아십니다. 그래서 창세전 밑바닥의 뜻을 들어 올립니다. 그러면 여기에 신자가 있고 불신자가 있어요. 창세전의 뜻이 뭐냐 하면,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그 뜻을 위해 성령께서 기도합니다.  

창세전의 그 지반을 바짝 들어보니까 개개인이 갖고 있던 소망과 뜻이 의미 없어요. 성령께서는 창세전의 뜻을 고집합니다. 창세전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이 몽골에 선교사로 가고 뭐 이런 뜻이 주님의 뜻 앞에 허물어지겠지요. 이렇게 허물어 질 때 불신자들은 나가떨어지고 신자들은 창세전에 택했기에 자기 뜻이 허물어져도 주님 품에서 떨어지지 않고 같이 갑니다. 이 사람이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떨어질 놈은 떨어지고 남을 사람만 남는 것. 이것이 창세전에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성령님의 일입니다. 개인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에게,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지요. 성령으로 한 세례를 받으면 자기한테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으로 집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몸을 위해서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주셨지요. 우리를 위해 믿음, 소망, 사랑을 준 게 아니란 말입니다. 

개인 적인 것, 자아 중심적인 것이 성령에 의해서 다 허물어집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으면서 과감히 죽을 수 있었던 이유가, 나는 창세전에 이미 돌에 맞아 죽기로 예정된 자다. 돌에 맞는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주의 것이 되어야 됨을, 성령 충만을 통해서 자기는 부인되고 사나 죽으나 죽의 것이라는 입장에서 태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2008. 4. 30. 11:26 녹취 마침)

 우리교회 (IP:220.♡.176.141)08-05-14 18:42 
광주080425b디모데전서2장4절광주 강의(08. 4. 25) 36-2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데, 욕심이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사망이라는 어떤 인격체로부터 오는 거예요. 물론 마귀지요. 그 욕심이 만드는 게 자아입니다. 자아는 고정된 것이 아니고 강물처럼 순간마다 변신이 됩니다. 13살 때 자아하고 20살 때 자아가 달라요. 

그런데 20살 때 자아를 이야기하는 순간 또 달라지죠. 강물처럼 흘러간다고요. 그래서 제가 쓴 책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자아는 항상 자신을 절대화시키기 때문에 거기다가 법을 집어넣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글을 쓸 때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등교하는 어떤 아이는 숙제를 했다는 자아가 있어요.
‘나는 선생님이 내 준 숙제를 다 했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고 정당하고 떳떳하다.’
그런데 그날 히로시마의 하늘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어요.
그 폭탄 앞에 나의 정당함이 소용이 있습니까?” 소용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기 딴에 교회 다니고, 정기적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고 등등의 자기 법을 동원해서, 법을 동원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법이 없으면 자아가 형성이 안 돼요. ‘나는 이렇게 훌륭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딴 사람은 버려도 나는 버리면 안 돼. 다른 사람의 기도는 응답이 안 돼도 내 기도는 응답이 되어야 해. 왜? 나는 신앙생활 너무 순수하게 잘 하니까.’ 라고 우겼던 그것이 어떤 사태가 터져버리면 아무 알아주는 사람 없이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려요. 

그러니까 애초부터 누군가 날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은 할 필요 없어요. 이 말이 뭐냐? 주님의 약속 앞에서는 자기규정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해도 소용없고. 뭐가 닥치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어떠한 인간이 되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내가 어떤 인간이라고 정립을 했다면, 그 때 2008년 4월 25일 그 때뿐이지 내일되면 또 바뀝니다. 

장마철에 갑자기 장맛비가 쏟아지는데 지금 내가 빨간색 옷을 입었느냐 노란색 옷을 입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산 색깔이 어떤 것인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 안 맞으면 됩니다. 

사람들이 사고, 팔고, 시집, 장가가고 이런 것이 아주 큰일이지요. 요즘 여자들 나이 30넘어서 시집 안가면 그 집안의 걱정거리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었다면 온 가족이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지요. 결혼식 할 때 부케 던지고 그것을 누가 받느냐 이런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결혼을 하는 그 순간에도 인자가 임하면 부케고 케이크 자르는 일이고 말짱 소용없이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집니다. 이것을 누가 알았느냐? 롯이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오늘날 교회는 농담 따먹기 하는 곳입니다. 성경책을 펴는 목사도 농담하고 있고, 듣는 교인들도 농담하고 있고. 자기부인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진담으로 듣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1시간 놀려고 오는 거예요. 노인들은 가서 점심 먹고, 다음 달 차 대절해서 어디에 놀러 가는지 그것만 관심이 있어요. 

유황불을 생각하고 주님의 심판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떠한 삶이 되어야 마땅한지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 외에 직업이 어떠니, 한 달 수입이 얼마니, 애가 어떤 대학에 들어가고 이런 것은 주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신 그 약속에 비하면 그런 것 은 기도할 내용도 이야기할 거리도 안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은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옵소서.’(롬8:30)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에게 뭘 퍼 붓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우리가 디모데전서 2장을 보면서, 이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이익이 될까를 생각하지 사도바울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재수 없게 디모데가 걸렸어요. 그런데 재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땡 잡은 겁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진리가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여름에 구청에서 모기약 뿌리듯이 온 천지에 복음의 모기약이 뿌려지기를 원합니다. 모든 이에게. 

그러면 망할 자는 망하고. 
고린도후서 2장 14절을 봅시다. 이 대목이 너무 좋아서 나는 스트레스 받을 때 이 대목만 보면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여기에서 ‘냄새’는 뭡니까? 복음의 모기약이죠.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누가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가지고 그렇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 다음 15-16절을 보세요. “우리가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는 이 대목이 너무 좋아요.
이 대목이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요.


왜 좋아하는지 여러분 이해되십니까?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 아닙니까. 

이 대목이 왜 좋으냐를 설명해 드릴게요. 복음이 왜 사망에 이를 자에게 악취가 되는가? 사실은 복음을 악취로 여기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성경만 보면 잠 오잖아요. 예배시간에 설교 듣기 싫어해요. 연속극 보기를 원하지 주일날 예배 참석하는 것 좋아 안 하잖아요. 우리 자체가 주님의 복음을 악취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이야기해 주는 것이 이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봅시다. 분명히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인데 그 다음에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분명히 악취로 볼 수밖에 없고, 태어날 때부터 복음이나 예수에 대해서는 싫어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이 농담이 아니고 진담으로 들리면서 생명의 냄새로 왔다는 자체가 이것은 복 받은 것이고 땡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은 겁니다. 분명히 내 힘으로 안 되는 불가능한 일이 내 인생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일이란 말이지요. 

사모님 말씀대로 돌아서면 또 악취로 들리지만.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해 줍시다. 왜? 우리도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망하는 자에게는” 이라는 말은, 복음을 전해야 ‘이런 인간은 망하는 자구나.’ 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께서 창세전의 뜻을 들어 올리니까 망할 자는 다 떨어지고 남는 자는 창세전에 예정된 자만 이 복음의 말씀에 남게 되는 이 현상이 바로 성령께서 빌 바를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를 위한 복음이 아니고 복음을 위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5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지금 고관대작이든지 미천한 사람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할 복음의 핵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왜 이 말은 했는가 하면, 사람이 100이면 100 다 하나님이 달라요. 그런데 바울은 인간 쪽에서 어떤 신을 믿을 것인가 그것을 편집하고 종합해서 하나의 신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분일 수밖에 없는 어떤 분이 오는 것을 통해서 너의 신도 아니고 나의 신도 아니고 처음부터 한 분밖에 없었구나 하는 것이 드러나는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복음인데, 중보자가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신자가 아니라 어떤 중보자를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마10:37).”고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그 말 하신 분을 믿습니까? 

사람들이 중보자라고 할 때 무슨 욕심이 있는가 하면,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있는데 중보자가 어떤 이야기를 했던 간에 하나님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성급해서 중보자가 예상 밖에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쏘아대는데도 그런 것은 못 들은 척 하고 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가지요. 

그래서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 다 달라요. 자기 기분대로 타고난 성격대로 전부 하나님이 다 달라요. 문제는 진짜 하나님이 누군지를 모르는데, 감춰진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이 누구만 앞장세워 일한다? 예수님만 앞장세워 일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 사람과 타협조로 일을 하시면 좋은데 사람들이 알아먹지 못할 일만 골라서 하십니다. “네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구나(요9:41).” 이런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너희들이 산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제자들이 “죽으시면 안 됩니다. 같이 삽시다.”고 하니까 “사단아 물러가라!(마16:23)” 

예수님 이야기가 하나도 알아들을 이야기가 없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마13:14).”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는 깨달았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에요. 못 깨닫는 게 정상이고 깨닫는 게 비정상입니다. 그렇게 하러 오셨단 말이지요.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복되도다.” 이것은 너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완전히 미쳤어요. 한 술 더 떠서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다(요1:30).”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그분에게 종속되었다는 말 아닙니까. 세상에 어떤 인간이 종속되기를 원해요? 그런데 어떤 분이 나보다 앞섰다는 것은, 나는 어떻게 살아도 나보다 앞선 사람의 쫄다구 밖에 안 된다는 그 이야기를 아주 자랑스럽게 한단 말이지요. “나는 쇠해야 하고 그분은 흥해야 한다(요3:30).”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흥하면 같이 흥해야지. 

제가 이번에 늘푸른교회에서 강의를 했는데 초반에 이런 강의를 했어요. 이런 강의를 하니까 사람들이 의아해하면서도 상당히 즐겁게 듣는 모습을 보고 기뻤습니다. 뭐냐 하면, 그곳이 창원인데 산도 있고 공장 건물도 있고 교회도 있단 말이죠. 여기 밑바닥에 있을 때는 서로서로 심각한 일이 많아요. 그런데 약 10m정도 올라와보니까 약간 넓게 보여요. 100m 올라가니까 창원 시내가 많이 보여요. 500m 산에 올라가니까 도시가 다 보인단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천국은 성경 없이는 못 들어가는데, 천국을 가기 위해서 성경을 봐야 하는데, 성경은 이 지상에 묻혀서 축복밖에 모르는 우리를 뭐로 봅니까? 더욱더 넓게 보지요. 좁게 볼 때는 안 보이든 주님이 넓게 보니까 주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그것 때문에 이런 이야기 했구나.’ 이게 넓게 보면 다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끌어올리는 이 상태에 대해서 이게 복된 거예요. 높은데서 보면, 우주여행을 한 이소연이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본다면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 이해가 안 되지요. 박근혜파 이명박파 나눠서 서로 싸우는데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낮은 곳에서 가까이 보니까 굉장히 심각하고 자살할 상황이고 하지만, 높이 주님 앞에 가까이가면 이 땅에서의 일은 아무 쓸데없고 시시하고 사소하고 아무 문젯거리도 안 되는 것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염려하고 있단 말이지요. 

우리는 누구 일찍 죽으면 ‘재수 없다’고 하고 실패한 인생으로 보잖아요. 예수님은 33살에 죽었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실패자로 봅니다. 그러나 나이 90이 넘은 사람을 보면 ‘아이쿠 복된 어른이네.’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보는 인식은 성경 말씀으로 주님께 가까이 안 가니까 지상에서 기껏 생각하는 것이 그따위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 교인 수 몇 명이고, 한 달 수입이 얼마고, 자식은 어디에 취직하고 이런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성경을 보면 ‘열심히 성경 읽으면 내 소원 들어주렵니까?’ 만날 교회 와서도 이러는 겁니다. 

우리를 들어 올리는데서 오는 복, 우리가 얽매이지 않고 마음이나마 우주유영을 할 수 있는, 그렇게 해 주시려고 성령께서 창세전부터 예정된 뜻에 의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다는 것이 남들 보기에는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지만 세례요한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거예요. 자기보다 앞선 분이 계셨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것은 남이 5m 올라갔는데 자기는 5Km 올라가 있는 거예요. 시간마저 초월해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그러니까 목이 잘려 쟁반에 담겨도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도 두렵지 않았단 말이지요. 이렇게 높이 올라가 있는데 무서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사랑을 받았는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요일4:8) 

지금 중보자가 왜 하나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보자를 사람이 고른다면 10여명 골라야 됩니다. 자기 입맛대로 골라야 하니까. 그런데 중보자를 하나로 모아놓고 모두에게 이 중보자의 말이 이해된다, 안 된다? 아무도 이해 안 되는 그런 점에서 중보자는 한 사람 밖에 없어요. 왜? 그래야 모든 인간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십자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고, 하늘의 깊은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알려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것이 중보자가 하나라는 증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대구의 어느 목사가 하는 말이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밖에 모른다.”고 해요. 이걸 ‘고맙다 친구야!’ 하고 감사히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조롱으로 들어야 할지? “부활도 있고, 성령의 능력도 있는데 그런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십자가만 이야기한다.”고 해요. 

위에 올라가 보세요. 위에 올라가면 내가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나’에 관한 것은 엷어져요. 위에 올라가면 전부 안개로 보입니다. ‘나’도 안개의 일부에요. 그래서 창원에서 강의할 때 죄 문제를 이야기 했어요. 사람들은 자꾸 자기가 죄 없이 그냥 성경 해석하려고 하는데, 중보자가 뭘 지고 갔습니까? 피를 흘리고 갔거든요. 이 말은 뭡니까? 버림받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림받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 없이 그냥 십자가를 이해하려고 해요. 십자가 목걸이 달고 천당 가려고 하는데, 십자가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죄가 뭐냐? “네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것이 야고보서 4장에 나오지요. 어느 도시에 가서 이익을 보는 게 왜 죄입니까? 나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합니까?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인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한테 관심이 있어요? 나로부터 와서 결국은 나에게 돌아가는 것.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뭘 하겠다고 하는 그 주인공이 누구예요? ‘나’잖아요. 그 때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주의 뜻이면 내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약4:15).” 우리는 뭐다? 안개. 정훈희 노래 [안개] 있지요. 현미 노래 [밤안개]도 있고. A라는 안개와 B라는 안개 중 어느 안개가 예쁩니까?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둘 다 관심이 누구한테 있어요? ‘나’에게 관심이 있지요. 

지금 내가 30살인데 40이 되면 뭘 하고, 50이 되면 뭘 하고 --.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60되면 안 그렇겠습니까? 70되면 달라집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뜻이면 뜻대로 하겠나이다.’ 하는 자기 부인. 이것이 창원 도시위에 붕 떠서 넓게 보게 되면 ‘나’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나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난 뒤에 창원 시내에서 부도를 만나든지 애가 가출을 하든지 개척교회하다 망해서 아내의 저주를 듣든지 이것조차도 창세전에 예정된 주의 뜻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듣고 난 후에 내린 결론이 뭐냐? “목사님 말씀이 맞기는 맞는데 사람이 따로 해야 될 일이 빠져 있잖아요. 목사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된다고 하면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냥 손 놓고 놀기만 하면 되겠네요?” 

1945년 8월 6일 아침 10시 10분 히로시마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원자폭탄이 떨어졌지요. 숙제한 것 가방에 넣고 학교 간다고 애가 길을 건넜을 때, 제가 하는 말이 “숙제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폭탄 맞아 죽지요.” 그러면 원자폭탄은 B29에서 떨어지다가 상공 1000m 지점에서 멈췄습니까? 아니죠. 계속 떨어졌지요. 학교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떨어져서 그 아이는 산산조각이 나고 없어졌지요. 이게 바로 성령의 폭발 아닙니까. 

사도바울이 놀았습니까? 예수님이 놀았습니까?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지요. 사람들이 ‘내가 일 안 하면 일이 안 된다.’고 여기는 그 사고방식이 바로 자기중심에서 오는 죄의 버릇입니다. 죄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님이 일한다는 생각을 못 믿기 때문에 ‘내가 일해야 일이 된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에 그 믿음에 주님의 믿음이 들어올 여지가 없어요. 

그러니까 강의 다 듣고 하는 말이 “이근호 그 사람은 뭐든지 주께서 하신데. 우리는 가만  있어도 주님께서 다 하신데. 말은 좋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방종해서 나중에 노숙자 되고 술주정뱅이 되면 그것도 창세전의 주의 뜻이라고 핑계되면 되겠네.”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중보자께서 6절 보세요.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이것은 사도바울도 포함되지만 이 편지가 누구에게 보낸 편지입니까? 디모데지요. 그러면 디모데가 이 말씀을 받을 때 “나는 놀면 되겠네.” 이렇게 나왔겠어요, 안 나왔겠어요? 

이렇게 되겠지요. “나의 나 된 것은 주님 은혜다.” 지금까지는 내가 일해야 일이 된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바로 죄였고 지금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다. 내가 일한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하신 분이 주님이고,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고 일거리 주시고 또 이끄시는데, 그것은 내가 전파하는 것,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중보자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예수님 밖에 없고 우리는 그분께 복종하게 하신다는 고백이 나오지요. 만약 고백이 안 나오면 그는 디모데 같은 사람이 아니고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 아니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말을 감히 솔직하게 고백을 못하기 때문에. 

그 다음 7절을 봅시다.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이렇게 말할 때에 사도바울을 비난하는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도취에 빠진 놈이라고 하겠지요. ‘놀고 있네. 네만 믿음 좋으냐? 나는 믿음 없단 말이지’ 이렇게 나올 것이고, 또는 ‘너만 사명 받았나? 누구는 사명 없나?’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너, 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좀 피곤하시지만 어려운 것 해 봅시다. 원래 이런 기회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뭐로 만든다고 했습니까? 법으로 만들죠. 법으로 칸막이를 쳐서 자아가 생겨요. ‘나는 이것도 할 줄 알고 이것도 할 줄 안다.’고 하는 그 안에 뭐가 담깁니까? 자아가 담기죠. 왜? ‘나는 저것은 못해. 하지만 이것은 할 수 있어. 나는 하루에 성경 3장 읽지만 5장은 너무 버거워. 너는 5장 읽어. 나는 3장 읽는 게 나야.’ 

그래서 자아라고 할 때는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표준으로 정해놓은 이것이 법이에요. 나름대로의 법을 정해놓고 자아를 만드는데 이 자아는 흐름입니다. 다음에 되면 또 바뀝니다. ‘나도 드디어 성경 5장 읽었다.’ 또 바뀌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법이 경계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경계선을 만들어요. 뭐냐 하면, “이것까지는 내 영역이고 저것까지는 네 영역이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만드는데 법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불신자들의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예수님은 여기 계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따라서 김집사, 최집사가 있다면 둘 다 열심히 하는데 더 열심히 하는 김집사는 더 복을 받고 조금 나태한 최집사는 덜 복을 받아야 한다. 왜?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 복 주시지 안 지키는 사람에게 복을 줄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 김집사와 최집사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경계가 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뭘 없애버렸습니까? 이 경계선을 없애 버렸어요. 없애 버리는 것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와요. 한 사람은 눈의 역할을 하고 한 사람은 발이 되는데, 문제는 발과 눈을 비교할 수 있는 경계선을 각자가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얼레리꼴레리 무좀 걸린 발 보래요. 나는 고상한 눈이 있는데.” 라고 비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주님께서 주신 적이 없단 말이지요. 

법을 없앰으로서 경계선을 없애는 거예요.  법이 없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무법’으로 알아요. 제가 욕먹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법이 없는 자리에 뭐가 있습니까? 사랑이 있다고 그렇게 성경에서 이야기했건만 사람들은 사랑이 아니라 법이 있어야 안심을 해요. 그리고 법이 있어서 경계선이 생기면 그 경계선을 놓고 서로 경쟁이 벌어지고, 서로 경쟁을 해야 교회에 헌금이 모이고 뜨거운 열기로 움직이게 되지요. 서로 이기려고 하니까. “김집사 당신 뭐하노? 최집사는 헌금 했는데.” 자꾸 목사가 경쟁을 붙이고 자극을 줘야 교회가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면 주차장도 넓히고 주차장이 넓으면 사람들이 교회 와요.  

법이 있으면 경쟁이 생기고 경계가 생기지만, 사랑이 있으면(고린도전서 13장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 온유하고 화평하고 ---.  온유하고 화평하면 회사에서 승진시켜 줍니까? 안 시킵니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 받은 증거는 뭡니까? 교회 다닌 후에 그 사람 수입이 갑자기 늘어나면 그 사람은 복 받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김집사가 만약에 수입이 늘고 십일조를 만이 하면 누가 기죽어요? 최집사는 기죽겠지요. 여기서 경계가 생기고, 목사는 ‘김 집사를 본받으라. 저렇게 열심히 하니까 복 받잖아. 너는 언제 정신 차릴래’ 이렇게 나온다고. 

예수님은 법을 없애고 사랑으로 바꿔서 심지어 최집사가 창녀 짓을 해도 천당 간다고 하십니다. 강도가 되어도 천국 간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이번에 제가 창원에서 그런 소리 했습니다. 오버했는데 오버한 것은 아니고 “27세 때 사람 죽인 죄를 예수 믿고는 뒤에 찾으려고 해도 찾지를 못해요.” 분명히 살인죄가 있는데 찾아보아도 없어요. 찾아도 찾아도 찾지 못하는 것이 뭡니까? 내 죄. 이게 뭐냐? 사랑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사람을 죽였고 김집사는 사람 죽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같이 사랑을 받을까요? 오늘 공부 했으면 압니다. 주님께서 한 아담에게 모으기 때문에 그 아담의 분신들이 어떤 놈은 간음죄를 어떤 놈은 살인을 해도 주님 보시기에는 아담의 후손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에 그들의 자질을 보는 것이 아니고 바깥쪽에 있는 마지막아담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와 관련된 사람, 이것을 믿음이라고 했지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벨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삽니다.’라는 표시로서 제사를 드렸더니 주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은 자기 잘난 맛에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제사는 거절하셨지요.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살지만 안 믿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밖에 모르고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릅니다. 다 자기 잘났고, 교회 가서 기도해도 다 자기 잘 되기 위해서. 그것밖에 모릅니다. 

한 가지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죄가 무엇인가?
이건 중요한 거니까 잘 들어보세요. 창원 강의에서 ‘이 밑바닥에서 죄라고 하는 것은 같은 이웃끼리 비교해서 좀 나으면 의가 되고 못하면 죄가 되는 거예요.’ “너는 간음했지? 나는 간음 안 했다.” 간음한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죽이려고 했잖아요. 

마귀가 죄를 깔아놓았어요. 이 죄는 인간이 열심히 하면 지킬 수 있는, 안 범해도 되는 그런 죄를 깔아놓았어요.
그런데 이런 죄를 깔아놓았다는 자체가 죄가 됩니다.
높이 올라가면 죄는 딴것이 죄가 아니고 하나로 모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죄예요.
너, 나 없이 모두 죄인이란 사실을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모르니까 똑같잖아.’ 이것이 아니라, 똑같이 우리는 저주 받을 수밖에 없고,
심지어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우리는 악마의 말을 들어요. 불순종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한테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아니면 누가 가르쳐 주겠습니까? 

에베소서 2장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고집 센 인간들이 ‘나는 다른 이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하지만, 성경에 보면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고 살아요? 마귀의 말을 듣고 산데요.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마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든 안 하든 모든 인간은 율법 앞에서 다 죄인으로 드러나요.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들어오면 갑자기 탐심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자기는 담배 피우면서 학생들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하면 아이들이 얼마나 비웃겠어요. ‘담배가 나쁜 것 같으면 선생님부터 먼저 끊을 것인데 나쁘다고 하면서 피우는 것을 보니까 나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런 생각 안 하겠어요? 

죄라는 것은 뭐냐? 주께서 우리를 아담으로 몰아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것. 이러한 작업을 주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내가 나에게 뭔가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주님을 섬기고 이것으로 자아를 구축하려는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것과 상관없이 주께서 십자가에서 거저 주시는 “너는 백날해도 아담이야.” 라고 지적하면서 거저 주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 관계가.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내가 너에게 와서 죄라고 지적하기 전까지는 너희가 죄가 없었다. 이제 내가 지적한다. 너희들은 몽땅 죄다.” 그러면 죄가 되는 거예요. 

이제 결론을 맺어봅시다. 
도대체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뭡니까? 주께서 까라면 까는 거예요. 그냥. 죄라고 지적하면 그냥 죄가 되는 거예요. 그 정도로 주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수용할 때, 거기에 목숨 걸고, 비록 내 사정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별로 안 중요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경이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이게 중요하단 말이지요.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는데 올라가니까 엘리야, 모세, 예수님이 변했습니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산 밑에서(창원시내에서, 광주시내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는 관심도 없어요. 뭐라고 합니까? “우리 내려가지 맙시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읍시다.(마17:4)” 이것을 가지고 ‘재개발, 뉴타운 건설’이라고 합니다. 변화산 위에서 뉴타운 건설하자고. 우리가 그 정도로 높이 올라가야 돼요. 올라가서 산 밑에서 ‘수입이 얼마냐, 장래 어떻게 먹고 살까?’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 주님 십자가의 용서를 만끽하고 누리면서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오셔서 하신 말씀을 아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떠밀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걸로 끝나줄 알았는데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성령 보내주셔서 십자가가 이처럼 중요하고 귀한 복음이고 사랑인 것을 저희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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