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딤전후(교회를 잊어라!) 제8강(둘날저녁2) 이제 디모데전서 5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3절입니다. (딤전 5: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 지도자는, 주님의 마음을 드러내야 !! !! 사도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이렇게 대하면 무엇을 얻는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은혜롭다, 교회가 부흥된다" 라는 것을 위함입니까? 그게 아니고, 이것은 바로 종말에 인간들이 범할 수 있는 오류, 즉 소위 교회 지도자가 저지를 수 있는 사태와 잘못에 대한 지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로서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여기에 나온 것들과 반대로 보면 되는데, 즉 늙은 사람을 꾸짖고, 또한 젊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과부를 경대하지 않는,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소위 지도자라는 자리를 오해해서 자기가 마치 지도자 행세를 해야만 교회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디모데 개인을 포함해서, 이 계시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이 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상적인 교회나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사셨는지, 그것을 교회에서 나타내고 보여주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 종말을 모르는 자들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즉 이러한 종말을 모르고 살아가는 일반 사회에서는 가족윤리나 사회윤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종말을 아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주변에 있는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과 과부들에게, 즉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선을 베풀 수 있는가?" 라는 것은, 여기에 대해서 동양철학에서는 그것을 개인적인 문제로서 본다는 겁니다. 물론 사람들은 보통 "나쁜 사람은 악을 행하고, 착한 사람은 선을 행한다" 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동양철학에서는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나쁜 사람과 선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선한 마음도 있고, 또한 악한 마음도 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세석' 이라는 동양철학자가 그런 주장을 했는데 말입니다. ◈ 맹자와 순자가 가라사대 !! 여기에 대해서 그 유명한 맹자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물고를 선한 방향으로 틀면 선하게 되고, 나쁜 방향으로 틀면 악한 결과를 낳는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즉 "타인에게 어떻게 선을 베푸는가?" 라는 문제에서, "개인의 성향과 자질을 어떻게 갖추면 선이 나오겠는가? 사회적으로 선한 사회가 되는가?" 라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 맹자가 결코 맹한 사람이 아닌데 말입니다(ㅋㅋ). 그런데 선한 쪽으로 물줄기를 틀려면, 결국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맹자의 경우에는 사회적 문제로, 즉 환경의 문제가 되고 마는 겁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사람들은 얼마든지 선할 수도 있고, 또한 나쁜 환경으로 빠지면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소위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라고 해서 맹자의 모친이 몸소 실천했는데, 즉 자식을 위해서 좋은 학군인 강남의 8학군으로 이사하는 것은 옛날에 맹자 엄마가 먼저 한 일이라는 겁니다. 시장 근처에서, 무덤 근처에서, 그리고 서당 근처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은 자기가 본 그대로 행동한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한 것을 보여주면 선하게 되어서 선하게 살고, 악한 것을 보여주면 악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서 선과 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해서 '순자' 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데, 즉 사람은 날 때부터 짐승과 같은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때문에 채찍질을 하고 패서 가르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많이 패면 팰 수록 좋은 사람이 되고, 방치하면 나쁜 놈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름은 순한 순자인데, 그가 주장은 내용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ㅋㅋ), 이것을 소위 순자의 '성악설(性惡說)' 이라 하고, 이에 반해서 맹자는 '성선설(性善說)'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게 선한 것이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철학자들이 이웃에게 선을 베풀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예수님의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입니까? 그것이 아닌데, 그러면 무엇입니까? 현재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를 평화롭고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서, 자신이 행복하게 살려는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 불교 - '인간의 마음이 행동을 결정한다' !! 불교 쪽에서는 이것을 더 심각하게 다루는데, 그들은 "인간의 마음이 행동을 결정한다" 라고 보는데, 이 말이 맞습니까? 아닌데, 인간의 마음은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는 "내 마음은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다르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나중에 동양철학에서는 굉장히 큰 논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즉 "사람에게서 나오는 충동이 우선인가? 아니면 이성이 우선인가?" 라고 말입니다. 보통 동양 철학자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면 바르게 할 수 있다"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를 해야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겁니까? 어떤 사람이 아파트의 가스관을 타고 올라갈 때, 정신 바짝 차리면 도둑질을 할 수 있는데, 물론 컨닝을 할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면, 감독관의 눈을 피해서 할 수 있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은 하면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학설이 있는데, 먼저 "정신을 차리면 된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곧 맹자 쪽인데 말입니다. 이 맹자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이 선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착한 일도 할 수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열심히 하면 말입니다. 그런데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인간에게는 '칠정(七情)' 이라는 욕망이 있는데, 이 욕망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다스려야 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아서 나온 게 충동이나 감정과 같은 것인데, 그러니 충동과 감정 등은 나쁜 것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 하지만 충동이 다 나쁜 것입니까? 기마이(선심?)을 쓸 때, 이 마음이 나쁘다고 볼 수 있습니까? 뭔가 구제하고 싶은데, 이것저것을 따질 때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 그냥 내면 되는데, 서로 얼마를 낼 것인지, 그 문제로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둘 다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 신수, 혜능, 원효, 의상 !!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떻게 보는고 하면, '신수' 라는 스님은 "보리수와 같은 이 마음을 갈고 닦으면, 그 갈고 닦는 행위만으로도 남에게 선한 향기를 낼 수 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혜능' 이라는 사람은 "닦을 마음이 없는데, 뭘 닦는다는 말인가?" 라고 했다는 겁니다. 완전히 묵시적인데, 즉 마음이 없어야 되는데, 자기에게 마음이 있다고 여기는 자체가 더러워진 것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마치 갈라디아서 2장 20절처럼 들리는데, 사도바울이 "내가 사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으니 말입니다(ㅋㅋ). (혜능 선사, 오랜만입니다!) 또한 유명한 '원효' 라는 양반은 바깥에 선을 행하자는 것인데, 즉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을 두고 고민했는데, 사실 동양의 도를 닦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면에서 굉장히 순수한데, "내 일신이 어떻게 하면 편할까?" 라는 것은 짐승과 같은 생각인데, 하지만 처음은 짐승과 같아도 도를 닦게 되면, "어떻게 하면 남을 위해서 살까?" 라고 하게 되고, 그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극단의 윤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 수고했어요. 바리새인들 !! 바리새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예수님도 하셨지만, 바리새인들도 그런 말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바리새인들을 그야말로 물 먹이는 말씀인데, 즉 "너거들이 기껏 생각한 것이 그 정도야?" 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행동에 대해서 "수고했어요. 바리새인들!" 라고 하시고는, 돌아서서 곧 바로 제자들을 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렇게 수고한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 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실컷 착한 일은 일대로 다 하고도 지옥으로 간 사람들의 대표자들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근처에도 감히 가지 못한, 그런 인간들도 다같이 줄줄이 지옥으로 가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에서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직 사랑을 받은 자만이 그 사랑을 알아보고, 그것만이 주께서 원하는 성도의 삶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사랑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죄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 사랑이 진정한 교회로서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한다는 말입니다. ◈ 원효의 '리턴'과 의상의 '고' !! 어쨌든 원효라는 사람은 그 당시에 "어떻게 선을 베풀까?" 라는 것을 고민하다가, 그 깨달음을 위해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겁니다. 가는 도중에 밤에 지치고 목이 말라서 길에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셨는데, 예전에는 물맛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그만 해골바가지에 담긴 빗물을 자신이 지난밤에 마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과연 낮이었다면 그 물을 마셨겠습니까? 마시지를 못했을 것인데, 그러니 결국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선입관이 이 세상을 잘못 판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물 한 그릇을 마시고 놀라운 것을 깨달았는데, 그래서 유학을 가는 길을 중단하고 돌아왔다는 겁니다. 유학이 문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자기 마음의 번뇌가 문제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번뇌가 있으면 고통이 온다" 라고 주장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제거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 그들의 과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몇 마디의 말을 던짐으로 인해서 그들의 고통을 해소해주는데, 이것이 곧 그들의 포교활동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번뇌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에 이미 번뇌가 있으니까, 그런 자기 마음의 번뇌를 지우면 그것이 해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원효의 경우에는 굳이 당나라까지 유학을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되돌아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원효와 같이 당나라에 유학을 떠난 분이 있었는데, 그가 곧 '의상' 이란 겁니다. 이 양반은 해골바가지로 물을 안 마셨기 때문에 그냥 당나라로 유학을 예정대로 갔다는 겁니다. 유학을 가서는 화엄경을 깨달았는데, 즉 "내가 해탈하는 그것조차도 전체 중에 일부에 불과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전체가 중요하지 개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원효와 의상, 이 두 사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바른 진리입니까? 소위 이러한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모든 해탈, 그들이 말하는 선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이 자연질서를 안정되고 평온하게 만들 수 있도록 자체적으로 지혜를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동양철학이란 말입니다. ◈ 동양철학을 오늘날 교회에서 써먹으면, '대박' !! 그렇다면 이 동양철학을 오늘날 교회에서는 어떻게 써먹겠습니까? 교회를 그만 폐쇄적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즉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가 평화롭고 부흥되기를 원하지요? 그러면 교회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인지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라는 동양철학 사상이, 그것이 그대로 디모데전후서를 가지고 동원된다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동원되는지 살펴보겠는데, 즉 성경에서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라고 하면, 그것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면 "교회에 다니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평화로운 교회가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설교가 참 쉽죠잉? 그래서 그들은 디모데전후서를 소위 '목회서신' 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하지만 성경에 '목회서신'은 없는데, 성경전부가 주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 즉 주 예수께서 행하신 이야기들로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 늙은이와 젊은이의 경우에 !! 그러면 주님께서는 늙은이와 젊은이에게 어떻게 다가가겠습니까? 그 사람의 늙고 젊음의 나이를 보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늙은이와 젊은이를 다루는 그 구조에 물들지 않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기존의 이 세상에서는 조직구조인데, 즉 조직이 우선이고 구성원들은 조직보다도 후차적인 문제로 뒤로 밀린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늙은이든 젊은이든 간에, 그들이 복음을 알기 위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감사와 사랑이란 겁니다. 그러니 "늙은이들은 대접을 받아라" 라는 것이 아니고, 늙은이들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고, 감사가 무엇이며, 희생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은 그 사랑과 희생을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됩니까? 현재 지금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그러니 계속해서 자기가 중요한, 그런 곳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이런 구조가 아니라,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신 사랑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서로 서로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은사'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디모데후서 1장 6절에 보면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러면 은사의 마지막에는 무엇이 나옵니까? 그것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데, 즉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모든 것은 사랑에서 흘러나와서 사랑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된다" 라는 겁니다. (딤후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그러면 이 '사랑'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는데(ㅋㅋ), 그게 아니고, 사랑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동양철학처럼 보이기도하고, 한 편으로는 불교처럼 보이기도하고 말입니다. 마치 무아사상처럼 들린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사랑의 출처를 우리 자신의 의식이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즉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로 그렇게 해서 이 사랑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사랑이 흘러가는 골 !! 그렇다면 이 사랑이 경과하는 그 모든 절차와 과정에서 대해서, 즉 사랑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것을 좀 설명해보자는 겁니다. 그것을 설명하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행적에 대해서 그 의미를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보면, 그야말로 사랑이 흘러가는 골을 만드는데, 즉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사랑을 주고, 그리고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영구적으로 피해버림으로서, 주님의 사랑의 가치를 우리에게 부각시킨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과부가 너무 억울한 일이 있어서 재판관을 찾아가서 간청을 하는데, 그런데 재판관은 귀찮아하면서 과부를 돌려보내는 겁니다. 그런데 계속 찾아와서 간청하니까, 그 재판관이 그 간청을 할 수 없이 들어주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는가?" 라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눅 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 오직, 재판관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 그런데 여기서 초점은 간청하는 과부가 아닌데, 간청을 귀찮아하는 재판관에게 맞춰야 한다는 겁니다. 즉 "불의한 재판관도 간청하니까 들어주는데, 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너희의 간청을 어찌 들어주지 않겠는가?" 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간청한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재판관이 불쌍한 과부를 챙기는 이유가 "네까짓 것 때문에 내가 더 이상 귀찮을 수는 없다" 라는 식인데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되시는 재판관이 불쌍한 우리를 도와준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높은 자리에 계신 주님이 낮아짐으로서, 즉 같은 눈 높이에서 그 간청을 들을 정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그런 내용이란 겁니다. 모든 예수님 말씀이 다 그러한데, 그러니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하신다" 라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모든 것이 주님 사랑으로만 되는데, 사랑이 없으면 저주밖에 주어질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나에게는 아무 것도 나올 게 없습니다. 헌금을 하든, 기도를 하든, 내가 주님께 받칠 것은 없습니다. 죄짓는 이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라는 모습이 될 때, 그것이 주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즉 주님 사랑과 매치가 되는 하나의 대상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연기를 해서 불쌍하고 초췌한 척하고, 그럴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세리, 창기, 거지 나사로와 같이, 버림을 받고 불쌍한 자들을 예로 들면서, "현재 너희들이 평소에 추구하는 본질과는 전혀 다른 쪽에 주님의 사랑이 임한다" 라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 어린아이는, 스스로 챙길 수가 없어 !! 또 다른 예를 들면, 제자들끼리 서로 멱살을 잡고 싸움이 벌어졌는데, 즉 "우리들 중에서 누가 높은 자인가?" 라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그때 주님이 어린아이를 한 명 데리고 오셨는데, 그러면 그 아이는 구원을 받습니까? 그게 아니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알다시피 어린아이는 독자적으로 스스로 자기의 것을 챙길 수 없는 자인데, 그렇게 자기 것이 없으니 사랑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적당하다는 겁니다. 이에 반해서 '제자'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곧 제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자기의 받은 사랑이 더 크다고 경쟁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 받은 사랑을 가지고서 적금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즉 누구의 적금이 더 큰 목돈이냐는 겁니다. 즉 누가 더 센지, 하늘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곳에 있는지, 그렇게 서로 키 재기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의 것이 전혀 없어야 천국에 합당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이, 즉 십자가의 영이 임하게 되면, 어린아이만도 못한 우리를 어린아이가 되게 만드시는 그 솜씨를 사랑의 은사로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굳이 사랑의 은사를 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주신 사랑이나 잘 간직하고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받으려고 폼을 잡지 말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는 이미 어떠합니까?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다음으로 6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5: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 쾌락을 좋아하는 자에게 사랑을 공급해라 !!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제가 보기에 참 어려운데 말입니다. "일락(一樂), 즉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것을 1절과 결합시켜보면 어떻게 됩니까? 일락을 좋아하는 늙은이는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죽었는데, 하루하루의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죽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락을 좋아하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은, 그냥 가만히 놔두라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잘 하셨습니다" 라고 해야됩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가 성경말씀을 어떤 질서를 잡기 위한 법 조항으로 삼지 말고, 주님의 취지는 항상 "디모데야, 제발 좀 마음을 낮춰라" 라는 것인데, 그렇게 마음을 낮추고 이야기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사랑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을지 여부는 우리가 장담할 수가 없고, 우리도 소관도 전혀 아니지만, 어쨌든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제공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마음을 낮출 수가 있고 말입니다. 이제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즉 "믿음을 배반한 자이고,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것인데, 제가 생각해도 시비를 제법 잘 걸었지 싶은데 말입니다. 전혀 대답이 없어서 조금 썰렁한데, 쉽게 말해서, 자기 친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예수를 믿어도 지옥에 가느냐는 겁니다. 제가 지금 너무 어려운 문제를 내었습니까?(ㅋㅋ) 어려운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만약 디모데에게 그것을 물었다고 하면, 즉 "디모데님, 교회에 나오시는 분 가운데 친척과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은 자가 있는데,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에 갑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뭐라고 대답을 했겠습니까? "행함이 없어서 지옥에 갑니다" 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십자가의 피를 지식으로만 알았으니 지옥에 갑니다" 라고 했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예수님의 피를 일단 믿으시고, 거기에다가 가족을 돌보는 것까지 합치면 천국에 갑니다" 라고 했겠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마음을 낮추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즉 "주신 사랑의 은사를 받았습니까?" 라고 디모데가 되물었지 싶은데 말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지금 당장은 돌봐주지를 못해도 다음에는 돌봐줄 수 있는 준비를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 어머님, 고추가 너무 비싸요 !! 그런데 여기서 '돌본다'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매월 생활비 얼마를 주는 것이 돌보는 겁니까? 아니면 한 달에 몇 번을 찾아가야 하는 겁니까? 요즘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1년에 두 번도 제대로 못 찾아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겁니다. 꼭 마늘을 보내고 고추를 보내줘야 전화라도 자주하고, 그리고 방학이 되면 귀찮아서 아이들이나 보내는데, 또한 용돈은 생각날 때마다 쥐꼬리만큼 부치고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이 말씀을 교회 앞에 붙여놓으면, 예수를 백날 믿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친족을 돌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말씀을 사랑이라는 바탕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금까지 제가 계속해서 그 바닥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가 그것을 마음대로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겁니다. 뭔가가 박혀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그 은사가 십자가로 박혀버리면, 자주 어머님을 뵙게 되고, 그리고 이제는 용돈을 타지 않는데, 용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또한 가끔 찾아가 보면, 자기는 돌본다고 하는데, 그런데 "됐다. 누구보다도 낫다(?)" 라고 하면, 그것이 성령의 은사냐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의 부족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 '덕대골' 이야기 !! 옛날 여름밤을 시원하게 했던 전설의 고향을 보게 되면, 어느 집에 시어머니가 병에 걸렸는데, 그것을 낫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다리를 삶아 먹어야 한다고 해서, 그것을 며느리가 묘지에 직접 가서 무덤을 파고 시체에서 다리를 잘라서 집으로 가지고 돌아오는데, 뒤에서 "내 다리 내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도망을 쳐서 겨우 집으로 와서는, 그것을 솥에 넣어서 삶아드렸느니 시어머니의 병이 나았다고 하는,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천년 묵은 산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게 소위 '덕대골' 이라고, 전설의 고향에서는 '구미호'와 함께 양대 축을 이루는 고전에 속한다는 겁니다(ㅋㅋ). 아무튼 그야말로 지극한 효심에 관한 이야기인데, 하지만 그런 효심이 있다고 해서 천국에 갑니까? 그러니 매주 부모님을 자주 찾아 뵙고, 자주 용돈을 드린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즉 십자가는 어떤 행위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이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완벽한 행동을 해도, 그것이 완벽한 행동이 될 수 없습니다" 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시집을 온 며느리가 제 아무리 잡채를 솜씨를 발휘하고 열심히 만들어서 대접을 해도, 그 시어머니에게는 그 맛이 그 맛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며느리의 면상에다 곧 바로 날려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잡채 맛이 엉망이니 말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면,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 아닌데, 우리의 행동은 그게 어떤 것이 되었건 간에, 십자가 앞에서 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낮춰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의 낮춤을 통해서 친척이나 가족을 돌볼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당연히 사랑으로 돌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모습이고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14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5: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 시집을 갈래? 아니면, 천국에 갈래?!! 이게 참 무서운 내용인데, 여기에 보면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라고 하는데, 여기서 젊은이는 젊은 과부를 말하는데, 그러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먼저 앞에 있는 11절을 보게 되면,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라고 하는데, 즉 "시집을 갈래? 아니면, 천국에 갈래? 이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거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무슨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다 있느냐는 겁니다. (딤전 5: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그러면 시집을 가는 게 지옥에 가는 겁니까? 즉 시집을 가는 것이 믿음을 배반한 것이냐는 말입니다. 과부가 어디 자기가 되고 싶어서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밤에 남편도 없고 해서 너무나 적적해서 자기 다리를 바늘로 찌르는데, 나중에는 찌를 데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와중에 디모데 목사님이 심방을 와서 한다는 말이, "집사님, 시집을 가고 싶어요? 아니면 천국에 가고 싶어요?"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중매쟁이가 와서 "어디, 선을 한번 볼 겨?" 라고 하는데, 그래서 디모데 목사님이 "이런 악마의 하수인이 어디에 와서 설치노? 어디 집사님을 지옥에 보내려고 하는가?" 라고, 그렇게 해야하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디모데전서 5장 11절에 있는 말씀을 제대로 지키는 겁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지금 전혀 대답들이 없는데(ㅋㅋ),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지킨다고 하면 그렇게 해야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대로 지킨다고 하면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종말론적인 삶에 있어서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 오더라도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딴 데 정신이 팔려서 온다는 겁니다. 그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절인데 말입니다. 그때 은사가 없는 자들이 교회에 온다는 것은 뭔가 노림수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은 자기들의 본 자리인 사단에게로 돌아가는데, 그것이 젊은 여자의 경우와 또 늙은 사람의 경우에 각각 다르지만, 물론 그 외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그렇게 다르지만, 하지만 교회를 그렇게 사람의 쾌락이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장소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회에 나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입니다. ◈ 교회는, 계속해서 십자가의 피가 흘러야 !! 교회는 '그리스도 안' 인데, 그러니 이것은 함부로 들어올 수도, 함부로 나갈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존재로서의 교회는 얼마든지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교회는 역사적 존재와 묵시적 존재가 만나는 지점, 즉 십자가의 정신이, 즉 주님께서 주신 사랑이 계속해서 피어나는 곳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곧 새언약인데, 이 새언약은 무엇입니까? 새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는, 즉 십자가의 피가 있기에, 그 피가 피의 효과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주님께서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이런 말씀을 보고, "아하, 우리가 얼마든지 이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구나" 라고 하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또 다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는 계기로 말씀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특정한 인간을 두고서 "지옥에 간다, 천국에 간다" 라고 하지 마시고, 우리도 늘 그런 마음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 속에 박혀서 이 말씀을 되새기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하, 교회를 너무 세상적인 즐거움을 주는 단체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구나" 라고 하는 교훈을 이 디모데전서 5장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사실 그러한 세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우리 자신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라고 하는데, 이것이 고린도전서 9장에도 나오는데, 고린도전서에서는 "전도자에게 생활비를 제공하라" 라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19절이 주가 된다는 겁니다. 즉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라고 말입니다.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 지도자는, 미움의 대상이 !! 왜 장로에게 증인들이 있어야 됩니까? 장로는 그 당시에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에게는 모함과 같은 것이 올 수가 있다는 겁니다. "어, 나를 치지? 나는 못할 줄 알고, 나도 한다" 라고 해서, 터무니없는 것을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올려놓고, 그 죄목이 몇 가지였습니까? 왜 사람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런 짓거리를 하는지, 참으로 이상하다는 겁니다. 다같이 죄인이면서 말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부각시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두 세 명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은, 증인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인이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납득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납득이 되더라도, 함부로 결정해서도 안 되는데, 그러면 또 모함이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단체에 있어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를 라이벌로 여기고서 미워하는, 그런 감정이 있는 자들이 굉장히 많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 지도자의 자리가 시기가 나서 그럴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지도자의 말에 상처를 받아서 그럴 수도 있다는 겁니다. ◈ 대표기도는 30초 내로 ?? 물론 우리교회는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전부가 조용하다는 겁니다. 대표기도를 시켜도 30초를 넘지 않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길어지면 또 말썽이 생기니 말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하면서 덜덜 떠는데, 집에 가서 딸에게 왜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떠느냐고 핀잔을 듣고 말입니다(ㅋㅋ). 그래서 기도를 기피하는데, 아까 응축된 자아의 도피라고 했는데, 그런 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대표기도를 피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저도 강요를 하지는 않는데, 그것이 주님이 주신 은사라고 여기고 말입니다. 말을 하고 보니 성경해석이 참 기가 막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튼 그렇게 은사라고 여기고 "그렇다면 원하실 때 기도를 하세요" 라고 말을 하기는 하는데, 물론 원해서 한 사람은 아직까지는 없지만 말입니다. 물론 그러한 가운데도 대표기도를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참으로 고맙게 여기는데, 왜냐하면 목사의 입장에서는 설교준비도 엄청 힘들고 바쁜데, 거기에 대표기도까지 준비해서 하려고 하면, 어떻게 보면 설교를 두 편이나 준비하는 셈이 된다는 겁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물론 어떤 분은 그냥 말도 없이 기도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제가 또 알아서 하기는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꾸만 빠지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사람도 그것을 보고는 "어, 주님이 맡기신 것이 아니잖아?" 라고 해서 덩달아 빠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구 빠져도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지도자는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겁니다. 즉 앞에 선 사람은 여러 가지 눈총을 받는 입장이어서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고, 또한 감정적으로 모함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는 여러 사람을 증인으로 세워서, 정말로 그러한지, 그 고소한 사람의 말이 맞는지를 잘 들어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면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말입니다. ◈ 목사님, 게시판에 그것도 죄라고? 어떤 사람은 "목사님, 게시판에 그것도 죄라고 올려놓았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섭섭한 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도 헛갈린다는 겁니다. 자기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했다 치고 목사가 이야기를 해버리니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는 조금 억울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어떤 어느 누구라도 사람들에게 변명할 수 있는 자격자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변명을 하나마나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온 천하가 모두 안다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다 죄인인데, 그런데 그것을 변명한다고 해서 죄인의 입장에서 조금 더 나은, 그런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 중요한 것은, '말씀' 그 자체 !! 다만 장로처럼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경우에, 그 전하는 사람의 인격과 품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의 신뢰도가 그러한 모함으로 인해서 가로막힐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건 사단의 역사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불신 때문에 살아있는 말씀을 의심하면서 듣는 분위기가 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 자체를 가로막는 게 되고 만다는 겁니다. 물론 그 어떤 인간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데, 즉 상대방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죄인이라는 겁니다. 숨을 쉬는 것도 죄인데, 그러니 변명을 한다고 해서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알고 보면 고발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죄목이 있으니 말입니다. ◈ 말씀증거를 통한 봉사의 기회로 !!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상대방이 노린 게 무엇이냐는 겁니다. 보통 지도자를 고발하는 이유는, 그 전한 말씀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인데, 즉 자기에게는 상처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한 말씀이, 즉 목사의 성경해석이 왜 마음에 들지 않는지를 이야기해보라는 겁니다. 다른 엉뚱한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말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본인들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좋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성경해석을 서로 토론하는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증거하는 봉사의 기회가 된다는 겁니다. 요즘도 주위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물론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제 6장 말씀을 보겠는데, 1절입니다. (딤전 6: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 이 본문도 어려운데, 사실은 이렇게 돈을 주고 받고 하는 관계라고 하면 공경하지 말라고 해도 공경하는데, 왜냐하면, 월급도 못 받고 잘리면 먹고 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말입니다. 따라서 아랫사람이 상전을 공경하지 않는 경우는, 돈 자체의 문제보다도 영적 상태나 세상적인 실력, 그리고 윤리와 도덕적으로 자기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무시할 경우가 여기에 주로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랫사람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 저 사람은 인간적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인데, 왜 그가 나의 상관이 되어있고, 나는 그의 아래에 있어야 됩니까? 내가 상관이 되어도 시원찮은데 말입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대들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래쪽에서 서러움을 받는 입장이 되어야만, 그러한 오만과 자만을 낮출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즉 억울한 곳으로 갈 때, 비로소 남이 자기를 칭찬해주는 것에 대해서 고마운 줄을 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자기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러니 상대방이 자기를 칭찬을 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미워지는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 나는 아래쪽이다 !! 그래서 늘 마음을 낮춰서 "나는 아래쪽이다" 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누군가가 칭찬해주면 "와우, 정말 횡재했다" 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나는 이만큼 수고하고 애를 섰기 때문에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돼" 라고 나온다면, 그런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을 항상 지적하고, 자기보다도 높다고 여기게 되면 언제나 시비를 걸 준비가 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예 회사를 상사를 공격하는 재미로 다니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특히 자기보다도 못한 인간이 진급을 해서 상전이 되면, 새파란 젊은 놈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한 시기와 불평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또 다시 불평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그 높은 자리에 비해서 지금 자기가 있는 자리가 못하다고 여기는 것인데, 그런 것에서 오는 서러움, 하지만 그런 서러움은 왜 생기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진급을 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동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즉 지나친 자기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높은 자리', 혹은 '낮은 자리' 라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이 세상의 세속적인 것인데, 바로 그러한 것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깨달으면 되는데, 그게 바로 성령의 은사인데 말입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을 입으면, 지금의 자기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인 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2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딤전 6: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여기서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게 바로 늘 사랑을 하나님께 받고 있는 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형제라고 경히 여긴다"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형제라고 해서 경히 여기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오히려 더 반갑고, 고맙고, 조심스럽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형제라고 해서 경히 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간성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즉 교회에서 같은 형제니까 서로 친한 것은 좋은데, 하지만 그 형제가 직장에 가서 상관이라고 하면 상관답게 대우를 해줘야 되는데, 그런데 마치 자기 동료처럼 대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리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서로 존중해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4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 글에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 여기에 보면,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라고 하는데,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항상 글을 쓸 때는 그 내용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성질을 내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글의 내용이 충실하고 성의가 있으면, 그것이 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글을 쓴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비록 그게 성질이 조금 나는 글이라고 해도, 그것을 읽어보게 되는데, 그러면 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글을 쓸 때는 반드시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즉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진리인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식으로, 그렇게 상대방에게 봉사하는 입장에서 글을 써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야기를 할 때도 그렇게 해야 되고 말입니다. 아마 '뜨끔' 하는 사람이 좀 있지 싶은데 말입니다. (앗, 뜨거!) 그러면 그 대목에 대해서 잘 모를 때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어릴 때부터 철공소에서 일만 한 사람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그때는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들으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서 조금 안다고 해서 니가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나? 그래, 너 잘났다" 라고 나오면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이 "이 옷을 짠다고 고생을 좀 했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뜨개질을 하는 절차나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러면 서로 대화가 되고, 듣는 사람도 뜨개질에 대해서 좀 배우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래, 니 잘났다. 니 똥 굵다" 라고 나오면, 아무 내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괜히 쓸데없는 논쟁만 일어나고 말입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라고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내용은 빠져버리고 자기만 살아 있으니, 그래서 다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제 7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 우리가 얼마나 낮아져야 됩니까?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릴까요? 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구나. 죄밖에 나올 것 없는 나에게도 주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이런 것들을 주셨구나" 라고, 그렇게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만드신 마음이라는 겁니다.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서 목사, 제발 빼먹지 마라. |
첨부파일 : 11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딤전후(교회를 잊어라)(강의정리)-재정리(8).hwp (52.5K), Down: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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