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디모데전후서[교회를 잊으라!] 제1강
(강의 : 이근호 목사)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세상 일로 분주했지만 디모데전후서라는 말씀이 여전히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움직이기에 그 움직임 속에 삼켜진바 저희들이 어떤 우리의 몸짓이 디모데전서며 우리의 어떤 생각이 디모데후서인지를 말씀과 더불어 사는 이들이 우리를 통해서 다시 한번 말씀이 살아계심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가 하려는 것은 디모데전후서에 관한 겁니다. 디모데전후서는 광주강의 때 몇 년 전에 한 적이 있습니다. 디모데전후서라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성경에 포함이 돼있는데 책에 포함이 됐다할 때는 만약에 디모데전후서가 빠졌다면 그러면 어떤 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게 되는가 봐야 합니다. 성경에 디모데전후서가 없다고 어떤 점에서 완성한데서 누락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디모데전후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교회라는 것이 사람 손으로 세웠다고 여기는 그 교회가 과연 사람 손으로 세운 것이냐, 아니면 주님이 세운 것이냐에 대해서 교회라는 실체를 두고 서로 다툼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세웠습니다. 우리가 전도해서 선교해서 세웠다고 나올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세웠다고 해서 나는 교회라고 인정해줄 마음이 전혀 없다고 나올 것이고.
그러면 인간 쪽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그 원칙만 제공해주시면 우리가 성심성의껏 교회를 세우겠다고 나올 것이고, 하나님 쪽에서는 그 원리원칙을 제공해봐야 너희들이 오히려 교회를 버려놓는다는 겁니다. 원리원칙을 알아서 우리가 교회시킨 대로 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라고 나는 여전히 간주하지 못하겠다고 나와요.
그래서 디모데전후서가 있음으로써 교회 있음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 착각 그런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서신이 디모데전서와 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소위 교회가 있음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교회 말고 다른 것을 쥐고 그걸 있다고 우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검토를 해봐야 되죠.
그래서 주제가 [교회를 잊으라!] 느낌표 하나 박혀있습니다. [교회를 잊으라!] 하면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교회가 있어야 구원된다는 사람 같으면, ‘교회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를 잊으라 하면, 오해하지 마세요. 교회가 없다고 말을 하는 게 아니고 교회를 잊으라는 거예요. 하여튼 지 마음대로 해석해서 이런 것까지 일일이 시시콜콜 다 설명을 해야 되니까
교회를 잊으라는 말은 교회를 만약에 잊으면, ‘내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뒤에 감추어진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 뒤에 교회는 하나의 간판이고 자기 구원에 관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조그만 시골에 슈퍼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슈퍼주인이 오늘부터 가게 문 닫습니다. 그러면 ‘애들 기저귀는 어디서 사노?’ 이렇게 나오죠. 그 말은 슈퍼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슈퍼를 이용했다는 겁니다. ‘당신이 있음으로 참 편리했었는데 당신이 가게 문 닫아버리면 우리는 읍내까지 기저귀 사러가고 음료수 사러 가면 힘듭니다.’라는 말을 하겠지요. 그러면 슈퍼주인이 뭐라 합니까? ‘당신들에게 내가 슈퍼하는 게 그렇게 귀하다면 물건 값 깎아달라는 말 하지 말던지. 당신은 왜 당신 생각만 하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교회를 잊으란 말을 함으로써 뒤에 감추어놓은 것, 내 구원은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해서 이 사람은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교회 존재가 자기 구원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들통 나고 만 거죠. 교회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 구원이죠. ‘나를 사랑해서 나를 구원하겠다는데 교회 제도를 통해서 나한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라고 자기 사랑에서 떠날 수 없다.
이런 경우가 첫 번째 있고,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죠. 두 번째 경우는 십자가마을 경우에 해당되면 좋은데 교회를 잊으라 한다면, ‘교회는 주님이 친히 조성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서 교회를 벌써 잊었습니다. 왜? 교회는 주님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교회를 잊으란 말은 교회는 잊어도 주님은 못 잊겠다는 사람이 그것이 성경에 이야기한, 디모데전후서에 이야기한 교회라 하는 거예요.
교회가 진짜 교회인지, 가짜 교회인지 하는 것은 날마다 교회를 잊어야 되죠. 교회를 잊음으로 말미암아 어제까지 교회는 주께서 어떻게 다루고, 이번 주는 또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다루고, 다음 주 되면 주님께서 어떻게 다룰 것이냐? 여기가 상당히 흥밋거리가 되겠죠. 세 주 전에 두 명 나갔고, 지난주에 세 명 나갔고, 이번 주에 네 명 나갔고. 주께서 참 교회됨에 있어서 단호하시고 어떤 인간의 흥정이나 타협에도 굴하지 않는구나. 역시 주님은 살아 계시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이 친히 조성하신다면 그 다음에 궁금한 것은, 주님이 어떤 식으로 교회를 결과물로 내놓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디모데전후서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게 해서 교회를 친히 조성하신다 이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교회에서 복음을 듣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교회되기 위해서 그쪽은 분리해서 나가줘야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라 하는 것은 주님은 변함이 없지만 교회는 항상 그때마다 발생하는 거죠. 그러면 이건 2번이고, 여러분이 이해됐는지 아닌 척하고 가만있는 것 보니까 됐는지.
지금 1번에 기준해서 교회를 어떻게 만드는가? 여기를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내 구원을 어떻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할 경우에는, 내가 교회를 버릴 수는 있어도 교회가 건방지게 나를 버리면 안 되죠. 그래서 항상 ‘나’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교회라는 것으로 뒤집어씌워야 되겠죠. 이 교회는 항상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느냐 하면, 교인이 열 명이라면, 열 명의 교인들이 각자각자 자기의 구원중심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래서 만약에 A 사람 있고, B, C, D 있는데 A라는 사람이 목사가 설교하게 되면 자기 구원을 확인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생각과 목사 설교와 안 맞는다면 다른 교회 갈 것을 고려할 수도 있어요. 뭐냐 하면, 그 목사의 성경해석의 옳다, 그르다는 누가 판단합니까? 내가 판단하죠. 그리고 A라는, B라는 사람이 한 소리 들은 게 있어요. 우리가 교회라는 걸 들은 적이 있어서 교회가 열 개에요. 각자가 교회 다 돼버리고 말았어요.
이런 경우에 있어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목돈을 냈다면 나갈 때는 목돈을 가지고 나가요. 자기가 교회니까. 문제없잖아요. 간단한 문제에요. 자기 구원중심이니까. 성경책이 있다면 성경해석이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다르겠죠.
그러면서도 이 사람들이 뭘 하느냐 하면, 원칙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 여기 계시면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하기 때문에 묻는 것은 ‘목사님, 어느 교회를 가야 됩니까?’ 성경에 보니까 교회는 한 군데밖에 없는데 두 군데 있다면 ‘어느 교회’가 성립돼요. 세 군데 있다면 셋 중에 하나 교회 가시면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밖에 없다면 한 군데 있는 교회 가면 된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논리상 그래요. 두 군데 있으면 ‘이쪽 갈래, 저쪽 갈래?’가 되지만 한 군데만 돼버리면 어느 쪽에 가던 그것은 간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교회도 한 군데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밖에 없는 교회니까 여기서 이쪽은 딜레마에 빠져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실제로 교회 건물은 많은데 성경은 하나밖에 없다하니까 하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백 개의 교회 가운데 어느 쪽으로 선을 그어서 하나의 노회로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기고, 이쪽 노회 만들 때 같은 신조 또는 같은 신앙고백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어떤 대목으로 작성해야 하나로 뭉쳐지느냐 그러한 생각도 들고요.
어쨌든 간에 그것은 교회를 위함이 아니라 교회는 매개체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교회라는 것이 필요하다. 내 구원이 우선이지 사실은 교회는 사실은 내 구원보다 미치지 못한다고 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최고되는 거죠. 그런데 자기 자신이 최고된다면, 만약에 네 식구라면 교회가 하나밖에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네 사람을 하나로 집약, 모을 수 있는 그러한 장치라든지 방법이 인간에게 나올 수 있습니까? 4가 어떻게 1이 되고, 7이 어떻게 1이 됩니까? 있을 수 없잖아요.
백 명 교인이 하나의 교회 있다. 말은 하는데 백 명한테 물어보세요. 색깔이 똑같은가? 백 가지 생각이 있잖아요. 백 가지 생각인데 어찌 하나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까? 부부가 한 몸이라 하는데 각자 물어보세요. 꿈도 따로 꾸는데 뭐가 한 몸 돼요. 안 되지요. 둘도 하나가 안 되는데 어떻게 백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덮어놓는 거예요. 이것만 덮는 게 아니고 다 덮어놔요. 성경말씀 전부 다 덮어놔요. 아예 콘크리트를 해버리지.
남는 것은 큰소리치는 사람, 돈 많이 낸 사람, 오래된 사람들 빼놓고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뒤에 온 사람이 기 죽어야 얼추 하나에 비슷하게 된다고 잡은 것이 교회에서 인정하는 것이 장로, 목사, 집사 등 직분 이런 것이 여럿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되는 겁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나 후서에 보면 이런 말을 해놨어요. 여자들은 교회에서 조용하고 집에 가서 남편한테 배워라. 그래서 제가 언뜻 생각이 난 게 뭐냐 하면, 군대 이야기 누가 합니까? 남자들이 하지요. 그런데 아내가 하사관 출신이고 남편이 방위출신이라면 아내가 군대 이야기를 해야지요. 아내가 복음을 알고 남편이 복음을 모르면 복음 이야기 누가 해야 됩니까? 그거야 당연히 아내가 이야기해야 돼요. 그걸 왜 남편한데 배워요. 개뿔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자기 전공분야도 아닌데. 남자들이 지지미 굽는데 아는 척 해보세요. 맞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이 만약에 교회를 만들려고 한다면 억지 춘향이라. 억지로 이걸 전부다 쑤셔 넣어야 돼요. 성경말씀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고 그 주동자가 목사가 되어서 무조건 성경말씀이니까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발길로 차는 수밖에 없어요. 교회 자체가. 그런데 이거는 성령에 의해서 만든 교회인지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회인지 분간이 안 돼요.
기존에 있는 단체, 다시마협회, 제주도해녀협회 그것과 교회와의 차이점을 대보세요. 댄싱경상북도지부와 교회의 차이점이 뭡니까? 회비 다 내고. 차이점이 없잖아요. 고양지구바둑동호회 그것과 교회의 차이점이 뭐예요? 사물놀이팀, 한 주에 두 번씩 연습하는 그것과 교회와의 차이점이 뭡니까? 한 주에 두 번 가고, 한 번 가고의 차이인가요? 재단법인, 사단법인과 교회의 차이점이 뭐냔 말이죠. 그래서 교회를 법인화시켜야 된다는 그런 말도 나오잖아요.
결국 교회 자체는, 제가 1번 쪽에서 하는 주장을 간추려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교회는 교회자체로서 의미가 없고 우리를 구원해낼 수 있는 교회라야 교회다.’라는 결론에 도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복음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1번적인 자기 상식적인 구원론으로 이걸 종교라 하죠. 자기 구원론 입장에서 교회나 성경을 봐서는 안 되고 예수님이 친히 교회를 만들어놓고 스스로 나갈 사람 나가고, 들어올 사람 들어오고 조정하는 거예요. 이게 초대교회 정신을 모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런 부부가 있는 곳이 에베소교회라는 겁니다. 자기 집에 모이면서 교회라고 이야기해요. 교회 건물 등록했다는 그런 개념 없어요. 사도행전에서.
사도행전의 교회라 하는 것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성령 받으면 교회고, 성령 안 받으면 교회 아닙니다. 얼마나 성경은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합니까? 어떤 사람은 성령 안 받았는데요? 그럼 교회 안 오면 되는 거예요. 그걸 왜 사람한테 묻습니까? 성령은 누가 주느냐 하면, 성령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줍니다. 원하는 사람에게만 성령을 준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다 준다는 뜻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준다는 말은 인간의 눈치를 안 본다는 그런 뜻이에요. 내가 주겠다는데 네가 왜 나서서 이 사람은 안 됩니다, 저 사람은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 내가 원하는 모든 사람은 다 준다 이 말이거든요. 본인이 성령은 받았나, 안 받았나를 어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다는 자체가 무당 같아. 성령을 왜 받아야 하는데요? 이것 자체가 이미 틀려먹은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 받은 목적이 뭡니까? 아까 나왔지요. 나 구원받으려고 성령 받은 거예요. 그런 성령은 없어요. 성령 받았으니까 구원된 거예요. 성령 받기 위해서 뭘 받으면 되지? 이것은 귀신들이 하는 짓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귀신이 이야기했지요. 어떤 제사장이 아들 일곱 명이 있는데 사도바울이 성령으로 귀신으로 쫓아내니까 자기도 비슷하게 폼을 잡았어요. 그러니까 귀신이 이야기한 거예요.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니 누고?’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축구에서 월드컵예선전 한다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페루와 시합하는데 어떤 아저씨들 몇 명이 반바지 입고 들어온다 말이죠. ‘나는 아르헨티나도 알고 페루도 하는데 당신은 누구냐?’ 조기축구회가 왜 오느냐 말이죠.
적어도 귀신과 악마와 싸우는 대장이 누구냐 하면, 바울 정도는 돼야 돼요. 성령 받은 사람은 누가 아느냐 하면 마귀가 알아요. 결국 이 말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성령 달라는 것은 악령과 성령이 하는 게임에 끼어들 자리가 아닌데 끼어든 거예요. 구원이란 성령께서 마귀를 이겨내시고 그 결과물로 생긴 것이 아까 뭐라 했습니까? 교회는 누구의 결과물이다? 성령은 주님의 영이고 주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해서 생긴 결과물이 악마로부터 구출해낸 결과물 그게 교회잖아요. 그래서 교회 치고 자기 구원받으려고 교회된 사람은 단 한 명도 교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하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성령 받았다고 지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오고 교회는 그런 게 없어요.
애들 사방놀이 할 때 1, 2, 3 밟듯이 그런 것은 지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죠. 인간들이 교회라 하는 것이 일종의 놀이에요. 일종의 자치기. 삐지면 안 나오고 지 마음대로에요. 말도 없이 교회 안 나오는 게 너무 신기해요. 인간이 교회 안 나오는 방법이 없어요. 교회 나올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교회를 들어올 수 있는 방법도 없어요. 교회 등록하는 방법은 있어요. 그런데 그 등록은 하늘나라에서 인정 안 해 줍니다. 이 명찰 단다고 하늘나라 가서 통합니까? 주민등록 명찰해서 이렇게 대면, 무슨 CF에 나오죠. 나도 성인이다, 주민등록증 있다 이 말이거든요.
하여튼 사람들은 연극무대로 만들었어. 놀이터로 만들었어. 특히 우랄알타이어 계통의 한국인들은 옥저, 동예, 부여 이런 데서 제천의식이 많아서, 이번에 용산에서 봤어요. 인간끼리 노는 게 재미가 없는 모양이라. 신과 더불어 노는 그런 재주가 있어요. 단군신화도 그렇고. 한국 땅에 오면 뭐든지 잘 놀아요. 어떤 신이 와도. 그래서 그 바람을 신바람이라고.
그래서 이방 사람들은 신과 더불어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자연에 대한 모든 해석을 거기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여러 가지 예측 불능한 그리고 불안정한 알 수 없는 미래에 암담한 이런 것을 신바람으로써 잠재울 수 있다고 한 겁니다. 그래서 유명한 여자신학자는 신바람을 성령바람이라 해서 신학의 토착화를 주장한 거예요. 모든 교회가 그 여자신학자의 주장을 비웃었어요. 이십 년도 안 돼서 모든 교회가 그걸 다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사람의 행함에다 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락지 않고 성령을 보내야 되느냐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뛰어들 수 없는 갭이 있어요. 이 갭은 성령을 통해서만 갭을 뛰어넘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모든 인간들은 여기서 스톱해야 돼요.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탄력 받으면 뛸 수 있지만 탄력 가지고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스톱에 누구까지 해당되느냐 하면, 놀랍게도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마저 십자가에서 스톱입니다. 왜 하나님이 십자가에게 스톱되느냐 하면 하나님마저 스톱된다면 어떤 인간도 이 갭을 뛰어넘을 수 있다, 없다? 없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스톱함으로 말미암아 뭐가 깨지느냐 하면, 인간들이 생각했던 구원의 구조, 고해 같은 세상, 이승과 죽어서 좋은데 가는 저승, 이승과 저승이라는 종교적인 구조도 여기서 그만 스톱~ 여기서 완전히 뭉개지는 겁니다. 종교적인 구조, 이 땅에서 고생했지만 신의 자비로서 좋은데 가겠다는 이러한 생각도 여기서 그만 끝나버리죠.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안 믿었지만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잖아요. 그것도 이 선까지 스톱. 왜? 인간이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는 십자가에서 스톱, 건너갈 수 없어요. 예수님마저 스톱입니다.
성령께서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켜서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란 수제자는 자기의 생각, 지금 이 땅에서 죽고 주님의 나라에서 산다는 그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가려고 내 목숨 담보로 해서 같이 가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스톱, 스톱하세요. 못 갑니다. 죽어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겠다는 생각도 스톱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죽어서 좋은 천국 가겠다는 게 죄가 돼요. 베드로처럼 예수님 따라서 순교해서 천국 가겠다는 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인간들은 어떤 생각을 해도 죄 아닌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돼있어요. 인간의 의라는 것도, 테레사 수녀가 뭘 어떻게 해도 죄 아닌 것이 전혀 안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 다음에 십자가에서 부활로 건너갈 수 없는 이 구조가 성령을 통해서 온다 했는데 신약에 보면 이 성령은 새 언약의 영이라 했어요. 여기서 무슨 길이 열리느냐 하면, 구약에 있는 모든 성경말씀을 십자가에서 부활, 승천해야 나오는 성령으로 인하여 이걸 근거, 바탕으로 해서 구약의 언약들을 설명할 수 있는 출발점,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새 언약의 완성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부활로 뛰어넘을 수 없다면 구약에 있는 모든 언약이 개입되는 사건에서도 인간의 힘으로 그 갭을 메울 수 있는 그런 자질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기에 나오는 어린양의 유월절이라는 겁니다. 여기 한 무리의 히브리인들이 있고 그들이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무사히 홍해를 건넜다. 어린양의 피니까 어린양의 죽음이죠.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어린양의 부활은 어디 있습니까? 새 언약에서는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새 언약을 설명할 수 있다면, 모든 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이라면 구약에 있는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새 언약을 모델로 해서 그대로 적용된다면 이 어린양이 죽어버렸는데 어린양의 부활이 어디 있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은 어린양, 유월절 보고 죽을 뻔 했다는 거예요. 우리는 장자가 죽었다고 아는 것과 죽을 뻔 했다는 게 달라요.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살아있는 히브리인들의 장자는 자기 집안 소유가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 어린양의 소유가 되는데 죽을 뻔 했으면 어떻게 돼요? 여전히 자기 자식이잖아요. 이게 바로 한국교회가 이야기하는 십자가-부활의 구도에요. ‘아이고, 십자가 아니면 큰일 날 뻔했다.’는 거예요. 이제는 십자가 잊어도 좋다는 거예요. 이미 자기는 살았기 때문에. 이 인간 다 죽었습니다. 광야에서 다 죽었어요.
어린양의 피를 이용한 거예요. 베드로가 순교하겠다고 예수님 따라가겠다는 것은 이 갭을 이해 못하고 자기도 예수님 따라서 여기 있는 베드로 본인이 어디에서 살겠다? 부활의 예수님의 나라에서 살겠다는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겠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제안한 겁니다. 하여튼 마귀는 끝까지 따라가요.
이런 사고방식이 인간들이 죽을 뻔한 사람들이 모이면 그걸 교회라 이야기해요. 그건 교회가 지옥입니다. 진짜 죽었다가 새로운 피조물 된 사람은 이 뒤에서 죽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옛날에 내가 살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나는 죽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고백을 하죠.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렇게 돼있어요. 그리스도가 산다는 거예요. 어르신을 모시고 살아요. 우리는 껍데기고.
우리 안에 우리를 구원하는 어르신이 있어서 나는 죽어도 그분이 살기 때문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마르다, 마리아와 오빠는 완전히 예수님의 쫄다구입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라는 것처럼 죽은 지 나흘 됐는데 살아나라 하면 살아나야 되고. ‘들어가고!’ ‘예.’ ‘나와!’ ‘예.’ ‘붕대 풀어줘!’ ‘예.’ ‘붕대 풀렸어?’ ‘풀렸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와 오빠는 무슨 낙을 볼 게 있다고 살다가 또 죽고. 그래서 또 불러낼지 모르죠. ‘이천 년 전에 죽은 나사로를 또 나와 봐라.’ 그러면 또 튀어나와요. 완전히 좀비야.
내가 죽게 되었다. 그런데 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다. 누가? 내가. 이것은 예수님이 갔던 그 차원, 부활은 위쪽에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 아래쪽에서 놀고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이것은 그 당시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양이 어디에 살아있는지 모르고 그냥 살았다고 우기면서 계속 가니까 여기 애굽에서 살던 죽을 뻔했다고 여긴 사람들이 홍해 건너고 난 뒤에 우리는 이제 살았다고 여긴 그들이 사실은 산 것이 아니고 애굽인으로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딱 두 사람 빼놓고. 여호수아와 갈렙 빼놓고 다 죽었어요. 심지어 모세도 광야에서 죽었는데요.
이걸 찾아야 돼요. 어린양이 지금 살아서 어디 살아있는가? 그걸 찾아야지. 홍해 통과하면 구원받습니까? 집에서 연습하겠다. 백화점 같은 데서 애들 자동문 처음 접할 때 애들은 쇼핑이고 뭐고 그 앞에서 노는 거예요.
그러면 어린양이 그 당시에 어디에 부활돼있습니까? 어린양의 죽음이 시내산에서 언약이란 이름으로, 율법이란 이름으로 주어집니다. 주어지게 되면 이 어린양 안에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죽어야 될 내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너희가 움직인다는 그 내용이 포함된 언약이 주어져요. 그래서 그 언약 앞에서 히브리인들은 뭘 해야 됩니까? 그 언약 따라서 치러지는 제사의 피 앞에서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그 언약이 살아있을 때 언약의 혜택을 계속 받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언약이 신약에서 새 언약이고, 새 언약은 십자가 사건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처음에 유월절은 지나가는 에피소드가 아니고 계속 언약적으로 살아 있잖아요. 영원히 성령 안에서 십자가에서 살아있죠. 그래서 십자가에서 살아있으면서 성령이 주게 되면 지금 네가 살려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려하느냐를 따지면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부활에 집어넣습니다. 우리 육으로 살게 한다면 절대로 성령께서 우리를 천국에 안 넣어줍니다. 우리를 죽이고 누구의 몸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몸이 될 때만 그들은 성령이 인도해서 예수님 계시는 부활의 나라에 갑니다. 그 그리스도의 몸이 될 때 그걸 두 자로 줄이면 그게 ‘교회’잖아요.
무슨 교회를 들락날락합니까? 물론 교회가 등록하는 게 필요해요. 왜냐하면 기도순서 때문에. 청소당번, 식사 조 짤 때. 카레, 짜장면 누가 하느냐 할 때 필요한데 성경에서 교회라는 것은 기존에 낚시회동호회와 달라요. 바둑동호회는 인간들이 각자 살아있어요. 그리고 살아있다는 티를 내야 됩니다. 회비 내세요. 이런 게 되는데 여기 주님의 교회에 회비 받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는 이야기죠. 인간을 죽여 놨는데 무슨 회비를 받아요. 죽여 놨는데 무슨 십일조를 받아요. 죽은 사람이 안식일이고 주일성수가 어디 있습니까? 전부다 사기를 치니까 저희끼리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라. 아무리 통해서 사기는 사깁니다. 띵하고 소리가 나요. 사기니까. 뭐가 캘빈이 어떻고, 루터가 어떻고. 그 사람들이 왜 등장합니까?
조금만 하고 10분 쉬고 어려운 것 합시다. 지금은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근처도 안 갔어요. 이 디모데전후서에서 사도행전과 관련을 지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포인트는 성령이 오게 되면, 걱정돼요. 다 잊어버렸으니까. 성령은 뭐라고요? 성령은 십자가와 부활의 세계로 점프하게 하는데 십자가에서 누구도 스톱했다? 예수님도 스톱했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 끌고 가서 다 죽여 버려요. 모든 인간이 십자가에서 죽은 거예요. 그 다음에 부활의 세계라는 것은, ‘나는 천국을 고대했습니다. 나는 천국 가려고 모든 걸 버렸나이다.’ 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베드로도 그런 이야기했지요. ‘주여, 우리가 주를 위해서 모든 걸 버렸습니다.’ 모든 걸 버렸다는 인간이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합니까? 하여튼 책임 없는 말을 마구잡이로 튀어나와버려요. 물론 말 안 하고 가만있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요. 이왕 가만있어도 구원 안 되는 것 속에 있는 할 말 다하면 좋지요. 우리 이상규 집사님처럼 댓글 쓰고 싶으면 다 쓰고. 어쨌든 간에 그것과 구원은 아무 상관없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네가 어떤 일을 했던 간에 죽은 자로 간주하고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면 죽을 너희들도 살리시리라 하고 건진다 이 말이죠.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 하잖아요. 그 앞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했잖아요. 이렇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중심지가 달라지면서 언약 땅 개념이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게 골로새서 3장에 나와요.
그러니까 성령이 밟고 지나가면 모든 개념과 해석이 예수님 안목으로 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성령이 안 온 것을 그걸 육이라 합니다. 육은 십자가로 달아버려요. 어떤 것도 십자가 앞에서 육 되지 않는 것이 없어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저주 받은 것처럼 예수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도 하나님께서는 육이냐? 저주해줄게. 육이란 이유 때문에 저주를 받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와야 영이 돼버리면 그때부터 예수님의 증인이 돼버려요. 예수님의 증인이 되면서 여기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 이 땅에서 와서 예수님의 안목,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그 시선과 동일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땅의 개념, 하늘개념, 율법개념, 교회개념, 남녀개념, 인간관계 모든 것이 예수님 안목으로 다 달라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했죠. 결혼 안 했나? 그냥 혼자 살아라. 괜히 고생하지 말고 혼자 사는 게 제일 편하다. 혼자 살 때 주를 위해 섬기라. 복음 때문에 마찰 있다면 갈라 서버려라.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지는 결혼 안 했으니까 편하게 이야기하지. 사도 바울은 너무 주관적이야. 이 사람이 얼마나 건방지게 이야기하는지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럼 베드로는? 그럼 요한은? 너만 사도가? 나는 가수다. 니만 가수가. 사도 바울은 너무 주관적이고 너무 독단적이고 지밖에 모르고. 샌더스란 사람이 그렇게 비난하고 신학자들이 많이 동조를 하고.
그래서 10분 쉬고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안목이 십자가 지기까지 어떤 변화를 일으키느냐? 그 변화가 오늘날 우리들의 변화로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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