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디도.빌레몬

딤전후제9강110802

아빠와 함께 2013. 5. 8. 08:23

 

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딤전후(교회를 잊어라!) 제9강(셋날오전1)
 
                                                           2011,08,02  강의 이근호, 녹취 정석훈

디모데전서나 디모데후서 뒤편에 가게 되면 여러 가지 교회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미리 디모데후서 3장 1절을 보면 "말세에 고통 할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고통입니까? '자기 사랑'이 고통이냐는 겁니다. 오히려 원했던 바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것이 어떻게 고통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5절까지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딤후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 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에 말씀에 나오는 것을 제가 숫자로 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를 사랑하며,
(2) 돈을 사랑하며,
(3) 자긍하며,
(4) 교만하며,
(5) 훼방하며,
(6) 부모를 거역하며,
(7) 감사치 아니하며,
(8) 거룩치 아니하며,
(9) 무정하며,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11) 참소하며,
(12) 절제하지 못하며,
(13) 사나우며,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15) 배반하여 팔며,
(16) 조급하며,
(17) 자고하며,
(18) 쾌락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

◈ 만약, 19 항목을 다 지키지 못하면?

여기에 나오는 19가지 항목들 중에 두 세 가지를 빠뜨리면 지옥에 갑니까? 실컷 십자가와 그 믿음을 이야기했다가, 끝 부분에 와서는 이것들 가운데 한 두 개를 위반하면 본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하면,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와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너 여기에 있고, 나 여기에 있다" 라는 식으로, 무엇을 상정하고 늘 무엇을 규정하는고 하면, "나 여기에 있고, 그 다음에 말씀 책이 있다" 라고 해서, 즉 여기에서 저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그렇게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시도가 수련회를 마치고 난 뒤까지 계속 그대로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 말씀은, 와서 박히는 것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즉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라고 새삼스럽게 물으신다면, 말씀이 여러분 속에 박히는 것이 새 언약의 혜택이고 묵시의 혜택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한 역사하심이라는 겁니다. 말씀이 박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이 박히게 되면 어디서 잡을 것이 없는데, 즉 지킬 것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속에 말씀이 박히게 되면 말입니다. 말씀이 뿜어져 나오면 여러분들은 그 말씀에 따라 저촉을 받게 되어있는데, 즉 구원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새삼스럽게 말씀을 지키고 말고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조금 전에 말한 19가지를 지키고, 즉 "이것은 지키고, 저것은 덜 지켰다" 라고,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영원히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경건의 연습을 한다고 하면서, "이것을 지키고, 저것을 지키고, 이런, 이것은 빠뜨렸구나. 이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라는 이런 식으로 경건의 연습한다고 해서, 그게 경건의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주의 말씀이,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

왜 그런고 하니, 말씀이 이미 박혀 있기 때문에, 말씀이 와서 우리에게 박혀 있어 버리면, 우리는 그 말씀의 효력을 날마다 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 보면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오는데 말입니다. 즉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시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말씀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그게 아무리 19가지가 아니라 30가지, 50가지라도 말씀이 오는 것에 대해서 "반갑다 말씀아!"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려고 하면, 말씀이 오는 것이 겁이 나는데, "또 무엇을 지켜야 되는데, 또 또 또"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또 다시 무엇을 지켜야 된다고 겁을 내고 있다는 겁니다. 즉 미리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말입니다.

◈ 반갑다, 친정 어머니 !!

제가 아는 분의 딸이 결혼을 했는데, 서울에 사시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사위와 딸이 모두 바쁘다는 겁니다. 자녀가 둘인데 키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친정 어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오셔서 전적으로 살림을 해주는데, 그것을 '생계형 살림' 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때는 친정 어머니가 그렇게 반가운 겁니다. 부인은 11시에, 그리고 남편은 컴퓨터 회사에 다닌다고 하는데, 12시가 넘어서 퇴근을 하는데, 서울은 다 그런지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물론 자녀는 낳았기는 낳았는데, 그런데 얼굴을 맞댈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ㅋㅋ).

아무튼 밤에 늦게 퇴근하고 아침에 일찍 출근해야 하니, 속옷은 아무 곳에다 던져놓고, 양말도 마구 던져놓는데, 그래도 친정 어머니가 다 세탁해주고 정리해주는 겁니다. 그때는 친정 어머니가 전혀 잔소리꾼이 아닌데, 즉 "야야, 오늘은 빨래가 너무 많았다. 슈퍼타이가 다 떨어져가니 사오너라. 그리고 아이가 목욕을 해야 되는데, 시간을 내서 좀 같이 시키자" 라고 해도, 그런 잔소리조차도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꿀 송이보다 단 말씀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이런 잔소리 저런 잔소리를 하시면서, 비록 우리는 이렇게 허접스럽고 부족하지만, 십자가의 피가 고마움을 느끼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나 여기 있고, 말씀 저기에 있고, 그러니 얼마나 지키면 내가 훌륭해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안과 초조를 유발시킨다는 말입니다.

◈ 가야산 밤중에 비가 내려도!!

조금 전에 식사할 때, 옆에서 어떤 분과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거기서 오늘 강의할 힌트를 얻었다는 겁니다. 그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밤사이에 비가 왔는데 자기는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왜 알아야 됩니까? 밤에 비오는 것을 말입니다. 바로 그 비오는 이야기가 오는 것이 어디에 나오는고 하면, 디모데후서 2장 9절에 있다는 겁니다.

(딤후 2:9)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가야산에 비가 오는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허락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어지는 것이 믿음이 아니냐는 겁니다.

주님께서, 즉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우리 속에 십자가의 피를 박아놓고는, "십자가의 피를 왜 흘려야 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잔소리를, 19가지 잔소리를, 아니 수백 수천 가지의 잔소리를 하시는데, 그런 가운데서 용서의 단비는 촉촉하게 우리 속에서 계속해서 작렬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까? 이게 믿음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밤중에 비가 주룩주룩 왔는데, 그런데 그렇게 비온 것을 자기가 모른다고 하면, 그러면 비가 오다가 그쳐야 합니까? 즉 "뭐 알아주지 않는데, 가야산에 비는 안 내릴 거야"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매입니까? 매이지를 않습니까? 전혀 매이지를 않고, 지금도 활동하시는데, 그 중에서 한 가지가 "나는 너를 창세 전에 택해서, 내가 죽은 십자가의 피로 건지겠다" 라는 것인데, 그 말씀이 촉촉하게 우리 심령을 지금도 적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보고 겁나서 도피하거나 도망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갑다, 말씀아!" 라고 해서, 언제나 말씀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바로 그러한 사람이 묵시의 세계를 아는,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동양철학은, 너무나 우아한 자태로 !!

그렇다면 반대로, 육적인 경건의 훈련은 어떤 것입니까? 어제 동양철학을 너무 길게 하지 않았느냐고, 최측근(?)이 그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이야기하기에도 귀한데, 왜 동양철학을 그런 시간에 그렇게 길게 이야기를 했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런 잔소리가 저에게는 꿀맛인데 말입니다(ㅋㅋ).

그것이 바로 육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경건의 모든 훈련, 즉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착함과 선행이, 그 동양철학을 보면 놀라서 자빠질 정도로 고상하기 짝이 없는, 그런 우아한, 너무나도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정갈하게 다듬는 모든 훈련들이 거기에 다 나와있는데, 그러면 그들이 구원을 받습니까? 택(턱?)도 없는 소리인데, 그들과 성도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다 이루심'이 그들에게 없고. 그냥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러니 행함주의자들과 똑같은 것인데, 즉 어떻게 해서든 구원을 받으려고 몸부림을 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착한 것을 다 듣고, 거룩한 것을 다 알아서, 자기의 행함을 동원시켜서 그것을 하나하나 자기 주체의 것으로 모으는 작업, 즉 "나 여기 있고, 말씀이 저기 있으니, 저 귀한 말씀을 내가 지켜서 내 것으로 삼으면, 그런 꽃다발을 만들면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겠는가?" 라는 아이디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동양철학인데, 즉 성령이 없는 육적인 경건훈련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센 말씀이 오면 도망쳐버리고, 그러면서 "나중에 지켜야지" 라고 하면서, 또 지킨 것을 가지고는 남과 비교경쟁에 나서고,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 '말씀' 인가? '나' 인가?

오늘 수련회를 끝내면서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말씀이냐? 아니면 나냐?" 라는 것인데, 즉 "말씀을 포기할래? 나를 포기할래?" 라는 겁니다. 결혼을 포기하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여기서 '나' 포기하면 말씀이 달게 느껴질 것이고, 물론 '나'를 포기하지 못하면 말씀이 귀찮고 부담이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씀을 전했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의 일행을 떠난 사람은 결국 무엇을 찾아 떠났습니까? 때려죽어도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자기의 행함은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즉 "나는 십자가에서 죄인이 되기 싫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디모데후서 4장 10절을 보겠습니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 갔고, 갔고, 갔고 !!

여기에 나오는데, 이것은 사도바울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즉 "나의 착함과, 나의 선행과, 나의 행함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겠다" 라는, 바로 그것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 아니고 싶다" 라는 겁니다. 즉 "나는 내 나름대로의 잘남을 나의 보람으로 삼고 내 인생을 버티겠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떻게 예수님의 나라인 천국에 가겠습니까? 지(자기?) 나라에 간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물론 그 나라는 지옥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말입니다. 

여기에 10절에 보면,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라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라고 하는데, 이것을 보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김응용 감독이 옛날에 해태 타이거즈를 맡았을 때, "종범이도 가고, 동렬이도 가고" 라고 했는데, 즉 지금 팀을 꾸려서 시합을 해야하는데, 차 떼고 포 떼고, 그야말로 제대로 쓸만한 선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제 아무리 사도바울이 성령으로 전해도, 설령 성령의 할배라고 해도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들이 분노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고 그렇게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결코 자기들의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것을 누가 말리겠느냐는 겁니다. 

◈ 십자가 사건이 과거완료인가?

그렇다면 왜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는고 하니, 바로 이것인데, 즉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이미 과거에 완료된 사건인데, 즉 과거에 한 번 있었던, 그렇게 한 번으로 끝나버리는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과거의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의 경우에는 "내가 다 이루었다. 오늘밤에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면, "아하,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구나" 라고 하겠는데, 강도가 실제로 낙원에 갔으니 그것은 혜택을 입어서 좋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장에 있던 강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본인이 아니니, 아무리 예수님께서 완성을 했다고 해도, 이미 역사가 지나버린 우리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미완료로 남는다는 겁니다. 즉 여기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라고 해도, 그것은 옛날에 다 이루었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우겨버리면, 그만 시간적인 갭이 성립되고 만다는 겁니다.

◈ 성령께서 '다 이루었다' 라는 시간적 갭을 !!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성령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의 논리적인 메커니즘, 즉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을, 우리가 건너갈 수 없는 그 갭을 넘어서 십자가를 현재 2011년 8월로 옮겨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미완료가 없어지고, 그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의 남아있는 정지작업 중의 하나가 곧 창세 전 예정된 자를 건지는 작업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미완료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성령을 통해서 지금도 적용된다는 것이 믿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19가지가 아니라 5,000가지라고 해도, 그 다 이루심의 일환으로 말씀이 그 사람 속에 박혀서 발휘되고 사랑이 방출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럴 때, 그 사람은 자기 행함을 따로 챙길 필요가 없는데, 그런 선물을 두고 '믿음'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 이루어졌다고 하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분명히 성경말씀을 다 지키지 못하는데, 디모데후서의 19가지 중에 하나도 못 지키고, 또한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에 환장해서 로또를 사는 판국에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 자긍심아 없으면 사람이 무슨 재미로 살아갑니까? 교만의 경우도, 그것은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데, 겸손의 티를 낸다고 해서 교만이 아닙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울어도, 돌아서면 자만인 것을 !!

지금 혹시 '레위기 안의 그리스도라는 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책을 만들면서 빠트린 것이 하나 있는데, 수련회를 개최한 연도가 여기에 나와있지 않다는 겁니다. 작년 여름이니까 2010년인데, 최측근의 아주 예리한 지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ㅋㅋ).

여기에 보면,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울어도 돌아서면 자만인 것을!" 라고 되어있는데, 즉 그때는 무엇을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제는 주를 위해서 자기 목이라도 내어놓을 것만 같았는데, 그런데 돌아서면 그것도 과거에 아주 경건해 보였던 것을 챙긴 하나의 자만으로 남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인간이 언제 완벽해져서 구원을 받겠습니까? 돌아서면 자만인데 말입니다. 도대체 자기 눈시울이 뜨겁도록 울었던 것을 왜 믿느냐는 겁니다. 자기 눈시울이 뜨겁도록 울었던 그 사건을 믿을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십자가 사건을 믿을 겁니까? 도대체 어느 쪽이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시울이 뜨겁도록 울었던 것은 자기 사건이고 자기 행위이지만, 하지만 십자가 사건의 근처에 '나'는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자리 없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인데,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있었다고 하면 또 그것을 자랑했을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만약에 있었다고 하면 다음과 같이 했지 싶은데, 즉 "제가 '주여, 오늘밤에 저를 생각해주세요' 라고 할 때, 주님께서 아주 거룩한 음성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여러분은 그 음성을 못 들어보았지요? 아주 매끄러운 음성으로 '니가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자랑한다고 돌아다니면서 간증집회하고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곳에 없었던 것이 참으로 천만다행이라는 겁니다. 만약 그곳에 있었으면, 그날 밤에 자기가 낙원에 갔다는 것을 자랑한다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을 것이란 말입니다. "야, 낙원이 참 멋지데!"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 사로잡힌 바 되어 !!

디모데후서 2장 26절을 보면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라고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진리가 오게 되면, 즉 진리가 우리에게 자극이 되면, 그냥 "나 이렇게 있고, 하나님은 저곳에 계시고", 그렇게 3미터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쳐들어와 버리면, 그때부터 우리는 사로잡힌 바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로잡힌 바가 되어버리면, 비로소 그때부터 우리는 무엇이 잘못이며,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우리의 믿음과 행함에는 어떤 오류가 있는지, 그렇게 새롭게 알아가는 즐거운 시간, 기쁜 시간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딤후 2: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그러니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이야기하신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너, 구원을 받아라" 라는 게 아니라, "이미 너는 구원이 되었어" 라는 과거의 되었음을 지금의 되었음으로 이야기할 때, 그것을 과거지사로 생각하지 않고,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믿어지는, 그러니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그런 놀라운 것이 우리에게 찾아들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에게 있어서 찾게 되는 게 아니라, 이미 성령이 함께 계시냐고 하는 그 여부를 찾는 것이란 말입니다. 즉 "과거에 일어난 일이, 미래의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라는, 그것이 시간을 뛰어넘어서 믿어진다는 것, 그것은 절대로 우리 솜씨, 우리 능력, 우리 경건의 훈련결과가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로잡고 지배했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이야기를 지금 디모데전후서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이미 말씀은 '나' 속에서 피어나기에 !!

일단은 그렇게 보시고, 어제 미처 다하지 못한 것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4장 9절부터 하겠는데, 제가 미리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수련회가 끝나고 돌아서면 또 "말씀을 어떻게 지키지?" 라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말씀이 자기 속에서 피어나고 있는데, 그런데 말씀이 저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해서, "바빠서 성경을 못 보았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엇을 못 본다는 겁니까? 말씀이 자기 속에 이미 들어있는데 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성령과 더불어서 새언약이 들어오고, 그렇게 새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모든 말씀이 택배로 해서 그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들어있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차후에 성경을 보게 되면, "아하, 그때 그 일이 이런 의미였구나" 라고 하면서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가운데서,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릴 수 있는, 바로 그런 구조와 영역 속에 포함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디모데전서 6장 9절과 10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여기 9절에 보면 "부하려 하는 자는 시험과 올무에 빠지게 되나니" 라고 하고, 또한 10절에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라고 하는데, 과연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이 즐겁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이런 소리가 즐겁고 기쁘다는 겁니다. 표정들이 좀 이상한데, 아닌가요? 물론 '즐거워라' 라고 요구하는 것은 행함이지만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여,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제가 평생 동안을 느낍니다. 이렇게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살면 된다는 겁니다. 편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 조금 있다가 어느 정도 수익이 되고 난 뒤에 지키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미루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즐겁게 말입니다.

◈ 그냥 주세요. 감사합니다 !!

그래서 누군가 불의한 돈을 주면, 즉 "이것을 받고 눈감아 주소" 라고 청탁이 들어오면, 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하면 되는데, 즉 "아저씨,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보면, 돈을 사랑하는 게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접니다. 그러니 주세요. 괜히 안 받는다고 해서 그냥 가버리면 2년 동안은 밤에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면 그쪽에서 "아니,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 했는데, 왜 줍니까?" 라고 하면서 가져 가버리면, "아하, 이것도 주의 간섭이구나" 라고 하면서 감사하고, 그런데 주면 눈치를 봐서, 검찰에서 조사가 들어오면, 기한 전에 돌려주면 되고 말입니다. "그건 외상이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다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함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나는 십자가 마을에 속한 사람입니다. 꺼지소 !!

그런데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여기서 가상 에피소드를 구상해보면, 즉 어떤 사람이 "이것을 받고 눈감아 주소" 라고 하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십자가 마을에 속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당신은 디모데전서 6장 10절도 모릅니까? 가져가소" 라고 해놓고 동네방네에 자랑하는 겁니다. 자기는 큰돈을 거부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지금 누구를 믿는 겁니까?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닌데, 자기가 참하게 행동했던 자기 행동을 믿는데, 그런데 거기에 붙는 게 있다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했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은 죄에 대해서 책망하는 것인데, 즉 "그것도 자만이야. 돌아서면 자만이야"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우리의 행함을 자랑할 그 모든 씨를 다 말려버렸다는 겁니다. 완전하게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빠져 나올 수 없는 이 역사적 환경 속에서, 우리를 거뜬하게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디모데전서 6장 15절과 16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 말씀이 너를 키워나갈 것이다 !!

이 말씀은 그 눈초리와 관심사가 마치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은데, 그게 무엇인고 하면, "내가 이 땅에서 어떤 행동하느냐?" 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은 전혀 그분의 빛 앞에서 흔적조차 없어지고, 다만 빛 되신 분이 우리에게 늘 잔소리하시는 그 말씀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미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너를 키워나갈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너를 계속 만왕의 왕이신 주를 바라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할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도 역시 우리는 달콤한 꿀처럼 반갑게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게 아니고, 이미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즉 이미 성경책이 우리 속에 있는데, 즉 성령께서 오실 때 이미 그 모든 말씀과 더불어서 우리 속에 박아놓으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하면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태에 이런 말씀이 생각나거든, 디모데전서 6장에 있는 말씀인 줄로 알아라" 라고 우리에게 내비추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해석하라" 라는 말은, 오직 성령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성령이 없는 자들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 키포인트 - 역사적 해석과 묵시적 해석을 같이 !!

이번 강의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것들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여러분들이 꼭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성경말씀을 전할 때는 항상 십자가에서 역사적 해석을 먼저 이야기하시고, 그 다음에 맞은편에 보이지 않는 묵시적 해석을 같이 이야기를 해주어야만, 그 다음에 말씀이 나온다는 겁니다.

◈ 십자가는, 행함의 끝이자 구원의 시작 !!

왜냐하면, 우리 존재 자체가 묵시적인 성령을 받았기에, 놀랍게도 두 가지 모두 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속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역사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행함인데, 그것은 무엇을 행해도 십자가에서 스톱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건너갈 수 없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건너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행함의 끝은 십자가인데, 또한 구원의 시작도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끝과 시작 중간에 십자가가 있어서, 성령께서는 그 십자가로 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피로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식으로, 성령께서는 그렇게 일을 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19절에 보면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바깥쪽에 참 생명이 있는 것이지, 이 세상 안에는 생명이 없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입니다.

(딤전 6: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세상을 사랑하는데, 왜 사도바울을 떠나는가?

그래서 조금 전에 살펴본 4장 10절에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라는 것이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세상을 사랑하는데 사도바울을 왜 버립니까?

(딤후 4: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사도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어디에 효과가 없었다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고 있는, 즉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데 사도바울의 말이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똑똑한 데마는 눈치를 챈 겁니다. 즉 "출세를 위해서 사도바울과 함께 할 이유가 없구나. 사도바울 저 놈은 내가 세상에서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켜줄 만한 위인이 아니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아주 똑똑하게 감을 잡았는데, 제대로 보았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은, 자기는 주님께 사로잡혔기에 죽어도 좋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있는 것은 말씀 때문이지, 자기를 위해서 말씀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이 달지도 않고 또 고맙지도 않은 사람들에게는, 사도바울의 말에 대해서 동의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무엇을 가져야 됩니까? '나'만의 것, '내'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 '내'의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장해줄 수 있는, 그런 '나'만의 것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과 동행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디모데후서에 들어가겠는데, 1장 9절을 보겠습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이것도 이전에 했는데, 영원한 때 전부터, 즉 창세 전부터 무엇이 있었다는 겁니까? '예수 안'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즉 창세 전에 있던 예수 안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예수 안에 집어넣어서, 창세 전에 마련된 모든 것에 우리가 참여하도록, 그렇게 성령께서 모든 조치를 다 하셨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데 말입니다(ㅋㅋ).

그런데 여기에 반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것은, 창세 후에 산이 있고 창세 후에 물이 있으니까, 창세 후에 이 세상에 있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그 바깥으로는 나가지 말자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불교 쪽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물론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1장 9절을 보면 처음부터 아예 바깥으로 나간다는 겁니다. 즉 "창세 후를 넘어서, 창세 전에 있었던 예수 안이 그대로 이동해 와서, 지금 성령을 통해서 창세 전 예수 안의 그 상황에다가 너희를 집어넣었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행함으로 이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나타날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12절을 보겠습니다.
 
(딤후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 십자가의 수치를 몸소 당하심으로 !!

여기서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라고 하는데, 고난이 왜 부끄럽습니까? 고난이 부끄러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실패자나 수치스러운 자로 분류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즉 이 땅에서 분명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은 수치스럽고 저주받은 모양새라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수치 중에서 가장 큰 수치가 무엇인고 하면, 바로 십자가 죽으심이란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몸소 그 수치를 담당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빌립보서 2장에서는 '제일 낮은 자리' 라고 하는데, 즉 제일 높은 곳에 계신 분이 제일 낮은 자리까지 일부러 내려오셔서 사람의 종이 되었는데, 그렇게 자기를 치는 사람들의 종까지 되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둔다는 말입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보면, "주님께서 연약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강자도 아닌, 권력자도 아닌, 너무나도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즉 연약함의 종결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연약해도 그렇게 연약할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만든 능력자가 가장 가난하게 되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 가난하게 되심을, 그것마저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가장 낮은 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 능력의 출처가 달라 !!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강한 것을 원하고, 돈이 많은 것을 원하는데, 그런데 만약에 가난한 것이나 비참한 것을 원한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다른 능력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 다른 능력과 매치가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가장 낮으신 분으로 오셨고, 그 낮으신 분이 도리어 우리를 섬기고 구원한다는 사실을 알도록 성령께서는 다리를 놓고 주선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승리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그 능력이, 자기 능력이 아닌 다른 능력에서 나왔음을, 즉 출처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 춘향전의 경우에 !!

성춘향의 위대함은 바로 성춘향의 모친인 '월매' 때문인데, 그 월매와 성춘향의 차이점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성춘향의 모친, 즉 기생 월매는 거지꼴의 자기 사위를 보고 얼마나 구박을 많이 주었습니까? 감옥에 가서 면회를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월매는 자기 것만을 생각하는데, 그래서 이도령을 보고 "당신은 왜 내가 원하는 사윗감이 못되는가?" 라고 하면서 구박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의 위대성은 그것을 뚫는데, 즉 "당신의 어떤 모습이라도,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월매가 아닌 춘향이가 말입니다. 그런 사랑이 바로 가난보다 더 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비록 가난한 가정에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성춘향의 이야기가 끝났다면, 성춘향이 고전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흐지부지한 전설의 고향에 들어갈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드디어 둘 다 거지꼴이 되어서, 이제 성춘향은 그만 죽고, 이도령은 과거에 낙제해서 거지처럼 돌아다니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마 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9회말 2아웃에 투쓰리에서 역전홈런을 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잘 되니, 그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보고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음흉하냐는 겁니다. (방자전도 있는데, ㅋㅋ)

◈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이 십자가를 미처 통과하지도 않고, 뒤로해서 '빙' 둘러서 부활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의 종교적 욕심에 불과한 것이지, 전혀 창세 전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아니, 낙타가 무슨 바늘구멍에 들어갑니까? 낙타는 비켜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을 먼저 보고는 "아, 승리했네" 라고 한다면, 그런 반칙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표도 내지 않고 극장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시켜주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믿는가? 죽으심을 믿는가? 그 의미를 믿는가?" 라는 것이 표가 된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의 피가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결국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얼마나 위대하게 만들 것인가?" 라는 것에 탐을 내고, 거기에 올인을 했기 때문에, 교회는 성경해석을 전부 그런 식으로 왜곡해서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끝까지 암행어사가 되지 못하고, 평생을 거지꼴로 살았고 말입니다.

이제 디모데후서 2장을 보겠는데, 4절입니다.

(딤후 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보면,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보다도 말씀의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이제 8절을 보겠습니다.

(딤후 2:8)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 '다윗의 씨'에 대해서 !!

여기에 '다윗의 씨'가 나오는데, 즉 예수님의 죽음을 무엇과 연관시키는고 하면, 다윗의 씨와 연관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알고는 있어도 막상 하려고 해도 정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이 이 '다윗의 씨' 라는 겁니다. 물론 책에도 제대로 나와 있는 데가 없고, 즉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다윗의 씨'를 간편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다윗의 씨는, 과거에서 내려오는 씨가 아니고, 미래에서 먼저 주어진 씨라는 겁니다. 그것이 다윗의 씨의 특징이란 겁니다. 즉 시간세계를 무시해서 태어난 분이 다윗의 씨가 된다는 말입니다.

대대로 부모가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이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낳는 것이, 과거에서 흘러서 지금에 이르는 역사적인 사슬이라고 하면, 이제는 그 사슬이 역(逆)으로서 부정을 하면서, 미래에서 거꾸로 흘러 들어와서 태어난 씨가 곧 다윗의 씨라는 말입니다.

◈ 서로 연결점이 없어 !!

그러면 미래의 씨와 다윗의 씨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는고 하니, 연결점이 없다는 겁니다. 연결점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실제로 육적인 다윗의 자손인 솔로몬에서 미래로 가는 씨에서는, 그것이 끊어진 다리라는 겁니다. 마치 중국의 고속철도와도 같은데 말입니다. 가보았자 끊어지게 되어있는데, 어디서 끊어졌을까요? 그게 마리아에게서 끊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의 씨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사실은 하나인데 말입니다. 그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다윗의 씨니까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메시야가 온다는 생각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끊어진 사고방식, 즉 "이런 역사적 흐름으로서는 절대 너희들이 구원될 수 없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런 역사성을 이야기해서는 구원하고 상관이 없느니라. 이것이 곧 죄니라"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의 씨가 예수님까지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망하고, 망하고, 결국은 끊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아무튼 끊어져 버렸는데, 그러니 결국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메시야는 끊어진, 즉 악마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마치 등산을 할 때 실컷 갔는데 절벽이 있는 것과 같은데,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그리고 길을 잘 모르고 차를 몰고 갔는데 옛 도로가 되어서 낭떠러지라는 겁니다. 그러면 최측근에게 잔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당신이 운전할 때 알아보았어. 지도를 보고 가라니까, 그렇게 안다고 해놓고 알기는 개뿔을 알아. 내가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 제대로 되는 게 없어" 라고 말입니다(ㅋㅋ).

◈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 !!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라" 라고 하면, 그건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증명할 길이 없으면, 그러면 무엇을 보고 믿으라고 하는 겁니까? 믿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성령이 오시게 되면 믿어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니 말입니다.

그게 문제인데, 증명이 안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신학자체가 끊어질 판인데, 증명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증명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안 됩니다" 라고 하니까, 계룡산에서 내려왔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계룡산에서 내려오면 다 도사입니까?

"왜 예수님이 다윗의 씨인가?" 라는 것을 소급해서 설명하면, 그러면 솔로몬은 다윗의 씨가 맞습니까? 아닙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다윗이 밧세바와 함께 육으로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솔로몬은 메시야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물론 솔로몬 저축은행은 몰라도 말입니다(ㅋㅋ).

아무튼 이 솔로몬은 다윗의 씨가 되지를 못하는데, 그렇게 솔로몬이 다윗의 씨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이 바로 '선지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인간적인 혈통이나 이 세상의 역사가 아닌, 정말로 오실 분을 기다리는데, 장차 오실 분을 말입니다. 즉 선지자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분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 에스겔 37장 - 다윗의 씨는 '여호와' !!
 
그래서 에스겔 37장을 보면, 거기서 다윗의 씨가 누구인고 하면, 그것은 바로 '여호와' 라는 겁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다윗의 씨를 통해서 오신다는 말입니다. 즉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겔 37:27)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그렇다면 그때부터는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고 하면, 사람들이 그동안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했던 그 모든 것은 완전 묵사발이 되어버리고, 그냥 주면 구원이 되는, 그냥 그분의 의가 우리의 마음속에 박혀버리는 것으로, 그것으로 구원을 '다 이루었다' 라고, 즉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생성되는 방식으로 구원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 모세 형님은 불 수레를 타보았어요?

제가 지금 오버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산에서 엘리아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엘리아와 모세가 수고한 것을 다 아는데, 물론 아브라함도 수고했고 말입니다. 하지만 엘리아나 모세가 자기가 수고한 것을 자랑했습니까? 변화산에서 말입니다.

엘리아가 모세를 보고, "형님, 저를 몰라요? 엘리아입니다. 모세 형님은 불 수레를 타보았어요? 뜨거워서 혼났어요. 신은 났지만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자랑했습니까? 그러면 모세가 "니가 지팡이로 홍해를 갈라 보았어? 갈라 보았어?" 라고 하면 그러면 다시 엘리야가 "형님은 물을 부어놓고 불을 내려 봤습니까?" 라고, 변화산에서 그런 간증하고 있었습니까?

◈ 예수님, 피를 언제 흘립니까?

그게 아니고 두 사람이 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는데, 즉 "예수님, 피를 언제 흘립니까? 피를 언제 흘립니까?"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피를 흘려야 자기들이 사니 말입니다. 불수레를 타든, 홍해를 가르든 간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주셔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두 선지자의 삶은 장차 예수님의 피 흘림을 보여주는 시범조교의 역할이지, 구원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닌데, 즉 이삭을 바치는 그 행위가 전혀 구원을 해주는 게 아니고, 이런 행위를 해야 되는, 장차 어떤 분이 오셔서 제물이 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제물이 될 그분이 오셔야만 말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알아서 제물을 바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 제물의 자리에 가셔야 효과를 본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어떤 구원도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어있는 것이지, 우리 몸이나 우리 행위나 우리 헌금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성령의 은혜로 무엇이 어떻고 어떻고 해도, 그런 것들이 끼어들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을 받으면 그렇게 어떻고 어떻고 하는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런 자기의 헌금하는 행위가 절대로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오직 십자가만 영광이 된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헌금을 한다는 겁니다.

◈ 그것도 역시 죄입니다 !!

흔히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헌금을 하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는 사람은 "그건 오해이고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그런 것이 은혜가 아니고, 진짜 성령을 받으면 헌금하는 행위도 십자가 앞에서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죄일 뿐임을 깨닫게 합니다" 라고 일러주고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성령이 없으면 자기 행위를 주어 담는데, 즉 "나 여기 있고, 말씀은 저기 있고, 내가 은혜로 저 말씀을 지키면, 그렇게 해서 꽃다발처럼 모이면, 그것이 나로 하여금 구원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해줄 수 있는 증거물이 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아이디어, 그러니 절대로 무엇을 포기하지 못합니까?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려되는 게 무엇인고 하니, "그러면 성령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까?" 라고 하면, 물론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뭔가 돌발적으로 또 다시 되풀이되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앞에서 "그것도 죄야" 라는 것인데, 즉 눈시울이 뜨겁도록 우는 것도 십자가 앞에서 가증스러운 것이란 말입니다.

◈ 울긴 왜 울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게, 울긴 왜 울어. 신랑이 함께 있을 때 울라고 했어? 웃으라고 했지" 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그렇게 울고 난 뒤에 한번 웃는 겁니다. "하하하, 울은 것은 미안. 이렇게 기쁜 것을 감사할 줄도 모르고, 또 내가 나에게 너무 동정하다 보니 그랬어. 내가 의인인데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다시 뭐라고 하십니까? "니가 언제부터 의인이었는데? 니가 무엇 때문에 의인이 되었는데? 또 니가 새삼스럽게 그렇게 무엇을 했다고 죄인이야? 넌 원래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어. 십자가 앞에서 그것도 몰랐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알았는데, 그만 까먹었어요. 죄송해요"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증거되는 삶이고, 또한 성도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육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인데, 계속해서 그런 불가능함이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3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에서 3장 16절이 중요한 구절이 많은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고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할 때, 여기에서 세상은 모든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있는 예수님의 자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왜 그것을 '세상' 이라고 했는고 하니, 앞에서 범위를 넓힐 때는 세상이고, 그 범위를 넓히면서 점차 점차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그렇게 세상이라고 해놓고, 그렇게 세상을 다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준 자만을 사랑한다고, 그것을 요한복음 17장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요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쉽게 말해서, 처음에는 지도를 넓게 보고 가다가, 가면 갈수록 초점을 맞추면서 점점 더 좁게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요한복음 3장 16절만 달랑 들고 나가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잖아"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또 있는데, 요한복음 15장 7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네가 뜻대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리라" 라고 말입니다. 또한 요한1서 5장 14절에서는 "주의 뜻대로 하는 것만 받는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주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는 겁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래서 이 둘을 합쳐버리면, "주님께서 주님 마음대로 하신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이 마음대로 하시는데, 또한 마음대로 주시고 말입니다. 즉 주시는 것도 다 주의 뜻대로 주시는 것인데, 그러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환경이 된다는 말입니다.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지금 자기의 환경이 마음에 드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데, 전부가 다 자기의 과거의 기억에 준해서 꿈꾸던 것에 비해서 아쉽다고 생각하는데,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동화책을 너무 많이 봤다는 겁니다. 또 드라마나 개콘을 너무 많이 자주 보았고 말입니다.

재벌3세가 나타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우연히 제주도에 가고, 오키나와 가서 만나고 하는, 그런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름만 '삼순이' 인데, 그게 무슨 삼순이입니까? 예쁜 김선아이지 말입니다. 그보다 못생긴 삼순이가 훨씬 더 많다는 겁니다.

이제 3장 15절을 보겠습니다.

(딤후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성경은, 쓰신 분이 성령이기에 !!

여기에 "성경은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성경해석을 하면서 이 중요한 것을 빠뜨리는데, '예수 안' 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마치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시키면 앞서서 수프부터 먼저 주고 또 주고 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먼저 '예수 안'이 오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그 의를 주시기 위해서 쟁반에 담아오는데, 그 쟁반이 곧 성령'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기준인고 하니, 기존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기준에 의해서 가르치는 것이 성령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쓰여졌고, 성령으로만 해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였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 '예수 안' 이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알면 성경해석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이제 4장을 보겠는데, 1절입니다.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 심판은,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

여기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 라는 말은 우리의 상식과 어긋나는데, 우리의 상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당연히 죽은 뒤에 심판한다고 보는데, 그런데 산 자와 죽은 자는, 즉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심판이 실시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심판이 무엇입니까? 갈라지게 하는 것인데, 즉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가라지와 알곡으로, 오른편에 왼편에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오른편과 왼편을, 즉 "천당에 갈래? 지옥에 갈래?" 라는 것을 마지막에 결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즉 "어린아이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니가 어떻게 대우했는가?" 라는 것으로, 이미 심판이 그렇게 갈라지는 겁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보고는, "그래, 니 안에 예수가 있구나" 라고, 그렇게 해서 목마를 때에 물을 주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냥 그냥 예수님을 믿고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누구에게 한 것이란 말입니까? 그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란 말입니다.

◈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이전에 누구를 핍박했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그런데 막상 예수님을 만나니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니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즉 "니가 왜 내 사람을 핍박하느냐?" 라고 하지 않고,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인이 한 모든 행적들이 누가 한 것이란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데리고 움직인 것인데, 그런데 정작 사람들의 눈에는 그 사람만 보이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수님을 이미 과거에 죽은 사람이라고 오해를 했는데, 지금도 살아계신데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해석이라는 게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제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여기 '사욕' 이라는 것은, "내 것이 있다. 그 내 것이 얼마나 잘 될까?" 라는 것을 요구하면서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그리스도께는 관심이 없고,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6절에서 8절을 보겠습니다.
 
(딤후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 면류관은 받아봤자, 다시 '반납' !!

여기 6절에 보면 부흥사들이 자주 써먹는 유명한 말씀이 나오는데 말입니다. 집회를 마치는 목요일 날의 마지막 테마에 이것이 들어가는데, 필수적 요소라는 겁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장례를 치게 되면, 그 치른 분이 어디로 갑니까? 물론 하늘나라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7절에 보면 면류관이 나오는데, 하지만 그 면류관은 받아봤자 다시 어떻게 해야합니까? 주님께 다시 돌려드린다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써봐야 자기에게 합당치 않은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말입니다.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요즘도 목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제법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목사가 되면 "아하, 이게 다 내어놓아야 되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앞에서 목사가 지켜야 될 항목이 몇 가지였습니까? 14가지인데, 사실 어느 항목도 지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직은 하려고 하면, 일단 벗어놓고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14절을 보겠는데, 이 대목만 하고 이번 수련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딤후 4: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 왜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등장하는가?

사도바울이 앞치마와 손수건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또한 죽은 유두고도 살렸다는 겁니다. 그게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드로아' 라는 곳에서 일어난 일인데, 사도바울이 밤새도록 말씀을 전하니, '유두고' 라는 청년이 3층에서 말씀을 듣다가 그만 잠이 들어서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를 끌어않고서 살렸다는 겁니다.

아무튼 사도바울이 그만한 파워와 능력이 있으면, 이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자기를 괴롭힐 때, "에라 이놈아, 내가 누구인지 몰라? 죽은 자도 살린 사도바울이야. 내 펀치 맛이 어떤지 니도 한번 볼 겨?" 라고 하면서, 한 방을 그냥 날렸으면, 그를 아작을 낼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말입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그렇게 사도바울에게 해를 입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놈에게 한 방을 왜 날리지 않습니까? "이게 어디서 복음을 방해해" 라고 하면서 왜 치지를 않느냐는 겁니다. 여기에서 '구리 장색' 이라는 것은, 구리를 세공해서 먹고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말입니다.

◈ 사도바울이 계시의 중심이 아니기에 !!

왜 그런고 하니, 비록 사도바울이 계시를 전했지만, 그 사도바울 중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환난을 많이 겪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살릴 사람은 살리되, 사도바울이 그렇게 남을 살리는 일을 했다고 해서, 그의 그런 행동이 구원의, 즉 복음의 내용으로, 믿음의 내용으로, 그게 들어간다는 겁니까? 들어가지 않는다는 겁니까?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사도바울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수천 명을 전도했다는 것이 계시 속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계시는 영원토록 예수님의 피, 오직 '피' 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피도 아니고, 아볼로의 피도 아니고, 또한 게바의 피도 아니고, 물론 우리들의 피도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이 '죄인' 이라는 것 때문에 말썽이 많은데, 즉 "주의 종이 되었으면 의를 행하는데, 그러면 의의 종인데 왜 자꾸만 죄인이라 하는가?" 라고, 그렇게 시비를 걸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의' 라는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죄의 반대말이 의가 아니고, 우리의 전부를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게 하는 능력 자체를 두고 '의'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수련회를 마치고 또 다시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자, 그런 시도를 한다면 우리도 역시 행함주의자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본성상 늘 행함주의자로서, 우리 자신의 잘남과 우리 자신의 우수함을 주님 앞에서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평생토록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때마다 십자가의 피를 다시 보이게 하셔서, 보고 믿는 게 아니고 보지 않고 믿도록 성령께서 우리 속에 말씀자체를 십자가를 통해서 심어놓았다는 사실, 그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1,10,06 오후 2시에 재정리함 - 녹취 '구'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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