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디도.빌레몬

2011여름 2강

아빠와 함께 2021. 5. 24. 18:12

20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디모데전후서[교회를 잊으라!] 제2강
(강의 : 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 두 가지 점을 제가 이야기했죠. 하나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엇을 분명히 했느냐 하면 어떤 인간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너희들이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성경을 통해서 어떤 구상을 했던지 간에 상관없이 어떤 인간도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다. 이것은 창세기 3장부터 일관돼있는 하나님 뜻이에요.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아놨다가 터놨다, 이제는 허락했다가 없어요. 그냥 인간은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따먹을 수 없습니다. 줘야 먹지 따먹지 그냥 따먹을 수 없는 겁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제가 이야기한 것은, 성령이 오게 되면 기존에 자기가 생각했던 것, 난 이런 식으로 세상을 해석으로 그 바탕 위에서 내가 구원을 따내리라. 죽어서 좋은데 가리라, 편하게 살리라 하는 모든 그것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십자가 여기 있고 부활이 있다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스스로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죽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진해서 죽은 게 돼요. ‘인간들은 너희 정체를 몰라. 너희 주제를 몰라. 내가 알려줄게.’ 하고 죄인의, 육신의 모습으로 와서 하나님과 만나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잖아요.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예수님 때문에 아버지가 나타난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아버지로 나타나요.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아버지로 나타나버리면 여기는 아들이 성립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만이 언약이 여기에 적용이 돼요. 아버지와 아들만의 언약은 이것은 중요한데 역사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이전의 창조 전에 있었던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그대로 여기에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우리는 창세 이후에 존재이면서도 무슨 혜택을 입느냐 하면, 창세전에 있었던 일의 혜택을 입는 그러한 존재로 탈바꿈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9장에 보면 야곱과 에서가 있거든요. 야곱, 에서 본인의 운명은 어디서 결정되는가? 야곱은 본인이 본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어요. 에서도 마찬가지고. 야곱은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돼있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돼있는데 그 사랑과 미움을 누가 결정했느냐?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결정해버렸어요.

보통 우상들, 일반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신의 개념은 반드시 인간이 개입되게 돼있어요. 왜? 인간이 섬기지 아니하면 어떤 신도 흐믓할 수 없어요. 그게 로마, 헬라 신입니다. 로마, 헬라에 나오는 신들의 특징을 보게 되면 인간과 좀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인간의 성품, 성질 급한 것, 밝히는 것, 짜증내는 것, 질투하는 것, 술 좋아하는 것 그리고 변덕스러운 것, 그게 그대로 나타나요.

그렇게 나타날 때 인간과 신 사이에는 공통점이 형성되고, ‘하나님, 성질 좀 죽이세요.’ ‘죽일까. 내가 좀 심하지.’ ‘이것 좀 받으시고 성질 죽이세요. 칠칠치도 못해. 신이 되서.’ ‘미안허이. 내가 좀 너무 과했지.’ 이런 식으로 교류가 되고 교제가 되는 신이 로마, 헬라 잡신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헬라 신이 로마 신으로 전환됐지만 그것 말고 동양에서 친숙한 마당에 기어 다니는, 동짓달 떡 시루에 찾아오시는 신, 이사할 때 택배회사 트럭에 함께 오는 귀신, 애 낳을 때나 콩나물 키울 때나 하여튼 아주 세세한 신들이 거기에 개입될 때 그 신들은 뇌물 챙기는 신들이에요. 옛날 60년대 교통순경 같아. 수고하십니다. 전부다 돈 달라는 거예요.

그러한 신이 인간한테는 너무 편해요. 주면 되니까. 안 되는 것도 바치면 되게 돼있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냥 수돗물 떠서 하면 안 되고 정화수 떠놓으면 효과가 더 나고. 그냥 양장 입고 빌면 안 되고 한복 입고 빌고. 그냥 파마해서 수건 뒤집어쓰고 빌면 안 되고 머리 단정하게 해서 빌면 효과 더 있고. 낮에는 싫어요. 밤중에 그것도 열두 시 땡~ 칠 때 그것도 괘종소리 들릴 때 비나이다, 비나이다.

성황당이라는 게 있어요. 강원도 강릉, 울진 방면에서 안동 넘어올 때 반드시 거기에 상인들이 비는 데가 있어요. 동전 몇 개 던지고. 그리고 청도에도 있어요. 상인들이 가면서 돌아올 때 이윤 많이 남기고 오라는 하는, 상업자본주의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이윤 받아 오면서 귀신한테 몇 푼 던져주고 지 묵고.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정다운 신입니까.

그것을 예수, 성령, 성부를 한국교회에서 그런 잡신으로 다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창세전이고 필요 없어요. 뭐하려고 그런 걸 배워요. 골로새서, 로마서 필요 없다니까요. 그냥 정성으로 하면 복은 온다고 그런 간증도 많이 들어놨겠다 그 간증만 챙기면 되지 안 그래서 성경만 보면 잠이 오는데 왜 봅니까.

그 우상이라는 것이 본인 자신이, 내가 투영된 거예요. 내가 생각한 이미지가 투영되면 그것이 바로 내가 섬기고 싶은, 내가 정말 찾고 싶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은 그러한 나한테 가장 정다운 친구 같은 신인 겁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우상은 언약이 없는 신이라고 해요. 하나님에게서 주어지지 않는 언약이 없는 신이다. 언약이 없는 신을 다른 말로 저주하지 않는 신. 뇌물 받지 않는 신, 인간의 정성도 받지 않는 신, 이미 너는 당연히 저주받아야 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신, 죽여 놓고 다루는 신,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럴 때 비로소 가장 인간답다고 그렇게 보시면서 작용하시는 신이에요. 죽은 자를 살려내는 하나님의 솜씨를 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그러니까 광야에서 그들은 죽을 맛이죠. 죽음의 환경에 집어넣고 거기서 어떻게 살려내는가 보라. 그것이 하나님이다. 그걸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특징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찾아온 그 하나님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됩니까? 둘로 나뉘죠. 어떤 하나님입니까? 하나님 계시고 그 다음에 역사 속에 구체화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인데 이걸 언약의 하나님이라 하고, 언약의 하나님은 여호와라 부르면서 자기를 계시하는 겁니다.

여호와 이름을 부를 때는 네가 여호와 이름을 상대하라는 말이 아니고 언약대로만 다루겠다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통고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하나님은 장차오실 예수님과 아버지의 창세전에 있었던 것을 창세후에 생긴 역사 속에 집어넣은 겁니다. 창세전에 있었던 그 계획을 시간 속에, 공간 속에 집어넣으니까 사람들은 기껏 생각해봐야 시간적, 공간적으로 자기 존재를 파악하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오후에도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왕의 신하가 병이 들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낫게 해 달라 할 때 벌써 낫다고 하니까 집에 돌아가서 ‘너, 언제쯤 낫느냐?’고 하니까 주께서 말씀하실 그때 낫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언제 가서 안수했습니까? 이것은 시공간을 무시해버리죠. 뛰어넘는다, 초월한다는 고상한 말이고 쉬운 말은 무시한다는 거예요. 시공간을 무시할 때 마음대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중심으로 시공간을 무시해버립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제자들이 갈릴리 호숫가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풍랑이 발작을 합니다. 누가 그렇게 한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죠. 발작을 일으켜서 배를 뒤집으려고 할 때 제자들은 물이 차면 물 퍼내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제자들 머리 속에 바람과 바다를 꾸짖는다는 생각을 못한 겁니다. 바람과 바다의 주인공이 오셔서 ‘조용히 해. 까불지 마.’ 이 한 마디만 하면 조용해질 텐데 ‘예수님은 뭐하고 계시나?’ 이런 생각을 제자들이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제자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기껏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 내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내에서 만든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간이 알고 있는 바깥으로 일을 해버리면 그게 납득이 아니고 소통이 안 돼요. 인간은 창세 이후에 태어난 존재고 예수님은 창세 이전에 아버지와 알았던 그런 분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자꾸 뭔가 하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팔짱 끼시고, ‘창세전에 택함 받았거든.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구원받게 되거든.’ 이런 것을 인간들은 감 잡을 수 없는 겁니다.

욥 같은 경우가 그렇잖아요. 욥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믿음 있은 것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작정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밑에서 그걸 몰라서 답답해하는 겁니다. 몸부림치고. 그런데 위에서는 사탄과 하나님과 즐기고 있어요. 꼭 벌레 툭 건드려놓고, ‘이 벌레가 몇 바퀴 돌겠나? 나는 세 바퀴, 나는 네 바퀴. 차보자. 네 바퀴네.’ 이거는 인간을 가지고 노는 거예요. 인간의 인격성? 인격성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인간의 존엄성? 뭐 하나님 형상? 형상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게 형상이에요?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안 떨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참새 떨어지게, 안 떨어지게? 하고 자기 손에 들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은 단순히 인간들의 호기심의 기적이 아니고 중심이 있다니까. 그 중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향하시는 언약의 핵심이 뭐냐를 알려주기 위해서 모든 천지만물이 그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겁니다.

그걸 에베소서 1장에서는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라 해서 모든 만물은 교회 하나 세우기 위해서 다 투자돼있고, 배치돼있고, 배열돼있고, 정돈된 모든 것이 각기 제 자리에서 있으면서 그리스도 몸을 하나,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만물은 가득 차 있다고 되는 겁니다. 물론 그 교회는 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님 본인을 두고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교회라 할 때 교회 다니는 우리 생각하잖아요. 성경에서 교회라 할 때는 항상 머리 부분이 누구냐가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머리되신다면 그것이 교회고, 예수님이 교회된다면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게, 빠져나오지도 못하게 그 머리에 종속돼있죠. 그 머리에 종속돼있으면 모든 은총과 혜택과 지시와 명령은 다 누구한테 쏟아지는 겁니까? 바로 머리되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쏟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차후적으로 그렇게 해석돼요.

지금 여기서 설명 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갖고 있는 언약인데 그 언약중심으로 언약이 어디에 개입된다 했습니까? 창세전의 언약이 창세후에 만들어진 인간세계에 개입될 때 여기서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깁니다. 충돌이 생긴 분화구에 교회 생깁니다. 위에서 날아온 운석 하나가 멕시코의 우카탄 반도를 직경 2키로짜리로 쳐버리니까 그 여파로 공룡이 다 멸망했다고 진화론자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빙하기 생기고 그런 이론이 있지만 어쨌든 간에 엄청난 에너지 파워가 온 지구상을 덮어서 완전히 몰살하죠. 공룡도 몰살하고. 그런데 사람은 죽었게요, 안 죽었게요? 공룡시대에 사람이 없다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세계에 들어오면 충돌을 야기 시키는데 그 흔적을 피라고 이야기하죠. 창세기 4장부터 시작하죠. 가인이 제사 드릴 때 가인은 언약을 몰라요.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창세후에 가인이 갖고 있던 나름대로의 신 개념이 있어요. 바치면 좋아라고 입 째지겠지. 안 바치면 시큰둥하니 성내는 거죠.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장마 끝났는데 비가 계속 올 때는 이건 뭔가 성질이 더러워서 시큰둥하다. 처녀를 공양 바치든지 해야 한다.

6세기부터 마야문명에서는 그렇게 했어요. 제단에다 바쳤습니다. 그것도 완전히 도박이에요. 바쳐서 비 오면 왕과 제사장은 완전히 환영 받고 만약에 처녀공양 했는데 비 안 오면 그 제사장과 왕은 몰살당했습니다. 그래서 마야문명 망했어요. 그들은 진지합니다. 장난이 아니에요. 한국교회처럼 장난치고 십일조하고 돈 나오면 그만이고. 이게 아니에요. 그냥 믿습니다. 십일조하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같으면 장부에 십일조 돈 계산하고 몇 달 후에 돈 나와야 돼요. 안 나오면 목사 목 쳐야 돼요. 다른 걸로 복 줄 겁니다. 이런 소리하면 안 돼요. 현찰박차기 아닙니까. 이쪽이 현찰 냈으면 현찰 내놔야지, 하나님께서. 로또를 사던지 뭘 하던지 해서.

옛날 사람들은 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신이 틀린다면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신이 있기 때문에 그 신을 믿는 민족은 반드시 승리하고 축복을 받게 돼있어요. 마르둑 신이 여호와를 이겼을 때 그 바벨론 왕이 얼마나 자만심이 대단했습니까. 여호와 신을 이겼기 때문에 성전에 있던 제구와 기구들을 무슨 전리품처럼 자기 창고에다 가득 채웠습니다. ‘어디 감히 사이비 신이 진짜 우리 마르둑 신을 이기려고 까불기는.’ 이랬단 말이죠.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드리는 신은 하나님과 결속돼있으니까 하나님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까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해서 바치는 제사입니다. 오늘날 추수감사절이나 감사예물 이런 것. 이번에 대학합격해서 경찰대 특차인데 합격해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거는 순수한 마음인데 보답 안 해도 됩니다. 이미 보답은 챙겨놓고 시작하니까 안 해도 됩니다.

그러면 순수한 마음으로 했으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면 되는데 이걸 이용합니다.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면, 안 받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되느냐 하면, 일체 인간의 것을 안 받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징벌은 뭐냐? 안 받는데 ‘역시 제 건 안 받는군요.’ 이러면 되는데 ‘안 받아? 네가 내 것 안 받아?’ 이렇게 되면 그건 저주받는 거예요.

다 안 받는 건 상관없는데 동생이 바친 제물은 받아버리죠. 그래서 형이 동생을 받아버립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개입으로 지상에 두 파가 생겨나요. 하나님이 개입 안 했으면 절대로 형제간에 싸울 리가 없는데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기준을 만들어서 갈라지게 만들어요. 그게 뭐냐 하면, 창세전의 언약이 창세후의 세상에 개입될 때에 모델 되는 하나의 케이스를 만들어요. 모델 되는 케이스는 아벨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받지 않는 손에 의해서 아벨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아벨에게 피를 내는 겁니다.

그래서 장차오실 메시아는 사가랴와 아벨의 피를 따라서 내가 그 노선 따라서 나도 죽는다. 그래서 십자가에 내가 죽는 이유는 이처럼 가짜 하나님을 진짜라고 우기는 인간들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피가 십자가 피에요. 그렇다면 죽은 분만 제대로 아버지를 알고 그 외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 전부다 아버지를 모르게 되죠. 그리고 모르는 정도가 아니고 필히 가해자가 되죠.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그때는 너희가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 하죠. 아들의 영을 받았으니까 아들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영을 받아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을 받아버리면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자기를 쳐다보지 않고 누구를 보느냐 하면, 아들 될 수 없는 인간이 아들 됐기 때문에 이 혜택과 공로는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 덕분에 내가 아들의 영을 받게 되었구나. 그럼 그 사람은 예수님의 것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철저하게 예수님에게 종속되는 겁니다.

이것이 창세전에 이미 계획했던 하나님의 교회라는 거예요. 창세전에 보관해놨던 교회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여기는 어떤 차질이 있을 수가 없죠. 계획대로 되니까. 차질이 없다는 말은, ‘신이여, 나한테 오시옵소서.’ 해서 달려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침투하고 개입해요. 마치 공수부대 같아. 그냥 적진에 투입해서 후방 적진을 교란한다. 우리 특수부대 임무는 후방을 교란한다. 그냥 동사무소에서 도시락 까먹는 게 아니고 후방을 교란하는 거예요.

그렇게 돼버리면 그 임무를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 받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았던 그 코스를 되풀이하게 돼요. 지상에서 되풀이 되는 걸 부활의 흔적이라 합니다. 부활됐기 때문에 되풀이, 반복이 되는 겁니다. 이 동네 말고 다른 동네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되풀이 되게 만드는 그러한 상태를 하나님의 나라, 부활의 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늘 되풀이 되는 것. 따라서 여러분들이 성령 받았으면 여러분들이 알아요. 뭔가 늘 되풀이 되는 어떤 초점이 있어요. 십년 믿던, 이십년 믿던 계속해서 되풀이 되면서 마지막 증인 지점이 있어요. 그게 뭐겠어요? 십자가잖아요. 사도 바울이 뭐라 합니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 7월 22일이라면 22일 후에는 몰라도 되겠네요? 7월 23일에도 뭐가 보입니까? 십자가. 24일도 십자가, 25일도 십자가. 그래서 다 합하면 토탈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 외에는 너희들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십자가마을의 비밀이고. 그것은 뭐냐 하면, 창세전의 아버지와 아들만 알았던 계획이 창세후의 설치돼있는 창조세계에 침투했던 결과가 피라는 한 자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이건 하나의 퀴즈인데 맞춰보세요. 강도란 이유 때문에 지옥 갑니까, 안 갑니까? 안 가지요. 그러면 강도는 다 천국 갑니까? 아니죠. 그러면 강도라도 지옥 가는 강도, 천국 가는 강도 따로 있지요. 그렇다면 강도라는 직업이 천국 가고, 지옥 가는데 영향이 있습니까? 없지요. 간단한 문제잖아요. 창기 중에서 천당 가는, 지옥 가는 창녀 따로 있지요. 그러면 창녀라는 직업이 전혀 천국 가고 지옥 가는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란 게 뭘까요? 성령의 열매란 바로 방금 이야기한 겁니다. 내 행함과 아무 상관없이 구원은 십자가로만 이뤄진다는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 합니다. 그 열매가 있을 때 다른 쪽에서 볼 때 그게 온유하게 보이고, 자비롭게 보이고, 양선 있게 보이고, 형제우애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신의 행함, 자신의 직업 이런 것이 무시되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니까요. 그럼 내가 행한 것을 무시하지 아니하면 그게 육의 열매가 돼요. 시기와 질투와 그런 것은 십자가마을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질투와 당 짓는 것과 조롱과 미움과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를 무시하지 말라 아닙니까. 이래도 성도다 아닙니까.

성도가 명사로 해서 목적어 구실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의 주체가 나와 성도가 동급이 돼버리죠.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성도의 주체는 누굽니까? 이건 예수님한테 가 있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에요. 나는 성도된 나지요. 성도가 먼저고 그 결과물로 내가 등장하는 거예요. 성령 받기 전에는 ‘나는 천국 갈 거야.’ 이 모습이라면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천국 간 사람이 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문법 또 나왔다.

나는 뭐뭐한다 하면 동사가 되잖아요. 창세후의 인간들은 이것밖에 할 줄 몰라요. ‘내가 뭐뭐한다.’ 내가 뭘 안 하면 그런 결과가 안 생긴다고 보는 거예요. 내가 기도를 안 하면 반드시 기도를 안 한 게 되고, 그러니까 내가 참새라면 내가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절대로 안 떨어진다는 게 참새 생각인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내 뜻이 아니면 허락 없으면 참새도 안 떨어진다는 것이 주님이 주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 것은 어떻게 됩니까? 나는 뭘 한다가 아니라 뭘 행해야 되는 것이 곧 나에요. 이걸 to부정사, 명사나 형용사 역할 하는. to부정사에는 시제가 없어요. 현재, 미래 이런 게 없이 전부다 완료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뭐뭐한 것은 곧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내가 되게 하는 거예요. 주께서 준비한 성도가 바로 내가 되도록 중간에 성령이 개입하죠. 십자가에서 부활 가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면, 부활의 세계에서 준비된, 창세전에 준비된 것을 창세후에 있는 역사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입혀주는 것도 누구 몫입니까? 성령이 와서 ‘너는 바로 창세전에 예정된 택한 너, 맞아.’라고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어떤 충돌이 일어나죠? 평소에 우리가 내가 잘 알아서 구원받겠다는 의도와 성령께서 와서 통과하는 의도와는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여튼 구원해줘도 문제라. 구원해줘도 자기의 가치를 무시했다고 삐치는 게 인간이라니까. 그걸 내성이라 하는데 속에 잠재돼왔던 성품, 성격 이런 것 주변에서 가르쳤던 것, 주변에서 압박을 가했고, 법적으로 구축된 것들이 있어서 코앞에 갖다 줘도 내가 먹어야 내 것 된다는 인식이 가득한 거예요.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왔는데 손으로 집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모든 구원, 믿음, 율법이 환상이 되고 우리 속의 율법, 우리 속의 구원, 우리 속의 부활, 우리 속의 성령 이렇게 돼야 되는데 전부다 내가 이걸 잡아야 돼요. 우리 속의 예수님인데 자기가 믿으려하고, 아침 9시에 믿으려하고 11시 되서 또 믿으려하고 미쳤어요, 완전히. 주님께서 어디 나비입니까? 잡힌다고 잡히는 분이에요?

이런 모든 실수와 오류가 그게 실수며 오류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정말 하나님께서 친절하게도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들의 실패담을 통해서 똑똑하게 우리에게 네 선배들 까불다가 이렇게 다 멸망했다는 걸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저래서 망했구나. 저렇게 말씀 지킨다하다고 말씀 지킨 것 때문에 망했구나.

사울에게 왕 주니까 자기가 왕인 줄 알고 준비된 왕이 너라고 하니까 사울은 ‘나는 왕이다’ 이렇게 바뀌어버렸어요. 하나님이 왕 되게 했다는 의미에서 너는 왕이다 이렇게 되는데 하나님 빼버리고 치워버리고 내가 왕이라는 거예요. 이게 디모데전후서에 나와요. 목사 되게 하니까 ‘나는 목사다’ 이렇게 나와요. 혼자 목사 해라. 목사는 이런 것이다 할 때는 어떤 것이냐 하면,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목사다 할 때는 특정 인간을 두고 목사라 하지 않고 목사 됨은 이거라고 해서 이 목사 됨에 부합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만들어서 집어넣는데 이거는 전부다 탐을 내는 거예요. 특히 여자 목사들. 여자 목사 왜 되려고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있는 목사도 때려치워야 되는데 여자들이 뭘 부럽다고.

무릇 내 것을 가지지 않으면 자기 주체성이 성립이 안 되는 것이 인간들의 육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뭘 줘도 그걸 내 소유화할 때 안심을 하려고 해요. 하지만 내 속에 들어온 것들이 그냥 무생물이 아니고 물컹물컹 살아있어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흉측한 비유지만 해야 돼요. 어떤 갓난아이가 현관에서 울고 있으니까 불쌍해서 키우니까 밤 2시에 괴물로 변해서 안방에 있는 자기 양부모를 잡아 죽인다는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내 소유라고 여겼던 것이 괴물로 변하잖아요. 이건 자식 키우는 사람 다 아는. 어릴 때 그때 그 자식인 줄 알았더니만 그 자식이 집안을 말아먹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하면 참 난처한 사람 한둘이 아니야. 괴물을 키웠어, 괴물을.

이것은 이 세상의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주도권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주도권은 예수님이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내 몸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을 생각해보세요. 성령 충만하게 되면 모든 스케줄과 모든 것이 무슨 모델을 따르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고난 받고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한 그 코스를 교회 자체가 그대로 되풀이해주고 있습니다.

병 고치는 것 이런 것도 심지어 사도 바울의 손수건 만져도 살아나고 하는, 세 번째 전도여행 때 그런 게 있었어요. 소아시아 북쪽에서. 앞치마, 손수건 이런 걸 해도 살아난다 이 말이죠. 누가 놀랐겠습니까? 살아난 사람이 놀랐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놀랐겠습니까? 사실 본인이 놀란 거예요. ‘주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이건 오바입니다.’ 내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해줘야 되는데 이렇게 앞서 가시면

그 말은 뭐냐 하면, 뭐든지 주님은 항상 앞서가요. 자기는 재판 좋게 해결하려고 했는데 주님께 꿰어서 기어이 너는 로마에 가야 된다. 로마에 왜 갑니까? 로마의 휴일이 있습니까, 공주가 있습니까? 거기 왜 가는 거예요? 로마 가는 것이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창세전의 아이디어기 때문에 창세후에 태어난 사도 바울은 자기 계획에 없던 거예요. 오히려 인간들의 자기 계획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부술 때 우리는 고마워해야 됩니다. 주께서 깊숙이 개입하시는구나.

그것은 아들 아닌 자 또는 율법의 종 된, 율법의 종이라는 것은 바로 마귀의 종이에요. 아들 아닌 자를 뭐로 바꿉니까? 아들 만드는데 아들의 모델로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살아왔던 그 모델로 아들이 아닌 자를 바꾸는데 여기에 필히 고난이 주어져야 돼요. 고난 가운데 결국 십자가로 데려가서 부활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냥 십자가 없이 부활로 가는 법이 없어요. 그러면 십자가도 고난이고 이것도 고난 같으면 차이점이 뭐냐? 십자가 고난은, 고난 받는다가 되지만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거예요.

그럼 이건 몇 살 때 십자가가 합니까? 몇 살 때가 아닙니다. 날마다, 매일같이 십자가에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날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몸은 죽고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 매일같이 그렇게 해요. 그래서 나는 매일 죽는다. 또는 다른데 보면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죽음 가운데 넘기움은 내 안에서 죽음에 넘기는 그 능력이 죽이는 능력이 아니고 살려주는 능력으로써 지상에서는 죽는 모습으로 오는 겁니다.

그 죽는 것이 불교에서는 자기 부정이지만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더욱더 감사하는 것이죠. ‘나 죽는다, 나 죽는다.’ 그건 화병이고. ‘못 살겠다. 차라리 죽여라.’ 이것은 한이 맺혀서 하는 짓이고 ‘예수님 고맙습니다.’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항상 사도행전에서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삼주 있으면서 거기서 혼이 났어요. 빌립보에서 옥에 갇혀서 디모데와 사도와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달려들어 옥에 갇혔는데 그때 실라인가 와서 풀려났는데 데살로니가 갔는데 또 따라와서 애를 먹이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아테네로 빼돌렸어요.

보세요. 우리 보기에는 유대인들 나쁜 놈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아테네에 전도하기 위해서 위의 사태를 일으킨단 말이죠. 그러면 만약에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으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는 됐고, 이제 아테네에서 내가 할까? 그렇게 되면 전도의 주체가 성령이 아니고 사도 바울 본인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전도가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하는 사업이 돼버립니다. 이 땅에서 사업해서 뭐 할 건데요? 괜히 고생만 죽도록 하죠.

지금 창세전의 계획의 창세후에 있는 세상을 덮어야 된다고요. 이걸 덮으려면,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여기 위에 침대 매트리스가 있고 매트리스가 오게 되면 여기서 번쩍번쩍 정전기가 일어나듯이 창세전의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면 불꽃이 튄다 말이죠. 이질적이니까. 성질이 다른 세계가 마주치니까 이질적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현상을 종말론적 현상, 신학에서 종말이 됐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을 종말론적 현상이라 하거든요.

창세전의 내용이 부딪치게 되면 번쩍번쩍할 때마다 틈 사이에서 십자가 복음이 계속해서 전파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이 전파된다면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땅이라는 게 뭐냐? 땅이라는 것은 육을 육 되게 덜어내기 위한 필수 환경이 되겠죠. 육은 무엇과 친화력이 있다? 육은 땅 없으면 못 사는 거예요. 처음에 아담이 쫓겨나고 난 뒤에 대지, 넓은 땅과 육의 만남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종말론적인 안목에서 볼 때 이렇게 육이 돼야 되고 땅이 된다는 안목을 가졌다는 말은 이미 이쪽에서 벗어난 인물만이 육과 땅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게 된 겁니다. 이건 육이다. 이건 땅이다. 그렇다면 육이란 어쩔 수가 없어요. 육을 육으로 고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육은 육으로 못 고칩니다. 아무리 도 닦고 성화 되도 육에서 난 것은 육이 되는 거예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성령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쌍소리로 말해서 지랄을 해요. 만날 해도 소용이 없다니까요. 까불고 찢고 지랄을 하세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니까. 소용없는 짓이라니까요. 헌금을 하고 예배를 하고 성질대로 하세요. 하여튼 육의 성질 다 나와요. 그냥 사는 것이 영광이고 성경에는 먹든지 마시든지 사는 것이 영광이고 사는 것이 예배인데 사는 것 중에서 따로 분리해서 예배라고 끄집어내버리면 그야말로 지랄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걸 왜 끄집어내는데. 끄집어내는 의도가 뭐예요? 육에서 육을 분리하겠다는 이 말 아닙니까. 분류하는 네가 뭔데? 육이 육을 분류해봤자 육 아닙니까.

축구선수 바보고, 상대방도 바보고, 심판도 바보고, 채점하는 사람도 바보고. 그러면 그게 축구가 아니지. 옛날 한자말로 축구라 하는 것은 바보라 하는 거예요.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축구한다고 얼마나 놀리는지, 바보짓 하는구나.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공부해보니까 영구 없다 그걸 축구라 하는구나.

육에서 고상한 육과 뭐 우~아~ 무슨 우아한 육이 있어요. 육도 우아한 육이 있고 지저분한 육이 따로 있어요? 사람이 몸의 컨디션이 좋으면 우아하지 않게 돼있어요. 여자가 몸 건강하면 화장발 잘 받고, 몸 피곤하면 루즈도 튀어나오고 입술도 튀어나와서 광녀가 돼버려요. 성질나서 하다보니.

육을 육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육을 포기하란 말인가? 아니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육을 육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포기했다고 성령 받은 게 아니고 성령 받았기 때문에 저건 육이구나. 이게 육이라면 영은 뭐냐? 영이란 땅이라고 생각하는 게 영이에요. 땅은 땅이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성령 받은 티가 팍팍 나잖아요.

하박국에 보면 성전에 있는 자는 잠잠하라고 했다고요. 목사가 하는 말이, ‘여러분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잠잠할지어다.’ 네가 더 시끄러워. 괜히 음성에너지 더 포함시키지 마. 네가 더 시끄러워.

항상 사도행전은 종말을 확인시키기 때문에 온 동네를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거룩한 대지를 땅으로 바꾸기 위해서 모든 인간을 육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통해서 다 시킨 거예요. 그리고 그들에게 대지를 땅으로 바꾸고 그러니까 저주받은 땅이죠. 인간을 육으로 바꾸는 이것이 새 언약이고 여기에 일하는 게 성령이란 말이죠. 이게 말씀인데 복음 또는 말씀이 사도행전에 개입해버리면 이런 땅이 생기고, 육이 생기는데 뭐도 생기느냐 하면, 말씀의 개입으로 창세전의 예정된 자가 육도 생기지만 놀랍게도 기적적으로 영적 존재가 생겨버려요.

십자가 복음을 알아듣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십자가를 인간 힘으로 믿을 수가 있고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까? 창세전의 이미 선택됐다는 것을 인간 힘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다시 할게요.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선택했다는 것을 믿어지는 사람이 선택된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한 육적인 선택론이에요. 지밖에 모르는, 자기 구원밖에 모르는, 자기 구원론 대기했다가 ‘성경말씀에 어떤 점이 나를 구원할까? 순종해야 되겠구나. 그걸 채택하면 되겠다.’ 자기가 그걸 채택해서 지 마음대로 반창고 붙이듯이 붙여놓으니까 반창고가 바람이 부니까 다 떨어져나가는데. 성령 한번 불면 반창고 다 떨어져나가는데.

‘믿습니다.’ 반창고. 우리교회 반창고 다 떨어져나가서 지금 반창고가 교회에 이만큼 쌓여있어요. 반창고에 이름 다 붙어있어요. 누구한테 붙은 건지. 투표하고 삐져서 반창고 떼버리고 간 사람 있고. 반창고가 수북이 쌓여있어요. 떨어진 반창고가 있는 반창고보다 더 많아요. 교회 한 십 년 이상 되니까.

다시 할게요. 뭔가 하늘에서 개입이 돼버리면 성령에 의해서 나온 사람이 있어요. 그게 율법의 노선이 아니고 성령의 노선 된 그러니까 그 사람의 특징이 뭐냐? 잉태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잉태도 못했는데 애가 어디서 생깁니까? 말이 안 되지요. 그러니까 십자가 믿는 것이 놀라운 기적이란 말이죠.

‘실례합니다. 어디서 잉태했습니까?’ ‘잉태된 적 없습니다.’ 그건 뒤통수 맞을 일입니다. ‘어느 산부인과 출신입니까?’ ‘잉태된 적 없는데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그게 안 믿어지면 당신, 십자가 믿는 것도 거짓말이야.’ 십자가 믿는다는 것은 육에서 난 어떤 죄도 육으로 해결하지 못하는데 육으로 해결하지 못한 죄가 예수님의 영적 육, 그 몸이 대신 피 흘림으로써 이미 게임오버, 끝나버렸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 더 이상 자기 육에 대해서 기대를 안 하게 되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가 거기서 나온 겁니다.


내일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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