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강-고후 3장 4-6절(새언약의 작용)1612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3장 4-6절입니다. 신약성경 288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3:4-6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어떤 문장에 하나님이 들어가게 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가 발각이 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보통 우리가 해요.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구태여 하나님이 끼어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끼어든다는 것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빼고 이야기하는 글들이 아니에요. 성경에는 반드시 그 바탕에 하나님이 시작한 일, 그리고 하나님이 진두지휘하시고 마무리까지 하나님께서 알아서 결정짓는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방금 제가 한 이 이야기는 시작도 우리는 빠져야 되고, 중도에도 우리는 빠져야 되고, 마지막도 우리자신이 빠져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시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로부터, 자기 욕구가 먼저 있고 그것을 위해서 잠시 하나님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심보가 작동합니다. 설교하는 자나 사도바울이나 뭐부터 제거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부터 시작하는 이것을 철저히 제거를 하는 작업부터 필요해요.
지난 낮 설교 때 거짓이라는 것, 거짓부터 이야기했거든요. 모든 것이 거짓되다 그 말이지요. 소용없는 짓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경에서는 육으로부터 시작해서 영으로 나가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뭐로 바꾸는가 하면, 육으로 옮기는 작업부터 이 말씀이 시작이 돼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인간이라고 여기는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아요. 인간으로 봐버리면 여러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육으로 전환시켜 버리면 보편성이 되어서 어떤 인간이냐, 흑인이냐 백인이냐, 잘나고 못나고, 그런 차별이 없어요. 그냥 한마디로 해서 육이에요. 아담의 자손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나지를 않습니다.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가 있을 수가 없어요.
인간을 육으로 바꾸는 작업과 그리고 육에서 영으로 바꾸는 작업 그 모든 시도를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오셔서 시작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 보는 태도가, 내가 구원받아야 되기 때문에 일단 자기 구원부터 먼저 시작을 해요. 그러면 여기는 자기가 육으로 가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육이라는 풀장에 풍덩 빠져야 되는데, 마치 목욕탕에 갔는데 옷도 안 벗고 그냥 구경하러 온 사람 같아요. 목욕탕에서 옷 안 벗고 있는 사람은 관리인밖에 없어요. 때밀어주는 사람이거나. 자기가 뭔데 거기서 어슬렁거립니까? 돛대도 아니면서. 자기로부터 출발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이, 육아! 들어와.” 이렇게 하지요. 안 들어가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해놓고 이 성경을 보면서 마음 낮추기, 겸손하기, 자기를 비우기, 이웃사랑하기, 하나님 섬기기, 온갖 것을 다 끄집어내는데 그 끄집어내는 것이 일종의 수단이 되는 겁니다. 어떤 수단이냐 하면, 현재의 못난 나를 잘난 나로 바꾸어서 내가 나를 천국에 집어넣는 수단처럼 되는 겁니다.
항상 내가 귀하고 주인공은 나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청년이 나오는데 그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왔다가 간 사람입니다. 왔다가 그냥 간 사람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왔을 때의 그 심보를 잘 보라는 거예요. 그것이 누구의 심보인지를? 그게 부자청년 만의 심보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의 심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왔지요. 오늘날 교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줘요. 예수님이 자기한테 필요하다는 겁니다. 어떤 정보를 입수해서 그 정보를 잘 기억하고 있으면 자기구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선한선생님이여, 이렇게 하면서. “내가 어떻게 영생을 얻겠습니까? 영생 얻는데 있어서 당신이 한 정보를 갖고 있는 줄 믿나이다. 그러니까 그 정보를 나에게 인수인계 해주면 당신 덕분에 영생을 얻겠습니다.” 그런 심보를 갖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그 사람은 갔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교회를 계속 다니고 있지만 주님 앞에 나왔던 그 사람은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온다고 다 받아주는 것이 아니고 돌려보낼 사람과 받아야 될 사람을 구분 짓습니다. 구분 짓는데 돌려보내야 될 사람과 받아야 될 사람이 우리 인간들 보기에는 같은 사고방식에다 똑같은 심보를 갖고 있어요.
그게 상당히 흥미로운 거에요. 훌륭하기에 받아주고 심보가 아주 더럽다고 보내고, 그것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든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예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받아주고 선택이 안 된 사람은 집으로 가라고 돌려보내고 그런 겁니다. 천국이란 뭐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의 나라가 천국이에요. 그들의 마을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든지 뭘 하든지 매일같이 쉬지 않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선택을 계속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위한 선택을 계속하고 있는 입장에서 자기선택을 포기한다는 이것은 죽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죽어야 가능한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권리는 없다는 말이지요.
그 마태복음 19장 이야기를 좀더 나가면, 제자들이 굉장히 놀랐어요. 그 부자청년이 가는 것을 보고. 교회부흥에, 목돈 챙기는 일에 도움이 될 것도 같은데 주님이 그냥 보냈으니까 얼마나 아깝습니까? 부자청년이에요. 그냥 청년이 아니에요. 백수가 아니고 부자, 재벌3세가 오는데 돌려보내면 그 재벌 3세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이가 없네?” 그럴 거예요.
주님께서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사람은 할 수 없다. 참 성경해석의 기본이잖아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그것 하나만 딱 들읍시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네가 너 자신을 가지고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쳐봐야 다 말짱 헛수고라는 거예요. 너만 고생한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썼지만 그것은 자기 맨발로 선인장, 가시채를 치는 거예요. 본인의 발만 아파요. 본인의 몸만 아파요.
모든 에너지만 소비될 뿐이고 교회에 속아서 재산까지 바치고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안된다고 했으면 “예” 이러면 얼마나 쉽습니까? 그게 안 된다니까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안된다잖아. 사람은 할 수 없다. 너 사람이지? 그러면 너는 안 되게 되어 있어.” “그러면 저의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왜 네가 구원받아야 되는데?” 이런 질문이 명확한 답변을 내세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럴 권리가 없어요.
남은 지옥가도 괜찮은데 왜 나는 천국가야 되는데? 거기에 대한 궁색한 답변조차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나만의 영광을 돌리기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참 웃기지도 않네. 왜 너만의 영광을 돌려야 돼? 나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기 때문에.” “참, 그리스도가 너 때문에 죽었다.” 네가 뭔데 그리스도와 레벨을 같이 하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아무도 없어요. 구원받을 권리는 아무도 없습니다. 혼인잔치는 그냥 놀고 서있는 사람들을 택한 거예요. 초빙하는 것도 안돼요. 청한 자는 많으나 택한 자는 적으니라. 청하는 것도 주님께서 그리고 택한 것도 주님께서, 그래서 모든 시작은 하나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예수님의 멘트, 발언은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증거를, 이 말이 진짜라는 것, 정말 그렇구나, 하는 그 증거를 주께서는 마지막에 제시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에게 린치당해서 죽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산다고 하는 인간들, 인간들이 살아 있는 그 세계에서 주님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인간에게 몰려서 죽음으로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다시 나타날 때는 죽은 자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요. 그냥 곱게 죽은 자가 아니라 너희들 때문에 죽은 자, “네가 나를 밀었잖아. 네가 나를 싫어했잖아. 싫어버림을 당해서 죽은 자인 내가 너를 구원한다.” 그것은 뭐냐? 나는 너에게 값을 매겼다는 거예요.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값을 매겼어요. 구원에 합당하도록, 적합하도록 그 안에 값을 집어넣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매하지 마세요. 우리 자신에게 가격표를 매기지 마세요. 나는 몇 점짜리, 나는 A등급, 혹은 B등급, 값을 매기지 마세요. 어떤 행위를 더 빼거나 보태도 주님의 값에 섞일 수가 없습니다. 또 섞여서도 아니 되고.
예수님께서 다녀가신 것은 값을 매기기 위해서 다녀가신 거예요. 슬쩍 오셔서 비극적으로 이 땅에서 밀침을 당해서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는 이 동네가 죄에 갇혀 있는 동네라 하는 것을 명확하게 십자가로만 보여줘요.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한다, 십자가만 믿는다는 말은, 주님을 죽이게 된 그 안에 내가 하나의 인물로 가담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결정과 선택권이 없었으면 우리가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내내 기억하고, 내내 인정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값을 치렀다는, 성령을 통해서 그 소식을 들은, 소식을 접수한 사람들의 달라진 면면이에요. 전혀 사람 자체가 달라요. 교회라 하는 것은 사람 오지 말라고 그렇게 사력을 다해서 밀어내야 돼요. 왜? 인간은 할 수 없으되 주님은 밀어주신다는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오지 마세요. 제발 돈 내지 마세요. 제발 선교 좀 하지 마시고 목사 섬기지 마시고, 그냥 예수 안 믿겠다고 발악을 해주세요. 그래도 뭔가 밀리시거든 선택된 자입니다.”
교회는 꾀는 데가 아닙니다. 꾀는 것은 보험회사에서 하는 거예요. 상품 판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3만 9천 9백 9십원, 10원 빼고 4만원 주는 것, 전화 중에는 5퍼센트 감해줍니다, 이런 것, 선물로 뭘 끼워줍니다, 이런 홈쇼핑 아닙니다. 참석하시면 2만원 드립니다, 하는 식으로 노인들 다 불러 모아서 나갈 때 봉투 받아 나가는 그런 것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에요.
전도 왕 뽑는 것, 복면가왕 뽑습니까? 왕을 왜 뽑아요, 왕을? 냉장고 주고, 목걸이 주고. 사람은 할 수 없다고 선언을 했으면, 그렇다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내가 꾀일 수 있고 사람을 전도할 수 있는 모든 기제와 모든 방법을 다 한 번 사용해보세요. 이미 엉터리인줄로 알고, 이래서 안 먹힌다는 것을 다 알고.
이스라엘이 그 역할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과 명령을 줌으로써 결국 명령을 받았던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겁니다.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서 망한 민족이 되는 그 망했던 그 현장,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나는 그 현장, 그 현장이 되어야 거기서 영이 등장하는 거예요. 육은 다 필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수수한 내용이지만 이게 엄청난 내용이에요. 6절에 보면, “새 언약의 일군”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벌써 새언약, 하면 골치 아픈 단어 아닙니까? 이게 뭐냐는 말이지요. 다음에 6절에 “의문” 이것은 물음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 문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의식과 관련된 문자.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 6절의 내용이에요.
이 말은 뭐냐? “인간아, 그냥 가만 서 있어. 가만 서 있으면, 내가 문자를 보내게 되면 네가 죽는 이유가 이 문자 안에 들어 있는 이유를 알거야.” 너를 죽이고, 그 다음에 의문, 율법이 먼저 주어졌으니까, 십계명이 먼저 주어졌으니까, 구약성경이 먼저 주어졌으니까, 옛언약이 먼저 주어졌으니까, 옛언약 쏘시고, 그 다음에 자빠트려서 바짝 마른 해골이 되게 되면, 그 다음에 영이 와서 “어이! 잠 그만 자지? 일어나야지.” 하고 깨워주면 “아아! 잘 잤다.” 하고 깨어날 때 그 사람이 바로 천국 간다는 거예요.
그러니 신구약의 모든 단어가 인간에게 찾아오게 되면 인간은 그 단어를 넙죽 붙잡고 마중나와서 “야, 하나님한테서 편지 왔다. 편지 읽고 우리 천국 가세. 할렐루야, 찬양하세.” 이렇게 나온다면 찬양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찬양하라, 뭐 하라, 하라, 하는 언어가 왔을 때 그 언어는 이미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날라 온 하나의 미사일이거든요.
그게 미사일인데 그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빵인 줄로 알고 덥석 물면 그게 우리를 죽이게 만드는 거예요. 그 시범조로 누가 당했는가? 바로 이스라엘이 당한 겁니다. 다윗이 당했고, 그리고 열 두 제자가 그런 오해를 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던져놓고 뒤에 반복해서 뒤에 붙이는 문구가 있어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아마 그 이야기 듣고 제자들 전부 다 귀 만져봤을 거예요.
“어!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잘 들리나? 우리 귀 있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이 말은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인간들이 쓰는 공통언어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 언어를 못 알아듣는 정도가 아니고 이 말이 너희를 죽이게 할 것이다. 왜? 처음부터 너희는 인간이 아니고 육이었으니까.”
육이라는 것은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의미가 뭐냐? 단지 육체라는 그 의미가 다가 아니고, 그 다음에 영이 찾아오게 되면 ‘아, 육이라 하는 것이 단지 신체의 물질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이 되지 못한 이것, 영이 되지 못한 인간존재를 육이라 하는 구나.’라는 것을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알아요.
그래서 육의 특징에 대해서 오늘 본문 5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육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모든 출발점을 자기로부터 하는 겁니다. 나 잘되기, 내가 구원받기, 내가 성공하기, 내가 지금보다 더 착한 사람 되기. 나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런데 이것이 만족함이 없습니다.
어린애도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그런데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 보통 세 가지 정도로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요. 첫째는, 이 육체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한다는 겁니다. 갖고 싶은 것을 못가지고, 가고 싶은 곳에 못가고. 특히 보고 싶은 사람을 못봐요. 그리운 사람을 못 만나고. 그보다 더 심한 고문 같은 것은, 떨어지고 싶은데 안 떨어져요. 거머리 같아요. 미칩니다, 미쳐. 안 떨어져 나가. “여보야!” 하고 다가오는데 “좀, 떨어져 있자. 각방 쓰자.” 이래도 늘 이게 붙어 있어요. 또 보고 싶어도 못봐. 먹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 먹고 갖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 사고, 살고 싶은 넓은 아파트도 돈이 없어서 못살고, 뚜껑 없는 스포츠카도 돈이 없어서 못 타요.
그래서 인간이 도대체 사는 것이 뭐냐는 말이지요.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왜 간격이 벌어져 있느냐는 말이지요. 남들은 잘도 하던데. 그리고 젊고 싶은데 젊어지지를 않아요. 안 늙고 싶어도 더 늙어. 맨 날 마루 치면서 “청춘을 돌려 다오.” 하는 거예요. 마루 안에 청춘 들어 있어요? 공연 하면서 나훈아가 “청춘을 돌려다오.” 할 때 마루를 막 친다고요. 마루 친다고 청춘이 돌아오느냐는 그 말이지요.
두 번째 육체의 문제는, 한번 만족한 것이 오래 가지를 않아요. 그 시효가 얼마 안돼요. 좋았던 것이 곧 시시해져 버려요. 죽고 못 산다더니 6개월도 안되어서 시시해져 버렸어요. 방구나 막 뀌고. 다른 여자, 다른 남자 없이 두리번거리고. 이렇게 시시해진다고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냥 내 육체의 욕구와 욕망이 나를 가만두지 않거든요.
셋째가 뭐냐? 제일 어려운 것인데 이유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만족스러워요. 원인이 있으면 해결책이 있는데 이유가 없이 화가 나요. 신경질이 나고. 그래서 인간들은 대책을 세웁니다. 그 대책이 뭐냐 하면, 닮아가기. 흉내 내기. 모방하기. 남들 자전거 타면 그게 괜찮은지 알고 겨울에 자전거 타다가 엎어져서 손 새파래지고. 남이 등산복 입으면 100만 원짜리 등산복 사서 팔공산 한 번 갔다 와서 집안 구석에 던져놓고. 움직거리는 것도 이제 귀찮아요.
등산가서 칼로리 다 채우느라 살 뺀 것 도로 다 보충하고. 좋아 보이는 것은 다 해요. 남들 낚시하면 낚시하고, 계모임에서 해외 갔다 오면 한 주간동안 시차 안 맞아서 드러눕고. 다 흉내를 내는 거예요. 모방하는 겁니다. 돌아서면 허무가 더 강렬하게 밀려와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소망은 소망으로 남겨둬야 하는데 그걸 실습하게 되면 소망이 깨지고 그렇게 되면 소망의 리스트, 위시리스트가 점점 더 삭제되면서 점점 더 불안해요.
‘죽기 전에 25개 하려고 했는데 2개밖에 안 남았다. 이거 하고 나서 허무하면 다음엔 뭘 하지?’ 자기 꾐에 빠지는 겁니다. 하여튼 몸부림을 쳐요. 죄에 갇혀 있다 했잖아요. 죄에 갇혀 있는 이 모양새가, 죄에 갇혀 있는 그 벽에다 뭐만 남기는가 하면, 낙서만 남겨요. 내가 이렇게 탈출을 시도했다는 낙서만 남겨요. 십일조하고, 헌금하고, 예수 잘 믿고, 그게 전부 다 낙서에 불과해요.
내가 시도했으니까. 인간은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계속 시도하는 거예요. 세례 받고, 15년 동안 교회 다니고, 뭐가 어쩌고저쩌고. 인생은 무엇인가? 인생은 낙서다. 인간은 남들처럼 되기 위해서 어딜 가는가? 남들이 그럴싸하다고 여기는 요란스러운 장소를 찾아요. 광화문 앞, 그것도 밤중에, 추운데 촛불 들고.
여러분, 장소는 가봐야 아무 의미 없는 곳이에요. 그것은 하나의 현혹거리를 줍니다. 뭐가 있는가 싶어서. 단체로 모여서 외치면 거기서 무슨 진리가 나오고 진실을 찾고 정의를 찾는 것처럼. 99퍼센트가 놀러온 거예요. 뭔가 으쌰, 으쌰, 해서 괜찮은 자리에 묻혀 들어가서 일종의 흉내 내기거든요. 남 닮아가기라는 말이지요.
나만 망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망해도 다 같이 망할 수가 있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자리가 없어요. 인간은 이처럼 어릴 때부터 육이기 때문에 항상 상대를 찾습니다. 닮아 가야될 상대, 모방하고 싶은 상대, 흉내내고 싶은 상대, 그것 없으면 외롭다고 자살해요. 자살하는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외로워서 죽어요.
외롭다고 왜 죽는가? 어릴 때부터 안 외로운 환경에 있다가 갑자기 홀로 된다는 느낌이 드니까, 옛날처럼 못사니까 못살겠다고 죽는 겁니다. 처음부터 혼자 살았으면 되는데 괜히 으쌰으쌰 하다가, 흉내 내고 모방하다가.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 장소는 상대적 장소에요. 내 오른쪽이 뭐가 있고, 내 왼쪽에 뭐가 있고, 내 위에 뭐가 있고, 내 아래 뭐가 있고.
뭔가 상대가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자리가 정립되는 식으로 평생을 우리는 육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경은 뭐냐 하면, 그 육적인 것이 다 허물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상대적 처소, 상대적 자리, 상대적 위치는 날라 가버리고 영은 절대적장소를 제공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게 되면, “두 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모인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을게.”(마 18:20)
심지어 한 사람도 괜찮아요. 스데반집사님은 달랑 한 사람이었지만 주님께서는 벌떡 서서 스데반 집사를 영접해줬습니다. 절대적 장소는 위, 아래, 위, 아래, 위위, 아래, 위아래가 없어요. 옆도 없어요. 오른쪽 왼쪽도 필요 없습니다. 설거지 하다가도 구원받고, 운전하다가도 구원받고,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다가도 구원받고. 그것도 지하에서. 혼자 tv보다가도 구원받고.
어떤 상대적 특정장소에 의미를 줄 필요가 없어요. 그걸 바람 분다고 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왜 사람 손에 잡히지 않느냐 하면, 사람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그러면 이런 영적인 것을 하게 되는 근거가 있어요. 우리보고 물어보지도 않아요. 우리는 할 수 없기에 일방적으로 하나님 쪽에서 다 정해버렸어요.
“옛언약 주고 새언약 주자.” “예, 예!” 하나님끼리 알아서 다 결정했어요. 옛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준 겁니다. 우리 이방인에게 준 것은 아니에요. 이스라엘에게 줘서 이스라엘이 인류를 대표해서 망하게 하는 거예요. 망하게 할 때 그냥 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의문은 사람을 죽인다고 하니까 의문, 말이 어려우니 율법이라고 하지요, 율법을 줘서 모든 것을 죄 천지로 만드는 겁니다.
인간이 사는 것은 죄 천지고 심판을 받아야 마땅함이지요. 새언약은 그것을 증명하듯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맞아죽은 장소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인간세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규정하라는 말이지요. 너를 포함해서 네가 있는 곳이 구원될 수 없는 장소라는 것, 그게 바로 너에 대해서 절대적 안목을 가지는 거예요.
나는 구원될 수 없다. 내가 있는 자리는 심판에 합당한 자리다. 진리에 끝까지 가보기 전에 먼저 쪼르르 나보다 앞서서 빠른 속도로 진리에 도달해서 양팔 벌리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진실로 진짜 내 자리를 먼저 선점해서 나에게 보이시는 분이 바로 십자가의 자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게 십자가의 의미잖아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 힘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에요. 주께서 언약 안에서 나를 어떻게 다루냐 하는 겁니다. 에스겔 13장 16절에 보게 되면,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에스겔 내용이 이거예요. “너희가 언약을 어겼으니까 합당한 벌을 받아라. 그래서 너희는 망한다.” 이게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을 선점한 자들이 있었어요. 그게 거짓선지자들입니다. 거짓선지자의 주특기가 있어요. “하나님이 함께 있으니 평강이다. 우리에게 계속 구원이 주어진다. 걱정 말아라. 우리는 괜찮다.”
이걸 상품으로 해서 거짓선지자들이 장사를 해먹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어요. 이방나라는 몰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믿기 때문에 안 망한다는 거예요. 언약은 이 이야기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꼭 망해야 됩니다, 하는 것을 아는 자만이 제대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바로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은 이름이 인자에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이름을 앞당겨서 이야기하면서 그 인자다움의 기능을 미리 앞서서 보여주는 분이에요.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이라 하는 거예요. 거짓말을 해서 기어이 백성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겁니다. 거짓선지자들의 뒤에 누가 있는가? 악마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서 단언합니다. 어느 누구도 악마의 친절한 인도함이 없이는, 악령의 인도함이 없이는 아무도 지옥 못갑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안 믿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친절한 가이드, 지옥, 무저갱에서 올라온 그 귀신들이 아주 친절하게 “'이랏샤이마세!(어서옵쇼)” 해가지고 인도하는데 그 방법이 뭐냐? 행함입니다.
“이렇게 행하시면 당신이 마일리지도 쌓을 수 있고 당신은 머지않아 천국에 갈 겁니다. 미리 감사의 찬송을 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에스겔 11장에 보면, 에스겔이 이러한 예언을 합니다. 그 때는 지금과 같이 하고 마지막 때에 새언약이 오게 되면 지금 같지 않고 말씀이 우리 안까지 파고 들어오는 거예요.
이제는 하나님의 성신, 지금은 성령이지요, 에스겔 11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친히 너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뭐로 만드는가? 성소로 만들어서 19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한다는 말이지요. 일치한 마음이에요.
일치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나 할 것없이 똑같은 고백을 내놓는다는 말은, 이것은 너나 나나 우리들의 종교적인 신앙솜씨가 아니라는 거예요. 똑같은 질의 선물을 받은 겁니다. 똑같은 질의 택배를 받은 거예요. 이걸 가지고 세자로 새언약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31장 31절에도 나옵니다. 유명한 말씀인데,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십계명 줄 때 말씀은 우리 앞에서 스톱이 돼요. 간격이 있고 그 말씀을 우리보고 지키라는 겁니다. 지키라고 하는 그 명령자체가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것은 문자고 율법이에요. 지키라고 하니까 ‘이것 지키면 우리 이스라엘은 구원받겠구나.’ 하고 선뜻 지켜서 내가 이만큼 잘났다는 것을, 이만큼 신앙생활 잘한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어서 나오는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 자기 의가 나와요. 육에서부터 뽑혀져 나온 자기의가 점차 변색이 되면서 십자가 앞에서 뭐로 변하는가? 저주로 와 버립니다. 이것은 처음 출발점이 뭐냐? 저주받을만한 것을 자기의라는 형태로 새언약이 증명을 해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현재 이방인들은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해서 “나는 양심대로 살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
윤동주의 서시에 그런 내용이 나오잖아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깜짝깜짝 놀랐답니다. 혹시 죄짓는가 싶어서. 그렇게 했던 그것을 율법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끄집어내는데 율법이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마지막 탈탈 털릴 때까지. 자기 의가 저주받을 죄가 된다면 우리의 장소라는 것, 우리의 장소는 악마가 만들어준 장소에요.
그런 장소에 백만 명 모여 봐야 그것은 지옥의 함성이에요. “하야하라.” 타조 알이 얼마나 큽니까? 망치로 깨도 안 깨져요. 그 타조알 속에서 보면 하야하라고 한 그 외침이 그 알껍데기에 붙어 있는 낙서로 덕지덕지 묻어 있어요. 그 안에서 인간들이 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용어를 인간들이 아무리 갖다 붙여봐야 물로 밀어버리면 묵은 때처럼 다 벗겨져요.
30년, 40년 신앙생활 했다고 교회 와봐야 옆에서 누가 밀면 맨몸 다 나옵니다. 육신 그대로 나와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속까지 파고 들어와야 하는데 파고 들어오지는 않고 그저 흉내 내고 모방하는 그 버릇이 어디 갑니까? 교회와도 모방을 해요. 자기는 이렇게 박수치면서 찬송을 했는데 옆에 있는 권사가 해병대박수를 하니까 그렇게 쳐야 은혜 받는지 알아요. 뒷자리에 앉았는데 앞자리에서 “주여! 믿씁니다.” 하고 쌍시옷 들어가게 하니까 앞자리에 앉아야 은혜 받는지 알고.
흉내 내고 모방하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네가 간다면 나도 가겠지’ 하는 그것 사기입니다. 그것을 저는 진실한 사기라고 하는데 상당히 진실스럽게 보이지만 어쨌든 사기에요. 상당히 경건스럽게 보여요. 경건 맞지만 문제는 사기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 사기 외에는 밀치게 되어 있어요. 왜냐? 본인이 사기 치는 사람이기에 거짓말 하는 것만 옹호하도록 되어 있어요.
왜? 그걸 모방하게 되면 덩달아 내가 잘난 신앙인으로 개조될 수 있는 찬스를 내가 미쳤다고 놓칩니까? 안 놓치지요. 술 끊고 담배 끊으면 천당 가는지 알고 있는데요. 이것은 제가 누구를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열 두 제자가 하는 행세였어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 받아놓고 제자들 발을 씻겨줍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야말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발을 씻겨주니까 인간들의 육의 본성이 가만있지를 않거든요. 그대로 따라 해요. 꼭 천안의 백석대학 같아요. 그 학교는 교수가 학생들 발 씻겨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거예요. 그 광고비가 얼마인줄 알아요? 엄청납니다. 애들 헌혈하는 것 보여주면서 하나 되었다는 그 광고도 그렇고.
신학교 치고 광고하는 대학은 백석대학교 밖에 없어요.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제자들 발을 씻깁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생님이 저희들 발을 씻깁니까?” 하니까 “이렇게 씻지 않으면 상관이 없다.” 했어요. 그 때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합니다. “발만이 아니고 다 씻어주옵소서.”
베드로가 얼마나 육적인가 티를 팍 낸 거예요. 베드로는 지금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수님은 죄 용서하시는 분이고 나는 용서 받으면 되니까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발을 씻겨주면 나는 용서 받는다, 하거든요. 그런 생각을 했는데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나는 주님한테 용서 받는 합당한 권리가 있는 사람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베드로가 얼마 뒤에 예수님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난뒤에, 주님 찾아오고 난 뒤에 이 대목을 다시 기억합니다. 주께서 기억나게 만들었어요. “베드로야,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 다시 말해서 “네가 사랑을 안했지? 안했는데 네 생각에, 배신하기 전에는 네가 주님을 얼마든지 사랑한다고 착각을 했었지? 그런데 지금에 와서 네 생각에 아직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묻는 겁니다.
세 번 물어요. 아마 한 번 더 물었으면 베드로 자살할 뻔 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제가 주체를 못 바꿨습니다. 목적 자리와 주체 자리를 제가 혼동했습니다. 주께서 베드로를 새로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베드로 주께서 잘 관리하라는 것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주인공 나를 주께서 도와주는 줄 알았습니다. 이 썩어빠진 나를, 버릴 수 있는 나를 안 버리고 챙겨주시는 그 권한이 주님에게만 있다는 그것을 저는 몰랐습니다. 그것이 사랑인줄 몰랐습니다.”
요한 1서에 보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우리는 누구를 미워했어요. 도움 되는 예수와 도움 되지 않는 예수 가운데서 나에게 구미에 딱 맞는 도움 되는 예수를 채택한 거예요. 그게 바로 잘못된 하나님이고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바울되기 전의 바울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미워해서 돌아보지도 않았던 그분이 찾아올 때 계속 미워했음을 우리 안에 내용물로 차곡차곡 채워줄 때 우리는 예수님만 자랑할 수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이 아기를 가졌을 때 이름부터 먼저 지어놓고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희한한 일이에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름부터 먼저 지었어요. 그리스도의 이름이 따로 있고 그 이름에 합당하게 성도 만들기에 나선 겁니다. 그 원리를 이야기하는데 이름을 이삭으로 지었습니다.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리니 명년 이맘때쯤 아기를 낳을 것이다.”
이삭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그 내용이 이삭이라는 이름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나이 90된 여인에게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하니까 사라가 실실 웃었어요. 손님에게 실례가 될 까 돌아서서 안 들키게 웃었는데 그 세 명의 천사가 “네가 웃었구나.” “안 웃었습니다.” “웃었잖아.” 웃었다는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그게 중요한 일이에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가 제대로 이 세상에 현실화된 거예요. 서울 의존교회 강의에서 디모데후서 강의를 하면서, 데마가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떠났다는 대목을 설명했습니다. 데마라는 사람이 통역자로서 사도바울에게 도움을 줬는데 세상을 사랑해서 떠났다는 거예요. 제가 설명하기를 데마가 정상적인 사람이에요.
데마가 인간 되었어. 인간 된 거예요. 주제넘게 예수 믿는다는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주께서는 인간에게 있을 수가 없는 일을 지금 벌인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망해야 돼요. 뭔가 수상해. 성령 받은 사람이 이렇게 많을 리가 없어요. 주께서 시작한 선지자나 사도한테는 양이, 촛불집회에 몇 명이 모였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걸 지옥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뭔가 서로 흉내 내기가 되었기 때문에 모였다는 겁니다. 서로 육신의 본성을 감출길이 없어서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터져 나와서 자발적으로 모인 거예요. 그런 인간들이 교회 나오면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자기들이 원하는 예수를 채택해서 온 거예요. 교회는 밀어내야 됩니다.
밀어내는데 오거든요. “뭐 얻으려고 오셨습니까?” “주께서 하시니까 왔지요.” 글쎄요. 그 말을 믿어야 될지. 그래놓고도 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거든요. 사도바울과 함께 한 사람 중에 마가라는 사람도 있어요. 마가는 갔어요. ‘내가 좀 정상으로 살자.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못 믿겠다. 어떻게 사람에게 맞아죽은 그 십자가가, 그 피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 착해야 구원받지.’
이렇게 해서 나갔는데 나중에 다시 왔어요. 그렇다고 “목사님, 저도 나갔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요.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아예 대놓고 반대했어요. 누가는 끈질기게 계속 있었고요. 이 네 가지 타입을 설명하면서 이 네 가지가 매일같이 우리한테 반복되고 반복돼요. 네 가지, 싸가지지요. 이 네 가지가 계속 나와서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바깥에 있던 의문, 율법이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내 안에까지 와서 우리가 디모데후서 4장이 되는 거예요. 내가 이런 식으로 구원받는다, 가 아니라 주께서 이런 식으로 다룬다는 것을 늘 표출해 보이는 겁니다. 그 모든 말씀은 십자가로 모아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결국은 망했다고 했는데 과연 끝까지 망했는가? 과연 전부 다 망했는가? 그것은 역대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해서 다윗이 벌 받는 대목이 나옵니다. 역대상 21장 15절이하에 보면, 다윗이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해서 단을 쌓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오늘 분문에서 영이라 하는 말은 그냥 추상적인 귀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영이란 그 현장을 심판의 장소로 만드는 작업, 내 속을 주께서 저주의 장소로 만드는 십자가의 반복이지요. 십자가의 능력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그게 바로 영이고 그걸 두자로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 만들기, 우리로 하여금 심판의 자리로 만들기, 이게 지금도 작용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역사를 가지고 귀신이 왔다갔다고 하는데 욥기 9장 11절에 보면, 욥이 하는 말이,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뭘 봤다 하는 것은 믿지 마세요. 그것은 타조알 속의 낙서입니다. 구원받으려고 아주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뭘 보고 싶어 하는데 마귀가 안보여줄 리가 있어요? 마귀가 친절한 가이드가 되어서 이것 보고 지옥가라는 거예요. 천국 보고 지옥가고, 지옥보고 지옥가고. 욥은 말하기를, “함께 있는 것은 맞지만 절대로 볼 수는 없다.” 다만 나타나는 현상은 뭐냐? 나로 하여금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현상을 일으키는 거예요.
다윗은, 성전이 왜 있는가를 알게 된 거예요. 역대하 6장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 지으면서 나오는 중요한 대목이 나와요. 6장 36절에,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땅의 원근을 물론하고 끌어간 후에” 돌이켜 간구하거든 이 성전의 희생을 보시고 용서하옵소서, 라는 내용입니다.
성전이 있는 이유는 벌써 이미 확정되었어요. 범죄하지 않는 인간, 그것도 매일같이 범죄하지 않는 인간이 없다는 것. 매일같이 범죄한다는말은 매일같이 율법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선하고 악하고 중립지점이 없어요. 늘 작용하고 있는데 그 작용이 어디서 나왔는가? 성전에서 나온 거예요. 그 성전의 완성은 십자가에서 나온 겁니다.
십자가 앞에 나왔을 때 우리가 떠밀어서 죽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준 것은, 이미 그 저주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저주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에 주께서 새언약을 다루기 위해서 사용하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고 구원 안 받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새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반복시키다 보니까 우리가 율법 앞에서 죄라 하는 것, 말씀 앞에서 죄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쁘게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이 현장이 죄인데 이 죄가 드러나야 하는 이유는 주님이 값을 치른 이 값이 나의 진정한 값이라는 것. “너 얼마짜리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살 정도로 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전으로 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새언약에 합류된 오늘날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루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사적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날마다 모든 발걸음과 생각이 죄밖에 나오지 않도록 조치하는 자체가 저희들을 이미 다루고 있다는 증거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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