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강-고후 2장 16-17절(생명에서 생명으로)1611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2장 16-17절입니다. 신약성경 288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2:16-17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또 하나님께서는 지옥 보낼 사람을 지옥 보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16절에서 “사망으로 좆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여기서 사망이 두 번 나오지요. 저 사람은 그냥 사망으로 간다, 또는 지옥으로 간다고 하면 될 것인데 “사망으로 좆아서 사망에 이른다.”
앞에 있는 사망은 무엇이고 뒤에 있는 사망은 무엇이겠는가? 사망에 이른다고 했으니까 지옥에 간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옥 보낸다고 하면 될 것인데 사망으로 좆아서 사망으로 간다고 해서 왜 앞에 ‘사망’을 붙여놓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사도바울이 나서서 복음을 전파할 때 이미 그 사람이 지옥갈 사람인지 천국갈 사람인지 이 세상에서 결판이 나는 겁니다.
결판이 나는데 그 기준이 있어요. 나는 천국가고 싶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가고 싶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가는 것이 복이고 지옥 가는 것이 저주라면 복과 저주의 기준이 이미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아닙니다. 이것이 진짜 중요해요.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기준이 우리들은 아니에요. 우리들은 아니라는 말은, 내 행함으로 지옥가고 내 행함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내가 잘하면 천국가고 내가 못하면 지옥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 기준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이미 우리 말고 따로 뽑아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지 내가 복의 근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과 저주의 근원으로 이미 따로 확정지어놓았어요. 그러면 신약에서는 뭐냐? 예수님이 이미 복의 근원이 되고 예수님이 저주의 근원이 되시는 거예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는 그 이야기만 있으면 참 긍정적인데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되어버리면 아브라함이 설쳐댄다는 자체가 그 시대에 부정적인 요소가 나대는 거예요. 좋은 게 좋다고 넘어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등장했다면 이미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점검해야 돼요.
내가 얼마나 단독적으로 훌륭한가, 이것이 아니라 저 사람과 나는 어떤 관계이고 어떤 사이로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느냐를 보라는 거예요. 그저 매일 매일을 서울의 광화문광장하고 맺지 마시고, 촛불과 맺지 마시고, 대통령과 맺지 마시고, 매일 매일을 나는 복의 근원과 어떤 관계로서 살아가느냐를 보라는 말이지요.
그 분에게 내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그것은 지옥가기 전부터 이미 지옥 간 사람으로 판정난 겁니다. 어디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세계의 운명 지어진 것에 대해서 자신의 주관을 새롭게 발견하는 거예요. 그 세계 내에서 나의 운명은 어떻게 지어졌는가를, 거기에 합당한 주관성, 나의 정체성을 다시금 발견하는 겁니다.
복의 근원이 있다는 말은 아브라함과 나와 관련성이 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설쳐댔다면 신약에서 갑자기 사람들은 자기 시대가 완전히 파산날 수도 있고 파멸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징후로 알려줘야 돼요. 그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 세상 자체가 어떤 구심점, 중심점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동안에는 그런 것이 없었고 각자 자기인생 살면 됐는데 이제 각자 자기인생 산다고 해서 그것으로 성공작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농사짓는 사람은 각자 자기농사 지으면 되지요. 누구 농사 하나 잘된다고 덩달아 잘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각자 자기농사일에 열심히 하면 되는데 세상이 그런 세상이 아니고 누구 하나 농사 잘 되면,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그것이 본인의 운명이 되고, 누구 하나 농사가 잘되든 말든 내 농사만 잘 짓는다고 죽자 하고 버틴다면 그것은 이미 파산 난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속된 거예요. 독자적인 삶이라 하는 것은 허락받은 적도 없고 권리도 없습니다. 어떤 분에게 종속되어 있는데 그 구심점, 중앙에 있는 분에게 종속되었어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망에서 사망으로, 사망을 두 개 이야기하고 생명에서 생명으로, 생명을 두 개 이야기하는 이것은, 15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 앞”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미 사망도 정해놓은 것이고 생명도 정해놓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져 분류된 인간형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생 얻을 사람들, 천국 갈 사람은 생명에 관한 기준을 그 사람에게 알게 하고 지옥갈 사람은 지옥 갈 기준에 대해서 이미 그들에게 배당을 시킨 겁니다. 그 사람이 그것을 무시하든 말든 배당시킨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잘만하면 네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잘 들어놓으세요. 사도바울이 복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신이 구원받고 안 받고는 당신하기 나름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 사람이 자기 행동에 의해서 자기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 기분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난 뭔데?” 대번에 이렇게 돼요. “내가 로봇인가? 내가 로봇청소기에 불과한가? 아무것도 아닌가?” 정답은 나와 있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편이다. 간단하게 나와 있어요. 그런데 그런 소리가 듣기가 싫은 거예요. 왜? 우리가 불량품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이 아닙니다. 정품이 아니에요.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잖아요. 뭔가 가짜에요. 가짜 명품노릇하고 있어요. 온 천지가 다 가짜에요. 그것을 아담의 반복이라 하는데. 선악과 따먹은 아담은 진짜 아담이 아니에요. 진짜 아담은 마지막 아담이 진짜고 두 번째 아담이 진짜지 우리는 그 가짜가 가짜를 잉태해서 낳은 그 가짜들의 집단입니다. 가짜들이 데모하고 있어요.
뭐가 뭔지를 아무것도 몰라요. 생명에서 생명을 이룬다는 것은 나중에 죽고나 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땅에서 죽기 전부터 지옥과 천국은 결정 난 겁니다. 자신의 이 몸은 흙에 속한 몸인데 내가 늙는 죽는 이유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주께서는 네가 늙는 이유, 죽는 이유를 네 스스로의 양식과 이성으로 공부를 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아는 것도 어떤 따로 나온 사건이 있어야 돼요. 내가 탐구하고 연구하고 도 닦는다고 알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이 난처한 이야기에 대해서 16절 끝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오.” 아주 짧게 이야기했어요. 그냥 감탄사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그 말이지요.
이것을 증거하고 이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은 인간의 손에서 인간의 능력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신학교 간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엄마의 기도 못 잊어, 그런 식으로 신학교 보낸다고 해서 감당될 문제가 아닙니다.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고 감당할 문제가 아니에요. 20년, 30년 목회 한다고 그 다음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감당할 일이 아니에요. 20년 동안 복음 전했다고 그 다음날 자동적으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복음전하는 본인이 가짜기 때문에 그래요. 선교사 치고 가짜 아닌 선교사가 없어요. 목사치고 가짜 아닌 사람이 없고. 전부 다 가짜의 세계에요. 우리가 아까 교독문 했지만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믿을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람이 이렇게 있습니까? 믿지 말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믿지 말라는 인간을 왜 그렇게 잘 믿는지. 사업 망한 사람 하는 이야기 들어보면 보증 잘못 서서 망했다는 이야기가 거의 90퍼센트라. 보증을 왜 섭니까? 믿었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믿지 말라고 하는데. 잠언에는 아예 보증서지 말라고 했어요. 잠언서 보지도 않은 모양이라. 진작 봤으면 보증 안섰을 것인데.
성경에서 그런 것 좀 찾아내지 그런 것은 눈에 안 보이는 모양이지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런 것만 잔뜩 보이고 보증서지 말라는 말씀은 안 보이는 모양이지요. 이웃 사랑한다고 같이 투자하면 떼돈 벌지 알아요? 가짜에서 무슨 이웃사랑이 나옵니까? 참 같잖지도 않아요. 가짜에서 무슨 사랑이 나와요? 가짜는 사랑할 줄을 몰라요. 자기 이익 챙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이 가짜입니다.
우리는 다들 그런 집안에서 양육 받았어요. 부모로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네가 양심대로 살면 복 받는다, 그게 바로 그런 소리 한다는 자체가 가짜잖아요. 양심대로 살면 손해 봐도 너는 양심대로 살아라, 그렇게 가르쳐야지요. 양심대로 살면 복 받는다. 복 받기 위한 노림수를 가지고 양심대로 살라는 수작을 부리는 것 밖에 더 됩니까?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본인이 나서서 해결하려는 습관을 스스로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 2천년동안, 그 이상 인간을 줄곧 속여 온 것이 있어요. 예수님은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않습니다. 2천년동안 성당과 교회가 거짓말을 해왔고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그런 내용은 성경에 없습니다. 생명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전율을 느낍니다. 아직도 교회에 가면 생명을 준다고 생각해요. 누가 누구에게 뭘 줘요. 안 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생명은 예수님 본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받아챙길 수 있는 생명의 없어요. 우리가 뭔데 생명을 줍니까? 우리가 생명 같으면 초반부터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도 않았어요. 쫓아내놓고 생명을 준다고요? 그런 이중플레이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에요. 예수님께서 생명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너에게 관심 끄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거기에 대해서 관심 끄라. 천국 갈 자격도 없으면 무슨 천국을 넘보나? 아직까지 네 주제파악도 안되나? 갈만한 사람이 가야지 네가 왜 가야 하는데?” 천국은 아들의 나라에요. 천국을 갈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어느 누구도 갈 자격과 권리가 없습니다. 천국가게 해 달라고 주제 넘는 요구를 하지 마세요.
여러분 잘 아시는 주기도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주일학교 애들도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군에 가면 기독교신자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그거예요. 주기도문 해보라는 것. 주기도문, 그 속에 있는 것. 다들 아는데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러분, 평소에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에 이것이 들어 있습니까?
평소에 우리 기도내용이 뭐냐? 잘되게 해달라고 하잖아요. 누구? 기도하는 당사자 잘 되게 해달라는 그거잖아요. 남 잘되게 해 달라는 것 같으면 미쳤다고 기도합니까? 우리는 시기질투가 가득한데, 그래서 남 잘되는 꼴을 못 보잖아요. 뭐든지 나한테서 나오는 행동은 그것이 나한테로 결과가 돌아올 때 내가 그 행동을 하고 싶은 노동의 의지가 생기고 보람이라는 것이 거기서 얻는 거예요.
내가 했는데 나한테로, 오직 나에게만 돌아올 때 우리는 그 행동에 나설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 주기도문에서 나라는 것이 아예 없어요. 참 몇 십 년 교회 다녀야 그걸 발견하겠습니까? 주기도문에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나와요. ‘우리’라 하는 것은 나로부터 우리로 넘어갈 수 있는 여지는 끊어져 있어요.
인간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나, 오직 나에게로만 돌아오게 되어 있지 우리에게는 안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 우리라는 것은 누가 만들었는가? 예수님이 없던 우리를 새로 만들 때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 우리의 특징이 뭐냐? “악에서 구하옵소서.”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자신의 능력으로 이 악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예수님 덕분에 악에서부터 벗어나게 된 이 우를 계속 우리답게, 처음부터 건지신 주님이 주체자라면 그 주체자가 계속 우리로 우리답게 지속시켜 주옵소서.”
그게 뭐냐?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상황이 연장되고 영원케 하옵소서.” 그렇다면 그 악은 뭐냐? 우리가 선악에서 판단할 수 있는 악이 아니지요. 내가 만약에 ‘저것은 죄고 이것은 선이고.’ 이렇게 판단한다면 우리는 죄와 관계없이 바깥에 관람자로 나설 때는 판단이 가능합니다.
저는 동대구역에 참 자주 갑니다. 마일리지도 많이 쌓였어요. 동대구역에 갈 때마다 늘 보는 사람이 있어요. 군밤 굽는 할머니들. 20년째 같이 늙어가고 있습니다. 군밤 구울 때 연탄불로 굽잖아요. 일산화탄소가 계속 나와요. 그걸 하루 종일 마시는 거예요. 2년 전 부터 동대구역이 공사를 하잖아요. 그 때 그분들이 어디로 갔나 보니 공사하는 그곳에서 계속 옆으로 이동하면서 밤을 구워요.
20년 동안 딱 한 번 사먹어 봤어요. 너무 가련해 보여서. 두 번 다시 안 사먹습니다. 그리고 사먹지 말라고 제가 지금 광고하고 있습니다. 덜 익었어요. 왜냐하면, 군밤에게 물어보지를 않는 거예요. 자신은 군밤을 굽는 제 삼자인 관람자로 있어서 대충 구워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군밤에게 물어봐야지.
우리가 죄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끄집어 내 준 담당자가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거기서 바르게 산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입장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할 필요 없어요. 기도할 시간에 착한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알아서 스스로 기어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광야로 바로 가지 않고 홍해로 가로막았어요.
이 말이 뭐냐?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 이스라엘의 유지됨은 한 시라도 나 없이는 이스라엘 될 수가 없음을 나타내는 겁니다. 죽음에서 건져내는 그 능력이 계속 이어줘야 돼요. 한번 구원받았다고 “이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구원 그 이후는 없습니다. ‘구원 그 이후’라는 말이 성경에서 성립이 안돼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도바울의 복음은 ‘구원 안’이에요. 구원 그 이후가 아니고 예수 안, 성령 안입니다. 안에 있는 사람은, 우리가 옛날 죄에 들어앉았을 때 죄에 대해서 우리가 탈출을 하려고 노력해 봐야 소용없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의에 대해서 착하다고 더 의로워지고 나쁜짓 한다고 덜 의로워진다는 그런 상황이 아니에요.
옛날 죄 아래 있을 때 나쁜 짓 더 한다고 악해지고 덜 한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듯이, 여전히 죄 아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착한 일 하나 나쁜 짓을 하나 계속 의인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 안에서는 선악적인 판단에 의해서 선악이 판단되지 않기 때문에. 선악으로 알던 그 판단을 이미 죽여 버렸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것을 소멸시키고 없애버립니다. 선악에 의한 판단을.
왜냐하면, 선악을 안다는 그 자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요건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2천년동안 성당, 교회가 속여 온 것이 뭐냐? “여러분, 더 살고 싶지요?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주시는 분이기에 예수 믿으면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에게 옵니다.” 이렇게 가르쳤어요. 그러면 예수 믿는 그 노력과 행위와 정성과 열성은 결국 현재 나 자신을 없애지 않겠다는 고집의 일환이에요.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예수 믿겠다는 그 노림수가 절대로 나는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아주 지독한 고집의 악마의 모습이고 악마의 얼굴이에요. 죽어도 나는 포기 못한다. 이단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짜고 이단이고 불량품이에요. 오늘 본문 보세요. 생명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앞에 사망에서 사망으로, 그 이야기를 하지요.
가짜 없는 데서는 진짜가 안 나오는 법이고 지옥으로 둘러싸이지 않으면 천국이 없어요. 천국은 지옥 속에서 나옵니다. 죄 속에서 의가 나와요. 살아 있는 내가 영생 얻겠다고요? 죽음 속에서만 영생이 나와요. 순서를, 앞에 있는 과정을 생략하지 마세요. 그것을 빼먹지 마세요. 모든 교회 가짜고 모든 성당 다 가짜입니다. 그 앞 전제를 빼먹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왜? 죽는 이유를 몰라요. 행복한 것은 아는데, 이렇게 하면 내 뜻은 이루어지는 그것은 아는데, 이렇게 하면 내가 사업성공하는 그것은 아는데, 사업성공하면서 내가 왜 늙어죽는지는 몰라요. 선악세계와 생명나무세계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선악세계자체를 소멸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붙잡고 있으면서 그것을 안 놓으려고 해요. 죽자하고 그것을 쥐고 있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쥐고 있는 방법이 뭐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겠다는 거예요. 영생 준다면 예수도 믿고, 행복 준다면 법륜스님도 믿고, 절에도 가고, 점도 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그런 것은 소용없다는 거예요. 말릴 수는 없는 것이고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왜 소용이 없는가? 죄 용서가 예수 믿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사건에서 죄용서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복과 저주의 기준이, 내가 얼마나 나대고, 교회에서 얼마나 나대고 설치고, 하나님 영광 찬양한다고 하는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고요, 헌금을 얼마를 하고 십일조를 얼마나 했는지,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고, 나 외에 다른 분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죄용서가 내가 반성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죄용서가 십자가사건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정리가 되어버렸어요. 그렇게 죄용서가 십자가로 결정이 되면 죄가 뭐냐를 십자가로부터 다시 정리가 되어야 돼요. 예수님이 곧 영생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영생 얻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용해서 영생 얻으려는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속이 시원하다. 예수 믿고 영생 얻으려는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넣어주는 천국이 없어요. 예수님이 곧 영생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꾸 예수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느냐 하면, 사람은 구체적인 존재고 예수님은 모호하니까 역시 구체적인 내가 어떤 변화가 되어야 되고, 내가 달라져서 내가 영생 얻었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목격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은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왜? 소멸하기 때문에. 영원하지를 않아요. 90까지 살다가 죽어요. 죽으면 다른 세계에 간다고 이야기들 해요. 다른 세계? 지옥 갈 사람에게 다른 세계는 없습니다. 이미 그 사람의 지옥은 시작된 거예요. 자기 몸이 있다고 해서 이 세상이고 몸이 없어진다고 해서 저 세상이 아니에요.
그 질이, 성질이 동일한 세계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동일한 세계입니다. 지옥 간 부자가 나사로 보고 심부름시키는 것을 보세요. 자기를 위해서 어떤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죽기전부터 이미 지옥에 갈 사람이었어요. 어떤 사람이 90세에 죽었는데 타계했다는 거예요.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 50년 통치해서 쿠바를 최빈국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아주 훌륭한 공로자지요.
어릴 때 들은 그 카스트로라는 이름을 잊을 수가 없어요. 먹고 싶은 카스테라하고 발음이 비슷해서. 저 인간 언제 죽나, 언제 죽나……. 왜? 우리는 어릴 때부터 공산당이 싫어요, 그걸 배웠거든요.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배운 것은 요한 1서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영생은 우리보다 더 구체적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영생이에요. 우리자신에 대해서, 내가 앞으로 사업을 잘 할까, 애 공부는 잘 할까, 관심 뚝 끊으세요. 관심 끊으라고 한다고 해서 끊을 위인들도 아니지만, 그것은 괜히 하는 소리고 우리가 천당갈까, 지옥갈까, 관심 뚝 끊으세요. 사람이 관심 갖는 곳으로 귀환하게 되어 있거든요.
아무리 에둘러도 나에게 관심 두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요한 1서 펼치는 순간, 우리의 관심사는 너 자신이 아니라고 단정 지어 버립니다. 사도요한이 복음을 외칩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예수님이 바로 영생이에요.
여러분이 그 차이를 아세요. 예수님이 영생이라는 말과 예수 믿으면 영생 얻는다는 그것과의 차이를 분명히 아세요. 우리는 영생 얻을 자격도 권한도 없습니다. 영생은 주님의 소관이고 권한이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어떤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나타난 그 영생에 대해서 얼마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구체적 인물로 봤으면…….
7절에 보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의 피가, 그 피가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우리 손톱 밑의 가시가 우리한테는 구체적이지요. 하나님에게 구체적인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들의 피, 예수의 피, 화목제물의 피, 모든 것은 그 피에서부터 의미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지옥 가는 이유는 피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2천년동안 성당과 교회는 이렇게 사람들을 속여 왔습니다.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라. 아닙니다.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라,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라. 그 말은, 인정하라고 하는 순간 인간은 예수님을 자기가존재하는 것처럼 예수도 하나의 존재의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과 그리고 나같이 생긴 분이 저기 있다는 것은 하나의 대상체가 되지요.
내가 구체적인 것처럼 구체적인 대상체를 내가 남들과 사귀듯이 사귀게 되면 나는 영생 얻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쇼입니다. 그 구체적인 판단이 누구에게서 나왔습니까? 가짜인 나에게서 나왔어요. 미국 뉴저지아카데미에서 <구약의 흐름>을 강의했는데 15강까지 강의를 하면서 처음부터 언급한 것이 있어요.
가장 구체적인 것은 가짜인 우리의 눈에 안 보인다고 했어요. 눈에 안 보인다는 말을 제가 강조해야 될 이유가,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간주해서 아예 관심의 대상 목록에서 빼버려요. 기도하고 응답은 어떤 것이 있을까, 챙기는 거예요. 응답을 챙겨야 구체화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구체적으로 판단이 되는 것만 의미 있는 것으로 주워 모으는 거예요.
기도를 얼마나 해서 우리교회가 얼마나 부흥되었는가? 자꾸 숫자를 세고 헌금 액수를 따지고 묻는 거예요. 왜? 그걸 판단하는 내가 나에게 마지막 구체적인 존재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뭐냐? 가짜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겁니다. 소멸될 안개 같은 존재이면서, 안개 같은 우리가 사라지면 아무것도 없는데, 살아 있을 때 계속해서 영원히 사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 판단이 옳다고 여기는 겁니다. 소멸될 가짜의 판단은 이단이에요. 가짜입니다. 이단의 특징이 뭐냐? 자기를 지적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문제 있다는 것을 판단할 기준을 외면해버리는 것이 이단의 특징입니다. 왜 성경을 안봅니까? 보다가 혹시라도 내가 가짜인 것이 들통 나면 내가 싫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 말고 다른 것을 보세요. 나를 긍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힘들지만 나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이런 것을 깨우치게 하고 확인시켜 주고 각인시켜줍니다. 그 희망이라는 것을 보고 200만도 모이고 하잖아요. 성경보세요. 희망가질 권한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어느 것이 진짜 나의 모습입니까? 희망없는 우리가 진짜 모습입니까, 아니면 양보하고, 마음을 낮추고, 내려놓고 또 내려놓으면 어떤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그것이 진짜 내 모습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백날 내려놓아봐야 희망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2천년동안의 성당과 교회는 오는 교인들에게 항상 희망을 주는 마지막 멘트를 해서 다시 돈을 들고 또 찾아오도록 유도를 해 왔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나 그 외 지역에서 선교할 때 전부 다 희망을 줘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희망을 줍니다. “예수는 희망이십니다.” 가짜입니다. 이단이에요. 마귀의 앞잡이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내가 관여할 일은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잠시 등장했다가 은퇴하세요. 무대바깥으로 사라지세요. 남아 있는 모든 일은 주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닙니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갈 일과 죽음에서 죽음으로 갈 일만 남아 있습니다. 구약의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했습니다. 오해했으니까 그들이 망했지요. 역대상 9장 24절에서 2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문지기가 동, 서, 남, 북 사방에 섰고 그 향리에 있는 형제들은 이레마다 와서 함께하니 이는 문지기의 두목 된 레위 사람 넷이 긴요한 직분을 맡아 하나님의 전 모든 방과 곳간을 지켰음이라 저희는 하나님의 전을 맡은 직분이 있으므로 전 사면에 유하며 아침마다 문을 여는 책임이 있었더라.”
성전을 지키는 레위지파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시대에 정해진 제도에요. 성전을 중앙에 두고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 뭐가 있느냐?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성전의 핵심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이스라엘의 기초가 된다는 것, 바탕이 된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 너희 백성들은 아무것도 없는데서 새로 생긴 민족이라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여기 있는 내가 천국백성 되어야지, 하는 그 과정은 중간에 절단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 여기 있다, 여기 있다, 아, 나는 없는 존재야. 있다가도 없어질 존재야.” 이렇게 돌아서야 돼요. 없음이 우리의 뿌리가 돼야 됩니다. 있는 내가 뿌리가 되면 우리는 내 행함을 내세우게 돼요. 그런데 없음이 뿌리가 되어버리면 지금 내가 행하는 것도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없는 예수님에 의해서 그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나를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없음이 돼야 돼요. 만약에 없음이 있음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어떤 성질을 발휘하느냐? 뭐든지 소유, 주워 모으려고 해요. 치매 걸린 할머니는 뭐든지 다 집에 갖고 오잖아요. 자꾸 주워 모으려고 해요. 이것은 내꺼, 이것은 내 교회, 내 교단, 내 종교, 내 축복, 내 은혜, 내 자식, 내 외손녀, 자꾸 끌어 모으려고 해요. 요새 내 외손녀 기고 걷는다고 바빠요.
자꾸 뭐든지 끌어 모아요. 그래서 내 것이 되면 관심을 거기에 올인 해버려요. 내 것 잘돼야지, 내 교회 잘 돼야지. 내가 믿는 예수 잘 돼야지. 자기가 믿는 예수가 어디 있어요. 자기가 믿는 예수 없습니다. 사람이 감당치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예수를 감당하려고. 진짜 예수님은 감당 못합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소멸이에요.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이미 있던 내가 가짜임을,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되돌아와서 가짜 나를 늘 내가 쳐다보는, 그리스도 안에서 쳐다보는 안목을 가지고, 이 육체에서 낯선 주관이 기존의 주관을 물리치면서, 몰아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안목을 가지고 새로 보게 하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 안이기 때문에 소유가 되지 않고 주에 대한 봉사만 있어요. 오늘 김장하는데 김장봉사 하세요. 광고가 이렇게 이어지네요. 봉사만 남아 있어요. “주의 복음을 위해서 뭘 도와드릴까요? 당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안도와줄거야.” 그래서 제가 강의할 때 늘 이야기하잖아요.
제발 거지들에게 돈 동냥하지 말라고. 그러면 그 인간 버립니다. 절대로 엎어져 있는 사람 껌 사주지 마세요. 그 사람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거예요. 도와주지 마세요. 그 사람은 편한 직업을 가진 거예요. 기술 배우는 대신 앉아서 그거 하고 있는 거예요. 동냥주지 마세요. 그 사람을 동냥하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것이 그 사람에게 주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무서운 말, 감당치 못할 말을 했습니다.
뭐든지 복음을 위해서 봉사하세요.
나이 많은 시아버지가 나이 80넘어서 장가가겠다고 설치거든 절대로 장가보내지 마세요. 주 안에서 봉사하는 거예요. 이상한 여자 만나서 돈 다 뗄 일 있습니까? 안됩니다. 적극 말려야 돼요.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그 사람과 거래하는 것이지 봉사가 아닙니다. 주 안에서 봉사라 하는 것은 뭐냐? 너나 나나 인간 아닙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일에만 일하세요.
사이다 같이 속이 다 시원하네요. “너나 나나 인간 아니잖아. 왜 자꾸 나보고 도와달라고 해.” 이게 주안에서의 봉사입니다. 이게 주안에서의 효도입니다. 이게 주 안에서 남편을 섬기는 일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아내에게 봉사하는 일입니다. “너나 나나 더 살 자격 없어.” 그런 쪽으로 살아가야 돼요. 우리의 만남은 주 안에서의 만남이거든요.
그 성전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 봐. 성전 없잖아.” 그 성전, 주님께서 라이터불로 다 날려버립니다. “구체적인 성전? 웃기지 마. 그런 것은 없었어. 성전을 섬겨? 예배당을 섬겨? 교회를 섬겨? 그런 것 없어. 영생은 거기에 없어.” 영생은 우발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서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는 거예요. 전하기는 성도가 전하고 주시는 것은 주님이 주시기 때문에 성도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하는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고.
물주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요, 심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고, 자라게 하시는 것은 오직 보이지 않는 분뿐입니다. 자유란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모든 구체화로부터 벗어나는 그것이 자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 한 40쯤 된 노총각인데 “어떤 아가씨를 원합니까?”라고 물으니까 평소에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김수미처럼 간장게장 같은 요리 잘하고, 현숙처럼 부모에게 잘하는 사람, 세 번째가 가관입니다. 박미선처럼 남편이 무슨 짓을 해도 입 꾹 다물고 돈 벌어다 남편 사업하는데 다 대주는 그런 여자를 원한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들으면서 제가 기뻤던 것은, 우리의 평소의 삶이 바로 그거 아니에요? 얼마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는지.
그런 이야기에 제가 기쁜 것은 복음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왜? 가짜가 가짜 티를 팍팍 내니까.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그저 믿음 좋고, 두 번째 신앙 좋고, 주께 영광 돌리는 사람, 이런 소리 들을 때마다 진짜, 진짜 복음으로 봉사하고 싶어요. 십자가로 내려치는 봉사 좀 하고 싶어요. 어디서 입에 발린 소리를.
안도현이라는 시인이 이런 시를 지었답니다. <너에게 묻는다>는 시를 보면,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렇게 시작하는 시가 있어요. 성질대로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는 말이지요. 연탄재는 옛날에 연탄재가 되기 전에 남에게 뜨거운 불로서 줄 것 다 주고 장렬하게 차가운 연탄재가 되어서 눈바람을 맞고 있다는 거예요.
그처럼 어차피 우리는 줄 것도 없어요. 처음부터 연탄재인데 그 다음에 우리에게 불을 주고 에너지를 주는 것은 우리를 다루시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그 생명이 들어와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빛이 아니에요. 빛이 우리가 된 거예요. 우리가 소금이 아니고 소금이 새롭게 우리로 만드신 거예요. 마태복음 5장 1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망하게 해놓고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너희를 망하게 했다. 이제 네 주제를 알겠지. 남은자만이 구원 얻는다는 것을. 왜 너희들은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오해를 했는가?” 남은 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최후의 남은자가 되시는 예수님이 남은자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내시면 그들은 자기 자신에 얽매이지 않는 만큼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그 자유인이 할 일은 간단한 거예요. 너나 나나 같이 죽자. 살만큼 살다가 그냥 죽자. 그것보다 더 큰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백년을 살았습니까, 90년을 살았습니까? 사도바울은 매일매일 죽는다고 이야기했고 놀랍게도 그는 주님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났습니다. 우리 형편하고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 행여 우리는 모를까 두렵습니다. 매일같이 주께서 주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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