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강-고후 3장 1-3절(그리스도의 편지)1612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3장 1-3절입니다. 신약성경 288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3:1-3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성경전체에서 항상 둘로 나누어지는 내용이 있습니다. 육이 아니고 영이다, 라는 내용으로 성경은 일관되게 죽 갑니다. 철도레일이 두 개 있는 것처럼 육과 영을 서로 손 붙잡고 가요. 손 장갑같이 왼쪽 오른쪽, 왼쪽 양말, 오른쪽 양말이 있는 것처럼. 육과 영을 손잡고 가서, 너는 어느 노선에 속했는가를 성경책을 가지고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끝을 보는 경향이 있어요. 영은 어디로 통하는가? 영은 천국으로 통하고 육은 어디로 통하는가? 육은 지옥으로 통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유황불에 가서 고생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영에 속하고 싶어서 “나는 영 쪽에 속했습니다.”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싶을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무슨 이야기할 겁니까? “나는 그쪽에 서겠습니다. 끝!” 그쪽에 서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쪽에서 섰다고 단정 짓고 인정해줄 하나님이 아니시거든요. 이유를 묻지요. “전에는 네가 어디에 있었는가?” 전에 것부터 먼저 물어요. “전에 육에 속했습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것이 어떻게 해서 영 쪽으로 왔지?” 묻게 되면 “몰라요.”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영이라는 것은 육에 속한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의 그 내용을 알고 있어야 돼요. 맞은 편에 있으니까. 육이 어떤 것을 보고 “아, 저게 육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영에 속한 것인데 육인지 영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영에 속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육이 뭔데?”라고 물을 때 답이 잘 나오지를 않아요. “육이 뭐였지? 내가 전에 어디 있었지?” 그걸 답변을 잘 못합니다.
그것을 답변할 때 다리가 있어요. 육에서 영으로 넘어오는 다리가 있습니다. 그 다리를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의 편지가 오게 되면 육이 편지를 읽어버리면 영이 될까,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성경은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육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어버리면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영의 사람이라는 것은 워치만 니가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너 자체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는 겁니다. 집에 있는데 우편배달부가 왔다. 또는 택배기사가 왔다. 그러면 배달 온 소포나 편지를 읽고 내가 새 사람 되면 되지, 우리가 이렇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편배달부가 오면 편지를 읽고 보내는 것이 아니고 그 편지를 보는 동시에 우리가 우편배달부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가 돼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는 말은, 그 전에 육으로서 ‘나는 장차 이렇게 될 거야.’ 자기 나름대로 어떤 포부가 있을 겁니다. 그 포부를 접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내 꿈과 희망과 이런 모든 것은 주님 앞에 다 좌절된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내가 의사가 되고 판사가 될 거야, 라고 했을 때 의사가 되는 나, 판사가 되는 나는 육적인 의사고 육적인 판사에요.
그래서 그런 목표라 하는 것, 아무리 그런 목표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의 사람의 증거로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의사되기를 기도했더니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육적인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고백일 뿐이에요. 내가 의사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면 아, 편지가 너에게 작업을 개시 했구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보 뒤쪽에 이번 주 설교요약이 나옵니다. 일찍 오시면 읽어보고 늦게 오시면 안 보게 되는데, 거기에 중간쯤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이렇게 감사함의 내용이 나와 있어요. 우리가 자기 희망대로 되었다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에요.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 2:13)
움직인다, 일한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지키는 것은 구약적 표현방법이에요. 신약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는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일체 없습니다. 말씀 지키지 마세요. 목사로서 당부합니다. 제발 말씀 지키지 마세요. 말씀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친구 계모임 갔는데 계하는 사람이 요리를 잘 못해서 호텔조리사들 열 댓 명 시켜서 다 주문했다는 말이지요. 그것도 모르고 친구들이 “오늘 점심 아무것도 없는 모양인데? 내가 뭐 좀 할까? 찌개도 하고 전 좀 부칠까?” 하게 되면 “제발 하지 마라.” 하잖아요. “다 불렀어. 하지 마.” “내가 샐러드하고 간단한 것만 할게.” “하지 마, 하지 마.” 이미 다 불렀다는 거예요. 신약의 성도는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왜 말씀을 지키지 말아야 하는가? 말씀을 지키는 순간 우리는 육의 사람으로 돌아서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켰다.” 말씀을 지켜서 망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역량을 총 집대성해서 쉐마, 쉐마,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 거기에 입각해서 그저 말씀에 순종해서 듣는데서 멈추지 않고 실천에 옮겨서 생활화하겠다는 운동을 벌인 사람이 바리새인들이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촛불운동보다 더 나갔어요. 말씀운동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똑같은 짓을 우리가 하면 안돼요. “그래도 말씀을 들으면 뭐하나? 실천에 옮겨야지.” 듣고 실천에 옮기든 말든 그것은 아직도 육의 사람입니다.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일단 듣는 것은 성령께서 듣게 하시지만 실천에 옮기는 이것부터는 내가 나서야지.” 이것은 자기가 누군지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한테 기대를 걸지 마세요.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우리 실력이 그다지 좋지를 않아요. 아무리 순교하고 아무리 열심 내봐야 천국 가는 점수 안 나옵니다.
여러분, 천국 안 갈 거예요, 정말? 안 가려면 헌금하시고, 안 가려면 기도하시고, 안 가려면 교회봉사하시고, 안 가려면 성경말씀 지키세요. 내가 지옥 간다는 것에 장담할게요. 우리가 감사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안 해도 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말씀을 안 지켜도 말씀이 “어설픈 아마추어야. 너는 좀 빠져라. 네가 뭘 한다고? 내가 알아서 할게.”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완전히 접수하고 점령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편지로 만들어버립니다. 전에는 편지 갖다 준다고 “수고했습니다. 날도 추운데 고맙습니다.” 하고 자기가 편지 읽고, 자기가 거기서 숙제하고, 자기가 점수 잘 받으려고 공부하는데, 하나님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숙제나 검사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접수를 했다니까요. 이미 편지가 전달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편지에 대해서 우리가 할 몫이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아쉬워하지 마시고 그것을 근거로 감사해야 돼요. 정말 감사해야 될 것은 천국 가는데 더는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내가 나댈 이유가 없다는 사실.
우리교회 표어를 내세운다면 한 세 가지 할 수 있어요. 나대지 말고, 설치지 말고, 촐랑대지 말자. 그냥 사시면 돼요. 그냥 사시면 된다고요. “목사님, 그냥 살려니 찝찝해서 못살겠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준비된 존재가 있어요. 그게 마귀입니다.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자꾸 열 내게 만들어요. 설치게 만들고 행하도록, 행함으로 전환하도록 우리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꼭 마귀를 만나셔야 돼요. 마귀 만나지 않으면 우리가 인간 안 됩니다. 마귀를 만나면 마귀가 제시하는 방법이 내가 원하는 방법과 딱 매치가 돼요. 뭔가 한 것 같고, 뭔가 성과 낸 것 같고, 그래서 성도인 것 같고, 그냥 이것저것도 안하면 논 것 같고, 그런데 마귀 말 듣고 열심히 하게 되면 뿌듯하고, 본인이 보기에 본인이 자랑스러워요. 대견하고 훌륭해 보이고, 친구 만나면 ‘너는 지옥가라. 나 혼자 천당 갈 게.’ 이렇게 자랑질 하고픈 근거 같은 것들이 마련되고.
왜 행함을 이야기하는 인간들이 마귀의 앞잡이냐 하면, 인간의 말 자체가 전부 다 거짓말이기 때문에 그래요. 입에서 나오는 행동과 말이 다 거짓말이에요. 성경책은 거짓말이 아닌데 성경책을 보고 있는 내 주체가 거짓말이 퍽퍽 쏟아지는 주체를 갖고 있어요. 따라서 성경을 백번 보는 순간 백번 거짓말하는 기회를 마련한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는 순간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깜박 잊고서 성경을 보게 돼요. 본인이 나는 거짓말 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 제 말 잘 들으셔야 합니다. 지금 바른 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앞뒤가 모순되지만. 나는 거짓말 외에는 원하지 않고, 늘 거짓만 원하고, 내 입에서 나오는 생각과 행동도 다 거짓만 나온다, 라는 것을 성경을 보면서 확인하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시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가 성경을 안 볼 때는 점잖기 이를 데 없어요. 굉장히 점잖아요. 북한의 주민들의 형사소송법이나 그런 것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굉장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입니다. 우리 김일성이 연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 대외적으로, 우리들끼리는 얼마나 착하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저렇게 천사처럼 서로 돕고 살수 있구나.’ 그런 나라가 북한, 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자랑하기 위해서 법이 굉장히 엄격하게 되어있습니다.
깡패조직도 저희끼리는 의리, 으리, 해가면서 의리가 대단해요. 어려운 동료를 도와주고, 욕심내지 말고. 영화에 그런 장면이 나오잖아요. 조폭의 집에 가훈이 걸려 있는데 그게 뭐냐? “차카게 살자.” 또는 “하면 된다.” 그런 것들. 어두운 세계의 조폭세계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리는 조폭이 아니라서 좋게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경향들이 있어요.
그러나 사실은 모두가 우리가 조폭이고 거짓으로 일관하면서 거짓말로 버티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통령만 거짓말하는 줄 알아요? 모든 인간 자체가 다 거짓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편지니까 보게 되면 성경내용은 간단해요. “하나님께서 인간 만들어놓았는데 그 인간이 천국 못 간다. 내가 못가도록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놓았다.” 딱 그 이야기입니다.
별로 어렵지 않지요. “천국 꿈도 꾸지 마라. 너는 천국 갈 대상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천국 못가도록 길을 막아놓았기에 평생 저주나 받고 살아라. 이 남자와 여자들아. 뱀하고 같이 살아. 뱀도 저주받고 여자도 저주받고, 순서대로 남자도 저주받고 다 같이 저주받아라.” 딱 그 내용이 창세기 2장과 3장에 겹쳐서 나옵니다.
그게 전부라니까요.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게 전부라니까. “더 없습니까?” 더 없어요. 더 없는데 그 성경말씀을 보는 순간 이제는 더 없는 그것을 인간 쪽에서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다 거짓이고 그 거짓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어찌어찌해서 천국 간다는 희망과 연결되어 있어요.
“비록 죄는 지었지만 무슨 수가 있겠지.” 수 없어요. “아니 있을 거야. 십자가를 믿든지 여호와에 순종하든지 무슨 수가 있을 거야.” 천국 가는 수가 없다니까요. “있겠지.” 없다니까요! “있을 거야.” 있을 거야, 그게 거짓이에요. 악마와 한통속이 되었기 때문에 악마가 자꾸 배후에서 쑤시는 거예요. “너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억울하지도 않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뭐가 있을 거야. 고생고생 하지만 죽어서는 호강하게 해 줄 거야. 그러니까 그걸 찾아보라니까?”
자꾸 그렇게 쑤시는데 그 쑤시는 작자가 누구냐? 악마가 쑤셔요. 악마가 자꾸 부추기는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본성과 딱 합치가 되는지. ‘그래!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면 되겠지.’ 여덟 번째 일어나봐야 없다니까요. “목사님은 왜 자꾸 없다고 이야기합니까?” 이게 나의 편지가 되면 안 되거든요. 내 인생이, “나는 이렇게 어려웠고, 이렇게 저주받았고, 이렇게 깡패였지만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았습니다.” 해서 그것이 자기편지가 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이랬는데 예수 믿고 새사람 되어서 천국 갑니다.” 이거 거짓말입니다. 거짓간증이에요. 말 잘못했다. 간증자체가 거짓이에요. 성경말씀은 안보고 왜 자꾸 간증을 듣고자 합니까? 이것이 내 거짓된 본성과 구미가 맞기 때문에. 간증 끝에는 항상 희망을 주거든요. 아무리 고생하는 대목도 팔짱을 끼고 웃으면서 들을 수가 있어요. ‘나중에 좋은 소리 나올 거야.’ 끝에 보면 좋은 소리가 나오거든요. ‘그렇지. 나올 줄 알았어.’
여러분, 성경은 그렇게 좋은 소리 안 나옵니다. 그것은 성경을 2천년동안 거짓으로 해석해왔고 거짓말쟁이들이 거짓말쟁이교인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남발해서, 소위 조직신학이라는 것, 성경 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신학적으로 체계를 잡아주면, 신학체계를 머리에 쏙 집어넣으면 백점, 합격, 이런 미끼를 던졌는데 그 자체가 마귀가 뒤에서 그렇게 부추긴 거예요.
우리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되도록 말씀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미 생명나무길이 끊어져 있으면 끊어진 입장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 희망을 놓치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뭔가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반발하고 저항하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어요. 너무 합니다, 너무 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생명나무 막아버리는 질 나쁘고 성질 더러운 하나님은 아니겠지요, 하나님은 나를 배반해도 나는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보다 내가 마음이 더 곱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생각하는 거예요. ‘설마 하나님은 그렇게 나쁜 하나님은 아닐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사랑하사, 하셨으니까 우리를 버릴 리가 있겠어?”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쪽으로 해석을 하는데 그 해석을 하는 자체가 거짓말의 영이 충만하기 때문에 우리 몸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워 가는 겁니다. 어느 교회치고 거짓말쟁이 아닌 교회가 없고 모든 교회가 거짓말쟁이의 집합체에요.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할 거예요. “당신 논리대로라면, 성경책은 바르다 해도 내 눈이 거짓의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면서 성경을 보니, 성경의 참된 진리에 도달 못하고 성경을 거짓되게 해석해서 그 거짓된 해석을 회수해서, 그걸 어떤 희망으로 삼고 하나님은 좋은 분이라고 일방적으로 신학을 만들어서 안심 푹 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짓을 한다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왜 주셨으며 현재 이미 천국에 가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돌파해서 천국을 갔는가? 당신 말대로 모든 아담의 후손이 다 거짓말쟁이고 마귀하고 한 통속이라면 지금 천국에 가 있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이삭, 그들은 다 어떻게 천국에 갔는가? 무슨 수가 있을 것이 아닌가? 어떤 방식이나 방법이 있을 것인데 그게 뭐냐?”
그렇게 여러분도 궁금해 하실 거예요. 그런데 저의 전제는 뭐냐? 인간의 말이나 행동자체가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해석은 거짓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엘리야, 천국 간 사람들을 다시 불러서 우리교회에 모셔서 인문학강좌를 한번 들어봅시다. “나는 이렇게 천국 갔습니다.” 하는 말을 들어보자고요. 그들에게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십자가로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할 거예요. 내가 십자가로 갔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십자가로 데려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강사가 만약 엘리야라면, “십자가로 데려갈 때 당신의 느낌은 어땠고 감정은 어땠습니까? 당신 감정과 내 감정이 같은 것인지 궁금해서 그걸 물어보는 겁니다. 당신이 불수레를 타고 천국에 갔다면 내가 천국 가는지 안 가는지 확인하기 위함인데 이끌려 갈 그 때의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이었습니까?” 이렇게 물어볼 것이 당연하잖아요.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내가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들통 났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뭡니까?” 내가 나가 아니었고 내 대신 미리 가서 박혔던 분이 있어요. 그 박혔던 분은 죄인의 대표자입니다. 의인의 대표자가 아니고, 이 세상의 잘난 사람들의 대표자가 아니라, 어떤 사람도 잘난 사람이 없고 그냥 구원받아야 될, 그것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하는데, 창세전에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로 맺어져야 될 사람, 택한 백성이죠, 아버지의 아들, 또는 이스라엘의 대표자, 그 분이 내가 달려가야 될 십자가에 먼저 선점해서, 먼저 도착해서 “이제 오냐? 내가 너를 계속해서 내게로 끌어당겼다.”고 하는 거예요.
방금 제가 한 이 이야기가 마태복음 17장과 누가복음 9장에 나옵니다. 엘리야와 모세의 대화 가운데서 예수님의 별세에 관해 언급하고 있어요. “형님, 우리 죄를 위해서 메시아가 언제 돌아가십니까?” “글쎄, 돌아가셔야 할 텐데.”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주님, 우리 죄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셔야 되지요? 그렇죠?” 그 이야기를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 세 분이 모여서 하신 거예요.
“너희 둘 때문에 내가 죽는데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저주받아서 죽는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이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잘못이냐 하면, 내가 망가져야 된다는 생각은 안하고 내가 어떤 요령을 부려요. “내가 어떤 수단을 강구하면 지금의 내가 천국에 쏙 들어가겠습니까? 살아있는 나는 다치지 않고, 저는 손대지 말고, 저보고 ‘하라’고 만 이야기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수완을 부려서 시키는 대로 해서 현재 있는 이 몸이 경계선 너머, DMZ너머 저 생명나무쪽으로 이 몸 그대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님은 “아니!” 그런 식으로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요령부릴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어요. 지난 금요일에 울산강의 했습니다만, 이미 십자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거든요. 용서라면 반드시 죄가 전제되어야 돼요. 죄가 먼저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용서가 있는데 우리는 날 때부터 거짓말쟁이기 때문에 본인을 절대로 죄인의 일부로 집어넣지를 않아요.
우리는 단독적이고 싶어요. 남들은 죄를 지어도 나는 아니어야 되고, 남들은 나쁜 짓만 골라서 해도 나는 착한 것도 가끔은 하는 개중 괜찮은 사람이라는 개인구원욕구가 날 때부터 강렬한 존재입니다. 더불어 죄인이 아니고 나는 좀 빼달라는 거예요. 나는 특별대우 해달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것 때문에 망했어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망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해서 선택했다는 그것 때문에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칼빈주의도 똑같은 거예요. 현재 있는 나를 선택했다는 거예요. 그런 것은 성경에 없어요. 성경에 이근호를 선택했다는 내용이 어디에 나옵니까? 잠언서에 나옵니까? 성경에는 그런 것이 어디에도 없어요.
성경은 그리스도의 편지지 나의 편지가 아닙니다. 편지라 하니까 어떤 노래가 생각나요.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김광진이 부른 <편지>라는 노래의 가사에요.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나의 편지에 그리스도께서 정보를 제공해서 내 편지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나의 편지라는 인식자체가 마귀가 나에게 심어준 거예요. 칩으로 내 안에.
“너는 네가 제일 중요해.” 그걸 미처 몰랐어요. 커서야 알았지 미처 몰랐어요. 이걸 우리한테 심어준 거예요. 심어준 그 씨앗이, 악마의 씨앗이 발아해서 커지고 어른이 되어서 토요일마다 촛불 들고 데모하고 있어요. 우리국민은 괜찮은 국민이라는 거예요. 그 자체가 거짓인데. 플레카드가 “탄핵도 거짓이고 데모도 거짓이다.” 이런 것 붙여놓은 것 봤습니까? 못봤지요.
“탄핵하라.” 그 뒤에 무슨 뜻이에요? 그게 진리라는 거예요. 그게 거짓이에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경험한 것은 실패해야 하기에 실패를 몰랐던 우리가
평생을 다 소모하면서, 일생 다 가도록 다 소모하면서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평생을 다 하면서,
“주여, 제가 거짓이었습니다. 저는 반항쟁이였고 반발쟁이였습니다.
제가 바로 마귀의 종이었고 마귀의 심보를 평생 나의 심보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게 십자가 앞에서 고백되어야 돼요.
“내가 죄지은 것이 아닙니다. 죄가 나를 갖고 놀았습니다.
내가 욕심을 낸 것이 아닙니다. 욕심이 나를, 나의 욕망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우리는 꼭 물침대 같아요. 한쪽을 누르면 한쪽이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한쪽을 극구 참으면 그 참은 것이 사라지지 않아요. 다른 새로운 욕망으로 모양이 바뀝니다.
세상 끊고 복음 사랑한다고요? 끊은 세상욕망을 이제는 복음 설교 듣는 욕망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걸 사자성어로 복음폐인이라고 하는데, 복음 들으면서 맨 날 생각하는 것이 ‘역시 나는 잘났어. 역시 나는 훌륭한 사람이야.’
복음 듣는 본인도 거짓되고 잘못된,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누가 감 잡겠습니까? 이걸 누가 알리요? 복음 알고 듣고 믿지 마세요. 복음 알게 되면 자기하고 그것을 자꾸 일치시켜요. “이 복음이 바로 나다. 고로 나는 구원받았다.” 이런 식으로. “나는 죄인이다. 복음은 예수님의 의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 고로 나는 예수 믿고 의인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입니다. 이거 거짓입니다.
“그럼 목사님, 어떻게 살라고요?” 그냥 살라니까요, 그냥. 그냥 사시면 알아서 복음이 기어들어오고, 그게 여러분 마음속까지 들어와 버려요. 들어와서 여러분 내면을 복음으로 호작질 해버립니다. 여러분 마음을 정돈하지 마세요. 정돈해버리면 정돈하는 그 주체는 마귀가 해요. 이것은 복음 듣는 시간, 이것은 돈 버는 시간, 이렇게 정돈하지 마시라니까.
그렇게 정돈해놓으면, 일 피곤해서 복음 안 들으면 “주여, 오늘도 복음도 안 듣고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어디서 들은 풍월이 있어서. 그렇게 시간 정해놓고 복음 들어서 구원받는 것,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왜? 내가 거짓이기 때문에, 내가 마귀 종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라도 스스로 위로하고 싶어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는 복음을 듣는다.”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러면 당신 말대로 성경도 안보고, 교회도 안 나가고, 멋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렇게 할 수 있거든 한 번 해보세요. 그런 용기도 없어요. 가까운 교회로 가게 돼요. 무슨 미신이 그런 미신이 또 있어요. 그것도 아니면 갓바위에 올라가든지. 아니면 속으로라도 기도하든지.
인간은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얼마나 우리가 선악에 의해서 나를 포기 못할 인간인지를 평생을 살면서 그것만은 정확하게 알아야 돼요. 얼마나 나는 내편인가를, 개인주의인가를, 그리고 나의 구원만을 사모하는지를. 구원은 공동구원이지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공동구원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것, 공동으로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신다는 거예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거짓된 것을 어떻게 엘리야는 뚫었느냐는 겁니다. 모세도 뚫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어떻게 그것을 뚫고 천국에 가서 지금 희희낙락 천국을 즐기고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이 예레미야 31장,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새언약이라는 것인데요. 새언약의 위력이라 하는 것은 옛언약과 달라요.
옛언약에서는 자꾸 “하라. 하라.” 합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본성이 나쁜 것은 싫어하고 착한 것은 더 해서, 그렇게 얻은 성과로 점점 더 자기를 개선시키고 보다 더 질이 좋은 사람, 요즘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 본받는 사람, 그런 식으로 자기를 만드는데 있어서 못할게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내가 잘되는 일이라면, 내가 구원받는 일이라면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들어가고 어떤 짓이든 다 할 사람들이에요.
그런 구약에 있는 그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를 대변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이거예요.
용서부터 먼저 줘요. 잘 들으세요. 제일 중요한 대목에 왔으니까. 용서부터 먼저 주고,
용서의 값을 하기 위해서 죄를 더욱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우리의 평생을, 자기백성의 평생을 다 소모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 방식이에요.
그리스도의 편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어떤 짓을 해도 용서해줄게.”가 이미 포함되어 있어요. 옛언약 시대를 바탕으로 해서 새언약 시대가 오는데 새언약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이, 그 은혜가 나에게 들어오게 되면, 이미 용서가 박혀 있습니다. 악마의 종인 우리는 뭐냐? “주님,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이거거든요. “지금은 고생하고 사람대접 못 받습니다만 나중에 천국 가서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걸 분쇄해버려요. 그걸 파쇄시켜 버립니다. 나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게 한평생 지속되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 편지까지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나를 구원하려고 어떤 짓거리를 해도 그것과 별개로 서서히 안에서 갑상선 암은, 위암세포는 온 전신에 퍼집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아무리 젊을 때 목사가 되었느니, 설교를 했느니, 강의를 했느니, 복음만을 전했다고 백날 해도 서서히 나이가 들게 되면 이런 것이 점점 온 몸에 퍼집니다. 나중에 치매가 걸리면 짐승 같은 본성만 탁 튀어나오게 돼요.
아까 저쪽 방에서 우리 어머니가 이야기 하는 것을 제가 유념해서 들었어요. 춥다고 난로 앞에 앉아서 “와, 크다.” 밥솥이 크고, 냄비가 크고, 크다는 거예요. 치매 걸리기 전에는 “이것 참 좋다. 예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곤 하셨어요. 왜냐하면 옷 장사를 했거든요. 그 사람의 직업이 그 사람의 제 2의 본성을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날라 가니까 남는 것은 크다, 작다만 남았어요. 옳다, 그르다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정말 단순해요.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어린애가 그래요. 어린애는 처음에는 옳다, 그르다가 없어요. 그냥 신체가 뜨거우면 뜨겁다, 맛있으면 좋다고 표정 짓고 싫으면 고개를 젓고. 아직 돌도 안 되었는데 ‘아니오.’가 나와요.
자기 몸에 편하냐, 자기 몸에 유리하냐, 불리하냐, 그것밖에 없어요. 그 어린애가 크게 되면, 사회생활을 하려 하면 윤리가 어떠니, 도덕이 어떠니, 하다가도 나중에 나이가 90이 넘어서 정신 다 나가면 “크다! 뜨시다. 추워라!”
인간두뇌에 파충류 뇌와 같은 시상하부가 있답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정과 생리만 관여하는데 진화론에 의하면 거기서 두뇌피질까지 퍼지면서 두뇌가 커졌다는 소리가 있는데 그 파충류두뇌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아프다, 기분 좋다, 몸의 컨디션 따라 나오는 것들이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대뇌피질 부분에서 따지는 것이지요. 나중에 그것마저 고장나버리면 아프다, 뜨시다, 그것밖에 없어요. 몸 편하면 최고고 그런 거지요. 누가 오게 되면 “반갑다.” 속으로는 ‘빨리 가라. 귀찮다.’ 효도도 귀찮아요. ‘다 가라.’
시상하부- 시상하부( hypothalamus, 視床下部)
- 시상하부는 사이뇌의 일부이며 제3뇌실 벽의 배쪽과 제3뇌실의 바닥 속에 위치한다. 시상하부에는 많은 신경세포와 신경 섬유들이 존재하며 신경세포 집단을 핵이라고 부른다. 주로 항상성의 유지에 관여하며 자율신경계통, 내분비계통 및 변연계통과 관련된다. 더보기
- 위치
- 시상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뇌하수체와 연결된다. 시신경 교차와 유두체 사이를 말하며 제3뇌실 주위의 아랫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더보기
- 관련질병
- 두개인두종, 뇌하수체선종, 베르니케뇌병증 등
- 관련검사
- 뇌 자기공명영상(Brain MRI), 뇌 컴퓨터 단층촬영(CT), 혈액검사 등 더보기
누구나 가야 될 길이에요. 우리는 30, 40, 50대를 아닌 것처럼 보냅니다. 곡선이 위로 올라갈 때 다시 출발점으로 내려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 출발점이 창세기 3장입니다. “너는 뱀하고 한통속이다.” 이게 출발점이에요. 뱀은 무슨 영이냐? 거짓말하는 영이에요. 그 거짓말이 뭐냐?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신에게 반발하고 대드는 것. 나는 내편인데 내 편들어주지 않는 하나님은 거부하고 내편 들어주는, 마귀를 꼭 닮은 그런 예수, 그런 삼위일체, 그런 성령, 그런 여호와하나님을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왜? 나 잘되기 위해서. 개인구원이니까. 개인본성이니까. 이런 원초적인 것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와 이사야는 밑에 발통이 달려서 쫙쫙 잡아당깁니다. 그 잡아당기는 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 3절에 ‘하나님의 영’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성신’, 구약의 택한 백성들에게 이미 성신이 들어간 거예요. 신약으로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을 다스린 겁니다.
발통2
[명사] [방언] ‘바퀴1(돌리거나 굴리려고 테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물건)’의 방언(경상, 전북, 충남).
내가 생각 못한 전혀 다른 나를 성신이. 그 성신이 어디서 나왔는가? 장차오실 메시아의 십자가에서 나왔거든요. 십자가의 일은 성령에 의해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는 그것이 성령의 객관적사역입니다. 주관적인 것, 개인마다 다 다른 다양성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객관적사역, 하나의 기준이 뭐냐? 그것은 십자가뿐이라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가 많아서 구원 못 받는다는 정도가 아니고, 구원에 대해서 저항하고 반발하는, 거짓말하는 악마의 영으로서 십자가를 욕하는 본성을 계속 토해내고 있다는 것까지 십자가 앞에서 밝혀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을 자가 아니고 답 나왔습니다. 우리는 저주받을 자이지요. 이걸 왜 우리는 기쁘게 못 받아들입니까? 이 단순한 결론을.
“주여, 저 저주받을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 세끼 먹을 거잖아요. 맛있게 먹을 거 아닙니까? 그것은 큰 은혜지요. ‘저주받을 자에게 왜 이렇게 맛있는 밥을 주시지? 왜 그렇지? 아, 이거 먹고 또 욕하라고 주시는 것인가?’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는 거예요. 저주받을 자에요. 왜? 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까? 이 죄는 나를 위한 죄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 그리스도의 용서를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으로 새로 투입된 나의 본모습이기 때문에.
엑스레이 사진이거든요. 이력서에 엑스레이 사진 붙이는 인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야 돼요. 갈빗대와 해골만 보이는 그 사진만 이력서에 붙여야 돼요. 이것이 제대로의 우리의 평생 이력입니다. 평생 우리의 스토리, 나의 편지는 해골에서부터 해골로 가는 것,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합당하니이다.
돌아보면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편지고, 아까 주보에서 본 것처럼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우리가 감사할 것만 골라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에요. “쉬지 않고 감사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우리 속에서 오늘날 우리 자신을 만들어내는데 그게 뭐냐?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가 왜 용서가 되느냐? 너 같은 인간, 너 스스로 구원될 수 없고 마귀자식중의 최고의 자식, 죄인 중에 괴수라 할지라도 십자가는 효과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새언약이라는 거예요. 이제 이 새언약은 너희와 세운 언약이 아니고 예수님과의 언약, 아버지와 예수님의 언약이니 사람하고 세운 언약은 다 폐기처분되어버리고 이제 하나님과 예수님이 단독으로 맺은 언약,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살과 우리의 피와 우리의 헌금은 주님 앞에 드리지 마세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요. 십일조를 받을 사람이 없는데 십일조를 어디에 냅니까? 공중에 뿌립니까? 뿌려봐야 나풀나풀 도로 내 얼굴에 떨어지는데. 받을 사람이 없는데 누구한테 냅니까? 십일조하는 사람한테 묻고 싶어요. 십일조 네 받나, 네가? 목사 네가 받나? 네가 받으면 네가 떼돈 벌어서 부자 돼야지.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십일조를 그래도 낸다고 하면 그게 뭐냐? 그게 악마의 영에 받쳐서 내는 거예요. ‘이래도 30배 안주기만 해봐라.’ 이런 반발. 30배 받아서 뭐할 건데? “내가 잘 돼야지.” 네가 왜 잘되어야 하는데? “나는 나니까. 나는 나밖에 몰라. 나는 나만 위해서 살아. 그래서 나 잘되기 위해서 나는 헌금도 아끼지 않고 교회 나갈 거야. 왜? 나 잘되기 위해서.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서.”
그게 바로 마귀가 여러분 속에 작당을 하는데 얼마나 고마운 마귀인지. 그 마귀를 누가 그렇게 우리 옆에 붙여줬습니까? 십자가만을 증거 하라고 주께서 일부러 우리에게 마귀를 붙여준 거예요. 우리에게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지요? 그 욕심을 누가 주셨습니까? 마귀로부터 오는데 그 마귀를 누가 보냈어요? 주님께서 마귀를 그렇게 보낸 겁니다.
이게 바로 욥기에요. 마귀로 하여금 욥이 정신 나가도록 만들었어요. 나중에 하나님 앞에 원망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봉사를 많이 했어요. 봉사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지금도 마귀가 우리에게 와서 자꾸 욕심을 부추깁니다. “대통령 하야해야 된다. 뭐하냐? 거의 다 왔다. 9부능선 넘었다. 12월 9일에 한 번 보자.”
12월 10일에는 뭐할 건데요? 12월 10일 아침밥은 하나님이 주시는데요. 십자가에서 나오는 거예요. 유력한 대선후보 누가 주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에서 주님이 주시는 거예요. 내가 노동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정신 똑바로 차립시다. 천국 안갈 거예요, 정말? 천국은 개인주의는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천국가려면 마귀가 나에게 주는 욕심, 욕심, 욕심, 그렇게 많은 욕심도 감사하세요. 욕심 많고, 나밖에 모르고, “주여, 나밖에 모르게 된 인간으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했습니다만 추려보면, 성경 말씀에 순종하지 마세요. 하나님에게 수시로 대드시고, 마귀하고 한통속이 된 것을 감사하시고, 욕심이 생기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시고, ‘암세포 또 번졌구나. 그래, 네가 있어야 내가 늙어죽지. 욕심이 잉태하여 사망을 낳으니까.’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교회 안와도 영광이고, 집에 있어도 영광이고, 직장에 가도 영광이고, 어디에 가도 범사에 감사합니다. 용서가 용서 값을 하기 위해서,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이미 용서하시는 자 앞에 설 때 우리가 죄인밖에 되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마지막 부탁합니다. 제발 내 피와 내 정성을 내놓지 마세요. 그것은 계약내용이 포함이 안 되었습니다. 계약내용, 우리가 믿을 내용은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의 평생의 공생애를 우리가 믿어야 되지,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했다, 아프간에서 순교했다, 나이지리아에서 폭탄에 맞았고, 수단, 에티오피아, 울지 마 톰스, 북한 가서 뭘 어떻게……, 그런 것 하지 마시고 그냥 여러분이 살던 동네가 있잖아요.
수성동, 학군 좋은데, 고추잡채 해서 드시고 군고구마 해서 잡수시고, 그렇게 살면서 “주여, 이것도 욕심인데도 불구하고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시기를 부탁해요. 여기까지가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인 것을 잊어버리고 내가 나의 편지를 써서 주 앞에 점수 좋게 맞으려고 오늘도 실시했습니다. 이런 짓거리가 거짓인 것을 늘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