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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15강-모세의 수건(고후3;12-18) 1612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20. 08:32
2016-12-18 12:42:15조회 : 123         
   모세의 수건 161218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모세의 수건(고린도후서 3:12-1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Npu_bksIwZM, Hit:10
 이근호16-12-18 13:37 
모세의 수건 

2016년 12월 18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3:12-18 

(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을 대하기 전부터 우리 사람들은 나름대로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들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그 언어를 가지고 천국도 가려고 하고 하나님과 상대하려고 합니다. 이는 곧 자신들에게 납득이 되는 식으로 천국 쪽에서 배려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즉 “너희는 이렇게 하면 그러면 구원될 것이다”라는 강령 같은 것이 제시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인간은 자신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그동안 너무 주변 사람이 둘러싸여 산 것도 있지만 근원적인 힘 앞에서 자신을 한번도 노출시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를 통해서 대신 들려오는 예수님 말씀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장을 대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수건과 자신의 행하심을 조합시키는지 언뜻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지혜를 짜낸 경전이라는 이런 내용들을 다 삭제시킬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납득되기 곤란한 개념의 조합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수건과 예수님을 연결시키는 이유는, 인간들이 말씀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모든 움직임이 다 예수님이 벌리시는 일의 부분으로 이미 가담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자기 행위로 인한 독보적인 자기 자리를 따로 장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쪽에서 내민 제안에 대해서 자기 판단과 연이는 선택행위로 그 구원의 노선에 뛰어들 요량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초등학교 아동들이 하는 줄넘기 놀이에 타이밍 맞추어 뛰어들 생각을 가지고 제 3의 자기를 따로 설정해서 줄넘기를 지켜보는 아동의 입장인 것처럼 자신을 여깁니다. 하지만 어느 인간이고 간에 예수님의 작업 범위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자신이 제 3의 지역을 따로 확보하고 주변 세상을 보는 것과 이미 함몰된 채 세상을 보는 안목의 차이에 대해서 알려줄 적절한 사례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바로 ‘이스라엘’이요 ‘구약’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의 입장이 어떠한 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모세가 백성과 격리된 공간에서 40일을 보내게 되는데 바로 그 자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리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상상하는 이승과 저승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한계는 인간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에게 절대적 자리로 따로 떨어져 나간 경험이 없다면 진정한 인간의 실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한계라고 여기는 것이 참된 한계가 아닙니다. 참된 한계는 모세를 통해서 도입됩니다. 모세가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와 아론 및 지도자를 만나는데 그들이 모세의 얼굴을 피하게 됩니다. 

이는 모세 본인도 미처 몰랐던 새로 생긴 인간 세계의 한계입니다. 즉 인간 세계는 물리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 못해서 다 죽임을 당해 소멸당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태양이 지구 가까이 오게 되면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감당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모든 자연의 혜택을 건성으로 ‘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진정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인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비록 전부가 아니라 일부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세가 수건을 쓰는 사건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이는 곧 인류는 마땅히 하나님의 광채 앞에서 저주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자연을 너무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은혜 보호막으로 감싸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보호막 안에는 저주를 참아내는 요소가 본질이 되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전하면서 일부 그 보호막에 ‘모세 통로’를 통해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랬더니 보호막이 약간 찢어지면서 보호막을 구성하는 본질이 나타났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엄위함과 거룩함이 빛으로 파고들어온 겁니다. 율법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 모세가 수건을 자기 얼굴을 덮어썼습니다. 이로서 모세의 수건에는 2개의 내용같이 들어있게 됩니다. 하나는, 이 세상은 저주의 대상으로 갇혀 있는 형국이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그 저주를 견뎌낼 장치가 하나님 자체적인 조치로 인해 성사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모세의 수건으로 알려진 사실은, 인간 세계 자체가 저주의 잉크물을 온통 뒤집어쓴 상황이기에 그 안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전혀 그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는 겁니다. 도대체 얼마나 착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모세의 수건을 통해서 알려진 사실은, 인간들이 그럼에도 완고하다는 겁니다. 즉 자체적인 노력과 행함으로 구원을 성사하겠다는 의지를 충천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인간들의 완고함에 마지막 때의 ‘십자가 상의 폭력’으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흔히들 인간들은 자신들을 고상하고 점잖고 선한 자들로 간주해달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아양을 떱니다. 

하지만 저주의 풀 속에서는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완고’요, 헌금하는 것은 ‘헌금하는 완고함’이고, 전도하거나 어려운 나라에 선교하는 것은 ‘전도하고 선교하는 완고함’입니다. 성경공부하는 것은 ‘성경공부’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완고함입니다. 이래도 완고함이요 저래도 완고함입니다. 

마땅히 완고해야 하기에 완고함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수건의 입장에서 내려본 우리의 진모습입니다. 왜 인간들은 이 사실을 거부할까요? 그것은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의 활동’에 관한 책으로 보지 않고 자신들이 구원되는데 필요한 아이디어나 정보가 담긴 책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나름대로 구원방식에 대해서 설정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스러운 자기 자신을 선한 자기 자신으로 변경시켜 당당하게 천국 입성을 타진해보겠다는 겁니다. 죄스러움에서 선함으로 바꾸는데 있어 하나님의 법만한 것이 더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모세 당시의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교회에서 여전히 벗겨지지 않고 있는 수건이라는 겁니다. 

즉 성경 말씀을 율법적 안목으로 보는 것은 완고한 방식으로 구원을 얻겠다고 시도하는 그 연속선 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차라리 십자가 폭력성 앞에서 인간들은 자기 구원을 시도하지 말고 포기해야 마땅합니다. 인간이 나이들어 죽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죽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된 피조물들의 개인적 죽음마저 시간을 종결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종결될 정도의 개인적인 죽음만이 진정한 죽음입니다. 곧 예수님의 개인적 죽음으로 인해 시간의 멈추게 된 것은 처음부터 천지창조의 의미가 다 드러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떠나 보낸 이 피조세계의 시간 흐름은 십자가 의미 이외에 더는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시간을 회수하는 일 뿐입니다. 마치 밑장 빼듯이 하는 겁니다. 모든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시체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겁니다. 살아도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두 죽은 자들입니다.(고후 5:14) 

따라서 우주의 운명은 예수님의 죽음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세상은 쓰레기 장이 된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주의 영’이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주의 영’이란 성령 당사자를 우대하라는 취지가 아니라 ‘주님이 행하신 일’을 드러내라고 성도와 예수님 사이를 거미줄처럼 연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의 영’이 있는 곳에 비로소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자유함이 없는’ 대표적 대상자들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율법으로 인해 율법적 안목이 숙성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함으로 드러난 것은 그들의 완고함뿐이었습니다. 

이들은 곧 오늘날 모든 인류를 대변해서 보여준 자들입니다. ‘주의 영’은 예수님이 이미 죽고 승천한 연후에 주어진 ‘권세’이기에 이 ‘주의 영’을 받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이미 ‘떠나버린 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즉 더 이상 저주받을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요 율법으로 지적받을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서 성도는 자체적으로 자기로서 죽은 자이기에 오로지 예수님의 활동하심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마음대로 살게 되고 예수님으로부터 부림을 받게 됩니다. 마치 열쇠를 바꾸면 철사로 돌돌감긴 고리를 빠져나오려면 둥근 철사길을 끝까지 거쳐야 하는 것처럼 성도는 예수님의 공생애을 ‘공동경험’하는 남은 세월을 보내면서 육에 속한 형상을 벗어 던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소망은 이 세상을 어서 떠나는 겁니다. 이는 곧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어떠한 미련이나 집착을 갖지 않게도 다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이 세상 일에 주눅들거나 겁내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것마저 주께서 시킨 일을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12-19 21:54 

215강-고후 3장 12-18절(모세의 수건)1612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3장 12-18절입니다. 신약성경 288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3:12-18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을 대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성경에서는 보통 마음으로서는 알 수 없는 내용들로 우리 앞에 날아오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런 용어들을 가지고 아무리 조립을 해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할 때는 전혀 적절치 않은 문장이 성립이 됩니다. 방금 읽은 이 본문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 해보세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습니까? 

  

전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진다는 이 말이 무슨 이야기일까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성경을 이야기할 때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이야기하거든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우리한테 이 내용을 가지고, 이 문장을 가지고 우리한테 이야기한다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것도 한국말로 이 현장,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한테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이 말 듣고,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18절까지 딱 끝내놓고 “알아들었나?”라고 하면 “뭐요? 무슨 말씀을 방금 하셨는데요? 뭘 알아들어요?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도록 해놓고 뭘 알아들었다는 말입니까? 저희들은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그래, 내 덕분에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원합니다.” “그러면 내 말을 알아먹어야지.”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셔야 우리가 알아먹지요.”라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식 말고 다른 식으로, 납득되도록 편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편하게 이야기하듯이 서로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버리면 뭐가 빠지게 되는가 하면, 내가 문제 있다는 사실이 누락이 되어버립니다. 아까도 예배 전에 이야기했습니다만, 천사가 어떻고, 귀신이 어떻고,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사람 대 사람으로 신학을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가 듣는 내가 정리가 되도록 이야기를 해주면 얼마나 수월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정리가 되어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마치 나에게는 구원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럴 여지가 있는 자신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좋게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나는 구원될 수 없어. 나는 구원 안 돼. 나는 구원 될 인간이 아니야.’라는 의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 이런 이야기가 나에게는 이해가 되니까, 해석이 되니까 역시 나는 똑똑하기만 할 뿐만 아니라 나는 구원될 자격이 있어’ 이런 오해를 사버려요. 

  

주님께서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3장 12절에서 18절을 주신 것은, 우리가 딱 보면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줄 때 필히 우리한테서 어떤 반응이 나오느냐 하면, “주여,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준비하신 그 다음 말씀이 있어요. “너는 너 자신에 대해서 평소에 상당히 좋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네가 왜 내 말을 알아들어야 해? 네 주제파악이 안되어 있어. 너는 너 자신을 좋게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시게 되면 딱 알아듣는, 그 정도로 나는 괜찮은 존재라고 네가 착각하지 말라.”하는 거예요. 

  

마치 나한테는 구원받을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마치 나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는 자처럼 그렇게 행세하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했다. 알아들었다. 그것이 아니에요. 지난 시간인가 이야기했잖아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는 그 단서를 왜 붙입니까? 그 강령을 왜 붙이는 거예요?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에요. 박사가 아니라서 구원 못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되는 방식조차도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그 방식을 주께서는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조치를 해주시면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이렇게 해서 구원받는다, 라는 어떤 기획 같은 것이 있으면 그것은 주님 앞에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구원의 방식조차도 주님께서 말씀 안에 새롭게 담겨 있어요. 세트로 하지요. 주께서 말씀만 하고 우리는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도 믿어지도록 하는 장치까지 주께서 말씀 안에 포함시켜서 택배로 우리에게 세팅시킨 채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게 오게 되면 우리가 도저히 내 능력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어지게 되는 거예요. 믿는 것도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어진 거예요.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 안에 뭐도 포함되느냐 하면, 믿을 수 없는 예수님을 믿게 하는 능력까지 집어넣어주신 그 주님의 세밀함도 같이 감사하면서 믿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나는 주님의 그런 친절한 배려로 인해서 나는 나 자신에게 구원받을 어떤 권리가 사랑받을 자격자가 아님을 또 다시 확인했습니다, 가 돼요. 오늘 본문에서 수건과 예수님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목욕탕 가면 주는 수건. 여탕에서는 안준다는 소문이 있던데 안가봐서 모르겠습니다. 수건과 예수 그리스도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수건과 예수님의 관련성, 이 성경책이 인간 쪽에서 끄집어낸 책이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삭제되었을 거예요. 될 수 있는 대로 구원 받기 쉽게 하려는 것들만 남아 있고 얼토 당토하지 않은 내용은 다 빠져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있다는 말은 성경이라는 것이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는 내용이지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면 구원된다는 책, 구원에 관한 책은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된 사람은 자기구원 되었다는 노림수가 죄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는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데 그 전에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내가 죽어서 천당 가는데 관심을 둔, 그 정도로 자기 입장도 제대로 알지 못한 죄인이었다는 고백을 두고두고 내 놔야 됩니다. 

  

만약 시작이 구원받는 것이 시작이라면 구원만 받으면 달랑 끝나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애들 놀이에 줄넘기가 있어요. 노래를 부르면서 양쪽에서 줄을 빙빙 돌립니다. 그러면 줄을 돌리는 두 애 말고 제 3의 아이가 타이밍을 찾습니다. 언제 빙빙 돌아가고 있는 저 줄 속에 들어갈 타이밍을 잡는가? 노래부르는 중에 타이밍을 딱 찾아서 뛰어들지요.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다 마련한 이 구원에 대해서 우리는 타이밍을 봅니다. 제 3의 지역에서, 구원 안된 지역에서 탁 뛰어들어서 “난 이제 구원받았다. 헤헤.” 우리가 이러고 싶어요. 그래서 젊을 때는 돈 번다고 교회 안 오다가 늙어서 할 일 없으면 교회 나오고, 그런 계산 같은 것이 그래서 나온 겁니다. 

  

우리 모든 인간이 그래요. 왜냐하면, 구원도 자기 선택에 의해서 성사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평소에 버릇이 어떤 결과를 낳을 때는 내가 먼저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그 원인에 의한 결과로서 내 행위에 의해서 구원이라는 것을 획득하고 영생도 가져오는 것, 평소의 인간들 행세가 그 행세에요. 

  

그래서 만날 교회에서 목사한테서 묻는 것이 “내가 뭘 하면 구원받습니까?” 항상 출발점을 내가 행하는 것을 원인으로 잡아서 그 결과로 구원이고 복이고 뭔가 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기도를 어떻게 하고, 헌금을 어떻게 하고, 전도는 어떻게 하고, 교회 봉사는 어떻게 하고, 신앙생활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묻거든요. 

  

그런데 묻는 그 전제가 뭐냐 하면,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고,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나는 죽어서 천당 갈 권리가 있습니다.”를 깔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만약에 그게 없다면 어떻게 할래요? 아예 그게 없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성경을 보게 되면 그 내용이 얼마나 악마적이라는, 마귀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우리가 제 3의 자리에서 줄넘기하는데 뛰어드는 입장이 아니고 우리가 제 3의 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평소에 자기 맘대로 멋대로 살아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마련한 그 판에서 함께 요동치고 있고 파닥거리고 있는 거예요. 관람하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보게 되면 절에 가서 빌고 갓 바위에 가서 비는 그것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되는 거예요. 

  

교회에 안 나오고, 예수 안 믿고, 자기 맘대로 살아도 그것마저도 주께서 그렇게 하도록 시켰고 허락했고 그 길로 가도록 조치를 하신 겁니다. 제가 지난 설교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지옥에 자기 맘대로 못 간다고요. 지옥도 악마가 인도해야 됩니다. 어린애가 유치원에 갈 때 엄마가 손잡고 가듯이 모든 인간이 지옥 가는 것도 자기 맘대로 못가요. 

  

아무리 죄를 짓고 또 짓고 지옥가고 싶어서 환장을 해서 죄를 계속 지어도 악마가 데려가지 아니하면 지옥에 못가요. 인간이 그런 입장입니다. 지옥 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나야 지옥 가는 거예요. 안 믿는 것도 본인이 안 믿고 싶어서 안 믿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허락 하에 안 믿고 있는 거예요. 무신론자. 주님 허락 하에 무신론자 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이 제발 무신론자처럼 살아달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자꾸 하나님이 없다고 살고 싶은데 주님의 허락이 안나요. 천국 가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어요. 이게 바로 성도에게 나타난 기이한 현상입니다. 줄넘기 하듯 하는 제 3의 지역이 아니에요. 만약에 우리가 구원부터 시작을 한다면, “구원 받았다. 헤헤!” 그 다음부터는 자기 맘대로에요.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막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또 그렇게 이야기한 목사가 있다는 거예요. 대구 지묘동에. 모든 판단이 구원론에 있기 때문에 자기 잘되는 것, 자기 구원론에 입각해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해도, ‘저 사람은 내 구원에 어떤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인가?’ 그런 식으로 보니까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나온 겁니다. 

  

우리 교회 남자화장실에 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돼요. 하도 고장이 나서 열쇠를 바꿨습니다. 화장실 자물쇠를 열려면 바로 딱 떼는 것이 아니고 철사가 돌아가면서 감겨 있거든요. 탄력성 있는 그 철사, 그 감겨진 선이 다 돌고 난 뒤에야 열쇠가 쏙 빠져요. 구원이라 하는 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에 참여된다는 말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구부러진 철사라면 한평생 다가도록 예수님의 공생애에 참여하면서 나중에 죽으면 그 철사에서 쏙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베드로전서 2장에 나오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기 위해서 따른다고 되어 있어요. 그걸 아는 목사가 왜 막살라고 했는가? 그게 바로 막 사는 행위인 것을 주께서 그렇게 규정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을 따르는 그 모습이 막 사는 모습일 경우에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동참했음을 느낄 수가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힘줘 버리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느껴지지 않고 내가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 어깨에 힘들어간 나의 윤리적, 도덕적인, 자기 의를 쌓는, 신앙이라는 이름의 종교적인 노동, 오락, 취미활동,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자기에게 계속 주어지는데 그게 바로 세자로 ‘자기의’라는 겁니다. 

  

신앙생활 오래하고 교회 오래 다닐수록 자기의가 점점 누적이 돼버려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위해서 뭔가 했다는 그것이 자꾸 기억나고 그것이 자꾸 마일리지처럼 쌓이게 되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복 달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말 살지를 못하는 사람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게 오늘 본문 17절에 나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뭐가 있다? 자유함이 있느니라.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 했습니다. 자유함을 다른 말로 하면 막 사는 것이지 뭐가 있겠어요? 왜 막살아야 되는가? 그 철사 줄에 매여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막 살아도 그 철사 줄, 예수님의공생애에 함유된 공동체험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리스도가 살았던 그 노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가서 부활로 사라졌잖아요. 성도도 그 길을 그대로 가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시니까,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못 벗어나니까 마음껏 살아도 괜찮고 마음껏 사는 것을 다른 말로 ‘막산다.’고 하는 거지요. 어차피 벗어나지 않는데요. 이러나저러나 벗어나지 않는데요. 그러면 제 말에 이의를 걸 거예요. 

  

막 살아서 지옥가면 어떻게 하는가? 그런 대구가 나올 줄 알고, 지옥가는 것도 자기 맘대로 못 간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마귀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면, 마귀노선에 있지 않으면 지옥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 자유에 반대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자유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누구라는 말입니까?” 이렇게 하겠지요. 

  

그게 누구냐?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유함이 없었던 사람이 모델로서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13절에,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말이 나오고, 14절에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그 다음에 나오는 말, 구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약, 이스라엘, 그리고 제가 아까 이야기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이 있다.’ 

  

막사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막사는 것이 뭐냐를 지금 설명하려고 합니다. 제가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설명합니다. 사도바울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사도바울을 세워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이 뭐냐를 알기 위해서 먼저 어디로 가느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 사람한테 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 자신이 누군지를 그들은 알았는가? 그들은 우리하고 똑같아요. 그들은 자신이 누군지를 몰랐습니다. 몰랐는데 그들이 속박되었다는 것, 완고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돼요.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수건을 덮고 내려오는 사건을 마주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수건이 신약까지 계속 이어졌다는 거예요. 예수님 때까지, 지금 이 때까지, 사도가 있던 신약까지 계속 이어지고 심지어 오늘날 21세기까지 수건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수건 질기기도 합니다. 뭐로 만든 수건인지 몇 천 년이나 이어지는 수건이네요? 수건이 하나님의 자유와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를 예수님은 수건가지고 설명하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그 수건가지고 주께서 언급하고 싶고 말하고 싶은 그 관계, 내용이 뭐냐를 주목해야 돼요. 

  

모세가 얼굴에 수건 쓴 것, 대체 하나님께서 왜 그런 조치를 취하게 하셨는가? 그 수건이 뭐 길래? 그 수건은 원천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오리지널이지요. 어려운 것 들어갑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어떤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한계라 하는 것은 여기서 여기까지는 한계, 그리고 그 바깥을 한계 밖이라고 보는 거예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여기서 여기까지 이생, 그리고 죽고 나면 저 생, 이생과 저 생 사이에 한계가 있는데 그 한계가 인간의 죽음,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게 맞는 말일까요? 그것은 맞ㄴ느 말이 아니고 틀리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는 자체가, 인간이 한계를 생각한다는 자체가 아직 한계를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현실인데 현실밖에 어떤 하나님이 계실 것이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이야기에요.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 본문의 내용이 이거예요. 하늘은 땅에서 연마되어서 하늘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땅에서 뭔가 일이 벌어져서 그것이 숙성되어서 하늘이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는데 어디에 창조했는가? 천지 창조를 어디에다 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답변 못합니다. 창조를 누가 하셨는가, 그 답변은 알고 있어요. “어디에?” “어디다가 했지? 무에서 했다는데 어디다가 했지?” 원래 원문에 보면 태초에, 해서 시간에다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한 거예요. 

  

만약에 제가 죽게 되면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가 죽어도 시간은 남아 있잖아요. 여러분이 죽어도 시간이 남아 있어요. 몇 해 전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직도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아버지는 분명히 시간의 주인공은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 그걸로 시간은 종결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 뒤에는 없어요. 

  

“예수님 죽고 난 뒤에 그래도 재림이 남아 있으니까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게 오늘 본문 13절에 나와 있어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장차 없어질 것이에요. 밑장 빼는 겁니다. 사라지는 거예요. 노을이라는 것은 새벽에 보면 이미 없어졌어요. 저녁에 노을이 온 천지를 다 덮고 있어요. 

  

그러나 노을은 새벽만 되면 사라질 겁니다. 밑장을 빼는 거예요. 움직이는 겁니다.

소멸되는 거예요. 이 시간이라는 것은 없어지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지심으로서 이미 시간은 마감이 되었어요.
마감이 되면서 예수님은 승천해서 위로 올라가면서 이 세상은 뭐가 되는가 하면, 묵시의 세계가 됩니다.
묵시의 세계라 하는 것은 옆에서 옆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아래로 비교하는 거예요. 


 
위에서 아래로 비교해보면, 이것은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그들은 갇혀 있습니다. 위에서 볼 때 전체는 시간 안에 갇혀 있고 공간 안에 갇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갇혀 있어요.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한 것이고요. 어디에 갇혀 있는가? 하나님의 저주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부터? 인간은 처음부터 저주에 갇혀 있었어요. 심판에 갇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몇 날 몇 시에 구원받았습니까?” 박옥수의 구원파. 이게 시간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 이후부터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모든 관심사, 교회 오는 관심사가 자기 구원받으려고 오는 거예요. 교회가 구원해주는 여행사입니까? 천당 가게 해주고 커미션 받아 챙기는 겁니까? 동유럽 가는데 9박에 13만 9천원이면 간다고 홈쇼핑에 나왔어요. 큰일 날 뻔 했다. 139만원이지요.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는 데가 아닙니다. 교회는 단 한사람도 구원하지 못해요. 교회가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 정보를 알아서 구원 못 받았던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당신은 구원된 사람입니까, 아닙니까?”를 확인하는 것뿐이에요. 새삼스럽게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어디에 속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이겁니다. 모세가 깨진 돌판을 대신해서 새로 만들어서 다시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시내산이 한 2천 2백 미터쯤 된다는데요. 요새는 시내산이 다른 데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고요. 어쨌든 그 높은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옵니다. 내려오면서 자기가 기억한 말씀과 두 돌판을 가지고 올 때에 모세 본인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몰랐어요. 

  

그런데 딱 내려오니까 마중 나온 대표자들, 아론과 다른 지도자들이 얼굴을 돌려버린 거예요. “저분들이 왜 그래?” 하니까 그 태양같이 빛나는 광채 때문에 얼굴을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모세가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갔다 왔지?’ 시내산 갔다 왔거든요. 시내산에서 누굴 만났지요? 하나님을 만난 거지요. 

  

그러면 시내산에서 물도 마시지 않고 40일동안 있다가 내려왔는데 산 밑에 있던 보통 일반인들과 같이 어울릴 수 없을 정도라면 이 말은 곧 이게 곧 인간세상의 물리적인 실체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세계는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저주 앞에서 다 불에 타죽어야 돼요. 40일 만에 내려온 모세의 광채도 제대로 못 볼 정도 같으면 물리적으로 인간은 태양보다 더 강렬한 그 열과 빛에 의해서 타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게 인간존재입니다. 인간은 그 정도밖에 안돼요. 그런데 사건이라고 했거든요. 모세가 시내산 내려오는 사건을 통해서 일부 그 사실이 알려졌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인간은 그냥 태평하게 태양은 그대로 돌고 별도 그대로 있으니까 농사 계속 지으면서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편안하게 사는구나. 왜? 하나님은 사랑이고 은혜로우시니 날 살려줘야 마땅하지.’ 

  

자기는 당연히 하나님이 살려줘야 되고 당연히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오해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다른 민족은 몰라요. 오직 구약 이스라엘민족에게, 그것도 늘 알려준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사건, 모세가 광채나는 사건을 통해서 ‘아, 우리가 물리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저주받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그 순간 잠시, 약간 그 틈새를 통해서 삐져나오듯이 알려준 거예요. 

  

그렇게 알려줬다면 그들은 뭘 알아야 되는가? 우리가 봄, 여름, 가을, 겨울, 평소에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이것은 보호막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저주받아도 마땅한데 뭔가 보호막 속에 놓여 있는 겁니다. 그 보호막 속에 놓여 있는 그것이 바로 갇혀 있는 거예요. 사실은 보호막 속에 갇혀 있는데 그 보호막은 뭐냐?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 오는 죄에 대한 저주를 보호막에 커버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보호막이 뭐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몰라요. 

  

보호막이 어떤 요소로 구성되었기에 죄짓고 있는, 저주받아 마땅한 우리가 태평스럽게 이렇게 평화롭게 살아가고,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 되면 우거지고, 가을이면 낙엽이 지고, 겨울이면 눈이 오고,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의 이 모든 것이 누구 덕분인지, 누구 은혜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어떤 요소 때문에 보호가 가능한지 우리는 당최 모르는 상태였어요. 

  

그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알려주는 겁니다. 그 보호막의 구멍을 찢는 거예요. 그러면 그 찢어진 구멍 사이에서 저주가 흘러들어오지요. 저주가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모세도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모세가 얼른 뭘 하느냐 하면, 광채로 인해서 말씀을 줘야 하는데 말씀을 못 주게 되니까 얼른 수건으로 막았다는 말이지요. 

  

수건으로 막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동안 보호막의 구성요소인 수건으로 땜질했다는 그 말이거든요
. 그러면 수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저주마저도, 저주 속에 있는 존재마저도 수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특별조치에 의해서 용서가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천국백성이 된다는 원천적인 요소가 수건 안에 함의, 그 뜻이 들어 있는 겁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저주는
기존에 편안하게 느껴지는 인간의 질서체제와 마주하면서,

저주 안에 있으면서도 나름대로의 어떤 질서체제를 갖추고, 민주주의를 외치고, 정의를 외치고, 촛불집회를 하면서, 살만한 세계, 인간다운 세계, 나라다운 세계를 만들자고 나서는 함성과 아우성과 몸부림, 그 둘 사이에 뭐가 있는가? 

  

여기에 폭력이 존재합니다. 흔히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십자가라고. 여러분, 십자가가 뭔지 알아요? 폭력의 증거물입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쪽이 있고 그 대중들에게 폭력을 당한 쪽이 있습니다. 그 폭력당한 쪽이 예수님 쪽이고 그래서 흘려진 그 피가 사죄, 용서하는 피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은 폭력적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태평천국, 인간의 행복, 인간의 민주주의, 그 모든 안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에 대해서 폭력적으로 행사할 저의가 포함되어있어요. 악마적인 노림수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다 인간성 좋고, 어질고 점잖아 보이지요. 어느 양식 있고 교양 있는 사람치고 점잖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상식 있는 사람치고 다 예절바르고,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친구와 함께 우정을 나누고, 양보 잘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지하철에서 누가 엎어져 있으면 천 원짜리라도 한 장 던져주고. 

  

이 정도로 동정할 줄 알고 남에게 의리 있고, 그런 식으로 인간답게, 성실하게, 착하게 살아가는 줄 알았지요. 이거 다 폭력을 위장한 거예요. “점잖은 우리에게 주께서 점잖게 이야기해주시면 우리는 점잖게 구원받겠습니다.” 이거 불교입니다. 불교는 성경이 아니에요. 불경이에요. 불경은 점잖은 사람들 더욱 더 점잖게 하는 거예요. 도 닦는 사람들 도 잘 닦게 하는 겁니다. 

“네 속에 선한 것을 개발해라.” 이게 세상 모든 종교의 특징입니다. 

“네 속의 점잖은 것.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불일 듯 일게 하라.” 이게 바로 모든 종교의 특징이에요. 


“네 속의 폭력을 발췌하라.” 이것은 오직 복음밖에 없습니다. 

복음 앞에 설 때 우리는 폭력적이 돼요. 

십자가는 폭력인데 왜 우리는 폭력이 아니라고 우기는 겁니까? 

이게 위선이에요. 

두 겹 세 겹 깔아놓은 위선입니다. 

그 폭력의 모습이 헌금이고, 기도요, 예배참석이고, 성경보기고, 큐티고, 전도고, 선교고 그런 거예요. 

왜 고향 놔두고 멀리 선교사 갑니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폭력이고 도발이에요. 반항하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희생은 예수님 희생으로 끝났어요. 

어떤 인간도 그 희생에 걸치지 마세요. 그것은 위선자들이에요. 

우리가 교회 나와야 될 것은 

이제는 우리가 위선자 아니라는 그 위선자임을 

제대로 폭로당하기위해서 우리는 말씀 앞에 서야 돼요. 

수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하면,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우리를 하나님 쪽에서 취한 조치가 들어 있어요. 

수건을 씀으로서 비로소 대화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수건을 통해서 또 알게 된 것은 뭐냐? 

  

수건을 통해서 저주가 임하지 않는다는 그것 하나, 

두 번째는 뭐냐? 그들의 완고함이 수건을 통해서 확연하게 증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14절에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이 말은 뭐냐? 얼마나 완고했으면 자기의 폭력성을 감추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에 대한 폭력성을 감추기 위해서 얼마나 유대인들이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실천에 옮기려고 하고, 말씀을 묵상하려고 했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런 폭력성을 세상에 심어놓았는가? 

하늘나라는 땅에서부터 연마되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땅의 그 폭력성이 확대되어서 그것이 하늘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 안에는 천국의 어린양의 보좌가 있어요. 

어린양의 보좌라는 것은 죽임당한 분의 보좌, 죽임당한 당사자의 나라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천국이라는 이름을 골로새서 1장에서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2017년 1월 8일에 대전에서 수련회합니다. 홍보 들어갑니다. 홍보할 필요도 없겠지만. 수건이 벗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사람은 법을 원하는 거예요. 

왜? 사람은 법을 지킬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법을 지킬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씀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그런 식이에요. 

“말씀하옵소서. 지키겠나이다.” 

오늘 본문은 뭐냐? “아직도 너는 완고하구나.” 이게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그 때 모세가 수건을 씀으로 말미암아 수건이라는 경계선을 통해서 비로소 그동안 인간이 한계라고 하는 그 한계는 거짓 한계고 진짜 한계는 모세가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수건으로 가리고 얼굴에 광채 띠고 내려올 때 비로소 인간은 저주에 갇혀 있는 거예요. 저주에 갇혔다는 말은 말씀을 지킨다고 해서 풀릴 저주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새삼스럽게 예수 믿고, 성령 믿고, 착하게 산다고 해서 구원받을 그런 대상들이 우리가 아닙니다. 이미 갇혔어요. 줄넘기 이야기 다시 해 볼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했다. 우리는 여기에 끼어들면 된다.” 이런 것은 없어요. 우리가 놓인 이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줄넘기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슨 자격으로? 저주받아야 될 입장으로 포함된 거예요. 

  

저주받아야 될 입장에 놓였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떤 잘못으로 저주를 받게 됩니까? 어떤 잘못인가요? 네 잘못이지요. 뭐요?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것, 시키는대로 해서 구원받겠다는 것, 교회 다녀서 구원받겠다는 것, 이게 바로 저주받을 짓이지요. 이게 완고함의 대장, 대 왕마귀가 이거예요. 교회 다녀서 구원 받겠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 이게 왕마귀에요. 

  

세상전체를 자기가 임의로 만든 한계로 지운 거예요
. “나는 이 땅에서 고생하지만 내가 죽게 되면 저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아닙니다. 자기 한계, 죽음이라는 자기한계, 자기죽음은 의미 없어요. 왜? 죽기 전부터 이미 죽어 있었으니까. 진짜 한계는 아무리 인간이 뭘 해도 한계는 알려지지 않아요. 한계라 하는 것은 구약 때는 모세가 돌판 들고 내려와야 한계가 알려지고 신약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함이라는 제대로 된 한계가 밝혀지거든요.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죄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라는 고백이에요. 죄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죄안에 갇혀서 몸부림치는 그것마저도 죄임에도 불구하고 죄가 파닥거리면서, 죄안에 갇혀 있는 주제에, 잉크 물에 빠져 있는 주제에 잉크 물을 덮어 쓰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임의로 그 잉크 물을 긁어내서 하얗게 만들려는 그 시도들. 교회 다녀서 도 닦아서 그리스도 형상을 본받자, 성화하자는 식으로 자기가 자기에게 어떤 행동을 가해서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순수해지고, 깨끗해지고, 개선의 여지가 있고, 착해지고, 주께 영광 돌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이 모든 짓거리가 그게 바로 마귀가 시킨 거예요. 

  

목사라는 라이센스를 가진 그 작자들을 통해서 시킨 거예요. 우리는 그게 납득이 되고 비로소 교회 온 보람을 느끼고. ‘교회 안 왔으면 큰일날 뻔 했다. 지옥 갈 뻔 했다.’ 교회 가고 안가고 그것으로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들어가니까 나의 죽음조차도 죽음도 아니에요. 그것은 죽음 근처도 안 갔어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 안에 가 보니까 이미 우리는 묵시의 세계, 시간이 끊어진 묵시의 세계, 시간이 어떻게 흘러도, 인생이 어떻게 흘러도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고, 이미 산 사람으로서 우리는 육신을 벗는 시간만 남아 있을 뿐이에요. 이것은 밑장 빼는 거예요. 슬슬 거두기 하는 겁니다. “자, 흙으로 만든 네 육체 이제 수거해간다.” 

  

수거하는 과정 속에, 도르레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우리 육신을 수거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형상, 하늘에 속한 형상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안에 있다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이렇게 했거든요. 

  

주의 영은 어디서 생기는가 하면, 주님께서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주의 영이 생겨요. 십자가 지고 난 뒤에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거기서 뭘 베풀어주는가? 성령을 주는데 그걸 성령세례라 합니다. 성령의 선물을 주게 되어 있어요. 이게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로 나옵니다. 성령을 선물로 주게 되면 성령은 스파이더맨이에요. 거미줄입니다. 

  

성령을 보라고 성령을 준게 아니고 주님이 어떤 일을 해결했는가를 보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것처럼 이미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어버리면 우리의 육체 때문에 보지 못하는 다른 것을 보게 돼요. 뭐냐? 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주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어떤 세상에도 얽매이지 않는 영광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세계에도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니까 그게 뭐냐? 거칠 것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거칠 것이 없이 살아가는 것을 세자로 막 산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막사는 거예요. 주 안에서. 주 안에서 막 살게 되면 그것이 주님께서 어떤 것을 해결했는지를 보여주는 증인으로서 그 기능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이래도 구원받았고 저래도 구원받았다는 사실. 무엇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죽음이라는 것, 이제 나의 죽음은 없어졌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는 이제 이 세상을 위에서 조망을 하게 돼요. 이 땅에서 어디에서 사느냐, 어떤 직업을 갖느냐, 그것이 의미가 없어요. 

  

어차피 세상은 전부 다 죄안에 갇혀 있습니다. 소원이 있다면 이 세상을 빨리 떠나는 소원밖에 없어요. 그게 사도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목적 같은 것이 없어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게 자유함이에요. 시키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상당히 부지런하다는 거예요. 막 사는데 굉장히 부지런하게 막 살아요. 

  

‘내가 뭐할까?’가 없습니다. ‘주께서 이 일 하라고 또 하루를 살게 하셨구나. 오늘은 교회 오라고 하셨구나.’ 교회 올 때 어떤 목적이 없습니다. 주께서 보내셨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교회 온 거지요. 교회 가는 것도 마찬가지고. 교회 못 오는 것도 주께서 못 오게 하신 겁니다. 그게 뭐냐? 이미 우리한테 예수님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구태여 내가 결정할 문제는 남아 있지 않은 거예요. 

  

내가 결정해 버리면 내 자존심도 함께 등장하고, 내 명예도 등장하고, 내 위신도 같이 고려하다 보니까 사람이 스트레스 받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만들었는데 제 3자인 내가 왜 스트레스 받습니까? 스트레스 받는다는 것은 아직도 고무줄 바깥에서 관람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춤출 때 같이 춤추면 되고 주님이 애곡할 때 같이 울면 되는 거예요.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같이 웃으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뭐로 설명하는가? 물세례 들어간 사람만이 성령세례 들어간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물세례에 들어가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인간을 대표해서 먼저 죄 없는 자지만 죄 속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난 뒤에 성령세례 받게 했습니다. 불세례, 십자가에 가가지고 성령세례 받게 했거든요. 

  

따라서 우리가 성령세례 받고 주님의 구원을 받은 것을 어떻게 아느냐? 우리가 물세례에 놓였다는 사실을 알면 돼요. 그게 뭐냐? 우리는 죄 안에 놓여 있는 입장에서 지금 마지막 우리의 껍데기 같은 남은여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옷 벗을 날만 남아 있습니다. 옷 벗는다고 그냥 홀랑 벗지 마시고, 자살하지 마시고 주께서 그 날짜도 충분히 활용을 해요. 

  

주의 증인으로 우려먹을 거 다 우려먹고 사용할 것 다 사용하고 더 이상 주의 증인 할 필요 없다 싶을 때 “어서 오너라.” 해서 우리를 데려가게 되시는 겁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갔던 길이고 사도들이 갔던 길이고 오늘날 우리가 가는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이 있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이해되는 말씀을 하셨사오니 이제는 그 수건이 벗어져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 안에서 세상 하등 부러울 것이 없고 세상에 어떤 미련도 두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