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강-고후 2장 12-16절(향기와 악취)1611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2장 12-16절입니다. 신약성경 287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2:12-16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복음에 대해서 냄새로 설명을 한다는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는 거지요. 보통 냄새는 사람의 몸에서 풍기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이 다가오는데 향기가 팍 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사람이 다가오는데 찌든 담배냄새, 술 냄새로 다가올 때 얼마나 그 사람이 지속적으로 담배를 피웠으며 지속적으로 술을 먹어왔는지가 그 사람의 신체 자체를 변형시킨 겁니다.
이것은 복음을 알 때 어떤 한 순간적인 체험이나 지식으로 복음을 안다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몸 자체가 복음덩어리, 지속적인 복음의 향기가 나오는 복음의 향수병으로 전환되는 것을 하나님이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복음이 한순간의 지식이 아니고 그 사람의 신체적으로 변형을 유발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재적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어떤 일순간의 체험, 은혜 받은 체험이라든지, 바람에 훅 날아버리는 식으로 ‘복음을 알았던 그 시절이 언제지? 언제 알았지? 내가 그런 적이 있었어? 복음에 대해서 듣기는 했는데 무슨 뜻인지는 다 잊어버렸어.’ 이렇게 잊었다는 것은 기억에 속하는 문제에요. 몸 자체가 복음에 의해서 계속 풍겨져 나오는, 생각이나 인간 자체가 변신이 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 제조된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그냥 버티고 있다는 거예요. 나중에 죽어서 좋은데 가야 되기에 지금 아는 이 지식으로 버티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학구적이고 탐구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일수가 있어요. 성경공부, 신학공부에 파고들어서, 원어 파고 들어가서 성경을 헤집고 다니면서 신의 뜻을 뽑아서 그것으로 자기의 장차 닥칠 재난과 지옥 갈 상황에 미리 대처하겠다고 시도하는 그것, 이것은 냄새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옛날 그 몸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보를 추가적으로 하나 더 긁어모은 것뿐이에요. 그러면 정보를 긁어모은 지식적인 그 교인과 몸 자체가 복음의 향수병이 된 그 사람과는 어떤 차이가 나는가? 어떤 차이로서 그것을 판정을 내릴 수가 있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4절 중간부터 보면,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 자체가 내재적이 되고, 인간자체가 하나님의 복음으로 가득 찬, 말씀으로 가득 찬 향수병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한편으론 지식으로 얼추 들은풍월이 있어서, 십자가가 어떠니, 그리스도가 어떠니, 삼위일체가 어떠니, 그런 것으로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지식으로 윽박질러서 자기 팬, 자기추종자로 만드는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둘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많은 자들을 유발하는 움직이는 구심처로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너는 뭘 어떻게 해도 저주받아야 돼, 라고 상대방에게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좋은 것이 좋잖아요. 그런데 복음은 좋은게 좋은게 아니에요. 그냥 어물쩍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기어이 두 조각으로 내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남과 원수 맺는 것을 심적으로 부담스러워 해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 성공한 겁니다. 주변에 다 자기 좋아하고 칭찬하고 자기를 격려해주고 자기를 도와주려고 준비된 사람들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주변에 내가 등장하기만 하면 다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만 생긴다면 ‘참 내가 이러려고 성도되었나?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그것이 중요한 것인데.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곡성>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중 하나입니다.
사람이 생존하고 이웃과 사귀는 것이 행복이지 뭣이 중헌디? 이보다 더 중한 것이 어디 있다고 왜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주변에 슬슬 나를 피하도록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느냐는 겁니다. 한발자국 다가가면 두발자국 물러난다는 이야기가 백지영 노래에 나옵니다. 가까이 가려고 하면 저만치 내빼버리고. 명절에 모여서 이야기하다가 종교이야기만 나올라치면 “너 입 떼지 마라.” 입도 못떼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이러려고 성도되게 했습니까?
사도바울은 좋은게 좋은게 아니에요.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면 만인에 의해서 환영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하나님의 향수병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가는 그 현장에서 필히, 그 점잖고 어질고 인간성 좋고 품격 있고 교양 있는 사람마저도 그것이 바로 망해야 될, 지옥 갈 사람이라는 것을 티를 내는 방식으로, 수단으로 너를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나에게 도움 줬던 일가친척, 친구마저 ‘아, 저래서 지옥 가는구나.’ 하는 티를 팍팍 내게 만드는 그 현장에서의 기준이 되고 구심점이 되는 사람으로 주께서는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자기 원하는 사람도 찾기 힘든 이 세상에서, 내가 등장하면 있는 관계도 다 끊어지는 이 싸늘하고 차가운 인간관계를 누가 원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 마지막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오.”
신학교 처음 들어간 입학생들은 정말 순수해 보입니다. 순수한 것은 아니고 순수해 보입니다.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만 들고 나가겠습니다.” 찬송을 불러가면서 일찍이 고생하고 순교했던 선배목사들 본을 받아서 자기도 그길 가겠다는 그것, 1학년 1학기로서 끝납니다. 2학기 때 컨닝합니다. 2학년 들어가면 수요일에 놀러갑니다. 3학년쯤 되면 수업시간에 족구해요.
신학교에 가면 왜 그 몸이 그렇게 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까? 딱 한가지에요. 뭣이 중헌디? 복음이 중요한가, 아니면 내가 월급 받을 교회가 중요한가? 교회가 중요한가, 복음이 중요한가? 이게 은퇴해서 늙어죽을 때까지 계속 갑니다. 뭣이 중헌디? 돈이 중하지요. 복음이 중하지 않습니다. 돈이 중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사람관계를 딱딱하지 않게, 날선 관계로 안 만들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다.
이게 그동안 지식으로, 일상의 체험으로만, 순간적인 체험으로 왔다가 기억으로만 남은 거예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래놓고 성경을 천 독을 하니 만 독을 하니 해요. 천 독 만 독하면 뭐합니까?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야 돼요. 사람들은 교회가 중하기 때문에 이렇게 합니다. 목회하면서, 나만이 이해하고 있는 그 분이라고 전하는 거예요. 나만이 예수를 이해한다고 그렇게 선전을 해댑니다. 나에게 오면 구원하겠다는 말입니다. 신천지가 따로 있어요? 그거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몸이 바뀌면 그렇게 됩니다. 나를 이해하는 오직 그 분, 이렇게 돼요. 나만이 이해하는 예수가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오직 그 분. 예수님 빼놓고 다른 사람은 내가 진실로 어떤 괴물인지를 아무도 나에게 일러준 사람이 없어요. 좋은 게 좋다고. 잘하면 성공한다고, 열심히 하면 뭐 된다고. 전부 다 나를 부추겨주고 격려해주고. 또는 마음에 안 들면 뒤에서 비난이나 했지 진실로 내가 누군지를 나한테 이야기해준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현장에서 떠나기만 하면 우리는 괴물로 변신해버려요. 사람들, 타인이 요구하는 인간으로 달라져버립니다. “여러분, 이런 인간 원했지요? 내가 그런 인간 되어줄게요.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가지 말고요!” 그리스도 없으면 외롭지 않지만 사람 없이는 외로워서 못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뭐냐 하면, 복음은 지식이 아니고 너에게 저벅저벅 걸어가는 하나의 인간에 의해서 다가간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떠나도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너에게 다가오는데 그 다가오는 사람들의 특징들이 있어요. 모두 다 약해요. 약해도 너무 약해요. 그런데 그 약한 대상이 위험해요. 가장 위험한 것은 약합니다.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 얼마나 위험합니까?
너에게 시시하게 보이는 그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살아 있는 이 예수한테 한 것이고 그 시시해 보이는 그 애를 개 무시한 것은 곧 나를 개 무시한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 약하디 약한 사람의 특징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세상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 필요치 않는, 소용없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
예수만 시시하게 본다면 그 인간도 같이 시시하게 도매금으로 얼마든지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연약한, 미미한 존재인데 그게 위험해요. 얇은 유리잔을 잘못하게 되면 깨지잖아요. 조금만 건드리면 쉽게 깨져버리는 것, 부서져버리는 것, 그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모습이었습니다. 결코 예수님은 강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분은 연약하심을 보이기 위해 십자가지셨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보여줄게.” 강한 것을 원했던 제자들은 다 가버렸어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졌다. 우리 편이 없어요. 우리끼리 촛불집회, 그런 것은 없어요. 그러면 초공장이나 잘 될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는다고요? 지식으로? 아니면 십자가로 화신된 연약한 몸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성도의 모습이고 하나님께서 그걸 제조해 내시는 겁니다. 왜? 모든 인간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힘들을 끌어 모으기 때문에 주님은 가진 힘조차 다 벗겨냈습니다. 교독문할 때 요한복음 1장을 잠시 보았습니다. 거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다.” 예수님이 얼마나 보잘 것이 없었으면.
예수님 이 땅에 오신지 2천년이 지나니까 예수님을 대단한 어벤져스같은 인물로, 영웅처럼 상상들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 살던 그 당시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찮게 보는 것처럼 편승해서 귀히 여기지 아니했다는 이사야 53장의 그 말씀 그대로 보여줄 겁니다. 아무도 그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우리에게 찾아와요. 그런데 그 예수를 귀하게 생각하고 믿는다는 그 말입니까? 그 귀하지도 않은 그분을 우리가 뭘 노리고 귀하게 봅니까? 그럴 수가 없어요.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우리가 속한 세상의 분위기, 속성 자체가 예수님을 폐기하고 돌아보지 않는 성향이고 그 속에 우리가 같이 스며들고 있어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 앞에 깔아놓은 말을 먼저 생각해 줘야 돼요.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였고 아무도 그를 영접하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영접하지 않는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는데 통뼈도 아닌 것이 왜 영접을 해요? 아무도 영접하지 않는다는데?
누구한테 “영접할까, 말까?” “하지 마, 하지 마!” 엄마에게 “영접할까?” “하지 마.” 전부 다 영접하지 말라고 하는데 무슨 재주로 영접이 가능합니까? 결국은 영접이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고 아무도 영접할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주님을 영접할 재주나 능력을 인간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지식으로나 받아들이고 자기는 꿈적도 안할 사람들이에요. 자기는 조금도 달라질 의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미쳤나 내가 달라지게? 이 내 몸 가지고 그대로 천당 갈 거야.” 달라진다 해도 어디서 어디로 달라져야 될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달라져야 되는가? 나 중심에서 말씀중심으로 달라져야 됩니다. 나 중심과 말씀 중심으로 달라져야 되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이 늘 교육했던 이야기에요. “여러분은 말씀을 지식으로만 받지 말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가르쳤겠습니까? 온 백성들을 향하여 귀에 박혀서 세뇌되도록, 귀에 박히도록 계속해서 했습니다. 실천에 옮겨야 말씀답다고, 멈추면 안 된다고.
그래서 그들은 지식과 실천사이에 규칙들, 세칙들을 무수하게 만들어냈어요.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이런 세칙들이 있으니 그것을 따라가게 되면 말씀은 나에게 실제가 된다는 그것을 가르치고 따라왔던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그게 주님을 영접하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나 말고 천국 가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방법이 아니었던 거예요.
개혁주의신학이나 그런 소리 하지 절대로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한 적이 없어요. 이렇게 하면 인간 달라진다는 것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사도본인은 예수님의 향수병이다.” 이 말은 내가 말씀을 지켰더니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찾아온 그 시점이 어떤 순간인가? 한참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던 그 시점, 그 가는 길에 예수님이 그냥 쑥 들어오듯이 일방적으로 찾아와 버렸어요.
찾아와서 내주했습니다. 안에 거주하고 말았어요. 저는 이것을 아메바포식방법이라고 하는데. 아메바는 입이 따로 없어요. 온 몸이 입 같아요. 플랑크톤이 있으면 입구가 없는데 그 순간만 입구가 생겨서 먹이를 삼켜서 자기내부로 훅 빨아 당겨놓고 입구를 닫아버려요. 그러니까 옆에 있던 플랑크톤이 아메바에게 먹혀버린 플랑크톤을 두고 “어디로 갔지? 저 안에 들어있네? 어떻게 들어갔지?”
그 들어간 입구를 찾을수가 없습니다. 입구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은 출구도 없다는 거예요. 한번 포식이 된 사람은 때려죽여도 그 밖으로 못 벗어나요. 영원토록. 그리스도에게 한 번 잠식된 사람은 아무리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골라서 다 하고, 교도소를 들락거려도 어떤 수를 써도 자기를 천국으로 포식한 그 구원의 능력에서 나갈 길을 찾지를 못합니다.
미치겠어요. 지옥을 구경하고 싶은데, 제대로 한 번 보고 싶은데 더는 구경 못합니다. 이걸 두고 저는 아메바 안이라고 표현했지만 성경에서는 ‘그리스도 안’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렇게 해서 예수 안에 들어왔다는 어떤 방법이 있어야 되는데 방법이 없어요. 비누방울 속에 포식이 된 것처럼 그냥 주님이 쑥 들어온 거예요. 한참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데 사도바울에게 주님이 그냥 쑥 들어온 거예요.
들어와서 잠식해 버린 겁니다. “지금껏 네가 한 그 짓도 사실은 하나님이 너보고 시킨 짓이다.” 하고 그냥 쑥 들어와 버린 거예요. 말씀을 지킬 순간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뻐하는 그 순간도, 기뻐하는 것도 안에 들어온 상태에서 기뻐했지 기뻐했더니 구원해주는 것도 없고, 회개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회개했더니 구원받는 그런 공식도 삐~, 천국에는 그런 공식이 없습니다. 교회에는 있는지 모르지만 천국에는 그런 공식이 없습니다.
네 쪽에서 이렇게 하면 구원해줄게, 라는 그런 것은 없어요. 그런 것을 흥정이고 거래라고 하는데 그런 거래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거래는 구약에서 하라고 해요. 구약에서 그런 거래를 하다가 실패로 끝났습니다. 신약에는, 새 언약은 그냥 성령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그대로, 죄인 자체를 입수해서 복음을 증거 하는 재료로 주께서 일방적으로 채택하면 끝! 끝났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인인 것을 발견하면서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의인의 효과를 받고 있는 겁니다. 나는 나의 체험, 나의 고통에 대해서도 내가 남에게 언질 할 언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 되게 아프다.” 하면 저쪽에서 “대게가 뭔데? 영덕대게?” 아무리 말을 해도, 표현을 해도 인간은 닫힌 상태가 되어버리면 이것을 알아줄 타인이 없어요. 입을 닫아버려야 됩니다.
우리의 몸,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못 믿을 사람에게는 악취로 작용을 해야 돼요. 마치 누구처럼. 예수님의 공생애처럼. 따라서 성도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공생애의 반복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왔던 그 몸, 신체, 그게 그렇게 궁금해? 성도를 보아라. 성도의 신체가 맨 그 신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보듬어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에요.
망해야 될 사람은 필히 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될 사람에게는……, 15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망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구원 얻을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이렇게 움직이는 향수병으로, 덩어리 자체가 그렇게 되어가는 겁니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왜 구약과는 달리 신약에는 모든 것을 결정지어버리는가 하는 겁니다. 우리와 사전에 의논한다든지 협상하지 않고, 거래하지 않고 왜 일방적인 조치를 취해버리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방주를 생각하면 됩니다. 창세기 6장부터 나오는 노아방주의 특징은 안과 밖이 명확하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보는 그 한계선 전체를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방주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그 전부에 포함되지 않는 또다른 전부가 따로 동실동실 떠 다니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고 내가 다룰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분이고 그 당시 방주가 그런 거예요. 내가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방주가 아닙니다. 문 닫는 것도 하나님이 해 줬어요.
꼭 아메바같아요.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어요. 그냥 뭔가 표시할 뿐이에요. 너희는 망했다. 얼레리꼴레리 망했다. 그래서 서로 소통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형성됨으로 말미암아 방주 안의 세계에 해당하는 질서 따로 있고 방주 밖에는 방주 안과는 명확하게 다른 질서가 따로 있습니다. 그 방주안의 안목으로 바깥을 볼 때 비로소 방주 밖은 물로 심판받는다는 그 이유가 실제현실이 되어서 보이는 겁니다.
노아는 그것을 비오기 전에 앞당겨서 알았어요. 그래서 미친 노인네가 된 겁니다. 성경 신약에 보면 노아가 외쳤어요.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를 않았습니다. 비도 오지 않는데 방주 만든다는 이것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거든요. 대통령한테 문제가 있으면 서울광장에 가야지 예수 믿는다는 이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촛불집회를 해야지 왜 교회에 오십니까?
대통령하야를 보는 그 시선은, 하야만 하면 나라꼴이 제대로 될 것이라는 뭔가는 희망을 주지만 이것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에요. 희망을 내다보고 있어요. 그러나 방주안에서는 희망은 이미 도달된 희망이에요. 완료된 미래입니다. 도착된 미래에요. 다른 비전, 희망, 꿈, 드림은 필요 없어요. 내가 잘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얼토당토않게 원치 않는데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된 거예요.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체 이 방주 안, 그리스도 안의 세계와 바깥은 어떤 세계라서 이미 결론이 지어졌는가? 저쪽은 이유도 묻지 말고 뭘 어떻게 해도 망하는 세계에요. 지옥 그렇게 보고 싶어 하지만 벌써부터 지옥이에요. 지난번에 백만 명을 봤습니다만 지옥을 보세요. 지금 우리가 매일 보고 있는 것이 지옥입니다. 그것을 다른 관점으로, 다른 안목으로 보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걸 보는 겁니다.
아까도 했지만 다시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외에는 아무권세도 인정하지 않기에 남들 보기에는 변변한 권세, 돈 하나 없는 인간으로 몰릴 때 아주 깨어지기 쉬운 유리창 같은 존재, 이러려고 성도된 거예요. 깨지기 위해서. 마치 누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톡 밀면 자빠지고 십자가에 매달면 허약하게 매달리고,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는 그런 존재이면서도 바로 그것이 이 세상의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얼마나 공부를 해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대체 얼마나 신학공부를 하고 교리를 공부해야 그것을 알까요? 모릅니다. 교리공부 해봐야 지식일 뿐이에요. 평생을 세상 돈과 권세 노리면서 살아왔는데 그게 바로 망하도록 되어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거기서 발견할 수 있다는 안목은 그리스도 안에서나 볼 수 있는 안목입니다. 그래서 이 망하는 자, 왜 복음이 망하는 자인가?
자꾸 망한다는 이것은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으니까 제켜놓고 향기만 생각하자고 그렇게 하는데 절대로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망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망하는 것이 뭔지를 몰라요. 망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납득이 되고 알고 있어야 비로소 그 납득이 된다는 그 사실이 안 망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안목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 악취, 왜 십자가복음이 그렇게 악취가 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이미 모든 인간이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천국가지 못하는 더러운 몸이에요. 더러운 몸, 악취와 향수, 더러운 몸과 거룩한 몸 사이에 건너올 수 있는 다리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주 극단적인 조치를 했습니다. 그게 피에요. 죽음입니다. 죽지 않고 건너오는 방법은 없다는 거예요.
그것도 알아서 죽는 자살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는 죽음 외에는 악취 나는 몸에서 향기 나는 몸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극단적인 조치를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해버렸어요.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고, 그래서 구원받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피에요. 그것도 자기 피가 아니고. 목숨 바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예수그리스도의 죽음, 대리죽음, 희생, 피로서 건너온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보다 더 극단적인 것이 어디 있겠어요?
“나가 죽어라.” 이것은 말 안하겠다는 것보다 더 극단적이잖아요. 나가 죽으라는 말이 관계 끊겠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잖아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극단적인 조치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원하고 천국을 원할 때 인간 자체에서 이미 악취가나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백성이 영접지 아니하”는 몸을 가지고 우리는 이미 이 땅에 태어났어요.
그 몸에서 나오는 종교, 천주교, 기독교, 어떤 종교든, 네 몸에서 변하지 않는 이 몸 가지고 믿는 예수, 이 몸으로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 이것으로 믿는 십자가, 그런 것들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를 여러분이 이제 알고 있어야 돼요. 며칠 전에 뉴스를 보니 항균비누는 항균효과가 없다는 거예요. 이름은 항균비누인데 항균의 효과가 없다는 거예요.
이름은 십자가죽음인데 구원받는 효과가 없다면 이것은 뭐예요? 이것은 사기지요. 왜 그게 사기인가? 출발을 악취 나는 데서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를 괜찮은 존재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주님은 말합니다. “어딜 봐서 네가 인간이냐?” 자기는 자꾸 인간이라는 거예요. 자기한테 좋은 소리만 하면 영접하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재주 없습니다. 제가 문방구에 복사하러 갔다가 ‘이게 바로 인간이구나.’라는 어떤 유명한 책을 봤습니다. 2월에, “집에 경사가 있으니 반드시 생남한다.” 3월에, “서쪽 남쪽이 해로우니 서쪽 남쪽으로 가지 마라.” 6월, “재물이 북방에 있으니 구하기만 하면 얻는다.” 3월 중간, “권가 장가 두 성은 가까이 하면 해가 있다.” 5월에, “귀인을 만나면 뜻밖에 횡재한다.” 그 밑에 “범사에 조심하라.” 7월에 “범사에 조심하라 손재가 두렵다.” 9월에 “송사하지 마라. 구술이 당부된다.” 10월에, “운수가 불결하지 망령된 것을 생각하지 마라.”
이 책 이름이 <토정비결>입니다. 얼마나 노골적입니까? 이게 인간이에요. 직선적으로 딱 잡아서 이야기해요. 이것 안하고 또 이것 하면 복이 온다. 그거하고 교회 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예수를 둘러대면서 아닌 척하면서 백날 해 봐도 결국 이거잖아요. 계속 더 할까요? 11월에, “욕심을 내지 마라. 도리어 실패한다.” 이것은 잠언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데요?
311페이지 10월에 보니, “북방은 길하나 남방은 해가 있다.” 복 받는 방법은 조심만 하면 되잖아요. 그저 조심조심, 교회 다녀도 조심조심. 노골적 방법이 있는데 왜 복잡하게 교리공부, 성경공부 해가면서……, 솔직한 마음은 그게 아닌데. 10월에 성경공부를 해라. 복이 온다, 이것과 차이점이 뭐가 있어요? 십일조를 하면 삼십 배의 복을 받는다, 이거하고 차이점이 뭐가 있습니까? 이런 직선적인 토정비결이 있는데.
이게 바로 마음의 시작이에요. 우리 마음의 시작을 토정비결이 다 보여줍니다. 마음의 시작이 너무 천박하니까, 너무 천박스러우니까 이름을 천주교니 기독교니 해서 바꿔가지고, 속에 있는 자기 노림수는 절대로 변하지 않고 계속 가면서, 예수 이름이니 성령이니 삼위하나님이니 불러가면서 하는 이것, 악취 나는 인간입니다.
악취를 풀풀 풍기면서도 그걸 막 억누르는 거예요. 거룩한 종교적 행위로, 기독교 모습으로, 세례니 성만찬이니 이런 것으로 막 억누르려고 해요. 토정비결의 이 마음을 안 들키려고. 억누른다고 이것이 폭발이 안 됩니까? 또 하나는 뭐냐? 인도에 가면 어떤 종교가 있어요. 그 종교는 인간이 되어서 해탈해야 된다는 거예요. 해탈 안하면 인간은 헛수고로 살아요.
해탈되는 방법은 살생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 승려들은 붓으로 만든 채하고 주전자를 가지고 다녀요. 붓으로 만든 채로 하루 세 시간 걸어 다니면서 길을 쓸어요. 주전자는 왜 갖고 다니는가? 목욕하게 되면 물 속 미생물이 죽기 때문에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주전자 물을 사용하는 거예요. 주전자 물은 그냥 물이 아니고 거름종이로 벌레나 미생물 거른 물입니다. 그 주전자의 물로 목욕한다는 겁니다. 벌거벗고 다니는 종교에요. 그래서 해탈에 이르면 된다는 겁니다. 살생하지 않음으로.
그것은 자발적으로 서서히 죽는 자살행위입니다. 죽는다고 해서 구원받습니까? 죽는다고 해도 구원 안되는 이유가 그 몸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기존의 모든 인간은 다 동등한데 잘만 하면 천국가고 거기서 네가 게으르면 지옥 간다는 그게 바로 우리 마음의 소리에요. 성심성의껏 착하면 천당하고 내가 여기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정신 못 차려서 태도나 행동이 불량하게 되면 지옥 간다는 거예요.
변치 않는 우리 마음이에요. 이것 가지고 껍데기를 기독교로 갖다 입히든 천주교로 갖다 입히든 불교에 입히든, “나는 살아야지, 나는 살아야지.” “네가 누군데?” 사적인 개인구원에 빠져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개인 구원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런 구원은 성경에서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개인이 있다 보니 생존이 중하지만 성경에서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가는 거예요. 열왕기하 17장에 보면, 북쪽 이스라엘나라가 계속 망하는 꼴로 가고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고 북쪽 이스라엘을 포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저 앗수르 대군에 의해서 너희들이 폭삭 망하는 이유는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이다.”라고 죽 나와 있어요. 열왕기상 17장 15절에 보면,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 열조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좇아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하사 본받지 말라 하신 사면 이방 사람을 본받아.”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해석을 잘 해야 돼요. 그들이 말씀을 안 지킨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없던 이스라엘이 만들어졌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보통 사람인데 말씀을 지켰더니 이스라엘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나라의 특수성이 뭐냐 하면, 말씀이,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고 그 약속 따라서 만들어진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보통 나라는 종족이 먼저 있고 종족중심으로 커지면 나라가 돼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만든 나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없던 나라에요. 죽음에서 기어 나온 나라에요. 홍해바다에서 기어 나온 나라입니다. 시편에 나옵니다. 그들이 홍해바다에서 기어 나왔다고. 죽음에서 기어 나온 거예요. 사람이 살 수 없는 물속에서 기어 나온 거예요.
거기서 나온 나라기 때문에 그 나라의 특징이 뭐냐? 그 땅에서의 행복이 우선이 아니라 말씀이 갖고 있던 내용이 더 우선되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특징이고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장차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나라 전체의 움직임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것이 구약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을 유지하면서 주변 강대국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저들처럼 행복하게 잘먹고 잘 살아야 된다는 것을 추구하다 보니까, 여호와 섬기는 제단은 예루살렘 성전 한 곳에 두고 주변의 모든 높은 산들에는, 계룡산, 팔공산, 가야산, 산들에는 산당이라는 것을 지었습니다. 산당을 지었을 때 백성들이 예루살렘성전보다 산당에 가서 빌었어요.
거기에서 효과봤다는 소문들을 산당의 제사장들이 다 입수해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효과 봅니다.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업 잘 된 경우가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이방신전의 모습과 풍속들이 많았습니다. 백성들이 그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임금이라고 해서 그것을 없애면 쿠데타가 일어나든지 대통령 하야하라는 식이 되기에 절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것을 다 허용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해 버리고 진짜 종교생활은 내 맘이 끌리는대로 했어요. 내가 결핍한대로, 내가 아쉬운 대로. 어려울 때 새벽제단 찾아 나오지요. 잘 될 때 왜 나옵니까? 아쉬울 때, 급할 때, 아주 다급할 때 찾는 예수. 그 때에만 비로소 의미 있다고 여기는 예수. 그래야 교회 장사가 돼요. “여러분! 사는데 힘드시지요? 그거 벌 받아서 그런 거예요. 하나님 말씀 안 들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빌어야지. 잘못했다고.” “복 주십니까?” “복 주고말고.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원하는 사랑의 하나님인데.”
그렇게 해서 끌어 모으는 거예요. 장사 그렇게 하는 거예요. 목회는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신학교 들어갈 때와 졸업할 때가 다르다고요. 뭣이 중헌디. 교회가 중하지. 거기서 생계비가 나오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왜 교인들은 가만있는가?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산당을 섬기는 사람들이거든요.
각자 예수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각자의 사업체가 중요하고 자기의 노후대책이 중요한 사람들이에요.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들인데 누굴 탓해요. 오히려 죽이 맞지요. 자기의 미래를 위하여 신에게 빌어보자고. 여러분, 성도에게는 미래라는 것은 없습니다. 미래 잘라버리세요. 미래는 없습니다. 이제는 미래보다도 행복보다도 말씀의 성취성, 실제성, 현실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의 복음덩어리로 주께서 확 하고 들어온 거예요.
아메바처럼 포식해버리고 잠식해 버린 겁니다. 그런 예수가 싫다고요? 빠져나올 수 있으면 한 번 빠져나가 보지요. 그래서 제가 막 살라고 하는 거예요. 한 번 빠져나오려고 몸부림 쳐보라고. 막 한 번 살아보세요. 교회도 나오지 말고, 술이나 먹고 개판으로 마음대로 해요. 그렇게 해서 빠져나왔거든 처음부터 들어온 사람이 아니에요.
진짜 들어온 사람이라면 어떤 소리를 해도, 극단적인 조치, 너같이 더럽기에 내가 깨끗한 피를 흘렸다는 그 십자가 피만이 갈수록 중요하고 유일한, 새로운 나라의 질서라는 것을 여러분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망하는 사회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예수 믿는 착한 일을 하면 복 받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들어올 수 없는 세계에 들어왔으므로 그동안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막 놀았는지를 오히려 쳐다보고 오히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걱정없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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