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16강-복음의 직분(고후4;1-5) 1612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27. 07:40
2016-12-25 12:45:58조회 : 105         
   복음의 직분 161225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복음의 직분(고린도후서 4: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IcbVGkcoKCE, Hit:1
 이근호16-12-25 13:45 
복음의 직분 직분 

2016년 12월 25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4:1-5 

(4: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세상의 모든 직업이란 본인 일에만 충실하면 그만입니다. 남의 운명까지 영향을 결정적으로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3절과 4절을 통해서 보면, 복음 전파하는 일은 ‘망하는 자’를 계속 생산하는 현상을 남기게 됩니다. 즉 복음을 전파되는 일이 없다면, 세상은 고만고만한 자들의 집단일 뿐입니다.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다가 자신들의 명대로 늙어 죽으면 그만입니다. 별다를 게 없고, 어태껏 그런 식으로 인류의 역사는 차분하게 진행되어 왔다는 것은 누구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어느 시간대나 어느 공간에서는 같은 질(質)로 뒤덮여져 있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인간들은 조금씩 늙어가지만 학창시절의 나나 지금의 나라 같은 ‘그’ 인간이라는 것이 변함이 없는 진리라고 여깁니다. 그 동질성이 깨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합니다. 하지만 이 동질성의 파도만 출렁이나 이 세상에 이질적인 분이 나타났습니다. 

동일한 공간이라고 여겨지는 이 테이블 위에 귤이 하나 놓임으로서 귤이 있는 자리와 그렇지 않는 ‘〜외’의 자리로 판명납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갑자가 운명적으로 ‘저주’에 해당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목숨 붙어있을 때까지만 살다가 그 이후에는 죽은다 고 말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5:25에 보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즉 인간은 영원토록 죽지 못합니다. 인간의 동질성을 깨시는 이질적으로 오신 그 분이 영원토록 인간을 간섭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등장하시고 난 연후에 나온 말씀입니다. 즉 제대로 된 악마의 기능이 복음으로만 알려집니다. 악마는 인간 세계 주변을 펜스로 둘러쳐버립니다. 사람들이 행위의 주격이 아니라 이 세상 신, 악마가 행위의 실질적 주인공입니다. 악마는 늘 인간쪽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 세상에 풀썩 던져진 존재입니다. 본인 아니게 태어난 것이고 등장된 물체입니다. 왜 내가 이 모양인지 따질 대상도 없습니다. 태어난 이유도 모르기에 이 의미 없음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이게 마련입니다. 단지 아는 것은 이 ‘동질성’을 기어이 지탱해야 한다는 숙제 같은 것을 부여받았다는 사실 뿐입니다.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에게 늘 조언과 위로와 격려를 얻고자 합니다. “내가 그 때 그 사람 맞지 그지?” 이러한 불안 증세는 곧 쉬지 않고 공포에 쫓기고 있음을 반증해줍니다. (중거해줍니다.) 사적인 동질성은 전체 인간 집단의 동질성에 안심과 안정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로서 악마가 정작 아우르는 ‘세상’이 윤곽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인류 전체는 어떤 성격을 보이게 되느냐는 겁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그 내막이 드러납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이 24절 맑씀은 모세와 아론의 대화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오므로서 그것이 ‘구원’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동질성에 얶매여서 실질적 본인들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자기 동질성임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만 시내산 위로 올려보내었습니다. 

모세가 그 시대에 일종에 분류작업을 위한 절대적 기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돌판을 들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서 백성의 대표자인 아론과 만나면서 했던 대화입니다. 아론이 제대로 말합니다. 금을 빼서 던졌는데 금송아지가 나왔다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모든 이들의 한결같이 의견일치를 본 결과라는 겁니다. 

축제를 벌린 그 날을 산 밑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이름 지었습니다. “여호와의 절일”(출 32:4) 설명도 붙입니다. 이 금송아지는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말입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예외없이 악마가 쳐놓은 펜스 안에 둘려싸여 살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이해하는 신은 ‘금송아지’라는 물질적 형상화에 도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인간들은 자기 동질성을 지켜내고 키워내기 위해서 금송아지에게 기도하고, 금송아지에게 돈을 바치고, 금송아지라는 단체를 자기 종교로 소속되려고 합니다. 그 금송아지 오늘날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인간들은 악마가 쳐놓은 펜스 위에다 구원에 관한 단어와 문장과 명제들과 신학으로서 낙서를 놓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런 몸부림은 공포에 쫓겨서 자기만의 동질성 세계를 확보하려는 도피생활에 불과합니다. 보다 든든하고 여유있는 공간을 장만하고자 하지만 이미 세상의 정신을 지배하는 악마가 퍼붓는 공포는 그 어디에서 찾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악마를 활용하시는 겁니까? 

욥기에 보면 그 내막이 나옵니다. 애초에 인간들이나 욥은 그냥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고만고만한 차이나지 않는 생활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 내기가 일어나고 그 여파는 욥은 영문도 모르는 채 자식 열 명과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가고 심지어는 자기 신체 악청이 일어납니다. 

욥기의 결론에 가게 되면, 욥 본인조차도 미처 몰랐던 새로운 욥이 자기 내부에서 만들어지고, 바로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도전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즉 ‘욥 안의 욥’이 구원받는 겁니다. 욥으로서도 도저히 예상 못한 일입니다. 이 예상 못함이 인간을 자기 동질성에서 구출합니다. 

복음의 광채란 ‘예상 밖’의 사건으로 침입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박사에게는 움직이는 별이 그런 겁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장에서는,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에게 갑자가 천사가 나타나는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우리 속에는 악마가 늘 부축이면서 만들어낸 고름 덩어리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공포를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팠던 토굴같은 겁니다. 그 토굴에서는 선악과 따먹은 본성들이 가동됩니다. 나쁜 일보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구원될 줄로 알고 열심히 악마가 시킨대로 선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기 동질성에 대한 집착을 강렬해지기만 합니다. 인간은 구출하고 싶어도 그 구멍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악마를 이기신 주님께서는 주사바늘처럼 침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마를 활동하여 인간들의 죄악된 본성을 마음껏 활성화 시켜놓으시고 피묻은 손으로 그 오염 덩어리, 고름덩어리를 친히 끄집어내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내부에 쓸데 없는 구원의 노력이 어떤 식으로 키워지느냐를 압니다. 

고린도전서 7:29-3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존재할 필요는 없는 것이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겸손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하므로서 구원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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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6-12-26 17:53 
216강-고후 4장 1-5절(복음을 전하는 직분)1612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4장 1-5절입니다. 신약성경 28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4:1-5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사람마다 직업 다 다르지요. 성경을 썼던 사도바울이 직업이 보통의 직업과 다를 바 없는, 그냥 여러 직업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세상의 모든 직업은 자기 일에 충실하면 그만이에요. 남까지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교사는 교사, 의사는 의사, 농부는 농사만 지으면 되고 자기 일만 충실하면 되는데 이 복음증거 하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일을 합니다.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3절, 4절에 나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사도가 그냥 일을 하는데 일하면서 발생되는 것이 있어요. 망하는 자들이 발생이 돼요. 희한한 일이에요. 보통 자기 직장일만 충실하면 돼요. 회사에서 과장이면 과장일만 하면 돼요. 자기일에만 몰두하면 되고 남들도 각자 자기일에 몰두하면 되고요. 

  

그런데 이 사도라는 사람, 그리고 사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일을 하면 할수록,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망하는 자들, 그저 보통 사람인데 망하는 자들로 티나게 되어 있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나쁜 짓을 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도소가서 망하는 것이 아니고 전혀 상관도 없는데 그저 이쪽 일만 했을 뿐인데 이쪽 사람 빼놓고는 망하는 사람으로 부각이 되고 들춰지지요. 

  

그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여기 세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상 전부를 말하는 거예요. 직업 중에 세상 전부를 다 아우르는 직업은 제가 보기에는 유엔사무총장정도? 내가 하는 일이 세상 전부의 성격과 속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일을 한다. 그 세상 전부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각종 종교도 들어 있어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종교가 들어 있어요. 

  

또 뭐도 들어 있는가 하면, 철학도 담겨 있습니다. 또 뭐가 담겨 있는가? 민족도 들어 있고요. 민족이 들어 있으면 그 민족의 내란문제라든지, 식량문제, 에너지문제, 국경문제, 핵문제, 그것도 들어 있어요. 그래서 유엔사무총장은 자기국적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오늘 4장 4절에 보니까 이 세상 전체를 한 울타리로 아우르면서 언급하는 일을 누가 하는가? 사도가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여기 나오는 이 사람들, 복음 전파하는 이 사람들을 세자로 이야기한다면 ‘오지랖’이라고 할 수 있어요.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오지랖이 어디서 나오는가? 예수그리스도의 사도고 예수그리스도의 종이거든요. 그러면 그 원천인 예수그리스도가 굉장히 오지랖 넓은 분이에요. 내가 오기 전에는 이 세상은 평온했었다. 아무 일이 없었고 정상적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질서체제’라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온 것은 화평하게 하려 함이 아니고 불화하게 함이다.” 갑자기 쪼개지기 시작합니다. 

  

서울에서 가락강의 중에 앞에 마침 귤이 있어서 그 귤을 가지고 설명을 했어요. 그 테이블에서 귤은 애초에는 없었거든요.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귤을 테이블에 한 개 놓았어요. 귤이 없을 때는 그냥 보통 테이블이었어요. 이걸 어려운 말로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이질성이 아닌 동질성.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그냥 고만고만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그렇고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있는데 거기에 귤을 하나 놓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하면, 귤이 잇는 장소와 그렇지 않는 그 외의 장소로 분류가 되었어요. 귤이 없었으면 그냥 인간과 인간끼리 이야기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만 살다가 죽어서 가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의 귤같은 존재로서 동질성을 유지하는 이 세상에 등장하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자로 분류가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드디어 예수님이라는 귤 때문에 생뚱맞게 저주라는 개념이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 귤이 없었으면, 예수님이 없었으면 그런 욕을 안 먹어도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요한복음 5장에서 하는 말씀을 보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절에 가든 알라신을 믿든 그냥 네 맘대로 살라고 해요. 이 땅에서만큼은 그냥 네 맘대로 살 수 있는데 결국은 무덤에서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놀라운 사실은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환장할 지경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살합니다. 자기 딴에 죽어서 고통도 함께 없애려는 시도를 하는데 아, 안 죽네요. 자살하는 사람들, 번개탄 피우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인데 인간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와요. 

  

문제는 기준입니다. 문제는 분류기준이에요. 분류작업을 나중에 죽을 때 하는 것이 아니고 벌써 시작된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의해서, 우리가 읽은 복음에 의해서. 세상전체를 아우르는 기준, 절대적기준이 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이 등장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등장하고, 세상을 아우르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간단한 이야기에요. 

  

뭐냐? 그냥 네 맘대로 막 사세요, 라는 뜻이에요. 전혀 어렵지 않지요? 분류는 이쪽에서 할 테니까, 분류는 이쪽에서 기준 들이댈 테니까 그냥 살던 데로 사세요. 별짓하지 마시고 그냥 사시라는 그 말입니다. 그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이걸 주체라 하지요. 행동의 주체, 주격이라 합니다. 이 세상 신, 악마지요. 악마가 주격의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어떤 개인도 자기가 주격이 아닙니다. 이 세상신이 주격이니까.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이미 주격, 주체가, 세상 신인 악마가 사람들의 마음에 펜스를 쳐요. 벽, 펜스, 야구장 펜스 있잖아요. 그 울타리가 있지요. 그렇게 펜스를 쳐버립니다. 

  

펜스를 쳐버리면 온 세상은 그 펜스 안에 갇힌 꼴이 돼버려요. 우주에 가서 목성 찾고 안드로메다 가봐야 소용없어요. 거기에도 펜스가 있어요. 악마가 쳐놓은 펜스가 있습니다. 천문학자는 지구와 지구바깥을 생각합니다. 은하계와 은하계 바깥, 태양계와 태양계바깥.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지배하는 그 바깥을 의미해요. 

  

그러니까 악마 없이는 일이 안돼요. 악마 없이는 구출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고 악마 없이는 구원 ……, 구원이란 맨 구출이에요. 출애굽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그 때부터 구원, 구출이라는 개념이 나왔거든요. 구원이라는 것은 이쪽에서 살다가 저쪽으로 빠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빠져나오는 그 행동을 구원이라 해요. 

  

소유개념이 아니고, 구원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 십원 빼기 1원입니까? 구원은 동전이 아니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는 그 모습을 이야기해요. 그 나가는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배치물이 필요해요. 우선 펜스가 필요하고, 펜스 안에 갇힌 사람이 필요하고, 펜스 바깥에 이미 거기에서 탈출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쪽에서 이쪽으로 구멍을 뚫어서 성령을 보내서 난데없이 성령으로서 복음 전하는 사람이 필요하고요. 

  

그 펜스저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펜스 안쪽으로, 울타리안쪽으로 들어오는 방식은 대구강의에서 주사기방식으로 독감주사 맞듯이 한다고 했습니다. 외부에서 압력으로 밀어 넣으면 분명히 들어오는 구멍은 있었는데 하루 지나면 들어왔던 구멍이 메워져서 없어요. 외부에서 주사를 놓는다는 말은 저쪽에서는 들어올 수가 있지만 이쪽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들어갈 구멍이 없어요. 

  

구멍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구멍이 없으니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되거든요. 만드는 방법이 뭐냐? 크리스마스에요. 이게 교회고 이게 절이고 이슬람교, 종교라는 거예요. 만드는 방법이. 저쪽에서 주사기로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은 거예요. 못 받으니 죽고 난 그 뒤의 일이 불안하다는 말이지요. 

  

지금 빠져나온 사람은 복음의 광채에요. 광채라는 말은 영광이라는 뜻이지만 이 영광이 내부적으로는 환희, 기쁨,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광채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공포에요. 두려움이고. 두려울 때는 도피를 해야 되거든요. 도피를 하려면 토굴이 필요해요. 그 토굴이 교회라는 겁니다. 자꾸 너구리처럼 파서 계속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요. 기도원도 그런 것이고요. 

  

그렇게 들어가는데 그게 질서체제에요. 점점 어려워져서 미안한 느낌이 듭니다. 이 테이블을 동질성이라고 했잖아요. 동질성에서 우리가 자라났습니다. 동질성에서 죽 살아온 거예요. 이걸 생중계한 영화가 1998년에 상영한 <트루먼 쇼>입니다 전 세계로 생중계하는데 트루먼이라는 그 애는 몰라요. 태어날 때부터 성장과정은 물론이고 대학 나와서 메릴이라는 아가씨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같이 사는 그 모습을 전 세계로 생중계하는 거예요. 

  

어릴 때 보트를 타던 아버지가 익사하고 그 충격으로 물을 겁내고, 그 모든 것을 온천지에 생중계하는 겁니다. 그런데 트루먼 본인은 그것이 자기의 현실인줄 알고 있어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세트장인데 그걸 현실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가 찾고자 하는 소망은 뭐냐?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몸에 습득된 그 현실을 자기만의 현실로 따로 빼돌려서 새로 꾸미고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자기 부인보고 “여보! 우리 피지에 가서 우리끼리 살자.” 우리끼리 살자는 것이 뭐냐? 나름대로의 동질성이에요. 결혼은 왜 합니까? 이미 내가 알고 있던 이 동질성을 계속해서 확장하고 그것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만드는 것이 결혼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동질성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두려움과 알 수 없는 공포를 피해서 나름대로의 자기굳히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일종의 자기토굴이지요. 

  

보다 안정적인 것. 보다 안정적이라면 돈을 벌어야 되지요. 돈이 있어야 안정적이니까. 보다 편한 것. 편하려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따로 살아야지요. 돈 많고 따로 살려면 강남에 가야지요. 강남아파트 말고 뭐가 있습니까? 거지들 덜 찾아오는 곳, 간섭 안 받는 곳. 혼자만의 궁전같은 곳을 지어서 그 속에서 독야청청 하는 것, 그게 사는 목적이고 그 외에는 목적이 없지요. 

  

왜 그렇게 하고 싶은가? 무섭고 두렵기 때문에, 공포심 때문에 그래요. 뭘 지키기 위해서? 지금 나는 나다운데 나를 지킬 수 있는 동질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나름대로 공격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걸 피하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는 방안을 계속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에 의하면 이것이 뭐냐? 세상신 악마가 쳐놓은 펜스 안에서 사람들이 노닥거리는 방법이에요. “목사님! 악마가 어디 있습니까?” 악마의 특징은 이런 거예요. 인간 쪽을 향하여 말을 건네는 것이 악마에요. 나하고 이야기하자는 것이 악마에요. 평소에 주부가 살림살이 하면서 세상 신을 생각합니까? 하나님 생각합니까? 안하지요. 

  

나와 한참 수다를 떨 수 있는 마음에 드는 이웃집 아줌마를 찾지요. 이게 인간이 인간에게 말을 건네는 거예요. 언제 마귀 연구하고 계명성 연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사는 것은 그게 아니에요. 커피숍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악마의 연구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커피숍을 많이 만들었습니까? 왜 그렇게 많은 거예요? 

  

전부 다 말 건넬 수 있는, 말동무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말을 건네게 되면 말을 건네고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구축되는 것이 뭐냐? 동질성이 구축돼요. ‘역시 나는 나야. 그래, 내가 생각하는 내가 맞아. 남들도 동의하잖아.’ 그러니까 나는 나 됨에 대해서 안심 푹 놓고 사는 거예요. 하루 24시간 종일 마귀 연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하나님 연구하는 사람도 물론 없습니다. 

  

그저 나를 편하게 해 줄, 나를 독려하고 칭찬하고 위로해줄, 나를 외롭지 않게 해줄 그런 사람을 찾아요. 그걸 네자로 관심꺼리. 관심꺼리를 새롭게 자꾸 만드는 겁니다. ‘아, 심심한데 앵무새 키울까?’ 앵무새를 키운다 칩시다. 앵무새를 키우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모든 집의 구조가 앵무새위주로 바뀌게 돼요. 앵무새가 스트레스 받으면 TV볼륨도 줄이고, 앵무새 잠 못 잔다고 조용히 걷고, 모든 것이 앵무새 위주로 돌아가지요. 

  

심지어 아기 있어 보세요. 모든 것이 아기 위주에요. 웃음도 아기로 인하여 웃고, 아기하고 화상통화 할 그 때를 기다려요. 모든 것의 중심이 아기 중심이니까. 말 건넴이 그렇게 자연스러워요. 자연스럽고, 안정성을 유지하고, 그 순간만큼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서 안 쫓겨도 되는 거잖아요. 애기 낳고 크면 말썽꾸러기 하나 더 낳고, 좀 크면 또 하나 더 낳고, 어떤 사람은 열두 명까지 낳은 사람이 있어요. 

  

문제는 앵무새가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분류기준이 안 된다는 거예요. 아기가 분류기준이 안돼요. 우리의 귀한 자식과 혈통이 분류기준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동질성이기 때문에 구출이라는 경계선이 필요치 않아요. 어디에서 살다가 어디로 빠져나온다는 경계선이 평소의 일상대화가운데 전혀 담겨있지를 않습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거예요. 마귀가 쳐놓은 펜스 안에서, 너도 그렇게 살고 나도 그렇게 사는데 뭐 별게 있을까, 너나 나나 같은 동질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질성입니다. 달라요. 너무 달라요.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백성을 끄집어낼 때, 그들이 홍해를 건너왔을 때 그들이 착각한 것이 있어요. 그들이 구원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천만의 말씀, 절대로 구원된 것이 아니에요. 그들은 구원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자만 40만이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을 시내산 밑에 모아놓았습니다. 흔히 보는 산이에요. 그냥 돌이 있고 나무가 있는, 해발 2285미터의 그냥 산이에요. 그 산으로 모세 한 명만 데리고 올라가 버립니다. 아론도 놓아두고 여호수아도 중간에 두고 모세만 시내산 꼭대기로 불러 세웁니다. 

  

모세가 빠지고 난 그 외의 사람들은 산 밑에 다 있어요. 그 사람들의 동질성이 뭐였는가 하는 것이 드러날 때까지는 모세가 산 밑으로 내려오지를 않습니다. 그게 40일이었어요. 40일이 지나고 난 뒤에 모세가 산 밑에 내려와 보니까 그들은 하나의 동질성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그게 금송아지였어요. 

  

출애굽기 32장 24절에서 모세와 아론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아론이 변명조의 이런 말을 해요. 정말 제대로 잘했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금을 빼라고 해서 그 금을 불에 던졌더니 나온 것이 금송아지가 나왔다는 거예요. 아론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모세보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억지가 맞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금을 던졌더니 어떻게 금송아지가 나옵니까? 말이 안돼요. 그런데 이 아론의 말이 정말 제대로 산 밑에 있는 인간의 동질성을 너무나 제대로 표현한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자신의 본심을 그대로 불에 던졌더니 거두어진 것이 금송아지였더라. 그런데 그 금송아지 만들 때 단지 금송아지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성경이 참 놀랍지요. 그 축제벌인 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금송아지축제가 아닙니다. 그 날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라고 누가 붙였습니까? 산 밑에 있는 사람들이 붙였어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금을 빼서 던졌더니 금송아지 되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동의했다는 그 말입니다. 금송아지 나온 것에 대해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라고 반대한 사람은 그들 가운데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이야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인간들끼리 놔두면 어느 누구도 구원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니 구원될 이유가 없어요. 그냥 그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고 난 뒤에 무덤에서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 이야기는 동질성밖에 없는 이 빈칸에 귤이, 예수님이 오실 때 나오는 현상이에요. 

  

예수님만 생각 안하고, 예수님만 빼버리면 살다가, 살다가, 그냥 죽으면 그만이에요. 죽고 난 뒤에 근심은 그 때 가서 하면 되는 거고요. 사는 게 뭐예요? 별거예요? 그게 사는 거 아닙니까? 관심 있는 사람만 교회 다니라 그 말입니다. 큰 교회에 총각들은 별로 없고 처녀들이 많은 이유가, 하나님을 빙자해서……, 출애굽기 32장 거쳤으니 말 제대로 합시다. 

  

금송아지의 힘, 예수라는 이름의 금송아지 힘을 빙자해서 시집한번 가보려고 교회찾다 보니 남자공급은 얼마 안 되는데 여자수요가 많아요. 총각은 얼마 없는데 처녀들이 많은 통에. 성가대 하면 좋은 점이 뭐냐 하면, 얼굴을 정면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거예요. 한 번씩 보고서 괜찮거든 날 찜하라는 그 말이지요. 성가대는 설교도 제대로 안 들어요. 괜찮은 사람 있나 찾기나 하고. 촌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는 그 동네의 결혼적령기에 있는 총각들 관심꺼리가 됩니다. 

  

사는 게 별거예요? 그게 사는 거예요. 그럴 때 그 교회는 관심사가 하나 되었어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자. 그런 공통적관심사, 동질성으로 교회가 아주 사랑스러운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게 사는 거니까. 그러니까 교회는 절대로 복음을 전하면 안돼요. 복음을 전하면 안 되고 익히 아는 것, 금송아지 이야기만 해야 돼요. 

  

금송아지가 뭐냐 하면, “여러분, 부자 되고 싶어요? 우리 금송아지 도움으로 부자 될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싶어요? 금송아지 도움으로 건강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화목하고 싶어요? 금송아지에게 열심히 철야기도하면, 열심히 성경 쓰고 읽고 하면 구원받습니다.” 그게 금송아지 교회에요. 그 금송아지를 사자성어로 하면 ‘삼위일체’ 

  

그것은 바로 토굴이에요. 무서움을 피해서, 알 수 없는 무서움. 내 동질성을 해칠까 싶어서, 그것을 쪼갤까 싶어서, 분해할까 겁을 내서 도망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펜스 안에는 뭐가 흐르는가? 그 안에는 역사가 흐릅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 역사를 새로 세우자.” 

  

그 말 자체가요. “아유 무서워라. 아이고, 무서워라. 나는 쓰레기가 아닌데 혹시 쓰레기 될까봐서 무서워라. 난 존재할 가치도 있는데 존재할 가치도 없다고 누가 지적할까봐서 무섭다.” 이런 이야기에요. “나는 그래도 가치 있는데.” 그래서 모이는 거예요. 그래서 150만 촛불집회 하는 거예요. 쫓겨서 모이고, 무서워서 모이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이 세상에서는 강한 힘이 진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요. 그게 정의라는 것을 알아요. 왜?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그렇게 배운 것이 동질성이에요. 그 동질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 역사를 새로 세울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역사를 새로 써서 도피하겠다는 그것도 반복적인 도피행각 입니다. 현상금 한 천 만원 붙여봐요? 우병우처럼 한 천 만원 붙일까요? 

  

청문회에서 부르면 나가면 되잖아요. 왜 도망갑니까? 20대에 사법고시 합격한 소년급제의 그 동질성을 잃지 않고 싶은 거예요. 남 욕할 것 없습니다. 청문회 하는데 간호장교가 군복입고 왜 나왔어요? 나 군인이라는 겁니다. 나는 옛날에도 군인이었고 지금도 군인이라는 거예요. 동질성이에요. 나라는 것을 잃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내 가치가 나의 노고로 그동안 이만큼 쌓였으니 손끝도 대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이 펜스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 역사를 가지고 예상한대로, 또는 예상한 바, 이걸 두자로 ‘과학’이라고 합니다. 방정식을 세워서 방정식대로 또 반복될 때 우리는 그 방정식을 진리라고, 지식이라고 하거든요. 과학이란 이처럼 예상한 거예요.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펜스 안에 있어요. 펜스 안에 있는 것은 못 빠져나옵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죽음에 쫓깁니다. 대책은 종교를 가지는 거예요. 여호와, 예수를 믿는 겁니다. 성령을 믿고 삼위일체를 믿고, 이왕 믿는 것 빈틈없이 확실한 지식을 확보해서 그것으로 죽고 난 뒤의 미래를 대비하겠다는 겁니다. 그 수 외에는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금송아지라 했지요? 그것은 다 예상한 겁니다. 그 예상한 것을 혼자 믿으면 이단 되거든요. 이단 안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가? 보다 큰 교회 가요. 보다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곳에 들어가서 자기안정감을 확고히 다지고 또 다지려고 하는 겁니다. 망하면 같이 망하자는 거예요. 그러한 모든 일을 악마는 말을 건넴으로 해요. 말로서. 

  

그런데 복음의 광채는 뭐냐? 예상 밖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초점이고 핵심입니다. 동방박사가 별 따라 왔지요. 움직이는 별을 따라왔습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올 때 이 별이 움직인다는 것은 펜스 밖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오고 그리고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난데없이 예수님이 변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광채, 하늘나라의 광채입니다. 특별히 오늘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누가복음 2장에 보게 되면 들판에 있던 목자가 예상 밖의 현상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당한다는 말이 옳아요. 오늘 본문 가운데서 “이 세상신이” 주격입니다. “혼미케 하여” 펜스를 해서 못 빠져나오지요. 그러면 어차피 모든 인간은 펜스 안에서 악마의 종입니다. 

  

물론 우리는 악마를 인정하지 않지요. 펜스 안에서는 악마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만고만한 인간 대 인간이 서로 말을 건네면 끝나는 거예요. 살만큼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고 더 힘들면 자살하면 그만이고. 그냥 동질성이에요. 그래서 모든 인간에 있어서는 별것이 없는 겁니다. 전부 다 예상되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복음 2장에 보게 되면, 목자가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 말을 하기 전에 10절에 보면, “천사가 이르되” 그 다음 말이 굉장히 가슴에 와 닿아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무서워말라고 해놓고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이걸 두자로 복음이라고 해요.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상 밖입니다. 그러면 예상 밖이라고 예상한 그것도 해당됩니까? 그것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내가 예상한 예상 밖이라는 것은 내가 이미 동질성으로 예상한 것 가운데서 그 바깥에 있다고 한 그것도 결국 내 동질성 돼버려요. 

  

예상 바깥을 예상했는데 와 버리면 이것은 큰 기쁨이 아니고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줄줄 내가 알았어. 내 죄 때문에 천국 못 가는데 누가 와서 내 죄를 씻어줄 줄 알았어.’ 이렇게 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큰 기쁨이 아니고 하나의 정보획득이에요. ‘남이 모르는 하나 알았으니까 일단 챙길 것 챙기고 나는 그대로 살면 돼.’ 이렇게 돼버립니다. 

  

목자가 어느 정도 되느냐하면, 양을 버릴 정도가 돼요. 큰 기쁨이 오고 난 뒤에는 내 직업이 목자라는 그 직업자체가 무의미한 것을 알아야 돼요. 동시에 뭘 아느냐 하면, 나는 쓰레기며 이 땅에 존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이 땅에 내가 살 이유가 없어요. ‘나 구원 받아야지.’ 했는데 예상 밖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겠다는 그것이 진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지어낸 어처구니없는 죄악 중에 죄악이구나, 하는 것을 사후적으로 소급해서 깨닫는 겁니다. 

  

‘내가 구원을 생각하다니 미쳤어, 미쳤어. 내 주제파악도 못하고 무슨 구원을 생각해.’ 이게 복음의 큰 기쁨이 들이닥칠 때 일어나는 일이에요. 세상 안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롭게 살지만 사실은 종입니다. 이걸 저는 세자로 이야기합니다. ‘셔틀콕’ 셔틀콕의 특징이 뭐냐? 배드민턴을 쳐보세요. 셔틀콕은 아무 죄도 없는데 이쪽에서 치면 얻어맞고 저쪽에서 치면 얻어맞고, 계속 얼굴을 얻어맞아요. 

  

이쪽에서도 종이고 저쪽에서도 종이에요. 어디에도 주인이 없어요. 이쪽에서는 펜스를 친 악마의 종, 그것을 로마서 6장에서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는 의의 종이라고 해요. 주님의 종이에요. 본인이 구원 받겠다 하는 이런 것은 본인이 주인행세 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다가 고생했으니까 천당 가서 보상받아야지.’ 이렇게 아직도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 자체도 사실은 공포심에 밀려서 교회라는 토굴을 찾아서 전에 있던 동질성 그대로 살아가는 방식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 복음은 찾아온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조작한 거예요. 마귀가 만든 종교단체에 속아 넘어간 거예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들어보니 좋기는 누가 좋습니까? 하늘나라에서 좋아요. 목자는 안 좋습니다. 목자는 안 좋고 어떤 상태인가? 내가 예상하지 않은 큰 두려움 속에 빠져있어요. 

  

그래서 천사가 “무서워 말라.” 무섭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에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아까 테이블에 놓이는 귤 이야기를 했지요. 귤을 보리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었다는 이 말은 뭐냐? 구원받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는데 ‘기뻐하심’이 주격이고 우리는 그 기뻐하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어디를 가도 기뻐하심이 떠나지를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펜스를 친 이유가 있어요. 지옥에 안갈 사람과 천국에 안 갈 사람, 이 모든 일을 마귀한테 다 시킨 거예요. 참 마귀가 굉장히 고마워요. 진짜 마귀가 고마워요. 왜냐하면 지옥을 가고 싶어도 못가도록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요. 그리고 마귀는 천국갈 사람을 천국 가도록 해줘요. 마귀가요. 

  

제가 하는 이야기 딱 들으면 또 성경좀 안다 하는 사람은 ‘그게 아닌데?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는데?’ 그 대목 막 생각날 거예요. 제가 설명을 드릴게요. 욥기에 보게 되면, 인간은 빼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마귀하고 내기를 했어요. 내기고스톱을 친 거예요. 내기를 했을 때 아래 있는 욥은 아무것도 몰라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이 알고 있던 그 욥이 욥기 마지막에 보면 욥이 몰랐던 욥이 되어버려요. 욥이라는 제 3의 대상체가 등장한 겁니다. 그럴 때 누가 거기에 가담했느냐? 마귀가 개입하지 아니하면 욥은 본인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은 욥 안의 욥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도와줘야 돼요. 

  

마귀가 도와줘서 욥은 재산 다 날라 갔지요. 자식 열 명 다 당했지요. 요즘으로 치면 자식 하나 있는 거 지명수배 당해서 소환당하는 식이라는 말이지요. 말이나 타고 돌아다니다가. 그러니 마귀가 아니면 이 동질성을 천당 보내려고 지금도 교회 와서 철야할 거예요. 헌금하고. 마기가 시켜서 헌금하고, 마귀가 시켜서 선교사로 가고, 마귀가 시켜서 예배참석하고, 마귀가 시켜서 성경공부하고. 

  

마귀가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너 무섭지? 저주받을까 무섭지? 교회 가 봐라. 거기가야 한주간 복 받아서 그냥 넘어가는 거야. 다음 주에 또 참석해야 돼. 안 그러면 너 또 다리 부러지고 자식도 엉망 되는 거야.’ 마귀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평소의 우리 동질성에 의해서 ‘아, 내 것 깨지면 안 돼.’ 남이야 죽든 말든 관계없어요. 내 인생 이만큼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런데 이게 깨지면 되겠어요? 그러니까 새벽기도도 하고, 수능 앞두고는 행동도 더 조심하고요, 시험은 애가 치는데 엄마가 갑자기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안 그럴 수가 없어요. 주여, 하고 부르짖고. “내 죄가 있어도 눈감아주시고 애한테 어떤 죄도 돌아가지 않도록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모자의 세월도 아니고, 엄마의 기도를 가지고 그 애가 기도 안한 것에 대해서 엄마의 마일리지로 보충해서 채우고, 이런 식으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의 균형을 맞춰서 약간이나마 인센티브를 갖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지 몰라요. 

  

미국에 있는 딸에게 어떤 효과가 있을지 싶어서 한국에서 기도하고요. 우리 사는 게 그냥 이렇게 펜스 안에서 사는 거예요. 내 것이 중요하지 하나님 복음 안중요해요. 시간은 가고 할 말은 많은데 간단하게 합시다. 여러분, 제발 좀 교만하세요. 교만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겸손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교만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억누르지 말고 교만을 좀 더 활성화시키는 교회가 됩니다. 내년 교회 소망은 “제발 좀 교만 합시다.” 

  

고린도전서 7장에 30, 31절에 보면,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마귀가 와서 울게 합니다. 참 하나님 얄미워요. 마귀를 보내서 우리를 울게 만들고 ‘내 인생 조져 놨다.’ 이렇게 울게 만들고 주님이 와서 “울지 마.”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마귀가 좋다고 해주니까 주의 성령을 보내서 “그것도 기쁜 거야?” 이렇게 따지고.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이것보다 오늘날 교회에 적절한 표어가 또 있을까요? 세상 뭐 있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펜스 안의 세상이에요. 동질성끼리 잘났다고 우기는 세상. 그래서 너도 못지않고 똑 같아요. 

  

마귀가 와서 들쑤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출, 구원이라는 개념을 생각을 안합니다. 그냥 동질성으로 더 큰 동질성, 그것을 성공이라고 하고 행복이라고 하거든요.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쓰레기가 무슨 행복입니까? 존재할 가치도 없는 것이. 존재할 가치도 없는게 무슨 명예를 생각하고 존엄성을 언급해요? 자존감? 요새는 또 자존감이래요. 꼴랑 자존감?

  

다 우리가 예상한 겁니다. 복음은 우리의 예상 밖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무시하는 이유가 예상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예상에 마귀는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도 하나님은 예상 밖이에요. 그러나 예상 밖이 예상대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찾아오거든 이것은 매일같이 주사기를 가지고 주사를 또 주는 겁니다. 네 안에 복음이 있다는 거예요. 

  

네 안에 네가 아는 동질성, 너 말고, 역사적으로 정리해놓은 지금의 너 말고, 네 안에 너 있다. 욥 안에 욥이 있는 거예요. 욥이 그걸 몰랐어요. 주님이 마귀와 내기 안했으면 욥은 그냥 잘난 줄 알았어요. 욥 안에 욥이 있는 겁니다. 어떤 욥? 마귀마저 이긴, 아까 장로님이 기도한 것처럼 마귀의 정죄함을 받지 않는 깨끗한, 하나님의 분류에 합격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집어넣은 그 사람, 복음에 의해서 새로 생긴 그 사람이 안에 들어 있어요. 

  

우리는 주님과 건방지게 거래하거나, 겸손할 테니까 복을 달라든지, 주님형상 본받을 테니까 내 뜻대로 되게 해달라는 흥정을 하지 마세요. 그것은 주님하고 장난치는 겁니다. 서머싯 몸이라는 20세기중반까지 살았던 영국의 작가가 있어요. 그 사람의 후기소설에 이런 것이 있어요. 어떤 부자가 가난한 아가씨를 첩으로 돈 주고 데려 왔어요. 

  

나중에 그 젊은 여자가 다른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웠어요. 그래서 그 부자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그 바람난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를 결혼시켜주되 조건이 있어요. 가끔 자신과 바람을 피우는 조건으로. 아이디어 멋지지 않습니까? 그 작가 이야기는 어느쪽이 선하냐는 거예요. 왜 그 소설을 그렇게 표현했느냐 하면, 사람은 아무리 요령을 부려도 절대로 형태 바꾸기, 모양새 바꾸기지 절대로 선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일단 자기가 선하다고 우기기 때문에. 우리가 평생 살면서 이렇게 모양새를 바꾸는 거예요. 교회 안 나오다가 교회 나오는 것. 교회 안 나올 때는 생각합니다. ‘죄 짓다가 죽을 때 예수 믿으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다가 억지로 교회 나오면 ‘예수 믿고 난 뒤에 막 살면 되지.’ 막 산다는 이야기를 대구지묘동의 누가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어떤 목사가 이야기했지만, 여러분, 둘 중 어느 것이 필요합니까? 

  

지금 그 문제 아니지요? 주님께서 손가락으로 우리 속의 괴물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우리는 교만을 키우세요. 내년 교회 표어는 “교만을 키우자.” 교만을 키우면 주님이 와서 주사기로 이 암 조직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우리는 기뻐하자는 그 말입니다. 그걸 보고 기뻐해야 돼요. 우리는 마음껏 교만하고. 

  

“헌금했으니까 이제 나쁜 짓해도 괜찮지요? 열심히 성경공부 했으니 눈감아 주시겠지요?” 이런 짓 하지 말고 그냥 매일같이 우리의 고름덩어리를 매일같이 끄집어내 주시는 것, 주사기로 끄집어내주시기에 우리는, 돈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아내 있다고 자랑질 하지 말고, 우는 자는 뭐 때문에 우는데, 웃어도 그게 얼마나 가겠어요? 



그저 껍데기로 살다가 고름덩어리가 가득 찬 껍데기인간을 주께서는 이미 분류작업이 끝났습니다. 오직 성령세례 받은 사람에게만 끄집어냄의 그 상쾌함과 시원함, 기쁜 소식, 하늘에서는 이미 기쁨이 함께 있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가 친 펜스를 우리는 주님도 무시하고 마귀도 무시해서 인간끼리 역사를 이루는 줄 알았습니다. 정의를 이루는 줄 알고 고만고만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 줄 알았습니다. 분류작업이 이미 개시된 것을 우리가 몰랐습니다. 그 기준에 주목케 해 주시고 오직 복음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을, 우리 안에 창조된 인간을 늘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