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선(사무엘상 4:18 -22) 대전-(사무엘상 19강)
이근호
2016년 10월 25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4: 18-22
(삼상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삼상4:19)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삼상4:20)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삼상4: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삼상4: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사무엘상 4장18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기고 난 뒤에 그 당시의 엘리 제사장 가문이 파탄 나는 대목입니다. 며느리가 하필 그 때 임신을 하고 있었는데 애기를 낳았어요. 애기를 낳았는데 애기 이름이 상당히 저주스럽습니다. ‘영광이 없다’ 영광이 없다는 말은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다는 말은 인간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두 노선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천국의 노선이 있고 또 하나는 지옥의 노선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노선 외는 없어요. 다른 제3의 경로는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인데 인간을 미래가 없는 곳으로, 영광이 없는 곳으로, 천국 노선과 지옥 노선에서 지옥 노선으로 가고 있는 집안이 바로 엘리 제사장 집안이다.
그런데 이 엘리 가문이 지옥 노선으로 확정되고 그것이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냐 하면 언약궤와 헤어졌기 때문에 언약궤와 이별 할 경우에 지옥 노선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엘리 가문의 자리가 언약궤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엘리 가문의 자리에 언약궤를 놓으면 언약궤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천국 노선도 나오고 지옥 노선도 나오는 겁니다.
언약+궤(상자) 이지요. 언약을 보여주는 상자가 되는 겁니다. 상자니까 이것은 물질, 물체가 되겠지요. 또는 사물이 되겠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물을 통해서 보여주는 언약이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보여 준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미래를 현재로 모아보면 언약 안에 천국과 지옥의 무늬가 그려져 있다 보시면 됩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을 알기 쉽게 이야기 하면 상자 안에 천국과 지옥이 들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상자는 일종의 환등기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환등기 같은 역할을 하는데 환등기+ 필름 이 필요 하겠지요. 필름을 집어넣어야 화면이 나오니까 필름 역할을 엘리 제사장이 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 또는 인간의 가문이 (역할)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과 접속(Contact , Connection)을 하므로서 언약의 내용의 본질이 미래까지 미래의 모습이 현재의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언약의 본질이 바깥으로 비쳐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인간의 역할은 뭡니까? 주도적인 역할이 되지 못하고 언약을 보여주는 도구나 수단이 되고 장치가 되겠지요.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는 말은 인간은 주체적으로 주도적인 역할로 선택이나 결정을 못한다는 뜻이거든요. 이것은 개인 구원이란 없다. 개인이 선택해서 천당가고 지옥 가지 못한다. 골라~골라~ 골라~잡아! 그런 입장에 있질 않습니다.
인간은 그 시대에 주어진 언약과 어떤 식으로 접속(Contact)하게 되어 있다. 접속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언약을 만약에 모른다고 한다면 그 개인은 어떻게 살아 가냐 하면 내 선택에 의해서 내가 결정 하겠다고 나오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제시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 땅에선 고생 많이 했는데 죽어서는 호강해야지요. 여러분의 믿음이라는 선택에 의해서 여러분의 장래는 풀립니다.” 이게 바로 구원파에요. 이 구원파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기존의 교회에서 다 나온 거에요.
구원파, 신천지. 모든 것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욕망과 결부된 상품을 교회가 제시하고 돈을 받아 챙기면서 교회 조직의 영업이 되는 거에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주고 일종의 보험 회사 같은 보험 회사에서 수수료(Commission) 받듯이 챙기는 거에요.
교회가 천국의 하청 업체 역할을 하는 거에요. 그렇게 하청 업체 역할 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으로 거부 할 수 없는 게 천국은 보이지 않지요. 보이지 않으니까 가시적으로 보이는 단체를 찾게 되는 겁니다. 성도와 교회를 찾게 되지요.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 때 빵 하나 얻어먹기 위해서 교회 다닌 적이 있어서 자기 인생을 살면서 안 풀렸다 교회 다니는 것을 너무 쉬어서 벌 받고 있구나!
이제는 중 장년 되었으니까 교회 다녀서 갱년기도 오는데 슬슬 죽을 준비 해야지! 그래서 교회가서 시키는 데로 하겠습니다. 유혹 하는 거죠. 당신이 선택 잘하면 천국가고 또는 지옥 갑니다. 사무엘상에 의하면 그런 건 없습니다. 인간은 구원에 대해서 어떤 주도권을 가질 자격도 없고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제 6일 째 만들어 졌기 때문에 마지막에 만들어 졌어요. 심지어 악마와 천사보다 뒤늦게 만들어 졌기 때문에 타락 천사인 뱀인 악마에 의해서, 모르고 무식하니까 유혹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천국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렇다면 지옥과 인간의 중보자는 누구지요? 사단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왔을 때 사단이 이미 세상 권세를 다 쥐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보면 세상 권세를 쥐고 있으니까 사단이 뭐로 위장 하냐하면 천사로 위장해서 메시야와 잘 아는 사이다고 하지요.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뛰어 드니까 악마와 귀신의 대장이 되죠. 귀신의 우두머리 취급을 받는 거에요. 바알세불이라 하지요. 개구리 모습 같은 악마의 모습이, 바알세불이 그런 뜻이에요.
흉측한 양서류에 해당되는, 이스라엘에서는 육지면 육지, 하늘이면 하늘, 물이면 물, 자기 정체성을 자기가 사는 영토에 맞는 그런 음식만 먹게 되어 있어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날개가 있으면서도 땅에 기어 다니는 이런 것은 먹지 말라고 되어 있거든요. 레위기 20장25절, 11장에 보면 먹을 음식과 먹지 못할 짐승을 구별할 때 어떤 동물을 먹을 때는 동물이 소속 되어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일치되는 음식만 먹어야 된다.
(레 20:25) 너희는 짐승이 정하고 부정함과 새가 정하고 부정함을 구별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부정한 것으로 구별한 짐승이나 새나 땅에 기는 것들로 너희의 몸을 더럽히지 말라
(레 11: 46)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길짐승에 대한 규례니
(레 11:47)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때 나의 위치는 율법이 지정한 위치가 곧 나의 위치이고 나의 소속입니다라는 뜻에서, 먹는 것까지도 관여 하시는 주님의 율법에 대응하고 반응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언약의 율법이니까 (모세 언약) 거룩한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다 아시겠지만 거룩이라는 말은 홀로서는 거룩이 안돼요. 홀로는 안 되고 짝을 이뤄야 되요. 동양에도 그런 것이 있지요. 음양이 서로 짝을 이룬다. 장갑은 하날 사면 소용없어요. 양말도 하나 사면 소용없고 신발도 짝이 있어야 되듯이 거룩이라는 것은 짝을 이루면서 거룩이 나와요. 단독 거룩은 없습니다.
네가 거룩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속되냐를 물어요. 오염되었느냐? 더러워 졌느냐? 하나님의 거룩은 어디서 피어나냐 하면 단독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더러운 가운데서 분리 되었을 때 거룩이라 해요. 그러니까 성도 주위에는 항상 뭐가 비 성도로 휘감겨 있는 양상이 성도의 삶입니다. 혼자 지리산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러지 마세요. 그냥 시장 바닥에 같이 사는 것이 거룩이에요.
성도가 비 성도에 둘러쌓임으로서 성도와 비 성도의 차이점을 보게 하는 겁니다. 비 성도는 자기 힘으로 혼자 경정해서 살기 때문에 비 언약이고 언약궤와 상관없이 염두에 두지 않고 단독적으로 독자적으로 느끼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언약에서 나온 성도는 나의 나됨은 나보다 먼저 된 언약이 (선재),
나 보다 먼저 계신 분에 의해서 그 분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다니엘 7장에 보면 나오지요. 선재하신 하나님께서 인자를 만나지요. 인자는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인생은, 다니엘은 물론 천국 노선이죠. 천국 노선에서 다니엘의 인생이란 것은 없어요. 전부 다 누가 유발 시켰는가? 장차 오실 인자되시는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분위기를 미리 앞서 만들어 가는 거에요.
보통 사람은 사람하고 상대하잖아요. 다니엘은 누구하고 상대하냐 하면 짐승하고 상대해요. 그런데 그 짐승은 땅에선 찾을 수 없는 짐승이에요. 분명히 땅으로 기어올라 왔는데 출생지가 땅이 아니에요. 바다에서 기어 올라온 짐승이에요. 그런데 바다의 짐승은 그냥 바다에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스물~스물 땅으로 올라온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냐하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훼손되고 이제는 땅에 있는 것이 바다에서 온 것으로 정복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땅에 누가 있을까요? 바로 언약이 있었거든요.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언약과 관련된 배치물들이 거기 있는 겁니다. 그것을 그동안 인간들이, 이스라엘이 관리했지요. 성전과 배치물들을 관리 했는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 가면서 바벨론의 정체가 그들이 같이 땅에서 머물렀던 족속이 아니고
땅이 아닌 땅보다 먼저 있게 한 배후(다른 존재)에 의해서 언약을 무산시키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무산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바다의 짐승을 땅으로 올라오게 해서 이스라엘을 점령하도록 그렇게 조치했다라는 것. 그 사실 만 다니엘이 알려 줄 뿐입니다. 그렇게 한 뒤에 다니엘이 보여 준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이 마지막 때라는 것. 마지 막 때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아까 한 노선을 다시 한번 봅시다.
*두 개의 노선
천국 가는 노선은 마지 막 때의 노선이에요. 그러나 지옥으로 가는 노선의 사람은 과거 현재의 노선이기 때문에 마지막 때는 가봐야 알지요. 누가 죽어서 지옥 가본 사람이 있나요? 지옥 갔다가 살아 온 사람이 없잖아요. 가 봐야 안다는 거에요. 심지어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에요.
하늘나라를 어떻게 하면 갈 수 있겠냐고 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니까 니고데모가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오는 방법으로 자기 미래에 반복시키겠다는 겁니다. 천국은 나중 문제인데 예수님께서 다기 태어나야 한다 하니까 나중에 천국가기 위해서 과거의 했던 것을 되풀이 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주는 선물이 있어요. 마지막 때에 메시야가 마지막으로 종결지었다는 이미 모든 것을 끝냈다는 증표가 있어요. 그것이 성령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성령은 마지막 때의 영이에요. 성령이 오면 무조건 마지막 때라고 봐라! 미래가 현재로 와버렸을 경우에 어떤 반복이 있냐 하면
마지막 때라는 사실 만 계속 반복시키기 때문에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에 반복이 되지요. 아까 강의 시작하기 전에 사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들을 했지요. 사는 게 힘든 다는 것도 마지막 때의 징표일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살기 참 힘들다고 주께 함께 있겠는 마음 드는 것은 축하드릴 일인데 문제는 갑자기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 “아이고! 더 살아야지!” 이런 생각이 들 때는 축하하기 곤란합니다.
반복이니까, 반복이라는 말은 늘 상 그렇다는 뜻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늘 세상 적이잖아요. 그럴 때 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반복해서 “마지막 때야! 다 이루었어! 네가 고민 할 게 아무것도 없어! 그동안은 네가 주인공이 되어서 네가 네 인생을 질질질 끌고 갔지만 지금은 마지막 때이니까 마지막에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는 내가 허락 할 때 까지는 죽기 싫게 계속 살아야 돼!”
계속 살면서 주님의 천국 노선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여기서 잘 이해 하셨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간의 자리가 있지만 사실은 배후에 붜가 있다고 했습니까? 언약이 있지요. 구약 때는 상자가 왔으니까 언약궤라고 하면 되고 언약궤와의 관계에 있어서 엘리 제사장은 언약궤를 빼앗겨 버렸어요.
빼앗겨 버렸을 때 엘리 제사장의 모습은 천국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옥을 보여주는 것이 되요. 지옥이라는 것은 4장21절에 보면 태어난 아기 이름을 이가봇이라 했지요. 이가봇이란 뜻은 ‘영광이 없다’ 이고 영광이라는 것은 미래의 광채, 하늘나라의 광채, 휘양찰난한 사도 바울이 봤던 삼층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지요? 그래서 저는 이걸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영광이 없다의 가장 쉬운 표현은 악취가 난다. 아주 독한 냄새, 똥 냄새가 날 때 는 가까이 가기 싫찮아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달 동안 목욕 안하고 머리 안 감고하면 가까이 하기 싫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아요. 이 세상 자체에서 지옥의 악취가 나고 냄새가 나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상령 받은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목사 설교하는데 도저히 못 들어요. 악취가 나고 더러워서,
아이고! 거기 있는 사람들은 인애성도 좋지, 그걸 어떻게 참고 있는지. 참으면서 이렇게 하면 복 온다고 그것만 기다리고 있어요. 악취가 나면 같이 사귈 수가 없지요. 그러면 친구나 동창도 다 떨어져요. 대화 상대가 안 됩니다. 가까이 하고 싶어도 세상에 찌들은 냄새가 나서,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고린도 후서 이야기에요. 고린도 후서에 내가 전하는 말은 구원 얻은 사람에게는 향기이고 지옥 갈 사람에게는 악취라고 되어 있어요.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그런데 일단은 복음을 전해 봐야 되지요. 복음은 언약의 완성입니다. 언약을 전하는 거지요. 그러면 그 당시에는 언약궤가 이동을 했는데 지금은 성도 자신이 언약궤의 역할을 하면서 성도의 육체가 뭐지요? 사물이지요? 물체잖아요? 늙어 가든 말든 복음이 쏟아져 나온다면 그 육체는 사람들에게 가시적으로 눈에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언약궤의 역할을 하게 된 거지요. 물론 그 당시에 언약궤도 있지만 사람도 있지요.
아까 이야기 한 죽었던 사람이 18절에 나오지요. 앞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죽게 된 이유가 자기 하나님의 말씀 보다 자기 아들들을 중히 여겨서 가문까지 죽게 되어 있어요. 사무엘상 2장 29절 이하부터 그에 대한 저주가 나오거든요. 저주가 아주 무서운 저주에요. 32-33절에 그리고 난 뒤에 35절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새로운 사람을 네 뒤를 이어서 세울 것이다.
(삼상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삼상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삼상 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삼상 2: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삼상 2: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삼상 2:33)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삼상 2: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삼상 2: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네 뒤에 나올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윗이에요. 왜냐하면 사무엘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에요. 변변치 안습니다. (8장에) 하나님 말씀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엘리 제사장이 왜 죽었느냐 하나님을 멸시해서 죽었다. 왜 멸시 했는가 상대적으로 자기 아들을 더 존중히, 귀하게 여겨서 그렇다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사실 이거는요 핑계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말을 안 들었거든요. 그리고 자식보다 더 하나님을 소중히 여길 사람이 있겠어요? 없지요. 지금 천국이라는게 가족 관계가 다 찢어지는 곳이 천국입니다. 천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을 더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못 가요. 천국에 갈 때는 모든 자식이나 가족 관계가 끊어져야 되요. 심지어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누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이 말씀 하실 때에 예수님의 가족인 동생들과 어머니가 왔더니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죠. 가족보다 새로운 구성을 원하시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어떤 사람들은 그럼 가족을 버리고 교회에서 주치고 살면 천국 가느냐고 하지요. 가족을 언급하시면서 그 칼이 어디까지 쑤시고 들어가냐 하면 너 자신을 미워하고 부인하라까지 도달하는 거에요.
이 말은 우리 자신의 개념과 평소의 태도가 나 자신을 감추는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어디에 감추느냐 하면 1차적으로 가족에게 자아를 숨겨 놓고 가족을 위한답시고 살아가요. 그리고 나와 가족 사이에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그러니까 결국 자식이 누구의 이상형이에요? 나의 확대지요. 나의 이미지가 확대 된 것이 자식이고 가족인 거에요.
그래서 주님은 비계 덩어리를 해체하시는 거에요. 쪼개면 그 안에 누가 들어 있어요? 내가 들어 있는 거에요. 애라서 예쁜 게 아니고 내 애라서 예쁜 거에요. 남자라고 좋은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남지이기 때문에 남편이 좋은 겁니다. 아내라고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조건하에 아내를 사랑하는 거에요.
그래서 전에 설교를 했지요.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말은 제가 뭐라 했던가요? 헤어지라는 거죠. 이혼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서! 벌써 마음으론 이혼해 놓고 붙어 있는 척하고 주의 말씀 지킨다고 붙어살려고 해요. 그래서 이혼의 핑계가 좋지요? 상대가 복음 가지고 시비 걸거든 후닥닥 헤어져 버리세요.(웃음) 고린도 전서 7장에 복음에 대해서 시비 걸거든 헤어져 버려요.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니까 유대인이나 제자들이 그러면 이렇게 일반적인 가족 사랑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하니까 결혼 안하는 게 아무나 그런 혜택이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혼 한 사람을 보고 굉장히 불쌍히 여겼어요. “아이고!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저렇게 한 평생을 고생하면서 살려고 할 수 없지 뭐! 자기 업보인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상당히 측은 하다는 듯이 아이고! 인생을 저렇게 힘들게 사나! 결혼을 고생이나 고난으로 보는 거에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게 되면 전에는 나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냐 저주이냐의 판가름이 이제는 나로 인해 가정이 축복이냐 저주이냐를 나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과를 주는 데 이 결과는 결국 피해지요. 갖고 있는 죄가 가족에게 파급이 되요.
만약에 결혼을 안 했으면 혼자 감당했을 손실을 나 때문에 억울하게 가족이 떠안게 되는 계기로 우리는 존재하기 때문에 필히 결혼을 해야 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결혼 안했으면좋겠는데 내가 얼마나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내 존재 자체가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알려면 결혼 해야지요. 이미 한 사람은 할 필요 없고 이미 다 드러난거라
그래서 이런 노래도 있어요. 들국화의 전인권 씨가 불렀던 노래인데 ‘사노라면’이란 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에 보면 사노라면 언젠가는 빛 볼 날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결혼식에 축가로 부르게 되면 멋지죠. 지지리 못난 인간끼리 만나서 맞지도 안는데 억지로 맞추느냐 힘들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사노라면 있을 것이다. 가사에 흐린 날도 갠 아침이 온다는 거에요. 얼마나 서글픈 노래에요.
아예 부정적인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거에요. 결혼식 축가론 최고 인 듯싶어요. “아이고! 고생하는 거 그렇다고 너무 절망 하지마!” 사노라면~ 언젠가는 빛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 가문은 엘리 한 사람 때문에 온 가정이 파탄나고 특별히 이가봇 이라는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야 되요.
왜냐하면 본인이 개인적으로 행복하냐? 저주스러우냐? 아무상관 없이 저주마저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증거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기여히 임신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약이라는 것은 모든 언약이 투입된 현장을 축복이 아닌 저주 마당으로 규정해서 언약을 위해서 새로운 언약의 깊은 내용이 추가적인 역사가 계속 뒤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저주가 뭐로 바뀌냐 하면 축복으로 바뀌는데,
여기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희생자가 필요하고 희생자가 바로 사무엘 노선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보면 축복의 노선은 결국 희생자의 노선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홀로 살면 안 되고 지옥 갈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의 죄 때문에 희생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감래 해야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벨이지요.
아벨 노선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줄줄이 사탕 꿰듯이 나오는 신앙인들이 있지요. 전부다 희생자들입니다. 모세 같은 경우엔 바로 공주의 아들임을 거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여기서 고난이란 성도가 받는 고난은 어떤 경우이냐 하면 생계의 어려움이 아니고 그건 고생이고 복음 때문에 세상과 격리 조치를 당하고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고난이에요.
이것은 언약이 완성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 하십니까? 세상과 격리 조치를 유발하는 상태로 성령이 찾아오게 되지요. 성령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게 아니고 복음적인 기능을 하는 거에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구원이 된 것이고 성령이 왔다는 것이 ‘다 이루었다’가 함께 하기 때문에 성령이 왔다는 것보다 ‘다 이루었음’이 온 거에요.
‘다 이루었음’이 오면 내 소유가 아니고 내 육체의 주인이 나인 것은 내 손에서 떠났고 이제는 죽을 때 까지 계속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 격리를 아까 ‘거룩’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거룩한 성도되게 하시는, 거룩은 무엇과 병행한다? 비 거룩과 하고 비 거룩과 거룩의 차이는 어떻게 구분한다고요? 거룩은 다 이루었음, 비 거룩은 열심히 해보자 쪽으로 나가지요. 이것이 행함이죠. 열심히 해보자.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을 때까지, 빛의 자녀가 될 때 까지 한번 열심히 해보자는 거에요. 본인은 빛의 자녀가 그 수준이 어디까지 인지 몰라요. 그냥 갈 때 까지 가보겠다는 거에요. 강남 스타일도 이에요. (웃음) 아까 이야기 했지만 인간들이 자기의 노선에서 지금까지 이 만큼 해 왔으니까 현재는 이 정도 수준까지 되니까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것이고 바로 이것을 ‘예기’라고 해요. 미리 기대 하는 것.
미리 기대하기 때문에 ‘예기’는 어디서 누가 결정 하는 거에요? 현재에서 결정하는 거에요. 현재의 내가 결정하는 거지요. 현재에서 내가 결정 했으니까 천국이라는 것은 항상 나의 이상형이 될 뿐이에요. 그러니 이 천국은 누구의 나라에요? 본인의 나라이지 주님의 나라가 아니에요. 그래서 천국이라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미 앞당겨 와 버렸어요. 로마서 14장 1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셨는지 한 가지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선교지가 아마존이에요. 온도가 40˚~50˚가 넘으니까 사람들이 힘들데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육체가 버틸 수가 없어요. 모기와 습기가 많고 그런데 온도가 높아도 습기가 없는 쪽이 있어요. 아라비아 그런 곳은 살만 해요. 그늘은 시원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마존은 강 유역에 있기 때문에 습기 많고 온도가 높으니까 오는 사람들이 일주일도 안돼서 다 가버리는 거에요. 온도가 높고 너무 힘드니까 그런데 그 아마존에서 선교를 한다고 합시다. 선교를 하면서 뭘 생각하겠어요? 이 선교가 잘돼야 될 것이 걱정이 되겠지요? 그것이 뭐냐하면 바로 예기(미리 기대하는 것)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나라는 뭐에요? 아마존이든 알라스카든 상관없지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까 이것은 이미 다 이루었다는 거에요. 지금 이게 아마존이든 낙동강이든 관계없어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어요. 주께서 나를 여기 있게 하신 거에요. 어떤 모습으로? 다 이루었다는 모습으로 그래서 장래에 대해 내가 걱정 할 게 없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죽은 자가 미래를 걱정한다는 것은 아직 덜 죽었다는 뜻인데 덜 죽었다고 이야기 하면 안되잖아요. 물론 육신이 있는 한 미래를 걱정하기 마련입니다만은 전에 이야기 했지만 성령이 그때 그때마다 이쪽 노선을 확인시켜 주면 짧은 시간동안 만큼은 “아! 인생의 실패라는 게 아예 처음부터 없었구나!” 뭘 보여주는 것이지 독자적으로 실패했다 성공했다를 내가 측정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에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공했나? 실패했나?를 따지는 것은 자기를 바라보는 제 3의 자리를, 특별한 자리를 자기가 따로 만들어 놓고 자기가 자기를 관찰하는 모습이 있어요. 관찰하는 자리가 왜 있어야 되는지? 이건 없는 거에요. 망상의 자리에요. 내가 그 안에 들어가야지요. 그 안에 들어가면 성공이냐 실패냐는 나와 관련되어 있는 언약이 성공했으면 나도 성공한 것이고 십자가가 실패했으면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가 그대로 있다면 나는 뭘 해도 실패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 고린도 전서 15장에 나와 있어요.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여러분 자신이 평가를 내리거나 관찰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망상의 자리이고 마귀가 자꾸 힘들게 하는 자리에요.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사무엘상 5장으로 넘어 갑시다. 이렇게 해서 엘리 제사장은 사나 죽으나 언약을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살았던 겁니다. 그러면 엘리 제사장은 지옥 갔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옥의 면을 보여줬지만 지옥갔다 안갔다는 판정은 우리가 내릴 수 없습니다. 허장강이 나쁜 역할을 한다고 해서 지옥갔다고 하면 안되는 것처럼 자기의 역할을 한 거에요. 달중이가 못된 짓 했다고 드라마 ‘여로’에서 달중이가 지옥 갔다고 하는데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참고> 1972년도 연속극 ‘여로’에 나왔던 악역 이름 (달중: 불량배)으로 그 당시 최고의 욕이 달중이 같은 놈일 정도 였다고 한다.
사무엘상 5장을 봅시다. 아까 언급했는데 이스라엘의 언약의 실패가 있어줘야 언약의 성공으로 가는 곳에 미지의 것이 개입이 되고 투입이 되는 때 이것을 희생이라고 했지요. 희생이 없이는 인간은 절대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신분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기 아닌 다른 분의 희생 덕분에 저주에서 축복으로 되지요.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의 자리에서 구원의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희생의 터가 깔려 있어요. 어린 양의 희생, 이게 뭡니까? 유원절의 양이지요. 이것은 아까 말했지만 반복한다고 했지요? 유월절의 반복을 두자로 하면 ‘제사’라고 합니다. 제사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어요. 번제와 속죄제와 화목제인데 다시 번제를 둘로 나누면 소제와 번제가 있고 속죄제를 둘로 나누면 속건제와 속죄제가 있고 화목제는 마감되는 제사입니다.
화목제의 특징은 제사가 마감 되었으니까 거기에서 나오는 음식은 온 백성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어요. 그것을 다수성이라고 해요. 하나, 숫자 1에서 나왔는데 누리는 것은 다수가 누리는 거에요. 하나에서 배급받는 식으로 하나님의 양식을 백성들이 같이 나누어 먹으면 오병이어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양식을 나누어 먹게 되면 하나에 종속되는 관계지요.
그러면 다수성에 A라는 사람도 있고 B라는 사람도 있고 C,D..있다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사귈 때 둘이 다이렉트(Direct)로 사귀면 안돼요. 반드시 하나를 경유해서 사귀어야 되요. 이것을 주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라 즉, 하나에서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어디서 탈락인가 하면 내가 사랑한다에서 ‘나’라는 독보적인 하나가 날라가 버리지요.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주께서 너보고 이 떡 주래!
이 빵을 주께서 오신 분들께 주라고 하니까 나는 그냥 심부름꾼이니까 저보고 고맙다고 하지 마세요.“ 빵 정도가 아니고 성경에선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용서’. ”주께서 너를 용서하라 하래!“ 하고 휙 돌아서는 거에요. 아이고 용서 해 준다 하니 고맙습니다. 놔라! 주께서 당신을 용서하라 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용서 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당신에게 사기 당하므로 깨닫게 하셨다는 거에요. 이런 이야기하기 참 힘듭니다만은 내가 당신에게 사기 당하기 전 까지는 내가 당신을 용서 할 수 있다, 내가 당신을 도와 줄 수 있다고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 했는데 사기를 당하고 보니까 그 돈이 나라는 이름에 속한 것이 아니고 주의 일에 속한 주님이 나에게 주신 돈을 내가 사기 당했다고 마치 내 돈 인 양 착각했는데
당신이 없었다면 내가 주님을 경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뻔 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난 뒤 비로소 나는 하나가 아니고 하나에 예속된 다수성에 속하고, 여러 가지 다수성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거지요. 특히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이고 남녀사이도 마찬가지이고 저 사람이 나에게 무얼 해 줄 것인가? 어떤 유용성을 가지고 따져 버리면 그 사귐은 상당히 가식적이고 위선적이죠. 상대를 이용하는 것 밖에 안 되거든요. 상대를 굴복시키는 쾌감이나 희열을 느끼는 것
특히 목사들에게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남을 가르친다는 것, 이건 안 되거든요. 가르치는 건 성령이 하는 것이지 인간이 가르치는 게 아니거든요. 예수님을 경유해서 해야 되요. 내가 저 사람에게 배우기 위해 나는 가르치는 기능으로 잠시 사용되는구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배우기 위해서, 상대방은 배움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에게 도리어 배움을 받기 위해 주께서 만나게 해주신 거에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은 한 명도 전도를 못했다. 단 한명도 못했어요. 왜 I am not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체를 더욱 더 심도있게 깊이 있게 하기 위해서 나보다 못난 인간들을 둠으로서 갑자기 내가 우쭐댈 수 밖에 없는 죄를 또 노출 시키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나 이 바보야!” 라는 마음이 드는 특히 복음을 알고 전도 하면서 전도하는 것인지 이건 정복하는 것인지 분간 안가는 사람이 많거든요.
“너는 나한테 걸려들었어! 너는 나한테 굴복 해 돼! 내 말빨에, 특히 대학생들 전도 할 때 꼭 남학생들이 예쁜 아가씨들한테만 하고 못난 아가씨는 아예 재껴 버리고 작업 걸듯이 하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못 난는지 너희 보다 더 못난 민족을 통해서 언약이 영광을 받습니다. 엘리 가문의 이가봇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대표 하거든요.
이스라엘 전체가 말만 하나님! 하나님! 했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영광이 없는 나라인데 영광을 주신 것은 언약이 독보적인 사람의 어떤 협조나 협력 없이 항상 홀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붙여 놓고 이스라엘에게 이겼다고 좋다고 하는 블레셋 나라에서 혼자 승리를 따내 버려요. 혼자 가서 이기는 화랑 관창? 계백한테 목 베었지만 혼자서 하는 소년 다윗 같아요.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오직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로 더 이상 죄를 씻을 수 있는 다른 제사, 요즘의 예배, 어떤 예배도 우리의 죄를 씻는 예배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의 예배를 반복 할 뿐이지 추가적인 예배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배 잘 드려서 구원 받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커튼 색깔 바꾸고 목사 가운 색깔 바꾼다고 해서 예배가 되는 게 아니에요.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하고 성전에서 잠잠할 지어다 하면서 11시 예배 때는 은혜 받고 2시에는 덜 받는 그런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 자체가 움직이는 언약궤이기 때문에 모든 성도의 만남은 비거룩과 현장에서, 처음 출발은 성도라고 하지만 비 성도와 동일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성령께서 다 이루었음을 제공해 줄 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면서
죄를 통해서 오직 지금 일 하시는 분은 주님 밖에 없고 구원도 선교도 다 주님의 자기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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