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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엇갈린 천국관 16093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1. 9. 07:27
2016-10-01 01:36:00조회 : 460         
엇갈린 천국관 160930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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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211.♡.22.157)16-10-19 08:57 
광주 강의(2016. 9. 30) 31-1 

마가복음 9장 1절을 보겠습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우리나라 사람이 캐나다로 여행을 갔다며 여행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오겠지요. 어디로 여행을 가든 결국은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오겠지요? 예수님께서 만약 한국 땅에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잘 봤습니다.”하고 우리 일상으로 돌아가겠지요. 

성도가 캐나다 갔다가 한국 왔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미국에서 한국 가는 것도 의미 없어요. 그러면 캐나다에서 바로 천국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또 미국 여행하다가 바로 천국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상당히 은혜롭잖아요. 있는 그 자리에서 천국 가는 것. 이것 역시 가위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을 보여주는 것은 뭐냐? 미국 안에서 천국을 가는 것, 캐나다 안에서 천국을 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은 이걸 의미하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와 같은 뉘앙스인데, 사람들은 천국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나라를 땅에 만듭니다. 

바벨탑에 대해 설교하면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왜 바벨탑 만들기 전에 말리지 않았는가?’하는 것과 ‘바벨탑을 쌓는 그들을 왜 흩어버렸는가?’하는 점입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자기 이름이 하늘에 닿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만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의 목적을 하나님이 성취시켜 줍니다. 

그들을 흩어지게 한 후 그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그 지점에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고 기다립니다. ‘진짜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다.’ 십자가는 비극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만나게 되지요.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데 결국 만난 분은 십자가 지신 분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바벨탑 만드는 것은 십자가 사건의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 합당하지요. 바벨탑 쌓는 것을 왜 사전에 막지 않았는가? 십자가와 관련되기 때문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는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일으켜 가능하게 만듭니다.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슬픈 사건이지요.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추방되었을 때 인간은 그것을 생각 못했어요. 세상살이가 너무 힘드니까 하늘나라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꿈꾸는 하늘나라는 사건이 아니고 이 땅과 연결된, 이 몸 그대로 가서 편하게 살겠다는 것이지요. 

이 땅에서의 이 몸은 누구이름이냐 하면 자기 이름, 또는 사람의 이름이지요.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에 올라가서 영원히 살겠다고 바벨탑을 쌓게 된 겁니다. 

사람의 이름과 하나님 이름의 만남은 비극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본문, 변화산 이야기가 비극입니까, 신나는 일입니까? 아주 신이 났지요. 그런데 이걸 아셔야 돼요. 하나님 쪽에서 모든 것을 보여줬다는 말은, 이제부터 너희들의 실체를 들춰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과도하게 자신의 실상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그에 상응하는 너의 속살도 공개하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엄마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엄마는 아기의 모든 것을 압니다. 그런데 만약 아기가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숨는다면 엄마는 기절할 거예요. 이미 엄마는 아기의 모든 것을 압니다. 그런데 아기가 도덕과 윤리의 책무를 다하면서 엄마를 대한다면 이건 엄마와 아기의 관계가 아니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변화산에서 천국을 봤지요. 이 변화산의 천국 모습과 윤리, 도덕체계는 결코 합치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됩니다. 예의를 차린다든지 ‘주님, 제가 나쁜 짓 했지요?’라는 말투로 주님 앞에 나온다면 주님은 오히려 그것을 더럽게 여기십니다. “이게 어디서 세속적은 사고방식을 표출해?”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를 보여주셨지요. 거기에 상응해서 인간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 보여 주셨는데 우리도 성의를 다해야지.’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절대 그런 인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보여 줄 것 다 보여 주셨으면, 이제는 각오  해야 돼요. 나의 감추고 싶고 부끄러운 것을 모두 주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변화산 이야기가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 들춰내는 작업을 주님이 어떻게 벌이는가? ‘너희들에게 하늘나라 보여줬잖아. 이제 너희들도 각오해!’ 주님이 보여줄 것 다 보여 줬으니까 이제 소매를 걷고 본격적으로 인간들을 압박합니다. “너희들이 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지를 알아야 돼!”라는 것을 알려주시지요. 

하나님 쪽에서 엄청난 것을 보여줬으면 그 이후에 우리는 절대 도덕, 윤리, 예의범절을 주님 앞에 내보여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 변화산을 보여주신 이유가 뭡니까? 지금까지도 이 문제가 원활하게 풀리지 않았어요. ‘조금만 더 고생해! 고생이 끝나면 나중에 이런 나라에 넣어줄게.’라는 식으로 미리 변화산을 보여준 것입니까? 

이게 아닌데, 대부분의 성경 주석은 그런 식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도 제자들이 초조해 하고, 답답해 하니까 장차 누릴 영광을 미리 보여줘서 안심시키고 위로하기 위해 주님이 제자들을 변화산에 데리고 갔다는 주장이지요. 이 주장이 옳다면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이 기뻐하셔야 되지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주께서 영광스런 광경을 보여줬으니까 그 은혜에 보답해야지.’ 이런 사고방식이 추잡한 세속적 안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티를 내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극도로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준 이유가 뭡니까? 성의 표시하라고 보여주신 겁니까? 격려하기 위함입니까? 

캐나다가 살기 좋은 나라지요. 벤프 국립공원은 세계 최고입니다. 그런 곳을 구경하고 놀다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여행에 지친 몸을 쉬게 되니 한국이 안식처가 되겠지요. 그러나 만약 그 여행자가 성도라면 ‘한국, 캐나다 전부 지옥이고 영원한 안식처는 천국이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말이 굉장히 은혜스러울 수가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병든 할머니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할머니, 이렇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에 대해 할머니가 하는 말이 “가야지요. 더 이상 고통 받고 싶지 않습니다. 천국 가서 주님께 맛있는 빈대떡 구워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성의를 다했으니까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쪽에서도 최소한의 성의를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런 생각 자체가 윤리, 도덕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윤리, 도덕체계를 죄로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나는 예수 믿어요. 죽으면 천국 갈 거예요. 그래서 저는 바르게 살 거예요.” 라고 할 때, 바르게 살려고 하는 나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더러운 죄악에 갇혀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제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알게 되었으니 바르게 살아야지요.’라는 생각이 주님을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안다면 입에서 ‘바르게 살아야지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가능성,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신앙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바르게 살겠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바르게 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본인이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인데, 이건 아직도 선악체계에서 못 빠져나온 자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는 말은, 자기를 위한 초막은 없으니까 굉장히 겸손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성의를 다하는 이런 모습이 자신으로써는 자신감 있게 내뺏은 말이에요. ‘나의 제안은 하자가 없다.’는 생각에서 한 말입니다. 

천국과 인간은 비극으로 만난다고 했지요. 바벨탑을 무너트리니까 그것이 땅으로 퍼져 역사가 되었고, 역사의 끝에서 십자가의 비극을 만납니다. 이 공식이 마가복음 9장과 안 맞잖아요. 영광을 보여주고 성의 표시하고. 서로 윈윈하는 것. 버지니아 두 번째 강의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인간은 왜 사는가?’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이 뭔가?’ ‘유쾌하고 상쾌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 것은 유쾌하고 상쾌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뭐가 빠졌어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하는 점이 빠져있어요. 오늘 본문을 볼 때 제자들과 예수님의 만남이 비극이 아니고 희극이지요.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가 저쪽에 있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이쪽에 있는데,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는 희극을 이야기했습니까, 비극을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까 비극이야기죠.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짓겠다고 희극을 이야기해요. “여기가 좋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그냥 예수님, 모세, 엘리야가 있는 자리로 넣어주면 안 됩니까? 뭔가 해결해야 될 것이 있지요. ‘내가 천국 가야지’라는 생각이 천국 갈 수 없게 만드는 죄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누가 알겠어요? 이걸 모르기 때문에 ‘이제 예수 믿으니까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변화산의 영광을 보여준 것은, 결국 인간이 깊숙이 감춰놓은 (주님 오시면 빨리 천국 갔으면 좋겠다는)기대와 희망 자체가 주님이 처리해야 될 죄의 본성 중 하나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로 하여금 성의 표시하게 만들었고, 주님과 나 사이는 아주 좋아서 ‘여기가 좋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노리는 것입니다. 목사가 이것을 상품화해서 장사를 합니다. 

모세, 엘리야, 예수님은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하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희극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과 요한복음 3장 6절을 비교해 봅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고 했습니다. 지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요한복음 3장 6절을 모르고 있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본인이 육이기 때문에 변화산의 일을 육의 세계로 보고 그곳에 합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영 세계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펴는 전략은 뭔가? 그들이 육이라는 사실을 들춰내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이런 작업이 없으면 제자들 자신이 육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한계치까지 몰아넣는 이유는 육이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다 예수님을 떠났어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하실 겁니다. “내가 너에게 CT촬영 해줄 테니까 그냥 하든대로 해!” 이 말에서 더 나아가면 복잡해집니다. ‘주님, 천국이 있다면 저를 천국에만 넣어주세요.’라는 생각을 그냥 하라는 말입니다. “나는 예수 믿고 천국 갈 백성이 되었기에 바르게 살래.”라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바르게 살 수 없어. 그냥 평소 하든대로 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은 아무리 고치려 해도 못 고치는 고질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칠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근원적인 죄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런 작업을 할 때 하나님은 은근히 사단으로 하여금 우리를 들쑤시도록 허락하십니다. ‘바르게 살아야지. 착하게 살아야지.’ 이것은 100% 마귀가 찾아온 것입니다. 마귀가 찾아오면 감사와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그 대신 염려와 걱정을 줍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마귀에게 쫓기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게 성도의 일상적 삶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 말씀을 제대로 몰라서 이런 식으로 사는 겁니다. 두려워 떤다는 것은 행복을 고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럼 행복이 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욕망과 권력의 놀이마당입니다. 정치인은 정치판에서 놀고, 학자는 지식놀이를 하겠지요. 이것이 욕망과 권력의 놀이마당입니다. 

이 놀이마당을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어요. 이건 ‘괴물’이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든 사람들은 욕망과 권력의 놀이마당에서 살아갑니다. 요즘 코레일 직원들이 파업하고 있지요. 이게 권력 싸움입니다. 욕망은 시시때때로 자극을 받으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스포츠 경기, 컴퓨터 게임, 도박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세상이 뭔가? 욕망과 권력의 놀이마당입니다. 돈을 왜 버는가? 새로운 자극으로 인하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거예요. 돈 없는 노인은 집에 있든지 경로당에 갑니다. 돈 있는 노인은 다방에 갑니다. 돈이 많은 노인은 해외여행을 갑니다. 돈이 많아서 성경공부에 참석하겠다는 노인은 없어요. 

인간은 욕망과 권력의 놀이마당에서 뛰놀고 싶어 환장한 자들입니다. 아담 스미스의 표현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우리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늘 점심 식사는 어디에서 하고, 식사 후에는 어디 가서 차를 마실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욕망을 쫓아 움직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을 보이게 하는 것을 ‘정치 구도’라고 합니다. 정치 구도의 극한은 독재 국가북한입니다. 북한의 모든 질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입니까, 보이는 뚱보(김정은)가 움직입니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는 미국, 일본 등입니다. 이것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장 원리입니다. 

국가가 관여하지 않고 될 놈은 되고, 탈락하는 자는 탈락하는 거예요. 탤런트 소유진의 남편 백종원이란 사람이 외식 사업을 세 업종을 열어서 온 동네 영세 식당이 고사 직전에 있답니다. 이 사람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강자입니다. 욕망과 권력의 게임마당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지요. 

마르쿠제는 이것은 ‘1차원적 인간’이라고 했어요. 1차원은 면적도 높이도 깊이도 없고 그냥 기어가는 개미 같은 거예요. 개미처럼 코앞에 있는 것만 보고 가는데, 그 가는 방향이 욕망과 권력의 게임에 빠져 움직이는 거예요. 저는 설교에서 이것을 ‘소꿉놀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삶의 의미도, 목적도 모르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나오는 벌레처럼 사는 거예요. [변신]에서 말하는 벌레는 셀러리맨이죠.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하고, 출근하면 시키는 일 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고. 다음 날이면 또 반복하는 삶. 카프카는 셀러리맨의 삶이나 벌레의 삶이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카프카를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합니다.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냥 분주히 움직이는 삶, 새로운 자극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인간들. 이러한 것에서 기껏 나오는 것이 ‘종교적 열망’이고, 여기서 나온 것이 윤리, 도덕입니다. 이런 소꿉놀이에서 권력을 잡은 자가 자신이 원하는 질서를 만들고, 이 질서가 윤리가 되고, 이 질서를 내면화 시킨 것이 도덕입니다. 이것이 세상 내막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가진 자의 권력에서 나왔어요. 아이들의 도덕심은 삼성전자를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 현재 제일 성공한 기업이니까요. 또는 판사, 검사, 의사 등. 아이들이 평소에 내면화 된 도덕심은 ‘착하게 살면 권력도 가질 수 있고, 자기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부모로부터 계속 쇠뇌 받아 온 것입니다. 

여자 고등학교 3학년 급훈 중 이런 것이 있어요. “올해의 노력으로 신랑 직업이 바뀐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별 볼일 없는 직업의 신랑과 결혼하게 되고, 좋은 대학 가면 괜찮은 직업을 가진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미 이것은 학습화 된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가 나오는데, 종교 역시 윤리, 도덕을 내용으로 해서 종교가 나오지요. 그런데 그 종교를 주님은 -- 

복습해 봅시다. 하나님이 보여 줄 것 다 보여줬습니다. 이것은 ‘네 죄의 극단까지 들춰 낼 거야.’라는 의미입니다. 부부가 첫날 밤을 함께 지내면 서로 보여 줄 것 다 보여준 거예요. 이제 서로가 서로를 장악한 거예요. 이제부터 상대가 자신의 소유가 되었기에 일일이 간섭하고 잔소리를 합니다. ‘내 것 다 보여줬잖아. 그러니까 너의 모든 것은 내 소유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남자는 미처 이것을 몰랐어요. 사전에 이것을 아는 남자는 없습니다. 나중에 당하고 난 뒤에 ‘내가 물렸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남자 연예인들과 하룻밤 잤다고 고소하는 이유가 뭡니까? ‘보여 줄 것 다 보여줬으니까 이제 넌 내 소유야.’ 라는 여자의 심리를 남자 연예인이 사전에 미처 몰랐던 거지요. 

여자는 그것이 하나의 운명인데 남자는 게임으로 생각합니다. 남녀 간에 의식 자체가 달라요. 여자는 가정에 목숨을 바쳤는데 남자는 가정을 자기 놀이터(또는 휴식처)로 여깁니다. 아내를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는 하녀로 생각해요. 사랑해서 결혼을 하면 결혼이 끝이 아닙니다. 

‘사랑해서 결혼을 했다면, 결혼은 사랑의 맛보기고, 이제부터 사랑을 본격화 시켜서 더 깊은 사랑이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 결혼생활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여자들이 감격을 하지요. 여자들은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면, 연애할 때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혼을 합니다. 연애할 때 잠시 잠깐 만나도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대 늘 같이 있으면 기쁨이 몇 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남자 생각은 달라요. 연애할 때는 아직 완전한 나의 소유가 되지 못한 상태지만 결혼하면 이제 자기 소유가 되었기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깁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의 윤리, 도덕 자체가 자신의 행복을 유지하면서 천국 가려는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감춰진 죄악이란 것입니다. 절대로 바르게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10분 쉽시다. 

(2016. 10. 19. 08:19 녹취 마침)

 서경수 (IP:59.♡.105.1)16-10-28 09:05 
광주 강의(2016. 9. 30) 31-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목적대로 이미 하늘나라를 보여 줬는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정신도 못 차리고, “여기가 좋사오니” 이런 소리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3명의 제자들을 모세, 엘리야와 함께 있도록 하는 것은 예수님의 숙제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세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다. 이런 철없는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제시하는 해결방안은 주님이 제자들의 세계에 들어오십니다. 들어오실 때 경계선을 넘어 와야 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자력으로 모세와 엘리야가 있는 자리로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장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벽은 로마서에서 ‘죄의 장벽’이라고 해서, 인간은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어요. 인간이 죄 안에 갇혀 있다는 증거가 인간의 심리 속에 있습니다. 자꾸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악을 선으로 이기려고 하는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바르게 했다고 여기는 순간 더 큰 과제가 새롭게 생겨납니다. 

한 낮에 길을 가면 내가 가는 곳에 나의 그림자도 따라 움직입니다. 이 그림자를 떼 낼 수 있습니까? 없지요. 선과 악은 한 세트입니다. 선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악이 있고, 악이 있는 곳에는 선이 있어요.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 나쁜 짓하는 중에도 변명거리가 있어요. ‘어쩔 수 없었어.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래도 나는 이 정도로 그쳤어.’ 등등. 

선을 부르면 악이 따라오고, 악을 부르면 원치 않는 선이 같이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이처럼 서로 모순된 것이 인간 속에 장착되어 있으니까 인간은 그 속에서 헤매고 있고 그곳에서 탈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모순을 품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을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켰잖아요. 그러면 모세와 엘리야는 어떻게 갔습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께 잘 보이고, 바르게 살아서 하늘나라로 간다면 모세와 엘리야는 측은히 여길 거예요. 모세는 바르게 살려고 하다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어요. 이것은 자체적 노력으로 구원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는 천국에 갔잖아요.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용감하게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러다 ‘주여, 저만 남았습니다.’ 주님 말씀이 ‘너만 남은 것이 아니라 7000천명 남아있다.’고 하셨지요. 

본인이 쫓겨 다니고 힘드니까 자기 혼자만 힘든 신앙생활 하는 줄 알았어요. 그랬던 엘리야지만 결국 천국 갔지요. 

두 사람 다 천국 가는 과정에서 자기 속에 있는 죄악이 발각되고 노출되었지요. 모세와 엘리야의 죄악을 분석해 보세요. 도적질 했습니까? 죄 같지도 않은데 죄가 되었지요. 그게 뭐냐 하면, 백성을 위해 희생, 봉사, 헌신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됩니다. 헌신 = 죄.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할까요? 순교 = 죄. 이걸 알면 다 안 것입니다. 순교마저 죄라면 죄 아닌 것이 없지요. 인간의 모든 것이 다 죄가 되는 거예요. 헌신과 순교도 죄가 된다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어떻게 이 장벽을 넘을 수 있습니까? 이 장벽이 눈에 보이는 벽이라면 사다리를 타고라도 넘을 수 있지만 이 장벽은 우리 심리 속에 장착되어 있어서 넘을 수 없어요. 

이건 내가 힘써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용기가 부족해서도 아니며, 기도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인간 내부가 구원이 이뤄질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홀로는 안 되고 같이 가야 합니다. 신앙은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헌신하고 충성, 봉사하면 기분상 구원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죄 속에 들어오십니다. 천국의 완성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목표로 잡고 자기 백성을 모세와 엘리야가 있는 하늘나라에 합류시키기 위해서 변화산에 모세, 엘리야는 대기 상태에 있고, 주님 혼자 내려오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렇게 하지 말고, “모세와 엘리아야, 너희들이 가서 십자가 져라.”고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님은 본인이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그걸 누가 아느냐? 모세와 엘리야가 압니다. 그래서 비극적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셔야 우리가 대기 상태가 아닌 완전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시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을 반길까요? 처음에는 반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오는 것이 아니고 장벽을 힘겹게 뚫고 들어옵니다. 들어와서 계속 차이나는 것을 던집니다. 그 때 선과 악 의식이 완벽하게 반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인간은 선과 악 의식에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는데 그 내용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이야기한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주님 은혜에 보답하며 착하게 살겠습니다.” 이것이 심하게 주님 하신 일에 대해 왜곡하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이렇게 나왔잖아요. 그러다 결국 배신하고 도망칩니다. 주님은 끝까지 갔는데 제자들은 주님을 피해 다 도망가지요. 이사야 53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건 각자 자기의 동굴로 갔다는 말입니다. 

왜냐? 착하게 살고 싶은 순수한 마음을 지키고 싶어서 주님으로부터 도망치고 맙니다. 주님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의 착함으로 그 간격을 메우려고 해요. 지난 수요일 설교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에는 거리가 없고, 간격이 있으면 안 된다’고. 사랑은 하나니까 간격이 없습니다. 간격이 있다는 것은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말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최선을 다해 대접하는 것이 아내의 도리입니까? 이건 사랑이 아니에요. 남편이 손님입니까? 아내는 자기가 먹는 것을 남편에게 주고 같이 먹으면 됩니다. 요리하는 주체가 누구지요? 아내지요. 그럼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요리하지 못 먹는 것을 요리하지는 않아요. 만약 남편 먹는 것 따로 있고, 아내 먹는 것 따로 있다면 부부가 아닙니다. 

하나에는 거리와 간격이 없어요. 떠나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라.” 이 말은, ‘더 이상 너는 내 사랑에서 못 빠져 나오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이 나와요. 이처럼 ‘너희도 나와 하나다.’는 것이지요.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사랑을 왜 새 계명이라고 합니까? 모든 계명은 못 지키면 지옥입니다. 계명이 기준으로 확정되면 못 지키면 지옥, 지키면 천국 가는 것이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미 메시아가 온 상태(완료된 상태)에서 거꾸로 새 계명을 주면 성도는 이미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새 계명이 왔다는 말은, 속하지 않은 다른 쪽은 마귀에 속한 자로 확정되고, 마귀에 속한 자는 아무리 선을 행해도 그것은 죄가 되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것은 죄 짓지 않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합격 통지서를 받은 결과를 뒤집어썼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친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하나가 되지를 못했어요. 친한 것과 하나는 다릅니다. 아무리 친해도 친한 것은 숫자로 표현하면 2지 1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면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다’고 해서 2에서 1로 바뀝니다. 그러면 ‘홀로’가 아니고 ‘함께’가 됩니다. 

주와 함께 있는 상태에서 우리 팔자와 운명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우리 이름을 대신할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저항과 반발에 대해 한 가지 예를 든 거예요. 첫 번째 예는 ‘주님이 오시니까 결국 배신하고 도피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배반해야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상황을 그렇게 몰아세우니까 어쩔 수 없이 배반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 그냥 그분 오심을 느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이 꽉 차 있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날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와도 마찬가지로 주님을 배반하면서 비겁하게 변명하며 떠날 수밖에 없는 심리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요. “이번 일은 주님도 눈감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변명합니다. 

누구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자꾸 변명을 해요. “주님 말씀 지키려고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못 지켰습니다. 주님은 제 마음 아시지요?” 이런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주님 앞에 이런 변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익히 아시기 때문이지요. 세상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첫 번째는 반발하고 저항한다. 두 번째는 행위하는 본인이 행위의 주체자가 됩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에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고 했지요. 여기서 ‘죽으러 가자’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우리’지요. 도마가 이런 말을 한 것이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더 살아보자.’는 것은 말이 됩니다. 그런데 ‘죽으러 가자’고 하면서 자기가 주체가 되는 행동은 성립이 안 됩니다. 

‘죽으러 가자고 하면 설마 살려주겠지’ 이런 마음이 밑에 깔려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도마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죽으러 가자’는 말을 기쁘게 하고 있어요. 진짜 죽으러 가는 자는 슬퍼해요. 그런데 도마가 기뻐하며 이런 말을 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을 전혀 이해 못하고 말을 한 것입니다. 

행위하는 본인이 행위의 주체자입니다. 예수 믿어도 내가 믿고, 천국 가도 내가 가고, 영생을 얻어도 지금의 내가 얻고. 이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지금의 내가 영생 못 얻습니다.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가 바뀌게 됩니다. 내가 여기 있는데 주님이 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께 자리를 양보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일하시는 죄의 장벽 밑에는 뱀의 후손이 지배, 통치하고 있어요. 

뱀과 뱀의 후손은 어떻게 다릅니까? 창세기 3장 11절을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했고, 세상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대결하는 장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뱀과 뱀의 후손의 차이점은, 뱀은 파충류고 뱀의 후손은 마귀지요. 그런데 뱀이 어떻게 뱀의 후손인 마귀가 됩니까? 

마귀는 영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뱀은 실체가 있잖아요. 실체 있는 것의 후손이 실체 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여자와 여자의 후손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여자는 신체가 있지요. 그런데 여자의 후손은 인자(예수님)인데, 인자는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증거하기 위해서 여자를 미리 만들었다고 하면 문제가 풀리지요. 그래서 여자는 기능자, 즉 예수님의 기능을 여자가 미리 보여줬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뱀의 후손의 기능을 누가 보여줍니까? 파충류 뱀이 보여준 거예요. 그러면 뱀은 여자에게 어떤 거짓말을 했지요?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오늘날 뱀의 후손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의 소망은 현재 내가 하늘나라에 가고 싶잖아요.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는 생각이 뱀의 주장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비극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신이 났어요. 천국과 같은 변화산의 환경이 얼마나 즐거웠겠어요. 

그래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거예요.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주님과 자신의 관계가 전혀 하자가 없는 정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생각 자체가 사단의 생각이에요. 처음부터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주님을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게 좋단 말이지요. 예수님이 우리를 지적하는 일만은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하면서 계속 공격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예수 믿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답게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하니까, 주님은 이런 마귀의 마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 지적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만큼 했으면 됐지 더 이상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내가 내 주체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 믿어주는 행위를 하는 그 짓이 바로 내가 그렇게 찾고 싶었던 마귀의 모습이 드디어 나를 통해서 분출된 거예요. 젊은 남자들이 다이어트하고 근력 키우면 상의 벗고 복근을 자랑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믿었다고 자랑을 하는데, 사실을 자신이 마귀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저것을 하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희생할까요?” 이게 전부 마귀 짓입니다. 

도마가 하는 말이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시는데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했어요. “주여, 죽여주옵소서!”가 아니고, ‘우리가 알아서 주님이 원하는 대로 죽겠습니다. 친구들아, 함께 죽으러 가자.’ 이런 뜻이지요. 요한복음 11장 1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설마 주님이 우리를 죽이기야 하시겠나?’ 이런 생각을 해요. 여기에는 나는 나를 위해 산다는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정리해 봅시다.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고 했는데 첫째는 비겁하게 배신하며 도망치고, 둘째는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뱀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의 양상입니다. 그러면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면 모세와 엘리야는 어떻게 천국에 갔지? 이게 풀어야할 숙제입니다. 

만약 모세와 엘리야에게 “당신들은 어떻게 해서 천국 갔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라. 주님이 너희들도 여기로 부르실 거야.” 주님이 우리 주체 자리로 들어오시고, 주체의 자리에 있던 우리를 주님이 하시는 일의 결과물로 돌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 있고(1), 주님이 저기 있다(2)고 숫자를 정한 것을 주님이 바꿔치기 하니까 주님을 1로 보고, 우리를 2로 본다면 기본이 1이지요. 1의 업적의 결과물이 2가 되는 방식을 취할 때, 구원 받은 사람은 2의 자리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2의 모든 것이 1의 은혜입니다. 1이 하신 업적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2는 1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증인 되는 구비조건은 뭔가? 날마다 주님을 배신하면 되고, 또 그에 대해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으면 되고, 내가 나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면 됩니다. 이처럼 평소에 하는 대로 살면 되는데, 직설적으로 말하면, 막 살면 됩니다. 

왜 제가 막 살라고 이야기합니까? 이 한 마디로 성령 받은 자와 안 받은 자가 구분이 됩니다. 막 사는 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덕분에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주님 증거하는 용도로 막 사는 거예요. 그렇다면 정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막 사는 가운데서 무엇이 드러나는가 하면, 구원 받기 전 홀로 있을 때 하던 행세를 그대로 다 보여주지요. 

실패할까봐 두려워하고, 불행이 닥치지 않을까 걱정하던 것. 특히 남자는 가을이 되면 모르는 여자를 사랑하고 싶어요. 그리고 모르는 여자에게 편지를 하고 싶어요. 이 말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여자는 식상하다는 거예요. 가을에는 바바리 깃을 세우고 낙엽을 밟으면서 한없이 걷고 싶어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제발 혼자 있고 싶다.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기존에 아는 여자는 접근하면 안 돼요. 그래서 출장 간다고 핑계를 대서 혼자 어딘가로 떠납니다. 그런데 아내가 눈치 채고 가만 두지를 않지요. “돈도 잘 못 버는 주재에 혼자 낭만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서 제동을 걸지요.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을 때 나오는 모든 것이 선악적 악마의 심성이 그대로 나옵니다. 여기서 질문 합니다. 마귀가 왜 예수님에 대해 시비를 겁니까? 혼자 있고 싶어서. 그 혼자 있고 싶다는 심성을 아담과 하와가 받았으니까, 아담과 하와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는 지시와 명령이 늘 함께 있어요. 

그럼 혼자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악과 자체를 뿌리부터 뽑아버려야 해요. 그래서 따먹게 했어요. 마귀가 그렇게 일을 전개한 거예요. “예수 믿어야 산다.”고 하니까 “안 믿으면 어쩔 건데?” 이런 식으로 반발심이 생기지요. 그래서 ‘믿으라’는 말은 미끼가 됩니다. “네가 믿는 것은 주님이 좋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천국 가는 것이 좋아서 믿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위하여 구원 받습니다.” 링컨이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맙시다. 그분들의 대의를 우리가 지켜 줍시다. 그러면 정말 이상적인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민을 위한다’는 말은 솔직히 ‘나를 위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나를 위한다’는 것으로 마중을 나갑니다. 나를 위한 예수님이라면 저에게 오시고 나를 위하는 것에 예수님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사단아 물러가라!’는 식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배신하고 도망치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12제자들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까지 했어요. 왜 자살했지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양심을 위해서 ‘나는 내 목숨을 바치겠다’는 거지요. 나를 위해 예수 믿겠다는 것이 우리 속에 있는 마귀의 심성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면 우리의 실상을 다 폭로시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나의 모든 것이 폭로 당했음을 인식할 때, 주님이 주체가 되어 나를 객체로 삼아서 ‘나는 혼자 있고 싶다’ 이런 생각을 유발시켜서 나의 죄악을 알려 주실 때 그것이 바로 주님께 구원 받은 자임을 증거하는 성도입니다. 

그럼 구원 받은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마가복음 9장 7절입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제가 질문합니다.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 말을 듣는 것이다. 2)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아는 것이다.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2번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서 예수님 말을 들으라고 하셨으니 이제부터 예수님 말씀 들어야지’라고 할 때 예수님 말을 듣는 주체가 누굽니까? 내가 되지요. 

내가 예수님 말씀 잘 들으면 구원 받습니까? 말을 잘 듣기는커녕 도망가기 바쁘겠지요. 여기서의 말씀 취지는 아버지가 따로 나타나시고 예수님은 따로 변화산에 계시지요? 구름 속에서 아버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계시지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한 분입니까, 두 분입니까? 두 분이지요. 
두 분의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말은, 아버지가 일을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아들이 성취하시는 그 작업장 속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 이 5명이 함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고도 놀라지만 그와 동시에 이미 죽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 있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따라서 개인 구원은 있을 수 없어요. 같은 동료로 구원 받습니다. 같은 소속에 있는 자들이 함께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 받은 자의 우열이 없습니다. 사도라고 해서 더 우세하고 사도 아니라고 해서 열등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갑질을 하지도 못하고 누가 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 한 형제일 뿐입니다. 

그럼 누구를 봅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성도란 결국 예수님의 언약 성취 과정에서 채택된 자입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예정된 일이고, 그것 때문이 이 땅에 태어나야 했고, 태어나서 아담의 범죄 때문에 나는 나 잘되기 위해 하나님을 믿었는데 성령이 임하시니 ‘주님의 주 되심과 언약을 위해 우리는 하나의 기능인으로 간택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을 보여줍니까?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데 차이점은 ‘우리는 이래서 죄인이야!’라는 말을 하고, 불신자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하지요. 내시는 남자입니다. 그런데 달빛에 비친 내시 중 아름다운 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그를 ‘내시’라고 부르지 않고 ‘라온’이라고 불러요. 라온은 ‘기쁨, 즐거움’ 이란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고 ‘너는 나의 기쁨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신학 체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체가 되고 우리는 주님의 기쁨의 객체가 되는 겁니다.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온) 중에 평화로다.’ 이미 구원 받았다는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변화산을 본 베드로는 좋아서 날뛰지만 그 자체가 바로 악마의 품성인 것을 성령 받은 후에야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