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60812b (성경해석)―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구약의 율법은 바로 우리 인간의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 율법이 십자가로 인하여 완성되고 난 뒤에 주어졌던 사도들의 권면과 명령도 율법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미 율법시대는 끝났고 이제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될 그런 도리 같은 것들이 주어졌다면, 전에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는 그런 의무가 있었다면, 사도 바울의 지시와 명령마저도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 줬다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 아니냐? 그것은 마땅히 해야 되고 또 성령을 받았으면 결국은 그것을 완전하게 지켜내는 말씀만 주셨다는 것이 옳지 않는가? 그래서 뭐 너희가 성도니까 거룩하라는 그 말씀이 거기에 성립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 경우가 베드로후서 1장에 보게 되면 5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절,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절,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라는 이 지시와 명령은 예수의 피를 믿고 성도가 된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거는 할 수 있다고 긍정적 의미에서 준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냐? 이것마저 율법이라고 해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으니까, 뭐 지식도 필요 없고 덕도 필요 없고 인내도 필요 없고 형제 우애도 필요 없고 절제도 필요 없고, 이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라고 반박과 공격을 저한테 해대는 겁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은요, 십자가 죽음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몰라요. 어떤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몰라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개인적인 입장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그 안에 품고 죽으신 거예요. 십자가가 그런 거거든요.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은 뭘 겨냥하느냐 하면, 구약의 율법은 인간이 있고 여기에 율법이 있어가지고 인간이 이걸 어떻게 지키느냐, 마느냐,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들어가도 저주받는다. 개인과 율법, 두 개가 하나의 대상으로 명확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냥 못 지키니까 예수님이 지켰다가 아니라, 여기서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해요. 그렇게 저를 공격한 사람이 뭘 놓치느냐 하면 십자가가 새로운 피조물을 만든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인정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여기 있는데 구약의 율법대로 지키려고 하는데 너무 어려워서 못 지키니까 십자가 믿고 난 뒤에, 그 다음에는 율법은 안 지켜도 되지만, 율법은 끝났지만,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아까 베드로의 권면, 그 정도는 내가 지킬 수 있다. 이렇게 돼버리면 이 인간 안에는 전에 인간이 하고 있는, 똑같은 인간을 계속 갖고 있는, 그걸 유지하고 있는 것이 돼요.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가 똑같이 돼버리면 십자가라는 그 의미가 내가 지은 죄를 그냥 용서할 뿐이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새로운 인간이 나온다는 것은 완전히 빼먹는 거예요. 하다 보니 안 되니까 십자가로 용서받고, 용서받고 난 뒤에 권면하면 내가 지키고. 이러면 전에 안 된다는 그 ‘나’나 내가 지킬 수 있다는 그 ‘나’나, 동일한 인간이 되가지고, 하나님이 그 인간 안 받습니다. 하늘나라는 받지를 않아요.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나와야 된다는 것. 갈 곳이 있다. 그 다음에 그 나라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게 무슨 나라냐 하면 인간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거든요. 아들의 나라라는 것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 같은 인간형이 되지 않으면 그 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자기 존재성을 계속 붙들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너는 죽었다는 무슨 뜻이에요? 니가 율법 지키려고 하니까 잘 안되지? 내가 니 용서해줄게. 그냥 용서해주는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니는 죽을 필요 없어. 내가 용서해주면 되지. 니가 왜 죽어야 해? 안 죽어도 돼. 가만히 있어. 내가 니 죄를 씻어 줄게. 됐어. 그 인간 그대로 계속 가! 이게 아니고, 십자가라는 것은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것이 십자가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내가 언제 죽었는데? 지금껏 태어나서 한 번도 죽어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때 감기에 걸려 열이 나서 죽을 뻔 한 적은 있지만, 맨 그 인간이 그 인간이고 그 인간이 그 인간인데, 뭘 죽어? 그러니까 신약에 나오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할 때, 그 죽고라는 개념이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들한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성경은 성령으로 감동된 것인데. 죽고, 그 다음에 태어날 때는 죽은 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안 태어나고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이 다시 태어나요.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나는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죽었으면 끝나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증인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그게 바로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우리는 예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말로 하려고 하니 참 어려운데, 이왕 어려운 거 어렵게 합시다. 쉽게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베드로의 예를 들어봅시다. 베드로가 전에 분명히 베드로로 있었잖아요. 배신하고. 근데 베드로에게 오순절에 뭐가 왔죠? 성령이 왔죠. 그 이후에 성령 받고 난 베드로하고 그 전 베드로하고 같은 베드로냐 하는 예를 생각해봅시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뭐냐 하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로 난 베드로다 이 말입니다. 근데 남들은 아무리 봐도 똑같아. 새로운 것이라는 것은 없어요.
없는데, 베드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게 전에 베드로가 이야기했을 때의 행동은 베드로 자신의 이름으로 한 거예요. 자신의.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자기가 한 행동이라면, 남들 보기에는 베드로가 앉은뱅이보고 일어나 걸으라고, 누가 봐도 베드로가 했다고 하지만, 베드로는 말하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있는 주께서 하셨다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하고, 양보하든 안 했든, 자기는 죽고, 자기는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지금 나를 매일같이 이렇게 만들고 있다고 하면서 보이지 않는 주인님을 증거한 셈이 되죠. 이게 예수님의 증인되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사도바울처럼. 이게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달라졌는가, 전에는 내 이름으로 살기 때문에, 반드시 원인이 나이기 때문에 결과도 나의 영광으로 돌아와요. 하지만 원인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누가 받습니까? 예수님이 영광을 받아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앵벌이 하는 대상이 되어 버렸어요. 실컷 구두 닦고 난 뒤에는 주님 앞에 다 내놔라. 다 내놔라. 주님이 몽땅 다 가져가 버려요. 어떤 것이라도.
왜 그렇게 가져가야 됩니까? 주님한테 물으면 주님은 시편을 언급합니다. 시편에 보면 찬양받으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그 말씀을 예수님이 자기한테 적용시키니까. 니가 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찬양받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찬양되어야 하지, 하나님이 찬양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찬양되게 되면 옛날 천국, 주님이 오시기 전의 천국과 똑같이 돼요.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주 예수의 나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린양이 찬양받아야 해요. 그게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면서 무엇을 자꾸 놓치면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핵심 부분을 어떻게 역사 속에 집어넣어서 빼내는가를 보는 거예요. 내시경 할 때 속에 플라스틱을 집어넣고 빼내잖아요. 수술할 때 실 집어넣고 꿰매듯이 빼낸다 이 말이죠. 여기서 들어갈 때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전에는 세상이 있고 그리스도가 들어갔는데,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이 있어야 된다가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주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세상이었다가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시간 자체가, 전에는 시간이 흘러가면 메시아가 오겠지 하는데, 모든 시간은 메시아를 위해서 준비된, 사전에 준비된 시간이 되는 겁니다. 모든 시간이.
그것이 무슨 형이다? 예수님의 인간형이 돼요. 그렇다면 사도의 모든 권면과 모든 명령은 무엇을 근거 합니까?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니가 그렇게 살아. 그게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말씀이지, 예수 믿고 난 뒤에 내가 잘 되기 위한, 내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그걸 증거 하기 위한 사도의 명령이나 권면은 결코 아닌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시간이 거꾸로 돼버리면 사도의 권면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와 화평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게 바로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주님이 준비해주신 온유와 화평을 나는 이렇게 선물로, 은사로 받는구나! 이렇게 되어 버린다니까요.
내가 행해서 얻어 챙기는 것이 아니고, 행한 것도 없는데 예수와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을 그냥 공짜로, 선물로 받아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이해되십니까? 이미 미래에 함께 있기 때문에, 과거는 지금 내가 받은 것이 어떤 계통을 통해서 나한테 이렇게 선물이 주어지는가.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을 위한 시간이고, 예수님을 위한 공간이고, 예수님의 의해서 벌어진 모든 사건들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받았던 영광을 우리는 함께 공유하게 된 거예요. 그게 혼인잔치다 이 말이죠. 혼인잔치.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참석했는데, 거기에 있는 모든 음식은 아들 혼인을 위해서 축하하기 위한 그 음식에 우리는 참여 한 거예요. 우리는 그냥 길거리에 놀던 사람인데. 잘나고, 난 사람들은 어디 뭐 밭을 산다나, 뭐 지 장가가야 된대나, 소를 사가지고 이빨을 조사를 해본다나, 이 핑계 저 핑계대고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석을 못하는데, 우리는 길거리에서 빌빌 놀던 실업자들인데 불러가지고 아들 혼인잔치를 찬양하니까, 호산나하고 찬양하니까, 행한 것도 없이 그냥 받았다고 하면 이제부터 시간개념자체를,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니고, 미래에 나타난 코난. 미래소년 코난으로 간주하시고, 모든 시간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준비한 것처럼, 모든 시간이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 모든 시간이 쏠리게 되어 왔다는 말이죠.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 그리스도만 위해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온 거예요.
따라서 사도의 권면, 이것은 이제는 예수 믿었으니까 지켜라가 아니라, 아, 이런 것이 바로 말씀이 이야기한 요구사항이었구나! 그게 아까 형제의 우애고 인내를 더하고, 그런 사항을 주님께서 알아서 생산해내도록 그렇게 환경을 몰아넣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울 때 항상 주의 할 것은 뭐냐, 제가 인내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없었는데 인내가 댑디다. 이렇게 고백해야죠. 누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베드로와, 요한보고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이구, 무슨 일을 했기에 앉은뱅이가 걷습니까? 하니까 베드로와 요한의 취지는 이거에요. 저는 한 것 없는데 주께서 해놓고 남들 보기에는 우리가 한 것처럼 그렇게 비칩니다. 왜? 우리는 이미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인간형이기 때문에.
그 인간형을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행전 3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목격자입니다. 목격자. 우리는 목격자라고 하는 겁니다.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준 인생이기에 목격자로서 내 인생이 되는 겁니다. 아, 내가 이렇게 코가 좀 크구나. 니가 니 코 크게 하려고 코 수술한 거 잊었어? 내가 수술했었나? 아, 수술한 거 맞다. 아, 수술하게 하신 주의 목격자로서 내가 수술 받았다. 이게 또 무지하게 길어져요. 그런 억지가 어딨어? 왜? 니는 억지로 보이나? 그래 억지로 봐라. 나는 새로운 인간형이야.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 일이 적합하게 주님에 의해서 주어지도록, 나는 목격자입장에서, 수동적인 입장에서 그걸 증거 하라고 나한테는 이렇게 코 걸리고 쌍꺼풀 수술하고 뜯을 거 다 뜯어 견적 내라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잘잘못을 따지면 안 됩니다. 시작을 내가 했으면 “주여, 주의 영광을 바래야 될 내가, 땅의 영광을 보겠다고 남의 흉내내가지고 고친다고 전지현 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욕심을 내었습니다.” 라고 이렇게 반성해봐야, 반성한 내가 우스워. 왜 그러냐 하면 반성해서 무슨 낙을 보겠다고. 반성하면 지금보다 살림살이 나아지십니까? 그 인간형이 더 멋져지는 거예요? 훌륭하게 되는 겁니까?
어떤 분하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공부 많이 하신다고 하길래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무식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거예요. 왜? 공부하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 수가 없어요. 계속 공부를 해줘야 아, 내가 이 방면에 무지몽매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죠. 그러면 그 공부도 안 하는 사람은 뭐예요? 무식의 무식인가. 그냥 포기한 거죠. 아이구 몰라. 자기가 무식한 것을 기정사실로 잡고 공부를 해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 이만하면 됐는데 공부 안 할래. 이렇게 하는 그 순간 유식한 사람이 돼버려요. 이미 목적을 달성해버리면 더 이상 무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주님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계속 죄인 되어야 할 이유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어요. 만약에 내가 스스로, 독자적으로 의인이 돼버리면 더 이상 말씀을 볼 이유가 없다니까요. 독자적으로 의인 돼버리면 그런 오류에 빠져요.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말씀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아, 독자적으로는 죄인 되었는데, 목격자로서 의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되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루터가 이걸 풀어내지 못해서 평생 해답을 얻지를 못했어요. 안타까워요.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신앙의 본을 보인 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 전야에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 정문에 붙이고 걸었는데, 정작 본인의 근본적인 것은 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천주교에서 공격하기를 그래, 성도가 죄인이야? 의인이야? 딱 까놓고 이야기하라고 하니까, 성도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무슨 말도 되도 않는 소리를. 죄인이고 의인이고 둘 중의 하나하라고 하니까, 아니야. 죄인이고 의인이다. 그러면 그 연결고리는? 몰라. 모르는 겁니다.
죄인 되어야 의를 나타낼 수 있어요. 죄인 아니면 의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죄인 되어야 독자적인 가치를 의라고 주장하지 않게 되죠. 만약에 독자적으로 내가 죄인 됐는데 의인되었다고 하면 결국은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의인이라고 독자적으로 놔버리면 뭐가 날라가 버려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의 그 존재의의가 날라가 버리니까, 무엇에 증인입니까?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 의인임을 증거 해버리죠. 그리되면 그것은 구약하고 똑같은 겁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마는, 길어졌으니까 또 정리가 안 되었으니까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 율법은 죄를 더 짓게 함이라고 할 때에는, 이미 기존의 인간이 자아상을 고수하기 때문에 율법을 준 겁니다. 근데 신약에서 명령과, 권면, 사도바울의 무시로 기도하라는, 그 모든 말씀은 이미 새로운 인간형이 있어서 합당한 말씀이 와버린 거예요. 지킬 경우에만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께서 지켰기에, 합당한 인간형을 선물로 그냥 부여 받았다는 것을 증거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하신 일에 증인이 되는 겁니다.
정리해도 모르겠죠. 다시 합시다. 이거는 진도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구약은 기존의 나라는 것이 있고 율법을 줬다 말이죠. 그럼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법을 지켰는데, 율법을 준 것은 아무리 해봐도 너는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의 기능은 죄를 더하게 함이라 이 말입니다. 이거는 딱 아시죠?
그런데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그런 나가 십자가를 통해서 이런 나는 이미 죽어버렸어요. 죽었다는 말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 나가 없어졌어요. ‘나는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해서, 그래서 깨달은 그 상태로 내가 의인이 되어야지.’ 이렇게 꼼수를 쓰는 내가 없어진 거예요. 그런 꼼수 자체가 이제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없고, 누가 있는가, 예수그리스도라는 표면적 모델이 등장했습니다. 그 다음에 새로운 피조물, 뭐 베드로가 됐든, 사도바울이 됐든,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님의 영이 임해버려요. 남들 보기에는 맨 그 인간이 그 인간이지만 주님 보기에는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새롭다는 말은 니가 죄인이었는데 의인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죽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에요. 삶을 얻은 그 인간은 옛날 인간처럼 독자적인 인간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어떤 일인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그걸 목격하기 위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했는가. 그것은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주어질 때, ‘아! 주께서 이런 이것을 이미 결과물로써 우리를 이렇게 세우셨구나.’ 하고 그것을 “나는 이렇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라고 주를 증거 하는 용도로써 권면과 명령이 계속 오는 겁니다.
무시로 기도하라는 사도바울의 편지 나오잖아요. 에베소서에. 무시로 기도하라는 것이 50분 하고 10분 쉬고 이렇게 하는 겁니까? 어떻게 하는 겁니까? 24시간 계속하면 그거는 노동법에 걸리고. 어디 쉬는 날이 있어야죠. 쉬는 날이. 무시로, 무시로 하면 시간 없이. 무시로~♬ 무시로~♬ 이거는 시도 때도 없이 그런 뜻이에요. 시도 때도 없이. 나는 울어요~♬ 계속 시도 때도 없이 그립다 이 말 아닙니까?
누가 그렇게 하신다? 주께서는 성도를 가지고 그렇게 기도하실 때, 이게 바로 무시로구나. 이게 무시로 기도하는 거구나. 아, 내가 못하는 것을 주께서 하게 해주시는구나. 그래서 잘난 나가 아니라 주께서 하셨다는 것을 증거 한다 이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성경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새 언약에 의해서 내 안에서 성경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 말입니다.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뜨거운 분출물이 나오듯이. 말씀이 계속 뜨겁게 나오는 거예요. 오늘은 베드로전서 나왔다가 다음은 히브리서, 로마서 3장 띄고. 그렇게 계속 하는 거예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어요. 미국가나 중국가나 독일가나 관계없이 말씀은 항상 성도 안에서 계속 활용됩니다. 그럴 때마다 통하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어떻게 운전하다가 오토바이를 박았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돈 많이 들었어요. 오토바이 타이밍에 맞춰서 배치하느라.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돈 많이 나갔죠? 한 팔 십 만원 나갔죠? 주의 돈으로 주의 돈을 메꿨습니다. 주의 돈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참 이걸 억지로 하려니까 가슴이 시리죠. 그러나 십자가를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은혜라는 순간, 그야말로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주의 돈으로 주의 돈을 보상해준 거예요. 모든 게.
자, 이정도 하면 여러분들이 이해했다고 치고, 계속 나가봅시다. 그러면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성령의 감동되었다 했죠. 그러면 성령으로 감동되었으면 아까 뭐라고 했어요? 연결고리가 있어야 된다고 했죠. 연결고리. 연결고리가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그걸 뭐라고 했던가요? 언약의 역사라고 했죠. 언약의 역사.
언약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현재 하나님이 약속을 주고, 약속 또는 언약을 주시고, 언약을 주시니까 사람들이 그걸 지키려고 하겠죠. 구약에서. 왜냐하면 지키면 뭐가 오고? 복이 오는데, 그 복을 탐을 내지 않을 위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복 준다는데? 나는 복도 안 받아. 이런 인간 없어요. 좋은 것 주겠다는 데에서는 실패하든 시도하기 마련이에요. 복 준다면.
근데 못 지키면, 약속 안에는 자체적으로 저주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복과 저주가 다 한꺼번에 이 속성 안에 들어있다 이 말 아닙니까? 이게 신약과 관계되게 되면 예수그리스도는 천국 보내주는 분도 맞고, 또 사람들을 어디 보낸다? 지옥에 보내도록 저주하는 기능도 누가 하신다?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이 하는 거예요. 예수를 알고 믿게 되면 천국이지만, 예수님을 알고 믿을 게 못되네. 하면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기준삼아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평가해야 될 분이 따로 와야 해요. 그 분이 바로 심판주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 앞에서의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가 그 사람의 최후의 운명을 완전히 확정지어버립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수련회 마지막 부활이야기 하면서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죠. 세상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세상의 평가는 사람이 만든 기준이 아닙니다. 근데 인간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율법은 현재 인간들이 지키고자 하는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율법은 죄를 감소시킵니까? 확산시킵니까? 더욱더 죄를 확산시키죠. 확산시키면 이 인간들은 뭡니까? 절망에 빠지고 실제로 나락에 빠지겠죠. 그러면 이 약속과 그 다음의 약속이 주어져요.
그러면 앞에 있는 약속을 약속1이라고 하고 그 다음의 약속을 약속2라고 한다면, 약속1은 모든 저주와 축복의 강도가, 깊이가 얕다면 약속2는 깊숙이 내려간 인간까지 건져야 되기 때문에 주님의 주시는 축복의 강도가 전에 약속1보다 더 깊이 내려가야 돼요. 이게 노아(약속1)라면 이건 아브라함(약속2)이 되고. 이게 아브라함(약속1)이 되면 이삭(약속2)이 되고, 이것이 모세(약속1)라면 이건 다윗(약속2)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항상 앞에 있는 약속보다 뒤에 있는 약속이, 거기 죄까지 깡그리 처리를 해줘야 되거든요. 치매 걸린 노인네를 배설물까지 싹 처리를 해줘야 되잖아요. 깔끔하게 냄새까지 나지 않도록 뒤처리를 하듯이.
주님께서 요양사처럼 우리가 저질러놓은 모든 더러운 것을 거룩으로 다 뒤처리를 하려면 점점 더 험한 꼴을 자진해서 감수하시고 약속대로 와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지자들이 갈수록 고생과 노고가 많습니까? 안 많습니까? 갈수록 고생이 많은 거예요. 처음에 선지자들은 기적을 행할 때 약간 인기가 많았어요. 나중에 선지자는 기적을 행해서 먹힐 것 같으면, 안 망할 것 같으면 기적만 하죠. 기적해봤자 그때만 헤헤거리고 또 우상 섬깁니다. 아예 밑바닥까지 와서 받쳐줘야 할 정도로 해야죠. 받쳐주려면 어지간한 선지자가 와가지고는 이거는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에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을 보낼 때, 점점 더 험한 꼴을 보는 종들을 보내는 거예요.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데,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종들을 보내어 좋게 이야기했는데 농부들이 때리고 죽이니까 또 더 많은 종을 보내는데 똑같이 때려죽여버려요. 마지막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제 아들을 보내면 공경하겠지. 천만의 말씀이죠. 아들 보내니까 이게 절호의 찬스라, 상속자만 죽이면 이 하늘나라는 우리 것이 된다. 이게 마지막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무리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게 하나님의 숨겨진 놀라운 전략이에요. 오히려 메시아를 죽인 죄마저 메시아가 용서를 해준다는 겁니다. 기가 차지 않습니까? 기가 찰 일 아닙니까?
이번 수련회를 하면서 여러분 들었죠? 베드로가 배신했다. 우리는 아직까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아직도 죄지을 수 있는 마일리지, 쿠폰이 많이 남아 있어요. 뭐 아무리 죄 지어도 배신까지 하겠어요? 근데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에요. 왜? 온전히 주님의 용서만 드러내주니까. 그럼 용서 드러내기 위해서 꼼수 써가지고 하고 싶은 짓 마음대로 하고 용서 드러냈다고, 그런 짓 하지 마세요. 항상 억지로 하면 안돼요.
자, 지금 제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 하는가 설명하는 겁니다. 언약의 역사대로 한다. 그게 뭐냐, 앞에 있는 언약과 뒤에 있는 언약은 미리 나와 있는 것이 아니고 앞에 있는 언약을 통해서, 충분히 그들이 앞에 있는 언약조차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무용지물 될 정도로 그들의 죄는 깊었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내고, 하지만, 그럴 줄 알고 두 번째 언약을 준비해가지고 또 그들을 건져냅니다. 이것을 충분하게 보여 주는 성경책이 바로 사사기죠. 새로운 사사들이 계속 투입됩니다. 근데 투입되는데, 그 투입되는 사사들이 갈수록 고생을 많이 해요. 처음의 사사는 사사가 죽는 일이 없어요.
근데 사사기 16장에 보면 삼손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주께서 어지간하면, 삼손이 여자를 세 명 밝혔거든요. 좀 드라마가 재미있으려면 삼손을 죽이지 말고, 주인공인데, 여자 세 명하고 잘 먹고 잘살았다. 이래야 좋은 드라마인데, 사사의 기능의 마지막은 결국은 죽지 아니하면 되는 일이 없구나! 라는 것을, 삼손이 마지막 사사로서 공개해버립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죽지 아니하면 니가 믿는 예수는 니하고 춤추려고 하는 예수가 아니라, 니가 헤헤거릴 때, 그 분은 헤헤거리는 너를 위해서 죽었다는 겁니다. 성령은 이 예수님의 죽음을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다가옴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불평과 불만, 우리의 짜증과 원망, 이런 것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마음가짐인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성령은 책망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오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 입만 떼면 불만, 불평하고 있는 우리를, 그것마저 받쳐주시는, 그냥 말만으로 받쳐주는 것이 아니고, 하다하다 이제는 예수님의 자기 목숨까지 받쳐주면서, 이래도 니가 천국 안 갈 인간이야? 이래서라도 보내고 말리라. 해서 자기 목숨을 걸고, 목숨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예수님의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 부활의 목숨가지고 우리를 풍선처럼 붕붕 뜨게 하는 겁니다. 풍선 생각하니까 터키의 관광지에 헬륨가스로 열기구 띄우는 것 있죠. 왜 그게 생각나느냐 하면 많이 죽기 때문에. 관광한답시고 올라가서 새벽에 해 뜨는 것 본다고 하다가 기구에 구멍 나서 죽었죠.
주께서 죽음의 권세마저 이겼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더 이상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헬륨가스처럼 아무리 해도 떠오르는 거예요. 죽음의 권세가 발목을 못 잡는 만큼의 능력이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의 풍선으로써, 예수님을 증거 하는 풍선으로써, 헬륨가스 들어있는 그런 열기구로써 우리는 알록달록하게 이 대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발은 땅에 닿지 않고, 우리의 목숨은 하늘에 있고. 이번 수련회 대전에서 하는데, 주제는 골로새서입니다.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에 있다.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그 말이 사람들한테 이해가 안돼요. 죽은 것 같으면 그 뒤에 말, 왜 권면할 필요가 있느냐? 이미 죽었는데, 죽은 사람한테 잔소리를 왜 하느냐 이 말이죠. 골로새서 3장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죽은 사람한테 아내 된 자여 남편을 공경하기를, 그런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아까 이야기했듯이 골로새서 3장하고 4장, 5장이 연결이 안돼요. 연결이.
연결 또 시켜드릴게요. 구약에서는 약속 못 지키니까 다시 다음 약속이 지켜줬지만, 해봐야 이걸 또 지키려고 해요. 그러나 신약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땅에서 죽고 하늘에서 살아있다는 모습이, 이 지상에서 어떤 모습이냐, 바로 어떤 일들을 해도 말씀이 완성된, 완성된 상태로써 살아가고 있는, 열기구 같은 모습으로, 말씀 자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이 모습이 주님이 주신 성령의 능력이다 이 말이죠.
성경해석은 약속 주고 또 그 다음에 약속이 왔을 때, 그 안에서 뭐가 발생된다고 했습니까? 죄가 발생되고, 이 죄에 대해서 약속으로 혜택을 입을 때, 입었으니까 사람들은 헤헤거리면서 또 다시 죄를 짓게 돼요. 처음에 아말렉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가지고 덤벼들면 적들이 물러갔잖아요. 그런데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언약궤를 들이대면 블레셋한테 이긴다고 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어떻게 되었어요? 언약궤도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죠. 보세요. 언약궤로 나가면, 민수기에 있어요. 언약궤가 진격하면 뭐든지 승리한다고 믿고 나갔는데, 언약궤 들고 나갔는데 패배했잖아요.
이게 무엇을 유발시킵니까? 이 언약이 종결된 언약이 아니고, 이 언약은 십자가를 향하여, 더 깊고 더 용서가 많은, 십자가를 닮은 언약으로 지금 진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약궤는 빼앗겼죠. 절망했습니다. 근데 그 언약궤가 돌아다니면서 혼자서 다곤 신상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손모가지 다 부러져가지고, 아침에 가보니까 언약궤는 멀쩡한데, 다곤 신상은 엎어져가지고 있는데, 모가지, 손모가지, 발모가지, 다 부숴져 있어요. 블레셋 사람들이 이것은 우리 신의 패배다. 졌다. 질 수밖에 없죠. 도핑해서 엉뚱한 약물 썼는데 이길 수가 있어요? 러시아 선수처럼 도핑 걸려가지고, 다곤 신상은, 이건 선수가 아니라 가짜 선수라는 겁니다. 진짜 선수는 언약궤밖에 없다 하고 블레셋이 돌려주려고 합니다.
돌려주려고 하는데, 돌려받는 사람들이 언약궤가 감당이 안 되어, 웃사는 만지다가 죽고 했죠.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이 이걸 안치를 했어요. 안치가 되면 이것이 성전입니다. 언약궤를 성전에 해놓으면 언약궤의 효력과 효과가 백성에게 해가지고 백성이 이방나라한테 이기고 평안을 획득한다. 이 성전 언약이 솔로몬까지 왔어요. 근데 솔로몬이 이방 섬겨 버리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중에 이 성전이 불타버리죠. 성전이 불타버린다고요. 성전이 불타니까 언약궤도 날라 갔죠. 그 다음에 많은 기구들 다 이방나라한테 뺏기죠. 나라 꼴 좋다. 뭘 어떻게 지켜주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 약속이 틀립니까? 아니. 약속이 틀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니가 생각하는 그 약속은 뒤에 숨어있었죠. 빵으로 예를 들게요. 빵이 있는데, 애들은 떡을 안 좋아하니까 떡을 놓았다 칩시다. 니 말 잘 들으면 떡 줄게.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난 떡 같으면 나 말 안 들을래. 떡 안 좋아해. 이런 다 말이죠. 그럼 그럴 줄 알고 뒤에 빵을 준비해놨지.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래 되면, 이 빵을 먹으려면 인간이 어느 정도 나빠야 하느냐 하면, 성경 읽어도 죄인이 되고, 십일조해도 죄인이 되고, 기도해도 죄인 되고, 전도해도 죄인 되고, 예배드려도 죄인 되고, 사마리아에서 예배드리느냐,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느냐, 어떤 장소도 구애 없이 양쪽 다 저주가 되고 죄가 될 때, 비로소 마지막 뭐가 등장한다? 모든 죄에 따라 등장하면서 용서는 뭐냐, 오직 십자가의 피만 용서되는, 마지막 준비된 언약이 나오는데 그 언약이 뭐냐, 그게 바로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새 언약, 용어가 신선하죠. 하다하다 안 돼서 주는 언약이 아니고 제대로 된 언약이고, 나머지기는 새 언약을 위한 모형과 그림자, 그게 가짜였다는 겁니다. 그게 실체가 아니었다. 그럼 진짜 새 언약은 진짜 새 언약이에요. 그리고 갑자기 졸지에 처음 나온 언약들은 무슨 언약이 됩니까? 이것이 New가 돼버리면 저쪽은 Old가 되죠. 옛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이 합쳐서 성경이 되잖아요. 이게 바로 성경해석이에요.
그래서 성경해석에 반드시 뭐가 필요합니까? 죄인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은 죄를 지어야 해요. 문제는 죄를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죄를 지을 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제대로 죄를 짓는 대표자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살해한 바리새인들이 인류를 대표해서 이것이 죄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줘요. 뭐냐 하면 남한테 나쁜 짓 하는 것은 그게 제대로 된 죄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안 믿는 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게, 제대로 된 죄에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되지.” 이렇게 나와요. 여러분,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이런 뜻이에요. “당신 없으면 나도 안 살래.” 뭐 호의를 베풀고 친절을 베푸는 이런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이유는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당신한테 있습니다.
이건 어떤 이야기인데요. 터널이 있는데 터널에 한 남자가 갇혔어요. 처음에는 일주일만 있으면 구출한다고 했는데, 갇힌지 20일 30일 지나도 잘못 뚫어서 구출이 안돼요. 그래서 이제는 마지막 휴대폰 배터리로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터널 바깥에 있는 아내에게, 하정우가 배두나한테 이야기합니다. 아이 하나 있는데. 나는 여기서 죽으니까 너는 나 잊어버리고, 니는 딸하고 잘살아라. 이렇게 하니까 아내 배두나가 하는 말이, 당신 죽고 난 뒤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야. 당신 죽으면 곧 내가 죽는 것이다 이 말이죠. 이게 뭐냐, 사랑의 관계에요.
예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당신이 나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거에요. 당신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사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그게 주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이게 성령이 아니고서야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이 안 오면 맨날 예수님한테 빼먹을 생각만 하고 이용할 생각만 하죠.
그래서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대 있음에, 그대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구차하게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해석을 못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뭐가 ‘주’고 뭐가 ‘부’인이지를 분간을 못해요. 안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예수 믿으라고 하면 자기가 주가 되고 예수는 그냥 옵션으로 믿는 것처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주가 되고 우리는 예수님에 의하면 주변이 되는 거예요. 반찬. 스끼다시. 회 따로 있고 우리는 스끼다시에요. 저 같은 경우는 회는 안 먹고 스끼다시만 먹는데.
그게 피조물의 존재이유입니다. 존재의 이유 아시죠? 조그만 기다려줘 달려 갈 테니 하는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 말고. 존재의 이유는 몰라요. 누가 와야 해요? 마지막에 우리가 더럽게 죄 짓고, 진짜 극단까지 내려갔을 때 등장하신, 그 예수그리스도가 그 죄마저 의로 바꾸기 위해서 자기 백성이든 누구든 간에, 죄가 끝까지 갈 때까지 가야 되는데, 죄의 마지막이 뭐냐,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는 게, 그게 바로 가장 악마적인 고백입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 이것이 마귀의 마지막 카드입니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 참 우리는 이것이 굉장히 편하죠. 왜냐하면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는 그 멘트를 구태여 안 날려도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러워요. 내추럴해요. 나는 나로 인하여 사는 거. 아이구, 나만 편하면 됐지. 이게 아주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다니까요. 근데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이고만 짜증나! 부자연스러워. 해보지 않은 일이라 어색해. 몸에 안 맞는 옷이에요.
성령이 와서 맴매해야 그때서 주여, 제가 원하는 제 모습이 제 모습이 아니었군요. 제가 가짜군요. 그때서 알지만 뭐 돌아서면 뭐 몇 초 안 지나서 헤헤거리면서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 이게 원래 자연스럽게 돼버렸어요. 그래서 나로 인하여 산다 할 때 이 ‘나’가 단수, 1인칭이잖아요. 이게 복수가 되면 ‘우리’가 되죠.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바로 우리 때문에 망한 거예요. 우리 이스라엘.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망한 거예요. 우리라고 해도 딱 쪼개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 선지자 주신 것도 여호와 있는 것도 전부 다 누구 잘 되기 위해서 존재 합니까? 이스라엘 잘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육적인 모습이에요.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이 여호와 축제라고 즐길 때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보내가지고 너희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위해서 존재해야 될 사람이지 너희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해서 생겨진 제도가 있었으니 그 제도가 뭐냐 하면 제사장 제도에요.
끝으로 성경 한 구절 보고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민수기 35장 33절. 그거 한 번 읽고 제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한 것 총 복습하는 의미에서 질문을 던질 테니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 민수기 35장 33절,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자, 질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용서하면 되지, 왜 이런 조항을 왜 주십니까? 애들아! 죄 졌지? 예. 죄졌습니다. 용서해줄게. 이러면 깔끔하게 일이 끝났잖아요. 그런데 왜 땅에 피를 흘리면, 그 흘린 자의 피가 아니면 땅은 용서가 안 된다, 라는 이런 조항이 연결고리에서, 왜 연결고리에서 왜 이 말씀이 등장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 그게 질문입니다.
방금 전체적으로, 대략적으로 한 게 뭡니까? “여러분, 죄지었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이 다 죄 지을 줄 알고 준비된 언약가지고 용서해주십니다. 그게 다가 아니거든요. 여러분이 또 범죄 합니다. 하지만 또 준비해놨습니다. 또 죄 지어요. 하지만 새로운 언약,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방금 제가 한 것처럼 쉽게 하면 되는데. 그렇다면 이 조항은 필요 없는 조항이 된다 이 말이죠. 질문한 제가 나빠요. 제가 못 돼서 그래요.
뭐냐 하면, 제가 원하는 정답은 이렇습니다. 이 땅이 우리 이스라엘을 위한 땅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만약에 이 땅이 이스라엘을 위한 땅이라면 죄 졌어요. 용서해주세요. 이래되면 주의 모든 말씀이 결국 우리 이스라엘이 잘 되는 쪽으로, 이게 단수가 돼버리면, 나는 누굴 위해서?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지. 그것을 옹호해주는 셈이 되잖아요. 그래서 이탈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 방에서 이탈이 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근데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니까, 아무리 이스라엘이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이스라엘은 누구를 위해서?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걸 땅이 지적한 거예요. 나는 너희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땅의 거룩은 양보 못한다. 왜? 이 땅은 너희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약속된 그 분의 것이기 때문에. 그걸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니 몸은 너를 위한 몸이 아니고. 뭐 나는 나 되는 대로 살지. 아니, 니 몸은 주님 기뻐하는 몸으로 만들었지. 니 좋아라고 준 몸이 아니다.
그래서 언약이나 모든 말씀은 예수그리스도 좋아라고 주신 말씀이지, 우리가 기대하는 우리 열망을 다 충족시켜 주신 말씀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 앞에서 그들은 파산한 겁니다. 그들은 선택했어야 돼요. 주를 사랑할 것인가? 아까 사랑 개념 들었죠? 당신 때문에 내가 있다는 것. 주를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평소에 하는 행세대로 나를 사랑할 것인가?
강도는 알았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온 것은 주님과 세트가 돼가지고 주님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동안 강도짓을 했음을 알기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저를 생각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단독적으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은 주님을 위한 말씀인데, 자꾸 우리는 죄악 된 본성 때문에 내 이익을 위해서 주신 말씀인줄 알고 오해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것마저 주께서 다 아시고 십자가의 능력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주님만 저희들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