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2장29절(들림)161115a-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9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갑자기 음향효과가 들어갔죠. 28절에 보면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음향효과가 주어지는 겁니다. 계속해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이게 누구이야기냐 하면은,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하고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시는 겁니다. 마치 변화산에서 하신 것처럼,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17:5).
주고받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예수님만 알아들었고 다른 인간들은 못 알아들었죠. 29절에 보면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레가 울었다고도 하며” 어떤 뭐 천둥치는 소리처럼 그렇게 들렸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처음 찾아왔을 때도 같은 일행들은 그것을 구체적인 사람말로 듣지 아니하고 역시 우레로 들었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것은 말의 내용과 형식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보통 그냥 말이면 말이지, 말의 내용 따로 형식 따로 따진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의아해할 거예요.
말을 딱 들으면 내용을 아는 건데, 그거 뭘 따지느냐? 이렇게 하지만, 보통 남들이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 알겠다든지, 밥 먹으라고 이야기하면 아, 이거는 밥 먹어야 되는 이야기라든지, 근데 이거는 내용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형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말의 내용은 이게 미지수에요. 미지수입니다. 몰라요. 말의 내용을 몰라요. 왜냐하면 말의 형식은 이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입니다.
말의 형식이라는 말은 기역, 니은, 디귿, 리을...글자 모양을 말의 형식이라고 하지 않아요. 여기서 형식이라는 말은 모든 인간들이 다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사항 중에서 필요한 말들을 골라서 사용합니다. 그냥 고르는 것이 아니고 배열을 해요. 집에 간다. 아, 뭐가 빠졌구나? 아, 내가 집에 간다. 나를 집어넣어야지. 내가(주어), 집에(목적어), 간다(동사). 한국말은 이렇게 결속이 되고 결합이 됩니다.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죠.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고 한국에서는 그렇게 결속이 돼요. 이게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 다르니까.
어쨌든 결합을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던 간에 익히 아는 내용입니다. 어린애가 말을 할 때, 엄마는 그 어린애의 말을 무시해버립니다. 지금 통용되는 말들이 아니기 때문에. 말들이 아닌데, 엄마는 그 애를 자기 세계의 그 공통된 구조 속에 집어넣기 위해서 아이의 말에다가 엄마가 일방적으로 의미를 부여해버려요. “뭐? 밥 달라 그 말이지? 아이구 엄마! 엄마! 하는 것 봐.” 애가 입만 벌렸을 뿐인데, 엄마! 엄마! 한다고 일방적으로 계속해서, 반복해서 양육을 해버리면, 애는 엄마가 요구하는 형식에 맞춰줘야 자기 욕구에 만족스럽게 해준다는 것에 감을 잡게 돼요. 뭐, 아무 소리 하지 않았는데, 엄마가 “그래. 물 달라는 말이지?” 하게 되면, 애는 ‘아, 물 달라고 할 때는 이런 말을 사용할 때 물을 주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뭐냐, 내용은 어디에 가려져 있느냐 하면 인간들이 익히 아는 의미집단에 인간의 말이 가려져요. 가려져버립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둘로 나눌 수 있는데요. 오늘 강의 좀 어렵다만, 할 수 없어요. 뜻 없다와 무의하다로 이렇게 나눕니다. 뜻 없다./무의미하다. 뜻이 없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냥 중얼중얼하는 것. 뜻이 없어요. 무의미한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어젯밤에 귀신 꿈꿨어! 하는 이런 것들. 귀신이 있어야죠. 귀신 없잖아요?
보편적인 인간세계에서는 귀신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지만, 실체하고는 일대일 대응이 안 되잖아요. 이건 귀신 없는 거예요. 그럼 귀신 꿈꿨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래? 하고 무시하죠. 오빠! 귀신 꿈꿔쪄~! 하면 무시하죠. 뭐 이뻐해달라고 하거나 귀여워해달라고 하는 그런 뜻이구나. 그냥 그런 뜻으로 대충 넘어가버리죠. 귀신의 키가 몇 센티미터 되느냐? 이런 것 안 묻죠. “아이구, 우리 애기!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렇게 대응한다 이 말이죠. 그리고 뿔이 세 개 있는 암소를 봤다. 이런 것 전부 다 의미 없는 것이죠. 실체가 없으니까. 뭐 용을 봤다든지, 그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의미한 거예요.
이제 뜻 없다는 것과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시겠죠. 중얼중얼하는 것은, 저건 뭐 헛소리도 아니고 잠꼬대도 아니고 그냥 뜻이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이 없는 것이냐, 아니면 무의미한 것이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은 무의미해요. 무의미합니다. 분명히 일반 그 당시 사람들의 말씀으로 말을 하되, 기존에 있는 의미를 다 동원해도 예수님 본뜻과 이게 결합이 안 돼요.
그 이유가 여기 요한복음 12장 38절에 나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게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제가 다시 읽어볼게요.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이래 되어 있는데, 제가 오늘 강의 핵심을 바로 여기에다 둡니다. 도대체 우리가 뭘 믿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뭘 믿느냐? 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죠.
그럼 다가가서 물어봅니다. 뭘 믿습니까? 어떤 것 믿습니까? 그러면 납득이 되는 것을 믿어요. 그럼 이것은 언어의 형식이 돼버리는 겁니다. 아까 언어의 내용은 언어의 형식에 의해서 가려져있다고 했죠. 언어의 형식이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어릴 때부터 같은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익히 알고 있는 의미들의 집합이 형식이 되는 겁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애한테 영어이야기하면 안 되잖아요. 영어이야기하면 안 되죠.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무의미함도 아니고 뜻 없음도 아니에요. 다만 살아온 환경이 한국이라서 그렇죠. 예를 들어서 미국에서 한 일 년만 살아도 엄마보다 애들이 영어 더 잘해요. 욕도 막 할 줄 알 건데.
언어의 형식이라는 것은 그 언어가 적용되고 통용되는 그 집단이 있어요. 원래 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공통된 언어가 소통되는 집단을 민족이라고 하는 겁니다. 유럽에서 민족들이 나누어질 때도 마찬가지고. 물론 그게 조건의 다는 아니에요. 그래서 흔히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국민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청와대가 왜 소통이 안 되느냐? 그거는 같은 이익집단들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형식은 같아도 내용면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그 의미를 거기서 거부하기 때문에 그런 거죠. 거부하잖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뭘 믿느냐 하는 겁니다. 뭘 믿느냐의 정답은 내가 좋기 위해서 뭘 믿을 거냐? 이래 되는 거죠. 내가 좋아하기 위해서. 유튜브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마는, 하늘이 주는 구원을 우리 인간들이 안 받습니다. 왜냐하면 아무짝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은 소용이 없고 내가 답답할 때 내가 찾은 구원만, 사람들은 그걸 근거해서 구원해달라고 이렇게 나와요. 그럼 그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믿으세요. 그럼 됩니다.” “그럼 믿을게요.” 이래 되죠. “구원해주세요. 믿을게요.”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있던 사회가 그 사회에요.
유대인들이 그냥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말의 형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아람어와 또는 헬라어를 썼던 사람들이죠. 헬라어는 이방인들이 썼죠.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 우리가 같은 아람어 사용하고 있으니까 그냥 사람말로 이야기해주시면 듣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우레나 이렇게 천둥 칠 이유가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주님이 찾아오실 때 같은 일행들이,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데, 일행들은 그걸 우레 치는 소리로 들었죠.
오늘 본문 요한복음 12장 2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이야기하면 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우레 치는,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죠.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이 아버지의 말을 알아들어서 이렇게 한다. 이렇게 그냥 정답부터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그 현장에 있다고 칩시다. 현장에 있다고 쳐버리면 우리는 아버지와 예수님이 아는 이야기의 내용을 우리가 알까요? 모를까요? 천둥치는 소리 말고 무슨 소리를 알겠어요? 몰라요. 그 모르는 것을 말의 형식이라고 했죠. 모르는데 말의 내용으로 예수님께서 풀이해주시니까, ‘아, 그런 뜻이었었어.’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천둥소리가 개입한 이유는 아까 요한복음 12장 38절에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이사야 53장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39절에 보면 이사야 6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구약을 볼 때, 1장, 2장, 3장...이렇게 안 보죠. 53장이야기를 끄집어내고 그 다음에 6장이야기를 뒤에 배치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 보기에는 “이거 문장나누기 반칙이 아닙니까? 예수님 그렇게 하시다가는 국어 빵점 맞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에요.” 라고 가르치고 싶지만,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게 들어가서 다시 예수님에게서 나와서 정리정돈을 하는 것이 정답이거든요.
모든 말씀은 일단 예수님에게 와야 돼요. 예수님에게 다 수용이 돼야 돼요. 수용이 되어서 그 진위와 더불어서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정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구약을 보는 것이 제대로 본 거예요? 잘못 본 거예요? 잘못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구약을 해석할 해석자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 그들이 구약을 해석할 때 그들의 해석이 그냥 잘못되었다 하지 마시고, 그들이 구약을 나름대로 해석할 때 어떤 근거에 의해서 조립하듯이 해석을 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하거든요.
그들이 구약을 해석할 때 그들은 역사적 지평을 가지고, 역사적 호라이즌horizon, 지평을 가지고 그 안에서 해석을 한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처음에 나온 말씀이 원인이고,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은 앞에 원인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하는 결과로서의 말씀이 주어졌다. 이렇게 해석한 겁니다. 그렇게 해석하니까 예수님께서 그럴 줄 알고 “그럼 내가 문제 내겠다.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다윗의 주가 되느냐?” 라고 문제를 던졌잖아요. 그걸 유대인들이 풀어냈습니까? 못 풀어냈습니까? 못 풀죠. 풀 수가 없어요.
어떻게 다윗의 손자가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느냐,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혈통을 굉장히 중요시하거든요. 혈통을. 아브라함 혈통을 중요시한다 이 말이죠. “우리는 아브라함 혈통이기 때문에 죄 진 적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복의 자손이다. 아브라함 복은 우리가 싫든 좋든 복은 내려오게 되어 있고, 그건 우리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인데, 우리가 아브라함 혈통이라면 우리는 때려죽여도 복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의 종이 된 적 없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에서 그렇게 대들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노선을 바꿔버렸습니다. “너희 애비는 마귀인데? 너희 애비는 마귄데?” 자, 이 소리 듣고 유대인들은 해석에 대해서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아브라함 혈통이 되었던 그 노선이 어떻게 해서 자기 노선이 악마의 노선으로 언제 이게 바뀌게 되었는지를, 바뀌게 된 그 계기를 찾을 길이 없어요. 찾을 수가 없다고요. 태어난 대로 살았을 뿐인데, 언제 마귀하고 협상하고 마귀하고 거래한 적이 없어요. 태어난 곳이 유대사회고, 거기서 시킨 대로 여호와 교훈을 받았고, 택한 백성이라고 태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했고, 안식일을 꼬박꼬박 지켰고, 하자 없어요. 그 중간에 엉뚱한 짓 한 적 없습니다. 모태신앙이에요. 모태신앙이고 허튼 짓을 한 적이 없다니까요.
아버지 엄마 목사고, 자기는 목사의 사모고, 집안이 다 목사 가정이고. 어떻게 딴 쪽으로 눈을 돌린 새도 없었는데 어떻게 우리 아비가 마귀가 돼요? 그것은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가서는 해답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노선을?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지 말고, 미래부터 가야 해요. 미래, 그것도 아무 미래가 아니고. 과거에서 흘러온 미래가 아니고. 혈통과 끊어진 미래. 혈통에서 미래는 따로 있어요. 과거부터 와서 현재를 거쳐서 가는 미래는 따로 있고, 혈통과 뭔가 도중에 끊어진, 노선이 하나 이렇게 곁가지로 갈라진 미래가 있을 거예요.
그 갈라진 미래가 바로 인간의 육 안에 하나님의 독생자, 새로운 노선, 새로운 곁가지가 하나 생기면서 그것이 기존의 멸망의 미래가 아니고, 구원의 미래가 선점되어 있다면, 그것을 먼저 염두에 둔다면, 그 미래로부터 거꾸로 이렇게 내려오는 거예요. 거꾸로 내려오는 거예요. 여러분, 파친코 본 적 있습니까? 일명 빠칭코. 일본사람들이 하는데, 밑에 핸들을 확 잡아 땡기면 구슬이 튕겨서 확 올라갔다가 죽 내려와 가지고 뭐 하나 걸리면 돈 많이 따는 것을 파친코라고 합니다. 구슬의 중력에 의해서 행운을 찾는 것. 탁 땡겨 버리면 구슬이 꼭대기로 올라가요. 군데군데 장애물이 있고 그 장애물을 통과해서 빠진다 이 말이죠. 자 올라갈 때는 중력에 반해서 올라가죠. 내려올 때는 그냥 중력에 의해서 내려오죠.
미래가, 과거, 현재, 미래로 해서 미래로 가고, 이쪽 미래에 두 가지가 있다 이 말이죠. 갈라졌으니까. 천국 가는 미래에서 파친코 구슬처럼 내려오듯이 이렇게 쏟아지게 되면, 쏟아진 그것이 구약에 대한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약 해석이에요. 그 구약 해석을 미래의 주님이 아닌 이상은 누가 구약 해석을 할 수 있겠어요? 아무도 구약 해석을 못하는 겁니다. 그냥 해석을 못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해석을 못한다가 아니고 꼭 우리 해석이 옳다고 우기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지금 뭐가 문제냐 하면, 제가 아까 했죠. 도대체 우리가 지금 뭘 믿느냐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믿습니다.”가 없다니까요. 우리는 뭔가 믿어요. 그런데 우리가 뭔가 믿는 그 믿음이, 내가 구원되는데, 소용되는 것을 믿어요. 그런데 정작 주님께서 오신 구원을 우리가 왜 거부하느냐 하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니까요. 내 구원받는데. 왜 소용이 없을까요? 이미 내가 원하는 구원을 내 안에 선점해놨어요. 선점. 내가 먼저 점령을 했거든요. 교회 가서 세례 받고 하는 이런 것들이 되어 있어요. 이런 것들이. 헌금 하면 복주고, 한 번씩 빠지면 교인 더 오고. 띠가 좋으면 복 받고, 혈액형 A형 같으면 어떻고 저렇고.
이미 우리가 미래를 예측 하는데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이미 우리 안을 선점한, 점령을 하고 있다니까요. 점령을. 그런데 일시에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고 그걸 다 어떻게 끄집어내요? 열심히 교회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걸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딴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 이딴 거 다 헛짓이라고 어떻게 그걸 인정을 해요? 긴긴 세월이 아까운데. 머리에 물 뿌린 것이 아까운데. 성찬식 받기 전에 조신하게, 나쁜 짓 안하고 받았던 그 성만찬이 아까운데. 교회 꽃꽂이 한 것도 아깝고, 성가대 봉사하고 주일학교 봉사한 것도 아까워 죽겠는데. 철야한다고 커피 값만 나가고. 방언한 것도 얼마나 아깝다고요. 방언한 것도. 방언하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두 달 만에 방언했는데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아니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그걸 어떻게 포기를 하느냐 말이죠. 그걸 어떻게 포기해요?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게 내 구원에 소용이 있고 필요하다고 누가 생각했어요? 내가 그렇게 생각했고, 아까 말의 형식, 모든 자들이, 모든 교회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왔잖아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말의 내용이 아니고 말의 형식이라고 했죠. 말의 형식. 다시 이야기합니다. 말의 형식이란 그 시대의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의견들, 견해들의 집대성이 바로 말로 표현될 때, 말의 형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글자, 문자를 형식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말의 내용은 형식에 의해서 가려져서, 그 의미가 가려져서 모른다고 했죠. 모르는 내용은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뭐가 없다? 뜻 없다. 또 한 가지는 무의미하다.
이 둘의 의미가 달라요. 뜻 없다는 횡설수설. 무의미하다는 분명히 한국말인데 의미를 캐려고 하니까 앞뒤가 배열이 안 맞아요. 배열이. 이쪽에 있는 말의 형식에서는 주어+목적어+동사하면 상대방이 딱딱 알아차리고 딱딱 맞춰줘요. “엄마! 나는 배고파.” “알았어. 밥 줄게.” 이렇게 딱딱 맞아 떨어진다고요. “엄마 배고파.” “밥 줄게.” 이렇게 되는데, 근데 애가 툭 튀어나오는 말이 “샤론의 백합화!” 이렇게 하면 “샤론의 백합화? 왜 갑자기 산 이야기하고 백합이야기를 하지? 어? 그래. 꽃 따줄게.” “엄마! 그런 뜻 아니야!” “그럼 뭔 뜻이야?” “배고프다는 뜻이야.” “그럼 말을 똑바로 해야지! 똑바로! 왜 샤론의 백합화가 왜 나와? 말을 똑바로 해야지! 내가 니 말을 못 믿잖아.” 니가 하는 말을 믿지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왜?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요.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12장 28절에서, 그 무의미한 것, 말의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뭐가 울었다고 했어요? 우레가 울었죠. 여기 29절에 보면 곁에 선 사람들이 듣고 우레가 울었다. 우레가 울었다. 말의 내용과 형식을 구분한 사람은 비슈켄슈타인입니다. 현대분석철학의 시초. 그 사람은 인간의 모든 말은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말이 의미가 있는 것은 니들 게임에서나 의미가 있다. 너희들이 게임을 가동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그때의 의미이기 때문에, 너희들의 의미는 너희들끼리만 의미가 있지, 그 게임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이게 무의미하거나 뜻이 없는 것이 돼요.
예를 들면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 보고 뭐라고 합니까? 북한의 김정은을 언론매체에서 뭐라고 합니까? 최고 존엄성이라고 하죠. 김정은에게 이렇게 자꾸 시비를 걸면 너희들이 최고 존엄성을 건드렸다고 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김정은을 최고 존엄성으로 봅니까? 재벌 3세로 봅니까? 이렇게 비룡그룹에 앉아있는 것처럼 철딱서니 없는 재벌 3세쯤 돼 보이죠. “어이가 없네?” 하잖아요. 유아인처럼. 굉장히 까불대죠. 무슨 최고 존엄성이 그런 존엄성이 있습니까? 그럼 뭡니까? 의미가 없죠. 한국 사람들한테는. 북한한테는 최고 존엄자고. 이쪽에서는 의미가 없잖아요.
알라를 건드렸다? 이스라엘에서 난리가 나죠. 진짜 현상금 걸고 죽이기 위해서 그 나라에 침투까지 하잖아요. 그런데 그 알라신이 다른 사람한테는 뭡니까? 그게 얼라신이지 그게 신이에요? 마호매트, 이상한 사이비가 조장해낸 몰몬교하고 비슷한 것 아닙니까? 그런 신은 없어요. 유목민 베두인들이 지어낸 신이죠.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같으면 삼위일체는 건드리면 안 된다고, 삼위일체 건드리면 무조건 이단이라고 하고 지옥 간다고 하는데, 성철스님한테는, 불교신자한테는 어떻습니까? 삼위일체? 뭐 영어강좌에 그런 삼위일체가 있죠. 문법, 단어, 발음, 뭐 이런 삼위일체는 봤지만. 또 건강의 삼위일체, 다이어트의 삼위일체 그런 것은 많이 들었지만. 그 삼위일체 그거 뭔데? 아무것도 아니죠.
그래서 비슈켄슈타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노는 게임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게임이고, 자기들끼리 그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진리라는 것은 자기들끼리 진리이기 때문에, 달리 말해서 진리는 없다가 되는 겁니다. 진리 있는데 모른다고 하면 안돼요. 진리는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있다, 없다는 말의 자체가 의미가 있으려면 언어체계의 바깥으로 나가면 안돼요. 일대일 실체가 대응이 되는 것만 있다, 없다가 돼요. 그래서 종교적인 말은 비슈켄슈타인에게서는 무의미한 말이 돼요. 없는 말이 아니고 무의미한 말이 돼요. 그래서 신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조차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자, 진도 나가봅시다. 요한복음 12장 38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런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누가 거론했죠? 예수님이 거론했잖아요. 예수님이 거론한 이유가 뭘 풀이해줬느냐 하면, 우레가 난 소리를 풀이해줬는데, 내가 하늘에서 이미 영광 받았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풀이한 것을, 도대체 어떤 내용을 풀이했기에 그 당시 제자들이 아무리 믿고자 하여도 믿지 못할 내용이었느냐, 그거는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광과 죽음(살해당함)을 일치시켜서 그래요. 이 땅에서 살해당한 것을 가지고 하늘에서 아버지는 뭐라고 했습니까? 영광이라고 했어요. 이걸 요한복음 1장에서 보면 그걸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못 믿는 이유가 이미 나름대로의, 영광은 이러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이미 선점해서 믿은 것이 있어요.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그러한 원칙이 있어요.
신명기 28장에 의해서, 니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니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아니하고, 니가 군에 가도 후방에 빠지고 전방으로 빠지지 아니하고, 뭐 그런 것이 있어요. 니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되고,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다 그런 게 있다 이 말이죠. 그걸 이미 선점, 이미 그걸 믿는다고 하는 확보한 믿음이 있죠. 근데 그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그 해석을 왜 잘못한 거라고 했습니까? 뭘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이에요?
갈라진 미래에서 나온 예수그리스도의 해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이 말이죠. 문자로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는데, 그 외에 달리 어떻게 설명하느냐고 하는데, 그걸 문자로 볼 때 문자로 본다는 그 의미가 어느 집단에서 나온 의미에요?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들끼리의 집단에서 나온 의미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인간들에게 있어서의 가장 잘 된 것은 생명나무 따먹는 것이고, 가장 못된 것은 뭡니까? 결국은 누구나 갈 수밖에 없는 죽음이잖아요.
학교에서 장래희망 쓰라고 하는데, 초등학교 2학년 애가 죽음이라고 이렇게 쓰는 것 봤어요? 가정통신란에 너희 집 가훈을 적어오라고 하면 가훈을 “죽자!” 이런 가정이 있습니까? 근데 그런 가정이 있긴 있었어요. 옛날 우리 집에서. 박사초등학교에서 가훈 써오라고 했는데, 그래서 제가 아버지 입장에서 제 아내하고 이야기했죠. 가훈 뭐 말씀대로 해야지. 죽자! 애가 그걸 듣는지 안 듣는지 모르고 우리끼리 이야기했어요. 근데 애가 그걸 옆에서 들었던 모양이라. 그래서 너희 집 가훈이 뭐냐고 하니까 “죽자!”라고 했대요.
자살하면 영광이 안 됩니다. 이 ‘죽자’가 영광이 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비로소 밝혀진 사항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영광일까요? 아벨이 영광일까요? 어느 것이 하나님께서 영광 받았습니까? 아벨이죠. 바로 그 아벨노선이 스가랴에서 어디로 이어집니까? 예수그리스도로 이어져서 어디로 갑니까? 하늘나라로 가잖아요. 그 노선이 하늘나라로 간다고요. 그러니까 가인은 어떻게 돼요? 가인은 죽지도 안 해. 번창해요. 그게 얼마나 사람들에게 영광으로 해석되겠습니까? 가게가 번창하고, 사업이 번창하고, 교회가 번창하고, 선교단체도 번창하고, 국가가 번창하고.
번창하고, 번창하고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이해합니까? 그걸 하나님께 영광으로 이해하잖아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다른 나라는 그냥 인간들끼리만 있지만 이스라엘은 누가 동행했습니까? 예수님의 영을 가진 선지자가 동행했잖아요. 그럼 선지자는 어디와 연계되어 있느냐 하면, 장차 오실 메시아와 연계되어 있죠. 그러면 선지자의 의견과 기존의 이 나라를 지켜야 되겠다는 사람들 의견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완전히 다르죠. 다르니까 선지자들은 순교와 고난과 죽음과 학대와 핍박으로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0-12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내 복음과 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선지자들도 이와 같았느니라” 선지자들도. 그게 팔복입니다. 복 받는 방법은 뭐냐,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복음을 위하여, 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게 되거든 그냥 땡잡은 줄 알아라. 어디서 그런 복을 얻겠느냐?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니가 어디서 그런 복을 얻겠는가? 제가 쉽게 이야기하면 니가 어디서 예수님과 같은 노선에서 살겠느냐?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니가 어디서 같은 지역, 같은 길을 갈 수 있겠느냐? 이런 뜻이에요.
스데반 집사님이 영광을 어떻게 돌렸습니까? 돌에 맞아 죽어서 영광 돌렸잖아요. 근데 예수님께서 반가워서 벌떡 일어나 스데반 집사님을 안아줬습니다. 거지나사로도 마찬가지고. 물론 비유지만. 독생자 영광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와서 내가 죽는 것이 독생자 영광이고 너희들이 사는 것은 영광이 아니야.” 라고 독생자 영광을 눈앞에 딱 해가지고 어느 쪽을 선택할래? 이렇게 하는 것이 독생자의 영광이 아니에요. 독생자 영광은 우리한테 선택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독생자의 영광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나쁜 역할을 필히 해야 해요.
나쁜 역할을 필히 거기다가 가담을 해야 된다는 말은 우리는 철저하게 무슨 영광을 고수해야 된다? 바로 우리 아비인 악마가 요구했던 그 영광, 세상 영광, 세상에 그야말로 잘 먹고 잘 살고 잘 되는 그 영광을 버리지 말고, 놓치지 않을 거예요~하는 것처럼 꼭 쥐고, 그 영광을 그렇게 고수할 때, 비로소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해당할 수 있는 겁니다. 살해당하는데 성공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주일 낮에 설교했잖아요. 사탄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사탄의 종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용서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지를 못해요.
사탄의 종이 될 때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용서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십자가의 그 용서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더 좋은 것이 없다는 말은 나한테 이 땅에서 어떤 굴욕적이고 모멸적인 일이 들이닥치더라도 그딴 거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신경 쓸 이유도 없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고민, 고민할 이유도 없는 겁니다. 나이 뭐 50살이 됐는데 결혼도 못하고 하는 그런 것도 고민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 나는 몸이 왜 이리 아프고, 가슴 이쪽은 왜 이리 아픈지, 그런 것 때문에 걱정할 이유도 없어요.
그러면 그 말을 바꿔서 이야기하면, 나는 이 가슴 쪽이 아파가지고 늘 주님 앞에 고민되고 원망스럽다는 이 말은, 그렇게 살아줘야 주님은 나에게 아벨이 되고 나는 가인이 되는 겁니다. 내가 그 분을 내 관심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내 이름으로 예수님이 요구하는 그 구원은 내게 소용없는 구원이라고 내가 강력하게 밀쳐버리는 거예요. “저리가세요!” “가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저리가!” 라고 하겠죠.
“나는 이 딴 것 달라고 한 적 없다. 이거 말고 내가 원하는 영광, 내가 납득이 되고 내가 이해가 되는 그러한 영광스러움을 달란 말이야.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전도하라고 하면 전도하고, 헌금하라고 하면 헌금하고, 십일조 하라고 하면 십일조하고, 다 할 테니까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달란 말이야.” 라고 이렇게 우리는 요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그렇게 좀 사세요. 그렇게 사셔야 돼요.
그렇게 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바로 38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할 때에, “저요!” 라고 손들지 마세요. 이거는 손들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거는 손들 위인이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2장 40절 한 번 봅시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갑자기 조용하네. 제가 할게요.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주께서 꼭 그렇게 하십니다.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소극적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진짜 말려가면서도 꼭 이걸 성사시키는 주체자가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필히 사탄의 종이 되어야 하고 절대로 우리는 신자 되면 안 되는 거예요. 신자 안 되는 방법을 이야기해줄까요? 신자 안 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교회나가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내가 원했던 나의 구원도 거기에 있고, 나의 소망과 나의 믿음과 나의 사랑도 다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나가면 이런 소리 듣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런 소리가 교회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 나가고 싶어 해요. 그 사랑을 따내야 할 텐데. 내 거로 만들어야 될 텐데. 그래서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은, 이거는 죽도 밥도 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좀 깨우친 대표자들이 교회에 나가는 거예요. 뭐 사업이 망했다든지, 집안에 우환이 있다든지 해가지고 그걸 계기로 어릴 때부터 가정이 기독교 가정이라서 교회 가게 되는 겁니다.
거기 가서 우리는 뭘 발견하느냐 하면, ‘아, 나한테 이런 희망과 이런 영광을 내가 원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그 교회에 가서 만끽해야 돼요. 또 만끽하면서 좋은 점이 뭐냐 하면 그 목사들이 딱딱 성경구절을 들이대니까, 정당화를 부여하니까, 세상에 이거는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성경말씀 약속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래 나오니까, 거기서 안 믿는다고 할 수 없고 “예. 믿쑵니다.” 할 수밖에 없잖아요.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 쟁반에 보면 평소에 내가 원했던 것, 평소에 좋아했던 것을 다 줘요.
지난 주 토요일에 결혼식이 있어서 금요일에 강의를 못 올리고 토요일에 올렸는데, 토요일에 결혼식이 있어서 갔었습니다. 갔는데, 우리 처가 집안 결혼식인데, 하여튼 좋다는 축복은 거기다가 다 퍼부어놨어요. 자녀 낳게 해주시고, 그 자리에요, 결혼 한지 몇 년 지났는데도 임신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해요. 요새는 특별히 결혼해도 임신이 잘 안돼요. 근데 그저 결혼하자마자 자식 잘 낳게 해주시고, 그리고 시어머니 잘 섬기게 해주시고, 그저 교회에 큰 일꾼이 되게 해주시고, 이 나라 민족의 큰 영웅 되게 해주시고, 그러니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뭐가 없느냐 하면 죄인인데 회개할 거리를 주지를 않아요. 회개할 거리를.
회개할 거리를 안 줬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회개할 거리가 없으니까 죄인이 아니죠. 죄인이 아니니까 무엇이 들어올 기회를 놓쳐버렸어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그걸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차단시켜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들과 생각하는 예수는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순풍순풍 애 잘 놓고, 직장에서 승진 빨리하고, 시어머니 잘 모시고, 가정 행복하고, 사도바울은 결혼도 안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주례했으면 뭐라고 했겠어요? “참, 결혼하는 꼬라지가 참 불쌍하다. 너희들 할 수 있거든 나처럼 혼자 살아라. 그리 못하니까 결혼하는데, 그러면 너희에게 고난이 있으리라” 주례 끝. 이게 주례에요.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그게 이 주례라니까요. “결혼하는 인간에게는 고난이 있으리라. 아이구, 안 됐다. 야야! 살만큼 살다가 삐딱하거든 후딱 헤어져버려라. 복음에 매인 자는 결혼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이혼해라.” 이게 주례에요. 이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주례라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더 붙이기를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며, 있으나마나 한 것처럼 살아라. 늘 혼자 살 준비해라.” 뭐 이런 것. 왜? 세상은 곧 끝장나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잠정적 존재니까. 이게 성경입니다. 이게 성경이에요. 기쁘지 않습니까? 그동안 여러분들 무거운 짐 진다고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쓸데없는, 구원도 안 되는, 구원에 방해하는 짐.
오늘 본문 40절에서는 뭐냐 하면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눈을 멀게 하고 완고하게 했으니까 우리는 자만한 자요, 또 소경이죠. 그럼 우리는 소경된 거고, 자만한 자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 존재에요. 여기에 대해서 더 욕심 부리면 안 됩니다. “다른 인간, 겸손한 인간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그러지 마세요. 그렇게 돼버리면 이 계획에 차질이 일어나요. 더욱더 교만케 하시고, 더욱더 눈이 멀게 하시는 작업이 주께서 찾아온 사람에게는 그게 느껴질 거예요.
바로 주님께서 이런 인간은 절대로 천국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주께서 찾아온 사람은 알아요. 그러니까 내 고집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내가 영광이라고 여기는 대로, 내가 축복이라고 간주하는 그대로 나는 밀어붙일 거라고 생각해야 돼요. 왜냐하면 그 몸과 그 인간은 구원 못 받기 때문에. 따라서 주님이 주시는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구원이 아님을, 구원이 아니었음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확인시켜주시는 이 고마운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주님이 그리는 하나의 도화지가 되죠.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음악이 흐르는 그 카페엔 초콜릿색 물감으로, 빗방울 그려진 그 가로등불 아랜 보라색 물감으로” 우리가 수채화, 우리의 그림 자체가 예수님께서 자기 일을 그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에게 주는 그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한테 소중한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소중한 겁니까? 우리 주님한테 소중하기에 덩달아 우리가 주 앞에 소중한 귀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쓰시기에 주님께서 무슨 영광을 받는다? 우리를 통해서 우리 영광을 안 받고 독생자의 영광을 박아놓고, 자기가 박아놓은 그 독생자의 영광을 우리에게 회수하는 그러한 도화지로, 재료로 우리를 활용해주시는 이 은혜가 바로 성령세례 받은 사람에게만 알 수 있는 은혜입니다.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어요. 이걸 당첨이라고 합니다. 아까 식사하면서 누가 이야기했지만. 당첨이에요. 이게 당첨된 자에요. 또 이거 당첨되려고 온 동네 돌아다니면서 로또하지 말고요. 그냥 이거는 창세전부터 예정된 자에게는 반드시 이런 당첨을 하게 해주십니다.
자, 그 다음에 봅시다. 중간에 제가 붕 띄웠는데, 중간을 띄우지 않으면 설명이 안 돼요. 중간의 내용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어떻게 영광이 죽음이 되느냐? 사람에게 매 맞아 죽고, 칼 맞아 죽고, 창에 찔린 죽음이 어떻게 영광이 되느냐? 이걸 설명할 차례입니다. 그게 바로 31절에 나옵니다. 먼저 3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너희와 뭘 연관시키느냐 하면, 31절에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라고 되어 있죠.
“너희”라고 해놓고 너희에다가 뭘 테두리를 쳐버리느냐면, 너희가 어디에 갇혀있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에 갇혀있다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제 한 번 물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는 겁니까? 우리를 가두어 둔 어떤 세력을 심판하는 겁니까? 어느 쪽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는 거예요? 인간 속에 가두어 둔 인간 외에 어떤 존재에 대해서 심판하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둘 중의 하나인데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를 가두어 둔 악마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겁니다. 악마에 대한 심판.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 15절. 여러분 다 아시죠? 전쟁의 두 세력이 나오잖아요. 한쪽은 여자의 후손, 또 한쪽은 뭡니까? 뱀의 후손이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서 거기에 사람이 끼어들어갑니까? 안 끼어들어갑니까? 사람은 안 들어가요. 사람은 그냥 들러리라니까요. 들러리. 싸우는 주역들이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인간본인은 제발 빠져줘야 돼요. 나댄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빠져줘야 돼요.
우리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마귀가 이런 것 시켰어요. 악마가 이런 것 시켰어요.” 라고 그대로 솔직하게 내놓으면 되는 거예요. 십일조 했다고, 복 받았다고, 이런 것들의 시킴을 많이 당했었어요. 헌금 좀 하면 30배, 60배, 100배 받는다고, 이 약속을 믿으라고, 이런 것들을 많이 강요했었어요.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 돼요. 수능 앞두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되면 자식 수능 점수가 10점 더 오른다고, 우리 속에 있는 선악을 쥐고 있는 세력이 우리한테 그렇게 가르쳤어요. “니가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지옥 간다.” 우리 속에 있는 악마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걸 솔직히 내놓으면 돼요.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 살게 되면 주께서는 봐준다. 그게 나의 양심의 소리로서, 우리는 거기에 휘둘려 왔었다고, 그걸 바깥으로 내놓으면 되는 겁니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중간 질문>
질문: 아까 강의에서 갇혀있다고 말씀하실 때, 심판의 대상이 사탄이지 사람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창조 자체가 사탄의 심판의 목적은 아니잖아요?
답변: 사탄이 없으면 창조가 안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아니고, 예수님의 주되심이에요. 그게 빌립보서 2장 10-11절에 나옵니다. 모든 만물로 예수님을 주라 인정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이라. 그 앞에 뭐냐 하면 모든 피조물이 주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예수그리스도가 주가 되시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그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피조물인 마귀가 꼭 필요한 거예요. 마귀가 인간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마귀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그리고 십자가에 죽어야 예수님이 주가 되지, 십자가에 죽지 아니하면, 언약이 완성되지 아니하면 주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쫓아가는 거예요. 백 미터를 10초에 달려가듯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가는 거예요. 그 달려갈 때마다 때가되매, 때가되매, 때가되매, 주님께서 달려갈 때 그냥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순서대로, 스케줄 따라서 달려가야 해요.
그걸 누가 조종했는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조종해서 딱 때가되매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때가되매 예루살렘에서 내려가고, 또 올라가고. 또 때가되매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져야 하고. 열두 제자 다 흩어져야 하고. 그 모든 연출과 스케줄이 예수님이 주되심을 위한 아버지와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그렇게 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거했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찬미하는 그 결탁관계를 구약의 이스라엘과 어린양의 관계로 반복시켜서, 하나님이 내 백성이라는 구약적 방식을 신약에다, 그 방정식을 적용시켜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어린양 피 때문에 공짜로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온전한 이스라엘. 그렇게 되죠.
방금 질문한 질문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마귀하고 싸우고 우리하고 싸우지 않는다는데, 그럼 창조하신 목적이 마귀를 심판하기 위해서입니까? 라는 그런 질문이었죠. 이 질문이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녹음을 했어요. 또 질문하세요.
질문: 예수님이라는 존재자체가 숭배의 대상이나, 경배의 대상이나, 어떤 신적 존재로 구체화되는 그거는 아니죠?
답변: 아니죠, 아니죠. 예수님을 숭배했다는 것은 다 노림수가 있는 거죠.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신을 섬겨요. 가인이 하나님께 뭘 드렸습니까? 제사 드렸어요. 가인이. 지옥 갈 가인이 제사를 드렸다고요. 자기한테 유리한데 뭘 못 섬겨요? 신은 나를 위한 신이라니까요. 그 명칭이 예수가 되던, 알라가 되던, 관심 없어요. 무조건 나만 사랑하게 되면 뭐가 되든 상관없이 다 섬기게 되어 있어요.
근데 그 섬김의 마지막은 결국 섬기는 나 자신, 나를 섬기는 거예요. 마지막에는. 그게 인간이 섬기는 종교에 마귀가 배후에서 자꾸 세뇌를 준 거예요. “역시 중요한 것은 니가 중요하지. 니가 섬기는 예수나 하나님보다 니 자신이 더 중요해. 누가 널 지켜 줄 거야? 여러분? 웃기지 마! 니 자신. 니가 지키는 거야.” 그렇게 우리한테 자꾸 설득시키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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