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9. 30) 31-1
마가복음 9장 1절을 보겠습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우리나라 사람이 캐나다로 여행을 갔다며 여행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오겠지요. 어디로 여행을 가든 결국은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오겠지요? 예수님께서 만약 한국 땅에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잘 봤습니다.”하고 우리 일상으로 돌아가겠지요.
성도가 캐나다 갔다가 한국 왔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미국에서 한국 가는 것도 의미 없어요. 그러면 캐나다에서 바로 천국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또 미국 여행하다가 바로 천국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상당히 은혜롭잖아요. 있는 그 자리에서 천국 가는 것. 이것 역시 가위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을 보여주는 것은 뭐냐? 미국 안에서 천국을 가는 것, 캐나다 안에서 천국을 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은 이걸 의미하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와 같은 뉘앙스인데, 사람들은 천국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나라를 땅에 만듭니다.
바벨탑에 대해 설교하면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왜 바벨탑 만들기 전에 말리지 않았는가?’하는 것과 ‘바벨탑을 쌓는 그들을 왜 흩어버렸는가?’하는 점입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자기 이름이 하늘에 닿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만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의 목적을 하나님이 성취시켜 줍니다.
그들을 흩어지게 한 후 그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그 지점에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고 기다립니다. ‘진짜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다.’ 십자가는 비극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만나게 되지요.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데 결국 만난 분은 십자가 지신 분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바벨탑 만드는 것은 십자가 사건의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 합당하지요. 바벨탑 쌓는 것을 왜 사전에 막지 않았는가? 십자가와 관련되기 때문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는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일으켜 가능하게 만듭니다.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슬픈 사건이지요.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추방되었을 때 인간은 그것을 생각 못했어요. 세상살이가 너무 힘드니까 하늘나라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꿈꾸는 하늘나라는 사건이 아니고 이 땅과 연결된, 이 몸 그대로 가서 편하게 살겠다는 것이지요.
이 땅에서의 이 몸은 누구이름이냐 하면 자기 이름, 또는 사람의 이름이지요.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에 올라가서 영원히 살겠다고 바벨탑을 쌓게 된 겁니다.
사람의 이름과 하나님 이름의 만남은 비극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본문, 변화산 이야기가 비극입니까, 신나는 일입니까? 아주 신이 났지요. 그런데 이걸 아셔야 돼요. 하나님 쪽에서 모든 것을 보여줬다는 말은, 이제부터 너희들의 실체를 들춰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과도하게 자신의 실상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그에 상응하는 너의 속살도 공개하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엄마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엄마는 아기의 모든 것을 압니다. 그런데 만약 아기가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숨는다면 엄마는 기절할 거예요. 이미 엄마는 아기의 모든 것을 압니다. 그런데 아기가 도덕과 윤리의 책무를 다하면서 엄마를 대한다면 이건 엄마와 아기의 관계가 아니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변화산에서 천국을 봤지요. 이 변화산의 천국 모습과 윤리, 도덕체계는 결코 합치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됩니다. 예의를 차린다든지 ‘주님, 제가 나쁜 짓 했지요?’라는 말투로 주님 앞에 나온다면 주님은 오히려 그것을 더럽게 여기십니다. “이게 어디서 세속적은 사고방식을 표출해?”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를 보여주셨지요. 거기에 상응해서 인간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 보여 주셨는데 우리도 성의를 다해야지.’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절대 그런 인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보여 줄 것 다 보여 주셨으면, 이제는 각오 해야 돼요. 나의 감추고 싶고 부끄러운 것을 모두 주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변화산 이야기가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 들춰내는 작업을 주님이 어떻게 벌이는가? ‘너희들에게 하늘나라 보여줬잖아. 이제 너희들도 각오해!’ 주님이 보여줄 것 다 보여 줬으니까 이제 소매를 걷고 본격적으로 인간들을 압박합니다. “너희들이 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지를 알아야 돼!”라는 것을 알려주시지요.
하나님 쪽에서 엄청난 것을 보여줬으면 그 이후에 우리는 절대 도덕, 윤리, 예의범절을 주님 앞에 내보여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 변화산을 보여주신 이유가 뭡니까? 지금까지도 이 문제가 원활하게 풀리지 않았어요. ‘조금만 더 고생해! 고생이 끝나면 나중에 이런 나라에 넣어줄게.’라는 식으로 미리 변화산을 보여준 것입니까?
이게 아닌데, 대부분의 성경 주석은 그런 식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도 제자들이 초조해 하고, 답답해 하니까 장차 누릴 영광을 미리 보여줘서 안심시키고 위로하기 위해 주님이 제자들을 변화산에 데리고 갔다는 주장이지요. 이 주장이 옳다면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이 기뻐하셔야 되지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주께서 영광스런 광경을 보여줬으니까 그 은혜에 보답해야지.’ 이런 사고방식이 추잡한 세속적 안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티를 내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극도로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준 이유가 뭡니까? 성의 표시하라고 보여주신 겁니까? 격려하기 위함입니까?
캐나다가 살기 좋은 나라지요. 벤프 국립공원은 세계 최고입니다. 그런 곳을 구경하고 놀다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여행에 지친 몸을 쉬게 되니 한국이 안식처가 되겠지요. 그러나 만약 그 여행자가 성도라면 ‘한국, 캐나다 전부 지옥이고 영원한 안식처는 천국이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말이 굉장히 은혜스러울 수가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병든 할머니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할머니, 이렇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에 대해 할머니가 하는 말이 “가야지요. 더 이상 고통 받고 싶지 않습니다. 천국 가서 주님께 맛있는 빈대떡 구워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성의를 다했으니까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쪽에서도 최소한의 성의를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런 생각 자체가 윤리, 도덕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윤리, 도덕체계를 죄로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나는 예수 믿어요. 죽으면 천국 갈 거예요. 그래서 저는 바르게 살 거예요.” 라고 할 때, 바르게 살려고 하는 나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더러운 죄악에 갇혀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제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알게 되었으니 바르게 살아야지요.’라는 생각이 주님을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안다면 입에서 ‘바르게 살아야지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가능성,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신앙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바르게 살겠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바르게 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본인이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인데, 이건 아직도 선악체계에서 못 빠져나온 자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는 말은, 자기를 위한 초막은 없으니까 굉장히 겸손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성의를 다하는 이런 모습이 자신으로써는 자신감 있게 내뺏은 말이에요. ‘나의 제안은 하자가 없다.’는 생각에서 한 말입니다.
천국과 인간은 비극으로 만난다고 했지요. 바벨탑을 무너트리니까 그것이 땅으로 퍼져 역사가 되었고, 역사의 끝에서 십자가의 비극을 만납니다. 이 공식이 마가복음 9장과 안 맞잖아요. 영광을 보여주고 성의 표시하고. 서로 윈윈하는 것. 버지니아 두 번째 강의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인간은 왜 사는가?’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이 뭔가?’ ‘유쾌하고 상쾌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 것은 유쾌하고 상쾌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뭐가 빠졌어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하는 점이 빠져있어요. 오늘 본문을 볼 때 제자들과 예수님의 만남이 비극이 아니고 희극이지요.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가 저쪽에 있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이쪽에 있는데,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는 희극을 이야기했습니까, 비극을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까 비극이야기죠.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짓겠다고 희극을 이야기해요. “여기가 좋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그냥 예수님, 모세, 엘리야가 있는 자리로 넣어주면 안 됩니까? 뭔가 해결해야 될 것이 있지요. ‘내가 천국 가야지’라는 생각이 천국 갈 수 없게 만드는 죄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누가 알겠어요? 이걸 모르기 때문에 ‘이제 예수 믿으니까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변화산의 영광을 보여준 것은, 결국 인간이 깊숙이 감춰놓은 (주님 오시면 빨리 천국 갔으면 좋겠다는)기대와 희망 자체가 주님이 처리해야 될 죄의 본성 중 하나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로 하여금 성의 표시하게 만들었고, 주님과 나 사이는 아주 좋아서 ‘여기가 좋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노리는 것입니다. 목사가 이것을 상품화해서 장사를 합니다.
모세, 엘리야, 예수님은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하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희극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과 요한복음 3장 6절을 비교해 봅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고 했습니다. 지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요한복음 3장 6절을 모르고 있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본인이 육이기 때문에 변화산의 일을 육의 세계로 보고 그곳에 합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영 세계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펴는 전략은 뭔가? 그들이 육이라는 사실을 들춰내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이런 작업이 없으면 제자들 자신이 육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한계치까지 몰아넣는 이유는 육이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다 예수님을 떠났어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하실 겁니다. “내가 너에게 CT촬영 해줄 테니까 그냥 하든대로 해!” 이 말에서 더 나아가면 복잡해집니다. ‘주님, 천국이 있다면 저를 천국에만 넣어주세요.’라는 생각을 그냥 하라는 말입니다. “나는 예수 믿고 천국 갈 백성이 되었기에 바르게 살래.”라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바르게 살 수 없어. 그냥 평소 하든대로 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은 아무리 고치려 해도 못 고치는 고질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칠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근원적인 죄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런 작업을 할 때 하나님은 은근히 사단으로 하여금 우리를 들쑤시도록 허락하십니다. ‘바르게 살아야지. 착하게 살아야지.’ 이것은 100% 마귀가 찾아온 것입니다. 마귀가 찾아오면 감사와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그 대신 염려와 걱정을 줍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마귀에게 쫓기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게 성도의 일상적 삶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 말씀을 제대로 몰라서 이런 식으로 사는 겁니다. 두려워 떤다는 것은 행복을 고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럼 행복이 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욕망과 권력의 놀이마당입니다. 정치인은 정치판에서 놀고, 학자는 지식놀이를 하겠지요. 이것이 욕망과 권력의 놀이마당입니다.
이 놀이마당을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어요. 이건 ‘괴물’이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든 사람들은 욕망과 권력의 놀이마당에서 살아갑니다. 요즘 코레일 직원들이 파업하고 있지요. 이게 권력 싸움입니다. 욕망은 시시때때로 자극을 받으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스포츠 경기, 컴퓨터 게임, 도박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세상이 뭔가? 욕망과 권력의 놀이마당입니다. 돈을 왜 버는가? 새로운 자극으로 인하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거예요. 돈 없는 노인은 집에 있든지 경로당에 갑니다. 돈 있는 노인은 다방에 갑니다. 돈이 많은 노인은 해외여행을 갑니다. 돈이 많아서 성경공부에 참석하겠다는 노인은 없어요.
인간은 욕망과 권력의 놀이마당에서 뛰놀고 싶어 환장한 자들입니다. 아담 스미스의 표현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우리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늘 점심 식사는 어디에서 하고, 식사 후에는 어디 가서 차를 마실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욕망을 쫓아 움직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을 보이게 하는 것을 ‘정치 구도’라고 합니다. 정치 구도의 극한은 독재 국가북한입니다. 북한의 모든 질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입니까, 보이는 뚱보(김정은)가 움직입니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는 미국, 일본 등입니다. 이것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장 원리입니다.
국가가 관여하지 않고 될 놈은 되고, 탈락하는 자는 탈락하는 거예요. 탤런트 소유진의 남편 백종원이란 사람이 외식 사업을 세 업종을 열어서 온 동네 영세 식당이 고사 직전에 있답니다. 이 사람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강자입니다. 욕망과 권력의 게임마당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지요.
마르쿠제는 이것은 ‘1차원적 인간’이라고 했어요. 1차원은 면적도 높이도 깊이도 없고 그냥 기어가는 개미 같은 거예요. 개미처럼 코앞에 있는 것만 보고 가는데, 그 가는 방향이 욕망과 권력의 게임에 빠져 움직이는 거예요. 저는 설교에서 이것을 ‘소꿉놀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삶의 의미도, 목적도 모르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나오는 벌레처럼 사는 거예요. [변신]에서 말하는 벌레는 셀러리맨이죠.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하고, 출근하면 시키는 일 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고. 다음 날이면 또 반복하는 삶. 카프카는 셀러리맨의 삶이나 벌레의 삶이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카프카를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합니다.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냥 분주히 움직이는 삶, 새로운 자극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인간들. 이러한 것에서 기껏 나오는 것이 ‘종교적 열망’이고, 여기서 나온 것이 윤리, 도덕입니다. 이런 소꿉놀이에서 권력을 잡은 자가 자신이 원하는 질서를 만들고, 이 질서가 윤리가 되고, 이 질서를 내면화 시킨 것이 도덕입니다. 이것이 세상 내막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가진 자의 권력에서 나왔어요. 아이들의 도덕심은 삼성전자를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 현재 제일 성공한 기업이니까요. 또는 판사, 검사, 의사 등. 아이들이 평소에 내면화 된 도덕심은 ‘착하게 살면 권력도 가질 수 있고, 자기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부모로부터 계속 쇠뇌 받아 온 것입니다.
여자 고등학교 3학년 급훈 중 이런 것이 있어요. “올해의 노력으로 신랑 직업이 바뀐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별 볼일 없는 직업의 신랑과 결혼하게 되고, 좋은 대학 가면 괜찮은 직업을 가진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미 이것은 학습화 된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가 나오는데, 종교 역시 윤리, 도덕을 내용으로 해서 종교가 나오지요. 그런데 그 종교를 주님은 --
복습해 봅시다. 하나님이 보여 줄 것 다 보여줬습니다. 이것은 ‘네 죄의 극단까지 들춰 낼 거야.’라는 의미입니다. 부부가 첫날 밤을 함께 지내면 서로 보여 줄 것 다 보여준 거예요. 이제 서로가 서로를 장악한 거예요. 이제부터 상대가 자신의 소유가 되었기에 일일이 간섭하고 잔소리를 합니다. ‘내 것 다 보여줬잖아. 그러니까 너의 모든 것은 내 소유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남자는 미처 이것을 몰랐어요. 사전에 이것을 아는 남자는 없습니다. 나중에 당하고 난 뒤에 ‘내가 물렸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남자 연예인들과 하룻밤 잤다고 고소하는 이유가 뭡니까? ‘보여 줄 것 다 보여줬으니까 이제 넌 내 소유야.’ 라는 여자의 심리를 남자 연예인이 사전에 미처 몰랐던 거지요.
여자는 그것이 하나의 운명인데 남자는 게임으로 생각합니다. 남녀 간에 의식 자체가 달라요. 여자는 가정에 목숨을 바쳤는데 남자는 가정을 자기 놀이터(또는 휴식처)로 여깁니다. 아내를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는 하녀로 생각해요. 사랑해서 결혼을 하면 결혼이 끝이 아닙니다.
‘사랑해서 결혼을 했다면, 결혼은 사랑의 맛보기고, 이제부터 사랑을 본격화 시켜서 더 깊은 사랑이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 결혼생활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여자들이 감격을 하지요. 여자들은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면, 연애할 때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혼을 합니다. 연애할 때 잠시 잠깐 만나도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대 늘 같이 있으면 기쁨이 몇 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남자 생각은 달라요. 연애할 때는 아직 완전한 나의 소유가 되지 못한 상태지만 결혼하면 이제 자기 소유가 되었기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깁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의 윤리, 도덕 자체가 자신의 행복을 유지하면서 천국 가려는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감춰진 죄악이란 것입니다. 절대로 바르게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10분 쉽시다.
(2016. 10. 19. 08:19 녹취 마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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