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10. 28) 32-1
지난 시간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해 같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 알았지요. 해 같이 빛나는 모습은 좋은데 그 메시아가 이 땅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몰랐어요. 자신들이 모시는 스승이 해 같이 빛나니까 초월적 존재로 이해했겠지요? 예상 밖의 큰 영광을 본 겁니다.
영광을 봤다는 것은 그만큼 실망할 가능성도 컵니다. 영광을 봤을 때 무엇이 안 보이는가 하면, 본인의 모습은 안 보이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는 모르고,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진짜 나로 여기고 여기에 영광을 더하면 이것이 바로 천국의 삶이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갈 때 자기 죄를 알기 위해 갈까요? 아니죠. 추가적인 혜택과 장래에 대한 확고한 보장을 얻기 위해서 가잖아요.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 교회 가는 사람은 없어요.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예수님의 멋있는 모습을 봤어요. 그래서 현재 자신에게 주님의 영광을 추가하면 멋진 천국 삶이 보장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여주신 이유가 제자들이 실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공식이 성립되는가 하면, ‘주님의 영광 + 나 = 실망’이 됩니다. ‘내가 굉장히 가난한데 갑자기 큰돈이 생겨서 재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이건 인간들이 기대하는 공식이고, 하나님의 공식은 ‘내가 가난한데 큰돈이 생겼다. 그래서 불행하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드라마 [질투의 화신]을 보면 공효진이 조정석과 또 한 남자를 좋아하는데, 시청자들은 공효진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거예요. 내가 만약 공효진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진짜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해서 살았다고 합시다. 그럼 행복할까요? 자기가 원했고, 또 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느냔 말이지요. 안 되잖아요. 여기서 무엇이 빠졌습니까? ‘내가 이런 행복을 감당할 자질이 있는가?’ 이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지요.
사랑, 돈, 권력 등 무엇이든 나에게 오면 그 모든 것이 행복의 요소가 될 것이라고 상상을 해요.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으면서 ‘나는 죄인이구나.’를 깨닫는 아이는 없어요. ‘빨리 어른이 되어 왕자님과 결혼하는 예쁜 신부가 되어야지.’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이지요.
여기에서 어떤 요소가 빠져 있습니까? ‘내가 과연 그런 행복을 감당할 수 있을까?’ 또는 ‘내 행복이 깨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은 없지요. 일단 챙기고 보자는 심정뿐입니다. 그래서 가수들 중 인기를 얻었는데 그것이 감당이 안 돼서 제주도에 가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변화산 위에서 해 같이 빛나는 영광을 제자들에게 보여줬습니다. 베드로는 오해를 했지요. ‘영광과 내가 결합되어 예수님과 함께 살면 천국의 삶이 펼쳐진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오늘날 우리도 동일하게 갖고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9장의 이 말씀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인데 땅에 내려와서 하신 말씀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절).”는 것입니다. 보여주신 후 ‘봐서는 안 될 것을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려고 한 것도 아닌데 주님이 보여주신 후에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감당이 안 되는 영광을 너희들이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의 영광을 감당하려면 그것을 본 제자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천국에 부합되는 인간성으로 바뀌어야 되겠지요. 오늘 강의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살고 있습니다. ‘살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천국의 영광을 미리 보여줬어요. 그래서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지요. 그런데 주님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이게 뭐냐 하면, 미래의 영광을 현재는 감당 못한다는 것입니다.
감당 안 되는 상태에서 미래의 천국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변화산의 영광 된 주님을 보았어도 십자가 지시기 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저주까지 했어요. 이게 꼭 필요한 과정이란 말입니다.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 주님은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니까 천국이 좋다고 하는데 ‘정말 천국을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겠어?’ 우리는 감당 못합니다. 감당 못하는데 주님께서 강제로 집어넣어주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변화가 이어져야 합니다. 감당 못하는 자를 감당하게 바꾸어주는 것이 꼭 필요해요.
그 바꿔주는 절차 가운데 “나는 예수 믿은 적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없었고,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고, 천국이 있다면 주님께 부탁해서 그곳에 가려고 했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을 막는 장애물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한 나의 이상적 자아가 주님 사랑하는 것을 막습니다.
‘이상 자아’는 ‘자아 이상’으로 바뀐다고 제가 라캉 강의할 때 언급했지요. ‘이상 자아’는 내가 상상하는 자아가 아니고 남들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요구하는 거예요. 인간은 남들의 요구에 맞추도록 양육되었어요.
우리나라 옛날 부부들을 보면 참 이상한 점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남편이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화를 내며 욕을 하지만 아침에 해장국을 끓어줍니다. 앞뒤가 안 맞아요. 이게 정인지 사랑인지 모르겠어요. 왜 이런가 하면, 예뻐서가 아니고 ‘당신이 원하는 아내 상은 이런 것 맞지?’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결혼을 해야 인간이 됩니다. 결혼을 해야 내가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휘둘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휘둘리며 사는 것을 ‘윤리성’이라고 합니다. 이 윤리성이 내 본질처럼 장착이 되면 이것을 ‘도덕’이라고 합니다. 집안에 식구가 많아 대가족인 경우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늘 눈치를 보면서 살기 때문에 행동이 어른스럽습니다. 그리고 두루두루 모든 상황을 고려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압니다. 이것을 ‘사람 사는 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손 가정에서 단출한 식구로 사는 집안에서는 아무래도 남을 배려하고 행동하는 것을 잘 배우지 못해서 미숙합니다.
‘이상 자아’는 남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자아 이상’은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입니다. ‘자아 이상’에서 새로운 환경이 오면 ‘이상 자아’로 바뀌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치시킬 때 ‘자아 이상’이 됩니다. ‘나는 저렇게 되고 싶었어.’ “아이고, 네가 설거지를 다 하다니?”라고 하면, “나는 원래 그러고 싶었어요.”라고 합니다.
내가 설거지를 하면 주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상 자아’지요. 남들이 좋아하는 것이 이제는 나의 기쁨이 되는데, 이것이 습관이 되면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대가 원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아 이상’으로. 윤리와 도덕을 합치면 이것이 사람 사는 도리라고 했지요.
처음부터 나는 이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도리’와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제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그 집단의 기준, 표준으로 행세하면서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동서 중 제일 연장자가 이런 자유를 느낍니다. “동서, 그렇게 말하면 안 돼지.” “형님, 제가 아직 형님께 배울 점이 많습니다.” 이것이 한 집안 맏며느리의 행복이고 자부심입니다.
이런 인간세상의 ‘자아 이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하겠습니까? 감당 못해요. 여기에 획기적인 변화가 없으면 12제자도 구원 못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 것은 “너희들이 지금 시도하고 있는 ‘이상 자아’의 세계, 너 자신을 중심으로 벌이는 세계가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10절을 봅시다. “너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물었지요.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 세계는 죽음이란 간격이 있습니다. 단절된 거예요. 이쪽과 저쪽이 연결되지 않은 거예요.
인간에게 하나님의 세계는 닫힌 공간입니다. 닫힌 공간인데 여기에 권력적 이미지를 제공하면 갇힌 공간이 되겠지요. 우리가 아는 갇힌 공간의 대표적 장소는 감옥입니다.
천국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 천국에 칸막이를 세우시고, 이것을 ‘죽음’이란 단절로 말씀하셨고, 저는 이것을 ‘감옥’으로 표현했지요. 우리나라 감옥을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나라 감옥은 각각의 방들이 있어요. 5~7명이 같은 방을 사용하는데, 말썽을 일으키면 독방에 가둡니다.
이런 감옥 말고 옛날 멕시코 감옥은, 이 세상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절해요. 멕시코 감옥은 칸막이만 있고, 이런 칸막이가 원형으로 여러 개가 있는데 군인들이 지키는데 이 칸막이를 벗어나면 총으로 쏴 죽입니다. 그런데 멕시코 감옥의 특성이 뭔가 하면,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어요.
멕시코 감옥은 밖에서 일거리를 제공해요. 주로 쓰레기 분류 수거하는 일입니다. 이러면 이곳은 일종의 산업체가 되지요. 바깥세상에서는 더럽다고 아무도 손대기 싫어하는 업무를 맡겨놓고, 겨우 목숨 연명할 만큼의 세끼 식사를 제공합니다. 갇힌 감옥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은 나름대로의 아파트가 생기고, 병원이 생기고, 손톱 손질하는 곳이 생기고, 위락시설이 생기고, 심지어는 파티를 즐기는 재벌급 인물들도 생깁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면, 일주일에 한 번 가족들이 면회를 올 때 사식정도가 아니고 돈이 들어와요. 그러면 죄수들은 그 돈으로 간수들을 매수해서 힘든 일에서 제외되고, 술과 담배가 은밀하게 들어옵니다. 그래서 감옥 안에 나름대로 휴식을 즐기는 공간도 있고, 매춘도 있고, 심지어는 간 이식까지 합니다. 여하간 별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곳을 벗어나면 사살됩니다.
이 감옥에서도 돈만 있으면 자유를 느낍니다. 이곳에서 권세를 부리고 왕으로 군림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모습입니다.
질문합니다. 감옥에서 재벌급 생활을 하는 죄수가 감옥을 벗어나서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감옥에서 계속 재벌급 생활을 지속하기 원할까요? 감옥 안이 좋아요. 이게 오늘날 인간 사회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있죠.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합니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네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다.”라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갇혀 있다는 부담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 호의호식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며 즐겁게 살기 때문이지요.
부자는 이런 세상에서 떠나기 싫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는 이곳에서 나가기를 원할까요, 이곳에서 부자 되기를 원할까요?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왜 그런가? 어릴 때부터 부와 권세를 누리는 자의 즐거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행복의 내용을 자신들이 보고 듣고 소망한 것에서 찾기 마련입니다.
지난 수요 설교에서 꿈과 희망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고 했어요. 인생을 살면서 ‘저 언덕만 넘어서면 평안이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넘어서면 또 언덕이 나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길을 가는데, 기다려도 내가 기대한 것은 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계속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메시아가 이미 왔다고 하니까 그들이 화가 난 거예요.
기다림은 기다림 자체에 의미가 있지 그것이 완성되면 안 돼요. 완성되면 기다릴 필요가 없어지니 무슨 힘으로 삽니까? 어떤 부부가 12명의 자녀를 낳았어요.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왜냐? 자식 외에는 다른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중독’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중독되어 있어요. 기도 중독, 돈 중독, 알코올 중독.
‘자아 이상’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 이상과 현재 부실한 나를 늘 바꿔치기 하겠다는 희망으로 삽니다. 나의 목표가 된 자아상과 지금의 허접한 내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오늘도 나를 살게 만듭니다. 삶의 에너지가 됩니다. 그런데 그 ‘자아 이상’의 모델은 어디에서 정보를 수집한 겁니까?
이것을 ‘정보 누적’이라고 하는데, 정보가 계속 누적되면 감당을 못합니다. 새로운 정보가 계속 들어오니까. 그리고 거기에 일치해야 남들 앞에서 ‘나 어때?’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이 ‘이상 자아’지요. 내 모습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여자들이 사진 찍을 때 그냥 찍지 않습니다. 50대 여자는 반드시 명품 가방이나 옷을 걸치고 사진 찍습니다.
아가씨들은 셀카 찍으면서 각도를 고려해서 최대한 선이 예쁘게 나오도록 찍습니다. 이것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내가 없어요. 남들이 만들어준 나와 지금의 못난 나를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요. 저녁 7~8시 TV 홈쇼핑을 보면 주로 나오는 것이 서유럽 여행상품을 선전합니다.
서유럽의 대자연과 아름답고 고풍스런 건축물 속에 자신이 들어가면 꿈꾸던 ‘이상 자아’가 되기 때문에 여행사 광고에 관심이 갑니다.
우리는 세상에 갇혀 있고, 우리 삶은 교도소 생활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 바깥에 있습니다. 감당하겠습니까? 감당 안 됩니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이 세상을 떠나기 싫어요. 심지어 교회에서 복음 전하면 ‘너나 천국 가라.’고 하면서 쫓아냅니다. 왜냐? 감당이 안 돼서 그래요.
자, 그러면 주님의 작전은 뭡니까? 우리 개개인을 설득해서는 설득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너희가 악한 권세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겠지요. “베드로, 요한아! 네가 있는 세상에 내가 들어왔는데, 세상이 너희들에게는 손대지 않고 나를 죽이려 한다.” 마가복음 9장 9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멸시가 뭡니까? 우리 동네 사고방식과 다르다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감옥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말과 행동과 의식이 안 맞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 구원 받아야 할 12제자도 감옥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헛소리를 했잖아요.
주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바꿔놓는 작업을 예수님이 이제 실시하십니다.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니까 제자들이 구원 받았지요.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할 지점입니다. “주님! 안 됩니다. 우리는 ‘자아 이상’ ‘이상 자아’ 외에 다른 꿈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태어났기에 이 땅에서 멋있게 살고 성공하고 싶어요.”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이 희망을 주님이 도와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여기지만 이 희망을 좌절시킨다면 주님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내가 요청하면 오시되 내 영역에 함부로 침범하지는 마세요.’라는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이런 완악함을 기어이 들춰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은 걱정이 될 거예요. ‘주님을 믿다가 실망해서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요한복음 13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랑의 주체자가 주님입니까, 사람입니까? 주님이지요. 주님이 약속했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끝에 성령이 오시지요. 성령이 오시면 끝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암세포처럼 점점 퍼집니다. 처음에는 몸에 암세포가 들어왔지만 나중에는 몸 전체를 암세포가 차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주님의 종, 성령의 종이 됩니다. 내 안에 들어왔던 성령이 그냥 조용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점차 확대시켜 나갑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는데, 이 사랑은 자기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만약 끝까지 사랑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자기 사랑에 내가 포함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이 질문을 예수님께 드리면 어떻게 답하실까요? ‘넌 누구야, 나가!’라고 하실 거예요.
그럼 예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예수 믿는 나만 자각되고 느껴진다면 그는 다른 예수를 붙들고 종교적 씨름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씨름하는 자기 자신만 의식되기 때문이지요. 아까 이야기한 ‘이상 자아’ 중에 자신의 종교적 노력도 포함됩니다.
“엄마, 아빠는 내가 교회 나가고 예수 잘 믿으면 좋아하시겠지? 내 부모님이 이걸 원했어.” 그래서 ‘부모님이 원하는 것 해 드릴게요.’라고 한다면 이게 믿음입니까? 믿음 아니죠. ‘부모가 아무리 원해도 나는 절대 안 믿을 거야.’라고 다짐을 해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주님의 뜻일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도라면.
이처럼 복음의 내용에는 자기의 모든 행함이 무용지물이란 것이 담겨야 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한 모든 것이 내 구원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느껴져야 돼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억지 춘향 격으로 하는 것, 이것이 ‘이상 자아’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예수님이 약속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내가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헛수고임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수긍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가 주님을 붙들 이유가 없고, 붙들어도 붙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존재는 깃털같이 가볍습니다. 내 인생은 없고 ‘주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 하시는 일에 내가 포함되었구나.’를 알게 됩니다. 내가 기관차를 모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모는 기관차 속에 한 개의 좌석을 배정받아 앉아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렇게 느끼는 사람은, 예수님이 ‘내 사람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이 말씀을 실현하는 과정 속에 도구로 들어가 있어요. 성령이 오시면 본인의 신앙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제 나는 믿는다는 소리는 안 한다.’ 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면서 보여주기 위한 쇼를 벌입니다.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어요.
‘옷이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머리 모양이 어색합니다.’라고 하면 화를 내는 이유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마네킹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철학자 홉스가 ‘인간은 모두 이기주의자다.’라고 주장하니, 어떤 철학자가 반론하면서 ‘당신은 왜 모든 인간을 이기주의자로 몰아세우나. 이타주의자도 있다.’고 하니까, 홉스가 ‘당신은 밤에 잠잘 때 문을 닫고 자나, 열어놓고 자나?’라고 되물었어요. 이 한마디로 상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습니다.
문을 왜 닫지요? 누가 들어와서 자신의 것을 가져갈까 두려워서 잠그잖아요. 그러니 이기주의지요. 남을 위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밤에 문을 잠그고 잔다는 자체가 이기주의고, 밤에 자식이 늦게 올 때 걱정한다는 자체가 이기주의에요. 홉스는 말했습니다. ‘이기주의자 인간에게 남는 것은 경쟁뿐이다.’
이 말은, ‘살 놈을 살고 죽을 놈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인간이 평등합니까? 이건 관념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평등해요? 정주영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몇 사람에게 각자 돈 2천만원 나눠주고 몇 년이 지나면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거지가 되어 있다고.
이 세상에 평등은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없는 평등을 주장하면서 출발하니까 생긴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가? 안 되니까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거예요. 조선소에서 배를 만드는데, 용접 기술도 없는 인간이 용접한다고 설치면 쫓아내야 됩니다. 그런데 쫓겨난 사람은 노동부에 고발하고 시위를 합니다.
그런데 기업주의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사람은 추방시키는 것이 당연해요. 평등은 없고, 그 상황에 적합한 사람은 살아남고 그 외에는 죽든 말든 추방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평등한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6. 11. 9. 15:16 녹취 마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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