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23서

시카고강의7 1609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17. 07:26
2016-09-16 00:03:53조회 : 55         
20160908 요한1서 시카고강의7-이 근호 목사이름 : 이미아 (IP:122.43.165.245)

20160908 요한1서 시카고강의7-이 근호 목사

 

제 7강입니다. 요한일서 2장에 보면 나오는 단어들이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나온 단어들이에요. 그중에 제일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화목제물이라는 거예요. 화목제물, 이거는 레위기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레위기도 구약입니다. 화목제물이 뭐냐 하면, 제사를 다섯 가지 지키는데, 마지막 마무리 제사가 화목제물이에요. 화목제물 앞에는 반드시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 제일 마지막이 화목제인데, 화목제물 드렸다는 말은 뭐냐 하면 “끝났다.” “이제 드릴 제사는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화목제물이라는 말은,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추가될 어떠한 방식과 방법도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 믿고 십일조 하라는 말은 이제는 없는 거예요. 예수 믿고 순교하라는 말도 성립이 안 돼요. 십자가 지신 분이 알아서 순교하시는 거예요. 모든 교회 운영은 십자가 믿고 교회 운영 잘하라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지신 분이 따로 만들어낸 교회 있고, 그 교회 운영은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왜냐, 화목제물은 화목제물을 완성한 티를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화목제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사람이 아니에요. 화목제에서 불쏘시개 넣었다고 해서 저도 협조했다고 하면 안 돼요. 화목제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시작과 끝마무리에서, 모든 공로는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천사들이 다 끊어버리고 예수님이 홀로, 혼자만이 하신 겁니다.

 

오직 온리only, 예수님만이 하신 거예요. 화목제물 홀로 다 이루신 거예요. 홀로 다 이루셨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십자가에 혼자 달렸고, 혼자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있는데? 못 박은 사람이 왜 십자가의 공로에 왜 끼어들어요? 십자가에 달릴 때, 영차! 영차! 하고 들어 올린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은 공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의 화목제물로 마감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바로 화목제물이죠. 제물. 구약의 제물은 양과 소와 염소죠. 제물이 신약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인간으로 바뀌었죠. 제물이 인간으로 바뀌면서, 제물(양, 염소, 소)이 했을 때의 그 효력과 인간으로 제물을 했을 때의 효력과 그 효과가 다릅니다. 제물이 했을 때는 이 제물과 관련된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요. 양 바쳐라, 소 바쳐라, 염소 바쳐라, 할 때에는 그 효과는 이스라엘 안에서만 머무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물로 인간을 바치게 되면, 이 제물은 화목제물. 그냥 바치는 것이 아니고, 이삭 바친 것은 번제고. 마지막 제사가 무슨 제사? 화목제물이라고 했잖아요. 마지막 제사, 마무리, 더 이상 죄를 씻을 어떤 방식이나 방법이 없다고 할 때에는, 모든 인간은 화목제물을 위하여 존재하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화목제물의 효과는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구원된다는 말이 아니고 화목제물이 자체적으로 갖고 있던 그 효과가 구원만이 아니라, 죄를 죄답게 드러내는 기능도 화목제물이 합니다.

 

쉽게 갑니다. “야! 너 어떻게 살아왔어?” “예. 바르게 살아왔습니다.” 다른 답변 한 번 보세요. “야! 너 어떻게 살았어?” “화목제물을 앞세워 살았습니다.” 이게 달라요. 한쪽은 “내가 이렇습니다.” 라는 자기 행함의 효과를 드러내는 반면에, 두 번째는 어떻게 됩니까? “저는 화목제물의 효과를 믿어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한쪽은 화목제물이 있으나마나한 조치로만 아는 거예요. “화목제물은?” “그따위가 뭔데?” “십자가?” “뭐? 십자가 그게 뭔데? 십자가가 내 사업하고 무슨 관계인데?” 완전히 화목제물을 개무시 한 거죠.

 

그럼 화목제물은 뭐냐 하면,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는 거예요. 기준은 누가 세웁니까? 천국 기준은 누가 세웁니까? 보통 우리가 세워요. 내가 착한 일 하면 천국 가고 나쁜 일 하면 지옥 가고. 내가 세우는데 그건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언약의 출현과 서서히 정리돼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축복과 저주는, 언약에 준할 때만 축복받고, 언약을 준하지 못할 때는 저주받습니다.

 

목사님들이 심방 갈 때, 주로 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이에요. 유명한 구절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내가 왔다 갔다 하면 먼지만 따라오는 것이 아니고 복이 막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얼마나 신나는 겁니까? 그런데 신명기 뒷부분은 이야기 안 해요. 니가 나가도 저주받고 들어와도 저주받는다. 그걸 너무 차별시키는 거예요. 앞부분만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그 말은 뭐냐, 기준이 뭐다? 주의 말씀을 지키는 여부가 기준이 된다. 그럼 주의 말씀에는 뭐가 들어있다? 화목제물을 지키라고 되어 있다. 화목제물이 그 당시에 시범조로 이스라엘을 상대했다면, 화목제물이 제물이 아니고 사람이 된다면, 사람이라고 생겨먹은 모든 인류에게는 화목제물이 절대적인 기준으로써,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이 가름이 됩니다. 구분 짓게 되어 있어요. 그럼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할 때, 뭐만 설교해야 됩니까? 최종적인 것을 설교해야 되겠죠. 왜? 최종적인 것이 천국, 지옥을 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설교 시간에 뭐만 나와야 돼요? 십자가이야기만 마지막으로 나와야 돼요. 돈 내라가 아니라. 돈 내라고 나오면, 돈 내면 천국가고 돈 안 내면 지옥가기 때문에. 마지막은 돈 내라가 아니라, 헌금 하든, 헌금 안 하든, 상관없이 뭐로 저주받고, 축복받는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돈 내나 안 내나, 봉사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천국가게 되어 있고, 십자가 안 믿으면 백날 헌금해봐야 그거는 헌금하면서 지옥 가는 거예요. 돈만 뺏겼어요. 기준도 아닌 것을 가짜로, 구라로 제시해요. 교회가.

 

그걸 구분할 줄 알라고 교회가게 하신 겁니다. ‘저건 아닌데? 저건 아닌데? 저건 언약이 아니고? 저건 성경의 핵심도 아니고? 저건 화목제물 효과도 아닌데? 왜 저러지?’ 왜 저러기는 뭐, 교회 유지하려면 지금 돈이 중요하지, 뭐 기준이 중요합니까? 맨날 천국 가 본 사람이 어디에 있어? 교회 운영하고 봐야지. 이런 조에요. 목사도 그렇지만 특히 중직에 있는 장로도 마찬가지에요. 어느 장로가 “목사님. 십자가 증거 해주세요. 안 그러면 쫓아내겠습니다.” 그런 장로가 어디겠어요? “교회 키워주세요.” 이런 장로뿐이죠.

 

그러니까 교회에 가서 이런 복음에 근거해서 교회를 한 번 살펴보세요. 이놈의 교회가 이건 교회인지, 영업장인지, 한 번 보란 말이죠. 사업장인지. 그거는 교인들이 판단 못한다는 것은 교인들 자체가 절대적 기준을 몰라서 그래요.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화목제물입니다. 번제 아닙니다. 속죄제 아닙니다. 속건제 아닙니다. 소제 아닙니다. 화목제입니다. 왜? 마지막 제물이 화목제물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화목제물이라는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우린 뭐부터 출발해야 돼요? 구약부터 출발해야 해요. 왜냐하면 화목제물은 구약에서 나온 용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다시 해봅시다. 제물이라는 것은 구약의 용어죠. 구약에 때 있는 범위가, 기준이 예수님이 인간 대신 화목제물이 됨으로써, 그 기준이 이제는 구약이라는 범위를 넘어서서, 이스라엘이라는 제한된 혈통을 넘어서서, 어떻게?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이 되겠죠.

 

그게 바로 2절에 나옵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온 세상의 죄라고 하니까, 이거는 뭐도 포함이 됩니까? 우리에 해당되는 두어 사람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뭐가 해당된다? 이 절대적 기준이 적용되는 거예요. 이 절대적 기준이 적용된다면, 자 묻습니다. 화목제물은 누가 행했습니까? 예수님 플러스 우리가 행했습니까? 예수님 홀로 행했습니까? 예수님 홀로 행했죠. 예수님 홀로 행하신 그 기준이 절대적으로 적용된다면, 이것은 소속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니 행함 말고 내 행함으로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면, 주님의 행함만 절대적인 기준으로 우뚝 서려면, 주님에게 소속되었느냐, 안 되었느냐의 여부가 천국, 지옥을 가름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몇 년 째 이야기해도 또 돌아서면, 저 어떻게 행하면? 또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면서 질문을 해대는데, 그거는 피곤하지 않고 즐겁게 받아주는데, 그런 질문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일인지.

 

자, 그럼 지금부터 제가 해야 될 일을 여러분들이 이미 아십니다. “목사님. 성경은 언약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마감됩니까?” 그거 해야죠. 화목제물이 어떻게 인간이 되었느냐? 같은 이야기잖아요. 언약이 어떻게 흘러가서 어떻게 되는가? 그걸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제가 저한테 물으면, 물은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성경 전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금부터 시작. 이때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성경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우리 자제분한테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은 성경이 주어져있고, 성경은 표면이 문자로 되어 있고, 밑에 내면에는 영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영으로, 성령께서 문자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성경입니다. 그럼 문자만 알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문자를 통해서 뭐까지 내려가야? 영까지 내려가야지. 그럼 문자는 구약의 용어가 다르고 신약의 용어가 다르니까 일치되지 않느냐?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밑에 조금만 내려가면 기다리는 영이 있는데, 영은 구약의 영이나 신약의 영이나 동일한 영입니다.

 

그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다가 예수님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아브라함은 예수님 오시기 전, B.C.2000년 사람이고,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후에, B.C.2000년 후에 온 사람이에요. 문자적으로 보게 되면 전혀 이게 뚝 떨어져있으니까, 아브라함의 기록에 보면 예수라는 문자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전혀 안 나오잖아요. 전혀 안 나오죠. 그러면 예수님하고 관련된 용어가 나옵니까? 나오죠. 여호와 이레(창22:14).

 

결국 예수님은 어떤 기능을 한다? 구약 성도에게 미리 준비된 어린양으로 오신 거예요. 이레라는 말이, 준비하심. 누가 준비하신?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심. 요셉 근처에 예수라는 단어 안 나옵니다. 근데 요셉과 관련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관련이 있죠. 요셉은 어떻게 관련이 있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형들한테 팔려서 죽었다가, 물구덩이에 빠졌었잖아요. 마침 그때 애굽의 상인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그냥 죽었어요. 애굽의 상인한테 팔려서 죽었다가 살아났죠.

 

근데 그 사실을 모르고 야곱은 이미 죽은 자예요. 이미 옷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봤어요. 없어진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야곱 입장에서 요셉은 산자에요? 죽은 자에요? 죽은 자죠. 근데 나중에 요셉이 살아 돌아오죠. 그러면 야곱입장에서는 요셉은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이것은 마치 이삭의 반복이에요. 죽을 뻔했는데, 옆에 양이 준비되지 않았으면 그냥 죽었어요. 준비된 양 때문에 살았잖아요.

 

그럼 요셉은 여호와이레입니다. 형제와 아버지를 살리려고 친히 준비된, 희생돼야 될 팔자가 요셉이었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들은 그들의 언약을 통해서 예수님과 이미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들에게 주신 언약을 통해서. 따라서 요셉이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가 아니라, 요셉이라는 이야기 안에, 야곱이야기 안에, 그들에게 흐르는 것은 그냥 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11절은 “구약 해석 어떻게 합니까?”에 대한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백점입니다. 10절부터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이 선지자 속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모세...다 들어있습니다. 11절,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아브라함 속에 뭐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었는데, 영이 어떤 기능으로 아브라함 속에 작용 했습니까? 고난 받고 그 다음에 영광 얻을. 이거는 이삭도 해당되고, 야곱도 해당되고, 아까 이야기했던 요셉도 해당되고. 모든 택한 백성의 계열 속에는 누가 살아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참여함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취급 받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줄 아시고,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질 장차 영광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고난 받죠. 하지만 장차 올 영광은 이러한 시련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비록 우리가 탄식하고 하지만, 우리의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니(롬8:24). 우리는 똑같은 고백을 선지자가 하고 있었던 겁니다. 얼마나 그들이 고생했을까요? 억울하잖아요. 아벨 억울하죠? 하지만 아벨 속에 뭐가 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있었던 거예요.

 

아벨과 그리스도와 연관된 증거를 대세요. 히브리서11장에 나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해놓고 선지자들이 대열이 나옵니다. 그 대열 속에서 제일 첫 번째로 나온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아벨이죠. 그 다음에 에녹, 노아, 아브라함...쭉쭉 나오죠. 보세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대열이잖아요.

 

방금 11장을 약간 늘이면 여러분 명단이 있습니다. 그게 칸이 다 11장에 못 들어가서 그래요. 시카고의 어떤 누구는 곗돈 떼여서 고난 받았지만 장차 영광을 바라고 기뻐했느니라. 이런 내용이 나올 거예요. 그걸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이 외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무수함 속에 여러분들이 들어가길 바랍니다. 그 무수함 속에. 앞에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을 앞당겨 보여주는 것, 이게 구약 해석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을 다 집어넣어서 구약을 해석해줘야지.

 

이게 뭐냐 하면 성경 안에 문자가 있는데 문자를 풀이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호와증인들 뭐 이거 의미 있다고 하는데,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영원한 같은 그리스도, 어디를 해도, 원유를 캐듯이 그리스도의 영이 뿜어져 나와야 돼요. 이 문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이, 십자가가 나와야 이게 구약의 언약해석입니다. 왜냐? 구약에 살든, 신약에 살든, 복과 저주의 유일한 기준은 장차 오실 마지막 제물, 화목제물이신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요한일서 1장 10절에서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는다는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서 긴긴 구약이 있어야 했던 거예요.

 

그렇다면 구약의 하나인 사무엘하 1장에 보면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성경 여러 번 찾는데,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귀찮게 합시다. 14절,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절,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6절, “다윗이 저에게 이를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 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거 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라 하였더라”

 

너는 사울을 죽인 것이 아니고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를 죽였기 때문에, 화목제물의 효과, 모든 효과 중에서 유일한 기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그 저주의 기능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너는 그것을, 기름부음 받은 자를 개무시 했기 때문에, 그 이유로 너는 지옥가야 돼. 그 지옥 가는 모습 중의 하나가 내가 가차 없이 소년을 쳐 죽인 거예요. 소년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한데, 지가 사울을 죽이고 싶은 것이 아니고, 죽어가는 사울이 요청했어요. “고통이 심하니까 빨리 죽여 도! 칼 있으니까 그냥 죽여 도!” 그래서 그냥 죽는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고.

 

아무 의미 없이 죽였는데, ‘장차 예수님하고 관련되어 있으니까 예수님을 죽여야지. 이런 마음도 없었어요.’ 그냥 죽인 거예요. 아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놀릴 때, ‘니는 그리스도다.’ 이런 마음이 없었고 그냥 장난인데, 그걸 하나의 모형으로 사용했듯이. 이 소년도 그냥 무심코 어? 왕이 아프네. 안됐다. 죽여 달라고? 예하고 죽였는데, 그 소년과 사울의 목숨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예표로써 구약에 미리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그걸 그대로 오늘날 적용을 해볼게요. 운전을 하는데, 그냥 조용히 운전했다가 주차를 했어요. 그것도 내 집 앞에 주차를 했단 말이에요. 약간 나갔지만. 했는데, 경찰이 와서 “왜 주차를 합니까?” “내 주차장인데요?” “안 됩니다.” 하면서 주차위반 딱지 뗄 때에,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한 것이 되죠. 어떻게 참여합니까? 억울합니다. 하지 말고 오늘 돈 몇 푼 날렸구나! 모든 것은 주의 돈 이구나!를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아마 그 경찰관이 그냥 통보만 했다면 그렇게 아까워하지 않았을 거예요.

 

근데 벌금이 문제야. 돈이 문제에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지금 제대로 주차를 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왜, 쌩돈 날렸는가, 그게 더 큰 문제다 이 말이죠. 결국은 뭐냐 하면 나의 삶의 기준은 돈이었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돈이 있으면 복이고, 없으면 저주인데, 성령이 와서, 경찰이 와서 나를 더욱 저주케 했다는 것이 기분 나쁜 거죠.

 

그러나 그 사건을 유발시킨 것은, 바로 세상은 돈이 기준이 아니고, 벌금 더 나가도 니 구원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게 다윗과 사울의 관계로 지금도 십자가를 반복하는 것으로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매사를 십자가와 연관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두려워한다는 것은, 사실은 솔직히 말해서 부러워한다는 것이죠. 부러움이 생기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만약에 부러움이 없다면 뭐도 없어져요? 두려움도 없죠. 근데 목사님 부러움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있어요. 누구? 사도바울. 사도바울은 죽고 싶은 것이 소원이에요. 사도바울한테, 혹시 장가 안 갔는데 장가 간 사람 부럽죠? 아니요. 돈 많이 못쓰는데 돈 많이 모은 사람 부럽지 않습니까? 아니요. 천하에 부러운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성령의 효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효과, 언약 속에 있다는 말이죠. 언약 속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구약에서 문자 밑에 영이 있는데, 어떤 문자로써 머물러서는 안 되고, 거기에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 뿜어져 나오는 원유 같은 이 영으로 해석을 해줄 때,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축복과 저주가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자, 또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이번에는 신약에 가볼게요. 요한계시록 11장을 설명하고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두 증인이 나오죠. 두 증인이 복음 전했습니다. 복음 전했더니만 그 둘이 죽었어요. 하나님이 좀 도와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두 증인이 복음 전했더니만, 사람들이 되도 않는 소리를 한다고 두 증인을 죽였어요. 끝났습니까? 그 사람들이 죽고 좋아들 했죠. 구경하고 좋아들 했는데, 12절,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절,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원인제공자가 누굽니까? 두 증인이 뭘 전했기 때문에? 화목제물, 유일한 십자가 복음을 전했더니만 무엇이 관련되어 있었다? 세상에 물리적인 지형의 구성에너지가 관련되어 있어요. 두 증인 죽었다고 뭐가 일어났다? 땅이라는 에너지가 파괴가 되더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뭐가 일어났죠? 지진이 일어났죠. 하늘에 있는 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해가 어두워졌죠. 그리고 공동묘지 무덤은 어떻게 됐죠? 무덤이 열려서 거기 있는 시체만 노출되었습니까? 시체가 살아났습니까? 살아났어요.

 

이게 뭐예요? 세상의 모든 물리적인, 화학적인, 생물적인, 과학이나, 자연과학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 세상은 십자가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물리적인 세상까지, 하늘의 별까지, 박혀져있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기준이 드러나게 되면, 주님 떠나고 나면 이 세상은 와르르 지진이 일어나고, 강물이 쓰고, 뭐 천사가 와서 다 조져놔 버리면 무너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살아남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주제가 아니고, 기준이, 무너진 기준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 무너진 기준이 뭐냐,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의 십자가. 이 세상은 십자가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결론적으로 말씀드린 거예요. 이 세상은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그러면 십자가 사건을 결론으로 한다는 것이 뭐냐, 새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

 

모든 언약은 하나의 계명 속에 묶어놓기 위해서. 그게 새 언약이거든요.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용서한다는 언약에 묶어놓기 위해서, 그렇게 세상은,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함이 아니고, 십자가의 기준을 내세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이게 우리나라에 교과서에 나온 유명한 시입니다. 아시죠? 공부들 잘하셨을테니까.

 

그렇다면, 그게 기준이라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내 구원을 위함입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차후에 논리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왜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전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언약적으로 보면, 십자가 이후에 아브라함이 태어났습니다. 십자가 이후에.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기능이 필요한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아담이 죽고 난 뒤에 바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필요한 기능들이 모세, 다윗...사람들을 통해서 해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신 거예요. 처음인 것이 마지막으로. 그래서 아브라함보다 누가 먼저냐, 아브라함보다 뒤에 오신 예수님이 먼저고. 다윗보다 다윗의 주가, 다윗의 자손이 다윗보다 먼저 있는 겁니다. 창세전이 창세후보다 먼저 있었던 겁니다.

 

그럼 창세전이 창세후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이 들어오게 되면 이 역사는 뭐를 맞이하게 되느냐 하면, 역사가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묵시를 맞이하게 돼요. 자, 언약은 역사와 역사의 층으로 되어 있으면서 거기에 영이 있다. 영이라는 것은 장차 완성된 것이 오잖아요. 그럼 역사+묵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럼 묵시에 의해서 뭘 보게 한다? 역사를 보게 하는 것이죠.

 

그럼 역사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는 시간 의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역사입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은 뭘 원하느냐, 인간은 대가를 원해요. 자기 행함에 대한 대가와 기대를 하게 되는 겁니다. 한 40일 철야기도 했다, 백퍼센트 뭔가 기대하고 있어요. 그 기대한다는 것은 현재에 속하는 것입니까? 미래에 속하는 것입니까? 미래에 속하죠. 그 사람이 기도했다.→과거, 지금 기도한다.→현재, 기도의 효과를 볼 거야.→미래. 그럼 그 사람은 묵시에 속했습니까? 역사에 속했습니까? 역사에 속한 사람이죠.

 

역사에 속하니까, 그거는 묵시의 공격대상이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기도함으로 본인이 복 받고 저주받고 하는 기준으로 삼고 싶어 해요. 이게 역사에 속한 존재의 특징입니다. 그 역사 속에 속한 존재의 대표자가 누구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에요. 그들은 역사 속에 묵시가 속했다는 것을 인정을 안 해요. 역사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역사며, 인간들은 과거 것을 참고로 해서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현재에 충실한 것을 가지고 미래에 괜찮은 미래를 대가로 받는 것을, 그들의 유일한 삶의 희망으로 삼는 겁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이 못살아요. 희망이 나를 살립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이유가 뭡니까? 희망 때문에 그런 거예요. 희망이 희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백날 살아봐야 내가 살아왔던 그것이 자기를 살리는 기준이 되지를 못해요. 기준이 되는 것은 뭐냐, 화목제물이죠. 화목제물의 피는 멀쩡한 제사입니까? 피 흘린 제사입니까? 피를 쏟아내죠. 피라는 것은 충돌이죠. 묵시와 역사의 충돌이죠.

 

그럼 우리를 살리는 것은 내 행함이 아니고, 제사 바치는 행위가 아니라, 역사 속에 있는 나를 위해서 묵시적인 존재가, 역사에서 빼내기 위해서, 뽑아내기 위해서 피를 흘리셨는데, 그 충돌의 피가 우리로 하여금 묵시적 존재인 것을 증명하고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의 등장은 모든 것이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화목제물로 마지막에 표시를 나타내는 겁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묵시가 역사를 삼킨다고? 뭐, 그런 증거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겠죠. 여기는 없는데, 또 시비 거는 사람이 그렇게 해요. 역사밖에 없어! 자꾸 구라치지 마! 역사밖에 없어! 과거 있고, 현재 있고, 미래있고, 이게 전부지, 무슨 묵시라는 용어도 어려운 그런 말을 왜 쓰냐고 하죠. 그럼 당신이 묵시가 있다는 것을 증거를 대라고 하겠죠.

 

자, 증거 나갑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어떤 일을 당하죠. 그럴 때 이렇게 되어 있어요.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이렇게 되어 있고. 마가복음도 있는데, 마가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10절을 보면,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라고 했을 때, 네모에 어떤 글자가 들어갑니까? 갈라짐이죠. 자, 갈라짐이라고 했으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하늘이 열려있었을까요? 닫혀있었을까요? 닫혀있었죠. 그럼 밑에서 금고 열듯이 열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럼 밑에서 깨면 깨집니까? 안 깨지죠.

 

그럼 결국은 갈라진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완벽하게 봉쇄되어있고, 갇혀있다는 거예요. 위에서 깨트리지 않으면, 원래 갈라짐이 아니고 찢어짐이에요. 위에서 찢어지지 않으면, 찢어졌다는 것은 강제성을 의미합니다. 하늘에서 강제로 찢어내지 아니하면, 찢어내기 전까지는 인간은 역사가 현실이고, 그것이 전부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 받은 사람에게 복음이야기하면 먹히지 않는 이유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유구한 역사, 그게 내가 아는 통일된 현실의 전부에요.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고생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니가 열심히 해서 미래로 나아가야 해. 어디까지? 인류는 영원한 거야. 인간은 소망이 있는 한 역경을 딛고 이겨낼 힘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은 역사 안에 갇힌 채 배우는 학문들이에요. 과학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은 다 역사 안에서 배운 겁니다. 그런데 묵시는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아요. 하늘이 찢어지고, 이것은 마가복음 1장 10절에서 하는 이야기지요.

 

찢어졌다는 말은, 드디어 역사에 갇혀 있는 그 속의 맨홀뚜껑이 열리고, 그 속에서 누가? 역사 바깥에 있는 요소가 안에 들어오죠. 하늘이 찢어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들어왔죠. 자, 중요합니다. 들어왔습니다. 누구에게로? 예수님에게로. 그럼 예수님은 역사적인 존재입니까? 묵시적인 존재입니까? 묵시적 존재죠. 그럼 예수님같이 성령 받은 우리는 묵시적 존재입니까? 역사적 존재입니까? 묵시적 존재죠.

 

묵시적 존재만이 역사 따로 있고, 묵시 따로 있고. 이 세대 따로 있고, 오는 세대 따로 있고. 이 세상 말고 바깥세상 따로 있고. 내부 있고, 외부 있고. 유일하게 두 개를 다 보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소속이에요. 그래서 요한일서는 소속입니다. 성령이 쏟아지게 되면 성령은 바깥에서 쏟아지겠죠.

 

여기 역사가 있다면 역사 안에는 뭐가 들어온다? 언약이 들어오죠. 언약 안에는 뭐가 되어 있다. 표면이 문자고 되어 있고 안에는 예수님의 영으로 가득 차있죠. 그럼 역사 바깥에, 이게 찢어졌다고 하니까, 최초로 역사가 찢어지면서 뭐가 들어왔습니까? 바깥에 있는 묵시세계가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왔잖아요. 들어와 버렸다 이 말이죠. 그럼 이게 뭡니까? 역사+묵시가 섞여버리게 된 거예요. 그 전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니까 예수님의 영이 임했죠. 누구한테? 아브라함 이삭 야곱...영이 임한 거예요.

 

아벨 같은 경우에 영이 임하니까, 역사에 속한 사람과 묵시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구분되는가? 해석이 다르고 대화가 안 돼요.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죽음입니다. 자꾸 억울하게 죽어요. “임금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어디서 신하가? 함부로 겁 없이? 내가 까라고 하면 까야지. 하라고 하면 하는 거지.” “안 됩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죽여라!”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돌에 맞아 죽었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벨과 스가랴와 모든 선지자의 피가 너희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마23:35).

 

아까 피 돌아간다는 이야기했죠? 누구한테? 사울을 죽인 아말렉 소년한테.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삼하1:16). 니가 잘못 건드렸다는 거예요. 묵시적인 존재를 건드렸기 때문에, 묵시적 존재를 건드리면 뭐가 허물어진다? 역사의 세계가 현실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여기 우리 행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위에서 바케쓰로 물 퍼붓는데 무슨 행함이 있어요?

 

성령의 세례가 뭐냐 하면, 연합되는 거죠. 바케쓰로 줄줄 붓는데, 무슨 행함이 있어요? 어떤 행함이요? 거지가 되던, 창녀가 되던, 세리가 되던, 강도가 되던, 성령세례 받으면 의인됐는데 뭐. 그러면 성령 세례 받은 예수님의 임무가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죠. 언약을 이루죠. 언약을 이룹니다. 내용을 설명하느라 말을 너무 빨리했는데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고 합니다.

 

언약이 와버리면 역사 속에 묵시가 섞이게 됩니다. 자, 그래놓고 아까 요한계시록 11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증인이 뭘 전했는가? 두 증인이 있었는데, 두 증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 전한 장소가 나와요. 11장 8절에 보니까, 8절,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이니라”

 

이게 역사적으로나 문자적으로도 말이 안 돼요. 왜냐하면 같은 장소가 소돔일 수가 없고, 애굽일 수도 없고, 심지어 갈릴리라는 좁은 지역일 수가 없어요. 그러나 성령 안 에서는 이 세상은 예수님을, 언약을 잡아 죽이는 그러한 지옥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그 시체를 며칠 동안? 사흘 반 동안. 지금 이 두 증인 연합해서 뭘 보여줘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그들이 괴롭게 했고, 아까 본 11절에 지진이 일어나죠. 그러니까 제 말은 이 세상은 화목제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된 세상이라는 겁니다. 십자가 증거 하기 위해서 보여준 세계가 이 세상입니다. 그럼 뭘 행하느냐? 행하지 말고 소속되시면 됩니다. 어떻게 돼요? 하늘이 찢어지고 성령이 예수님에게 왔던 것처럼, 성령이 여러분 속으로 주어지면, 여러분들은 개인구원이 아니고 예수님께 소속된 입장에서, 예수님의 공로로 여러분들은 구원받습니다. 왜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같이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자, 요한일서 이제 들어가 봅니다.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행하라가 아니라 고백하라는 겁니다. 너의 소속을 고백하라. 새 언약이 완성됐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언약이 되죠. 그걸 요한일서 2장에서는 한 계명(화목제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2절,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일서 2장 3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계명을 지키면 계명을 지키는 자가 부각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안다면, 아들이 무슨 아들? 화목제물 되신 아들. 그래서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화목제물에 대해서 동의하느냐가 계명을 지키는 것이 돼요. 그래야 자기가 소속된, 그 소속의 특징을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게 6절에 보면,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저 안에, 안이라는 것은, 누구 안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다음에 행함이 나오는데, 모든 우리의 행함은 내가 착하다가 아니라, “나는 이런 소속 안에 있습니다.” “소속되어 있습니다.”를 증거 하는 행함이 나오는 거예요. “성령 안에 있습니다.”또는 “예수 안에 있습니다.”를 증거 하는 티를 내는 행함이에요. 착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을 나타내는 행함이죠. 그리고 예수님에게 소속되어 있고. 안이라는 말은 바깥이 따로 있다는 말이에요. 어디 안에 있다는 말은 바깥이 있어줘야 안이라는 말이 성립돼요. 안과 밖 두 개가 있어야 안이라는 말이 돼요. 우리 바깥에는 화목제물이고 우리는 그 안에 있고.

 

그래서 이 계명이 뭐냐, 마지막 계명이에요. 사랑이라는 마지막 계명이에요. 요한복음도 마찬가지고 요한일서도 그렇고. 그 하나 계명밖에 없어요. 그 계명이 뭐다? 예수님은 화목제물이다. 그 화목제물이 뭐냐 하면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계명이에요. 그것이 모든 언약의 완성입니다. 언약이 완성되면 뭐가 된다? 묵시가 되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이 영을 받아서 묵시가 된 것처럼, 우리가 거울을 봐도, 거울 보니까, 본인이 뭐 묵시처럼 보입니까? 뭐 천사처럼 보여요? 무슨 천사가 늙어요? 주름살이 자꾸 늘어나고? 천사, 묵시적 존재.

 

영적존재가, 성령 받은 존재가 자꾸 늙어가고, 기운이 떨어지고 치매 걸리고 그래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우리 옛사람은 이미 후패해야 되고 우리 속사람은 새롭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자, 우리의 옛사람이 떨어져나갈 때, 옛사람 속에 있는 기능들은 어떤 기능들이 있을까요? 나만 사랑하는 것,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것, 세상 것 끌어 모아서 남한테 뽐내는 것, 내 나와바리, 영역을 지키는 것, 이런 것들이겠죠.

 

많이 피곤하신데, 제가 보니까 역력하게 옛사람이 다 보이네요.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세상이 통일되어 있습니다. 화목제물, 예수님으로 통일되어 있죠. 예수님으로 통일되어 있으니까, 이 전체는 뭐가 적용이 된다? 기준이 적용되죠. 무슨 기준? 화목제물로 해서 죄 용서받으면 천국, 화목제물을 핍박하면, 아까 했었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모독하면 또는 희롱하면 지옥 가죠. 이 전체가, 유일한 현실은 예수님으로 통일되는 현실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전체 안에, 예수님의 통일된 현실 안에, 우리는 짧게 나름, 나름대로의 통일된 현실이 있어요. 나는 이렇게 해서 복 받았다. 저렇게 해서 복 받았다. 행함으로 이만큼 살았다. 이런 것이 있겠죠. 내 뒤에 있는 사람도 나름 있겠죠. 내 앞에 할아버지도 나름 있겠죠. 각자 한평생 살아간 것들이 나름대로 있겠죠. 이 할아버지는 1918년에 태어나서 1972년에 죽었다. 이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나름 있었겠죠. 나름대로 살아가면서 뭐합니까? 자기 현실이 있겠죠. 여기에 뭐가 끼어드느냐 하면 화목제물이 다 끼어듭니다. 십자가가 끼어듭니다.

 

그래서 만약에이 할아버지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자기 인생을 증거 할 때, 나는 이렇게 살았다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 누가 끼어들었다? 주님의 화목제물이 끼어들었다. 한 계명이 끼어들었다. 사랑의 계명이 끼어들었다. 이러면 그 사람은 언제 태어났든, 결국 천국에 합류되는 우리의 신앙의 선배가 되는 겁니다. 만일 이 할아버지에게 친구가 말하기를, 친구야! 니는 무슨 보람으로 사나? 이러면 그 할아버지가 뭐라고 해요? 나는 죄인 된 보람으로 살아간다. 왜? 죄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주께서 죄를 끄집어내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사람 인생 자체가 이미, 그전부터라도, 그 이후라도 그 사람 시대에 이미 예수님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처음이요, 나는 끝이니까. 우리는 그 사이에 있거든요. 처음과 끝 사이에, 그 사이에 화목제물의 영향이 이미 다 속속들이 끼어있어요.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오늘 9월8일 오후 3시, 4시 사이에도 끼어들어 있어요. 화목제물이. 빵이 참 맛있다. 빵이 맛있어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고, 무슨 빵을 먹든 간에 십자가 안에서 영생을 얻은 거죠.

 

근데 우리는 그걸 다 알지만 생략하죠. 그냥 빵 맛있다고 이야기하죠. 그 뒤에는 빵이 맛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산다는 이야기에요. 문장이 너무 길잖아요. 그걸 줄입시다. 참, 빵 맛있네! 우리끼리는 이렇게만 해도 다 통하는 것이 있으면....,그럼 제가, “집사님 빵 맛있어요?” “나도 빵 맛있어요.” 라고 하는 말은 그게 진담이 아니고, “나도 빵 맛있는데 이것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 않겠어요?

 

항상 우리는 그렇게 내가 행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용서해주시는 효과를 증거 하라고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나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의 계명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게 6절에 보면 우리는 “그 안에 거한다.” 라고 되어 있어요. 거한 적이 없고 나 혼자 있다면 나만 자랑질 할 거예요. 만약에 거하게 되면 절대로 내자랑 못하고, 우리는 나를 거하게 만드신, 성령 받게 하신 예수님의 화목제물이 와따고 유일한 기준이에요.

 

유일한 기준, 이것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은, 그 기준 앞에, 십자가 앞에 어떤 기준도 들이대지 말라는 거예요. 공부 잘해야지? 아니, 들이대지 마! 부자 되어야 되지? 아니, 들이대지 마! 교회 커야 되지? 아니, 들이대지 마! 아프면 안 되고 건강해야 되지? 아니, 들이대지 마! 그거는 기준이 안 돼요. 나는 착하다. 니가 착한 것, 기준이 아니에요. 나 말고 유일하신,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렇게 합시다. “저요?” 나 안 믿고 누구만 믿는다? “예수 믿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라는 겁니다. 예수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자가 없느니라”(3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야 되죠.

 

기계적으로 예수 믿는 것 아닙니다. 진짜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을 주라고 한다면, 그거는 뭘 근거로 하느냐 하면 나는 절대로 나를 자랑하거나 믿을 수 없습니다. 물론 옛사람은 평소에 자랑해요. 3초 빼놓고 23시간59분57초는 자랑해요. 하지만 그 3초가 나의 본질이고, 나의 원조고, 나에게 나올 수 없는, 행함에서 나올 수 없는, 외부에서 내 안에 박힌 이런 묵시적 가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