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07 요한1서 시카고강의5-이 근호 목사
다섯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요한1서 1장 8절을 같이 한 번 봅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믿음직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은 딱 무슨 말씀이냐 하면, 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죄만 상대한다. 이런 뜻입니다. 죄가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서 나는 너희를 상대한다. 내가 죄를 겨냥한 것처럼 너희들도 너희 자신 속의 죄를 내 앞에 가져오게 되면, 이로써 하나님과 구원계약은 성사된다.
우리가 가게에서 물건 살 때, "물건주세요." 하면서 뭘 내밀죠? 돈을 내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저기, 죄를 가져왔으니까 용서를 주세요." 라고 이야기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까요? 물건 가져오기 전에 먼저 뭘 가져와야 돼요?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뭡니까? 돈을 준비해야 되잖아요. 이해되시죠? 가게에서 그냥 물건을 가져올 수는 없잖아요. 그럼 하나님 앞에서는 뭘 준비해야 해요? 돈 필요 없고, 정성 필요 없고, 의미 필요 없고, 뭐만 준비하면 돼요? "죄 가져왔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렇지! 니가 제대로 나를 아는구나." 이러시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뭘 가져오느냐 하면 "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하는 거예요. 젠틀맨이라는 노래에 그런 가사가 있어요. 전부 다 잘남을 가지고, "니 아들 몇 등 해?" "우리 아들은 몇 등 하는데?" "차는 뭐 타는데?" "차는 이거 타는데?" 뭔가 잘남을 가지고 물물 교환하듯이 가져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마음을 낮췄습니다." 마음 낮춘 것 가져와가지고 주 앞에 축복 달라고. 물물 교환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이렇게 주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봉사를 했으니까, 주께서 다 꼬불쳐놓은, 준비해놓은, 그 30배 60배 100배 주시옵소서." 30배, 60, 100배가 뭔가 이상한 게, 세상에! 100배가 눈앞에 보이는데 30배, 60배 달라고 하는 것도 뭔가 이상한 거예요.
달라고 할 것 같으면 100배를 달라고 해야지, 근데 주님께서 30배, 60배, 100배를 이야기하니까, 주님께서 객관식 문제를 내신 것도 이상해요. 딱 100배 준다고 하면 아무 문제없는데, 30배, 60배, 100배를 준다고 하니까, 어느 누가 100배가 아니고 30배를 탐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100배 주세요." 하잖아요. 그렇게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우리가 못되니까, 우리는 뭐냐, 가져올 때, 죄를 가져왔기 때문에 딴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죄를 가져왔다는 것은, 주님이 어디에 전문가냐 하면, 죄 씻어주는 전문가. 그게 끝.
그래서 여러분이 죄 씻음 받았으면, 얻어낼 것 다 얻어냈고, 받을 것 다 받았어요. 그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 마세요. 죄 씻음 받았는데, 딴 것을 요구하게 되면 그거는 다른 하나님을 상상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죄를 가져오너라! 다시 말씀드릴까요? 돈 가져오너라! 물건 줄게. 문방구에서 신상품 나오면 애들이 막, 아침에는 안 나왔는데, 오후에 물건이 나와 있을 때, 그럼 애들이 "아저씨! 외상 돼요?" "으응~ 안 돼! 집에 가서 엄마한테 이야기해서 돈 가지고 와라." 하죠. "하나님! 천국 돼요?" "으으응~ 안 돼! 집에 가서 죄 가져오너라. 죄 가져오면 천국 줄게."
의인은 천국에 못 갑니다. 주께서 의인을 요구하지를 않아요. 주께서 요구하는 것은 죄인을 요구하기 때문에, 죄만 가져오면 천국주십니다. 정말 들어보면 이건 주일학교 어린이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어른들은 왜 자꾸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어요. 죄 가져오라고 하면 자꾸 정성들이대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해가지고 기도했다고 하고. 자, 기도 가져오는 사람, 헌금 가져오는 사람, 전도 가져오는 사람, 봉사 가져오는 사람, 가정의 화목 가져오는 사람, 왜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가져와요. 주께서는 그걸 안 받습니다. 근데 그걸 왜 가져오느냐 하면, 가짜 하나님을 자기가 만들어가지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상대한다. 인간을 안 봅니다. 죄인만 상대하지 인간이라는 것은 없어요. 죄인을 상대하지. 이 말을 더 나아가보면 하나님은 죄를 만들어내면서 죄인과 상대한다. 좀 더 발전돼야 합니다. 아까 하나님이 죄와 상대한다고 할 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면 "그럼 제가 죄를 만들어오겠습니다." 이래 되죠. 그게 땡이라는 겁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니가 죄를 지어서 죄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니는 죄를 만들 재주가 없어요. 죄를 누가 만드느냐? 하나님이 죄를 만들어내신, 하나님이 만들어낸 죄를 가져오면 용서해줄게.
그럼 하나님께서 만들어낸 죄를 가져오는 방법이 뭐냐, 이거는 왕년에 성경공부 좀 했던 사람들은 다 압니다.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는 방법이 뭐겠어요. 율법이죠. 율법. 하나님의 법인 겁니다. 하나님의 법. 법이 없는 곳에서는 뭐도 없다? 죄도 없다. 없는 죄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집어넣어버리면 없는 죄도 새롭게 만들어져요.
이거 뭐 과격한 것도 아니고. 로마서 7장에 분명히 나와 있는 겁니다. 제가 혼잣말로 안 들리게 하는 것은 녹취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근데 이 말도 녹취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8절에 보면,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절,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너무 좋은 말씀이라고 제가 감격스러워요.
전에는 나는 나라고 우겼죠? 조폭같이. "이리 오너라." "누구십니까?" "나는 나야." 자기가 살아 있어요. '나를 알아 도! 나는 이정도야. 내 재산은 이정도고. 나는 이정도로 깨끗한 사람이야. 나를 알아 도!'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성경 말씀대로 나는 살아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리와! 이리와! 너 이리와! 니가 어떤데?" "저 살아있습니다." "이리와! 이리와!" 여기 7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나는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주께서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것을 집어넣으니까, 졸지에 탐내지 말라는 그 율법에 의해서, 율법이 살아나면서 동반해서 뭐가 살아나느냐 하면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죽어있던, 탐냈습니다를 살려내고 살아있다는 나는 죽여 버린 거예요. 다시 한 번 텀을 줍시다. 지금 긴장해야 될 시간이에요. 주무시면 안 됩니다. 내 속에 잠자고 있던 내 죄를 끄집어내고 나도 살아 있다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동시에 나를 죽였다는 겁니다. 죽였다.
제가 억지로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 말보다 성경 자체가 더 어려워요. 이거는 여러분들이 증거 할 수 있죠? 성경 방금 봤죠? 성경 여러 장 봤죠? 대단히 어렵죠? 제가 나름대로 쉽게 해드리는 겁니다. 자, 성경을 볼 때, 출발점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자, 성경을 내가 덮었다고 치고, 로마서 7장을 모른다고 치고, 상상해봅니다. 나는 살았고, 살아있는 내가 죽어도 나는 좋은데 가야지. 나는 지옥가기 싫어. 그럼 거기에 물 한 방울 없는데 거기 왜 갑니까? 갈려면 살아서도 고생했는데 죽어서는 고생 안 해야 하지 않습니까? 천국 가려면 내가 뭘 하면 좋을까? 옳지! 성경을 읽자. 펼쳤는데, 로마서 7장 나왔어요.
"주님이여, 저 좋은 말씀 걸렸습니다. 자, 제가 천국 가는 데 있어서 주의 말씀 지킵니다." 라고 보는 거예요. 보는데, 살아있는 내가 살아서, 주의 말씀 지켜서 산 채로 천국가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니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너를 산 채로 보내지 않고 너를 죽인 채로 보내겠다." "그럼 자살할까요?" "자살하지 마! 내가 너에게 뭘 보여줄게. 뭘 보여주게 되면 니는 자살 안 해도 이미 죽은 자가 되고." "그럼 죽고 나면 못하잖아요?" "죽은 동시에 니 속에 있는 죽은 죄를, 도리어 이제는 살려내어서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와 하나님과 관련지을만한, 의미가 있는 죄인으로서 우리를 상대하시는데, 그 솜씨를 내 쪽에서가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성도에게 실시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럼 여기서 제가 질문 하나 들어갑니다. 자, 질문이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율법을 대할 때만 탐심이 일어납니까? 평소에도 탐심이 일어납니까? 평소에도 탐심이 일어나죠. 그럼 우리가 평소에 율법을 모르고 산다면 사람이 탐내는 것이 그게 정상이죠. 나만 그래? 다들 그러지. 이쁜 것 보고 이쁘다고 하는데, 뭐가 문제야? 그리고 주여, 그것도 죄입니까? 이래 나오죠. 전혀 우리는 탐낸다는 사실을 주의 뜻이 아니면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의 율법을 보게 되면, 그것이 탐낸다는 죄를 영글어내기 위해서, 만들어내기 위해서 우리 앞에 맛있는 선악과부터 해가지고, 역사 끝 날 때까지, 어쩌면 이 세상에서 탐낼 일이 그렇게 많은지. 이쁜 여자도 있고, 잘생긴 남자도 있고, 차도 있고, 좋은 집도 있고. 아침에 눈만 뜨면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는 것으로 쫙 깔려있어요.
"여기 좋사오니" 베드로가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내 맘에 드는, 그냥 떠나기는 너무 아쉬워. 아쉬워. 가더라도 누릴 것은 누리고, 즐길 것은 즐기고, 노래방에 가서 한 한 시간정도 노래 부르고. 그렇게 하고 싶어요. 주께서 재림하셔서 휴거하는데, 저기 재미있는 파티에 한 번 참석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그냥 나와! 손잡고 하늘로 그냥 올라가게 되면, 좋긴 좋지만 예를 들어서 못해본 거, 골프 치는 것도 좀 하고 싶고, 뭔가 손을 대서 코도 높이고 싶고, 이런 것을 못해보고 천당에 가니 좀 섭섭할 거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데려갈 때, 우리가 죄에 딸려 가는 거예요.
그 죄가 어디서 나왔는가? 너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너는, 그게 죄를 죄 되게 하는 시다발이로, 죄에 딸려서 가는 거예요. 내 주체가 주인이 아니고, 내 속의 죄가 주인이 될 때, 바로 그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인 것을 알 때, 우리는 제대로 하나님을 아신 겁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아신 거예요. 그럼 이런 하나님을 아신다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에만 국한되고, 성령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상대할 때, 내 속에 죄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나 자체와, 하나님 자체와 흥정과 타협과 협상에 의해서 구원되고, 안 되고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신이시여, 착한 일을 원하시죠? 제가 압니다. 천국은 깨끗한 사람이 간다는 것을 제가 아니까,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51퍼센트의 선한 지분을 얻어서 가겠나이다. 됐죠? 됐나? 됐심니까? 이러면서 가는 거예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의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안다 치고,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죄가 무엇이냐? 율법에서 끄집어낸 그 죄가 무엇이냐를 이제부터 설명 들어갑니다. 구약에서는 죄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들어보시면 여러분이 아! 하고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우상. 우상숭배가 죄입니다. 우상숭배가 죄인데, 여기, 우상숭배라고 하니까, 여러분들이 "아이구, 목사님 그게 죄인 줄 알아요." 하잖아요. 그럼 제가 맞나, 틀리나, 한 번 해보겠습니다. 안다고 하니까 약간 약이 올라서, 우상이라는 것을 이렇게 쓰겠습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죄입니다. 이거 납득이 됩니까?
방금 제가 이거 쓰기 전에 뭘 썼습니까? 우상이죠. 구약에서 에스겔이 우상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지적을 하잖아요. 근데 그 당사자들은 우상을 믿었어요? 하나님을 믿었어요? 하나님을 믿었어요. 참 하나님을 믿었어요. 인간이 기껏 믿었던 하나님은 전부 다 우상이 됩니다. 왜? 인간 안에 뭐가 잠복되어 있기 때문에? 죄가 잠복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주체가 아니고 죄가 주체죠. 죄가 하나님마저 왜곡시키고, 변경시켜서, 내 죄가, 죄가 아닌 걸로 위장하는데 필요한 짓만 골라서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오늘날 한국교회에요. 어쨌든 간에 내가 섬기고 헌금하는 것을 칭찬해주는 하나님을, 나의 예수, 삼위일체 하나님, 뭐 명칭이야 어떻든지 간에 진짜, 진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섬기는 거예요.
그렇게 섬겨버리면, 나의 죄는 더 이상 들키지 않고, 나의 장점 들고 하나님과 직접 흥정에 나서기 때문에, 30배 이야기가, 60배 이야기가, 100배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주님이여, 십일조 한다고 애쓰는 것 주께서 아시죠? 이거 돈 모으니 라고 애 먹었습니다. 이번 교육관 짓는데 제가 얼마나 공들였는지 아시죠? 저희 집 팔아서 전세로 옮기고 나머지 가지고 바치는 겁니다. 주께서 이뻐해 줄 거지용? 이러거든요. 이미 그 자체가 구약에서는 뭐냐 하면 우상이지만, 오늘날에 나 우상 섬긴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없어요. 전부 다 참참참 신, 가짜 참기름 말고 진짜 참기름 있잖아요. 진짜 참기름을 못 믿어서, 진짜, 진짜 참기름 하는 것 있잖아요. 진짜, 진짜, 그것도 모자라서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섬긴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이었습니다. 추호도 자기가 믿는 여호와가 하나님, 진짜 여호와로 알았지, 우상이라고 평가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어느 누구도 상대방이 믿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그것을 어제 밤에 이야기했습니다. 공동체에서 질서를 위해서 하는 그것을 윤리라고 하죠. 어제 것 복습합시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양심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도덕. 윤리를 파괴하는 것은 짐승만도 못하고, 도덕이 없는 인간은 죽여 버립니다. 여러분 정신병자와 짐승만도 못한 것을 구분해야 해요. 정신병자는 혼자서 도덕이 없어요. 그러나 남을 괴롭히고 혼자 설치는 이런 인간들은 쳐 죽일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회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면 병원에 가야하지만, 윤리적으로 문제 있으면 교도소에 보냅니다.
제가 갑자기 어려운 이야기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 이해되시죠? “저 인간은 교도소 보내야 돼. 이거는 정신이 말짱한데, 까불락 대는 것은 교도소에 보내야 돼.” 그런데 이건 뭐 물인지, 잉크인지, 돈인지 모르는, 정신이 이상한 이런 사람은 무슨 도덕이 있습니까? 그냥 파충류 본능대로 움직이는데. 아니, 2개월 3개월 된 애기한테 도덕도 모른다고 하면 말이 돼요? 지금 집안이 부도가 나서 차압이 들어왔는데, 애는 그 사실을 모르고 젖 달라고 울고 있을 때, “애야, 니는 도덕도 없나? 니는 양심도 없나? 우리 집 봐라. 지금 차압 들어왔는데 니가 젖 달라고 울면 줄 수 있겠나?” 이걸 애한테 할 이야기가, 할 잽이 안 되죠.
그걸 애한테 하면 애가 압니까? 그럼 애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으으응~” 하면서, 애가 천재에요. 천재. ‘우리 집안에서 내가 조심해야지. 내가 너무 먹는 것만 챙기나?’ 이러면서 젖을 안 먹죠. 이건 이미 밥 먹는 정도가 돼야 되지, 젖 먹는 애가 무슨 그런 시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른 됐다고 해가지고 남한테 사기나 치고 지 잘난 척 하는 것은 교도소에 집어넣을 윤리라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인간은 뭘 지키려고 하겠어요? 도덕과 윤리를 지키려고 하겠죠. 윤리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 사회에서 사람대우 받으려고 하는 것. “나 이정도 도덕적이야. 또는 저사람 앞에서는 나는 기본 부모교육을 잘 받았기 때문에, 나는 어디가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이야.” 라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고 인정받고 있죠. 그렇다면 사람들에게만 인정받아야 돼요? 저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께도 인정받아야 되겠어요?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아야 되겠죠. 그렇다면 윤리, 도덕을 살리고, 살리고, 기 살리고, 살리고 하는, 그 살리고를 인정해주는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이스라엘이고,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대로 남은 거예요. 그게 우상이었다는 거예요. 우상.
선지자는 고난 받는데, 그들은 윤리도덕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복 줄줄로 알았던 거예요. 선지자는 핍박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1장 비유에서 포도원에 종을 보냈어요. 포도원 농부들이 때리고 죽이고 아프게 했어요. 또 보냈어요. 또 때리고 죽이고 아프게 했어요. 마지막 아들을 보내니까, 이제 아들만 죽이면 이제는 포도원이 우리들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왜 이야기하셨습니까?
인간의 인류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고 뭐고 없이, 나는 이 정도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신은 나를 천국에 넣어주어야 하고, 30, 60, 100배, 복을 줘야 되지. 나를 이렇게 섭섭하게 하는 하나님은, 나한테 믿으라는 소리 하지 마! 당신은 사탄이지 진짜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 구미에 맞고, 내가 선택할만한, 그런 어떤 나한테 괜찮은 장점들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럼 나도 당신을 선택해서 믿겠습니다.
이 건방떠는, 이것이 선악과 따먹은 악마의 표현형이고 악마의 앞잡이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니그들 애비는 악마니라. 어떻게? 악마이야기 들어보니까 악마가 참 정상이죠? 어쩌면 우리하고 공통적인 동일한 심성을 갖고 있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교회 다녔고, 뭐 착한 일 하게 되면 다음 주가 은근히 기대돼요. 착한 일 했으니까. ‘참 우리 애가 이번에 시험 치네? 토요일에 치는데, 국가시험 친다고 했는데, 사전에 착한 일 좀 많이 해야 되겠다.’ 조심~조심~왜? 내일 시험 치는데 함부로 경솔하게 굴다가는, 나한테 올 벌이 자식에게 떨어지면 성적이 떨어질 수 있어요. 일단은 시험 끝날 때까지는 방종하지 말고 근신하고 있어요. 시험치고 난 그 다음부터는 스트레스 풀더라도 시험 전까지는 조심하는 거예요. 그렇게 계산하는 고 심보, 우상적인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저한테 항의가 들어오죠. “목사님. 저는 그런 신 말고, 참된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고거는 더 지독한 죄가 되는 겁니다. 감히 처음부터 그렇게 다짐을 하고, 친절히,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착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뭘 원한다? 죄를 원한다고. 사전에 그렇게 고집했던 되도 않는 질문 받고 상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쯤 돼서 강의하게 되면, “그럼 목사님, 저는 우상섬기지 않고 참된 신을 섬길게요.” 또 이래 나온다 말이죠. 인간들에게 나올 것은 우상밖에 없어요. 사람의 행동이 지 좋아라고 행동하지, 누구 좋아라고 행동하겠어요?
내 도덕을 알아주고 내 윤리를 알아줘서 거기다가 보너스까지 해서 복까지 주면 금상첨화인데, 그런 하나님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게 바로 우상이고 죄인데, 인간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죄를 찾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only you~♬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 사람은 바로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 해결 할 수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보고 빠지래요. 죄인이 껍죽대지 말고, 니가 하나님도 모르면서 하나님하고 거래하려고 나서? 내 뒤에 서!
영화관에 가서 표 사는데, 앞 사람이 열 사람의 돈을 다 내겠다고 해요. 그럼 돈 내는 사람 뒤에 서면 될 거 아닙니까? 돈도 안 내고 공짜로 보는 주제에, 표 살 때, 앞에 와서는 “F열에 5번 걸로.” 아니, F에 5번이라니요? 천국은 그 분 맘대로, 값을 지불하는 그 분이 어느 자리인지 그건 그 분이 결정하지. “니는 내 뒤에 서라.” 뒤에 서라고 하니까, “에이, 창가에 제일 좋은 자리로 주지.” 이런 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자꾸 지가 간섭하는 거예요. 주여, 내 인생 이래 가지 말고, 이래 가가지고 천국에 넣어주세요. 우리 아들 좋은데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자꾸 주님한테, 자꾸 이렇게 뭐라고 할까? 압력을 행사한다고 할까요? 뇌물 비슷한. 자꾸 주님의 결정에 압력을 행사하는 거예요.
"우리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1:7), 오늘 본문처럼 우리 서로 사귐이 있잖아요? 사귀면 내 말 들어줘야 할 거 아닙니까? 이왕 할 거면 이렇게 해주세요. 어이, 죄인아! 내 뒤에 가. 내 뒤로 가. 애들 노래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런 노래 알아요? 중국에도 있어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하면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겠니. 찾겠니. 하면 뭐 누구 꽃을 찾겠다. 찾겠다. 해서 가위 바위 보를 합니다. 자, 가위 바위 보를 하는 사람의 결정에 의해서 뒤에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뽑혀서 이긴 편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할 때, 그 대표자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왜? 유일하게 우상이 아닌 참 하나님을 아시니까. 그러면 예수님 뒤에 서야 돼요. 그걸 성경에서는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승리를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냥 뒤집어쓰는 겁니다. 여기는 집이 단독이잖아요? 근데 아파트 보면 베란다가 있어가지고, 가족한테 안 좋으니까 베란다에 가서 담배 피우면 3층으로 담배냄새가 올라가니까, 담배냄새 싫어하는 3층에서 2층한테, 담배 좀 피우지 마세요. 이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우면 간단하죠. 3층에서 바케쓰에 물을 가득 받아서 부어버리면 되죠.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를 뒤집어쓰는 거예요. 죄가 전혀 보이지 않도록 바케쓰 물 퍼붓듯이, 우리가 뭐 잘했다, 못했다 하는 자체를 그 의미가 없게 만들어요. 그 자체를.
내 윤리도덕을 챙길 여지가 없게 만들어요. 자, 아까 사실은 윤리도덕 앞에 뭘 빠트렸어요. 이 도덕은 나의 도덕이고, 이 윤리는 나의 착함을 보여주는 나의 윤리잖아요. 이 나의 도덕, 나의 윤리로 흥정해서 가겠다는 것은, 이게 바로 뭐냐 하면 개인구원이에요. 개인구원.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예수 이름 외에는 달리 구원받을 이름이 없어요. 너 말고 너를 대표하는 사람 이름 대라? 이 말이에요. 그럴 때, 내 이름 댈까요? 누구이름 대야 돼요? 누구이름 댈까요? 주의 이름 대야 돼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참 쉽죠잉~ 너무 쉽죠.
너무 쉬운데, 그 말을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왜 기분 나빠 합니까? 자기 요구가 옵션으로 안 들어갔다고 짜증내는 거예요. 자기 요구사항이. 그러니까 자기죠. 자기. 나죠. 그러니까 개인구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꼭 이렇게 머리를 내밀고요. "저는요?" 이래 나와요. 이게 나무랄 입장이 안 되는데,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에도 있었어요. 전체 예수님 제자들이 열둘이 맞는데, 또 치맛바람이 있어가지고 우리 애가 천국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세요. 꼭 이렇게 개인구원으로 들이대는 엄마가 있어요. 누가 높으냐, 하는 사람이 있고.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입장에서는 다 죄인으로 다루기 때문에, 개인구원이 없고, 주님의 공로로, 주의 이름으로 가는 겁니다. 그럼 주의 이름으로 간다는 말은, 그럼 "주의 이름을 부르는 나는 개인이잖아요?" 이래 나옵니다. 이래 나오면 안 돼요. 왜냐하면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나만 부르면 내 개인으로 가는데, 이 세상에서 나만 구원받을 것 같으면 개인구원이 되는데, 주의 이름을 나만 부릅니까? 아니면 내가 평소에 사이도 좋지 않는 저 사람도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에이씨. 니가 왜 천국에 와? 니가 천국에 오면 나는 천국에서 못 살아. 니가 천국 오면 나는 지옥 갈 거야. 나 니 꼴 보기 싫어서 천국 가는데, 니까지 오면 어떻게 할 거야? 이래 나오는 것이 개인적인 구원의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런데, 어? 내가 믿는 주님을 저 사람도 믿어. 그러면 차이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둘 다 구원받은 상태에서 차이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차이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번 강의의 제목을 구태여 붙인다면, 지금까지는 안 붙였는데, 붙인다면 이겁니다. "무차별성" 일체 차이가 없어요. 일체 차이가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물 주었다고 했던, 어떤 사람은 심었다고 했던, 뭘 했던, 심었다고 상금 더 주고 물 뿌렸다고 상금 더 주는 것 없습니다. 아까 예를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내 이름 아니라고 했죠. 예수 이름으로. 앞에 표 값을 대신 내 준, 그것을 죄 값을 치러 준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 이름으로 라는 말은, "예수님이 이미 내 죄를 치렀잖아요." 라고 동의한다 이 말입니다.
천사가 와서, "야! 니 뭘 잘했다고 천국에 와?" "누가 내 대신 죄 씻어 줬어요." "누군데? 그게 누군데? 석가모니?" "아니요." "누군데?" "나사렛 예수님이 나를 씻어줬어요." "어이구! 이거, 니가 언약완성을 아는구나. 들어와! 들어와!" 천국에 넣어준다 말이죠. 들어가는 것 까지는 좋은데, 보니까 지 돈 떼먹고 부도나게 만든 그 인간도 들어온다 이 말이죠. 옆에. 그래서 지는 가면서 발로 차는 거예요. 시비 거는 거예요. "어이! 니가 천국을 니가 뭘 보고 들어와?" 주님께서 대신 값을 치러주신 이유가 오늘 요한일서 말씀에서 우리를 뭘로? 인간으로 보지 않고, 행함으로 보지 않고, 윤리도덕으로 보지 않고, 우리 속에서 뭐만 끄집어냈다? 죄만 끄집어내서, 죄와 예수님의 그 씻어주심과 해서 천국 넣어주는데.
갑자기 서로를 보는 순간, 갑자기 둘 다 죄인이라는 생각은 날아가 버리고, "저 인간 때문에 내가 한평생 고생한 생각하면 내가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 니가 지옥가든지 내가 지옥가든지, 둘 중의 하나는 가야지. 그래도 주께서 가라고 하니까 가지만 주님의 무슨 조치가 있을 거야." 하고. "어이, 이리와 봐!" "아이구, 돈 못 갚아서 미안하다." "미안한 것은 아는데, 니가 나한테 사기 친 것은 아는데, 니 여기 왜 왔어?" "천국 갑니다." "천국 간다고? 니가 나한테 나쁜 짓 한 거 알지?" "아이구, 나쁜 짓 한 거 알죠. 그러니까 내가 죄인입니다." "듣기는 들었구나. 나중에 천국 가서 한 번 보자."
그래서 천국까지 간다 이 말이죠. 둘 다 천국 갔다고 치고. 이건 상황극입니다. 하나의 상황극인데, "주님!" "왜? 기쁘지?" "예. 기쁜 건 기쁜 거고 찝찝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나는 천국 받을만한 정당한 사람인데, 저 사람은 사기 쳤는데 여기 왜 왔습니까?" 이렇게 고소하는 이유는, "에구, 니 고생 많이 했었쪘쪄요? 니는 천국에 높은 자리에 가고. 뭐? 사기를 쳐? 니는 저 구석에 가라!" 라는 판결을 우리가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것 때문에 그래요. 이게 바로 갑자기 집단구원에서 다시 뭐로 바뀌었어요? 개인구원으로. 그럼 뭐가 날아갔어요? 무차별성. 앞에 뭐 하나 붙입니다. 죄의 무차별성. 죄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 있잖아요? 도둑질 한 사람하고, 살인한 사람하고, 살인 하나도 안 한 사람하고 차이 나잖아요? 아니요. 내가 죄를 찾아서 죄를 바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율법을 주어서 찾아내게 되면, 그 찾아낸 죄는 똑같아요. 더 시커멓다. 시커멓다가 아니라 다 시컴해요. 똑같아요.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가서 싸울만한 일이 있거든 천국 가기 전에 실컷 싸우세요. 누가 잘했나? 하고 싸우세요. 천국 가봐야 안 통하니까. 그건 내가 만든 법가지고, 내가 만든 기준가지고 싸우다가, 그냥 싸우다가 끝나면 안 되고. 싸우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둘 다 죄인이지? 그치? 이걸로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싸울 건 싸워야 해요. 성질나는데 안 싸울 수가 없어요. 실컷 싸우다가, 그러니까 우리는 둘 다 똑같은 인간이야? 그치?
싸우게 된 상황은 주께서 유발한 상황입니다. 싸워서 없던 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죄인인데, 싸움을 통해서 자기 본성을 노출시키게 주께서 그렇게 유도하신 거예요. 심지어 부부싸움까지도 주께서 유도하신 겁니다. 뭐 신비주의라고 탓하지 마세요.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그럼 성도한테 그런 특혜를 주는 이유가 죄를 가지고 오지 아니하면 천국은 없습니다. 사람은 죄를 감추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어떤 사람은 죄를 자꾸 끄집어내는데, 자기 손으로 자기 죄를 끄집어내지 마세요. 가만히 그냥 사세요. 그냥 살아도 죄인데, 거기서 뭘? 죄도 아닌 것을 가지고 지가 뭐, 무슨 새삼스럽게 죄를 구분해요? 물에다가 참기름 집어넣고 휘발유 집어넣어보세요. 집어넣고 참기름하고 휘발유를 구분하라고 하면 구분할 수 없어요. 전부 다 섞여가지고 다 기름인데, 이걸 어떻게 구분해요?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로새서 3장 5절에 있는 말씀이죠. 모든 것의 눈에는 탐욕이 있고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구약에서 주께서 이스라엘을 저주케 했던 그 원인은 우상. 그리고 모든 죄는 뭐냐 하면, 니가 잘못해서 죄가 아니고, 다른 하나님, 우상이니까. 다른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알고 살았던 그 모든 것이, 바로 죄의 가장 기초였고 뿌리였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님. 그럼 다른 하나님이 죄라면, 의는 뭡니까? 뻔하죠. 참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의가 되겠죠. 그럼 참된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죄 용서 할 때 압니다. 죄 용서할 때. 아, 그러면 죄를 알고 가져오면 용서해준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언제요? 용서할 때, 비로소 내 죄가 어떤 죄인지를 뒤늦게 알죠. 순서는 죄 가져오면 용서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니가 죄를 알면 용서가 된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거는 우리가 다 떠나고 난 뒤에 아는 순서고, 실제 현실적인 순서는 뭐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용서해주고 용서했던 죄가 무엇인가는 뒤늦게 죄를 까발리는데, 우리의 한평생을 다 보내게 하십니다. 금메달 따고 난 뒤에 금메달 딸 때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평생을 통해서 알게 되는 거예요. 어제 이야기했죠? 우리는 끝까지 배신자여야 한다고요.
그 배신하는 범위가 뭡니까? 내가 나에 대해서 배신해야 돼요. 아브라함이 아브람을 배신하게 되죠. 어제 이야기했습니다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든 피조물이 아브라함이죠. 근데 아브람은 뭐냐 하면 혈통적으로 온 것이 아브람이에요. 나의 본능적인 본성이,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나를 핍박을 해도 그렇게 핍박이 심해요. 내가 나를 핍박한다니까요. 하나님이 만든 새로운 피조물은 뭐냐,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거예요. 옛날의 나, 잘나갔던 나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 좀 죄 좀 지을 수 있지? 뭐? 죄만 지었나? 착한 일을 더 많이 했는데?" "니 교도소 몇 번 갔다 왔어?" "안 갔다 왔는데요." "거봐! 니 착하잖아."
자꾸 옛날의 나는 나를 긍정하려고 하고, 죄를 용서해준 예수님이 들이대는 진짜 나는,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그 나고. 이 두 개의 나 중에서 하나님은 누굴 좋아하느냐 하면, 주께서 만들어준 나를 좋아하는데, 나는 누구한테 정이 들고, 맘에 들고, 자연스럽게 따라가느냐 하면, 역시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남한테 자랑할 것이 있을 때, 희망도 있고 살 보람도 있고. 우리는 이쪽을 그렇게 집착하고 좋아하는 거예요. 아줌마들 모이면 지 자식 자랑들 하는데, "이번에 우리 아들 하버드대 들어갔는데, 대출까지 해도 공납금 걱정돼서 죽겠어." 공납금 걱정하긴 뭘 걱정 해. 지금 지 자랑하고 있는데. 사람 사는 재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 자랑하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서는 못 살아요. 왜? 자랑 할 대상이 있어야 살거든요. 남편이 직장에 가고 난 뒤에, 설거지 대충 하고 나면 아침 아홉시 반 됩니다. 그때부터 언제까지 전화를 하느냐 하면 열두시 다 되어서까지 전화를 하거든요. 그렇게 수다 떨 때, 그거 외롭지 않거든요. 해댈 때, 나는 죄인입니다. 그 이야기합니까? 나는 잘났다. 그 이야기해요? 나는 잘났다. 그 이야기해요. 바로 그 자체를 죄라고 규정해주는 하는 그 분이, 내가 모르는 진짜 하나님이 해주니까. 우리는 실컷 죄만 짓고도 느긋하게, 진짜 하나님까지 아울러 알아듣게 됐으니까, 이런 복이 어디에 있어요? 세상에! 진짜 죄는 죄대로 짓고 자랑은 자랑대로 다 하면서도, 주여. 이게 죄군요. 느긋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참 엄청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수천 번 물었던 것이, “목사님. 성도의 삶이 뭡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에요?” 마음대로 사세요. 막 사세요.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뭘 조절하고, 뭘 조절 안 하고, 뭘 조심하고, 뭘 자기 관리하고, 절제하고. 절제하고, 관리하고, 이웃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죄인 속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사랑하게 하신 것을 우리가 사랑한 걸로 말씀은 다 이해되는 거예요.
요한1서 3장 16절 한 번 봅시다. 3장 16절하면 유명한 구절 있잖아요. 요한복음 3장 16절. 이것도 유명해요.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은 누가 주신 말씀?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죠. 누구 안에 담는다? 죄인에게 담아서 이 말씀 하게 하죠.
그러면 이 말씀이 가만히 있겠어요? 이 말씀이 새로운 인간을 만들겠어요? 이 말씀에 합당한 인간을 만들어내겠죠.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상한 것이 있어요? 없어요? 여전히 있죠. 그 예상이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이 말씀 지키려고 애쓰겠죠. 지켜집니까? 살기 바쁜데 어데? 내 귀한 몸을 형제를 위해 바쳐? 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데, 왜 남을 위해 살아요? 최선은 다하겠죠. 양심껏 이런 것 하겠죠. 양심 말고 목숨 주라는데, 우리는 목숨 못 주니까 돈 몇 푼 봉투에 넣어주면서, “그래. 재미있게 살아야지.” 그러면 그게 이웃사랑입니까?
요한일서 3장 16절은 간단한 거예요. 3장 16절은 돈 주라는 거예요? 우리 목숨 주라는 거예요? 목숨 주라는 거예요. 이 목숨 주신 사람은 이 세상에 누구밖에 없어요? 친구를 위해서 목숨 바친 사람은 누구밖에 더 있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 밖에 없는 분이 이 말씀을 이룬 상태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줬다면, 그 새로운 비전은 뭐냐, “주여. 나는 주님 하신 일에 죄인입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3장 16절에 근거해서, “저는 죄인 맞습니다.” 하는 것이, 3장 16절을 확 완성시키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우리한테 적용이 되면서, 졸지에 나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우리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로 드러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죽었나니 나는 살았고? 죽었고? 나는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살아서 뭐 합니까? 요한일서 3장 16절의 완성을 마음껏 보여주면서,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죽은 자가 되고, 주께서는 이 말씀 자체가 살아있는 것으로 증거 되면서 우리의 옛 사람이 왜 죽어야 되는지를 깨닫죠.
그러면, “주여. 우리가 죄인이군요.” 하면서 주께만 감사할 때, 그 감사가 요한일서 3장 16절의 완성입니다. 얼마나 완성됐으면 우리 입에서 감사가 나오겠어요? “주님이여,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세상에! 못 지킵니다. 그런데 이 죄를 대신 값을 치렀다니 고맙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안에 사귐이라고 하는 거예요. “빛 가운데 사귐이라”
요한일서 1장 6절을 제가 읽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이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잖아요. 주님이 빛이고 우리는 그 안에 있고. 그러면 우리가 행한 것은 뭐가 되고? 빛이 발산이 되는 겁니다. 빛이 발산이 되게 되면 요한일서 3장 16절을 우리가 마음껏 보여 주게 되죠.
그 내용이 뭐냐 8절에, 우리가 죄 없는 자가 아니고 죄 있는 자였는데, 누가 끼어들었다? 진리가 우리 속에 와서 우리를 진리로 용서해주었다는 그 상황을 증거 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피곤하시니까. 지금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하나님이 우리한테 뭘 하라고 하느냐 하면, 형제를 사랑하는데 그냥 말로 하지 말고 뭘 바쳐라? 봉투에 넣은 돈 몇 푼? 아니야. 우리의 목숨을 바치라고 하죠. 우리는 이것을 지킬 수가 없죠.
자, 중간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바로 중보자가 끼어들었죠. 그 중보자가 끼어들면서, 중보자가 우리 죄를 뭐 했습니까? 우리는 죄 있습니다. 말씀이 들어와야 죄가 살아나잖아요. 죄가 뭡니까? 우리는 때려죽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못 바친다? 미쳤어요? 바치게.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죄가 있으면 그냥 하나님과 사귀지를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죄를 피로써 사함을 주게 되면 우리는 죄인 된 채로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귀게 되면서 우리는 날마다 죽고, 우리 안에 누가 산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빛 가운데 사귐이 된다. 이 말입니다.
참, 이렇게 복잡한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내 구원의 주체라고 해가지고,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이 본심이 늘 우상섬기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근데, 아주 짧은 순간에 ‘내가 한 것이 뭐가 있지? 없어.’ 라는 순간에는 전혀 복잡한 것이 아니고, ‘오케이. 그러네요. 그런 이야기가 맞네요. 뭐가 어렵지?’ 아주 극미한 짧은 순간에. 3초. 어떤 사람은 깁니다. 4초정도. ‘자자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뭐 보답해야지.’ 또 슬슬 하는 거예요.
‘뭐 보답을 하면 주께서 상급을 주시겠지. 애 시험 치는데 내가 이렇게 봉사하면 주께서 해주시겠지.’ 또 어데? 되지도 않을 기대를 하네. 죽어야 될 내가 또 갑자기 말씀은 죽고 내가 살아나고 있어요. 언제까지 간다? 배신자가? 끝까지. 나를 걱정하고, 나에게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자기한테 실망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자기한테 실망할 마음이 전혀 없어요. 자랑하는 재미로 인생을 살아야지, 친구한테 전화해서, 나 실망했다고 이런 소리를 왜 해요. 안 그래도 어차피 기죽고 사는데. 스스로 알아서 얼떨이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죄인 아니라고 한다면 그거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뜻이에요. 지옥가도 한참 가요. 그럼 천국 가는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끄집어내서, 예수님 보내서 죄를 뭐로? 피로. 피라는 이야기는 2장에 나오는데,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시는 그 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영생 얻게 되었고 예수님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응용문제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 빵이 있죠? 제가 이거 빵이라고 하면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이게 바로 진리가 아니고 죄라고 생각하면서 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빵이 아닌 게 아니고, 주께서 하신 모든 관심사가, 이게 빵이라고 하는 그런 반응 자체를, 주님께서 팔짱을 끼고, “그래,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의미가 있는데?” 니가 이걸 빵이라고 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어이구, 이거 니가 알았어요? 아이구, 착하다.” 그런 소리 들으려고 하지.
“주여, 제가 이걸 빵이라고 한다고 해서, 이것으로 내가 구원받거나, 내가 의인되거나, 내가 진리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라는 고백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돼요. 빵 맞아요? 다만 빵이 맞는데, 이것으로 인해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마음 자세로 빵이라고 해야 해요. 내가 이걸 빵이라고 해서 “아이구, 착하다. 복 줄게.” 이런 것이 아니고, 저걸 사과라고 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주여, 복은 우리 예수님 때문입니다.” 라고 해야 돼요. 더 나아가서 “이걸 빵이라고 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60907 요한1서 시카고강의5-이 근호 목사
다섯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요한1서 1장 8절을 같이 한 번 봅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믿음직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은 딱 무슨 말씀이냐 하면, 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죄만 상대한다. 이런 뜻입니다. 죄가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서 나는 너희를 상대한다. 내가 죄를 겨냥한 것처럼 너희들도 너희 자신 속의 죄를 내 앞에 가져오게 되면, 이로써 하나님과 구원계약은 성사된다.
우리가 가게에서 물건 살 때, "물건주세요." 하면서 뭘 내밀죠? 돈을 내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저기, 죄를 가져왔으니까 용서를 주세요." 라고 이야기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까요? 물건 가져오기 전에 먼저 뭘 가져와야 돼요?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뭡니까? 돈을 준비해야 되잖아요. 이해되시죠? 가게에서 그냥 물건을 가져올 수는 없잖아요. 그럼 하나님 앞에서는 뭘 준비해야 해요? 돈 필요 없고, 정성 필요 없고, 의미 필요 없고, 뭐만 준비하면 돼요? "죄 가져왔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렇지! 니가 제대로 나를 아는구나." 이러시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뭘 가져오느냐 하면 "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하는 거예요. 젠틀맨이라는 노래에 그런 가사가 있어요. 전부 다 잘남을 가지고, "니 아들 몇 등 해?" "우리 아들은 몇 등 하는데?" "차는 뭐 타는데?" "차는 이거 타는데?" 뭔가 잘남을 가지고 물물 교환하듯이 가져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마음을 낮췄습니다." 마음 낮춘 것 가져와가지고 주 앞에 축복 달라고. 물물 교환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이렇게 주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봉사를 했으니까, 주께서 다 꼬불쳐놓은, 준비해놓은, 그 30배 60배 100배 주시옵소서." 30배, 60, 100배가 뭔가 이상한 게, 세상에! 100배가 눈앞에 보이는데 30배, 60배 달라고 하는 것도 뭔가 이상한 거예요.
달라고 할 것 같으면 100배를 달라고 해야지, 근데 주님께서 30배, 60배, 100배를 이야기하니까, 주님께서 객관식 문제를 내신 것도 이상해요. 딱 100배 준다고 하면 아무 문제없는데, 30배, 60배, 100배를 준다고 하니까, 어느 누가 100배가 아니고 30배를 탐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100배 주세요." 하잖아요. 그렇게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우리가 못되니까, 우리는 뭐냐, 가져올 때, 죄를 가져왔기 때문에 딴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죄를 가져왔다는 것은, 주님이 어디에 전문가냐 하면, 죄 씻어주는 전문가. 그게 끝.
그래서 여러분이 죄 씻음 받았으면, 얻어낼 것 다 얻어냈고, 받을 것 다 받았어요. 그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 마세요. 죄 씻음 받았는데, 딴 것을 요구하게 되면 그거는 다른 하나님을 상상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죄를 가져오너라! 다시 말씀드릴까요? 돈 가져오너라! 물건 줄게. 문방구에서 신상품 나오면 애들이 막, 아침에는 안 나왔는데, 오후에 물건이 나와 있을 때, 그럼 애들이 "아저씨! 외상 돼요?" "으응~ 안 돼! 집에 가서 엄마한테 이야기해서 돈 가지고 와라." 하죠. "하나님! 천국 돼요?" "으으응~ 안 돼! 집에 가서 죄 가져오너라. 죄 가져오면 천국 줄게."
의인은 천국에 못 갑니다. 주께서 의인을 요구하지를 않아요. 주께서 요구하는 것은 죄인을 요구하기 때문에, 죄만 가져오면 천국주십니다. 정말 들어보면 이건 주일학교 어린이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어른들은 왜 자꾸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어요. 죄 가져오라고 하면 자꾸 정성들이대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해가지고 기도했다고 하고. 자, 기도 가져오는 사람, 헌금 가져오는 사람, 전도 가져오는 사람, 봉사 가져오는 사람, 가정의 화목 가져오는 사람, 왜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가져와요. 주께서는 그걸 안 받습니다. 근데 그걸 왜 가져오느냐 하면, 가짜 하나님을 자기가 만들어가지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상대한다. 인간을 안 봅니다. 죄인만 상대하지 인간이라는 것은 없어요. 죄인을 상대하지. 이 말을 더 나아가보면 하나님은 죄를 만들어내면서 죄인과 상대한다. 좀 더 발전돼야 합니다. 아까 하나님이 죄와 상대한다고 할 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면 "그럼 제가 죄를 만들어오겠습니다." 이래 되죠. 그게 땡이라는 겁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니가 죄를 지어서 죄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니는 죄를 만들 재주가 없어요. 죄를 누가 만드느냐? 하나님이 죄를 만들어내신, 하나님이 만들어낸 죄를 가져오면 용서해줄게.
그럼 하나님께서 만들어낸 죄를 가져오는 방법이 뭐냐, 이거는 왕년에 성경공부 좀 했던 사람들은 다 압니다.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는 방법이 뭐겠어요. 율법이죠. 율법. 하나님의 법인 겁니다. 하나님의 법. 법이 없는 곳에서는 뭐도 없다? 죄도 없다. 없는 죄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집어넣어버리면 없는 죄도 새롭게 만들어져요.
이거 뭐 과격한 것도 아니고. 로마서 7장에 분명히 나와 있는 겁니다. 제가 혼잣말로 안 들리게 하는 것은 녹취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근데 이 말도 녹취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8절에 보면,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절,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너무 좋은 말씀이라고 제가 감격스러워요.
전에는 나는 나라고 우겼죠? 조폭같이. "이리 오너라." "누구십니까?" "나는 나야." 자기가 살아 있어요. '나를 알아 도! 나는 이정도야. 내 재산은 이정도고. 나는 이정도로 깨끗한 사람이야. 나를 알아 도!'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성경 말씀대로 나는 살아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리와! 이리와! 너 이리와! 니가 어떤데?" "저 살아있습니다." "이리와! 이리와!" 여기 7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나는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주께서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것을 집어넣으니까, 졸지에 탐내지 말라는 그 율법에 의해서, 율법이 살아나면서 동반해서 뭐가 살아나느냐 하면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죽어있던, 탐냈습니다를 살려내고 살아있다는 나는 죽여 버린 거예요. 다시 한 번 텀을 줍시다. 지금 긴장해야 될 시간이에요. 주무시면 안 됩니다. 내 속에 잠자고 있던 내 죄를 끄집어내고 나도 살아 있다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동시에 나를 죽였다는 겁니다. 죽였다.
제가 억지로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 말보다 성경 자체가 더 어려워요. 이거는 여러분들이 증거 할 수 있죠? 성경 방금 봤죠? 성경 여러 장 봤죠? 대단히 어렵죠? 제가 나름대로 쉽게 해드리는 겁니다. 자, 성경을 볼 때, 출발점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자, 성경을 내가 덮었다고 치고, 로마서 7장을 모른다고 치고, 상상해봅니다. 나는 살았고, 살아있는 내가 죽어도 나는 좋은데 가야지. 나는 지옥가기 싫어. 그럼 거기에 물 한 방울 없는데 거기 왜 갑니까? 갈려면 살아서도 고생했는데 죽어서는 고생 안 해야 하지 않습니까? 천국 가려면 내가 뭘 하면 좋을까? 옳지! 성경을 읽자. 펼쳤는데, 로마서 7장 나왔어요.
"주님이여, 저 좋은 말씀 걸렸습니다. 자, 제가 천국 가는 데 있어서 주의 말씀 지킵니다." 라고 보는 거예요. 보는데, 살아있는 내가 살아서, 주의 말씀 지켜서 산 채로 천국가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니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너를 산 채로 보내지 않고 너를 죽인 채로 보내겠다." "그럼 자살할까요?" "자살하지 마! 내가 너에게 뭘 보여줄게. 뭘 보여주게 되면 니는 자살 안 해도 이미 죽은 자가 되고." "그럼 죽고 나면 못하잖아요?" "죽은 동시에 니 속에 있는 죽은 죄를, 도리어 이제는 살려내어서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와 하나님과 관련지을만한, 의미가 있는 죄인으로서 우리를 상대하시는데, 그 솜씨를 내 쪽에서가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성도에게 실시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럼 여기서 제가 질문 하나 들어갑니다. 자, 질문이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율법을 대할 때만 탐심이 일어납니까? 평소에도 탐심이 일어납니까? 평소에도 탐심이 일어나죠. 그럼 우리가 평소에 율법을 모르고 산다면 사람이 탐내는 것이 그게 정상이죠. 나만 그래? 다들 그러지. 이쁜 것 보고 이쁘다고 하는데, 뭐가 문제야? 그리고 주여, 그것도 죄입니까? 이래 나오죠. 전혀 우리는 탐낸다는 사실을 주의 뜻이 아니면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의 율법을 보게 되면, 그것이 탐낸다는 죄를 영글어내기 위해서, 만들어내기 위해서 우리 앞에 맛있는 선악과부터 해가지고, 역사 끝 날 때까지, 어쩌면 이 세상에서 탐낼 일이 그렇게 많은지. 이쁜 여자도 있고, 잘생긴 남자도 있고, 차도 있고, 좋은 집도 있고. 아침에 눈만 뜨면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는 것으로 쫙 깔려있어요.
"여기 좋사오니" 베드로가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내 맘에 드는, 그냥 떠나기는 너무 아쉬워. 아쉬워. 가더라도 누릴 것은 누리고, 즐길 것은 즐기고, 노래방에 가서 한 한 시간정도 노래 부르고. 그렇게 하고 싶어요. 주께서 재림하셔서 휴거하는데, 저기 재미있는 파티에 한 번 참석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그냥 나와! 손잡고 하늘로 그냥 올라가게 되면, 좋긴 좋지만 예를 들어서 못해본 거, 골프 치는 것도 좀 하고 싶고, 뭔가 손을 대서 코도 높이고 싶고, 이런 것을 못해보고 천당에 가니 좀 섭섭할 거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데려갈 때, 우리가 죄에 딸려 가는 거예요.
그 죄가 어디서 나왔는가? 너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너는, 그게 죄를 죄 되게 하는 시다발이로, 죄에 딸려서 가는 거예요. 내 주체가 주인이 아니고, 내 속의 죄가 주인이 될 때, 바로 그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인 것을 알 때, 우리는 제대로 하나님을 아신 겁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아신 거예요. 그럼 이런 하나님을 아신다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에만 국한되고, 성령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상대할 때, 내 속에 죄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나 자체와, 하나님 자체와 흥정과 타협과 협상에 의해서 구원되고, 안 되고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신이시여, 착한 일을 원하시죠? 제가 압니다. 천국은 깨끗한 사람이 간다는 것을 제가 아니까,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51퍼센트의 선한 지분을 얻어서 가겠나이다. 됐죠? 됐나? 됐심니까? 이러면서 가는 거예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의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안다 치고,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죄가 무엇이냐? 율법에서 끄집어낸 그 죄가 무엇이냐를 이제부터 설명 들어갑니다. 구약에서는 죄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들어보시면 여러분이 아! 하고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우상. 우상숭배가 죄입니다. 우상숭배가 죄인데, 여기, 우상숭배라고 하니까, 여러분들이 "아이구, 목사님 그게 죄인 줄 알아요." 하잖아요. 그럼 제가 맞나, 틀리나, 한 번 해보겠습니다. 안다고 하니까 약간 약이 올라서, 우상이라는 것을 이렇게 쓰겠습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죄입니다. 이거 납득이 됩니까?
방금 제가 이거 쓰기 전에 뭘 썼습니까? 우상이죠. 구약에서 에스겔이 우상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지적을 하잖아요. 근데 그 당사자들은 우상을 믿었어요? 하나님을 믿었어요? 하나님을 믿었어요. 참 하나님을 믿었어요. 인간이 기껏 믿었던 하나님은 전부 다 우상이 됩니다. 왜? 인간 안에 뭐가 잠복되어 있기 때문에? 죄가 잠복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주체가 아니고 죄가 주체죠. 죄가 하나님마저 왜곡시키고, 변경시켜서, 내 죄가, 죄가 아닌 걸로 위장하는데 필요한 짓만 골라서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오늘날 한국교회에요. 어쨌든 간에 내가 섬기고 헌금하는 것을 칭찬해주는 하나님을, 나의 예수, 삼위일체 하나님, 뭐 명칭이야 어떻든지 간에 진짜, 진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섬기는 거예요.
그렇게 섬겨버리면, 나의 죄는 더 이상 들키지 않고, 나의 장점 들고 하나님과 직접 흥정에 나서기 때문에, 30배 이야기가, 60배 이야기가, 100배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주님이여, 십일조 한다고 애쓰는 것 주께서 아시죠? 이거 돈 모으니 라고 애 먹었습니다. 이번 교육관 짓는데 제가 얼마나 공들였는지 아시죠? 저희 집 팔아서 전세로 옮기고 나머지 가지고 바치는 겁니다. 주께서 이뻐해 줄 거지용? 이러거든요. 이미 그 자체가 구약에서는 뭐냐 하면 우상이지만, 오늘날에 나 우상 섬긴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없어요. 전부 다 참참참 신, 가짜 참기름 말고 진짜 참기름 있잖아요. 진짜 참기름을 못 믿어서, 진짜, 진짜 참기름 하는 것 있잖아요. 진짜, 진짜, 그것도 모자라서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섬긴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이었습니다. 추호도 자기가 믿는 여호와가 하나님, 진짜 여호와로 알았지, 우상이라고 평가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어느 누구도 상대방이 믿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그것을 어제 밤에 이야기했습니다. 공동체에서 질서를 위해서 하는 그것을 윤리라고 하죠. 어제 것 복습합시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양심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도덕. 윤리를 파괴하는 것은 짐승만도 못하고, 도덕이 없는 인간은 죽여 버립니다. 여러분 정신병자와 짐승만도 못한 것을 구분해야 해요. 정신병자는 혼자서 도덕이 없어요. 그러나 남을 괴롭히고 혼자 설치는 이런 인간들은 쳐 죽일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회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면 병원에 가야하지만, 윤리적으로 문제 있으면 교도소에 보냅니다.
제가 갑자기 어려운 이야기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 이해되시죠? “저 인간은 교도소 보내야 돼. 이거는 정신이 말짱한데, 까불락 대는 것은 교도소에 보내야 돼.” 그런데 이건 뭐 물인지, 잉크인지, 돈인지 모르는, 정신이 이상한 이런 사람은 무슨 도덕이 있습니까? 그냥 파충류 본능대로 움직이는데. 아니, 2개월 3개월 된 애기한테 도덕도 모른다고 하면 말이 돼요? 지금 집안이 부도가 나서 차압이 들어왔는데, 애는 그 사실을 모르고 젖 달라고 울고 있을 때, “애야, 니는 도덕도 없나? 니는 양심도 없나? 우리 집 봐라. 지금 차압 들어왔는데 니가 젖 달라고 울면 줄 수 있겠나?” 이걸 애한테 할 이야기가, 할 잽이 안 되죠.
그걸 애한테 하면 애가 압니까? 그럼 애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으으응~” 하면서, 애가 천재에요. 천재. ‘우리 집안에서 내가 조심해야지. 내가 너무 먹는 것만 챙기나?’ 이러면서 젖을 안 먹죠. 이건 이미 밥 먹는 정도가 돼야 되지, 젖 먹는 애가 무슨 그런 시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른 됐다고 해가지고 남한테 사기나 치고 지 잘난 척 하는 것은 교도소에 집어넣을 윤리라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인간은 뭘 지키려고 하겠어요? 도덕과 윤리를 지키려고 하겠죠. 윤리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 사회에서 사람대우 받으려고 하는 것. “나 이정도 도덕적이야. 또는 저사람 앞에서는 나는 기본 부모교육을 잘 받았기 때문에, 나는 어디가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이야.” 라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고 인정받고 있죠. 그렇다면 사람들에게만 인정받아야 돼요? 저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께도 인정받아야 되겠어요?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아야 되겠죠. 그렇다면 윤리, 도덕을 살리고, 살리고, 기 살리고, 살리고 하는, 그 살리고를 인정해주는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이스라엘이고,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대로 남은 거예요. 그게 우상이었다는 거예요. 우상.
선지자는 고난 받는데, 그들은 윤리도덕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복 줄줄로 알았던 거예요. 선지자는 핍박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1장 비유에서 포도원에 종을 보냈어요. 포도원 농부들이 때리고 죽이고 아프게 했어요. 또 보냈어요. 또 때리고 죽이고 아프게 했어요. 마지막 아들을 보내니까, 이제 아들만 죽이면 이제는 포도원이 우리들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왜 이야기하셨습니까?
인간의 인류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고 뭐고 없이, 나는 이 정도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신은 나를 천국에 넣어주어야 하고, 30, 60, 100배, 복을 줘야 되지. 나를 이렇게 섭섭하게 하는 하나님은, 나한테 믿으라는 소리 하지 마! 당신은 사탄이지 진짜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 구미에 맞고, 내가 선택할만한, 그런 어떤 나한테 괜찮은 장점들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럼 나도 당신을 선택해서 믿겠습니다.
이 건방떠는, 이것이 선악과 따먹은 악마의 표현형이고 악마의 앞잡이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니그들 애비는 악마니라. 어떻게? 악마이야기 들어보니까 악마가 참 정상이죠? 어쩌면 우리하고 공통적인 동일한 심성을 갖고 있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교회 다녔고, 뭐 착한 일 하게 되면 다음 주가 은근히 기대돼요. 착한 일 했으니까. ‘참 우리 애가 이번에 시험 치네? 토요일에 치는데, 국가시험 친다고 했는데, 사전에 착한 일 좀 많이 해야 되겠다.’ 조심~조심~왜? 내일 시험 치는데 함부로 경솔하게 굴다가는, 나한테 올 벌이 자식에게 떨어지면 성적이 떨어질 수 있어요. 일단은 시험 끝날 때까지는 방종하지 말고 근신하고 있어요. 시험치고 난 그 다음부터는 스트레스 풀더라도 시험 전까지는 조심하는 거예요. 그렇게 계산하는 고 심보, 우상적인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저한테 항의가 들어오죠. “목사님. 저는 그런 신 말고, 참된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고거는 더 지독한 죄가 되는 겁니다. 감히 처음부터 그렇게 다짐을 하고, 친절히,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착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뭘 원한다? 죄를 원한다고. 사전에 그렇게 고집했던 되도 않는 질문 받고 상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쯤 돼서 강의하게 되면, “그럼 목사님, 저는 우상섬기지 않고 참된 신을 섬길게요.” 또 이래 나온다 말이죠. 인간들에게 나올 것은 우상밖에 없어요. 사람의 행동이 지 좋아라고 행동하지, 누구 좋아라고 행동하겠어요?
내 도덕을 알아주고 내 윤리를 알아줘서 거기다가 보너스까지 해서 복까지 주면 금상첨화인데, 그런 하나님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게 바로 우상이고 죄인데, 인간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죄를 찾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only you~♬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 사람은 바로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 해결 할 수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보고 빠지래요. 죄인이 껍죽대지 말고, 니가 하나님도 모르면서 하나님하고 거래하려고 나서? 내 뒤에 서!
영화관에 가서 표 사는데, 앞 사람이 열 사람의 돈을 다 내겠다고 해요. 그럼 돈 내는 사람 뒤에 서면 될 거 아닙니까? 돈도 안 내고 공짜로 보는 주제에, 표 살 때, 앞에 와서는 “F열에 5번 걸로.” 아니, F에 5번이라니요? 천국은 그 분 맘대로, 값을 지불하는 그 분이 어느 자리인지 그건 그 분이 결정하지. “니는 내 뒤에 서라.” 뒤에 서라고 하니까, “에이, 창가에 제일 좋은 자리로 주지.” 이런 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자꾸 지가 간섭하는 거예요. 주여, 내 인생 이래 가지 말고, 이래 가가지고 천국에 넣어주세요. 우리 아들 좋은데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자꾸 주님한테, 자꾸 이렇게 뭐라고 할까? 압력을 행사한다고 할까요? 뇌물 비슷한. 자꾸 주님의 결정에 압력을 행사하는 거예요.
"우리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1:7), 오늘 본문처럼 우리 서로 사귐이 있잖아요? 사귀면 내 말 들어줘야 할 거 아닙니까? 이왕 할 거면 이렇게 해주세요. 어이, 죄인아! 내 뒤에 가. 내 뒤로 가. 애들 노래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런 노래 알아요? 중국에도 있어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하면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겠니. 찾겠니. 하면 뭐 누구 꽃을 찾겠다. 찾겠다. 해서 가위 바위 보를 합니다. 자, 가위 바위 보를 하는 사람의 결정에 의해서 뒤에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뽑혀서 이긴 편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할 때, 그 대표자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왜? 유일하게 우상이 아닌 참 하나님을 아시니까. 그러면 예수님 뒤에 서야 돼요. 그걸 성경에서는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승리를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냥 뒤집어쓰는 겁니다. 여기는 집이 단독이잖아요? 근데 아파트 보면 베란다가 있어가지고, 가족한테 안 좋으니까 베란다에 가서 담배 피우면 3층으로 담배냄새가 올라가니까, 담배냄새 싫어하는 3층에서 2층한테, 담배 좀 피우지 마세요. 이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우면 간단하죠. 3층에서 바케쓰에 물을 가득 받아서 부어버리면 되죠.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를 뒤집어쓰는 거예요. 죄가 전혀 보이지 않도록 바케쓰 물 퍼붓듯이, 우리가 뭐 잘했다, 못했다 하는 자체를 그 의미가 없게 만들어요. 그 자체를.
내 윤리도덕을 챙길 여지가 없게 만들어요. 자, 아까 사실은 윤리도덕 앞에 뭘 빠트렸어요. 이 도덕은 나의 도덕이고, 이 윤리는 나의 착함을 보여주는 나의 윤리잖아요. 이 나의 도덕, 나의 윤리로 흥정해서 가겠다는 것은, 이게 바로 뭐냐 하면 개인구원이에요. 개인구원.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예수 이름 외에는 달리 구원받을 이름이 없어요. 너 말고 너를 대표하는 사람 이름 대라? 이 말이에요. 그럴 때, 내 이름 댈까요? 누구이름 대야 돼요? 누구이름 댈까요? 주의 이름 대야 돼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참 쉽죠잉~ 너무 쉽죠.
너무 쉬운데, 그 말을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왜 기분 나빠 합니까? 자기 요구가 옵션으로 안 들어갔다고 짜증내는 거예요. 자기 요구사항이. 그러니까 자기죠. 자기. 나죠. 그러니까 개인구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꼭 이렇게 머리를 내밀고요. "저는요?" 이래 나와요. 이게 나무랄 입장이 안 되는데,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에도 있었어요. 전체 예수님 제자들이 열둘이 맞는데, 또 치맛바람이 있어가지고 우리 애가 천국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세요. 꼭 이렇게 개인구원으로 들이대는 엄마가 있어요. 누가 높으냐, 하는 사람이 있고.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입장에서는 다 죄인으로 다루기 때문에, 개인구원이 없고, 주님의 공로로, 주의 이름으로 가는 겁니다. 그럼 주의 이름으로 간다는 말은, 그럼 "주의 이름을 부르는 나는 개인이잖아요?" 이래 나옵니다. 이래 나오면 안 돼요. 왜냐하면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나만 부르면 내 개인으로 가는데, 이 세상에서 나만 구원받을 것 같으면 개인구원이 되는데, 주의 이름을 나만 부릅니까? 아니면 내가 평소에 사이도 좋지 않는 저 사람도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에이씨. 니가 왜 천국에 와? 니가 천국에 오면 나는 천국에서 못 살아. 니가 천국 오면 나는 지옥 갈 거야. 나 니 꼴 보기 싫어서 천국 가는데, 니까지 오면 어떻게 할 거야? 이래 나오는 것이 개인적인 구원의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런데, 어? 내가 믿는 주님을 저 사람도 믿어. 그러면 차이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둘 다 구원받은 상태에서 차이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차이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번 강의의 제목을 구태여 붙인다면, 지금까지는 안 붙였는데, 붙인다면 이겁니다. "무차별성" 일체 차이가 없어요. 일체 차이가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물 주었다고 했던, 어떤 사람은 심었다고 했던, 뭘 했던, 심었다고 상금 더 주고 물 뿌렸다고 상금 더 주는 것 없습니다. 아까 예를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내 이름 아니라고 했죠. 예수 이름으로. 앞에 표 값을 대신 내 준, 그것을 죄 값을 치러 준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 이름으로 라는 말은, "예수님이 이미 내 죄를 치렀잖아요." 라고 동의한다 이 말입니다.
천사가 와서, "야! 니 뭘 잘했다고 천국에 와?" "누가 내 대신 죄 씻어 줬어요." "누군데? 그게 누군데? 석가모니?" "아니요." "누군데?" "나사렛 예수님이 나를 씻어줬어요." "어이구! 이거, 니가 언약완성을 아는구나. 들어와! 들어와!" 천국에 넣어준다 말이죠. 들어가는 것 까지는 좋은데, 보니까 지 돈 떼먹고 부도나게 만든 그 인간도 들어온다 이 말이죠. 옆에. 그래서 지는 가면서 발로 차는 거예요. 시비 거는 거예요. "어이! 니가 천국을 니가 뭘 보고 들어와?" 주님께서 대신 값을 치러주신 이유가 오늘 요한일서 말씀에서 우리를 뭘로? 인간으로 보지 않고, 행함으로 보지 않고, 윤리도덕으로 보지 않고, 우리 속에서 뭐만 끄집어냈다? 죄만 끄집어내서, 죄와 예수님의 그 씻어주심과 해서 천국 넣어주는데.
갑자기 서로를 보는 순간, 갑자기 둘 다 죄인이라는 생각은 날아가 버리고, "저 인간 때문에 내가 한평생 고생한 생각하면 내가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 니가 지옥가든지 내가 지옥가든지, 둘 중의 하나는 가야지. 그래도 주께서 가라고 하니까 가지만 주님의 무슨 조치가 있을 거야." 하고. "어이, 이리와 봐!" "아이구, 돈 못 갚아서 미안하다." "미안한 것은 아는데, 니가 나한테 사기 친 것은 아는데, 니 여기 왜 왔어?" "천국 갑니다." "천국 간다고? 니가 나한테 나쁜 짓 한 거 알지?" "아이구, 나쁜 짓 한 거 알죠. 그러니까 내가 죄인입니다." "듣기는 들었구나. 나중에 천국 가서 한 번 보자."
그래서 천국까지 간다 이 말이죠. 둘 다 천국 갔다고 치고. 이건 상황극입니다. 하나의 상황극인데, "주님!" "왜? 기쁘지?" "예. 기쁜 건 기쁜 거고 찝찝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나는 천국 받을만한 정당한 사람인데, 저 사람은 사기 쳤는데 여기 왜 왔습니까?" 이렇게 고소하는 이유는, "에구, 니 고생 많이 했었쪘쪄요? 니는 천국에 높은 자리에 가고. 뭐? 사기를 쳐? 니는 저 구석에 가라!" 라는 판결을 우리가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것 때문에 그래요. 이게 바로 갑자기 집단구원에서 다시 뭐로 바뀌었어요? 개인구원으로. 그럼 뭐가 날아갔어요? 무차별성. 앞에 뭐 하나 붙입니다. 죄의 무차별성. 죄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 있잖아요? 도둑질 한 사람하고, 살인한 사람하고, 살인 하나도 안 한 사람하고 차이 나잖아요? 아니요. 내가 죄를 찾아서 죄를 바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율법을 주어서 찾아내게 되면, 그 찾아낸 죄는 똑같아요. 더 시커멓다. 시커멓다가 아니라 다 시컴해요. 똑같아요.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가서 싸울만한 일이 있거든 천국 가기 전에 실컷 싸우세요. 누가 잘했나? 하고 싸우세요. 천국 가봐야 안 통하니까. 그건 내가 만든 법가지고, 내가 만든 기준가지고 싸우다가, 그냥 싸우다가 끝나면 안 되고. 싸우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둘 다 죄인이지? 그치? 이걸로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싸울 건 싸워야 해요. 성질나는데 안 싸울 수가 없어요. 실컷 싸우다가, 그러니까 우리는 둘 다 똑같은 인간이야? 그치?
싸우게 된 상황은 주께서 유발한 상황입니다. 싸워서 없던 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죄인인데, 싸움을 통해서 자기 본성을 노출시키게 주께서 그렇게 유도하신 거예요. 심지어 부부싸움까지도 주께서 유도하신 겁니다. 뭐 신비주의라고 탓하지 마세요.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그럼 성도한테 그런 특혜를 주는 이유가 죄를 가지고 오지 아니하면 천국은 없습니다. 사람은 죄를 감추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어떤 사람은 죄를 자꾸 끄집어내는데, 자기 손으로 자기 죄를 끄집어내지 마세요. 가만히 그냥 사세요. 그냥 살아도 죄인데, 거기서 뭘? 죄도 아닌 것을 가지고 지가 뭐, 무슨 새삼스럽게 죄를 구분해요? 물에다가 참기름 집어넣고 휘발유 집어넣어보세요. 집어넣고 참기름하고 휘발유를 구분하라고 하면 구분할 수 없어요. 전부 다 섞여가지고 다 기름인데, 이걸 어떻게 구분해요?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로새서 3장 5절에 있는 말씀이죠. 모든 것의 눈에는 탐욕이 있고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구약에서 주께서 이스라엘을 저주케 했던 그 원인은 우상. 그리고 모든 죄는 뭐냐 하면, 니가 잘못해서 죄가 아니고, 다른 하나님, 우상이니까. 다른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알고 살았던 그 모든 것이, 바로 죄의 가장 기초였고 뿌리였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님. 그럼 다른 하나님이 죄라면, 의는 뭡니까? 뻔하죠. 참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의가 되겠죠. 그럼 참된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죄 용서 할 때 압니다. 죄 용서할 때. 아, 그러면 죄를 알고 가져오면 용서해준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언제요? 용서할 때, 비로소 내 죄가 어떤 죄인지를 뒤늦게 알죠. 순서는 죄 가져오면 용서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니가 죄를 알면 용서가 된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거는 우리가 다 떠나고 난 뒤에 아는 순서고, 실제 현실적인 순서는 뭐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용서해주고 용서했던 죄가 무엇인가는 뒤늦게 죄를 까발리는데, 우리의 한평생을 다 보내게 하십니다. 금메달 따고 난 뒤에 금메달 딸 때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평생을 통해서 알게 되는 거예요. 어제 이야기했죠? 우리는 끝까지 배신자여야 한다고요.
그 배신하는 범위가 뭡니까? 내가 나에 대해서 배신해야 돼요. 아브라함이 아브람을 배신하게 되죠. 어제 이야기했습니다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든 피조물이 아브라함이죠. 근데 아브람은 뭐냐 하면 혈통적으로 온 것이 아브람이에요. 나의 본능적인 본성이,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나를 핍박을 해도 그렇게 핍박이 심해요. 내가 나를 핍박한다니까요. 하나님이 만든 새로운 피조물은 뭐냐,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거예요. 옛날의 나, 잘나갔던 나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 좀 죄 좀 지을 수 있지? 뭐? 죄만 지었나? 착한 일을 더 많이 했는데?" "니 교도소 몇 번 갔다 왔어?" "안 갔다 왔는데요." "거봐! 니 착하잖아."
자꾸 옛날의 나는 나를 긍정하려고 하고, 죄를 용서해준 예수님이 들이대는 진짜 나는,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그 나고. 이 두 개의 나 중에서 하나님은 누굴 좋아하느냐 하면, 주께서 만들어준 나를 좋아하는데, 나는 누구한테 정이 들고, 맘에 들고, 자연스럽게 따라가느냐 하면, 역시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남한테 자랑할 것이 있을 때, 희망도 있고 살 보람도 있고. 우리는 이쪽을 그렇게 집착하고 좋아하는 거예요. 아줌마들 모이면 지 자식 자랑들 하는데, "이번에 우리 아들 하버드대 들어갔는데, 대출까지 해도 공납금 걱정돼서 죽겠어." 공납금 걱정하긴 뭘 걱정 해. 지금 지 자랑하고 있는데. 사람 사는 재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 자랑하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서는 못 살아요. 왜? 자랑 할 대상이 있어야 살거든요. 남편이 직장에 가고 난 뒤에, 설거지 대충 하고 나면 아침 아홉시 반 됩니다. 그때부터 언제까지 전화를 하느냐 하면 열두시 다 되어서까지 전화를 하거든요. 그렇게 수다 떨 때, 그거 외롭지 않거든요. 해댈 때, 나는 죄인입니다. 그 이야기합니까? 나는 잘났다. 그 이야기해요? 나는 잘났다. 그 이야기해요. 바로 그 자체를 죄라고 규정해주는 하는 그 분이, 내가 모르는 진짜 하나님이 해주니까. 우리는 실컷 죄만 짓고도 느긋하게, 진짜 하나님까지 아울러 알아듣게 됐으니까, 이런 복이 어디에 있어요? 세상에! 진짜 죄는 죄대로 짓고 자랑은 자랑대로 다 하면서도, 주여. 이게 죄군요. 느긋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참 엄청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수천 번 물었던 것이, “목사님. 성도의 삶이 뭡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에요?” 마음대로 사세요. 막 사세요.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뭘 조절하고, 뭘 조절 안 하고, 뭘 조심하고, 뭘 자기 관리하고, 절제하고. 절제하고, 관리하고, 이웃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죄인 속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사랑하게 하신 것을 우리가 사랑한 걸로 말씀은 다 이해되는 거예요.
요한1서 3장 16절 한 번 봅시다. 3장 16절하면 유명한 구절 있잖아요. 요한복음 3장 16절. 이것도 유명해요.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은 누가 주신 말씀?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죠. 누구 안에 담는다? 죄인에게 담아서 이 말씀 하게 하죠.
그러면 이 말씀이 가만히 있겠어요? 이 말씀이 새로운 인간을 만들겠어요? 이 말씀에 합당한 인간을 만들어내겠죠.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상한 것이 있어요? 없어요? 여전히 있죠. 그 예상이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이 말씀 지키려고 애쓰겠죠. 지켜집니까? 살기 바쁜데 어데? 내 귀한 몸을 형제를 위해 바쳐? 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데, 왜 남을 위해 살아요? 최선은 다하겠죠. 양심껏 이런 것 하겠죠. 양심 말고 목숨 주라는데, 우리는 목숨 못 주니까 돈 몇 푼 봉투에 넣어주면서, “그래. 재미있게 살아야지.” 그러면 그게 이웃사랑입니까?
요한일서 3장 16절은 간단한 거예요. 3장 16절은 돈 주라는 거예요? 우리 목숨 주라는 거예요? 목숨 주라는 거예요. 이 목숨 주신 사람은 이 세상에 누구밖에 없어요? 친구를 위해서 목숨 바친 사람은 누구밖에 더 있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 밖에 없는 분이 이 말씀을 이룬 상태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줬다면, 그 새로운 비전은 뭐냐, “주여. 나는 주님 하신 일에 죄인입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3장 16절에 근거해서, “저는 죄인 맞습니다.” 하는 것이, 3장 16절을 확 완성시키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우리한테 적용이 되면서, 졸지에 나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우리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로 드러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죽었나니 나는 살았고? 죽었고? 나는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살아서 뭐 합니까? 요한일서 3장 16절의 완성을 마음껏 보여주면서,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죽은 자가 되고, 주께서는 이 말씀 자체가 살아있는 것으로 증거 되면서 우리의 옛 사람이 왜 죽어야 되는지를 깨닫죠.
그러면, “주여. 우리가 죄인이군요.” 하면서 주께만 감사할 때, 그 감사가 요한일서 3장 16절의 완성입니다. 얼마나 완성됐으면 우리 입에서 감사가 나오겠어요? “주님이여,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세상에! 못 지킵니다. 그런데 이 죄를 대신 값을 치렀다니 고맙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안에 사귐이라고 하는 거예요. “빛 가운데 사귐이라”
요한일서 1장 6절을 제가 읽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이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잖아요. 주님이 빛이고 우리는 그 안에 있고. 그러면 우리가 행한 것은 뭐가 되고? 빛이 발산이 되는 겁니다. 빛이 발산이 되게 되면 요한일서 3장 16절을 우리가 마음껏 보여 주게 되죠.
그 내용이 뭐냐 8절에, 우리가 죄 없는 자가 아니고 죄 있는 자였는데, 누가 끼어들었다? 진리가 우리 속에 와서 우리를 진리로 용서해주었다는 그 상황을 증거 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피곤하시니까. 지금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하나님이 우리한테 뭘 하라고 하느냐 하면, 형제를 사랑하는데 그냥 말로 하지 말고 뭘 바쳐라? 봉투에 넣은 돈 몇 푼? 아니야. 우리의 목숨을 바치라고 하죠. 우리는 이것을 지킬 수가 없죠.
자, 중간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바로 중보자가 끼어들었죠. 그 중보자가 끼어들면서, 중보자가 우리 죄를 뭐 했습니까? 우리는 죄 있습니다. 말씀이 들어와야 죄가 살아나잖아요. 죄가 뭡니까? 우리는 때려죽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못 바친다? 미쳤어요? 바치게.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죄가 있으면 그냥 하나님과 사귀지를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죄를 피로써 사함을 주게 되면 우리는 죄인 된 채로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귀게 되면서 우리는 날마다 죽고, 우리 안에 누가 산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빛 가운데 사귐이 된다. 이 말입니다.
참, 이렇게 복잡한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내 구원의 주체라고 해가지고,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이 본심이 늘 우상섬기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근데, 아주 짧은 순간에 ‘내가 한 것이 뭐가 있지? 없어.’ 라는 순간에는 전혀 복잡한 것이 아니고, ‘오케이. 그러네요. 그런 이야기가 맞네요. 뭐가 어렵지?’ 아주 극미한 짧은 순간에. 3초. 어떤 사람은 깁니다. 4초정도. ‘자자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뭐 보답해야지.’ 또 슬슬 하는 거예요.
‘뭐 보답을 하면 주께서 상급을 주시겠지. 애 시험 치는데 내가 이렇게 봉사하면 주께서 해주시겠지.’ 또 어데? 되지도 않을 기대를 하네. 죽어야 될 내가 또 갑자기 말씀은 죽고 내가 살아나고 있어요. 언제까지 간다? 배신자가? 끝까지. 나를 걱정하고, 나에게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자기한테 실망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자기한테 실망할 마음이 전혀 없어요. 자랑하는 재미로 인생을 살아야지, 친구한테 전화해서, 나 실망했다고 이런 소리를 왜 해요. 안 그래도 어차피 기죽고 사는데. 스스로 알아서 얼떨이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죄인 아니라고 한다면 그거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뜻이에요. 지옥가도 한참 가요. 그럼 천국 가는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끄집어내서, 예수님 보내서 죄를 뭐로? 피로. 피라는 이야기는 2장에 나오는데,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시는 그 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영생 얻게 되었고 예수님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응용문제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 빵이 있죠? 제가 이거 빵이라고 하면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이게 바로 진리가 아니고 죄라고 생각하면서 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빵이 아닌 게 아니고, 주께서 하신 모든 관심사가, 이게 빵이라고 하는 그런 반응 자체를, 주님께서 팔짱을 끼고, “그래,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의미가 있는데?” 니가 이걸 빵이라고 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어이구, 이거 니가 알았어요? 아이구, 착하다.” 그런 소리 들으려고 하지.
“주여, 제가 이걸 빵이라고 한다고 해서, 이것으로 내가 구원받거나, 내가 의인되거나, 내가 진리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라는 고백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돼요. 빵 맞아요? 다만 빵이 맞는데, 이것으로 인해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마음 자세로 빵이라고 해야 해요. 내가 이걸 빵이라고 해서 “아이구, 착하다. 복 줄게.” 이런 것이 아니고, 저걸 사과라고 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주여, 복은 우리 예수님 때문입니다.” 라고 해야 돼요. 더 나아가서 “이걸 빵이라고 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