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08 요한1서 시카고강의6-이 근호 목사
제 6강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 1장 10절에 보면, “만약에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만약에 우리가 죄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백퍼센트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참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우리가 백퍼센트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일깨워주는 분만이 진짜 참 하나님이시구나.
근데, 그 참 하나님이 그렇게 알려주신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자기를 백퍼센트 죄인이라고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나쁜 짓도 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쁜 짓을 안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렇게 되죠. 그렇게 우리 자신이 장담한다면 하나님은 뭐가 되겠어요? 진짜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하나님으로 만든다 이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진짜 하나님과 그 외의 하나님, 딱 둘로 나누어지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과 그 외의 하나님.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되고, 그 외의 모든 하나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죄인된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관계 맺어지는 것은 다 가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은, 누가 진짜냐, 가짜냐를, 그걸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목제물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 주 되시는 예수님이 화목제물 되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한 것입니다.
1장 10절 끝에 보면,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하니라” 하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되게 되면, 1장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그러니까 이 땅에 특별한 분이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오신 분과 진짜 하나님과 관련성이 있다는 거죠.
진짜 하나님과 관련성이 있는데,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의에 이르지 못하고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데, 그 증거가 1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 아들 예수의 피가”라고 해요. 예수님의 돌보심이나, 예수님의 사랑하심이라고 해도 충분하게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의 돌보심도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하심도 아니고, 예수님의 피라고 했거든요.
피는 극단적인 충돌이 일어날 때 생기는 사건입니다. 좋게, 좋게, 좋게 해서는 절대로, 피가 터지고 피가 쏟아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셨다, 구원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었다, 구원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하셨다, 구원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하셨다, 구원되지 않습니다. 오병이어 행한 후에 제자들이 다 떠난 것을 아시죠? 열두제자 빼놓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신 그 목적이 뭐예요? 결국은 뭘 남기고자 하시는 겁니까? 피를 남겨야 하는데, 그 피가 뭐냐 하면, 이 피가 내가 너희와 하는 새로운 언약이니, 이 잔을 마시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이 살을 먹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6장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드러내기 위한 그 주변 환경이, 그 배치도가,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쪽이고, 하나님 쪽에서는 죽이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고.
그냥 점잖은 말을 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고, 점잖은 말은 중간 과정이고, 결국은 죽기 위해서, 피를 흘리기 위해서 아들을 보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낸 피에 합류를 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계속 우상숭배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만약에 피에 합류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합류하게 되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 맞습니다.” 라는 것을 아주 즐겁게 하면 돼요. 즐겁게.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아, 내가 존재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 때문이구나.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2장에 들어가 봅시다. 2장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이 “나의 자녀들아” 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먼저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물어볼게요. 남자6명, 여자7명을 짝을 지어서 결혼을 성사시킨다면 누가 남을까요? 일대일해서 짝을 짓는다면 여자가 한명이 남겠죠. 그 여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짝이 없겠죠.
예수님이 누구의 아들이냐 하면 바로, 남아있는 여자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 여자는 짝이 없어요. 그렇다면 짝이 없다는 말로 왜 이렇게 제가 여자의 후손을 언급하느냐 하면은,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냥 덜렁오신 것이 아니고, 구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또는 구약 말씀의 예언대로 오셨다는 겁니다. 예언대로 오셨다면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구약성경이 있겠죠. 몽땅 다 들어있는 것이 당연하겠죠. 구약성경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에, 사람들은 나한테 온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인터셉트 intercept,라는 말 아시죠? 가로채다. 가로채기 하는 것처럼 어떤 분이 오셨는데, 이 말씀이 가로채기 하신 분한테 오는 거예요. 가로채기 하시는 이 분이 남은 여자, 이 땅에서 어떤 것도 짝이 없는, 여자의 자손으로서 이 땅에 가로채기로 오는 겁니다. 이 여자의 자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우리의 어머니는 오직 하늘에 있다고 되어 있고, 27절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뭘 설명하려고 하느냐 하면 이 단어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 단어를 설명해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잉태치 못한 자여” 뒤에 ☐다. 그 네모에 잉태치 못한 자여 울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구로라는 것은 애기 놓을 때 해산의 고통인데, 해산의 고통을 왜 못 느끼느냐 하면 임신된 자식이 있어야 하죠. 임신하지 못한 자여 소리를 질러 외쳐라. 뭐라고?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 그게 남편 없는 여인의 자녀가 남편 있는 여자의 자녀보다 많으니까 어떻게 하라?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외치고 자랑하라. 이 말이거든요.
자, 이사야 54장에서 나오는 이 인용된 이 말씀과, 나의 자녀들아 죄를 범치 않게 함이라, 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제가 지금 설명해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설명하기 전에 보통 설명, 흔히 주석에 나오는 보통 설명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해석하기를, “여러분들은 예수님 믿고 하나님 자녀 되었죠?” “예.” “그러면 죄 지으면 안 돼요.”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더라 이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거는 사람들이 뭐 거의 없어요. 아예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뭐 딱 보면 딱 인데 뭐. 여기서 뭐 다른 설명이 나올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다른 설명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죄 짓는다 할 때는 그 사람이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하면은, 땅이라는 차원, 땅에서 죄 짓고 말고가 돼요. 땅에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의 자녀들아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할 때는, 그 죄라는 것은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땅의 세계 자체를 의미해요. 땅의 세계 자체.
남편이 있어서 자식을 많이 낳은 상황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육적으로 자식을 많이 낳아서 형성된 이 인간세계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애기가 어디서 나왔지? 남편에게서 나왔구나. 남편이 있으니까, 애기를 낳았지. 애기를 낳았으니까 이 땅에서 사는구나. 이제부터 죄 짓지 말자. 그러니까 죄 짓지 말자가 뭐냐 하면, 기존의 상황이, 남편 있고 생긴 자식들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자. 이래 되잖아요.
근데 성경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죄 짓지 말자가 아니라 아예 이 세상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 자체는 죄 아닌 게 없다는 겁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죄가 아닌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하나님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죄를 만들어내되, 우리는 아예 의가 없는 쪽으로 만들어낸다는 거죠. 만약에 의가 있다고 한다면 누굴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든다? 하나님의 조치를 전부 다 거짓말로 만든다는 거예요.
그럼 이 땅은 결국은, 우리는 이 땅에서 뭘 해도 죄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한 거예요. 그럼 우리는 이 땅에서 죄다, 의다, 할 것 없이 아예 통째로 이 땅의 모든 것은 죄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디서 생겨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자녀는 말씀에 의해서 나와야 되거든요. 그 말씀을 제가 이사야 54장을 예를 든 거예요. 이사야 54장을 인용한 갈라디아서 4장 26절을 보면 우리의 어머니는 땅에 있다? 하늘에 있다? 누가 읽어보세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우리 어머니죠. 안산홍 집단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는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으니까. 땅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남편과 인간의 여자가 만든 그런 자녀들밖에 없는데, 그들이 잘했다, 못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땅에서 태어난 것, 남편 있는 자식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죄가 된다 이 말이에요. 이게 진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라는 겁니다. 아휴! 정말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걸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지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우리 예수 믿고 바르게 살자.” 지금 바르게 살자고 하는 그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예수 믿었으면 죄 짓지 말자.” 지금 그 문제가 아니고, 니가 소속이 어디냐? 그 문제에요. 니 소속이 어디냐? 소속이? 우리가 정말 죄 안 짓는 사람 같으면요, 죄 안 지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여. 우리 소속은 땅에 있는 소속이 아니군요.” 이게 죄 안 짓는 사람에게 나올 고백이에요.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서 우리 죄 짓지 말자.” 서로 격려하고 하는 이것이 죄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주여. 우리는 하늘에 속했지, 땅에 속하지 아니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죄 안 짓는 하나님의 자녀의 합당한 내용물이 된다 이 말이죠. 내 자녀들아!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인간들아! 이런 뜻이에요.
자, 어째서 그런가? 모든 이 세상의 여자는 태어나면서 남자한테 소속이 되어 버리고, 남자의 일부가 되어 버려요. 동시에 단독적인 여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뭐냐, 마이너스남자에요. 남자가 플러스남자라면 여자는 마이너스남자에요. 그래서 플러스(+)마이너스(-)가 만나면 그게 1이 되면서, 그 1은 누가 가져가느냐, 그 명목은 아담이 가져가요. 남자가 가져가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은 거예요. 아브라함이 무슨 자궁이 있습니까? 남자가 무슨 남자를 낳아요? 남자가 애기를 낳는 것이 아니고 남자는 그냥 남자인데.
하나님께서 뭘 보느냐 하면 자식은 여자 소속이 아니고 남자 소속이 되는 이유는, 여자마저도 처음부터 남자 소속이 되는 거예요.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 그래서 여자는 없는 거예요. 여자는 소녀 때는 아버지에게 속했고, 결혼하게 되면 남편한테 속하고. 그러면 이혼하면 새로운 남자한테 속하기 위한 예비상태에 들어가지, 단독적인 여자는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 세상은 여성이 없는 세계, 곧 남성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남성의 세계에 속하는 겁니다. 육에 속한 세계입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4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8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절,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여기에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어요. 하나는 뭐냐, 육체를 따라 난 자 따로 있고, 그 다음에 뭐? 성령을 따라 난 자.
제가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있느니라” 여기서 제가 말을 멈추겠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육체로 따라 난 자, 아버지 엄마가 동침해서 태어난 자식들이 있대요. 한다면 여러분이 뭐라고 합니까? 그럼 사람치고 다 부모에게서 태어났지? 그게 다지? 아니, 아버지 엄마가 동침해서 자식 낳는 거, 그것 말고는 무슨 인간이 또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겠어요? 놀랍게도 그 외에 따로 있거든요.
아니, 아빠 엄마한테서 자식 낳는 것이, 그게 육체의 전부지. 뭐가 있겠습니까? 엄마가 하늘에 있거든요. 무슨 말도 되도 않는 소리? 무슨 엄마가 하늘에 있어요? 그럼 우리가 신경질적으로 그럼 하늘에 있는 엄마는 죄 없겠네요? 바로 그 이야기 하는 거야. 바로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니가 낳아서 죄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의 본질이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본질이. 땅에서 낳았든, 육체로 낳았든, 그 이유 때문에 무조건 그 사람은 죄의 피울 수밖에 없고, 죄를 유발할 수밖에 없고, 죄를 짓게 되는 본성을 본인이 이길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지금 요한일서를 보는데, 이 요한일서가 신약에 속하죠? 본문에서만 자꾸 파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신약은 어느 바탕위에 있느냐 하면, 구약의 바탕 위에서 예언된, 구약의 예언이 신약이 되는 거예요. 그럼 신약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반드시 그 기본이 되는 뭘 파악해야 됩니까? 구약의 흐름을 따라서 신약의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1장의 이야기,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다. 2장에서 자녀들아 너희는 죄 짓지 말라고 하는 그 말이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죄라는 것이, 일단 이 세상의 전부가 다 죄라면, 죄 안 짓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가 아니고, 소속이 죄 안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소속으로서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죄 안 짓는 것이 뭐냐, 죄 안 짓는 것은 중보자를 아는 것이 죄 안 짓는 거예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죄 안 짓는 거고, 뭐가 죄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죄다. 이것이 요한일서 내내 끌고 가는 테마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는다는 말이에요. 그게. 세상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되어 있죠. 이미 본질 자체가 같은 인간을 두고 똑바로 하고 죄 짓지 말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 니 소속이 어디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고향이 어디에요?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마세요. 이런 노래도 있지만. 니 소속이어딥니까? 하늘이에요? 땅이에요? 라고 묻는 거예요.
하늘에 속한 사람은 누가 만들었어요? 라고 물으면 땅에 속한 사람은 “제가 나름대로 착해서 만들었어요.” 이렇게 대답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우리의 대언자되시는 곧 화목제물이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어요.” 이야기하고. 반면에 세상에 속한 사람은, “내가 알아서 열심히 해서 죄 안 지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그렇게 되겠죠. 육체에 속한 사람은 아예 뭘 배제합니까? 육체에 속한 자들뿐이라는 것을 고수하면서 뭘 배제하겠어요? 우리처럼 되지 않은 자는 따로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성령에 속한 사람은 뭐가 훤히 보입니까? ‘어, 저 인간은 육체에 따라서 태어났구나.’가 훤히 보이죠.
육체로 태어난 사람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그 자체가 뭘 해도 죄가 되게 되어 있어요. 이유는 다른 언약이기 때문에 그래요. 표정들보니까 무슨 말하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제가 바짝 긴장이 되네요. 아까 봤던 갈라디아서 4장 봅시다. 28절, 29절을 보면, 28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절,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핍박을 누가 했는데? 한 적이 없는데? 그냥 나는 내 뜻대로 충실히 살고, 각자 자기대로 충실히 살뿐이지, 누가 누굴 핍박한다 말이냐? 라고 한다면, 니가 성령을 따라 태어난 사람을 만나보지 못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았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어떻게 했습니까? 초창기에는 환영하고 대우했지만 수상한 심보 때문에 했고, 마지막에 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좋아했습니까? 핍박했습니까? 보세요. 성령을 따라 난 사람 있잖아요. “예수님 당신은 목수의 아들입니까?” “아니야.” “당신의 어머니는 마리아입니까?”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본토를 이야기해요. 예수님의 본토는 하늘에 있어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예수님의 어머니에요. 예수님을 있게 만드셨으니까.
두 종류의 인간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두 종류의 인간을 만들겠다는 말은 두 종류의 인간의 차이점을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겠다는 겁니다. 손들고서 “저 하늘에 속하고 싶어요?” “손 내려! 손 내려라!” 내가 지금부터 내용을 말하는데, 그 내용에 합치되면, 그거는 누가 말려도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거기에 합치되지 아니하면 땅에 속한 사람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내용을 말씀해주세요. 요한일서 1장에 나오잖아요. 누구든지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죄 없다 하는 사람은 어디에 속했다? 땅에 속한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따라서 나타난 하나님인데, 그 약속 안에 이미 두 종류의 인간으로 구분 짓겠다는 취지가 담긴 그런 약속이 내려온 겁니다.
그러면 핍박을 누가 했는가? 이삭을 누가 핍박했습니까? 이스마엘이 핍박했거든요. 그러면 이스마엘이 이삭한테 뭐 잘못한 거예요? 아니면 소속이 다른 거예요? 이게 중요하죠. 잘못한 것이 아니에요. 절에 다니는 어떤 사람이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핍박한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소속이 다름을, 서로 소속이 다름을 핍박을 통해서 알려주는 계기로 삼는 겁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하지 마세요. 본인 소속만 평소에 드러내세요. 편하게 사세요.
나의 소속은 땅이 아니고 어디 소속이다? 하늘의 소속이다. 왜 앞자리에 누가 계시니까? 하늘에 계신 성령 받은 분이 내 대신 값을 치렀잖아요. 그 분이 피를 흘렸다 이 말이죠. 자, 피를 흘렸다는 말은, 곱게 죽으신 것이 아니에요. 충돌이 일으켰잖아요. 충돌이 일어났다는 말은, 서로 반대편, 서로 대립되는 반대진영이 있다는 말이고, 주님 소속과 주님 소속을 대적하는 대적과 충돌하니까, 예수님이 희생되어서 피를 흘렸잖아요.
그럼 피를 흘렸다는 말은, 주님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고. 그 사람은 어디에 소속된 사람입니까? 그럼 소속이 하늘이라면 더 이상 죄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그냥 니는 내 아들이다가 아니라 죄를 씻어주면서 내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 자녀라. 이 죄 없는 내 자녀야. 니는 죄가 없어. 그런 뜻이란 말이죠. 왜?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 뒤에 죄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소속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가 이런 소속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죄가 없느니라, 죄가 없느니라, 죄가 없느니라. 계속 반복해서 요한일서까지 밀어붙이는 겁니다. 니가 어떤 짓을 해도 죄가 없느니라. 왜? 니 죄는 니 행함에 따라서 죄가 생기고 안 생기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죄 있는 걸로 간주했죠? 왜? 죄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하나님으로 안 만들려면, 우리는 뭐라고 해라? 우리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하라는 이 말이죠.
그 이유가 뭐냐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주님께서 율법을 보내서, 주님 쪽에서, 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만들어낼게.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죄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럼 죄는 살아나고 우리는 어떻게 된다?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죽은 자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못해요. 그냥 소속된 그 특징만 드러낼 뿐이지. 여기 돌이 있는데, 돌에다가 발광체를 발랐습니다. 돌이 밤에 반짝반짝 빛나니까, 분명히 돌에다가 형광체를 발라놨기 때문에 빛나는 거잖아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돌아, 돌아 니가 그렇게 착하니까 반짝이는구나. 이렇게 하면 돌은, 나는 죽었어요. 죽었고, 발려진 형광물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겁니다. 왜 자꾸 내가 잘해서 빛난다고 오해하십니까? 아까 못 들으신 분이 계셔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우리는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율법이 오니까 죽은 죄는 살아있으면서 드러내고, 나는 공짜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뭐로 만든다? 나를 죽은 자로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는 너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잠복되어 있는 죄를 끄집어내서 그 죄와 상대해서 예수님의 피로써 그 죄를 씻어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근데 니는 니 자신을 자꾸 들이대는데, 니 자신을 들이대지 말고 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니 죄를 끄집어내서, 니 죄와 그리고 예수님의 화목제물하고 이렇게 만나게 해줘야, 화목제물의 의미가 살아나요. 화목 다음에 무엇입니까? 제물이잖아요. 제물의 기능이 뭔지 알아요? 죽는 게 기능입니다. 멀쩡한 제물은 제물도 아니에요.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왔습니다. 죽기 위해서 왔다는 말은 우리 죄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기어이 하나님이 없애주시는 고집과 열심은, 실패나 중도포기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따라서 성도는 어떤 것을 보여주느냐 하면, “주께서 성공하셨습니다.”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이미 구원이 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우리를 돌아보는데, “주여,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더욱 죄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라고 할 때, 니가 착하다가 아니라, “니가 내 소속이구나.” 소속!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어느 소속입니까? 하늘에 속해 있다. 또 성령으로 난 자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 여인들이 낳지 못한, 오직 하나님만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날 자가 너다. 너희 아버지, 엄마, 이걸 속된 말로 하면 애비, 애미 라고 하죠. 애비, 애미 잘 만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모태신앙, 모태솔로라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증거 하기 위해서 너는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하죠.
그럼 우리는 따집니다. 제가 성령으로 태어난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육체로 태어난 사람, 지옥 갈 사람들이 너를 핍박할 거야. 그럼 우리는 또 답변하죠. 저는 핍박받은 적이 없는데요? 핍박받는 것이 머리 쥐어뜯고 할퀴고 하는 이런 것이 핍박이 아니고, 다른 소속 때문에 마지막 나오는 멘트의 결론이에요. 세상은 세상 쪽이고. 나는 죄인인데, 나는 간다. 천국! 이렇게 소속 찾아가는 거예요. 자기 소속 찾아가는 거예요.
같이 어울려서 노래방에 가고, 술 먹고, 결국 마지막에는 술 먹고 천국 가고, 술 먹고 지옥 가는 거예요. 소속이 각자 자기의 출발지점으로 되돌아 와요. 출발지점으로. 땅에서 왔으면 땅으로 가고, 하늘에서 왔으면 하늘로 가는 겁니다. 에이, 목사님. 그런 구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구라, 거짓말이 어딨어요? 아브라함의 자식이 둘이 있다니까요? 정말 묻고 싶어요. 또 물을게요. 여러분 이스마엘이 잘못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이스마엘이 잘못한 것이 뭐가 있어요? 없어요.
기껏 찾으면 이삭한테 희롱하고 괴롭혔다고. 세상에! 어린애 아닙니까? 어린애 괴롭혔다고, 애가 한 짓이죠. 그 희롱했다고 하는 것을 가지고 소속이 다른 모델로 간주해버리는 거예요. 애들 장난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소속이 다르니까 그렇게 했다는 것으로 일방적으로 주께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어데? 소속이 다른데 건드려! 애들이 무슨 소속을 알아요? 애들끼리 놀다보면 지들끼리 다투고, 힘이 약하다고 밀치고 하겠죠. 어데? 소속이 다르면서 내가 관리하는 자를 괴롭혀? 이래 된다 말이죠.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짓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처럼 죄짓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처럼 죄짓지 않는다는 말은, 화목제물의 의미를 고수하는데 있어서 동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 행함으로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화목제물 덕분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같은 소속이다. 이 말이죠. 그게 성령 받아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아까 5강에서 강조한 것이 뭐냐 하면 이걸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한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어요.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율법을 주게 되면 죄가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되어 있고, 반대로 나는 죽은 자가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이 로마서 7장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은 죄를 용서한다고 하니까, 그 소리 듣고 자꾸 하는 짓이, 이거 죄입니다. 이것도 죄입니다. 자기가 죄를 가지고 나오더라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런 예를 들었죠. 애들이 문방구에서 사고 싶은 물건이 있더라도, 돈 들고 오듯이.
하나님은 우리보고 뭘 갖고 오라고 하느냐 하면 죄를 갖고 오라고 하는데, 그 갖고 오는 죄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죄가 아니고. 가만히 있어. 내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의 작용에 의해서, 그래서 생긴 죄를 가지고 나오면,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는다. 주께로 해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회개 한 적도 없어요. 회개 하신 것도 주께서 하신 것이고.
자, 요한일서 4장 13절 한 번 봅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알죠? 두 글자로 말하면 이게 소속이에요. 소속. 자, 어떤 단체관광객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동굴 안에 들어가자마자 말소리가 달라져요. 동굴 밖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여보!” 되죠. 동굴 안에서는 뭐가 돼요? “여어어보오오~”가 되죠. 이건 왜 그렇습니까? 일부러 동굴 안에 들어 간 것을 티내려고 보보보~막 반복합니까?
“여보!” 하면 될 것을 “여어어보오오~” 이렇게 일부러 꾸미면 동굴 안에 들어간 것이 돼요? 안 돼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동굴 안에 있으니까 그냥 “여어어보오오~”가 되는 겁니다. 성령 안에 있으니까 뭡니까? 화목제물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마련이에요. 아니 이게 어려워요? 동굴에 집어넣어버릴까? “여보 물 가져왔어요요요~” “어이, 말 좀 똑바로 해주세요요요~”니나 나나 똑같네.
똑같은 이유가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고, 동굴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부부싸움 할 때, “여보! 애한테 그렇게 다그치지마세요요요~” “고3이라고 너무 공부하라고 하지마세요요요~ 당신은 말을 왜 그렇게 해요요요~” 이게 전부 다 소속이 주 안에 있다 보니까, 본인이 본인의 마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동굴의 위력이, 나로 하여금 화목제물을 귀하게 여기도록 몰아가도록 하는 거예요. 동굴 자체에 위력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약속의 자녀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의 자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쯤해서 그럼 목사님! 궁금한데 성령의 자녀가 뭡니까? 또 막 묻고 싶죠? “아이구, 성령의 자녀 되고 싶은데 성령의 자녀가 뭡니까?” 또 묻고 싶죠? 답변해드리겠어요. 그것 때문에 제가 있잖아요. 여러분 육체의 자녀가 누군 줄 아십니까? 아신다면 성령의 자녀에요. 육체의 자녀는 뭡니까? 태어난 내가 알아서 내 행함으로 어디에 간다? 천국에 간다. 이게 육체의 자녀입니다. 그런 쪽이 보이거든, 나는 그런 쪽이 아니구나 하세요.
만약에 그게 구분이 안 되거든, 본인하고 똑같아요. ‘아이구, 저 봐! 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저 꼬락서니를 봐!’ 라고 보이거든,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게 보인다는 거예요. 육체의 자녀는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 동굴이 없어요. 맨 땅이에요. 맹숭맹숭 해요. 그냥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어요. 말도 그냥 여보! 하면 끝나요. 여어어보오오~!가 없어요. 모든 것은 자기가 알아서 딱딱 정리해서 하는 겁니다. 아무도 안 도와줘요.
근데 성령 받은 자는 하고 싶어도 갑자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길로 가게 돼요. 응답을 받으면서 뭔가 차이남을 보여줍니다. 그 차이남 속에 뭐가 끼어드느냐 하면 십자가가가 끼어드는 것이죠. 화목제물이 끼어드는 것과, 요한일서 1장 7절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게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는 것을 집어넣은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 이게 바로 약속으로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에요. 예수의 피가 무의미하다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피 때문에 의미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근데, 육체를 따라서 난 사람은 지가 할 일을 지가 알아서 하는데 뭐가 필요 없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왜 끼어드느냐고 하죠. 내 인생에. 그 딴 거 필요 없죠. 교회 가서만 잘 들으면 되지, 평소에 필요 없어요. 그러나 평소에 교회 가서 이렇게 하고 세상에서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나, 직장에 가나, 어디 가나, 우리는 왕왕 울리는 예수 안이라는 동굴 안에서 교회도 가고, 직장도 가고, 집에도 오고. 항상 내 맘대로 안 되는 동굴 안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령 안에 성도입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뭘 해도 죄가 아닌 거예요. 뭘 해도 화목제물 때문에 죄가 없어진 거예요. “거하라” 거하라는 말과 적당한 말은 소속이라는 말입니다. 소속에 행하라가 등장하지 않고, 소속에 거하라. 그걸 요한일서에서는 성령 안에 거하라. 또는 사랑 안에 거하라. 그 사랑이 우리 죄를 씻어줄 것이다. 화목제물이 씻어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소속된 행함 속에서 나오는 행함이 있어요. 그럼 그 행함은 우리의 본질을 보여주는 행함으로 나올 수밖에 없죠. 소속이 다른 티를 내는 거죠.
그리고 이 요한일서에서 항상 주의할 것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우리는 이렇다.”로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같지 아니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똑똑히 보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요한일서 4장 4절. 누가 한 번 크게 읽어보세요. 성질 급한 제가 읽겠습니다. 4절,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속하였다는 말은 소속되었고.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소속이니까 안이 성립돼요. 동굴 안. 니가 니 인생을, 니 운명을, 니 팔자를 결정지을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5절,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듣느니라” 저희는 ☐에 소속되었고, 자 ☐가 뭡니까? 뭐라고 되어 있죠? 세상. 세상에 소속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을 대할 때, 그냥 “김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러면 되는데, 또 성도라고 불쑥 나오는 거예요. “세상에 속하신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남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을 때,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 부모님 모셔와!” “예.” “아무개 학생 부모님이시죠?” “예. 그렇습니다. 아이구, 선생님 진즉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아이구, 세상에 속한 선생님을 이제 보게 되었네요.” 이런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학교에 속한 선생님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선생님. 물론 그 말을 하면 실례고. 세상이란 말은 생략하고 그냥 악수하세요. 세상에 속한 교장선생님은 무슨 훈시를 하시려나? 세상에 속한 사장님은 무슨 말을 하려나? 이 말은 뭔 뜻이다?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고백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방금 말로 나왔죠. 그게 행함이에요. 행함은 소속 자가, 소속된 신분 자가, 구성원이 저절로 나오는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이 주께 영광이 되는, 하나님의 소속된 자의 표현형이 되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소속 나옵니다. 이러면 또 “목사님! 이래 사는데 세상 것이 나와요?” 그럼 세상 소속이겠죠. 나보고 어쩌라고? 세상 것이 나온다는 것은 방탕,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내 구원은 내가 행하겠다. 이게 바로 1장부터 이야기한, 나는 죄를 짓지만 선을 행할 수 있어! 이래 나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뭐로 만든다고 했습니까? 거짓말로 만드는 거죠.
거짓말 만드는 주특기 때문에 예수님은 피 흘렸잖아요. 가짜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이 피 흘렸잖아요, 피는, 충돌이 없는 피는 없어요. 피 흘린다는 말이 어디 넘어져서 피 흘린다는 말이 아니고, 충돌해서 피 흘렸잖아요. “너 아니야!” 때문에 십자가 달렸잖아요. 그런데 그걸 중간에 넣고, 그게 화목제물이며, 내 죄를 씻어주는 제물이라고 인정한다면 그거는 착해서가 아니고, 우리는 착한 일을 해서가 아니고, 하늘의 소속, 처음부터 창세전에 약속에 속한 자녀이기 때문에, 때에 맞추어 이 땅에 누구는 천구백 몇 년도, 누구는 천구백 몇 년도.. 그렇게 태어난 거예요.
생일 축하합니다~♬ 하는 것은 소속 다른 자가 태어난 거예요. 소속 다른 자가. 촛불 훅 불고. 이 소속이 다른 자야! 니 뭘 만질래? 실 만질래? 청진기 만질래? 마이크 만질래? 청진기 만진다는 것은 의사된다는 것이고, 실은 오래 산다는 것이고, 마이크는 나중에 아나운서 된다는 것이고. 돌잔치 할 때 하잖아요. 소속이 다르다는 말을 요한일서가 하는 이유는 요한복음이 그렇기 때문에 그래요. 같은 사도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다음에 요한계시록 해석은 뭐가 됩니까? 정답을 다 알려줬는데? 요한계시록 해석은 뭐가 돼요? 우리의 소속은 이 땅에 속하지 않고, 예수 안에, 생명책 안에 있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세상 멸망을 지켜본다. 이게 요한계시록의 테마입니다. 베리칩 백날 문신 새겨도 괜찮아요. 생명책에는 행함을 묻지를 않습니다. 묻지도 않는 행함을 내세우지는 마세요.
우리가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뽑아낸 죄를, 우리는 밖에 세우고, 우리의 죄만 뽑아서,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처리를 하고 난 뒤에,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소속을 알려줬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다가 신분을 노출 당하고 확인 될 뿐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까 쉬는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의 외부가 우리의 내부에 침투해서, 내부에서 형성된 외부를 다시 가져가면서, 다시 내부를 함몰시킨다고. 식사하면서 제가 이야기 했죠? 외부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에 속한 예수님이, 우리의 내부에, 세상 속에 들어와서, 이 안에서 뭘 만든다? 하늘에 속한 자를 만들어 내놓고, 그들만 뽑아서, 택한 자를 뽑아서 데려가게 되면, 나머지기는 뭐냐, 함몰되는 거죠. 쓰레기니까. 아무가치 없는 것이니까. 주께서 천사를 보내서 완전히 도살 처분하는 거죠.
이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쭉 흐름이에요. 통으로 뚫은 거예요. 외부가 내부에 와서, 택한 백성을 생성시켜서 데려가고 나머지기는 빠이빠이bye-bye! 전부 다 날려 보냅니다. 누구의 행함입니까? 주님의 행함이죠. 주님의 행함이 우리 안에서 말씀대로 완성시킨 그러한 증거물을 하늘에 속한 자가 그대로 내보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에는 뭐가 없다? 두려움이 없나니.
요한일서 4장 18절,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오직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 이걸 누가 아십니까? 하나님이 아셨죠? 사랑이 없으면 형벌이 있다는 것을 아시죠? 그럼 예수님이 오실 때, 아무 임무도 사명도 없이 그냥 맨손으로 왔겠습니까?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왔습니까? 목적이죠.
그 목적은 예수님도 알고 아버지도 알고 두 분만 알고 있겠죠. 그 목적이 뭐냐,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는데,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 이 말이죠.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뭡니까? 형벌 없애기 위해서 뭘 주면 돼요? 사랑 주게 되면, 사랑이 화목이 돼버리고, 화목제물 주게 되면 더 이상 뭘 할 게 없다? 두려워할 게 없다. 왜? 소속이 다르니까.
여러분들이 다니엘 세 친구가 어디 가서 죽을 뻔 했습니까? 불속에 들어갔죠. 불속에 세 명이 들어갔는데, 느부갓네살이 보니까 네 명이죠. 그러면 천국은 불 밖에 있는 게 천국이에요? 불속에 있는 게 천국이에요? 불속이 천국이에요.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천국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소속이 되니까. 함께 있는 것이 천국이니까. 그러면 자동적으로 불에 집어넣지 사람은 무슨 세계가 돼요? 하늘에 속하지 않는 세계가 되면서 지옥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그 불은 지옥불이 맞아요. 불속이 지옥불이 아니고 불 바깥이 지옥불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번 시간에 말고 저녁 먹고 할 시간에는, 왜 다윗이 사울 죽인 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울이 죽을 때 블레셋 군대한테 죽었잖아요. 본인이 자살을 했는데 죽지 않은 모양이라(대상10장). 그래서 옆에 아말렉 소년한테 죽이라고 했을 때에, 다윗이 사울 왕을 죽였다고 해서 그 소년을 또 죽였어요. 그 이유가 뭐냐, 이게 구약 사무엘하 1장에 보면 나오거든요. 그것과 요한일서의 소속과 이게 연관이 되어 있어요. 구약 전체가 신약과 연관이 되어 있어요.
신약은 해답이고, 구약은 문제를 던지는 겁니다. 문제 던져놓고, 소크라테스 같이 지는 해답도 모르면서, 니 자신을 알라. 그냥 니 자신을 알라고 문제를 던져놓은 거예요. 니는? 나도 몰라? 같이 모르자. 이게 구약입니다. 신약은 뭐냐, 이제 해답이 온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뭐부터 보는가 하면 해답부터 보니까, 이게 문제하고 연결이 안 되니까, 해답에 대해서 오해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오해들을 하니까, 신약보고 뭘 지키느냐 하면, 신약보고 율법화 시켜서 도로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구약으로 돌아갔어요. 지키면 천당 가고 못 지키면 지옥 간다. 전혀 아는바가 없어요. 소속됨으로 천당 가는데.
구약은 뭐냐, 소속이 아니고 뭐로 가느냐 하면 내가 행하면 복 받고, 행하지 못하면 지옥 간다. 내 미래를 누가 해결한다? 지금 내가 단독으로, 휑하니 나만 달랑 남아서, 내 문제 내가 손 안대면 해결 없다. 이런 식으로 자기 미래를 개척하려고 하는 거예요. 신약은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사랑 안에서, 이미 덮어씌운 소속이 있는데, 그 점을 사람들은 놓친 거예요.
다시 요한일서 2장에 들어와서 1절 뒤에 보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시라” 2절,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저는 (음음음)화목 제물이니, 방금 제가 (음음음)했죠? 빈 칸에 여러분들이 넣어보세요. 무슨 말을 해야 됩니까? 저는 (음음음) 화목 제물이니, 화목 제물과 저는 사이에 뭐가 돼요? “우리” 그 다음에, 우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죄를” 강의 끝났습니다. “우리 죄.” 화목 제물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합니다. 화목제물이 와야 우리가 죄인 돼요.
화목제물이 아니면 우리는 착한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항상 자기한테 기대하고 긍정해요. 그러나 화목제물이 오는 순간, 우리는 뭘 해도 화목제물을 위해서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작업대에 놓인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의 소속이 화목제물이신 주님과 같은 소속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