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09 요한1서 뉴저지(주사랑 교회)강의9-이 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주께서 준비한 모든 것이 주께만 영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제를 제가 미리 말씀드렸는데, ‘복음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교재는 요한일서를 하는데, 요한일서 1강에서 8강까지는 시카고강의에서 해왔고, 그것이 유튜브에 1~8강이 이미 다 올려져있습니다. 오늘은 요한일서 9강부터 시작되는 거예요.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어떤 지역에 있든지, 누구든지 말씀은 보편화되어야 된다는 것. 한국에 있든, 브라질에 있든, 유럽에 있든 간에, 누구도 그 듣는 사람이 직업과 상관없이, 나이와 상관없이, 복음은 그냥 복음으로만 구원이 돼야 된다는 것. 그래서 지역 따라 차별됨이 없이 그냥 쭉 갈 겁니다.
이게 9강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제목으로 드렸듯이, 복음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무엇인가? 라는 말을 하려면, 뭔가 있어야 돼요.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미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형광등이 무엇인가? 그런데 사람이 뭔가 있다는 것을,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은, 자기가 묻는 것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고, 그렇게 묻는 자기 자신이 먼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학교가 무엇인가? 하늘이 무엇인가? 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늘도 있지만 그렇게 묻는 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고 할 때는 이게 달라져요. 복음이 있어버리면 인간은 없어져요. 그리고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복음은 없는 겁니다. 그러면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복음이 있는 것이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있는 것이 좋겠습니까? 어느 것이 있는 게 여러분에게 유리하겠어요? 복음만 나타나고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없어져도 복음만 있으면 좋겠습니까? 이 질문은 요한복음 1장의 질문이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있다고 시작하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알려면 내가 있다는 것을 빼라는 말이죠. 내가 있다는 것을 빼고 복음을 물어야 되지, 내가 여기 있고 복음이 있어버리면 그 복음은 나의 있음을 옹호해주고 정당화시켜주는 가짜 복음이 되는 겁니다. 내가 복음 믿으면 어떤 이익이 있을까? 내가 복음 믿으면 우리 가정이 어떻게 펴질까? 내가 복음 믿으면 구원될까? 이 모든 것은 복음에 대한 모독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먼저 있었고, 그건 어디에 있었습니까? 태초에 있었습니다. 그럼 태초에 있었다는 말은 우리는 태초에 있지도 않았던 존재들입니다. 먼저 계셔서 만들어진 존재죠.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뭐냐, 만들어진 이후에 안다는 것은 반칙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려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가 있기 전에,우리가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은 무슨 의논을 했는가? 그것을 간파하고 파악해야 이게 복음을 하는 겁니다.
내가 있기 전에 복음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있기 전에를 바꿔서 말하겠습니다. 내 가정이 있기 전에, 내 육체가 있기 전에, 내 교회가 있기 전에, 내 사업체가 있기 전에, 내 자식이 있기 전에, 내 돈이 있기 전에, 뭐가 있었다? 복음이 있었고 말씀이 있었죠.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할 때, 내가 우선이 되지 말고 복음이 먼저 우선이 된다고 한다면 무엇이 지워져야 하냐면, 복음이여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이여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이여 우리에게 오셔서, 내가 고민하는 이런 것들을 다 없애달라고 하는 이런 능력이 작용해야 복음이 복음답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고민거리, 가정, 교회, 직장, 자식, 노후대책문제, 내 건강문제, 이런 모든 것을 가지고 복음과 결부시키려고 하는 것은 사이비 복음이에요. 백퍼센트 사이비 복음이에요. 딱 한마디로 끝납니다. “니가 뭔데?” 딱 한 마디로 끝납니다. “니가 뭐야? 니가 하나님이야?” “아닌데요.” “그럼 뭐야?”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건방지게, 니를 만들기 전인데, 그걸 일방적으로 개입하고 간섭할 수 있어?” 회장단들 회의하는데, 신입사원이 거기 끼어들면 곤란하잖아요? 아무리 미생이라도. 거기에 끼어들면 그 회사 안 됩니다.
빨리해서 듣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친절하게 천천히 말씀드립니다. 복음이여 오셔서 내 가정 문제, 내 교회문제, 내 육체문제, 아픈 문제...심지어 나의 천국, 지옥 가는 자체의 문제가 나의 고민이 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없애주소서.그럼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래야 태초, 피조 이전의 세계가 우리에게 구현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묻죠. 니 소망이 뭐냐? 저의 소망은 태초이전의 사상과 계획이 그대로 이 땅에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누가 그렇게 가르쳤던가? 그것은 태초이전에 관여하신 분이 가르쳤잖아요? 누군데? 성령이 그렇게 가르쳤잖아요. 태초에 성부, 성자, 또 누가 계셨어요? 성령이 계셨잖아요.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상이 문제가 있는데,그 문제가 해결 안 되는 것이 아니고 해결되는데, 해결되려면 바로 태초로 돌아가, 태초에 계신 그 작정과 계획이 그대로 넘치면 되느니라.
뭐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이렇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참 쉽죠? 문제 정말 간단해요. 우리 애가 몇 살까지 살겠습니까? 그거는 니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야. 제가 앞으로 90일 살겠습니까? 니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야. 왜요? 태초에 관해서는 내 소관이지, 피조 된 니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묻게 될 때, 이렇게 묻는 우리 자신은 이미 복음에 의해서 소멸 될 마음의 자세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소멸 될 마음이 자세를 준비한다면 무엇도 소멸됩니까? 그동안 끙끙 앓으면서 인생의 모든 고민과 걱정과 그리고 기도제목으로 삼았던, 심지어 금식제목으로 삼았던, 심지어 십일조 내는 그 이유로 삼았던 모든 것들은 다 허망한 것이고, 그동안 그 허망한 것을 그렇게 고민거리로 내게 받아들였다는 것은, 태초에 대해서 인간이 알지 못하는 다른 세력, 사탄이 그렇게 가지고 논 것입니다. 인간을.
“너 존재하지?” “그래. 존재해.” “잘 존재해서 어쨌든 천국가야지?” “어. 내 소원이야.”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렇게 놀아난 겁니다. 그동안 놀아난 거예요. 사탄은 이렇게 합니다. 예수 믿어라! 사탄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해요. 세상에! 이게 사탄의 말인 줄 상상도 못했을 거예요. 예수 믿으라는 것이 성경에 다 나와 있는 것인데, 왜 그게 사탄의 말이냐?
풀이 들어갑니다. 왜? 예수 믿는 것이 사탄의 말이냐 하면은, 그 멘트를 내뱉는 사람이 무엇을 전제로 하겠어요? 나 이렇게 하면 이익이 되겠죠? 가 전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으니까 저 사람을 천국 보내달라고 하는 그런 생각은 절대로 없어요. 내가 멘트를 내뱉는 나 있죠? 스냅사진 찍으세요. 하나님 저 보이죠? 제가 이런 멘트를 날릴 테니까 멘트를 날리는 주인공인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로마서 9장에, 2년 전에 가스펠 펠로우쉽 교회에서 했던, 처음 목요일에 했던 강의의 본문 제목이 뭐냐 하면,로마서 9장 3절이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끊어질지라도”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내가 원하는 바로다.” 아이 원티드 I Wanted, 내가 원하기는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서 저주를 받는 것조차도 내가 원하는 요소 중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이것을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나는 개인구원에서 벗어났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개인구원. 개인구원 안 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주님만 좋다면 지옥 보내셔도 괜찮습니다. 이 고백을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 3절에서 하고 있어요. 보통 사람을 겁이 나서 후딱 넘어가버립니다. 근데 저는 그것을 잡아당겨서 가스펠 펠로우쉽 처음 강의에 그거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렇게 했더니만 가스펠 펠로우쉽 어떤 교인이 그 취지도 모르고, 본문을 읽었더니만 교회에서 하는 문화처럼 “아멘”이라고 해요. 강의 시작도 안 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아멘.” “저도 같은 생각에 한 표 손들었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아! 이 정도였어! 가스펠 펠로우쉽 교회가 이 정도였어!’ 지옥 갈 각오를 가지고 이 교회에 오셨느냐 이 말입니다. 시작부터가 복음이 왔을 때, 왜?복음의 위협이, 마태복음 3장의 이야기입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세례요한이 이야기할 때, 왜?이런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 당시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접근되는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결과를 가지고서, 세례요한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느냐를, 우리가 마태복음 정도는 읽어봤으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의심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기쁜 소식이 왜 그 당시 사람들은, 거기에 적극적인 반발과 발작증세를 일으키면서, 극도로 저주하고, 저지하고, 심지어는 그 세례요한을 조기에 그들이 살해해버렸느냐? 뭐 세례요한뿐만 아니겠죠. 예수님도 그렇겠죠. 예수님이 어디 천년만년 같이 살자고 하는 내용이 제가 알기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없어요. 제가 알기 에는요. 바라바를 원하느냐? 예수님을 원하느냐? 할 때 바라바라고 했지. 예수님은 조기에 제거 대상이었지. “천년만년 우리와 함께 살면 참 고맙겠습니다.” 라는 그런 생각이, 제가 보기에는 공관복음에 없어요.
그러면 그걸 우리가 봤으면 눈치 채야죠. 그 당시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고 침착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의회의 숫자가 몇 명이냐 하면, 70~72명 사이입니다. 왜 유대인들의 의회 숫자를 70명에서 72명 사이에 두느냐 하면은, 결정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카리스마 있는 독단적인 의견이 진리처럼 설쳐대는 그 꼴을 못 보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패 가르는 것도 못 보겠다는 겁니다. 이거는 거의 만장일치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느냐, 그럼 완벽하게 동의하지 않으면 이거는 신의 뜻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신중에 신중을 구한 겁니다. 그들이 침착하고 합리적이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고 아이큐가 높은 사람들이에요. 그 72명이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예수는 쓸모 짝이 없는 존재다. 예수는. 예수가 쓸모 짝이 없는 존재라는 말은 뭐냐, 예수님이 주장하는 모든 것들이 이 인류 사회에, 인류 미래에 저지해야 될 불필요한, 그러한 제거대상이라는, 아주 침착한 결론의 합에 도달해서 제거한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냐 하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어요. 예수 믿을 수가 없는데, 예수님이여 오셔서 내 가족 다 파탄시키고, 내 사업 다 망치고, 내 목회 완전히 실패로 끝나서 교인들 한 명도 없이 다 떠나게 하옵소서. 선교한 족족 죽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면서 나설 위인들이 없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니까, 이상해요. 제가 잘못 들었는지, 아니면 뒷조사를 해야 할 문제인지, 무슨 노림수를 가지고 교회오지는 않으셨는지.
한국민족의 무속신앙이 옛날부터 뭐 별보고 달보고 비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뭐 모든 민족이 다 그렇지만. 지성이 감천이면 누굴 또 감동시킨다? 하늘도 감동한다. 조직신학이고, 교리고, 성경책이고 다 필요 없어요. 딱 하나만 알면 돼요. 정성을 얼마나 증가시키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얼마나 주어지느냐를 결정했던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기독교 교회가 흘러들어왔다는 것은, 지극히 내추럴 natural 한, 자연스러운 거거든요. 자연스럽단 말이죠.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실력을 안다고 생각하고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역사는 원인을, 결과를, 역사 안에서만 찾게 되어 있어요. 별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뭐 상식적인 이야기에요. 역사는 모든 되어 진 결과를, 그 원인을 반드시 역사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역사 안에서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그 말이 진리라고 72명뿐만 아니고, 7억, 70억이 동의한다면, 인간의 미래의 찬란한 역사의 결과는 그 원인을, 지금 내가 원인이 될 경우에만 그런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이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환경이 있어야 얻었겠지? 환경도 없는데 얻는다는 것은 이 무슨 도둑놈 심보가 있느냐? 열심히 공부하면 원하는 목표에 갈 수 있다. 이거는 지당한 이야기거든요. 지당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결과가,당장은 모르지만 추적해보면 반드시 그 원인은 역사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기본속성입니다. 아닌 경우는 딱 한 경우밖에 없어요. 그거는 예수님께서 알려줬어요. “너희의 구원은 역사 안에서 원인을 찾을 수 없느니라.”
그 말을 이해를 하려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면 역사 안에서 역사 밖으로 가서, 아! 그렇구나! 알고 다시 역사로 오는 수밖에 없어요. 왜? 역사란, 그 원인은 역사 안에 있기 때문에. 역사 안에 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안에,인간 손에 의해서, 라는 그런 뜻입니다. 내가 여기서 이것을 해내면, 여기에 부합되는 대가와 합당한 결과는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예수 믿고 천국 가자. 그렇다면 “예수 믿고” 라고 할 때, 예수 믿는 것은 뭐냐, 내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 결과로 뭐가 주어진다? “우리가 천국 간다.” 라는 논리가 되어 진다. 이 말이죠.
근데 이것이 거짓말입니다. 이게 거짓말이에요. 이게 사기에요. 왜냐하면 내가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안 받아 줍니다. 성령의 선물로 온 믿음만 받아주지, 내가 믿는 믿음은 안 받아줘요. 성령께서 주신, 성령은 뭐냐 하면 역사 바깥에서 주신 분이에요. 역사 바깥에서 믿음을 선물로 주게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 2장 8절. 믿음을 선물로 주게 되면, 무슨 충동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역사 안에서 원하는 대가와 보상을, 은근히 역사 안에서 손에 쥐기를 기대하면서, 내가 열심히 벌이는 내 믿음과, 그것과 관계없이 외부에서 성령으로 투입되는 그 믿음과는 죽을 때까지,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맹렬한 투쟁과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번 애가 공부 잘 한 거, 주여 기도 빡세게 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게 아니다! 니 기도와 애 공부 잘 한 거,아무 상관없다! 아닙니다. 주님. 이번에 애 때문에 신경 많이 썼습니다. 밥도 못 먹고 금식했습니다. 아니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다. 아닙니다. 제가 공로입니다. 제 기도 공로입니다. 만약에 기도한 공로가 없다면 나는 기도할 이유도 없고 이제 나는 기도 안 하겠습니다. 니가 지금 나한테 개기나?
이번에 성적이 딱 올라가면 제가 헌금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아니다! 헌금하는 거, 십일조 하는 것하고 아무 상관없다! 이번에 집사하게 되면 제가 선교사를 작정해서 두 명 보내겠습니다. 아니다! 이번에 일이 잘되면 내 아들을 신학교로 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니다! 이번에 하는 일이 잘 된 것은 목사를 잘 섬겨서 그런 것입니다. 아니다! 왜 저의 순수한 마음을 주께서는 기꺼이 물리치시옵나이까? 왜 저의 순결하고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을 왜 어떤 결과에 끼어들지 않게 하시옵나이까?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니가 죄인이기 때문에. 니가 보기에는 애가 공부 잘 한 것으로 니가 의롭게 보이느냐? 내가 원하는 것은 애가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은혜로 믿게 된, 의인이 된 아들을 나도 원한다. 애가 공부 잘했다고 해서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국의 백성을 얻기 위해서는, 천국의 백성의 방식에 무엇이 끼어들고, 무엇이 방해되고, 무엇이 훼손되는지를, 주께서는 너무 잘 알아요.
그것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로 천국에 가야되는데, 이 엄마라는 작자가 금식해서 우리 애가 믿음 생겼다고 우기니,그걸 내쳐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잘라내야 돼요. 니가 니 자식을 배렸어. 배렸다고. 엄마 입장에서는 자식을, 그러니까 엄마도 한 소리 해요. “하나님 저도 제 애가 천국가기를 간절히 소원해서 그쪽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이 천국백성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순수하게 기도했습니다.” 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순수하게 기도한다고 했지만 나는 니 맘 안다. 천국 가되 공부 잘 한 채로 천국 가게 해달라고, 니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도를 니가 스스로 꾸민 것이다.”
이렇게 순수한 천국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나중에 우리 아들한테 무슨 행복을 해주실까? 이것이 밑에 깔려 있다고요.이것이 없는 인간은 없어요. 순수함을 대가로, 순수함의 대가, 다시 말해서 역사 속에서 순수한 것을 내가 간직할 때, 그 결과가 순수하게 역사 속에서 나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할 때, 나는 종이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요번 문장이 좀 길었죠? 이게 뭐냐 하면 그냥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잖아요? 두 세 사람이에요. 그럼 세 사람에서 잘라봅시다. 그럼 몇 명이냐 하면 두 사람입니다.
교회가 두 명이냐, 세 명이냐 아무 의미 없어요. 오로지 주님만 찾으면 그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근데 사람들은 뭐냐, 두 명에서 세 명되고, 그 다음에 네 명되고, 네 명에서 여덟 명 오게 되면, 이거는 역사적으로 2명에서 8명이 되었으니까, 어떻게 되었어요? 실적을 눈으로 목격했으니까, 그 목격한 것을, 우리교회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2명에서 8명이 되었겠는가? 그 실적을 근거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제자들로 지금 목회하고 있다고, 그걸 자기 확인, 자기 증명의 자료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런 경우가 굉장히 흔해요. 백퍼센트 흔합니다. 권찰이 되어서 목사님 심방하는데 따라갔다. 사실 이런 예는 다른 데에서는 들지도 않아요. 목사님. 우리가 아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는 하지도 말라고 하니까. 심방을 갔는데, 집에 가스 불을 안 꺼서 홀라당 다 태웠다. 그러면 백이면 백이 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의 일 했는데 돌아온 대가가 뭡니까?
그러면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역사로 쓰이는 원인은 절대로 결과로 넣을 수 없다. 똑같은 이야기에요. 니가 권찰로 주의 일 했다고 해서, 니 집이 그날 그때에 불나야 할 계획이 변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근데 니는 무모하게 내가 주의 일을 한 것과 집에 불 난 것과 연계시켜서 문제다. 역사에서 일어난 원인은 절대로 역사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데,우리가 그런 줄 알고, 뭐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합니까? 주여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집 날린 것도 하나님이요. 백날 이야기해봤자, 아무리 해봤자, 제가 여기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죄인 됨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죄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 이야기 들었으니까, “목사님. 말씀대로 원인과 결말을 엮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제발 입에 발린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우리만 생각하고 내 공로만 자랑하는 그런 인간으로 눈 감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땡겨서 알게 되면,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태초에 것을 어떻게 하는가, 우린 모릅니다. 올라가서 내려와야 하는데, 누가 올라갑니까?베드로가 자기 목숨 걸고 따라가려고 하다가 저지당했잖아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주님께서 지정한 자리가 있어요. 니 자리는 주님의 자리다. 니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니 조상부터, 조상의 DNA가 잘못돼서 죄인 되었으니까, 그걸 니 탓으로 생각하지마라. 니가 갖고 있는 성격과 성품은 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건데, 우리가 죄인의 형상을 물려받았기에, 그 다음에 나온 현상이 뭐냐 하면, 죄 되는 것만 선호하게 되어 있어요.
이거 몰랐죠? 아무리 기도하고 뭘 해도, 지금 기도 시간이다. 7시에 모이라고 할 때에, 뭐 별 일 없으면 모이는데, 만약에7시에 사돈네가 온다고 하면 얼마든지 취소할 수 있어요. 인간은 우선순위에 있어서 그다지 우리가 융통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제일 우선순위에요. 내가 지금 기도회한다고 사돈을 내쳐버리면, 나중에 우리 자식의 결혼생활이 어렵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장차 역사 안에서 생길 그 결과는 지금 나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철석같이 포기를 못합니다. 내가 사돈하고 잘 사귀면 우리 자식의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그 미래, 예상되는 것. 젊은 애들은 그걸 흔히 비전, 꿈, 드림이라고 하죠. 그게 바로 우리가 죄를 벗어나지 못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거대한 역사 안에는, 그 안에서 인간은 자기만의 역사를 따로 챙기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역사 안에.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거대한 계시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한 사람의 역사를 따라간다고 생각하는데,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의 김정은 역사를 사람들이 따라간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김정은이 무슨 소리를 해도 그 밑에 있는 부하들은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자기 역사를 생각합니다. 돈 모아서 남한으로 튀어야지. 인간은 결코 자기 역사를 절대로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 역사를.
신이든, 하나님이든, 성령이든, 관계없어요. 내 역사를 도와주면 믿고, 내 역사를 안 도와주면 나는 당신을 버리겠습니다.그것이 기본적인 죄로 깔려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한 번 광고합니다. 제발 그 죄를 고치려고 하지마세요. 고치려고 하는 것이 더 못 됐어. 더 위선자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 그냥 사세요. 고치지 마시고, 이게 고쳐질 문제가 아닙니다. 고쳐질 것 같으면 주께서 일부러 우리를 데리러 오시질 않았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고 숙제는 니가 알아서 하고 오라고 할 거예요. 이거는 절대로 고쳐지질 않습니다.
누가, 누가 위선자냐? 그거 시합할 필요 없잖아요? 교회에서. 그런다고 누가, 누가 더 개판이냐 그거 시합할 필요는 없고.바라보기는 이런 일이 되는 원인을 여러분 자신에게 찾지 말라는 거예요. 이번 일 이렇게 잘 된 것을 찾지 마세요. 원인은 몰라요. 우리가 보기에 일이 이렇게 꼬인 것, 이 원인을 몰라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이 잘 됐다, 못됐다를 우리가 언급할 입장이 못 됩니다.
거지같은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니까, 뭐가 이렇게 쓰니? 다니? 어디 그렇게 따질 그럴 교만한 위치에 있을 가치가 있겠어요?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지. 뭐가 쓰네, 짜네, 따질 수 있겠어요? 식당에서 족발을 시켰는데, 겨자를 많이 넣었니? 적게 넣었니? 하는데, 근데 그런 것은 따져야 해요. 그런데 뭐든지 주신 것을 감사하고.
여러분, 한 달에 햇빛 세금 얼마 냈습니까? 안 내죠. 제가 위쪽에서 왔는데 비가 왔어요. 비올 때, 세금 낸다고 바빴습니까? 야, 비 온다. 돈 더 내라. 이렇게 했습니까? 햇빛과 공기를, 심지어 악인과 선인과 관계없이 다 주시죠. 이게 뭐냐 하면 지옥이라는 것은 받아놓고 누가 준 줄 모르는 사람만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죄인에게도 의인에게도 차별 없이 다 줬는데, 문제는 죄인인데 왜 이렇게 주십니까? 라고 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왜?천국 가서 면류관 반납해야 되니까. 모든 것이 주님의 공로입니다. 고백하는 사람은 영원히 지루하지 않고 천국에서 살 거고. 내가 이 땅에서 역사 속에서 어떤 결과를 바랬는데, 예수 믿고 천국 갈려고 했는데 왜 지옥 보냈습니까? 하고 따지는 인간에게는, “니 몰랐어? 니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그런 논조를 내가 이 세상에서 내려준 적이 없어.”
그런데 교회가 이 세상에서 장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목사님. 뭐 하면 됩니까? 이거 하세요. 또 행함 나와요.요거 하세요. 뭐요? 나 따라 하세요. 예수 믿습니다. 또 손들고 예수 믿습니다. 한마디 하면...그런 식으로 교회에 오백 명 천명 모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자체가 인간이 예상한 건데요. 자, 정리 들어가 봅시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나의 구원을 예상 못한 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천국 가시거든요, 소스라치게 놀라시기 바랍니다. 어! 이런 나를 다 넣어주다니! 나는 나의 이기주의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저를? 나는 남한테 지고는 못사는 성격인데, 어떻게 나를? 나를 건드리면 죽여 버리는, 그 정도로 욱하는 성질인데, 왜 저를? 나는 내 것과 내 가정, 내 재산을 건드리면 세상 끝까지 가서 복수를 하는 복수혈전의 사람인데, 왜 이런 저를 이렇게 천국 넣어줬습니까? 아하! 십자가 피가 그런 기능이구나! 그걸 성경을 통해서 미리 눈치 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미리 눈치 채라는 말은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오늘 강의 들었더라도 2분 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실지 모르니까. 마태복음 10장에 보니까, 참새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되어 있죠. 저는 달리 이야기합니다. 참새가 죽고 사는 것은 참새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말씀이 새롭게 들리십니까? 참새가 죽고 사는 것은, 참새 자기 운명이잖아요. 참새 자기 운명인데, 자기라는 것이 자기 운명에 끼어들 잽이 못됩니다. 그걸 살짝 인간으로 바꿉니다. 인간의 죽고 사는 것은,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만 그럴까요?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도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그것은 지옥 가는 사람이나 평생 실컷 하라고 해라. 그것은 이방인들이나 기도하는 내용이다.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내용이고. 그럼 너희들은?너희들은, 오늘 강의에 첫 번째 등장하는 어려운 것입니다. “너희”라는 용어. 너희들은 없습니다. 너희라는 사람이 없어요. 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아담의 죄로 이방인이고, 예수님을 오해한 사람들이에요. 너희들은 없어요.
성경에는 너희들이라고 해요. 너희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할 때, 너희들이라고 하잖아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너희들은 이 세상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묵시적 존재가 되어야 해요. 너희들은 그 나라 그의 의를 구하라. 다시 말해서 그 나라의 의를 구하는 존재는 니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니가 행함으로 니를 예상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헌금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만들어내겠다 해놓고, 앞당겨서 너희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죠.
따라서 그 나라 의를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 나라 의를 구했다면 그것은, 그 솜씨는 우리의 솜씨가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낸, 피조물의 속성으로서 그 나라 의와 연계되어 있게 되어 있어요. 그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가 천국을 바라본 것은 자기의 경건함이 아니라, 이거는 주님의 뜻이잖아요? 라고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렇게 복음이 간단한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는 날 때부터 이방인이에요. 우리는 역사 속에서 내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천국 가는 결과를 낳고자 합니다. 근데 그 사실은, 그 사이에 뭐가 끼어들어 있느냐 하면, 그 사이에는 들키지 않은 게 끼어들어 있어요. 뭐냐 하면 천국 갈 테니까 일단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은 보장해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육적인 본능을 뒤에 감추고 있어요.
천국에 넣어줄 테니까 목을 내놓으라고 하면, 어이구! 하면서 목을 뒤로 내뺍니다. 한 이십년 뒤에 가겠다는 그런 이야기죠. 이런 식으로 나오죠. 반드시 깔려 있는 것은, “나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해줄 테니까, 하나님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세요.” 라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 존재로 하여금 더욱더 존재케 하는 거예요. 입는 것, 먹는 것은 보장되어야 하고, 최소한의 행복은 보장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라니까요. 그런 것들은 뭐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에요.
천국 가겠다고 하는 것은, 그건 가짜니까 걷어내고, 실제로 니가 원하는 것이 뭐냐?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내 아들 아프리카 선교사로 보내겠다고 하는 그 의도 뭐냐? 그 의도가? 가더라도 내 아들만큼은 건강하게 포로로 잡히지 않고 납치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뭐 이런 것이 깔려있거든요. 왜? 내 아들이니까. 나I, 나니까. 나. 나로부터 나왔거든요.
다시 복습 들어가면, 근데 그러한 습성은 죽을 때까지 없어진다? 안 없어진다? 안 없어진다. 이제 마음에 드네요. 그런 습성은 없어지지 않아요. 없어지지 않는데, 왜 교회 와서 위선을 떨고 연출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주께서 다 아는데. 이미 게임 끝났어요. 뭘 고상하고 거룩해봐야 어떤 실적을 가지고 나는 믿는 사람이라고 자랑질 하는 사람들이에요. 전부 다.
내가 선교사 몇 명 보냈고, 내가 기도해서 예배당 짓고, 내가 교회 이렇게 해서 오천 명 모이고, 전부 다 지자랑 하는 거예요. 그거는 빤한 거예요. 누구 욕 할 거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교인 수 몇 명 안 되니까 주여! 주여! 하지만, 한 오천 명 돼보세요. 큰 교회 목사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어떤 누구도 이거는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우리는 모두 다 이방인입니다. 이방인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 번째 결론을 지어봅시다.두 번째 결론은 뭐냐,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습니다.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복음은 우리에게 없다. 내 욕망과 욕망을 채워주는 복음 외에는 복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복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 말씀을 드릴게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백날 오십년 교회 다녀봐야, 오십년 교회 다니면 가면만 늘어나요. 오십 개의 가면만 늘어날 뿐이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은요, 하나님이 아니에요. 결국 돈 문제입니다. 돈 문제에요. 돈이 있어야 밥 먹고 살죠. 목사라도, 아니 원목사라도 돈이 없으면 못 살아요. 빤한 걸 왜 감추려고 애를 씁니까?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 없고.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없어요. 가짜 복음만 우리에게 둘러 싸여 있어가지고 없어요. 가짜 교회가 뭐냐 하면 우리 보기에 괜찮은 역사를 내다보는 식으로 복음을 위장했기 때문에, 없습니다. 없는데, 말씀 보니까 “너희”가 있어요. 우리한테는 없는데, 성경 보니까 말씀에 있어요. 너희들은 내 백성이다. 어?너희가 나오잖아요. 너희들은 그 나라 의를 구하라. 어? 너희가 나온단 말이죠. 우리들은... 어? 우리가 나온단 말이죠.
하늘에 계신, 그 다음에 무슨 하나님입니까? 우리 하나님이죠. 개인구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죠. 이건 가스펠 펠로우쉽 교회에서 주일에 설교 한 거예요. 두 번 했는데, 첫 번째는 나실인 했고 두 번째는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 한 거예요.그때 장보리 이야기하면서. 우리 하나님, 우리라는 것이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목자를 치니 뭐가 흩어진다? 양들이 다 도망갔는데 뭐가 우리가 있어요? 예수님만 달랑 남고 다 도망갔는데? 열두제자 다 도망갔는데요.
성경 분명히 보세요. 성경을 분명히 보게 되면 우리가 성경에서 빼먹을 한 구절도 없어요. 성령 받으면 뭐 덤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또 이런 기도를 하는데, 또 이런 말까지 안 해야 하는데 해야 되겠어요.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는 그 사도바울을 가지고 성령 충만 이라고 했어요. 내가 죽은 자 같으나 실제로는 산자요. 내가 가난한 자 같으나 내가 부요한 자요. 역사적으로 볼 때 가난하게 보이지? 묵시로, 역사 바깥에서 볼 때는 나는 부자다.
이것이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라면, 여러분 그 고백에 고개 끄덕이고 공감하십니까? 공감해야 진도 나가는데? 공감하십니까? 공감하시는 방법을 말씀드릴게요. 예를 들어서 나에게 지금 뉴욕에 아파트 한 2채 있고 , 땅이 한 20만평 있다. 자녀들 재산까지 하면 한 50억 된다. 50억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제가 가난한 자 같으나 사실은 부요합니다. 이 땅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부요한 자라는 고백이 나올 수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1번.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다. 2번. 없다. 몇 번 입니까? 성령 받으면 그런 고백이 나옵니다.
재산 팔아서 교회에 바칠 생각 하지마세요. 그대로 갖고 있으세요. 땅하고 부동산 그대로 갖고 있고 절대로 주지 마세요.헌금이라는 명목으로도 주지마시고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수법입니다. 이거 있더라도 주의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라고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오해해서 그렇습니다.
자기의 재주가지고 주 앞에 들이대려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는 아멘을 못한 겁니다. 내가 나를 판정한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판정할 자격이 못됩니다. 왜냐, 확정적 자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너는 죄인이다. 뭘 해도 죄인이다.확정적 자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나의 성공과 실패도 없고. 내가 이렇다 저렇다 판정하지 마세요. 죄인을 가지고 덜 죄인, 많은 죄인, 그렇게 측정하지 마세요. 그 측정은 주님이 하시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죄인, 덜 죄인, 더 착함, 덜 착함은 어떤 사람에게만 해당되느냐 하면은, 행위 책에 기록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심판기준이고, 마지막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의 이름으로만 구원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더 착함, 덜 착함,못됐음, 더 못됐음을 일체 묻거나 따지지를 않습니다. 괜히 우리가 쫄았어요. 우리가 성경말씀에 괜히 쫄았습니다.
십계명 열 개에서 다섯 개 지키는 사람과 두 개 지키는 사람 중에서, 다섯 개 지킨 사람이 더 착하다고 괜히 쫄았던 이유가 뭐냐,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방인이고, 나의 역사 안에서 행위가 제공된 원인이, 나의 천국에 합당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동조했을 뿐이죠.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럼 마귀 말에 동조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이렇게 하는데,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마귀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이거는 내 탓이 아니고, 우리의 속성 자체가 그래요.
아무리 복음 들어도 뭔가, 우리가 뭘 해드려야, 뭔가 받아야, 우리가 덜 미안스럽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성령께서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소스를 뿌려줍니다. 적절한 소스. 말씀으로. 그렇게 될 때, 나의 생각보다 더 세신 분이, 말씀이 우리 안에 운동하느니라. 역사하느니라. 아, 나는 자꾸 행위대로 가지만, 주께서는 행위대로가 아니고, 니 행위 말고 예수님의 행위,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이미 너를 합격했다고 보시는 겁니다.
제가 몇 주 전인가 설교에서 그런 예를 들었어요. 금메달을 손에 쥐고, 금메달 따는 경기를 재방송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금메달을 딴 것을 알고 난 뒤에, 한국선수가 금메달 따는 과정, 16강, 8강, 4강, 준결승, 결승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아주 아슬아슬하면서도 무슨 마음을 느껴요? 흐뭇하죠. 이미 금메달 땄잖아요? 그때는 이렇게 대처하시면 됩니다. 의도적으로 호들갑을 떨면 됩니다. ‘어이구! 어떻게? 이제는 금메달 끝났어. 끝났어. 아이구, 바람 불어서3점이야. 이젠 죽었어,죽었어.’ 이게 왜 흐뭇 하느냐 하면 이미 알거든요.
이런 과정과 상관없이 금메달을 딴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그 과정을 즐길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즐기시려면, 여러분이 또 착하다고 시작하지 말고, 이미 나는 지옥가도 마땅하다는 존재라는 것부터, 자기 자신을 분명히 해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은 뭐냐, 이래서 지옥 가는구나. 그것을 확인하는 식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사시면 되는 겁니다. 아,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내가 지옥가야 마땅한데, 이렇게 지옥가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의, 세상의 역사적인 능력으로 안 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역사 바깥에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역사 전부를 한꺼번에 다 아는 거예요. 남은 인생이 행복해보이십니까? 역사 안에 있는 것은 어떤 것도 행복이 없습니다. 어느 집구석에도 고민 없는 집구석이 없습니다. 삼성재벌 지금 돈 벌어서 난리 났습니다. 삼성갤럭시7 때문에 사고 나서 고민이 많습니다. 롯데부회장? 고민 많아요. 고민 많아서 죽었잖아요. 즐거워서 죽었어요? 자살이 취미라서 죽었습니까? 고민 많아 죽었어요. 롯데그룹 부회장인데? 못 먹어서 돌아가셨습니까? 자기 역사가 예상대로 안 되어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그때 죽었다가 아니라, 그때 자살했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자세히 알아야죠. 처음부터, 날 때부터 죽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 속에 죽음을, 역사 이후로 보지 않고, 역사 안에다 우리 모든 죽음을 집어넣었는데, 우리의 모든 죽음을 일괄해서 묶어서 집어넣고, 죽고 난 뒤에가 아니라 이미 살아있는 자체를 죽음이라고 넣어서 해석하는 그 해석의 징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걸 죽음의 현실이라고 하는데, 죽고 난 뒤에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죽음을 우리가 이 몸으로 지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인생과 몸은, 죽음의 표현형입니다. 죽음을 표현하는, 죽음을 보여주는. 아, 이래서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이래서 내가 죄인이구나. 왜 이미 금메달 땄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나의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아주 호들갑을 떨어도 괜찮아요. 애교로 봐드리겠습니다. 아이구, 죽었어. 죽었어. 주님이여, 애가 저러면 나 못살아. 못살아. 하면서 한쪽으로 싱긋 웃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사랑인데,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시카고강의 8강에서, 사랑이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사랑 안에 배신이 들어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실 때는 너의 배신을 여기에다 집어넣으라는 이야기에요. 이게 바로 베드로고, 목자를 치니 양들이 다 떠났어요.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말은 들었는데 안 믿었습니다. 뭐 엄마 마리아는 믿을 줄 알았어요? 믿었으면 그 빈 무덤 찾아서 갔겠어요?
그러니까 아무도 못 믿어요. 예수님을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못 믿습니다. 사랑이란 뭘 하느냐 하면, 사랑이란 고맙습니다가 아니라, 사랑 안에는 뭐가 있느냐, 내가 배신자라는 것을 집어넣고, 나까지 포함해서 사랑이 형성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 속에서 자신의 배신을, 이제는 주께서 오시는 날까지 자신의 배신을 뽑아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이 배신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찬송가는 잘해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더 귀한 것은 없네~ 할 때 전화가 오면, “예예 알겠습니다.” 아무리 노래 불러도 갑자기 바이어한테 전화 오게 되면, 예배 곧 마치고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네가 아니라, 주 예수 보다 더 쓸데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주께서 상황을 유도해서 우리가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가를, 죽을 때까지 이 상황을 덮쳐주시는 이것조차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이해해주시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