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23서

시카고강의8 1609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17. 07:27

20160908 요한1서 시카고강의8-이 근호 목사

 

제 여덟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2장 12절을 봅시다. 요한일서 2장 12절에 보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사도요한이 지금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제발, 제발, 용서함 받으세요.” 라는 이야기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여러분 보기에는 죄가 없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가 있습니다. 그 죄는 여러분이 자기 죄를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책이 없습니다.

 

내가 지은 죄를 내가 해결한다는 것은 마치 내가 지은 죄를 안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충돌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충돌이 성립됐다는 말은, 내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 내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모르고 있으면 스스로 해결할 대책도 없다는 겁니다. 대책 없는데, 대책이 먼저 나왔어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피고, 화목제물이에요.

 

그러면 중심을 뭐로 잡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로 또는 화목제물로 시작해서 어떤 논리를 펼쳐도 우리는 이미 이기게 되는 겁니다. 승리함이 되는 겁니다. 아! 예수 피 믿고 승리해야지! 이러지 말라는 말이죠. 우리가 미리 예수 피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 것 같으면, 우리가 빨리 십자가로 하겠는데, 십자가 피의 등장은 우리 요구사항이 아니고, 우리가 제안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아버지, 우리 대신 누가 십자가 지게 해주세요.” 라고 요청한바가 없는데, 요청이 들어왔다는 말은, 이미 그 결과마저도 확정지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앞에 포도 있고 멜론 있는데, “아, 나는 사과가 먹고 싶었는데?” 생각했는데, “에이, 여기 사과 있다.” 이렇게 해버리면 이건 이미 요청한 것이 돼요. ‘분명히 내가 거기에 가면 아마 포도가 있을 걸?’ 이렇게 예상했는데, 포도가 있으면 예상과 포도가 관련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예상하지 않고, ‘에이, 사과 뭐 먹을 게 있어?’했는데 사과가 있다면, 그 사과가 있다는 것은 누구 의견입니까? 우리가 요청한 의견입니까? 누구 의견이에요?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해결책이 왔다는 말은, 나머지기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가 해결할 수 없었던 요소가 우리한테 있단 말이죠. 내가 내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는 방법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해결책을 이미 얻은 것이 돼요.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마는, 이걸 달리 말할 방법이 없어요. 자꾸 뭘 하면 됩니까? 하고 덤벼들기 때문에 그걸 피하려면, 예상 못할 결과가 왔다는 말은, 우리는 내 자신도 내가 예상 못할 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느 게 우선이에요? 언약이 우선입니까? 내가 우선입니까? 언약이 우선이죠. 그럼 진맥 안 받아도 돼요.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모든 스트레스가. 지금 한의사에게 진료 받는 이유가, 모든 출발점은 뭐다? 내가 제일 중요하다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해결책이 없습니다. 보약 지어봐야 효과 떨어지면 마찬가지에요. 근데 예수님의 피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요청한 것이 아니죠? 그냥 누리면 되죠.

 

단, 조건이 있어요. 내 생각하지 말고 먼저 뭘 생각해라? 주께서 다 이루신 계명만 생각하고, 나는 계명 덕분이라는 말만 하라 이 말이죠. 나는 그 계명 덕분에 몰랐던 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계명 오기 전에는 나는 잘났는데, 계명이 딱 등장하고 난 뒤에는, 이미 용서받은 죄인. 죄인이니까 용서받자가 아니라 이미 용서가 결정된, 내가 없는 걸로 확정된 그러한 죄인. 마음껏 죄지으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마음껏 죄지으세요. 해결책 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제가 잠시 써보겠습니다. 계명이 우선이니까, 계명을 제일 첫 번째 자리에 놓겠습니다. 계명 다음에 우리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아니고, 계명을 정립하기 위해서, 계명이 왜 확정적이냐를 증명하기 위해서, 계명이 왜 영생이 되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계명이 먼저 있다는 말은 우리는 계명의 아들이 되고, 계명의 새끼가 되고 계명의 자식이 되겠죠. 계명을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이기에, 이걸 가지고 요한일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형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걸 형제라고 해요.

 

그리고 계명에서 흘러나온, 형제 없는데서 형제 되게 한, 흘러나온 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 그럼 문제 들어갑니다. 내가 사랑합니까? 계명이 나를 사랑합니까? 계명이 우선이고 계명에서 흘러나온 사랑이 나를 만든 거예요. 없는 나를 만든 거예요. 자, 없는 나를 만들었다? 마지막 시간이니까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자, 어려운 거 하나 나왔어요. 없는 나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둘로 나누어져야 해요.

 

뭐냐 하면, “내가 아는 나”, 이거 스트레스 받아요. 이거 소용없어요. 그런데 “내가 모르는 나” 이거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에서 출발해서 나한테 들러붙어 있는, 새롭게 돌출된, 출현된 나. 이 나가 있을 때, 형제라는 것이 성사가 됩니다. 그러니까 남을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남을 사랑하지 말라.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에요? 내가 남을 사랑하게 되면 출발점이 누구부터 해요? 나부터 나오죠. 그런 사랑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골라잡아서 사랑하기 때문에.

 

제가 옛날에 대학 다닐 때, 선교단체가 있어가지고 노방전도를 하는 거예요. 돌아다니면서 벤치에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선교지, 사영리라고,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이라고 해가지고, 잠시 교육받고 전도를 하는 겁니다. 전도를 제가 실제로 해보니까, 꼭 예쁜 아가씨들한테만 해요. 전도를 하면서도 뭔가, 전도하면서도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뭔가 사귀어볼만한 이성한테 하는 거예요. 그게 깔리고 떨리고. 그러니까 깔려있으니까 떨린 거예요. 그래서 떨려서 전도할 때는 약간 더 신빙성 있고 진지하고. 그런데 못생긴 것이 와가지고, “뭐하시는데 저한테도 이야기를 거시죠?” 그러면 북한말로 “일 없습네다”

 

왜, 사람은 내 사랑에 실패할까요? 출발점을 누구부터 한다? 나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거는 형제를 아무리, 일본야쿠자들처럼 손목 칼로 그어서 피를 함께 나눠봐야 나중에 지분싸움이나 하고.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사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는 사랑을 주께서는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잘남을 증거 하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께 일 없습네다. 북한 말로.

 

일 없고, 하나님께서 하는 일은 먼저 계명이 등장하고, 계명의 어떤 체제에서냐, 이미 완료된, 저는 완료되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성경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겼다고 되어 있어요. 13절 끝에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어떤 겁니까?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증거 하기 위해서 새롭게 창조된 너는 이미 악함을 이겼다는 거죠.

 

그러면 기존의 나는 악함을 이깁니까? 못 이깁니까? 니가 백날 해봐야 못 이긴다. 이길 수가 없다. 그럼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은 우리는 전에 어디에 소속되어 있었습니까? 소속 또 나옵니다. 악한 자에 소속된 자인데 어떻게 악한 자를 이겨요? 소속됐는데 뭘 이깁니까? 못 이기죠. 그러면 우리가 이 소속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소속에서 유일하게 왔다가 벗어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벗어나면서 만든 게 있어요. 계명을 만든 거예요. 그 계명은 벗어났다를 증거 하기 위해서 만든 계명이에요. 악한 데서, 또는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계명. 그 계명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사람이 바로 형제라고 하는데, 형제에서는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발휘한 것을 가지고 요한일서 뒷부분에서는 성령 안에서 사랑, 성령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냥 사랑은 사랑이지, 왜 성령의 사랑이라고 하느냐, 우리의 행함으로 나올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성령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행할 수 없으니까. 그러면 이래나 저래나 결국은 뭐예요? 사랑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남을 사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해봤자, 괜히 해가지고 사랑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게 더 못됐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기 더 밉다고. 되지도 않은 사랑을 해놓고, 실컷 사랑했심더~ 이래요. 뭘 사랑했어? 이기지도 못할 사랑. 나 자신의 명예를 보이기 위해서, 지 자랑할 사랑을 해놓고.

 

그러면 이기는 사랑하고, 내 사랑하고 어떻게 다릅니까? 진짜 주님의 이기는 사랑을 하게 되면, “역시! 계명이, 주님의 사랑이 정말 승리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겠죠. 나는 못했는데, 주께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이래 됩니다. 첫 번째 어려운 것이 살짝 지나간 것 같은데, 아직 어려운 것이 남아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형제는 어떤 사람이냐, 두 개의 경로를 다 고백하는 사람이에요. 뭐라고? 나는 사랑할 수 없었는데,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구를 사랑한다? 사람을 사랑한다?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한다? 아닙니다. 뭘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거예요. 형제를.

 

그럼 형제라는 의미는 뭐냐, 형제의 반대말(↔)세상. 형제의 반대말은 세상이죠. 그래야 형제들은 어디에 속하지 않는다? 세상에 속하지 않죠. 소속이 또 나와요. 너희들은 세상에 속한 소속이 나오지만, 우리들은 하나님께 속했다. 하늘에 속한 형제에서 나오는 겁니다. 자, 그러면 내가 형제를 사랑할까요? 못할까요?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계명이 아니기 때문에. 계명이 유발한 형제를 내가 사랑할 수 없어요.

 

그러면 성경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먼저 니가 나를 사랑했지? 내가 너를 사랑했지? 이렇게 만나는 것이 아니고, “어이! 거기 전하는 사람?” “왜요?” “누구 믿습니까?” “나, 계명 믿어요.” “어? 형제네!” 이래되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그건 엉터리고, 둘 다 계명을 가지고 만날 때, “무슨 계명?” “화목제물.” “어? 당신도 죄인? 나도 죄인.” 죄인과 죄인이 만나고 나서, 이미 계명으로 인하여 새삼스럽게 사랑할 필요 없이, 그 자체가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도 전혀 몰랐었는데 이어진 형제가 되는 겁니다.

 

사도요한이 이 편지를 쓴 것은 바로 교회를 떠나라는 거예요. 이건 아주 도발적인 거예요. 교회를 믿지 말고 교회를 떠나라. 왜? 그것은 바로 적그리스도가 접수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교회에 속하지 말고 형제에 이미 속했느니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뭐 학자들이 아는 체하면서 요한123서는 이미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온통 교회가 다 깨진 이후에, 가령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 그거는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예수님의 계명, 화목제물을, 십자가 피를 사모하는 사람끼리 이미 형제가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걸 썼다고 딴에는 맞는 소리를 해요.

 

그건 맞는 이야기 맞아요. 비판한다고 무조건 다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그들의 그 말은 맞는데, 그들이 모르고 누락된 것이 하나 있어요. 그런 뭐냐 하면, 계명이라는 것.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묻는 게 뭐예요? 계명이 우선입니까? 인간이 우선입니까? 라고 했죠. 근데 분명히 계명이 우선이죠. 인간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안 돼요. 분명히 입맛에 골라잡아요. 자기 습성과 취미에 맞는 것을 해요.

 

이건 교회에서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 보면 주로 취미생활이 맞는 사람이에요. 이건 계명으로 하나 된 것이 아니고 취미로 하나된 거예요. “골프 치십니까?” “나도 치는데.” “어떻게 에버리지가?” “어이구! 잘 치네? 홀 한 번 돌까요?” 이래되는 거예요. 근데 교회 가서 눈치 없이 “혹시 화목제물 아십니까?” 이러면 아무도 안 친해요. 이미 사도요한시대에, 이미 그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이게 단체인지, 노는 단체인지, 이거는 어디 정보교환단체인지, 외로운 한국 사람들, 돈 못 버니까 김밥 한 줄씩 먹기 위해서 모이는 단체인지, 분간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보이는 설교자가 계명을 이야기하고, 화목제물이야기하고, 하나밖에 없는 계명입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할 것을 가지고 맨날 하는 소리가, “여러분, 우리 서로 형제를 사랑합시다.” 이거는, 이미 진위를 들었으니까 여러분 아시겠죠? 형제사랑 하는 것, 백퍼센트 가짜교회입니다.

 

형제를 사랑할 수 없어요. 우선이 내가 아닌데 왜 내가 사랑해야 돼요? 전에 했죠? 인간의 행동은 반드시 뭘 원한다? 반드시 대가와 보상을 밑에 깔고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뭐 바봅니까? 쪼다에요? 지 희생해놓고, 대가없는 희생이 어디에 있어요? 사랑 한만큼 사랑 돌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남편이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아내여! 받은 만큼 돌려달라는 이런 뜻이에요. 이거 뭐 뻔한 거예요. 절대로 형제를 사랑하는 교회는 그거 교회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화목제물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돼요. 죄 이야기해야 되고.

 

이제 마지막 시간이라 다 알고 가셔야 되니까, 여기까지는 다 아셨다 치고 그 다음이 뭐냐, 계명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계명이. 계명이 우선이라고 했으니까 이제 계명을 알 차례인데, 이 계명이 뭐냐 하면 새 계명이라고 되어 있어요. 새 계명을 숫자로 이야기하면 새 계명=1계명. 한 계명. 그러나 1이라는 숫자는 언제 쓰느냐 하면 모든 위상에서 최고의 궁극적인 위상일 때, 숫자를 1로 쓰는 겁니다. 이게 1이 되버리면 여기 밑에는 2345..이것을 철학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양성이라고 합니다. 다양성. 이발사 되도 구원받고, 미용사도 구원받고, 의사들도 구원받고, 판사들도 구원받고, 백수라도 구원받고, 놀아도 구원받고, 농부들도 구원받아요. 다양성입니다. 다양성.

 

그러나 농부라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지 않고, 박사라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지 않아요. 그러면 그 이유는 개인에서 끝나야죠. 지금 제 말씀의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나는 농부다. 농부이기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이 되는 요소는 농부 자체에서 찾아야 된다? 안 찾아야 된다? 절대 찾아서는 안 돼요. 목사라서 구원받는 것은 없어요. 이걸 교인들이 알아야 돼요. “아이, 목사님은 성품 좋으니까.” 절대로 목사라서 구원되지 않습니다. 다른 데서 찾아야 돼요. 그 다른데서 찾는 것이 요한일서에서는 뭐냐 하면, 그 사람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새 계명 나오면, 그 사람은 목사냐, 아니냐, 상관없이 형제입니다.

 

요한일서가 무서운 것은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요한일서 2장 27절에서. 그럼 뭐냐, 누가 니 지도자야? 이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듯이 신학자들은 이미 분명히 교회 다 깨졌다. 핍박받아서 다 깨졌다고 한 거예요. 이제는 교회 직분이고,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내용이 중요한 거예요. 뭐 장로, 목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건 껍데기에 불과하고. 새 계명을 우선으로 여기는 형제에, 이미 형제로 엮어진 것을 동의하는 자가 이미 이겼느니라. 아까 이미 죄에서 사함을 얻었느니라.

 

자. 이쯤해서 다시 한 번 해봅시다. 12절,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라고 되어 있죠.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얻었다는 말은, 죄 용서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과 방법은 우리 자체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그러면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는 말은, 궁극적인 그 원인에 의해서 결과적으로 새롭게 구원된 자가 바로 너희들이지? 라고 묻는 겁니다. 우리는 아멘. 그렇습니다. 사람 잘 봤네요. 이래 이야기 하면 되겠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다양성 속에, 어떤 사람은 이발사고, 의사고...이런 사람의 공통점이 뭡니까? 내가 우선이 아니고, 너도 우선이 아니고, 너, 나 보다 궁극적인 최고의 원천에 의해서 우리가 다양성이긴 하지만 다 같은 형제가 되는 겁니다.

 

자, 그럼 형제가 몇 개입니까? 하나죠. 형제가 몇 명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에요. 형제가 몇 개입니까? 오직 하나의 형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그 관계는 둘의 관계가 나와야 돼요? 셋의 관계가 나와야 돼요? 하나의 관계가 나와야 돼요? 하나의 관계죠. 그 하나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라면 한다면, 그 하나 관계 말고 다른 관계로 형제들 간에 이어지겠어요? 안 이어지겠어요? 안 이어지죠. 중요한 거 했습니다.

 

취미 생활 같다고 형제라고 쳐주지 마시고, 전도하면서 아가씨가 인물 예쁘다고 전도하지 마시고, 눈을 뜬 이상 안 보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하면서 뭔가 인물을 능가해야 될 다른 요소가지고 해야 돼요. 결국 우리는 주께서 만들어주신 형제 찾기가 곧 전도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전도 할 때는 꼬시는 것이 아니라 뭘 전했는가가 중요해요. 각자의 역량과 재주와 사랑하기를 전하면 안 됩니다. 그건 가짜입니다. 우리는 사랑 못한다는 것을 증거 해야지. “우리는 사랑 못하죠? 그런데도 용서 받았죠?” 누구겠습니까? ‘아, 위에서 내려온 사랑이 따로 있구나.’ 내 사랑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의 사랑이 내려오는 것이죠.

 

자, 거기까지 일단 복습이 됐다고 치고, 진도 나갑니다. 진도 나갑니다. 새 계명이 1계명, 이 한 계명을 성경에서는 새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계명이 몇 개입니까? 하나죠. 아, 이거 어렵다. 분명히 십계명 있고, 십계명은 계명이 몇 개입니까? 구약적으로 열 개명인데, 요한일서에서 물으면 십계명은 몇 개입니까? 한(1)계명.

 

우리한테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열 개명을 하나로 만들어라.” 그거 수능 나옵니다. 하늘나라 수능. “열 개의 계명을 하나로 만들어라.” 아, 이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죠? 근데 어렵지 않는데, 3초 만에 굉장히 쉬워요. 123 3초 만에 대박 해답이 나옵니다. 계명을 내가 지킬 계명이라면 이거는 해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인터셉트해서, 뺏어가지고 단독자가 계명을 다 지키면, 그 계명은 두 계명, 세 계명이 아니고, 어떤 계명이든 그 분이 전담이 돼서 혼자 지킨다면, 그 계명이 무슨 계명이 되죠? 오직 한 계명 되고, 그걸 가지고 새 계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고맙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데, 문제는 제가 방금 알려드린 것처럼 합당한 근거가 있느냐? 그게 문제가 되겠죠. 합당한 근거, 제가 제시해드리겠습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친절한지 모르겠다마는, 제시해드리겠습니다. 몇 군데 나오는데요, 우선 요한복음 15장 보겠습니다.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먼저 나를 미워한 줄로 알라” “너희”가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숫자가 적어요? 많아요? 한명이 아니고 너희니까 여러 명을 이야기하죠. 여러 명입니다. 숫자로 치면 1이 아니에요. “나”는 숫자로 치면 몇 명입니까? 1.

 

그러니까 여기 너희라 하는 것은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민 그 사랑의 효과로 인하여 새롭게 규정된 너희들. 그 너희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너희들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어디를 수긍하고 어디로 쫓아오느냐 하면, “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는 말을 고백하는 그러한 성질을 나타내는 자가, 여기 너희라는 겁니다. 그거까지 논리적으로 맞지요?

 

그 다음에 나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 것은, 너희를 미워함이 아니고 바로 나를 미워함이다. 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이겼다는 말은 어디에 나옵니까? 요한복음 16장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형제여! 세상을 이기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서로 사랑해서 세상을 이기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교회로서는 교회가 아니에요. 그거는.

 

33절 말씀 하게 되면 제가 할 말이 없어요. 뭐냐 하면, 여기 “너희”라는 복수 나오죠. 그 다음에 뭡니까? “나”는 단수 나오죠. 숫자 많음이 뭐로 수용된다? 숫자 1로 수용되죠. “여러분 누구 믿습니까?” “나 믿습니다.” 라는 것은 아니죠. “저요? 하나뿐인 궁극적인 예수님 믿죠.” 그런데 세상과 예수님과 싸워서 누가 이겼습니까? 예수님이 이겼습니다. 이겼다는 말이 뭘까요? 세상은 예수님을 죽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됐습니까? 죽음가운데서 부활하셨죠.

 

그러면 세상은 따라 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세상이 조폭 되어서 땅에 묻었는데, 조폭들이 뒤에 가서, “야, 이거 채무자 한 번 들어봐라 썩었나 보자.” 그랬는데, 빈 무덤이야. 그럼 그 조폭들은 하늘나라에까지 따라와서 죽이느냐? 못 죽이죠. 그럼 천국은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세상에서 내 빼는데 성공한 사람들이 집합. 이게 천국이죠. 그럼 구원은 뭐냐,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 하나에게 종속된 집단구원입니다.

 

이제 집단구원 이해하시겠습니까? 그거 이해하려면 계명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나보다 누가 우선이다? 내가 우선이 아니고 계명이 우선이다. 그럼 나의 삶은 계명을 증거 하기 위해서 아직도 목숨이 붙어서 살아있다. 뭐하라고? 나는 사랑할 줄도 모르고, 나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 고백을 하는 거죠. 그래서 참된 교회는, 사랑하지 맙시다가 이게 참된 교회에요.

 

논리가 간단한데. “여러분!” “예.” “사랑하지 맙시다.” 오늘부터 절대로 사랑하지 않기. 자기 주제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주제를. “목사님. 우리는 죄인 되잖아요?” “예. 죄인 됩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아요?” 우리가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구원자가 따로 있다는 말이고, 우리는 그 분을 버리거나 떠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말인데, 예수님만 증거 하는 형제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뭘 더 행함으로 보탤 수 있을까요?

 

한 번 정리 들어갑니다. 계명이 여러 개일 것 같으면 우리가 지켜야 해요. 모든, 여러 개의 계명이 딱 하나로 뭉쳐졌다는 말은, 그 분이 그 한 개만 지키면, 모든 계명을 다 지킨 것이 되죠. 자, 반대로 나갑니다. 그 여러 개의 뻗어 나온 그 계명 하나를 어기면 모든 계명을 어긴 게 되죠. 이제 야고보서에 나오는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돼요.

 

이걸 사도바울의 편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몸은 하나요 지체는 여럿이니. 제가 한 번 박집사님의 손을 만져볼게요. 그럼 만일 박집사님을 만진 것이 아니고 손만 만졌다고 하면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나는 박집사님 안 만졌어요? 손 만졌지. 그거 내 손인데? 어이구, 그러셨어요? 나는 그저 손 인줄 알았지. 그래서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우 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는 순간, 우리는 내가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경유하는 순간 이게 박탈이 됩니다. 주님은 노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에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내가 만약에 누구를 사랑하게 된다면, 복습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뭐가 따른다? 대가가 따르죠. 자기 딴에는, “주님이여 제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대가로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지금 이 공식이 맞는 공식이에요? 틀린 공식이에요? 틀린 공식이죠. 세상을 이기는 분은 누구밖에 없었습니까? 이미 확정 났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왜? 건방떨면서, 왜? 우리가 예수님 자리에 끼어들려고 합니까? 니 좀 나가 있어! 니는 좀 빠져 있어! 그렇게 되죠.

 

그럼 예수님에게만 공로를 돌리려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느냐, 아무리 이웃을 사랑해도 그것이 악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되겠죠. 제가 젊을 때 봤던 영화 중에 아주 유명한 오멘이라는 영화를 봤어요. 모가지 홱 돌아가는,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상영금지 되기도 했어요. 실제로 그 영화보고 죽은 사람도 있어요. 너무 놀라가지고. 어린애가 목이 돌아가요. 귀신들려 가지고.

 

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 귀신들린 애를 신부가 대책을 세웁니다. 어떤 십자가를 구합니다. 그 다음에 성경책을 찢어가지고 도배지를 합니다. 그럼 귀신이 달아날까요? 안 달아날까요? 이겼는데 왜 새삼스럽게 그 짓 하고 있어요? 이겼는데. 그럼 신부가 그 소년을 위해서 왜 그런 무당 짓을 하는 겁니까? 형제 아닌 자를 형제로 만드는 수작이죠. 그러면 형제는 누가 만들어요? 내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새 계명이 하죠.

 

그 새 계명의 주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럼 이 예수님이 죽어서 노십니까? 살아 있잖아요? 그럼 살아서 가만히 앉아 마작이나 둡니까? 흥흥거리며 놉니까? 아니죠. 부지런히 뭐해요? “얘가 니가 생각하는 형제야. 형제. 얘가 형제야.” 하면서 부지런히 형제를 소개하죠. 그럼 우리는 뭐합니까? “제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하면서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그럼 형제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합니까? 나는 내가 아무것도 잘할 수 없다는 걸로 생각하는데, 아저씨는 어떻게 사랑합니까? 내가 뭘 사랑해요? 사랑할 줄 몰라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어이구, 반갑습니다. 반갑구만 반가워요!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이미 세상을 이겼어요. 그 분이 주장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분 빼고 나머지기는 손을 훌훌 털어야 돼요. 빠져야 돼요. 주인공에서 빠져야 돼요. 그걸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겁니다. 어디로 빠질까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빠지라 이 말이죠. 제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하니까, 봉투에 돈 넣어서 주면서, 어렵지요? 받으세요. 그게 형제 사랑입니까? 어데? 돈으로 목숨을 때울라고. 주께서는 목숨을 바치라고 했지, 목숨 아까우니까, 여윳돈 갖다 내미는 것은 그건 형제 사랑이 아닙니다.

 

목숨을 바쳐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어떤 발악을 해도, 내가 아는 나의 옛사람은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 뽀빠이! 개입해주세요! 이래 돼요. 뽀빠이! 살려주세요! 어릴 때 뽀빠이 그 만화를 보면서 제가 불만이 굉장히 많았어요. 올리브가 반반하게 생겼지 않습니까? 올리브가 처음부터 뽀빠이를 불러야 되지 않아요? 빰빠라밤빰빠~♬ 빠라라빰빠빰~♬ 처음부터 부르면 부르투스가 안 그럴 건데, 꼭 처음에는 지가 물리친다고 “놓으세요.” 이러고 있다고요. 어린 마음에 답답해서 미치겠어요.

 

매일 매회에. 뽀빠이! 살려주세요. 매일 매회에 그러는 거예요. 한두 번 당했으면 뽀빠이하고 살림을 차리든지 이래야 될 건데, 뽀빠이가 와서 사랑한다고 하면, 에이, 치워라! 돈 받아놓고 치워라! 그래놓고 부르투스가 와서, 에헤헤 목소리도 이래요. 또 성희롱하고. 또 도망치고. 뽀빠이도 미리 시금치를 먹지, 지 힘으로 한다고 얻어맞고 터져진 후에야 빰빠라빰~ ♬해가지고 시금치 먹으면 알통이 위에부터 나오기 시작해가지고. 어린 마음에 가슴 아팠어요. 정말. 건의할 수도 없고.

 

세상의 모든 신화는 영웅 신화입니다. 영웅 신화는 반드시 고난이 있게 되어 있어요. 고난을 딛고 시련을 밟고 그 다음에 영웅이 되었을 때, 그런 반전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합니다. 중국이고 한국이고 모든 신화는 바로 고난 뒤에는 영웅이 와서 하죠. 중국영화도 보면 아버지가 도장을 차렸는데, 상대방 도장의 사람들이 와서 도장이 엉망이 되고, 아버지 죽고,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쫓겨가지고, 무슨 유명한 산에서 도사를 만나서 무술을 익힌 후에 내려와서, 그 도장 근처 중국집에서 만두 먹다가 한바탕 벌어져가지고, 마지막에 고수 나오면 그 고수 죽이고 영화가 끝나잖아요. 이소룡, 부르스 리 영화가 전부 다 그런 거잖아요.

 

그건 뭐냐, 인간들은 내가 고난 속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포기 못하는 겁니다. 그거는 자기 자신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계명은 나중입니다. 내가 돈 모아서 교회 세웠다. 이제는 교회가 우선이고, 주의 계명은 나중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이야기 해도 용서해주되, 교회이야기하면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만 해도 흔쾌히 받아들이는데, 우리 교회는 십자가로 끌어 모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삼가주세요. 이런 인간 검증으로써 모인 교회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참, 이게 악한 세대죠.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한(1)계명에 대해서 다 아시겠지만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 숱한 계명이 어떻게 된다? 계명 하나로 뭉쳐지죠. 그 방법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 계명을 내가 지킨다면, 이거 지켜야지, 미진한 것 지켜야 되지, 세 계명, 네 계명, 다섯, 여섯 계명...매일 이건 숙제를 내야 되지만, 그게 아니고 계명이 하나로 뭉쳐진 입장에서는 어느 계명을 건드려도 다 어긴 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와서 계명 지키는 것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가 계명 지키는 것과 어떤 조건 때문에 우리는 계명을 제대로 못 지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갈라디아서 3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이런 구절은 우리가 누구하고 이야기할 때 기억을 해놓으면 참 좋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제가 중요한 것은 네모라고 할게요. 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 자들은” 그 네모에 뭐가 나옵니까? “속한” 소속이 또 나와요. 무릇 율법 행위에 소속된 자들은, 이렇게 되겠죠. 그 다음에 “저주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ALL)일을 항상” 항상 영어로 올웨이즈always죠. 시도 때도 없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아니하면.

 

그 다음에,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마지막 계명은 뭐가 주어진다? 축복? 아니죠. 천국? 아니죠. 뭐가 주어진다? 저주가 주어지는 원칙을 누가 세웠다? 율법을 주신 우리 주님이 세운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니가 지키는 것이 율법의 완성일까? 내가 지키는 것이 율법의 완성일까? 너희들 다 동원해! 850 대 1이 아니고 전 세계 모든 사람과 예수님 혼자 할 때, 누가 이기느냐, 누가 승리하느냐, 한 번 해보자 이 말이죠.

 

그럼 예수님 본인이 다 지켰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그거는 예수님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증명해요. 죽은 자가 도로 부활함으로써, 유일한 이름이, 유일하게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이름, 영원한 영생할 이름, 길이고 진리고 생명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율법을 가지고 증명해냅니다. 자, 그러니까 뭡니까? 우리는 율법을 지킨다? 못 지킨다? 못 지킨다.

 

그럼 성경을 왜 봅니까? 우리 자신의 소속이 어디냐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못 지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소속은 땅일까요? 하늘일까요? 하늘이고. 만약에 지킬 수 있다고 하면서 보는 사람은 소속이 하늘일까요? 땅일까요? 땅이고. 그렇게 복잡한 성경이 너무 쉽네. 우선 나부터 출발 안 하니까 쉽고. 나부터 출발 안 하니까 내가 못 지킨다고 하니까 쉽고. 더 쉬운 것은 이미 가져가서 내가 못하는 것을 다 해줬다는 분이 있다는 것이 쉽고. 그리고 그 분이 쉬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옆에 형제를 따로 생산해냈다는 점을 아니까 쉽고.

 

결국 그 전체를 모으면 딱 두 글자. “소속” 소속입니다. 성령께서 묻는 것은 니 소속이 어디냐? 소속이 어디에요? 율법에 속합니까? 성령에 속합니까? 율법에 속하면 무조건 저주고, 성령에 속하면 예수님이 대신 해주셨기 때문에 무조건 천국입니다. 이거는 구약에 나오는데, 광야 때 백성들이 원망했죠. 원망한 이유는, “못살겠다. 애굽으로 돌아가자!”입니다. 괜히 나왔다 이 말이에요. 괜히.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불뱀이 나와 가지고 많이 죽이고 어떤 사람은 아프고 그랬어요.

 

그럴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대책을 세워줬어요. 그 대책이 뭐냐 하면, 아픈 사람,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대책이 아닙니다. 절대적 기준을 제시해요. 니가 아파야 될 절대적 기준을 제시한 겁니다. 방금 제가 뭐에 물렸다고 했습니까? 뱀에 물렸죠.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세웠어요. 물릴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보세요. 예. 물릴만합니다. 뱀이 와서 죽어도 할 말 없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은 놋뱀을 쳐다보면서 병이 낫고.

 

이건 전적인 하나님 책임이지, 점잖고 착하고 천당 가려고 애쓴 나를 잘못이라고 한 사람은 절대로 놋뱀을 쳐다보지를 않습니다. 근데 주님께서 더 무서운 것은 그 놋뱀을 뭐로 교체했느냐 하면 십자가로 교체했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은 천국에 가고, 십자가를 안 보는 사람은 지옥에 가요. 쉬워도 그렇게 쉬운데,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나를 알고 쳐다봐야 하는데, 무조건 무당처럼, 주술처럼 그냥 쳐다보니까, 백날 봐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고백을 해야 하는데. 그럼 지금 십자가가 안 보이죠. 그럼 뭐만 보입니까?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형제들만 보이죠. 이게 바로 형제입니다. 이게 진정한 사랑이고 교회입니다. 놋뱀 만든 것을 알겠죠? 니가 물려도 싸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것을 보면, 예수님이 버림받은 것이 아니고 니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도 싸다는 것에 동조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영생 얻은 사람입니다. 아이고~ 이래 쉬운 것을 가지고. 어려워서 못 믿는 것이 아니고, 고집이 얼마나 센지. 나는 나의 의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자 본문 요한일서 2장 11절에 나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소속이 어디 소속이냐 하면 국가소속이 아니고 어두움의 소속이죠. 이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두움에 속했다는 말은, “내가 이러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 당신을 미워합니다.” 라는 핑계가 이거는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처럼 되면 예수 믿을 거야.” 라는 핑계는 핑계일 뿐이라는 겁니다. 어두움에 속했다는 것은 개인의 인격성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키가 몇 센티고, 성품이 온유 하냐, 아이구, 예수 안 믿어도 착하구나. 이런 모든 개인적인 소속들은 일체 없습니다. 일괄적으로 다 어두움에 속한 겁니다.

 

그럼 저 사람이 어두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빛이 나타나게 되면 어두움도 같이 확연하게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빛이 등장하게 되면. 이게 바로 8절에 나오죠.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 이니라”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이 빛으로 등장하게 되면, 결국 그 순간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내게 속했다. 나는 어느 고등학교 나왔다. 어느 대학교를 나왔다가 아니라, 나는 어두움에 속했다를 새삼스럽게, 자기 옛날 소속된 것을 자백하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효과가 있죠. 빛이 왔기 때문에 어두움입니다. 이 어두움이라는 설칠 필요가 없죠. 어두움이 설쳐봐야 아무도 모르는데. 어두움이 헌금해봐야 하늘나라에서 인정 한 해줍니다. 어두움인데. 자, 마지막으로, 시카고 강의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될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남은 숙제가 이겁니다.

 

그러면 이 어두울 수밖에 없는, 사랑하지 못하는 옛사람을 왜 그냥 두십니까? 백날 해봐야 이웃사랑도 못하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자기 잘난 척만 하는 나를 왜 이렇게 살려 둡니까? 주께서 잘라서 없애버리지? 그래서 참 빛만 남겨두면 되지? 말 잘 듣는 사람만 남겨두면 되지? 왜 그걸 안 버리고 계속 유지시키느냐?

 

그 질문인데, 그 질문을 쉽게 하기 위해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성경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잖아요? 라는 질문입니다. 방금 제 말 이해되십니까? 이미 구원받고 성령 받았잖아요? 그럼 이 참고서는 대학시험 보고 난 뒤에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단 말이죠. 이것이 구원을 받는 참고서라면 이미 성령세례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면서 그럼 성경을 왜 봐야 하는데? 여러분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교회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십자가마을사람들도 “기도해도 응답 없습니다.” 라고 하니까 대박 나온 답변이, “그럼 기도 안 해도 되네요?”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저한테 들리기는 뭐냐 하면, “기도하기 싫었는데 잘됐다.” 이래 들려요. 평소에 이 말은 뭐냐 하면, 기도해도 억지로 했다는 것이고. 어떤 핑계만 정당성만 준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기도 때려치웁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자기의 노골적인 속마음을 드러낸 거예요. 들킨 거예요.

 

자,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성경책이 왜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먼저 답변하기 전에 아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솔직히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성경에서 이래서 구원받았다고 했잖아요? 과거 완료잖아요? 이미 구원됐는데 성경을 왜 봐요? 구원 안 됐으면 더 봐서 구원 돼보려고 하는데, 구원됐는데? 대학을 들어갔는데 고등학교 참고서는 왜 보느냐? 이 말입니다.

 

계속 강의 주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소속이잖아요. 잉태치 않는 자가 복되도다. 없던 존재가 새롭게 발생된 거죠. 땅에서 아버지, 엄마가 낳은 그 혈통은 절대로 이거는 구원 못 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구원 못돼요. 그러면 영생을 얻으려면 소속돼서 영생을 얻게 되는데, 그거 소속을 생각해서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계명이 우선일까요? 내가 우선일까요? 계명이 우선이죠.

 

그러면 계명에 의한 구원이 우선일까요? 내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우선일까요? 계명에 의한 구원이 우선이죠. 이 계명에 의한 구원은 구원자가 있어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시죠. 이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은 왜 예수님 먼저 부활되었는가? 첫 열매, 첫 부활이죠. 예수님이 왜 부활의 첫 열매인지를, 둘째, 셋째가 무엇에 종속되어야 해요? 근원적인 1. 그 일에 종속되기 위해서 234..가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234..나와도 소용이 없고, 2가 나와도 1에 달라붙고, 3이 나와도 1에 달라붙고, 이게 강력한 자석이 지나가면 개별체가, 니는 니대로 놀고, 나는 나대로 놀고, 니는 커피 들고 가고, 우리 네명은 뷔페 식사하러 가로, 이 모든 것이 마귀가 지나가면 모든 것이 그 순간 하나 되듯이, 예수 그리스도 은혜가 지나가면 전부 다 형제가 되는.

 

결국 이거는 내가, 개인구원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명하기위해서 우리가 와야 됩니다. 오게 되면 그 사람은 새롭게 숙제가 주어지게 됩니다. 왜? 내가, 니 대신 죽어야 되는가를,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주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7장을 보겠습니다. 같은 사도요한이 썼으니까. 이걸로 모든 시카고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이 말씀을 끝으로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17장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 이로소이다”

 

여러분들이 하루하루 포도 먹고, 멜론 먹는 그 능력은, 내 능력이라고 하지 마세요. 포도를 먹는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고, 포도를 먹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포도가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은 누구 몸인가 하면, 내가 스트레스 받고 신경 쓸 내 몸이 아니고, 내 몸은 하나도 없다. 주님 몸이라고 하지 말고, 내 게 없다고 해야 돼요.

 

항상 부정적으로 이야기해야 돼요. 이 몸이 이빨이 빠지고 아프던, 내 이빨 아니고 내 손가락 아니다. 그럼 덜렁덜렁해서 죽을까요? 아니요. 주께서, 내 몸이 아니고 주님 몸이기 때문에, 의사 보내시고 치료하라고 돈 벌게 하시는 거예요. 모든 먹고 마시고 죽든지 살든지 주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 계명이 만들어낸, 하나밖에 없는 주님의 연결된 형제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라고 어겼는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형제였습니다. 그 사람하고 티격태격한 것이 아니라 곧 주님하고 티격태격한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을 보지 말고 배후에 그 사람을 두게 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로만 연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