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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99강-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고전15;45-49) 1606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6. 28. 07:46
2016-06-26 12:37:39조회 : 113         
   첫사람과 마지막 사람 160626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고린도전서 15: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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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6-26 13:30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

2016년 6월 26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5:45-49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지금 이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 바뀌어져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겁니다. 이 ‘달라짐’을 유발하는 주도권은 달라져야 하는 인간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려 주는 영’이 따로 있습니다. 인간과 협조하거나 협력 체계가 성사되는 게 아닙니다. 일방적인 조치가 취해집니다.

이는 곧 ‘흙에서 산 영’이 된 인간에게는 자기를 자기가 스스로 살려내는 능력이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이는 천국이란 인간의 기대와 바람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사람 좋으라고 사람들이 구상한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용도의 나라도 아닙니다.

하나님 좋으라고 일방적으로 만든 나라가 천국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점검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일종의 필터같은 작용자가 등장해서 이 여과작용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입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 필터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합치된 마음이 아니면 천국은 못들어갑니다.

그런데 사람들보고 ‘바꾸라’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형편과 바꾸어진 형편을 미리 예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신이 가능성에 입각한 연결 노선을 깔게 됩니다. 즉 “나는 이렇게 행동하면 목표점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상상은 현재 불만을 재료로 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일방적인 개인적인 열망에 미흡함이 있어 그것을 마저 채우기 위해 신을 찾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변하는 것’도 아니요 ‘달라진 것’도 아니요 ‘바꾸어진 것’도 아닙니다. 미리 예상한 그 안에서만 왕복운동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상상력 안에서 말입니다. 진정 달라지기 위해서는 낯선 분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즉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내 쪽에서 예수님 쪽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 있는 곳까지 오셔서 접수하셔야 합니다. ‘살려내신다는 것’은 살려냄을 당하는 그 대상자가 계속 ‘산 영’으로서의 위상과 한계와 문제점을 계속해서 발휘하는 기능이 한참이어야 합니다.

‘산 영’으로서 인간은 흙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평생 발산합니다.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산 영’이 무기물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은 예수님의 방문으로 그 진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사야 6:9-10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평소에 자신을 ‘산 영’으로서 그 정체성을 꾸준히 유지하고 사수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얼마나 비-복음적 요소을 뿜어내는지를 살피보시는 겁니다. 굿하는 것이 대표적인 겁니다. 길흉화복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위해 굿판을 벌리게 됩니다.

지정된 장소인 사당에서, 흥분된 자, 곧 샤먼(무당l이 앞장 서서 벌리는 종교적 축제는 지독한 자기 사랑의 발로입니다. 즉 안 망해겠다는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아야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바로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치하심은 늘 일관됩니다.

요한복음 6:65에 보면,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끌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게로 이끄시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곧 신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은 ‘나타나 분’이요,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한 분’이십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에서 이질적으로 차이나는 다른 두 개의 ‘현실 구성’이 마련됨을 뜻합니다. 하나의 현실 구성은, 기존이 이미 있는 그 동질성을 줄곧 영원까지 이어보겠다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25:32-34에 나오는 에서가 그런 인물입니다.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에서는 생각했습니다. 설마 장자의 위상이 팥죽 한 그릇으로 변동되리라고 짐작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어떤 바꿈을 감안합니다. 장자 아닌 자가 장자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됩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중요시했습니다. 이는 그가 ‘장자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움켜짐(붙잡음)과 거짓말과 빼앗음의 본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이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창 32:35) 이 과정에서 그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죽음을 거치게 됩니다. 하나는 창세기 27:41에 나오는 형 에서로부터 오는 죽음입니다. 장자의 명분과 관련된 ‘하나님의 축복내림’으로서 유발된 죽음입니다. 또 다른 죽음은 창세기 32:30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유발된 죽음입니다.

“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즉 자기는 늘 산 사람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의 죽음을 통해 변화된 자임을 나타낼 자로서 자아입니다. 이를 통해서 ‘살려내시는 분’의 현존을 말해줍니다.

인간의 모든 시대는 다 ‘마지막’과 관련된 현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실패하고,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타난 겁니다. 에서처럼 자신의 것을 쥘려고 해서는 아니되고 야곱처럼 변화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마지막 때를 보내는 성도는 자신의 존재성이 옅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비해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희석되어 가는 중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주시고 나머지는 다 빼앗습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천국의 필터를 통과하는 마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실패에서 오는 가벼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6-28 06:41 
195강-고전 15장 45-49(첫 사람과 마지막사람)16062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45-49절입니다. 신약성경 283페이지입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사도바울이 하는 말은, 보고 듣게 되면 우리가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딱 느끼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요. 뭘 어떻게 해야 될 것이 없잖아요. 성경 덮고, 안보고 교회 다니면 할 것이 그렇게도 많은데 이상하게 성경만 펼치면 할 것이 깔끔하게 다 날라 가버리고 없어요. 그래서 성경을 안 보는가? 이 말씀은 뭐냐 하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바뀌어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런 마음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은 바뀌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가 없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안 바뀌고 그냥 가는 방법을 자꾸 염두에 두시는데 주께서는 그런 천국을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여러분, 천국이라는 것이 사람이 만들어서 사람끼리 모여 사는 동네가 아니에요. 그것은 교회나 그렇게 잘 하라고 하세요. 천국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면, 하나님이 만들어요.



새삼스러운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 같은데 정말 새삼스럽게 이야기고하고 싶습니다. 천국은 사람이 만들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하나님이 만드시잖아요. 우리가 만들 것 같으면 우리가 지분내서 우리가 노력하게 되면 노력한 사람, 주식 지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모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천국은 주식회사가 아니거든요. 사람이 모였다고 해서 천국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천국은 만드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을 만들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고 말고는 사실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개입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천국을 만드실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그 기준도 필터가 있어요.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그 필터를 통과해서 남은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필터가 없는 게 아니에요. 그냥 손들면 넣어주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필터가 있다니까요? 걸러내는 것이 있어요. 걸러내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또 자기 종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인 천국 필터가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는 그 본문을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보고 있으면서,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달라져야 된다.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어떻게 바꾸는가, 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해요. ‘지금 나는 달라져야 해. 바뀌어져야 해.’라고 맘먹는다고 해서 천국의 필터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쪽에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이 상태와 바뀌고 난 그 상태를 지금 이 상태에서 미리 알아버리면 그것은 아무리 해도 바뀐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이런 상태지만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달라지고 난 상태는 이럴 거야, 라는 것을 지금 내가 미리 알아버리면 그것은 진정 바뀐 상태가 아니고 우리가 지금 상상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 거짓이에요. 그거 가짜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가지면 안돼요. 우리의 목표, 목적 자체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지금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의 상상이라 하는 것은 불만이 재료가 되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상상입니다.



달라지고 난 뒤에 그 상태를 미리 우리가 눈치 채고 감잡아버리면 그 달라짐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 노선도 누가 설치하는가 하면, 내 쪽에서 설치가 되어버립니다. ‘바뀌어야 해. 달라져야 해.’ 하면서 뭔가 꿈지럭거리고 노력을 하는데 그걸 구약에서 우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상이란, 인간이 자기가 상상한 것……, 상상이라는 인간의 불만에서 나왔거든요. 결핍에서 나왔다고요. ‘지금 이것은 내 맘에 안 드는 인생인데 천국 가게 되면 괜찮을 거야.’라고 상상한 것, 자기만족입니다.



자기만족을 목표로 삼고 지금의 불만스런 나에서 만족스런 나로 가는 나름대로의 자기 길을 상상해놓고, 노선을 깔아놓고, 거기서 그 모든 천국의 목표에 도달되는 것 말고 그 외 여분의 것은 전부 다 조절하는 것, 조절해서 삭제시키고 좋은 것만 남도록 애쓰는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그게 왜 우상인가? 오늘 본문에 이게 나옵니다. 45절에 보면,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이 말은 살아 있는 대상, 개체라는 말이지요.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흙에서 입김을 불어넣으니까 산 육체가 되었다, 그걸 ‘산 영’이라고 했어요. ‘산 영’이 된 그것에서 아무리 어떤 목표를 세우고 기대를 해봐야, 그 성질은 살아 있는 영에서부터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 봐도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기초로 해서 내가 지금 나를 살게 만드는 그 원리에 의해서 꾸역꾸역 어떤 행동에 나서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게 되면 이 산 영은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필터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



본문에 보면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마지막 아담이 필터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함께 있지 않으면 천국에 못가요. 왜냐? 천국은 내 동네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기대한 동네가 아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자기 좋은 대로 만들어놓은 동네기 때문에, 우리 좋으라고 하는 동네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가는 그 방법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기준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기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기준 말고,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말고,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기준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살려주는 영에게 살림을 받을 때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살려주는 영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못 받으면 끝이지요 뭐. 못 받으면 끝인 거예요. 제가 여러분을 협박하고 공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에 65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요한복음 6장 65절입니다. 안 들었다 하지 마세요. 분명히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이 말을 바꿔보겠습니다. 본문과의 차이점을 보세요.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주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



잘 들으셔야 돼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주지 않으면 누구든지 내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 이것은 방금 제가 지어낸 말이고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예수께 올 수 없다고 되어 있어요. 그 차이가 어렵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자체가 거짓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이용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갈게, 라는 말 자체가 살려주는 영의 작용이 아니고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그 본성이 확장되어서 성경의 개념들을 끌어당겨서 자기 살겠다고 몸부림치다 보면 그런 우상이 나오는 거예요. 그건 가짜거든요.



신이 불러주면 신께로 간다. 이것은 가짜에요. 9월 5일에 미국으로 출국하는데 거기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할 강의가 중요한데 지금부터 뭘 로 할 것인가를 지금부터 늘 생각해요. 한 20개 이상을 할 것인데 그 모든 강의를 요한1서, 2서, 3서를 할 겁니다. 미국에 계신 분들은 미리 읽어오라는 말이지요. 요한 1서, 2서, 3서의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가짜라는 겁니다.



예수님한테 오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다, 라고 요한 1서 2장 23절에 분명히 나옵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아들에게 오지 않으면 아버지가 없다고 되어 있어요. 우상이 뭐냐 하면, 부처 믿는 것이 우상이 아니고 하나님 믿는 것이 우상이라니까요. 하나님 믿는데 그동안 빠트린 것이 있는데 예수 빠트렸구나, 하나님 믿는 것은 정상이니 거기에 예수 믿는 것을 채우면 온전하게 되겠구나, 이게 우상이에요.



하나님이라는 그 체제자체가 거짓이고 잘못이라니까요. 그런 것은 없어요. 여러분, 구약의 여호와를 믿는 사람이 여호와가 우상이 된다는 것을 상상도 못하지요. 구약사람들에게 여호와가 우상이에요. 여호와가 우상이라면 뭐가 우상이 아닌가? 그들과 함께 있었던 하나님이, 그들 삶속에 개입된 하나님이 우상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들과 함께, 구약 때 그들 삶 속에 개입한 그 하나님,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 주의 이름이 행하신 일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을 가짜로 만드는 일, 쉽게 해서 모든 것을 실패케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왜? 그래야 살려냄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려고 하다 보니 살았다는 것을 절대로 용납을 안 해요. 그러면 천국의 필터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살려고 발버둥 쳤는데 그게 몽땅 실패로 끝나야 돼요. 쉽게 말해서 신앙에 실패해야 돼요. 실패하지 않으면 살려냄의 의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머리 굴리고,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했더니 살았다, 그렇게 돼버려요. 그것은 우상입니다.



길흉화복, 그 모든 것을 조절하는 방법을 이 산영, 아담의 집단, 이스라엘이나 이방인들이나 다 마찬가지인데 이 아담들이 그냥 가만있는 것이 아니에요. 길흉화복을 조절하려고 나서는 겁니다. 그 길흉화복을 조절하려고 나서는 자를 동북아시아쪽에서는 ‘샤먼’ 이라고 합니다. 샤만은 흥분하는 자에요. 무당입니다. 무당이 굿할 때 장소가 있어요. 그 장소를 사당, 또는 국사당이라고 합니다.



무당이 사당에서 굿을 하는데 푸닥거리라고 하지요. 곡성영화에 푸닥거리, 굿하는 것이 나오지요. 푸닥거리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좀 더 세련되고 노하우가 깃든 푸닥거리, 뭔가 보기만 해도 사람들의 흥분을 유발시킬 수 있는 푸닥거리 전문가가 바로 박수무당이에요. 그냥 무당이라고 해도 되지요. 자기가 할 수 있는 푸닥거리를 전문가에게 맡기는 거예요. 자기도 대나무 붙잡고 흔들 수 있는데 훈련과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박수무당에게 대나무를 흔들게 만드는 겁니다.



그 기술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전통적으로 그 공동체에 이어져 내려오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는가? 길흉화복을 조절하기 위해서. 왜 조절해야 되는데요? 살아 있는 나를 계속 죽어서도 살아 있게 만들기 위해서. 전문가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습해서 된 것을 세습무라고 합니다. 38선 이북의 북한쪽에서 세습무가 발달되어 있고 남쪽에서는 강신무, 신 내림으로 무당이 되는 것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점차 세습무는 점치는 쪽으로 가버리고 강신무가 주로 하는데 신 내림의 무병이 어떤 사람에게는 8년에서 30년 동안 걸리기도 합니다.



아무리 치료해도 낫지 않는 그런 병에 걸리고 난 뒤에 무당이 되어야, 그렇게 미쳐야 자기도 살고 무당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을, 그걸 연속성이라 하는데 자기 동질성을 유지한 채 죽음까지 넘어서서 연속적으로 살게 하는 방식을 인류가 계속적으로 전통적으로 만들어왔었습니다. 그 언저리에 지금 교회라는 것, 기독교라는 것, 천주교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살려주시는 분을 모르게 되면 여러분은 지금 굿하러 오신 거예요. 여러분은 자기 길흉화복을 조절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빌러 온 거예요.



빌러 왔는데 옛날 조선시대 때처럼 촌스럽게, 천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갓바위처럼 하는 것이 아니고 세련되게 하지요. 그 세련된 방법을 서구에서 빌려와서 파이프오르간 연주하면서 주여, 하는 겁니다. 그게 성에 안차니까 커피 마셔가면서 밤새도록 스스로 굿하는 거예요. 샤만, 흥분하는 자. 흥분을 하는데 흥분하는 이유가 있어요. 불만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불만이 뭐냐? 자기가 기도할 목표가 되는 겁니다.



이것저것 얻고 싶은데 불만이 생길 때 그 결핍을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철학적으로 따져서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겁니다. 끝까지 내 사랑을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교회 나오는 사람치고 자기 미워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분명히 성경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에서 자기를 미워하라고 했지만 자기를 미워하려고 교회 오지 않고 전부 다 더욱 더 자기를 사랑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말만 사랑이 아니라 실제로 ‘아, 내가 사랑한 결실이 이만큼 맺어졌구나.’ 사랑의 결실을 얻고 싶어서 교회 오는 거예요.



그러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전부 다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매이게 되어 있어요. 사랑자체가, 날 사랑하든 누굴 사랑했던 사랑했으면 그것은 비극이지요. 슬퍼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인다. 전유나가 불렀던 <너를 사랑하고도>라는 노래입니다.



“너를 사랑하고도 늘 외로운 나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이고 / 어두운 방구석에 꼬마 인형처럼 / 멍한 눈 들어 창밖을 바라만 보네 / 너를 처음 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 / 내 가슴속에 머물길 원했었지만 /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기에 / 난 너의 마음 가까이 갈 수 없었네 / 저 산 하늘 노을은 항상 나의 창에 / 붉은 입술을 부딪쳐서 검게 멍들고 / 멀어지는 그대와 나의 슬픈 사랑은 / 초라한 모습 감추며 돌아서는데 / 이젠 더 이상 슬픔은 없어 / 너의 마음을 이제 난 알아 / 사랑했다는 그말 난 싫어 / 마지막까지 웃음을 보여 줘.”



왜 사는 것이 이렇게 슬퍼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놔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보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 첫째 아담이 나오고 둘 째 아담이 나오기 때문에, “첫째는 둘째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과 대비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현재 우리 자신이 살아있다, 는 느낌, 자의식을 갖지요. 내가 살아 있지 죽어 있지는 않잖아요.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이 나를 마지막 때에 살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을 위해서 지금 미리 내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나 살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만든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에 살려주시는 그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분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 미리 앞당겨서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 인간이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숨 쉬고 살아 있는 것도 어디에 편입을 시켜야 되느냐 하면, 마지막 현상에 다 편입을 시켜줘야 돼요.



쉽게 말해서, 우리 자신을 통해서 마지막심판의 모습이 나와 줘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마지막에서 자꾸 피하고, 마지막을 밀어내려고 합니다. 브렉시트,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한다는 투표결과가 지난 금요일 오후 세시쯤에 나왔지요. 경제학자들이, 정치학자들이 어떻게 분석하든 간에 저는 달리 봅니다. 유럽연합체에서 영국이 나왔다는 것이 뭐가 문제냐 하면,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이 세상을 천국 만들려고 하는 그것이 실수였어요.



자전거는 달려야 돼요. 중간에 멈추면 안 됩니다. 자전거를 멈추게 되면 가진 재산을 갈라먹기 해야 돼요. 갈라먹기 하는 것이 복지정책입니다. 유럽이 망하는 것은 복지정책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살아날 사람은 살고 나머지는 떨어내야 돼요. 그게 이 세상입니다. 떨어진 사람은 안 살면 돼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공무원시험에 떨어졌잖아요. 떨어지는 그것이 마지막 때의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아, 세상은 지옥이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간단한 문제거든요.



하나님이 살려내는 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살아 있다는 것을 죽은 것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이게 바꾸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악바리처럼 해서 남은 다 죽어도 나는 오랫동안 살아남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도 ‘우리끼리.’ 그 우리끼리가 뭐냐? 유럽의 복지정책입니다. 그것을 한국도 배우고 다 배우는 거예요. 무슨 ‘종일반’을 하고. 종일반 할 것 없어요. 애는 엄마가 키워야 돼요. 왜 유치원에 애를 왜 맡깁니까? 어린이집에 왜 맡기는데? 애는 엄마가 키워야 돼요.



“엄마가 키우면 돈을 못 벌어서 60도 안되어서 굶어 죽을 일이 생기는걸요?” 60 안되어서 죽으면 돼요. 그러면 되잖아요. 살려고 하니까 우상을 안 만들래야 안만들 수가 없습니다. 주보 중간에 있어요. “나를 배신하는 신은 신도 아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산 영’의 본체에요. 나를 배신하는 신은 신도 아니다. 이게 ‘산 영’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산 영을 이용해서 뭘 하는가? 마지막 때를 보여줍니다. “너를 배신하지 않는 신은 신도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나를 배신하는 신도 아니라고 하거든요. 하나님은 그것을 바꿉니다. 너를 배신하지 않는 신은 참된 신이 아니다. 실패하라고 만들었는데 너는 왜 자꾸 성공하려고 하는가? 왜 산 영이 건방지게 살려내는 영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가? 살려내는 역할은 따로 있거든요. 그게 천국의 필터입니다. 그분이 살려내요. 그분이 살려내는데 우리는 내가 나를 살려내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 가서 예수 믿어서. 이것은 굿하러 오신 거예요. 이 교회에 푸닥거리 하러 오신 거예요.



인간은 살아 있는 그 속성 가지고 산 영을 영원히 살려주지를 못합니다. 살려내는 영이 따로 있어야 돼요.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첫째 아담은 산 영이 되었지만 선악과 따먹고 죽었거든요. 그 죽은 영을 살려내는 영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인간이 만들어질 때 이미 마지막 때에요. 그게 종말이에요. 마지막 때 종말을 위하여 처음부터 종말이었던 겁니다. 첫째 아담이 태어난 것부터, 우리가 태어난 것부터 이미 종말의 기운으로 태어난 거예요.



우리가 보여줄 것은, ‘아, 이래서 망하고, 이래서 심판받는구나.’ 하는 것을 드러내면 되는 겁니다. ‘우리보고 어쩌란 말인가?’ 그냥 살면 돼요. 그냥 살면 그게 전부 다 마지막 때기에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봐요. 옛날 어머니가 시장에서 바지락을 사다가 국도 끓이고 요리를 하잖아요. 바지락을 그릇에 담아서 한쪽으로 기울이면 조개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기우는 쪽으로 쑥 하고 쏠리고 저쪽으로 기울이면 저쪽으로 소리를 내면서 쑥 쏠리지요.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몰리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왁 몰리고. 이게 인간입니다. 나름대로 살고자 한다는 것은……, 혹 조개 안에서 혼자 숨 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저항도 할 수가 없어요. 그냥 길을 터주면 그 쪽으로 우르르 몰리고, 이쪽으로 터주면 또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요. 세금이 어쩌고, 당이 무슨 돈을 받아먹고, 세월호가 2주기가 되고, 북한이 로켓을 쏘아올리고, 브렉시트가 어쩌고 해도 연예인 일탈하는 이야기 하나에 다 싹 빨려 들어가요.



하나의 새로운 이슈가 등장하면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는 다 잊어버려요. 같은 바지락 들입니다. 주께서 그릇 흔드는 대로 흔들릴 뿐이에요. 제가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거제도의 부도가 심화된다는데 거제도 사람들이 그렇게 극악무도한 사람들입니까? 그렇게 전생의 업보가 많은 사람들이에요? 나쁜 짓을 그렇게 골라서 많이 한 사람들입니까? 아니지요. 그냥 착실한 사람들이지요. 착실한데 망하잖아요. 구조조정당하잖아요. 우리는 그냥 바지락조개라니까요. 아무 능력도 없어요. 그냥 세월 흘러가는대로 이렇게 흔들면 이렇게 흔들리고, 저렇게 흔들면 저렇게 흔들릴 뿐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여분의 기운, 그 여분의 능력, 그걸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걸 모르겠으니까 그냥 굿이나 하는 거예요. 좋은 환경이 오도록, 행운이 찾아오도록. 우리는 거울을 봐도 자기를 모르고, 인생을 살아도 인생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뱃전에 누워 흔들리는 대로 좌로 흔들리고 우로 흔들리고, 그렇게 갈 뿐이에요. 군대에서, 오고 싶어서 온 사람들 손들어보라고 하면 아무도 안 나옵니다.



“왜 왔어요?” “오라고 하니 왔지요.” “누가?” “나라에서.” 나라가 뭔데요? 언제 평소에 나라말을 잘 들었어요? 인간은, 산 영은 몰라요. 스스로 살아야 되겠다는 것만 알고, 왜 사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인간은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데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간단하게 말해서 윤리와 도덕이라, 또는 동양철학, 서양철학의 윤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있다는 겁니다.



선과 악이 있는데 악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원래는 날 때부터 선한데 살다보니 먼지가 끼면 선이 가려져서 악이 된다는 겁니다. 훅, 하고 털어내면 내재되어 있던 선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아무리 악해도 인간의 선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이게 동양유교철학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먼지 털면 된다는 거지요. 사형시키지 말라는 거예요. 살다보면 개과천선할 때가 있으니까요.



이 경우에 여러분이 생각해야 돼요.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잘 들으세요. 그걸 가지고 선과 악의 가치론적 대비라고 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선은 악이 아닌 것이 선이고 악은 선이 아닌 것이 악이다. 그 말은 선이나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선이 게으르면 악이 되고 악을 훌쳐내면 바닥에 있는 선이 드러난다. 이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가치론적대비가 아니고 존재론적 대비라 해서 뭐라고 하는가? 선한 분이 따로 있고 악한 자가 따로 그 존재가 있어요. 그 악한 자를 악마라고 하고 선한 분을 예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아무리 선하고 싶고, 아무리 악하지 않고 싶어도 악마의 기운에 넘어지게 되어 있고 죄 짓게 되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도 닦는다고 해서 천국에 못 간다는 그 말이에요.



그걸 지금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 살려주시는 그 분의 필터를 통과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만든 천국에 못가기 때문에 그래요. 아버지께서 불러주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예수께 올수가 없어요. 우리가 상상하는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오지 않으면 하나님께 못가요. 예수 믿는 착한 일을 하고, 하나님 믿는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께 와야 돼요. 이거 아는데 수십 년 걸렸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로 와야 된다니까요. 내가 예수 믿어버리면 그것은 착한 일이 돼요. 그러면 내가 예수 안 믿는 일은 나쁜 일이 되어서 그것은 가치론적대비가 되어버려요.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착하게 믿으면 되고 안 믿으면 안 된다. 내 운명은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여기에 걸린 것인데 그것이 아니고, 그것이 아니고 악마가 못 믿게 하면 지옥 가는 것이고 예수님이 믿게 하셔야 천국 가기 때문에 나는 누구 소속이냐가 중요하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그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이 그겁니다. 산영과 살려주는 영을 따로 구분한 것은, 네가 열심히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무당들이 설교할 때 뭐라고 합니까? “아하, 이 집에 액운이 끼었구먼.” 인간의 모든 병은 악귀에 의해서 된다는 것이 무당세계의 진리입니다. 또는 잡귀라고 하지요. 무당세계에서 귀신종류도 몇 가지가 돼요. 그 중에 결혼 못하고 죽은 처녀귀신이 제일 세고 그 옆에 몽달귀신이 있어요. 총각귀신.



죽은 애들 귀신도 있고요, 심지어 개가 죽은 귀신도 돌아다닌 답니다. 그 귀신의 원천은 악마가 아니고 사람으로 봅니다. 사람의 혼이 분리된 것을 귀신으로 보거든요. 그들은 모든 것이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불교에서는, 모든 세속을 끊어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서 도 닦으면 된다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도 참선이라는 말은 안하지만,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이 된다, 그런 식으로 교회도 장사를 시작하는 겁니다. 천주교에서는 벌써 시작했고.



성경에서 우리가 파악해야 될 것은, 살려내는 영이 어떤 식으로 살려내는가, 이게 중요한 문제거든요. 그 살려내는 방식이 아주 특이해요. 제가 성경 세 구절을 읽겠습니다. 구약 한 구절을 읽고, 신약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마태복음을 읽고, 그 다음에 사도행전을 읽겠습니다. 이사야 6장 9절,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마태복음 13장 14절, 15절에 보면,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이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사도행전 마지막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26, 27절에,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살려내시는 주님의 방법이 뭐냐? 모른다는 거예요. 모르면 실패하면 된다는 겁니다. 제가 짧게 공식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내시는 공식이 뭐냐? “너희는 몰라. 모르기에 성공할 맘은 아예 먹지 마.” 내 인생 성공할 맘 아예 먹지도 말라는 거예요. 제가 아까 유럽 이야기했지요. 이 세상을 천국 만드는 것이 실수라고요.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 지옥답게 사시면 되는 거예요.



참, 이런 이야기 하면 제가 설교할 맘이 안 납니다. 이미 해답을 다 이야기했으니까. 이 세상은 지옥이다. 나는 실패가 주특기다. 원래 실패하도록 태어났다. 그러니까 성공은 아예 기대하지 마라. 끝! 이걸 위하여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그걸 세자로 “오지 마!”입니다. “모르면서 왜 와?” 모르면서 왜 오느냐는 말이지요.



“그러면 난 교회 안 나올래.” “나오지 마.” “그러면 천국 가지 말까?” “오지 마.” 이거예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떻게 갔는가?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에서와 야곱 이야기가 나오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봅니까? 이걸 보게 되면 같은 현실의 다른 구성이 나옵니다. 같은 현실의 다른 구성, 똑같은 현실이지만 구성을 달리해요. 야곱이 느끼는 구성은 뭐냐 하면, 야곱이 실패한다는 쪽으로 정리가 되는 그 현실구성이 있는 반면에 에서의 구성은, ‘아, 그 때 그런 실수만 안했다면. 내가 제대로만 했었어도 지금 성공할 것인데.’



구성이 달라요. 에서는 영원히 미움 받기 위해서 만들어진 인간이고요. 야곱은 영원히 사랑받는 사람 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될 사람이 야곱입니다. 창세기 25장부터 계속 이어지는 내용은, 그 구성상 같은 현실인데, 누가 봐도 같은 현실인데 그 구성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층으로서 나란히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일단 형의 것을 무조건 빼앗으려고 해요. 성질이 못됐어요. 이름 자체가 빼앗는 자에요. 꽉 쥐고 빼앗는 자라고 해서 이름이 야곱이에요.



그런데 형의 이름은 성질과 관계없습니다. 그냥 외형적인 모습이에요. 굵다, 빨갛다, 그게 이름이에요. 그 이름 자체가 어떤 성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붉은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 뭔가 기능적으로 뭘 보여줍니다. 자꾸 빼앗으려고 해요. 여기에 뭐가 게재되는가? 숨 끊어지는 죽음 말고 이질적인, 정말 낯선 죽음이 여기서 삐져나오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25장 31절에 보면, 에서가 사냥하고 돌아올 때 즈음에 야곱은 팥죽 냄새를 피우면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에서가 하는 말이, “아, 배고프다. 그 팥죽을 나에게 다오.” 하니까 “내가 형에게 팥죽을 주는 대신 형은 나에게 뭘 해줄 건데?” “뭘 원하나?” “장자의 자리를 갖고 싶다.” “그래? 지금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장자가 문제냐?” 하고 내 놨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가볍게) 여김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어려운데요. 야곱을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 것 이었으면 처음부터 야곱을 먼저 태어나게 해서 장자 만들 수도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뭘 경유하게 만들어요. 야곱으로 하여금 죄악된 것, 실패한 것, 못된 것, 나쁜 짓 한 것, 도둑질 한 것, 야곱은 자기 삼촌 것 도둑질 한 것이거든요, 거짓말 한 것, 뭔가 야곱은 달라져야 돼요. 야곱이나 에서나 다 산 영입니다. 하지만 야곱과 에서의 차이점이 뭐냐? 그 산 영 안에 살려내는 영의 모습과 특징이 그 속에 삽입되어 있어요. 그게 성도에요. 그게 삽입되어 있기에 야곱은 세상 현실을 볼 때 달리 봅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려주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었다는 그런 느낌을 야곱은 갖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야곱 같은 이스라엘인 교회, 성도는. 못된 짓을 다 해요. 뭘 노리고 목적을 갖고. 그러나 형은 느긋합니다. 장자니까. 팥죽 먹고 장자의 자리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팥죽에 바뀔 자리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이미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형 에서는 바뀌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천국 간다는 겁니다.



그러데 야곱은 바뀌어야 천국 간다는 거예요. 왜? 필터자체가 이 땅에서 바뀜을 나타내기 때문에. 의인으로 와서 죄인 되었다가 죄인에서 또 의인으로 바뀌잖아요. 바뀜이 없는 자는 필터에 같이 통과할 수가 없어요. 우리 보기에는 형제간의 싸움입니다. 형제간의 싸움이 무엇으로 번지는가? 나중에 여기서 이질적인 죽음이 나옵니다. 창세기 27장 41절에 보면,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지금 에서가 죽이고자 하는 것은 그냥 동생이지요. 자기가 아는 현실구성에서는 그냥 혈육적인 동생에 불과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새로운 현실구성에 의하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살인자의 피의 모습이에요. 내가 가진 것을 훼손했으니 너는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것을 계속 유지하려다 보니 자기 것 건드리면 죽이고 싶어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살인자의 피라고요.



낮에 뭔 일 있었다고 앞에 가는 마누라 뒤에서 안 들키게 마누라를 막 욕하고 싶어 해요. 드라마에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비위에 거슬리면 부모고, 형제고, 자식이고, 다 죽이고 싶어요. 형이 못된 짓을 하잖아요. 그러면 동생은 어린 마음에 기관차에 형이 받쳐서 안 죽나,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여기서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엄마는 그 소리를 듣고 야곱을 빼돌리지요. 그 죽음은 우리가 숨 끊어지는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속에 들어 있는 죽음이에요. 그래서 세상에 있는 이방 사람들, 우상 섬기는 사람들은 그냥 도 닦으면 되고 신에게 잘 보이면 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나님은 없어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낯선 죽음을 유발하는, 복음을 아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 사이의 미움과 다툼을 통해서 거기서 복음을 끄집어내는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신을 상상하지 말고 네 곁에 오신, 함께 계신, 십자가지신, 너와 똑같이 이 세상에서 고생고생, 지질이도 고생하신 그 분이 너를 위해서 결국 무엇을 보여주었던가를 보라는 거예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세상에, 십자가에 사형당하는 하나님은요, 사람들이 상상도 못했어요. 하나님이 죽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우리를 영으로 살려내는 거예요.



그리고 그 분의 살려냄을 당한 사람은 예수님아 당했던 시련을 똑같이 주변에서 당합니다. 서로 친하게 지내더라도 십자가복음만 끄집어내면 그쪽에서는 발작을 일으킵니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기독교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 다 좋은데 예수 십자가 이야기는 하지 마라.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할 것이 없잖아. 열심히 기도할 것도 없고, 전도할 것도 없고, 선교도 하지 말고, 헌금도 죄고, 예배참석도 죄인가?” 이렇게 발작을 일으켜요. “그래, 죄다.” 하면 발작을 더 일으키지요. “너 죽을래?”



그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런 식으로 착실하게 살아왔는데 왜 그 착실함에 흠집을 내는가, 그 말이거든요. 주보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거짓을 폭로하는 힘, 이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거짓을 폭로하는 힘. 다른 사람의 거짓을 폭로하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성도 본인이 본인한테 그렇게 우리 자신의 죄를 폭로시킵니다. “네가 예수 믿고, 복음 알고, 구원받았다고, 네가 성공했다고 자부하고 싶지? 그게 너를 바라보는 우상 적인 안목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네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야.”



이 세상은 살려주시는 분이 이미 네 속에 침입해서 네 몸이 네 것이 아니고 이미 주의 몸으로 바뀐 거예요. 바뀌었기 때문에 날마다 주님한테 지적을 당하는 그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마지막 때의 성도의 모습이 뭡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답변이 됩니다. 마지막 때는 자아의 운신의 폭이 옅어지고 좁아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벼워요. 마지막 때는 세상 흘러가는 대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고집 부린다는 것이 나만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하여가>에요. 이방원이가 읊었다는 시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같이 누리리라.” 이렇게 읊은 시조지요. 아무 의미 없어요. 하지만 그냥 이런들 어떠하리, 도나 닦는 식이 아니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그것이 그냥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타인과의 관계, 지옥 가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아픔 가운데 몸소 느끼게 만들어요.



‘그래. 내가 쓸데없는 목적을 고대했구나. 쓸데없는 희망을 기대했구나. 그게 바로 죄였구나. 주께서 그냥 구원시켜 줬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욕심을 냈구나.’ 이것 간직해야 됩니다, 이거 실패하면 안 됩니다, 라는 고집, 성령께서 그 때 그 때 마다 “그거 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일방적으로 너를 살리는 거야.” 아버지가 아니면 아무도 네게 올 수 없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달라지시기 바랍니다. 그 실패자의 모습, 욕 얻어먹는 마음, 주께서는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집어넣는 그것으로 바꾸어지는 것, 그것이 필터 안에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보다 다른 귀한 것 붙들고 있을 때에 고맙게도 찾아와 주셔서 그게 아무것도 아님을깨우쳐 주시니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