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강-고전 15장 35-41(부활에 대한 반박)16061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35-41절입니다. 신약성경 282페이지입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사도바울이 공격받은 것은 간단한데 답변은 꽤 깁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일에 대해서 공격이 들어옵니다. 공격이 들어옴으로써 사도바울은 주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 세대에 속한 악한 사람들은 자기를 악하다고 보지를 않습니다. 물론 인간이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죄 지은 만큼 착한 것으로 얼마든지 땜질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자기가 있는 세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나아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가 속한 세계가 악하다고 여기지 않는데 거기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와버리면 예수님께서 하신 문장에 반드시 따라 붙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악한 세대여, 이 죄 많은 세대여, 이렇게 설정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세상이 살만한 세상인데 예수님이 보기에는 이 세상은 헐어버려야 될 세상이고 날라 가버려야 될 세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다니셨는데 열 두 제자들도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아, 우리가 위험한 동네에서 살았구나.’라는 것을 알게 돼요. 위험한 동네에서 살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 예수님을 몰랐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것을 겸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미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서 그런 거예요.
성령을 받기 전에는 그냥 살았지요. 성령을 받지 전에는 뭘 생각을 못했느냐 하면, 내가 속해있는 이 세상 자체가 엉터리라는 것을 전부 다 일괄적으로 생각을 못했어요. 세상에는 악한 사람도 있지만 착한 사람도 있다, 이렇게 여전히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기대나 미련을 갖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마땅히 다 망해야 될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네.’라고 느끼는 겁니다. 그 안목이 무슨 안목이냐? 예수님이 처음 이 세상에서 외칠 때 갖고 있던 동일한 안목을 열 두 제자들도 갖게 된 겁니다.
이것은 열 두 제자뿐만 아니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뭘 아느냐 하면, 천국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이해를 해요. 자기가 옛날에 그렇게 살았거든요. 자기가 그렇게 살면서 했던 말, 평소에 자기가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하고 있으니까 이해 안 될 수가 없어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겁니다. 다만 성도가 되어서 이제는, 옛날에는 그랬었었는데 그 경계선에서 벗어난 채로 경계선 바깥에서 다시 보는 겁니다. 성령 받지 않은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것이 육에 속했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이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겁니다. 당연한 것으로 보는 그 질문 가지고 사도바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오늘 3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누가 묻기를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죽은 사람이 어떻게 몸이 분해되지 않고 생생하게 몸을 갖고 있을 수 있느냐고 사도바울이 갖고 있는 복음에 대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한 겁니다. 그들이 아는 범위 내에서 당연한 거예요.
이걸 보면서 교회 좀 다녔다고 ‘역시 그래.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은 부활을 몰라. 우리는 부활을 알거든.’ 이렇게 여유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오산입니다. 왜 오산인가 하면, 기존에 살던 대로 살면서 플러스알파, 기존의 것에 부활을 하나 더 추가해서 새사람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부활이란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그 뒤의 이야기가 이렇게 구차하게 나올 필요가 없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부활의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가 미련 두고, 우리가 관심 두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고, 우리가 정신을 집중시켜서 얻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이 부활의 세계에서 보게 되면 다 헛짓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죄가 된다.’ 이렇게 모든 것에 일괄적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사고방식 가지고 사람은 다시 산다, 이렇게 되어야지, ‘살다가 지치면 나중에 부활되겠지.’ 이런 관점은 아니에요.
관점자체가 바뀌어야지 ‘살다가 죽으면 보험 들어놓았으니 보험금 나오겠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요. 평소에 3천만 원짜리 보험 넣어놓은 사람하고 30억 보험 넣어 놓은 사람과 달라요. 3천만 원짜리 보험 들어놓은 사람은 ‘살다가 죽으면 3천만 원 타겠지.’ 이렇게 되는데 없는 살림에 30억 보험 들어놓은 사람은 주변의 친척을 보게 되면 ‘저걸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죽여 버릴까?’ 이런 사고방식으로 산다니까요. 30억이니까. 그게 목표에요.
사람을 대할 때, 일가친척, 동서, 시누이를 대할 때 ‘저걸 어떻게 죽여야 완전범죄로 죽일 수 있는가?’ 그것만 생각한다 이 말이지요. 30억 따기 위한 먹잇감으로 보는 거예요. 예가 좀 이상합니다만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요. 살다가 추가적으로 더 사는 것이 아니고 아예 이걸 없애버릴래, 이 세상은 그냥 없는 것으로 치고 살래, 없다고 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갖고 있던 의식이고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죽고 어떻게 사느냐의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았으니 우리도 살아난다.’ 이렇게 우리 같으면 굉장히 간편하게 답변을 할 것인데 이야기가 뒤에 나오는 것은 이런 취지 때문에 길게 언급되어 있어요. 인간들이 흔히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데서 만들어진 현실관, 현실체계가 있어요. 그 현실체계를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히 다 분해시키고 다 부셔버립니다.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부활의 세계가 전부야.’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지 조목조목 따집니다. 도마에 생선 올려놓고 요리사가 회 뜨듯이 낱낱이 조각내는 거예요. 다 조각내면 알맹이가 나옵니다.
모든 것을 다 쪼가리로 내서 그 알맹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아예 난도질을 해버려요. 이래도 이 세상에 미련 가질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살다 보면 나중에 부활되겠지.’ 그런 가짜들까지 다 난도질을 칠 수가 있어요. ‘나는 교회 다니니까 나중에 죽으면 부활세계에 가 있겠다.’라고 여기는 사람까지 그게 전부 다 엉터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렇게 긴 설명이 필요했던 겁니다.
‘살다 보면 천국 가겠지.’가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난도질을 당해야 돼요. 복음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난도질을 당해야 됩니다. 그리고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돼요. 왜? 당하면서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안당하면 자기가 잘난 존재인줄 알고 있는데, 살만 하다고 생각하는데 당해보니까 이러쿵저러쿵 주님께 대들 위치가 아니고 그런 권리가 없어요. 살아온 것만도 참 과분하다, 그런 생각이 들어야 돼요.
사도바울의 소원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입에서 “사람이 죽었다가 어떻게 살아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상식으로 “죽었다가 부활해.”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질문자체를 가져와서 현재 우리의 마음가짐은 과연 성령 받은 마음가짐인가를 들추어내고 노출시키는 작업으로서 오늘 본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셰프처럼 머리에 수건 두르고 도마에 도미 하나 얹어서 회칼 들고 낱낱이 칠 때 사용하는 용어는 뭐고 개념은 뭐냐? ‘형체와 알갱이’입니다. ‘형체와 알갱이’ 가지고 토막을 내는 겁니다. 이 세상은 전부 다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하나가 아니고 각자 따로 있는 것을 권력으로 묶어놓았다는 거예요. 그 묶어놓은 권력이 수상하다는 겁니다. 그 묶어놓은 권력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 끊어놓겠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남자들이 그냥 남자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남성위주의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가정도 마찬가지에요. 다시 말해서 남자를 세워놓으면 여자가 안보이도록 해서 남성 위주의 세계, 남성우위의 세계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여성은 어디 있는가? 여자는 보면 보여요. 세상에 반은 남자고 반은 여자인데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것은 남성위주로 돌아가느냐 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남자 여자 있더라도, 그 구분과 차이가 있더라도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권력이 거기에 스며들어서 그 차이를 없애버리는 식으로 권력이 작용한다는 겁니다. 차이를 없애버리면 남성을 놓고서 여성을 없애버리는 쪽으로 획일화시키는 겁니다. 하나로 딱 등장하게 만들어요. 남자만 좋으면 좋은 세상이 되고 여자야 울든 말든 상관없는 세계로 인류문명이 죽 이어져 온 거예요.
그러면 여성은 뭐냐? 여성을 세워놓고 여성에서 여성을 빼버리고 남성한테 종이 되는 속성을 남자의 권력에서 계속 심어준 거예요. 칩을 심듯이 여자가 태어나면서 계속 심어준게 뭐냐? 기존에 있는 남성 위주의 힘과 사고방식이 여성에게 독약처럼 스며든 것처럼 계속 스며든 거예요. 남자 잘 만나야 팔자 고친다. 이것이 계속 스며든 겁니다. 남자 잘 만난다는 말은 그 남자가 단독으로 나에게 잘난 남자가 되면 안돼요. 그 남자는 남성위주의 세계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인기가 있고, 존경받는 남성이고 그 남성에게 내가 기어 붙으면 나는 이 남성의 세계에서 호강할 수 있다, 방정식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남자의 세계에서 남자가 돋보인다는 말은 돈 가지고, 권력가지고, 인물 잘났고, 그런 것들이잖아요. 남자가 봐도 반할만큼 멋있는 남자. 유시진 대위 같은 그런 남자 말입니다. 그런 남자를 우러러 보는 겁니다.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차이를 없앰으로서 질서가 유지된다는 거예요. 가정의 질서, 국가의 질서, 모든 질서가 그렇게 유지가 되는 거예요. 50년 동안 남녀가 같이 살면서 50년 동안 하녀로 부리잖아요. 50년 지나서 이제 여자가 탈출한다고 보따리 싸고 어느 헌집에 가서 누워 자고 있고요. 그런 식으로 나름대로의 반항을 해보는 거예요.
남자가 여자한테 뭘 시킬 때 그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차이를 없애고 시켜요. 일을 시킬 때. ‘너는 너 나름대로의 인격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계산 안 해요. ‘너는 이 순간 나름대로의 뜻이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의 기대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걸 고려하지 않아요. 다 없애버려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미 우리가 잘못된 질서 안에 있으면서 그 질서 속에서 차이를 따로 뽑아낸다는 것은, 현재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안에 있는 이상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몸이 죽었는데 어떻게 다른 몸이 있을 수가 있느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들이 그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죽음이 오게 되면 이 몸의 효능도 끝난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너나없이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한 거예요. 우리 몸이 있을 때까지만 몸이고 죽으면 그 다음은 없으니까 있을 동안에 눈에 보이는 이 몸만 단단히 챙기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것은 네가 형체는 보고 알갱이는 못 봐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된다고 보는 겁니다. 형체만 보고 알갱이는 못 보는 거예요.
그러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형체를 보면 알갱이는 있으나 없으나 그만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형체가 있더라도 알갱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알갱이는 그대로 알갱이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형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알갱이가 몸집 키운 것이 형체에 불과하기에 형체 속에서 알갱이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고방식 가지고는 내 말을 이해못한다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성경 본문 읽는 것이 낫겠지요.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하나님이 개입하는 지점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개입하는 지점은 알갱이의 가치를 그대로 확대시키기 위해서 알갱이에 합당한 형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관여하는 식으로 이 세상에 형체를 주셨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 형체가 각각 다르다는 이야기에요.
각각 다르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이 차이나는 것, 다른 것을 하나로 통합할 권리나 권한은 없다는 겁니다. 남자가 시켜도, 남편이 시켜도 여자 쪽에서 “아니오!” 할 권리가 처음부터 있는데 남자들은 결혼생활 한 30년, 40년, 50년 하다 보면 “어? 이게! 개기네? 뭐 믿고 나한테 대느나? 너 그렇게 나에게 대들면 우리 동네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욕 얻어먹는 여편네 된다. 주의해라.”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내 앞에서 남자, 여자 차이를 언급해?” 그걸 가지고 문자로 간이 배밖에 나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간이 배밖에 나왔다.
여기서 우리가 반박할 수 있어야 돼요. 간이 배밖에 나온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람이 개 될 수 있습니까? 이게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생뚱맞은 질문을 복음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하는 거예요. 사람이 개 될 수 있느냐? 사람들은 개를 보면서 자기가 개가 된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합니다. 왜냐? 개는 사람이 다루는 대로 다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사람위주로 일관성 있는 생각을 구성해 놓았기 때문에.
한 번도 개한테 뭘 물어보고 한 적이 없어요. “도꾸, 도꾸!” 이걸 개한테 물어보지 않았어요. 누가 그렇게 했는가? 모든 것을 분해해 버립니다. 도마 위에서 생선을 해체하듯이 다 잘라버려요. 네가 형체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이 형체를 그냥 준 게 아니고 형체마다 각 알갱이에 합당한 영광 성을 집어넣어서 줬다는 거예요. 그 영광 성을 집어넣어서 줬는데 그 영광 성을 완전히 묵사발 만들었어요.
완전히 하나로 합쳐버리고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모든 각자의 영광 성을 다 삭제해서 소멸시켜 버리고, 그 영광 성을 지시하고 명령하는 하나의 권력의 영광성 안으로 다 우겨넣어 버렸습니다. 가정에서는 남자의 영광을 위해서 여자의 영광은 기도 펴지 못하게 없애버렸어요. “남자만 잘되면 돼. 남자가 잘되면 덩달아 너도 잘된 거야. 그렇게 하지 마.” 그러면 여성으로서의 여성알갱이는 어디 있습니까? 그런 것은 완전히 무시하는 거지요.
“여자는 남자의 배필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잖아. 너는 나에게 서비스하면 되는 거야.” 여자는 남자의 배필로 서비스해야 된다는 그 서비스의 질, 그 서비스라는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거예요? 이미 남성의 일관성위주의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조작된 서비스개념을 가지고 지금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거예요. 여자 고유의 영광 성을 누가 가리는가? 남성일변도의 세계가 그걸 가려온 거예요.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성경을 볼 때 선입감을 갖고 보는데 그 선입감이 수상하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읽습니까?” 우리가 아는 답변은 또박또박 읽는다, 삼십 분 읽고 십분 쉰다, 이런 답변을 들으려고 한 질문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읽어야 성경에서 복음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봐야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접촉할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답변을 했지요. 성경 읽을 때 선입감을 가지고 읽습니다. 기대한 바가 있고 의도한 바가 있어요. 읽는 당사자가 영광을 받는 쪽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는 쪽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거예요. 성경 읽는 이 순간을 천사가 찰칵찰칵 사진 찍어버리면 얼마나 착해 보이냐는 말이지요. 성경 읽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읽은 내용대로 실천에 옮기면 더더욱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면 나는 지금 죽어도 천당 간다. 그게 확정되는 순간이니 얼마나 귀한 순간입니까?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리고 성경 읽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틀려먹은 성경읽기입니다. 그게 틀려먹은 성경읽기지만 모든 인간은 다 그렇게 읽어요. 성경 읽을 때 다 기대감을 가지고 와요. 그 기대감은 뭐냐? 자기 의고, 자기 영광성이고, 자기 복 받는, 하나님께 행운을 얻어내는 어떤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보는 겁니다. 지금 집안에 문제가 있는데 성경 읽음으로서 집안문제가 싹 해결되는 괜찮은 미래를 은근히 기대하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맞은편에 누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냥 보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완료가 되었어요.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었더라, 가 이미 마련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성경을……, 지킬 수가 없지요. 성경 저자가 인간이 아니고 성령이기에 인간은 그 저자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어요. 그냥 아까 이야기한 자기 잘남, 자기 영광을 위해서 그냥 본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미 성령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성경의 모든 것을 다 이루었어요. 이뤄놓고 마중을 나와요. 지난 의존교회 강의 첫 시간에 한 거예요. 성경을 다 이루게 되면 의가 됩니다. 티를 찾으려 해도 찾을 티가 없어요. 흠집을 찾을 수가 없어요. 완벽하게 주의 약속대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걸 하나님의 의라고 하고 두 자로 복음이라고 하는데 그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마중을 나옵니다.
마중을 나오는데 그 말씀을 다 이룬 것을 집대성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가지고 마중을 나와요. 십자가는 예수의 피와 살이 거기에 담겨 있어서, 누구든지 내 피와 살을 먹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는 그 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마중을 나오게 되면 우리는 자기 영광, 자기 의를 위해서만 성경 보다가 거기서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충돌이 일어나면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이렇게 성경보면서도 성경보고 난 뒤에 뭔가 행운을 찾겠다는 그런 일을 획책하는 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거예요.
죄가 되면서 첫째로, 오직 의는 십자가 안에만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그 한 가지, 두 번째는, 내가 이렇게 성경 읽음으로서 구원받겠다는 이것이 개인적 구원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죄가 돼요. 개인적 구원은 없는데 나만 구원받기 위해서 나만 성경 열심히 본 거예요. 내가 하는 행동이 사적인 나의구원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그런 행동과 오늘 본문과 연관시켜보면, 인간은 자기 눈에 보이는 형체를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알갱이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요.
39절에,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이 말은 전부 다 알갱이가 다르다는 겁니다. 알갱이가 다 다른 거예요. 알갱이가 다 다른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르니까 형체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남자와 여자가 결혼했다. 결혼하게 되면 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두 종류가 돼버려요. 이걸 하나로 통합하지 않으면 가정이 자꾸 분란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권력이 작용하지요. 힘 센 쪽이……, 쉽게 가겠습니다. 듣기 쉽도록, 혼수 많이 한 쪽이, 결혼식 때 비용 많이 댄 쪽이, 또는 시댁과 친정 가운데서 더 돈 많은 쪽이 큰 소리를 치게 되어있어요. 그래야 가정의 질서가 하나로 통합이 됩니다. 그러면 각자의 차이나는 알갱이는 날라 가버리고 하나의 형체 속에 복속이 되고 예속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알갱이까지 접근해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접근해 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각자의 형체가 다르다는 말은 알갱이가 다르다는 말인데 각자의 알갱이가 다 다르니까 어느 알갱이를 가지고 대표알갱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어느 것이 기준점이 되고 중심점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은 전부 다 차이뿐이에요. 차이뿐이기 때문에 차이를 통합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어요.
인간의 몸은 전부 아담의 한 몸에서 나왔고 아담은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아담에서 파생된 아담의 동일한 몸뿐이라는 말이지요. 쉽게 해서 인간은 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알갱이가 달라서 그래요. 이 말은 인간은 또 남이 될 수가 없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인간 몸의 처음 알갱이, 모든 차이를 전부 다 소멸시키고 이걸 집중화할 수 있는 한 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몸은 우리가 도서관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어디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살아가면서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한 여름에 아이스크림 장식 아무리 많이 해봐야 땡볕에 다 녹듯이 우리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죽음은 모든 차이를 없애버립니다. 새로운 몸은 어디서 나오는가? 본문에서 질문한 사람이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그럴 리는 없다고 했을 때에 이 사람이 질문한 것은, 자기 몸, 자기형체가 기준인줄 알고, 내가 기준인 줄로 알고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런 세계에 살던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뭘 알고, 보험 들어 놓고,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해도,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사람이 죽어가게 되면 몸만 죽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몸이 체험했던 그 체험도 함께 날라 가버려요. 내가 눈꺼풀 감는 순간에 옆에서 “아버지! 아버지! 지금 가시면 안 됩니다.”하고 백날 울어봐야 그 울음소리가 귀에서 점점 더 작아지고 희미해지고 눈 감기면 눈감긴 그 장면의 틀만큼 좁아지면서 캄캄해지겠지요. 귀도 그렇고.
모든 것이 내 죽음과 함께, 내가 믿던 예수, 내가 믿던 삼위일체 하나님, 내가 교회 헌금한 것, 봉사한 것, 밀대 밀면서 청소한 것, 전부 다 동반해서 죽습니다. 몸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던 것,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둥, 내가 성경 몇 독한 것, 그런 것도 전부 다 같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헛짓하지 말라는 거예요. 오늘 앞자리에 앉아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백날 앞자리에 앉아서 기도한 그것도 다 소용없이 네 죽음과 함께 죽어요.
데카르트가 한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내가 살아 있는 한 하나님도 살아 있지 내가 죽으면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솔직하고 노골적인 이야기입니까? 중국의 장자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꿈에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꿨을 때 내가 진짜 나비인지 아니면 내가 인간인데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더 나아가서 내가 꿈을 꿀 때만 꿈이 아니고 꿈 깨고 난 뒤에도 꿈인지 아닌지를 누가 장담할 수 있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보기에는 지금 이미 살아 있어요. 살아 있으니까 모르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죽으면 모르겠다는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내가 뭘 안다고 하는 순간 자기는 선이 되고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죽음에서 차이가 없는데 눈만 뜨고 귀만 열리면 계속해서 자기중심의 차이를 만들어내요.
그것을 주께서 없애버립니다. 해체시켜요. 그리고 알갱이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은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죽음에서 인간이 나온 거예요. 죽음에서 소멸되지만 그 죽음이 무슨 죽음인가? 현재 내가 내 몸이라고 여긴 그 몸이 죽는 거거든요. 기존의 몸이 죽는 죽음과 내 몸이 아닌 다른 몸이 죽는 죽음과도 차이를 만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아담 안에서 죽어요. 그러면 차이가 없네, 라고 하잖아요. 사도바울은 없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주께서 마땅히 죽어야 될 몸 가운데서 사흘 만에 하나님께서 살려내는 몸이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 몸은 우리와 같은 몸이 아니더라는 그 말입니다. 차이가 난다는 말은 알갱이가 다르다는 말이고, 알갱이가 다르다는 말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알갱이, 형체에 하나의 개념을 덧붙여요. 오늘 본문이 복잡하게 여기는 것은 개념을 세 개나 집어넣어서 그래요. 그 나머지 또 하나의 개념이 영광입니다. 영광을 집어넣어요. 형체가 다르면 영광이 다르다. 다른 말로 하면 알갱이가 다르면 영광이 다르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인간의 영광은 죽음으로서 그 영광이 죽지만, 살아 있을 때 영광, 영광 해도 다 죽을 때는 비참하게 영광이 소멸되지만 예수님만 그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영광, 유일한 형체, 유일한 알갱이, 유일한 몸이 지금 부활의 몸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겁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를 살아 있는 몸으로 생각해서 그 몸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결국 살아 있는 내 몸의 영광이 되니까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 종교 사기꾼들이 하는 짓이에요. “현재 당신 몸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안돼요. 우리의 몸을 주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께서, 또는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실 때는, 살아 있다는 우리의 이 몸을 뭘 로 바꾸느냐 하면, 이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데서 나온 죽음의 알갱이고, 죽음의 형체고,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고, 그래서 죽어야 되는데 그 죽음이 인간의 보통 죽음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까지 가야 된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우리가 성령 없이는 ‘남들 다 죽는데 나도 죽겠지’ 그렇게 그냥 죽는 죽음의 몸으로 끝나버려요. 그 차이를 예수님의 죽은 몸으로 건너 뛸 수가 없어요. 살아 있을 때 무슨 조치가 일어나야 돼요. 살아 있을 때의 조치중의 한 예가 창세기 32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얍복강가에 야곱이 홀로 있었을 때에 밤에 천사가 나타났어요. 야곱이 나중에 말하기를, 천사가 온 것이 아니었어요.
본래적인 죽음, 죽음 중에서도 하나님의 속성 안에 담겨 있는 죽음,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그 죽음이 자기에게 찾아왔다고 그렇게 보고 있어요. 야곱이 나중에 그렇게 고백해요. 하나님을 만나고 죽어야 되는데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천사가 올 때 그냥 빈손 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건너 뛸 수 없는 원초적인 죽음, 그 죽음은 하나님 안에 들어 있는 죽음이에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을 당겨서 야곱에서 천사 보내는 사건으로 등장한 겁니다. 그 죽음이 왔을 때 야곱은 말하기를, “나는 죽었다.” 다시 말해서 이 몸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나는 저주받는 사람이구나.” 저주스러운 영광, 이게 말이 안 되니까 영광이라는 말은 빼고, 저주스러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실 분에 의해서 나는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겁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그렇게 본 것은 모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는 말은 본래적인 죽음은 인간이 알지를 못하고 그 죽음은 누구 안에 있는가? 하나님의 속성 안에 들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그냥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을 만든 이유를 선악과를 심어 놓고 대비하면서 보여줬습니다. “누구든지 따먹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
그 ‘죽으리라’를 곁에 두고 인간을 만든 거예요. 인간을 만들고 선악과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에 담긴 의미를 위해서 인간을 그 곁에 만든 겁니다. 인간은 원초적인 죽음을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 거예요. 그것이 2천 년 전에 솟구쳐 올라온 겁니다. 이 지반을 뚫고 불쑥 솟구쳐 올라온 거예요. 인간만이 그렇고 그런 세상에, 그 한가운데, 인간이 왜 죽는지 왜 태어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아무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그 동네에 원초적인 진짜 죽음을 뚫고 이 땅에 등장했습니다.
이것을 세례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 여기 말씀이라는 단어, 육신이라는 단어, 전부 다 새롭게 생각해야 할 단어지요. 말씀이라는 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라.
하나님이 아버지 됨을 증거하는 유일한 영광이라. 그 영광, 아버지의 영광은 이 독생자에게만 독점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사람의 형체가 다르고 짐승의 형체가 다 다르고, 이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이어지는가 하면, 40절에 보면,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늘에 속한 영광이 다 같은가? 아니에요. 해의 영광 다르고, 달의 영광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고, 다 하늘에 속한 그룹인데 다 영광이 다르다는 겁니다. 알갱이가 다르다는 거지요.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기존의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을 그대로 유지시켜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다 없애버리겠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내가 누구냐? 이 세상 어떻게 사느냐?’라고 여겼던 모든 이 세상을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써 전부 다 없애버리겠다는 거예요.
하늘에 걸린 달과 별도 다 없애버려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다 갈아치워 버립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하늘에 별이 있고 땅에는 우리가 있다. 나는 나대로 살면 된다. 나대로 살면 된다는 그것이 곱게 가는 것이 아니에요. 거기에 권력이 작용하게 되면 이렇게 돼요. 나는 나 위주로, 나 좋은 쪽으로 남을 이용하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바로 그 권력, 권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대로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래야 예수님이 쫓겨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편하게 생각하는 그 권력,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그 권력에 의해서 예수님이 추방되었습니다. 아무 문제없다는 그 권력, 그 권력 안에서 작용하는 의미가 뭐냐? 나의 영광, 나의 영광은 영원하리라, 나의 영광은 영원해야 된다, 그런 것을 부추기고 그런 것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부지런히 살고 있습니다. 다 내 영광이거든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추방시킨 악한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개보고 명령하잖아요. 남자가 되어서 여자보고 함부로 명령하고. TV언뜻 보니 거기에 기쁜 소식이 하나 등장했어요. <최고의 사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에 김숙하고 윤정수가 나와 가지고 부부도 아닌 게 부부인체 하면서 개그를 하는데 그 개그맨이 정말 놀라운 멘트를 했어요. “어떻게 남자의 소리가 담벼락을 넘어가느냐?”
얼마나 여자들이 억눌렸으면 그 말이 여자들에게 속 시원한 말이 되겠습니까? 이 말은 “어떻게 여자의 소리가 담벼락을 넘어가?” 하는 조선시대의 윤리도덕을 바꾸는 거예요. “어딜 남자가 큰소리를 내고 있어.” 그렇게 되면 또 여자 앞에서 남자를 삭제하게 돼요. 어쨌든 간에 한쪽을 몰아세웁니다. 차이 자체를 용납을 못해요. “어딜 감히 집사가 목사에게 대들어?” 모든 것을 권력으로 일원화, 권력으로 정리정돈 하는 쪽으로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감히 을이 갑에게 대들고?” 이런 식으로. 도대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 부활 하나 첨가했다고 해서 천국에 가요? 어림도 없는 소리지요.
우리가 왜 존재하느냐? 제가 안양에서 식사하는데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해요. 내가 보기에 질문하나하나가 주께서 허락하셔서 다 뜻이 있어서 하는 질문들이에요. 자기 남편이 질문하기를, “천국이 어디 있기에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느냐?” 복음을 잘 모르니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잖아요. 천국이 있다는데 어디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마침 식탁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생선튀김이 올라와 있었어요.
생선튀김은 생선에 튀김옷을 입혀놓은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해드렸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설명하라고. 천국은 어디 있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죄인을 의로 튀김한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로 옷 입은 거예요. 천국에 갈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막 사세요. 거기에 튀김을 하실 거예요. 무슨 튀김으로 하든지 그냥 그 현장에서 애 낳고 살면서 천국의 하나님의 의로 튀김을 할 때 그렇게 덧붙여야 될 이유가 우리의 영광은 지옥의 영광이고 악마의 영광이기 때문에 이것을 독생자의 영광으로 튀김을 하면서 죄를 의로 바꾸는 그 기능이 작용할 때 그것이 천국이에요.
우리가 만들 수 없고 우리가 얻어낼 수 없는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의, 하나님이 어디에 집어넣어도 천국 되게 하는 그 완벽한 의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일괄적으로 우리가 놓여 있는 이 세상이 폐기처분되어야 될 세상인 것을, 일체 희망이니 기대를 걸지 않고 일괄적으로 없애버리는 그것, 그러한 안목, 그것은 성령이 와야 가능한 겁니다. 나의 영광이 아니고 독생자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죽음의 세계에 일부러 보내서 그게 얼마나 악한 세대인지를……, 아까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끼리 있으면 악한 줄도 모른다고요. 예수님의 영이 옴으로써 일괄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부 다 썩어빠진 마귀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다녀감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일괄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 일괄적인 사고방식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받아져서 우리는 그 안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안양강의에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 안에 산다는 거예요.
물고기가 어항 안에서 헤엄치지 않지요. 그냥 살지요. 물고기가 헤엄친다는 것은 우리 생각이고. 우리는 평소에 헤엄친다는 행동이 있고 걷는 행동이 따로 있듯이 살지만 물고기는 헤엄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사는 거예요. 말씀 지키는 시간이 따로 있고 안 지키는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있기만 해도 생선튀김옷 입히듯이……, 바삭바삭 얼마나 맛있습니까? 나는 생선튀김은 생선 맛이 아니라 튀김 맛으로 먹어요.
그렇게 되면 주께서 나를 볼 때 말씀 안에서 튀김생선으로 보시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못난 인간을 용서해주시는 은혜로 사는 거예요. 아까 출애굽기 33장에서, 나를 볼 자가 없는데 긍휼을 입힐 자에게 긍휼을 입혀주시고 사랑을 줄자에게 사랑을 해주시는 그 모든 말씀을 이루는 사랑이 뭐냐?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십자가의 튀김옷을 우리에게 이미 입히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말씀을 답변으로 내놓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차이를 지웠습니까? 권력싸움에서 지게 되면 가진 자 앞에서 차이가 없어지는 이 권력세계를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여긴 세계 속에 예수님이 오시니까 당연한 게 아니고 폐기처분되어야 될 악한 세계인 것이 들통 났으니 저희들은 주님의 의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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