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강-고전 15장 51-53(생명의 나팔소리)16071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51-53절입니다. 신약성경 283페이지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확인되지 않는 것이 유포되어버리면 듣는 사람들이 심적으로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는 모든 정보라는 것은 확인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어떤 원인으로 해서 이런 일이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또 만들어낼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고, 기대할 수도 있는데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확인이 되지 않아요. 확인이 되지 않으면 이것은 믿음에 대해서 보류가 되는 겁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인정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인정을 해줘버리면 우리 마음속에서 말썽을 일으킵니다. 지금껏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 우리의 모든 습관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살기에 적합한 것만 수집해서 거기에 맞춤으로 맞아떨어질 때 그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요령이거든요. 나 좀 살려줘, 살려줄게, 이렇게 서로 의견이 결합되고 같아질 때 우리는 하나의 시민으로서 넉넉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불쑥 마지막 때에 나팔소리가 들리면서 홀연히 죽은 자가 부활된다는 이런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해버리면 상대방이 불쾌하지요. 상대방의 불쾌함은 곧 나의 불쾌함이 돼요. 본인이 감당이 안 되는 내용이 본인 속에 들어와 버리면 본인이 사는데 지장이 되고 부담되고 불쾌하다니까요.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음식이 몸속에 들어 와버리면 이것을 토해내야 할지, 설사약을 먹어서 빼내야 될지가 고민이 되는 것처럼, 세상의 것은 공부해서 내 것으로 전환이 되는데,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보로서 접수가 되는데 이런 것은 전혀 우리가 이 땅 사는데 보탬이 안돼요.
세상살이라는 것이 별것이 아닙니다. 정보를 많이 가진 자가 정보를 적게 가진 쪽을 지배하는 구조에요. 많이 아는 자가 갑 질하고 모르는 자는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소위 말하는 시다발이가 될 수밖에 없어요. 왜?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고자 하는 거예요. 법도 모르는 사람을 검사자리나 판사자리에 앉혀놔 봐야 욕만 얻어먹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의사 자리에 두면 그것은 안 되지요.
안다는 것은 힘이 되고 그 힘은 우리 생존에 보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1절에서 53절은 이것 알아서 살림살이 나아지겠습니까? 이게 어디에 쓸데가 있어요? 아무 쓸모가 없는 거예요. 아무 쓸모가 없으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보류상태로 추방이 되어야 되고 한쪽으로 제켜놔야 되는데 그게 우리 맘대로 안 될 때 성도입니다. 주의 말씀이 기꺼이 받아지는 것이 성도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이런 것은 안들은 것으로 칠게요.’라고 이 말씀을 아주 적극적으로 심하게 내 속에서 밀치려고 하는데 그게 나가지를 않네요. 이게 빠져나가지를 않아요.
남들은 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53절 없어도 잘만 살아요. 삼성그룹 임원들 이런 것 없어도 잘만 살아요. 반도체 만드는데 고린도전서 15장 아무 도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계비를 늘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이것이 왜 다른 사람한테는 목숨 같은 것이고 생명 같은 것이냐 하는 겁니다. 주님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왜 집어넣었습니까? 이거 뽑아서 던지고 싶은데 던졌다 치면 들어오고 던졌다 치면 들어오고. 이제는 안 보겠다, 하면 들리게 되고, 안 듣겠다, 하는데 그것이 또 궁금해지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사도바울의 성경말씀은 성도, 택한 자를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네가 말씀의 범주 내에서 네가 빠져나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이렇게 규정된, 마지막 날에 나팔소리가 들리리라, 그 대상자에서 네가 제외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마지막 때의 그 나팔소리 들리기 전에 미리 그 사실을 고지하고, 알려주고, 통보하고, 이 통보된 것을 내 힘으로 아무리 빼내려고 해도 빠지지도 않고, 계속해서 우리 속에 이 말씀이 살아 있습니다. 참 신기하고 신비로운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조금 더 보탠다면, 천군천사가 내려오고 땅에 있는 자가 하늘로 올라가고 무덤에 있는 자가 변화되어서 영광스럽게 달라진다는 이 내용을 그 때 가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도바울의 정보를 그 때 가서 우리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미 이런 상태로 우리가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에 입각해서 다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이 말씀을 나는 안 들은 것으로 치겠습니다. 나는 못 본 것으로 치겠습니다.” 라고 할 수 없는 바에는 차라리 이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를 그냥 고개속이고 수용해야 돼요. 왜냐? 이 세상 정보라는 것은 세상 마지막 끝가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요. 살아 있을 때의 그 눈에 보이는 세상은 대충 파악이 되고 정리정돈 되는데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꺼지고 난 뒤에 주께서 어떤 손질을 할 것인지의 정보는 성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누가 지옥가본 사람이 있습니까, 천국에 가본 사람이 있습니까? 이 성경의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따라서 이 성경의 정보가 내 안까지 들어와야 돼요. 수용을 해야 됩니다. 어떻게? 그렇다 치고, 그렇다 치고, 확인되지 않는 이 이야기를 우리한테 왜 해야 됩니까, 라는 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이 되어야 됩니다. 확인되지 않는 것. 아는 것도 다 추스르기 바쁜데 왜 확인되지 않는 것까지 점검해야 됩니까, 라는 생각으로 다가서야 되지요.
51절에 사도바울은 우리의 이러한 마음심보를 미리 간파를 하시고 이렇게 합니다. 이것은 비밀인데,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은 비밀이다. 이것을 좀 실감 나게 하면, (속삭이듯이) ‘이것은 비밀이거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라고 되어 있어요.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라고 할 때 ‘누구’라고 정해진 것은 아닌데 비밀이라는 의미,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인간들이 아무리 연구하고 분석해봐야 만들어낼 수 없고 알아 낼 수 없는 낯선 요소가 방금 그 비밀의 내용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너희’라는 대명사의 그룹에 해당되는 사람이에요.
이것은 세상에서는 듣도 보도 못할 일인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세상이 유지되기 때문에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거예요. 세상이 다 파괴되고 난 뒤에 비로소 확인될 사항이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아무에게나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너희’라고 호칭되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비밀이다. 그러면 내가 ‘너희’에 포함됩니까, 안됩니까, 라고 물으려면 이것이 우리한테는 비밀로 남아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비밀인 거예요. 비밀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집어넣어 준 것이지 내가 창안한 것, 내가 아이디어를 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창안하고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다면 내 지식과 이 비밀을 연결시켜야 되는데 이게 아니기 때문에 그 비밀의 원인은 인간의 외부에 있어야 돼요. 외부에서 쏙 집어넣었기 때문에 이게 비밀이 되는 겁니다. 자기들끼리의 비밀이지요.
그래서 이 비밀의 특징, 이 비밀이 유지되려면 설득하거나 납득시키면 안돼요. 그것은 비밀의 가치를 스스로 무시하고 짓밟고 훼손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안 가르쳐 주~지.” 이걸 두 글자로 하면 전도라는 겁니다. 안 가르쳐주지. 옛날 못살 때 형이 아이스케키 빨고 있으면 동생이 쳐다보면서 “형아! 맛있나?” 이렇게 물으면 형이 “안 가르쳐 주~지.” 빼앗아먹을까 싶어서 휙 등을 보이잖아요. 나중에 다 먹고 막대기만 던져주죠. 동생은 막대기만 빨면서 맛이라도 보려고 합니다. 이미 다 먹고 없는데.
이게 전도입니다. 전도하기 참 쉽지요. 약 올리면 되는 겁니다. 이게 전도요 이게 선교입니다. 사람을 꾀이면 이것이 나의 실적이 되고 그 원인은 나에게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것은 비밀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을 교회 데리고 오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교회 앉아 있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도 비밀이 아니에요. 그냥 약을 올려버리면 ‘그거 나 벌써 아는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바로 주께서 그 사람에게 비밀에 동참하라고 집어넣어준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한 비밀이라는 것은 사실은 크게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우리들끼리 소곤소곤, 속닥거리면서 이야기해야 됩니다. ‘마지막 날에 ……’ “뭐! 뭔 소린데?” ‘마지막 때 나팔 소리가 ……’ “너 그거 어디서 들었는데?” ‘그건 비밀이야.’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실은 이 본문뿐만 아니고 성경전체, 마태복음, 창세기, 성경전체가 다 비밀이 되는 거예요. 인쇄술이 발달해서 성경이 너무 많다보니 쓰레기마냥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데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의 사는 재미와 보람은 이 비밀이 나를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 나를 새롭게 만든다는 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것이 즐거움이고 기쁨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내막을 알아야 되잖아요. 51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되어 있는데 그러면 이 복음의 비밀, 부활과 승천의 비밀이 우리한테 어떤 효과를 주는가 하면, 변화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어떤 변화냐 하면, 고린도전서 15장 43절에 보면, 욕된 것으로 심고, 약한 것으로 심고, 육의 몸으로 심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욕되다, 다른 말로 하면 지저분하다, 더럽다, 더 이상 시간을 보낼 가치조차 없다. 욕된 것으로 심었는데 그게 나팔소리와 함께 영광스럽게 달라지는 이것이 비밀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는 굉장히 간단해졌습니다. 우리 자신이 굉장히 추하고, 더럽고, 욕되다는 것을 평생을 통해서 경험해야 돼요. 지저분하고, 더럽고, 욕되다는 사실을.
주께서 복음의 비밀을 준 것은, 우리가 지저분할 수밖에 없고, 욕될 수밖에 없고, 추하고 더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맨 날 아침마다 씻고 화장하는데 뭐가 더러울까, 나름 영광스럽거든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오염이 되었다, 더럽다고 하는 이유가 죄 때문에 그래요. 마지막에 영광스럽게 된다고 할 때, 제가 교회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일방적으로 비율을 따져서 정확한 것은 아닌데 거의 99퍼센트가 예수 믿으면 마지막에 영광스럽게 된다고 그렇게 생각들을 해요. 성경을 다들 봤으니까.
그런데 저는 그것을 인정을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추하고, 더럽고, 더 살 가치도 없음을 인정하는 쪽이 0.1퍼센트 내지는 0.5퍼센트밖에 안 되는 거 같아요. 어떤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느냐 하면, 욕되고, 추하고, 더럽다는 비밀에 입각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영광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는데 멀쩡하게 그냥 살다가 나중에 주께서 구름타고 오면 그 때 영광스럽게 되겠지, 이건 아니거든요.
무슨 말인고 하니, 주께서 더럽다, 혹은 욕되다고 할 때 정말 비밀을 아는 사람은 “멀쩡한 제가 왜 그렇습니까?” 하면 “네가 죄지었거든.” 오염되었다는 말은, 더럽혀졌다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추하다는 그 말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거예요. 죄를 지었으니 죄 지은 것이 하나님께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서는 그냥 죄 지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누가 끼어들어야 돼요. 죄를 의로 바꿀 수 있는 인물, 제 삼자가 중보자로서 끼어들어야 돼요.
그러면 영광을 미리 알아야 되는데 그 영광이 뭐냐? 십자가의 죽음이 영광이고 독생자의 영광이 진짜 영광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교회 와서 이 대목을 그냥 슬쩍 대충 봐서 그런지 어쩐지, ‘야, 교회 오면 이런 보호혜택이 있네.’ 그저 보호혜택만 보고 ‘교회 다니다가 나중에 구름타고 오시면 영광스럽게 쫙 올라가게 된다면 반 중력이 주는 쾌감이 멋질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멀쩡한 인간, 멀쩡하니 영광스러운 것, 그런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중간에 뭐가 빠져버리는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져버렸어요. 예수님의 고난이 빠져버렸습니다. 그걸 경과하지 않고 영광 되는 노선을 성경은 제시해준 적이 없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죄 때문에 고난 받고 영광스럽게 되었다 할 때 사람들은 성질이 급해서 영광만 들리고 그 앞에 있는 고난 받았다는 것은 안 들은 것으로 쳐버려요. 고난 받고 영광 받으려면 성도도 그 길을 가야 되거든요.
베드로전서 2장에 의하면, 네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된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뭐가 듣기 싫으냐 하면,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야 그 마지막에 영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거예요. 빌립보서 3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십자가로 들어간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도 나와 있어요. 아바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지만 그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할 때 우리는 더러운 거지심보가 있어서 고난 안 받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게다가 또 이근호 목사는 막 살라고 가르치니 이거는 완전히 땡잡은 거예요. 막 살다가 그냥 하나님께 영광만 받으면 땡 잡았다. 내 성질대로 다 살다가 영광만 받으면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는 거비다.
본인의 주제파악이 안 되가지고. 주께서 고난 받는 이유에 대해서 몰라요. 자기가 자기 보면 멋지고 잘났거든요. 성경전체에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모양새가 왜 고난이냐 그 말입니다. 사랑과 고난이 어울립니까?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가 기대하는 사랑은 예쁘다, 착하다, 복 준다, 행복을 보장한다, 이런 소리로 들리는 거예요. 너는 잘났어, 훌륭해, 내가 너를 지켜줄게, 네 잔이 넘친다, 이런 이야기만 들리는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는 생뚱맞게 들리는 겁니다. 십자가를 지고가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이것은 사랑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 거예요. 주제파악이 안되어서 그래요. 자기 자신이 욕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수긍을 못해서 그렇고 인정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더럽고 추하다는 그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죄 때문에 더럽고 추한 거예요. 그래놓고는 하나님보고 사랑을 해달라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거예요. 육체적으로 합치되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정신적으로 합치시키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거든요. 사람이 사랑을 찾는 이유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손으로 만들어내고자 계속 상대방에게 사랑을 퍼부어주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준 사랑을 상대가 받으면서도 상대도 만족 못하고 상대가 만족 못하니까 내가 사랑해준 보람이 내 만족에 영 차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도 사람은 합치될 때까지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해서 퍼부어주는데 그걸 가지고 기만이라고 해요. 사랑은 속임수입니다. 그런데 자꾸 퍼주다 보면 나중에 자기의 바닥이 드러나요.
그래서 사랑은 결여, 자기의 부족함, 결여를 노출시키는 행위가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밑천이 다 떨어져요. 그런데 왜 사랑을 시도하느냐? 내가 사랑하고 싶은 모델을 찾아서 내가 원하는 그것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정리합시다. 사랑은 뭐냐?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합한 상대방을 구해서 거기에 내가 준 노력을 거기에 덮쳐서 그걸 도로 내 작품으로 합치, 일치시기 위한 시도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기, 속임수에요.
그런데 그 사랑에서 뭐가 배려되지 않았느냐? 나는 오염되었다, 나는 추하다, 나는 더럽다, 나는 하나님께 죄졌다, 이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랑 대상을 선택해서 자기의 사랑을 마구 투자하고 퍼붓습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했는데 네가 가만있으면 네가 틀린 거지, 이런 식으로 어떤 면에서 상대방에게 사랑을 준다는 것이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수가 있어요.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 일방적으로 줘놓고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대가를 주지 않는다고 길길이 뛰고, 무슨 그런 짓이 다 있어요. 누가 사랑해 달라고 했어요? 자기가 사랑해놓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데이트 폭력행사하고. 이게 얼마나 기만적인 자기를 속이는 행위입니까? 그래서 이런 사랑 저런 사랑이 실패하게 되면 이제 뭘 하느냐? 과거로 돌아가요.
돈은 좀 있고 촌에다 집하나 지어서 귀촌해서 옛날 어릴 때 꿈꾸던 그 과거로 돌아가려는 겁니다. 뒷동산에 누워서 하모니카 불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지만 그 때 주의 할 것은 야생진드기를 주의해야 됩니다. 그 아름다운 낭만 속에도. 호숫가를 거닐면서 옛날 흘러간 노래를 부를 때, 그 때는 자외선을 또 주의해야 돼요. 자외선차단제를 잊지 말아야 해요.
어릴 때는 그런 것도 몰랐어요. 자외선 차단제도 몰랐고 야생진드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몰랐지요. 사람이 정보를 알면 알수록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정보는 선택에 의해서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갖기 위한 방편으로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가져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남는 것이란 지독한 나에 대한 충성심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나에 대한 집착과 나에 대한 열정, 생존의 열정, 삶에 대한 열정에 대해서 하나님이 호응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호응해 주지 않아요.
내가 날 사랑해서 세상을 사는 이것은 전혀 비밀이 아닙니다. 너나 나나 다 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무슨 비밀입니까? 정보 양에 따라서 갑 질 하고 무식하면 을이 되는 세상, 아주 냉혹하고 비정한 세상에서 그게 무슨 비밀이에요? 내가 교회 나와서 예수 믿었으니까 나중에 주께서 변화시키겠지, 이것은 비밀 아니에요. 그것은 평소에 하던 갑 질을 교회 와서 똑같이 하는 짓이에요. 평소에 자기만 사랑하는 그 사람을 교회 왔다고 해서 영광스러운 천국에 보내지를 않습니다.
비밀이 개입되어야 해요. 비밀이 개입되었다는 것은, 내가 누군지 주제파악이 되어야 됩니다. 나는 오염된 자에요. 오염되었다는 말은 썩었다, 더럽다, 지저분하다, 그런 뜻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정화시키는 겁니다. 무엇으로 정화하겠어요? 더러운데. 사람들은, 교회 와서 말씀대로 살아서 내가 죄를 억눌러서 퍼지지 않게 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지만 그렇게 죄가 퍼지지 않으면 그것이 정화시설입니까? 그게 정화된 상태일까요?
그것조차 내가 나를 사랑하는 오염의 원인을 계속 품고 있는데? 내가 나를 사랑해서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것이 오염을 갖고 있다, 이게 지저분하다는 티를 하나님 앞에서 팍팍 내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못 고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를 정화 못해요. 교회 와서 많이 성화되었다고 자랑질을 하는데, 죄는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생산합니다. 생산하고 노출시키는 것이지 이것은 우리가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죄를 몰라도 진짜 너무 몰라요. 하나님이 죄를 생산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말씀을 주는 겁니다. 구제를 하고 헌금을 할 때 “목사님, 저 잘했지요?” 그러나 목사한테 물을 것이 아니라 성경한테 물어야 해요.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헌금내고 구제하면서 내가 잘했지요, 라는 것 자체가 뭐냐 하면, 나머지 돈은 주님이 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는 돈 사랑의 표현방법이 그겁니다. “ 이만큼 세금 뜯어갔으면 그만해라. 이것은 내 꺼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지독하네. 얼마나 더 뜯어가려고. 그래. 줘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손대면 안 돼. 십일조 냈으니까.”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그게 바로 돈을 사랑하는 거잖아요.
죄는 내 몸을 통해서 날마다 생산되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너는 욕되고 더럽다고 한다면……, 잘 들으세요.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더럽고 욕되다고 성경에서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90세, 100세 다 할 때까지 더럽고 오염되게 해주실 거예요. 더럽고 오염되게 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다는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눈에 보인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날이 가면 갈수록 나에 대한 집념과 아집이 도가 넘쳐요. 나이 60, 70, 80되었다고 인간에서 천사되는 것 아닙니다. 갈수록 지독해요. 남는 것은 파충류의 본능만 남아요. 두뇌에 파충류의 작용이 있거든요. 때리면 아프다. 어린애라도 때리면 “엄마! 왜 때려요.” 하잖아요. 노인들이 치매 걸리면 애들보다 더 못해요. 아프다가 끝나요. 애는 “엄마! 왜 때려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러는데 노인네는 때리면, 아프다, 배고프다, 잠 온다, 감각적이고 육적인 육으로 되돌아가요. 무기물로 환원된다고 해요.
여러분, 채송화는 번식되지만 돌멩이는 번식 안 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민들레는 번식하지만 돌멩이나 암석은 번식이 안돼요. 결국은 그게 바닥, 번식의 끝이기 때문에. 인간은 흙에서 와서 무기물로 돌아갑니다. 이게 인간의 본래 모습이에요. 그 자리가 있어줘야 하나님께서 흙에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취지가 나풀나풀 살아나는 겁니다.
우리 자신들이 지금 무기물로 환원되고 있는 중이에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어릴 때는 멀쩡하게 포동포동하던 우리가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서 이렇게 욕되고, 더럽고, 추하고, 흙이 되어 가는가? 그것은 죄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미 죽어가는 입장에서, 죄가 생산되는 입장에서 죄를 의로 바꿀 수는 없어요. 날마다 죄가 추가가 되는 입장인데 다시 내 힘으로 원상복구가 되겠어요?
여기서 육신 바꿔치기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쓰리꾼(소매치기)입니다. 하나님은 날치기, 바꿔치기를 해요. 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예수님 자신의 육체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어떤 기능이 있느냐 하면, 우리와 똑같이 죄의 몸으로 와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죽음을 이미 경과해서 체험한 몸이고 그 체험한 몸이 사흘 뒤에 영광스럽게 된 그 몸으로 우리의 노선을 바꿔치기 하면서 우리를 합체해서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있어서 죽어가는 것은 사실은 영생을 얻는 노선입니다. 영생 얻는 작업 중에 있어요. 그 작업 중임을 알리는 신호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 ‘나팔소리’가 나옵니다. 빰빠라빰~! 트럼펫 소리라는 것은 뭐냐,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소리를 통해서 소집하는 소집신호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소통할 수 있고 같이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이 땅이 도구를 가지고 사용한 그 흔적이 나팔소리에요.
‘나팔소리가 안 들리는데?’ 이러잖아요. 구약을 봐야 돼요. 구약에서 나팔소리가 이스라엘 백성 소집용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나팔소리가 울린다는 것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궤가 움직일 때입니다. 예를 들면, 여리고성 함락할 때 언약궤를 앞장세우고 하루 한 바퀴씩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 총 열 세 바퀴를 돌면서 움직입니다. 그 때 은 나팔을 제사장이 불어요.
이스라엘은 출정하라, 주목하라. 그 나팔소리를 울릴 때 이스라엘은 어떤 무기도 소지할 수가 없습니다. 왜 무기를 소지할 수 없느냐 하면, 나팔소리라 하는 것은 이미 전쟁이 완료가 된 그 이후의 상황을 이스라엘백성한테는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전쟁이 완료된 상황에서 무기를 쓸 이유가 없잖아요. 더 이상 무기가 필요치 않은 그 후의 상황을 나팔소리와 더불어 미리 앞당겨서 자기백성들과 동행시키는 형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팔소리를 들었을 때에 여리고성은 무너지면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떤 느낌을 받느냐 하면, ‘아, 이것은 우리가 나서서 승리한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는 겁니다. 기드온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팔을 불 때 항아리와 횃불을 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는 전혀 손에 들지 않았습니다. 기드온 전쟁할 때 미디안 군사들이 죽었는데 그 숱한 병사들이 서로 자기네들끼리 찔러서 다 죽었어요. 스스로 무너졌어요.
그러면 오늘 이 본문에서 나팔소리라고 할 때 그 나팔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지 마시고, 나팔소리라는 것은 마지막 때 들리니까 지금 이 나팔소리가 들리는 그 지점, 나팔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지속되고 유지되고 있는 그 지점이 뭔가를 알아야 되겠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고난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절, 11절을 강의시간에 여러 번 했어요. 성경을 해석할 때 이렇게 하시면 백점 만점에 백점입니다, 라고 소개한 대목입니다.
그렇게 왜 제가 장담할 수 있느냐 하면, 성령 받은 선지자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이 방정식, 이 공식을 대입해서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 공식이 뭐냐?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이겁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영광을 가지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해독했습니다. 백점만점에 백점입니다.
어떤 해석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이 도출되어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은 어느 현장에서 나옵니까? 우리가 지저분하고, 더럽고, 욕되고, 무가치하고, 죄인이고, 라는 사실과 고난과 결합이 되어야 됩니다. 왜? 이렇게 내가 죄인일 때, 죄인인 내가 스스로 자기를 의존하거나 자기를 믿을 수 없는 거거든요. 죄인 주제에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죄인 주제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죄인 주제에 소망하는 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죄인인 것을 유지하려는 자기집착이고 집념에 불과한 거예요. 교회 나온 사람들 대부분 다 그래요. 우리교회는 안 그렇겠지만 대부분 다 그래요. 보험하나 괜찮은 것 들어서 죽어서도 천당 갈 수 있는 것, 이런 식으로 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바로 욕된 것이고 지저분한 거예요. 영광만 자꾸 기대하게 되지 내가 주의 고난의 노선에 합류해야 된다는 사실을 자꾸 빼먹으려고 해요. 왜? 자기 사랑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는 다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 다음에 오는 영광, 다시 말해서 죄를 척결하고 죄를 심판하는 영광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더럽고 추한 거예요. 어제 프로야구 삼성과 한화의 게임이 있었습니다. 그 게임이 땅 위에서 일어난 거거든요. 그 야구장에서 맥주 마시고 치킨 뜯어가면서 경기 관람했던 사람이 ‘나는 지금 더러운 세상에서 더러운 짓을 하고 있어.’ 이걸 깨닫기 위해서 관람료 지불한 겁니까? ‘야, 재미있다. 결국 비겼네.’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월드컵 왜 기다리고 리우올림픽은 왜 기다립니까? 더러운 것 보려고 기다립니까? 브라질의 도둑놈들 도둑질 하는 것이 궁금해서 올림픽 기다리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이 땅에 대한 믿음, 이 땅이 얼마나 즐거운 땅이고, 이 땅이 나에게 얼마나 행복을 줄 수 있고, 이 땅이 천년만년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모든 정보와 환경이 조성된 고장이니,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나는 못 버리겠다는 그것 때문에 뭐든지 하잖아요.
왜 이 땅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을 합니까? 그 땅에 누가 살고 있는데요? 현재 내가 살고 있잖아요.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가 없지요. 그러니 우리는 내 사랑에 대한 이야기만 납득이 되는 거예요. 평소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나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되는 것만 납득이 되고 수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쉿! 이거 비밀이거든.” 라고 하는 그 내용이 뭐냐? “네가 오염되고, 더럽고, 추하고, 죄 때문에 썩었어. 지금 당장 흙이 되고, 지금 당장 대리석이 된다 할지라도 너는 할 말 없다.” 그 이야기를 지금 비밀 속에 집어넣고 있다는 말이지요. 성경해석에서 오늘 본문 해석도 예외가 아니에요. 이 본문 해석할 때 공식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그 영광.
왜? 선지자들이 그렇게 해석을 했거든요. 예수님의 고난과 더불어서 뭐가 날라 가는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불 심판 받아야 돼요.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보면,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지금 야구경기 한창인데, 투 아웃 투 스리 풀 카운트 상태에서 스트라이크 공 한 개만 더 넣으면 되는데 그 때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져 보세요. ‘공 한 개만 더 던지면 그 때 유황불 오지.’
한 달 뒤에 결혼식인데 이틀 전에 불 심판 와버리면 내 포부와 기대가 뭐가 돼요? 베드로후서 3장에서는 마지막 때 지구, 그 체질이 다 녹아지는데 그게 바로 이 땅에 미리 당겨온 영광이라고 합니다. 세상영광을 부수는 것이 독생자의 영광이고 주님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눈, 우리가 본다는 그것이 문제에요. 우리는 나 잘되는 것을 보는데,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보는데 정작 우리가 봐야 될 마음의 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를 봐야 돼요.
십자가를 바라볼 때, ‘아, 세상은 벌써 끝이구나. 끝났을 때 끝이 아니고 이미 주께서 십자가 질 때 모든 인간은 산 인간이 없고 다 죽은 인간이고 이 땅은 인간과 죄와 더불어서 다 싹쓸이 심판당하는 것은 속이 다 시원한 행위를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셨구나.’라고 우리가 이것을 비밀로 받아들여야 돼요. 이사야 6장에 보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주께서 이 말씀대로 자기 백성을 찾아가는데 찾는 방법이 뭐냐? 자기 백성에게 이 비밀을 집어넣어주면서 “너는 내 백성이다.” 할 때 그 내 백성을 찾아내는 방식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그러니까 내 백성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지 그 말이지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나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세상 영광을 무가치한 것으로, 허무한 것으로 빼앗기는 경험을 가지신다면 여러분은 성도입니다. 목사자격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의 고난과 영광이라는 공식의 자격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그 세상영광은 예수님의 고난을 유발시킨 바이러스입니다. 우리가 세상영광에 도취되어서 정신없을 때 “나 이 정도로 성공했어.”라고 그 영광에 도취되고 좋다고 할 때 거기서 뭐가 배려되지 않는가?
우리가 오염되었고, 더럽고, 추하다는 자기 주제파악이 배려되지 않고, 감안되지 않는 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은 여러분이 마음껏 써야 돼요. 자, 이제부터 이상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주신 것은 마음대로 써야 돼요. 아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얼른 헤어져야 돼요. 이상한 소리 시작한다고 했지요.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재산 가진 자는 아무리 써도 다 못 다 쓰고, 또 “임아, 강을 건너지 마오.” 그런 까불거리는 소리 하지 마시고, 아내와 재미나게 살아봤자 언제 마음 바뀌어서 뒤틀릴지 모르니 간다고 하거든 보내라는 겁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는 것, 남편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는 것, 그 이유가 나옵니다. 왜? 비밀인데 그 비밀은 여러분에게는 이야기할게요. 세상 흔적은 곧 끝나기에, 지나가기에. KTX가 시속 300킬로로 달립니다. 뛰어내리면 위험해요. 그냥 지나가는 풍경만 감상하세요. 40대 이런 풍경, 바깥 풍경 감상하고 45세 때, ‘이런 일도 또 생기네.’ 구경하시고 65세 되거든, ‘이런 일도 생기네.’ 보시고, 86세 되어서 치매 걸리거든 ‘나에게 또 이런 풍경도 생기네.’ 90이 되어서 자식들이 갖다 버리거든 ‘이런 일도 생기네.’라고 구경하세요.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어차피 지나가는 거니까. 지나가도 얼른, 후딱 지나가는 거예요. 우리는 근심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 십자가 안에 담겨 있는 비밀인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런 조로 작업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돈 한 푼 아끼지 말고 오히려 다 써버려라, 하는 사도바울의 말, 가족 관계에 연연하거나 얽매이지 말고 뭐든지 되는대로 살라는 이 사도바울의 말이 저희들에게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신속하게 사라져가는 땅 위에서 멀미까지 느끼면서 이것을 실감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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