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98강-죽은 자의 부활(고전15;42-44) 1606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6. 20. 15:19
2016-06-19 12:46:08조회 : 98         
   죽은 자의 부활 160619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죽은 자의 부활(고린도전서 15:42-4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uj1PK1gXjMA, Hit:5

 이근호 16-06-19 13:35 
죽은 자의 부활

2016년 2월 19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5:42-44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삽니다. 자기 자신을 규명할 때도 자기 눈, 자기 시선을 앞장 세우게 됩니다. 그런 시선으로 타인까지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됩니다. 이런 심정으로 사람들이 ‘자기 부활’을 기대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형체에 대한 연속적인 집념과 집착에 해당됩니다.

즉 지금의 이 몸을 부활시켜 천국에 넣어달라는 식으로 호소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부활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의 몸은 부활되지를 않습니다. 부활될 몸은 따로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부활과 인간들의 불멸욕구로서의 부활과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형체’가 전부라고 여기기에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알갱이’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닌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도마’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도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보지 않고 믿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작업의 경향은 모든 보이는 것, 그리고 보는 것에 대한 믿음을 비켜 가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는 것을 믿는 것은 곧 인간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계’란 벗어날 수 없는 끝부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설쳐대고 분석하고 결론내리는 모든 것들은 보이는 것 안에 갇혀있는 상황을 말해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의 하시는 바는 ‘육신 바꿔치기’입니다. 기존의 몸은 썩어질 몸이요, 욕된 몸이요 약한 몸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몸에 원기가 불어넣어 부활의 상태로 전환시켜 보려고 합니다.

즉 ‘몸 바꿔치기’가 없는 구원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형체’로서의 자아상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곧 개체적 구원이요 개별 구원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은 종교적 노력을 시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개별적 몸들을 몽땅, ‘썩을 몸, 욕된 몸, 연약한 몸’으로 한데 녹아버리십니다.

즉 집단적으로 동일한 처지에 있음을 알리는 식으로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이 활동하십니다. 개체적 구원에는 필히 ‘위선’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수정해내가고 교정해 나가는 방식의 구원을 시도하게 됩니다. 반면에 모두를 하나님의 ‘죽음’으로 녹아버리게 되면, 이런 상황에서 구원이란 개인이 소유할 ‘소유의 대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산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썩지 않으신 몸이신 예수님은 구원작업을 하면서 모든 것을 썩게 하시는 능력을 작렬시켜 버립니다.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이나 직업이나 환경이나 지식이나 재물이나 위치 같은 것과 상관없이 몽땅 ‘죽음’ 안에서 포괄적 해석의 대상자가 됩니다.

경쟁이란 개체적인 존재들 사이에서나 성립하는 겁니다. 신앙에 경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기존의 몸이 아닌 다른 몸으로 교체되지 아니하면 천국의 영광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로 다가오시면서 벌리시는 모든 일들은 다 ‘육신 바꿔치기’입니다. 창세기 15:2-5에 보면,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약속의 실현태로 등장하는 자식은 엘리에셀도 아니요 이스마엘도 아니요 오직 이삭입니다. 이삭은 전혀 아브라함의 혈육(사라)과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임신된 자식입니다. 이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는 일을 통해서 일짝감치 자신의 육신으로 구원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구원은 현 육신의 몸 말고 다른 특수한 몸이 생겨야 되고 그 몸에 의해서, 기존 육신의 몸을 관통해서, 기존의 몸이 품고 있는 영향권을 내부적으로 다른 영향권으로 교체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18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난 몸은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나타난 몸입니다. 그 몸은, 기존의 몸의 영향권이 죽음이요 죄요 저주인 것을 폭로시키는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자연과학과 인문학과 종교는 모두 기존의 몸을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발악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령 받은 몸에 의하면 이런 세상은 ‘종말’이요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의 몸의 영향력 행사에 의해서 기존의 몸에 부활이 일어나기에 기존의 몸들은, 연약하고, 욕되고 썩어질 몸인 것들 드러내면서 다 죽어야 마땅합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이 말은 부활을 위해서 기존의 모든 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 어떤 식으로 죽어져야 하는 몸들입니다.

레위기 17:10-11에 보면,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두 종류의 피를 구분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룰 그 몸에서 나온 피만이 죄를 사해지는 피가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인간들의 피는 그 피 앞에서 저주받을 살인자의 피가 흐르는 바가 됩니다. 첫 번 유월절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집 앞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듯이 오늘날 성도는 자기 몸이 아닌 다른 몸에서 나온 피를 증거하는 증인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부활의 영은 오늘날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기존의 몸, 썩어져야 하고 욕되고 약한 몸인 것을 고백케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께서 우리 내부에 구멍을 뚫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하시고 계심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6-19 23:14 
194강-고전 15장 42-44(죽은 자의 부활)16061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입니다. 신약성경 283페이지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부활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너무너무 친절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친절한가 하면 이렇게 친절합니다. “네 몸은 부활되지 않는다.” 이 정도로 친절해요. “예수 믿고 부활되겠다는 것, 애초에 그런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부활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무지하게 많이 설명해요. 많이 설명하니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다시 산다는 이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15장에서 계속해서 부활을 설명하면서 거기에 다른 요소까지 총동원해서 이렇게 거창하고 장황하게 설명할 이유가 인간 입장에서는 없어 보입니다.



네 몸 죽었다가 다시 산다. 얼마나 간단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이 안 된다는 겁니다. 부활에는 반드시 노선이 바뀌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내 몸 죽었다가 다시 산다면 그 노선 그대로 유지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그런 부활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적도 없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신 적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의 부활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이야기고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마지막 열망, 또는 희망이나 포부, 그런 것으로 조작해낼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종교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 수는 있지만,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 안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우리 몸이 죽었다가 산다. 그런 것은 애초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몸은 죽어야 마땅하고 부활은 예수님 몸이 부활한다, 이게 사도바울의 복음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몸이 바꿔치기, 육신 바꿔치기가 되지 아니하면 부활은 어림도 없습니다. 육신 바꿔치기가 되려면 이 몸에 대해서 일치감치 지금부터 포기를 해야 돼요. 그 바꿔치기 하는 논리와 과정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엄청나게 많이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성경 보면서,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할 이유를 당최 모르겠다는 거지요.



“네 몸이 죽지만 곧 살아.” 이렇게 간단하게 하면 될 것을 가지고 거창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겠다는 그 이유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또 한 친절하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2절에 보면,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먹고 마시자’ 하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봐서, 너의 모든 관심사는 내 몸이 어떻게 연속성을 갖는가, 죽고 나서도 내 몸이 얼마나 화려하게 재등장하느냐,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을 이 세상에서도 갖고 있었고 죽은 뒤에도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을 포기 못하고 있으니까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 몸에 대한 집착과 아집, 이 몸을 어떻게 살릴까 하는 그런 모든 시도, 그 모든 것이 부활에 대해서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다는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이 육신교체작업을 해야 되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지난시간에 했듯이 그 형체와 알갱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보고 있는 것은 전부 형체에 불과하지 알갱이는 아니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형체를 보고 있는데 보고 있는 그 형체의 끝은 뭐냐? 그냥 허무한 죽음이 인간의 영광이에요. 다 죽어버려요. 전혀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영광이 없는 것을 붙들고 어떻게 살아보자고 애쓴다는 것은 뭔가 네가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형체로서의 자아, 거울에 비추이는 내 모습, 이것에 매진하고 몰두하고 있어요. 그것을 나라로 보는 것, 동일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정작 놓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알갱이를 놓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작전이 뭐냐? 알갱이를 심어서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거지요. 오늘 본문 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우리의 몸이 죽는 것으로 끝이라면 죽기 전에 실컷 먹고 마시고 놀면 되겠네, 라고 여기는 것, 막 살면 되겠네, 그런 것이지요.



사는 것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면 완전범죄 저질러도 안 잡히면 그만이니까, 그런 식으로 막되게 살자, 또는 함부로 자기 몸을 굴리자,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거울 앞에 자기 형체가 있으니까 자기 형체만 들여다보듯이 남들을 볼 때도 형체만 보면서 그것이 남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가시적인 것인데요. 성경은 또 얼마나 친절한지, 인간이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내다보는 그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 보면, 도마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서, 나는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고 이야기했습니다.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는 것. 도마는 열 두 제자중의 하나로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발언을 하는 도마가 왜 열두제자에 포함이 되는가? 누구도 일단 도마를 따라와서 일단 도마에서 제 2의 도마로 도약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는 거예요. “나는 보지 않고서도 예수 믿어.”라는 거짓말 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솔직하자는 겁니다.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평소에 우리가 거울 앞에 선 나 자신을 나의 전부라고 보고 그런 식으로 남들의 눈에 보이는 것을 그들의 전부라고 보듯이 이러한 습관, 이런 생활방식을 인간이 무슨 수로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떻게 자기 자신을 속입니까? 그냥 살아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데요. “교인 몇 명 모였습니까?” “5천명 모입니다.” “부흥되었네요. 주께서 함께 하시는군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눈에 보이는 교인 수, 예배당 크기, “당신 요새 어떻게 삽니까?” “차 바꿨습니다.” “잘 사시네요.”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눈에 보이는 거잖아요. “너 몇 등 하는데?” “1등” 다 눈에 보이는 거잖아요. 그것에 초연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입니까? 아무도 없어요. 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가운데 도마 같은 치밀한 사람을 왜 심어놓았는가 하면, 누구도 도마가 알고 있는 범주에서 벗어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날 믿고 싶어? 제대로 믿고 싶어? 참된 믿음이 뭔지 알고 싶어? 그러면 도마를 거쳐 나와라.” ‘나는 절대로 보지 않고서는 안 믿는다.’라는 그 고집을 절대로 버리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간증집회가 다 그런 겁니다. 안수해서 병이 나았다는 것들이 다 그런 거예요. 암에 걸렸는데 안수하고 난 뒤에 암이 나았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사진 찍어봤다. 그 엑스레이 사진은 보이잖아요. 그거 보고 병이 나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서 비로소 ‘아, 나았구나.’ 하고 안심을 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보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으로 마감되는 거예요. 이러한 삶의 방식을 도마가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참 도마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 속에서 쿨렁쿨렁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도마가 대신 다 해주는 거예요. “백날 뭘 해도 나는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 우리는 요한복음 20장 29절에서 도마가 예수님한테 책망 받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듣거든요. 그걸 책망으로 듣지 마시고 이미 구원받았기에 주어지는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면 보이는 것을 전부 다 차단시키고 보이는 것을 의심하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것을 의심하시는 ‘역도마’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용어 나왔습니다. 보이는 것을 몽땅 의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보이는 것을 왜 의심해야 되는가?



그것은 개체기 때문입니다. 하나, 하나, 숫자로 매길 수가 있습니다. 귤이 세 개 있다면 1, 2, 3이 돼요. 네 개가 있다면 1, 2, 3, 4, 네 개가 됩니다. 강아지가 다섯 마리라면 1, 2, 3, 4, 5, 한 마리당 숫자를 다 꽂을 수가 있고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게 잘못이에요. 그걸 의심해야 돼요. 그게 형체입니다. 그것은 알갱이가 아닙니다.



주님은 알갱이를 심어서 새로운 형체를 끄집어낸다는 것이 부활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갱이는 모르고 자꾸 형체를 심어서 형체가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주께서는 우리를 부활에 참여시켜주지 않고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형체라 하는 것은 개체니까 숫자로 하나, 또 하나, 이렇게 대비가 가능한 형체를 어떻게 녹여버리느냐, 그 말이지요. 어떻게 이걸 갈아버리느냐는 그 말이지요.



갈아버리는 방법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해 줍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하나님께서 개별적 형체를 어떻게 집단화시키는가? 방법은, 형체에서 갖고 있던 모든 것, 학력이라든지, 재산이라든지, 건강, 키, 몸무게, 미모, 권력, 전부 다 묵사발내서 하나로 응집시킵니다. 뭐라고? 욕된 것으로. 욕해도 괜찮아요. 욕된 것으로, 썩을 것으로. 보통 사극 대사에 나오잖아요. “이 썩을 것!” 하잖아요. 욕된 것으로, 그리고 약한 것으로, 모든 것을 다 집단화시켜 녹여버립니다.



동양화에 이런 이론이 있어요. 동양화에 보면 서양화에 비해 왜 그렇게 품위가 있느냐? 모든 것을 묵으로 갈아버려요. 묵은 시커멓잖아요. 모든 것이 종말, 모든 것을 다 부정해버리고 먹물을 갈아서 화선지에 옮기면 새로운 창조가 피어납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거예요. 그런데 새로운 것들, 꽃이 있고, 강물이 있고, 선비가 나오고, 이런 것은 다 먹물에서 나온 거예요. 동일한 성질에서 나온 겁니다. 새로운 창조에요. 서양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베끼는 것이지만, 동양화는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고 하나의 네모난 종이에 반복해서 창조의 숨겨진 속성을 그림으로 표현해내는 겁니다.



무에서 유의 창조. 시간도 정지되면서 반복만 남는 영원회귀, 영겁회귀. 모든 것은 스스로 흐른다는 동양사상이 동양화에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을 먹물 화시킨다는 말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썩을 것이고, 욕된 것이고 약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형체를 가지고 어떤 알갱이를 찾을 생각을 하지 말라. 그냥 형체를 가지고 살다보면 다 죽는다는 겁니다. 그 죽음이 바로 먹물이에요. 잘났다 하지만 결국은 죽음으로 환원이 돼요.



그 죽음으로 심고 그 다음에 부활이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이 말이 뭐냐? 예수님의 죽었다가 살아난 그 부활의 능력은 어떤 식으로 발휘되고 실제화 되느냐 하면, 멀쩡한 우리를 그저 죽이는 쪽으로 부활의 능력이 작용해요. 부활의 능력을 받았다는 말은, ‘아, 이런 식으로 죽어가는구나.’라는 것을 기쁘게 인정하는 것, 그게 부활의 능력입니다. 목사가 되었는데 성령 받았다. ‘아, 목사해서 죽으라고 하는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집사나 장로도 마찬가지고, 일반회사원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에 해당되는 겁니다. 물론 그것을 아는 것은, 인식하는 것은 성도만, 성령 받은 사람만이 인식하지만.



주님은 죽으라고 성령을 주셨는데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살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를 죽이고자 할 때 그 죽음의 특징은 뭐냐? 소유이 대상이 안 됩니다. 개체는 모든 자를 위선으로 만들지만 집단구원에 있어서, 죽음 안에서 환원이 된 상태에서는 우리가 그 집단의 일원이 되기 때문에 그 집단을 소유할 수가 없어요. 믿음, 소망, 사랑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우리는 그것을 소유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겨울이 되면 눈송이가 날리잖아요. 그 많은 눈송이 중에서 나는 어느 눈송이를 맞을 것인가, 그것은 내가 선택할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는 임의의 눈송이에 피격당하고 저격당해요. 눈송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맞닥뜨린 모든 것, 장사하다 보면 손님이 오는데 그 손님 오는 것이 하나의 눈송이입니다. 이것은 임의로 와요. 계십니까, 하고 눈송이가 하나 들어오는 겁니다. 내가 기대하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요.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애를 낳을 때 어떤 애를 낳을지를 예상 못해요. 낳고 난 뒤에 아빠를 닮았네, 엄마를 닮았네, 하지만 낳기 전까지는 애가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뱃속의 애 촬영해 봐야 움직거리고 눈 비비는 대충의 모습이나 나오지 별거 안 나오잖아요. 세상에 있는 형체는 그 형체자체가 요구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형체로 보지 않고 알갱이로 보기에.



그 알갱이는 먹물처럼, 죽처럼, 죽음이라는 고요한 알갱이로 전부 다 환원시키는 작업을 신자나 불신자 가리지 않고 주께서 줄곧 해 온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한꺼번에 알기에요.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한꺼번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은 굉장히 허무해지지요. ‘인생 살면 뭐하겠나. 장사 좀 잘된다고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러니 뭐하겠나.’ 아무 의미도 없이 허무한 거예요.



사람들은 이 허무한 것을 추방시키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합니다. 그게 과학이에요. 자연과학이라고 하는데 자연과학으로 편리한 세탁기 만들고, 로봇 만들고, 백날 해도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을 가지고 고급스런 기술로 만든 새로운 차로 바꾸고, 비행기 타고, 다 해봐야 마음의 행복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과학 가지고는 안 된다 해서 인문학이 나왔어요.



과학이라는 것을 둘러싸서 인문학이 나왔는데 인문학이라는 것으로 백날 조사를 해 봐야, 소통하자, 서로 행복하자, 그런 거예요. 문제는 뭘 놓치고 있는가? 진짜 중요한 것을 놓쳐요. 그렇게 착하게 살고, 인문학 많이 하고, 바르게살기 많이 하고, 박사가 되어도 죽는다는 그 죽음을 대체 누가 해결한 것인가 말이지요.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공부한 체로 죽어버리는데? 전도서에 나오잖아요. 공부 많이 해도 죽으면 소용없다고요. 백날 해도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래서 또 만드는 것이 종교를 만들어내요. 죽고 난 뒤에 바르게 살면 나중에 상급을 받아서 천국에서 떵떵거리면서 산다. 로마의 16대 황제가 있어요. <명상록>을 지은 마르크스아우렐리우스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전쟁하면서도 <명상록>으로 썼어요. 본래의 제목이 ‘내가 나에게’라는 것인데 그 사람이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으로 일곱 가지를 제시했거든요.



여러분이 들어보면서 빠진 것이 있는지 찾아보세요. 1. 정신을 똑바로 잡고 흐트러지지 말아야 한다. 2. 만물의 이치를 꿰뚫어 봐야 한다. 3. 만물을 볼 때 어떤 목적이 있는지를 보고 살아야 된다. 4. 선량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 5. 각자 위치에서 자기의미에 충실해야 된다. 6. 천성이 요구하는 대로, 기본양심에 부응하듯이 살아야 된다. 7. 정당하되 남에게 예의를 갖춰야 된다.



빠진 것이 있습니까? 이것이 <명상록>이에요. 지금도 학계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읽어요. 이렇게 훌륭한 황제가 있느냐, 하면서. 그 황제가 예수 믿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몰라요. 그에게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악한 사람이지요. 이 사람의 이런 이야기를 소위 여유 있고 뭔가 밥이라도 먹는 사람에게 하면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해.’ 그런데 끼니도 못 잇는 사람에게 이런 소리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굶어본 적이 있느냐? 네가 황제니까 그렇게 배부른 소리 하지 네가 굶어본 적이 있느냐? 네가 하도 못살아서 차에서 연탄불 피워서 자살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느냐?”



그래서 이 사람이 훌륭하긴 하지만 뭘 자꾸 거부하느냐 하면, 종교를 거부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종교를 거부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도마의 경우 때문에. 보지 않고서는 못 믿겠다는 거예요. 왜? 내가 일곱 가지를 내세울 정도로 괜찮은 사람 같으면, 신이 그렇게 나를 그렇게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 같으면 내 인생, 내 미래,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어느 곳에 갈 것인지 하는 것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조건 때문에 나에게 물어봐야지요.



“너 어디 갈래?” 나에게 물어봐야 된다는 거예요. 나에게 물어보면 이처럼 일곱 가지를 내세울 정도로 괜찮은 양심을 갖고, 이성을 갖고 있는 사람 같으면 언제든지 협의하고 의논해서 “가만 있어보자. 나 천국 갈래요.”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한테 천국을 보여주게 되면 이런 괜찮은 양심을 가지고 얼마든지 좋은 쪽으로 갈 텐데 그걸 안 보여주었다는 말은,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믿을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이것은 사기꾼이다. 그래서 나는 사기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종교에 대해서 핍박을 하겠다고 나온 겁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이런 소리가 다 배부른 소리라고 했지요. 끼니도 거르고, 쌀 한 톨이 집에 없고, 숨도 못 쉬도록 빚쟁이에 쫓기고 있는데 이게 무슨 객쩍은 소리입니까? 그런데 “그런 명상록 다 때려치워라. 나에게 양식이나 다오. 의식주나 보장해라.”라고 하는 사람들이 명상록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어요. 그 사람은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이 인간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현미경으로 아메바를 발견했는데 아메바라는 생물은 입구가 있고 출구가 있을 뿐이에요. 먹는 기구인 입과 항문만 있을 뿐이에요. 이것이 투명하거든요. 그냥 통과하는 어떤 파이프 같은 것밖에 안돼요. 들어왔다, 나갔다,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메바를 뭐로 보는가? 생명으로 봐요. 아메바와 인간이 차이가 뭡니까? 없어요. 에너지가 들어왔다? 에너지가 나갔다. 음식물이 들어왔다. 소화하고 음식물이 밖으로 나갔다. 에너지에 의해서 그 튜브 같은 세포가 유지가 되고 빠져나올 것은 빠져나왔다. 그게 아메바에요.



아메바와 사람의 차이점이 요만큼도 없어요. 사람 사는 것이 뭐예요? 먹을 것 먹고, 쌀 것 사고 죽을 때 죽고, 그거잖아요. 아메바와 다른 점이 뭐가 있어요? 먹었다, 배부르다, 잠잤다, 자는 잠에 죽었다, 끝.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같은 사람은 “그런 소리 말고 밥이나 줘.”라고 하는 사람에게 “너는 짐승만도 못하다.”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내가 개야? 원숭이야? 인간이야. 인간이면 이렇게 살아야 해. 정의로워야 되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고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되는 이것이 인간이야.”



이게 결국 뭐냐 하면, 자연과학 하는 사람과 인문학 하는 사람이 서로 싸우는 거예요. 둘 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매몰되어서. 그것에서 못 벗어나고. 심지어 종교도 마찬가지지요. 천국이 있다, 라고 하니 이 사람들이 “그러면 보여줘.”라고 하니 “보여줄게. 여러분,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기도하면 복 받아서 재산이 늘고 눈에 보이니까 ‘아, 하나님은 계시네.’ 개척교회 하면서 한 500명, 천명 늘어나니까 ‘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구나.’ 이게 전부 다 도마같이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확인하고 싶어 하잖아요.



장사한다고 빡세게 기도하면서 “손님 오게 하옵소서.” 하거든요. 제가 얼마 전에 개업하는 집에 심방 가서 말씀 전하고 기도도 했어요. 그 때 설교가 그거였어요. “손님이 누가 오든지간에 아브라함이 되시면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고 저주를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복음 전도하기 위해서 이 가게를 만들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약간은 억지 같은 느낌도 들었는데, 거기가 좋은 것 파는 데가 아니거든요.



그러나 좋은 직장이나 좋은 가게가 어디 있어요? 다들 전부 다 아메바인데. 들어왔다, 배설했다, 그 나머지는 껍데기인데요. 결국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한 거예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자꾸 형체로 나타난 인간을 자꾸 인간이라고 하니까, 알갱이를 모르니까 껍데기를 유지하면서 그 껍데기를 가지고 천국가려고 하니까, 부활이라는 곳에 가려고 하니까 이게 틀어지는 거예요. 보지 않고서는 안 믿겠다는 그런 고집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주님은 일방적으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어요. 보는 것을 의심해야 돼요. 예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모든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이것에 일괄 포괄적으로 다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가 이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게 진리고 이게 주님이 벌이는 작업인데 우리는 자꾸 “왜 나를 섭섭하게 합니까? 제가 인간인데 왜 자꾸 저를 무시합니까?”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그렇게 없애서 한데로 다 집어넣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의미가 있어요.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여, 아무 걱정 말아요. 지나간 것, 모든 욕된 것, 썩어질 것, 그 썩어질 것으로 드러내게 하는 것, 욕된 것을 욕된 것으로 드러내게 하는 것, 약한 것을 약한 것으로 드러내는 것, 이것이 성령의 역사고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게 부활의 능력이에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육신교체작업, 육신 바꿔치기의 과정입니다.



창세기를 보게 되면 아브라함이 나오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개입할 때 이 작업을 놓치지 않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는데 그 때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창세기 15장 1, 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기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을 때에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게 아니고 친히 네 몸이 난 자가 약속의 자녀가 된다고 했어요. 그러고 난 뒤에 16장에 보니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하도 자식이 없으니까, 자기는 죽을 때 다 되었으니까, 욕된 것, 썩어질 것, 그리고 약한 육체, 이것가지고 희망이 없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은 욕된 것, 썩어진 것, 그리고 약한 것만 거울에 비취지만 그것이 전부인데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거울에 비춰보세요. 거울에 비추인 여러분의 모습 그것이 전부에요. 아무리 이모저모 따져 봐도 그것이 나의 전부에요. 그것이 전부인데 그 형체에서 알갱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끄집어내는 방법이 뭐냐? 옛날 아브라함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방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사라가 하는 말이 “여보! 우리에게 자식이 없으니까 다른 방법으로 자식을 생산합시다.” 해서 하갈이라는 여자와 아브라함이 동침해서 낳은 아이 이름이 이스마엘이에요. 그런데 그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는 상속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아브라함의 축복의 전달자, 자식은 누구냐? 아브라함이 낳은 이스마엘이 아니고, 엘리에셀도 아니고 오직 이삭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상속자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 그냥 빈손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무슨 작업을 하시려고 찾아오는 거예요. 욕된 것을 영광스러움으로 바꾸기 위해서, 약한 것을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리고 썩을 것을 영원히 썩지 않을 것으로 바꾸기 위한 작업을, 예수님 오시기 전 구약 때부터 계속해서 하나님이 출몰했다 싶으면 그 작업과 연관해서 계속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인문학이야기 했는데 인간에게는 아메바 같은 몸이 있고요, 그 주위에 자연과학이 있어요. 밥 먹고 살려면 기술 익히고, 용접하고, 실제로 땅을 파고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지요. 그러나 인문학은 “그냥 먹고만 살면 그것이 짐승이지 사람이냐? 정신을 바짝 차려서 바르게 살아야 그게 사람이지.” 몸이 중앙에 있고, 그 다음에 자연과학이 있고, 그 위에 인문학이 있고, 또 그 인문학 위에, 죽어서 계속 살려고 종교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 롤 케이크 구조입니다. 제가 새로 지어낸 거예요. 롤 케이크 구조에요. 이 롤 케이크 구조의 그 몸을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기존의 그 롤 케이크의 구조가 뭐냐? ‘내가 돈 많이 벌면 남을 구제해야지.’ 돈 많이 벌면, 이것은 자연과학이거든요. 돈 많이 벌어서 착한 일 한다, 이것은 인문학에 해당되고 종교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몸은 그냥 몸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고 와이파이에요. 자기영향권을 포괄해서 그 가운데 자기가 있어요.



제가 2년 전에 미국에 갔을 때……, 이것은 제가 오는 9월에 미국 간다고 간접 광고하는 셈입니다. 2년 전에 미국 갔을 때 생소하게 느낀 점이 딱 하나 있었어요. 미국 가니까 외국인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게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백인이 많고 라틴계도 많이 보였어요. ‘미 8군 근처도 아닌데 외국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그 이유가 나의 와이파이, 내 영향권을 그대로 가지고 가서 미국이 내 나라인 것처럼 착각한 그것, 인습을 그대로 가져간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롤케이크 구조의 몸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릴을 만들어서 그 중심을 뚫어버려요. 아주 터널을 파버려요. 터널을 파는데 그 터널 파는 것이 오늘 본문 44절에 나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것이 마태복음 1장에 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예수님 나름대로의 와이파이를 갖고 오시는 거예요. 이미 인간 나름대로 롤 케이크 같은 층을 이루면서 구조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아메바와 같이 맨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늙어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다가 죽으면 그만이고, 그것밖에 없으면서 그것을 반복하는 이 몸, 이것은 욕된 것이고, 썩어진 것이고, 약한 것이에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육신 바꿔치기를 해야 돼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개입하는 모든 작업의 내용, 육신 바꿔치기에요. 그냥 하나님이 나타났다, 믿어라, 그거 아닙니다. “내가 그 몸 가만 안 둘 거야. 바꿔치기 할 거야.” “어떻게요?” “네 몸이 어떻게 보이느냐?” “참 멋있게 보입니다.” “그것은 형체고 알갱이를 만들 것이다.” “그 알갱이가 뭡니까?” “먹물로, 죽음으로 만들어버리겠다.” 그 죽은 것을 가지고 그냥 버리지 않아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죠!



아메바처럼 그저 먹고 사는 것뿐인 몸, 그러다가 늙어 죽는 그것이 우리 보기에는 참 허무하지만 허무한 것을 가지고, 약한 것을 가지고, 욕된 것을 가지고, 썩어질 것을 가지고 그것을 심어버리면 거기서 놀라운 새로운 몸으로 바꿔치기가 됩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의 몸이 부활 안돼요. 우리의 몸은 죽어야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께서 지금도 바빠요. 되게 바빠요. 왜? 죽인다고. 그냥 죽이면 소용없지요. 지옥가지요.



어떻게 죽이는가? 너는 죽어야 마땅하고 일체 모든 영광은 다 부정되어야 하는 영광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우리를 지금도 부지런히 죽여가고 계십니다. 내가 착하게 살았던 것, 바르게 살았던 것, 층층이 살아온 그 인문학적 교양과 윤리, 아우렐리우스의 그 인생지침, 그런 것은 기존의 몸의 더러움을 감추기 위한 형체의 위선적인 아우라에 불과하거든요. 그게 썩어질 영광이 됩니다. 교회 나오는 것도 썩어질 영광 기대하면서 나오는 겁니다. 그거 위선이에요.



개체구원에서 집단구원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집단구원이 되게 되면, 먹물이 되게 되면 먹물과 먹물, 알갱이와 알갱이사이에는 뭐가 없는가? 경쟁이 없어요. 사람이 왜 고민하게 되고 왜 사람이 몸을 피곤하게 하면서까지 힘들게 살아가는가? 이것은 경쟁에서 져서는 안 된다는 기존세계에서의 후습이 계속 이 아메바 속에 스며들어서 그래요. ‘지면 안 돼. 지면 나답지 않아. 나는 이겨야 돼.’ 도대체 뭘 위한 이김입니까? 누굴 위한 승리에요?



자기 죽음에 지세요. 그게 승리입니다. 자기 죽음에 져버리는 거예요. 오늘도 열심히 죽자, 파이팅! 죽자! 이렇게 가게에 눈송이 하나 임의로 주께서 집어넣은 손님이 오게 되면, ‘이 손님 때문에 내가 또 죽습니다.’ 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내가 약하고, 천하고, 부끄럽고, 욕되고, 썩어진다는 것을 매일같이 자백하고 고백하는 기쁨이거든요. 이러한 능력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될 수 없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우리 육신이 교체가 되니까.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거든요. 그러면 이 육체의 죽음의 의미는 뭐냐? 성령으로 태어날 예수님 앞에서 애초부터 우리가 구원될 수 없는 입장임을 늘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업이 가시적인 역사적인 사건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게 레위기 17장에 나오는데 이게 좀 어려워요. 레위기 17장에서 피를 흘리게 되면 죄로 여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생명은 피에 있다고 하고, 피가 죄를 속한다고 해서 피에 강조점을 둬요. 설명이 되어야 하는데 뭐냐? 피는 인간의 육체 안에 들어 있어야 돼요. 그런데 피가 바깥으로 나오면 죽음이 되는 겁니다. 절대로 바깥에 피를 내면 안돼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피가 바깥에 유일하게 나와야 될 분만 나오고 나머지 바깥에 나오는 피는 저주스럽다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줄 때 제사법을 줬습니다. 제사할 때 흠 없는 양을 잡아야 돼요. 흠 없는 양은 지정된 거예요. 아무 양이 아니라 흠 없는 어린양을 잡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이 게재된 상태에서 그 피가 양 안에서 양 밖으로 나오고, 그 피를 바름으로서 죄용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그 약속 안에 기존의 몸과 바꿔치기 해야 될 몸이 같이 삽입되어 있다는 것, 또는 삽입시킨다는 것, 언젠가는 삽입시킨다는 신호, 약속이 구약 때부터 이스라엘에게 특수하게 주어졌고 그것이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 보편의 복음으로서 듣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겁니다.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든 죄 사함, 죄 용서는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처럼 되려면 죄가 먼저 성립이 되어야 해요. 민수기 32장 23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그 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너희의 죄가 너희를 찾아낸다. 아, 완전범죄라고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 무서운 이야기에요.



너희의 죄가 너희를 찾아낼 것이다. 경찰서에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고 너의 죄가, 네가 아무리 피해도 너를 찾아낼 것이다. 왜? 너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죄 안에 있기에 죄가 “죄인 여기 있습니다.”하고 끄집어 낼 거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거예요. 죄 안 지었다고 하면 안돼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주께서 죄를 끄집어내시는 이유가, 죄를 끄집어내진 그 죄인이 죄를 씻을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우리의 육신은 왜 연약해야 되고, 왜 썩어야 되고, 왜 그렇게 죽어야 되는 몸인가? 그 원인을 주께서 부여하는데 그게 죄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들은 말하기를, 형체만 보면서 그 형체만 보기에 “나는 죄 아닙니다.” 하거든요. 그럴 때 주님께서는 약속을 막 퍼부어줘요. 하나님의 율법을 줍니다. 율법을 주면서 “네가 죄 아니라고? 봐라. 죄 맞잖아.” 죄가 맞으니까 너는 결국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살인자의 피가 네 속에 흐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살인자의 피가 네 속에 흐르고 있으니까, 화내고 분노하고 그 분노가 하늘까지 닿으니까 네가 가인의 후손이 된다는 겁니다. 그 죄를 까발리는 것은 어떤 몸도 그 몸 자체로 다른 몸을 살릴 수가 없어요. 다른 몸이 준비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태어나서 새로운 몸을 준비했습니다. 그 새로운 몸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의 피거든요. 그 어린양의 피가 왜 중요한가 하면,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몸이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 몸이라 하는 것은, 기존에 우리가 거울 보면서 내 몸이라고 하는 그 내 몸은 예수님이 규정한 그 먹물, 죽음 앞에 집단적으로 녹아져야 돼요. 허물어져야 돼요. 잘났다, 못났다, 할 수가 없어요. 전부 다 똑같은 존재에요. 모든 인간은 죄지을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몸입니다.



이것을 기존의 신자들은 몰라요. 기존의 신자들은 개체를 주장합니다. 지옥 간 부자가 죽기 전에 하던 부자행세를 못 버리고, 지옥에 가서도 기어이 거지 나사로를 통해서 물 한 방울만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세요. 인간의 기억이란 모둠기억이에요. 모둠회처럼. 모든 기억이 모아진 그것이 인간의 자아거든요. 그 버릇, 개 안줍니다. 지옥에 가도 그 버릇 그대로 있거든요. 그것 때문에 거지 나사로가 얼마나 구박을 받았겠어요? 부자를 향하여, “너는 약하고 너는 죽을 몸이고 너는 썩어질 몸이고 욕먹어도 마땅한 욕된 몸이다.” 그렇게 백날 해도 “나는 부자다. 나는 부자다.” 이걸로 버티는 거예요. 왜? 개체니까.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거지 나사로는 집단이니까, “너나 나나 잘난 것 없어.”



죽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있어도 없는 존재에요. 어떤 분이 저에게 상담하기를, “남을 볼 때 어떻게 보면 됩니까?” 제가 그랬어요. “있어도 없는 존재로 보세요. 빗자루처럼.” 빗자루 하나 서 있다고 보시면 돼요. 빗자루가 방위 하다가 여자 네 명 건드리든 말든, 그것은 그냥 빗자루가 그렇게 한 거예요. 그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비자금마련 했다는 그것도 빗자루가 비자금마련 한 거예요. 검사인데 돈을 받았다는 그것도 그냥 빗자루에요.



결국 다 죽음으로 환원된다니까요. 아메바라니까요, 아메바. 아무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그것, 그게 바로 우리가 몰랐던 알갱이라는 사실이에요. 의심하는 그 도마가 알갱이에요. 의심하는 도마 심어서 부활의 도마로 끄집어내는 이 작업이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작업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피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요.



따라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자기 몸에는 썩어질 살인자의 피가 흐르지만 바깥에는 어린양의 피를, 출애굽 할 때의 유월절처럼 그 피를 발라버린 거예요. 나를 살리는 피는, 내 죄를 사하는 피는 내 안에서 흐르는 내 피가 아니라 내 바깥에 증거 하듯이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되는 겁니다. 내 썩어질 피 말고 바깥에 발린 피가, 어린양의 피가 나를 살린다. 이미 영광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의 영광, 예수님처럼 성령 받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성령 받고 난 뒤에 똑같이 아버지가 그런 작업을 했기 때문에. “나는 십자가에 죽는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죽자. 죽으면 그리스도의 피가 바깥에서 나의 증인될 것이다.” 이게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복음입니다. 이걸 모르고 기존의 거울에 비추이는 내 몸이 어떻게 부활할까? 예수 믿을까? 백날 믿어봐야 그것은 인문학입니다. 그 인문학은 썩어질 몸에서, 자기 썩어질 영광을 붙들기 위한 것이고 악마가 결국 그렇게 만들어요.



그 범위를, 그 힘에서 벗어나려면 성령이 와야 되지 성령 받지 않고서는, ‘자기 잘났다’ 하고 남하고 경쟁에 나설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알갱이를 심어서 부활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 지나간 거예요. 그러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하는 작업을 모르고 내가 주님께 갖다 바친 것, 봉사한 것, 바르게 산 것, 정신 차린 것,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만 가지고 복 받으려고, 내 영광 챙기려고 했습니다. 이런 부질없는 짓, 그 자체가 죄고 썩어질 것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