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강-고전 15장 29-34(날마다 죽노라)16060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29-34절입니다. 신약성경 282페이지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오늘 본문 가지고도 충분하게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34절 끝에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있고, 이렇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두 종류 사이에는 각기 세상을 보는 관점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따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따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은 두 그룹 사이에 서로 대화가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감히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는 내용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리 기웃거려도 무슨 동네의 이야기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 굉장히 자부심을 가져야 되고 “웃샤!” 성공했다 하는 고마움, 감사함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다 통하는 이야기를 했다면 그것은 본인도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중이라, 이렇게 판정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부류에 속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그 시작점을 하나님을 모르는 자로부터 시작해 나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몰랐을 때, 하나님이 있으나마나할 그 때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무엇이며,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무엇이며,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무엇이며, 그들이 생각하는 삶이 무엇이며, 인생의 보람이 무엇인가, 그런 것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동조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부터 우리가 출발을 해야 돼요.
제가 그렇게 출발하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걸로 출발합니까?”라고 하는데 그 이야기에 나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그 꼴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똑같은데 이제 와서 “음? 나는 모르겠다.”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과 동일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나는 빠지겠습니다.”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육이 있는 이상은 매일같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남에게 들을 필요도 없어요. 내 육신에서 똑같이 폭발합니다. 분출되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하나님을 아는 자의 사고방식을 같이 넣어주게 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알고 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이야기도 알고, 둘 다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언급을 할 때 어떤 티가 난다는 말인가? “너 하나님 아는 자 맞지?”라고 티가 날 때 사도바울의 생각과 동감하면 되거든요. 같은 느낌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굉장히 심각합니다. 오늘 본문내용을 30절부터 죽 보게 되면, “위험을 무릎쓰리요.” 그 다음에 32절에 보면, “맹수와 더불어 싸웠으면.” 또 31절에, “날마다 죽노라.” 그리고 33절에, “속지 말라.” 그 다음에 “악한 동무들은.”
상당히 뭔가 비장한 자세를 가지고 말을 하고 있어요. 누가요? 하나님을 아는 사도가. 자기 속을 편하게 이야기하면 될 텐데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비장함을 표현하는 단어들로 엮어서 우리에게 줍니다. “너도 나처럼 비장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느냐?”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생활을 말하는데 이것은 교회생활의 비장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실생활의 비장함을 이야기해요. 교회에서 자기들끼리 이런 저런 회의, 제직회도 하고,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세상 살아갈 때 이런 비장함, 위험을 무릅쓴다, 맹수와 싸운다, 날마다 죽는다, 속지 말라, 이런 비장함을 사도바울 나는 느끼는데 여러분도 같이 느끼십니까?” 이렇게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조용한데? 별일 없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러면 뭐가 문제냐 하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필히 구비되어야 하고 갖춰야 될 현실이라는 그 개념과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개념이 뭔가 다르다는 낌새가 보이는 겁니다.
제가 설교초반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가에 대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으면 당연히 아는 거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육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안 믿는 쪽으로 성질을 발휘하기 때문에 알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막상 제대로 하나님을 아는 사도바울에게 어떤 언질이 오고 어떤 말을 듣게 되면, ‘뭐야? 사도바울이 사는 시대와 우리시대가 달라도 많이 다른 모양이다.’ 이렇게 자기 맘대로 이해를 해버려요. 똑같아요. 많이 다른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면 그렇게 구상된 그 현실감각, 그 현실감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티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경말씀을 보셔야 되는 이유가 성경말씀과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살아가는 사고방식과 갭이 있어요. 뭔가 끊어져 있어요. 그래서 성경보면서도 그렇게 심각성을 못 느끼는 겁니다. 그 비장함을.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려고 하잖아요. 사도는 이 세대를 통과하려고 합니다. 나그네니까, 우리의 고향은 따로 있으니까 사도바울은 훌훌 털어버리고 통과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어디에 죽치고 살까, 라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되어 있어요.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우리 어디서 살지?”라고 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넓고 복잡한 세상에 터 잡고, 애 낳고, 백 살까지 한 번 살아보세, 라고 터 잡는 일에 관심이 있지, “여보! 우리 결혼했으니 훌쩍 떠납시다.” 그런 식으로 신혼을 시작하는 젊은이는……, 아마 솔다 외에는 별로 없을 것 같아요. 빨리 엉덩이 털고 떠나고 싶은 사람, 아, 그런 젊은이가 있을까요? 70대가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어서 20대가 일하고 거할 자리가 없다고 데모나 해대지, 그냥 세상을 통과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것, KTX 300킬로 이상 달릴 때 어떤 시원함을 느껴야 하는데 인생 너무 빨리 간다고 어지럽다고 하면 뭔가 문제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쪽에 속한 사도바울과 왜 대화가 안돼요? 대화가 안 되니까 성경자체가 보기 싫은 거예요. 내가 죽치고 사는데 별로 도움이 안돼요. 통과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데 죽치고 사는 데는 이 성경말씀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죽치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그게 축복이라고 간주할 때 근본적으로 그 사람이 보는 현실관은 사도의 현실관과 다릅니다. 지금 엉뚱한 현실을 조장해 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가 보는 현실관은 뭐냐? 우리가 살다보면 죽겠지, 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여서 죽는 것이지 살다보면 맥 빠져 죽는 것이 아니에요. 날마다 주께서는 죽이시는 겁니다. 뭐로? 말씀으로 죽이고 율법으로 죽이고, 날마다 죽이는 거예요. 죽음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한 번 죽으면 끝인 죽음이 있는 반면에 반복해서 죽는 죽음이 따로 있어요. 반복해서 죽는 죽음은 그 몸이 특수한 몸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이상한 말을 해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람 죽으면 끝인데 어떻게 날마다 죽는가? 내 몸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몸하고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몸이 달라요. 몸이 다르니까 생각도 다르고 현실을 보는 눈도 다르고 다 다른 겁니다. 교회 와서 복 받겠다고 하는 이것, 교회 와서 복 받겠다는 그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살려주세요.” Help me, 살려주세요,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살려달라는 그 사람에게 상담하기를 “하나님이 죽으시는 그 죽음에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추어라.” 호수에 배를 띄워놓았는데 호수에 파도가 일렁이게 되면 그 뱃전에 물결이 치듯이 이 세상은 계속해서 죽음의 세력에 의해서 침몰 당하게 되어 있어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바닷가에 늘 쌓이는 오물 같아서 계속 해변 가로 밀리는 것이 죽음의 힘이고 본질입니다.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죽음이라는 속성이 자기증명을 하기 위해서 모든 인간을 하나 둘씩 죽여 버립니다.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죽고 싶더라도 죽고 살고 싶더라도 죽게 되어 있어요. 사적죽음이 죽음개념의 전부가 아니에요. 범주를 넓혀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분명히 살아 있을 때 예수님 만났지요. 그 순간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 순간이 제대로 죽은 순간이었다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이런 고백이 나올 때 그 고백이 나오는 사도의 몸은 전에 있던 자아소유의 몸이 아니고 예수님 소유의 몸이 되어서 예수님의 위력,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을 이 시대에 현재화시키는, 실재 화시키는 작업에 사도바울이 지금 동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아는 부류야? 그렇다면 내 말 알아듣겠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반복해서 죽는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날마다 나에 대해서는 패배하고 그 패배한 나를 예수님의 승리로서 또다시 새로운 날을 맞이하고 새아침, 새 새벽을 맞이해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내일되면 그렇게 해서 내 자아는 또 실패해서 죄로 인하여 죽게 되지만 주께서는 그런 죄인을 또 뜻이 있으면 살려낼 것이고.”
이렇게 해서 내 삶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현재 살아 있는 분으로서 활동하고 있음을 늙어가는 우리 몸을 통해서 마음껏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 죽는가, 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사도바울은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너희가 정말 하나님을 아는 부류라면 “살고자 하는 자를 왜 하나님은 죽이십니까? 살고 싶은데 왜 죽이십니까?”라는 질문부터 시작되어야 해요.
왜 그 질문이 나는 그 시작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부류가 매일 스스로 자기에게 하는 질문이거든요. ‘오늘도 또 하루 살아야 될 것인데. 오늘도 살아야 될 것인데.’ 사람마다 직업이 다 달라요. 봉제하는 사람도 있고, 교사도 있고, 목사도 있고, 농사짓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수십 년을 살다 보면, 그 직업에 맞춤인간이 되어버려요. 봉제공장에 있는 사람은 그 봉제일로 자기의 주된 시간을 보내다 보니까 봉제에 적합한 인간형으로 수정이 되는 겁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에 적합한 사람이 돼요. 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생각조차 농사에 적합한 사람. 직업이 2만 가지라고 하는데 그 2만 가지의 직업 따라서 사람도 종류대로 2만 가지가 다 다르지요. 그 사람이 하는 일을 통해서 맞춤인간형이 따로따로 생산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쪽인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그걸 통합해서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네가 하는 일에 적합한 인간형으로 달라졌지만 그걸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뭐냐? 다 살려고 하는 짓이에요.
이 몸 가지고 어떻게 하면 환경에 적응해서, 직장에 적응해서 살아볼까, 그 살아볼까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는 똑같은 자아상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살아볼까?’ 할 때 그 살아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말하는 생명과는 터무니없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근원적으로 잘못보고 있다는 거예요. 세상 자체를 지금 잘못 읽고 있고 또 보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볼까, 에 억지춘향으로 맞춰서 세상을 보는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데 얼마나 유리할까, 그걸 전제로 해서 세상을 재편성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과학이에요. 잘못된 사고방식이고 상식입니다. 상식이라는 그것이 잘못된 상식이에요. 사도바울은 예수님만나고 난 뒤에 ‘아하, 내가 살았다, 죽었다, 이걸 반대로 이해했구나. 내가 살고자 하는 이것이 곧 죽어야 될 이유가 되고 내가 죽어도 괜찮다고 하는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우리에게 생명을 받은 상태에서야 나오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기존에 고집 부리던 그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구나.’라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를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이유는 뭐냐?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이 의미 있는 그 그대상자를 죽여 버린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무의미한 존재들이 의미 있는, 하나님 아버지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독생자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의미는 어디서 쏟아져 나와야 하느냐 하면, 그 의미 있게 죽은 그 죽음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분출되어야 되고 새롭게 제시되고 제공되어야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것이 ‘십자가로부터’에요. 십자가로부터 모든 것은 다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를 모르게 되면, ‘나부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요. 신을 인정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십자가를 아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돼요. 십자가를 아는 자가 예수님을 아는 자가 되고 예수님을 아는 자가 예수님만 아시는 그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왜 죽이는가? 진리를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죽이는 겁니다. 진리를 모르거든 죽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설교자가 설교할 때 제일 신경 쓰는 것은 이 설교가 본문의 진리를 드러내느냐, 이게 관건이에요. 진리를 드러내지 않고 진리를 훼방하는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설교하면서, 목회하면서 지옥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진리는 본인이 진리화해서 동반해서 같이 수정되어야 되거든요.
이 말이 어려운데, 사람이 자기가 살고자 한다면 주변의 환경을 미리 예측을 해버려요. 그러면 예측된 그것은 그 자리에 있다고 보고 또 나도 그냥 그 자리에 있으니까 내가 그 자리에 있는 환경을 이용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엄마들이 애 키울 때 애는 엄마 말 잘 들으니까 시키는 대로 할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애가 커가면서 애와 엄마가 부딪히면서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수정하기 마련입니다. 일방적으로 한쪽이 한쪽을 수정시키는 것이 아니고 말 안 듣는 애로 말미암아 엄마 본인이 ‘아,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았구나.’ 하고 수정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잘 한다고 말은 하는데 정작 말은 하면서도 이 육은 감당이 안 되어서 말 따로, 육신의 욕망 따로, 이렇게 따로 놀아요. 이걸 누가 수정합니까? 그 욕심에 시달리고 부대끼는 환경을 우리한테 맞닥뜨리게 함으로써 내가 살고자 한 것 때문에 남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주님이 얼마나 아파한다는 것을 깨닫는 가운데서 비로소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는 거예요.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뭔가 자꾸 토해놓는데 그 토해놓는 것들이 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천국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미리 다 토해놓게 하는 겁니다. 욱, 하고 토해놓는 토사물을 통해서 네 안에 이런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살핌으로서 ‘아, 이런 것이 있으니 이런 것이 나로 하여금 천국 못 가게 하는구나.’ 확인 차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 토해놓은 토사물의 역할을 위해서 주께서 우리의 등을 두드려야 되거든요. 두드려야 뭔가 토하니까. 그 두드리는 작업이 예수님의 산상설교입니다.
마태복음 5장 29절, 30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의 등을 두드려 보겠습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제가 아까 인간의 몸, 인간의 정신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직업, 자기가 하는 일에 맞춤이 되도록 수십 년 동안 단련되어서 합당하게 된 거거든요. 결국 자랑은 뭐냐? 내가 이만큼 노력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실적을 냈습니다, 개척교회를 해서 교인 몇 명을 모았고, 설교나 강의를 이만큼 했습니다, 그런 것을 내놓잖아요.
그것이 우리 몸을 지옥으로 안 보냅니까? 바로 그게, 우리가 자랑이라고 내놓는 그것이 우리의 몸을 지옥으로 가지 않게 하는 요인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우리로 하여금 뭔가 하나님의 진리를 감추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거예요. 진리도 모르면서 천국 가려는 이 더러운 심보를 날마다 살면서 토해놓게 하는 겁니다. 주님에 의해서 천국 가는 것은 방법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방법은 단호히 거절하고 내가 올린 그 실적을 내밀면서 그것가지고 천국 넣어달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자식 이만큼 잘 키웠습니다.” 또 “상하이 공원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도시락폭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봉창 의사가 산상설교대로 살았습니까? 마음으로 간음 안했습니까? 형제에게 욕 안했습니까? 예수님이 진리라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도 진리에요. 그 진리를 모르게 되면 이 땅의 순군선열이 되어도 지옥가요. 내일이면 순국선열을 기리는 현충일인데 그 순국선열이 되어도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이 현실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상식이거든요. 유구한 5천년역사가 아닙니다. 천년이 하루 같아요. 반만년 역사도 의미 없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인간은 어떤 집단이 되고 수천수만이 모여도, 수만 명의 교회가 오더라도 그게 무의미한 거예요. 무의미한자들의 집단이 의미 있는 예수님을 살해한 겁니다. 그 살해한 것을 되받아 와야 그게 구원의 능력이 돼요. 그 앞에서, 의미 있는 분 앞에서 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고백을 해야 그게 나에게 구원의 능력이 된다고요.
매일같이 진리를 못 찾으면, 달리 이야기해서 매일 같이 자기가 종사하는 그 업 속에서 날마다 죽이시는 그것을 못 찾으면, 달리 이야기하면, 날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산다는 의식이 없으면……. 포도농사 지으면서 ‘날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 포도 농사짓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없으면……. 지금 포도농사 지으면서 포도를 맹수로 봐야 돼요. 맹수와 싸우는 거예요. 그리고 포도농사 지으면서 속으면 안돼요. 이 포도농사의 작황에 좋은 것에 속아서는 안돼요. 목회하는 사람은 이 교인수가 많은 것에 속아 넘어가면 안돼요.
이처럼 머물려고 하지 말고 통과하는 중에 우리는 그러한 느낌을 공유해서 받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할 때 진리를 모른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너를 죽일 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갈구어서 죽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시면 성경해석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됩니다. 저는 그냥 칼빈신학자체를 이단으로 봐요. 칼빈주의, 개혁주의신학을 이단으로 간주하는 이유가 개인구원과 관련되어 있어요.
흔히 한국에서 말하는 신천지, 여호와의 증인, 뭐니뭐니 해도 그 이단들, 이단에서 나온 이단들, 천주교도 마찬가지고요, 그 모든 이단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특징이 딱 하나로 뭉쳐집니다. 개인구원론입니다. 개인구원은 악마가 주로 하는 짓이에요. “당신은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이게 모든 이단들의 시작점, 시발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절중의 하나가 그것과 연관성을 짓고 있어요. 성경은 개인구원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러면 개인구원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요한계시록 14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라고 되어 있어요. 포도주틀. 이걸 오늘날 한국의 토속적 환경으로 달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도가니에 막걸 리가 있다는 그 말입니다. 막걸리 통에 막걸 리가 들어있는 거예요. 여러분은 술을 자신 적이 없기에 막걸리 이야기를 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막걸리는 막걸리 통에 들어 있잖아요. 뽀글뽀글 올라오는 그 막걸리, 옛날에 집에서 술 담그면 표면에서 뽀글뽀글 막 올라와요. 할아버지 계실 때 담그는 것 많이 봤어요. 뽀글뽀글 올라오는 그것이 전부다 하나님의 진노의 거품이라는 말입니다. 개인구원은 애초부터 성사될 수 없는 이유가 인간 하나하나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하나의 거품이에요. <생명의 신호>라는 책 보셨습니까? 시커먼 배경을 하고 물방울 하나 보이지요. 최 지영 씨가 순간촬영을 해서 올린 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 14장 19절, 뽀글뽀글 거품, 술을 담아놓은 술 도가니에 올라오는 그 거품, 그게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에요. 집단 심판이에요, 집단심판.
그 진노가 어디서 오는가? 그 출처가 있어요.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보면, 진노의 출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언약궤는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하나입니다. 하늘에 언약궤가 보이는데 그 하늘에서 뭐가 내려오는가? 번개, 음성, 뇌성, 지진, 우박, 전부 다 이 세상을 작살내는 심판의 도구들, 심판의 방식들입니다.
이걸 아까 이야기한 요한계시록 14장 19절과 11장 19절, 둘 다 19절인데 이 둘 다를 조인트하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사람은 저주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그 언약을 누가 갖고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이 갖고 있었고 이스라엘이 실패한 언약을, 이스라엘이 고대하는 메시아가 오셨는데 그 메시아인 예수님이 오셔서 열두 제자에게 이야기하기를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이것은 너희와 맺는 새 언약이다.”
그러면 새 언약의 효과가 뭐냐? 그것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이야기하기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음부의 권세가, 죽음의 권세, 심판의 권세, 죄의 권세, 악마의 권세, 율법의 권세, 저주의 권세가 너를 누르지 못할 것이다.” 결단코 죄에 합당한 진노와 심판은 이 교회는 비켜갈 것이다. 네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세우는 교회의 원칙을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날 때 이것이 바로 그동안 숨겨진 악마가 그토록 예수님을 훼방하려고 했던 그 본색이라는 말이지요.
마귀가, 제발 예수님께서 이 일만은 하지 않기를 원한 거지요. 그게 악마가 원래부터, 처음부터 노렸던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베드로가 하는 소리가 “예수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나서서 싸워서 예수님을 안 다치게 하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하는 소리가, “베드로야” 하지 않고 “사탄아, 물러가라.”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너와 똑같은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 술 도가니의 막걸리처럼 똑같은 사고방식. “죽으시면 안 됩니다. 나는 죽은 메시아 믿지 않고 산 메시아, 영웅적인 메시아를 믿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는 그것이 기어이 악마가 그 사람을 지옥으로 같이 데리고 가기 위해서 발악을 하고 있을 때 그런 고백이 나와요.
주께서는 사정없이 이야기합니다.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세상전체가 악마의 속임수에 의한 술 도가니처럼 뽀글뽀글 거품을 내면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 형편의 사실을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증거 하는가? 본문 29절에 보면,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 말을 언급한 것은 지금 사도바울이 알고 있는 부활의 능력과 사도바울처럼 그런 능력이 없는 자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부류에서 그냥 기독교 흉내나 내고,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척이나 하고 종교생활이나 하면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기존의 육적인 본성, 마귀에게 잡힌 본성을 기독교색채를 가지고 어떤 티를 내는가? 그 예를 든 것이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 받는 거예요.
그런 문화들이 있었어요. 어떻게 하는가? 죽은 자의 관이 여기 있으면 그 밑에 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요. 그 공간에 산 사람, 죽은 자의 후손이나 배우자가 들어가요. 죽은 사람은 예수도 모르고 세례도 안 받고 죽었어요. 그게 안타까우니까 예수 믿는 다른 사람이 들어가고 목사는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러면 죽은 사람은 죽은 채로 말을 못하니까 대신 해서 산 사람이 “예”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믿습니까?” “예” 그렇게 한 다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이미 세례를 받았어요. 자기는 세례 받았지만 예수도 안 믿고 세례도 안 받은 다른 친척이 죽었으니까 죽은 자를 위해서 대신 세례 받으면 효과 있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주님이 친히 찾아와서 건지는 그 방식인데 사람들은 본인 쪽에서 본인의 종교행위를 가지고 찾아가는 방식이에요. 그러면 뭐만 계속 기억이 되고 뭐만 가치가 되느냐 하면, 내가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그 실적, 업적을 계속 빠트리지 않고 고이고이 간직해야 돼요.
요즘말로 하면 내가 십일조를 얼마를 했고 몇 년 동안 교회에 출석했고, 예배당 지을 때 땅 얼마 냈고, 그걸 계속 간직해 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말로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말로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출발을 개인구원부터 출발해요. 개인구원부터 출발하니까,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내 친척, 내 남편, 아내, 내 자식을 같이 하늘나라로 데려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게 개인구원의 사고방식이 계속 번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내 신앙가지고 남까지 구원하고자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요. 그렇게 떠오른 그것이 안 믿는 사람들의 종교의식이거든요. 종교 없는 사람들은 없어요. 종교라 하는 것은 미래까지 시간을 연결하기 때문에 종교의식은 다 있어요. 그런 종교인들이 고객이 되고 장사라 하는 것은 결국 고객이 왕입니다. 고객들을 끌어 모으면 교회는 되는 거지요. 운영이 되는 겁니다. 장사가 되고, 사업이 되고, 사업이 잘 되면 나중에 노후대책까지 보장이 되는 겁니다.
목회 뭐 있냐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되는데요. 천국 가지고 구라치고, 공갈쳐서 “천국 가려면 뭐 하면 됩니까?” “세례 받아라.” 간편해요. “가끔 죄 짓는 것은?” “그것은 성만찬 해서 떡 먹고 해결하고.” 카스테라와 포도주로 해결하니 얼마나 간편합니까? 이게 기독교라면 불교식은 뭐냐 하면,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염라대왕한테 걸리거든요. 사람이 살고자 한다는 것은 그만큼 남에게 피해를 줘야 살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인간 없습니다.
어떤 검사장도 터니까 백 이십억 나왔어요. 아파트가 백 채, 약간 터니까 그 정도 나왔다는 말이지요. 다 자식들 유학 보내고 먹고 살려고 한 짓 아닙니까? 이게 개인구원이거든요. ‘help me’거든요. 나를 살려줄 때 좋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나를 죽이는 하나님을 미쳤다고 믿나, 그거라는 말이지요. 고객들이 원해요. 여러분을 살려 줄 테니 교회에 돈 바치라, 그래서 교회가 커지기를 원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세상입니다. 마귀가 만든 현실이에요.
이것은 죽고 난 뒤에 장례를 치르는 방법에도 나와요. 기독교도 그렇고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죽고 난 뒤에 삼우제(三虞祭)를 지냅니다. 장례 후에 삼일제 지냅니다. 그리고 7일후에 칠제를 지내고 그 칠제를 일곱 번 반복하게 되면 49제를 지내지요. 점점 죽은 사람을 자기 기억에서 삭제해가는 거예요. 삭제를 너무 빨리 하면 섭섭해요.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너무 빨리 삭제하면 냉정한 것 같기도 하고 귀신이 “네가 나 죽었다고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이렇게 나오면 안 되니까 ‘섭섭합니다.’를 계속 늘여보는 거예요. 49제 지나면 이제 빠이빠이라. “이제 얼씬거리지 마세요.”
그래서 고인에 대해서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장례를 합니다. 하나는, “당신이 가 계신 그 세계에 미리 가 계시고 당신 따라 갈 테니 저를 잊지 마세요. 어차피 합류할 테니까 먼저 터 잘 잡고 계세요.” 두 번째는, “살아 있는 사람 근처에 좀 오지 마세요.” 49제 다음에 드리는 것이 천도제입니다. 도를 아십니까, 그게 천도 제거든요. 귀신이 한이 맺혀서 떠돌아다니면 하는 사업이 안 돼. 잘 달래서 줘서 보내야 돼요. 한 풀어줘서 보내야 돼요. “예, 예! 제가 어머니에게 잘못했습니다.” 좀 달래줘야 돼요.
한 마디로 해서 이것은 굿판이에요, 굿판. 굿, 디귿이 아니고 시옷받침, 굿판, 전부 다 굿판이에요, 굿판. 교회고 절이고 천주교성당이고 다 굿판이에요. 개인구원입니다. 신천지도 마찬가지고 구원파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개인구원,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마찬가지로 전부 다 개인구원이에요.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지금껏 그래온 거예요. 그래놓고 하나님을 아는 부류라고요? 천만의 말씀. 하나님을 모르는 부류입니다.
그것마저 신앙이 아니고 그게 엉터리라면, 그게 악마의 속임수고 진리가 아니라면 어떻게 진리를 알고 어떻게 천국 가는가? 성경에 삼손이 나옵니다. 이 삼손은 하나님의 신을 받았어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할 능력을 가지고 삼손이 뭘 했느냐 하면, 여자 밝히는데 그 능력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약속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다는 말은 삼손 자체가 나실 인에요.
나실 인이란 구별되었다, 현재 이스라엘을 예수님 쪽으로 끌어당기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자리에서 자기의 육체의 욕망을 위해서 여자, 1, 2, 3을 밝힙니다. 그런데 삼손이 마지막에 보여주는 것은 뭐냐? 여자를 밝혀서는 안 되고 삼손 본인이 여자였던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었던 겁니다. 삼손이 여자를 밝히고 한 그 모든 행동에서 우리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자기 힘을 가지고 자기가 선택한 곳에다가 힘을 몰아줬습니다. 모든 인간은 선택합니다. 문제가 뭐냐? 선택한 그것을 선택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 자체에 대해서 이미 창세전부터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가 거기에 몰아세워져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였는데 나중에 주님을 만나고 보니까 나의 선택이라고 여긴 그것마저 주님의 선택이었던 겁니다.
나의 선택보다 주님의 선택이 우선이었고 우선권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그렇게 여자를 밝혔으면 죽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삼손이 구원받게 된 것은 이미 자기 이전에, 자기 자신 이전에 이미 다른 분에 의해서 자기가 그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소급해서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철없어서 몰랐지요. 처음에는 여자밖에 몰랐습니다. 여자의 후손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자기의 선택이 무산되고 실패로 끝나고, 그리고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자기 몸에서 눈이 뽑히고 나머지 몸 가지고 마지막 힘을 다하여 “아버지여, 이 몸 가지고 주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나실 인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하고 희생물이 될 때 주님을 위해서 희생물 되라고 그동안 내가 인생을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뒤돌아보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개인구원이 아니고 전혀 예상 못한 낯선 선택이 우리 인생에 침범한 거예요. 침투한 겁니다. 마치 사도바울처럼, 마치 삼손처럼, 그리고 많은 선지자처럼. 희한한 현상을 따로 찾지 마세요. 오늘 본문에 보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라고 했는데 실제로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에서 있었던 일이거든요. 여기에 맹수 안 나옵니다. 맹수 안 나오고 복음 전하면서 핍박받은 이야기가 나와요.
핍박받았다는 말은, 제가 이렇게 하면 “제가 직장생활 하면서 핍박받아야 됩니까?” 자꾸 핍박을 남에게 욕 얻어먹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세상을 볼 때 ……,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사 다니면서 “매출이 올라서 이번에 특별히 보너스 200프로 드리겠습니다.” 하면 사람들이 “야호!” 하고 외칠 때 세상에 죽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해야 될 성도는 ‘돈 받아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돈 받아서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런 식으로 별로 그것이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알 때 그게 지금 맹수하고 싸우는 중이에요.
날마다 우리는 세상 것을 원하고 자꾸 정주, 머물고자 하고, 머물고자 하는 나를 날마다 죽여서 떠나도록 하고, 떠나고자 해놓고는 “제가 떠나고자 했으니까 괜찮지요? 복 주세요.” 이렇게 떠났다는 것을 빌미로 또 출세하려고 하고, 그러면 또 손잡고 “가자!” 하고 떠나버리고, 그렇게 떠나면서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의 권세라는 것, 이 세상 자체가 지옥입니다. 지옥에서의 모든 구성원들은 미친 자들입니다. 정신병환자들이에요. 그 안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고. 전부 다 미쳤어요.
각자 다른 현실가지고 동일한 현실이라고 우기는 정신병 환자입니다. 조현증 환자에요. 정신분열증. 수락산에 가기가 위험해요. 등산하다가 괴물 만나는 수가 있어요. 전부 다 괴물들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부모자식도 마찬가지고 부부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정주고 마음 주고 돈 주고 사랑도 줬지만……. 아, 사랑이라는 것은요. 목에 걸린 가시 같아서 한 번 걸리면 목에서 넘어가지를 않아요. 헤어지면 그렇게 울어요. 왜? 가시가 걸렸으니까.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해놓고는 가시 걸려서 내려가지를 않네. 자식 키우면서 자식이 애먹일 때 ‘아이고, 저거……’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우리 몸에는 이 세상에 대한 정의 가시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처리하면 안돼요.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죄를 우리가 처리하지 마세요. 손대지 마시고 그냥 그대로 반납하세요. 이게 날마다 즐겁게 죽는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달리 보게 하옵소서. 술 도가니에 거품이 일어난 것처럼 봐야 되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고 남에게 패배한다고 얼마나 짜증내고 울분을 터뜨렸습니까? 왜 나에게는 나의 안식처를 주지 않느냐고 얼마나 항의했습니까? 주여, 다시 한 번, 하나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얼마나 격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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