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강-고전 15장 50(혈과 육)16070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50절입니다. 신약성경 283페이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하나님나라의 못 들어간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가는 이유는 인간들이 혈과 육에 몰입하기 때문입니다. 혈과 육을 가지고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시도하는 그것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혈과 육에 하나님이 결합되지 않고 연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이 혈과 육에 대해서 깨져야 되고 파괴당해야 되는 현상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현상이라고 했는데요. 보통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무엇을 한다, 내가 어떤 것을 한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이런 일을 합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것은 혈과 육만 인정하는 이 세상의 잘못된 관행입니다.
나는 애를 공부시켰습니다. 나는 승리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했습니다. 항상 내가 무엇을 했습니다. 또는 내가 무엇을 안했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내가 무엇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바로 혈과 육에서 못 벗어났다는 증거가 돼요. 그러나 성경은 뭐냐 하면, 나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게 됩니다. 나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나는 내가 빵을 먹고 싶어서 먹었습니다, 라고 하지 말고, ‘나에게 이상하게 배고픈 현상이 일어나는데? 저 빵이 먹고픈 현상이 일어나네? 그래서 나는 빵을 손에 쥐고 입으로 가져가는 현상이 일어나네. 이런 현상이 다 있네.’
이렇게 하게 되면 상당히 복잡해서 간편하지를 않지요. 그냥 배고프다, 하면 간단하지요. 그러나 그냥 배고프다, 해버리면 무엇이 빠지는가, 어떤 내용이 삭제가 되느냐 하면,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쉽게 말해서,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받을 수 없다는 그 내용이 자꾸 누락이 되어버려요. 혈과 육으로서 어디에도 다 갈 수 있어요.
어떤 분이 이야기하는 것을 언뜻 들었는데, 요새는 개나 소나 다 유럽에 여행 간다는 거예요. 그 개나 소가 바로 혈육이지요. 맨날 제주도만 가다가 유럽에 갈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유럽에 가 봤자 혈과 육이 한국에서 유럽으로 간 것뿐이에요. 천국은 그러 식으로 들어가지를 못해요. 유럽에 가듯이, 미국에 가듯이 가지를 못합니다. 혈과 육이 빠라바라, 빠라바라, 지중해는 갈 수 있지만 천국은 못 간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쉽게 말해서 천국은 못 간다, 가 되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이 세상 마지막에 불 심판이 되기 전에 회개하라고 했는데 사람이 예정되었다면 공짜로 다 천당 가는 것이 아닌가, 회개하라는 말이 왜 필요한가, 라는 조의 질문을 하셨어요. 제 답변의 처음이 뭐냐 하면, 그것은 베드로사도의 사도성을 인정해주는 사람에게만 하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베드로배후의 살아계신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다고 베드로를 인정해주는 사람에 한해서만 그 말이 실효성이 있는 겁니다, 라고 답변을 해줬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지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우리 몸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을 할 때, 우리가 그 말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고, 시비를 걸고, 저항하고, 반항하고,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고 대들게 아니라, 먼저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도하고 예수님하고 과연 생각이 합치되는가를 따져봐야 돼요.
이것이 사도바울의 사적인 견해인지, ‘너는 뭐가 잘났어?’ 이렇게 사적인 견해로 투박하게 내칠 수 있는 견해인지, 아니면 이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우리가 믿고자 하는 예수님 이야기와 합치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에요. 그리고 사도의 권한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말이 아니고 살아계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란 이런 거예요. 믿든 안 믿든 간에 이 세상은 그대로 운영되고 있고 실효성 있게 현재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혈과 육이 애써서 만들어내는 그런 일들의 업적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일어나야 될 일들이 그냥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아까 제가 현상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믿고 안 믿고는 따질 필요 없어요.
나는 믿습니다, 쌍시옷 넣어가면서 백날 믿어봐야 치매 걸리면 소용없습니다.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데 나중에 나이 많아지면 말씀을 알아보겠어요? 내가 믿습니다, 를 내가 믿어서는 안돼요. 그것은 믿음 아닙니다. 전부터 그런 질문은 많이 있었는데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심각한 질문을 해요. “목사님은 왜 집단적인 부활만 이야기하고 개인적인 부활은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부활된다는 이야기를 왜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개인부활은 없습니다. 개인부활이라는 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이에요. 개인부활의 희망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평소에 내가 나에 대해서 집착을 하는 집착적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사도바울이 전했던 부활 이야기하고 억지로 연결시키다 보니까,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나에게 집착한다, 나는 나를 포기 못하겠다, 죽어서도 좋은데 가야 되겠다.” 한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부활의 세계가 있다고 하니까 “나 예수 믿으면 부활 됩니까?” 이런 질문이 툭 튀어나온 거예요.
그게 바로 혈과 육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천국의 내용을 억지로 잡아당긴 거예요. 그게 연결이 안 되게 되어 있는데 강제로 연결을 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들이 이야기하지요. “부활됩니다.” “어떻게 부활됩니까?” “십일조 하시고, 교회 봉사하시고, 성경구절 외우시고, 제자훈련하시면 됩니다.”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그까짓 거 제가 하지요.” 하거든요.
그걸 하게 되면 나라는 것을, 나에 대한 집착을 내가 나한테 행함을 덧붙여서, 십일조내고, 선교 헌금내고, 예배참석하고, 전도하고, 이런 행함을 추가해서, 그렇게 추가해서 완전체로 만든 내가 부활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것은 자기 딴에는 멋진 아이디어인데 그렇게 끄집어내는 행동이 어디서 나오는 행동인가 하면, 혈과 육에서 나온 행동이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부활하고 개인부활이 연결이 안 되는데, 그러면 뭐가 빠졌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부활을 언급할 때는 개인부활, 혈과 육에 대한 집착을 천국까지 이어갈 수 없다고 내 칠 때 거기에 집어넣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죄 문제를 집어넣어요. “네가 죄를 알아?” 네가 게 맛을 알아, 하듯이 “네가 죄를 알아?”
죄라는 것은 천국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 천국에서 허락되지 않고 내쫓는 것이 죄입니다. 그 내쫓는 것이 뭐냐? 현재 우리가 우상처럼 섬기는 내 혈과 육, 이게 바로 천국에서 용납되지 않는 내치려는 대상이 돼요. 간단하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천국 못갑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천국 못 간다, 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이유가 천국에서 받아주지를 않기 때문에 그래요.
혈과 육이기 때문에 받아주지를 않아요. 혈과 육이라는 것은 가족중심이라는 뜻입니다. 혈통중심, 족보중심이라는 겁니다. 나는 어디서 나왔는가? 답변은 둘 중 하나에요. 1.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2. 하나님에게서 만들어졌다. 답변은 간단해요. 그 두 개를 합치면, 하나님께서 아빠 엄마를 통해서 나를 낳았다. 그러면 그게 합친 겁니까? 주체자는 하나님이고 아빠 엄마는 하나의 경로, 통로가 됩니다.
그러면 그 통로를 거기에 집어넣지 말고 빼버리자는 말입니다. 나는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들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그 통로를 고집을 하느냐는 말이지요. 아빠 엄마가 결혼해서, 동침해서 나를 낳았다는 그 말을 왜 자꾸 집어넣느냐는 말입니다. 집어넣는 의식 자체가 혈과 육에서 나온 의식입니다. 그걸 뺄 수 있는 자유함이 있어야 돼요.
아빠 엄마가 나를 낳았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태어나는 현상을 일으켰다. 왜 그런 현상을 일으키는가? 하나님의 창조 속에는 하나님 자신의 본질, 본뜻과 속성을 피조물에 담아내기 위해서 우리를 만들었다, 가 돼요. 하나님께서 아빠 엄마에게 다 일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누구에게 맡겨요? 안 맡깁니다.
그냥 순수 개입하면서 무엇과 마주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방향이 하나님 쪽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무엇과 충돌되고 마주치는가 하면, 내가 여기 있기까지의 원인 제공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혈과 육의 사고방식과 중간에 꽈당, 하고 마주치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이번에 당신애가 성적이 올랐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빡세게 기도했습니다.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렇게 해놓고는 금방 “아이고 말을 잘못했네요. 하나님께서 빡세게 기도하게 해서 애 성적이 올랐습니다.”
중간에 집어넣는 것, 빡세게 기도했다는 것을 빼면 안 됩니까? 그걸 왜 못 뺍니까? 하나님이 애 성적 올리는 현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 될 것인데 왜 그걸 못 빼느냐는 말입니다. 그걸 빼버리면 내 혈과 육이 가치가 누락이 되기 때문에 못 빼는 거예요. 아예 천국 안 가려고 악을 써요. 혈과 육은 들어가지 못한다 하는데 그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그렇게 집착해요. 빼면 되는데.
왜 못 빼는가? 그걸 집어넣어야 ‘봐라. 내가 이렇게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니까 나는 신자 맞잖아.’ 하고 옆 사람에게 과시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애들 성적이 이렇게 올랐습니다.” 하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당신이 아무것도 안 해도?” “해봐야 혈과 육인데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은혜 주셨습니다.” 그렇게 되는데 그러면 옆에서 질문한 사람이 “그럼 나는? 나도 아무것도 안하는데 왜 우리 애는 성적이 안 오르지요?” 그렇게 되거든요. “그걸 왜 나에게 묻습니까?”
지금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돼요. “나처럼 해 봐라. 이렇게!” 이런 식이 되면 안돼요. 나처럼 해 봐라. 이렇게! 그렇게 되면 그 교회는 혈과 육의 투쟁장, 경쟁장이 돼요. 단체로 천국에 안갈 작정을 하신 거면 그렇게 하세요. 혈과 육이 가족중심이고 혈육중심인데 이것을 우리 힘으로 스스로 삭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혈과 육을 사모하고 나 자신을 포기 못할 때는 그자체가 죄가 되거든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죄가 뭐다?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 것. 그게 뭐다? 혈과 육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혈과 육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혈과 육인 우리를 삭제할 수가 없어요. 이럴 경우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 것인가? 이미 해답을 처음에 언급했어요. 이 몸을 가지고, 이 혈과 육을 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 하지 마시고 왜 하나님께서 혈과 육이라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현상으로, 주께서 살아계시기에 일어난 하나의 결과물로 자기 자신을 수동적으로 받아주시면 되는 거예요.
죄 짓는 혈과 육이라도 너무 자기지신을 탓하지 마세요. 오늘 기쁜 소식 처음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죄를 짓고,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니까 내가 나한테 회초리 들고 때리지 마세요.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자기 자신의 잘못을 비하하거나 자책하지 마세요. 자책한다는 것은 ‘잘할 수 있었는데’라는 자기 혈과 육에 대해 아직까지 집착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거예요. 여전히 거기에 미련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런 현상을 가지고 하나님과 연결시킬 때 어떤 현상이 혈과 육에 기초했을 때 가장 신앙적이고 경건스러운 현상인가가 성경보면 나와 있어요. 그걸 제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여기는 겁니다. 첨 듣는 이야기라는 표정들이신데요. 그냥 아버지가 든든한 가장이라고 해 봅시다.
어릴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무리 내가 배고프고 힘들더라도 아버지께서 집에 계시고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해주신다면 우리는 일단 먹고 마시는 것, 자는 것, 혈과 육의 기본적 조건이 대만족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럴 때 “나는 왜 걱정이 없어?” 하면 “우리 아빠 엄마가 날 키워줘.” 이럴 때 한 때나마 인생사는 것이 굉장히 안심이 되고, 든든하고, 평온하고, 안정감이 있어요. 든든한 분이 계시니까.
세상철학이라 하는 것, 신이라는 것이 모호해요. 어떤 인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턱대고 신이 만들었겠지, 이쯤에서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교회에 오게 되면 구체적인 어떤 특정 인물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자세히 하면 삼위일체 중에서 성부 하나님. “성부하나님이 여러분을 대할 때 아들같이 대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냥 눈에 보이는 사람만 의지하지 말고 여러분을 책임지고 죽어서 천국까지 보장해주는,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는 든든한 아버지를 믿어보세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은 놀라운 능력이 임합니다.”
그러면 상상하는 거예요. ‘그래. 하나님아버지가 계시다. 든든한 아버지처럼 모든 것에 대해서 용납을 하시고, 어떤 것도 예쁘다 하시고, 넘어져도 일으켜 세우시는 든든한 인물만 있다면 이게 바로 신앙이라는 것이구나. 이게 바로 신앙의 기쁨이구나. 야, 사람들이 이 재미로 교회 가는구나. 밤낮으로 교회 가는 이유가 거기 있구나.’ 아버지한테 잘 보여야 나중에 재회의 기쁨이 있어요. 재회의 열망, 다시 만났을 때 “아빠, 보고 싶었어요.” “나도 너를 기다렸다.” 얼싸안는 그 재회의 기쁨, 그것이 있다면 교회 다니는 것이 고통이고, 교회에 돈 내는 것도 아픔이지만 그까짓 거는 아버지가 돌봐주시는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얼마든지 든든한 아버지, 일종의 보디 같이 지켜주는 아버지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래. 이것이 신앙이 처음이고 이것이 신앙의 끝이야. 너희들은 죽은 신을 믿지만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나는 신앙생활 잘하고 있어. 나는 든든해. 끝!” 하면 이것이 최고의 신앙처럼 그렇게 간주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이 두꺼운 성경책 볼 필요 없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키우고 보살펴준다는 그 느낌이 왕창 오는데 그 느낌을 굳이 성경 봐서 훼손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 느낌을 유지하면 이것이 최고의 신앙인데, 든든한 분을 믿고 주님은 나를 사랑하고. 시편 23편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데요. 세상에 이런 아버지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선한 길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 경상도 말로 데끼리라는 말이거든요. 내 잔이 넘치나이다. 집에다 그거 액자로 만들어서 걸어놓고. 그렇게 살면 신앙 그까짓 거 뭐 있어요? 그게 신앙이지요.
그런데 그게 바로 혈과 육에서 나온 가짜신앙이라면, 예수님과 통하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그 말에 해당되는 내용이라면? 네가 지금 든든하다, 기분 좋다, 평안하다, 이제는 안심이다, 하는 그 내용이 어디에 담겨 있는가? 지금껏 내가 나를 사랑하는 혈과 육에 담긴 내용과 직접 하나님을 연결시켰다는 오류라면, 그게 잘못된 만남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성경 안 봐도 어떤 분을 든든하게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편하기 짝이 없어요. 그러면 되었지 신앙에 뭐가 더 필요해요? 누가 하나님 욕하거나 하면 오기는 또 있어가지고 ‘주를 위해 목숨 바쳐 살리라.’ 하고 나와요.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시킬 수 없고,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기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내가 지키겠습니다, 하는 아주 순교자적 오기가 막 나와요. 이러면 되었잖아요. 이러면 백점짜리 신앙 아닙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 노선, 그 레벨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교회 다니고 열심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되면 성경 볼 이유가 없다니까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런 거나 보면 되고.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자가 없다는 그런 구절이나 보면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없는 이유를 너희들이 알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에서 안 받아준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 네가 곰곰이 따져보고 성경전체를 통해서 알아볼 마음이라도, 그런 적이라도 있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어쩌란 말인가? 하나님 뜻은 이렇습니다. 혈과 육밖에 모르는, 혈통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 누굴 집어넣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아버지와의 관계와, 평소에 내가 나를 사랑해서 아버지라는 이미지, 내가 상상해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관계에 대한 모든 모습이 그게 같으냐를 따져보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섬긴 그 섬김의 방식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상상한 그 섬김, 교회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긴 그 것과 같은가 보라는 거예요.
같은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알아요. 왜? 십자가사건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 말은 다르다는 이야기에요. 네가 네 아버지라고 하는 그 섬기는 방식이 달라도 어떻게 그렇게 다르냐는 말이지요.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휙 돌아보면서, 네가 여호와 하나님 섬기는 것은 혈과 육에 기초해서, 하나님 아버지 이미지를 만들어서 억지춘향으로 연결시킨 마귀적인 관계 때문에, 내가 섬기는 것에 대해서 오해와 곡해로 일관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 죽으심이 거기에 개입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에 있다. 다른 말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어떤 현상을 일으키느냐 하면, 혈과 육으로 믿는 것, 주여, 이것이 가짜입니다, 라는 고백이 서슴없이 나올 수밖에 없는 현상이 유발될 때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사는 참된 성도인 겁니다. 나의 모든 행한 것, 행함, 그 모든 기초는 혈과 육에 있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행함입니다.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기도는 얼마나 할까요, 헌금 몇 퍼센트를 하면 될까요, 선교는 어느 나라까지 할까요, 목사는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교회청소는 일주일에 몇 번 할까요, 성경은 몇 장 읽으면 될까요, 큐티는 어떻게 할까요, 교인 수는 몇 명 모아야 될까요, 이 모든 것들이 혈과 육에서 나온 모양새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뭘 하든 간에 혈과 육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어떤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그렇다면 아담에 속한 인간이 다 그럴 진대, 어떤 인간도 예외가 없는데, 어떤 사람이 천국 가고 어떤 사람이 지옥 가는가? 혈과 육을 다 지닌 다 같은 입장에서 어떤 사람은 천국에 합격이 되고 어떤 사람은 천국에서 탈락되는가? 합격한 사람은 무슨 묘수를 행해서 합격된 거예요? 그런 문제가 거론 되지요.
이제 그걸 설명하겠습니다. 그 설명을 위해서 창세기 42장에서 45장이 준비되어 있어요. 그 이전에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제자와 이야기하는 가운데 제자가 하는 말이, “예수님, 제가 예수님 계신 곳이 영생인 줄 알고 따라가겠는데 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서 아버지장례 치르고 가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죽은 자로 하여금 장례 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렇게 했어요.
혈과 육이라는 것이 가족중심이라는 것, 그겁니다. 인간이 혈과 육의 본성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유가 인간에게는 중심이 있어요. 중심이 있고 그 중심에서 달아날 수가 없어요. “목사님, 아무리 성경을 보고 아무리 교회 나와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제가 수백차례 들은 질문이에요. 그것은 중심에서 잡아당기기 때문에 그래요. 뭔가 내가 미처 모르는 중심이 있고 그 중심에서 나보고 멀리가지 말라는 거예요.
중심에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 중심을 로마서 10장에서는 ‘자기의’라고 하는데 “너는 의로 운거야. 너는 남에게 지지 않아. 괜찮은 거야.” 이게 자꾸 잡아당겨요. 주님 섬기려고 하면 또 중심에서 잡아당기고. “네가 뭐가 잘났다고 주님을 섬겨.” 이렇게 잡아당기지요. 그 잡아당기는 중심에 무슨 괴물이 들어 있는지를 창세기 42장에서 44장의 내용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고 난 뒤의 이야기에요. 가족이야기입니다. 혈과 육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 가족 이야기 속에서 혈과 육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혈과 육을 계속 유지하고 거기서 못 벗어나게 하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힘은 인간의 내부에 흐르는 힘이에요. 세상에서 말하는 힘은 바깥에서 작용하는 힘입니다.
그 바깥에서 작용하는 힘이 과학이고. 힘을 force라고 하지요. 뉴턴의 힘의 공식입니다. 질량×가속도, 이것이 힘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질량이 있고 가속도가 있지요. 가속도란 속도의 변화량을 가속도라고 합니다. 시간이 나오는데 시간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시간은 거리와 관련되어 있어요. 거리의 변화량이 속도가 되고 속도의 변화량이 가속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뜻으로 하는 이야기냐 하면, 인간은 하나의 질점,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 세상 모든 것이 힘으로 작용합니다.
쉽게 말해서 무슨 짓을 해도 돈만 벌면 너는 힘이 있다. 그 법칙이에요. 왜? 넌 하나의 점이기 때문에. 감각적인 점에 불과하기에.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혈과 육이라고 할 때는 바깥이 아니라 인간 그 내부에 혈과 육을 꽉 잡아서 절대로 혈과 육에서 한 걸음도 탈출하지 못하게 붙잡아두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 힘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 힘의 내막을 몰라요. 그 괴물의 정체를 몰라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사람들이 사탄에서 매여 살기에 죽기를 무서워한다고 되어 있어요. 도대체 죽는 것을 안 무서워하면 되는데 안 무서워 할 수가 없어요. 왜? 혈과 육에서 ‘죽으면 안 돼’가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네가 죽으면 되겠어? 너 죽으면 소용없어.” 이런 힘이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 힘을 알아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가정이 있어요. 그게 아브라함이고 그 아브라함가정에서 이삭이 나왔고, 이삭가정에서 야곱이 나왔습니다. 야곱에서 열 두 아들이 나와요. 그 나오는 모든 경과 속에서 혈과 육안에 대체 어떤 힘, 어떤 괴물의 힘이 들어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파헤치는 겁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기 전에 꿈을 꾸었지요. 볏 집단이 자기를 둘러싸서 절을 하고 또 하나는 해와 달이 자기에게 절하는 두 개의 예언적인 꿈을 꿉니다. 그 꿈을 근거로 해서 열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어요. 르우벤이 말려서 겨우 구덩이에서 빠져나와서 그곳을 지나던 미디안 상인을 통해서 애굽에 팔려갔어요. 팔린 뒤에 애굽에서 요셉은 종으로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요셉의 사적인 영광이나 출세가도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만든 가정이 야곱가정이고 그 가정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열두 명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물론 디나라는 딸이 있지만. 일반적인 가정이라면 그냥 놔둬버려요. 그런데 하나님의 택한 가족이기에 그 가족은 그 자체가 현상이에요. 어떤 현상?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현상이 일어나는 가족으로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족 속에서 드디어 인간이 혈과 육을 고집했을 때 어떤 범죄가 일어나는가를 대표적인 입장에서 보여주고 있어요. 아버지 야곱이 별나게 요셉을 사랑해서 고급 옷을 입히고 특별사랑을 해주지요. 그 자식 하나를 유별나게 챙기는 이유는 그 어미인 라헬을 사랑해서 그렇거든요. 요셉과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했어요. 진짜 사랑했던 여인은 레아가 아닙니다. 아주 아름다운 여인 라헬을 사랑했는데 그 여인이 죽은 뒤에도 그 몸에서 난 자식을 계속 사랑한 거예요.
여기서 가족 간에 드디어 죄가 발생됩니다. 요셉이 애굽에 간 것은 애굽나라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야곱의 가족 속에 있는 그 중심의 죄를 어떻게 밝혀내는가의 과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모든 꿈은 애굽나라 유지책이 아니고 아버지 가족, 야곱가족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실시하는 그 죄를 끄집어내는 작업과 접촉을 시킬 것인가에 관련되어 있어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고 난 뒤에 야곱가정에 양식이 떨어지니 자식들에게 닦달을 냅니다. “얘들아, 뭐하느냐? 애굽에 내려가서 양식을 사오너라.” “예! 가겠습니다.” 열 명의 형제들이 애굽에 옵니다. 그 때 형제들인지 다 알면서 갈굽니다. 언제까지? 요셉에 대해서 잘못했습니다, 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드릴을 가지고 파헤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파헤치는 과정에서 형제들은 극구 무엇으로 대비하느냐 하면, “다 밥 먹고 살자고 한 겁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세상 돌아가는 현실이 어쩌고저쩌고……” 이런 변명들을 자꾸 깔아놔요. “이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한 겁니다.” 그래서 요셉과 형제들과 만나서 하는 그 대화가 42장부터 죽 나오는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양쪽 다 정직하대요. 요셉도 정직하고 형제들도 정직하다고 하는데 양식 사러 온 사람을 붙들어놓고 모함을 해버려요.
“너희 정탐꾼이지?” “정탐꾼 아닙니다.” “정탐꾼 맞잖아.” “아닙니다.” “정탐꾼 맞아.” 이렇게 억지를 부리면서 시므온이란 형을 볼모로 잡아놓고 “나머지는 가. 가서 너희 막내아들(베냐민) 데려올 때까지는 너희 형제 못 찾아.”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거예요. 형제를 위해서 자기 한 몸 버릴 수 있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므온이 죽든 말든 양식 가지고 돌아갔지요. 가져온 양식 다 떨어졌습니다. 아버지가 닦달 냅니다. “양식 다 떨어졌는데 뭐 하냐?” 그러니까 맏이가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실은 시므온이 애굽에서 못 돌아온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셉이라는 총리대신이 우리 사정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도사같이 꿰뚫어 보면서 막내 동생 베냐민 데려오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양식이고 뭐고 없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버팁니다. “요셉이 죽었는데 이제 막내까지 죽이라고? 난 그건 용납 못한다. 절대로 용납 못한다.” 버팁니다. 그러니까 요셉도 버팁니다. “막내아들 내놓아라.” 야곱도 “막내아들만큼은 못 내놓는다.” 중간에서 열 형제가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형이 동생들 보고 이야기합니다. “얘들아! 그 때 요셉을 그렇게 학대하지 말라고 했잖아.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마침 상인들이 지나가기에 팔았기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대로 죽었어.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했어? 이제 그 피 값을 우리가 받고 있어.”
그렇게 해놓고 유다가 결단을 내립니다. “아버지! 베냐민을 저에게 내주세요. 우리가 다시 안 돌아오거든 제 아들을 대신 죽이세요. 제 아들을 값으로 내놓겠으니 베냐민을 내주세요.” 그래서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왔지요. 요셉은 벌써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약을 올립니다. “그래. 아버지는 잘 계시고? 약속대로 막내아들 데려왔구나. 이제 양식 가져가서 잘들 사시오.” 해 놓고 은잔(점치는 잔)을 막내아들 배낭에 몰래 넣어두고 보내버려요.
보내놓고 난 뒤에 요셉이 자기 부하들 시켜서 추적해서 도둑으로 몰아서 잡아옵니다. 추적할 때 대화가 상세하게 나오는데 “너희들은 도둑이다. 은혜를 어떻게 죄로 갚는가?” 유다가 하는 말이 “우리는 정직합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인님의 은잔이 나오는 배낭이 있다면 너희는 어떻게 할래? 그 인간은 죽여도 할 말이 없지?” “죽여도 할 말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주인님의 물건에 손댄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 사정을 살펴보면 양쪽 다 혈과 육에 근거해서 아무 잘못이 없어요. 최선을 다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꼭 여러분 같아요. 정말 그래요. 평생 나쁜 짓 한 번 안하고, 마음속으로도 남에게 나쁜 짓 안하고. 좋게좋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섬기고, 교회 꼬박꼬박 나오고, 누가 들었으면 좀 부끄럽겠다만 하여튼, 그저 하나님이 최고인줄 알고,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혈과 육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그야말로 윤동주의 서시 같이 전혀 부끄럼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께서 찾아내시는 겁니다. 사해 보니 베냐민의 짐에서 나왔어요. “약속대로다. 베냐민 빼놓고 다 돌아가라.” 했거든요. 유다가 하는 말이 “베냐민 죽는다면 우리 아버지 죽습니다. 내 목숨 바칠 테니까 베냐민 살려주세요.” 그게 뭐냐 하면, 옛날 우리가 꿈꾼 요셉을 요셉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학대했다는 겁니다. 학대한 이유는 시기심 때문에, 다시 말해서 혈과 육 때문에, ‘내가 중하지 요셉이 뭐가 중해’라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괴물에서 나온 본성, 나만 최고고 모든 것은 나보다 못하다는 이 평생 지니고 가야 될 우리의 육신적 본성, 이 본성을 우리 내부에 담아둔 채 그저 최선을 다하면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내가 보기에 한 점 흠이 없이, 남에게 해코지 한 적이 없이, 그야말로 남을 섬기고 봉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반듯하게 살아보려는 우리의 모습, 그게 혈과 육이었습니다. 백날 죄 반성해봐야 꺼낼 죄가 없어요. 부흥회 해봐야 꺼낼 죄가 없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더 완벽합니까? 늘 조심하고, 늘 자기를 살피면서, 오늘도 주님께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늘 살피면서 살아가는데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거룩하라는 말입니까?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총각으로 살면서 신부가 될까요? 이미 결혼했는데 무를 수도 없고 어떻게 할까요? 그런데 못갑니다. 이 혈과 육은 천국에 못가요.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요셉이 그 유다에게, 그리고 형제들에게 창세기 45장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나 팔아먹은 것 가지가 자책하지 마세요.” 제가 설교 처음에 했지요. 혈과 육에 대해서 자책하지 말라고.
“여러분에게 진짜 생명주기 위해서, 진짜 천국, 진짜 영생주기 위해서, 진실로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여러분의 혈과 육의 본성에 의해서 시기심이 나도록 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해서 당신들 손에 팔렸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은 “착실하게 살았어요? 그러면 천국 넣어줄게.”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개입 안에 뭐가 들어가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어떻게 섬겼는가가 합치되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려요.
여러분이 바느질 할 때 바늘만 들어오지 않고 바늘에 꿰어진 실이 엮여서 바늘이 섬유 속까지 파고 들어오잖아요. 수술할 때 우리 살 속까지 들어오듯이. 주님께서 들어올 때, 하나님께서 개입할 때 그냥 빈손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가지고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꿰매버리면 우리는 겉으로는 혈과 육인데 속은 혈과 육의 죄를 이미 용서한, 구원하기 위해서 혈과 육이 되었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현상으로 발현되고 재현되고 발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창세기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해서 모세와 이스라엘 속에도 있습니다. 성막 지켜서 구원받는다고요? 멸망했습니다. 십계명 지켜서 구원받는다고요? 멸망했어요. 멸망하는 현상이 일어나야 그들은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이것은 뭐냐? 혈과 육 자체는 생명도 없고, 목숨도 없고, 영생도 없어요. 다만 이 죽음이라는 현상 속에 뭐가 있는가? 생명이 그 죽음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 미꾸라지나 장어처럼 죄 때문에 죽어가는 그 속에서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죽는 이유가 뭐냐? 죄 때문에 죽어요. 죄는 어디서 찾는가? 우리 스스로 혈과 육의 본성을 숨길 수 없어서 그대로 발휘하다 보니까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그 죄 속에, 그 혈과 육 때문에 상처받은 분 그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그 분이 바로 생명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앙꼬요 우리의 몸은 주님의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스카이다이빙 할 때 초보자는 어떻게 하는가?
초보자는 베테랑이 뒤에서 안고 뛰어내립니다. 우리는 베테랑을 제키고 내가 반듯하게 살아서 하나님과 직접 신앙생활 잘하고 싶어 해요. 그게 죄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베테랑 되시는 주님께서 “너 때문에 내가 대신 죽었다가 너를 껴안고 대신 살아났잖아.” 이걸 늘 보여주는 현상,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 그게 바로 이미 영생을 얻고, 영생 안에 있는 사람이고, 천국 안에 있는 사람이고, 사도바울 같은 사람입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게 바로 진짜 성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요셉의 열 형제입니다. 어디 가도 나만 챙기는 속성이 연세가 아무리 많아도 계속 갈 거예요. 일본에서는 75세가 되면 운전졸업장 같은 것을 발급한답니다. 운전 그만하게 하는 대신 대중교통승차권도 주고 한답니다. ‘개호’라는 것이 있어요. 치매나 노인을 보호하는 것인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끝없는 마라톤, 살아 있는 지옥이라고. 그 정도로 옆에서 돌보는 사람이 힘들어요.
그 말은 뭐냐? 젊을 때는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운전하고 싶지요. 나이 많으면 터져 나오는 이 욕망의 운전대를 이제는 놔야 돼요. 졸업해야 됩니다. 늙어서도 내가 잘났다 할 수 없어요. 비틀거리면서 뭘 해요? 정신도 오락가락하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데. 늘 자유낙하하세요. 하나님이 베테랑다이버가 되셔서 우리를 죽이십니다. 우리를 이 땅에서부터 죽이십니다. 죽이실 때 그냥 죽지 말고 베테랑과 함께 죽으면 함께 살리라.
주님과 통하는 사도바울이 외치는 것은 이겁니다.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받을 수 없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네가 네 힘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구원되었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 흉내 내고 모방하면서 신앙인줄 알았는데, 주께서 개입하셔서 그게 하나님 믿는 것이 아님을 깨우쳐주시고, 그저 우리는 엉터리밖에 안 되는 것을 날마다 알려주시니 그저 십자가의 긍휼하심과 용서하심만 우리의 자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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