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강-고전 13장 8-11(온전한 것)16022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8-11절입니다. 신약성경 279페이지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계속해서 사도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두 종류가 있는데 사람 속에서 만들어내는 사랑,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 남편이 아내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자식이 부모 사랑하는 것, 그리고 국민이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 그런 것들이 인간 속에서 만들어낸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본인이 힘들어할 때는 다 끊어지게 되지요. 멈추게 되는 겁니다. 가짜라는 말이지요. 내가 편할 때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데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는 사랑해야 됨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나오지를 않아요. 짜증이 나온다든지 불평이 나오든지,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그 사랑 말고 다른 사랑이 있는데 그 다른 사랑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선물로 주는 사랑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으니까 없는 거잖아.”라고 하지요. 상식적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랑 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을 받게 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따로 계시고 우리는 이 지상에 사는데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와 지상 사이에 연결되는 이것이 사랑이라는 은사입니다.
사랑은 모든 죄를 용서하고, 모든 행동에 대해서 탓하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짓을 했든지 묻지도 따지지 않으시는 그것, 지난 시간에 그걸 가지고 덮어주시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덮어주는 거예요. 덮어줄 때의 그 취지가 뭐냐?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네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하나님, 제가 망했습니다.” “네가 망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다 망한다.” “하나님, 제가 죽습니다.” “너만 죽는 것이 아니고 다 죽는다.”
우리는 자꾸 개인적으로 출발해서 개인과 하나님 관계를 자꾸 유지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개인과 하나님관계를 유지하지 않습니다. “너도 그렇고 그런 인간종류의 하나일 뿐이다. 너도 똑같아. 욕먹는 사람이나 욕 받는 사람이나 똑같아. 모은 인간은 똑같아.”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거예요. 태어날 때 욕심가지고 태어나고 그 욕심에 상상력을 더해서 죄가 되고, 그 죄가 장성해서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나만 살겠다고 설치고. 그 점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 할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좀 살고 넉넉하니까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보세요. 베푸는 것은 어디로 가고 없고 남에게 빼앗지 못해서 환장하는 그것이 성격 탓도 아니고 모든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요.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꾸 나를 갈구는 하나님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이 나만 갈구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을 똑같이 간주하시고 똑같이 취급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있는 우리에게 사랑을 줄 때는 우리의 행동보고 특별대우하지 않습니다. 똑같기 때문에. 제가 옛날 어릴 때 비행기에서 광고전단지를 뿌리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지금도 북한에서 삐라를 뿌린다고 하잖아요. 심지어 하늘에서 과자를 막 뿌린 적이 있어요. 애들이 그거 줍는다고 난리를 피웠는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랑을 뿌릴 때 그 사랑은 인간의 직업이라든지 하는 일, 그 사람의 성품, 국적, 출생, 일체 묻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주십니다. 지금도 그래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데 악인이든 선인이든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죽기 전에,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 미리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받고 살았다는 것을 미리 챙겨야 됩니다. 그거 챙기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죄를 덮어주는 사랑을 미리 챙겼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성경이 이렇게 두껍습니다. 두꺼운데 그 내용을 한마디로 하면 이렇습니다. 하늘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이 하늘이 열리면서 지상을 향하여, 하늘에 준비된 사랑이 지상을 향하여 흘러 들어오는 겁니다. 그 흘러오는 코스, 그 경로에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받은 자가 되고 그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걸 지난 시간에 “내가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줄자에게 긍휼을 주신다.”는 출애굽기의 본문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그 은혜와 긍휼이 뭐냐? 그 죄를 덮어주는 거예요.
숨 막히듯이 확 덮어주는 거예요. “주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것은 내가 문제 삼지 않을게.” 하고 덮어주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이? 햇빛과 공기를 줄 때, “너 죄 지었잖아. 햇빛 안주겠어. 너는 나쁜 짓을 했으니까 공기 안주겠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햇빛과 단비와 공기를 선인이나 악인이나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선물을 주는 것처럼 햇빛만 주는 것이 아니고 공기만 주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준비한 진짜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을 준비해 두었다가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을 너무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하실 것인데 하늘이 열리면서 사랑이 내려왔다는 것이 햇빛과 공기처럼 누구나 다 받게 되면 시큰둥할 거예요. ‘사랑, 그거 뭐 중요하지도 않네.’ 이렇게 될 것인데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3장 16절, 원래 성경에 3장 16절에 중요한 것이 많아요. 여기도 아주 중요한데 마태복음 3장 16절에 보게 되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이 열렸어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비둘기같이 뭔가 따로 주어지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늘에만 있고 지상에는 없는데 예수님 때문에 이제는 지상에도 생겨나게 된 현상, 그게 성령을 받게 되는 현상입니다.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가 어떻게 확인되느냐 하면, 내 문제가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을 늘 짧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정말 중요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내 문제가 나 혼자 끙끙 앓을 문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게 내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과 연관된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그 사랑을 온전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온전한 것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사랑을 받으면 그것이 온전한 것이 돼요. 오늘 본문 10절에 나오지요?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그 온전한 것이 있다는 말은 비온전한 것, 덜 온전한 것, 온전치 못한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 설교 내용이 길지만 결론적으로 짧게 하면 이렇습니다. 온전한 것을 받은 사람은 늘 웃지요. 늘 웃어요. 그런데 온전한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일이 잘 되어도 늘 화를 내지요. 늘 불만과 짜증을 내게 되어 있어요.
불만과 짜증이 환경 탓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야말로 치매 걸린 어머니가 온 방에 똥을 싸놓아도 그걸 이야기할 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그게 온전한 거예요. 다른 사람 같으면 마구 짜증을 낼 텐데, “내 팔자가 왜 이런가!” 할 텐데 그걸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온전한 거예요. 내 인생에 대해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게 불만스럽지 않고 어차피 주께서 덮어줄 일이잖아요. 어차피 주님의 사랑 없이는 해결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 때에 주님의 성령을 통해서 사랑을 아는 사람 같으면 이것도 주께서 덮어줄 비 온전한 것이다, 비온전한 것, 온전치 못한 것을 온전한 것이 와서 덮어주면 그게 온전한 것이 돼요.
제가 너무 이야기를 쉽게 해서 거짓말 같지만 진짜입니다. 진짜는 좀 쉬울 수가 있어요. 의외로 굉장히 쉬워요. 사람이 자기 인생에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해결하려고 덤벼들기에 그런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나님 상대할 때 개인적 자격으로 상대를 해요. “하나님, 제가 뭐가 잘못되었는데요?” 하고 자꾸 나를 끄집어내는데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은 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너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을 상대하시는 겁니다. 내가 힘든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힘들어요. 나만 죽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다 죽습니다. 북한의 김정은도 죽고 다 죽어요. 어제 유명한 정치인도 죽었어요. 기호학자이면서 <장미의 이름>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움베르토 에코도 엊그제 죽었어요. 그렇게 똑똑한 사람도 죽어요.
미리 알아야 돼요. 죽기 전에 미리 알아야 돼요. 미리 해결해야 됩니다. 미리 하늘의 것을 받아야 돼요. 그동안 지상에 있던 것, 자기가 노동한 것, 자기가 애쓴 것, 그것만 쥐고 인생 끝내고자 해서는 안돼요. 햇빛과 공기처럼 그냥 아무 대가없이 준비된 것이 있어요. 애쓰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거 하나님이 준비했습니다. 그게 추상적이다? 관념적이다? 아닙니다. 구체적입니다. 구체적이 뭐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죽을 때 이상한 짓을 하고 죽었어요. 피 흘리면서 죽었습니다. 피라는 말은 목숨 값이라는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현재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내 목숨 내가 유지하고자 부지런히 애를 쓰는데 그 목숨은 가짜라는 겁니다. 그것은 온전치 않은 목숨이에요. 온전치 않은 목숨을 온전한 생명으로 바꿔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물론 지옥가도 오래 살아요. 지옥가도 오래 사는데 문제는 지옥 가서 오래 산다는 그것이 지옥의 근원적인 문제점입니다. 너무나 힘들어요. 힘든데 안 죽어요. 구더기를 튀기는 것처럼 뜨거운 불에서 영원토록 못 빠져 나오면서 거기서 튀겨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워요.
천국을 볼 생각하기 전에 지옥부터 먼저 알아야 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와요. 부자가 지옥에 갔는데 물 한 방울이 없어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거예요. 지옥, 물 한 방울이 없어서 고통스러워하는 그 지옥에 비하면 이 땅에서 인생 살면서 못살겠다, 못살겠다, 하는 그것은요, 엄살입니다. “손님 없어 장사 못하겠다!” 엄살입니다. “자식이 애먹여서 못살겠다!” 엄살입니다. “남편 때문에 못살겠다!” 다 엄살이에요. 미리 지옥을 맛보라는 겁니다. 지옥보다는 이곳이 훨씬 살기가 좋다는 겁니다.
왜? 햇빛과 공기라는 은혜가 아직도 제공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아직도 서비스가 있어요. 서비스가 아직도 제공될 때 미리 그 서비스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야 돼요. 제가 그 서비스가 하늘에서 온다고 했지요. 그걸 구체화시키자는 말이지요. 그냥 하늘에서 온다고 하지 말고 하늘에서 올 수밖에 없도록 지상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만들었어요. 하늘에서 주어지는 그 은혜, 하늘에서 은혜를 주시는 당사자가 지상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해서 이 땅에서 뭘 했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피 흘렸습니다.
아,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것은 그냥 하늘만 멍청하게 쳐다보라는 것이 아니고 지상에서 정말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햇빛과 공기, 그리고 죄를 용서하는 은혜의 근거와 증거가 확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옥가야 될 우리의 죄를, 지옥보내기는커녕 천국 보내기 위해서 십자가 피를 흘리는 그 모습, 그걸 근거로 해서 이미 예수님께서 아버지하고 이야기가 끝난 거예요. 그 이야기를 가지고 약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약속에 의하면 네가 받아야 될 저주를 내가 대신 받는 그것이 약속의 실내용입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그거예요.
어제 우리교회에 어떤 분이 비밀글로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비밀 글을 공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만 이름은 밝히지 않으면서 그 내용이 너무 좋아서 밝힙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구약 때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신약성도들이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알겠는데 예수님 오시기 전의 구약성도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차마 질문하고 싶었지만 무식하다는 소리 들을까 차마 질문 못하고 입 꽉 다물고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참으셨습니까? 그걸 대신 질문해주니 참 고맙지요. 그걸 비밀글로 할 것도 없어요. 공개해야할 만한 질문입니다.
제가 즉각 답변해 드렸습니다. 구약에는 오실 예수님의 약속이 미리 거기에 긴 그림자처럼 깔려 있었습니다. 노을이 지면 내 몸체가 서 있고 해가 지면 질수록 그림자는 몸체 뒤에 길게 드리우잖아요. 긴 그림자처럼 신약을 중심으로 봤을 때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그림자가 구약까지, 아담까지, 창세 때, 심지어 창세전까지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그림자에 포함이 된 사람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실 예수님의 하실 일을 그들은 미리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이름으로, 환경의 이름으로. 그들이 경험한 것을 가지고 언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은 것을 ‘새 언약’이라 합니다. 새 언약을 두자로 줄여서 신약이라고 하고 옛 언약을 두자로 줄이면 구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질문이 뭐냐? 구약성도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구약 적으로 구원받았지요. 옛날 언약 안에서 십자가를 맛보면서 구원을 받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지요? 구약에 십계명 같은 법이 있는데 십계명을 지킨다고 구원을 받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지요.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옛날 언약가운데, 율법, 옛날 언약을 율법이라고 해요, 그 율법을 보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알아요.
그런데 나만 죄 짓는 것이 아니고 이 십계명의 위반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 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이 세상의 모든 법은 지키는 자 따로 있고 못 지키는 자가 따로 있어요. 자기 능력이나 교양 따라서 지키거나 못 지키거나 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준비했다가 이 땅에 주신 그 약속은 인간치고 지킬 위인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분 좋습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나만 못 지키는 것이 아니고 개나 소나 다 못 지키는 거예요.
인간들을 보면 지킨다는 사람들은 얼마나 잘난 체를 합니까? 학창시설에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면 숙제 한 사람은 음매, 기 살고 숙제를 못한 사람은 기가 죽지요. “오늘은 며칠인가? 21일, 21번이 앞에 나와서 칠판에 있는 문제 풀어봐.” 할 때 21번이 수학을 잘하는 사람 같으면 보란 듯이 풀겠지요. 그러면 다른 학생들은 ‘좋겠다. 참 똑똑하다. 나는 못 푸는데.’ 기 죽지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기죽을 필요가 없어요. 왜? 지킬 위인이 없습니다.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모두 다, 인간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킨 사람이 없어요.
한 두 개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다 지켜야 돼요. 다 지키는 그것도 5년 전에 다 지켜서는 안돼요. 매일 같이, 매 순간, 모든 말씀을 항상 다 지켜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저주가 주어집니다. 구약성도들은 하나님의 율법가운데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뭘 기다렸느냐 하면, 이 죄에서 자기를 건져줄 자신의 왕, 메시아를 기다린 겁니다. 그 메시아를 기다릴 때에 하나님께서 또 약속을 줬어요. 그 약속에 의하면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되면 그가 메시아”라는 약속을 다윗 왕에게 준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이지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그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오시면 이제는 죄인도, 이 저주받을 위인도 천국 갈 수 있다고 약속대로 그들은 알았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싹 지나갈 때 문둥병자, 또는 소경된 자, 쉽게 말해서 남들에게 저주받았다는 티가 다 나는, 누가 봐도 저주받았다는 티를 다 보여주는 그런 문둥병자들, 또는 바디매오라는 소경이 뭐라고 하느냐? “다윗의 자손이여.”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슨 뜻인가 하면, “다윗의 자손이여, 저는 제 힘으로 제 죄를 없이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메시아여,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은 죄는 내가 스스로 해결할 길이 전혀 없음을 저는 수용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물론 그렇게 해서 문둥병자도 고침 받았고 소경도 눈을 떴고 용서받았어요. 제가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여러분이 “참 쉽네. 그러면 우리도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든지 아니면 ‘제가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믿나이다. 저를 구원하소서.’ 이런 멘트를 외치면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들을 할 거예요. 굉장히 간편하고 쉽다고 여길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돼요.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대목을 설명을 해 드려야 돼요. 멘트, 말을 한다는 것, 우리가 말을 해서 구원을 받을 것 같으면 참 쉬울 것 같은데 이 말을 해서는 구원받지를 못해요. 말로 구원 못 받고요 말씀으로 구원받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말을 할 때 자동적으로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이 말에 담겨서 하나님 앞에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기도가 그런 거거든요. 기도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헌금하는 행동을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고백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회개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속에서 나올 때는 그것이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은 뭐냐? 말은 그 속에 나의 욕망과 욕구가 담겨 있어요. 사적인 욕구가 담겨 있다는 말이지요. “나를 천국 보내주세요.”라고 요구하게 되는 겁니다. 나를 위한 천국은 없어요. 설교 초반에 이야기했지요. 나와 하나님관계가 아니라는 그 말이지요. 나를 어떻게 해달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갑자기 이야기가 어렵게 되어버렸지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 율법이 어떠니, 언약이 어떠니, 약속이 어떠니, 숨겨진 죄용서가 어떠니, 죽 이야기를 했습니다.
상당히 좋은 이야기고,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는 것도 다 맞는 이야기고, 구체적으로 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것도 다 맞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내 귀에 듣는 순간 이게 나의 사적인 욕망의 도구로 쓰이게 되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야기가 잘 오다가 여기서 스톱이 된 셈이지요. ‘야, 이러면 구원되겠네.’ 하다가 덜컥 엔진이 꺼져버린 느낌이 들지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아는데 그 아는 것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그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뭔지를 아는데 그 아는 것을 고백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상투적이라고 짜증내지 마시고요, 제가 잠시 노래 가사를 읽어드릴 테니 이 내용을 생각해 보세요. 실제로 있는 노래 가사입니다. “나는 그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나는 변했어요. 정말 변했어요. 요즘 며칠간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볼 때 꼭 다른 사람 같아요. 내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대체 어떻게 된 거지요?” 뮤지컬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고백하는 그 노래,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의 가사입니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는 거예요. 이 가사를 왜 이야기하는가? ‘아, 방금 목사님 이야기를 들은 대로 이렇게 멘트를 해서 예수 믿으면 되겠네.’ 그게 아니라 진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왜 저를 가만두지 않습니까?”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저를 가만두지 않습니까? 요즘 며칠간 저는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이렇게 내가 변할 줄을 나도 미처 예상 못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다니.” 그 가사에 보면, 예수도 다른 남자중의 한 사람인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고 유일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유일한 남자라는 겁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 거기에 꽂혀버렸어요.
그리고 이것은 내가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한 것이 아닙니다. 예상 안했다는 말은 내 기대나 욕심과 상관없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겁니다. 이것은 말이 아니고 이것은 말씀입니다. 말은 내가 이렇게 저렇게 정리해서 하나님 앞에 예쁨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말씀은 내가 어떻게 붙잡을 수 없는 내 바깥의 활동성이 나를 덮쳐버린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사랑은 덮어주는 것이라고. 주님의 바깥 활동이 나를 덮어버린 거예요. 죄 용서하기 위한 용도로 나를 덮어버린 겁니다. 주님을 이용해서 뭘 해보겠다는 것이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주님에게 기도해서 돈 잘 벌고, 주님한테 기도해서 가정이 화목 되고, 그럴 의사도 없어요. 그냥 덮쳐버린 거예요.
그게 시편 19편에 나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이 대목과 오늘 본문,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 방언이 다 언어와 관련되어 있고 인간이 소통하는 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예언하실 때 말로 예언하신 것 맞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성경의 말씀을 이해할 때는 말씀으로 보지 않고 말로 이해하는 거예요.
말로 이해한다는 말은 ‘아, 이거 지키면 되겠네. 저거 지키면 되겠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국에 99.99퍼센트입니다. ‘성경말씀대로 지키면 되겠네.’ 성경말씀을 말씀으로 보지 않고 말로 보는 거예요. ‘아, 지키라고 이렇게 지시했으니까 우리가 지키면 되겠네. 지키면 구원받겠네.’ 그런 식으로 구원해주지 않습니다. 뭘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뭘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도 폐하는 마당에 뭘 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언어는 껍데기에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언어는 하나님 앞에 빈 봉투에요.
빈 봉투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지난 설에 우리 장모님이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에게 봉투에 돈을 넣어서 드렸어요. 그렇게 늘 정기적으로 드려왔었어요. 장모님 연세가 올해 구십 셋이거든요. 이젠 정신이 오락가락해요. 하루는 사모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우리 장모님이 목사님 부인이니까 사모님이지요. “사모님! 봉투를 보니 빈 봉투네요.” 그 젊은 목사의 사모가 그런 전화 한다는 것이 참 힘들어요. 알맹이는 빼놓고 껍데기만 주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전화를 하는 것이 사모로서 참 힘든 것이요, 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돈 준 사람이 분명히 돈을 넣었다고 확정을 하고 줬는데 이 못된 사모가 자기가 돈을 빼돌려 놓고 곱빼기로 얻어내려고 “빈 봉투네요.”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시골교회에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시골에는 정신없는 노인 분들이 많거든요. 돈 좀 줘놓고는 네 딸 시집갈 때 2천만 원 줬다는 식으로 우기는 경우도 있고, 하여튼 치매의 경계선 가까이 가면 희한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모로서는 ‘에이, 그냥 받은 것으로 치지.’ 우리 집사람 같으면 그렇게 해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얼마나 갈등이 되겠습니까? 사모가 우리 장모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우리 장모님이 “미안합니다. 제가 빠트렸네요.” 그래서 다시 채워서 보내줬어요. 그 사모님이 전화할 때는 복걸 복이에요. 동의하면 천만다행이고 동의 안하면 교인하나 또 나가는 거예요. 돈 몇 푼 챙기려다가 교인 하나 떠나보내는 거예요. 예배참석, 헌금하기, 기도하기, 전도하기, 선교하기, 전부 다 빈 봉투입니다. 전부 다 껍데기에요, 그거.
왜 껍데기인가? 그걸 해놓고 그걸 한 행동을 본인이 잊지를 않습니다. 내가 이 교회 얼마나 투자했는데, 내가 이 교회를 얼마나 섬겼는데, 이 교회에 얼마나 봉사했는데……. 결국 인간의 모든 말이 말씀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모든 말이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으로 휙 되돌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정말 교회를 망치는 겁니다. 봉사한다가 안 알아준다? 딱 놓고 나가시면 돼요. 그런 식으로 하려면 교회 더 나올 필요 없어요. 내가 봉사하는데 남이 안 알아준다. 딱 그 자리에 놓고 나가면 돼요. 목사가 설교하는데 교인들이 안 알아준다. 강단에 딱 놓고 나가면 돼요. 장로가 열심히 하는데 안 알아준다. 장로 그만두고 나가면 돼요. 교회는 말이 통하는 데가 아닙니다. 교회는 말씀이 활동하는 곳이지 인간의 말들이 많은 곳이 되면 안 됩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뭘 할 때, 내가 기도할 때, 배후에서 말씀이 그렇게 기도하게끔 내 환경을 그렇게 몰아넣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지요. 말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말에다가 상상력을 보태서 은근히 뭔가 기대하고 은근히 뭔가 노립니다. 뭔가 목적을 갖고 있고 어떤 기대가 있어요. ‘내가 이만큼 기도했는데 설마 응답하시겠지.’ 은근히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욕망입니다. 이것은 욕구에요. 이것은 말씀이 아닙니다.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을 봅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기도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은근히 노리지 아니하며, 그런 뜻이잖아요. 사랑은 이런 거예요. 사랑은 말에 속한 것이 아니고 말씀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말이 아니고 말씀이에요. 사랑은 열심히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거예요.
인간이 만든 사랑은 자기자존심으로 돌아오지만 진짜 주님이 주신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드러내는 것으로 되돌아갑니다. “내가 어떤 직업을 가졌다면 주님이 이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한 직업이다. 어떤 일을 한다면, 내가 만약 비행기 스튜어디스가 된다면 주님 증거 하라고 이 자리 주셨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희생덕분에 내가 이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말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말씀에 사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뭘 시도해서 용서받은 것이 아니고 주님의 용서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게 구체화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온전한 것이라는 것은 화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허허, 웃는다는 겁니다. 웃으면서 산다는 거예요. 그런데 온전하지 않은 것은 화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제일 화를 내는 사람이 누구냐? 목사입니다. 설교했는데 들어주지도 않고, 은근히 돈 내라고 에둘러서 했는데 돈도 안내고,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협조합시다.” 하고 은근히 에둘러서 이야기했는데 돈도 안 나오고, 뭘 하면서도 항상 화를 내고 있어요. 웃으면서 설교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누구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이야기가 아닌지.
교인 몇 명 떨어졌다고 화내고 들어왔다고 좋아하고, 이런 식으로 교회가 자기교회, 자기 말 빨이 서는 교회, 주의 말씀이 서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말이 갑 질하는 그 집단, 오늘날의 교회가 그런 식의 교회가 된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개인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주의 몸으로, 주의 몸에서 주님으로, 바로 은사라는 말씀의 능력으로 이끌어갑니다. 나로부터 출발했다가 ‘아, 주님은 나하고 상대하지 않는구나. 교회가 중요하구나.’라고 해서 ‘우리교회’ 그냥 ‘내 교회’ 하다가 ‘아하, 우리교회 중심이 아니구나. 예수님으로 돌아가는 사랑이구나.’ 모든 방향이 우리교회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으로, 그리스도 몸 중심으로 가다가 결국 주님 중심으로 가는 거예요.
그 와중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당해야 되는지. 그 억울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억울함 당해도 웃으시기 바랍니다. 10절, 11절을 봅시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언덕을 올라갈 때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너머광경이 다 보이는데 언덕 꼭대기까지 다 올라가지도 않았으면서 인생 다 산 것같이 착각을 하는 거예요. 자살하는 사람들이 그런 실수를 범합니다.
더 가보라는 겁니다. 언덕 위까지 가 보자. 가보고 천국인지 지옥인지 판단해야 되는데 미리 가보지도 않고 “인생 이래서 못살겠다.” 이렇게 설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래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유치원 때까지만. 유치원 때까지는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런데 유치원이 공부의 끝이 아니잖아요. 더 올라가 보세요. 힘들지. 교회 처음 나오고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계속 가 보세요. 가다보면 억울한 일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자기 딴에 사랑한다고 비타민 드링크 하나 줬는데 ‘어디서 이런 걸 줘?’ 이런 개 무시를 당하세요. 그래야 내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이 억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더 억울했어요. 우리 억울한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더 억울했습니다. 그래놓고는 교회 다 알았다느니 어쩌고저쩌고 하지 마세요.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밖에 없어요. 남이 나를 무시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도 무시당했는데.
골프용품에 에이밍이라는 것이 있어요. 골프 칠 때 자세를 바르지 않으면 공이 목표점에 가지 않아요. 그 에이밍이라는 것을 차고 골프를 치게 되면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신호음이 뚜우, 뚜우, 울리는데 자세를 바로 고치면 딩동, 하는데 그 때 치면 돼요. 저는 골프도 못 치지만, 에이밍(aiming)이라는 것이 어떤 목표라는 뜻이 있습니다. 목표를 맞춰주는 거예요. 정렬, 교정해주는 겁니다. 모든 것이 나 중심이거든요. 말밖에 모르는 나 중심의 인간, 이 비온전함을 주님의 온전한 사랑이 오게 되면 에이밍을 해서 사랑으로, 사랑으로 교정을 해줘요.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고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좁은 길로 갈 수 있도록 에이밍을 해줘요. 그 가운데서 우리는 억울함을 많이 당해야 됩니다.
사회에서 억울함 당하고, 교회에서 억울함 당하고, 가정에서 억울함을 당해야 되고, 남한테 저주받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요. 하지만 어차피 주께서는 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지체되라고 했기 때문에 나로부터 벗어나서 오직 주의 몸으로 방향 틀기를 늘 해주시는 겁니다. 이런 에이밍현상, 오늘도 주께서 그런 사랑을 주시는 겁니다.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 하는 말은 인간의 욕망의 상상력이 자꾸 가짜 거울을 만들어요. 주께서는 그 거울을 깨트립니다.
어떤 드라마에 보니 상견례를 하는데 진드기처럼 옛날 여자가 와서 신랑보고 “난 너를 사랑하고 싶다.” 하니까 신랑이 그 여자를 거울 앞에 세워놓고 “여기 거울이 있지? 이 거울을 봐라. 네 모습을 봐라. 네가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사랑을 할 것이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하고 상견례 하려 가버리니까 그 못된 여자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거울을 들고 상견례 하는 자리에 와서 깨버린 거예요. 여러분 표정을 보니 모르시는 것 같아요. 그걸 보고 ‘아, 인간이 날마다 상상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깨트리는구나.’ 접시를 깨자, 하지 말고 이제는 거울을 깨세요.
날마다 내가 기대하는 욕망, 욕심, 상상력, 환상, 그것은 바로 나에게 돌아오는, 나의 자존심과 관련된 말인데 그 자존심을 깨도록 주께서 에이밍 해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준비한 사랑, 그 사랑이 와서 미리 우리가 지옥가기 전에 대비하라고 주신 그 사랑을 감사히 받게 하옵소서.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햇빛과 공기를 받는 것처럼,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고 죄만 지었는데 주님 주신 그 덮어주는 사랑, 그 사랑만을 우리가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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