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20719-요한계시록 총정리(숫자)43강a-이 근호 목사
제 43강a
자, 요한계시록을 총 정리하는 시간이라 말씀 드렸죠? 총 정리하면서 정리를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까, 숫자로 정리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봤습니다.
부제목이 뭐냐, ‘1(완성)과 7(완성) 사이에서’ 돼 있죠? 1 해놓고 완성, 7 완성, 완성과 완성 사이에서, 처음도 완성이고 나중도 완성이라면 중간은 어떻게 됩니까? 중간도 미완성이 아니고 완성입니다. 보통 인간의 일은 미완성인데 미완성을 보완해서 완성되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하나님의 일은 미완성일 경우가 없었어요.
한국의 춘향전 거기에 보면 변 사또 나오면 조마조마하죠? 미완성처럼, 빨리 이 도령 과거급제 해야 되는데, 요새 같으면 사법고시 합격해야 되는데, 어사또로 출세해서 어사또가 등장해야 되는데, 하면서 굉장히 조마조마 하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조마조마한 게 없습니다.
어떤 일도 완성이 아닌 게 없죠. 그걸 제가 전에 그림 그릴 때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에 이렇게 절벽과 절벽 사이를 선으로 연결된다면 이것도 완성이고 이것도 완성이라면 이게 축~ 늘어졌던 더 늘어졌던 요한계시록은 아예 많이 늘어지죠. 많이 늘어져서 아예 세상 제일 낮은 곳까지 늘어지죠. 시작이요, 알파와 오메가, 나는 시작이요 끝이요. 그 중간 과정도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주님은 완성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힘들지 않겠느냐 하는데 인간은 원래 힘들어야 그게 완성에 가깝습니다. 힘들게 사시는 게 우리한테 합당해요. 죄 짓고 난 뒤에 말똥말똥한 얼굴로 돌아다니면 이상해요. 죄인은 죄수복을 입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입은 죄수복이 너무 화려해요. 죄수복인데 루비똥인가 명품으로 너무 화려하고 비싼 걸 걸쳤어요. 고급의류나 고급 가방이나 구두, 저기 보니까 골프채까지 있어요. 죄인인데, 저거 죄인이 치는 거거든요.ㅎ 너무 신나고, 가끔 가다 ‘ 나 죄인 아닌가? 이래도 돼?’ 할 정도로 죄인 아닌 것처럼 되는데, 여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성도들은 그야말로 힘들게 삽니다. 그것이 자기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간 가장 적합한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7교회가 뭘 닮았느냐 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을 닮아서 주변에 있는 세상의 풍조와 분위기에 말려들어버렸어요. 7교회가. 7교회 자기들끼리 모인다 해놓고는 바깥에 더 관심이 있고 바깥을 더 부러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약 백성 이스라엘, 바깥을 통해서 안쪽에 대해서 ‘니 본래의 자리, 정신 차려라, 니 자리 찾아가야지.’라고 다그치는 것처럼 7교회로 하여금 주변에 있는 이런 세계에 대해서 7인, 7나팔, 7대접으로 폭격을 함으로 말미암아 7교회라 하는 것이 ‘내 손에 딱 쥐고 있다.’
바람 부는 날 같은 경우에 손수건 끄트머리를 잡고 있으면 손수건은 죽어라고 겁내죠. 비 맞고 하니까. 하지만 그 손수건 끄트머리를 누가 잡고 있습니까? 내가 쥐고 있으면 아무리 태풍불어도 손수건 하나 쥘 힘은 있잖아요. 집에 키우는 강아지가 낯선 사람한테 무서워하면서 어디로 들어옵니까? 주인 쪽으로 자꾸 들어오면서 짖어대고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어린양의 생명책’라는 그 의미를 이 어린양의 생명책이 이미 니가 겁내고 있는 바깥에 있는 악마한테 이겼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악마마저 어린양의 생명책이 이겼느니라. 이미 이긴 분의 손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쥐고 있다면,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명단이 기록돼 있다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돼 있다면 주님 자신이 이렇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까 손수건 예를 들었듯이 그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을 앞장세워서 세상의 태풍과 모든 세상의 질곡 어려움을 다 맞도록, 흠뻑 젖도록 만들면서 우리가 거기에 우리 힘으로 못 빠져나온다 싶지만 사실은 먼저 ‘어린양의 생명책에 있는 자들은 이기리로다.’ 완전히 우리를 골탕 먹이는 거 같아. 세상 모든 것은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만큼은 이러한 세상을 이기리로다. 이렇게 돼 있다 말이죠. 심지어 죽기까지 하면서 그들은 이겼다. 죽는 게 뭐가 이기는 겁니까? 죽는 것도 이기는 거예요. 죽는 것도 이겼다는 거죠.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잖아요. 남들 보기에는 재수 없다 할 거라 말이죠. 사람이 제 명에 못 죽고 병들어 죽느냐, 저주 받았나, 죄 졌나, 하겠지만 나중에 보니까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되돌아오는 걸 봐서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는 처음부터 이 완성, 처음부터 이긴 자의 손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병들어 죽게 함으로써 그걸 다른 사람에게 다른 세계를 다른 세계관을 나타낸 겁니다.
그 다른 세계 나타나는데 지금 우리를 거기다 활용하고 있어요. 우리로서는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포기 안 하면 못 견디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교정한다 할까요? 수정해 나가야 돼요.
우리 자신의 세계관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숫자로 치면 ‘0’이예요. 0과 1의 차이는 1-0=1이죠. 0과 1의 차이는 이게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차이입니다. 1이 1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1이니까, 처음이요 나중이니까, 예수님 되기 위해서 0을 이 세상에 보내서 주님께서 끌고 오는 그 자국인데 그 자국이 1,2,3,4,5,6이예요. 7인 할 때 7인을 한꺼번에 터뜨립니까? 차례차례 터뜨립니까? 첫째 인, 둘째 인, 셋째 인, 넷째 인, 다섯째 인, 여섯째 인 나오죠?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 했기 때문에 그냥 안다고 치고 막 나갑니다. 1,2,3,4,5,6 여섯째 인을 뗄 때 인을 뗀다는 것은 옛날에도 요새도 있는데 편지가 이렇게 있으면 편지를 개봉 못하도록 이렇게 파라핀으로 붙여놓은 게 있죠. 그것을 딱 떼서 누가 봤느냐, 안 봤느냐를 남기는 것.
007 영화에 보면 007 제임스본드가 호텔에 나오면 호텔이 문제가 있어요. 호텔 나갈 때 머리카락을 붙여 놓아서 머리카락이 붙어있으면 아무도 방문 안 했고 머리카락이 떼어졌으면 누가 방문했고, 나중에 보면 뱀이...신월동 뱀 나오잖아요. 007에 나오는 것처럼 인을 뗀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 살면서도 정체를 몰라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누가 머리카락 떼듯이 누가 인을 떼듯이 예수님이 떼시는데 떼실 때는 자격이 어떤 자격이냐 하면 이미 세상을 이긴 사람에 한해서,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이미 다 제대로 운영한다는 것을 자격 받은 그게 확정된 분만 떼는 거예요.
애들 일기장을 자물쇠로 잠가 놓는데 그 자물쇠를 누가 엽니까? 일기 쓴 본인만 열 수 있잖아요. 왜, 자기가 일기를 썼기 때문에. 이 세상은 주님의 일기장 이예요. 그래서 주님만이 이걸 열 수 있다 이 말이죠. 열 때 그냥 여는 것이 아니고 1,2,3,4,5,6으로 여는 것은 그 1,2,3,4,5,6이 뭣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7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1,2,3,4,5,6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녀간 흔적이죠. 그래서 제목이 1과 7 사이에서 완성과 완성 사이에서.
1과 7이 같은 완성이지만 그 내용은 확연하게 다르겠죠. 1은 이미 느긋하게 안식에 있는 완성이라면 7은 이건 전쟁이 벌어지는 칠대로 치고 다투고 싸우고 분쟁을 일으키고 대결하고 죽기 살기로 진짜 전면으로 붙는 그런, 금요일 날 저녁에 홍대 앞에 있는 지구대 같은 목숨, 주 폭들이 술 먹고 난동을 부리는 그러한 치열한 삶의 현장, 아니면 오후 4시쯤 되면 남대문 같은, 옷 팔려고 손님 하나 더 끌려고 애쓰고 빌고 당기고, 안사면 욕하고 그 치열한 삶의 현장, 그게 7이예요.
거기다가 주께서 손수건처럼 우리를 사용해서 우리는 7로 딱 담가놓고 끝은 누가 쥐고 있고요? 어린양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을 딱 쥐고 이건 뭐가 물들어 있고? 세상 것에 성도가 완전히 푹 젖을 때 성도는 뭘 아느냐 하면 1,2,3,4,5,6으로 젖는다는 걸 유일하게 알아요. 같이 세상에서 젖어도 다른 사람은 1,2,3,4,5,6을 모릅니다. 7과 연계돼 있는 1,2,3,4,5,6을 몰라요. 그냥 자기 밥 먹고 살려고 자기 일하고 자기 사업하는 그뿐입니다. 그게 7하고 연계돼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해요. 7하고 연계돼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은 손수건 끝을 예수님의 어린양이 생명책에 내 명단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유출된 거죠. 빠져나온 거죠.
고기 잡을 때 고등어나 꽁치 잡을 때 그냥 음식을 안 하죠. 배 가르고 내장을 다 들어내죠. 우리는 주님의 내장이라. 주님의 것으로 세상에 쏟아져 나와요. 우리는 거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우리가 거기서 ‘어떻게 사는 게 힘들다‘를 느끼는 게 아니고 어째서 이게 첫째 인이야, 어째서 이게 두 번째 인이야, 주님의 벌이신 일곱 째 인을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그 말은 우리의 삶을 뭐로 번역할 수 있다? 말씀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예언 덩어리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
이걸 독일의 극작가 카프카가 표현한 이론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두두두 재봉으로 재단을 했다. 두두두두 박아 놨다. 누비이불처럼. 우리 몸 전체가 6인 7인으로 두두두두 완전히 주께서 쑤신 바늘자국이 박히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완성입니다. 뭐 착해서 완성이 아니고 나쁜 생각 안 먹어서 완성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 요한계시록의 6인이 그대로 여기에 박혀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완성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무슨 교회라 했습니까? 처음부터 무슨 교회입니까? 7교회, 그래서 7이라는 의미가 무슨 의미냐, 그걸 풀어나가야 되겠죠. 자, 1번 봅시다. 주체와 자아, 주체는 뭐고 자아는 뭘까, 여기에 몸이 들어가면 이해가 되죠.
주체와 자아, 몸의 차이점이 뭐냐, 애매한데 애매한 거, 제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몸은 이미 있는 거죠. 몸은 여기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꼬집으면 ‘아야’하는 몸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뭘 모르느냐 하면 내 몸은 있는데 ‘누가 내 몸 있게 했느냐’를 몰라요. 엄마 아빠한테 물어봐도 몰라요. 2억 개 정자가 쏜살같이 난자 쪽으로 공격을 가하는데 중간에 호르몬에 의해서 다 죽고 여기 한 200개가 여기까지 도달해서 난자를 포위한다는 거예요. 포위를 하고 그 다음에 이 난자와 용납되고 난 뒤에는 나머지 199개는 장렬하게 알아서 죽어서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팔관에서 수정이 돼서 나중에 줄기세포로 번져서 몸이 된다는데, 확률이 여기서는 (200분의 1)이고 여기서는 확률이 (2억분의 1)이 되겠죠. 중간에 지가 누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2억분의 1) 가운데 그 중에 2억분의 1 그 중에 어느 게 나인지 알 수가 없어요.
성경은 예레미야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내가 태중에서 이미 너를 알았나니, 이렇게 돼 있어요.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세례요한 아버지가 자기 자식 낳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한나 같은 경우에도 자식이 없었어요. 리브가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사라에게 난자 있고 아브라함에게 정자 있어도 난자 정자 있어도 애기라 하는 것은 자기가 낳을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애기는 부모가 낳는 것이 아니고 부모를 통해서 낳게 되기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는 게 아니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나셨다고 돼 있어요. 마태복음 1장 16절에 보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냥 나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알고 예수 안에서는 모든 인간은 그냥 우리도 나온 거예요. 그냥 나온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부모 역할은 계시 전달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식 낳잖아? 부모는 자식을 낳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부모를 통해서 자식을 낳게 했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아비멜렉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자, 올케, 누이 모든 여자의 태를 다 닫아버렸어요. 여기서 정자가 가다가 주님의 계엄령에 의해서 전부 다 스톱이 돼 버렸어요. 난자한테 가서 수정이 안 되도록 다 만들어 놨다니까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몸은 피조물이잖아요. 피조물은 그냥 피조물 떨어질 때 홀로 자존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을 관리하는 관리체제가 함께 있습니다. ‘발걸음을 세신다.’고 돼 있죠? 집사님은 발걸음을 몇 번 셌어요? 모르죠? 몰라도 괜찮아요. 주께서 알고 계시니까. 주께서는 발걸음 셀 때마다 하나, 둘,....발걸음을 세십니다. 오늘 내 머리카락이 몇 개 빠졌는지 몰라요. 수요일 날 했던 동영상을 보니까 내가 깜짝 놀랐어요. 머리가 중간에 빠져서 동방교회 같아, 거긴 일부러 깎는데 난 빠져서 허예. 머리카락이 몇 개 빠졌는지 주께서 하나, 둘...세시죠.
피조물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관리체제에 들어갑니다. 여기 길거리에 침 뱉고 담배 피우는 젊은 애들 지 맘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허락하심에 껌 씹고 담배 피우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어떤 행동도 주께서 허락 아니면 인간은 자기 발자국도 못 세고 키도 한자라도 자랄 수 없습니다. 들에 피는 들풀이 지 맘대로 자라날 수가 없어요. 자라날 수 있는 권리가 들풀한테는 없습니다. 그 흔해빠진 참새, 날개 짓, 그 지 맘대로 날지 못해요. 그러니 하나님을 얕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얕보지 말란 말은 이 설교자로 하여금 항상 늘 두려움을 갖게 만들어요. 행여나 사람들이 알게 하는 설교 했을까봐 겁나는 거예요.
원래 인간은 죄 짓고 난 뒤에는 자기 몸이 있음이라고만 알지, 누가 있게 한 것은 모르게 돼 있다고요. 모르는 사람에게 ‘당신의 몸은 하나님이 했습니다.‘ 라고 해도 사실은 모르는 상태에서 지식으로 ’하나님이 만들었구나.‘ 수용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면 그건 안 되거든요. 그건 방지해야 되거든요. 어렵죠? 지식으로 받아주는 것을 못 받아들이게 방해를 해 줘야 돼요. 우리가 방해한다고 방해되는 건 아니지만.
다시 해봅시다. 몸은 그냥 우리는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있는가를 몰라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몸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몸이 어디서 왔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간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 몸은 나의 것이다.’ 해서 자아를 만듭니다. 이걸 철학적 용어로 존재라 하는데 존재 안에 들여다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 소유권으로 돼 있어요. 내 몸은 나의 것이라. 그게 존재입니다.
그래서 정박아들이 존재감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어요. 존재감이 없습니다. 사람이 약물 복용, 마약 복용했다. 존재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내가 미쳤지, 왜 행동을 그랬을까, 본인도 몰라요. 존재감이 없어요. 심지어 정신병자 되면 자기 귀를 베어버려요. 귀 베어버린 사람 있죠? 유명한 화가 가운데, 빈센트 반 고호라는 사람 있잖아요. 자기 귀를 베었습니다. 존재감, 소유성이 없어요. 알코올 중독 하는 사람은 자기 몸이 자기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동물적인 ‘먹고 싶다.‘가 계속 주둥이로 물 붓듯이 술이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치매 걸려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의 몸은 자기가 소유하기 위해서 자아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유하고 난 뒤에는 몸은 누구의 종이 되느냐 하면 자아의 종이 돼요. 그래서 제가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몸을 만들 때 몸만 만드는 게 아니고 몸의 주인이 누구라고요? 누구 뜻대로 한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거든요. 하나님의 복음대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된다고요.
그런데 자아는 이미 하나님의 것을 누가 뺏어 갑니까? 뭐라고 오해해요? 자기 몸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누가복음 10장인가 12장에 나오죠. 요새는 뭐 내 몸이 내 소유가 아닌 모양이라. 자꾸 잊어버려요. 누가복음 12장 19절에 보면 어떤 부자 농부가 창고를 지어놓고 뭐라 하느냐 자기가 자기보고 뭐라 합니까?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때 누가 누구보고 대화하는 겁니까? 내가 내 몸보고 하는 거예요. 자기 몸은 자기를 위한 애완견, 강아지예요.
여자가 성형을 한다든지,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백설 공주 계모가 거울보고 하는 소리가 누구보고 합니까? ‘거울아, 거울아.’ 자기가 자기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 속에 거울 하나 있다 이 말이죠. 최종적인 판단은 자기 거울보고 하는 겁니다. 백설 공주 계모 아닌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심지어 지옥 가도 지옥 가는 나를 달래주고 위로할 자는 누굽니까? 여러분? 아닙니다. 그건 윤 복희가 하는 거고, 누가 위로할 자라? 바로 내가 영원히 내 몸을 위로해 줘요. 왜, 내 몸 없이는 니 몸 없이는 나도 없기 때문에. 빵이 없으면 빵 향기도 없죠? 향수병이 없어지면 향수도 없죠. 그러니 향수병이 있을 때 향기를 느끼는 것처럼, 향수병이 우리의 몸이라면 향기는 우리 자아가 향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도 그렇고 여호와증인도 마찬가지로 뭐라 합니까? 이 몸이 없으면 우리 영혼도 없어진다고.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멸절, 아예 없어져 버려요. 그래서 만약에 그렇게 사고한다면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한 탕하는 거예요. 실컷 한 탕 해놓고 경찰이 따라오잖아요. 그러면 죽으면 그만 이예요. 없어지면 잡을 나도 없으니까, 죽고 난 뒤에 누가 욕하든 말든 내가 없는데 뭐.
성경은 히브리서 9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 몸의 소유권을 자기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니가 심판 안 받고 싶어도 내가 기어이 심판하겠다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 몸을. 그러니 하나님이 주인 값을 하는 거예요. 그동안 한평생 이 몸이 누구 것입니까? 내 것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주인을 모르니까, ‘오, 있네, 있는 걸 누구라 할까? 내 것으로 해야 되겠다.’ 이렇게 내 것이 된 거예요. 이게 몸이 있음이라고.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것이 중요해요. 하나님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 안 믿고 누굴 믿어요? 나를 믿는다니까요. 나한테 이익이 될 때만 하나님 찾고 나한테 손해가 되면 하나님도 관계를 끊을 요량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참, 그런 인간을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바깥에 내놓아서 니가 살아가는 거나 세상 살아가는 것이 똑같다는 보여주는데 끝에는 어린양의 생명책을 둘둘 감아서 광풍에 태풍에 날라 가지 않도록 붙잡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펄럭이는 깃발 같은 이 모든 걸 행함이라 합니다. ‘니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게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와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같아 주리라”(계22:12) 그 행함이 뭡니까? 다 어디서 나온 거다? 주께로부터 나온 행함.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신 행함, 그 행함 이예요.
자아의 몸은 서로 대화상대가 그냥 묻는 거예요. 사실은 독백이죠. 자아가 자아보고 몸을 근거로 해서.
그러면 주체는 뭐냐, 이 자아가 몸만 쳐다보는 게 아니에요. ‘오, 저기 나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네.’ 이렇게 남의 몸을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길거리 가다가 전봇대에 오줌 누는 사람 있죠? 일찍 집에 가는 사람은 못 보고, 늦게까지 같이 술 잡수시는 분들은 볼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술이 취해서 길거리 가다가 구두 벗고 양말 벗고 바지 벗고 자는 사람이 있죠? 그런 사람은 술 취해서 뭘 잊어버렸습니까? 자기 주체를 잊어버린 거예요. 왜냐 하면 양말 벗고 바지 벗는 것은 어디서 하면 돼요? 집에서 하면 돼요. 왜, 내 몸은 내가 관리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것을 집에서 안 하고 길거리에서 했다는 말은 술이 너무 취해서 자기가 주체됨을 잊어버린 거예요. 이게 집이 아니고 집안 식구들이 있는 게 아니고 남이 있는 곳 이예요.
그래서 주체라 하는 것은 누구에 둘러 싸여서 성립되는 것이다? 바로 타인에 의해서, 타인의 몸, 타인의 자아죠. 타인에게 둘러싸일 때 그때 형성되는 이게 주체입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호명’이라고 해요. 집사님이 길거리에 가는데 누가 뒤에서 ‘과장님’ 하면 집사님이 뒤를 돌아봅니까? 안 돌아봅니까? 안 돌아보죠. 과장이 아니니까. 저한테 누가 ‘대리님’ 해도 안 돌아보죠. 그런데 ‘목사님’ 하면 제가 돌아보거든요. 그런데 저보고 ‘집사님’ 하면 안 돌아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누가 나를 불러줄 때 비로소 나는 자아는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남의 의해서 인정받은 나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집에서 ‘도꾸, 도꾸’ 부르면 아내가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여보’하면 슥 나와요. 여보라 하면 ‘왜’ 이야기하죠. 그러면 ‘나’라는 주체는 나를 ‘여보’라고 불러줄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여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혼을 했다. ‘여보’하면 안 봅니다. 왜, 이혼해버렸는데요 뭐. ‘여보’ 불러줄 사람이 없는데. 그래서 여자들이 결혼도 안 했는데 나이 한 35살이 되어 결혼도 안 했는데 ‘아줌마’하면 화를 내는 거예요. 항상 자기는 ‘아가씨’가 주체거든요. ‘아가씨’가 주체인데 결혼도 안 해서 서러운데 거기다가 동사무소 가니까 ‘아줌마’ 하면 ‘나 아줌마 아니에요’ 서류를 보는 게 아니고 호명 가지고 시비를 걸어요. ‘나 아줌마 아닙니다. 아가씹니다.’ 하잖아요. 자기 결혼 안 한 걸 지 말로 들통 내 버린 거죠. 이게 주체입니다. 애매한 거, 제가 정리해 드렸습니다. 이제 아시겠죠.
결국 인간은 뭣과 뭐의 싸움이다? 결국은 자아와 주체와 일치되지 않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일치를 시도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일치를 시도해 봤자 다른 어떤 경우나 다른 타인이 드러날 때는 나는 거기에 급 수정에 들어가야 됩니다. ‘성도가 됐으면 똑바로 살란 말이야, 성도가 왜 술을 먹어? 성도가 왜 담배를 피워?’ 이러면 그걸 듣는 순간, 호명하는 순간 우리는 뭘 해야 됩니까? 급 수정에 들어가요. ‘한 요번 달만 피우고 안 피워야지. 술 좀 줄여 볼까?’ 급 수정에 들어가죠.
그러면 이 몸이 술을 덜 마시게 되죠. 그럼 이 몸은 분명히 자아가 한 게 아니고 누가 조정한다? 타인이 조정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타인에 둘러싸이게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뭐냐, 인간은 결국 마귀한테 조정 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니가 안 했나? 니가 니 몸을 가지고 니 자아라고 그렇게 우겨도 그거 다 소용없다.’ 타인이나 어떤 환경에 속했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다른 주체로 변신해 버리고 그 주체와 자아를 일치시키려고, 일치되지도 않는데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 간격, 그 결핍, 일치되지 않고 남아있는 그것,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를 불안정하게 만들어요.
저는 사람을 볼 때 제일 먼저 보는 게 어느 사람은 코를 본다, 눈을 본다, 다리를 본다, 이렇게 하는데 저는 사람을 볼 때 안정성을 봅니다. 정서적으로 안정적이냐, 다른 말로 듬직 하느냐. 안정적이냐. 뭔가 말은 많이 하는데 불안한 가운데 있는 말, 말은 적게 해도 뭔가 안정돼 있는 것, 또는 안정돼 있지도 않으면서 안정된 체 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은지, 그런 사람 많아요. 기도 하라 하면 ‘기도 못해요.’
안정성이 없을 때는 사람은 자기 불안정함을 감추기 위한 다른 대체되는 안정성을 끄집어내기 마련이거든요. 고것이 자기 불안정성을 이불로 다 덮으면 좋겠는데 다 덮이지 않아요. 키가 1미터 70인데 이불은 1미터 50이라 다리가 다 나와요. 그게 안 맞아요.
그래서 이 안정성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안정되게 하는 어떤 방법을 이야기해 줘버리면 그 사람은 두 겹 세 겹 삼겹살 되면 계속해서 위선의 층들은 더 증가합니다. 그래서 그 증가된 층은 첫 번째 인 뗄 때, 인 떼는 게 뭐냐 하면 본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숨어있는 걸 폭로시키기 위해서 주께서는 추적자처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점점 더 나가 와서 뜯어내는 거예요. 쌓이고 쌓인 것을 뜯어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바리새인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기적을 베풀었거든요. 기적을 베푸니까 바리새인들이 자기편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가 자기는 중풍 병 낫기를 위해서 왔을 때 주변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있는 걸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냥 ‘ 나았다, 걸어가라.’ 이렇게 하면 될 건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하니까 그쪽에서 화를 발끈하고 나왔죠. 그게 뭐냐, 주께서 인 떼는 거예요. ‘어디를 숨겨? 어디를 숨긴단 말인가?’ 결국 마지막 심판 때 들통 다 날 거예요. 주님은 심판주이기 때문에 껍질을 다 벗기는 거예요.
의존교회 김 명현 목사님 잘 쓰는 표현 있잖아요. 속살, 나는 속살 생각하면 자꾸 영덕 게가 생각나요. 여기 보니까 게 전문요리 하나 있던데. 껍데기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죠. 속살은 여러 개 층으로 두껍게 있으니까 그걸 들춰내는 겁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난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만큼 자기가 죄인인 걸, 아니까 그 죄와 반대되는 의로움을 가지고 껍질을 강하게 쌓고 쌓은 거예요. 그건 뭔 뜻이냐, 자기 자리가 불안정 돼 있다. 안정돼 있지 못하다는 거예요. 불안정 돼 있으니까 누가 ‘어’ 하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설교할 때는 깜짝 놀라게 설교해줘야 돼요. ‘헌금 안 해도 헌금 한 게 됩니다.’ 하면 ‘어, 그런 게 어디 있노.’ ‘예배 찬석 안 해도 예배 참석 한 게 됩니다.’ 하면 ‘어, 그러면 지옥 가잖아.’ 이런 식으로.
자기 감추어진 불안정을 예수 그리스도로 어떻게 땜질하듯이 때워보려고 하는 것, 자기 행함으로 헌금, 기도, 전도로 때우려 하는 사람한테는 그 전도 그런 껍데기를 다 떼서 버려야 돼요. 그래서 가끔 이사를 해야 된다니까. 이사 갈 때 보면 쓰레기를 다 버리잖아요. 대충 못 쓰는 것을 버리죠. 그런 걸 다 떼버리는 거예요.
교회 와서 말씀을 들어야 될 이유가 우리가 교회에서 말씀을 안 들어버리면 이게 어느새 두껍게 쌓여 있어요. 뒤의 각질처럼. 그걸 말씀을 들어서 내가 못 떼는 것을 그 말씀으로 성령께서 확 떼게 만들어요. ‘이게 많이 두껍네. 1주일 동안 많이 두꺼워졌네.’ 한 달 동안 교회 안 나오면 이만큼 두꺼워요. 아유, 이렇게 굳은살이, 안 되면 치과에선 집게 들고 와서 강제로 떼어 버리죠.
이사야에 보면 ‘너희가 벌거벗은 채로 나올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본래의 자리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뭔가 커버해서 그 말씀을 스폰지에 흡수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는 불안정한 것을 그냥 불안정하게 노출시키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법을 아는데 그건 법을 지키려고 애를 써도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나로 하여금 자꾸 죄를 짓도록 부추기니까 ‘나 이렇게 불안정합니다.’라고 노출시키게 하는 그 성령의 작업, 그럴 때 이렇게 발각된 데서 오는 그 환희, 완성이죠. 그게 안정감, 완성. 오호라 감사하리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양하리로다. 이 그리스도 찬양이 자기 껍데기 홀딱 날라 갈 때 그때 찬양이지, 입만 살아서 찬양한다고 찬양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뭐가 있다? 몸이 있다. 그런데 몸이 어디서 왔느냐, 인간은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이미 하나님과 단절됐기 때문에. ‘아, 나는 안다.’ 이 신은 가짜인데. 그냥 신으로 오면 그냥 신의 존재만 오죠. 신이 있어서 내 몸을 만들 때 신께서 깔아놓은 그 기본적인 구조 환경은 우리는 모르잖아요. 그게 요한계시록에서는 6인, 7인으로 돼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모른다고요. 우리는 평소에 그걸 못 느끼고 살아가요. ‘신이 만들었겠지.’ 만들었는데 어떻게 만들었지? ‘그런 몰라.’ 뭣 때문에 만들었고 2012년 7월 달에 내 몸은 어떻게 하라고 만들어 졌는가, 몰라요. 내일 일을 누가 압니까? 7월 29일 날 내 몸을 어떻게 돼야 되는 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라요. 그때 가봐야 알죠. ‘아, 내가 이거 하라고 이 몸 되었지.’ 그때 가봐야 알죠.
지금 한국 올림픽 대표 팀이 멕시코하고 붙는데 몇 대 몇으로 될지 미리 아십니까? 그거 알면 로또 하면 대박 납니다. 모르잖아요. 주식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거 미리 알면 베팅하면 돈 많이 타죠. 그런데 만약에 그때 어떻게 된다면 그거 되기 위해서 우리 몸이 그때 주께서 애초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항상 소급해서 결과적으로 해석해야 됩니다.
이런 걸 모르는 상태에서 몸이 있으니까 이 몸은 누가 관리해야 돼요? 이걸 모르니까 신을 대신하여 내가 관리해야 돼요. 내가 관리하면 되는데 이 몸이 갑자기 저 몸이 보고 싶고 어떤 사람이 초콜릿 복근이라고 하니까 ‘아유, 내 몸이 저렇게 되면 좋겠다.’ 어떤 사람은 키가 크니까 ‘나도 키 좀 크고 싶다.’ 어떤 사람이 콧날이 오뚝하니까 ‘나도 실리콘 하나 집어넣어볼까‘ 이렇게 되죠.
갑자기 나는 예쁘다. ‘나는 예쁘다.‘라고 이야기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냐 하면 나는 예쁘지 않지만 예뻐지려고 노력한다. 이게 포함이 됐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나는 예쁘다고 만족하는 사람 없잖아요. 왜냐 하면 계속 예뻐져야 된다는, 나는 그걸 원한다. I want to it. 이거 칸트 철학인데 굉장히 어려워요. 나는 그걸 원한다. 조인스 ...신학들이 이겁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뭘 원하시는 하나님이다.’라는 이야기를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그런 의견을 내세운 의견이 있어요. 이번 수련회에 그런 이야기 할지 안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수련회 해 봐야 나올지 몰라요.
나는 몰랐기 때문에 지금 내 모습에 대해서 내가 어떤 미흡을 갖고 있는 거예요. 흡족치 못한 거예요. ‘아이고, 고 소영씨 예쁩니다. 코에 점 있고 예쁩니다.’ 고 소영씨한테 물어봐요. ‘아이고, 나도 내가 원하는 만큼 예쁘지 않습니다.’
한번 예를 들어보면 어떤 여자가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당신은 예쁩니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화를 낼 수밖에 없어요. 왜, 자기가 거울 보면 못 난걸 뻔히 아는데 예쁘다 하는 것은 이건 위로삼아 하는 거라고 뻔히 거짓말을 한다고, 내가 이 거짓말을 듣고 살아야 되느냐고 화를 낸다니까요. 누구보고 예쁘다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물어봐야 돼요. ‘당신은 어느 레벨로 예쁘다고 해줄까요?’ 그래서 ‘나보고 예쁘다 하지 마소.’ ‘예쁘다 하면 당신 뜻대로 당신이 예쁘지 않습니까?’ ‘막상 예쁘다 하니까 기분 나쁘네.’ 이거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이래도 인간은 미흡하고 저래도 인간은 미흡해요.
자, 그러면 성형해서 코가 세워졌다. 그러면 예쁩니까? 이번에는 양악수술해서 상하 양쪽을 다 해버릴까, 또 허리 사이즈는 어떻게 하고, 교회 커 봐도 마찬가지예요. 교인 수 많이 모인다고 좋아하지 않아요.
인간은 이렇게 자아가 항상 주체에 끌려 다니면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교재 1페이지에 보면 공식 큰 S를 기표라 하고, 작은 s를 기의라 해서 기의와 기표가 만나서 이게 언어가 됩니다. 언어를 아까 호명이라 했죠. 이름을 부르는 것, 그런데 이 호명, 이 언어는 정해진 것이 아니고 그 사회에서, 그 주변 단체에서 약속한 거죠.
자기 여자 애인보고 ‘호박 같은 내 사람’ 이러면 기분 되게 나쁘죠. 호박 같은 사람이란 말은 한국에서는 이건 못 생긴 여자를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하나의 약조예요. 약속한 거예요. ‘백합 같은 내 사람’ 하면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들죠. 그러니 언어라 하는 것은 이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부모가 기저귀 마련하는 것처럼 이미 나를 받아주는 사회에서 이미 통용되는 그들의 약조입니다. 문화적인 관행과 관습이라 하는 거예요.
인도 사람은 밥 먹을 때 어떻게 먹습니까? 손으로 먹는다는 거예요. 안 가봐서 모르지만, 가보셨습니까? 진짜 손으로 먹어요? 아니 잘 사는 귀족들도? 와, 진짜로 신기하네요. 물론 손 씻겠죠? 예외는 없습니까? 좀 배우고 못 배우고 관계없이 다 그렇습니까? 아, 진짜 이상하네요. 그들 앞에서 포크로 먹으면 실례됩니까? 호텔에서는 괜찮죠. 아, 이것이 알고 싶다. 진짜 그러네요.
사회적 관행과 관습이죠. 이슬람 여자들이 뭘 쓴다는 게 종교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미 오래전 산과 사막에서 살아왔던 바람 부는 거와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 하나에 종속되기 위해서 여성 자체를 차이를 없애버리는 유니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옳고 그르다, 이것을 이미 후발자, 나중에 태어난 사람이 이걸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마 개혁하든지 하면 되지만 개혁 해봐야 또 나중이 되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언어가 뭘 만드느냐, 주체를 만들어요. 그래서 호명을 하는 거예요. ‘너는 무조건 인도 사람이니까 무조건 손으로 먹어.’ 이건 말을 안 해도 딱 보면 눈에 보이니까. 주변이 다 그러니까. 나에게 옷 입혀주고 나에게 학교 보내주고 그 부모가 그걸 요구할 때는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그걸 가지고 흔히 아는 말, 모태신앙이라 합니다.
모태신앙! 이 세상에 신앙 아닌 게 없죠. 그런 의미에서. 이건 이미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선택이니까, 이건 본인이 선택한 게 아니에요. 그냥 강요된 거예요. 문화 자체가 그냥 덮친 거예요.
북한 사람들 김일성, 하면 눈물 흘리고 하는 것 보면 웃긴다고요. 이건 수퍼 주니어도 아니고 동방신기도 아니고 완전히 팬클럽처럼 울고불고 좋아서 뛰고 이런다 말이죠. ‘미쳤나, 마귀 들린 건지.’ 사이비도 그런 사이비, 종교 단체도 그런 종교 단체 없잖아요.
그걸 바꿔치기 했어요. 그동안 내 몸이 주인이던 자아를 자아가 영 미덥지 못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 불안정한 자아를 안정된 타인의 주체를 끌어다가 그걸로 나의 주체를 대행해서 입힌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이게 함수관계예요. 그 함수 관계가 교재 3페이지에 이렇게 쓸 때 여러분 잘 이해못했지만 설명 들으니 알겠죠. 기표가 밑에는 압력을 가해요. 이거는 무조건적 이예요. 함수라 하는 것은 반복된다. 그 원칙대로 간다. 기의(s) 함수는 새로운 의미에 의해서 눌리게 돼 있어요. 이것은 주체가 분열된 주체($)라 해요. 기호가 없어서 이렇게 하는데, 분열된 주체에다 s₁첫 번째 기표에서 두 번째 기표 s₂에서는 뭐로 바뀌는가, 타인 (a)의 이미지로 바뀌죠. 이거하고 요한계시록 해석하고 무슨 관계있느냐,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