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43강-총정리 1207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2. 13. 10:06

2012-07-20 01:22:32 조회 : 1606         
숫자 120719 이름 : 이근호 (IP:117.55.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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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 (IP:203.♡.41.16) 12-07-24 20:03 

가락교회120719-요한계시록 총정리(숫자)43강a-이 근호 목사

제 43강a

자, 요한계시록을 총 정리하는 시간이라 말씀 드렸죠? 총 정리하면서 정리를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까, 숫자로 정리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봤습니다.

부제목이 뭐냐, ‘1(완성)과 7(완성) 사이에서’ 돼 있죠? 1 해놓고 완성, 7 완성, 완성과 완성 사이에서, 처음도 완성이고 나중도 완성이라면 중간은 어떻게 됩니까? 중간도 미완성이 아니고 완성입니다. 보통 인간의 일은 미완성인데 미완성을 보완해서 완성되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하나님의 일은 미완성일 경우가 없었어요.

한국의 춘향전 거기에 보면 변 사또 나오면 조마조마하죠? 미완성처럼, 빨리 이 도령 과거급제 해야 되는데, 요새 같으면 사법고시 합격해야 되는데, 어사또로 출세해서 어사또가 등장해야 되는데, 하면서 굉장히 조마조마 하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조마조마한 게 없습니다.

어떤 일도 완성이 아닌 게 없죠. 그걸 제가 전에 그림 그릴 때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에 이렇게 절벽과 절벽 사이를 선으로 연결된다면 이것도 완성이고 이것도 완성이라면 이게 축~ 늘어졌던 더 늘어졌던 요한계시록은 아예 많이 늘어지죠. 많이 늘어져서 아예 세상 제일 낮은 곳까지 늘어지죠. 시작이요, 알파와 오메가, 나는 시작이요 끝이요. 그 중간 과정도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주님은 완성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힘들지 않겠느냐 하는데 인간은 원래 힘들어야 그게 완성에 가깝습니다. 힘들게 사시는 게 우리한테 합당해요. 죄 짓고 난 뒤에 말똥말똥한 얼굴로 돌아다니면 이상해요. 죄인은 죄수복을 입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입은 죄수복이 너무 화려해요. 죄수복인데 루비똥인가 명품으로 너무 화려하고 비싼 걸 걸쳤어요. 고급의류나 고급 가방이나 구두, 저기 보니까 골프채까지 있어요. 죄인인데, 저거 죄인이 치는 거거든요.ㅎ 너무 신나고, 가끔 가다 ‘ 나 죄인 아닌가? 이래도 돼?’ 할 정도로 죄인 아닌 것처럼 되는데, 여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성도들은 그야말로 힘들게 삽니다. 그것이 자기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간 가장 적합한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7교회가 뭘 닮았느냐 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을 닮아서 주변에 있는 세상의 풍조와 분위기에 말려들어버렸어요. 7교회가. 7교회 자기들끼리 모인다 해놓고는 바깥에 더 관심이 있고 바깥을 더 부러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약 백성 이스라엘, 바깥을 통해서 안쪽에 대해서 ‘니 본래의 자리, 정신 차려라, 니 자리 찾아가야지.’라고 다그치는 것처럼 7교회로 하여금 주변에 있는 이런 세계에 대해서 7인, 7나팔, 7대접으로 폭격을 함으로 말미암아 7교회라 하는 것이 ‘내 손에 딱 쥐고 있다.’

바람 부는 날 같은 경우에 손수건 끄트머리를 잡고 있으면 손수건은 죽어라고 겁내죠. 비 맞고 하니까. 하지만 그 손수건 끄트머리를 누가 잡고 있습니까? 내가 쥐고 있으면 아무리 태풍불어도 손수건 하나 쥘 힘은 있잖아요. 집에 키우는 강아지가 낯선 사람한테 무서워하면서 어디로 들어옵니까? 주인 쪽으로 자꾸 들어오면서 짖어대고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어린양의 생명책’라는 그 의미를 이 어린양의 생명책이 이미 니가 겁내고 있는 바깥에 있는 악마한테 이겼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악마마저 어린양의 생명책이 이겼느니라. 이미 이긴 분의 손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쥐고 있다면,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명단이 기록돼 있다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돼 있다면 주님 자신이 이렇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까 손수건 예를 들었듯이 그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을 앞장세워서 세상의 태풍과 모든 세상의 질곡 어려움을 다 맞도록, 흠뻑 젖도록 만들면서 우리가 거기에 우리 힘으로 못 빠져나온다 싶지만 사실은 먼저 ‘어린양의 생명책에 있는 자들은 이기리로다.’ 완전히 우리를 골탕 먹이는 거 같아. 세상 모든 것은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만큼은 이러한 세상을 이기리로다. 이렇게 돼 있다 말이죠. 심지어 죽기까지 하면서 그들은 이겼다. 죽는 게 뭐가 이기는 겁니까? 죽는 것도 이기는 거예요. 죽는 것도 이겼다는 거죠.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잖아요. 남들 보기에는 재수 없다 할 거라 말이죠. 사람이 제 명에 못 죽고 병들어 죽느냐, 저주 받았나, 죄 졌나, 하겠지만 나중에 보니까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되돌아오는 걸 봐서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는 처음부터 이 완성, 처음부터 이긴 자의 손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병들어 죽게 함으로써 그걸 다른 사람에게 다른 세계를 다른 세계관을 나타낸 겁니다.

그 다른 세계 나타나는데 지금 우리를 거기다 활용하고 있어요. 우리로서는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포기 안 하면 못 견디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교정한다 할까요? 수정해 나가야 돼요.

우리 자신의 세계관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숫자로 치면 ‘0’이예요
. 0과 1의 차이는 1-0=1이죠. 0과 1의 차이는 이게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차이입니다. 1이 1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1이니까, 처음이요 나중이니까, 예수님 되기 위해서 0을 이 세상에 보내서 주님께서 끌고 오는 그 자국인데 그 자국이 1,2,3,4,5,6이예요. 7인 할 때 7인을 한꺼번에 터뜨립니까? 차례차례 터뜨립니까? 첫째 인, 둘째 인, 셋째 인, 넷째 인, 다섯째 인, 여섯째 인 나오죠?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 했기 때문에 그냥 안다고 치고 막 나갑니다. 1,2,3,4,5,6 여섯째 인을 뗄 때 인을 뗀다는 것은 옛날에도 요새도 있는데  편지가 이렇게 있으면 편지를 개봉 못하도록 이렇게 파라핀으로 붙여놓은 게 있죠. 그것을 딱 떼서 누가 봤느냐, 안 봤느냐를 남기는 것.

007 영화에 보면 007 제임스본드가 호텔에 나오면 호텔이 문제가 있어요. 호텔 나갈 때 머리카락을 붙여 놓아서 머리카락이 붙어있으면 아무도 방문 안 했고 머리카락이 떼어졌으면 누가 방문했고, 나중에 보면 뱀이...신월동 뱀 나오잖아요. 007에 나오는 것처럼 인을 뗀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 살면서도 정체를 몰라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누가 머리카락 떼듯이 누가 인을 떼듯이 예수님이 떼시는데 떼실 때는 자격이 어떤 자격이냐 하면 이미 세상을 이긴 사람에 한해서,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이미 다 제대로 운영한다는 것을 자격 받은 그게 확정된 분만 떼는 거예요.

애들 일기장을 자물쇠로 잠가 놓는데 그 자물쇠를 누가 엽니까? 일기 쓴 본인만 열 수 있잖아요. 왜, 자기가 일기를 썼기 때문에. 이 세상은 주님의 일기장 이예요. 그래서 주님만이 이걸 열 수 있다 이 말이죠. 열 때 그냥 여는 것이 아니고 1,2,3,4,5,6으로 여는 것은 그 1,2,3,4,5,6이 뭣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7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1,2,3,4,5,6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녀간 흔적이죠. 그래서 제목이 1과 7 사이에서 완성과 완성 사이에서.

1과 7이 같은 완성이지만 그 내용은 확연하게 다르겠죠. 1은 이미 느긋하게 안식에 있는 완성이라면 7은 이건 전쟁이 벌어지는 칠대로 치고 다투고 싸우고 분쟁을 일으키고 대결하고 죽기 살기로 진짜 전면으로 붙는 그런, 금요일 날 저녁에 홍대 앞에 있는 지구대 같은 목숨, 주 폭들이 술 먹고 난동을 부리는 그러한 치열한 삶의 현장, 아니면 오후 4시쯤 되면 남대문 같은, 옷 팔려고 손님 하나 더 끌려고 애쓰고 빌고 당기고, 안사면 욕하고 그 치열한 삶의 현장, 그게  7이예요.

거기다가 주께서 손수건처럼 우리를 사용해서 우리는 7로 딱 담가놓고 끝은 누가 쥐고 있고요? 어린양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을 딱 쥐고 이건 뭐가 물들어 있고? 세상 것에 성도가 완전히 푹 젖을 때 성도는 뭘 아느냐 하면 1,2,3,4,5,6으로 젖는다는 걸 유일하게 알아요. 같이 세상에서 젖어도 다른 사람은 1,2,3,4,5,6을 모릅니다. 7과 연계돼 있는 1,2,3,4,5,6을 몰라요. 그냥 자기 밥 먹고 살려고 자기 일하고 자기 사업하는 그뿐입니다. 그게 7하고 연계돼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해요. 7하고 연계돼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은 손수건 끝을 예수님의 어린양이 생명책에 내 명단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유출된 거죠. 빠져나온 거죠.

고기 잡을 때 고등어나 꽁치 잡을 때 그냥 음식을 안 하죠. 배 가르고 내장을 다 들어내죠. 우리는 주님의 내장이라. 주님의 것으로 세상에 쏟아져 나와요. 우리는 거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우리가 거기서 ‘어떻게 사는 게 힘들다‘를 느끼는 게 아니고 어째서 이게 첫째 인이야, 어째서 이게 두 번째 인이야, 주님의 벌이신 일곱 째 인을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그 말은 우리의 삶을 뭐로 번역할 수 있다? 말씀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예언 덩어리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

이걸 독일의 극작가 카프카가 표현한 이론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두두두 재봉으로 재단을 했다. 두두두두 박아 놨다. 누비이불처럼. 우리 몸 전체가 6인 7인으로 두두두두 완전히 주께서 쑤신 바늘자국이 박히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완성입니다. 뭐 착해서 완성이 아니고 나쁜 생각 안 먹어서 완성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 요한계시록의 6인이 그대로 여기에 박혀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완성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무슨 교회라 했습니까? 처음부터 무슨 교회입니까? 7교회, 그래서 7이라는 의미가 무슨 의미냐, 그걸 풀어나가야 되겠죠. 자, 1번 봅시다. 주체와 자아, 주체는 뭐고 자아는 뭘까, 여기에 몸이 들어가면 이해가 되죠.

주체와 자아, 몸의 차이점이 뭐냐, 애매한데 애매한 거, 제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몸은 이미 있는 거죠. 몸은 여기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꼬집으면 ‘아야’하는 몸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뭘 모르느냐 하면 내 몸은 있는데 ‘누가 내 몸 있게 했느냐’를 몰라요. 엄마 아빠한테 물어봐도 몰라요. 2억 개 정자가 쏜살같이 난자 쪽으로 공격을 가하는데 중간에 호르몬에 의해서 다 죽고 여기 한 200개가 여기까지 도달해서 난자를 포위한다는 거예요. 포위를 하고 그 다음에 이 난자와 용납되고 난 뒤에는 나머지 199개는 장렬하게 알아서 죽어서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팔관에서 수정이 돼서 나중에 줄기세포로 번져서 몸이 된다는데, 확률이 여기서는 (200분의 1)이고 여기서는 확률이 (2억분의 1)이 되겠죠. 중간에 지가 누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2억분의 1) 가운데 그 중에 2억분의 1 그 중에 어느 게 나인지 알 수가 없어요.

성경은 예레미야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내가 태중에서 이미 너를 알았나니, 이렇게 돼 있어요.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세례요한 아버지가 자기 자식 낳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한나 같은 경우에도 자식이 없었어요. 리브가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사라에게 난자 있고 아브라함에게 정자 있어도 난자 정자 있어도 애기라 하는 것은 자기가 낳을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애기는 부모가 낳는 것이 아니고 부모를 통해서 낳게 되기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는 게 아니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나셨다고 돼 있어요. 마태복음 1장 16절에 보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냥 나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알고 예수 안에서는 모든 인간은 그냥 우리도 나온 거예요. 그냥 나온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부모 역할은 계시 전달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식 낳잖아? 부모는 자식을 낳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부모를 통해서 자식을 낳게 했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아비멜렉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자, 올케, 누이 모든 여자의 태를 다 닫아버렸어요. 여기서 정자가 가다가 주님의 계엄령에 의해서 전부 다 스톱이 돼 버렸어요. 난자한테 가서 수정이 안 되도록 다 만들어 놨다니까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몸은 피조물이잖아요. 피조물은 그냥 피조물 떨어질 때 홀로 자존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을 관리하는 관리체제가 함께 있습니다. ‘발걸음을 세신다.’고 돼 있죠? 집사님은 발걸음을 몇 번 셌어요? 모르죠? 몰라도 괜찮아요. 주께서 알고 계시니까. 주께서는 발걸음 셀 때마다 하나, 둘,....발걸음을 세십니다. 오늘 내 머리카락이 몇 개 빠졌는지 몰라요. 수요일 날 했던 동영상을 보니까 내가 깜짝 놀랐어요. 머리가 중간에 빠져서 동방교회 같아, 거긴 일부러 깎는데 난 빠져서 허예. 머리카락이 몇 개 빠졌는지 주께서 하나, 둘...세시죠.

피조물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관리체제에 들어갑니다. 여기 길거리에 침 뱉고 담배 피우는 젊은 애들 지 맘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허락하심에 껌 씹고 담배 피우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어떤 행동도 주께서 허락 아니면 인간은 자기 발자국도 못 세고 키도 한자라도 자랄 수 없습니다. 들에 피는 들풀이 지 맘대로 자라날 수가 없어요. 자라날 수 있는 권리가 들풀한테는 없습니다. 그 흔해빠진 참새, 날개 짓, 그 지 맘대로 날지 못해요. 그러니 하나님을 얕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얕보지 말란 말은 이 설교자로 하여금 항상 늘 두려움을 갖게 만들어요. 행여나 사람들이 알게 하는 설교 했을까봐 겁나는 거예요.

원래 인간은 죄 짓고 난 뒤에는 자기 몸이 있음이라고만 알지, 누가 있게 한 것은 모르게 돼 있다고요. 모르는 사람에게 ‘당신의 몸은 하나님이 했습니다.‘ 라고 해도 사실은 모르는 상태에서 지식으로 ’하나님이 만들었구나.‘ 수용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면 그건 안 되거든요. 그건 방지해야 되거든요. 어렵죠? 지식으로 받아주는 것을 못 받아들이게 방해를 해 줘야 돼요. 우리가 방해한다고 방해되는 건 아니지만.

다시 해봅시다. 몸은 그냥 우리는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있는가를 몰라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몸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몸이 어디서 왔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간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 몸은 나의 것이다.’ 해서 자아를 만듭니다. 이걸 철학적 용어로 존재라 하는데 존재 안에 들여다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 소유권으로 돼 있어요. 내 몸은 나의 것이라. 그게 존재입니다.

그래서 정박아들이 존재감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어요. 존재감이 없습니다. 사람이 약물 복용, 마약 복용했다. 존재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내가 미쳤지, 왜 행동을 그랬을까, 본인도 몰라요. 존재감이 없어요. 심지어 정신병자 되면 자기 귀를 베어버려요. 귀 베어버린 사람 있죠? 유명한 화가 가운데, 빈센트 반 고호라는 사람 있잖아요. 자기 귀를 베었습니다. 존재감, 소유성이 없어요. 알코올 중독 하는 사람은 자기 몸이 자기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동물적인 ‘먹고 싶다.‘가 계속 주둥이로 물 붓듯이 술이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치매 걸려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의 몸은 자기가 소유하기 위해서 자아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유하고 난 뒤에는 몸은 누구의 종이 되느냐 하면 자아의 종이 돼요. 그래서 제가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몸을 만들 때 몸만 만드는 게 아니고 몸의 주인이 누구라고요? 누구 뜻대로 한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거든요. 하나님의 복음대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된다고요.

그런데 자아는 이미 하나님의 것을 누가 뺏어 갑니까? 뭐라고 오해해요? 자기 몸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누가복음 10장인가 12장에 나오죠. 요새는 뭐 내 몸이 내 소유가 아닌 모양이라. 자꾸 잊어버려요. 누가복음 12장 19절에 보면 어떤 부자 농부가 창고를 지어놓고 뭐라 하느냐 자기가 자기보고 뭐라 합니까?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때 누가 누구보고 대화하는 겁니까? 내가 내 몸보고 하는 거예요. 자기 몸은 자기를 위한 애완견, 강아지예요.

여자가 성형을 한다든지,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백설 공주 계모가 거울보고 하는 소리가 누구보고 합니까? ‘거울아, 거울아.’ 자기가 자기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 속에 거울 하나 있다 이 말이죠. 최종적인 판단은 자기 거울보고 하는 겁니다. 백설 공주 계모 아닌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심지어 지옥 가도 지옥 가는 나를 달래주고 위로할 자는 누굽니까? 여러분? 아닙니다. 그건 윤 복희가 하는  거고, 누가 위로할 자라? 바로 내가 영원히 내 몸을 위로해 줘요. 왜, 내 몸 없이는 니 몸 없이는 나도 없기 때문에. 빵이 없으면 빵 향기도 없죠? 향수병이 없어지면 향수도 없죠. 그러니 향수병이 있을 때 향기를 느끼는 것처럼, 향수병이 우리의 몸이라면 향기는 우리 자아가 향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도 그렇고 여호와증인도 마찬가지로 뭐라 합니까? 이 몸이 없으면 우리 영혼도 없어진다고.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멸절, 아예 없어져 버려요. 그래서 만약에 그렇게 사고한다면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한 탕하는 거예요. 실컷 한 탕 해놓고 경찰이 따라오잖아요. 그러면 죽으면 그만 이예요. 없어지면 잡을 나도 없으니까, 죽고 난 뒤에 누가 욕하든 말든 내가 없는데 뭐.

성경은 히브리서 9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 몸의 소유권을 자기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니가 심판 안 받고 싶어도 내가 기어이 심판하겠다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 몸을. 그러니 하나님이 주인 값을 하는 거예요. 그동안 한평생 이 몸이 누구 것입니까? 내 것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주인을 모르니까, ‘오, 있네, 있는 걸 누구라 할까? 내 것으로 해야 되겠다.’ 이렇게 내 것이 된 거예요. 이게 몸이 있음이라고.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것이 중요해요. 하나님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 안 믿고 누굴 믿어요? 나를 믿는다니까요. 나한테 이익이 될 때만 하나님 찾고 나한테 손해가 되면 하나님도 관계를 끊을 요량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참, 그런 인간을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바깥에 내놓아서 니가 살아가는 거나 세상 살아가는 것이 똑같다는 보여주는데 끝에는 어린양의 생명책을 둘둘 감아서 광풍에 태풍에 날라 가지 않도록 붙잡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펄럭이는 깃발 같은 이 모든 걸 행함이라 합니다. ‘니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게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와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같아 주리라”(계22:12) 그 행함이 뭡니까? 다 어디서 나온 거다? 주께로부터 나온 행함.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신 행함, 그 행함 이예요.

자아의 몸은 서로 대화상대가 그냥 묻는 거예요. 사실은 독백이죠. 자아가 자아보고 몸을 근거로 해서.

그러면 주체는 뭐냐, 이 자아가 몸만 쳐다보는 게 아니에요. ‘오, 저기 나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네.’ 이렇게 남의 몸을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길거리 가다가 전봇대에 오줌 누는 사람 있죠? 일찍 집에 가는 사람은 못 보고, 늦게까지 같이 술 잡수시는 분들은 볼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술이 취해서 길거리 가다가 구두 벗고 양말 벗고 바지 벗고 자는 사람이 있죠? 그런 사람은 술 취해서 뭘 잊어버렸습니까? 자기 주체를 잊어버린 거예요. 왜냐 하면 양말 벗고 바지 벗는 것은 어디서 하면 돼요? 집에서 하면 돼요. 왜, 내 몸은 내가 관리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것을 집에서 안 하고 길거리에서 했다는 말은 술이 너무 취해서 자기가 주체됨을 잊어버린 거예요. 이게 집이 아니고 집안 식구들이 있는 게 아니고 남이 있는 곳 이예요.

그래서 주체라 하는 것은 누구에 둘러 싸여서 성립되는 것이다? 바로 타인에 의해서, 타인의 몸, 타인의 자아죠. 타인에게 둘러싸일 때 그때 형성되는 이게 주체입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호명’이라고 해요. 집사님이 길거리에 가는데 누가 뒤에서 ‘과장님’ 하면 집사님이 뒤를 돌아봅니까? 안 돌아봅니까? 안 돌아보죠. 과장이 아니니까. 저한테 누가 ‘대리님’ 해도 안 돌아보죠. 그런데 ‘목사님’ 하면 제가 돌아보거든요. 그런데 저보고 ‘집사님’ 하면 안 돌아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누가 나를 불러줄 때 비로소 나는 자아는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남의 의해서 인정받은 나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집에서 ‘도꾸, 도꾸’ 부르면 아내가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여보’하면 슥 나와요. 여보라 하면 ‘왜’ 이야기하죠. 그러면 ‘나’라는 주체는 나를 ‘여보’라고 불러줄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여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혼을 했다. ‘여보’하면 안 봅니다. 왜, 이혼해버렸는데요 뭐. ‘여보’ 불러줄 사람이 없는데. 그래서 여자들이 결혼도 안 했는데 나이 한 35살이 되어 결혼도 안 했는데 ‘아줌마’하면 화를 내는 거예요. 항상 자기는 ‘아가씨’가 주체거든요. ‘아가씨’가 주체인데 결혼도 안 해서 서러운데 거기다가 동사무소 가니까 ‘아줌마’ 하면 ‘나 아줌마 아니에요’ 서류를 보는 게 아니고 호명 가지고 시비를 걸어요. ‘나 아줌마 아닙니다. 아가씹니다.’ 하잖아요. 자기 결혼 안 한 걸 지 말로 들통 내 버린 거죠. 이게 주체입니다. 애매한 거, 제가 정리해 드렸습니다. 이제 아시겠죠.

결국 인간은 뭣과 뭐의 싸움이다? 결국은 자아와 주체와 일치되지 않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일치를 시도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일치를 시도해 봤자 다른 어떤 경우나 다른 타인이 드러날 때는 나는 거기에 급 수정에 들어가야 됩니다. ‘성도가 됐으면 똑바로 살란 말이야, 성도가 왜 술을 먹어? 성도가 왜 담배를 피워?’ 이러면 그걸 듣는 순간, 호명하는 순간 우리는 뭘 해야 됩니까? 급 수정에 들어가요. ‘한 요번 달만 피우고 안 피워야지. 술 좀 줄여 볼까?’ 급 수정에 들어가죠.

그러면 이 몸이 술을 덜 마시게 되죠. 그럼 이 몸은 분명히 자아가 한 게 아니고 누가 조정한다? 타인이 조정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타인에 둘러싸이게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뭐냐, 인간은 결국 마귀한테 조정 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니가 안 했나? 니가 니 몸을 가지고 니 자아라고 그렇게 우겨도 그거 다 소용없다.’ 타인이나 어떤 환경에 속했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다른 주체로 변신해 버리고 그 주체와 자아를 일치시키려고, 일치되지도 않는데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 간격, 그 결핍, 일치되지 않고 남아있는 그것,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를 불안정하게 만들어요.

저는 사람을 볼 때 제일 먼저 보는 게 어느 사람은 코를 본다, 눈을 본다, 다리를 본다, 이렇게 하는데 저는 사람을 볼 때 안정성을 봅니다. 정서적으로 안정적이냐, 다른 말로 듬직 하느냐. 안정적이냐. 뭔가 말은 많이 하는데 불안한 가운데 있는 말, 말은 적게 해도 뭔가 안정돼 있는 것, 또는 안정돼 있지도 않으면서 안정된 체 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은지, 그런 사람 많아요. 기도 하라 하면 ‘기도 못해요.’

안정성이 없을 때는 사람은 자기 불안정함을 감추기 위한 다른 대체되는 안정성을 끄집어내기 마련이거든요. 고것이 자기 불안정성을 이불로 다 덮으면 좋겠는데 다 덮이지 않아요. 키가 1미터 70인데 이불은 1미터 50이라 다리가 다 나와요. 그게 안 맞아요.

그래서 이 안정성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안정되게 하는 어떤 방법을 이야기해 줘버리면 그 사람은 두 겹 세 겹 삼겹살 되면 계속해서 위선의 층들은 더 증가합니다. 그래서 그 증가된 층은 첫 번째 인 뗄 때, 인 떼는 게 뭐냐 하면 본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숨어있는 걸 폭로시키기 위해서 주께서는 추적자처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점점 더 나가 와서 뜯어내는 거예요. 쌓이고 쌓인 것을 뜯어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바리새인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기적을 베풀었거든요. 기적을 베푸니까 바리새인들이 자기편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가 자기는 중풍 병 낫기를 위해서 왔을 때 주변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있는 걸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냥 ‘ 나았다, 걸어가라.’ 이렇게 하면 될 건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하니까 그쪽에서 화를 발끈하고 나왔죠. 그게 뭐냐, 주께서 인 떼는 거예요. ‘어디를 숨겨? 어디를 숨긴단 말인가?’ 결국 마지막 심판 때 들통 다 날 거예요. 주님은 심판주이기 때문에 껍질을 다 벗기는 거예요.

의존교회 김 명현 목사님 잘 쓰는 표현 있잖아요. 속살, 나는 속살 생각하면 자꾸 영덕 게가 생각나요. 여기 보니까 게 전문요리 하나 있던데. 껍데기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죠. 속살은 여러 개 층으로 두껍게 있으니까 그걸 들춰내는 겁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난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만큼 자기가 죄인인 걸, 아니까 그 죄와 반대되는 의로움을 가지고 껍질을 강하게 쌓고 쌓은 거예요. 그건 뭔 뜻이냐, 자기 자리가 불안정 돼 있다. 안정돼 있지 못하다는 거예요. 불안정 돼 있으니까 누가 ‘어’ 하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설교할 때는 깜짝 놀라게 설교해줘야 돼요. ‘헌금 안 해도 헌금 한 게 됩니다.’ 하면 ‘어, 그런 게 어디 있노.’ ‘예배 찬석 안 해도 예배 참석 한 게 됩니다.’ 하면 ‘어, 그러면 지옥 가잖아.’ 이런 식으로.

자기 감추어진 불안정을 예수 그리스도로 어떻게 땜질하듯이 때워보려고 하는 것, 자기 행함으로 헌금, 기도, 전도로 때우려 하는 사람한테는 그 전도 그런 껍데기를 다 떼서 버려야 돼요. 그래서 가끔 이사를 해야 된다니까. 이사 갈 때 보면 쓰레기를 다 버리잖아요. 대충 못 쓰는 것을 버리죠. 그런 걸 다 떼버리는 거예요.

교회 와서 말씀을 들어야 될 이유가 우리가 교회에서 말씀을 안 들어버리면 이게 어느새 두껍게 쌓여 있어요. 뒤의 각질처럼. 그걸 말씀을 들어서 내가 못 떼는 것을 그 말씀으로 성령께서 확 떼게 만들어요. ‘이게 많이 두껍네. 1주일 동안 많이 두꺼워졌네.’ 한 달 동안 교회 안 나오면 이만큼 두꺼워요. 아유, 이렇게 굳은살이, 안 되면 치과에선 집게 들고 와서 강제로 떼어 버리죠.

이사야에 보면 ‘너희가 벌거벗은 채로 나올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본래의 자리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뭔가 커버해서 그 말씀을 스폰지에 흡수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는 불안정한 것을 그냥 불안정하게 노출시키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법을 아는데 그건 법을 지키려고 애를 써도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나로 하여금 자꾸 죄를 짓도록 부추기니까 ‘나 이렇게 불안정합니다.’라고 노출시키게 하는 그 성령의 작업, 그럴 때 이렇게 발각된 데서 오는 그 환희, 완성이죠. 그게 안정감, 완성. 오호라 감사하리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양하리로다. 이 그리스도 찬양이 자기 껍데기 홀딱 날라 갈 때 그때 찬양이지, 입만 살아서 찬양한다고 찬양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뭐가 있다? 몸이 있다. 그런데 몸이 어디서 왔느냐, 인간은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이미 하나님과 단절됐기 때문에. ‘아, 나는 안다.’ 이 신은 가짜인데. 그냥 신으로 오면 그냥 신의 존재만 오죠. 신이 있어서 내 몸을 만들 때 신께서 깔아놓은 그 기본적인 구조 환경은 우리는 모르잖아요. 그게 요한계시록에서는  6인, 7인으로 돼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모른다고요. 우리는 평소에 그걸 못 느끼고 살아가요. ‘신이 만들었겠지.’ 만들었는데 어떻게 만들었지? ‘그런 몰라.’ 뭣 때문에 만들었고 2012년 7월 달에 내 몸은 어떻게 하라고 만들어 졌는가, 몰라요. 내일 일을 누가 압니까? 7월 29일 날 내 몸을 어떻게 돼야 되는 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라요. 그때 가봐야 알죠. ‘아, 내가 이거 하라고 이 몸 되었지.’ 그때 가봐야 알죠.

지금 한국 올림픽 대표 팀이 멕시코하고 붙는데 몇 대 몇으로 될지 미리 아십니까? 그거 알면 로또 하면 대박 납니다. 모르잖아요. 주식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거 미리 알면 베팅하면 돈 많이 타죠. 그런데 만약에 그때 어떻게 된다면 그거 되기 위해서 우리 몸이 그때 주께서 애초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항상 소급해서 결과적으로 해석해야 됩니다.

이런 걸 모르는 상태에서 몸이 있으니까 이 몸은 누가 관리해야 돼요? 이걸 모르니까 신을 대신하여 내가 관리해야 돼요. 내가 관리하면 되는데 이 몸이 갑자기 저 몸이 보고 싶고 어떤 사람이 초콜릿 복근이라고 하니까 ‘아유, 내 몸이 저렇게 되면 좋겠다.’ 어떤 사람은 키가 크니까 ‘나도 키 좀 크고 싶다.’ 어떤 사람이 콧날이 오뚝하니까 ‘나도 실리콘 하나 집어넣어볼까‘ 이렇게 되죠.

갑자기 나는 예쁘다. ‘나는 예쁘다.‘라고 이야기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냐 하면 나는 예쁘지 않지만 예뻐지려고 노력한다. 이게 포함이 됐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나는 예쁘다고 만족하는 사람 없잖아요. 왜냐 하면 계속 예뻐져야 된다는, 나는 그걸 원한다. I want to it. 이거 칸트 철학인데 굉장히 어려워요. 나는 그걸 원한다. 조인스 ...신학들이 이겁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뭘 원하시는 하나님이다.’라는 이야기를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그런 의견을 내세운 의견이 있어요. 이번 수련회에 그런 이야기 할지 안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수련회 해 봐야 나올지 몰라요.

나는 몰랐기 때문에 지금 내 모습에 대해서 내가 어떤 미흡을 갖고 있는 거예요. 흡족치 못한 거예요. ‘아이고, 고 소영씨 예쁩니다. 코에 점 있고 예쁩니다.’ 고 소영씨한테 물어봐요. ‘아이고, 나도 내가 원하는 만큼 예쁘지 않습니다.’

한번 예를 들어보면 어떤 여자가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당신은 예쁩니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화를 낼 수밖에 없어요. 왜, 자기가 거울 보면 못 난걸 뻔히 아는데 예쁘다 하는 것은 이건 위로삼아 하는 거라고 뻔히 거짓말을 한다고, 내가 이 거짓말을 듣고 살아야 되느냐고 화를 낸다니까요. 누구보고 예쁘다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물어봐야 돼요.  ‘당신은 어느 레벨로 예쁘다고 해줄까요?’ 그래서 ‘나보고 예쁘다 하지 마소.’ ‘예쁘다 하면 당신 뜻대로 당신이 예쁘지 않습니까?’ ‘막상 예쁘다 하니까 기분 나쁘네.’ 이거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이래도 인간은 미흡하고 저래도 인간은 미흡해요.

자, 그러면 성형해서 코가 세워졌다. 그러면 예쁩니까? 이번에는 양악수술해서 상하 양쪽을 다 해버릴까, 또 허리 사이즈는 어떻게 하고, 교회 커 봐도 마찬가지예요. 교인 수 많이 모인다고 좋아하지 않아요.

인간은 이렇게 자아가 항상 주체에 끌려 다니면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교재 1페이지에 보면 공식

큰 S를 기표라 하고, 작은 s를 기의라 해서 기의와 기표가 만나서 이게 언어가 됩니다. 언어를 아까 호명이라 했죠. 이름을 부르는 것, 그런데 이 호명, 이 언어는 정해진 것이 아니고 그 사회에서, 그 주변 단체에서 약속한 거죠.

자기 여자 애인보고 ‘호박 같은 내 사람’ 이러면 기분 되게 나쁘죠. 호박 같은 사람이란 말은 한국에서는 이건 못 생긴 여자를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하나의 약조예요. 약속한 거예요. ‘백합 같은 내 사람’ 하면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들죠. 그러니 언어라 하는 것은 이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부모가 기저귀 마련하는 것처럼 이미 나를 받아주는 사회에서 이미 통용되는 그들의 약조입니다. 문화적인 관행과 관습이라 하는 거예요.

인도 사람은 밥 먹을 때 어떻게 먹습니까? 손으로 먹는다는 거예요. 안 가봐서 모르지만, 가보셨습니까? 진짜 손으로 먹어요? 아니 잘 사는 귀족들도? 와, 진짜로 신기하네요. 물론 손 씻겠죠? 예외는 없습니까? 좀 배우고 못 배우고 관계없이 다 그렇습니까? 아, 진짜 이상하네요. 그들 앞에서 포크로 먹으면 실례됩니까? 호텔에서는 괜찮죠. 아, 이것이 알고 싶다. 진짜 그러네요.

사회적 관행과 관습이죠. 이슬람 여자들이 뭘 쓴다는 게 종교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미 오래전 산과 사막에서 살아왔던 바람 부는 거와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 하나에 종속되기 위해서 여성 자체를 차이를 없애버리는 유니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옳고 그르다, 이것을 이미 후발자, 나중에 태어난 사람이 이걸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마 개혁하든지 하면 되지만 개혁 해봐야 또 나중이 되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언어가 뭘 만드느냐, 주체를 만들어요. 그래서 호명을 하는 거예요. ‘너는 무조건 인도 사람이니까 무조건 손으로 먹어.’ 이건 말을 안 해도 딱 보면 눈에 보이니까. 주변이 다 그러니까. 나에게 옷 입혀주고 나에게 학교 보내주고 그 부모가 그걸 요구할 때는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그걸 가지고 흔히 아는 말, 모태신앙이라 합니다.

모태신앙! 이 세상에 신앙 아닌 게 없죠. 그런 의미에서. 이건 이미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선택이니까, 이건 본인이 선택한 게 아니에요. 그냥 강요된 거예요. 문화 자체가 그냥 덮친 거예요.

북한 사람들 김일성, 하면 눈물 흘리고 하는 것 보면 웃긴다고요. 이건 수퍼 주니어도 아니고 동방신기도 아니고 완전히 팬클럽처럼 울고불고 좋아서 뛰고 이런다 말이죠. ‘미쳤나, 마귀 들린 건지.’ 사이비도 그런 사이비, 종교 단체도 그런 종교 단체 없잖아요.

그걸 바꿔치기 했어요. 그동안 내 몸이 주인이던 자아를 자아가 영 미덥지 못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 불안정한 자아를 안정된 타인의 주체를 끌어다가 그걸로 나의 주체를 대행해서 입힌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이게 함수관계예요. 그 함수 관계가 교재 3페이지에 이렇게 쓸 때 여러분 잘 이해못했지만 설명 들으니 알겠죠. 기표가 밑에는 압력을 가해요. 이거는 무조건적 이예요. 함수라 하는 것은 반복된다. 그 원칙대로 간다. 기의(s) 함수는 새로운 의미에 의해서 눌리게 돼 있어요. 이것은 주체가 분열된 주체($)라 해요. 기호가 없어서 이렇게 하는데, 분열된 주체에다 s₁첫 번째 기표에서 두 번째 기표 s₂에서는 뭐로 바뀌는가, 타인 (a)의 이미지로 바뀌죠.

이거하고 요한계시록 해석하고 무슨 관계있느냐,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이한례 (IP:203.♡.41.16) 12-07-25 14:15 
가락교회120719-요한계시록 총정리(숫자)43강b-이 근호 목사

제 43강b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인간 자체에 대해서 인간이 그렇게 주체와 자아와 몸으로 돼 있는데 이거하고 요한계시록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데 예수님이 몸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오니까 사람들은 자기하고 같은 몸인 줄 알고 오해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일부러 오해를 유발시키러 왔습니다. 그래야 어린양이 살해당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우리를 죽이는 세상이 아니고 예수님을 죽이는 세상으로 그렇게 구조화 돼 있는 세상 이예요. 그걸 뭐냐, 마귀가 지배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악마가 지배해서 노리게 되는 게 뭐냐 바로 어떤 인간도 악마에서 못 벗어나게 만들어요. 왜, 악마는 이미 요한계시록에 나오지만 이미 그들은 유황불 가기로 작정이 됐기 때문에 그것이 안 들켜야 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북한 같아. 절대로 들키면 안 돼, 감시를 해서 666 비슷한 인을 찍더라도 절대로 한 사람(놈)도 악마에서 못 벗어나게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마태복음 2장에 나오죠. 마태복음 2장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몰래 찾아온 것이 아니고 자기들은 뭐를 보고 찾아왔죠. 별을 보고 찾아왔죠. 별을 보고 찾아왔는데 이 별이 위험한 별입니다. 별보고 찾아왔다고 하나님께서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별보고 찾아온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러 왔지만 예수님만 만난 게 아닙니다. 예수님 주변에 뭐가 포위돼 있었겠습니까? 시커먼 세력들이 예수님을 노리고 있었던 곳에 겁도 없이 동방박사 이분들이 여기에 들어온 거예요.

마치 영화에 보면 갇혀 있는 유명한 박사를 건지기 위해서 007이나 이쪽에서 보낸 유능한 요원이 있잖아요. 가는데 막 가려고 ‘박사님 이제 나갑시다.’ 나가는데 그때 또 같이 온 여자하고 007이 실수해서 ‘박사를 놔주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 그래서 애간장을 태우게 하잖아요. 영화 보면. 하여튼 여자보고 ‘따라오지 마.’ 했는데 괜히 따라와서 말썽 일으켜서 힘들게 만들잖아요.

이처럼 동방박사는 위험한 그리스도 아기 예수 보러 왔는데 사실은 아기 예수를 지켜보고 있는 어둠의 세력에 의해서 살해를, 사실 살해를 당했다고 봐야 되죠. 왜냐 하면 오던 길로 못 갔기 때문에.

누가 등장 안 했으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 등장했어요? 천사가 등장했죠. 천사가 와서 빼줬다는 말은 천사가 성도에게 관여하지 않으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천사도 그렇고 성령도 그렇고. 신약에는 성령님의 도움! 천사의 도움이죠. 사도행전 보면 천사가 베드로의 옥문을 열잖아요. 그러니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는가, 그 야고보 같은 경우에는 천사가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냥 칼에 죽게 되죠. 그러니까 야고보 몸은 죽는 것으로 돼 있고, 원래 시나리오 상, 베드로는 일단 잡혔다가 옥문이 지진이 일어나서 나오게 돼 있고,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천사가 흔들어 깨워야 나오게 돼 있고, 그래서 사람의 발걸음과 이 모든 것은 그냥 재미삼아 발걸음 세는 것이 아니고 그 발걸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한 용도로 쓰기위한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심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이 주체라는 것이 몸이 있다고 주체되는 것이 아니고 몸에서는 자아가 생기고 주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본의 아니게 우리 몸을 둘러싸고 있는 그 세력에 우리는 고개 숙이고 굴복하는 그런 입장으로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몸에 뭐가 둘러싸였다? 어둠의 세력이 둘러싸였죠. 그러면 예수님의 몸은 이 어두운 세력을 빠져나갔잖아요? 빠져나갈 때 뭐로 빠져나갔습니까? 어린양이 되셔서 빠져나갔죠? 맞죠? 그냥 ‘어이, 날 잡아봐라.’ 이렇게 나간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빌라도가 협박 공갈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지금이라도 하늘의 천군천사가 와서 나를 데려갈 수가 충분히 있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왜, 나는 그런 식으로 빠져나오는 게 아니고 다른 식으로 빠져나와야 되죠. 다른 식이 뭐냐 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희생양의 모습으로 빠져나가야 돼요. 이게 이사야 53장 5절에 나오죠.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요 계획은 주님이 세운 계획이지, 우리가 우리 머리에서 돌대가리 같은 우리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계획이 아닙니다. 우리 계획은 뭔지 알아요? 우리를 힘들게 하는데 뇌물주고 돈 먹이고 아부하고 굴복하고 고개 숙이고 그렇게 복종함으로서 뭔가 좀 몸이 편안한 식으로 사는 것이 우리는 이력이 났어요. 그게 되풀이 되는 겁니다. 센 사람한테는 비비고 약한 사람은 밟고 더 한 사람은 돈 먹이고 그런 식으로 했거든요. 그래놓고 정의 사회 구현한다고. 이번에 드라마 추적자 보면 적나라하게 그런 게 다 나오잖아요. 드라마에 나온 이름 강동영이 백홍석이 한 게 그 추적자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사람 이름 잘 못 외우는데 강동영이 백홍석이는 잘 외우느냐, 그게 우리나라 바둑기사 이름 이예요. 작가가 바둑 두는 사람이라.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주체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자기에 맞도록 주체를 강요했습니다. 그게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할 때 여기에 3차례에 걸쳐서 악마가 친히 왕림하사 예수님을 방문하셔서 3가지 시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 구조, 이 주체로 같이 손잡고 살자. 우리 딴 데 가지 말고 우리 이 세상사람 되어줘‘ 그걸 강력하게, 단 조건이 있어요. ’이 세상 권력은 내(악마)가 쥐었으니까 나한테 고개 숙이면 니가 원하는 모든 걸 다 줄게.’

괴테가 지었던 유명한 소설 ‘파우스트’란 책 있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파우스트 박사가 누구하고 거래합니다. 악마하고 거래합니다. ‘니가 원하는 걸 다 줄게.‘ 특히 과학자나 이런 사람들, 예술가나 이런 사람들은 마귀하고 거래하기가 쉽죠. 특히 작곡가 이런 사람들, ’아, 기발한 악상‘ 과학자 같으면 ’야, 마지막 요 단계에서 이게 안 풀리네. 요 단계에서, 요것만 풀리게 해주면 뭐든 다 하겠는데.‘ 또 자식 키우는 주부 같으면 ’요번에 애가 수능 성적만 나오면 내가 뭐든지 하겠습니다.‘하는 요런 것. 빡세게 기도하는 것, 100일도 안 남았어요.

제가 주일 낮인지 오후 설교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자식이 어려울 때는 갑자기 부모가 자제에 나선다는 겁니다. 나쁜 짓도 줄이고 행여나 나의 좋은 품행이 자녀가 합격되는데 보탬이 될까 싶어서 자제를 하는 거예요. 자제할 때 뭐냐 합격만 된다면 지금 자제해서 손해 본 것을 합격하고 난 뒤에 그때는 몽땅 다 맘 놓고 해보려는 마음을 잡고 그렇게 해보는 거예요. 그것이 이 세상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 합니까? 니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하죠. 그리고 너의 생명은 하늘에 있고 딴 데 가 있는데 여기에는 생명이 없어. 우리가 성도라 할 것 같으면 여기에 내 생명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살면 되는 겁니다.

또 한 번 해봅시다. 우리 생명은 어린양에 있거든요. 어린양에서 십자가가 나왔다면 이 십자가 피로 적혔는데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껏 80평생 90까지 계속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온갖 일을 당하게 만들어요. 나그네 길, 사기도 당해보고 온갖 일 다 당해 봐요. 눈물도 흘려보고 가슴도 앓아보고 또 종교적으로 나오면 복 받을까 싶어서 철야도 해보고 헌금도 교회에 바쳐도 보고 온갖 이런 사기 저런 사기를 당하면서 해보는데 결국 아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자신의 몸을 위하여 우리 한 자체로서 활용했다는 사실. 주님은 내 몸은 관심도 없어요. 예쁘나 안 예쁘나 관심도 없어요. 주님의 몸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주님의 몸을 위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갔는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서 이 시대에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두께, 예수님 몸이 여기 있고 예수님을 가둬놓았던 이 두께를 예수님께선 7인, 7나팔, 7대접으로 그 층층을 까발려내는 일의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누굴 앞장세워서? 순교자, 성도를 앞장세워서, 그걸 다른 말로 하면 7교회를 앞장세워서.

그래서 7교회에서 예를 들어서 한 교회에 앞에 뒤에 붙는 거, 7교회 사도행전은 중간에 가두고 앞에 붙고 뒤에 붙는 이 모든 내용은 누구에 대한 내용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여튼 오늘 요한계시록 다 해야 돼요. 그래도 시간 늦추지는 않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을 보면 2장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이렇게 돼 있죠? 그냥 예수님이 너에게 편지하기를, 이러면 되는데 그냥 예수님 하지 않고 보니까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리을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 7절에 보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해놓고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주어 먹게 하리라“ 돼 있거든요.

이 생명나무에 현재 누가 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가 있잖아요. 이 말은 앞에서 한 이야기, 뒤에서 한 이야기, 이 모두는 뭐냐 하면 내가 시작한 이야기를 내가 있는 곳까지 너희들을 데리고 가겠는데 그 방법에 대해서는 너희들을 그걸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거예요.

결정의 규칙과 방법에 대해서는 중간에 내용으로 차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라 하는 것은 교회에 있다고 교회가 아니라 주께서 다루시는 원칙을 가지고 다루시게 되면 고 때, 고 때 그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걸 무슨 교회라 하느냐, 이교회를 어려운 말로 ‘사건으로서의 교회’ 사건으로서의 교회는 무슨 교회와 대비되느냐 하면 존재로서의 교회와 이게 대비가 됩니다.

이번에 수련회에서 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사도바울의 십자가는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기존 교회사는 뭐가 됩니까? 사건이 아니고 현재 교회가 어떻게 하면 있습니까? 이교회는 어떻게 키웁니까? 있는 교회를 더 있게 만드는 존재로서의 교회를 가지고 그들은 거기다가 십자가, 부활, 거기다가 억지로 집어넣는 작업을 2천년이상을 해오고 있습니다.

사건이라 하는 것은 변합니다. 변하기 때문에 변하는 것은 소유대상이 안 돼요. 그런데 제가 했죠. 인간의 몸은 자아가 인간의 몸을 어떻게 본다? 소유대상으로 보죠. 소유대상으로 보니까 사건인 예수님을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한다? 소유하려고 덤벼드는 거예요. ‘주님이여, 우리교회 오셔서 우리교회 당회장 돼 주세요. 주님이여, 내 인생에 주인 되소서.’ 자꾸 소유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반대로 ‘니 자신을 부인하라’ 그런데 우리 자신을 부인해버리면 우리가 소유할 권리도 박탈당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주님의 사건에 같이 휘말리는 사건이 되는 거예요. 여기 선풍기 있죠. 선풍기에서 바람이 나오면 주님의 바람이 나옵니다. 여기다 손수건을 갖다 대면 바람에 어떻게 됩니까? 흔들리죠. 종잡을 수 없이 변화되죠.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니까요. 우리는 선풍기를 꺼버려요. 주일 날 되면 선풍기에 흔들리다가 월요일도 아니고 주일 날 오후만 되도 선풍기 꺼버리고 ‘아, 또 오늘 은혜 많이 받았네. 이 예쁜 내 손수건에 뽀뽀’ 하고 또 그걸 내 인생에 소유합니다. ‘나 오늘 은혜 받았어, 내 몸은 귀한 거야.’ 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런 나에게 엉뚱한 사람을 손님으로 보내서 또 나를 흔들게 만들어 버려요. 내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어 버리죠. 교만을 툭툭 털어내라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흔들기는 전부 다 7인, 7나팔, 7대접의 이야기로 그렇게 구성돼 있습니다. ‘누가 찾아온다.’ 이러면 쉬울 텐데 7인을 떼네, 둘째 인을 떼네,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그건 누구라고 하는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 와서 해코지하면 ‘저 놈은 나쁘다.’ 하는데 그 뒤에 오는 사람은 더 나쁜데.

첫 번째 오는 사람도 주님이 보내주고, 두 번째 오는 사람도 주님이 보낸 거예요. 왜,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먹게 해주겠다는 에베소교회에 있는 주님의 자신의 계획을 우리에게 실행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베소 교회고 우리가 바로 사대 교회고, 우리가 두아디라 교회고, 우리가 빌라델비아 교회고, 우리가 라오디게아 교회고 그런 겁니다. 7교회라 해서 우리교회, 의존교회 이런 게 아니고 교회는 한 군데밖에 없어요. 주님의 손에 잡힌 한군데밖에 없어요. 다 여러 가지의 모양새가 환경 따라서 보여주는 거죠.

한번 다시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의 몸 위주로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이 몸이 왔을 때 어두움이 자기 정체를 드러냈다. 헤롯이 두 살 밑의 애들을 다 죽였고 동방박사 죽이려 했다. 천사가 와서 동방박사 살려내고 천사가 와서 예수님의 부모로 하여금 예수님의 몸을 빼돌렸다. 그럼 귀한 것은 뭐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몸이죠. 예수님의 몸은 귀한데 예수님 몸 떠나고 난 뒤에 베들레헴 두 살 밑의 애들은 무슨 법입니까? 예수님 하나 살리고 예수님 잡겠다고 덤벼든 헤롯에 의해서 상사에 의해서 몰살당한 그 두 살 밑의 애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들의 존재 의미는 뭐예요?

처음부터 존재의미 없는 것을 그리스도와 엮이게 만들어서 존재의미를 입힌 겁니다. ‘니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자들이다.’ 참~ 매정하죠. 이걸 너무 매정하다고 보지 맙시다. 2억 개의 정자 가운데서 하나만, 내 아들 위해서 다 죽고, 나머지 1억9천9백9십9는 얼마나 매정하다 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빠져나간 이 세상에 대해서 오늘날 이 시대 식으로 해석해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콘, 그 모습은 바로 예수님 당시, 또는 사도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가지고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은 이제 다 풀렸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사대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그 당시 현재 역사 속에 실존했던 그 사건이거든요. 일단 존재잖아요. 존재를 뭐로 바꾼다? 예수님의 몸이 일으킨 사건의 반복으로 만들어 버리는 작업으로 그들이 먼저 모델로서 등장한 겁니다.

그래서 전부 다 전체 다 비유가 되죠. 실제로 빌라델비아 교회가 있더라도 그리스도 몸한테는 비유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몸이 일으키는 그 회오리바람, 그 태풍, 태풍의 눈이죠. 요번에 온 태풍의 이름이 뭡니까? 카눈인가. 카눈 태풍의 눈으로서 예수님 몸이 흔들기를 해버리면 이게 7인, 7나팔, 7대접으로 흔들기를 해버리면 예수님을 죽였던 그 어둠의 세력이 드디어 숨지 못하고 기어이 옛 뱀, 용, 악마, 그리고 마귀가 자기 정체를 기어이 드러냅니다. 드러낼 때 예수님을 죽였던 것이 바로 정치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나왔던 이 악마의 모습도 왕들이요, 제왕들이고, 또 제왕들은 이 도성 음녀, 다시 말해서 경제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을 죽이죠.

여기 몸에서 나온 것은 뭐냐 성도들이 예수님의 몸의 지체로서 여기서 나왔고 제가 아까 얘기한 손수건이죠. 손수건들이 나왔고 이것을 어둠의 세력들은 손수건을 공격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공격하게 되겠죠.

힘들더라고 요한계시록 마지막이니까 좀 참으세요. 요한계시록 12장 17절 잠간 한번 봅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그렇게 돼 있죠? 그림 나옵니까? 일단은 무슨 그림 나옵니까? 용 그림 나오죠. 용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용은 현실적인 인간을 초월한 그리고 인간을 추월하지만 인간이 붙잡을 수 없어요. 지배할 수 없는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진 신화적 동물이죠.

인간을 오히려 괴롭히면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그런 존재를 여기, 용이라고 여러분이 그림을 딱 그리고,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도로 삼키면서 용은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는 뭐냐 하면 예수님을 잉태한 여인이 나오죠. “그 여인의 남은 자손” 여인이 아들 예수를 낳듯이 여인이 또 낳고 또 낳는 남은 자손, 남은 자손인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계명을 다 지켰기 때문에 그 예수님 지킨 그 계명의 증거를 가진 자로서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바다 모래 위에 섰다는 것은 바로 뭡니까? 그 전선이 용의 출현이 바다에서 나왔거든요. 자기 출현 지를 밝히는 겁니다. ‘난 바다에서 나왔다. 땅에 있는 것하고 한번 붙어 볼까? 너희들은 완전히 내 손 안에 있어.’라고 붙는 거예요.

그럼 이 문장이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밖에 없죠. 결국, 용이 노리는 것은 누굴 노린다는 말입니까? 누굴 공격하겠다는 말입니까? 누구에 대한 대항자예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대항자. 이게 시편 110편에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니가 나의 원수의 발등상 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라.“ 그 말씀 있죠?

여러분, 메시아는 메시아 역할을 해줘야 메시아다운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다 할 때 그 예수가 인물로 믿으면 안 되고, 메시아 기능을 다하신 분으로서의 예수를 믿어줘야 돼요. 메시아 기능을 다했다는 말은 더 이상 우리 마음속에 불안정한 요소가 있다? 없다? 있기, 없기, 없기!! 예수님께서 메시아 기능을 다했는데 왜 우리가 우리 기능을 다 한다고 왜 자꾸 우리가 불안해합니까? 내 몸과 내 자아는 내 몸에 어찌할 수 없어요. 이미 우리의 주체는 마귀로부터 놀아났다는 주체입니다. 이 주체가 예수님의 몸에 의해서 우리가 다루어지게 되면 더 이상 우리가 우리 마음에서 걱정하거나 염려하거나 불안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 진리를 알았다면, 진리가 확정됐는데, 우리가 왜 불안해 할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걱정을 왜 해야 됩니까? 진리를 아는데, 진리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했는데. 우리가 어디에 매일 이유가 없다니까요. 진리인데, 뭐든지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해서 벌어진 일인데. 우리가 수정할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고 고칠 이유도 없고 되는대로 뭐든지 예수 십자가를 위해서 증거 하기 위해서 돼 가는 일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뭘 꼽사리 껴서 또 걱정거리를 만들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 염려하지 마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 말이 성령님이 원하는 뜻이 그 뜻 이예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한다는데 뭐. 그것도 죽음보다 더 강한 아가 서에 나오는 것처럼 주께서 사랑한다는데. 그 사랑하면 그 사랑을 받으면 되지.

아내가 집에서 뭔가 잘못을 저질렀어요. 홈쇼핑으로 한 100만원어치 샀는데 가짜라. 집에서 가스 불 켜놓고 운동 하다 잊어버려서 냄비 두 개 홀라당 다 태웠다. 남편 돌아오니까  오늘 탄 냄새가 나고 하니까 보통 남자들 같으면 ‘집구석에 앉아서 뭐했나, 쓸데없는 짓 했구나.’ 하는데 아내가 겁을 내서 ‘여보, 오늘 내가 낮에...’ 하면 남편이 입에 손을 대고 ‘쉿 가만있어. 난 너의 모든 걸 사랑하니까.’ 니가 이 집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은 이 사랑을 갉아먹을 수가 없어요. 그런 것들이 사랑의 흠집을 내질 않습니다.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중대한 건 사랑만 그것만 든든하다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아요. 우리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뭐 손가락 수술하고 뭐 그런 일이 있더라도. 그건 사랑에 아무런 손상이 가지 않습니다.ㅎ 기쁘지 않습니까?

왜 우리 인생에 대해서 과도하게 주제넘게 오버합니까? 분수에 넘치게 엉뚱한 생각들을 그동안 하고 온 거예요. 안 해도 되는데,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데, 걱정하면서 살고 있다 말이죠.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데 걱정을 더 보태서 살아온 거예요. 될까, 안 될까, 뭘 해도 안 되는데, 뭘 해도 안 되게 돼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되겠나, 안 되겠나, 해요? 뭘 해도 안 되는데.

7인을 떼면서 제가 아까 이야기한 마지막에는 뭐라 했습니까? 정치적이라 이야기했죠. 증거를 대하면 바로 이 바다에서 온 용이 뭐를, 짐승이었는데 이 짐승은 다음 시간에 하는 다니엘 할 때 나오는데 다니엘에서의 짐승은 뭐냐 하면 정치적인 국가 체제를 말합니다. 요걸 좀 설명할게요. 구원은 개인의 자격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고걸 아셔야 돼요. 목사님, 아브라함이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아니 아브라함 그때에는 국가도 없었는데, 국가가 있을 거예요. 국가가 없더라고 국가가 있을 겁니다.

그걸 무슨 나라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되죠.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계획이 구체화 된 것은 다윗 때입니다. 다윗 언약이죠. 다윗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나라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아들’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거 주일 낮 설교 잠간 끝 부분에 한 느낌이 들어요. 아들이란 말이 하나님께서 만들었다 해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윗 언약에 준할 때만 아들이라고 제가 잠간 했습니다.

뭐냐 하면 다윗 언약대로 이룰 때만 ‘이는 내 아들’이라고 돼 있거든요. 사무엘하 7장 12~13절에.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은 개인 육체를 아들이라 하지 않고 어떤 왕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왕을 두고 이야기했다는 것은 왕 배후에 뭐가 아우라처럼 뭐가 형성돼 있다? 나라가 형성돼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들한테 이렇게 물어보세요. 옛날에도 왕이 있었는데 왜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왜 새삼스럽게 신약에 나와 있습니까? 물어보면 답변 못합니다. 왜, 그들은 뭐라고 가르치느냐 하면 하나님이 통치한 게 하나님 나라라고 하거든요. 통치한 게 나라라는 거예요. 통치한 게 나라 같으면 구약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말은 말이 안 되잖아요. 이미 이스라엘이 있는데 무슨 하나님 나라가 와요?  있는데, 있는데. 어렵죠? 참 어렵죠? 세례요한이 뭐라 했습니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다윗이 약속한 왕(王)이 왔다는 거예요.

이 개념 바꾸는 거, 제가 아무리 설명해도 참~ 이 개념이 안 바뀌어져요. 왜 그러느냐 하면 왜 안 바뀌느냐 하면 사람이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이 내 몸이 우선입니다
. 내 몸이 우선인 것을 가지고 그 다음에 내 가족들, 내 일가친척들이 모이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씨족사회가 돼요. 씨족들이 모이게 되면 나중에 크게 되면 부족연맹에서 부족 국가가 돼요. 부족 연맹과 부족 국가의 차이점은 부족연맹이라 하는 것은 신라시대 선덕여왕처럼 전체 다 만장일치로 될 때에만 화백제도가 되거든요. 이걸 부족연맹이라 하는 겁니다. 그것은 왜냐 하면 산과 산이 있는데 옛날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과 산이 장벽이었어요. 이쪽에서는 이쪽으로 시집을 못 갔어요. 이 동네는 이 동네가 자기 세계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쪽 동네를 알게 되면 그때부터 사돈 간을 맺으면 나라가 커지는 거예요. 커지면서 사돈 간을 맺었기 때문에 이쪽이 이쪽을 지배하고 이런 건 없어요. 그냥 부족연맹을 맺는 겁니다. 이게 신라시대에 가야 같은 경우가 그렇고 마한, 진한, 변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한, 진한, 변한, 옛날 배웠던 기억나죠? 마한, 진한, 변한, 중간에 가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사금, 반짝반짝 금니, 이사금이 튀어나와요. 이사금이 뭐냐 하면 왕이 나와 버리죠. 그때부터는 이 사람들이 왕에게 종속되고 왕의 성씨, 경주 김씨, 전부 다 한번 왕이 되면 줄줄이 왕이 되고 완전히 신하가 되는 거예요. 사이좋게 동등하게 해야지 왕은 왜 하느냐, 왕은 왜 하느냐 하면 옆에서 백제가 쳐들어오기 때문에. 고구려도 쳐들어오고. 아시겠습니까?

십자가 마을이 조용할 때는 서로 자기 일 하다가 갑자기 십자가 마을 공격하러 들어오게 되면 여기저기서 막 댓글을 달게 되죠. 하나가 되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인과 서기관들이 서로 싸우고 뜯고 하다가 누구 앞에서는 공통된 의견을 내놓습니까? 예수님 앞에서는 공통된 의견을 내놓죠. ‘저거 말 믿지 마라. 우리가 아무리 봐도 믿을 사람이 못 된다.’ 무참하게 모욕을 당하죠. 그분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가짜일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한번 해봐야 된다 이 말이죠. 우리도! 성령이 와야 믿어야지, 이용가치가 있어서 믿는 것은, 이용가치가 있었으면 그분들이 먼저 예수님을 이용가치 있었죠. 탈탈 털어도 이용가치 없어요. 탈탈 털어도. 예수 믿고 탈탈 털어도 아무리 해도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소원, 이 세상의 이 어둠의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겁니다. 오해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수 믿어도 술 안 끊고 담배 못 끊고 해요. 예수 믿고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그 살림살이 나아지는 것은 저 허경영이나 통합진보당에나 거기 가 물어보세요. 살림살이 나아지십니까?

국가 정치적으로 국가 체제가 되었다는 말은 처음부터 우리는 내가 주인이 될 수 없는 입장에서 구원받은 거예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렇다면 민주 사회에서 몸에 박힌 이 몸은 주님 앞에서는 이건 뜯어고치든지 수정이 돼야 됩니다.

그 수정하는 작업을 주께서 7인, 7나팔, 7대접으로 하는 거예요. 내 힘으로 버틸 수 없는 고난과 환난이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사정없이 쏟아지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10재앙 만날 때 그들은 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답답했죠. 그동안 살았던 애굽이 황폐화 될 때 앞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어이 사느냐, 일단 우리는 해코지 안 당하니까 기분 좋다마는 그들이 얼마나 우리를 반대할 것이고, 우리는 살고 싶어도 못 살아요. 이 세상 자체가 우리가 성도의 눈에는 더 이상 이 세상이 재미있는 것도 없고 고귀한 것도 없고, 낙을 누릴 만한 것도 없고, 그냥 왠지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아주 폭격을 하는 그것이 7인, 7나팔, 7대접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달리 소망 없게 만들어요. 아예 우리가 앞에, 옆에, 옆에 보는 것마다 다 차단시켜서 요거만 보도록 좁은 길만 가도록 몰아넣는 거예요. ‘어디를 봐? 어디를 봐?’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그리스도 십자가만 볼 수 있도록 그런 사건들이 자꾸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니가 본 거 봤나?’ ‘봤습니다.’ ‘좋기는 뭐가? 소돔과 고모라야.’ 여기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바로 소돔이라 하고 애굽이라 하고 주께서 십자가 진 그 이 세상이 뭐냐, 두 증인이 있는 곳이 바로 십자가 못 박힌 애굽이고 소돔과 고모라다. 이것은 바로 두 증인은 스가랴에 나오는 예언이죠.

누가 이렇게 물으시거든 ‘요한계시록이 무슨 책이야? 공부했다면서 나한테 이야기해봐.’라고 물으시거든, 예수님의 몸이 이 세상을 빠져 나와서 천국 가면서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빠져나오면서, 나오면서 당했던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7인, 7나팔, 7대접으로 층층이 면면을 다 보여준 책이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앞장서서 이 땅에서 빠져 나오면서 알게 된 이 세상의 두께가 7인, 7나팔, 7대접으로 한 꺼풀, 두 꺼풀 벗겨 가면서 다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몸은 우리도 벗겨야 돼요? 안 벗겨야 돼요? 우리도 벗겨야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의 주체라 하는 것은 세상을 닮아가고자 해서 만들어진 주체거든요. 아까 공식 다 잊어버렸죠? S₁그리고 그 다음에 옆에 분열된 주체가 이렇게 나가면 새로운 S₂새로운 기표가 생기면서 이게 타인의 욕망으로 변한다고. 지금은 내가 여기서 이걸 만족하다가 돌아서면 사흘도 안 가죠. ‘저거 갖고 싶은데.’

외국 여행가서 시계 하나 사서 차고 오면 이 시계 처음에는 한 두 달 간 좋다 합니다. 하다가 친구가 외국 나갔다가 딴 거 사오면 ‘아이쿠, 그걸 사올걸.’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미끄러짐’이라 했잖아요. 집사님 한번 미끄러져 봤죠? 계단에서 한번, 미끄러지는 거예요. 미끄러진다는 것은 ‘요긴 내 자리야.’ 하고 분명히 눌렀는데 이게 고 자리 놔두고 엉뚱한 자리에 가버렸죠. 그럼 내 몸과 어긋맞잖아요. ‘오, 이게 아니고 여기 가면 여기서 주체가 달라지고 S₂는 또 S₁으로 바뀌면서 또 뭡니까? 또 내가 새로운 타인이 오고 새로운 기표 안에서 우리는 또 나라는 주체를 만들어지는 거예요. ’니 누구야?‘ ’나 이정도 되는 사람이야.‘ 요게 2012년도예요. 내년 되면 ’나 이정도 되는 사람이야.‘ 작년에 그랬잖아. 작년은 그때고 지금은 이때야. 우리는 만날 뭔가 새롭게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미끄러지는 겁니다. 특히 가정주부 같은 경우에는 주체 형성에 자식 자랑이 포함돼 있습니다. ’니 어느 정도야?‘ ’요번에 애가 사법고시 합격했어.‘ ’니 애는?‘ ’요번에 사법고시 수석으로 돼서 이번에 판사 됐어.‘ 계속해서 자기 주체는 애를 대신해서 나가는 겁니다.

개인 구원이 아니고 점차 7을 통해서 개인은 스스로 설 수 없게 만들어서 어떤 왕에게 종속되게 만드는 방식을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신자에게만 그런 게 아니에요. 이렇게 어렵고 힘들 때마다 우리는 안철수를 워하고 박근혜를 원하고 어떤 여호와를 원하는 거예요. 본의 아니게 내 원함과 내 기대를 충족시킬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영도자, 태양의 아들이 나오든지 위대한 지도자를 우리는 원하게 되는 겁니다. ‘바꿔 보자 이러고,  바꿔 봐도 소용  없다.’ 이러고, 옛날 자유당 시대 때 그런 구호 많았어요. ‘못 살겠다 바꿔 보자.’
바꿔 봐도 소용없다.‘ 그런 구호를 외칩니다.

인간은 분명히 개인만 찾는다고 보는데 자아는 그래요, 자아는 개인입니다. 하지만 주체로 나갈 때는 개인이 아니고 나의 이 끓는 욕망을 대신 채워줄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고개 숙일 용의가 돼 있다. 이런 식으로 자꾸 미끄러지는 거예요. 이건 불신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자도 그래야 돼요. 신자는 어디한테로 미끄러집니까? 결국은 누구한테 미끄러져요?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할 때 결국은 누구한테 손 벌립니까?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될 때는 결국은 뭡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 손 벌리죠.

그럴 때 왕에게, 주여, 나의 왕이 그리스도시며 왕이십니다.‘ 왕에게 종속됨으로서 우리는 백성의 백성 됨을 티를 내게 되는 겁니다. 그 모든 작업이 7인, 7나팔, 7대접으로 지금도 작용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리고 주님은 말합니다. ’빨리 내 십자가 죽인 대장 나와. 대장 나와.‘ 그 대장이 누구냐, 바로 옛 뱀이고 용이고 마귀고 사탄이고 그런 겁니다. 그게 정치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죠.

이러한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당시에 있는 로마 역사와 로마 상황 가운데서 실제로 사대 교회 있고 실제로 있는 그것을 모델로 삼아서 그 취지가 영원토록 세상 끝나는 날까지 계속 꽉 채워지도록 전선줄 뒤에 완성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한계시록을 마감하면서 시작도 끝도 우리 주님 알아서 주님 증거 하라고 일으킨 사건 속에 우리가 놓여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걱정 안 해도 되는데 그동안 걱정 했습니다. 염려 안 해도 되는데 염려 했습니다. 십자가로 감사해야 되는데 저희들 딴 데 눈 돌렸습니다. 이 시간부터 진리를 알았사오니 진리답게 진리가 퍼붓는 대로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