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31강-외부는 없다 1201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26. 08:59

2012-01-20 01:13:48 조회 : 1386         
외부는 없다 120119 이름 : 이근호 (IP:117.55.1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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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 (IP:203.♡.40.73) 12-02-02 15:01 
가락교회120119-요한계시록18장(외부는 없다)31강a-이 근호 목사
제 31강a

자, 오늘은 요한계시록 18장 21절부터입니다.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졌다 그랬죠? 몇 가지 정확한 것을 원하고 있는데 정확한 게, 이 내용이 뭐냐, 정확하게 이 뜻이 뭐냐 하는 거죠. 그러려면 여기에 나오는 용어들, (힘센) 천사가 나오고 그 다음에 큰 돌이 나오고 큰 성 바벨론이 나오고 그 다음에 바다가 나오죠.

이러한 단어들, 천사, 돌, 바벨론, 바다, 이 단어들이 모아져서 정확하게 뭘 표현하느냐 하면 ‘이게 진리야. 이게 현실이야. 이게 리얼리티야. 실제야.’라고 표시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돌은 어떤 것이고 바벨론은 어떤 것이고 바다는 어떤 것이고 천사는 어떤 것이다.’ 라는 것이 인간 중심으로 따로 이렇게 단어가 구비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이 하는 것은 다 이것(천사, 돌, 바벨론, 바다)을 대입해서 조립을 해보면 과연 이 뜻이 나오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안 나옵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어떻게 한 도시를 듭니까? 도시가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데 그걸 들어요? 아무리 천사라 하지만, 그리고 바다에 빠진다는 건데 바다가 왜 나오느냐 하는 문제죠.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오는 그런 언어, 문자의 연결고리 가지고서는 이쪽에 있는 따로 돼 있는 연결고리를 접근 할 수가 없습니다. 접근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동네, 역사가 아니고 묵시로 통하는 이 용어를 사용하는 몸은 우리 몸이 아니고 어디 몸이냐 하면, 예수님이 몸에서 연결돼 있는 용어로 이렇게 하나로 이해가 비로소 가능해 져요. 우리 몸은 안 돼요. 우리 몸의 일상적 용어 가지고는 이것이 풀리지가 않습니다. 그런 우리 생각에 이게 안 풀려도 ‘나는 나대로 살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일 하세요.’이러면 그만일 텐데 그렇게 ‘나 뱃장이다.’라고 나오면 될 텐데 예수님에 관계된 이 일이 지금 우리 일을 동떨어지게 할 것 같으면 상관할 필요 없는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이것이 모든 것이 ‘망상이고 착각이고 허무다.‘ 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쳐들어온다 이 말이죠.

니가 생각하는 이 세상이란 자체는 니가 만들은 조작된 것이고 니 몸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다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만날 때 그것이 사람이 일한다는 것이 자기 몸이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만 이해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본 것도 우리는 못 봐요. 안경을 이렇게 놔두고 ‘안경을 어디다 놨더라.’ 이렇게 안경을 놔두고도 만날 안경을 찾거든요. 그럴 때 ‘안경은 당신이 화장실에 놔뒀던데.’ ‘아차, 내가 이거 생각한다고 내 생각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안경이 다른 사람이 볼 때 안경이 화장실에 있다는 걸 발견했을 경우에 우리는 내가 안다는 것이 뭔가 자꾸 누락되고 빠져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게 유명한 라캉의 ‘잃어버린 편지’라는 하나의 예가 나옵니다. 편지가 책상 위에 있으면서도 편지 찾는다고 난리예요. 그런데 편지가 책상 위에 있다는 것을 왕비도 찾고 경감도 찾고 신하도 찾고 하지만 그런 단편 소설이 있어요. 어떤 편지가 있더라고 편지를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관 가지고 아무리 샅샅이 조사해봐야 그 놓여있는 편지 하나가 눈에 띄지 않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편지 여기 있네.’ ‘어~ 거기 있었는데  왜 몰랐지?’ 왜 모른 이유는 뭐냐 하면 본인은 편지가 절대로 책상 위에 보이는 곳에 있지 않고 숨어있는 곳에 안 띄는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책상 위에는 안 보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의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그러니까 사람이 내가 못 보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고,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내가 볼 수 있고 두 사람이 못 보는 것을 세 번째 사람이 볼 수 있고 열 네 명이 못 보는 것을 열  다섯 번째 사람이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은 못 보는 것도 있지만 안 보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임금님이 옷을 벌거벗었는데 임금님 옷 만든 사람이 속이잖아요. ‘ 임금님, 최고의 임금님입니다.’ 이렇게 할 때 어린애가 뭐라 그랬습니까? ‘얼레리 꼴레리, 임금님 벌거벗었다.’ 하잖아요. 완전히 까발리잖아요.

지금 정권을 잡고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분명히 자기 눈에 보이면서도 입을 함구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경우, 그런 경우 그 사람한테는 자기 잘못은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나 한 사건이든 간에 어떤 사람이 있을 때 여기서 빨간 조명을 비추든지 파란 조명을 비추든지 노란 조명을 비추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 어린양 되신 예수님 관점에서 세상을 비춰볼 때 사람들은 망상과 허구에 빠져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 내 몸 위주로 세상을 보니까 ‘진실을 전혀 모르고 있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이야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 몸 구조가 아니고 어디로 가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가서 세상을 다시 보는 이 절차를 우리가 가져야 되겠죠. 내 몸에서 벗어나서 올라갈 때 그때 필요한 관점은 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를 부정하라. 또 비슷한 말로 자기를 미워하라. 또 자기를 죽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 따르라. 다 같은 이야깁니다. 이런 이야기를 거쳐서 이렇게 갔다 와야 되는데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되거든요. 왜냐 하면 내가 나를 부정해 버리면 나를 부정한 그 자기를 자기는 부정할 수 없고 인정해야 돼요. ‘하나님, 저는 자기를 부인했습니다.’라고 하는 그렇게 구축된 나는 또 내가 인정해야 되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 선에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에 ‘자기를 부인하라’는 명령, ‘미워하라’는 모든 명령, 그 외의 다른 여러 명령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니가 못하는 것을 내가 이런 식으로 너희를 이끈다는 예수님의 자기 계획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부담 없이 봐야 돼요. 내가 이걸 하려고 하면 전혀 성경을 모릅니다. ‘주께서 이런 식으로 나를 조지는구나, 주님께서 이런 계획표 가지고 여기에 맞추어서 나를 인도하시는구나.‘라고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뭐냐 하면 생명책에 기록된, 그 앞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앞에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영생을 얻고 마지막 심판 때에 천국 갑니다. 생명책에 명단이 누락돼 버린 사람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그 사람은 마귀가 가는 지옥 불에 가죠.

그렇다면 이 성경 본문이 나와 있으면 이 성경 본문을 우리보고 지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생명책에 기록됐다고 우길 게 뻔하기 때문에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너가 앞으로 나의 성령께서 하시는 것을 보면 무엇이 점점 더 수긍이 가고 점점 더 확신이 오느냐 하면 ‘야! 이거 내가 착해서 구원받은 그런 세상이나 그런 내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그 공로, 피 용서를 알게 된 것은 전부 다 생명책에 명단이 기록된 이유 때문에 내가 이런 축복과 은혜를 받고 있다.’라는 것을 알게 만드는 일을 주님께서 일을 벌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생명책의 일을 벌일 때는 우리가 만약에 내가 교회 가서 구원받고자 한다면 누가 필요하냐 하면 ‘내가 교회 가니까 심심하니까 친구들하고 같이 가고 오고 이런 게 필요한데.’ 만약에 우리가 교회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됐다면 내 옆에 내 친구, 내 친척, 예수 믿는 아버지, 엄마, 이런 분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 누가 필요하냐 하면 이 생명책에 대드는 마귀에 속한 사람들이 필요해요. 그래서 핍박을 해줘야 되고 환란을 안겨줘야 됩니다. 믿던 사람에게 사기 당하고 믿던 사람에게 도끼 찍혀야 돼요. 저 사람에게 그렇게 투자하고 잘해줬는데 저 사람이 나중에 복음을 버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야 돼요. 왜냐 하면 그렇게 될 때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골라 가는 사람이 아니고 생명책에 인도하기 위해서 반 생명책, 생명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옆에 배치를 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 믿지 말고 말씀 믿게 하는 그러한 사태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옆의 사람들한테 하나의 사람이고 하나의 여자고 하나의 남자고 하나의 어른이지만 성경 해석할 때 우리는 그렇게 보지 말고 ‘생명책에 기록이 안 되었었구나.’라는 성경적 안목으로 우리가 입에서 표현돼 나온 거예요. 비로소 그때에, ‘저것은 인간적인 능력이 아니다. 저것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흐리게 만드는 마귀와 연계된 그러한 작당들의 일부다.’라고 평소에 성경책을 안 보면 ‘저 사람이 왜 나한테 감정이 있나.’ 이렇게 나오는데 성경책을 보고 투입되면서 이것이 성경말씀대로 새롭게 정리되는 겁니다. 깔끔하게 매끄럽게 성경 말씀대로 정리정돈이 돼 가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이해됐다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출발점이 어디냐 하면 바다예요. 성 바벨론 성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바벨론 이예요. 바벨론은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만 워낙 강의를 많이 했기 때문에 잊어버리니까 되풀이하면 바벨론은 최후의 제국이면서도 모든 제국에 통합된 제국, 시간적으로는 최후고, 그리고 공간적으로서는 전부 모든 마지막 때의 모든 인간사회의 전부를 통칭할 때 그걸 성 바벨론이라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여러 번 설명했지만 다시 말씀드리면 느부갓네살이 넘어져서 느부갓네살이 자기를 위해서 만든 금신상이 넘어지면서 그 코가 땅에 닿고 발이 땅에 닿을 때 한 돌이 날아와서 그걸 부수면서 드디어 세상 인류역사는 끝이 납니다. 끝이 나는 그 신상을 발딱 세우게 되면 전체 인류역사를 대표하는 하나의 신상이 되는데 그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나라가 바벨론이거든요. 바벨론이 엎어지면 세상역사고 바로 세우면 바벨론 되고 바벨론이 세워졌다는 이 말은 엎어졌다는 말이 엎어짐과 동시에 드디어 세상은 gameover,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운명과 뭣과 연관돼 있느냐 하면 세상 멸망과 연관돼 있어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바벨론은 누가 무너뜨리느냐. 바벨론은 자체적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내분이 나도 그 내분 자체를 포함해서 바벨론 안의 일이기 때문에, 뭐냐 하면 ‘제국에는 외부가 없다.’ 외부가 있어야 안과 밖이 구분이 되는데 제국에는 외부가 없어요. 죽어도 그 안에서, 살아도 그 안에서, 그 안에서 북적북적, 그 안에서 북적북적 이예요. 이게 오늘날 인간들이 보는 세계관입니다.

인간의 세계관은 우주 끝, 안드로메다에 가도 소용없어요. 그것도 인간의 망원경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외부가 없어요. 우주는 자체적으로 외부를 만들어 내지 우주 바깥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주가 커지는 것이 외부의 마지막 한계점을 계속 만들어가기 때문에 외부라는 게 없어요. 그래서 바깥에서 나가자 하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요즘 사람들 보세요. 바깥으로 구원받으러 가자 안 하죠. 그냥 이 땅에서 성공하고 출세하자 이거 아닙니까? 사는 이유가 뭔데요?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삽니까? 이 안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사는 겁니까? 이 안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외부라는 것이 인간머리에는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외부라는 것이 없는데 성경에서는 주님은 뭐라 하시느냐 하면 ‘나는 너희들이 외부가 없는 세계 외부에서 왔다.’ 이러시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니는 니 아버지는 요셉이고 아버지는 목수고 당신 태어난 것은 베들레헴이고 그러니 베들레헴이라는 시골에서 메시야가 날 리가 없다.’ 다시 말해서 항상 사람들이 보는 것은 외부 바깥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외부 안쪽에 있는 통용되는 세계관과 사고방식 가지고 예수님을 이해하려 한 거예요. 내 몸 중심으로 예수님을 이해하려 한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내가 몸이 아프다. ‘예수님, 내 몸 건강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자체가 예수님을 내 안의 세계로 다시 한 번 발목 잡는 거예요. 내 안으로 끌어당겨서 당신이나 나나 우리 외부세계 생각하지 말고 이 안에만 잘 먹고 잘 삽시다.‘하는 식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안 놓아주려고 시도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합니까? ’나는 떠나야 한다.‘

이번 수련회 하면서 중요한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잖아요. 유대인들도 바리새인들도 제자들도 다 가는데, 샛길로 빠지죠. 예수님께서 죽 가다가 샛길로 빠지니까 여기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노’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은 외부로 갔기 때문에 이 땅이 아니고 외부로 갔기 때문에 그 외부라면 나도 따라가야지.‘라고 나선 거예요. 베드로가 따라나서려고 ’내가 목숨 바치고 따라나서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못 온다.‘는 거예요.

자, 여기서 어려운 문제 있어요. 예수님은 이 세상 외부, 바깥으로 나가서 예수님 아는 다른  세계(하나님의 세계)에 갈 수 있는데 왜 인간은 자기 세계에서 예수님 따라서 베드로가 왜 가지 못하느냐 말이죠. 베드로란 인간이 예수님 따라 가지 못하는 이유를 베드로는 평소에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지 못했거든요. 이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외부, 내부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는 외부, 내부예요.

인간들이 외부라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고 착각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살기 더러운 세상 빨리 죽어서 천당 가야지.’ 그게 망상이었다니까요. 그건 인간이 생각하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거예요. 그걸 시간적 이미지, 공간적 이미지라 하는데 인간의 이미지는 항상 외부와 내부, 지금과 그리고 미래, 항상 구분돼 있어요. 그걸 합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그 정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바깥, 거기서 말하는 미래, 거기서 말하는 천국, 이 모든 것도 막상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가 보니까 그것도 말짱 조작된 거예요. 그야말로 마귀가 시켜서 조작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외부가 없다’는 말이 맞아요. 외부를 현재 이 세상 말고 바깥세상이라 해도 그 바깥마저도 외부가 아니고 내부에서 언제든지 상상할 수 있는 외부, 내부에서 만들어 낸 외부에 불과합니다. 그게 뭐냐, 바로 신화의 세계라는 거예요. 13세기부터 14세기에 서양에서 나온 게 이태리 피렌체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르네상스라는 거예요. 르네상스, 재생, 르네상스란 뭐냐 하면 옛날 기독교 오기 전에 그리스 로마의 신화가 풍부했던 풍부한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은 신과 인간, 인간과 신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대화 하면서 이 세상을 같이 공유했던 겁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그 신화의 세계, 헬라 로마의 세계의 신은 우주 밖에 있습니까? 우주 안에 있습니까? 우주 안에 있어요. 안을 관리하는 겁니다. 우주 바깥에는 신이고 뭐고 없어요. 우주가 전부예요. 동양철학에도 우주가 자연의 전부예요. 우주 밖이라는 게 성립이 안 됩니다. 자연 밖이라는 게. 자연 밖에 뭐가 있더라도 그것도 자연의 일부가 돼 버려요. 그만큼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서 사는 거예요.

그림으로 그리면 공이 대자연인데 점이 만약에 예를 들면 ‘나’라고 하면 그런데 이 공이 찌그러지면 나는 어디 붙어있습니까? 바깥으로 튀어나옵니까? 안 튀어나오죠. 찌그러진 이 표면에 하나의 점으로 같이 찌부러지죠. 요게 인간들의 위치입니다. 피조물의 위치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멸망할 때 우리도 같이 멸망의 대상 속에 우리가 일부로 포함이 되는 거예요. 이 점이 무슨 자격으로 튀어나옵니까? 우리는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멸망해도 로켓처럼 멸망하는 걸 보면서 지가 따로 튀어나오기를 사람들은 상상해요. 왜,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한번 물어 봅시다. 사는 것이 힘든 게 나 때문입니까? 남 때문입니까? 누구 때문 이예요? 아무도 몰라요. 그냥 힘들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한적한 곳에 한 사람이 등산을 합니다. 저 멀리 차가 들어옵니다. 차가 들어오는 겁니까? 사람이 들어오는 겁니까? 차가 알아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안에 탔잖아요. 사람이 나타날 때 반드시 사람은 움직임을 몰고 온다고요. 사람이 차를 몰고 오잖아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우주 안에 점이지만 우주 안에 점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인간이 알죠. 그런데 우주 안의 하나의 점이고 점이라는 생각을 누가 갖고 있다? 내가 갖고 있으니까 우주가 큰 거예요? 내가 큰 거예요? 나보다 우주가 더 크죠. 왜, 안드로메다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내가 아니까 아무리 우주가 넓고 커도 다 어디 안에 있소이다? 내 머리 속에 있소이다. 내 머리 속에 보다 더 나간 것은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자, 그럼 사두개인이나 베드로나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믿을 때 어떻게 믿겠습니까? ‘이미 하늘나라가 있고 거기서 메시야가 왔다.’라는 생각을 갖겠죠. 이건 누가 만들어 낸 생각입니까? 인간이라면, 바리새인이라면 유대인이라면 베드로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이 말이죠. 지금 우리 정확한 뜻을 압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 하셨느냐 하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할 때에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아이 훌륭하다. 착하다. 공부 많이 했다.’이게 아니죠. ‘이걸 알게 하신 것은 니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다.’ 했죠. 여기서 베드로가 오해한 거예요. ‘혈육이 아니고.’란 말을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알려 준 것도 뭐로 전환시키느냐 하면 내가 익히 안다는 것은 이미 내 세계관 속에 이 고백도 내 것으로 이미 들어 와버린 거예요. 들어와 버린 상태니까 그 다음부터 자기는 칭찬받은 상태니까 자기는 구원받았다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고난 받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 하니까 ‘주여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할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뭐라 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했죠.

자, 그 소리 들을 때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 것은 뭐며 신앙고백을 듬뿍 담고 있는 자기 보고 사단이라고 지적한 그건 또 뭡니까? 이 문제를 제가 내가 본 책에는 이걸 문제를 풀어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어떤 주석가나 어떤 신학자나 어떤 목사도 내가 아는 이상은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겠어요? ‘베드로야, 뭐 좀 안다고 우쭐대지 마라.’ 고 정도로 할 텐데,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믿어주셔서 제가 오버했습니다.‘ 이런 것이 아니고, ’사단아 물러가라.‘ 했다고요.

이게 베드로는 뭐냐 하면 뭘 고백해 놓고 고백한 것이 자기의 주체의 소유된 자기 것으로 삼아버린 거예요.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자기 것, 내 것이라고 삼은 그것, 그것이 사단이 하는 짓이 그래요. 아무리 좋은 고백이고 아무리 훌륭한 고백이라도 일단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사단의 악마의 것이 돼 버려요. 그러면 뭐냐 그 다음부터 주께서 ‘누구든지 날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날 따라 오너라.’ 그 이야기가 사단 이야기 바로 뒤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못 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걸 염두에 두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께 구원받겠다는 그 모든 그림도, 이미지도 이미 어디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일부가 돼 버리면 결국 누가 누굴 믿어요? 나는 내가 끌어 모은 좋은 성경구절 멋진 것 다 끌어 모은 그 자체를 내가 믿게 돼 버려요. 이것이 바로 지금 그 인간을 이러한 우주성에서 인간자체에서 끄집어내주려 하는데, 그만 끄집어 낼 것 없이 내가 알면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도 알고 언약도 알고 예수도 알면 되지,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미 알면 주께서 알아서 구원해 주겠지.‘하는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가 뭘 알아야 됩니까? 바로 자기가 세 번씩 주님을 모른다 하고 부인하는 가운데서 베드로가 알게 된 것이 뭐죠? 결국 베드로가 끝까지 몰랐던 것은 십자가에 대해서 뭔지 몰랐어요. 죽는다는 그 개념도 지가 죽는 거와 섞일 수 있는 죽음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샛길로 갈 때 예수님이 죽으러 간다 할 때 ‘나도 따라 죽겠습니다.’ 했잖아요. 이(예수님) 죽음과 이(베드로) 죽음이 같은 죽음이 아니에요. 예수님 죽음과 우리 죽음이 같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어도 안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냥 있어라. 그냥 있어. 그냥 있으면서 만날 상상만 하고 있으란 말이죠. 그러나 내가 성령을 보내서 너희에게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뭐를 지식을 소유한다든지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체가 이 세계, 우주전체가 함께 이걸 박살나고 저주받고 심판 받게 하시는 그 힘에 의해서 같이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같이 무너지고 주께서 자신의 성령이 임한 사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누구의 사람이다? 그 다음부터 나는 나의 사람이 아니고 나는 누구의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람 이예요. 성령이 안 오면 나는 누구 것입니까? 성령이 안 오면 나는 내 것이 되어서 내가 열심히 성경도 배워서 십자가도 알아서 내가 내 것이니까 내가 알아서 나를 구원해야 되는 거예요. 왜,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믿으라 하면 믿고 행하라 하면 행하고, 성령의 열매 맺으라 하면 맺고 은혜 받고 실천에 옮기라 하면 옮기고 뭐든지 누가 해야 돼요? 내가 해야 돼요.

이게 바로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를 못하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얼마나 열심히 행하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말짱 소용없는 거예요. 그건 자기 값어치를 높이고 자기 질을 향상시키는 부단한 노력의 일부입니다. 그냥 자기한테 관리해서 자기가 손대서 자기가 구원해 보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그리스도의 영이 오죠. 그리스도의 영이 오게 되면 그때부터 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나라는 것은 나한테 나라고 지적할 수 있는 이것도 반칙이었습니다. 이미 소유권이 ‘나는 나다.’라는 소유권 자체가 마귀가 심어준 것이기 때문에 이것 자체를 부정해야 돼요. 이빨 하나, 귀 하나, 다 내 것이 아니고 값을 주고 산 것이니 주의 것이 된 거예요. 주의 것인데 우리는 만날 주의 것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주의 것이라고 붙여놓고 이걸 다시 또 나의 것을 하나 상정해 놓고 주의 것을 몽땅 들어다가 내 것으로 만들어 버려요.

아~주 강력한 뿌리가 인간의 몸에 있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선 삽질을 해버려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용어 하나 나왔습니다. 뭐냐 하면 ‘삽’ 일본 말로 수금포, 삽질로 퍼내는. 여기 모종이 하나 있는데 모종이 흙에 심어있죠. 그러면 삽이 모종과 흙을 함께 파내야 살죠. 바로 인간을 자기 백성을 죄가 키운 참한 열매로 보는 겁니다. 요걸 수금포, 삽으로 푸욱 떠요. 떠버리면 요건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겠죠. 뜰 때 요 삽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모두가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심판아래 있게 함이라. 여러분이 이것만 알아도 말씀 지키라는 말씀이 나올 수가 없어요.

말씀은 우리 인간의 내 중심의 언어 가지고는 말씀을 이해 못합니다. 그건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내 중심으로 하다 보면 말씀도 오해를 하게 돼요. 주님의 몸에서 나온 삽이기 때문에 여기에 피가 묻어있어요. 피는 말씀의 완성이니까, 피 묻은 삽으로 푹 떠올리면 이것은 뭐냐 이 피는 대신죽음인데 피를 왜 흘려야 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멋진 재료가 되는 겁니다. 이 어두운 세계에 많은 할 일도 많은데 주님이 삽 들고 오셔서 어두운 세계가운데 삽으로 푹 떠서 그걸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천국에 데려가요. 자기 나라 데려가면서 그걸 보면서 자기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온갖 미와 영광을 다 받는 겁니다.

이것은 뭘 따먹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죠. 선악과 따먹은 자는 생명나무를 먹으면 돼요? 안 돼요? 안 먹게 돼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자가 생명을 얻는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와중에 뭐가 바뀌어야 됩니까? 선악과 따먹은 자가 사라져야 되겠죠. 선악과 따먹은 자가 사라지고 선악과 따먹은 죄를 누가 대신 감당을 해서 그 생명을 거저주신 은혜로 영생을 얻는 사람이 돼야 되겠죠.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그 모든 죄가 대신해서 흘려진 피와 하나님의 저주가 있어야 되고 버림받은 그 분을 누가 살립니까? 아버지가 그 예수님을 살려낼 때 같이 딸려서 같이 생명의 혜택을 입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전구가 이렇게 있으면 전구를 뽑으면 뒤에 뭐가 나오죠? 전선 나오죠. 주님께서는 그냥 전구 알만 따먹으러 오신 게 아니고 전구를 뿌리 채 뽑아버리면 뭐가 올라옵니까? 전선이 나오죠. 그 전선마저 주께서 가져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보고 뭐라 하느냐 하면 ‘니는 나 보지 말고 니 뿌리를 봐라.’

사람은 자기 뿌리가 누군지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 눈이 바깥에 나와 있기 때문에 자꾸 ‘저 사람일까, 나일까,’ 만날 사람만 보니까 자기 뿌리를 몰라요. 사람은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지, 언제 ‘주여 제 뿌리가 뭡니까?’ 언제 물어봐요. 뭐 달라고 기도하지, ‘주여 저의 뿌리를 알려주옵소서.’ 이런 기도 해본 적 있습니까? ‘저의 뿌리가 뭡니까? 제가 고생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런 것, 그런에 구약에 뿌리가 왔던 사람이 있습니다. 욥 아닙니까? 욥.

여러분, 우리 뿌리는 우리를 모르게 돼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세상의 점으로 이 세상을 모르는 거예요. 욥이 모르는 거예요. 욥은 ‘내가 왜 고난 받는지, 왜 나는 고난을 받아야 되는 뿌리를 갖고 있는지,’ 도무지 자기가 아는 지혜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나타나야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나타나 보니까 욥의 뿌리는 욥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뿌리는 고난 주신 하나님이 욥의 뿌리였던 겁니다. 마귀는 욥을 잘못 건드렸어요. 마귀가 욥을 건드린 것은 누굴 건드린 겁니까? 마귀가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하나님을 시비거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해서 대신 용서하셨다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뿌리가 연결돼 있었어요. 이 전구하고 이 전구하고 연결돼 있단 말이죠. 마귀가 이 전구를 치니까 뿌리가 어디까지 연결돼 있느냐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 십자가와 연결돼 있어요. ‘누구야? 내가 대신 용서한 사람을 누가 정죄해? 누구야? 누가 너를 심판하리요.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데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어떤 거라도 너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이 말이죠.

바로 끊어지지 않는 연결고리, 이 연결 고리를 우리가 증거 해야 돼요. 주님과 나의 연결고리, 연결고리는 피와 연결되거든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이 샛길로 빠졌을 때 베드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좋은데 가면 나도 따라 갑시다.’ 하여튼 엄마가 시장가면 어린애가 공부 안하고 따라가려는... 친정엄마가 화장실 가면 따라가는 식으로..., 이렇게 예수님이 빠질 때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니가 지금 죽어도 못 온다. 내가 처소가 마련되면, 전선이 연결되면 니하고 쁘라찌 시켜서 그래서 성령 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 안에 내가 있는 것처럼 그때 성령이 오게 되면 너희들은 내 안에 너희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아버지 안에 너희가 있는 것을 알리라. 성령 안에서 이렇게 뽑아 올릴 것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이렇게 돼 버리면 도대체 우리가 행한다는 게 무용지물이죠.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갇혀 있는 세상에서는 살아봤자 갇혀있지 바깥으로 못 튀어나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거지 나사로가 바깥으로 튀어나갈 생각 안했습니다. 그냥 거지로 살았어요. 그런데 언약의 위력이 거지 나사로로 하여금 아브라함이 받는 복과 전선이 연결돼서 거지는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기고 그 전선이 닿지 않는 부자는 그 땅에서는 출세했는데 세상에 물 한 방울 없는 물 값이 그만큼 비싼지 몰랐지, 이 물을 마음대로 마시니, 천국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지옥가면 국물도 없어요.ㅎ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아이쿠, 그 흔한 물을 사랑의 하나님이 주지.’ 하는데 주님께서는 물조차도 뿌리를 탐색하는 용도로 쓰는 거예요. 지금 주시는 은혜는 안 믿어도 주시는 은혜는 노아의 희생제물 때문에 우리가 이런 물이나 햇빛을 얻고 오늘도 비가 오게 되죠. 노아 은혜 다 철수하고 다 끝나버리면 세상은 같이 망해버리고 자체가 지옥이 돼 버립니다. 옛날에 그렇게 흔하던 햇빛, 흔하던 공기, 흔하던 물도 한 방울도 주지 않고 저주의 불꽃 속에서 고생만 하게 됩니다. 그 전선의 주인공이 이미 2천 년 전에 왔어요. 그 당시 사람도 못 알아봤고 후대 사람도 못 알아봅니다.

예수님의 영을 받게 되면 세상이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면서 ‘내가 이미 주님의 것으로 되었구나,’ 주의 영이 임하면 도대체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항상 우리의 뿌리, 우리의 근본을 보는 쪽으로 살아야 됩니다.

자, 그렇게 되면 바다라는 의미가 나옵니다.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죠. 성령이 임하니까 베드로는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했죠. 지 원하는 길은 없어요.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뭐라 하시느냐 하면 ‘우리가 절망하고 있다.’ 절망이 줄어 희망이 있어요. 절망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희망이 보이지 희망 찾다가는 절망만 남습니다. 꼭 반대가 되죠. 이 절망이라 하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다.’할 때 외양간을 지을 때는 뭐를 희망 삼습니까? 외양간에 소가 가득 차는 희망이죠. 그러면 외양간을 만들 때 이렇게 소가 가득 차는 걸 상상한다면 그 외양간에서 나온 희망과 일치되려면 여기 소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러면 인간의 희망이라는 것은 현재 자기가 소속해 있는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이 시점과 같은 동질의 것이 나타날 때 그걸 희망이라고 본다 이 말이죠. 내가 지금 원하는 것과 같은 동질의 것, 외양간을 지어놨으면 소가 있을 게 아닙니까? 소가 없는데 외양간을 왜 짓겠어요. 그러니까 이 외양간 지을 때 기대했던 그 내용의 질과 진짜 자기한테 주어질 거라 예상되는 그 질과 같은 질일 때는 그걸 희망이라 한다 말이죠. 어느 인간이 외양간 지으면서 ‘소가 하나도 없게 하옵소서.’ 그런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박국 3장에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뭐한다? 나는 기뻐한다. 이게 바로 희망이거든요. 외양간에 소가 없다는 말은 외양간을 지을 때 절망입니다. 나의 기대를 절망케 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가려 졌던 하나님의 숨겨놓은 진짜 세계, reality, 진짜 현실, 그것은 하나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나는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한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고 일하실 때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절망이죠. ‘참새는 집이 있지만 나는 참새보다 더 못해.‘ 이건 하나의 절망으로 보이거든요. ’그리고 나는 고난 받고 죽는다.‘ 죽으면 절망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로 되받았습니까? 이 모든 일이 표적인데 나라는 존재가 니하고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거죠. 나는 이 세상에 제대로 현실을 보여주려고 왔는데 그것은 바로 소위 인간들이 ’희망, ’희망, ’희망, 때문에 정작 희망이 마귀로 인해 가려 졌던 거예요. 희망 없는 인간은 없어요. 인생이란 게 뭡니까? 희망을 먹고 살아요. 희망은 나의 희망을 포기할 수 없어요. 인간은 눈만 뜨면 희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희망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항상 모든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는 만반의 준비만 하면 돼요. 지가 알아서 절망하지 마세요. 괜히 그것도 트릭 쓰는 것이고, 맘껏 희망을 가지세요. 손자 키우면 나중에 대통령 되는 줄 아시고...ㅎ그 절망이 절망으로 인하여 정작 주님께서 우리가 기대해서 얻은 게 아니라 주께서 기대하는 건 따로 존재한다는 것, 따로 우리에게 마련해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월등하게 더 좋고 더 기쁘고 더 행복한 것을 지금 다 준비해 놓으신 거예요. 그것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하고 현재 내가 생각하는 동질의 것을 내놓으라고 자꾸 윽박지릅니다.

내가 지금 행하는 것도 다 노리고 하는데 ‘그 노리는 것을 달란 말이야, 이 예수님이야.’ 이런 식으로 윽박지르죠. 그러면 주님께서 ‘뭐, 또 죄 지을 것 없나, 마음껏 또 윽박 질러봐. 그 윽박 안 지른다 해서 우리가 의인되는 것 아니니까 원 없이 윽박 질려봐.’ 그리고 실제로 주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비교해봐라. 그것은 바로 나의 절망, 나의 희망이 좌절되는 가운데서 비로소 빼꼼이 얼굴을 내미는 희망 같은 것이 주님께서 준비된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목 베인 영혼들이 기쁨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죠. 참, 이게 얼마나 역설입니까?

이 목 베인다는 것, 세례 요한이 죽으면서 세례 요한 본인은 좋을지 모르지만 일가친척 보세요. 참담합니다. 일가친척, 아는 사람, 세례 요한 부인, 부인은 없었죠. 세계 요한 동생들, 심정이 어떻겠어요? 지는 혼자 종교에 탐닉해서, 종교에 빠져서 처자식도 팔아버리고 혼자 까불다가 죽는구나. 이렇게 해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절망한 본인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성령에 의해서 이것이 내 몸 같으면 걱정 하겠는데 내 몸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몸으로 넘겨진 이상은 그런 걱정을 내가 할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할 때에 뭐를 요청하느냐 하면 짐승이 올라와야 돼요.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인간에게 죽은 것이 아니고 짐승에 의해서 죽어간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땅에 계시죠. 땅에 있는데 이 바다는 땅을 위협합니다. 바다에서 드디어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허락을 해요. 그러면 이 땅은 누구의 세력 속에 들어가느냐 하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세력 속에 들어가요.

요 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 성경 말고 여러분들이 아는 정치적 용어를 동원해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정치라 하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가, 내부에서 주어지는가, 이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주어진다는 말이 많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내가 복종합니까? 내가 내 마음 안에 대통령을 원하고 있느냐, 내 마음 안에 ‘나를 위해주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월등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하는 내부의 정치적인 야심이 결국은 외부에 정치인들을 요청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정치용을 뭐라 그러느냐 하면 존재용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예요. 정치가 있다는 것은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나를 주관이라 하고 정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객체, 또는 객관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정치라 하는 것은 결국 정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라도 누구를 위해서 정치를 할 때 가장 기분 좋다? 바로 옆 사람이 아니고 저 사람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내가 직업 바꾸면 직업 바꾸는 직업마다 정치법이 달라져서 내가 바꾸는 직업에 유리하도록 그렇게 모든 법조항이 달라지기를 원하는 겁니다. 나라에서 어떤 법을 시행할 때 전에 가졌던 직업 같으면 시위를 하고 데모를 하겠는데 지금 직업을 바꾼 상태에서 보면 얼마나 좋은 대통령인지, 옛날에 목축업을 할 때는 대통령을 죽이라고 서울 시청에서 데모하다가 지금 말 타고 난 뒤에는 소고기를 폭리를 해도 아무소리 못하는 대통령이 얼마나 좋은 대통령인지, ‘역시 대통령은 훌륭해.’

결국 정치라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위해서 항상 편리하다 말이죠. 결국 이것은 그런데서 사람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잘 들어 보세요. 내 야심에 합한 내가 꾸며낸 정치이면서도 정치를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나 말고 나보다 더 넓은 세계에서 나한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데아 세계, 초월 세계에서 이 세상에는 도덕법이 있고 도덕법을 위해서 여러 가지의 변화되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초월 세계, 오직 신만 사는 세계, 완벽한 세계가 이 땅의 변화하는 인간의 세상과 만날 때는 중간에 하나님이 있을 거라 하는 것이 도덕이죠. 도덕이라 하는 것은 정의롭고 평등하고, ‘평등을 통해서 본다.’라고 사람들은 이걸 객관화 시켜요. 객관이라 하는 것은 눈에 띄게, 눈에 보이게, 내가 만약에 내 딸이 집에 가는데 누가 악한에게 돈을 빼앗겼다. 또는 내 아들이 고등학교에 갔는데 얻어맞았다. 그럴 때 갑자가 뭐를 요구합니까? 나라에 뭘 요구해요? 정의와 사랑과 복지를 요구하겠죠. 이렇게 집에 불이 났을 때 그걸 전부다 나라가 보상해준다든지, 복지를 요구하겠죠.

인간의 모든 정치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누가 요청한다? 내가 요청해 놓고 막상 정치에 대해서 필요한 것이 있거든 ‘외부에 나보다 먼저 있었던 너희들이 나에게 먼저 해 줘야 돼.‘라고 그걸 객관화 시키는 거예요. 뭔 뜻인지 이해되겠습니까? 그러면서 이 정치가 훌륭한 대통령, 훌륭한 정치가이기를 바라죠. 그거 앞, 뒤가 안 맞는 이야기예요.

자기가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봐 놓고 마치 거짓말하기를 ‘ 나보다 더 넓은 세상이 내 바깥에 있다.’라고 우기는 겁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공기업 하나 인사이동 있으면 뭐라 합니까? ‘어이그, 대통령 저희끼리 다 해먹어라.’ 욕하잖아요. 그런데 다 해먹는데 그 중에 우리 삼촌 하나 있으면 ‘역시 대통령은 좋은 대통령이야,’ 이렇게 생각한다? 생각 안 한다? 만약에 농협장이 부정선거라 해놓고 그 농협이 어느 날 와서 ‘농협에서 보상금 많이 나왔습니다.’하면 지 보상금 나왔다고 좋아하죠.

그래서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결론부터 이야기할게요.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뭐죠? 군대죠. 이스라엘=군대 이스라엘이 군대라 하는 것은 성경 말씀에 분명히 있죠.(출 7:4) 그러면 이스라엘이 군대 되기 위해서 세상은 움직이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군대라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우리의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이스라엘 군대와 전쟁하기 위해서 군대로 조직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작용합니다.

그러면 말씀 때문에 세상도 말씀을 따라가 줘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군대로 조직되려면 이스라엘 왕이 누굽니까? 보이지 않는 왕이 누구예요? 여호와 하나님이죠. 이쪽의 군대는 왕이 누가돼요? 역시 보이지 않아야 돼요. 그러면 땅에서는 인간이 해봐야 보이는 왕들, 땅에서 나온 인물이죠. 그러면 땅에서 안 나오는 인물은 어디서 나와야 돼요? 바다에서 나와요. 왜, 땅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객관화되기 때문에, 내가 요청하게 되기 때문에, 인간의 왕은 인간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러면 이스라엘이 군대가 아니라면 그 말은 맞아요. 어느 대통령도 다 누구 집 아들 아닙니까? 이명박, 이 씨 집 아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 집 아들입니까? 멜기세덱의 반차예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요. 그러니 여기에 맞서는 땅의 세계, 악마의 세계는 임금, 왕은 누가 돼야 돼요? 이 땅의 혈육과 관계없는 인물이 돼야 돼요. 그 인물이 어디서 올라옵니까? 바다에서 올라오게 되는 거예요. 바다에서! 그러니 이런 안목으로 세상을 보려면 성경을 통으로 쫙 읽고 있어야 돼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0.73) 12-02-10 22:50 
가락교회120119-요한계시록18장(외부는 없다)31강b-이 근호 목사
제 31강b

자,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가운데서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뭐냐 하면 정치적인 주관화가 객관화 된다는 그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워서 제가 쉬운 예를 들 테니까 우리가 평소에 일상생활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갇혀있는 꼴이 되는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옥이란 뭐로 구성돼 있느냐 하면 첫 번째, 물리적 기계(배치)라는 사람도 있는데 감옥에는 벽돌, 땅, 건물, 철장이 있어야 되죠. 두 번째는 유기체 기계(배치)가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죄수, 교도관이 있어야 되죠. 세 번째는 문화적 기계(배치)가 있는데 이건 뭐냐 하면 법률, 판결, 판례가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전체를 다하여 뭐냐 하면 감금, 갇혀있는 감금이 형성되겠죠.

보세요. 우리가 편하게 그냥 생각하는 ‘누가 요번에 사기 쳐서 감금됐대.’라고 편하게 말하는 요 말이 그게 뭐냐 하면 결국은 추상개념인데, 추상적인데 추상이라 하면 우리는 없는 걸로 여기잖아요. 그런데 추상하나를 위해서 실제로 현재는 아는 사람 교도관이 있고 어떤 아는 사람은 교도소에 벽돌 납품했고 또 어떤 아는 사람은 사법고시 합격해서 판사가 돼 있고, 이게 뭡니까? 우리가 말하는 세계 전체라 하는 것은 손에 만져지는 벽돌 만져지죠. 그리고 어떤 사람이 판사 되고 하는 것도 눈에 보이죠.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고 느껴지고 교제하고 법률 공부하는 이 모든 것이 ‘감금’이라는 추상명사 하나를 계속 낳게 만든다 말이죠.

그럼 추상적인 것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있죠. 있는데 감금이라는 것이 막상 몇 킬로입니까? 몇 미터입니까? 감금이 한 근에 얼마예요? 없죠. 사람의 모든 활동이 사람 활동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게 어디서 솟구쳐 올라오느냐 하면 결국은 이 세상에 떠도는 모든 추상적인 개념들은 다 밑둥치에서 형성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여기 22절에 보면 거문고 타는 자, 풍류 하는 소리, 퉁소 부는 자, 나팔 부는 자, 그 다음에 세공업자, 전부다 실제로 다 있죠? 있는데 성경은 이런 것들을 모아서 뭐라고 합니까? 큰 성 바벨론! 그런데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목사님, 큰 성 바벨론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방금 이렇게 설명했는데 ‘감금이라는 게 사실 없을 거야.’ 왜 감금이 없습니까? 이런 요소들이 뭉쳐서 감금이 있죠.

마찬가지로 ‘성경에 큰 성 바벨론은 없을 거야.’ 왜 없습니까? 여기 나와 있는데, 사람들은 큰 성 바벨론이 세상에는 없고 성경 안에만 있는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그 변화를 근거로 해서 큰 성 바벨론을 이끌어내는 겁니다. 이끌어낼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큰 성 바벨론이라는 것이 구체화되지를 안 해요. 남는 건 뭐가 남느냐, 바로 실제적으로 만들어 낸 추상화, 이걸 가지고 주관적인 것이 객관화 된 거예요. 그 객관화 된 것을 분석해 보면 뭐가 남는다? 다시 주관으로. 그러나 다시 한 번 두 개를 합쳐서 나타난 것은 뭐냐 세상은 누구의 세계다? 우리 인간들만의 세계다.

직장 다니는 사람, 회사 근무하는 사람, 다 길에 가서 물어 보세요. 세상은 누구만 있습니까? ‘우리 인간만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건물은 누가 졌습니까?’ ‘인간들이 지어 놨습니다.’ 오직 인간으로 나와서 인간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정부로 이 세상에 영원히 살아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아브라함 링컨이죠.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그것이 바로 인간이 자기 주관을 요청한 객관화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객관화 세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건 따로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외부는 없어요. 뭐냐 하면 인간들끼리가 그것이 전부입니다. 인간 바깥에 외부는 없어요.

그렇다면 여기 종교를 봅시다. 종교 있으려면 벽돌 있어야 되고 강대상 있어야 되고 종도 있어야 되고 매미채 있어야 되겠죠. 그 다음 유기체 기계는 교인 있어야 되고 목사 있어야 되죠. 문화적 기계로는 뭡니까? 교회법 성경이 있죠. 합해서 뭡니까? 종교 기독교 교회 많잖아요.

그렇다면 결국 이것은 뭡니까? 인간의 주관이 뭐가 된 것이다? 객관화 된 거죠. 결국 합치면 교회고 하나님이고 예수고 간에 다 누가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거예요. 인간이 만들어 내놓고 하는 말이 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을 두고 그 다음에 교회서 신을 만들어 내면 그 신은 인간 외부 바깥에서 못 벗어나고 신이 유발시킨 교회 말을 누가 들어야 되요? 예수가 들어야 되고 하나님이 들어야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말을 들어야 돼요. 안 그러면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사고방식은 뭐냐 모든 것이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을 위해서 교회가 있고 예수가 있고 하나님이 있는 거예요. 사랑의 하나님이고 자비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고 모든 게 인간을 위해서 있다는 거죠.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사람을 그렇게 삐딱하게 보지 않고 죄인으로 몰아세우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 다 신처럼 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성경 이해와 성경 사고방식에서 뭐가 빠졌습니까? 뭐가 빠졌죠? 바로 인간 중에서 최고의 의를 행했던 게 누굽니까? 바리새인이죠. 바리새인보다 더 우수한 의인은 없기 때문에.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모든 인간적인 지혜와 종교적인 집결과 객관화가 모여서 한 짓이 무슨 짓입니까? 결국 누굴 죽였어요?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럼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굽니까? 사울이란 사람이죠. 사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뭐가 바뀌었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죽음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한다. 사도바울은 의롭다 했죠. 그래서 사도요한의 모든 성경이나 사도들의 성경은 일괄적으로 다 뭐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얘기잖아요.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했다 말이죠.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거론한 게 아니고 누굴 거론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게 복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누굴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의 사람을 위한 하나님이었는데 그걸 뭐로 바뀐다? 예수의 예수를 위한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를 만들었다고 봐요.

그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이 분명히 사람이잖아요. 신학자들은 사도바울을 뭐로 분석합니까? 인간의 뜻이라고 분석하죠.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니까 ‘너희(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내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니 참 고맙다고 돼 있죠.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려면 사람의 말이 아닌 이유를 대야 돼요. 사도바울의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돼요. 그 이유는 같은 인간이 그 이유를 따질 근거가 없어요. 근거는 십자가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사도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본인의 사적인 신학적인 견해로 봐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악마가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그렇게 했다고 이야기해요. 한번 보세요. 사도바울이 자기가 하는 말을 안 믿는 것은 악마가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실제로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귀신이 뭐라 합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사도바울은 악마의 나라에서 유명해요. 그 이야기를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볼 때 뭐로 봅니까? 그냥 우리하고 보통 사람으로 보고 그 사람 주장하는 것은 지 개인의 사적인 견해로 보는 거예요.

그렇게 안 보고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인간의 주관에서 나온 객관으로 가는 모든 것을 뭐로 차단해야 됩니까? 이건 주관에서 객관으로 가는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수밖에 없는 바로 이미 어두운 세계가 지배하고 있다는 그러한 증거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만약에 교도관이다. 동생이 취직됐다. 추카, 추카, 추카, 추카. 그러면 내가 찾아가서 ‘너 교도관 됐다며?’ ‘형님, 교도관 됐습니다.’ ‘교도관 돼서 뭐하는데?’ ‘아이, 뭐요. 나쁜 놈 잡아서 착한 일하고 내가 월급 받고 살죠.’ 얼마나 지당하신 말씀입니까? 그게 무슨 하자가 있고 그것이 큰 죄가 됩니까? 방금 이야기한 것이. 죄가 안 되죠. 그런데 그것이 뭐가 된다? 그렇게 교도관이 되려면 정권이 대한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국이 돼야 되죠. 만약에 북한이 쳐들어오면 지는 교도관 자리에서, 교도관, 경찰 군인들은 북한이 쳐들어오면 제일먼저 처형되겠죠. 그런데 교도관 유지되려면 어떻게 돼야 돼요? 나라가 안정이 되고 나라가 정권이 유지가 돼야 되겠죠. 본인이 교도관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벌써 뭐가 됐어요? 새로운 주관에 주관을 위한 나를 위한 새로운 객관화된 주관이 어떤 새로운 나를 주관을 지킬 수 있는 객관화의 작업을 들어간 거예요.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그럼 나는 누구편이 됩니까? 우리 아는 동생이 교도관이면 나는 누구 편을 들어요? 내 동생의 직업이 유지되고 연금 많이 받고 안정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에게 표를 한 표 던지죠. 지금 그런 실험, 그 인간들이 만들은 정치적 실험이 결국 누구한테 부딪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딪힘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 결과가 뭐였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결과를 낳잖아요.

그러니 어떤 사람이 교도관 됐다. 그 순간 교도관 된 순간, ‘나는 죄인인데 교도관 된 죄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나는 죄인인데 어떤 신입사원이 교도관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교도관 하면서 뭐를 알라? 내가 왜 죄인인가를 더 깊이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맡겼다? 교도관 일을 맡긴 거예요. 그럴 경우 정권이 바뀌어서 누가 왕이 돼야 됩니까? 이 명박이 아니고 누가? 안철수가 아니라 예수님이 왕으로 오실 날을 학수고대 하겠죠. 그게 주관의 객관화가 아니고 자기를 부정(부인)하는 겁니다.

자, 목사가 됐습니다. 그래서 교인 200명을 맡았다. 그럼 올해 한해 목표가 뭡니까? ‘자, 여러분, 올 연초 목표를 정하겠습니다. 올해 예수님 재림하시기를 다같이 기도합시다.’ 이래 나옵니까? 아니죠. 뭡니까? 200명에서 250명, 300명이죠. 그런데 그 중에 어떤 교인이 와서 ‘우리는 십자가만 증거 합시다.’라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 쫓아냅니다.

결국 종교나 이런 교도관이나 사업이나 모든 것이 집결해서, 여기 나오는 것 다시 봅시다. “세공업자가 맷돌 소리나 등불이나 신랑과 신부의 음성,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마지막 큰 성 바벨론 안에 집결된 안의 구성요소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마르쿠제라는 사람이 있어요. 20세기 초 사람인데, 마르쿠제, 하버마스, 에릭 프롬, 이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그렇게 똑똑하고 지혜 있다는 합리적인 이성이 오히려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을 이야기한 사람 이예요. 이 마르쿠제라는 사람의 책. ‘일차원적 인간‘ 이라는 책에 기술이 발달되게 되면 인격은 날아가고 모든 사람을 기술에 순응하게 만들어요. 일차원이라 하는 것은 강판이 납작하게 된 거예요.

네모난 강철이 이걸 열을 가해서 나중에 편편한 판이 되죠. 요게 삼차원이라면 이건 일차원이 되겠죠. 삼차원은 뒤에 숨을 수가 있어요. 뒤쪽에는 안보이잖아요. 그런데 판판하게 두께가 없이 되면 숨을 곳이 없어요. 숨을 곳이 없다는 말은 ‘너는 이 공장 공정에서 어떤 위치에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장님, 저 믿음 좋은데요.’ 믿음 좋을 필요 없어요. ‘저는 집이 부자인데요.’ ‘지금 니가 하는 공정에서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하니까 요 제품이 다음 작업까지 연결되지 못해요. 각자 맡은 제품만 할 뿐입니다. 각자 지정된 자리에서 할 뿐 이예요. 그럼 여기 아침 7시 출근해서 9시 퇴근하면서 자기가 맡은 직업에 종사하죠. 이때 무슨 생각합니까? 핀트 잘 맞춰야 돼요. 유명한 영화배우 찰리채플린 영화에 나오잖아요. 잘 맞춰야 돼요.

그렇다면 오늘 작업하는 일에 대해서 ‘오늘은 라면 100개를 만듭니다.’ 할 때 직원이 ‘아이고, 사장님 요새 머리 스타일이 멋집니다.’ 이런 이야기는 쓸데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문이 라면 100개 들어와서 라면을 만들어야 되는데 거기서 사장님 머리 스타일이 거기서 상품 생산에 도움이 됩니까? 안 되죠. 그러면 뭐 안에서만 이야기해야 돼요? 라면 100개 만드는 안에서만 이야기를 해야 되겠죠. 그것을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세상, 인간이라 그래요. 사람을 납작하게 만들어요. 이걸 가지고 마르쿠제는 모든 것은 순응하게 돼 있다. 인간은 본래의 마음껏 튀어나온 창의성과 창조성은 다 날아가고 시장에서 돈이 되는 상품 만드는데 매진해야 돼요. 시장에서! 지가 딴 거는 못하는데 노래를 잘 부르면 ‘노래 잘 부르면 가수가 되든지 해. 여기는 오지 마.’ 시장에서 잘 파는 상품에 얼마나 기여도가 높으냐에 따라서 그 사람은 현재 자리에서 가치를 받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 세공업자나 모든 각종 풍류 하는 자나 나팔 부는 자 모든 직업들이 동원돼도 이것은 이미 목적은 하나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큰 성 바벨론인데 문제는 제가 큰 성 바벨론이 뭐하는 것인지 아직 이야기 안 했습니다. 하여튼 큰 성 바벨론이 객관화 되는 거예요. 큰 성 바벨론이 바다에 빠져서 없어진다 할 때 그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큰 성 바벨론에 바다에 빠졌다는 말은 자신의 근원지, 근원 성을 찾아간다. 이 세상이 어디와 결탁돼 있는가를 보자. 아까 했죠. 예수 믿는 사람은 뿌리가 어디에 있다 했습니까? 성령이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과 연결돼 있다면 세상 나라는 어디에 연결돼요? 큰 성 바벨론은 어디에 빠집니까? 바다에 빠지죠. 그러면 모든 뿌리는 어디에? 바다의 근원지, 근원 성이 바다와 짐승과 관계돼 있어요. 그런데 아까 첫째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짐승이라는 말은 없어요. 인간 세계에 짐승이란 없습니다. 나쁜 놈 이런 말은 있죠. 나쁜 대통령, 나쁜 왕 이런 것은 있어요. 악마 같은 인간, 이런 건 있지만 짐승이라고 이야기할 것은 없어요.

왜냐 하면 짐승이라 하려면 전체 다를 포괄적으로 이야기해야 되는데 전체를 포괄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 대통령 나쁜 대통령 하려면 뉘앙스가 뭐냐 하면 다음번에는 좋은 대통령을 희망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나쁜 대통령은 짐승이 아니에요. 바뀌고, 바뀌고 바뀌지 않는 고정성이 짐승입니다.

오늘 강의 참 어렵다. 아까 오늘 주제에 뭐는 없다? 제목은 외부는 없어요. 외부는 없으니까 갈아봤자 그놈 이예요. 외부는 없으니까 이 안에는 뭐냐, 이쪽 인간이 이쪽으로 가고 니가 하나 내가 하나 누가 와도 마찬가지라니까요. 대통령 선거는 누가 와도 마찬가지라니까요. 자꾸 짐승 쪽으로 떨어져요. 지금 제가 뭘 설명 하려느냐 하면 아까 짐승은 어디 등장해야 되느냐 하면 하늘에서 오신 분이 와야 짐승이라는 정체로 자기 얼굴을 내밀어요. 그 근거를 아까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의 군대라 했죠. 군대는 싸우는 집단입니다. 싸움이 없는 집단은 군대여도 군대가 아니에요.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나온 이름이냐 하면 야곱에서 나왔죠? 야곱은 처음에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형하고 싸웠어요. 형하고 싸우는 동생을 쥐고 이것은 인류 전체와 싸우는 사람의 중심인물로 삼겠다는 것이 언약이 떨어진 효과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자고 있을 때 꿈에 사다리 왔다 갔다 했죠? 그 왔다 갔다 한 군대 이름을 포괄적으로 그걸 합쳐서 뭐라고 합니까? 마하나임이라 하는데 마하나임은 하나님의 군대죠.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에게 마구 쏟아지는 거예요. 그럼 야곱에게 쏟아진다는 말은, 성경이라는 것이 내용이 감당이 안 되도록 굉장히 폭이 넓어요. 야곱은 우리가 보기에 분명히 인간이죠. 인간에게 뭐가 접촉이 됩니까? 천사가 접촉이 되면 야곱이 천사를 부릴 수 있는 입장입니까? 입장이 아닙니까? 그런 입장이 못 돼요. 오늘 본문도 큰 천사가 들잖아요.

천사를 부릴 입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접촉을 한다는 말은 야곱은 천사를 감당할 수 있는 다른 인물로 바꾸어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바뀌어서 천사도 한 둘이 아니고 군대예요. 천군천사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인물로 야곱이 바뀌어야 되는데 야곱은 웬만하면 인물이 안 바뀝니다. 다만 야곱이라는 것과 야곱과 천사를 관리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차가 올라온다. 차가 올라올 때 차가 올라오는 거예요? 사람이 탄 겁니까? 아니 사람이 탔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멀리서 사람이 안 보이고 차만 멀리서 산길로 올라오는 거예요.

분명히 야곱이 올라오는데 그 안에 누가 탔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탄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야곱이란 인간을 통해서 뭐하느냐 하면, 천사의 역할, 이 천사가 무슨 천사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군대죠. 하나님의 군대가 뭐하는 일입니까? 전쟁하는 일이죠. 하나님의 전쟁하는 일이 야곱이란 걸 통해서 하나님이 내부에 탑승해서 몰고 오시는 겁니다. 몰고 오실 때 이 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누가 보입니까? 야곱이 보이죠. 하나님이 야곱에게 씨앗을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40만 50만 퍼뜨리니까 이 나라가 무슨 나라 됐어요? 이스라엘 됐죠. 이스라엘이 40만이지만 하나예요. 왜,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40만을 합해서 이스라엘 이름이니까. 이스라엘 남자만 40만 대군이 하나로 통솔된다는 말은 여기 한분이 뭐로 와야 돼요? 왕으로 통제돼야 돼요.

그러면 이스라엘에 왕이 필요합니까? 필요 안 합니까? 따로 인간 왕이 필요 없죠. 이게 어려운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자기를 지켜 줄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주죠. 그러면 정치론은 정치론이 아니고 뭐다? 존재론이잖아요. 내가 여기 존재하잖아요. 존재하면 인간은 반드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나를 지켜 줄, 나를 보호해 줄 어떤 사회나 어떤 공동체를 원하기 마련이라 말이죠.

가인이 만든 게 뭡니까? 도시죠. 가인이 도시 만들 때 하나님의 인을 맞아서 도시에 가입해서 도시를 만들었죠.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살아가기 마련이죠. 세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은 다 뭐가 있습니까? 왕이 있죠. 어떤 나라에 왕이 있다면 그 왕을 자기들은 어떻게 봅니까? ‘이건 왕은 가상이야. 허구야, 소용없어.’라고 생각합니까? 이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정치론이 존재론이라는 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왕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내가 여기 없다.’와 똑같은 소립니다.

내가 있는 이상은 나를 보호해 줄 나보다 뛰어난 사회를 원하고 사회로부터 사회를 통솔해야 될 질서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어디 일을 마치고 가는데 강도를 만나서 옷 뺏기고 도둑놈이 와서 뺏기고 하면 나라꼴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가는 길에 경찰관이 있어야 누가 와도 지켜줘야 되지 않습니까? 경찰관은 월급은 누가 주고 훈련은 누가 시킵니까? 경찰관은 저희끼리 합니까?  아닙니다. 경찰관을 지휘 통제할 수 있는 경찰청이 있어야 되고 그 위에 누가 있습니까? 대통령이 있어서 보호해줘야 한다 말이죠. 그럴 때 사람들은 이걸 정상적인 리얼리티, 현실로 보고 인간 공동체 사회로 보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그런 것들이 대통령이 있고 정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 허무라고 느낍니까? 안 느낍니까? 전혀 안 느끼죠. 이상합니까? 당연한 거지, 그게 왜 이상해요?

그래서 이방 나라 보기에는 누가 이상해요? 이스라엘이 이상하고 나중에는 이스라엘 본인이 저들이 이상해요. 왜 우리는 왕이 없고 쪼다 같은 인간들이 어떤 성신 받을 때만 ‘우리는 하나다.’ 해놓고 ‘이번에 당신 기드온 덕분에 미디안 군사들한테 구원받았으니까 당신 왕 해라.’ 하면 뭐합니까? 왕 시켜줘도 안 해.

왕이라는 것은 세습제입니다. 세습제란 뭐죠? 아버지가 왕 되면 아들도 왕이 되죠. 이 말은 뭐냐 가문은 특별 가문, 가문 자체를 특수한 가문, 거룩한 가문, 이 가문은 이집트에 의하면 어디까지 연결돼 있습니까? 신과 모든 문명은 특수한 가문과 신과 연결시켜 놨어요. 이러한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다? 주관의 객관화! 제국은 외부가 없고 전부 다 내부에서 창작하고 창설하고 만들어 낸 거예요. 신화시대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지금 거기에 깜박 속아 넘어 온 거예요. 국가가 있고 다 정상적으로 놓여진 이런 데 있어야 될 게 있다고 우리는 다 본 거예요. 학교에는 교사가 있어야 되고 유치원에는 보건 선생이 있어야 되고 병원에는 의사 있어야 되고 우리는 그것이 전혀 하자 없고 정당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마땅한 것이고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그냥 캘빈주의에 의하면 그것도 하나님의 소명이고 전부 다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들을 위하라고가 아니라 그 중에 일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지금 정당하게 일을 하고 있다는 스스로 자기를 정당화 시켜서 그래요. 그러니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우리나라 잘 되게 하옵소서.’ 덴마크하고 우리나라가 할 때 우리나라 이기게 하고 덴마크 지게 하옵소서.‘ 전부 다 우리나라, 내가 아는 사람, 내 가족, 내 친척, 내 마누라, 마누라 이혼하면 새로 사랑하는 여자, 전부 다 자기중심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은 없습니다. 왜 왕이 없는가, 기존의 모든 왕들은 신이 있는데 이방나라에 있는 신을 한마디로 뭐라 합니까? 우상이라 하죠. 이게 또 다른 나라가 보면 말이 안 돼요. 지 신은 참된 신이고 자기나라 신 아니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우상시한다면 그런 독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요번에 제가 수련회 때 이야기했잖아요. 뭐라 했습니까? 우상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무슨 기계를 동원시킨다고 했어요? 지문감식시스템, 미국의 드라마 미드에 보면 CSI(Crime 범죄 Scene 현장 Investigation 조사)에 보면 나오죠. 어떤 사람이 과학 수사할 때 자문을 나타내는 기계에 지문을 그리고 지문에 맞을 사람들이 사진을 화면에 띄웁니다. 그러면 막 지나가는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아냐, 이거야.’ ‘딩동. 빙고’ 딱 맞다.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는데 문제는 뭐를 모릅니까? 다른 신이 뭔지 모르죠. 그러면 다른 신이 뭔지 나타날 때까지 이스라엘을 가지고 계속해서 다른 신과 전쟁을 하게 만듭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메시야가 등장하지 않는 법인데 우상이 뭐냐 하기 전까지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먼저 뭐가?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해서 뭣과 대결하게 합니까? 우상과 대결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보시기에 ‘저게 바로 그거야.’ 라고 ‘딩동’ 하고 딱 등장할 때 그것이 바로 ‘십자가’예요. 십자가 사건 딱 아다리 될 때 '바로 그거야. 그게 바로 우상이었어.‘ 모든 우상을 우상 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합니까? 신약 성경에서는 악마라고 하죠. 악마가 나올 때까지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시 하면 차가 올라온다 할 때 차가 보입니까? 사람이 보입니까? 차가 보이죠. 악마가 예수님 공격할 때 악마가 보입니까? 악마가 모는 차가 보여요? 마찬가지 아닙니까? 악마는 안 보이고 뭐가 보여요? 악마는 안 보이고 차만 보이죠.

동방박사가 별 따라 왔을 때 어디로 갔죠? 제일 먼저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중간에 어디에 기착했습니까? 헤롯왕에게 갔죠. 헤롯왕이 그 당시 뭡니까? 정치적인 주체라 했죠? 전에 설교할 때 정치적 주체라고. 정치적인 주체에 왜 별이 없어졌어요? 바로 베들레헴 가면 되는데, 뭐 별을 못 찾아서 그래요? 하늘나라 네비게이션이 고장 나서 그렇습니까? 아 이쯤 되는데 못 찾아서 그렇습니까? 왜 별이 헤롯에게 멈췄습니까?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이 그냥 예수 믿으면 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정치적인 세계 속에 왜 사업을 벌이면서 직장에 나가면서 왜 고생을 해야 돼요? 왜 해야 돼요? 무슨 깨달음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악마의 실체는 ‘니가 정상적이다. 그렇다, 반드시 있어야 돼, 이건 필요 없는 게 아니야. 있어야 돼, 경찰 있어야 돼, 있어야 돼, 있어야 돼, 있어야 돼.’ 그 정당선 전체가 악마의 객관성!!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세상의 모든 것을 쥐고 있었던 거예요.

별이 멈췄죠? 멈추고 난 뒤에 누가 혼이 났습니까? 동방박사가 혼났죠. 동방박사는 헤롯왕 만나러 온 게 아니에요. 지금 별 따라 갔는데 분명히 메시야를 만나러 갔는데 별이 멈추니까 동방박사는 별이 베들레헴에 있는지 몰랐어요. 별이 가는 곳만 갑니다. 인도하는 대로 가는 거예요. ‘실례합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동방에서 왔습니다.’ ‘뭘 찾아왔습니까?’ ‘메시야, 왕이 나타난 모양인데.’ ‘어디쯤 나타났는지 모르겠습니까?’ ‘기다려보세요.’ 메시야 온다면 베들레헴에 태어난다. 그럴 때 그 소리 듣고 간 게 아니고 그런데 갑자기 떠나려 할 때 무빙스타, 별이 움직이면서 베들레헴에 갈 때, 그때 헤롯이 뒤에서 뭐라 합니까? ‘죽여라.’ 그 죽이란 소리를 아담에게 덮쳐왔던 천사,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 중의 천사가 뭐를 캐치했죠? 천사가 밤중에 동방박사에게 뭐라 합니까? ‘오던 대로 가지 말고 딴 길로 새라.’ 누가 조정했습니까? 천사가 조정했죠. 천사가 누구의 지시를 받습니까? 보이지 않는 왕, 아기 예수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죠.

다른 말로 하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의 지시를 받죠. 하나님의 이름은 전쟁을 통해서 진짜 숨어있는 우상을 밝혀내는 역할을 하죠. 그 동방박사가 빠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또 뭡니까? 베들레헴에 태어난 걸 조사해서 ‘다 죽여라.’ 자, 그럴 때 그 다 죽이라고 명령할 때 헤롯 군대가 베들레헴에 가서 2살 밑의 아기들을 다 죽였잖아요. 그 죽일 때 경찰관들이 동원됐잖아요. 그런데 그 경찰관이 파출소장이라 합시다. 파출소장이 우리 아는 동생이라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파출소장은 본인이 예수님한테 어떤 감정이 있어요? 아니죠. 파출소장이 아기 예수에 대해서 뭐 사기 당한 일 있습니까? 아니죠. 파출소장이 누구 명령을 받습니까? 그 당시 지도자 헤롯의 명령을 따르죠. 그러면 2살밑의 아기들을 죽인데 대해서 자기 사적인 견해를 집어넣으면 돼요? 안 돼요? 안 되는 거예요.

오늘 강의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겁니다. 마귀에 속해도 우리는 마귀의 그걸 우리는 거역한다? 거역 못한다? 거역을 할 수도 거역을 하고 싶지도 거역을 할 수도 없어요. 왜, 우리의 몸은 내가 다스리는 게 아니고 이 몸이 다스리기 때문에 몸은 ‘밥 달라’ 하죠, 2살 밑의 애들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파출소장 잘리느냐 안 잘리느냐 그게 더 중요하다 말이죠. 죽기가 무서워서 종노릇할 때 그게 누구 종노릇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 악마의 종노릇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자손은 악마의 종노릇을 풀어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돼 있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종교 따로, 교회 따로, 사업 따로, 가정 따로, 전부 따로 노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장바구니처럼 집어넣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걸 허용 안 해요. 하나님 말씀은 그걸 용납을 안 합니다. 착하고 착한 우리 딸이 선생님이 시키는 그 모습 하나, 하나가 마귀가 조정하는 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고, 어느 누구도 마귀에서 벗어난다, 마귀를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마귀보다 더 센 게 있어요. 성령입니다. ‘아! 성령을 동원해서 대통령 하라나보다.’ 아니에요. ‘성령을 동원해서 사장 멱살 쥐라 하나보다.’ 아니라니까요. 성령이 동원해서 교사 뺨 때리라.‘ 그것도 아니고 성령이 오면, ’바로 내가 죄인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이미 해결이 다 끝난 상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 아는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정권을 바꾼다든지 우리가 칼을 쥐고 전쟁을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전쟁, 전쟁, 전쟁이라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다 끝내버린 상태에서 우리는 빠져나올 수 없는 그 길을 주께서 친히 만들어서 끄집어내요.

환란과 핍박과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라는 길을 통해서 뭐를 발견합니까? 우리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면서, 바뀌면서 그 가운데서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음을, 십자가로 이미 용서로 다 구원되었음을 확인하는 그러한 상황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뭐를 알 수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이 장난이 아니고, 이게 하나의 소설책이 아니고 성경이 실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파악할 수가 있죠. 그럴 때 우리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천국 간다는 이 사실이 새롭게 다가오는 겁니다. 왜, 자기가 이 땅에 가진 게 없기 때문에, 만날 마귀한테 굽신거리고. ‘니 왜 그런 짓 하나?’ 하면 ‘월급이 있는데, 월급이.’

한나 아렌트란 유명한 유대인 여자 철학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정범을 재판하는 것을 참석 하고 하는 말이 ‘정범이 나쁜 인간이 아니다. 그 사람은 순수한 보통 시민이었다. 그가 500명의 유대인을 학살할 때 그건 지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평소에 착실한 사람이거든요. 내가 해야 될 것은 반드시 해내고 마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한 그 버릇이 반복된 학습이 그 속도를 죽이지 않고 그대로 나가다 보니까 500명의 유대인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걸 위에서 시켜서 했으니까 내가 한 게 아닙니다. 이게 농담이 아니고 진짜래요. 진짜로 그래요.

이OO경감이란 사람, 그 사람이 얼마 전에 죽었던 김OO를 고문했던 사람인데 그때 죽은 게 아니고 죽을병을 만들어 놨는데 ‘나는 그때 그게 옳은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OO은 악마고 김OO는 천사입니까? 둘 다 내가 무슨 짓을, ‘내가 고문 짓을 안 하고 차라리 고문을 하려면 나는 사표를 던지겠다.‘ 던져도 그는 악마입니다.

이 땅에는 이상적인 사회, 살기 좋은 사회가 기껏 해봐야 큰 성 바벨론, 백날 이상적인 사회, 유토피아, 완벽한 사회, 보다 잘 사는 사회, 더 이상 학교에서 왕따가 없는 사회, 그 세계가 뭐냐 하면 큰 성 바벨론 이예요.

이걸 알게 되면 소위 자유주의 신학, 이상사회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노력한다는 모든 것들이 다 마귀 짓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교회? 교회만은 착하다. 말도 안 돼요. 진짜 교회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 아니면 구제 불가능한 인간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고백하는 모임이 교회입니다. 다른 것은 교회가 아니에요.

천사가 뭐한다 했습니까? 천사는 전쟁을 한다. 전쟁의 목적은 뭐라 했습니까? 우상을 전쟁한다. ‘우상 나와, 우상 나와, 이 세상 배후자 나와, 배후자 나와, 근원지 나와, 땅 말고, 땅에서 나오는 지도자 말고 만날 바꾸는 지도자, 왕 말고 어떤 인간이 왕이 되더라도 어떤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것을 쥐고 있는 그 정체 모를 인간 나와, 그 존재 나와.’ 바다에서 슥~ 기어 나와요.

처음부터 바다에서 올라 온 거예요. 처음부터. 그것을 수소문해서 다 적용하니까 바다에서 올라온다고 돼 있어요.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이 결국은 땅에 있는 인간을 지배한다. 이것은 바로 뱀이 아담을 미혹했다와 같은 시점에서 계속 이야기가 놓이게 되는 거예요. 어느 게 후다 전이다 하는 일은 없어요. 이 세상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 갈 때 갑자기 폭풍이 일었던 이유도 알고, 폭풍 속에서 폭풍이 일 때 제자들이 당황했을 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실 때 제자들이 깨울 때 제자들에게 뭐라 하십니까? ‘너희들이 왜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행할 때 그건 예수님의 자기 죽음이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떡으로 이해한 거예요. 그럼 뭔 뜻입니까? ‘이거 먹고 더 살지.‘ 한 거예요. ’이거 먹고 같이 죽자.‘ 이래야 되는데 ’이거 먹고 더 살자‘ 하니까 나중에 정작 예수님께서 ’진짜 정답 듣고 싶나?‘ 하니까 ’듣고 싶습니다.‘ ’그럼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그러니까 다 가버린 거예요. 결국은 그들은 그쪽 세계로서 예수님을 자기 세계에다 예수님을 무조건 끌어당길 생각만 했지 정작 예수님의 생각에서 전혀 접근조차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이것을 성령 받은 사람은 매일 삶 속에서 이걸 알아야 돼요. ’나같이 월급만 챙기고 앞으로 내가 만약 경찰관이 돼서 저 동네 사살하라 .‘ 하면 ‘예’ 하고 충성 되게 가죠. 왜, 그게 공무원이 해야 될 충실하고 충직한 공무원이 해야 할 짓이니까. 뒤돌아보니까 그게 정권용이 되죠. 정권용이 되고 안 되고는 문제가 아니고 자기 할 도리를 할 수밖에 없죠.

그러한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그 인간이 마귀한테 붙잡혀 사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오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이 날로 새롭게 새로 보이시거든 아버지께서 살살이 아니고 질질 끌어당긴다고 보시면 됩니다. 매일같이 메가지 쥐고 성령으로 건지고 잡아당기는 거예요. 당기면서 온갖 짓 다 하는 거죠.

전쟁을 한다. 그러면 다니엘에 있어서의 여호와는 누구와 전쟁했습니까? 마르둑 신하고 했죠. 마르둑 신을 어느 나라 신입니까? 바벨론 신이죠. 바벨론 신은 마르둑, 유다 신은 여호와, 누가 이겼습니까? 마르둑 신이 이겼죠. 그러니까 성전에 있는 기명들이나 그릇들을 다 뺏어갔잖아요. 그리고 유다나라의 다니엘과 많은 사람들을 포로 잡아갔잖아요. 누가 진 것처럼 보입니까? 마르둑 신이 이긴 걸로 보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역으로 이용했죠. 몽땅 잡아감으로써 비로소 악마의 악마성이 드디어 마지막 공개할 때가 가까이 왔어요. 블레셋 나라가 언약궤를 빼앗았습니다. 누가 이겼다고 봅니까? 블레셋이 언약궤를 가졌으니까 이긴 것 같지만 언약궤가 돌아다니면서 모든 블레셋 나라에 전염병을 일으키고 다곤 신상이 엎어져서 손모가지 다 부러지고 했죠. 그럼 누가 이긴 거예요? 언약궤가 이겼죠. 그러니까 블레셋 나라가 어떻게 했어요? 회의를 해서 ‘내 보내야 돼,’ 자기들 했던 것을 빌고 내보내죠.

자, 바벨론이 누굴 이겼습니까? 여호와를 이겼죠. 다니엘이 섬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바벨론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자는 누구였습니까? 지혜로운 자는 누구였습니까? 다니엘이잖아요. 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을 뭐하는 존재입니까? 다니엘의 지혜가 얼마나 추월적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재료로 쓰여진 것이 수준 낮은 느부갓네살 이예요. 그런데 수준 낮은 느부갓네살이 인간의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을 한꺼번에 쥐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마귀도 어디에 필요하다? 다니엘 구원하는데 필요조건으로 반드시 주변에 배치돼야 돼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마귀가 필요해요. ‘니가 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서 죽는다.‘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했거든요. 요한복음 10장에서. 바로 그 작업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무엇이 착한가, 나쁜 짓은 안 해야지, 착한 일 해야지.‘라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이 세상에 같이 묻혀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는 피로써 이미 그 현장에서 이미 그 자리 있으면서 용서했다니까요.

그러니까 왕은 누가 왕입니까? 공무원 짓해도 누가 왕 이예요? ‘나는 예수님이 나의 왕입니다.’ 이 땅에서 인자를 세상에서 인자를 시인하면 마지막 때 나는 너희를 시인할 것이고 인자를 부정하면 내가 너희를 부정하리라. 마태복음 10장 32~33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 내십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ㅎ ’그래도 주님은 살아계셔.‘ 이런 식으로. ’내가 참 더러워서 애 셋이라 밥 먹고 살려니 아무소리 못하지만, 아휴, 그래도 내 죄를 주께서 아신다.‘ ’내 의를 아신다.’가 아니라 ‘내가 무슨 짓을 한지 주께서는 다 아시고 계시니 감사합니다. 이 죄를 다 처리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거 대신 죽으신 거예요.

그 다음에 23절 봅시다.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요거 잠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생산이 극대화되면 인간의 정치적 객관화도 늘어나게 돼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위에서 잡아당기는 어떤 세력이 있는 게 아니고 내부에서 활동이 많아지면 외부의 권력이 커지게 돼 있습니다. 기체와 액체와 고체의 차이점은 뭡니까? 분자의 활동이 심하게 일어나면 기체가 되고 그래서 온도를 높이면 기체 부피가 늘어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꾸 인간은 객관화를 생각해서 ‘우리나라‘라 말하지만 우리나라는 없어요. 우리나라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활동성에 따라서 우리나라는 커지고 우리나라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활동성이 적어진다든지 ’우리나라 못 살겠다 이민 가야지.‘라고 빠져버리면 이게 줄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나라를 유지하는, 그 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 나라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안에 속 알맹이의 활동 여부에 따라서 껍데기는 점점 더 번창하고 화려하게 보인다 이 말이죠.

그래서 큰 성 바벨론이라 해놓고 안에 실제 내용은 뭡니까? 상인들, 사업하는 사람들, 무역, 또는 생산하는 사람들, 경제 활동하는 사람들, 경제활동의 주체들, 가정주부도 마찬가지로 밑에서 가계부 쓰면서 아끼니까 주체들이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경제는 자기가 노동해놓고 그 모든 은덕을 어디다 돌립니까? ‘아, 우리나라가 살기 좋아.’ 이러잖아요. 그런데 아까 봤죠? 실제는 인간이 활동해 놓고 그게 나중에 추상화 된다 했죠. 추상화. 이제 끝이 되가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모든 국가 사회는 추상화입니다. 다 추상화예요. 가정이 화목하다. 추상화죠. 심지어 뭡니까? 가족 구성원끼리 서로 의 맞고 인정 있게 살면 그것이 가정이 결과적으로 화목한 거죠. 가정 화목하면 가정 화목으로 들어가면 가만이 있어도 가정 화목 합니까? 이 집이 가정 화목하다 하면 지는 가만히 있고 지는 개판 치면 가정이 화목합니까? 오히려 이질적인 것이 오면 가정 화목한 것도 깨지잖아요.

화목하다는 것은 하나의 희망이고 폼으로 걸쳐 놓고 실제로 활동하는 것은 누가 해요? 구성요소들이 활동하죠. 구성요소라는 말도 어폐가 있어요. 그게 전부예요. 사실 내용이 전부고 바깥의 외부에 있는 결과 껍데기 결과물일 뿐입니다. 일종의 우리가 인간의 활동에 말을 뭔가 붙이다 보니까 그게 나온 거지, 실제로 국가라는 게 있는 게 아니고 그 안에 구성된 사람들이라고 할 때 그들은 이상스럽게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게 되면 이 구성요소가 한결 같이 하나로 정서가 올인 하는 거예요. 이게 세상의 정치와 철학이 일원화 돼요. 정서가 하나로 돼요. 안중근 의사가 뭐하게 되면 우리나라가 다 같이 의분이 나죠. 한국 사람한테 LA인가에서 중국사람 7명이 얻어터졌죠. 중국사람 보면 화날 거예요. 정서가 하나로 모이죠.

그 정서, 또는 기쁨, conatus라 하는데, 인간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팽창하고 존재하려고 하는 본능을 스피노자는 conatus라 또는 역량을 일으키는 활동력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정서가 직업에 상관없이 하나로 집결된다는 겁니다. 이란, 북한, 막 울어요. 팬클럽도 그런 팬클럽 없어요. 이상하잖아요. 그 정서가 결국 어디로 모인다? 오늘 성경에 의하면, 큰 성 바벨론! 따라서 하나님의 군대에 대적하기 위해서 그들이 군대처럼 조직돼서 활동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왕은 누구라고요? 어디서 올라왔습니까? 바다에서 올라온 것, 천사가 ‘에라, 니 왕한테 갓. 자, 니들은 바다와 하나님의 창조에 어울리지 않아. 바다에 빠져라.’ 바다에 빠지죠.

이 말은 땅이 건전하단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왕 중심에서, 새로운 왕 예수님 중심에서 새로운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기존의 악마가 다스리는 왕은 더 이상 이제는 예수님 앞에서 좀 사라지고 심판받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냥 자연스럽게 봤던 모든 세상도 정서적으로 하나로 집결돼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아무소리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고 그것이 하자 없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 우리 몸 하나 챙기기 위한 이기주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저희들 이미 아시고 십자가의 거룩한 피로 용서해 주셨사오니 용서하신 그분의 피를 흘린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왕인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