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20119-요한계시록18장(외부는 없다)31강b-이 근호 목사 제 31강b
자,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가운데서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뭐냐 하면 정치적인 주관화가 객관화 된다는 그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워서 제가 쉬운 예를 들 테니까 우리가 평소에 일상생활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갇혀있는 꼴이 되는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옥이란 뭐로 구성돼 있느냐 하면 첫 번째, 물리적 기계(배치)라는 사람도 있는데 감옥에는 벽돌, 땅, 건물, 철장이 있어야 되죠. 두 번째는 유기체 기계(배치)가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죄수, 교도관이 있어야 되죠. 세 번째는 문화적 기계(배치)가 있는데 이건 뭐냐 하면 법률, 판결, 판례가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전체를 다하여 뭐냐 하면 감금, 갇혀있는 감금이 형성되겠죠.
보세요. 우리가 편하게 그냥 생각하는 ‘누가 요번에 사기 쳐서 감금됐대.’라고 편하게 말하는 요 말이 그게 뭐냐 하면 결국은 추상개념인데, 추상적인데 추상이라 하면 우리는 없는 걸로 여기잖아요. 그런데 추상하나를 위해서 실제로 현재는 아는 사람 교도관이 있고 어떤 아는 사람은 교도소에 벽돌 납품했고 또 어떤 아는 사람은 사법고시 합격해서 판사가 돼 있고, 이게 뭡니까? 우리가 말하는 세계 전체라 하는 것은 손에 만져지는 벽돌 만져지죠. 그리고 어떤 사람이 판사 되고 하는 것도 눈에 보이죠.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고 느껴지고 교제하고 법률 공부하는 이 모든 것이 ‘감금’이라는 추상명사 하나를 계속 낳게 만든다 말이죠.
그럼 추상적인 것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있죠. 있는데 감금이라는 것이 막상 몇 킬로입니까? 몇 미터입니까? 감금이 한 근에 얼마예요? 없죠. 사람의 모든 활동이 사람 활동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게 어디서 솟구쳐 올라오느냐 하면 결국은 이 세상에 떠도는 모든 추상적인 개념들은 다 밑둥치에서 형성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여기 22절에 보면 거문고 타는 자, 풍류 하는 소리, 퉁소 부는 자, 나팔 부는 자, 그 다음에 세공업자, 전부다 실제로 다 있죠? 있는데 성경은 이런 것들을 모아서 뭐라고 합니까? 큰 성 바벨론! 그런데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목사님, 큰 성 바벨론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방금 이렇게 설명했는데 ‘감금이라는 게 사실 없을 거야.’ 왜 감금이 없습니까? 이런 요소들이 뭉쳐서 감금이 있죠.
마찬가지로 ‘성경에 큰 성 바벨론은 없을 거야.’ 왜 없습니까? 여기 나와 있는데, 사람들은 큰 성 바벨론이 세상에는 없고 성경 안에만 있는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그 변화를 근거로 해서 큰 성 바벨론을 이끌어내는 겁니다. 이끌어낼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큰 성 바벨론이라는 것이 구체화되지를 안 해요. 남는 건 뭐가 남느냐, 바로 실제적으로 만들어 낸 추상화, 이걸 가지고 주관적인 것이 객관화 된 거예요. 그 객관화 된 것을 분석해 보면 뭐가 남는다? 다시 주관으로. 그러나 다시 한 번 두 개를 합쳐서 나타난 것은 뭐냐 세상은 누구의 세계다? 우리 인간들만의 세계다.
직장 다니는 사람, 회사 근무하는 사람, 다 길에 가서 물어 보세요. 세상은 누구만 있습니까? ‘우리 인간만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건물은 누가 졌습니까?’ ‘인간들이 지어 놨습니다.’ 오직 인간으로 나와서 인간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정부로 이 세상에 영원히 살아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아브라함 링컨이죠.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그것이 바로 인간이 자기 주관을 요청한 객관화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객관화 세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건 따로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외부는 없어요. 뭐냐 하면 인간들끼리가 그것이 전부입니다. 인간 바깥에 외부는 없어요.
그렇다면 여기 종교를 봅시다. 종교 있으려면 벽돌 있어야 되고 강대상 있어야 되고 종도 있어야 되고 매미채 있어야 되겠죠. 그 다음 유기체 기계는 교인 있어야 되고 목사 있어야 되죠. 문화적 기계로는 뭡니까? 교회법 성경이 있죠. 합해서 뭡니까? 종교 기독교 교회 많잖아요.
그렇다면 결국 이것은 뭡니까? 인간의 주관이 뭐가 된 것이다? 객관화 된 거죠. 결국 합치면 교회고 하나님이고 예수고 간에 다 누가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거예요. 인간이 만들어 내놓고 하는 말이 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을 두고 그 다음에 교회서 신을 만들어 내면 그 신은 인간 외부 바깥에서 못 벗어나고 신이 유발시킨 교회 말을 누가 들어야 되요? 예수가 들어야 되고 하나님이 들어야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말을 들어야 돼요. 안 그러면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사고방식은 뭐냐 모든 것이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을 위해서 교회가 있고 예수가 있고 하나님이 있는 거예요. 사랑의 하나님이고 자비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고 모든 게 인간을 위해서 있다는 거죠.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사람을 그렇게 삐딱하게 보지 않고 죄인으로 몰아세우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 다 신처럼 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성경 이해와 성경 사고방식에서 뭐가 빠졌습니까? 뭐가 빠졌죠? 바로 인간 중에서 최고의 의를 행했던 게 누굽니까? 바리새인이죠. 바리새인보다 더 우수한 의인은 없기 때문에.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모든 인간적인 지혜와 종교적인 집결과 객관화가 모여서 한 짓이 무슨 짓입니까? 결국 누굴 죽였어요?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럼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굽니까? 사울이란 사람이죠. 사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뭐가 바뀌었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죽음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한다. 사도바울은 의롭다 했죠. 그래서 사도요한의 모든 성경이나 사도들의 성경은 일괄적으로 다 뭐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얘기잖아요.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했다 말이죠.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거론한 게 아니고 누굴 거론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게 복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누굴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의 사람을 위한 하나님이었는데 그걸 뭐로 바뀐다? 예수의 예수를 위한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를 만들었다고 봐요.
그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이 분명히 사람이잖아요. 신학자들은 사도바울을 뭐로 분석합니까? 인간의 뜻이라고 분석하죠.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니까 ‘너희(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내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니 참 고맙다고 돼 있죠.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려면 사람의 말이 아닌 이유를 대야 돼요. 사도바울의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돼요. 그 이유는 같은 인간이 그 이유를 따질 근거가 없어요. 근거는 십자가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사도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본인의 사적인 신학적인 견해로 봐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악마가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그렇게 했다고 이야기해요. 한번 보세요. 사도바울이 자기가 하는 말을 안 믿는 것은 악마가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실제로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귀신이 뭐라 합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사도바울은 악마의 나라에서 유명해요. 그 이야기를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볼 때 뭐로 봅니까? 그냥 우리하고 보통 사람으로 보고 그 사람 주장하는 것은 지 개인의 사적인 견해로 보는 거예요.
그렇게 안 보고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인간의 주관에서 나온 객관으로 가는 모든 것을 뭐로 차단해야 됩니까? 이건 주관에서 객관으로 가는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수밖에 없는 바로 이미 어두운 세계가 지배하고 있다는 그러한 증거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만약에 교도관이다. 동생이 취직됐다. 추카, 추카, 추카, 추카. 그러면 내가 찾아가서 ‘너 교도관 됐다며?’ ‘형님, 교도관 됐습니다.’ ‘교도관 돼서 뭐하는데?’ ‘아이, 뭐요. 나쁜 놈 잡아서 착한 일하고 내가 월급 받고 살죠.’ 얼마나 지당하신 말씀입니까? 그게 무슨 하자가 있고 그것이 큰 죄가 됩니까? 방금 이야기한 것이. 죄가 안 되죠. 그런데 그것이 뭐가 된다? 그렇게 교도관이 되려면 정권이 대한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국이 돼야 되죠. 만약에 북한이 쳐들어오면 지는 교도관 자리에서, 교도관, 경찰 군인들은 북한이 쳐들어오면 제일먼저 처형되겠죠. 그런데 교도관 유지되려면 어떻게 돼야 돼요? 나라가 안정이 되고 나라가 정권이 유지가 돼야 되겠죠. 본인이 교도관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벌써 뭐가 됐어요? 새로운 주관에 주관을 위한 나를 위한 새로운 객관화된 주관이 어떤 새로운 나를 주관을 지킬 수 있는 객관화의 작업을 들어간 거예요.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그럼 나는 누구편이 됩니까? 우리 아는 동생이 교도관이면 나는 누구 편을 들어요? 내 동생의 직업이 유지되고 연금 많이 받고 안정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에게 표를 한 표 던지죠. 지금 그런 실험, 그 인간들이 만들은 정치적 실험이 결국 누구한테 부딪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딪힘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 결과가 뭐였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결과를 낳잖아요.
그러니 어떤 사람이 교도관 됐다. 그 순간 교도관 된 순간, ‘나는 죄인인데 교도관 된 죄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나는 죄인인데 어떤 신입사원이 교도관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교도관 하면서 뭐를 알라? 내가 왜 죄인인가를 더 깊이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맡겼다? 교도관 일을 맡긴 거예요. 그럴 경우 정권이 바뀌어서 누가 왕이 돼야 됩니까? 이 명박이 아니고 누가? 안철수가 아니라 예수님이 왕으로 오실 날을 학수고대 하겠죠. 그게 주관의 객관화가 아니고 자기를 부정(부인)하는 겁니다.
자, 목사가 됐습니다. 그래서 교인 200명을 맡았다. 그럼 올해 한해 목표가 뭡니까? ‘자, 여러분, 올 연초 목표를 정하겠습니다. 올해 예수님 재림하시기를 다같이 기도합시다.’ 이래 나옵니까? 아니죠. 뭡니까? 200명에서 250명, 300명이죠. 그런데 그 중에 어떤 교인이 와서 ‘우리는 십자가만 증거 합시다.’라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 쫓아냅니다.
결국 종교나 이런 교도관이나 사업이나 모든 것이 집결해서, 여기 나오는 것 다시 봅시다. “세공업자가 맷돌 소리나 등불이나 신랑과 신부의 음성,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마지막 큰 성 바벨론 안에 집결된 안의 구성요소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마르쿠제라는 사람이 있어요. 20세기 초 사람인데, 마르쿠제, 하버마스, 에릭 프롬, 이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그렇게 똑똑하고 지혜 있다는 합리적인 이성이 오히려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을 이야기한 사람 이예요. 이 마르쿠제라는 사람의 책. ‘일차원적 인간‘ 이라는 책에 기술이 발달되게 되면 인격은 날아가고 모든 사람을 기술에 순응하게 만들어요. 일차원이라 하는 것은 강판이 납작하게 된 거예요.
네모난 강철이 이걸 열을 가해서 나중에 편편한 판이 되죠. 요게 삼차원이라면 이건 일차원이 되겠죠. 삼차원은 뒤에 숨을 수가 있어요. 뒤쪽에는 안보이잖아요. 그런데 판판하게 두께가 없이 되면 숨을 곳이 없어요. 숨을 곳이 없다는 말은 ‘너는 이 공장 공정에서 어떤 위치에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장님, 저 믿음 좋은데요.’ 믿음 좋을 필요 없어요. ‘저는 집이 부자인데요.’ ‘지금 니가 하는 공정에서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하니까 요 제품이 다음 작업까지 연결되지 못해요. 각자 맡은 제품만 할 뿐입니다. 각자 지정된 자리에서 할 뿐 이예요. 그럼 여기 아침 7시 출근해서 9시 퇴근하면서 자기가 맡은 직업에 종사하죠. 이때 무슨 생각합니까? 핀트 잘 맞춰야 돼요. 유명한 영화배우 찰리채플린 영화에 나오잖아요. 잘 맞춰야 돼요.
그렇다면 오늘 작업하는 일에 대해서 ‘오늘은 라면 100개를 만듭니다.’ 할 때 직원이 ‘아이고, 사장님 요새 머리 스타일이 멋집니다.’ 이런 이야기는 쓸데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문이 라면 100개 들어와서 라면을 만들어야 되는데 거기서 사장님 머리 스타일이 거기서 상품 생산에 도움이 됩니까? 안 되죠. 그러면 뭐 안에서만 이야기해야 돼요? 라면 100개 만드는 안에서만 이야기를 해야 되겠죠. 그것을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세상, 인간이라 그래요. 사람을 납작하게 만들어요. 이걸 가지고 마르쿠제는 모든 것은 순응하게 돼 있다. 인간은 본래의 마음껏 튀어나온 창의성과 창조성은 다 날아가고 시장에서 돈이 되는 상품 만드는데 매진해야 돼요. 시장에서! 지가 딴 거는 못하는데 노래를 잘 부르면 ‘노래 잘 부르면 가수가 되든지 해. 여기는 오지 마.’ 시장에서 잘 파는 상품에 얼마나 기여도가 높으냐에 따라서 그 사람은 현재 자리에서 가치를 받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 세공업자나 모든 각종 풍류 하는 자나 나팔 부는 자 모든 직업들이 동원돼도 이것은 이미 목적은 하나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큰 성 바벨론인데 문제는 제가 큰 성 바벨론이 뭐하는 것인지 아직 이야기 안 했습니다. 하여튼 큰 성 바벨론이 객관화 되는 거예요. 큰 성 바벨론이 바다에 빠져서 없어진다 할 때 그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큰 성 바벨론에 바다에 빠졌다는 말은 자신의 근원지, 근원 성을 찾아간다. 이 세상이 어디와 결탁돼 있는가를 보자. 아까 했죠. 예수 믿는 사람은 뿌리가 어디에 있다 했습니까? 성령이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과 연결돼 있다면 세상 나라는 어디에 연결돼요? 큰 성 바벨론은 어디에 빠집니까? 바다에 빠지죠. 그러면 모든 뿌리는 어디에? 바다의 근원지, 근원 성이 바다와 짐승과 관계돼 있어요. 그런데 아까 첫째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짐승이라는 말은 없어요. 인간 세계에 짐승이란 없습니다. 나쁜 놈 이런 말은 있죠. 나쁜 대통령, 나쁜 왕 이런 것은 있어요. 악마 같은 인간, 이런 건 있지만 짐승이라고 이야기할 것은 없어요.
왜냐 하면 짐승이라 하려면 전체 다를 포괄적으로 이야기해야 되는데 전체를 포괄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 대통령 나쁜 대통령 하려면 뉘앙스가 뭐냐 하면 다음번에는 좋은 대통령을 희망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나쁜 대통령은 짐승이 아니에요. 바뀌고, 바뀌고 바뀌지 않는 고정성이 짐승입니다.
오늘 강의 참 어렵다. 아까 오늘 주제에 뭐는 없다? 제목은 외부는 없어요. 외부는 없으니까 갈아봤자 그놈 이예요. 외부는 없으니까 이 안에는 뭐냐, 이쪽 인간이 이쪽으로 가고 니가 하나 내가 하나 누가 와도 마찬가지라니까요. 대통령 선거는 누가 와도 마찬가지라니까요. 자꾸 짐승 쪽으로 떨어져요. 지금 제가 뭘 설명 하려느냐 하면 아까 짐승은 어디 등장해야 되느냐 하면 하늘에서 오신 분이 와야 짐승이라는 정체로 자기 얼굴을 내밀어요. 그 근거를 아까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의 군대라 했죠. 군대는 싸우는 집단입니다. 싸움이 없는 집단은 군대여도 군대가 아니에요.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나온 이름이냐 하면 야곱에서 나왔죠? 야곱은 처음에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형하고 싸웠어요. 형하고 싸우는 동생을 쥐고 이것은 인류 전체와 싸우는 사람의 중심인물로 삼겠다는 것이 언약이 떨어진 효과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자고 있을 때 꿈에 사다리 왔다 갔다 했죠? 그 왔다 갔다 한 군대 이름을 포괄적으로 그걸 합쳐서 뭐라고 합니까? 마하나임이라 하는데 마하나임은 하나님의 군대죠.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에게 마구 쏟아지는 거예요. 그럼 야곱에게 쏟아진다는 말은, 성경이라는 것이 내용이 감당이 안 되도록 굉장히 폭이 넓어요. 야곱은 우리가 보기에 분명히 인간이죠. 인간에게 뭐가 접촉이 됩니까? 천사가 접촉이 되면 야곱이 천사를 부릴 수 있는 입장입니까? 입장이 아닙니까? 그런 입장이 못 돼요. 오늘 본문도 큰 천사가 들잖아요.
천사를 부릴 입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접촉을 한다는 말은 야곱은 천사를 감당할 수 있는 다른 인물로 바꾸어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바뀌어서 천사도 한 둘이 아니고 군대예요. 천군천사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인물로 야곱이 바뀌어야 되는데 야곱은 웬만하면 인물이 안 바뀝니다. 다만 야곱이라는 것과 야곱과 천사를 관리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차가 올라온다. 차가 올라올 때 차가 올라오는 거예요? 사람이 탄 겁니까? 아니 사람이 탔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멀리서 사람이 안 보이고 차만 멀리서 산길로 올라오는 거예요.
분명히 야곱이 올라오는데 그 안에 누가 탔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탄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야곱이란 인간을 통해서 뭐하느냐 하면, 천사의 역할, 이 천사가 무슨 천사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군대죠. 하나님의 군대가 뭐하는 일입니까? 전쟁하는 일이죠. 하나님의 전쟁하는 일이 야곱이란 걸 통해서 하나님이 내부에 탑승해서 몰고 오시는 겁니다. 몰고 오실 때 이 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누가 보입니까? 야곱이 보이죠. 하나님이 야곱에게 씨앗을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40만 50만 퍼뜨리니까 이 나라가 무슨 나라 됐어요? 이스라엘 됐죠. 이스라엘이 40만이지만 하나예요. 왜,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40만을 합해서 이스라엘 이름이니까. 이스라엘 남자만 40만 대군이 하나로 통솔된다는 말은 여기 한분이 뭐로 와야 돼요? 왕으로 통제돼야 돼요.
그러면 이스라엘에 왕이 필요합니까? 필요 안 합니까? 따로 인간 왕이 필요 없죠. 이게 어려운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자기를 지켜 줄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주죠. 그러면 정치론은 정치론이 아니고 뭐다? 존재론이잖아요. 내가 여기 존재하잖아요. 존재하면 인간은 반드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나를 지켜 줄, 나를 보호해 줄 어떤 사회나 어떤 공동체를 원하기 마련이라 말이죠.
가인이 만든 게 뭡니까? 도시죠. 가인이 도시 만들 때 하나님의 인을 맞아서 도시에 가입해서 도시를 만들었죠.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살아가기 마련이죠. 세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은 다 뭐가 있습니까? 왕이 있죠. 어떤 나라에 왕이 있다면 그 왕을 자기들은 어떻게 봅니까? ‘이건 왕은 가상이야. 허구야, 소용없어.’라고 생각합니까? 이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정치론이 존재론이라는 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왕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내가 여기 없다.’와 똑같은 소립니다.
내가 있는 이상은 나를 보호해 줄 나보다 뛰어난 사회를 원하고 사회로부터 사회를 통솔해야 될 질서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어디 일을 마치고 가는데 강도를 만나서 옷 뺏기고 도둑놈이 와서 뺏기고 하면 나라꼴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가는 길에 경찰관이 있어야 누가 와도 지켜줘야 되지 않습니까? 경찰관은 월급은 누가 주고 훈련은 누가 시킵니까? 경찰관은 저희끼리 합니까? 아닙니다. 경찰관을 지휘 통제할 수 있는 경찰청이 있어야 되고 그 위에 누가 있습니까? 대통령이 있어서 보호해줘야 한다 말이죠. 그럴 때 사람들은 이걸 정상적인 리얼리티, 현실로 보고 인간 공동체 사회로 보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그런 것들이 대통령이 있고 정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 허무라고 느낍니까? 안 느낍니까? 전혀 안 느끼죠. 이상합니까? 당연한 거지, 그게 왜 이상해요?
그래서 이방 나라 보기에는 누가 이상해요? 이스라엘이 이상하고 나중에는 이스라엘 본인이 저들이 이상해요. 왜 우리는 왕이 없고 쪼다 같은 인간들이 어떤 성신 받을 때만 ‘우리는 하나다.’ 해놓고 ‘이번에 당신 기드온 덕분에 미디안 군사들한테 구원받았으니까 당신 왕 해라.’ 하면 뭐합니까? 왕 시켜줘도 안 해.
왕이라는 것은 세습제입니다. 세습제란 뭐죠? 아버지가 왕 되면 아들도 왕이 되죠. 이 말은 뭐냐 가문은 특별 가문, 가문 자체를 특수한 가문, 거룩한 가문, 이 가문은 이집트에 의하면 어디까지 연결돼 있습니까? 신과 모든 문명은 특수한 가문과 신과 연결시켜 놨어요. 이러한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다? 주관의 객관화! 제국은 외부가 없고 전부 다 내부에서 창작하고 창설하고 만들어 낸 거예요. 신화시대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지금 거기에 깜박 속아 넘어 온 거예요. 국가가 있고 다 정상적으로 놓여진 이런 데 있어야 될 게 있다고 우리는 다 본 거예요. 학교에는 교사가 있어야 되고 유치원에는 보건 선생이 있어야 되고 병원에는 의사 있어야 되고 우리는 그것이 전혀 하자 없고 정당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마땅한 것이고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그냥 캘빈주의에 의하면 그것도 하나님의 소명이고 전부 다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들을 위하라고가 아니라 그 중에 일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지금 정당하게 일을 하고 있다는 스스로 자기를 정당화 시켜서 그래요. 그러니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우리나라 잘 되게 하옵소서.’ 덴마크하고 우리나라가 할 때 우리나라 이기게 하고 덴마크 지게 하옵소서.‘ 전부 다 우리나라, 내가 아는 사람, 내 가족, 내 친척, 내 마누라, 마누라 이혼하면 새로 사랑하는 여자, 전부 다 자기중심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은 없습니다. 왜 왕이 없는가, 기존의 모든 왕들은 신이 있는데 이방나라에 있는 신을 한마디로 뭐라 합니까? 우상이라 하죠. 이게 또 다른 나라가 보면 말이 안 돼요. 지 신은 참된 신이고 자기나라 신 아니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우상시한다면 그런 독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요번에 제가 수련회 때 이야기했잖아요. 뭐라 했습니까? 우상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무슨 기계를 동원시킨다고 했어요? 지문감식시스템, 미국의 드라마 미드에 보면 CSI(Crime 범죄 Scene 현장 Investigation 조사)에 보면 나오죠. 어떤 사람이 과학 수사할 때 자문을 나타내는 기계에 지문을 그리고 지문에 맞을 사람들이 사진을 화면에 띄웁니다. 그러면 막 지나가는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아냐, 이거야.’ ‘딩동. 빙고’ 딱 맞다.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는데 문제는 뭐를 모릅니까? 다른 신이 뭔지 모르죠. 그러면 다른 신이 뭔지 나타날 때까지 이스라엘을 가지고 계속해서 다른 신과 전쟁을 하게 만듭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메시야가 등장하지 않는 법인데 우상이 뭐냐 하기 전까지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먼저 뭐가?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해서 뭣과 대결하게 합니까? 우상과 대결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보시기에 ‘저게 바로 그거야.’ 라고 ‘딩동’ 하고 딱 등장할 때 그것이 바로 ‘십자가’예요. 십자가 사건 딱 아다리 될 때 '바로 그거야. 그게 바로 우상이었어.‘ 모든 우상을 우상 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합니까? 신약 성경에서는 악마라고 하죠. 악마가 나올 때까지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시 하면 차가 올라온다 할 때 차가 보입니까? 사람이 보입니까? 차가 보이죠. 악마가 예수님 공격할 때 악마가 보입니까? 악마가 모는 차가 보여요? 마찬가지 아닙니까? 악마는 안 보이고 뭐가 보여요? 악마는 안 보이고 차만 보이죠.
동방박사가 별 따라 왔을 때 어디로 갔죠? 제일 먼저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중간에 어디에 기착했습니까? 헤롯왕에게 갔죠. 헤롯왕이 그 당시 뭡니까? 정치적인 주체라 했죠? 전에 설교할 때 정치적 주체라고. 정치적인 주체에 왜 별이 없어졌어요? 바로 베들레헴 가면 되는데, 뭐 별을 못 찾아서 그래요? 하늘나라 네비게이션이 고장 나서 그렇습니까? 아 이쯤 되는데 못 찾아서 그렇습니까? 왜 별이 헤롯에게 멈췄습니까?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이 그냥 예수 믿으면 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정치적인 세계 속에 왜 사업을 벌이면서 직장에 나가면서 왜 고생을 해야 돼요? 왜 해야 돼요? 무슨 깨달음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악마의 실체는 ‘니가 정상적이다. 그렇다, 반드시 있어야 돼, 이건 필요 없는 게 아니야. 있어야 돼, 경찰 있어야 돼, 있어야 돼, 있어야 돼, 있어야 돼.’ 그 정당선 전체가 악마의 객관성!!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세상의 모든 것을 쥐고 있었던 거예요.
별이 멈췄죠? 멈추고 난 뒤에 누가 혼이 났습니까? 동방박사가 혼났죠. 동방박사는 헤롯왕 만나러 온 게 아니에요. 지금 별 따라 갔는데 분명히 메시야를 만나러 갔는데 별이 멈추니까 동방박사는 별이 베들레헴에 있는지 몰랐어요. 별이 가는 곳만 갑니다. 인도하는 대로 가는 거예요. ‘실례합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동방에서 왔습니다.’ ‘뭘 찾아왔습니까?’ ‘메시야, 왕이 나타난 모양인데.’ ‘어디쯤 나타났는지 모르겠습니까?’ ‘기다려보세요.’ 메시야 온다면 베들레헴에 태어난다. 그럴 때 그 소리 듣고 간 게 아니고 그런데 갑자기 떠나려 할 때 무빙스타, 별이 움직이면서 베들레헴에 갈 때, 그때 헤롯이 뒤에서 뭐라 합니까? ‘죽여라.’ 그 죽이란 소리를 아담에게 덮쳐왔던 천사,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 중의 천사가 뭐를 캐치했죠? 천사가 밤중에 동방박사에게 뭐라 합니까? ‘오던 대로 가지 말고 딴 길로 새라.’ 누가 조정했습니까? 천사가 조정했죠. 천사가 누구의 지시를 받습니까? 보이지 않는 왕, 아기 예수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죠.
다른 말로 하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의 지시를 받죠. 하나님의 이름은 전쟁을 통해서 진짜 숨어있는 우상을 밝혀내는 역할을 하죠. 그 동방박사가 빠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또 뭡니까? 베들레헴에 태어난 걸 조사해서 ‘다 죽여라.’ 자, 그럴 때 그 다 죽이라고 명령할 때 헤롯 군대가 베들레헴에 가서 2살 밑의 아기들을 다 죽였잖아요. 그 죽일 때 경찰관들이 동원됐잖아요. 그런데 그 경찰관이 파출소장이라 합시다. 파출소장이 우리 아는 동생이라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파출소장은 본인이 예수님한테 어떤 감정이 있어요? 아니죠. 파출소장이 아기 예수에 대해서 뭐 사기 당한 일 있습니까? 아니죠. 파출소장이 누구 명령을 받습니까? 그 당시 지도자 헤롯의 명령을 따르죠. 그러면 2살밑의 아기들을 죽인데 대해서 자기 사적인 견해를 집어넣으면 돼요? 안 돼요? 안 되는 거예요.
오늘 강의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겁니다. 마귀에 속해도 우리는 마귀의 그걸 우리는 거역한다? 거역 못한다? 거역을 할 수도 거역을 하고 싶지도 거역을 할 수도 없어요. 왜, 우리의 몸은 내가 다스리는 게 아니고 이 몸이 다스리기 때문에 몸은 ‘밥 달라’ 하죠, 2살 밑의 애들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파출소장 잘리느냐 안 잘리느냐 그게 더 중요하다 말이죠. 죽기가 무서워서 종노릇할 때 그게 누구 종노릇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 악마의 종노릇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자손은 악마의 종노릇을 풀어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돼 있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종교 따로, 교회 따로, 사업 따로, 가정 따로, 전부 따로 노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장바구니처럼 집어넣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걸 허용 안 해요. 하나님 말씀은 그걸 용납을 안 합니다. 착하고 착한 우리 딸이 선생님이 시키는 그 모습 하나, 하나가 마귀가 조정하는 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고, 어느 누구도 마귀에서 벗어난다, 마귀를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마귀보다 더 센 게 있어요. 성령입니다. ‘아! 성령을 동원해서 대통령 하라나보다.’ 아니에요. ‘성령을 동원해서 사장 멱살 쥐라 하나보다.’ 아니라니까요. 성령이 동원해서 교사 뺨 때리라.‘ 그것도 아니고 성령이 오면, ’바로 내가 죄인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이미 해결이 다 끝난 상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 아는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정권을 바꾼다든지 우리가 칼을 쥐고 전쟁을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전쟁, 전쟁, 전쟁이라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다 끝내버린 상태에서 우리는 빠져나올 수 없는 그 길을 주께서 친히 만들어서 끄집어내요.
환란과 핍박과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라는 길을 통해서 뭐를 발견합니까? 우리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면서, 바뀌면서 그 가운데서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음을, 십자가로 이미 용서로 다 구원되었음을 확인하는 그러한 상황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뭐를 알 수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이 장난이 아니고, 이게 하나의 소설책이 아니고 성경이 실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파악할 수가 있죠. 그럴 때 우리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천국 간다는 이 사실이 새롭게 다가오는 겁니다. 왜, 자기가 이 땅에 가진 게 없기 때문에, 만날 마귀한테 굽신거리고. ‘니 왜 그런 짓 하나?’ 하면 ‘월급이 있는데, 월급이.’
한나 아렌트란 유명한 유대인 여자 철학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정범을 재판하는 것을 참석 하고 하는 말이 ‘정범이 나쁜 인간이 아니다. 그 사람은 순수한 보통 시민이었다. 그가 500명의 유대인을 학살할 때 그건 지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평소에 착실한 사람이거든요. 내가 해야 될 것은 반드시 해내고 마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한 그 버릇이 반복된 학습이 그 속도를 죽이지 않고 그대로 나가다 보니까 500명의 유대인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걸 위에서 시켜서 했으니까 내가 한 게 아닙니다. 이게 농담이 아니고 진짜래요. 진짜로 그래요.
이OO경감이란 사람, 그 사람이 얼마 전에 죽었던 김OO를 고문했던 사람인데 그때 죽은 게 아니고 죽을병을 만들어 놨는데 ‘나는 그때 그게 옳은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OO은 악마고 김OO는 천사입니까? 둘 다 내가 무슨 짓을, ‘내가 고문 짓을 안 하고 차라리 고문을 하려면 나는 사표를 던지겠다.‘ 던져도 그는 악마입니다.
이 땅에는 이상적인 사회, 살기 좋은 사회가 기껏 해봐야 큰 성 바벨론, 백날 이상적인 사회, 유토피아, 완벽한 사회, 보다 잘 사는 사회, 더 이상 학교에서 왕따가 없는 사회, 그 세계가 뭐냐 하면 큰 성 바벨론 이예요.
이걸 알게 되면 소위 자유주의 신학, 이상사회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노력한다는 모든 것들이 다 마귀 짓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교회? 교회만은 착하다. 말도 안 돼요. 진짜 교회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 아니면 구제 불가능한 인간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고백하는 모임이 교회입니다. 다른 것은 교회가 아니에요.
천사가 뭐한다 했습니까? 천사는 전쟁을 한다. 전쟁의 목적은 뭐라 했습니까? 우상을 전쟁한다. ‘우상 나와, 우상 나와, 이 세상 배후자 나와, 배후자 나와, 근원지 나와, 땅 말고, 땅에서 나오는 지도자 말고 만날 바꾸는 지도자, 왕 말고 어떤 인간이 왕이 되더라도 어떤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것을 쥐고 있는 그 정체 모를 인간 나와, 그 존재 나와.’ 바다에서 슥~ 기어 나와요.
처음부터 바다에서 올라 온 거예요. 처음부터. 그것을 수소문해서 다 적용하니까 바다에서 올라온다고 돼 있어요.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이 결국은 땅에 있는 인간을 지배한다. 이것은 바로 뱀이 아담을 미혹했다와 같은 시점에서 계속 이야기가 놓이게 되는 거예요. 어느 게 후다 전이다 하는 일은 없어요. 이 세상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 갈 때 갑자기 폭풍이 일었던 이유도 알고, 폭풍 속에서 폭풍이 일 때 제자들이 당황했을 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실 때 제자들이 깨울 때 제자들에게 뭐라 하십니까? ‘너희들이 왜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행할 때 그건 예수님의 자기 죽음이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떡으로 이해한 거예요. 그럼 뭔 뜻입니까? ‘이거 먹고 더 살지.‘ 한 거예요. ’이거 먹고 같이 죽자.‘ 이래야 되는데 ’이거 먹고 더 살자‘ 하니까 나중에 정작 예수님께서 ’진짜 정답 듣고 싶나?‘ 하니까 ’듣고 싶습니다.‘ ’그럼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그러니까 다 가버린 거예요. 결국은 그들은 그쪽 세계로서 예수님을 자기 세계에다 예수님을 무조건 끌어당길 생각만 했지 정작 예수님의 생각에서 전혀 접근조차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이것을 성령 받은 사람은 매일 삶 속에서 이걸 알아야 돼요. ’나같이 월급만 챙기고 앞으로 내가 만약 경찰관이 돼서 저 동네 사살하라 .‘ 하면 ‘예’ 하고 충성 되게 가죠. 왜, 그게 공무원이 해야 될 충실하고 충직한 공무원이 해야 할 짓이니까. 뒤돌아보니까 그게 정권용이 되죠. 정권용이 되고 안 되고는 문제가 아니고 자기 할 도리를 할 수밖에 없죠.
그러한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그 인간이 마귀한테 붙잡혀 사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오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이 날로 새롭게 새로 보이시거든 아버지께서 살살이 아니고 질질 끌어당긴다고 보시면 됩니다. 매일같이 메가지 쥐고 성령으로 건지고 잡아당기는 거예요. 당기면서 온갖 짓 다 하는 거죠.
전쟁을 한다. 그러면 다니엘에 있어서의 여호와는 누구와 전쟁했습니까? 마르둑 신하고 했죠. 마르둑 신을 어느 나라 신입니까? 바벨론 신이죠. 바벨론 신은 마르둑, 유다 신은 여호와, 누가 이겼습니까? 마르둑 신이 이겼죠. 그러니까 성전에 있는 기명들이나 그릇들을 다 뺏어갔잖아요. 그리고 유다나라의 다니엘과 많은 사람들을 포로 잡아갔잖아요. 누가 진 것처럼 보입니까? 마르둑 신이 이긴 걸로 보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역으로 이용했죠. 몽땅 잡아감으로써 비로소 악마의 악마성이 드디어 마지막 공개할 때가 가까이 왔어요. 블레셋 나라가 언약궤를 빼앗았습니다. 누가 이겼다고 봅니까? 블레셋이 언약궤를 가졌으니까 이긴 것 같지만 언약궤가 돌아다니면서 모든 블레셋 나라에 전염병을 일으키고 다곤 신상이 엎어져서 손모가지 다 부러지고 했죠. 그럼 누가 이긴 거예요? 언약궤가 이겼죠. 그러니까 블레셋 나라가 어떻게 했어요? 회의를 해서 ‘내 보내야 돼,’ 자기들 했던 것을 빌고 내보내죠.
자, 바벨론이 누굴 이겼습니까? 여호와를 이겼죠. 다니엘이 섬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바벨론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자는 누구였습니까? 지혜로운 자는 누구였습니까? 다니엘이잖아요. 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을 뭐하는 존재입니까? 다니엘의 지혜가 얼마나 추월적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재료로 쓰여진 것이 수준 낮은 느부갓네살 이예요. 그런데 수준 낮은 느부갓네살이 인간의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을 한꺼번에 쥐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마귀도 어디에 필요하다? 다니엘 구원하는데 필요조건으로 반드시 주변에 배치돼야 돼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마귀가 필요해요. ‘니가 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서 죽는다.‘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했거든요. 요한복음 10장에서. 바로 그 작업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무엇이 착한가, 나쁜 짓은 안 해야지, 착한 일 해야지.‘라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이 세상에 같이 묻혀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는 피로써 이미 그 현장에서 이미 그 자리 있으면서 용서했다니까요.
그러니까 왕은 누가 왕입니까? 공무원 짓해도 누가 왕 이예요? ‘나는 예수님이 나의 왕입니다.’ 이 땅에서 인자를 세상에서 인자를 시인하면 마지막 때 나는 너희를 시인할 것이고 인자를 부정하면 내가 너희를 부정하리라. 마태복음 10장 32~33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 내십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ㅎ ’그래도 주님은 살아계셔.‘ 이런 식으로. ’내가 참 더러워서 애 셋이라 밥 먹고 살려니 아무소리 못하지만, 아휴, 그래도 내 죄를 주께서 아신다.‘ ’내 의를 아신다.’가 아니라 ‘내가 무슨 짓을 한지 주께서는 다 아시고 계시니 감사합니다. 이 죄를 다 처리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거 대신 죽으신 거예요.
그 다음에 23절 봅시다.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요거 잠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생산이 극대화되면 인간의 정치적 객관화도 늘어나게 돼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위에서 잡아당기는 어떤 세력이 있는 게 아니고 내부에서 활동이 많아지면 외부의 권력이 커지게 돼 있습니다. 기체와 액체와 고체의 차이점은 뭡니까? 분자의 활동이 심하게 일어나면 기체가 되고 그래서 온도를 높이면 기체 부피가 늘어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꾸 인간은 객관화를 생각해서 ‘우리나라‘라 말하지만 우리나라는 없어요. 우리나라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활동성에 따라서 우리나라는 커지고 우리나라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활동성이 적어진다든지 ’우리나라 못 살겠다 이민 가야지.‘라고 빠져버리면 이게 줄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나라를 유지하는, 그 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 나라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안에 속 알맹이의 활동 여부에 따라서 껍데기는 점점 더 번창하고 화려하게 보인다 이 말이죠.
그래서 큰 성 바벨론이라 해놓고 안에 실제 내용은 뭡니까? 상인들, 사업하는 사람들, 무역, 또는 생산하는 사람들, 경제 활동하는 사람들, 경제활동의 주체들, 가정주부도 마찬가지로 밑에서 가계부 쓰면서 아끼니까 주체들이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경제는 자기가 노동해놓고 그 모든 은덕을 어디다 돌립니까? ‘아, 우리나라가 살기 좋아.’ 이러잖아요. 그런데 아까 봤죠? 실제는 인간이 활동해 놓고 그게 나중에 추상화 된다 했죠. 추상화. 이제 끝이 되가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모든 국가 사회는 추상화입니다. 다 추상화예요. 가정이 화목하다. 추상화죠. 심지어 뭡니까? 가족 구성원끼리 서로 의 맞고 인정 있게 살면 그것이 가정이 결과적으로 화목한 거죠. 가정 화목하면 가정 화목으로 들어가면 가만이 있어도 가정 화목 합니까? 이 집이 가정 화목하다 하면 지는 가만히 있고 지는 개판 치면 가정이 화목합니까? 오히려 이질적인 것이 오면 가정 화목한 것도 깨지잖아요.
화목하다는 것은 하나의 희망이고 폼으로 걸쳐 놓고 실제로 활동하는 것은 누가 해요? 구성요소들이 활동하죠. 구성요소라는 말도 어폐가 있어요. 그게 전부예요. 사실 내용이 전부고 바깥의 외부에 있는 결과 껍데기 결과물일 뿐입니다. 일종의 우리가 인간의 활동에 말을 뭔가 붙이다 보니까 그게 나온 거지, 실제로 국가라는 게 있는 게 아니고 그 안에 구성된 사람들이라고 할 때 그들은 이상스럽게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게 되면 이 구성요소가 한결 같이 하나로 정서가 올인 하는 거예요. 이게 세상의 정치와 철학이 일원화 돼요. 정서가 하나로 돼요. 안중근 의사가 뭐하게 되면 우리나라가 다 같이 의분이 나죠. 한국 사람한테 LA인가에서 중국사람 7명이 얻어터졌죠. 중국사람 보면 화날 거예요. 정서가 하나로 모이죠.
그 정서, 또는 기쁨, conatus라 하는데, 인간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팽창하고 존재하려고 하는 본능을 스피노자는 conatus라 또는 역량을 일으키는 활동력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정서가 직업에 상관없이 하나로 집결된다는 겁니다. 이란, 북한, 막 울어요. 팬클럽도 그런 팬클럽 없어요. 이상하잖아요. 그 정서가 결국 어디로 모인다? 오늘 성경에 의하면, 큰 성 바벨론! 따라서 하나님의 군대에 대적하기 위해서 그들이 군대처럼 조직돼서 활동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왕은 누구라고요? 어디서 올라왔습니까? 바다에서 올라온 것, 천사가 ‘에라, 니 왕한테 갓. 자, 니들은 바다와 하나님의 창조에 어울리지 않아. 바다에 빠져라.’ 바다에 빠지죠.
이 말은 땅이 건전하단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왕 중심에서, 새로운 왕 예수님 중심에서 새로운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기존의 악마가 다스리는 왕은 더 이상 이제는 예수님 앞에서 좀 사라지고 심판받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냥 자연스럽게 봤던 모든 세상도 정서적으로 하나로 집결돼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아무소리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고 그것이 하자 없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 우리 몸 하나 챙기기 위한 이기주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저희들 이미 아시고 십자가의 거룩한 피로 용서해 주셨사오니 용서하신 그분의 피를 흘린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왕인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