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30강-경제판 1201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24. 21:04

2012-01-06 09:13:44 조회 : 1494         
경제판 120105 이름 : 이근호 (IP:117.55.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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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120105-요한계시록18장(경제판)30강a-이 근호 목사
제 30강a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입니다. 계속해서 일곱 대접의 내용들이 나오는데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라고 돼 있죠? 성경 요한계시록 볼 때마다 항상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이 알 수 있는 것과 인간이 알 수 없는 것, 이것을 섞어 놔버려요. 섞어 놔버리면 여기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오는 걸 보니.’ 이것은 언제? 어느 때? 어느 장소에? 모르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언어로 돼 있는데 인간이 알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알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이예요. 그렇게 정리하면 되죠. 인간이 쓸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천사, 권세, 바벨론, 다 쓰잖아요. 쓰는데 그러면서도 인간으로 하여금 도저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사는 판, 경상도 말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판 대기, 사는 기반이 달라서 그래요. 판이 달라서 그래요.

하나의 언어가 장미라면 장미가 기존의 꽃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장미라 하면 꽃, 그 장미밖에 없잖아요. 소설가한테 장미는 장미이름의 소설이 생각난다 말이죠. 이미 자기가 사는, 자기가 포함돼 있는, 내가 포함돼 있는 진흙 판, 진흙 판이라는 것은 찐득찐득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기 있어야 내가 생존의 판이 되니까. 이 생존의 근거에서 통용되고 사용하는 이 언어로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그 세상에서의 언어와 여기서는 연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알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 설명할 때는 반드시 이 둘 중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계시의 말씀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사이에 반드시 여기에 연결선을 하나 걸쳐놓고 그 다음에 이 둘 사이에 이해가 되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요 연결선이 뭐냐 하면 연결선을 먼저 말씀드릴게요. 누가복음 21장 찾아봅시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이 백성에게 그 다음에 뭐가 있겠다고 하죠? 진노죠. 감정이 섞여 있다니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냥 재앙이 온다 하죠. 재앙이 오는 게 아니고, ‘우리 집에 재앙이 왔다.’ 하고 진노, ‘우리 가정에 누가 화를 내더라.‘하고 다른 문제입니다.

지금 제가 강의하는 시작이 뭐냐 하면 인간이 언어를 사용했지만 하나님의 언어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의 사고방식과 달라서 같은 언어지만 이해를 못한다고 운을 뗐죠. 그러면 이해를 못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간에 뭐를 집어넣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죠? 그 집어넣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볼 때에 그냥 장난치듯이 뭔가 사고를 일으키는 게 아니고 화를 내신다는 겁니다. 화를 내신다는 것은 내가 누구한테 화를 버럭 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인상을 쓰시는 거예요.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거 확 부숴버릴까.’ 하는 거예요. 이것은 완전히 그냥 ‘내 것이 하나님께 벌 받았구나.’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구나.‘라는 인격자 대 인격의 만남, 요걸 중간에 넣자는 거예요.

열심히 기도하면 복 받는다 할 때 뭐가 빠졌어요? 뭐가 빠졌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화낸다는 요소를 빼버린 거예요. 한국 교회가 그래요. 송구영신 예배하면서 올해는 잘 되라고 자식들 공부도 있고 입시를 앞두고 열심히 기도하세요. 그러면 응답 받습니다.‘ 그럼 뭐가 빠진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 열심히 해봐, 열심히 해봐, 열심히 하는 자에게 복 줄게.‘라는 고용자, 또는 노동자 입장이지,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그런 것은 아니다 말이죠.

자애롭고 어진 아버지 앞에서 열심히 착한 일하면 복 준다. 이런 관념이지 처음부터 아버지께서 자식들 보면 보자마자 뭘 던지는 ‘ 화난단 말이야, 화나.’ 그 화난 사람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면 무슨 소용 있어요? 아무 소용없는 거죠. 오히려 화를 돋을 뿐이죠.

너희들은 기도할 때 너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을 가지고 기도하지 말라했습니다. 환장할 노릇 이예요. 이게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왜 그 말은 사람들이 쏙 빼놓는지 몰라요. 너희들이 무엇이 있어야 될 것을 너희들이 몰라. 누가 알아요? 우리 주님이 알기 때문에,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그걸 기도하지 마, 내가 가르쳐 준 것만 기도하고 니가 아쉬워하는 것 때문에 기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만약에 내가 아쉬운 걸 가지고 기도해버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결국 우리가 획득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항상 내 것에서 내 것으로 멈추고 맙니다. 내 것인데 기도해서 더 확장시킨 내 것이 돼 버리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화내는 이유가 그것 보고 화내는 거예요. ‘글세, 너 것이라고 우기지 말란 말이야, 그것 때문에 화내는데 그 화내시는 걸 모르고 ’하나님, 채워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 화를 더 돋우는 셈이 돼요.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먼저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제가 뭘 해야 됩니까?’ 이렇게 하라 말이죠. 그러면 뭘 빼야 돼요? 자기 영광을 위한 기도는 일체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린치 당할만하죠. 예, 목 베일만하죠. 우리는 지금 그분을 구세주로 믿고 있습니다. 모든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천명의 사람이 다 화를 돋울 수밖에 없는 천명이 들어도 ‘예수 저는 죽여야 돼,’라고 화가 날수밖에 없는 그분을 우리는 뭐 알고 믿는지 모르고 믿는지 우리는 사랑의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그렇다면 각오를 해야 돼요. 이용할 생각하지 마세요. 이용하려고 했다가 다들 12제자 다 배반했습니다. 그러면 그 출발점이 뭐냐, 바로 하늘과 땅 사이에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이 세상을 저주한다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 명쾌한 증거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의 죄를 짊어진 것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았다는 말은 곧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가 직접적으로 주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유일한 연결점은 뭡니까? 너희 눈앞에 십자가가 보이는데 그 다음에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이게 뭐냐 하면 출발점 전제가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야 되는데 십자가를 빼버리면 그 출발점이 어디서 출발되겠어요?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성의를 표하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진실된 삶을 사느냐, 얼마나 착한행동을 하느냐,’ 이거부터 출발해 버리는 것은 그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할 리가 없어,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내실 분이 아니야,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향하여 어떻게 자기가 침을 뱉을 수 있어. 그런 경우는 없는 거야.‘라는 잘못된 하나님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죠.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안 되는 이유가 십자가에서 눈을 안 돌리면 거기서 하나님의 저주가 증거로서 등장하는데 만약에 십자가에서 눈 돌려버리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분 내심과 화내심의 그 증거가 날아가 버려요. 그 증거가 날아가 버리면 하나님과 나의 만남은 괜찮은 분과 괜찮은 존재의 만남 이예요. ‘뭘 해드릴까요? 뭐, 찬양해드릴까요? 헨델처럼 메시야 작곡 하나 해드릴까요? 안 그러면 밀레처럼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는 들밭에 그 농부의 저녁노을 속에 만종이란 그런 아름다운 이삭 줍는 것처럼 신의 은총에 감사하는 그런 그림을 그려드릴까요? 뭘 해드릴까요‘ 라고 나오는 거예요. 뭘 해드릴까요? 우리의 타고난 버릇이죠.

마치 손님 영접 하듯이. 손님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방은 엉망진창 해놓고 거실 앞 쪽은 걸레질해서 치워놓고 ‘어서 오세요. 이래 삽니다.’ 보여주잖아요. 안방은 지금 바퀴벌레 돌아다니는데...하나님을 영접할 때 우리가 평소에 사람과 사람과의 그 만남의 관계 속에서 그냥 하나님을 받아들이니 진짜 오신 하나님을 사람들은 죽여야 될 자로 그냥 처리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 유일한 접촉점은 뭡니까? 사도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십자가를 가지고 해석하게 되면 이것이 비로소 요한계시록이 풀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 전체의 내용이 무슨 내용이냐, 여러분들이 다 한가하신 분이 아니라 다 읽어보지 않았겠지만 제가 대충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천사가 와서 1절 끝에 보면 재밌는 구절이 있어요. “그의 영광으로 인하여 땅이” 그 다음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환하여지더라.” 밝아졌더라. 조명발입니다. 다 시커먼데 거기다가 후레시 쫙 비추니까 갑자기 그 비췬 지점의 본질과 정체가 꾸물거리는 벌레들,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빛 앞에서 환하게 노출되죠. ‘음, 이랬었구나. 이렇게 살아왔었구나.’하는 거예요.

그러면 정작 그 인간 당사자는 그렇게 비취는 빛이 자기한테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뭐 이래 살아도 건전하고 이래 살아도 복 받을만해,’ 하고 자기 합리화에 굉장히 익숙해졌습니다.  친숙해졌어요. 다들 그렇게 사는데요 뭐. 그러나 밝은 빛 조명 앞에서는 내가 보는 것하고 전혀 달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밝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 앞에서는 누가 감히 그 앞에서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정말 십자가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달라 소리를 못합니다. ‘주여, 죄송합니다.’라는 말 밖에. ‘저 같은 인간을 위해서 피 흘려주시다니 제가 이 복음을 위해 제가 다른 뭐를 얻겠습니까?’ 제가 지난 수요일 날 이야기했잖아요. 아브라함이 받은 복, 그 복이 뭐냐, 이삭 하나밖에 없어요. 전 용렬 목사님 설교에 그게 나와요. 참 잘 설교했어요. 복 받은 복이 딱 이삭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도 내 힘으로 낳은 자식이 있는 전제를 깔고 이삭만 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니가 낳은 이스마엘 목매달래, 아니면 내가 준 자식에 목매달거야?’ 그걸 시험한 거예요. 그걸 시험한 게 뭐냐 하면 ‘니 자식을 내 앞에 번제로 바쳐라.’ 할 때 아브라함은 자기 이스마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모든 것, 이스마엘 그 자식은 놔두고, 여기에 같이 동참해서 거기다 몰입을 해버립니다.

자기 자식 속에서 하나님께서 계시로 접촉선 가릴 때 자기가 계시 내려오는 그 현장에 자기의 모든 걸 바친다니까요. 그걸 순종이라 해요.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말은 내가 만들어 낸 게 아니기 때문에 거기다가 올인한 겁니다. 다 갖다 부은 거예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 갖다 부은 겁니다. 이건 하늘에서만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온 자기 것을 끄집어내서 거기다 바쳐버린 거예요.

그럴 때 이삭이 다시 죽고 나서 다시 살 때 이삭과 동반해서 아브라함도 죽고 다시 산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가 진짜로 십자가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모든 걸 바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죽을 때 같이 죽고 예수님 부활할 때 같이 부활한 존재로서 인정받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이 결의한 의지도 아니고 오기도 아니고 도박도 아닙니다.  본인도 왜 예수님을 믿는지도 본인도 그 원인을 나에게서 찾을 수가 없어요. 또 찾지 말아야 되고. ‘이것은 있을 수 없다. 나 같이 자존심이 센 사람한테 있을 수 없는 거야, 이건 말이 안 돼, 왜 내가 예수를 믿는데? 이건 말이 안 돼.’라는 그런 놀라운 뒤풀이가 있어야 돼요. 경악을 금치 못하는 뒤풀이가 우리의 남은 인생을 휘감아 버려야 됩니다.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 해서 그걸 근거로 돈이나 빼먹으려고 하고 애 성적이나 올리려 하고 지 몸이나 나으려 하고 가정이나 화목하고 이런 식으로 삶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올인한 거예요. 주님이 거기 속아 넘어 갈 이유가 없죠.

조명발 확 비춰보니까, 우리에게 나온 빛 가지고는 도저히 발각이 안 되는 그런 요소가 하늘의 천사가 무순 역할을 하느냐 하면 조명 감독 역할, 조명 담당 천사가 와서 쭈~욱 비춰준 거예요. 마치 2차 대전 때 미군이 일본군을 폭격할 때 그때는 기계가 발달 안 됐기 때문에 전자 디지털이 발견 안 돼서 앞에 있는 비행기가 조명발을 팍팍 비춰주면 조명발이 터질 때 보면 ‘아! 너희들 여기 엎드려 있었구나.’ 하고 밤중에 어두운데 엎드려 있으니까 조명발로 환하게 발각시켜 놓고 집중해서 퍼붓는 것처럼 지금 천사가 앞에서 조명발 쫙 비춰줍니다. 비추게 되면 위에서 본 빛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가 아무리 철학에 신학에 공부를 해도 발각되지 않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다 들춰집니다.

명칭도 뭐냐 하면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다니엘에 의하면 최종 나라, 다니엘에 어디 나옵니까? 다니엘에 최종나라란 말은 다니엘이 했던 금신상의 발 부분이 넘어질 이때 하에 돌이 날라 와서 큰 태산을 이루기 때문에 요 시대가 이렇게 금에서 은에서 놋에서 철에서 진흙으로 가도 흘러가 봤자 같은 우상 안에서 흘러간 것이기 때문에 요 우상성에서는 변하지 않죠. 요것이 팍 고꾸라지니까 앞으로 수천 년 흘러도 관계없어요. 역시 그 바벨론의 연장선에, 같은 바벨론의 우상 안에 있는 그 틀 안에 있어요. 그리고 이 바벨론을 우상이라고 금 신상이라고 할 때 그렇게 규정한 성격, 이 성격에서 어떤 제국도 어떤 나라도 이 바벨론 성격에서 못 벗어나게 돼 있습니다. 왜, 조명발이기 때문에, 일곱 천사가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여러분들이 성경 볼 때 제가 자꾸 우려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성경을 확인하려 하고 이 성경을 지키려 하지 마세요. 성경대로 이미 돼 버렸고 그 다음에 우리 쪽에서 ‘왜 나는 성경은 바벨론으로 보는데 왜 나는 세상을 볼 때 바벨론이 안 보이지?’ 자기한테 문제를 삼아야지, 성경이 맞는가, 안 맞는가, 자꾸 지가 따지면 안 돼요. 고고학이 제일 나쁜 점이 그거 아닙니까? 왜 성지순례를 갑니까? 주님은 여기 있다 했는데,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다 했는데 왜 성지순례 하러 여행사에 돈 그만큼 많이 주고 거기 왜 가는데요.

2절에 보면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더러운 영이 모였다 하는 것은, 더러운 영은 여기 17장 13절에 나오죠. 더러운 영은 개구리 영인데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죠.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이 더러운 영들의 아지트, 아지트 그 중심으로 활동을 해 왔는데 그들은 그 정체를 우리 인간들은 알 수가 없었죠. 왜, 조명을 터트리는 일곱 천사의 안목을 우리는 안 가졌기 때문에, 어두움이 어두움을 보니까 뭐 고만고만하죠. 알아챌 수가 없잖아요. 그렇게 됐는데 그것이 3절에 보면 본질이 나와요.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이 말은 술에 취했다는 말은 지금 정신이 없다는 말 이예요. 지금 뭐가 어딘지 지금 정신도 없이 그냥 취하니까 그저 돈 벌고 돈 벌고, 돈 벌어서 뭐하는데? 그저 이유도 목적도 없어요. 그냥 돈 벌고 돈 벌고, 마치 술 취하면 사람이 술 마시다가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신다는 말이 있잖아요. 뭐 안 먹어본 사람은 뭔 소린지...ㅎ 이거는 물 마시는지 술 마시는지 분간도 안 될 정도로 내가 주인인지 술이 주인인지 분간도 안 될 정도로 여기 ‘치부되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격적으로 강의가 시작됩니다. 어렵지는 않아요. 어렵지는 않은데 생각을 깊이는 필요 없어요. 넓게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경제가 우선이냐, 정치가 우선이냐, 둘 중에 어느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되었습니까? 옛날에서는 경제가 우선이 아니었고 정치가 우선이었어요. 전제군주, 이걸 한자로 이야기하면 왕의 시대였어요. 국가 있다는 말은 국민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왕이 있으면 그게 국가가 되는 거예요. 왕 없는 국가는 없어요. 왕이 있다면 국가는 생기게 돼 있어요.

요즘 사고방식은 뭐냐 나라 먼저 만들어 놓고 대통령 뽑잖아요. 옛날에는 그게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어느 나라에 살 거냐가 아니라 어느 왕에게 보호를 받을 거냐가 백성들의 이주의 이유였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사무엘하에 보면 사울에게 쫓겼던 다윗이 어디 갑니까? 어느 왕을 찾아가요. 자꾸 왕을 찾아서 보호받죠. 옛날에는 영토라는 관념은 없어요. 무슨 줄을 쳐놨겠어요. 철조망도 없고, 철이 보급이 안 되는데. 철조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바로 옛날에는 혈육이 힘이기 때문에 그래요. 혈육=힘 타고난 핏줄, 고상한 핏줄, 왕의 가문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혈통을 다른 사람들은 자기 가문이 있는데 특정 가문의 혈통을 찾는가, 그것은 혈통 가문의 피가 RH+가 좋아서 그런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고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때 그냥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신에 의해서 세상은 움직인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믿었어요. 처음부터 가인이 제사할 때 보세요. 우리로서는 납득이 안 되죠. 가인이 제사를 누구한테 했겠습니까? 신에게 한 거죠. 세상은 신이 주관하는데 그 신을 주관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과 신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혈족을 중간 매개체로 해서 우리에게 신께서는 관계를 맺고 교섭을 맺는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이라든지 모든 고대 4대 문명 지 있잖아요. 고대 문명을 조사해보면 다 나와요.

그래서 사람들은 왕을 볼 때 왕을 그냥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신의 아들로 봐요. 그럼 신의 아들로 보면 왕 같으면 ‘기분 좋겠다‘하는데 그게 좋은 게 아닙니다. 제발 인간들로 봐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안 돼요.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왕께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인간들이 못하는 것, 가뭄이 들었다든지, 홍수가 났다든지,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재판, 그것도 애매모호한 재판, 이런 것에 대해서 서로가 만족스럽게 납득이 되는 것은 무엇의 죄다? 이것은 신이 내린 지혜자만 그렇게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왕이 됐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고 사람 하나 조져놓는 거예요. 아! 본인은 신의 아들도 아닌데 ‘으쌰, 으쌰 김정은, 김정은, 김정은.’ 사람들이 이렇게 신의 아들로 만들어 놓으니까 본인은 똥배 나와야 되고 얼굴 해야 되고 머리 싹 깎아야 되고 아버지처럼 걷게 되고, 이건 바보도 아니고, 내가 지난주일 아침에 했잖아요. 우리교인은 공동수상, 최우수연기상 받아야 된다고. 믿음이 있는 척하는 최우수연기상!

이건 신의 아들도 아닌 게 위에서 으쌰,으쌰 하니까 신의 아들의 행세를 해야 되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데 남들처럼 그냥 한복 입으면 되는데 호화찬란한 용의 옷을 입혀놓아서 사람 병신 만들고요. 가발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가발 쓰고 의자도 불편해요. 다른 사람들은 양말 신고 편하게 앉아서 고스톱 치기 편해요. 왕은 의자에 앉아서 폼 잡아야 되고 다른 사람은 교육 안 받아도 돼요. 그런데 왕자는 세 살 때부터 교육 받아야 돼요. 최고의 학자한테 알랙산더 같은 경우에는 세 살, 네 살 때부터 아리스토텔레스란 최고의 학자한테 그것도 남의 나라 학자한테 교육 받았어요.

그래서 알랙산더는 지가 신인 줄 알았어요. 미친놈 돼 버렸죠. 그래서 신인 줄 알아서 지가 신이니까 겁도 없이 다리오 3세와 붙어서 이겼잖아요. 바사나라의 다리오, 그게 기원전 3백년 경의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고대 전쟁을 할 때 반드시 모든 국가는 자기가 믿는 신을 앞장세워야 됩니다. 성경에 나오잖아요. 마르둑 신을 믿든지 말뚝을 뽑든지 하여튼 태양신을 믿든지, 전부 다 다곤 신을 믿든지, 꼭 신을 거쳐야 되는 이유가 왕을 좋아라고 왕이 있는 게 아니고 신에 합당할 때 이 민족은 신에 의해서 지배받을 때 가장 나라가 나라답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현대 학자들은 이게 뭐냐 하면 아직도 없는데 세상은 그냥 우연이고 전자, 원자의 집합에 불과한데 왜 인간들은 없는 신을 왜 찾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몰라요. 그것은 성경에서 나온 게 인간은 뭡니까? 인간은 그냥 육적 존재가 아니고 영적 존재, 귀신과 관련된 존재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 가인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느냐 이 말이죠. 드렸어도 받지는 안했지만. 최초의 도시가 가인에서 시작된 게 아닙니까? 가인이 쫓겨나서 도시를 만들잖아요. 그래서 가인의 후예잖아요. 왜 그 가인이 처음부터 신을 섬겼느냐, 인간 마음속에 신이라는 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지 딴아 여러 가지 이론들을 내세우죠.

프로이드란 사람은 아버지와 엄마가 가까이 지내니까 자식들이 질투해서 엄마를 독차지하려고 아버지를 때려죽여 놓고 아버지의 시체를 다 뜯어먹고 미안하니까 아버지가 내 안에 살아있다는 식으로 그때부터 조상숭배를 시작해서 아버지의 이미지를 고정한 것이 신이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것은 뭐냐 기독교에서 성만찬할 때 내 살과 내 피, 그런 것을 참고로 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일본의 학자들은 처음에는 일신이었는데 다신교가 있었고 처음에는 숲속에 정령이 있었고 정령이 다신교로 바뀌었고 다신교에서 일심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이것도 안 맞아요. 처음부터 일신교는 하나, 처음부터 하나였어요. 다른 증거들에 의하면.

그래서 여러 가지 이론들이 많은데 어쨌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처음에는 인간들은 경제적이지 않고 정치적이었다. 정치라 하는 것은 결국은 신으로부터 혜택을 입으면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고 신으로부터 저주받으면 우리나라는 망하고 우리 혈육도 다 떨어진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제일 어질고 착하고 훌륭하고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하나의 일종의 인신공량, 신에게 바치는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같이 섬기면서 신에게 바칩니다.’ 바쳐지는 신은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이거는 미치는 거예요. 대통령 하고 싶다는 자체가 내가 보기에 이상해요. 그거 왜 하는데? 그게 뭔가 정신이 헤까닥한 건지 귀신한테 씌워서 그러는 거예요. 올려놓고는 지들이 다 해먹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사회가 발달하면서 정치적인 지배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것이 밑바탕이 돼서 나왔던 정치였다는 것이 성경에 보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 본문 한번 봅시다. 11절 봅시다.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사람의 영혼 하는 것은 노예겠죠. 온갖 그 당시 지중해에서 일어났던 주고받던 모든 무역인, 두로라든지, 베니게라든지 무역항이 발달된 겁니다. 굉장히 발달됐어요. 이게 일종의 해적인데 해적들은 원래 수평선, 바다를 다스리는 자가 무역을 하게 돼 있어요. 배 제작부터 해서 항해술이 발달되지 않으면 그냥 뗏목 타다가 뒤집어버리면 다 죽잖아요. 항상 땅이 없는 민족들이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리고 그들이 무기를 사서 땅이 있는데 가서 약탈한다든지 땅을 사고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마지막에는 땅이 있는 자가 패권을 잡는 게 아니고 바다에 무역하고 돈 많은 부자가 결국 세상의 패권을 잡는데 그럴 때에 어디가 진실에 가까우냐 하면 진짜 바벨론의 진실에 오히려 이런 무역상들의 감당 못할 아주 정신없이 돈 벌기에 매진하는 이러한 모습들이 바벨론의 숨겨진 최후의 모습들이다 이 말이죠.

그것들이 드디어 산과 바다에 재앙이 떨어짐으로서 하나님의 분노하심으로서 무역선이 불타면서 모든 무역에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 닥치면서 정치적인, 사회적인 모든 기반을 와르르 다 무너뜨리게 되죠. 그때 바벨론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딴 게 아니고 돈에만 미친 인간들의 집합체라는 정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돈에 미친 자의 집합체! 그리고 윤리, 도덕, 양심, 정치, 예절, 법, 이런 것은 전부 다 하나의 그것은 장식에 지나지 않아요. 그것조차도 돈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기대해서 척하는 것들, 체하는 것들에 지나지 않아요. 가족의 모든 혈육관계든 모든 부모 자식 간에 모든 관계는 마지막에는 돈이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마태복음 6장에 나오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누가복음 16장에도 나와 있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리고 골로새서에도 나와 있고, ”땅의 것을 사랑하는 자는 우상숭배 자다. 탐심을 내지 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이 분명한 것이 그 말씀대로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그렇게 돼 가야 돼요.

우리가 성경 해석 제대로 해야 됩니다. ‘아! 이것은 말씀에 어긋났구나.‘ 말씀에 어긋났다고 하지 말고 말씀대로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온통 세상이 돈밖에 모르는 세상 된 것에 대해서 ’역시 주의 말씀은 틀린 게 없어.‘ 다시 한 번 찬양해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요한계시록을 무시하고 그걸 모독하고 인간의 힘으로 이왕 살게 된 이 땅을 아주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왕 공동체 하는 것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자. 욕심 내지 말고 어떤 유토피아, 이 땅에서 천국을 만들어 보자는 두 가지의 시도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정치적 시도가 있어요. 두 번째는 경제적 시도가 있습니다. 중간에 1.5는 정치적과 경제적인 것을 겸비한 3가지의 이론들이 나왔어요.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은 정치적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려면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국가’라는 책을 지었어요. 그 책에서 바른 정치를 하게 되면 이 땅에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께서 사람을 만들 때 금과 은과 동(구리)에 해당되는 각각 구분된 사람을 주셨다. 금은 통치자, 귀하니까, 은은 국가 수호자, 관리하는 공무원들, 동은 생산자, 그래서 동으로 태어난 인간들은 어디 감히 은을 넘보면 안 되고 은에서 나온 사람은 감히 금을 넘보면 안 돼요.

그러면 정치는 어떻게 하느냐, 모든 문제는 개인이 재산을 갖는 게 문제였다는 겁니다. 사유재산, 사유재산을 없애는 겁니다. 그래서 통치자는 금 같이 태어났기 때문에 세상을 보다 높은 자리에서 많이 보고 깊이 알기 때문에 이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 철학자에게만 통치자가 돼야 된다. 철학자니까 세상에 대한 지혜가 그만큼 풍부하고 깊은 거예요. 철학자만 통치하는데 거기에는 일체 개인적인 재산은 없고 모든 백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떠나서 훈련을 시키는 거예요. 시나 고상한 것, 예의범절을 훈련을 시켜요.

그리고 사회상 가운데서 부인을 갖고 있으면 안 돼요. 부인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애를 못 낳잖아요. 애를 낳되 부인을 어떻게 하느냐, 부인 공유제를 하는 겁니다. 부부 공유제인데 왜 여자들이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데, 여자들이 직업 현장에 안 뛰어들고 가정사를 하다 보니까 여자들끼리 모이잖아요. 여자들끼리 모이면 여자들은 하와도 그랬지만 아름답고 이쁘고 그런 것에 대해서 한번  필이 꽂혀버리면 세상의 천하를 줘도 그 보석을 못 가지면 사람이 뭔가 화딱지 나는 모양이라. 스트레스 받는 모양이라. 명품을 남자들은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명품 시계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별로 없고, 명품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명품이 아주 예쁘고 진짜 예술적이고 그렇잖아요. 촌스럽지 않고 귀한 존재고 흔하지 않고. 거기에 한번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모든 돈을 다 벌어서라도 오직 그 명품 가방 사기 위해서 그 수모를 당하면서도 목적하는 것을 그 최고의 아름다운 것을 갖고자 하는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남자애들은 탱크로 부웅~ 타다다닥~ 총 쏘고 놀잖아요. 그런데 여자애들은 그저 바비 인형 가지고 빗으로 머리 빗어서 나중에는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머리가 다 빠져버렸어요. 쓸고 옷 입히고 분홍 입혔다가 노랑 옷 입혔다가 이야기같이 했다가 하는데 남자는 개 키우다가 싫으면 발로 차고 하는데 여자는 개를 키워도 옷 입히고 미용실에 가고 지 미용실 가는 것보다 돈도 더 많이 들고, 아프면 ‘아이쿠, 아파요?’ 하면서 병원 가서 주사 맞히고 영양제 맞고 사료도 고급 사료에 인삼 집어넣어서 먹이고.

그러니 여자가 사유가 되면 여자가 아름다움을 가지기 위해서는 누구를 들볶겠습니까? 남자를 들볶아서 ‘다른 부인들은 이런 게 있는데 나한테도 내놔, 빨리 내놔.’ 하게 되면 여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플라톤이. 그래서 부인을 아예 시장에 내놔서 전부 공유제라. 오늘은 니 부인 됐다가 내일은 내 마누라 됐다가, 참 플라톤도 참... 얼마나 이상 국가를 했으면...

그런 식으로 해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똑똑한 정치가, 그래서 여자는 안 돼요. ‘남자로서 똑똑한 철학가가 철저하게 계급을 해서 어릴 때부터 전 국민을 최고의 엘리트로 훈련시키는 것, 그것을 하게 되면 이상적인 국가가 된다.’ 라고 한 겁니다. 어때요? 오늘날 우리나라 과외가 많고 한데 어떻습니까? 이게 되겠습니까? 이게 플라톤이 시키지 않고 엄마들이 다 시키는데. 요새 갑자기 합기도 태권도 도장이 난리 나요. 학교서 왕따 안 당하려고, 하여튼 하나 일어나면 우르르 몰려가서 애들 시켜요. 애들은 지 엄마 인형 같아요. 뭐든지 집어넣으면 다 들어가는 줄 알고 있다니까요.

그 다음에 16세기 1550년경에 토마스 모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영국의 대 법관인데 그 사람은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두 양립해서 ‘유토피아’라는 책을 썼어요. 유토피아란 책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사람도 뭘 봤느냐 하면 사유재산이 문제가 된다고 보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1500년경에 영국이 모직 산업이 커지니까 지주들이 모직 산업에 양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러니까 감자, 밀 캐서 돈이 안 되니까 울타리를 쳐요. Enclosed 운동, 울타리 치기 운동, 소작인들을 다 쫒아내 버리고 울타리만 크게 쳐서 양을 키우는 거예요. 그러면 그 소작인들 다 어디 갑니까? 갈 곳이 없어서 도시에 나가서 도시의 부랑인, 거지되고 부랑인이 되니까 말이 거지고 부랑인이지 뭐냐 하면 그게 절도범 이예요. 절도범인데 그 당시 영국에서는 절도범을 너무 엄격하게 다스려서 한해에 절도범 사형시켜 죽인 사람이 7만 2천 명 죽였답니다. 그리고 어떤 데는 한 곳에 대기하고 있어요. 한 교수대에 스무 명씩 달려야 하기 때문에 순번제로 달려야 하는 절도범.

그리고 옛날 이 당시 16세기 영국에는 만약에 길거리에서 거지 구걸하다가 한번 걸리면 때리고 두 번 걸리면 체포하고 세 번째는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법은 그렇게 엄격한데 농민들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소작농들은 전부 다 주인이 있어 다 가버렸다 말이죠. 그래서 토마스 모어는 뭐냐 일체 땅을 갖지 마라. 땅 가진 게 문제다. 그래서 양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나왔어요. 양이 농민을 죽인다. 사람이 양을 잡는 게 아니고 그 당시에는 양이 사람을 잡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일체 토지를 전부 다 개인이 갖지 말고, 이게 유토피아입니다. 있지도 않은 일인데 소설로 있는 일인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도시의 사람들이 2년 간 토지는 소유하는 게 아니고 토지는 경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말 맞죠? 경작해야 그게 나오니까. 2년 간 도시에 있는 사람이 2년 간 농사짓다가 그 다음에 교대로 지는 도시로 돌아가고 도시에 있던 사람이 와서 해서 거기서 나온 생산은 생필품만 갖고 나머지는 일체 아무도 갖지 못하게 해요. 왜, 사람이 뭔가 갖게 되면 더 갖고 싶기 때문에. 서로 생존에 필요한 것만 갖고 나머지는 공유해서 자기가 필요한대로만, 예를 들어서 볼펜이 필요하다면 볼펜을 마을 단위의 공동에 가서 애들 볼펜을 구하면 됩니다.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얻는다. 이거 누가 이야기했어요? 엥겔스가 이야기했어요. 마르크스는 그런 이야기 한 적이 없는데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실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했어요.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얻는다. 한 때 그걸 토마스는 6천 세대씩 구별해서 ‘이렇게 하면 가장 이상적이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거 실패 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 성공할리가 없죠.

세 번째가 뭐냐 하면 18세기에 나온 아담스미스라는 사람이 국부론, 보세요. 나라를 부하게 만드는 이론, 국부론 이예요. 이 사람이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이기주의가 우리를 먹여 살린다.’고 했어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왜 중요하느냐 하면 그때까지는 어떤 특출한 겸손한 것, 자기 재산 팔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민중만 사랑해서 헌신적으로 일한 사람의 지혜와 도덕에 근거해서 다른 사람이 그걸 숭상하고 본받아서 마음을 낮춰서 이상적인 나라 되잖아요. 어떤 특정한 영웅 같은 위대한 성자 같은 분들이 나와서 그분이 주도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무식한 동물 같은 인간들을 이끌어갈 때 그나마도 나라가 유지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담스미스가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이기주의가 사람을 먹여 살린다. 치과 의사가 사람을 이빨을 치료하기 위한 게 아니고 지 돈 벌어먹기 위해서 하다 보니까 이것도 빼고 이것도 하라 해서 전부 다 빼서, 이거는 양복점도 그렇고 식당도 그렇고 각자의 자기 이기주의가 결국은 모든 사람을 많이 먹여 살리는 거예요.

그런 여기서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 결국 뭣을 뺏습니까? 경제는 경제가 가장 진리답다. 경제에 손대지 마라. 어느 잘난 인간이 손대나? 경제는 경제로 돌아가는 거야. 그럼 절대 군주는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소용없는 거죠. 위대한 철학자 소용없어요. 특히 뭐가 소용없습니까? 하나님! 하나님 믿는 사람 필요 없어요.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시장은 돌아가게 돼 있어요. 이기주의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는 겁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해요. 자본주의는 되돌릴 필요 없어요. 자본주의는 세상이 그전까지는 이기주의는 나쁜 걸로 되잖아요. 그게 윤리고 도덕이잖아요. 이거는 이기주의가 오히려 긍정되죠. 그러면 동양에서는 선이라 하는 것은 착하면 선이예요.

서양에서의 선이라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이익 되는 것이 선입니다. 좋은 것이 선이 돼 버려요. 지금은 전 세계가 전부 다 동양사상입니까? 서양사상입니까? 전 세계가 이미 근대화됐잖아요. 뭔 뜻입니까? 이미 서양의 자본주의 물결이 전 지구를 다 덮었잖아요. 심지어 쿠바까지. 모든 나라가 북한까지 모든 나라가 다 자본주의예요.

자존주의에서 좋다는 의미가 뭡니까? 얼마나 돈을 챙기느냐, 그게 진리예요. 가정이고 자식 간에도 형제간에도 필요 없어요. 가장 선한 자가 누구냐 하면 명절 날 가장 많은 용돈을 드린 그 자식이 효자예요.ㅎ 그게 오늘날 효자예요.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촌의 부모님도 그런 인식으로 변했습니다. 결국 부모는 자식을 뭐로 봅니까? 지한테 돈 갖다 주는 존재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 이러한 이기주의에서 누가 누굴 탓합니까? 여기 바탕 자체가 그런데. 아담스미스 이전까지는 세상을 너무 낭만적으로 좋게 본 거예요. 유토피아가 있는데 유토피아는 우리들 속에 있어요. 뭐냐, 이기주의 속에 유토피아가 있는 거예요. 이기주의를 버리고 딴 나라 만드는 게 유토피아가 아니고 그냥 그대로 막 살면 그게 유토피아가 되는 거예요. 막 사는 게!! 그러니까 한번 받은 자유를 누가 양보해요. 누구 좋아라고 양보하는데, 좋다는 의미가 뭔데. 나한테 이득이 들어올 때는 좋은데 어떻게 지 좋은 걸 양보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본격적으로 자본위주의 세상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합리화 되는지는 10분 쉬고 해봅시다.
 이한례 (IP:203.♡.40.73) 12-01-27 11:16 
가락교회120105-요한계시록18장(경제판)30강b-이 근호 목사
제 30강b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성경 요한계시록 18장 11절에서 뒤 부분까지의 무역하고 16절 보면,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해서 부, 부유함, 또는 재산, 결국은 바벨론이 무너진 것이 안의 무게를 못 이겨서 무너졌다 이렇게 돼 있고 그 무게라 하는 것은, 사치하고 부유하고 잘 살고 호화롭게 살고 하는 것들이 죽 돼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나는 여황”으로 돼 있기 때문에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18장 전체가 무엇이 없느냐 하면 그동안 쌓아놓았던 부와 재산과 모든 귀한 귀금속이 모조리 다 주저앉고 사라졌기 때문에 그래서 애통하게 되는 내용 이예요. 17절 봅시다.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라고 울고 있어요.

18장 전체를 제가 일일이 설명한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설명한 겁니다. 이렇게 설명하려면 아까도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여기 하나님께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인간의 단어를 사용할 때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알았다고 생각하면 계속 모르는 게 또 나오고 모른다고 생각하면 문득문득 알게 하시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말씀으로 지배하는 방식을 성경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이 말씀대로 빼도 박도 못하게 하나의 운명이고 팔자처럼 이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돈 좋아했다가 돈 망하는 것, 이것은 ‘난 안 그래야지’가 안 된다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이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에 들어서 버렸어요. 이건 구멍 난 배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구멍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 아이디어를 제가 처음에 두 가지 이야기했는데, 처음에 플라톤 이야기했고 토마스 모어, 또 한 가지는 세 번째는 아담스미스의 국부론, 나라를 부하게 하는 이론으로 해서 그렇게 나온 거예요.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마르크스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이미 자본주의는 시작이 됐어요. 마르크스 이전에 존 스타트 밀, 그 전에 벤담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최대 다수가 즐거운 것이 그게 행복이다.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이 그것이 가장 큰 일이다. 그전까지는 뭡니까? 귀족이나 왕이 즐거우면 다른 사람은 ‘저건 받을만해, 받을 가치가 있어.’ 하고 부러워하면서 자기 생활에 만족했는데 자본주의는 뭐냐 하면 평등, 어떤 평등이냐 하면 정치적 평등 이전에 부의 평등, ‘나도 귀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나도 귀족처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민중들도 귀족이 되려면 그동안 있던 모든 부들이 전부 다 모든 전 인민들을 먹여 살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생산성이라는 거예요. 생산성은 어떻게 오는가, 분업을 통해서 와요. 그걸 조사해 보면 일을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나눠서 하면 생산성이 5배, 10배, 그 이상으로 불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생산성이 불어나게 되면 그 다음에 모든 사람이 생산성이 있으니까 ‘골고루 나눠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생산성이 2배가 오를 때 반드시 고용자 중 둘 중에 하나는 퇴직하게 돼 있어요.

노동시간이 만약에 6시간에서 20시간을 했을 때 6시간 하는 것보다 20시간 하는 것이 양이 많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일주일에 6시간 했는데 20시간 일 했다면 생산성이 많이 나면 20시간 한 사람에게 골고루 나눠줘야 되는데 6시간 한 사람이 20시간 하게 되면 그만큼 이 사람들은 나눠주는 게 아니고 이 여분의 것(=잉여)이 뭐로 모이느냐 하면 이게 자본으로 모아지게 돼 있어요. 자본으로 모아지게 되면 돈 놓고 돈 먹기인데, 특히 자본 중에서 금융 자본 같은 경우에 돈 놓고 돈 먹기인데 이걸 하게 되면 이 사람들이 노동한 사람들이 아무리 해도, 옛날에는 10원 주고 살 것을 자본가가 자본을 도로 가져가면 물가가 올라서 200원 줘야 하기 때문에 자본가만 배불리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최대로 모든 사람이 생산성만 모조건 하게 되면 마르크스 그 전까지는 상당히 꿈같이 이야기했어요. 모든 사람을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생산이 나오면 모든 사람이 다 골고루 혜택이 주어질 것이라고 굉장히 안일하게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몇 몇 자본가한테 독점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죠. 그 원인이 뭐냐, 마르크스는 오해했어요. 이걸 자본가들의 나쁜 생각 때문에 그렇다는데 절대로 자본가들이 나쁜 생각한 게 아니에요.

그 원인이 뭘까요? 현재 이 사회에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미국에 벌어진 골드만삭스라든지 .... 모기지 같은 부량파생금융상품 하는 게 있거든요. 신용도 보고 그 사람의 수익보고 미래보고 대출해주는 게 아니고 ‘일단 안 보고 돈 빌려 드립니다.‘ 할 때 사람들이 각자 본인이 정신을 차려야 돼요. ’안 돼,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돼, 내가 이 주택 대출은 받아서는 안 돼.‘라고 끊어야 되는데 은행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일단 사놓으면 부동산 값이 오르기 때문에 값보다 남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거기에 사람들은 무슨 꿈을 꾸느냐 하면 내 집 갖기 꿈을 꿔요. ’나도 내 집 한번 살아봤으면. 나도 사랑받고 살아봤으면.‘

나라가 잘 되니까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부의 혜택이 돌아갈 그날을 기다리면서 사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 뿐만 아니라 옛날에도 자본주의 처음 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아까 누가 이야기했습니다만 자신의 야망과 욕망이 자기를 망치고 있는 자기를 갉아먹는 암세포 같은 거예요. 자기 욕심과 야망에 완전히 그걸 성경에서는 뭐냐 포도주에 취했다. 술에 취해버리면 진짜 자아는 없어져버리고 술이 자기를 지배해서 완전히 미친 인간 된다고요. 돈에 미친 자예요. 돈에 미쳐 버려요. 이 오늘 18장에 돈에 미친 자예요. 돈에 미친 자.

그리고 돈에 안 미친 자도 돈에 미쳐야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돈에 신경 안 쓰고 관심 없는 사람들도 결국은 다 같이 돈에 미쳐야 돼요. 그 노동 운동 같은 시위 하는 걸 싫어하는 촌에 있는 부모도 자기 아들이 노동 현장에서 체류탄 맞아버리면 갑자기 그 엄마가 투사로 바뀝니다. 엮여져 있어요. 모든 세계가 하나로 엮여져 있어요. 보증을 선다든지 모든 것이 어느 누구도 돈 사랑 안 하기로 할 수 없어요. 일종의 뭐와 같은가 하면 수용소에 다 같이 갇혀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벨론이란 수용소입니다. 이 수용소에서는 돈에 다 미쳐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그 수용소 지금 주저앉고 있습니다. 그 무게, 과중한 부담, 무슨 부담이냐, 돈 사랑이 아니고 돈 사랑하는 자기 욕망과 ‘나도 돈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된 단 말이야.‘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심, 이러한 것들이 계속 장려돼 있었어요.

옛날에는 ‘팔자다. 아이고, 못 살아도 없는 대로 살지.’ 스스로 자기 욕망의 노예가 안 됐는데 지금은 ‘너만 욕망 있어? 나도 욕망 있어. 나도 돈은 있다가 없지만 돈은 가질만한 자격은 된단 말이야.’라고 그런 식으로 하고 또는 금융회사에서 그것도 부추기고 하잖아요. 부산의 저축은행 같은 경우에는 전부 다 촌 아주머니들이 5천 만 원 넣었다가 다 날렸잖아요.

어째서 그러느냐, 그 원인을 마르크스가 밝혀낸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상품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 들어가는데 이 노동이 들어가서 가치가 나오는데 이 가치가 가치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여기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있어요. 사용가치라 하는 것은 그냥 사용하기에 편리한 가치가 사용가치인데 이 교환가치가 등장해 버리면 이것은 뭐냐, 아무리 물건을 잘 만들어도 사는 사람이 없으면 이건 지 노동에 대한 애씀의 보상이 전혀 자기에게 전혀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면 교환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교환은 마켓, 시장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보이지 않는 손’ 이야기했죠. 그러면 하나님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이 숨어있죠. 하나님의 모습이 뭐냐 하면 경제를 살리는 하나님이죠. 보이지 않는 손이라니까요. 멀리 구름타고 오신 그런 인자하신 할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다가 이제는 우리와 함께 있는, 진짜 복음적이죠. 우리와 함께, 너희가 있는 세상이 있는 곳에 함께 있으리라. 뭐? 돈 신이. 함께 있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손이 함께 있다 이 말이죠.

교환이 되려면 조건이 2가지 있어야 돼요. 첫 번째는 내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돼요. 소비자가 없으면 생산해봐야 헛꿈 꾼 거예요. 옛날 19세기 때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접시 닦는 기계를 만들어놨습니다. 팔렸겠어요? 안 팔렸겠어요? 안 팔렸습니다. 그거 손으로 닦지 뭘 기계로 해요. 옛날에 만약에 김치냉장고가 나왔다. 누가 사겠어요? 안사겠어요? 안삽니다.

그러니까 현대 마케팅은 광고 아닙니까? 안 사게 하는 것을 사게 만들어요. 수억 줘서 김 연화 모델로 쓰고 좋아하는 모델 인기인들을 써서 모델을 쓰는 거예요. 요새는 다 팔아먹어요. 여기 사람의 영혼도 팔아먹고 다 팔아먹는데, 요새는 뭐도 팔아먹느냐 하면 날씨도 팔아먹어요. 봉이 김 선달 따로 없어요. 땅이고 물이고 날씨도 팔아먹는다니까요.

자, 이렇게 될 때 교환가치는 사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두 번째는 그 시장에서 자기가 인격적인 대우를 해야 된다. 내가 결정해야 된다. 내가 ‘팔 거야, 안 팔 거야’를 내가 결정해야 되는데 노동자가 노동해서 이런 상품을 만들어주는 노동자의 인격이 시장에 개입이 돼야 되는데 이걸 누가 차단시킵니까? 자본가가 차단시킵니다.

송아지 한 마리 값이 삼겹살보다 못하거든요. 그런데 시중에 가서 한우 먹으려해 보세요. 비싸죠. 중간에 뭐가 있습니까? 전혀 사료 먹인 적도 없고 소 목욕시킨 적도 없는 5~10단계에 걸친 중간 상인들이 그만큼 이익을 남겨 먹었다 말이죠. 그러니까 소비자는 안사고 싶은 거예요. 안 사게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산지 값은 더 떨어지는 거예요. 교환가치가 없다니까요. 내가 인격적으로 ‘내가 팔 거야, 안 팔 거야.’라고 결정할 수 있는 게 안 된다 이 말이죠.

유명한 화가 고호가 살아생전에 자기 작품 값을 얼마 받았습니까? 굶어 죽었다고 보면 돼요. 지금은 고호가 세계 최정상급의 마네, 모네, 낭만주의, 이상주의학파의 최고의 작품 값을 달라고 해요. 500억, 1000억 달해요. 비싼 거는 팔지도 않지만. 팔리지 않으면 굶어죽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상인들 손에 넘어가니까 상인들은 생산자가 아니잖아요. 상인들은 뭘 갖고 있습니까? 자본을 갖고 있으니까 시차를 노린다니까요. ‘이거 내년에 팔 것이냐, 봄에 팔 것이냐, 가을에 팔 것이냐. 봄에 신상품 낼 것이냐.’ 이거 조정해요. 그래서 상인들도 고민 이예요. 왜냐, 이거 도박입니다. 이거 9땡, 피사리를 언제 낼 것이냐. 화투치는 것과 같아요.ㅎ

그래서 19세기 20세기 이런 마르크스 자본주의시대에는 어떤 성실함, 순진함, 그리고 깨끗함,  양심껏, 이런 것들이 전혀 시장에서는 먹힙니까? 안 먹힙니까? 전혀 시장에서는 먹히지 않아요. 시장에 먹히는 것은 뭐냐 하면 여유자금이 많은가, 얼마나 뒷돈을 댈 수 있는가, 그래서 돈 버는 사람이 돈 벌게 돼 있고, 세상에 큰 재벌들이 장사할 게 없으니까 두부 만드는데 대재벌이 개입해서 촌에서 두부 만드는 사람들 망했다니까요. 애 코 묻은 돈을 빼먹지, 두부 만드는 것까지 대기업이 들어갔다니까요. 소비자는 좋죠. 왜, 좋은 상품을 싸게 사니까 좋은데 그것에 일평생을 바쳤던 사람들의 일터가 없는 거예요. 완전히 엔 크로즈 운동 이예요. 토지에서 완전히 보내버리고 돈 되는 것만 무조건 울타리 치는 그런 세상. 그런 세계.

마르크스는 이렇게 합니다. 노동자로 하여금 상품의 고유 인격과 권리를 노동자에게 보상하라. 어떻게?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다 단결해야 돼요. 전쟁을 벌이게 되는 거죠. 노동자 대 자본가의 전쟁을 벌이기를 특히 마르크스 이후에 엥겔스가 그걸 강력하게 주창했고 공산당 선언을 했고 그래서 전 세계 공산당은 전쟁을 했고 특히 중국 같은 경우에는 남쪽과 화북과 관주 지역에 각자, 각자 운동을 벌여서 남쪽에 장개석 북쪽에는 모택동, 마오쩌둥, 여기 화북에 있는 한국에서 만주에 있던 팔로군 사람이 붙어서 전쟁을 했고 이 전쟁의 여파로 국내에 내란으로 번진 것이 6.25 전쟁입니다. 이쪽에 있던 한국군, 여기 북한에 내려온 사람, 한국군이 마오쩌둥과 같이 훈련을 받아서 장개석을 몰아쳤던 그 세력들이 내려와서 이쪽의 자본주의 미국 자본주의와 싸운 전쟁이 6.25전쟁.

 그런데 그 나라가 지금은 뭐로 바뀌었습니까? 자본주의 바뀌어버렸죠. 자본주의로 바뀌었으니까 그럼 자본주의는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심지어 북한도 마찬가지고. 자본주의는 적이 있어요? 없어요? 적이 없다는 말은 이제는 국내문제, 시장의 국내문제에 관여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가 하나의 마트, 시장이 되었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적과 아군이라는 것은 어떻게 결정됩니까? 누가 어느 나라가 많은 돈을 가졌는가가 그게 아군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가 부도났을 때 그리스의 항만 누가 샀습니까? 100년 동안 중국에서 헐값에 항만을 임대했다 말이죠. 그러면 중요한 항공이나 이러한 것은 돈 많은 다른 나라들이 그걸 헐값에 사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는 나라를 계속 팔아먹는 거예요. 그리스 부자는 전부 다 세금 안 내고 나라에서 다 튀어버리는 거예요. 이거는 나라나 민족 개념이 아니고 자본주의는 나라나 혈통구조가 아니고 돈 위주라니까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8장에 나오는 모든 나라와 모든 제국은 오직 한 나라에, 바벨론 한 나라에 통합되는 거예요. 뭐로? 돈으로,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미국에서 만든 그 파생상품을 한국에서는 한국의 은행에다..... 해지펀드라 해서 막 팔아먹은 거예요. ‘아! 이거 좋은 겁니다. 사실은 부도인데 미국의 하청 민들이 갚을 능력도 없는 그 펀드에다 한국 은행이 투자를 했고 한국 사람들 서민들에게 펀드하면 돈 번다 해서 미국 펀드라 해서 ’안심 푹 놓읍시다.‘ 해서 다 투자한 거죠.

그래서 유명 브라더스 망하고 난 뒤에 그리스 망했잖아요. 그리스 망하니까 포르투갈, 스페인도 다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이 세상은 나라들이 하나의 그림처럼 볼록, 볼록, 볼록하게 있지만 사실은 밑의 판때기는 뭡니까? 각자, 각자가 신이 아니고 이미 전부 다 하나로 통일돼 있어요. 돈보다도, 자본, 자본 있는 곳으로 하나로 모아져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옵니까?’라고 질문을 그렇게 던지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이 볼록 볼록 튀어나온 산 중에 하나가 저와 여러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볼록 튀어나온 종기, 지금은 이렇게 자본 이렇게 말하지만 여기 내 조카, 내 딸, 내 아들이 만약에 거기에 연관돼 있으면 우리는 기어서라도 ‘나한테 손해가 안 되는 쪽으로 경제정책 그렇게 펼쳐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스한테 국방비 돈으로 잠수함하고 비행기 사라고 한 나라가 프랑스와 독일이거든요. 그러한 과정에서 막대한 리베이트 뇌물이 들어갔다 말이죠. 그래놓고 나중에 망해버리니까 독일하고 프랑스가 생색내고 도와준다 하다가, 그러니까 국가와 뭐든지 돈 없이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국민들은 어떻게 하면 돼요? 국민들은 하나밖에 없어요. 돈 있는 사람은 빨리 국적을 버리고 다른 데로 튀는 수밖에 없어요. 약간 수명이 길다고 생각하는 나라에 이민 가버리는 거예요.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은 빚더미에 앉아있는 뒤늦게 정신 차려서 ‘어! 우리가 속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세금도 다 뒤집어쓰고 연금도 다 떼고 왕창 망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것은 도망가는 사람이나 남아있는 사람이나 사고방식이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온 것이 돈이 전부고 시장이 우리 인간을 만든다. 시장에서 떠나버리면 우리는 짐승밖에 안 된다 어쨌든 간에 좋든 나쁘든 이 자본주의라는 시장바닥에서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이겨내야 된다.’ 하는 교육과 훈련을 계속해서 받아온 겁니다. 지금도 모든 영어 수학 모두 다 돈과 관련돼 있어요.

요 볼록 튀어나온 중에 교회가 있어요. 그러니 이 교회가 무슨 교회입니까? 산당이죠. 이게 무슨 교회이겠습니까? 지금이 요한계시록 18장인데 끝나버렸는데 요한계시록 18장이 끝나버리면 교회는 뭡니까? 오직 십자가 그분만 사랑하면서 ‘내가 바로 돈을 밝힌 내가 망해도 싼 이 땅의 자본가와 함께 돈과 함께 돈 찾다가 돈 벌지도 못하고 돈에 사기당해서 망해도 마땅한 내가 바로 주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사람만이 교회예요. 그 사람만 성도고 교회지, 아직도 야망과 욕심과 그것에 띠를 걸고 남의 욕심은 욕심이고 지 욕심은 욕망이고 꿈이 되고 무조건 자기 사랑 그것은 철이 없어도 보통 철이 없는 게 아니에요.

은행에 저금해 봐야 물가 상승률에 비하면 마이너스 아닙니까? 그럼 돈을 옛날에는 돈을 모은다는 개념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으는 게 아니고 굴려야 되는데 어디에 글려야 하는지, 어느 판에 굴려요? 굴릴 판이 어디 있어요. 없는데.

그러니까 무슨 소리를 하느냐 하면 판이 없을 때는 속일 수밖에 없죠. 다단계 하든지 뭘 속여서 순간적으로 내 것으로만 오게 하는 것이지 남과 다 같이 이익이 나는 그런 거짓말은 없어요. 로또입니다. 로또는 많은 사람이 돈 주고 모아놓은 것이 그 1등 당첨이지, 어떻게 1등 당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다른 사람이 돈 모아 준 게 아닙니까? 모든 것이 투자고 도박이고 그런 판에 거기에 무슨 영어, 수학, 윤리, 도덕, 신앙,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무 의미 없죠. 다만 우리가 믿는 것은 뭐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 이 세상은 기어이 그렇게 돼 가고 있고 그게 고맙죠. 말씀대로 되는 것에 고맙고 감사할 뿐 이예요. 그리고 이 문제는 아까 영웅들 있죠? 아까 철학인들, 소용없습니다. 어떤 특정한 인간이 나서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 마귀죠. 마귀! 마귀가 굴러가는 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우리는 날마다 그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돌이 떡 되게 하라.‘ 다른 말로 하면 ’펀드가 대박 터져라.‘하는 그거거든요. 우리는 아침 되면 그것만 꿈꾸고 수시로 TV보고 경제 신문 보면서 언제 내가 사놓은 주식이 언제 돌이 떡 되나, 그것만 보고 있다니까요. 그게 나이 60넘은 사람 취미 아닙니까? 객장에 떡 앉아서 다리 이래가지고 하루 종일, 나중에 수수료 다 떼고 남는 것은 하나도 없고 기분 나빠서 술 한 잔 먹고 들어가서 돈 뺏기고.

인생 산다는 것이 이미 판이 돈 판입니다. 어릴 때는 그게 아니에요. 신데렐라도 있고 공주도 있고 뽀뽀해주는 이웃 나라 왕자도 있고 참 아름답고 멋있는데 막상 돈 줄이 부모로부터 끊어지고 지가 돈 벌어야 된다고 나오면 모든 것이 그냥 한푼 두푼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때는 낭만이고 꿈이고 너무 사치스러운 것 다 벗어버리고 나도 팔 걷어붙이고 ‘이씨, 니가 돈 잘 버나, 내가 잘 버나 한번 해보자. 두고 보자.’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으면, 다른 말로 하면 누가 더 사기 잘 치나, 누가 말발로 사기를 잘 쳐 먹나, 그것만 남아있다니까요. 어리숙해서 남 속이려다가 오히려 속임을 당해서 있는 돈마저 빼앗기고 하지 말고. 그런 취미도 이런 돈 가진 자한테는 당하지 못하게 돼 있어요.

아주 현숙해 보이고 정숙해 보이는 그런 아가씨가 막상 재벌 집에 시집 가 보세요. 현숙하게 집에서도 한복 입고 돌아다니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그건 소녀 때 아가씨 때 꿈이었지, 실제로 남편은 전 세계 따라다니면서 상품 하나 팔아먹으려고 따라다니는 장사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 정숙한 여자가 라이나 치면서 차나 우려내고 이럴 수 없어요. 지도 발 벗고 ‘나도 회사 도와줄게.’ 같이 동업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만큼 사람들이 돈 앞에서는 어떤 꿈인지 그런 낭만 같은 아름다운 것, 윤리, 착함, 그러한 모든 것은 소용없고 진실로 남는 것은 요한계시록 18장입니다. 그저 좋은 것, 금, 은 보석 진주 이런 거, 그래서 토마스 모어는 무슨 소리를 했느냐 하면 유토피아 책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절대로 쇠가 사용가치가 없는 것은 보석이라고 보지마라. 금과 은보다도 쇠가 더 귀하다는 걸 알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모일 때 유토피아가 된다는 거예요. ‘니나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토마스 모어가 이해 안 되는 것이 왜 쇠가 얼마든지 더 필요한데, 호미도 만들고 이것도 만들잖아요. 국민이 쇠를 쓸 일이 많은데 왜 금과 은을 사람들이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좋아하더란 말이죠. 다이아몬드 같은 것을. 다이아몬드가 뭐냐 하면 탄소 복합제입니다. 아무 의미 없거든요. 약간 단단한 거, 그런 단단한 것은 인간적으로 물리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 그런데 다이아몬드 하나에 다이아몬드는 forever,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다이아몬드 거기에 어떤 목표를 두고 목적을 두고 인생의 활력소가 생기고, 집에 다이아몬드를 잃어버리니까 살맛이 없어 우울증 걸리고 그저 탄소, 흑연인데 연필심, 같은 요소거든요. 아! 연탄 하나 잃어버렸다고 축 처지는 것 봤습니까? 연탄 한 장이라니까요. 다이아몬드는.

그게 뭐냐 하면 다이아몬드를 팔면 딴 걸 살 수 있지만 연탄 팔면 연탄재밖에 남지 않는다는 사실, 교환가치가 있어야 돼요. 다시 해 봅시다. 교환가치가 중요한 것은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교환권을 모아요. 내가 꽉 쥐고 있는 것은 뭐든지 다 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상품권은 통하지 않아요. 돈이 상품권보다 더 좋아요. 뭐든지 할 수 있거든요. 뭐든지 하게 되면 자본주의 시장에서 돈을 가지고 왔다하면 사람들이 그 사람의 손을 보고 ‘손이 이쁘다.’라고 안 보고 돈 가진 액수를 보지, 이쁜 손을 안 본다고요. 아무리 이쁜 손이라도 돈 없으면 나가라 하거든요.

그러니까 돈 따라서 인간이 따라가는 거예요. 그러면 시장에 들어왔으면 그 인간은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상품이 된다는 말은 그 사람하고 바꿀 때 얼마짜리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못 사는 사람들 이혼해도 위자료 별로 없어요. 그러나 타이거우즈 이혼할 때 5천억 받았는지 그래요. 특히 케네디 재클린 같은 경우 5천억 받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도 하나의 명화처럼, 명화가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압니까? ‘조금 잘 그렸구나.’ 하지 뭘 압니까? 하지만 명화를 다른 것으로 바꿀 때 집 한 채, 두 채 값이 된다 말이죠. 그런 상품에 18장에 뭐가 포함돼 있다는 말입니까? 13절에 사람의 영혼도 뭐와 같은 상품 이예요?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나란히 같은 선반에 뭐가 붙어있다? 인간의 영혼도 거기에 나란히 진열돼 있다 이 말이죠. 일종의 우리는 노예시장 이예요. 요새 안철수 많은 값어치 있습니다. 전부 다 노예예요. 전부 다 명찰에 얼마짜리, 얼마짜리 붙어 있어요.

특별히 그런 것이 잘 드러난 곳이 결혼정보회사, 거기에 보면 대학 나왔는가, 키, 부모계신가, 종교, 해서 점수 매겨요. 나이 많은 노처녀는 점수도 안 나오고, 젊어야 되고.

자, 그 다음에 봅시다. 이제 결론 봅시다. 4절 봅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음성이 다릅니다. 한쪽은 조명탄 쏘는 천사가 와서 환하게 비추니까 완전히 세상이 돈 판이죠. 완전히 자본 판인데 또 다른 천사가 와서 보여주는데 보니까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돼 있죠?




이게 성경에서 “받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라 하는 것은 우리보고 명령을 지키면 혜택주고 그런 명령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의 구별됨, 너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어떻게? 이 명령에 포함된 내용대로만 너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규정돼 있다 이런 뜻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어떻게 됐습니까? 있었더라. 그래서 명령은 곧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명령할 때는 누구이름으로 명령으로 하느냐 하면 주의이름으로 명령하죠. 그러면 받을 때는 나의이름으로 안 받아요. 반드시 명령이 존재가 되려면 우리는 평소에 누구 이름으로 사느냐 하면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이름으로 사는 사람에게만 이 명령이 현실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파이프가 주님하고 내가 파이프가 연결돼 있어서 주님이 명령했다 하면 우루루 쏟아져 그대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대로 내가 순종하고 순종 안 하고 필요 없어요. 그냥 그대로 구멍이 나서 굴러서 다 들어오게 돼 있어요. ‘아! 나는 여기서 참여가 안 되게 돼 있는 팔자구나.’ 그냥 굴러들어 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 속에서 우리를 가지고 실현시키는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 말을 어떻게 지킵니까? 우리는 의인은 없고 죄인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의인돼야지,’ 손들고 나오면 안 된다. 그 말이 오해가 된다는 거예요. ‘모든 율법으로 다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 하면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 말이 그대로 굴러 들어와서 우리 안에 들어오면 되는데 ’난 저주 안 받아야지.‘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자기한테 펑크가 안 났단 말이죠. 자기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믿지, 주의 이름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바로 상대방 이름을 지워버리고 그리고 그 자리를 점령하는 식으로 오시기 때문에 모든 주의 명령은 주의이름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이것이 ‘아멘’으로, 현실로, 아멘이란 말은 다른 말로 ‘현실 맞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라는 뜻 이예요. ‘아! 그게 바로 실제입니다. 실제 그렇게 돼가고 있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절 봅시다.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22장 12절에 보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돼 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 행위의 문제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제가 명백하게 말씀드리면 열왕기상 8장 39절을 보면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돼 있죠.

그 행위가 누구의 행위냐 하면 우리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이렇게 행동 했잖아.’라고 지적해 주시는 주님의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이고 중요한 말인데요. 예를 들어서 제가 지금 물을 마십니다. 물 마시는 것 여러분이 보셨죠? 물마시고 딱 끝나고 난 뒤에 하는 말이 ‘내가 방금 니 행위대로 이야기하겠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아! 물 마셨으니까 물 마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모양이다.’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방금 물마시면서 머릿속에 뭘 생각했느냐 하면 5년 전의 일을 생각했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어느 것을 행위로 보십니까? 바로 주님만 알고 계시는 행위만 그것을 되찾아가는 식으로 행위를 보시는 거예요. ‘니 물 마시면서 5년 전의 일을 생각했지? 그거 내가 그렇게 해서 한 거야.’하고 주님의 행위를 자기가 자기 행위를 되찾아 가시면서 행위대로 갚아주시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8장 39절에서 “모든 사람의 행위대로 행하사” 라고 돼 있고 46절에 보면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그 뒤의 이야기를 제가 줄입니다. “갈 때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그들을 다시 구원하소서.”라고 돼 있죠.

이 말이 뭐냐 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부탁하면서 이야기할 때는 ‘니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이미 그 행위는 죄다? 죄 아니다? 모든 인간은 범죄 하는 인간인데 그게 죈데 죄라는 행위가 아니고 그 죄를 뭐를 근거로 해서? 성전에 있는 그 희생제물을 근거로 해서 그 죄를 용서하는 그 행위를 주께서는 찾아가버리는 그 찾아가버리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딸려 나와서 구원받은 겁니다. 뭐로? 우리의 행위대로. 그럼 우리의 행위를 우리가 판정할 일입니까? 주께서 우리를 판정하신 행위입니까? 주께서 따로 주님의 안목으로 우리를 판정하시는 행위가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믿는 사람답게 행동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그 행동은 누가 판단한 행동 이예요? 내가 판단한 행동이죠. ‘예수 믿고 믿었으니까 합당한 행동을 해야지, 이제 합당하게 헌금도 하고, 합당하게 전도를 해서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령 안에서 은혜로 주셔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건 하자 없는 행위다.‘라고 ’그걸 첨부하고 그걸 보태야 돼, 그런 소리를 해야 돼.’ 라고 우기는 것은 그 행위는 누구행위입니까? 자기가 판단한 행위예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식이다 이 말이죠.

그러나 주님의 행위는 뭐예요? 우리가 뭘 해도 뭐가 된다? 우리가 죄가 되며 그 죄는 누구 행위로 인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던 행위로 인하여 구원받을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 행함의 증거는 표준과 측정과 판단은 누가 하시고? 주님 쪽에서 십자가와 결부시켜서 판단해 주시고.

이걸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고 안 믿고 있으니까 자꾸 복음에서 오해를 하는 거예요. 오해를 해서 ‘성경에 행하라 해서 행함 이야기했는데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 만날 그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보고 본인이 판단하고 본인이 한 행동을 자신이 판단하면 전부 다 자기한테 좋은 걸로 판단해요. ’요건 나쁜 것이고 요건 착한 짓이고.‘

그렇다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이런 성경책을 지워버려야 돼요.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착한 행동 없다’로 고쳐야 됩니다. 성경에서는 그 모든 것을 ‘자기 의’라고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기분, 인간은 자기 기분대로 산다고 했죠. 기분대로 산다는 그 기분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들어 준 자기 의에서 나오고 그 자기 죄가 18장에 보니까 어느 판에서 돌아다니는 욕망이다? 돈 판에서 굴러다니는, 굴러다니지도 못해요. 끌려가는, 돈 판에서 끌려가는 그러한 욕망입니다.

라캉이라든지 지젝이라든지 프로이드같은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죠. 나의 욕망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이미 약을 올렸다 이 말이죠. 살살 약을 올린 거예요. 사람이 촌에서 커서 촌에서 죽으면 항상 대화도 순박하기 짝이 없어요. 도시 사람이 봤을 때. 촌 애들 12살, 13살 그 애들이 부흥회에 와서 부흥목사 하는 걸 보고 울고 회개하고 할 때에 ‘목사님, 용서해 주세요. 우리 집 개가 있는데 개 꼬리를 밟았어요. 이런 나쁜 소녀를 용서해 주세요.’ 얼마나 순박한지 몰라요. 그 목사 사기 치는 걸 모르고, 사기 치는 목사 앞에서 순박하다고요. 왜, 촌에서 저희들끼리 했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선악이라는 것은 그들이 경험했던 그들이 기껏 아는 타인이라는 것은 고만고만한 타인들이예요. 남이라는 것이. 기껏 남이라고 해도 멀리 안 갔어요. 이웃집 산 아래에 모여 있는 50보, 100보 안에 있는 타인들이예요. 그게 전통이고 그게 진리고 자기가 아는 전부입니다.

그랬던 그것이 어느 날 보따리 가방 싸들고 순이가 서울로 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한 10년 뒤에 립스틱 짙게 바르고 양장하고 빼딱 구두 신고 나타났을 때는 이미 그 모습을 봤을 때 같은 동창생 초등학교 동기생들이 봤던 순박함은 없잖아요. 그럴 때 그 애가 설 돼서 잠깐 사흘 왔다가 갔을 때 그 순박한 아가씨들의 마음을 불질러놓죠. ‘엄마, 나도 서울 갈련다.’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남들이 만들어 낸 욕망 이예요.

프로이드, 라캉은 그런 식으로 했는데 이걸 성경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 이 원리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일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인간이신 예수님에게서 집약돼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무슨 말이냐 하면 구약에서는 바다가 갈라지는 게 기적이잖아요.

신약에서는 뭐가 기적입니까? 신약에서도 바다가 갈라지는 것 있습니까? 없잖아요. 어디에 집약됩니까? 인간의 실존으로 집약됩니다. 아브라함이 복 받아서 양이 많아졌죠. 그러면 신약에도 양 많아지는 게 복입니까? 그게 아니죠. 신약에는 자기 죄를 십자가에서 아는 게 복이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모든 계시가 예수님의 실존으로 와서 이게 퍼져버리면 그때부터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 이야기가 복이 됩니까?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를 덮치면서 복 안에 사로잡힌 자가 돼 버려요.

그렇다면 그동안은 타인의 욕망, 나의 욕망은 없어요. 남의 욕망으로 가다가 이제는 낯선 욕망, 예수님의 욕망이 나에게 와 버리면 뭐를 시시하게 여깁니까? 그동안 ‘아이, 부러워라, 돈 부러워라.’ 하던 그런 것들이 나의 근본적인 내 판때기, 내 기본을 모르고 철없이 굴었던 하나의 일종의 좋게 말하면 순박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멸망하는 세상, 돈 세상이 이게 인간의 전부인 줄 알던 순박함이 다 그건 악마의 속임수에 불과하고 진짜 예수님의 욕망,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어요. 내가 이 욕망을 가졌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욕망, 내가 진짜 주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 하늘나라 가는 그 기쁨이 더 큰 기쁨으로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 18장 4절의 말씀처럼 “너는 그 죄(재앙)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재앙들을 받지 말라.” 가 주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실현이 된 겁니다. 누구 능력으로? 주의 말씀의 능력으로 실현된 거예요. 이미 우리의 기본이 달라요. 저쪽은 돈밖에 모르지만 우리는 뭐가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펑크를 내버렸어요. 돈밖에 모르는 나에게 아예 구멍을 내버렸잖아요. 실존입니다. 실존! ‘니가 사는 세상, 나도 살았잖아. 내가 안다. 니가 뭣 땜에 고민하고 뭣 땜에 까불락 거리고 뭣 땜에 ’야호‘ 외치고 뭣 땜에 좌절하고 자살하고 다 안다.’ 이 말이죠. ‘내가 안다니까.’

나의 사정을 내가 모르는 것을 주께서 아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게 새로운 기반이고 새로운 기초입니까? 이것은 새로운 인생의 의미예요. 우리보고 천사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보고 하늘의 별을 따라는 말이 아니고 니가 돈 좋아하고 니가 돈밖에 모르는 걸 누가 안다? 옆에 있는 내가 아는 거예요. 왜 아십니까? 어떻게 아십니까? 말씀대로 되었기 때문에 아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안다니까’를 믿는 사람은 그 다음부터 어디 속에 있다는 걸 알아요? 말씀이 만들어 낸 멸망 받을 세계 속에 내가 한 요소로서 들어있다는 말씀 세계를 알게 되죠.

성도가 뭐냐, 말씀에 대해서 관심 있는 게 성도입니다. 만약에 말씀에 관심 없으면 내가 주인공 돼요. 내가 주인공 되면 내가 나의 조명발이 되기 때문에 항상 내가 자기 의,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남은 다 돈 망하고 다 죽어도 절대로 나는 절대로 망하면 안 된다는 일방적인 자기 의, 자기 고집만 남아 있어요.

그러면 이건 요한계시록 18장 4절, 5절에 그 사람은 해당되지 않죠. 왜, 거기서 빠져나오라 하는데 그 사람은 못 빠져 나오니까. 그 사람 뭐라 합니까? ‘돈 좀 더 벌고 빠져나오겠습니다.’ 이건 우리보고 빠져나오란 말이 아니고 진짜 너는 이미 ‘내가 안다니까’ 주님이 알고 계신 사람은 이미 빠져나온 사람 이예요. 새삼스럽게 이웃사람에게 돈을 주고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내주고 톨스토이처럼 지 받은 유산 받은 걸 다 내줘도 가난한 사람만 횡재한 겁니다. 그 사람 그 받은 걸로 돈 놀이할 거예요. 그런 쓸데없는 짓, 자기 자력, 자기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빠져나갈 사람이 못 빠져나와요. 안 돼. 못 빠져나와요. 요새 개콘에 유행하는 것처럼 ‘안 돼’ 절대로 못 빠져나와요. 다만 말씀대로 말씀이 들어오니까 이미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그 주님을 사랑하게 되죠. ‘참, 주님 잘했습니다. 망해야 될 세상인데 잘 망하게도 하십니다. 잘~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는 거기서 그 재앙에 받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18장의 해석입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그냥 사시는 대로 사시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와서 우리의 위치와 위상을 탁탁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행함이 아니고 그걸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믿기만 하면! 절대로 믿기만 했으니까 행동은 안 들어가죠. 행동이 아니고 그걸 그냥 현실로, 말씀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주님의 조명발이 오는 겁니다. 세상은 돈으로 나간다. 그중에 나도 하나 포함돼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런데 주께서 그 사실을 알게 하신다는 것은 실존적으로 주님의 조명발이 실존적으로 내려와서 주님 실존에서 나온 조명발이 누구한테 내려왔다? 우리 자신에게 말씀의 조명발이 비춰줘서 요한계시록 18장 이게 장난이 아니고 신화가 아니고 농담이 아니고 만화가 아니고 소설이 아니라 현재 이대로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거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감사합니다. 뭔가 잘해보려고 착하게 살아보려고 이왕 돈 버는 것 깨끗하게만 살아보려고 돈 벌려하지만 하지만 그게 얼마나 안 되는 짓인지를 이제는 통감했사오니  있는 그대로 주어진 환경대로 사시되 이 모든 것을 주께 친히 아시는 분에게 우리 자신을 이미 맡겼다는 사실을 그렇게 기적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