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20105-요한계시록18장(경제판)30강b-이 근호 목사 제 30강b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성경 요한계시록 18장 11절에서 뒤 부분까지의 무역하고 16절 보면,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해서 부, 부유함, 또는 재산, 결국은 바벨론이 무너진 것이 안의 무게를 못 이겨서 무너졌다 이렇게 돼 있고 그 무게라 하는 것은, 사치하고 부유하고 잘 살고 호화롭게 살고 하는 것들이 죽 돼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나는 여황”으로 돼 있기 때문에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18장 전체가 무엇이 없느냐 하면 그동안 쌓아놓았던 부와 재산과 모든 귀한 귀금속이 모조리 다 주저앉고 사라졌기 때문에 그래서 애통하게 되는 내용 이예요. 17절 봅시다.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라고 울고 있어요.
18장 전체를 제가 일일이 설명한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설명한 겁니다. 이렇게 설명하려면 아까도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여기 하나님께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인간의 단어를 사용할 때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알았다고 생각하면 계속 모르는 게 또 나오고 모른다고 생각하면 문득문득 알게 하시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말씀으로 지배하는 방식을 성경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이 말씀대로 빼도 박도 못하게 하나의 운명이고 팔자처럼 이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돈 좋아했다가 돈 망하는 것, 이것은 ‘난 안 그래야지’가 안 된다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이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에 들어서 버렸어요. 이건 구멍 난 배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구멍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 아이디어를 제가 처음에 두 가지 이야기했는데, 처음에 플라톤 이야기했고 토마스 모어, 또 한 가지는 세 번째는 아담스미스의 국부론, 나라를 부하게 하는 이론으로 해서 그렇게 나온 거예요.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마르크스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이미 자본주의는 시작이 됐어요. 마르크스 이전에 존 스타트 밀, 그 전에 벤담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최대 다수가 즐거운 것이 그게 행복이다.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이 그것이 가장 큰 일이다. 그전까지는 뭡니까? 귀족이나 왕이 즐거우면 다른 사람은 ‘저건 받을만해, 받을 가치가 있어.’ 하고 부러워하면서 자기 생활에 만족했는데 자본주의는 뭐냐 하면 평등, 어떤 평등이냐 하면 정치적 평등 이전에 부의 평등, ‘나도 귀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나도 귀족처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민중들도 귀족이 되려면 그동안 있던 모든 부들이 전부 다 모든 전 인민들을 먹여 살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생산성이라는 거예요. 생산성은 어떻게 오는가, 분업을 통해서 와요. 그걸 조사해 보면 일을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나눠서 하면 생산성이 5배, 10배, 그 이상으로 불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생산성이 불어나게 되면 그 다음에 모든 사람이 생산성이 있으니까 ‘골고루 나눠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생산성이 2배가 오를 때 반드시 고용자 중 둘 중에 하나는 퇴직하게 돼 있어요.
노동시간이 만약에 6시간에서 20시간을 했을 때 6시간 하는 것보다 20시간 하는 것이 양이 많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일주일에 6시간 했는데 20시간 일 했다면 생산성이 많이 나면 20시간 한 사람에게 골고루 나눠줘야 되는데 6시간 한 사람이 20시간 하게 되면 그만큼 이 사람들은 나눠주는 게 아니고 이 여분의 것(=잉여)이 뭐로 모이느냐 하면 이게 자본으로 모아지게 돼 있어요. 자본으로 모아지게 되면 돈 놓고 돈 먹기인데, 특히 자본 중에서 금융 자본 같은 경우에 돈 놓고 돈 먹기인데 이걸 하게 되면 이 사람들이 노동한 사람들이 아무리 해도, 옛날에는 10원 주고 살 것을 자본가가 자본을 도로 가져가면 물가가 올라서 200원 줘야 하기 때문에 자본가만 배불리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최대로 모든 사람이 생산성만 모조건 하게 되면 마르크스 그 전까지는 상당히 꿈같이 이야기했어요. 모든 사람을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생산이 나오면 모든 사람이 다 골고루 혜택이 주어질 것이라고 굉장히 안일하게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몇 몇 자본가한테 독점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죠. 그 원인이 뭐냐, 마르크스는 오해했어요. 이걸 자본가들의 나쁜 생각 때문에 그렇다는데 절대로 자본가들이 나쁜 생각한 게 아니에요.
그 원인이 뭘까요? 현재 이 사회에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미국에 벌어진 골드만삭스라든지 .... 모기지 같은 부량파생금융상품 하는 게 있거든요. 신용도 보고 그 사람의 수익보고 미래보고 대출해주는 게 아니고 ‘일단 안 보고 돈 빌려 드립니다.‘ 할 때 사람들이 각자 본인이 정신을 차려야 돼요. ’안 돼,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돼, 내가 이 주택 대출은 받아서는 안 돼.‘라고 끊어야 되는데 은행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일단 사놓으면 부동산 값이 오르기 때문에 값보다 남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거기에 사람들은 무슨 꿈을 꾸느냐 하면 내 집 갖기 꿈을 꿔요. ’나도 내 집 한번 살아봤으면. 나도 사랑받고 살아봤으면.‘
나라가 잘 되니까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부의 혜택이 돌아갈 그날을 기다리면서 사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 뿐만 아니라 옛날에도 자본주의 처음 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아까 누가 이야기했습니다만 자신의 야망과 욕망이 자기를 망치고 있는 자기를 갉아먹는 암세포 같은 거예요. 자기 욕심과 야망에 완전히 그걸 성경에서는 뭐냐 포도주에 취했다. 술에 취해버리면 진짜 자아는 없어져버리고 술이 자기를 지배해서 완전히 미친 인간 된다고요. 돈에 미친 자예요. 돈에 미쳐 버려요. 이 오늘 18장에 돈에 미친 자예요. 돈에 미친 자.
그리고 돈에 안 미친 자도 돈에 미쳐야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돈에 신경 안 쓰고 관심 없는 사람들도 결국은 다 같이 돈에 미쳐야 돼요. 그 노동 운동 같은 시위 하는 걸 싫어하는 촌에 있는 부모도 자기 아들이 노동 현장에서 체류탄 맞아버리면 갑자기 그 엄마가 투사로 바뀝니다. 엮여져 있어요. 모든 세계가 하나로 엮여져 있어요. 보증을 선다든지 모든 것이 어느 누구도 돈 사랑 안 하기로 할 수 없어요. 일종의 뭐와 같은가 하면 수용소에 다 같이 갇혀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벨론이란 수용소입니다. 이 수용소에서는 돈에 다 미쳐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그 수용소 지금 주저앉고 있습니다. 그 무게, 과중한 부담, 무슨 부담이냐, 돈 사랑이 아니고 돈 사랑하는 자기 욕망과 ‘나도 돈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된 단 말이야.‘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심, 이러한 것들이 계속 장려돼 있었어요.
옛날에는 ‘팔자다. 아이고, 못 살아도 없는 대로 살지.’ 스스로 자기 욕망의 노예가 안 됐는데 지금은 ‘너만 욕망 있어? 나도 욕망 있어. 나도 돈은 있다가 없지만 돈은 가질만한 자격은 된단 말이야.’라고 그런 식으로 하고 또는 금융회사에서 그것도 부추기고 하잖아요. 부산의 저축은행 같은 경우에는 전부 다 촌 아주머니들이 5천 만 원 넣었다가 다 날렸잖아요.
어째서 그러느냐, 그 원인을 마르크스가 밝혀낸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상품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 들어가는데 이 노동이 들어가서 가치가 나오는데 이 가치가 가치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여기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있어요. 사용가치라 하는 것은 그냥 사용하기에 편리한 가치가 사용가치인데 이 교환가치가 등장해 버리면 이것은 뭐냐, 아무리 물건을 잘 만들어도 사는 사람이 없으면 이건 지 노동에 대한 애씀의 보상이 전혀 자기에게 전혀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면 교환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교환은 마켓, 시장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보이지 않는 손’ 이야기했죠. 그러면 하나님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이 숨어있죠. 하나님의 모습이 뭐냐 하면 경제를 살리는 하나님이죠. 보이지 않는 손이라니까요. 멀리 구름타고 오신 그런 인자하신 할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다가 이제는 우리와 함께 있는, 진짜 복음적이죠. 우리와 함께, 너희가 있는 세상이 있는 곳에 함께 있으리라. 뭐? 돈 신이. 함께 있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손이 함께 있다 이 말이죠.
교환이 되려면 조건이 2가지 있어야 돼요. 첫 번째는 내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돼요. 소비자가 없으면 생산해봐야 헛꿈 꾼 거예요. 옛날 19세기 때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접시 닦는 기계를 만들어놨습니다. 팔렸겠어요? 안 팔렸겠어요? 안 팔렸습니다. 그거 손으로 닦지 뭘 기계로 해요. 옛날에 만약에 김치냉장고가 나왔다. 누가 사겠어요? 안사겠어요? 안삽니다.
그러니까 현대 마케팅은 광고 아닙니까? 안 사게 하는 것을 사게 만들어요. 수억 줘서 김 연화 모델로 쓰고 좋아하는 모델 인기인들을 써서 모델을 쓰는 거예요. 요새는 다 팔아먹어요. 여기 사람의 영혼도 팔아먹고 다 팔아먹는데, 요새는 뭐도 팔아먹느냐 하면 날씨도 팔아먹어요. 봉이 김 선달 따로 없어요. 땅이고 물이고 날씨도 팔아먹는다니까요.
자, 이렇게 될 때 교환가치는 사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두 번째는 그 시장에서 자기가 인격적인 대우를 해야 된다. 내가 결정해야 된다. 내가 ‘팔 거야, 안 팔 거야’를 내가 결정해야 되는데 노동자가 노동해서 이런 상품을 만들어주는 노동자의 인격이 시장에 개입이 돼야 되는데 이걸 누가 차단시킵니까? 자본가가 차단시킵니다.
송아지 한 마리 값이 삼겹살보다 못하거든요. 그런데 시중에 가서 한우 먹으려해 보세요. 비싸죠. 중간에 뭐가 있습니까? 전혀 사료 먹인 적도 없고 소 목욕시킨 적도 없는 5~10단계에 걸친 중간 상인들이 그만큼 이익을 남겨 먹었다 말이죠. 그러니까 소비자는 안사고 싶은 거예요. 안 사게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산지 값은 더 떨어지는 거예요. 교환가치가 없다니까요. 내가 인격적으로 ‘내가 팔 거야, 안 팔 거야.’라고 결정할 수 있는 게 안 된다 이 말이죠.
유명한 화가 고호가 살아생전에 자기 작품 값을 얼마 받았습니까? 굶어 죽었다고 보면 돼요. 지금은 고호가 세계 최정상급의 마네, 모네, 낭만주의, 이상주의학파의 최고의 작품 값을 달라고 해요. 500억, 1000억 달해요. 비싼 거는 팔지도 않지만. 팔리지 않으면 굶어죽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상인들 손에 넘어가니까 상인들은 생산자가 아니잖아요. 상인들은 뭘 갖고 있습니까? 자본을 갖고 있으니까 시차를 노린다니까요. ‘이거 내년에 팔 것이냐, 봄에 팔 것이냐, 가을에 팔 것이냐. 봄에 신상품 낼 것이냐.’ 이거 조정해요. 그래서 상인들도 고민 이예요. 왜냐, 이거 도박입니다. 이거 9땡, 피사리를 언제 낼 것이냐. 화투치는 것과 같아요.ㅎ
그래서 19세기 20세기 이런 마르크스 자본주의시대에는 어떤 성실함, 순진함, 그리고 깨끗함, 양심껏, 이런 것들이 전혀 시장에서는 먹힙니까? 안 먹힙니까? 전혀 시장에서는 먹히지 않아요. 시장에 먹히는 것은 뭐냐 하면 여유자금이 많은가, 얼마나 뒷돈을 댈 수 있는가, 그래서 돈 버는 사람이 돈 벌게 돼 있고, 세상에 큰 재벌들이 장사할 게 없으니까 두부 만드는데 대재벌이 개입해서 촌에서 두부 만드는 사람들 망했다니까요. 애 코 묻은 돈을 빼먹지, 두부 만드는 것까지 대기업이 들어갔다니까요. 소비자는 좋죠. 왜, 좋은 상품을 싸게 사니까 좋은데 그것에 일평생을 바쳤던 사람들의 일터가 없는 거예요. 완전히 엔 크로즈 운동 이예요. 토지에서 완전히 보내버리고 돈 되는 것만 무조건 울타리 치는 그런 세상. 그런 세계.
마르크스는 이렇게 합니다. 노동자로 하여금 상품의 고유 인격과 권리를 노동자에게 보상하라. 어떻게?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다 단결해야 돼요. 전쟁을 벌이게 되는 거죠. 노동자 대 자본가의 전쟁을 벌이기를 특히 마르크스 이후에 엥겔스가 그걸 강력하게 주창했고 공산당 선언을 했고 그래서 전 세계 공산당은 전쟁을 했고 특히 중국 같은 경우에는 남쪽과 화북과 관주 지역에 각자, 각자 운동을 벌여서 남쪽에 장개석 북쪽에는 모택동, 마오쩌둥, 여기 화북에 있는 한국에서 만주에 있던 팔로군 사람이 붙어서 전쟁을 했고 이 전쟁의 여파로 국내에 내란으로 번진 것이 6.25 전쟁입니다. 이쪽에 있던 한국군, 여기 북한에 내려온 사람, 한국군이 마오쩌둥과 같이 훈련을 받아서 장개석을 몰아쳤던 그 세력들이 내려와서 이쪽의 자본주의 미국 자본주의와 싸운 전쟁이 6.25전쟁.
그런데 그 나라가 지금은 뭐로 바뀌었습니까? 자본주의 바뀌어버렸죠. 자본주의로 바뀌었으니까 그럼 자본주의는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심지어 북한도 마찬가지고. 자본주의는 적이 있어요? 없어요? 적이 없다는 말은 이제는 국내문제, 시장의 국내문제에 관여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가 하나의 마트, 시장이 되었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적과 아군이라는 것은 어떻게 결정됩니까? 누가 어느 나라가 많은 돈을 가졌는가가 그게 아군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가 부도났을 때 그리스의 항만 누가 샀습니까? 100년 동안 중국에서 헐값에 항만을 임대했다 말이죠. 그러면 중요한 항공이나 이러한 것은 돈 많은 다른 나라들이 그걸 헐값에 사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는 나라를 계속 팔아먹는 거예요. 그리스 부자는 전부 다 세금 안 내고 나라에서 다 튀어버리는 거예요. 이거는 나라나 민족 개념이 아니고 자본주의는 나라나 혈통구조가 아니고 돈 위주라니까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8장에 나오는 모든 나라와 모든 제국은 오직 한 나라에, 바벨론 한 나라에 통합되는 거예요. 뭐로? 돈으로,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미국에서 만든 그 파생상품을 한국에서는 한국의 은행에다..... 해지펀드라 해서 막 팔아먹은 거예요. ‘아! 이거 좋은 겁니다. 사실은 부도인데 미국의 하청 민들이 갚을 능력도 없는 그 펀드에다 한국 은행이 투자를 했고 한국 사람들 서민들에게 펀드하면 돈 번다 해서 미국 펀드라 해서 ’안심 푹 놓읍시다.‘ 해서 다 투자한 거죠.
그래서 유명 브라더스 망하고 난 뒤에 그리스 망했잖아요. 그리스 망하니까 포르투갈, 스페인도 다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이 세상은 나라들이 하나의 그림처럼 볼록, 볼록, 볼록하게 있지만 사실은 밑의 판때기는 뭡니까? 각자, 각자가 신이 아니고 이미 전부 다 하나로 통일돼 있어요. 돈보다도, 자본, 자본 있는 곳으로 하나로 모아져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옵니까?’라고 질문을 그렇게 던지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이 볼록 볼록 튀어나온 산 중에 하나가 저와 여러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볼록 튀어나온 종기, 지금은 이렇게 자본 이렇게 말하지만 여기 내 조카, 내 딸, 내 아들이 만약에 거기에 연관돼 있으면 우리는 기어서라도 ‘나한테 손해가 안 되는 쪽으로 경제정책 그렇게 펼쳐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스한테 국방비 돈으로 잠수함하고 비행기 사라고 한 나라가 프랑스와 독일이거든요. 그러한 과정에서 막대한 리베이트 뇌물이 들어갔다 말이죠. 그래놓고 나중에 망해버리니까 독일하고 프랑스가 생색내고 도와준다 하다가, 그러니까 국가와 뭐든지 돈 없이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국민들은 어떻게 하면 돼요? 국민들은 하나밖에 없어요. 돈 있는 사람은 빨리 국적을 버리고 다른 데로 튀는 수밖에 없어요. 약간 수명이 길다고 생각하는 나라에 이민 가버리는 거예요.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은 빚더미에 앉아있는 뒤늦게 정신 차려서 ‘어! 우리가 속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세금도 다 뒤집어쓰고 연금도 다 떼고 왕창 망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것은 도망가는 사람이나 남아있는 사람이나 사고방식이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온 것이 돈이 전부고 시장이 우리 인간을 만든다. 시장에서 떠나버리면 우리는 짐승밖에 안 된다 어쨌든 간에 좋든 나쁘든 이 자본주의라는 시장바닥에서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이겨내야 된다.’ 하는 교육과 훈련을 계속해서 받아온 겁니다. 지금도 모든 영어 수학 모두 다 돈과 관련돼 있어요.
요 볼록 튀어나온 중에 교회가 있어요. 그러니 이 교회가 무슨 교회입니까? 산당이죠. 이게 무슨 교회이겠습니까? 지금이 요한계시록 18장인데 끝나버렸는데 요한계시록 18장이 끝나버리면 교회는 뭡니까? 오직 십자가 그분만 사랑하면서 ‘내가 바로 돈을 밝힌 내가 망해도 싼 이 땅의 자본가와 함께 돈과 함께 돈 찾다가 돈 벌지도 못하고 돈에 사기당해서 망해도 마땅한 내가 바로 주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사람만이 교회예요. 그 사람만 성도고 교회지, 아직도 야망과 욕심과 그것에 띠를 걸고 남의 욕심은 욕심이고 지 욕심은 욕망이고 꿈이 되고 무조건 자기 사랑 그것은 철이 없어도 보통 철이 없는 게 아니에요.
은행에 저금해 봐야 물가 상승률에 비하면 마이너스 아닙니까? 그럼 돈을 옛날에는 돈을 모은다는 개념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으는 게 아니고 굴려야 되는데 어디에 글려야 하는지, 어느 판에 굴려요? 굴릴 판이 어디 있어요. 없는데.
그러니까 무슨 소리를 하느냐 하면 판이 없을 때는 속일 수밖에 없죠. 다단계 하든지 뭘 속여서 순간적으로 내 것으로만 오게 하는 것이지 남과 다 같이 이익이 나는 그런 거짓말은 없어요. 로또입니다. 로또는 많은 사람이 돈 주고 모아놓은 것이 그 1등 당첨이지, 어떻게 1등 당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다른 사람이 돈 모아 준 게 아닙니까? 모든 것이 투자고 도박이고 그런 판에 거기에 무슨 영어, 수학, 윤리, 도덕, 신앙,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무 의미 없죠. 다만 우리가 믿는 것은 뭐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 이 세상은 기어이 그렇게 돼 가고 있고 그게 고맙죠. 말씀대로 되는 것에 고맙고 감사할 뿐 이예요. 그리고 이 문제는 아까 영웅들 있죠? 아까 철학인들, 소용없습니다. 어떤 특정한 인간이 나서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 마귀죠. 마귀! 마귀가 굴러가는 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우리는 날마다 그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돌이 떡 되게 하라.‘ 다른 말로 하면 ’펀드가 대박 터져라.‘하는 그거거든요. 우리는 아침 되면 그것만 꿈꾸고 수시로 TV보고 경제 신문 보면서 언제 내가 사놓은 주식이 언제 돌이 떡 되나, 그것만 보고 있다니까요. 그게 나이 60넘은 사람 취미 아닙니까? 객장에 떡 앉아서 다리 이래가지고 하루 종일, 나중에 수수료 다 떼고 남는 것은 하나도 없고 기분 나빠서 술 한 잔 먹고 들어가서 돈 뺏기고.
인생 산다는 것이 이미 판이 돈 판입니다. 어릴 때는 그게 아니에요. 신데렐라도 있고 공주도 있고 뽀뽀해주는 이웃 나라 왕자도 있고 참 아름답고 멋있는데 막상 돈 줄이 부모로부터 끊어지고 지가 돈 벌어야 된다고 나오면 모든 것이 그냥 한푼 두푼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때는 낭만이고 꿈이고 너무 사치스러운 것 다 벗어버리고 나도 팔 걷어붙이고 ‘이씨, 니가 돈 잘 버나, 내가 잘 버나 한번 해보자. 두고 보자.’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으면, 다른 말로 하면 누가 더 사기 잘 치나, 누가 말발로 사기를 잘 쳐 먹나, 그것만 남아있다니까요. 어리숙해서 남 속이려다가 오히려 속임을 당해서 있는 돈마저 빼앗기고 하지 말고. 그런 취미도 이런 돈 가진 자한테는 당하지 못하게 돼 있어요.
아주 현숙해 보이고 정숙해 보이는 그런 아가씨가 막상 재벌 집에 시집 가 보세요. 현숙하게 집에서도 한복 입고 돌아다니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그건 소녀 때 아가씨 때 꿈이었지, 실제로 남편은 전 세계 따라다니면서 상품 하나 팔아먹으려고 따라다니는 장사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 정숙한 여자가 라이나 치면서 차나 우려내고 이럴 수 없어요. 지도 발 벗고 ‘나도 회사 도와줄게.’ 같이 동업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만큼 사람들이 돈 앞에서는 어떤 꿈인지 그런 낭만 같은 아름다운 것, 윤리, 착함, 그러한 모든 것은 소용없고 진실로 남는 것은 요한계시록 18장입니다. 그저 좋은 것, 금, 은 보석 진주 이런 거, 그래서 토마스 모어는 무슨 소리를 했느냐 하면 유토피아 책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절대로 쇠가 사용가치가 없는 것은 보석이라고 보지마라. 금과 은보다도 쇠가 더 귀하다는 걸 알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모일 때 유토피아가 된다는 거예요. ‘니나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토마스 모어가 이해 안 되는 것이 왜 쇠가 얼마든지 더 필요한데, 호미도 만들고 이것도 만들잖아요. 국민이 쇠를 쓸 일이 많은데 왜 금과 은을 사람들이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좋아하더란 말이죠. 다이아몬드 같은 것을. 다이아몬드가 뭐냐 하면 탄소 복합제입니다. 아무 의미 없거든요. 약간 단단한 거, 그런 단단한 것은 인간적으로 물리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 그런데 다이아몬드 하나에 다이아몬드는 forever,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다이아몬드 거기에 어떤 목표를 두고 목적을 두고 인생의 활력소가 생기고, 집에 다이아몬드를 잃어버리니까 살맛이 없어 우울증 걸리고 그저 탄소, 흑연인데 연필심, 같은 요소거든요. 아! 연탄 하나 잃어버렸다고 축 처지는 것 봤습니까? 연탄 한 장이라니까요. 다이아몬드는.
그게 뭐냐 하면 다이아몬드를 팔면 딴 걸 살 수 있지만 연탄 팔면 연탄재밖에 남지 않는다는 사실, 교환가치가 있어야 돼요. 다시 해 봅시다. 교환가치가 중요한 것은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교환권을 모아요. 내가 꽉 쥐고 있는 것은 뭐든지 다 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상품권은 통하지 않아요. 돈이 상품권보다 더 좋아요. 뭐든지 할 수 있거든요. 뭐든지 하게 되면 자본주의 시장에서 돈을 가지고 왔다하면 사람들이 그 사람의 손을 보고 ‘손이 이쁘다.’라고 안 보고 돈 가진 액수를 보지, 이쁜 손을 안 본다고요. 아무리 이쁜 손이라도 돈 없으면 나가라 하거든요.
그러니까 돈 따라서 인간이 따라가는 거예요. 그러면 시장에 들어왔으면 그 인간은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상품이 된다는 말은 그 사람하고 바꿀 때 얼마짜리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못 사는 사람들 이혼해도 위자료 별로 없어요. 그러나 타이거우즈 이혼할 때 5천억 받았는지 그래요. 특히 케네디 재클린 같은 경우 5천억 받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도 하나의 명화처럼, 명화가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압니까? ‘조금 잘 그렸구나.’ 하지 뭘 압니까? 하지만 명화를 다른 것으로 바꿀 때 집 한 채, 두 채 값이 된다 말이죠. 그런 상품에 18장에 뭐가 포함돼 있다는 말입니까? 13절에 사람의 영혼도 뭐와 같은 상품 이예요?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나란히 같은 선반에 뭐가 붙어있다? 인간의 영혼도 거기에 나란히 진열돼 있다 이 말이죠. 일종의 우리는 노예시장 이예요. 요새 안철수 많은 값어치 있습니다. 전부 다 노예예요. 전부 다 명찰에 얼마짜리, 얼마짜리 붙어 있어요.
특별히 그런 것이 잘 드러난 곳이 결혼정보회사, 거기에 보면 대학 나왔는가, 키, 부모계신가, 종교, 해서 점수 매겨요. 나이 많은 노처녀는 점수도 안 나오고, 젊어야 되고.
자, 그 다음에 봅시다. 이제 결론 봅시다. 4절 봅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음성이 다릅니다. 한쪽은 조명탄 쏘는 천사가 와서 환하게 비추니까 완전히 세상이 돈 판이죠. 완전히 자본 판인데 또 다른 천사가 와서 보여주는데 보니까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돼 있죠?
이게 성경에서 “받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라 하는 것은 우리보고 명령을 지키면 혜택주고 그런 명령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의 구별됨, 너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어떻게? 이 명령에 포함된 내용대로만 너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규정돼 있다 이런 뜻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어떻게 됐습니까? 있었더라. 그래서 명령은 곧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명령할 때는 누구이름으로 명령으로 하느냐 하면 주의이름으로 명령하죠. 그러면 받을 때는 나의이름으로 안 받아요. 반드시 명령이 존재가 되려면 우리는 평소에 누구 이름으로 사느냐 하면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이름으로 사는 사람에게만 이 명령이 현실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파이프가 주님하고 내가 파이프가 연결돼 있어서 주님이 명령했다 하면 우루루 쏟아져 그대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대로 내가 순종하고 순종 안 하고 필요 없어요. 그냥 그대로 구멍이 나서 굴러서 다 들어오게 돼 있어요. ‘아! 나는 여기서 참여가 안 되게 돼 있는 팔자구나.’ 그냥 굴러들어 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 속에서 우리를 가지고 실현시키는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 말을 어떻게 지킵니까? 우리는 의인은 없고 죄인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의인돼야지,’ 손들고 나오면 안 된다. 그 말이 오해가 된다는 거예요. ‘모든 율법으로 다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 하면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 말이 그대로 굴러 들어와서 우리 안에 들어오면 되는데 ’난 저주 안 받아야지.‘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자기한테 펑크가 안 났단 말이죠. 자기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믿지, 주의 이름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바로 상대방 이름을 지워버리고 그리고 그 자리를 점령하는 식으로 오시기 때문에 모든 주의 명령은 주의이름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이것이 ‘아멘’으로, 현실로, 아멘이란 말은 다른 말로 ‘현실 맞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라는 뜻 이예요. ‘아! 그게 바로 실제입니다. 실제 그렇게 돼가고 있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절 봅시다.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22장 12절에 보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돼 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 행위의 문제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제가 명백하게 말씀드리면 열왕기상 8장 39절을 보면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돼 있죠.
그 행위가 누구의 행위냐 하면 우리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이렇게 행동 했잖아.’라고 지적해 주시는 주님의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이고 중요한 말인데요. 예를 들어서 제가 지금 물을 마십니다. 물 마시는 것 여러분이 보셨죠? 물마시고 딱 끝나고 난 뒤에 하는 말이 ‘내가 방금 니 행위대로 이야기하겠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아! 물 마셨으니까 물 마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모양이다.’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방금 물마시면서 머릿속에 뭘 생각했느냐 하면 5년 전의 일을 생각했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어느 것을 행위로 보십니까? 바로 주님만 알고 계시는 행위만 그것을 되찾아가는 식으로 행위를 보시는 거예요. ‘니 물 마시면서 5년 전의 일을 생각했지? 그거 내가 그렇게 해서 한 거야.’하고 주님의 행위를 자기가 자기 행위를 되찾아 가시면서 행위대로 갚아주시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8장 39절에서 “모든 사람의 행위대로 행하사” 라고 돼 있고 46절에 보면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그 뒤의 이야기를 제가 줄입니다. “갈 때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그들을 다시 구원하소서.”라고 돼 있죠.
이 말이 뭐냐 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부탁하면서 이야기할 때는 ‘니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이미 그 행위는 죄다? 죄 아니다? 모든 인간은 범죄 하는 인간인데 그게 죈데 죄라는 행위가 아니고 그 죄를 뭐를 근거로 해서? 성전에 있는 그 희생제물을 근거로 해서 그 죄를 용서하는 그 행위를 주께서는 찾아가버리는 그 찾아가버리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딸려 나와서 구원받은 겁니다. 뭐로? 우리의 행위대로. 그럼 우리의 행위를 우리가 판정할 일입니까? 주께서 우리를 판정하신 행위입니까? 주께서 따로 주님의 안목으로 우리를 판정하시는 행위가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믿는 사람답게 행동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그 행동은 누가 판단한 행동 이예요? 내가 판단한 행동이죠. ‘예수 믿고 믿었으니까 합당한 행동을 해야지, 이제 합당하게 헌금도 하고, 합당하게 전도를 해서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령 안에서 은혜로 주셔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건 하자 없는 행위다.‘라고 ’그걸 첨부하고 그걸 보태야 돼, 그런 소리를 해야 돼.’ 라고 우기는 것은 그 행위는 누구행위입니까? 자기가 판단한 행위예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식이다 이 말이죠.
그러나 주님의 행위는 뭐예요? 우리가 뭘 해도 뭐가 된다? 우리가 죄가 되며 그 죄는 누구 행위로 인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던 행위로 인하여 구원받을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 행함의 증거는 표준과 측정과 판단은 누가 하시고? 주님 쪽에서 십자가와 결부시켜서 판단해 주시고.
이걸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고 안 믿고 있으니까 자꾸 복음에서 오해를 하는 거예요. 오해를 해서 ‘성경에 행하라 해서 행함 이야기했는데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 만날 그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보고 본인이 판단하고 본인이 한 행동을 자신이 판단하면 전부 다 자기한테 좋은 걸로 판단해요. ’요건 나쁜 것이고 요건 착한 짓이고.‘
그렇다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이런 성경책을 지워버려야 돼요.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착한 행동 없다’로 고쳐야 됩니다. 성경에서는 그 모든 것을 ‘자기 의’라고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기분, 인간은 자기 기분대로 산다고 했죠. 기분대로 산다는 그 기분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들어 준 자기 의에서 나오고 그 자기 죄가 18장에 보니까 어느 판에서 돌아다니는 욕망이다? 돈 판에서 굴러다니는, 굴러다니지도 못해요. 끌려가는, 돈 판에서 끌려가는 그러한 욕망입니다.
라캉이라든지 지젝이라든지 프로이드같은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죠. 나의 욕망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이미 약을 올렸다 이 말이죠. 살살 약을 올린 거예요. 사람이 촌에서 커서 촌에서 죽으면 항상 대화도 순박하기 짝이 없어요. 도시 사람이 봤을 때. 촌 애들 12살, 13살 그 애들이 부흥회에 와서 부흥목사 하는 걸 보고 울고 회개하고 할 때에 ‘목사님, 용서해 주세요. 우리 집 개가 있는데 개 꼬리를 밟았어요. 이런 나쁜 소녀를 용서해 주세요.’ 얼마나 순박한지 몰라요. 그 목사 사기 치는 걸 모르고, 사기 치는 목사 앞에서 순박하다고요. 왜, 촌에서 저희들끼리 했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선악이라는 것은 그들이 경험했던 그들이 기껏 아는 타인이라는 것은 고만고만한 타인들이예요. 남이라는 것이. 기껏 남이라고 해도 멀리 안 갔어요. 이웃집 산 아래에 모여 있는 50보, 100보 안에 있는 타인들이예요. 그게 전통이고 그게 진리고 자기가 아는 전부입니다.
그랬던 그것이 어느 날 보따리 가방 싸들고 순이가 서울로 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한 10년 뒤에 립스틱 짙게 바르고 양장하고 빼딱 구두 신고 나타났을 때는 이미 그 모습을 봤을 때 같은 동창생 초등학교 동기생들이 봤던 순박함은 없잖아요. 그럴 때 그 애가 설 돼서 잠깐 사흘 왔다가 갔을 때 그 순박한 아가씨들의 마음을 불질러놓죠. ‘엄마, 나도 서울 갈련다.’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남들이 만들어 낸 욕망 이예요.
프로이드, 라캉은 그런 식으로 했는데 이걸 성경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 이 원리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일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인간이신 예수님에게서 집약돼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무슨 말이냐 하면 구약에서는 바다가 갈라지는 게 기적이잖아요.
신약에서는 뭐가 기적입니까? 신약에서도 바다가 갈라지는 것 있습니까? 없잖아요. 어디에 집약됩니까? 인간의 실존으로 집약됩니다. 아브라함이 복 받아서 양이 많아졌죠. 그러면 신약에도 양 많아지는 게 복입니까? 그게 아니죠. 신약에는 자기 죄를 십자가에서 아는 게 복이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모든 계시가 예수님의 실존으로 와서 이게 퍼져버리면 그때부터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 이야기가 복이 됩니까?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를 덮치면서 복 안에 사로잡힌 자가 돼 버려요.
그렇다면 그동안은 타인의 욕망, 나의 욕망은 없어요. 남의 욕망으로 가다가 이제는 낯선 욕망, 예수님의 욕망이 나에게 와 버리면 뭐를 시시하게 여깁니까? 그동안 ‘아이, 부러워라, 돈 부러워라.’ 하던 그런 것들이 나의 근본적인 내 판때기, 내 기본을 모르고 철없이 굴었던 하나의 일종의 좋게 말하면 순박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멸망하는 세상, 돈 세상이 이게 인간의 전부인 줄 알던 순박함이 다 그건 악마의 속임수에 불과하고 진짜 예수님의 욕망,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어요. 내가 이 욕망을 가졌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욕망, 내가 진짜 주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 하늘나라 가는 그 기쁨이 더 큰 기쁨으로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 18장 4절의 말씀처럼 “너는 그 죄(재앙)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재앙들을 받지 말라.” 가 주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실현이 된 겁니다. 누구 능력으로? 주의 말씀의 능력으로 실현된 거예요. 이미 우리의 기본이 달라요. 저쪽은 돈밖에 모르지만 우리는 뭐가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펑크를 내버렸어요. 돈밖에 모르는 나에게 아예 구멍을 내버렸잖아요. 실존입니다. 실존! ‘니가 사는 세상, 나도 살았잖아. 내가 안다. 니가 뭣 땜에 고민하고 뭣 땜에 까불락 거리고 뭣 땜에 ’야호‘ 외치고 뭣 땜에 좌절하고 자살하고 다 안다.’ 이 말이죠. ‘내가 안다니까.’
나의 사정을 내가 모르는 것을 주께서 아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게 새로운 기반이고 새로운 기초입니까? 이것은 새로운 인생의 의미예요. 우리보고 천사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보고 하늘의 별을 따라는 말이 아니고 니가 돈 좋아하고 니가 돈밖에 모르는 걸 누가 안다? 옆에 있는 내가 아는 거예요. 왜 아십니까? 어떻게 아십니까? 말씀대로 되었기 때문에 아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안다니까’를 믿는 사람은 그 다음부터 어디 속에 있다는 걸 알아요? 말씀이 만들어 낸 멸망 받을 세계 속에 내가 한 요소로서 들어있다는 말씀 세계를 알게 되죠.
성도가 뭐냐, 말씀에 대해서 관심 있는 게 성도입니다. 만약에 말씀에 관심 없으면 내가 주인공 돼요. 내가 주인공 되면 내가 나의 조명발이 되기 때문에 항상 내가 자기 의,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남은 다 돈 망하고 다 죽어도 절대로 나는 절대로 망하면 안 된다는 일방적인 자기 의, 자기 고집만 남아 있어요.
그러면 이건 요한계시록 18장 4절, 5절에 그 사람은 해당되지 않죠. 왜, 거기서 빠져나오라 하는데 그 사람은 못 빠져 나오니까. 그 사람 뭐라 합니까? ‘돈 좀 더 벌고 빠져나오겠습니다.’ 이건 우리보고 빠져나오란 말이 아니고 진짜 너는 이미 ‘내가 안다니까’ 주님이 알고 계신 사람은 이미 빠져나온 사람 이예요. 새삼스럽게 이웃사람에게 돈을 주고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내주고 톨스토이처럼 지 받은 유산 받은 걸 다 내줘도 가난한 사람만 횡재한 겁니다. 그 사람 그 받은 걸로 돈 놀이할 거예요. 그런 쓸데없는 짓, 자기 자력, 자기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빠져나갈 사람이 못 빠져나와요. 안 돼. 못 빠져나와요. 요새 개콘에 유행하는 것처럼 ‘안 돼’ 절대로 못 빠져나와요. 다만 말씀대로 말씀이 들어오니까 이미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그 주님을 사랑하게 되죠. ‘참, 주님 잘했습니다. 망해야 될 세상인데 잘 망하게도 하십니다. 잘~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는 거기서 그 재앙에 받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18장의 해석입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그냥 사시는 대로 사시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와서 우리의 위치와 위상을 탁탁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행함이 아니고 그걸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믿기만 하면! 절대로 믿기만 했으니까 행동은 안 들어가죠. 행동이 아니고 그걸 그냥 현실로, 말씀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주님의 조명발이 오는 겁니다. 세상은 돈으로 나간다. 그중에 나도 하나 포함돼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런데 주께서 그 사실을 알게 하신다는 것은 실존적으로 주님의 조명발이 실존적으로 내려와서 주님 실존에서 나온 조명발이 누구한테 내려왔다? 우리 자신에게 말씀의 조명발이 비춰줘서 요한계시록 18장 이게 장난이 아니고 신화가 아니고 농담이 아니고 만화가 아니고 소설이 아니라 현재 이대로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거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감사합니다. 뭔가 잘해보려고 착하게 살아보려고 이왕 돈 버는 것 깨끗하게만 살아보려고 돈 벌려하지만 하지만 그게 얼마나 안 되는 짓인지를 이제는 통감했사오니 있는 그대로 주어진 환경대로 사시되 이 모든 것을 주께 친히 아시는 분에게 우리 자신을 이미 맡겼다는 사실을 그렇게 기적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