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20202-요한계시록19장(할렐루야)32강b-이 근호 목사 제 32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공동체라고 했는데 공동체 자체가 뭐냐, 공동이거든요. 공동이라 하는 것은 큰 곳이고 나는 여기 일부가 됨으로서 큰 곳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데서 모든 불안감과 모든 불안정을 소멸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비하면 여기에 뭐가 단점이냐 하면 여기에 이 공동체 규칙을 따라야 돼요. 이걸 아까 제가 법이라 했는데 이 법은 바깥에 외부에만 법이 있는 게 아니고 우리 머릿속에 이미 따로 법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건 성경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법의 구조가 있는데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이라는 것을 이방인들도 양심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 이방인의 양심을 로마서 8장에서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이방인들에게서 뭐다? 율법이라 했죠. 앞에 ‘율‘자에 괄호를 하면 뭐가 남습니까? 법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법에 의해서 법을 따라서 법을 그때그때 만들어 내면서 스스로 법이 옳다고 우기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법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오라 할 때 그냥 법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법만 이야기하면 우리는 지켜줄 테니까 맞춰줄 테니까 법만 이야기하라 말이죠. 법만 이야기하면 법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뭐냐 하면 이 규칙을 예외적인 조항과 마주치게 만들어요. 법에 속하지 않는 법에 해당되지 않는 다른 법을 내세워서 마주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예외적인 조항은 이 기존의 법에 포함이 될까요? 안 될까요? 포함이 안 되고 바깥쪽에 나가있죠. 바깥쪽에 나가 있어 버리면 이쪽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깥쪽의 예외적인 조항에 의해서 공격을 받게 되고 그것을 성경에서 심판이라고 합니다. 자체 내에서 나쁜 짓해서 심판 받는 게 아니고 인간이 만든 인간이 생각하는 법의식들을 모아서 공동체가 되는 거거든요. 공동체가 사람의 모임 아닙니까? 모이니까 사람마다 법의식이 있는데 거기 합의를 보는 거예요. ‘그래 동의 할게.’ 합의를 봐서 동의가 되거든요. 합의가 안 되면 딴 공동체로 뛰어나갈 게 분명하니까.
합의 봤는데 그것도 해석이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이질적인 거, 전혀 다른 법이 하나 툭 튀어나와서 너희를 향하여 심판한다 하니까 이쪽에서 인간들이 가만있습니까? ‘에라, 우리가 먼저 공격해서 심판한다.’ 왜? ‘우리 법에 의해서 너를 심판받아 마땅해.’ 나오고 주님은 ‘너희들 속에 속하지 않는, 너희들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법을 가지고 너희를 심판하겠다.’ 이렇게 해서 붙는 거예요. 거기서 희생과 십자가와 규칙과 규칙의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쉬운 거예요. 구원받는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규칙이 아니고 내 머리 속에 들어있지 않은 다른 법이 와서 나로 하여금 ‘니는 이쪽 공동체에 그만 살아도 돼, 그동안 산다고 고생 많이 했어. 이제 고만 시달려도 되고 이 세상에 대해서 정죄를 당할 만큼 많이 당했어. 이제는 거기에 대해서 구애받지 마. 거기에 대해서 시선 받지 말고 그런 것 의식하지 말고 니는 내가 준 법에 의해서 여기서 탈출하여서 구원받아서 내가 준 법에 의해서 너는 나와 함께 살자.’ ‘예수님의 알고 있는 규칙을 이제 너도 알게 되었어.‘라고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굉장히 간단하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 머릿속에 있는 나의 알고 있는 양심이라는 것, 양심이니까 아까 로마서 8장에서는 양심을 뭐라 했습니까? 이방인이 알고 있는 율법이고 앞에 ’율‘ 자를 빼버리면 법이다 말이죠.
만날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고 난 뒤에 ‘나한테 이런 것들로 인하여 그동안 내가 허접스럽게 살아왔었구나. 이런 쓰레기 같은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이런 법들이 가득차서 이런 것들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구나.‘를 다 파헤치는 그런 세월을 남은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겁니다. 이걸 지난 주일날 암세포라, 밀려나오는 고름이라 했거든요. 주의 은혜가 임하고 난 뒤에 뭐가 있지를 못하고 바깥으로 밀려나오는 거예요. 그 밀려나오는 것들이 뭐냐, 평소에는 주님 없을 때는 이런 것에 자존심 걸고 살아왔던 이런 것들이 바깥으로 밀려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네배로 갚겠나이다.‘라고 삭개오가 이야기 한 것은 그전에는 주님 오시기 전에는 이것 가지고 보람을 느끼면서 돈 가지고 나답게 살겠다고 버텼던 것들이 이제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걸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뭡니까? 내가 예수님을 알고 난 뒤부터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고상해서 나머지는 뭐가 됐다? 똥, 오줌처럼 배설물로 여겼다. 이제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는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도 똥, 오줌, 나의 의는 똥, 오줌에 불과한 거예요. 나의 의라는 게 없다 이 말이죠. 내가 기존의 공동체한테 들은 거예요.
이 공동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구조란 공동체라 하는 것은 전체에서 어느 하나에 속했다 할 때는 공동체가 적당하지만 우리가 어느 위치를 정하고 있느냐 할 때는 이런 육각형 사각형 구조가 좋아요. 내가 이 지점에 있다고 한다면 이 지점은 그냥 나를 위한 이 지점이 아니고 공동체에서는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보람으로 산다.’ 이렇게 되지만, 사각형, 육각형 구조가 딱 돼 버리면 ‘나’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요 일 어떤 지점의 요 일을 위해서 나는 지금 연계돼서 봉사해줘야 되는 거예요. 그들과 협력해서 일종의 나만이 할 수 있는 분업을 행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육각형 구조에서 나의 위치)도 이야기하고 공동체도 이야기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할 때 이 세상은 조직적으로 구조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공격하는데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한 역할들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군인은 군인으로서, 농부는 농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복음을 모독하는데 전부 다 같이 한 행세를 하는 겁니다. 서로 서로 협조가 돼 있어요. 같은 패로서 같이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요 위치, 위치 정하는 그 모습의 본질이 뭔지 알아야 되겠죠. 놀이기구인데 장기하고 바둑이 있다 합시다. 장기는 마(馬), 칸이 있으면 이렇게 가는, 여자 분들은 장기 잘 두잖아요. 이렇게 가서 이리 가로질러서 가는 게 마(馬)입니다. 포는 넘어가는 거고. 장기 알은 마(馬)라는 글자를 씀으로 말미암아 이 마(馬)는 항상 어디가든지 어느 위치든지 이렇게 자기 기능을 발휘해요.
그런데 바둑알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요. 쓰여 있지 않은데 바둑을 이렇게 두다보면 바둑을 처음 한 점을 놨을 때는 그 사람의 ..가 3밖에 안 되지만 다른 사람이 이렇게 같이 놓여있게 되면 3이 8이 될 수도 있고 16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3이 될 수도 있고, 이렇게 -되는 걸 악수라 하고 한 2500쯤 되는 걸 요수라 합니다. 이건 알 자체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누구와의 만남, 누구와의 접촉, 누구와의 연계냐에 따라서 그 사람은 스타가 될 수가 있고, 역적이 될 수 있는 겁니다.
히틀러 밑에서 유대인 500만 죽인 사람이 누구죠? 후스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착실한 사람이고 자기 행동에 책임지는 사람이고 어릴 때부터 자기 행동을 반듯이 한 사람이고 남한테 해코지 하지 않은 사람 이예요. 공직 생활을 아주 착실하게 한 사람 이예요. 쓸데없이 뇌물 받지 않고. 그런데 유대인 500만 죽이라 할 때 자기는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반복적인 학습이 주어지는 거예요. ‘나는 공직자야, 나는 공무원이야.’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나의 일이 아니고 하나의 국가라는 조직의 제 역할을 해야 되거든요. 내가 담당할 분야에서 나는 충실하게 다해야 되지, 내가 총통도 아니고, 나는 면 서기도 아니고, 나는 죽여야 하는 총살하는 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다해야 돼요. 그래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찌라는 대 독일 연방제국이라는 제국을 위해서 자기 역할을 다 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사적인 생각은 잊어야 되죠. 사적인 생각을 잊어야 된다는 말은 ‘내가 이런 행동하면 내가 얼마나 명예롭게 될 것이냐‘ 하는 것도 잊어야 되겠죠. 오직 ’내가 할 행동은 무엇이냐‘ 그것에만 충실하면 되지, 내가 이것을 해서 얼마나 이득을 얻고 얼마나 손해가 난다는 그러한 사적인 이득 같은 생각에서도 벗어나고 추월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냥 충실해야 되고 충실해야 돼요. 그래서 유대인 500만 명을 죽였던 겁니다.
문제점이 뭐죠? 한나 아렌트란 여자 정치학자는 말합니다. 그 사람은 동물처럼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생각할 줄을 몰랐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그 생각한다는 말은 생각 안 할 수 있습니까? 생각 한다는 말은 뭐냐 세상을 자기만 생각하지 말고 그 피해당하는 유대인 입장에서 생각할 줄을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히틀러의 500만을 죽인 책임 지도자는 그 조직원은 이 육각형위의 조직은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여기 유대인 포함돼 있어요? 없어요? 안 돼 있어요. 여기는 독일 인민들만 있죠. 그러면 유대인은 따로 조직이 있는 거예요. 저쪽에서 이쪽에 있는 사람을 헤아릴 필요 있어요? 없죠. 왜, 경쟁관계에 있으니까. 어디 사업이 자선사업이 아니잖아요. 라이벌 경쟁업체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누굴 생각해야 됩니까? 나를 생각해야 되죠. 심지어 라이벌 경쟁과 단합을 하고 가격 싸움을 한다 할지라도 결코 저쪽을 위함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누구 좋으라고? 유유상종, 우리 모두가 같은 인간끼리 같이 좋아지기 위해서 하나의 양보하는 것이지 결코 저쪽 입장을 먼저 생각해서 한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사람이 조직에 포함이 되고 이게 공동체라 하면 흐리멍덩하지만 조직이 돼 버리면 조직 자체를 위해서 본인이 하나의 밑거름이 돼야 되고 하나의 희생물이 되더라고 나는 죽고 뭐는 살아야 된다? 조직은 살아남아야 돼요. 이건 여러분이 교회 다녀서 많이 들고 많이 훈련 받았죠? 하나의 밀알 되어서 희생되어서.
공동체일 때는 그냥 소극적으로 어디에 속했음을 감사합니다. 이래 되지만, 이 공동체가 조직으로 변하면서 어떤 임무를 맡겨 줘 버리면 자기 존재라는 것은 임무를 수행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지 존재가 감히 유지되든지, 아니면 내 존재가 무가치한지를 자기 맡은 분야에 얼마나 충실하게 역할을 다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5분 동안 이야기한 걸 죽 들어보니까 이것이 세상 나라를 뭐 달리 표현할 필요 없죠. 이게 바로 세상나라잖아요. 어떤 애가 부모 밑에서 그냥 밥이나 주고 학교에 다녔다. 그때는 가정 공동체잖아요.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정 조직은 아니에요. 가정 공동체예요. 그저 못해도 사랑받고 잘 해도 사랑 받고 그래요. 그런데 막상 가정을 떠나서 본인이 자립하겠다고 회사 취직했다. 누가 사랑해 줍니까? 그때는 조건부예요. 니가 니 할 일 하면 누가 사랑해 주고? 조직이 너를 사랑해 주고, 니가 니 일 못하면 조직에서 잘려 나가야 되는 거예요. 너 때문에 조직이 와해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러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니는 니 한 몸이 아니라 니가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회사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한다.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해요. 심지어 주차해 주는 사람에게도 ‘당신이 주차를 잘못 해버리면 우리 회사가 무너져서 엄청난 손해를 본다.’
그러한 직무를 맡겨주지 아니하면 책임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책임감이 생기지 아니하면 어느 시절로 돌아간다? 공동체 시절로 되돌아가서 조직원이 아니고 마치 퇴행한 어린아이처럼 부모 밑에서 어린양하는 그런 시절로 되돌아 갈 수가 있어요. 이건 무상으로 혜택을 입잖아요. 그러나 조직은 자기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겁니다. 이 조직이 내 조직으로 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그 조직에서 쫓아내야 돼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조직적인 체제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 말은 어떤 인간도 이 사회가 짜놓은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나면 그 사람은 즉사하여 죽습니다. 서울역 앞의 노숙자예요. 아무도 써주지 않는 노숙자 됩니다. 그러면 이 추운 겨울에 얼어 죽습니다.
그러면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살기 위해서는 어릴 때 공동체에서 조직으로 들어와서 그야말로 자기보다 조직을 살릴 때 비로소 나는 그 부대현상으로 부대 동반현상으로 내가 사는 것, 조직과 운명을 같이 해야 되는데 이 조직이 바로 이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경쟁에서 지는 자들은 단순히 월급이 깎였다가 아니라 뭐가 날아갔느냐 하면 ‘내 자리는? 내가 있을 자리는? 내가 옛날에는 어느 회사 과장인데 지금은 어디 청소 일하고 있고 이게 내 자가 아닌데, 나다운 게 아닌데. 빨리 나다운 곳에 찾아가야 되는데, 아니야, 이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니야, 진짜 내 모습은 이게 아니야, 지금 부장의 모습이 내 모습이야.’ 라고 계속해서 환상을 꿈 꿀 때 그 사람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평생가도 꿈을 쫒듯이 쫒다가 그냥 넘어지죠.
어느 인간도 지한테 합당한 자리라고 만족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집사님도 이 정도가 아니고 수 천 명도 직원 더 늘여야 돼요.ㅎ 적어도 내 능력은 이 정도가 아니야, 모든 게, 언제? 경쟁 업체가 크게 될 때 약을 살살 올려요. 세상이 우리를 약을 올려요. 약을 올리면서 이 구조보다 더 큰, 이 구조가 하나의 은하계라면 이 은하계 같은 것이 우주에 약 천 억 개가 있습니다. 한 은하계 속에 별이 사천 억 개가 있어요. 요게 하나의 작은 태양계라면 태양계를 보다 크려면 은하계 속에 요 자체가 하나의 점으로 새로운 조직을 연결시켜야 돼요.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라는 사람은 누구와 엮이느냐에 따라서 내가 결정되는 거예요. 내가 홀로 나라고 외쳐봐야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습니다. 당신하고 엮여진 사람이 청와대 있는 사람이냐, 당신이 아는 사람이 의사냐, 판사냐, 이렇게 내가 엮여져 있는 엮임을 통해서 관계를 통해서 내가 다시 소급적으로 사회가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그런 시대입니다. 거미줄!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것을 전부 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조직에서 누가 탈출한 사람이 있어요.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 같은 인간 절대로 되지 마라 말이죠. 왜, 그건 배신자요. 배반자요. 배, 배, 배신자, 배반자야. 이게 유명한 영화 넘버3에서 현정화가 라면 먹고 뛰었다면서 그 제목에서 ‘그 인간은 배신자야. 배반자야. 우리 조직의 배신자고 배반자야.’
조직이 모여서 나라가 되잖아요. 인간 사회의 모든 조직에서 구성원들의 배신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도 모르고 예수를 믿겠다고 나섰어요. 이게 무슨 이야깁니까? 사실 우리를 믿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마귀가 웃을 일입니다.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아니야, 이 마귀가 알아. 너는 그냥 흉내나 내지. 니는 아니야 니는 내 쪽이야..’ 안다 말이죠. 이게 사도행전 19장에 나오죠. ‘나는 예수도 알고 내 손아귀에서 확실히 바울도 뛰쳐나오고 예수도 뛰쳐나온 걸 아는데 니는 안 뛰쳐나갔어. 니는 내가 놓은 덫에 걸린 거야.’ 이게 바로 예수님 위주가 아니고 뭐든지 공동체 위주로 가서 외로움을 달래고 하는 모든 조직이 다 마귀에 속합니다. 그중에 국가도 있겠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요한계시록에 가면 땅의 짐승, 교회입니다.
교회, 교회가 공동체 위주죠. 어릴 때 사랑, 어릴 때 용서받은 그걸 기억하면서 마치 따로 천국을 이룬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심어주는데 그 규칙은 익히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있잖아요. ‘착한 일하면 상 받고 나쁜 일하면 벌 받습니다.‘라는 우리가 익히 아는 안 믿는 사람도 다 아는 규칙 가지고 우리는 스스로 자위하면서 스스로 그걸 긍정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왔다고 안심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진짜로 나타난 예수님은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런 양심이나 율법이 아니고 율법 외에 뭡니까? 율법 외에 다른 법이 있다 말이죠. 그 법이 뭐냐, 그 법이 나옵니다. 8절에 봅시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 이 세마포는 요한계시록 7장14절에 보면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희게 되고 난 뒤에 하늘나라 보면 성도들이 나오는데, 그 혼인잔치 이르러서 여러분 잘 아시는 이야기니까 한번 해 볼게요. 예수님께서 혼인잔치 비유할 때에 먼저 아는 사람, 자기 본래 아는 사람을 초청을 하죠. 유대인을 초청해요. 아들의 혼인잔치, 메시야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세요. 하니까 어떤 사람은 지 장가가야 한다고 안 오고 어떤 사람은 밭을 샀다고 못 오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소를 새로 샀기 때문에 금 산다고 소 값 내려간다고 안 오고 그랬다 말이죠. 그러니까 임금님이 화가 나서 그렇다면 청첩장 다 취소시키고 사거리 가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쉽게 말해서 저주 받은 자예요.
그 대목을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공동체가 있습니다. 또는 이런 정 육각형 구조가 있는데 어떤 점으로서 자기 역할을 해야 되는데 알콜 중독이다. 알콜 중독 같으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알콜 중독자라 아무 일도 못하죠. 도박한다. 이런 사람은 한정 치산자라 해서 법원에서 사람 취급도 안 하잖아요. 그 사람은 어떻게 돼요? 그 사람은 누가 죽여도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법에 호소할 수도 없는 거예요.
어떤 외국 노동 이민자가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가는데 자전거 세우고 볼일을 보는데 자기 자전거를 가지고 애가 도망을 치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가서 애를 붙잡아서 파출소에 갔더니만 ‘실례하지만 주인은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티벳에서 왔습니다.’ 보니까 벌써 기간이 지났어요. 불법 이민자로 몰리고 처벌받고 자전거 훔친 애는 풀려나버리고, 이 나라 법에 저촉이 안 되니까 이것은 그 사람 자전거를 가져갔어도 어떤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거예요. 누가 죽여도 그 사람은 그 가족들이 ‘왜 죽이냐.’고 소리가 없는 겁니다. ‘니는 니 나라 가.’ 니 법이 적용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그 사람 속에 법의 구조가 있는데 이 법 구조하고 뭐하고 맞아야 돼요? 자기가 기거하고 있는 외국의 공동체 법 구조하고 일치된 법 구조가 된다 말이죠. 색깔로 봅시다. 바깥의 법은 뭐냐, 빨강이라 하면 이게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죠. 그러면 같은 고을 만약에 어떤 사람이 녹색이라면 자기가 속해 있는 바깥도 녹색이라면 이 사람은 이쪽에 포함이 된 거죠. 공동체 포함이 되죠. 그러면 여기서 전체라는 것은 정치 관리가 한 마디로 치안입니다. 치안이라 하는 것은 경찰들의 활동을 치안이라 하죠.
‘있는 법에 무조건 복종하는 조건으로 법에 의해서만 보호해 줄게. 니가 양심대로 산다고 보호 받는 것이 아니고 법에 맞을 경우에만 니 권리를 찾아줄게.‘라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거예요. 민주주의. 그렇다면 인간은 점차로 뭐로 변합니까? 점차로 어디에 딱딱 맞춰야 돼요? 날이 갈수록 법에 맞추어서 살아가야 돼요.
우리나라에 보컬 그룹에 부활이란 보컬 그룹이 있잖아요. 그 리더가 김 태원이라는 사람인데 김 태원이는 어릴 때부터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녔습니다. 그럼 뭐를 했습니까? 기타 쳤다고요. 그럼 걔가 왜 학교를 못 다녔습니까? 자기가 뭘 하고 싶다? 기타를 하고 싶은데 학교에서는 ‘학생은 수학대신 기타 쳐도 됩니다.’라는 법이 있으면 걔는 괜찮아요. 그런데 수학시간에는 수학을 해야 되고 영어 시간에는 영어를 해야 되는데 걔는 뭐를 쳤습니까? 기타를 쳤기 때문에 걔는 학교생활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애가 편하게 살려고 하면 뭐를 버리면 돼요? 기타 부수고 영어 수학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공동체에 하나 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민주주의라는 거예요. 그걸 법치주의 국가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시민들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한 거라 보는 겁니다.
시험문제 출제 잘못 해서 그걸 따졌더니만 학교 당국 성균관대학교에서 ‘당신은 교소로서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파면시키니까 그걸 법으로 호소해서 대법원까지 가서 결국은 파면됐어요. 파면되니까 김명호 교수가 석궁 들고 가서 ‘니 한번 혼나 볼래?’ 하다가 그게 잘못 쐈는지, 쐈는지 해서 4주 진단 나왔는데 판정을 4년 받았습니다. 그게 부러진 화살 영화에 나오는 주제거든요. 그럴 때 김명호 교수의 자리는 뭐냐 하면 수학에 보면 집합론이 있어요. 우리나라의 집합론의 최고 권위자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집합론을 발전시키고 학문을 발전시키려면 그 사람은 지금 놀아서는 안 되고 법이나 공부할 사람이 아니고 교원서 연구해서 집합론, 수학이 발전하지 아니하면 물리, 기술 발달도 안 되고 기술 발달이 안 되면 수출도 안 돼요. 이 모든 것이 자기 역할을 맡아서 해줘야 나라가 이 구조가 커져요. 이 구조를 성경에서는 뭐라 해요? 음녀가 커지는 거예요.
음녀의 특징은 뭐냐, 모든 머릿속에 있는 선악과 따먹은 그 법이라는 것, 아까 양심이라는 것, 법에 합당한 대로 나가는데 이게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규칙을 더욱 더 크게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 속합니까? 이 규칙에서 어떻게 됐다? 예외 조항으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뭐냐, 예수님께서 어쩌다가 바뀐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너희들이 생각할 수 없는 원칙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자꾸 보여주기 위해서 결국은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자꾸 비비는 거예요. 아휴, 그 당시 바리새인들 죽을 지경 이었어요. 만날 바리새인들 찾아가서 ‘너희 아비는 마귀다.’ 해서 점잖은 목사보고. 원래 바리새인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미워할 생각 없었어요. 그런데 성전을 부수고 채찍을 가지고 그러니까 도저히 한 사람 때문에 자칫하면 폭동이 일어나면 우리나라가 로마에 먹히겠다 싶어서 그런 거예요.
우리나라가 로마한테 먹히면 이스라엘이 망하는 거죠.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이스라엘이 누구 이스라엘이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다.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본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내가 이스라엘 12제자부터 새로 시작하겠다. 남은 자부터.’ 예수님은 남은 자, 예수님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고, 그들이 갖다 버린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면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갖다 버려줘야 돼요? 안 돼요? 그들이 돌을 갖다 버려줘야 되는 거예요. 그들이 버린 돌이 돼야 버렸다는 그것이 포함되어서 ‘나같이 버림받은 놈 다 나와.‘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성경의 원칙이예요. 원칙!
그러니까 마귀 없이는 일이 안 돼요. 악한 마귀가 없으면 주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 아니면 십자가, 가룟 유다는 십자가의 공로자예요. 음녀는 있어야 돼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느 누구도 음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제가 한 20분 동안 계속 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음녀에서 못 벗어나요. 벗어날 생각 하지 마세요. 벗어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벗어나요. 벗어났다는 사람이 수상해요. 우리는 예수 믿어도 마찬가지예요. 예수 믿는다 해서 누가 빵 주고 밥 주고 돈 주고 안 합니다. 자기 역할을 다 해줘야 돼요. 수출 역군이 돼야 돼요. 지하자원이 없는 이 시대에 수출 역군이 돼 줘야 돼요. 수출 역군이 되려면 교회 갈 시간에 상품 계속 만들려면 크레인 밟고 일하려면 교회 갔다 와서 휴대폰 보고 빨리 차 몰고 가야 돼요. 공장에 가서 빨리 일해야 돼요. 그러니 주문량이 들어오면 밤새도록 해서 해줘야 돼요. 그래야 신용도가 있어야 다른데 주문이 이쪽에 오지 저쪽으로 안 간다 말이죠.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포르투갈 일감이 없어서 브라질로 이민 간다고.
이 규칙은 뭐냐 하면 능력 있는 자는 살아남고 능력 없는 자는 능력 있는 자 옆에서 빌어먹어라 이 말 이예요. 그런데 여기 보면 8절에 보면 “그에게 빛나고” 그 다음에 어떤 세마포입니까? “깨끗한 세마포”죠. 깨끗한 세마포는 요한계시록 7장에서 흰 옷 입은 거예요. 어떤 피로? 어린양의 피로 깨끗해졌다. 그럼 깨끗하다는 말은 피가 있어서 깨끗하다는 말은 피 없이는 어떻게 된다? 똑같아요. 신자고 불신자고 교회 오나 안 오나 세상 이 구조에서 힘 밑에서 사는 것, 누구 힘 빌고 살고 누구 힘 의지해서 사는 것, 이건 반복된 학습이 돼서 우리의 체질화 되었어요. 이 몸 말고 다른 몸은 상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내가 노력해서 밥 먹고 사는 것 외에 다른 거 없어요. 우리 몸 자체가, 우리 생각 자체가. 이 몸을 굴려야 돼요. 돈 없으면 몸을 팔든지 해야 밥 먹고 살아요. 이건 어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세요.
음녀에서 뭘 끄집어낸다? 음녀가 여자 아닙니까? 여자에서 뭐가 나옵니까? 깨끗한 뭐가 나온다? 깨끗한 신부가 나와요. 누구 때문에? 자, 다 음녀입니다. 음녀라 하는 것은 하나입니까? 두 개입니까? 분명히 전체 합해서 바벨론 성, 마지막 성, 음녀죠. 그게 뒤에 보면 나와요. 음녀가 하나밖에 없죠. 음녀, 음탕한 여자에서 뭐가 나온다? 여기서 신부가 나오는데 여기 누가 개입해야 돼요? 이게 지가 알아서 깨끗하게 돼서 나옵니까? 여기에 어린양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다가오게 됩니다. ‘니는 더러운 여자인데 신랑 잘 만나서 니는 내 신부가 되었다.’ 그 이야깁니다.
음녀에서 신부되는데 여기에 신랑이 개입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성도예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성도입니까? 신랑을 자랑하는 게 성도예요? 신랑이죠. 그러면 자기가 신랑을 자랑하면 자기는 뭐로 행세해야 됩니까? 신부가 돼야 되겠죠. ‘나는 주님의 신부다.’는 근거가 있어야 돼요. 내가 신부라는 근거가 있어야 되지, 나는 주님의 신부라는 것은 아무라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 신부라는 근거가 되는 걸 가지고 옳은 행실이라 해요. 아! 기존 개념하고 개념 다르죠. 기존 개념은 ‘깨끗하게 행동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음녀가 무슨 깨끗하게 행동해요? 손님 받을 때 목욕하는 게 깨끗한 겁니까? 옳은 행실이라 하는 것은 행실을 옳게 하는 근거를 현재 기존의 음녀의 규칙에서 가져오지 않고 신랑이 이 땅에서 빠져나온, 신랑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빠져나왔을 때 신랑 자신에게 적용했던 그 원리 원칙을 같이 살 부부기 때문에 자기한테 적용시키는 사람이 그것이 ’옳다. 비로소 의롭다.‘는 원칙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쫓겨나가듯이 죽게 된 그 주장했던 그 주장을 신랑과 영원히 같이 살게 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원칙을 이제는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옳은 행실을 가진 신부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신부와 신랑은 서로 통하도록 돼 있어요. 아, 하면 알게 돼 있어요. 아! 그 원칙 말이죠. 이 원칙을 로마서에서 ‘율법 외의 한 의’가 되겠죠. 율법 외의 한 법이 아니고 율법 외의 한 의가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율법이라는 것은 뭐를 요구하느냐, 의를 요구하게 돼 있는데 율법에서 요구하는 의 말고 또 다른 의, 율법에서는 인간의 율법을 통해서 이게 (파이프)유리관이라면 인간의 율법을 통해서 올라오는 점점 더 올라오는 의 말고 올라갈 수도 없어요. 인간에서 나오는 의 말고 파이프를 인간에게 꽂아서 저쪽에서 율법 외의 한 의에서 쏟아오는 이 의, 의가 마중 나오는 의, 신랑의 의, 신랑이 신부를 맞이할 때 의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 의를 로마서 3장에서는 이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화목 제물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로마서에서 화목제물이라 한다면 화목제물이 처음에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나오잖아요. 화목제물이라 하는 것은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치르면서 하나님이 동참하는 제사예요. 보통 제사는 인간이 드리잖아요. 그런데 화목 제물은 하나님이 그 양식을 와서 먹어요. 하나님이 가담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면 화목제물이라는 것은 누가 우리를 보증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행동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고 화목에 가담하신 하나님이 친히 그 화목제물에 대해서 보증을 하고 인정해 준다는 뜻이 화목제물입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화목제물입니다. 뭔 뜻입니까? 하나님이 거기에 같이 참여하신 제사가 되는 거예요. 참여했기 때문에 거기서는 하나님이 하나의 당사자가 돼서 당사자가 참여를 했으니까 스스로 희생해서 스스로 화해를 하면서 화해하는 근거로서 본인이 들어간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만두라면, 주님이 나한테 오셔서 ‘야, 나 만두 먹고 싶어. 나한테 만두 줘.’ 주님이 먼저 주면서 ‘빨리 나한테 만두 주란 말이야.’ ‘주님 거 여기 있잖아요.’ ‘알았어.’ 이게 화목제물이잖아요. 율법 외의 한 의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그걸로 이미 끝나버렸어요. 끝난 동시에 그 안에서 뭐가 이루어지느냐 하면 그것이 십자가에선 끝났지만 그 십자가가 이 세상 전체에 대해서 어떤 식의 의미를 갖느냐 하는 그 세상이 화목 제물에 대해서 어떻게 반발하느냐, 어떻게 대드느냐, 그것에 따라서 그 효과가 점점 더 확대가 되는 겁니다.
말을 좀 어렵게 했지만 이렇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단독적으로 주님께서 다 됐지만 이 십자가라는 것이 어디에 쓸데가 있고 어디에 필요하고 어디에 유용하냐 하는 것은 이 십자가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십자가 없이도 우리는 산다.‘라는 그런 세력들이 많이 확장을 해줘야 돼요.
호떡을 만들 때 요런 기구가 있어요. 납작하게 눌러주는 금속으로 만든 기구가 있죠. 밀가루를 동그랗게 해서 시커먼 설탕을 넣고 여기 불판위에 올려놓고 프레스(press), 눌러버리면 바깥에 삐직삐직 나오고 설탕이 타서 나오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면 동그란 게 십자가예요. 그런데 요걸 딱 눌러 버리면 퍼지잖아요. 퍼지면서 요 부분 말고 퍼진 부분 가장자리에서 어떤 충돌과 어떤 다툼과 싸움이 벌어지느냐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모든 것은 호떡이 눌린 거와 같이 다 경험하게 돼 있어요. 그럴 때 이 바깥에서 호빵을 향해 저주하고 미워하고 모독하고 모멸하고 멸시하는 이런 요소들을 이걸 한꺼번에 보면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건 내 신부가 아니다.’ 신부가 아니기 때문에 더러운 여자니까 음녀가 되는 겁니다.
원래 음녀란 용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본래 하나님의 백성인데 자기 남편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긴다는 의미로 음녀예요. 그러면 음녀라는 용어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누구 나라였습니까? 이스라엘을 사모하면서 이스라엘을 어떻게든지 키워보고 유지하려고 누구 힘을 빌렸어요? 초반에는 말감, 몰렉, 아스다롯, 바알, 이런 이방신들을 섬겨서 어쨌든 저쨌든 간에 이 나라가 있어야 사니까 이게 아까 뭐라 했습니까? 나라가 있어야 산다. 공동체죠. 조직이고 공동체. 공동체가 죽으면 나도 같이 죽으니까 어쨌든 조직 하나 살리기 위해서 이방나라와 사귈 때 그때 이 이스라엘을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음녀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보면 돼요. 성경 해석할 때 세상 이방세계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이방 나라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구약의 이스라엘을 하나의 모델케이스로 삼는 거예요. 모델케이스로 삼아서 호떡처럼 꽉 눌러버리면 ‘그중에 진짜 남은 자는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음녀에 해당된다.‘라고 그 양면성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약 용어들이 많이 나와요. 이스라엘이 있던 그 나라에 속했던 운명이 주께서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확산시켜서 전 인민들,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당했던 똑같은 운명을 여호와로부터 당하는 그것이 최후의 날입니다. 그게 마지막 광경이고 전경이라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아내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은 다시 이야기하면 근거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쫓겨날 때 한 근거를 자기도 동일하게 그것을 ‘내가 신부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라고 제시하는 거죠. 십자가죠. 주님이 쫓겨나게 만든 예외적인 조항, 세상 규칙 말고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다른 규칙을 적용했기 때문에 그 이유로 인하여 탈락 당하고 죽게 된 그 근거를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쫓아냈던 세상이 요번에는 누굴 미워하게 되죠? 바로 신부도 미워하게 되고 죽이게 되는 거예요. 똑같은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순교자죠. 여기 10절에 봅시다.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이렇게 돼 있어요. 천사한테 절하니까 천사가 ‘그러지 마라, 지금 당신, 천사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증거가 더 중요한 겁니다. 당신들이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에게 경배하세요.‘ 그렇게 돼 있거든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증거란 딴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추방되면서 갖고 있던 증거, 그냥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갖고 있던 증거가 아니고 예수님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만 비로소 얻어지는 증거들, 이질적인 세계에 살면서 받아야 됐던 상처들, 아픔들, 고난들, 그게 아까 무슨 시라 했습니까? 할렐루야!
다시 이야기할게요. 할렐루야는 어떤 때 나온다?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 내가 저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똑같이 조직에 살면서 내 노동으로 밥 먹고 살면서도 주께서 나를 신부로 보는 다른 원칙, 내가 알고 있는 원칙 말고 다른 원칙으로 적용시키는 적용 대상자가 됐다는 사실, 그러면서 ‘할렐루야!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을, 음녀를 왜 구원하십니까?’라는 그 기쁨, 그게 할렐루야예요. 다시 말해서 땡 잡았다. 다른 말로 번역하면 땡 잡았다. 웬 횡재냐. 이런 거예요.
1절 다시 봅시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 있는 거예요. 나한테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할렐, 루야. 여호와만 영광 돌리는 거예요. 이게 여호와, 하나님, 이것은 구약적 용어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되겠죠. 구약 용어를 그대로 요한계시록에 사용하는 거죠.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서 완성됐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대로 사용하는 겁니다.
여기 10절에 보면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요한계시록의 한마디, 한마디가 뭔가 자체적으로 연결되지 않아요. 언어가 이렇게 있다면 자체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요한계시록은 위를 경유해서 연결되어 있어요. 위로 붕붕 경유해서 A, B, C, D 연결돼 있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을 A와 B도 예수님을 C와 D도 예수님을 경유해서 전부다 예수님을 경유해서 단어가 주어졌어요. 이 단어는 구약 적 단어로 연결돼 있어요. 예수님만 집어넣지, 모든 단어는 구약 적 단어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예수의 증거는 뭐라? 대언의 영이라. 이것도 구약 적 용어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뭐라 합니까? ‘내가 전하는 말은 내 뜻이 아니고 여호와의 신이 임해서 전하는 것이다.’라는 거예요. 신을 영으로 번역한 겁니다. 대영이니까 대신해서 전하는 영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증거는 예수님의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서 성령 받은 사람들이 예수의 증거를 가진 사람이다. 예수님의 증거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옛날 선지자와 똑같은 역할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럼 옛날 선지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구약 해석 다시 해 봅시다. 구약을 해석을 할 때 구약 이스라엘은 쉽게 말해서 1.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것이다 2. 선지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 갈등 아닙니까?
이스라엘 왕 아하스 왕은 이스라엘은 누구 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죠.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은 누구 것입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아들이 뭐가 돼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지자한테는 뭐가 없느냐 하면 ‘변화 없음’ 이스라엘에는 변화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1번, 이스라엘 왕들은 변화를 어떻게 묶어야 돼요. 선지자는 변화가 없기 때문에 뭐가 일어나요? 변화가 일어나도 괜찮아요.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변화 없는 분에 묶였기 때문에 맘껏 변화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눈에 보이는 나라가 자기 나라 같으면 이 나라는 잡혀가면 안 되고 망하면 안 되고 변화가 일어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기 뜻대로 내 뜻대로 목적대로 항상 변함이 없어야 되고 내 원대로 딱딱 돼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인생은 어떻게 봅니까? 변화가 있는 게 좋습니까? 없는 게 좋습니까? 이건 제 질문의 대답은 간단해요. 내가 내 몸은 내 것이라 생각하면 변화 있으면 안 돼요. 그런데 주께서 내 소원을 거부하고 난데없는 사태로 변화를 주어지게 되면 그때 다시 성령이 오면서 우리는 이미 신부로 확정되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변화는 고마운 변화입니다.
만약에 그게 변화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내 인생을 내가 꾸며 나가고 내가 책임지고 내가 생각하는 내 목표에 합당하게 일치되는 내 인생으로 얼마나 나한테 강요했겠습니까? 그리고 나를 학대하겠어요? ‘바보야, 바보야, 바보 같아, 바보 같아. 내가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었는데.’
목사 같은 경우에는 ‘아휴, 설교에서 그 말은 빼는 건데.’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면 구원받는 것은 누구 소관입니까?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6장 39절 말씀은 내가 감당할 몫 이예요? 누가 감당할 몫입니까? 주님이 하신 몫인데 내가 설교 잘하고 못한다 해서 구원받는 자가 탈락되고 탈락되는 자가 구원받는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설교하면서도 평소에 뭔가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진다는 옛날 구약 이스라엘 왕들이 하는 사고방식을 우리가 그대로 100% 하고 있어요. 걱정을 사서 해요. 씨잘 데 없는 쓸데없는 걱정을 따라 했어요.
우리는 과정을, 변화 많은 과정을 즐길 줄 몰랐고 그저 조마조마한 새 같은 쿵쾅 뛰는 가슴을 안고 부푼 가슴도 아니고 발발발발 떨면서 만날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기도해놓고 지가 가서 시험 다 들고 지가 시험 거리를 만들어요. 지가 지한테 과제를 내서 지 손으로 숙제 검사해서 못했다고 자책하고 때리고 하죠. 이 지경에 간다고요. 과정 자체가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아무 상관도 없는데, 상관도 없는데 우리는 너무 치어서 살아요. 너무 힘들게 사는 거예요.
부부생활 하면서 남편들은 오래 살았다고 아내를 알고 아내는 남편과 오래 살았다고 남편을 안다고 하지만 살면 살수록 모르는 게 배후자입니다. 아무래도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 제가 언젠가 이야기했습니다만 남편들이 이 정도 양보하고 이 정도로 남편이 희생하고 내 뜻 치워 버리고 아내 뜻을 수용했으면 기대하기는 이정도 했으면 보답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음, 전혀 없어요. 나중에 가서 ‘내가 이정도 양보했으면,’ 하면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한 걸 가지고 새삼스럽게 뭘.’ 반대로 이정도 내가 했으면 화낼 것이라 하면 화내지도 않아요. 그럴 때 그게 화가 나요. 뭔가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 내 예측대로 안 되는 게 화나는 거예요. 남자 분들 지금 공감하시죠?ㅎ
아까 가산산성에서 얼어 죽었다는 거 있죠? 자, 자기 옷을 웃통을 벗어서 자기는 얼어 죽고 여자도 얼어 죽었지만 자기가 웃통 벗어서 연약한 여자 입혀줬는데 만약에 죽어서 끝났지만, 안 죽고 구사일생으로 심폐소생해서 살아났다 해 봅시다. 그 여자가 남자 친구한테 얼마나 따지겠습니까? ‘내가 먼저 앞장서서 가지 말자 했잖아. 하여튼 그때 안 갔어야 했는데.’ 이렇게 이야기하지, ‘자기 웃통 벗어줘서 고마워.’ 이런 소리 안 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얼어 죽을 줄 알고 옷 벗어 줬잖아.‘ 하면 여자가 ’당연한 거 아냐. 남자는 원래 그래야 돼. 그렇게도 안 하면 나한테 사기 치려고 한 거 아니냐.‘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의 단어는 개개인이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음녀 될 사람은 음녀 되게 모이게 하고 신부는 신부끼리 모여서 그 모임을 만드는 그 연결 고리는 주님 쪽에서 제공되는 거예요. 예수님 쪽에서 제공된 거예요. 내가 남편을 잘해주는 것은 주님을 생각해서 잘해준다는 이것은 성도라면 이것은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 나왔던 대언의 영,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대언은 자기 자신 내 몸은 내 것이고 내 인생이라는 게 아니고 내 것은 따로 있고 주인은 따로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전도라는 것은 성령이 전도하는데 성령은 반드시 전하는 사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전할 수밖에 없게 만드신 배후에 봐주는 분, 든든히 봐주는 분을 증거 하는 겁니다. ‘나 이렇게 증거 해도 괜찮은 것은 내 뒤에 나를 봐주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분을 증거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신부의 증거다. 신부가 다른 것이 아니고 대언의 영으로 사는 게 신부다 이 말입니다.
또 그다음에 장면 바뀌면서, 아휴, 하다 보니까 쓸데없이 가산산성 이야기해서, 금방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후회해도 소용없죠. 강의 잘하고 구원받는 거하고 소용없는 거 이제 아시죠. 여기 11절 봅시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충신과 진실이란 말은 나 예수는 너희들이 믿고, 믿고, 믿고, 믿어도 손해 볼 분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진실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내 말은 헛된 말이 없고 헛되이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분이 우리의 신랑으로서 우리에게 오신 거예요.
그 말 탄 백마의 이름이 있는데 그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16절에 보면 있어요. 백마 탄 분이 오셨다는 이 말은 그럼 우리는 어디 소속돼 있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도 어디 소속 됐습니까? 그 백마 탄 분에 의해서 다른 신분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원하는 인생을 내가 만들고 싶어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아요. 왜, 주의 성령이 오게 되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의 증인이 돼야 될 그러한 입장에서 그러한 선지자 같은 그러한 처지에서 그분에 의해서 우리는 만들어지기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그 증거가 뭐냐, 이 말씀이 그대로 요한계시록 19장의 말씀이 그것이 현실로, 현실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 인정된다는 거, 동의가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만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낯선 현실이고 실제 현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감사합니다. 율법으로 구원시키지 않고 율법 안 되는 줄 아시고 율법 외에 십자가로서 우리를 신부로 만들었사오니 이제부터 우리의 자랑할 것은 우리를 신부 만들기 위한 그 용서하시고 사해주시고 은혜 주시고 의롭다 해주신 그 선물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